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386의 사상적 배후는 '강철서신'의 김영환?
(출처: 월간 말 구영식 기자)

'전향 386'들의 다수가 80년대 NL 주사파로 활동했던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사상적 배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386인사들은 대체로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남한 주사파의 대부로 잘 알려진 김영환 <시대정신> 편집위원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김 위원은 1986년 서울대에서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을 결성하고 최초로 주체사상을 학생운동권에 전파한 인물이다. 구학련은 한국 학생운동사에서 '최초의 비합법 주사파 조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당시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 단 편지형태의 글로 운동진영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것이 바로 '강철서신'이다.

80년대 학생운동권 강타한 '강철서신' 주인공

김 위원은 구학련 활동 이후 구속되었다가 출소해 반제청년동맹(1989년)민족민주혁명당(1993년, 민혁당) 등 비합법 주사파 조직에서 핵심활동가로 활동했다. 특히 민혁당은 90년대 중반 내부 사상투쟁을 통해 '김영환파'에 의해 장악됐다. 김 위원은 90년대 초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두차례 면담하는 '거물'로 성장했다. 그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김일성주의자'였다는 것이 당시 동료들의 평가다. 그와 민혁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한 386 인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94년 김영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해는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영환은 '육체적 아버지와 정신적 아버지를 모두 잃었다, 94년은 내게 가장 슬픈 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철저한 김일성주의자였다."

김 위원은 99년 터진 '민혁당사건'에서 공소보류라는 파격적인 조치를 받았는데 그가 국정원에서 '반성문'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민혁당을 해체한 뒤 구해우(현 광주평화개혁포럼 대표) 등과 함께 '푸른사람들'을 결성했다. 푸른사람들은 80년대 NL 주사파로 활동했던 운동권 출신의 친목·학습모임이었다. 그는 구해우 대표에 이어 2기 회장을 맡았다. 또한 김 위원은 홍진표·한기홍 등과 함께 1998년 11월 현재 젊은 우파의 사상지인 <시대정신>을 창간했다. <시대정신>은 80년대 NL 주사파 그룹이 사상전향을 선언한 후 만든 잡지였다는 점에서 운동권 안팎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2003년 1월호를 끝으로 격월간지에서 계간지 형태로 발간해오고 있다.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가 단골 필자로 등장한다. 2004년 가을호에는 박세일 의원(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권두 인터뷰로 내세워 눈길을 끌고 있다.

'전향 386'의 사상적 거처 역할을 해오고 있는 <시대정신> 그룹은 북한민주화로 포장한 북한붕괴론을 제기해오고 있다. 특히 이들은 황장엽 전 비서가 만든 주체사상이 60년대 이후 김일성 주석에 의해 '김일성주의'로 변질됐다고 비판한다. 즉 황 전 비서의 주체사상이 진정한 주체사상이라는 것. 그래서 운동진영 일각에서는 이들을 '황파'라고 부른다.

한홍구 교수 "김영환은 주체사상을 끝내 소화하지 못한 채 토해 버렸다"

한홍구 교수(성공회대)는 11월 25일자 <한겨레21>의 '남한 주사파의 비극과 희극'에서 김 위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김영환은 황장엽 등이 화려한 당의정을 입혀놓은 주체사상을 가장 반주체적인 태도로, 대단히 교조적으로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끝내 소화하지 못한 채 토해 버렸다. …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지만, 그와는 달리 차분하게 북을 바라보는 연구자가 된 어느 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환상이 깨진 자리를 치열한 반성적 대안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악으로 규정하고 반공, 반북으로 나감으로써 최대한 보상받으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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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NL주사파 운동권 핵심이었다
뉴라이트운동 주도하는 '전향386', 그들은 누구인가
(출처: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

 "운동권들은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자본가만큼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어디 있나."
소위 '수구꼴통'의 우익집회에서 나온 발언이 아니다. 지난 24일 자유주의연대 창립 기념토론회에 참석한 한 386 운동권출신이 내뱉은 '자본가 찬양가'다. 그는 범청학련 부의장과 한총련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지낸 'NL(민족해방) 주사파'출신이었다.

지난 4·15 총선에서 전대협 출신이 12명이나 당선되면서 운동권 386은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요즘 또다른 부류의 운동권 386이 뜨고 있다. 자유주의연대로 집결한 이들은 <조선>과 <동아> 등 보수언론의 지원을 받으면서 현재 뉴라이트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전향 386'들로, 대다수가 과거 NL 주사파 출신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홍진표·한기홍, "김정일 정권 타도" 기치 건 <시대정신> 창간멤버

 
▲ 홍진표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정책실장

<오마이뉴스>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자유주의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향 386'은 신지호·이동호·최홍재·최희섭·한기홍·허현준·홍진표 등으로 확인됐다. 이중 PD(민중민주) 계열인 신지호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는 80년대 NL 주사파의 핵심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먼저 홍진표(42)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정책실장. 홍 실장은 한때 국보법(2번)과 집시법(1번) 위반으로 3번이나 투옥된 운동권이었다.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전남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홍 실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82학번으로 입학했다가 이듬해 정치학과 83학번으로 다시 입학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홍 실장은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남한 주사파의 대부로 잘 알려진 김영환 <시대정신> 편집위원과 함께 서울대의 구국학생연맹(남한 학생운동사상 최초의 비합법 주사파 조직)에서 활동했다. 그는 당시 김영환 위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현재까지도 함께 활동하고 있다. 홍 실장은 이후 전민련(전국연합의 전신) 통일분과 간사와 한겨레사회연구소 연구원,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조직국장 등을 지내며 10여년 동안 통일운동에 전념했다. 그는 현재 젊은 우파의 사상지 역할을 해오고 있는 <시대정신>의 창간 멤버이기도 하다.

홍 실장은 지난 23일 기자회견에서 현 정권을 '수구좌파'로 규정한 뒤 "현 정권은 북한인권문제는 외면하고 김정일 정권 유지에 목을 걸고 있다"며 "정상적인 좌파라면 지금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홍 실장과 함께 <시대정신>를 창간한 한기홍(43)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노동운동 경력을 가지고 있다.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한 대표는 대학 3학년 때 중퇴한 뒤 인천의 작은 공장을 전전했다. 인쇄노조와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각각 3년씩 일하기도 했다. 한 대표는 이후 94년부터 97년까지 철도청 하급 기능직으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지속했다. 하지만 90년대 말 사상전향한 그는 '푸른사람들'에서 활동했다. 푸른사람들이란 80년대 NL 주사파로 활동했던 운동권들의 친목·학습모임이었다. 그는 1기(구해우)와 2기(김영환)에 이어 3기 회장을 맡았다.

한 대표는 99년 12월 "2000만 북한민중을 구출하기 위해 김정일 독재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결성했다. 이를 계기로 '전향 386'들은 <시대정신>과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등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과거 전대협은 폭력혁명세력... 민주화운동세력이란 용어 쓰지 말아야"

 
▲ 최홍재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최홍재(37)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역시 <시대정신> 편집위원이다. 최 위원은 고려대 신방과 87학번으로 91년 고려대 총학생회장과 전대협 5기 조국통일위원회(조통위) 대행을 지냈다. 최 위원은 94년 한총련 조통위원장을 지냈으며 그 이후 97년까지 전국연합 자주통일위원회에서 일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98년부터 2000년까지 민화협 연수기획부장을 지냈으며 열린사회시민연합의 은평지부 사무국장으로도 활동했다.

최 위원은 스스로 "골수 주사파였다"며 "98년 북한 기아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북한체제의 허구성을 깨달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와 함께 전대협에서 활동했던 한 386 인사는 "그는 매우 성실했고 열정적인 동료였다"고 회고하면서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전대협 5기와 6기 중앙위가 이월식을 한양대에서 했다. 교정으로 올라가는 길에 승용차가 길가에 죽 늘어서 있었는데 홍재가 백미러를 다 때려 부시더라.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자본가는 다 때려 죽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조국통일투쟁과 관련해서도 강경발언을 했다." 최 위원은 90년대 후반 사상적 변화를 겪으면서 젊은 우파의 집결지인 <시대정신> 그룹에 합류해 현재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그는 민주통일센터 사무국장도 지냈다.

