나방 사냥꾼 베라 스탠호프 시리즈
앤 클리브스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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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하버 스트리트]보다 더 재미있다.


돈 많고 은퇴한 사람들이 밤마다 술을 마시는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어쩌면 그렇게 매일을 여유롭게 살 수 있는지, 어쩌면 그렇게 집 안을 완벽하게 꾸며놓을 수 있는지 그런 환경에 놓이지 않은 베라는 궁금하며 질투심도 일지만, 그들 개개인에 대해 알게 됐을 때 많은 것들을 숨기고 살고 있다는 걸 보게 된다. 그래, 사람이 그렇게 완벽한 삶을 살 수 없지.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것 같은 그들이었지만, 심지어 부부사이에서도 그들은 비밀을 갖고 있었다.


사건과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뚱뚱한 독신 여성 베라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것, 그리고 후배 여성과 후배 남성과 일을 같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무척 좋다. 냉정함을 홀리에게 주고 따뜻함을 조에게 준 것도 유쾌한 설정이다.

사건의 중심과 주변에 있는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삶을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장점. 읽으면서, 아 이 맛에 소설을 읽는 거야, 생각했다.




베라 시리즈는 나오는 족족 다 읽어봐야지.


집 옆쪽으로 구식 부엌 정원이 딸려 있었다. 과일 덤불에는 망을 씌웠고, 식물이 나란히 싹트고 있었다. 모든 것이 깔끔했다. 수전은 정원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있었다면 분명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카스웰의 솜씨다. 그들은 이 집을 사랑했고, 이 정도의 시간을 집에 투자할 수 있다면 분명 은퇴했을 것이다. 정원 너머로 언덕은 가파르게 바위산으로 이어졌다. 잠시 서있으니 양 우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P22

˝나이절 루카스입니다.˝
˝소문은 다 들으셨겠지요.˝
˝음, 수전 새비지, 퍼시 노인의 딸이 간밤에 전화해서, 카스웰 저택 하우스시터가 도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개울 옆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보려고 위층에 올라가 보기도 했습니다.˝ 베라는 그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도 그를 위해 슬퍼하는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P73

베라는 자기도 조금만 잘 갈고 닦으면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아침마다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시간을 들여 얼굴에 분칠하는 수고를 감당할 만큼 가치 있는 남자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P75

애니는 자기도 모르게 대화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두려워했다. 고통이나 질명이라는 현실이 아니라, 자신이 없이도 세상이 돌아간다는 자체가 무서웠다. 아직도 그녀는 어둠에 삼켜져 갑자기 사라지는 악몽을 꾸곤 했다. - P120

나이 든 여자가 탁자에 앉아 있었다. 혼자였고, 같이 온 사람은 안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잇는 것 같았다. 뺨에는 둥글게 분을 발랐고, 립스틱은 입술 경계를 넘어 파우더까지 번져 있었다. 옷은 밝은색이었다. 파란 코트와 분홍색 스카프, 그녀는 탁자 위에 헝겊 인형을 들고 아기처럼 어르며 말을 걸고 있었다. 자동차 창문이 닫혀 있어서 뭐라고 하는지 들을 수는 없었지만, 홀리는 인형을 계속 탁자 위에서 아래위로 어르다가 아기처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노인에게서 당황스러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치매였다. 어쩌면 알츠하이머일 것이다. 이렇게 도로 가까이 혼자 내버려두면 안전하지 않으니, 보호자가 근처에 있을 것이다. 홀리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왜 저런 노인을 밖에 돌아다니게 할까? 어디 보호소에 있는 게 노인에게 더 편하지 않을까? 하지만 홀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노인의 편안함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123

자신이 이렇게 잔인하게 타인을 재단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자기도 저렇게 약하고 정신 나간 노인으로 생을 마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갑자기 구역질이 나도록 역겨웠다.- P123

홀리는 카모마일 차를 끓여 거실로 향했다. 사각형의 방에는 물건이 별로 없었고, 홀리는 그게 좋았다. 이 집 융자 보증금을 대느라 몇 년 저축을 쏟아 부었지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그 돈이 한 푼도 아깝지 않았다. 이곳은 업무의 긴장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정적이 좋았고, 자동차 소음이 없어서 좋았고, 새로 칠한 벽의 날렵한 모서리와 다림질해서 반듯하게 접어놓은 침대 시크가 좋았다. 도전적인 곳이 경력을 위해 좋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북동부로 옮겼고, 이 아파트로 이사 온 뒤로는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P132

˝요즘도 안 좋은 남자하고 사귀나요?˝ 베라는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하려고 해 보았지만, 이제는 그냥 이야기에 휩쓸려 수사와 관계가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애니는 딸이 외지에서 일한다고 했고, 베라는 굳이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았다.
˝학교에 다닐 때 선생 중 한 사람과 관계를 가졌죠. 선생은 해고당했어요.˝
˝그건 학생 잘못이 아닙니다!˝ 베라는 받아쳤다. ˝특히 미성년일 때는. 유일한 잘못은 남자한테 있어요!˝- P137

˝이렇게 멀쩡한 척하는 것도 압박 아닌가요?˝
로레인은 피식 웃었다. ˝모든 부부는 뭔가 가장하고 살아요. 항상 정직하면 미쳐 버리고 말겠죠. 성공적인 이성 관계는 선의의 거짓말과 사소한 아첨으로 이루어지지 않나요? 파트너가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상대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해 주는 거예요.˝-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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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탕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7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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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가기 위한 수단 혹은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오래전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목적지가 어디인지만 계속 염두에 두고 있으면, 버스나 기차를 타든 중간에 잠시 쉬어가든, 걸어서 오래 걸리든, 어쨌든 우리는 가고자 하는 바가 확실하다면 어떻게든 그곳에 가게 될거라고. 그러나 이렇게 어쨌든 닿기 위해서라면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축에 속한다고 스스로를 생각하는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지를 모르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되, 지금 여기는 아닌 것 같은 상태.


이승우는 자신의 책 《캉탕》에서 등장인물 '핍'의 행동을 가져와, 그가 정착하기 전에, 머무를 곳을 찾기 위해 했던 것이 항해라 얘기하고 있다. 여긴 아닌 것 같아,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이렇게 해볼까, 라고 생각해 배를 탔고, 그 배는 어느 곳에 정착했고, 정착해보니 여기가 바로 내가 머무를 곳이다, 라는 생각에 배에서 내렸다. 나는 결국 여기에 오기 위해서 떠돌아 다녔구나, 내가 떠돌아다닌 건지는 몰랐지만, 나는 이곳을 찾기 위해 배를 탄거였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내가 머무를 곳, 정착할 곳을 찾았다면, 그제야 자신이 항해를 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정착해있다. 그러나 언제든 떠날 준비도 되어있다. 나는 이곳이 내가 정착할 곳임을 안다. 그러나 낯선 곳이 저 어디에 있다는 걸 알고, 충분히 낯선 곳을 마주치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나 당신은 어쩌면 항해중인 걸 수도 있다. 아직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채로, 닿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채로, 그런 채로 대부분 잔잔한 바다 위에서 때로는 파도가 공격하는 곳에서 항해중인 걸 수 있다. 항해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항해는 뜻밖의 일로 이름 모를 곳에 정착할 수도 있다. 핍은 배가 멈춘 곳에서 나야를 만나 그곳에 정착하고 남은 삶을 살게된 것처럼, 당신 역시 어느 순간 배가 멈춘 곳에서 나야를 만나 배에서 내려, 그곳에 터를 잡을 수도 있다. 나야와 밥을 먹고 나야의 노랫소리를 듣고 나야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아, 나는 긴 항해를 마쳤구나, 비로소 정착했구나, 생각하며 고요한 낮과 밤을 보낼런지도 모른다.



이승우의 캉탕은 문장 때문에 읽는 맛이 있다. 나는 이승우가 언제나 건드리는 자신 안의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것도 싫어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그의 문장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아니야, 문장이 아니라 주인공이 가진 저 깊은 곳에, 다른 사람에게 차마 드러낼 수 없는 개인의 은밀한 비밀 같은 것을 사랑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캉탕에도 이승우 고유의 문장이 있고 개인의 은밀한 비밀이 저 안에 숨겨져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 있고 불완전한 삶이 있다. 그리고 정착한 사람이 있고 항해하는 사람이 있다. 정착하고자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되질 않아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저 먼 캉탕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캉탕으로 가서도 하루에 몇 시간을 걷는 사람이 거기에 있다. 나 역시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먼 곳으로 가 몇 시간이고 걷고 싶다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생각했다. 걷다가 지치면 해변가에 철푸덕 주저앉아도 좋을테고 해변가의 술집으로 들어가 자리잡고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셔도 좋을테다. 생각들을 쏟아내기 위해 걷고 또 걷는 일을 몇날이고 반복하다보면, 아마 해변가 술집엔 내 고유한 자리가 생기겠지. 그렇게 걷기 위해 갔다가 어쩌면 나도 그곳에 정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 나는 나도 몰랐는데, 내가 정착하고 있는줄 알았는데, 사실은 떠돌고 있었구나, 뒤늦게 깨달으면서.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은 아직 항해중인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은 항해중이고, 당신은 아직 세이렌의 노래 소리를 듣지 못했고, 당신은 아직 배에서 내리지 않았고, 당신은 아직 스스로가 항해중인 걸 알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캉탕에 닿는 시기와 당신이 캉탕에 닿는 시기에는 어쩌면 시간차가 있을 수 있겠지. 나와 당신이 캉탕에 이르게 된 이유와 방법은 달랐을지언정, 결국은 배에서 내려 만나게 될 수도 있겠지. 우리가 닿지 않을 사람들이라면, 내가 다시 항해를 시작하게 될 즈음에야 당신이 비로소 캉탕에 닿을 수도 있고. 나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다시 항해할 수도 있고 당신은 여기에 오기 위해 그동안 길고도 긴 항해를 했구나, 할 수도 있겠지. 결국 당신과 내가 각자의 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면 그 먼 바다에서 당신과 나는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한 명이 캉탕에 이미 닿아 있다면 다른 한 명을 기다린다면 언젠가 배는 흐르고 흘러 캉탕에 닿게 되지 않을까.


