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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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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리가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의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뿐이에요. 그래요, 물에 다시 뛰어들지 않았다면 애나는 지금 살아 있겠죠. 하지만 애나가 원하는데 물에 들어가는 걸 내가 막으려 하거나 그랬다면 우리는 30년 이상 함께 하지 못했을 거예요. 삶은 위험해요. 매리언, 언제라도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죠.(중략)솔직히 나 자신이 불쌍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고, 왜 하필이면 나냐, 하고 하늘을 향해 신음을 토하지도 않아요. 왜 내가 아니어야 하나요? 사람들은 죽어요. 젊어서 죽고, 늙어서 죽고 쉰여덟에 죽죠. 다만 나는 애나가 그리워요. 그게 전부에요. 애나는 내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고, 이제 나는 애나 없이 계속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해요." p.41

🔖하지만 그녀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내세의 삶, 의식적 비존재라는 이 역설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존재는 그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는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중략)그녀가 확실하게 아는 것 한 가지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룩했던 깊은 연결은 죽어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일시적 림보 같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마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한다.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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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는 죽었다. 하지만 바움가트너의 감각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는 부재를 인정하면서도, 아내와 공유했던 시간 속에 머문다. 그녀가 남긴 기록을 더듬고, 흘러간 세월을 복기하며, 기억의 층위를 하나하나 되짚는다. 그 손끝에서, 애나는 끊임없이 소환된다.
이때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흐려지고, 폴 오스터는 '눈부신 역설'의 공간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상실 이후에도 관계는 계속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의식적 비존재’라는 사유로 드러나며,
주인공의 애도는 기억을 복원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애나가 남긴 기록으로 그녀의 소멸은 유예됐다. 감각의 수면 위로 떠오른 아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바움가트너는 살아간다.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지워가며 홀로 서 있는 바움가트너.
그 쓸쓸한 여정에 스며든 한 줄기 빛이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 닿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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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나는 북유럽 동화 - 노르웨이부터 아이슬란드까지 신비롭고 환상적인 북유럽 동화 32편 드디어 시리즈 6
페테르 크리스텐 아스비에른센 지음, 카이 닐센 그림,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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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부모님은 항상 바쁘셨다. 주말을 제외하면 얼굴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어쩌다 함께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지만, 늘상 언성을 높이며 다투시는 부모님 때문에 동생과 나는 자리를 피하는 순간이 많았다. 잔뜩 핏대를 올려 아빠를 비난하는 엄마와 집안이 떠나갈듯 고함을 지르던 아빠. 동생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런 동생을 애써 달래며 함께 작은 방으로 피신했다. 우리 남매의 유일한 방공호였던 공간으로.
그리고 어깨를 맞댄 채 비디오를 봤다. 어둑한 밤하늘 아래 웅크린 고양이들처럼.

거실 귀퉁이에 매달린 벽시계가 무겁게 울리고, 고막을 찌를 듯 날카롭게 울리던 소음이 간신히 잦아들어 낮은 속삭임으로 이어질 때 동생은 안도하듯 눈을 감았다.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엄마가 잠든 동생을 침대에 눕히고, 꺼질듯한 한숨을 남긴 채 부엌으로 갈 때까지 나는 멍하니 화면만을 바라봤다. 나는 온몸으로 가시나무를 끌어안은 한 여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을 지켜보던 눈망울엔, 커다란 이슬처럼 부풀어오른 슬픔이 맺혔다. 열린 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서늘한 정적 속에서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동생의 숨소리, 그 평온한 숨결을 호흡하듯 화면 속 여자는 모든 것을 비워낸 얼굴로 눈을 감는다. 침묵의 그늘이 드리워진 그녀의 얼굴은 아름답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을, 그와 공유했던 세월을 떠올리며 기도하듯 맞잡은 두 손.