최 위원은 자유주의연대 창립기념식 토론회(24일)에서 '잃어버린 세대 386(?)-386에 대한 성찰적 회고'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80년대 386'에 대해 "좌경도 용공도 아닌 혁명적 사회주의자"였으며 "소련식 사회주의국가를 만들거나 북한식 김일성주의 국가를 세우려 했던 강력한 이념세대였다"고 규정했다. 최 위원은 '정치권 386'에 대해 "히틀러의 게르만주의보다 더욱 파괴적인 '우리 민족끼리'라는 시대착오적 담론에 매몰되어 있다"며 "한국 386은 김정일과 운명공동체"라고 주장했다.


▲ 이동호 한반도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이동호 한반도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을 지냈다. 그는 이동복 전 의원이 상임대표로 있는 '북한민주화포럼' 간사를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1월 1일 북한민주화포럼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학교 때 조국통일그룹의 지도적 위치에 서서 잘못된 사상에 입각해 살았다"고 '고백'했다. "애국운동세력은 좌파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나처럼 친북주사파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친북주사파에 대한 실질적인 공격에 나서야 한다. 과거 우리(전대협)들은 폭력혁명세력이었다. 더이상 민주화운동세력이라는 말을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남한의 학생운동과 좌파운동을 지도하는 세력은 김정일정권이다.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으로 일할 때 한민전 투쟁지침과 북한의 혁명관을 단파라디오로 듣고 그 내용을 각 대학의 토론자료로 내려보냈다. 애국운동진영은 남한의 좌파를 성장시킨 배후(김정일)를 찾아 집중 공격해야 한다."

유일한 PD계열 신지호... 90년대 초 "더 이상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선언

또 전북대 88학번인 허현준 민주통일센터 연구원(36)은 1994년 전북대 총학생회장과 전북총련 의장을 지냈다. 범청학련 남측본부 부의장로 활동하면서 '남·북·해외 공동연석회의'를 성사시켰던 그는 범청학련사건과 서울대 범민족대회사건으로 두차례 구속됐다. 특히 그는 1996년 한총련 연세대 사건 때 한총련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2년간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허 연구원은 98년 (주)다우스마트라는 정보통신회사를 설립하고 2003년 4월에는 인터넷 생선회 쇼핑몰(피시팔팔)을 열면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통일운동과 장애인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2003년 민화협과 통일맞이, 북한민주화네트워크, 탈북자동지회 등에 활어횟감을 무료로 배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허현준 민주통일센터 연구원

허 연구원이 총학생회장으로 있던 전북대는 90년대 중후반 이후 새로운 학생운동의 중심지였다. 즉 NL그룹 주류에서 분화한 '사람사랑(사사)계열'의 근거지였던 것. 이들은 '푸른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대부분의 전북지역 총학생회를 장악했다. 심지어 총학생회 사무실에 '김정일 정권 타도'라는 슬로건을 내걸 정도로 '북한타도론' 혹은 '북한붕괴론'에 집착했다.

허 연구원은 자유주의연대 창립기념 토론회에서 "한총련 중앙간부들은 밤에는 김일성 회고록을 읽고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비디오를 보면서 탄복하고 박수를 쳤다"며 "386의 이념적 토대는 북한정권의 붕괴와 함께 급격히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최희섭(40) 열린사회시민연합(시민연합) 동대문지부장은 경희대 사학과 84학번. 그는 5기 전대협에서 조통위 정책위원을 지냈으면 이후 전국연합에서 활동했다. 시민연합은 <시대정신>과 연계된 박홍순(87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숭규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시민연합은 서울민통련과 민주쟁취국본 서울지부가 각각 시민단체로 전화된 서울민주시민연합과 서울겨레사랑지역운동연합이 합쳐져 1998년 창립한 단체다. 시민연합은 창립 초기부터 '북한실상과 탈북자 실태', '북한현실과 통일운동의 방향' 등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자유주의연대에 소속된 '전향 386'들 중 거의 유일한 PD계열인 신지호(42) 대표는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82학번)를 졸업했다. 신 대표는 노회찬·조승수 의원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추진위 울산 책임자였다. 신 대표는 90년대 초반 '고백논쟁'을 일으키며 운동진영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바 있다. 당시 진보정당추진위에서 활동하던 그는 잡지에 '고백' 등의 글을 통해 운동권을 공개 비판하며 사상전향을 선언했다.

신 대표는 92년 8월호 <길을 찾는 사람들>에 기고한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에서 "사회주의의 핵심이 사적 소유의 폐지에 있다면 장구한 역사발전이 있는 후라면 몰라도 앞으로 상당기간은 불가능하다"며 "따라서 그것을 신봉하지도 행동에 옮길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당시 기고글의 편집자주에는 "지난 수년간 지하노동운동을 해오면서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을 추진해왔다는 필자가 맑스레닌주의자에게 묻고 있다"고 적혀 있어 그의 운동경력을 짐작케 한다. 이후 그는 "운동권은 이제 경실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자신의 충고에 따라 경실련에 들어가 정책파트에서 활동하며 서경석 목사를 보좌했다. 신 대표는 경실련 활동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대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삼성경제연구소 북한연구팀 수석연구원과 한국개발연구원(KDI) 북한경제팀 초빙연구위원을 지냈다. 현재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로 있다.

신 대표는 최근 "현 정권의 참여민주주의는 80년대 운동권이 주창했던 민중민주주의의 노무현 버전"이라며 "지배계급 교체, 기존질서 해체 등의 발상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종인 민중민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노무현 정부를 공격해왔다.


▲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왼쪽)과 지난 92년 8월호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에 실린 신 대표의 '당신은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가' 기고글.

전대협 출신들의 반응 "극단적 단절... 정치세력화를 위한 이미지화작업"

이들에 대한 전대협출신 386인사들은 대체로 "이해할 수 없다", 또는 "슬프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성원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사무처장은 이들의 변신을 "극단적 단절"이라고 표현하면서 "극우와 극좌는 통한다는 말을 증명해주는 사건"이라고 평했다. 전문환 전대협 동우회장은 "우익인사가 후원하고 우익매체가 띄워주고 있는 자유주의연대의 출범은 우파의 위기의식에 기반한다"며 "하지만 이들의 고백에는 무게나 비전이 전혀 없다"고 꼬집었다. 전 회장은 "이들은 정치세력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며 "현재의 활동은 결국 정치권 진출을 위한 이미지화작업"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는 "지역기반 등 하부조직력이 없어 영향력 있는 조직으로 등장하긴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향 386'의 사상적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김영환 위원의 과거 동지였던 A씨는 "왜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했냐고 그들에게 따져야 하는데 도리어 그들이 우리를 욕하고 있다"고 꼬집으면서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김영환이나 홍진표는 당시 학생운동권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이들은 우리한테 공장에 들어가라고 하면서도 자신들은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들은 혁명 지도자기 때문이란다. 이들은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다. 이들은 그동안 운동권에서 나름의 지위를 누려왔다. 이것은 당시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던 많은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자신들이 사상적 지도자인 것처럼 행세하면 어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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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좌파는 가장 후진적인 외눈박이"
386 골수 사회주의자→자유주의자 전향한 서강대 신지호 교수
(출처: 주간조선 정장열 기자
jrchung@chosun.com)

동아일보에 칼럼을 정기 기고하는 신지호(申志鎬ㆍ42) 서강대 교수가 요즘 지식인 사회에서 화제다. 386 골수 운동권 출신인 그는 과거 운동권 동지였던 열린우리당 386 의원들을 향해 “동지들을 속일 수 없다”며 친북좌익의 성향과 주사파적 시각이 변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이들에게 “과거 청산 자격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전향한 사회주의자’로서 우리 사회 좌파의 시대착오에 대해 메스를 가하고 있는 신 교수를 지난 10월 2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 평소 칼럼에서 386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하던데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주사파의 목소리가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하나.
“노무현 정권을 규정하는 여러 가지 말 중 하나가 386 정권이고 17대 총선 이후 386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여의도에 입성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386의 다수가 주사파 출신이다. 또 민노당의 다수파도 주사파 출신들이다. 주사파들은 아직 한국 정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일반 국민에게 반미(反美)ㆍ친북(親北)의 바람을 일으키는 진원지이다. 한국 정치가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 주사파 문제를 제대로 검증하고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이 사람들이 과거 어떤 사람들이었고, 지금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한국을 앞으로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가 명확해져야 국민의 정치적 선택도 분명해질 수 있다.”

