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이 세미나 - 인생을 항해하는 데는 나침반이 필요하다
대니얼 멘델슨 지음, 민국홍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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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오늘이 바로 내일이에요. 

- 영화 <사랑의 블랙홀> 中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기상캐스터 필 코너스는 매사 냉소적이다. 그러다 성촉절 취재 차 간 펜실베니아의 펑추토니에서 매일 같은 날을 반복하게 된다. 타임루프의 저주에 빠진 것이다. 즐거운 일탈도 잠시, 똑같은 하루하루가 지겨워 자살도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심술궂던 필은 차츰 주변에 눈을 돌려 노숙자 노인을 도와주는 등 이웃의 대소사를 살피고 자기개발에도 열중한다. 필에게 매일 반복되는 하루는 이제 늘 같은 오늘이 아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기 보다는 좀 더 나은 자신이 되려는, 어느 지점에서든  어느 시점에서든 출발할 수 있는 여정이 된 것이다. 반복되는 시공을 맴도는 여행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필은 이 모든 것을 버텨내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풍요로운 인간이 되어 마침내 저주에서 벗어난다.



원을 돈다는 것

<오디세이 세미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오디세이> 텍스트를 나침반 삼아 함께 한 여정을 담고 있다. 저자인 대니얼 멘델슨은 대학에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한다. 그리고 저자의 아버지 제이 멘델슨이 이 수업을 청강하면서 부자의 여정은 시작한다. <오디세이> ‘세미나’라고 해서 서사시의 구조나 서구 문명화에 대한 비유와 상징이 넘쳐날 거란 생각은 마시라. 이 책은 미국 어느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이자 우리네 삶의 얘기다. 50년 전 지루한 선회를 거쳐 집으로 돌아온 여행 이후로 가장 멀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한 여행이자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아들의 이야기,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역자는 후기에서 “두 번째 서른이 돼서야 <오디세이>가 인생지침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소회를 밝힌다.


50년 전 꼬마 대니얼에게 아버지는 여행에 관련하여 수수께끼를 낸다. "아무데도 가지 않으면서 어떻게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을까?” 정답은 “원을 돈다”이다. <오디세이>의 첫 수식어 ‘폴리트로포스’  polytropos는 회전을 많이 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오디세우스는 충분히 방랑한 끝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오디세이 세미나> 역시 그 원형 原形이 그렇듯 수학자였던 아버지와 문헌학자인 아들의 이야기가 각자의 궤적을 그리다 어느 지점 - 혹은 시점 - 에서 함께 선회하는 원형 圓形 구조를 따른다. 저자는 학생들에게 <오디세이>를 세밀하게 읽으면서 큰 그림은 무엇이고 조그만 것들이 큰 그림에 어떻게 맞아 떨어지는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고 가르치는 데 이런 문헌학적 독법과 <오디세이>의 궤적을 따르는 유람선 여행을 통해 멘델슨 부자의 교감은 차곡차곡 쌓인다.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닌 것

<오디세이>는 뮤즈가 원하는 임의의 시점, 혹은 지점에서 시작한다. ‘아무도 아닌’ 한 남자가 트로이 전쟁 후 귀국길에 오른 지도 7년이 지났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 아내를 만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이 남자는 트로이 목마로 그리스군을 승리로 이끈 이타카의 군주 오디세우스다. 이처럼 오디세우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중요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이름과 유사한 발음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책략의 대가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와의 싸움에서 이를 영리하게 써먹는다. 네 눈을 찌른 게 누구냐고 묻는 동료들에게 폴리페모스는 ’아무도 아니야’라고 절규한다. 하지만 도망가면서 자만심으로 신상을 노출하는 통에 ‘아무도 받지 않을’ 저주를 사서 받는다. 그리고 고향으로 가는 데 10년이 걸린다. 