선술집, 해가 잘 드는 곳에 이미 당신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앞자리에서 문이 열릴 때마다 돌아보면서, 책장을 넘기고 있을지도 몰라.

사실 나는 정착해 있는 사람이니까.







그는 핍을 보고 싶었다. 바다에서 내린 후 다시는 배를 타지 않은 사내. 바다에서 내렸으므로 정박했고, 정박했으므로 바다에 타지 않은 남자.- P36

한중수는 J가 본 핍을 보지 못했고 J는 한중수가 본 핍을 보지 못했다. 시간은 조르바를 에이해브로 만들 수도 있고 에이해브를 조르바로 만들 수도 있다. 아니, 시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20년 전의 핍과 20년 후의 핍 사이에 달라진 것이 전혀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에게는 조르바로 인상 지어진 사람이 다른 이에게는 에이해브로 기억되지 말란 법이 없다. 핍은 한 사람이 아니다. 어떤 순간의 누군가의 핍이 있다. 어떤 순간의 횟수와 누군가의 숫자를 곱한 만큼 많은 여러 핍이 있다. 어쨌든 그가 만난 핍은 J가 말해준, J의 말에 의해 인상 지어진 핍이 아니었다.- P45

J는 대체로 한중수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는데, 그것은 한중수가 J에게서 자기 목소리를 듣기 때문이었다. 혹은 자기 목소리와 같은 목소리만을 듣기 때문이었다. 설득은 설득하는 사람의 권위보다 설득당하는 사람의 형편과 의지에 더 의존한다. 말하는 사람이 효과적인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효과적인 말로 듣기 때문에,그 경우에만 설득이 일어난다. 심지어 스스로 결정한 것을 추인받거나 이미 한 선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부의, 권위를 가진 목소리를 설득하는 자로 불러오기도 한다. 가령 스승의 어떤 교훈을 삶의 지표인 것처럼 언급하는 착실한 제자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스승의 수없이 많은, 더러는 충돌하는, 다른 맥락 때문에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는 여러 가르침들 가운데 제자는 어떤 특정한 충고만을 스승으로부터 받은 중요한, 더러는 유일한 가르침으로 언급한다.- P48

그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언제나 먼저 싸움을 걸어야 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가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싸움밖에 없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진 자는 그 상태를 평화라고 부른다는 것을 그는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가진 자가 자기 것의 일부를 내주는 일은 절대로 인어나지 않았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가진 것이 없는 가즌 가진 것이 없는 채로 살게 된다는 것을 그의 경험이 가르쳤다. 그러니까 가진 것이 없는 자가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서는 가진 자가 하지 않는, 할 필요가 없는, 치열한, 치사한, 때로 공허한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P121

책을 통해 세상의 넓이와 문학의 매력을 맛본 청년에게 밭에 거름 주고 바다에서 김 뜯어 오고 하는 머슴 노릇이 좀 갑갑했을라고. 실제로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어. 오랫동안 고래잡이배의 선원 노릇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해 배가 정박한 항구에서 만난 여자에게 빠져 살림을 차리고 그곳에 정착했어. 그러고는 다시 배를 타지 않았지. 그 양반, 정착지를 찾기까지 떠돌아다닌 거라고 해야 할까. 정착지를 찾지 못해 떠돌아 다닌 거라고 해도 되겠지. 떠돌아다녀야 정착할 곳을 찾을 수 있다는 교훈도 아주 억지스럽지는 않을 테고 ……. 정박할 때까지는 바다에서 내리지 않는다, 이게 그 양반이 내게 한 말이야.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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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1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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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허랜드 - 여자들만의 나라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5
샬롯 퍼킨스 길먼 지음, 황유진 옮김 / 아고라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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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라는 것은 '이것은 어째서 이런가, 뭔가 부조리하다' 라는 깨달음에서, 의문에서 시작한다. 왜 그런가 물어도 '오래 그래왔어'라는 대답밖으 들을 수 없었으므로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 같다.  여러차례 언급한 적 있지만, 페미니스트 철학자 윤김지영 선생님은 천주교도로서 성당에 가 미사를 드리면서 왜 여자만 미사보를 쓰는건지, 그걸 안쓰면 안되는지에 대해 주변에 물었을 때, '원래 여자만 쓰는 거야' 라는 답을 들었고, 그 대답이 성에 안차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나로 말하자면, '최명희' 의 [혼불]을 시작하면서 내내 쌓아뒀던 것들이 폭발했다. 대체 왜 여자는 예로부터 이런 취급을 받아야 했는가, 왜 피해자이면서 숨죽여 지내야 했는가, 왜 멸시를 당하면서도 침묵해야 하는가. 그렇게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결혼을 하고 전통적인 성역할을 강요하는 남편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려버린다. 산후우울증도 여기에 한 몫을 했고. 그러나 치료를 위해 찾아간 정신과에서는 그녀에게 지적활동을 하지 말고 육아와 가사노동에만 집중하라는 처방을 내린다. 이 처방은 그녀를 더 나쁘고 약한 상태로 몰아갔다.


아마 이런 경우 많은 여자들이 점차 시들어가고 더 약해졌을 것이다. 1900년대였으니까. 그러나 샬롯 퍼킨스 길먼은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그만두겠다 말하고 남편과 이혼한다. 자신이 아픈 이유가 뭔지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잇었던 탓이다. 자기에게 처방을 내린 의사가 자신을 제대로 진찰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내가 왜 아픈줄 알아? 그건 지적활동을 해서가 아니라, 지적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해서야! 

의사가 시키는대로 자기 자신을 침묵 속에 놓아두기 보다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그녀는, 그 일을 계기로 <누런 벽지>라는 자전적 소설을 썼다. 그리고 이 글의 처음에 언급했던 페미니즘, 그러니까 이 모든 일들이 이상하지 않은가, 부조리하지 않은가, 를 생각했던 그녀는 그것을 고발하는 소설을 써낸다. 이 책, [허랜드]가 그것이다.



'허랜드'는 말그대로 '여자들만 사는 나라' 이다. 미국인 남성 세 명이 여자들만 있는 나라라는 말에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찾아간다. 일단 여자들만 있다는 곳이니 완성되지 않았겠지, 그곳은 많은 것들이 부족할거야, 여자들의 질투와 시기가 가득하겠지, 젊은 여자들 많겠지, 라는 뻔한 편견으로 그곳에 도착했는데, 오, 이곳은 천국이었다. 여자들만 있는 곳에서 여자들은 스스로 아이를 낳는 법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여자들만 살면서 의식주를 현명하게 해결하며 게다가 나라의 모든 여자들이 굉장히 지적인거다. 이 모습은 이 미국인 남자들이 결코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고, 눈앞에 보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곳에서 그곳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익히며 미국의 문화와 언어 역시 교환하던 그들은, 자시들이 살고 있는 미국을 욕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많은 부조리한 것들에 대해 침묵하려 하지만, 허랜드에서 살고 있던 여자들의 '당연한' 물음들 앞에 자신들이 살아왔던 남성위주의 사회가 얼마나 보잘것 없었는지, 얼마나 불공평 했었는지를 드러내게 된다. 




"일부 고등 곤충 가운데에도 그런 예가 있는데, 우리는 그걸 단위생식, 즉 처녀생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생식이란 말은 알겠는데 처녀는 뭐죠?"

그녀의 질문에 난감해 하는 테리 대신 제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처녀란 짝짓기를 하는 동물 가운데 아직 한 번도 짝짓기를 하지 않은 암컷을 부르는 말이에요."

"그렇군요. 처녀라는 말이 수컷에게도 적용되나요? 아니면 수컷한테는 다른 용어를 쓰나요?"

그는 같은 용어를 쓰지만 수컷에게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급히 질문을 회피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런가요? 그렇지만 짝이 없으면 짝짓기가 불가능하잖아요. 그럼 짝짓기 전의 암수 모드는 처녀 아닌가요? 미국에는 수컷 혼자서 생식이 가능한 생명체가 존재하나요?"