- 386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이 아직 친북 성향이라고 단정했던데 이들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과거와 다름이 없다는 얘기인가.
“물론 주사파도 다양하게 분화됐다. 민노당 주사파 출신들은 거의 변함이 없는 반면 열린우리당 주사파 출신들은 김일성 체제를 찬양하고 신봉했던 데서 이제는 북한을 감싸고 이해하는 식으로 변했다. 이들은 북한의 문제점에 대해 애써 외면하거나 침묵을 한다. 이런 변화도 제대로 된 자기 반성을 통한 게 아니라 북한 체제의 문제점이 만천하에 폭로되면서 어쩔 수 없이 이뤄진 것이다. 이들은 아직도 북한에 대해서는 외눈박이들이다.”

- 386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이 과거 자신들의 오류에 대한 반성과 고백이 필요하다는 입장인가.
“그렇다. 주사파는 기본적으로 민족사의 정통성이 대한민국에 있는 게 아니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대한민국 국회의원 배지를 달 수 있나. 그들이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번이라고 밝힌 적이 있나.”

- 386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이 주사파적 시각이 아니라 통일의 염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일반적 정서를 앞장서 대변하고 있다고는 보지 않나.
“그런 측면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민족이나 통일 지상주의로는 그들의 태도가 설명이 안된다. 친(親) 김정일 노선을 걷는 것과 민족ㆍ통일지상주의가 일치할 이유가 없다.”

신 교수는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을 비롯해 현 정권에 참여한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은 ‘자아분열증 환자’라는 주장도 폈다. “이 사람들은 세계사적으로 검증된 선(先) 산업화, 후(後) 민주화 노선이 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경시한다.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 북한 인권 문제를 물어보면 인권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게 생존권이라며 ‘북한도 일단 먹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민주주의 인권은 나중에 해도 되지 않느냐’는 논리를 편다. 과거 우리의 권위주의 정권에 적용했던 논리와 북한 전체주의 정권에 적용하는 논리가 180도 모순이다.”

“한국 좌파는 수구 맹동적”

- 주사파를 포함한 우리나라 좌파들의 문제점이 뭔가.
“한국의 좌파는 선진국과 비교하면 가장 후진적인 좌파다. 한국의 좌파는 크게 세 덩어리로 분류가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는 주사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민노당 내의 과거 PD계열이다. 또 하나가 주사파나 PD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포스트 막시즘 등 서유럽풍의 세련된 좌파이다. 이런 세련된 좌파가 대표주자가 되면 그래도 괜찮을 수 있다. 독일의 사민당 같은 정당은 과거 소비에트식 사회주의와 치열하게 투쟁한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 좌파 진영에서는 아직도 주사파가 가장 영향력이 크다. 성숙된 좌파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수구적 맹동적 좌파다.”

신 교수는 주사파에 대해 “고쳐서 새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100% 폐기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최악의 전체주의인 김일성ㆍ김정일 체제를 지탱하는 주사파가 사회주의 내에서도 가장 문제가 많은 사회주의였으며 북한의 실패가 곧 주사파의 실패”라는 것이다.

- 노무현 정권을 평소 좌파 정권이라고 지칭하던데 현 정권 인사들은 좌파 정권이라는 평가에 반발하고 있고 사실 구체적 정책들을 봐도 좌파라는 평가는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많다.
“과거 PD계열은 주사파들에게 개량주의자라고 비판했다.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노선을 걷지 않고 자본주의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오로지 미 제국주의 반대투쟁만 한다는 것이다. 지금 노무현 정권의 정체성을 보면 그때 구도와 비슷하다. 시장친화적인 주장을 펴는 일부 386 출신 의원들을 보더라도 경제 정책은 우로, 사회ㆍ문화적인 것은 좌로 가져가겠다는 태도다. 이들에게 결정적으로 빠진 것은 통일ㆍ외교ㆍ안보 문제를 어떻게 하겠느냐는 점이다. 이제까지 노무현 정권의 방향을 보면 반미는 아니라고 해도 탈미(脫美)는 분명하다.”

- 현 정권의 정책이 과거 주사파의 전략과 비슷하다는 얘기인가.
“구도가 닮았다. 현 정권은 시장경제 마인드를 갖고 있는데 왜 우리가 좌파냐며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시장을 조금 중시하는 마인드를 보여준다고 좌파 혐의를 벗을 수 없다. 경제 정책은 기본적으로 시장이 작동하기 때문에 정부가 좌지우지할 단계를 넘어섰다. 정책에서 일정한 편향이 나오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이를 조정해 나간다. 하지만 안보ㆍ외교ㆍ통일 문제에는 시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조정자가 없다. 국민에게 이 부분에서 확고한 믿음을 주지 못하면서 시장이 감시하는 경제 정책에서 약간의 우파적 경향을 보인다고 좌파의 이미지를 벗을 수 없다. 노무현 정권은 주사파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좌파 정권이다.”

유시민씨 권위·전체주의 차이 몰라

- 좌파 진영이 지금도 ‘박정희보다 김일성이 낫다’는 식의 사고를 한다고 보나.
“과거에는 박정희·전두환이 싫고 김일성을 좋아한다고 내놓고 얘기했지만 지금은 조금 변했다. 지금 좌파의 멘탈리티는 김일성보다는 박정희가 싫다는 쪽이다. 과거 유시민 의원이 한 신문 칼럼에 ‘유신 5공의 체육관 민주주의나 김일성에게 100% 찬성표를 던지는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나 오십 보 백 보다’라는 글을 쓴 걸 기억한다. 유시민 의원은 운동권 내에서 우파라는 평가를 받았고 주사파 출신이 아니다. 이런 사람조차 과거 개발독재는 우파 독재였고, 저쪽은 좌파 독재였는데 뭐가 다르냐는 위험한 논리를 편다. 이는 권위주의 체제와 전체주의 체제의 차이점을 전혀 모르는 한심한 얘기다. 과거 문화혁명 시기의 중국이 전체주의였다면 지금은 권위주의 체제다. 이 차이를 중국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하늘과 땅 차이다.”

신 교수는 한국의 현 정치 지형을 ‘시대착오적인 20세기 수구 연합’이라고 규정했다. 북한과 운명을 같이 할 열린우리당의 수구 좌파 세력과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한나라당의 수구 보수 세력,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민노당의 반동 좌파 세력이 우리 정치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한국 정치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수구 보수를 대신할 혁신 보수가 등장하는 보수혁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다. “박정희 시대를 역사적으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지금 박정희식 모델로는 절대로 2만달러 시대를 열 수 없다. 지금은 작은 정부와 민간의 활력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모델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조도 내용도 없이 기득권에만 집착하는 보수가 아니라 철학과 영혼이 있는 배고픈 보수가 필요하다. 이런 보수 혁명이 일어나 우파로의 정권 교체가 이뤄진 다음에라야 우리 사회 좌파도 진정한 변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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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6-09-2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념과 사상은 변화해야 한다. 단, '현실과의 호흡을 통해서'라는 전제이자 근거가 있어야 한다. 전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향 근거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전향근거에는 '북한 체제가 대안이 아니다'라는 현실은 있는데, 정작 한국의 현실은 없다. '철학과 영혼이 있는 배고픈 보수'가 대체 어떤 현실적 정책을 의미하는가. 이들은 북한을 이상사회로 생각했던 과거에도, 사회주의를 만병통치약 정도로 생각하는 현재에도, 현실 불가능한 배고픈 보수 운운하는 미래에도, 여전히 현실과는 담을 쌓은 이들이다.
 

386 운동권, 사교육 시장 '완전정복'

(출처: 오마이뉴스)

"386운동권이 사교육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뭐라고 할 말은 없다."
386운동권 출신으로 사교육 시장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강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난 6월 김진경 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운동권386들이 사교육시장을 장악했다"며 "사회를 변혁시키겠다던 사람들이 이제는 학원 장사를 해서 떼돈 버는 세상이니 도대체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고 말했다. 이 발언을 두고 일부에서는 '운동권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라며 박수를 보냈고, 일부에서는 '망발'이라며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운동권들의 사교육 시장 장악은 업계에도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얘기다. 386운동권의 사교육 시장 장악은 현재의 입시제도와 한국적 학벌주의가 만들어 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 말은 단순한 논리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들은 왜 사교육 시장에 강자로 등장했나

386운동권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94년 수학능력시험으로 입시제도가 바뀌고, 논술 비중이 높아지면서부터. 운동권들은 비판의식과 종합적인 사고를 요하는 언어영역과 논술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입시 경향이 통합교과형으로 바뀌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됐다. 2008년 입시부터 서울대 등 주요 대학이 통합교과형 논술을 대학별 고사로 선택하면서 사교육 시장은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송파구에서 논술학원을 경영하고 있는 L씨는 386이 사교육 시장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수능의 주요 출제자들이 80년대 중후반에 석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로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교수들이다. 그들의 논문주제는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언어 시험에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나오고 민중정서를 담은 이규보나 정약용의 작품이 자주 출제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386이 겪었던 비판정신과 출제 경향이 유사하다."