폴리페모스의 동료들이 너를 죽이려고 하는 게 ‘누구냐’고 묻는 것 역시 오디세우스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언어유희라고 저자는 짚어준다. 그리스어로 ‘누구냐’(me tis)는 ‘술책’(metis)과 발음이 같다는 것이다. 하나의 상황에서 참과 거짓이 공존하는 게 가능할까? 세미나를 마치고 <오디세이>의 행적을 좇는 유람선 여행에서 저자는 아버지 제이 멘델슨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놀란다. 아들이 보아온 심술 맞고 완고한 노인은 유람선에서 호방하고 트인 노신사가 되어 있지 않은가. 아버지가 1930~40년대 자신감과 영악함, 건방진 행동의 시대를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랑스러운 노인네라는 것을 깨닫고 저자는 정체성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원의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는 파노라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루에 한 것

여행을 뜻하는 영어단어 중 ‘journey’는 본디 ‘하루에 한 것’이라는 프랑스 고어 ‘jornee’에서, 궁극적으로는 라틴어 ‘diudrum’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먼 옛날 사람들은 목적지에 도달할 때 도로상의 ‘거리’보다 하루의 이동을 표현하는 것이 편했고, 자연스럽게 하루에 이동한 것이 여정 전체를 나타내는 말로 변했다고 한다.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 ‘travel’은 감정의 영역으로, 여행의 고됨을 품고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오디세우스의 이름 Odysseus에 들어 있는 ‘odyne’은 고통이라는 뜻으로 ‘odyssey’는 오랜 방랑과 모험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방대한 여행을 떠나는 이에게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타임루프의 저주에 빠진 필. <사랑의 블랙홀>의 원제 ‘그라운드호그 데이’ groundhog day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좋지 않은 상황’을 나타내는 관용어가 된 지 오래다. 필은 리타에게 이런저런 수작을 부리지만 호감을 사는 데 매번 실패한다. 하루하루 반복해서 만나는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진정으로 리타를 마주하면서 그녀가 좋아하는 시를 읊고 문학을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자기 계발에 몰두하게 된다. 오늘은 무한히 반복되지 않는가. 어느덧 필은 지성과 예술로 충만한 삶을 살고 사랑도 이루게 된다.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필이 타임루프에서 보낸 시간이 족히 10년 이상은 걸렸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은 이타카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스 경제 위기로 전국적인 파업이 일어나는 통에 멘델슨 부자는 여행의 정점이자 최종 목적지인 이타카에 갈 수 없게 된다. 대신 저자가 번역하여 출간한 그리스 시인 콘스탄틴 카바피스의 시 <이타카>를 주제로 조그마한 강연을 연다. 카바피스의 <이타카>는 “도착하지 않는 것의 덕목”을 노래한 시로 예상치 못한 여정을 대신하는 데 있어 탁월한 선택이었다.


항상 당신 마음에 이타카를 유념하라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너의 최종 목적이라네

그러나 어쨌든 여행을 서두르지는 말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오 : 

이타카가 당신을 부유하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고

도중에 획득한 것으로 풍요로운 노인이 되어

그 섬에 닻을 내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오



저자의 말대로 이젠 대중문화 속 상투적 문구가 돼버렸지만 여행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인생의 의미는 인생을 거치면서 일어나는 변화와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에 달렸다고 저자는 재차 강조한다. 마침내 타임루프의 저주에서 벗어난 필은 펑추토니에 닻을 내린다. 1초도 있기 싫다며 치를 떨던 곳에서 말이다. 멘델슨 부자는 이타카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나침반은 제 역할을 다했다.


이타카가 형편없다는 것을 발견하더라도 

그녀가 당신을 속인 것이 아니오

당신이 언제인가 많은 경험을 쌓고 현명해질 때

그때서야 당신은 이런 이타카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멘델슨 부자의 여정을 좇다 어느새 그 원형 原形을 다시 꺼내 본다. 이 그리스 고전은 이번엔 어느 방향으로 가는 나침반이 되어줄까?



#원탁의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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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이 사상은 마르크스에 의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에는 사랑으로써만, 신뢰에는 신뢰로써만 교환하게 될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예술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당신은 실제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발전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당신의 모든 관계가 당신의 의지의 대상에 대응하는, 당신의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생명의 분명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일깨우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곧  당신의 사랑이 사랑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생명의 표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을 사랑받는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능한 사랑이고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랑에서만 주는 것이 받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선생은 학생에게서 배우고, 배우는 관객들로부터 자극을 받고, 정신분석가는 환자에 의해 -그들이 서로 대상으로 다루지 않고 서로 성실하고 생산적으로 관계한다면- 치유된다.