그가 대답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p.83-84)



하하하하. 물론 이 당연한 의문은 몹시 통쾌했고 너무나 쉽게 여성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이라 감탄하며 읽었다. 그런 한편, 이미 백년도 훨씬 더 전부터 누군가는 '처녀'란 말이 '아직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을 뜻하는 용어로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건만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씁쓸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이 그 오래전부터 '이거 이상하잖아!' 부르짖었건만, 그러나 아직까지 '처녀 비행', '처녀작' 같은 말을 운운한다는 것은, 샬롯 퍼킨스 길먼의 외침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게 아닌가. 여성을 혐오하는 문화는 너무나 힘이 셌다. 아주 오래전부터 여자들은 이렇게나 문제점을 지적했건만!!



"우리는 고기는 물론이고 우유를 얻기 위해 소를 키우거든요. 소의 우유는 식단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 음식이죠. 우유를 모아서 유통하는 사업의 규모도 상당하고요."

그녀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그린 소를 가리켰다. "농부들이 소의 젖을 짭니다." 그러고는 우유 통과 의자를 그리고 몸짓으로 소 젖을 짜는 모습을 재연해 보였다. "그러고 나면 우유 배달원이 도시로 가져와 운반하지요. 모두가 아ㅣㅁ이면 집 앞에 놓인 우유를 받아볼 수 있답니다."

소멜이 진지하게 물었다. "소는 새끼가 없나요?" (p.88)



역시 길먼은 허랜드 여자의 입을 빌어 묻는다. 소젖은 소 새끼가 먹는 거 아니야?



미국 남자 세명은 각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제프'는 여성을 천사 대하듯 우러러보고 '테리'는 여성을 성적대상화 하는 데만 급급하며 소위 빻음의 절정을 달린다. 이 이야기속의 화자인 '밴'은 그들 사이의 중립이라고 칭해지지만, 가장 객관적 시선을 가졌다고 스스로도 자부하지만, 그러나 그가 '남자로 태어나 남자로 살아온' 세월이 어디가겠는가. 그는 중립을 자처하지만 영낙없이 남자다. 그나마 다른 게 있다면 허랜드의 장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는 거, 아내가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설득을 하되, 강제하지 않는 거. 그렇다. 테리는 그곳에서도 강간을 시도한다. 누가 남자 아니랄까봐, 발정기가 아닌데 섹스를 해야하는 걸 이해못하는 아내의 방에 몰래 들어가 강간을 시도하는 것. 그러나 그는 허랜드의 건강한 여자들의 손에 맞고 묶인다. 테리는 어떤 여자라도 남자가 정복해주기를 원하는 법이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 허랜드에서 일 년을 살면서 자신이 알고 있던 고정화된 여성성을 가진 여자들이 아닌 여자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버리지못했다. 그나마 혐오와 숭배 가운데에 있던 '밴'은 이 일에 대해서 테리의 강간 시도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여자에게도 잘못은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아내는 특히나 더 여성성이 강해 보였다면서.



테리는 강간을 하지 못했고 아내로부터 거절 당했다. 게다가 다른 여자들로부터도 감시당한다. 이 때 그가 분노에 차 허랜드 여자들을 멸시하며 내뱉는 욕이 '노처녀' 이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여자들에게 내뱉는 욕이 노처녀라니, 그게 그가 생각하는 여자들에 대한 욕이라니. 그가 어떤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내가 누누이 '어떤 걸 욕으로 쓰는 지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 하는 것은 사이언스...



'밴'은 '엘라도어'랑 결혼해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이런 사랑이 있다는 것, 이렇게나 큰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애의 당연한 섹스에 대해서, 그리고 양성이 사는 사회에 대해서 늘 엘라도어에게 말했기 때문에 엘라도어는 미국이라는 곳, 양성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 자기들처럼 한쪽 성만 있는 곳보다 더 나은 곳일거라고 당연히 전제한다. 그렇게 그들 부부가 미국으로 가면서 이 소설은 끝맺는다. 아흑-

엘라도어는 미국에 가서 어떤 세상을 보게 될까. 그녀가 마주하게 될 세계는 그녀에게 어떤 생각을 심어주게 될까. 그녀가 미국땅을 밟고 양성 사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녀는 아마도 이 책의 작가인 샬롯 퍼킨스 길먼처럼,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지는 않을까.  그녀에게 이 때 내려질 처방은, 그렇다면, 그녀가 원래 살던 행복한 그곳으로, 남성이 없는 그곳으로 가야하는 게 아닐까.



이 책에는 본편인 <허랜드>를 포함해, 자전적 소설인 <누런 벽지>도 실려있다. 작가의 실제 상황, 삶을 반영한 것인데, 글 쓰는 걸 싫어하는 남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서 글을 써야 하는 여자, 처방이라고는 쉬고 산책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요하는 의사 남편과 살면서 그 처방대로 하다가 단단히  미쳐버린 여자가 나온다. 이 소설을 샬롯 퍼킨스 길먼은 지적활동을 하지 말라는 처방을 내린 자신의 정신과 의사에게 보냈다는데, 그 의사는 그 소설을 읽었을까? 읽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남자라면> 역시 짧은 단편인데, 이 소설을 읽노라면 샬롯 퍼킨스 길먼은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이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달았던 게 아닐까 싶다. 아내가 갑자기 남편인 남자가 되어 남자 옷을 입고 나가면서 옷에 주머니가 많은 것부터 편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기능성 좋은 옷이라니! 게다가 모자! 실용성을 강조하는 남성들의 모자들이 있는데, 여자들은 왜 모자에 깃털 같은 걸 꼽고 다니는가.  게다가 경제력은 어떻고! 이 모든 걸 1860년 미국에서 태어난 샬럿 퍼킨스 길먼은 알고 있었고 이렇게 글로써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진작에 깨우치고 의문을 갖던 여성의 입을 막으려 했던 정신과 의사라니. 너무 해롭다. 이렇게 글로써 모든 걸 고발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지적 활동을 하지 말라는 처방이라니, 너무나 한심하다. 그런 처방에 굴하지 않고 단호히 앞으로 나가 글을 계속 썼던 샬롯 퍼킨스 길먼은, 아, 얼마나 위대한가.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모임으로 이렇듯 좋은 소설을 또 읽게 되어 너무 좋다. 기억해야 할 좋은, 지적인, 날카로운 여성 작가가 있다는 사실은 너무 큰 기쁨이다. 샬롯 퍼킨스 길먼의 이름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녀들이 본질적으로 지닌 모성애가 문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우리가 말하는 ‘여성스러움‘이 현저히 부족했다. 이 점 때문에 나는 이내 우리가 너무도 좋아하는 ‘여성스러운 매력들‘은 사실 전혀 여성스럽지 않으며 남성성이 반영된 결과물일 뿐임을 확실히 깨닫게 됐다. 즉 여자들은 남자들을 즐겁게 해줄 의무가 있어 그런 특징들이 발달된 것이고 이러한 특징들은 여성 스스로 자아실현을 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P105

˝여자들의 나라가 존재한다고 쳤을 때 그곳 여자들 어떤 모습일 것 같아?˝
우리는 많은 여자들이 필연적인 한계, 단점들, 사악함 등을 가졌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확신했다. 우리는 그들이 여성 특유의 허영에만 매달려 과도한 장식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중국 의상보다 더 완벽한, 진화된 의상을 입고 있었다. 매우 아름답지만 늘 실용적이며 위엄과 훌륭한 감각을 갖춘.- P141

궁전들이, 보물들이, 눈 덮인 산맥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이 커져갔다. 나는 그녀처럼 뛰어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재능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물론 그녀는 최고의 수목 관리인이었지만 그런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그야말로 모든 측면에서 놀라웠다는 뜼이다. 내가 이런 여자들을 많이 알고, 그녀들과 가깝게 지냈다면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이곳 여자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남달랐다. - P158

˝과거를 존중하지 않는 거예요? 선조 어머니들의 생각과 믿음 말입니다. ˝
그녀가 대답했다. ˝물론이에요. 왜 존중해야 하는 거죠? 그들은 이미 떠났고 게다가 우리보다 아는 것도 많지 않죠.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사람들이 아니라면 선조들뿐 아니라 우리 다음 세대를 이끌 아이들에게도 우리는 가치 없는 사람들일 거예요.˝
이 말을 들은 나는 진정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마도 남들에게서 들었기 때문인지 나는 늘 여자들이 본래부터 보수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곳 여자들은 진취적인 기상을 가진 남자들의 도움 없이 과거를 지나쳐 미래를 향해 대담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 P192