사실 386운동권들의 사교육 시장 진출은 생계형에서 출발했다. 80년대말과 90년대초에 사회에 나가 마땅히 뿌리내릴 곳이 없었던 이들은 운동에 한 발을 걸치고 밥벌이를 위해 학원강사로 뛰었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돼 사교육 시장으로 진출한 이들도 적지 않다. 386운동권들이 사교육 시장에서 입지를 넓힌 결정적 계기는 90년대 후반 강남 대치동 학원가가 커지면서부터다. 여기에 2000년 대학 수시 시장확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386운동권 출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학원은 조동기논술학원, 유레카논술아카데미, 초암논술아카데미, 플라톤청솔학원, 학림학원, 청산학원 등이다. 이들은 소규모 학원에서 출발해 영역을 전문화하면서 규모를 확장시켰다. 이들 학원 대부분은 현재는 100명이 넘는 강사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출판부, 논술연구소, 어학원을 부설로 두고 기업형으로 움직인다. 인터넷 강의가 일반화된 지 오래다. 이들 사교육 시장의 정점에는 코스닥 상장기업 메가스터디가 있다. 이들 학원들은 네트워킹을 통해 서로 그물처럼 연결돼 있다.

사교육시장에서 돈 벌어 비정규직운동... 정치권 진출도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역임한 황광우(서울대 77학번)씨는 플라톤청솔학원에서 논술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황씨가 지은 <진리는 나의 빛> <황씨 아저씨네 논술 서리>는 논술교재로 유명한 책이다. 도시형 대안학교 '이우'의 교장인 정광필(서울대 78학번)씨도 플라톤청솔학원에서 논술 강의를 했다. <르몽드 코리아>의 대표이사인 박승흡(서울대 80학번)씨는 국어교사 출신으로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됐다가 논술강사를 시작했다. 그는 학원강사로 뛰면서 번 돈으로 비정규직센터를 만들었고, 노동전문지인 <매일노동뉴스> 발행인을 맡기도 했다.

전대협 2기 출신인 조동기(고려대 85학번)씨는 강남 대일학원에서 국어과목으로 스타강사 대열에 들어선 이후 97년말 대치역에 '조동기국어논술학원'을 열어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핵심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현재는 전국에 19개 분원을 마련하고 올해 매출목표를 400억원으로 잡고 있다.

강동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청산학원을 이끄는 쌍두마차인 최원극(외국어대 84학번)씨와 박영재(서울대 84학번)씨는 주체사상쪽 조직이던 자주민주통일(자민통) 소속으로 골수 운동권이었다. 91년 속셈학원 수준으로 출발한 청산학원은 과학고, 민족사관고, 외국어고 전문학원으로 성장해 매출 100억원대의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논술과 구술 면접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고 22개 분원을 두고 있는 유레카논술아카데미의 대표강사 장민성(서울대 81학번), 박홍순(성균관대 82학번)씨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계로 분류된다. 박홍순씨는 민주노동당 중앙당 기획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04년에는 구로갑 후보로 출마한 바 있다.

노원구에 있는 학림학원의 채광석(성균관대 87학번)씨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운동권의 유명한 시인이었다. 학림학원에는 성대 운동권 출신들이 강사로 다수 포진하고 있다. 초암논술아카데미 대표강사인 이윤호, 송재인씨도 80년대 초반 학번으로 운동권 출신들이다.

과학탐구 영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연봉18억원을 기록한 이범(서울대 88학번)씨도 좌파 운동권의 이론을 제공했던 <학회평론>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학원 사업을 하다가 정치권으로 진출한 경우도 있다. 열린우리당 정청래(건국대 85학번)의원과 정봉주(외국어대 80학번)의원은 길잡이학원과 외대어학원을 운영하다가 여의도 입성에 성공한 경우다.

총학 집행부 회의같은 마라톤 강사회의

운동권들의 사교육 성공비결은 끈끈한 연대감과 네트워크, 조직관리능력, 친화력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철저한 친분과 인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한 학원의 경우 강사 회의가 총학생회 집행부 회의와 비슷하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들린다.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의견을 조율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회의도 학생운동 시절 마라톤회의를 연상케 한다. 초암논술아카데미의 경우 일요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교사 80여 명이 각 학년별로 세미나를 진행한다. 아이들이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과연 그것이 강사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토론하고 고민한다. 철저한 분석을 통해 '시험에 나올 법한 문제'를 찍어낸다. 철저히 경쟁시스템이 도입된다. 사교육이 공교육을 앞설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세미나가 끝나면 뒷풀이가 진행된다.

이러한 386출신의 사교육 시장 활약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이 존재한다. 사회 변혁을 외칠 때의 모습과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교육이 확대될 수밖에 없는 공교육 취약성과 입시 중심 체제에 대한 진단없는 비판은 현실과 동떨어진 감상에 불과하다는 의견이다. 386출신 학원 관계자들은 인터뷰 요청에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을 아끼면서도 "지금 구조대로 가면 공교육은 사교육 시장에 먹힐 수밖에 없다"고 공통적으로 말했다.

이들은 공교육의 상징이 된 전교조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386출신의 한 학원장은 "전교조가 아니라 전개조(전체가 개조대상이라는 의미)"라면서 "변화하지 않고, 교원평가제에 부정적인 모습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한만중 전교조 전 정책위원장은 "사교육 업체들이 교과서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공교육을 포위할 정도로 성장한 상태에서 공교육의 취약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다"면서 "사교육을 이기는 공교육은 현실 조건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386은 이미 중산층, 비판은 무의미하다"

한편에서는 사교육을 통해 제도가 담아내지 못하는 새로운 내용을 담아내겠다는 목소리도 있다. 초암논술아카데미 이윤호 대표강사는 "학교교육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그 한계를 21세기 대안적 교육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초암논술아카데미는 '풀로 엮은 집' 등의 문화사업 활성화를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386운동권 출신이자 대치동 전문학원 1세대인 김찬휘(서울대 83학번), 한석원(서울대 83학번), 이범(서울대 88학번)은 무료인터넷 강의를 통해 교육기회의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올해 3월 인터넷 공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죽음의 삼각형 : 누가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가'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2008년 대입이 내신-수능-대학별 고사로 이뤄진 최악의 균형이라며 혹평했다. 이 동영상은 학교-학원-대학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다. 2008학년도 대입은 논술을 중심으로 한 사교육 시장을 팽창시키고 있다. 지난 4월 <대우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사교육 시장 규모는 현재 16조8000억원에서 계속 확대될 전망"이며 "향후 5년은 고등학교 학생수가 증가하는 황금 시기"라고 규정했다. 이 때문에 언론사와 학원이 손잡고 논술강사 양성 아카데미를 개설하고 강사를 확보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결과적으로 학교-학원-대학의 균형보다는 사교육 쪽에 더 많은 무게가 실릴 가능성이 크다. 시장질서에서 철저히 살아남아야 하는 386세대에게 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공교육 약화의 책임을 돌리기는 힘들다. 논술강사를 하고 있는 J(서울대 인문대 박사과정)씨는 "이미 중산층에 편입돼 있는 386운동권들을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면서 "예산을 가지고 정책을 움직일 수 있는 국가가 국립과 사립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고, 차별화된 지원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지역 특목고의 한 교사는 "교사 1인당 학생수를 현재 35명에서 20명으로 낮추고, 학교조직 슬림화를 통해 운영의 자율성을 높여 나가야 한다"면서 "다양한 방식의 공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현실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초암C&C 이윤호(44)대표는 잘 나가는 논술강사다. 81학번인 그는 대학시절을 뜨겁게 보냈다. 대학을 3군데나 옮겨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했고, 90년대에는 문화운동을 했다. 잡지 <리뷰> 만들 돈을 구하기 위해 13년 전 처음 학원시장에 뛰어들었다. 이 대표는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일정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사교육과 공교육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분법적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다. "현 제도 속에서는 공교육이 아무리 개혁을 외쳐봐야 틀을 깨고 나오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교육주체 만들기가 중요한 것 아닐까요." 이윤호 대표가 공개한 자신의 월급은 비수기인 요즘 200만원 내외. 물론 한참 잘나가는 입시 시즌에는 하루 15시간 강의를 해서 한 달에 3000만원 이상을 번다. 몇 달 일해서 1년을 먹고 사는 셈이다.