-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2006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무능력은 사랑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은 특별히 마르크스가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인간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을 사랑으로써만, 신뢰를 신뢰로써만 바꾸게 될 것이다. 만약 예술을 즐기려 한다면 예술적으로 훈련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자 한다면, 타인에 대해 진실로 자극을 주고 발전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는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진실되고 개인적인 삶의 명확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삶의 표현'을 통해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능력이요 불행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랑에서만 주는 것이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배울 수 있고, 배우는 관객에 의해 자극받으며, 정신병 전문의는 그의 환자에 의해 치료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이 서로를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서로가 진실하고 생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경우에 가능하다.      


- 정성호 옮김, 종합출판범우,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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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쪽, 그자비에에두아르 르죈 vs 그 자비에에두아르
동일인물인가?


313쪽, 드니 풀로(1980)
숫자는 최초 인용 연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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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 자본이 만든 메트로폴리스 1830-1871 현대의 고전 13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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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온갖 유령 — 국가, 사적 소유권, 보나파르트주의, 마음의 지배 등 — 이 횡횡하던 때. 들라크루아와 마네, 쿠르베의 그림, 발자크와  플로베르, 보들레르의 소설, 청년 마르크스와 <자본>의 성숙한 마르크스 사이. 여기에 ‘1848년, 파리’가 존재한다. 1848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데이비드 하비는 묻는다. 


20세기 문화와 예술, 자본이 한데 어울려 끓어오르던 곳이 뉴욕이라면 19세기의 ‘용광로’(melting pot)는 단연코 파리였다. 19세기 파리는 모더니티 이전의 모든 것을 혁파하고 ‘근대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데이비드 하비는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에서 근대와 전근대의 ‘단절'은 근대성이라는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허구적 신화를 해체하기 위해  하비는 자신의 사상적 기반과 역사지리학 관점 위에 도미에의 풍자화, 발자크와 플로베르, 보들레르의 문학 작품을 적절하게 엮는다. 


에투알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정렬된 파리는 제2제정의 권위를 위한 정치적인 설계였다. 그리고 이 설계의 중심엔 오스만이 있었다. 직선의 기하학과 기계공학적 묘기는 위고식으로 표현하면 볼테르와 디드로의 꿈을 계산한 것이었다(455). 자본의 순환을 위해 직선으로 구획된 도시에서 업무의 분할과 이에 따른 위계는 특정 경험 영역을 구성하지 못하게 한다. 수공업 장인은 산업자본가의 공장 시스템에 밀려나게 되고 구체적 노동은 추상적 노동이 된다. 1848년 <공산당 선언>의 내용처럼 자본은 독립적이고 개성을 갖는 반면 살아 있는 사람은 그 순환에 종속되고 개성은 말살된다. 제2제정기의 산업 혁신자 풀로의 주요 목적은 정확성과 생산 속도의 증가, 그리고 “노동자들의 자유의지의 감축”이었다. 하지만 일꾼들이 게으르고 다루기 힘들다고 험담해대던 그조차 

파리는 사람들이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열심히 일하는 도시다. (…) 지방에서 파리로 온 노동자들이 모두 버텨내지는 못한다. 여기서 생계를 꾸리려면 힘든 일을 너무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 파리에서는 도급제로 유지되는 직업이 있는데, 그 일을 20년간 하다보면 노동자는 불구가 되고 탈진해버린다. 다행히 그때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면 말이다.

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288). 공산주의 유령은 아직도 배회중이다.