나는 어떤 독실한 사람이 전능한 하나님을 길게 내려오는 옷을 입고 긴 머리와 긴 수염을 한 노인으로 제멋대로 묘사한 그림을 떠올렸다. 무척 솔직하고 순수한 그녀의 질문을 듣고 보니 이러한 신의 모습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실제로는 고대 히브리 인들의 신이며, 고대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연히 그들은 신의 모습에 가부장적 사회의 지도자인 할아버지의 모습을 덧입혔고, 우리는 단지 그들의 가부장적인 신의 모습을 이어받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 P196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성을 빼고는 여러분에게 줄 게 없어서 정말 바보처럼 느껴져요.˝
셀리스가 불쑥 질문했다. ˝미국 여자들은 결혼하기 전에는 성이 없나요?˝
제프가 설명했다. ˝물론 있어요. 처녀 때의 성이 있죠. 그녀의 아버지 성을 딴 거예요.˝
알리마가 질문했다. ˝그럼 아버지한테 따온 성은 어떻게 되는거죠?˝
테리가 대답했다. ˝그건 버리고 남편의 성으로 바꾸는 거죠, 내 사랑.˝
˝바꾼다고요? 그럼 남편은 아내의 처녀 적 성을 갖게 되나요?˝
- P205

상상할 수 있는 지구상의 온갖 민족들의 결혼을 떠올려보면 여자의 피부가 검든, 붉든, 노랗든, 갈색이든, 희든, 여자가 무지하든 교육을 받았든, 순종적이든 반항적이든 상관 없이 인류 역사가 정립한 결혼 전통이 그녀 뒤에 버티고 서 있다. 이러한 전통이 여자를 남자에 종속시킨다. 남자는 자기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여자는 남편과 그의 일에 적응해간다. 국적의 경우에도, 이상하고 간교한 속임수로 여자는 자신이 태어난 곳, 사는 곳과 상관 없이 자동적으로 남편의 국적을 따르게 된다.- P209

˝미국에서는 결혼을 하면 정해진 기간이나 아이를 낳는 것과는 전혀 상관 없이 바로 그걸 하기 시작한단 말인가요?˝
내가 씁쓸해 하면서 말했다. ˝물론이죠. 단지 부모이기만 한 게 아니고 서로 사랑하는 남자, 여자니까요.˝
엘라도어가 뜻밖의 질문을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요?˝
조금 짜증이 난 내가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얼마나 오랫동안이냐고요? 그야 평생 동안이죠.˝
그녀는 여전히 마치 화성인 애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무언가 매우 아름다운 생각이네요. 다른 모든 생명체들은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 그 강렬한 행위를 하는데, 당신 나라 사람들은 더 고귀하고 순수하며 숭고한 목적을 위해 한다고요. 당신이 말한 내용에 비추어보건대 이런 관계가 인성을 가장 고귀하게 하는 효과를 낳는 거네요.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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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8-31 14: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뭐랄까... 샬롯 길먼 이야기를 읽으면서 천재란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다른 여자들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참고 살아야했던 그런 면들이 있잖아요. 샬롯은 이게 아닌거 같아, 할 때 그걸 박차고 일어선다는 느낌이 들었달까요.
머리가 엄청 좋고 용기가 백배인 사람.
전 그런 사람들이 역사에 흔적을 남기는 천재라고 생각해요.

잘 읽고 또 배우고 갑니다, 다락방님~
역시 페미니즘 페이퍼는 다락방님 페이퍼가 제 맛입니다!!

다락방 2019-09-02 11:27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저도 그 생각했어요! 이 사람은 보통이 아니다! 라고 말이지요.
지적 활동을 하지 말란 말에 하지 않으면서 끙끙 앓다가 사라지는 많은 여자들이 분명 있었을거에요. 그런데 샬롯은 ‘그거 아니란 말이야!‘라고 부르짖었던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 아내도, 엄마의 역할도 그만두겠다는 것도 어려웠을 테지만, 그 후에 책으로 하고자 했던 바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니, 진짜 대단하다 싶어요.
게다가 책의 내용도 그렇잖아요. 애초에 잘못된 게 보였고 그게 이상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걸 알리려는 의도가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잖아요. 진짜 너무 고맙고 짜릿해요! 그런 한편, 이렇게 진작부터 잘못된 걸 지적한 여자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여성혐오 문화가 이어져온다는 건, 그 여자들의 목소리를 얼마나 억압했던건가 싶기도 하고요. 하아-

정말 좋은 책을 이번 기회에 잘 읽었어요, 단발머리님. 이제 시몬 베유도 읽어야 하는데 아직 책이 도착을 안했으니 조금 게으름을 피우겠습니다. 후훗.

유부만두 2019-08-31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역시 다락방님!

다락방 2019-09-02 11:27   좋아요 1 | URL
제가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탈코르셋 선언 - 일상의 혁명 페미니즘 철학 세미나 1
윤지선.윤김지영 지음 / 사월의책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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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김지영과 윤지선은 이 책에서 탈코르셋의 의미와 의의를 정확히 궤뚫고 있다. 게다가 철학자들이니만큼, 들뢰즈, 마르크스, 부르디외 등을 데려와 글에 설득력을 더한다. 들뢰즈 무엇 마르크스 무엇.. 이냐 라며 그들에 대해 전혀 모른다 해서, 이 작은 책 한 권을 읽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페미니스트라면 이해가 되고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 윤김지영 교수님을 처음 만난 건 몇 해전 책출간 행사에서 였다. '독자와의 대화' 같은 것이었는데, 그 당시 윤김지영 교수님은 긴 머리에 예쁜 원피스를 입고 곱게 화장을 하고 다소곳이 앉아 계셨다. 질의응답 시간에 나는 '남자들이 다 죽어야 끝날 것 같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ㅎㅎㅎ 그 때 거기 계시던 다른 독자분께서 '아니에요,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어요' 라고 말씀해 주셨더랬지.

그런 윤김지영 교수님이 지금은 브라대신 니플패치를 하고 원피스 대신 바지를 입는다고 하신다.

 

 

- 얼마전에 여자 k 가 남자친구에게 불만인 점을 얘기했었다. 자신은 항상 예쁘게 화장하고 옷을 입고 나가는데, 남자친구는 꼭 집에 있다 바로 나온 옷차림이라 화딱지가 난다고.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k 는 그 남자와 헤어졌다. 자신에게 성의를 보이지 않는 남자인데 자신 혼자 성의를 보이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고 했다.

 

이런 일은 비단 k 에게만 있는 일은 아니다. 나도 데이트 하면서 집에 누워있다 나온건가, 싶은 남자들을 더러 만나기도 했으니까. 편한 게 좋지, 라며 나는 그들에게 옷차림이나 겉모습에 대한 어떤 지적도 한 적이 없다. 나는 원피스에, 힐에, 화장에, 무거운 가방을 들었으면서. 씨부럴..

 

 

- 꾸밈노동을 '내 기분이 좋다, 내 의지다' 라고 주장하며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나 역시 내가 좋아서 하는 줄 알았었지. 후훗. 그러나 탈코르셋을 접하고 화장을 하고 다니지 않으면서, 아 내가 그동안 누구 좋으라고 화장 하고 다닌건가, 하는 것에 더 강한 의문을 갖게 됐다.

 

낯선 나라, 여행지에서의 일이다.

그림을 보러 갔는데 화장을 전혀 하고 가지 않았다. 박물관에는 나 외에도 당연히 다른 사람들, 남자들도 많았는데, 내가 그들의 존재에 대해, 그들의 시선에 대해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홀가분함, 바로 그것이었다! 늬들이 거기 있든지 말든지, 나를 보든지 말든지, 가 내가 화장을 하지 않으니 비로소 가능해졌던 것. 나는 그냥 그림을 보러 온 사람1 이었다.

그간 나는 남자들에게 잘보이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화장한 게 아니라고 내 스스로 생각해왔다. 내 기분 좋으니까 한거야, 라고 당연한듯 생각해왔지. 그러나 그 박물관에서, 이국에서 온 남자들과 더불어 있으면서 내가 얼마나 홀가분한지를 깨닫고는, 아 나는 나도 모르게 의식하고 살았구나, 싶었다. 화장을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겠구나, 하는 깨달음. 그러니까, 내가 꾸몄기 때문에 꾸밈에 대한 보상을 어떻게든 바랄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그것이 과연 나의 자유의지였을까?

이 경험은 나에게 굉장히 새롭고 충격적이었다.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느낌.

 

 

 

- 인스타에는 숱한 여자들이 사진을 올린다. 날씬한 여자들이 '통통한 몸이지만 뭐 어때' 라고 올리고, 이목구비 뚜렷한 여자들이 '오늘 못생겼어..' 라고 올린다. '운동이 좋아' 라면서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몸매 과시하는 옷을 입어 올리고. 그런 사진들에는 보란듯이 하트가 수백 수천개씩 따라붙고 팔로워도 많다. 누가 봐도 의도와는 다른 멘트로 올려지는 사진들.

반면 탈코르셋을 해시태그로 쓴 사진들에는 거침없는 욕이 따라붙는다. 화장을 하거나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서 사회가 정해놓은 '미'에 거스르는 것, 못생기거나 뚱뚱하게 되는 건 탈코 당사자들일텐데도, 그걸로 욕을 하는 남자들은 대체 무슨 심리일까. 자기들이 못생겨지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뚱뚱하게 되는 것도 아닌데, 왜 '화장 안할거야' 라고 하는 여자들에게 못생겼다, 쿵쾅댄다 욕을 할까. 그여자들이 못생겨서, 뚱뚱해서 싫으면 그 여자들하고 안놀고 안사귀면 되잖아. 저리 가. 니네가 원하는 예쁜 여자 찾아, 쭉빵 여자 찾으라고.