사교육 시장에 진출하면서 고민이 많았지만 그는 대안적 교육을 지향하는 것으로 그 고민을 해결하고 있다. 시장적 질서와 가치적 질서의 균형을 부여하려고 애쓴다. '풀로 엮은 집' 운영은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이곳의 다양한 강좌는 민예총 문예아카데미를 연상시킨다. 초암논술아카데미는 94년 출발해서 직영학원 5개를 포함해 서울과 경기에 8개 학원이 있다. 홈페이지에 밝힌 내용을 보면 2005년 1월까지 약 2300여 명이 수강하고 있으며 140여 명의 강사가 있다. 강의배정이나 수익배분에 있어서도 스타시스템에 의존하기보다는 함께 나누는 방식을 중시한다. 매주 일요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진행하는 80여명의 학원강사 세미나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토론하는 자리다.

21세기 새로운 교육 모델 지향이 이들의 목표다. 이 대표는 386운동권의 비판과 자유로움이 조직을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그도 알고 있다. 사교육 시장이 결국 양극화나 신자유주의적인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아니, 양극화를 고착화시키는 역할을 사교육이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교육 시장에 진출한 386이 비판도 많이 받고, 왜 그런지 이유도 알지만 나름대로의 건강성도 있다고 봅니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일정한 합리적 인식이 있다는 것은 교육을 합리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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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사 금지`가 이들을 키웠다

(출처: 중앙일보)

강남의 사교육 논술시장의 규모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대형 논술학원의 1년 매출이 100억원이 넘는 점을 감안하면 연간 수백억원은 족히 될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개인적인 논술 과외까지 감안하면 시장 규모는 더욱 커진다. 이 거대한 시장의 승자는 1980년대의 386 학생 운동권 출신들이다. 강남 입시 논술시장의 양대 봉우리인 유레카와 초암을 비롯해 C, N, H 학원 등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학원들을 움직여 가는 주력이 바로 386 운동권이다. 강남의 논술 명문학원 중 비운동권 출신이 대표강사인 곳은 몇 안 된다.

사교육 시장이 번성한 가장 큰 배경은 널뛰기를 거듭한 정부의 교육정책이다. 학교교육에 대한 불신을 학부모들이 사교육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동권 386들은 대체 어떻게 강남의 논술 시장을 석권하게 됐을까. 혹시 그들이 과거의 운동권적 사고방식을 학생에게 주입하는 건 아닐까.

◆ 밥벌이 위해 시작했다 = 80년대가 운동권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운동권 좌절의 시대였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사회주의권의 해체, 소련의 몰락은 운동권에 커다란 좌절과 동요를 불러 왔다. 국내에선 군사정부가 물러나면서 운동권은 투쟁의 대상을 잃어버렸다. 80년대의 운동권이 90년대 중반 학원계에 투신한 것은 '밥벌이' 때문이었다. 초암아카데미 노원초암 함경목 원장은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선배의 제안을 받고 논술강사가 됐다. 그는 "학원강사는 이력서를 낼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한때 제적되거나 감방 경력이 있는 386 운동권은 90년대에 정상적으로 갈 곳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과거 경력을 캐묻지 않는 학원으로 몰렸다는 것이다.

학림논술연구소 대치본원 강상식 원장도 "(2001년) 9.11 사태가 터져 토론을 하다가 선배가 '너 지금 뭐 하냐'하며 논술 교재를 준 게 (내가 강사가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런 인연과 결속력으로 이들은 빠르게 논술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다 보니 특정 학원에 같은 계열의 운동권 선후배가 많다. C학원의 경우 노동운동을 했던 민중민주(PD) 계열이 많다. A학원엔 박노해 시인 등이 관련됐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 관련자들이 있다. 대학과 노동운동 현장 혹은 감방 생활의 선후배 간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학원에 PD 출신이 많고, 어느 학원에 민족해방(NL) 계열이 많다는 건 이들 사이에선 다 알려진 비밀이다. 하지만 학원 측은 학원강사들의 과거가 외부에 알려지는 게 내키지 않는다.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이유였다.

◆ 정부 정책 덕분에 컸다 = 94년 주요대학에서 사실상의 본고사가 부활됐다. 그 무렵엔 논술시험인 국어와 영어.수학 시험을 봤다. 그런 분위기에서 초암(94년), 유레카(96년)가 생겼다. 조모 강사는 "수요가 늘게 되면서 논술 시장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97년 이후엔 논술고사만 남았다. 학교 교육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본고사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99년부터는 논술고사가 주요대의 입시를 좌우하게 됐다. 당시 초암과 유레카는 서울대 등 주요대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다. "잘 가르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이 두 학원은 급속히 성장했다.

초암아카데미의 이모 대표는 "당시 17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세 명은 경희대 한의대, 연세대 의대, 이대로 갔고 나머지는 모두 서울대에 진학했다"며 "다음해 목동에 분원을 냈는데 240명 정원에 1200명이 몰려왔다"고 말했다. 2008학년도 서울대가 논술을 통합교과형으로 바꾼다고 발표하면서 사교육 시장은 다시 한 번 폭발했다. 초암아카데미 성민기 원장은 "시장은 냉정하다"며 "가치가 있으면 투자가 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 운동권이어서 성공했다 = 80년대 운동권에선 PD와 NL 계열 사이에서 치열한 사상 투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시로 팸플릿이 회람됐고, 수없는 세미나와 토론, 대자보 작성이 이뤄졌다. 대중 설득도 중요한 실력이었다. 386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논리를 세우고 상대방의 허점을 공격하는 기술을 익혀 나갔다는 것. 조모 강사는 "운동을 하면서 10여 년간 학습을 했다. 운동권 아니면 체계적인 학습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상식 원장은 "우리는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과 대안, 헌신성이 있었고 자기계발에 적극적이었다"고 말했다. 운동권이었기에 논술시장에서 성공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강사는 "비운동권 출신들은 거대 담론을 접할 기회가 적었고, 한 분야에서만 강해 논술 강의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초암아카데미 함경목 원장은 "90년대 이후는 운동권이 취약해 논술 시장에서 크지 못했다"고 했다.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비판에 대해 이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조모 강사는 "누구도 밥벌이를 나쁘다고 할 순 없다"며 "우리의 공통 가치는 '우리는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학림논술연구소 대치본원 강상식 원장은 "공교육의 토대를 약화시키는 데 대해 원죄 의식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고정애 기자, 강승우 김윤미 인턴기자 / 사진 = 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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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6-09-2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년대 치열하게 투쟁했던 이들을 대학 출신에 국한하는 것도, 서로 다른 정치적 목표와 활동방식을 가진 이들을 '386'이라고 뭉뜽그리는 것도, 사교육 자체의 폐해와 사교육에 몸담고 있는 특정 집단의 아이러니를 뒤섞는 방식도, 엉터리 일색이다.

비로그인 2006-09-2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86이라는 말에 벌써 학번이 들어 있으니까요... 이른바 운동권이 사교육 시장에서 엄청난 돈을 벌고, 또 그 돈이 운동단체에 기부되는 거.. 참 아이러니하죠..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
 

(출처: 매일노동뉴스)

“‘이론’과 ‘실천’을 잇는 긴장 유지할 것”

"전체 노조조직률 11.6%, 민주노총 조직률 4.3%, 2000년대에 들어 더 뚜렷해진 정규-비정규직간의 갈등과 시민사회에서의 주변화 속에서 한국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를 이루어낸 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중앙위원 겸 정책실장 은수미씨(41). 그가 지난 2월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유형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3월부터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부연구위원으로서 본격적인 연구자 생활을 시작했다.

80, 9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은수미씨의 박사논문은 무엇이 ‘위기의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정치적 진입을 가능하게 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97년 감옥에서 나와 보게 된 노동운동 현실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은 박사는 연구를 시작하기 전 대기업 노동운동이나 정파갈등 등에서 ‘위기’를 실감하면서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다.

