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여름의 빌라 (biche7923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eyre79</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서재는 예측불가능한 창조물이 탄생되는 마녀의 방이다.</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04 Jul 2026 20:02:16 +0900</lastBuildDate><image><title>biche7923</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31404108131367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eyre79</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biche7923</description></image><item><author>biche7923</author><category>그 여자의 삶</category><title>골짜기의 영성, 사랑의 약속으로 남다 - [신애론 - 베르나르도가 말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의무']</title><link>https://blog.aladin.co.kr/eyre79/17329538</link><pubDate>Thu, 11 Jun 2026 21: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yre79/1732953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119880&TPaperId=173295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54/68/coveroff/893211988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119880&TPaperId=1732953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신애론 - 베르나르도가 말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의무'</a><br/>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지음, 암브로지오 M. 피아조니 엮음, 방종우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05월<br/></td></tr></table><br/>1115년, 한 수도자가 동료들을 이끌고 인적 드문 숲속으로 들어간다. 세속과 등을 진 그들이 발길을 멈춘 곳은 도적들의 은신처로 전해지던 음습한 골짜기, 고립된 황무지에 가까운 땅이었다. 바로 그 땅에 수도자는 클레르보(Clairvaux), 빛의 계곡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br/><br/>황량한 골짜기에 뿌리를 내린 베르나르도는 동료들과 함께 기도와 노동의 삶을 시작한다. 척박한 땅에 뿌린 씨앗은 사랑과 겸손,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을 향한 갈망에 대한 깊은 성찰로 자라났고, &lt;신애론&gt;은 그 사유의 한 정점으로 남게 된다.<br/><br/>총 2부로 구성된 &lt;신애론&gt;은 베르나르도의 원전과 암브로지오 M .피아조니의 해제를 함께 담고 있다. 책의 이해를 돕는 해제를 먼저 읽어도 무방하겠지만, 나는 원전부터 펼쳤다. 피아조니의 해석을 경유해 베르나르도를 만나기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언어와 먼저 마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대신 경험해 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본질을 말하는 책 또한 나만의 독법으로 깨우쳐야 하지 않겠는가.<br/><br/>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 사랑<br/><br/>베르나르도는 사랑을 네 단계로 나눈다. 첫 단계에서 인간은 자기를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철저히 자기애에 갇힌 사랑이지만, 베르나르도는 이를 비난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래 연약하고 자기중심적인 존재이기에, 그는 이 낮은 자리를 사랑의 출발점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가장 깊은 사랑은 골짜기에서 시작되며 존재 안에서 끝내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야말로 자기에게 갇힌 사랑을 확장하는 첫 번째 문이라고.<br/><br/>두 번째 단계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다만 여전히 자아라는 틀에 갇힌 사랑이다. 신을 찾지만 오직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단계다. 그러나 베르나르도는 이 불순함마저 기꺼이 끌어안는다. 사랑은 본래 이렇게, 제 필요에 떠밀려 시작되는 법이니까.<br/><br/>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게중심이 하느님에게로 옮겨간다. 인간이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들어서는 순간, 자아라는 굳건한 성채가 무너지고 육체의 모든 감각은 오직 한분만을 향하게 된다. 줄곧 안으로만 파고들던 사랑이 마침내 유일한 진리를 마주한 것이다. 인적 드문 골짜기에서 하느님을 열망했던 베르나르도처럼.<br/><br/>네 번째 단계는 가장 낯설고 심오하다. 인간은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언뜻 첫 단계와 비슷한 지점같지만, 그 사랑은 더 이상 미성숙한 자기애에 머물지 않는다. 끝없이 안으로만 침잠하던 사랑이, 이제는 오직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베르나르도는 이 망아의 정점을 탈혼(excessus)이라 부른다.<br/><br/>그러나 베르나르도는 단언한다. 이 마지막 여정은 현세에선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며,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합일은 찰나에 불과할 뿐이라고.<br/> <br/>탈혼은 육신을 저버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베르나르도가 기다리는 것은 육신의 부활이다. 모든 연약함을 벗어난 영화로운 육신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재현하는 것이다.<br/>그러므로 네 번째 사랑은 완성이 아니라 그분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과정이다.<br/><br/>책장을 덮고 나서야 클레르보라는 이름이 다시 보였다. 베르나르도가 발견한 골짜기는 어둠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 척박한 땅에 뿌리내린 기도와 노동 속에서 베르나르도는 하느님과 마주했다. 그가 말한 사랑의 네 단계도 다르지 않다. 사랑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보상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의 결핍에서 비롯되어 존재를 관통해 그분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br/><br/>내 안에도 어둡고 습한, 오래된 골짜기가 있다. 