지상에 홀로 남은 그녀의 삶은 한 작가의 손끝에서 영원으로 거듭났으며,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로 남았다. 슬픈 꿈에서 막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의 멍한 감각. 그 아련한 여운을 고스란히 간직한 안데르센. 나는 어릴 때부터 안데르센을 비롯한 북유럽 동화 특유의 느낌이 좋았다. 마치 전쟁을 치르듯 살벌한 눈빛으로 대치하던 부모님, 그들을 피해 은밀한 방공호로 몸을 숨겼던 어린 남매. 오프닝 곡과 대사까지 달달 외울 정도로 끊임없이 재생했던 비디오, 이야기에 몰입하는 그 순간만큼은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막연한 공포와 슬픔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유년기를 어루만지듯, 장막처럼 떠올랐던 오로라. 그 신비스런 빛깔이 나는 좋았다. 손등으로 떨어졌던 눈물처럼, 영롱한 빛깔이.

성인이 된 지금, 이제 와 다시 그 이야기를 읽을 때면 그때 느꼈던 감각들이 어릴 적보다 훨씬 선명하게 다가온다. 뚜렷한 형상조차 갖추지 못했던 슬픔이 제각각의 이름으로 말을 건네는 느낌.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를 부여받은 슬픔, 그 얼굴들을 확인하듯 나는 책장을 펼친다. 허공 속 먼지로 흩어진 그날의 소음들과 엄마의 붉은 눈시울을 떠올리며. 그리고 이젠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아빠의 목소리를.

슬픔의 마지막 이름을 이제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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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 10 (반양장) 대망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박재희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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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센코쿠 시대, 격랑의 전장을 누비던 세 명의 영걸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담은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은 중국의 <삼국지>와 쌍벽을 이루는 12권 분량의 대하 역사 소설이다.
화려한 지략과 병법, 능란한 처세로 난세를 평정했던 두 걸출한 인물,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이에야스는 항상 뒷전에 밀려 그들의 영광을 지켜보는 이인자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낙담하지 않았다. 볼모로 잡혀 온갖 수모를 겪었던 어린 시절은 '인내'라는 굳건한 토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겐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뛰어난 기량을 인정하고 기꺼이 고개 숙여 순종했지만, 그 이면에는 예측불허의 속내가 존재했다. 폭주하듯 맹렬한 속도로 타오르는 두 영웅을 숭배하기 여념이 없었던 사람들은 이에야스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개중엔 조롱하는 무리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오랜 세월, 침묵과 인내로 수양을 거듭했던 그는 깨닫는다. 지금은 묵묵히 내실을 쌓으며 인종(忍從)이란 거대한 탑을 쌓아야 하는 때라는 걸. 조급한 야망보다 인내에 근간한 깊은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매 순간 인내와 끈기로 쌓아 올렸던 탑은 결국 하늘의 뜻과 맞닿았고, 마침내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의 창시자가 됐다. 260년에 이르는 평화의 시대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거대한 과업을 성취한 인물이였기에 젊은 시절 내 독서는 자연 이에야스의 인생 철학에 포커스가 맞춰졌고, 주변 인물들의 서사는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막부의 개창자라는 위업을 이룬 이에야스의 묵직한 여정에 사로잡혀 역사의 뒷켠으로 쓸쓸히 사라진 인물에게 시선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대망>을 완독한 사람들은 누구나 꿈꿀 것이다. 연이은 좌절과 굴욕 속에서도 특유의 집념으로 다시 일어서는 이에야스를. 그러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불굴의 투지로 승부하는 이에야스의 삶은 어디까지나 이상향일 뿐, 우리의 삶은 대부분 상실과 회한으로 채워진다.

그런 삶의 이치를 깨달을 무렵 나는 중년이 됐고, 자연스레 내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불세출의 영웅 이에야스가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로. 나름 특출한 자질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한계에 갇혀버린 히데요리. 센코쿠 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온갖 호사를 누렸던 그의 삶은 여느 부잣집 도련님과 다를 바 없었다. 모든 것이 풍요롭게 갖춰진 오사카성, 그가 손에 넣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앞날은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모진 수난을 겪으며 정치적 감각을 익혔던 이에야스는 직감한다.
온실 속 화초로 자라난 히데요리는 결코 난세를 평정할 기량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특유의 분방한 기질로 내전을 휘저었던 생모 요도기미. 그녀는 히데요리의 보호막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지나친 자기연민과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아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녀. 히데요리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어려서부터 여인들에 둘러싸여 안방에서만 자란 히데요리에게, 난세에서 자라온 난폭한 영주들을 제압할 힘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 p.143

히데요리의 삶을 따라가며 나는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았다.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나 서서히 무너져가는 그에게서 더 깊은 공명을 느꼈다.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도, 강철같은 의지나 묵직한 내공도 갖추지 못한 채 무사안일로 일관했던 내 삶은 놀랍도록 그와 닮아 있었다. 역사라는 모체를 공유하며 서로를 마주 보는 쌍둥이처럼.