은 박사는 지난 12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서 주최한 노동포럼에 발제자로 참가해 석·박사과정 6년만에 출고한 이 논문 내용을 처음으로 노동계에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 박사의 지도교수도 “5번을 읽고나니 내용을 좀 알겠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1시간여 발제로 논문내용을 설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논문에서 사용된 핵심분석틀인 ‘연결망 분석’이 학계에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관계구조, 사회적 연대, 정치적 연대, 상징, 조직구조 등과 같은 개념은 일반인에게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자나 청중들 모두 노동계 토론에서 나오는 ‘주장’과 ‘정책과제’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나, 은 박사의 논문엔 이같은 내용이 거의 없다. 박사논문에 ‘정책’을 담는게 ‘마이너스’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은 박사의 문제의식도 반영돼 있는 결과다. 은 박사는 다음날 노동연구원에서 기자를 만나 “연구자가 할 수 있는 최대지점은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연구자가 더 나갈 때 ‘감히 내가’라는 두려움도 들고, 한편으론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연구내용을 안 받아들이거나 추상적이라고 치부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은 박사가 한국노동연구원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 반응은 찬반 양론으로 나뉘었다. 이에 대해 은 박사는 “이론과 실천에서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브릿지’ 역할을 하고 싶었다"고 전제한 뒤, "그런 면에서 연구원이 적절한 곳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노동연구원은 "이론을 필요로 하면서 현실의 요구에 답해야 하는 곳이자 현장을 접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게 은 박사의 설명. 실제 은 박사는 12일 보건의료노조의 올해 첫 산별교섭 현장에 나가보기도 했다. 사노맹 사건으로 6년간의 수감생활과 6년간의 석·박사 학위과정으로 아주 오랜만에 '현장'을 접한 소감은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A를 이야기하면 A브랜드로 인식되는” 현재 노동판도 한국노동연구원을 택한 한 이유였다. 은 박사는 “난 오픈마인드로 이야기하고 있다"면서, "A를 이야기하면서도 B나 C나 D도 함께 생각하고 있는데 A를 이야기하면 A브랜드로 낙인찍히는 것 같다"고 답답해 했다. 특히 "사노맹 출신이라는 것으로 규정된 느낌”이라는 것.

연결망 분석이 1차 자료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보니 이번 논문은 자료수집에만 4년여가 걸렸다. 반면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부터 자정까지 집중적으로 써 집필기간은 6개월이 소요됐다. 은 박사는 1차 자료로 1983년부터 현재까지 활동한 조직 중 전국적 연합사건에 참여한 1,609개 조직의 결성선언문, 주요구성원, 강령, 조직체계 및 규약, 내부회의록, 보도자료, 정책보고서, 기관지 등을 활용했다. 자료수집 과정에 쏟아부은 돈만 2천만원 이상. 은 박사는 자료수집이 가장 어려웠다며 노동계가 역사가 될 수 있는 자료를 중요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는 노동계에서 ‘자료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여력이 없어 간직하지 못하는 탓이 크지만 자료를 스스로 폐기하게 만들었던 국가보안법 영향도 있다. 사노맹 같은 급진노동단체는 더 그러했다.

이와 관련 은 박사는 급진노동운동의 경험에 대한 성찰도 하고 있었다. “의회민주주의가 아닌 정치세력화 움직임은 대중적 동의를 못받고 이념이 대안적이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는 혁명적 건강성이 있었는데, 지금 흐름에 대해선 그 부분도 의문을 갖는다.”

은 박사는 모주간지와 인터뷰에서도 사노맹 활동의 오류를 인정한 바 있다. “점조직화된 지하활동이다보니 조직 내 인간적인 소통이 약했다. (…중략…) 소통이 없는 연대의 나약함을 고민하지 못한 것도 돌이켜 보면 잘못”이라고. 그러나 은 박사는 “급진적 노동운동은 노동운동 내에서 배제됐을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배제됐다. 급진적 노동운동이 과대평가되는 면도 있고 과소평가되는 면이 있는데 앞으로 이 부분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노동사회연구소 포럼에 토론자로 참여했던 김윤철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상징과 구조의 분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면서 "상징과 구조의 인과성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김 실장의 문제제기는 “행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은 박사는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이후 빨리 논문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부분을 담지 못했으나 이 논문을 책으로 발간하자는 제안이 있어 책으로 낼 때 인과관계도 밝혀낼 예정”이라고 답했다. 은 박사의 이번 논문에는 '향후 과제'로 둔 문제들이 곳곳에 있었다.

김 실장은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 한 뒤 ‘상징정치’를 잘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며 인과성에 대한 연구를 재주문했다. “연구자가 제기한 명확한 현실을 보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연구자에게 문제제기를 다시 던지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은 박사에 말을 떠올리면, 바로 이런 ‘소통’이 비로소 은 박사의 역할에 의미를 부여할 듯 싶다. 은 박사는 앞으로 조만간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이 민주노총에 미친 영향’과 ‘사회적 교섭의 전제조건’ 등에 연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급진적 노동운동가에서 연구자로 돌아온 은 박사가 만들어갈 새로운 ‘역할모델’이 기대되고 있다.

송은정 기자  ssong@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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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6-09-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혁명적 건강성을 오로지 자신들만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만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의회민주주의는 대중적인 동의를 받는데 있어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관습적인 우선순위를 의미할 뿐이지요.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오로지 이념의 대안성입니다. 점조직적 지하활동이나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어려움일 뿐이지, 이념 자체에 내제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출처: 중앙일보)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 내정자, 신계륜 당선자 인사특보, 이해찬 민주당 의원, 한나라당 소장 개혁파인 심재철, 김부겸 의원, 유시민 개혁국민정당 전 대표, 이들은 23년 전인 1980년 5월 15일 한 곳에 있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에 맞서 운동권이 격렬한 투쟁을 벌이던 당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10만여명이 결집한 서울역 광장 시위의 주역이 바로 이들이었다. 당시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20대 초반의 우리는 너무 어렸고, 상황을 너무 몰랐다"고 말한다.

80년 5월 15일 서울역 부근 경찰 저지선에 시내버스가 돌진해 전경 1명이 숨졌다. 한 학생이 치켜든 플래카드에서 '경희대 복학생회'를 확인한 경찰은 현장에서 시위를 이끌던 문재인(청와대 민정수석 내정자)씨를 연행했다. 당시 경희대생 文씨는 75년 교내시위로 제적됐다 80년 복학했다. 문재인씨는 이날 청량리 경찰서로 연행된다. 그리고 며칠 만에 文씨는 유치장에서 사법고시 2차 합격 소식을 들었다. 경찰서장은 소주 파티를 열어줬고 경희대 재단이사장의 신원보증으로 文씨는 석방됐다. 文씨는 후에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에 임용되지 못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일했다. 盧당선자는 20년 변호사 동업자인 文씨에 대해 "나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 이라고 소개했다.

지도부는 흔들리고 있었다. 신계륜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철야농성이라도 벌이자.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 유시민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 복학생 막내인 김부겸씨 등은 "쿠데타의 빌미를 줄 수 있다. 일단 퇴각하자"고 했다. 함께 있던 서울대 이수성 학생처장(전 국무총리)도 "여기저기 알아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충고했다. 공수부대 출동 움직임이 전해지자 지도부는 결국 '회군(回軍)'을 결정한다.

80년에 이어 84년에도 구속됐던 유시민씨는 명문장의 '항소이유서'로 유명하다. TV토론 사회자로 활동하던 그는 지난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바리케이드 앞에서 화염병을 들던 심정으로'라며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했다. 盧당선자는 이 당에 대해 "같은 여당이자 전략참모가들이 모인 곳"이라고 말한다.



'서울의 봄' 당시 구속학생 중에는 유종일 한국경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도 있다. 졸업 후 친형인 유종근 전 전북도지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했던 그는 지난해 '노연(盧硏.노무현과 함께 하는 연구자 그룹)'을 만든 핵심 주역이었다. 2001년부터 노무현의 경제 가정교사였던 그는 지난 대선 때 盧후보의 핵심 공약들을 구상했다.



'서울의 봄' 주역들인 운동권 2세대들은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않았다.
당시 숙명여대 형난옥 총학생회장(현 현암사 전무)은 "그때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친구들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은 20년이 흐른 뒤인 2000년에 다시 모여 '봄날 동우회'를 만들지만 정기모임도 없고 연락조차 뜸하다.