1848

1847년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선거 개혁 요구는 1848년 혁명에서 주요 쟁점 중 하나가 되었다. 혁명의 주도자는 노동자, 학생과 더불어 부르주아였지만 자본으로 도시를 장악한 부르주아지는 보통선거를 통해 정치판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중을 위한 사회 정책들이 하나 둘 붕괴하고 노동자는 자본주의 화폐 권력에 굴복해갔다. 예술가들 역시 아카데미의 권위와 시장 논리에 휘둘렸다. 이러한 경험적 일치는 쿠르베나 보들레르 같은 보헤미안을 혁명에서 노동자의 편에 서게 했다. 하지만 6월의 봉기는 정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노동자는 차라리 루이 나폴레옹에게 표를 몰아주면서 민주주의를 포기한다. 그나마 견딜 만한 보나파르트주의를 선택한 것이다. 1848년 12월 제2공화국이 탄생하고 대중과 부르주아지는 완전히 갈라선다.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작업장. 거리와 실내가 저마다의 성격을 표출하는 곳. 감정을 가진 “가장 유쾌한 괴물". 발자크의 파리다. 발자크는 대범하게 펜을 놀려 끊임없이 동요하는 공간의 ‘심리지리학’을 만들어냈다. 도시의 생태와 그 주민들의 인격은 서로 거울에 비친 영상 같은 관계다(84). 발자크의 만보객은 도시의 비밀을 캐고 소유하겠다는 열망 속에 대로라는 시詩를 누빈다. 하지만 파리를 자기만의 특별한 목적에 맞게 개조하여 소유한 것은 오스만과 개발업자, 자본가와 시장 논리였다.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에서 프레데리크는 유령처럼 이리저리 도시를 떠다니고 소외와 익명 속에 실제와 몽상 간의 경계는 영원히 흐려진다. 플로베르는 외과의사가 메스를 놀리듯 정교하게 펜을 놀린다. 오스만이 야심 차게 과업을 완수한 1869년. 플로베르의 펜 끝에서 파리는 하나의 “정태적이고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실증주의 미학”으로 제시된다. 감정과 신체는 사라졌다. 정치체로서의 도시, 양육적인 사회공화국의 전망도 숨이 멎었다.


보들레르의 만보객은 구경하면서 구경거리가 되는 — 참여하면서 관망하는 — 자로 바로 그 자신이다. 예술가와 부르주아 사이, “최고의 조화가 우리의 것”이 되리라는 장밋빛 전망이 깨진 후, “충분히 빠르게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 종합을 도출하고 손에 넣기도 전에 우리를 끌고 가던 유령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렵다”는 보들레르의 얘기는 현재를 대하는 플로베르의 딜레마와 공명한다(32). 하지만 하비는 온통 이렇게 서두르는 바람에 엄청난 양의 인간 잔해, 무시할 수 없는 “뿌리 뽑힌 무수한 인생”이 남겨진다고 쓴다. 랑시에르가 말한 마르크스주의 예술가의 '현재의 지체'(lateness)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 "현재의 지체에서 추출한 예견의 힘"으로 새로운 미래를 구축하라. 




에마는 왜 죽어야했나

하비는 오스만의 신화에 의구심을 보이면서도 자본주의에 의한 '규모'의 변화는 전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고 짚는다.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이 점을 다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말이다. 또한 아주 다르게 보이는 영역인 플로베르의 글쓰기를 들어 설명하는 점도 흥미롭다.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에 등장하는 개인은 자기 완결적이다. 에마 보바리는 평범한 시골 의사의 아내로 소녀 시절 탐독했던 문학에 빠져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삶을 꿈꾼다. 그녀는 당시 급부상한 부르주아지와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을 욕망하는 민주주의적인 임의의 개인을 상징한다. 그런 에마는 왜 죽어야 했는가? 


랑시에르는 플로베르의 소설을 ‘인상주의 시학’으로 규정한 바 있다. 플로베르는 문학이 예술로 부합하는 데 있어서 문체의 힘을 제1 가치로 여겼다. “문체는 사물들을 보는 절대적인 방식”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절대적이라는 것은 어떤 원리나 규범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현 규범의 해체는 반재현이 아니라 모든 재현 방식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문학성'이라고 부르는 이 지점은 버지니아 울프가 인상은 모든 방향에서 "원자의 끊임없는 소나기로 내린다"고 표현한 것과 닿아있다. 


에마의 죄는 꿈 꾸어서는 안 되는 삶을 욕망한 것도, 문학(예술)과 실제의 삶을 혼동해서도 아니다. 에마는 일상의 사소한 감각 체험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무언가에 귀속시키고 대상화하여 욕망했다. 그녀는 창가에 통통 튀어 오르는 꿀벌의 움직임, 미사 중 촛불의 신비로움을 그 자체로 향유하지 못하고 이 미적 정서와 감각에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한다. 랑시에르는 따르면 에마는 플로베르가 벗어나려고 했던 고전적 관점을 그 원인이 되는 실체에 끊임없이 귀속시키면서 예술의 근대적 이해를 정초하는 미적 체험의 고유성을 무화시켜버렸다. 에마는 낭만파 주인공처럼 애인에게 버림받고 절망하여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다. 몽상 속에 떠돌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비소를 삼킨다. 