신앙은 그 골짜기를 메워주진 않았다. 다만 그 어둠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내 골짜기가 그분 안에서 빛날 수 있도록.<br/><br/>채워지지 않는 자리, 그 결핍의 공간이야말로 빛이 스며드는 문이라는 걸, 베르나르도는 아홉 세기 전 클레르보의 어둠 속에서 그 진실을 발견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54/68/cover150/893211988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546895</link></image></item><item><author>biche7923</author><category>그 여자의 삶</category><title>메워지지 않는 구멍 앞에서 - [죽음의 신비]</title><link>https://blog.aladin.co.kr/eyre79/17209014</link><pubDate>Fri, 10 Apr 2026 20: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yre79/1720901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119848&TPaperId=1720901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43/36/coveroff/893211984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119848&TPaperId=1720901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죽음의 신비</a><br/>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지음, 조규홍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6년 02월<br/></td></tr></table><br/>2015년 12월, 아빠가 말기 암 선고를 받았다. 나는 거동이 불편한 아빠를 부축하고 장루를 갈아드리며 그렇게 넉 달간 아빠의 곁을 지켰다. 거듭된 항암으로 체력이 바닥난 아빠는 가끔 중심을 잃고 비틀대곤 하셨는데, 한 번은 앞으로 크게 넘어져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그때 처음 느꼈다. 아빠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허공에 붕 떠있던 발끝이 비로소 땅 위에 내려앉고, 구체적으로 죽음을 감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책을 펼쳤다. 제목부터 나를 끌어당겼던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의 &lt;죽음의 신비&gt;.<br/><br/>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아빠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 미사를 앞두고 봤던 고해 성사에서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아버님께선 사랑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이 또한 은총이니까요." 신부님뿐만 아니라 성당 지인들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아빠의 죽음은 은총이라고. 장애가 있는 몸으로 태어나 평생 모진 수모와 천대를 겪다가 죽는 순간까지 고통받았던 분께 은총이라니. 결국 은총이란 신의 무심함을 온몸으로 견디는 일인가?<br/>신부님과 자매님들의 위로가 거짓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은총'이란 단어로 아빠의 고통 자체가 축소되는 게 싫었다.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내게 은총이란 단어는 버겁기만 했다. 그 구멍은 쉽사리 메워지지 않았다. 슈파이어는 죽음이 산 자에게 구멍을 낸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구멍은 영원으로 통하는 입구로 존재할 수 있다고. 나는 그 구멍을 아빠의 장례 미사에서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으로 통하는 입구인지, 아니면 그저 공백으로 남겨진 자리인지, 나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한다.<br/><br/>어떤 자매님이 그랬다. "하느님께서 아버지를 데려가시고 자매님을 부르셨네요." 슈파이어는 말한다. 하느님께선 때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이용해, 남겨진 사람들에게 영원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주신다고.<br/>저자의 논지대로라면, 아빠의 고통에는 계획이 있었다는 뜻이다. 나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 그 생각은 위로가 되는 동시에 버거운 진실이었다. 결국 아빠의 죽음은 나를 깨우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셨을까. 그렇다면 아빠의 고통은 나를 위한 것이었나. 그 생각이 나를 십자가로 이끌었다. <br/><br/>저자에 따르면, 케노시스란 자아를 비워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행위이며 성자께선 그것을 사랑으로 완성하셨다. 두려움이나 체념이 아닌 완전한 사랑. 성자의 십자가는 사랑의 최종적 수긍이었다. 강요된 죽음이 아니라 선택된 죽음. 그렇다면 아빠의 고통도 소멸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였을까. <br/><br/>본가에는 아직도 아빠의 물건들이 남겨져 있다. 주인 없는 빈 방에 덩그러니 놓인 물건들을 마주하는 게 지금도 여전히 편치가 않다. 밑줄이 그어진 책들과 마지막을 예감하며 쓴 메모들을 뒤적이고 있으면 여전히 울게 된다. 벌써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내 가슴속 구멍은 그대로다. 슈파이어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br/><br/>나는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믿으며,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희망하고, 결국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겠지만, 성자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p.231)<br/><br/>폰 슈파이어는 죽음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 그 말의 온전한 무게를 알지 못한다. 다만 이것은 안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넘어지면서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아빠의 빈자리를 안고도 묵묵히 걸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43/36/cover150/893211984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433606</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