80년 5월 17일에는 광주에서 대규모 민주화항쟁이 벌어졌고 신군부는 이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정권의 폭력성을 목격한 운동권 학생들은 과격해졌다. 화염병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지하서클에는 사회주의 혁명이론이 스며들었다. 노선투쟁도 치열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광주항쟁은 80년대 운동의 모태이자 학생운동 의식화.조직화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그 첫 신호탄이 이른바 무림(霧林)사건. 파고 들수록 실체를 종잡을 수 없어 붙여진 이름이다. 80년 12월 11일 서울대 도서관 학생식당에 뿌려진 '반파쇼학우투쟁선언'을 정부는 '명백한 좌경화'로 규정했다. 당시 선언문을 써 구속됐던 김명인씨는 현재 문학평론가로 우뚝 섰다. 고세현 창작과비평 사장, 현무환 웅진미디어 사장, 최영선 한겨레신문 교육사업단장, 허헌중 농어촌사회연구소 부소장 등도 함께 구속됐다. 구속자 중 서울대 토목공학과 학생이었던 윤형기씨는 학원가에서 전설적 기록을 세운 인기 수학강사다.

  

81년에는 학림 부림사건 등이 꼬리를 물었다. 노동운동 학생운동의 연대를 강조한 학림사건으로 이선근(민노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 민병두(문화일보 정치부장) 박문식(회계사)씨 등이 구속됐다. 같은 해 부산지역 대학생 21명은 불온서적을 읽었다 해서 구속됐다. 이른바 부림(釜林)사건이다. 盧당선자는 이때 부산대생 이호철(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내정자)씨의 변호를 맡으면서 운동권 책을 처음 접하고 '의식화'되기 시작했다. 노무현이 국회의원이 됐을 때 첫 보좌관이 이호철씨였으며 그는 지금도 당선자가 가장 신뢰하는 측근 중 한사람이다.

82년 3월 18일의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은 운동권에도 큰 충격이었다. '반미(反美)운동'이 갑자기 돌출한 데다 지나치게 과격하고 대담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고신대생 문부식(현 당대평론 편집위원)씨는 7년 만에 석방된 뒤 시인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文씨는 무림사건의 주인공 김명인씨와 공개 논쟁을 벌였다. 학생들의 방화로 교내 진입 경찰 7명이 숨진 89년 부산 동의대 사건을 민주화운동보상심의회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면서 벌어진 '80년대 반성 논쟁'에서다.
"성급한 결정이다. 진압경찰의 희생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몰고갈 위험이 있다." (문부식)
"새삼 '내 안의 폭력'을 거론하는 것은 오늘의 잣대로 80년대 인간을 몰아붙이고 학대하는 짓이다." (김명인)
운동권 내부의 과장된 명분론과 과잉 폭력을 경계한 文씨에 대해, 金씨는 당시 국가의 '거대한 폭력'부터 먼저 짚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82년부터 대학가 이념서클 사이에 벌어졌던 '사투(思鬪.노선투쟁)'는 NL(민족해방)대 PD(민중민주) 논쟁으로 이어졌다. 지하 유인물을 통한 이 노선 투쟁은 86년 자민투.민민투라는 별도의 투쟁조직을 탄생시켰다. 당시 지하 유인물 주인공들의 '오늘'은 다양하다. 85년 '깃발'을 쓴 문용식씨는 벤처기업 나우콤 대표이고, 함께 구속된 안병룡.황인상씨는 변호사가 됐다.

운동권 필독서로 70만부나 팔려나간 '철학에세이'의 저자 조성오씨는 41세에 사법고시에 합격,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학생운동 조직화도 빠르게 진행됐다. 84년 학도호국단 대신 직접선거로 총학생회가 구성되고, 85년에는 전국 연합 공개조직인 전학련이 등장했다. 대규모 연합시위로 '학생회장=구속'의 관행이 굳어진 것도 이때다. 서울대 마지막 학도호국단장인 백태웅씨는 '사노맹(남한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건으로 오랜 투옥생활 끝에 현재 미국에서 사회운동 전반을 연구 중이고, 84년 첫 서울대 총학생회장 이정우씨는 현재 변호사다.

 

같은 해 고려대 김영춘 총학생회장은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 농성 사건으로 구속됐고 지금은 한나라당 의원이다. 전학련 초대 의장 출신 김민석씨는 재선의원을 거쳐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뒤 국민통합21로 옮겨가는 바람에 인터넷에서 '김민새'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특별취재팀] 김창호 선임전문위원, 이철호 차장, 백성호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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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라는 이름, 참노동자라는 이름 김승호씨를 찾아서
이인휘

80년 겨울은 참혹한 삶, 그 자체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징집돼 군대에 끌려갔다가 1974년 제대를 해서 돌아오니 암울하더군요. 서너 평짜리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가 살고 있는 겁니다. 제대한 첫날밤 발을 뻗을 곳이 없어서 동생들 다 재우고 앉아서 잠을 자는데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더군요.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사회 변혁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던 나였습니다. 하지만 경동시장에서 밥튀기 장사를 하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외면할 순 없었죠. 취직을 해서 뒷바라지를 했어요. 3개월 정도 일을 하는데, 미쳐버리겠더라구요. 내가 가진 놈들을 위해 일하려고 이제까지 고생했나 싶었죠. 선택을 해야 했어요. 가족이냐, 내 삶이냐. 모질게 마음을 먹기로 했습니다.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갖고 소리 없이 성남으로 갔어요. 당시 성남은 이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이었지요. 어떤 대단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과 함께 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거죠. 75년 여름 기술을 배우면서, 주민교회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느닷없이 ‘사복’들이 문을 열어 젖혔습니다.
“손들어!”
그들은 내게 총구를 들이밀며 서울대 시위 사건의 배후 조종자를 찾았어요. 당시 김상진이가 ‘진정한 민주주의가 돼야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 자살을 했었거든요. 아마도 서울대 출신 요주의 명단을 작성해 조사하다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낸 거죠. 결국 그 사건과는 관련이 없어 풀어줬지만, 그들은 나를 끊임없이 감시했습니다. 부모 형제와 인연을 끊고 떠나왔는데,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용납하지 않더군요. 그때만 해도 학생운동 인자들이 현장에 가는 것 자체가 보안법 대상이 될 수 있었거든요.

'문제는 학교다. 내가 비록 학교 생활 속에서 세상에 대한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이젠 그게 너무도 힘든 짐이 되었구나. 끊자. 학생운동과의 모든 인연도 끊어버리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직장을 다시 잡고, 야간 기술 학원을 다녔습니다. 1년쯤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기술이 있어야 공장에 들어가서 노동운동을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렸습니다. 77년 말쯤 직장을 버리고 양평동에 있는 금속 공장에 들어갔어요. 공장은 그야말로 비참한 환경이더군요. 정말 자고 먹고 일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삶 그 자체였어요. 그 곳에서 한 3개월 동안 현장에 대한 감을 익히고, 구로 공단에 있는 공장으로 이전했죠. 그런데 5개월쯤 지나자 또다시 감시가 따라붙더군요.

이게 무슨 업보인가. 정말 지독한 놈들이구나. 이젠 학교와의 인연도 끊었는데 평생 저놈들 감시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니…. 합법적인 신분을 갖자. 몇 년 벙어리처럼 냉가슴 앓으며 지내면 나를 포기하지 않겠나. 좋다. 그런 생각으로 어용인 한국노총으로 들어갔어요. 78년 말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노총 섬유노조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 교육 선전부 차장을 거쳐 교선 부장으로까지 올라갔지요. 처음엔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어요. 국장이란 놈이 이북에서 넘어온 안기부 프락치인데, 이놈이 내가 출근을 하면 24시간 감시하는 거예요. 놈들은 내가 어떤 놈인지 잘 알면서 뽑은 거거든요. 어떻게든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했는데, 이상스럽게 행동하면 골치 아프니까, 늘 감시를 한 거지요.