 

나는 이게 내가 여행지에서 느꼈던 바로 그 자유로움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너는 나에게 예쁘게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남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다는 것.

미모에 대한 자연스런 갈망은 애초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주위 사람들과 매스컴에서 엄청 주입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그러나 남자들에게는 그것이 '너는 나에게 선택받기 위해' 당연해 지는 것이고 여자에게는 '저 남자에게 선택받기 위해' 당연해져 버리는 것.

탈코르셋은 기본적으로 이걸 거부하기 때문에 남자들이 화딱지가 나는 것 같다.

왜 너는 나에게 잘보이기 위해 화장하지 않지?

왜 너는 나에게 잘보이기 위해 날씬해지려 하지 않지?

화장 안해서 못생겨진다면, 다이어트 하지 않아서 뚱뚱해진다면, 그리고 그게 나쁜거라면, 그걸 하는 '당사자'는 탈코르셋을 하는 페미니스트들인데, 탈코르셋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 자기는 살던대로 그 얼굴에 그 몸매로 살면서, 화장하지 않고 다이어트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여자들을 비난하다니. 너무 이상하잖아? 같은 나라에서 같은 교육을 받고 사는데 왜그럴까?

 

 

- 완전히 코르셋을 버리진 못했지만 나도 탈코르셋을 시작하면서 가장 기이하게 생각됐던 게 볼터치였다. 볼터치라면, 하아- 과어의 내가 '반드시 해야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는데. 볼터치 하지 않으면 밖에 못나가겠어, 했었는데. 친구에게도 '우리 볼터치 하며 살자' 며 선물하기도 했는데. 하하하하. 이제는 볼터치한 사진들을 보면 너무 기이한거다. 이렇게 이상한 걸 내가 왜 했지? 너무 이상하잖아. 왜 볼이 발갛게 보여야 해? 왜 발갛게 보이려고 심지어 거기에 색을 입혀? 볼터치한 사진만 보면 미쳐버릴 것 같다. 그거 너무 이상해요...

나는 제일 먼저 볼터치를 갖다 버렸다.

 

 

 

- 요즘은 색조화장을 안하고 산다. 개기름이 끼는 걸 어떻게 방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 고민이긴 하지만, 세상 편해. 일터에서 내가 맡은 자리가 있어 립스틱까지 버릴 순 없지만, 회사에서도 여행지에서도 이제 화장을 하지 않는다. 팩트 사둔 건 썩고 있고 파운데이션을 이제 사지 않아도 되니 너무 좋다. 나는 모든 화장품을 백화점에서 비싼 것만 사서 쓰는 사람이었는데, 화장품 비용이 싹 줄어들었지. 게다가 여행지에서 화장을 하지 않으니, 외출 준비도 빨리 끝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팬티랑 속바지 대신 남자 드로즈 하나 입고 원피스 입고 바깥에 나가버리면 끝이여. 이번 여행에서 동행과 함께 나갈라치면 나는 화장하는 동행을 계속 기다려야 했는데, 동행이 자꾸 미안해했다. 아녀, 천천히 하고 싶은 거 다 해. 나는 친구가 화장하는 동안 크레마로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든가, 가족들과 연락을 하든가, 스맛폰을 들여다보든가 했지.

 

남자사람 만날 때도 걍 노메이크업으로 나간다. 코르셋을 벗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여.. 남자 만나기 전에는 약간 고민이 되는 것이다. 하도 화장 안해버릇 하니까 하기 너무 귀찮은데 내가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화장을 해야 하는 것인가...고민이 되다가,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나가자, 그 남자도 안하는데 내가 뭐하러 해. 이런 내가 싫으면 그 다음부터 안만나겠지 뭐, 이러면서 남자 1 만날 때 화장 안하고 나갔더니 그 다음에 남자2 만날 때도 노메이크업이 당연해지더라.

 

 

- 책날개에 있는 저자의 이력을 보노라면 그 타이틀의 화려함에 너무 반해버린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이며, '연구자' 이며, '교수' 라니.. 너무 멋져버리는 것. 여자들이 지금보다 좀 더 많이 타이틀을 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의사, 박사, 교수, 국회의원 등등 여기저기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더 많이 보일 수 있기를.

 

 

 

 

 

- 인용하는 구절이 매우 많은데, 그냥 이 책 사서  읽어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남성 욕망경제 매트릭스 내에서 교환가치가 일어나지 않는 신체를 가진 여성들은 실질적으로 어떠한 취급을 받았나요? 이 사회에서 그러한 여성들은 소위 게으르고 쓸모없는 자들로 취급되고 조롱받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회가 그러한 여성을 자연적으로 거저 주어진 스스로의 여성-신체자원의 가치조차 제대로 활용·관리하지 못하며 꾸밈노동이라는 의무를 방기한, 나태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폄하하기 때문입니다.- P22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유용한 여성-신체자원(자궁-여성 유기체로서의 대상)으로 동원, 소비, 착취, 억압되는 것을 거부하는 움직임일 뿐만 아니라, 이때껏 스스로의 신체의 교환가치를 더 높이고 적어도 남성의 성애적 욕망의 투여가 일어나지 않는 무가치한 몸(교환가치=0)으로 전락하지 않고자 지속적이며 의무적으로 수행하던, 일체의 꾸밈노동을 집단적으로 보이콧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거부와 보이콧의 물결이 일으키는 진폭과 파장은 우리 사회의 인식론적 담론 지형뿐만 아니라 정상성 규범의 실천 지형까지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일회적 차원의 운동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적 판‘에 대한 도전이며 이 사회를 지배하는 ‘지층화 작용‘에서 벗어나려는 탈주의 움직임입니다.- P23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의 신체를 남성석 성애의 투자(investissement)대상물이자 순수한 부계혈통의 성씨를 날인한 세대 재생산의 몸으로 환원시키는 일체의 작용을 거부하는 탈지층화(destratification)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P25

탈코르셋을 실천하는 여성들은 남성 욕망경제에 철저히 귀속되어 있는 이성애 연애와 섹스, 결혼, 출산의 경로를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욕망의 서사로 받아들이길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일상적 성담론 속에서 남성의 성애적 욕망의 대상인 삽입구 기관으로 축소되고 환원·유통-단체 카톡방 내 음담패설, 성희롱, 디지털 성범죄 영상물 피해-되는 것을 폭로하며 이와 절연을 선언합니다. 그와 동시에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들이 남성 욕망경제 매트릭스 내에서 성적 대상물-물방울 모양 가슴, 핑크빛 성기, 애플힙, 11자 다리-이란 기호로 부유하는 것을 벗어나, 특이성과 비전 등과 같은 다각적 요소들과 함께 구축해 나가며 새로운 욕망의 서사를 배열, 조성해낼 수 있는 구조적 장을 기획하고자 하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P27

『자본론』에 따르면 ‘상품‘(commodity)이란 ‘타인과의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된 유용한 물건‘입니다. 여성의 신체 역시 남성적 담론과 실천의 장 안에서는 교환을 위한 ‘유용한 물건‘이 되면, 따라서 일종의 상품으로 기능합니다. 그리하여 사실상 여성에게 자신의 ‘신체‘는 남성 욕망경제 매트릭스 속에서 사회경제적으로 교환가치가 인정되는 상품으로 존립시켜야 할 대상이 됩니다. 달리 말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자연적으로 여성-신체자원이라는 ‘천연적 노동대상물‘을 타고 났으며 이를 보다 세련되게 관리하고 정교히 세공해내는 기술을 투입함으로써 스스로의 신체를 ‘가공된 노동대상‘으로 탈바꿈하는 ‘꾸밈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P32

‘늘 젊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란 처절한 꾸밈노동의 산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그러한 여성을 그 자체로 아름답게 태어난 존재로 신비화함으로써 인위적 꾸밈노동의 모든 노력들-아름다운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화장술과 시술, 지속적 운동과 고강도 식이요법-과 사회적 압력들을 단번에 비가시화해 버립니다.이는 마르크스가 거론한 ‘상품의 물신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품의 물신화 현상은 일종의 착시 현상입니다. 인간 노동의 산물인 상품이 마치 그러한 노력의 과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상품 자체가 가진 자연적·본질적 속성으로 인해 교환가치를 발생시키는 독자적·독보적 존재물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P35

남성의 신체자원이 성적으로 동일한 방식과 강도로 채굴되고 착취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신체가 가부장적 교환가치-남성 욕망경제의 기호품이자 부계혈통의 세대 재생산 도구-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여성의 성적 신체자원은 그들의 노동력의 기본값(default value)으로 설정되어 있기에 업무의 분야에 상관없이 여성들을 향한 아름답고 젊어 보이는 외모에 대한 요구는 사회적으로 이미 조건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용모단정의 엄격한 규준을 준수해야 하는 서비스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성적 신체자원은 노동 상품성의 자격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기본값으로 간주되기에 고용주의 상품판매 촉진과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와 자원으로 원할하게 동원됩니다.- P39