세상의 거친 민낯을 몰랐기에 어른이 될 수 없던 히데요리.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표면적인 예의만 갖춘 채 서서히 거리를 두던 가신들 틈에서. 화려한 오사카성에서 그는 조금씩 마모됐으며, 결국 짧은 생을 마치게 된다. 섬뜩하게 벼려진 역사의 칼끝에 흥건한 핏물만을 남긴 채.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삶의 벼랑에 내몰렸을 때,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이 왔을 때, 내가 내린 결정이 누군가의 상처를 덜어주는 쪽이기를, 그리고 잊혀진 이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나이기를 바란다.
히데요리의 짧은 생이 나에게 남긴 울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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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의 비오 신부
존 A. 슈그 엮음, 송열섭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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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는 내게 항상 불편한 성사였다. 정확히는, 고해소 특유의 숨 막히는 공기가 버거웠다. 세상과 차단된 밀실에 갇혀, 그간 저지른 죄악과 오류를 낱낱이 고백해야 하는 행위 자체가 나를 짓눌렀다. 가톨릭 신자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라는 걸 알면서도, 선뜻 고해소를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례 받은지 이십 년이나 흘렀음에도 좀체 지워지지 않은 기억 때문일까. 반 평도 되지 않은 좁은 공간에서 두 손을 맞잡은 채, 더듬더듬 말문을 여는 내게 신부님들은 항상 자상하셨고, 보속도 대부분 가벼웠다.
그러나 때론 버럭 역정을 내며 혼을 내는 분들도 더러 계셨다. 눈물이 쏙 나올만큼.
살면서 항상 따뜻한 위로만 받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땐 그저 서럽고,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참담했다. 반복되는 죄의 굴레에 갇혀 관성대로 살아가는 나 자신이.
참회와 성찰의 본질을 알지 못했던 어린 날의 나에게, 그 독설은 오래도록 사무치는 상처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그날을 떠올리면 나도 모를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그날 내가 흘렸던 눈물은, 돌이켜보면 은총의 또 다른 빛이었으니까.

상처로 남은 고해성사

존 A.슈그의 <오상의 비오 신부>는 생전의 비오 신부님을 만났던 성직자와 신자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그분이 남기신 놀라운 행적들을 기록한 책이다. 동시에 두 장소에 나타나는 빌로케이션을 비롯해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치유의 기적들,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심오한 영적 깊이. 사후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큼 대단한 업적을 쌓았지만, 비오 신부님은 마냥 친절한 사제는 아니었다. 다소 냉정하고 단호한 태도는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고해 성사 중 그분의 무뚝뚝한 말투에 상처를 받았다는 수녀님의 증언을 읽어보면, 신부님은 틀에 박힌 친절한 위로보다는 철저한 회개와 정직한 고백을 원하셨던 듯하다.

상처로 남았던 고해성사였지만, 시간이 흘러 신부님의 본심을 헤아린 수녀님은 다시 그분께 돌아와 또 한 번 고해를 청하셨다. 구체적인 해결책 대신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는 신부님의 조언을 가슴에 새기면서.

하느님께서는 비오 신부님을 내 인생에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계속 나를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p.288

비오 신부님을 흠모해 '비아'라는 수도명을 택했던 수녀님. 그녀는 깨달았다. 거룩함이란 항상 부드러움이나 고요함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때론 서늘하고 예리한 영성으로 영혼을 일깨우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단초라는 걸. 오래전 고해소에서 내가 흘렸던 눈물처럼.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티모2, 4장 7절-