<보바리 부인>은 프랑스 최초의 위대한 모더니즘 소설로 평가받는다. 오스만이 전근대를 폐기하면서 파리를 설계했듯 플로베르는 에마를 죽임으로써 문학성을 정초했다. 하비는 낭만주의의 목이 잘린 1848년 이후에야 플로베르가 제 목소리를 찾았다고 적는다. “위대한 세기가 태어나려면 한 위대한 인물이 사라져야” 한다는 위고의 표현에서, 에마는 ‘위대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녀의 죽음은 플로베르에게 새로운 시대 —  문학의 근대성 — 를 정초하는 “창조적 파괴”의 구심점이었다. 오스만, 플로베르, 보들레르 그리고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1848년 이후에야 모두 본연의 모습을 찾아냈다는 사실은 단절로서의 근대성이라는 신화에 힘을 보태주었다(35). 1848년 전후의 사고와 실천의 흐름에서 분명 이 시기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고 하비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무덤에서 요람으로

파리는 발자크의 유쾌한 괴물에서 보들레르의 창녀로, 그리고 졸라의 타락한 야수가 된다(466). 외과의사의 메스도 소용없는, 내장이 드러난 채 피흘리는 여성. 투기의 대상이고 탐욕의 제물이 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혁명 봉기 밖에 더 있겠는가? 하비는 다시 묻는다. 하지만 1871년 사건은 파리와 여성 모두에게 비극의 클라이맥스이자 하나의 종말이 되었다.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 사크레쾨르 바실리카가 파리를 굽어보고 있다. 사회 각계각층의 모금으로 건축한 성당인데 이국적인 비잔틴 양식의 돔으로 유명하다. 사크레쾨르는 기독교 전통에 반하는 모든 불경한 것 — 나폴레옹 3세와 제2제정, 코뮌의 악령과 피의 일주일 등 — 을 모조리 지워버려야 했고 아바디가 설계한 “동방적인” 디자인은 그 임무에 충실했다.


로지에르 거리의 순교, 외젠 발랭의 골고다 수난, 제2제정의 악덕과 불경은 사크레쾨르의 장엄한 돔과 새하얀 대리석 아래 잠들어 있다. 이 성심의 기념물은 운명의 변덕과 역사의 이율배반 속에 무덤에서 요람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해왔다. 이곳에 묻힌 역사를 알고, 그 지점의 빛과 투쟁의 원칙을 이해하는 자만이 소망을 이룰 것이라고 하비는 마무리한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는 1848년 혁명 전후로 파리가 어떻게 변이했는지, 자본과 근대성이 어떻게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만났는지, 이 만남에서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상상력이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 역사지리학적 관점으로 재구성한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반지구화 anti-globalization 운동’에서 어떠한 메아리 — 푸르동, 푸리에, 르루, 카베 — 와 공명할 수 있다면, 1840년대 프랑스에서 약간의 역사적 교훈을 얻고 그 이해가 좀 더 깊어질 것이라고 쓴다. 또한 발자크의 재능을 빌어 "깊은 어둠 속에 혼자 있는"지도 모를 부르주아 전체 역사를 그려보기도 한다. 하비가 벗겨낸 근대성의 허물을 쫓으며 독자는 묻는다. 오늘날 우리에게 창조적 파괴의 구심점은 어디인가? 




* 참고서적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자크 랑시에르, 현실문화연구, 2018년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 中 '13장 랑시에르의 미술론 - 표면의 탐험가 오귀스트 로댕', 박기순, 문학과지성사,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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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타그뤼엘리즘


이 책을 읽는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모든 정념을 떨쳐버리시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성내지 마시기를.

악하거나 추한 것은 없다 해도,

웃음에 관한 것 외에 완벽함은 거의 찾기 힘들 테지만,

당신들 마음을 상하게하고 괴롭히는 큰 슬픔을 보면,

다른 이야깃거리가 내 마음을 끌 수 없음을

여러분은 이해할 것이오.

눈물보다는 웃음에 관하여 쓰는 편이 나은 법이라오.

웃음이 인간의 본성일지니.


.



문학과 지성사, 가장 널리 읽히는 판본.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 세대, 나아가 부모 세대를 위한 '체계적이고 혁신적인 세계문학 축역본의 정본 컬렉션' 이라는 설명 때문에 읽어 보고 싶은, 살림의 '생각하는 힘'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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