여성을 보지라는 신체자본(capital corporel)을 통해 신분상승과 부(벼슬, 잉여가치)의 창출을 손쉽게 추구하는 존재로 환원하고 있는 ‘보슬아치‘라는 용어는 매우 문제적입니다. 여성의 신체자원이 채굴, 배분, 활용, 억압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맥락 이해 자체가 상실되어 있고 성차별적 현실을 의도적으로 지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남성들을 여성들에 의해 부와 특권을 탈취당하고 피해를 입는 계층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P43

‘보슬아치‘는 ‘창녀와 꽃뱀, 된장녀와 김치녀‘라는 여성혐오 용어의 스펙트럼 확장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연애와 결혼의 잠재적, 현실적 상대인 모든 여성들이 성적 매력자원을 미끼로 남성들이 어렵게 취득한 부와 계층적 특권을 손쉽게 탈취하거나 나눠 갖는다는 기묘한 환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사실상 ‘모든 남성이 남근권력의 상징물인 경제적 부와 계층적 특권을 보유한 강력한 팔루스(Phallus)가 될 수 없다‘는 남성 특유의 구조적 불안의 원인을 스스로의 자격미달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여성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P43

탈코르셋 운동을 실천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어떻게 남성과 구별되는 외형과 속성(propriete)들로 구성되는가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여성들이 어떠한 역량들(puissances)을 가지고 있는가(여성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문제의 축 자체를 이동시켜 버립니다. 여성을 옥죄며 가동되던 식별(distinction)의 코르셋-남성보다 가녀린 신체, 선이 곱고 예쁜 이목구비, 볼륨감 있는 몸매, 사근사근함, 애교 등-으로부터 스스로의 신체를 해방시키고 새로운 역량과 감각을 발굴하며 더 이상 남들에게 예쁜 인형이 아닌, 다양한 역량의 다발체로서의 자신을 조우하고 탐험해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P52

예를 들어 급격한 체중감량을 위해 식욕억제제와 이뇨성분이 든 다이어트 약을 섭취하는 여성은 자신의 신체와 해당 약품의 합성(melange)작용이 일으키는 탈수 증상과 복통, 기력쇠진과 두통, 생리불순이라는 부정적인 감각증상에 대해 자신의 존재 및 신체역량의 축소와 하락의 상태(etat)를 느끼며 술픔의 정동(affect)에 놓입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자신의 신체에 부합하지 않는 다른 신체와의 만남과 합성은 우리의 신체를 불유쾌하고 유해한 방식으로 변화시키며 조화로운 신체 밸런스를 깨뜨리고 파괴한다는 점에서 슬픔의 정동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 P58

개인의 성향과 취향의 체계는 그 개인이 속한 성별, 사회적 위치, 경제적 계층, 교육환경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지고 결정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를 기반으로 비춰볼 때 여성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성별 계층성(sex class)에 의해 침투·각인되어 있는 다양한 습속들-특정 취향과 기호, 소비성향, 행동방식과 습관, 태도, 말투, 걷거나 앉는 방식, 제스처 등-의 총체들을 무의식적으로 체화하고 있습니다.- P74

이러한 관점에서 화장이나 외모 꾸미기에 대한 여성들의 취향이나 관심,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 인형이나 분홍색에 대한 선호, 나긋나긋한 말투나 수동적 태도 등은 여성에게 각인된 ‘아비투스‘(habitus)를 드러냅니다. 여기서 아비투스란 사회적으로 범주화된 계층적 가치가 육체에 각인된 상태로서, 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층성을 온전히 체현한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위하고 무언가를 선호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화장과 같은 꾸밈노동을 여성 개인의 사적인 취향이나 기호로 오인하도록 만드는 구조야말로 성별 계층성에 의해 도식화된 개인의 행동패턴과 특정 라이프스타일의 재생산 효과가 얼마나 한 개인의 신체와 사고방식에 온전히 칩습되어 있는가를 방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74

예컨대 남성보다 가녀린 신체, 선이 곱고 예쁜 이목구비, 볼륨감 있는 몸매, 긴 머리, 호전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순종적인 태도와 눈빛, 배려심, 착하고 고운 마음씨, 애교 등은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특성들의 총합일 뿐이지만, 이것이 남성과 확연히 대별되는 신체적, 심리적 차원의 성별 특성들의 총체를 형성함으로써 결국에는 ‘여성‘이라는 하나의 균질하고 동질적인 성별 계층성의 고유한 특질(property)로서 고정화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P75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에 대한 성별 식별체계로 가동되고 있는 아비투스 도식들의 임의성과 우연성을 통렬히 비판하고 사회구조의 차별성과 억압성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는 ‘여성성‘ 분류화의 틀에 대해 근본적으로 의구심을 제기하고 반기를 드는 행위입니다.- P75

화장과 꾸밈노동이라는 아비투스를 거부하는 행위는 단순히 ‘~하지 않음을 선택함‘을 넘어서 여성의 행동양식과 감각, 활동반경과 인식태도, 욕망과 기호까지 온전히 새로이 발굴하고 주조하게 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 탐색을 추동시키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탈코르셋 운동은 성별 식별체계 내부에 식별 불가능한 존재들이자 남성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질적인 몸들을 난입시킴으로써 성별 식별체계의 가동에 거대한 타격을 가하며,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라는 위계적 질서가 새겨진 사회적 공간을 균열시키고 그로부터 탈주를 감행케 하는 것입니다.- P81

대다수의 여성들은 외모 꾸미기는 사회적 강요가 아닌, ‘내가 좋아서‘, 내가 자유롭게 선택해서 하는 일이라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왜 그것을 그만두라고 하는지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영화 <매트릭스>에서 이 세계가 구조적 착취와 차별의 시스템으로 가동되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깨달은 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파란 약을 먹고 그 진실을 알기 전으로 되돌아가서 편안하고 자유롭다는 환상에 젖어 살 것인지, 아니면 빨간 약을 먹고 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목도하며 매트릭스의 파괴를 힘겹게 싸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 P92

우리 대다수가 꾸밈노동의 완벽한 수행을 찬사와 무조건적인 박수로 맞이했었다면, 여성들의 민낯과 짧은 머리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불편함의 감각‘을 선사합니다. 왜냐하면 짧은 머리를 하고 바지를 입은 여성들은 기존의 여성성 수행 방식에 대한 반란자들이자 이 억압적 사태에 ‘동참하지 않음‘을 선언하고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보여줌으로써 여전히 꾸밈노동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전엔 느껴보지 못했던 윤리적 불편함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탈코르셋 운동을 배제와 차별의 정치라고 반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코르셋이야말로 수많은 여성들을 스스로의 신체와 불화케 하고 아름다운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만 합니다.- P99

화장이나 외모 꾸미기라는 행위에 대한 고정화된 기쁨의 정동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코르셋을 전시하는 이들에 대한 일방적 비난과 설득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화장이 주는 기쁨의 정동의 강도보다 탈코르셋 운동을 실천하는 이들이 드러내는 존재역량의 상승의 사진들과 경험담들, 이로 인한 새로운 삶의 양식들의 전략과 태도들이 더 많이 사회적으로 발화되고 공유됨으로써 탈코르셋이 주는 기쁨의 정동의 강도가 더 높아질 때, 많은 여성들은 그 기쁨의 정동의 물결을 스스로 따를 것입니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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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9-08-21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열심히(!) 읽고 있는‘성의 변증법‘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남성보다 ‘더 순수한‘존재로 여김으로서 그들의 열등한 지위가 정교한 ‘숭배‘하에 은폐되어 있었다고 꼬집고 있던데요. 이 관점에서도 왜 남성은 아무렇게나 입어도 될 자유를 얻고 여성은 꾸밈노동을 하지 않으면 욕먹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요.. 아무래도.. 이 책 그냥 사서 읽어보는게 낫겠죠? (๑◔‿◔๑)

다락방 2019-08-21 13:54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블랙겟타님. 이 책은 얇으니까 금방 읽을 수 있을 거에요. 사서 읽어보시는 걸 적극 추천합니다. 책 한 권에 전체적으로 밑줄을 긋고 싶더라고요. 이개 철학세미나 시리즈 1편이던데, 앞으로 나올 시리즈도 기대돼요. 하하하하.

그나저나, 성의 변증법 읽고 계시군요. 화이팅입니다, 블랙겟타님! 빠샤!!