인간적인 온기를 초월해, 하느님의 사명을 완수한 비오 신부님. 그는 죄 앞에 무너지는 인간의 나약함을 알았기에, 그들을 무작정 감싸지 않으셨다. 때론 비수 같은 말로 영혼 깊은 곳을 자극하며, 진정한 회심을 촉구하셨던 신부님. 오상을 지닌 육체로 매일 그리스도의 수난을 되새겼고, 고해소라는 좁은 공간에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셨던 그분의 삶은 치열한 전투와도 같았다. 오직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는 맹렬히 싸워냈다. 불처럼 타오르되, 얼음처럼 정제된 영성. 그 거룩한 온도의 신비를 더듬으며, 조심스레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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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
로널드 롤하이저 지음, 이선정 옮김, 허찬욱 감수 / 생활성서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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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아빠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일반 병동에서 한 달이란 시간을 보낸 아빠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는데 독한 진통제에 의존하던 아빠는 선망 증세까지 보이며 혼수상태에 빠져들던 시간이 많아졌다. 더는 해줄 것이 없으니 차라리 고통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라던 의사의 말에 억장이 무너졌지만 현실을 수용하는 것밖엔 다른 도리는 없었다. 넋을 잃고 배회하듯 병동을 떠돌다가 점점 의식이 꺼져가는 아빠를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력함에 참담해졌다. 아빠의 머리맡에 놓여있던 '자비의 희년' 기도문을 만지작거리다 체념하듯 짧은 한숨을 뱉으며 나는 속삭였다. '하느님, 어디에 계시나요? 왜 이런 순간에 침묵하고 계신 건가요?'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아빠가 돌아가신 후 오랜 냉담을 깨고 다시 성당에 나가긴 했지만 내 마음 한편에 세워진 불신의 벽은 쉽사리 허물어질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칠흑 같은 장막으로 겹겹이 쌓인 세상 속에 나 혼자 고립된 느낌. 가까운 친척들과 사람들에게 상처받으며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웠던 시간들, 영혼의 어두운 밤과 같은 세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시기와도 같은 '영혼의 어두운 밤'. 로널드 롤하이저의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은 신앙의 어두운 밤과 인간의 한계를 다루며 즉각적인 응답을 바라는 유아기적 신앙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도 신뢰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를 강조한다. 성 테레사, 성 요한 등이 경험한 신앙의 침묵과 갈망, 그들이 간직한 영적인 신비와 깊이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고통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하느님 사랑

하느님이 우리에게 계시지 않는 듯 암흑 속 고통을 느끼게 하시는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이 아니시고, 참신앙도 우리가 상상하는 신앙 너머에 있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중략) 신앙도 가슴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감정이나 마음속의 확신이 아니라, 사고와 감정을 넘어 영혼에 찍힌 낙인처럼 존재한다는 걸, 하느님은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p.56

십자가 수난을 앞둔 밤, 고뇌에 싸여 간절히 기도했던 예수님 또한 영혼의 어두운 밤을 피할 수 없었다. 그토록 예수님을 추종하며 따랐던 군중들은 비난과 야유를 서슴지 않았으며 제자들은 스승을 부인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과 거부 속에서 홀로 묵묵히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찬란한 빛을 발한다. 가슴에 새겨진 하느님의 침묵이 사랑으로 드러나고 모든 굴욕의 순간마다 흘렸던 핏방울과 눈물들이 숨겨진 은총으로 가슴을 두드릴 때 고통은 이전과 확연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한때 내가 바쳤던 기도와 전혀 다른 응답을 주시는 하느님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결핍 앞에서 하느님의 위로와 사랑을 갈구했던 시절, 그럴수록 상처는 깊어져갔다. 바닥조차 가늠되지 않는 물 속에서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하느님을 불렀던 나의 외침은 '구원'을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즉각적인 응답을 달라 떼쓰는 '구조' 요청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하느님은 '구조' 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안에 숨겨진 핵심적인 계시입니다. p.95

신앙을 가지면 항상 위로받고 보호받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현실에서는 하느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가 많다. 십자가는 삶의 고통을 면제해 주는 수단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보여주는 거룩한 표징이다.

모든 것에는 균열이 있어, 그곳으로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p.194

구원이란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십자가를 끌어안으며 고통을 감내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무수한 오류와 죄악 속에서 한 줄기 빛으로 스며드는 하느님, 세상을 정화하는 그분의 침묵을 사랑으로 깨닫기 위해 나는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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