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출근길이었다. 삼성역에서야 비로소 공간의 여유가 생긴다. 나는 핸드백에서 주섬주섬 책을 꺼내어 조금 더 여유로운 공간을 찾아 선다. 책날개를 꽂아둔 곳을 펼쳐 책을 읽으려는데 내가 선 자리 바로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하얀 와이셔츠가 유독 눈에 띈다. 그리고 그의 손도. 정확히 말하자면 책장을 넘기려고 잡고 있는 손. 그는 책장을 넘기기 위해 책장의 윗부분을 붙잡고 있었다. 그 손이 눈이 부셔 눈길이 머물렀다. 앉아있는 다리 위로 가방을 올려두고, 그 가방위로 책이 올려져 있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은 무얼까?
책과 손을 본 뒤에 그의 얼굴을 본다. 그는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침착한 얼굴이다. 이 지하철, 이 코스로 출퇴근한게 몇년인데 저 남자를 왜 처음보는걸까? 출근시간이니 저 남자는 이제야 갓 입사한 사람인걸까? 아니면 외근인걸까? 출장?
선릉역에 도착하고 출입문이 열리자 그는 고개를 들어 두리번 거린다. 아마 내릴때가 다 되었나 보다. 그는 읽던 책을 닫는다. 조지 오웰의 『1984』다. 가방을 열고 책을 넣는다. 어어, 내리려나 봐, 역삼에서 내리려는 건가봐.
짧은시간동안 나는 결심한다. 그래 어차피 쪽팔림은 순간이다. 한번 해보자. 나는 급한 마음에 지갑을 연다. 지갑에 명함 몇 개쯤은 넣어다니니까. 아, 명함이 없다. 그러자 어제 패밀리 레스토랑에 식사권 당첨이벤트에 마지막 명함을 넣었던 것이 생각난다. 아, 나란 애는 도대체 왜 이모양이지? 어째 명함은 죄다 패밀리레스토랑에 뿌리는거야?
이제 정말 마음이 급하다, 문이 열릴때가 다가온다. 나는 핸드백 안에 손을 넣어 펜을 찾는다. 핸드백 안은 정말이지 지저분하다. 아, 평소에 정리를 잘 해둘걸. 가까스로 펜을 찾아 들고 있던 책에 헐레벌떡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벌써 출입문 앞에 가 있다. 나는 얼른 그의 옆자리로 가서 아주 조그맣게 "저기요~" 한다. 그를 포함해 몇명이 나를 쳐다본다. 부끄럽다. 이왕 팔린 쪽이다. 나는 그에게 내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내가 들고 있던 책을 내민다. 김이경의 『순례자의 책』. 열차의 속도가 느려진다. 이제 정차한다.
"이거 읽어보시라구요. 괜찮을 거에요."
그는 처음에 무슨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본다. 출입문이 열린다. 그는 열린 문을 보고 다시 나를 보더니 책을 받아 들고 내린다.
아, 얼굴이 빨개진다. 심하게 부끄럽다. 모두가 나를 쳐다본다. 왜 내가 한정거장 더 가야 된단 말이냐, 대체 왜. 왜 그가 나보다 한정거장 전에 내리는 것이냐.
강남역에서 내린다. 아직도 부끄러운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그리고 퇴근무렵까지 내 책을 가져간 남자, 아니지,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책을 준 그 남자는 내게 연락하지 않는다. 미친년이라고 생각했을까? 완전 또라이라고 생각했을까?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에게선 연락이 없다. 아, 연락이 있을거라 생각한 내가 바보지. 게다가 지하철 에서도 그를 만나지 못한다. 어쩌면 그는 이 코스로 출근하는게 아닐지도 몰라. 아, 아직 다 안 읽은 책인데..뒤에 조금 남았는데..괜한짓을 했나.
잊자, 잊자, 잊어버리자.
또다시 월요일 출근길이다. 역시나 사람이 바글바글 거리는 지하철 안. 가랑비까지 내린 뒤라 기분도 꿉꿉하다. 그리고 종합운동장역에서 나는 그를 본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으윽. 알아보겠지? 아, 심히 쪽팔린다. 그러나 꼼짝도 할 수 없다. 삼성역쯤 되면 좀 여유가 생긴다. 그때 옆칸으로 이동하자.
삼성역이다. 사람들이 내렸다. 나는 최대한 속도를 내서 옆칸으로 이동하기 위해 움직인다. 아, 그러려면 옆칸으로 이동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밀쳐내야 한다. 번거롭다. 번거로움이냐 쪽팔림이냐 아 대체 뭐가 먼저란 말이냐. 나는 갈팡질팡 한다. 그리고 그가 있는 쪽을 돌아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두근두근. 그러나 그는 내게 다가 오지 않는다.
선릉역이다. 그래 조금만, 그래 한 4분정도만 견디면 된다. 저사람은 어차피 역삼에서 내린다. 아, 그런데 이 두려운 느낌은 뭐지? 왜 초조하지? 살짝 고개를 돌려 보니 그가 사람들을 조금씩 밀치면서,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간간이 섞어 가면서 내게로 온다. 아, 설마 나한테 오려는 건 아니자? 정말 아니지? 이제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있으면 역삼이야.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저기요."
으윽, 나한테 하는 말인가? 나는 한쪽눈만 살짝 뜨고 그를 본다. 역시 내게 하는 말이다.
"네"
그는 들고 있던 걸 내게 건네며
"잘 읽었어요."
한다.
받아들고 보니 내가 그에게 줬던 『순례자의 책』이다. 아, 이거 다 읽었다고 돌려주는거야? 순식간에 나는 지하철안에서 책 빌려준 순수또라이가 된건가? 네,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그 책을 받아든다. 아 또 심히 쪽팔린다. 분명 어딘가에 앉은 누군가는 지난주의 나도, 지금의 나도 봤겠지.
문이 열리고 그는 내게 간단한 목례를 하고 내린다. 아, 뭐 이제 쪽팔림도 없다. 그저 기운이 빠질 뿐. 강남역에 내려 시간을 확인해보니 07:45. 천천히 걸어도 사무실에 도착하기엔 여유로운 시간이다. 가는길에 스타벅스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한다. 오른쪽에서 음료 준비해드릴게요, 하는 점원의 말을 듣고 오른쪽으로 이동해서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책장을 연다. 거기엔 파랑색으로 이름과 전화번호가....어? 파랑색? 나는 검정색으로 썼는데? 그랬다. 거기에 써진 이름과 전화번호는 내것이 아니었다. 내가 쓴게 아니었다. 아 맙소사. 그는 내가 준 책을 다시 준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번호를 쓴 책을 내게 새로 준 것이다. 게다가 밑에는 메모도 있었다.
「다음에 책 주실때는 전화하세요.」
"손님.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나는 아직도 축축한 우산을 마구 가방에 쑤셔 넣은 후, 한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쥐고, 한 손에는 『순례자의 책』을 든 채, 나는듯이 걷는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