별족 2019-08-2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모르겠네요. 세상에는 많은 직업이 있고, 요구되는 능력이 다르고. 연예인이 학벌을 자랑하는 것도 우습고, 교수가 미모를 자랑하는 것도 우습고. 그럼에도 교수가 아름다우면 한 번 더 눈이 가고, 연예인이 학벌이 좋으면 또 그렇고.
‘꾸밈노동보다 타이틀에 집중하라‘라는 게 의미있는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타이틀을 숭상하는 것은, 예쁜 것을 숭상하는 것보다 더 나은가요? 저는 박사학위는 없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할 거니까 ㅋ

다락방 2019-08-21 15:05   좋아요 0 | URL
누군가 타이틀을 숭상하는 것은 예쁜 것을 숭상하는 것보다 나으냐, 는 말을 꼭 할 것만 같아서 부연 설명을 하느라고 했는데 잘 안닿았나 보네요. 저는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좀 더 많이 다양한 곳에 자리잡아서 서로에게 보이자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지금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권력 있는 자리는 대부분 남자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그런 곳에 여자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뜻으로 타이틀을 얘기한 거에요. 교수라는 타이틀, 연구자라는 타이틀, 국회의원 이나 판사라는 타이틀을 우리가 좀 더 많이 가져오자고요. 저는 의미있다고 한 말인데 별족 님은 의미를 모르겠다 하시면 그것까진 제가 뭐 어떻게 할 수 없고요. 저 역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할 거니까요.

단발머리 2019-08-21 1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면 좋죠~~ 잘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면 제일 좋지요.
주의할 점은..... 여성들에게 더 지엽적인 일, 보조적인 일들이 제안되고, 주어지고, 강요된다는데 있다고 봐요, 저는.
주변을 정리하고 꾸미는 걸 좋아하는 여성이라면 괜찮겠지만, 그런 성향의 여성이 아니더라도 그런 일들을 하도록 강제하는 문화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탈코르셋도 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해요. 자신을 아름답게 정돈하고 꾸미는 일을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테죠.
그런 남자, 그런 여자가 있겠죠. 문제는 1년 365일 대부분의 시간을 민낯으로 보내는 대부분의 남자들과 달리,
여성이 민낯으로 나서면 ‘어디 아프냐‘는 이야기부터 듣게 되니까요.
화장을 안 하겠다는 여성들에게 달리는 혐오댓글이 보여주죠.
그런 사람들이 원하는 여자 사람이란 남자를 위해 ‘단장하는 여자‘라는 것을요.

잘 읽고 가요, 다락방님. 참 좋은 책이었어요, 그죠? ㅎㅎㅎ

다락방 2019-08-22 08:02   좋아요 2 | URL
예전에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님께서 저에게 직장인이냐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렇다고 하니 당신 딸은 너무 못생겨서 취직이 안된다고 어떡하면 좋겠냐고 하셨어요. 가수들이 노래 실력만으로는 뜨기 힘드니 성형 수술하라는 권고를 받는다는 건 우리도 종종 듣곤 하잖아요.
소개팅 할 때도 남자들은 제일 먼저 ‘예뻐?‘ 를 묻죠. 요즘은 카톡으로 프로필 사진 보며 얼굴 직접 확인하고요.
어디를 가나 무얼 하나 그 여자가 예쁜지를 확인하는데, 이 얼마나 강요된 코르셋인가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예뻐야 직장에서도 연애에서도 선택받는다는 걸 끊임없이 주입하잖아요.

그렇게 외모를 가꾸어야 대우받는 상황에서 또 지하철안에서 화장하는 여자는 못보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를 만나기 전에, 출근하기 전에 셋팅은 반드시 집에서 하고 와라, 셋팅하되 셋팅하는 과정을 보이지 말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자들은 셋팅하기 위해서 더 일찍 일어나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하죠. 하아-


어제는 윤자매님들이 다른 여성학자들보다 더 정확하게 탈코르셋에 대해 이해한 것은 철학을 공부하기 때문일까, 라는 생각을 했어요. 결국 철학이 그렇게 만든건가, 하는 생각요. 탈코르셋에 대해서라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불쾌해하곤 하는데, 윤자매님들은 그 불쾌함의 지점까지 명확히 짚어내주시잖아요. 그동안 공부했던 철학들이 그 이해를 가능하게 만든걸까, 결국 학문은 철학으로 닿게 되는 것인가, 라는 생각도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 역시 철학도 좀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만..... ( ˝)


단발머리님,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이 책을 단발머리님 덕에 읽게 되고 또 우리가 같이 읽었다는 것도 너무 좋아요. 같은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일이야 언제나 환영할만한 일이고 기쁜 일이지만, 이 책에 대해서라면 더 그런 것 같아요. 정말 좋은 책, 좋은 독서였어요. 얇은 책 한 권에 북마크를 얼마나 붙였는지 몰라요.

단발머리님, 우리 계속 공부하도록 해요!

별족 2019-08-23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까지, ‘화장하라‘는 억압을 당해본 적이 없어서 전혀 공감이 안 생기는 거 같습니다. 저는 ~촬영,일 때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화장했거든요.
그러면서, 저는 예쁜 사람들을 좋아해서, 사람들이 예쁘게 꾸미면, 화들짝 마음이 쿵, 하는 타입이거든요. 내 얼굴은 거울이 없으면 볼 일이 없으니, 저렇게 예쁘게 꾸민 사람들은 참으로 이타적인 사람이구나, 덕분에 내가 이렇게 기분이 좋네, 고맙구나, 생각하거든요.
 
버려진 사랑 나쁜 사랑 3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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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소녀 였을때 지금의 남편과 만나 사랑에 빠졌던 여자는 그의 대학 입학을 돕고 그의 공부를 돕고 그가 직장에 들어가 어엿한 사회인이 되는 동안 계속 그의 옆에서 그를 돕는다. 그의 아이를 둘 낳고 주부로 살아가면서 그녀는 그전에 가졌던 그녀의 직업을 잊고 살았고,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남편과 아이들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남편은 다른 여자가 생겼다며 그녀에게 이혼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남편의 여자는 이제 고작 스무살이다. 게다가 남편의 애인이 스무살이 되기도 훨씬 전부터 시작된 만남이라, 그는 미성년자인 여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었던 셈이다. 자신의 옆에서 경력단절이 되며 자신의 삶을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 자리를 지켜주었던 아내를 배신한 데에서 그는 개새끼지만, 미성년자인 소녀와 연애를 시작한 걸로는 더 개새끼이다. 이래저래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이니 이 세상에 어디에도 그가 발붙일 곳이 없어야 마땅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엘레나 페란테의 다른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독하게 몹쓸 놈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내가 느끼는 건 이 남자에 대한 분노에 앞서, 하아- 남편의 배신에 다쳐버린 여자의 무너짐이다.



여자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그에게 바쳤고 또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배신에 치를 떤다. 그가 떠난 자리에서 그녀는 그전에도 그랬듯이 공과금을 납부해야 하고, 보안에 신경써야 하고, 아이들 둘을 학교에서 데려오며 신경써야 한다. 둘이 하던 때에도 딱히 남편이 도와준 건 크게 없었지만, 그러나 둘이 하던 일을 혼자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자기 앞에 닥친 일상들에 힘겹다. 남편이 잠깐 방황하는 것뿐이라고,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냐고 자기 자신을 다독여 보지만 쉽지 않다. 우리가 사랑했는데, 그가 어떻게 해야 내게 돌아올까, 그를 어떻게 있던 자리로 돌려놓을까 고민하느라 그녀는 힘들다. 죽을 생각도 해보다가, 아니야 나는 그렇게 무너져내리는 여자가 아니야, 이를 악물지만, 그러나, 그녀는 무너져내린다.



공과금을 제때 납부할 수 없고, 아이는 아프고 개는 죽어간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이성의 끈을 자꾸 놓친다. 아픈 아이를, 시름시름 앓는 개를, 열리지 않는 출입문을 열어야 하는,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 앞에서 그녀는 자꾸만 과거속으로 빨려들어가며 현실을 벗어나려고 한다.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데, 아이가 아픈데, 개가 죽어가는데, 그런데 그녀는 자꾸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생각이 뻗어나가 좀처럼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남편에 대한 신뢰와 믿음과 사랑이 배신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충격으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나 이 여자야 정신을 차리란 말이야, 나는 읽으며 얼마나 힘겨웠는지 모른다. 게다가 그녀를 힘겹게 하는 건, 자꾸만 남편의 애인과 남편이 함께 발가벗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는 데에 있다. 그의 몸에 내가 새긴 흔적들을 그녀가 그동안 다 지웠겠구나 생각하고, 나한테 했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했겠구나 생각하고, 내 옆에 있으면서도 그녀를 떠올렸겠구나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그들은 섹스하며 쾌락속에 있겠지, 생각한다. 혹시 그동안 나와 섹스하며 나를 최상의 상대라 생각했던 건 아닌건가, 지금 만난 새로운 여자야말로 진정한 짝이라 생각하고 있는건가, 생각한다. 나는 그와 오래 살며 그의 성적 취향을 닮게 되었는데, 이제 그는 그녀와 성적 취향이 닮게 되었겠지, 생각한다. 나는 그녀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그렇게 무너져내리면 안된다고, 바닥을 치고 올라오라고, 아이들이 아픈 걸 돌보라고, 당신의 몸을 돌보라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무너짐에 동참해서 힘들었다. 이제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취향을 맞추고, 다른 여자에게 익숙해지고, 다른 여자와 은밀한 농담을 새로 만들고, 다른 여자와 역사를 만들어나갈 걸 생각하면 어떻게 무너져내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는게 정말이지, 너무나 힘겨웠다. 내가 지나온 시간이라 힘들었고, 지내고 있는 시간이라 힘들었다. 아, 나도 까딱하면 이렇게 이성을 잃고 무너져내릴 수 있었어, 하는 생각에 무서워졌다. 아, 내게 돌봐야 할 나보다 약한 존재가 있지 않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미칠것 같은 그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그녀의 영혼이 너무 힘들었다. 그녀가 결국은 그 시간을 극복하는지 보고 싶어서 힘겹지만 꾸역꾸역 책장을 넘겼다. 그에게 복수라도 하고 싶은 마음으로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보았지만, 아무 만족도 느낄 수 없는 그 서러움이 너무 슬펐다. 이건 비단 그녀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나자 나는 너덜너덜해져있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길 한복판에 버려진 휴지가 된 것 같았다. 이대로 비가 계속 내린다면 흔적도 없이 약해지고 흩어져 사라지고야 말 휴지쪼가리...



너무 힘든 독서였다. 차라리 엘레나 페란테가 분노를 주는 편이 더 좋다. 무너짐말고 분노를 주세요, 페란테 님...

대신 지나도 우리 가족 모두에게 인심이 후했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항상 나와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잊지 않았고 내게 자기 소형차를 빌려주었다. 주말에 가서 쉬라며 케라스코 근처에 있는 자기 별장 열쇠를 내어주기도 했다. 별장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기 대문에 우리는 기꺼이 지나의 친절을 받아들였다. 비록 딸과 함께 갑자기 들이닥쳐 우리 가족의 주말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기도 했지만.
상대방의 친절에는 또 다른 친절로 보답하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호의는 결국 사슬이 되어 우리 가족을 옭아맸다. 마리오는 어느새 카를라의 후견인이라도 된 듯 죽은 아빠 대신 카를라의 선생님들과 상담하러 다녔다. 언젠가 부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크랄르에게 화학 과외까지 해주기 시작했다.- P11

그의 대학 시험 준비를 도운 것도 나였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그를 끌고 시끄러운 푸오리그로타가를 가로지른 것도 나였다. 도시와 시골에서 몰려든 학생들로 주위가 북적이는 데도 터질듯이 두근거리는 남편의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때 나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남편을 이끌고 대학교 복도를 누볐다.
난해한 정공과목 복습을 도와주느라 남편 옆에서 며칠밤을 새운 것도 나였다. 나는 내 시간을 남편의 시간에 투자해 그를 더 강한 남자로 만들었다. 그의 야망을 위해 내 야망은 접어두었다. 남편이 낙담해서 위기를 맞을 때마다 남편을 위로해주기 위해 내게 닥친 위기는 덮어두었다. 남편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의 시간 속에 스며들었다. 나는 집안일을 하고 요리를 하고 아이들을 돌봤다. 일상생활을 위한 귀찮은 일들을 도맡았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비천한 출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집스레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올라갔다.
그랬던 그가 이제 와서 나를 떠나버린 것이다. - P116

지금껏 그에게 바친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와 노고를 몽땅 가져가 버린 것이다. 내 모든 노력의 결실을 다른 계집과 즐기기 위해서 가져가 버렸다. 내가 남편을 낳고 길러 지금의 모습으로 만드는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랑 말이다. 이보다 더 부당한 일이 어디있단 말인가.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이런 모욕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총기가 흐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우리 둘만의 추억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어디선가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 더욱 강렬히 느껴졌다. 열정이라기보다는 불안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남편에게 지금 당장 내 도움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대체 어디에서 남편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 P117

여자는 흔하디흔한 성욕을 대단한 호의로 오해한다. 남자들의 성욕을 사랑하고 지나치게 현혹된 나머지 사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하고만 관계를 가지고 싶어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오직 한 사람과 관계를 가지고 싶어 한다고 착각한다.
그렇다. 여자는 특별한 남자가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주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성욕에 이름을 붙인다. 나만의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내 사랑‘ 이라고 부른다.
아! 황홀함이니 설명할 수 없는 짜릿함 따위는 엿이나 먹으라지. 남자는 여자와 섹스하고 나면 다른 섹스 상대를 찾는다. 그런 남자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시간이 흐르면 먼저 여자는 떠나고 다른 여자가 오기 마련이다. 나는 수면제를 몇 알 삼키려 했다. 나의 내면 가장 어두운 곳에 누워 잠들고 싶었다.- P139

둘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섹스를 하고 있었다. 둘은 분명 밤새 섹스할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나 몰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괴로움에 경련을 일으킬 때마다 그들은 쾌락에 못 이겨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이제 그만 힘들어하기로 했다. 깊은 밤 그들의 행복한 입맞춤에 나는 복수의 입맞춤으로 맞서야 했다. 나는 버림받고 혼자가 됐다고 무너져 내리거나 미쳐버리거나 목숨을 버리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조금 망가지기는 했지만 나는 괜찮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온전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구든 내게 상처를 주려 한다면 나는 그대로 되갚아줄 것이다. 나는 스페이드의 여왕이다. 나는 독침을 품은 말벌이다. 나는 시꺼먼 밤이다. 나는 불 위를 걸어도 타죽지 않는 불멸의 생명체다.- P143

카를라에게서는 나와 똑같은 맛이 날까? 나와 똑같은 냄새가 날까? 혹시 남편은 지끔껏 내 맛과 체취를 혐오스러워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카로노에게서 느끼는 것처럼? 나를 만난 후 수십 년이 흘러 카를라를 만나고 나서야 남편은 자신에게 맞는 체취를 찾아낸 것이 아닐까?- P153

정말이다. 나는 바보 같았다. 감정의 수로가 꽉 막혀서 삶의 에너지가 흐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마리오가 세심하게 제공하는 황홀한 부부생활에 취해 내 존재의 의미를 가정주부로만 한정지은 것은 너무 큰 실수였다. 마리오의 만족감과 기쁨, 날이 갈수록 성공 가도를 달리는 그의 삶을 내 자존감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너무나도 큰 실수였다. 그중에서 가장 큰 실수는 그와 함께 있어도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인데도 그 없이 살 수 없다고 믿었던 일이다. 손끝에 스치는 그의 피부를 마지막으로 느껴본 지가 언제였던가. 그의 입술의 따스한 온기를 느낀 적이 언제였던가.- P275

우리 관계가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그의 어떤 면을 보았던 걸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남편의 생각과 행동과 말투와 기호와 성적 취향을 얼마나 많이 닮게 되었을까.
나는 그런 식의 질문으로 종이를 여러 장 채우곤 했다.
마리오에게 버림받은 후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도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는데 왜 아직도 그의 흔적을 몸에 간직하고 살아야 하나.
내가 그의 몸에 남겼던 흔적은 나 몰래 은밀한 관계를 지속했던 지난 몇 년 동안 이미 카를라에 의해 지워졌을 것이다. 한때는 내 몸에 새겨진 그의 흔적이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이제는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그의 흔적을 내 몸에서 떼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 자아를 손상시키지 않고 그가 남긴 흔적만 내 몸과 마음에서 깔끔하게 긁어낼 수 있을까.- P320

앞으로 다시는 이런 자리에 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이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절대로 다리 놔주기를 좋아하는 지인들이 마련한 자선 행사를 찾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상대 남자가 제대로 작업하고 있는지, 여자가 제대로 반응하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만남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훔쳐보는 이들 앞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이미 파트너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광경은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식탁에 음식 찌꺼기만 남았을 때 농담거리로 삼기 딱 좋은 소재가 아닌가.-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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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8-1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116쪽 읽는데, 딱 홍상수 감독 부인이 생각나더라구요.
시어머니, 치매인 시어머니를 한참 모셨다고 그러런데, 세계적인 감독이 되고 사랑 찾아 떠났죠.
다 자기 일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겠지만.... 제일 좋은게 사랑이고 제일 잔인한 것도 사랑 같아요.
서로 영혼의 짝이라 믿고 있겠죠.... 허허...

저도 이 책 읽을 때 힘들었어요. 화자가 너무 제정신 아니어서.... ㅠㅠ 정신차려라!!! 하면서요

다락방 2019-08-13 07:58   좋아요 0 | URL
화자가 무너져내리는 게 보이니까 미치겠더라고요. 게다가 아이도 아프고 강아지도 아프고 문은 안열리고 ㅠㅠ 아 저 너무 스트레스. 집어던질까 하다가 그래도 바닥 치고 올라와서 일상으로 돌아오는 걸 보고 싶은 마음에...
화자가 자꾸만 새애인하고 함께 있는 남편의 모습을 그릴 때마다 저도 같이 그리느라고 대환장했답니다 ㅠㅠ

비연 2019-08-12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안 읽고 좋아요 만.. 책 다 읽으면 차분히 읽기로~

다락방 2019-08-13 07:58   좋아요 0 | URL
비연님 이 책 읽기 엄청 힘드실거에요. 포기의 순간이 수시로 찾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