출근해서 화장실 가는 때를 빼놓고 책만 보는 일을 되풀이하다가 ‘동일방직 사건’과 ‘YH 사건’을 겪게 되었죠. ‘YH 사건’ 일어날 때가 내가 2년째 되던 해입니다. 국장이란 놈이 ‘YH’ 저놈들 빨갱인데, 빨갱이란 성명서 한 장 쓰자고 하데요.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그들을 빨갱이로 몰다니. 해도 너무 한다 싶어 국장이란 자와 싸움이 붙었어요. 그러자 직원들이 두 패로 갈라졌어요. 안기부에서 파견 나와 있는 놈들이 국장 쪽으로 달라붙고, 양심적인 직원들과 중간파까지 나를 응원했지요. 옥상에서 한판 붙자고 했지만, 싸움해 봐야 자기들만 망신당하는 꼴이 되니, 신경전만 매일 부려댔지요. 그러면서 지내는데 한 달도 안 돼서 궁정동에서 총소리가 나고 10.26 사태가 터진 겁니다.

당시 노동운동 쪽에 관여하던 선배 그룹들을 만났지만 지켜보자는 결론만 들었습니다. 답답하더군요. 어차피 누군가가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은 뻔한 이치였습니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막혔던 숨통을 토해내듯 거리로 뛰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난 간염을 앓고 있었지만 가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그토록 목놓아 기다리던 때가 눈앞에 닥친 겁니다. 쓰러져서 죽어도 좋다, 라는 각오로 6개월 동안 집도 안 들어가고 전국을 뛰어다니며 신규노조 결성을 서둘렀습니다. 마지막으로 5월 17일 서통노조를 결성했는데, 그 시각 군사 쿠테타가 일어난 겁니다.

다음날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데, 계엄선포가 된 거예요. 광주에서 전화가 불나게 오고, 19일엔 사람이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비상이다! 선배들이 모였지만 또 다시 관망론이었습니다. 쿠테타가 분명하니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 난 참을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여동생이 직장생활로 모아 사준 어머니가 낀 금가락지까지 팔아서 모은 돈 40여 만원을 가지고, 00일보 원판 삭제 안 한 것을 빼돌려 복사를 하고 뿌렸지요.

하지만, 이미 거리는 얼어붙었습니다. 총을 맨 군인들이 거리를 장악하고 모두들 다시 어디론가 숨어들었습니다. 참혹했습니다. 노총에선 나를 일주일 무단 결근으로 처리해서 해임시켰습니다. 간염은 더욱 도져 몸도 무너지고, 마음은 황폐해져 어디에 둘 곳을 몰랐지요. 죽은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내 마음을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이제까지 세상을 읽고 대항해 왔다는 내 자신이 얼마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가를 한번에 보게 된 겁니다. 그토록 일사천리로 진행된 쿠테타를 모르고 있었다니…. 80년 겨울은 참혹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3개월 동안 투병 생활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이를 물었습니다.

딛고 일어서야 한다. 관념적인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자. 10년 동안은 최소한 노동자, 민중으로서 철저하게 바닥 생활로부터 다시 시작하자. 노동운동 한다고 할 때, 학생운동과의 인연을 철저히 끊은 것처럼, 노동운동을 하면서 알던 사람들을 다 끊었어요. 몸이 회복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죠. 기술을 배우자.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자. 보일러공 자격증을 따서 81년 제지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서 1년 정도 생활하면서 부인될 사람을 만났습니다. 광주항쟁을 통해 카톨릭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던 그 사람을 만나면서, 연인적 감정보다는 동지로서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6개월 정도 그녀와 만나면서 ‘노동계급’이 나서야 혁명이 된다는 의견일치를 봤습니다. 이 참혹한 세상으로부터 좀더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세상이 되려면,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지요. 우린 결혼하고 단칸방을 마련해서 우리부터 혁명의 세포가 되어, 철저하게 바닥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하자고 맹세했던 거지요.

서울대 시절, 세상을 바꾸는데 같이 할 사람 나와라!

저는 1949년 6^25가 일어나기 바로 전 해에 울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기와집 하나 없는 산골 마을이었지요.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시절이었으니까, 어릴 적엔 탄피 같은 것을 주어서 장난을 하며 자랐답니다. 증조부께서 장사를 한 돈으로 농토를 모아 아버지 대에는 농사를 지었지요. 50여 가구되는 마을에서 논 열 다섯 마지기와 밭 스무 마지기 정도를 갖고 있는 중농쯤 되었어요. 하지만, 종가집이라 형편이 넉넉치 못했고요. 제사 많고 예의는 다 차려야 하고, 고모 이모들 시집갈 때 땅 조금씩 나눠주고, 그러다 보니 내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에는 땅이 모두 없어졌어요.

전 국민학교를 만 다섯 살에 들어갔습니다. 한글도 모른 채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거죠. 그런데 1학년 끝날 때 1등을 했어요. 국민학교 시절 내내 일등을 하다가 중학교도 일등으로 들어갔죠. 아버지가 교편을 잡고 있었으나, 여전히 생계는 어려웠어요. 중학교 졸업할 무렵 형이 도망간 이유도 알게 됐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학비를 못 내자 가출했던 겁니다. 깝깝하데요. 울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해 봤자, 서울에 있는 대학 들어가기는 하늘에서 별따기였습니다. 또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고등학교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웠던 것은 자라면서 부모님들 간섭을 많이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내게 큰 축복이었지요. 고향의 그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생활은 곤궁했지만, 대가족 속에서 정감 있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전 생각이 찌들지는 않았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고요. 그러던 어느날 불현듯 사람이 태어났는데 큰 물에 가서 한 번 놀아봐야 되지 않겠나 싶더라구요. 그래서 느닷없이 부모님에게 서울로 가겠다고 했죠. 어릴 때부터 모범생이었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걸 믿었던 탓인지, 반대 한 번 없이 천 원을 만들어주시더군요.

오백 원 차비하고, 오백 원 비상금을 찔러 넣고 가방에 옷가지 몇 개 집어 넣어서 서울로 향했습니다. 14살 먹은 시골 촌놈이 서울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새벽이더군요. 다행히 열차 안에서 만난 군인이 내 처지를 눈치채고, 형 주소를 보며 집을 찾아줬어요. 그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지금도 남아 있는 청량리 588 골목이었습니다. 다닥다닥 붙은 판자집들 사이에 있는 이층 판자집에 딱 들어서니, 형이 대뜸 하는 말이 “니 임마, 왜 왔노?”입디다. 당시 형은 고물상에 기거하면서 엿을 팔고 있었어요. 판자집 이층에는 노인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숙하고 있었고요.

서울 구경 한 번 시켜주고 무작정 쫓아내려고 했던 형의 고집을 꺾고 신문팔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구역 다툼하는 고참들에게 세 번을 속아 비상금을 다 날리면서 신문팔이 길로 접어들었죠. 서울에 왔으니, 악착같이 돈을 벌자고 다짐했습니다. 청량리에서 광화문 쪽에 있는 동아일보사까지 걸어다니며, 신문을 하청 받아 거리를 뛰어다녔습니다. 기숙사에서 먹여주는 아침만 먹고, 점심은 굶고, 돈이 생기면 무조건 저금을 했습니다. 또 신문이 나오면 한 줄도 빼지 않고 다 읽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세상에 돌아가는 것이 눈에 띄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더군요.

6개월 동안 모은 돈을 갖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 공부를 하기로 작심했습니다. 3개월 동안 죽어라고 공부를 해서 서울에 있는 대광 상업고등학교 야간을 전체 일등으로 들어갔지요. 배우자. 배워서 저 청량리 588 같은 어두운 인생을 살지 말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하도록 하자. 주간에는 형과 함께 리어카를 끌며 고물을 줍고 야간에는 학교를 다녔죠. 그러다가 형이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내 위치가 위태롭게 된 거죠.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담임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에게 부탁해 수위 아저씨들과 함께 잘 수 있도록 해줬어요. 그 숙직실에서 기거하며 학교에서 마련해준 가정교사 일을 했어요. 눈물겨운 날도 많았지만 배워서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을 했죠.

주야간 통 털어서 1등을 하자 학교에서 서울대를 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은행원이 될까, 고민하다가 내가 배우자고 했던 이유가 단지 돈만 벌겠다는 것이 아니었기에, 서울대에 가서 좀더 배우기로 했지요. 시험 운이 좋았던지 서울 상대 과 수석을 했습니다. 때마침 독지가가 나타나 가난한 집 자식 중에 공부 잘하는 사람 대여섯 명에게 주는 장학금이 생겼어요. 그 장학금으로 하숙비도 내고, 책도 사서 볼 수 있게 됐어요. 또 남는 돈은 집에 부쳐 가사에 보탬이 되도록 했고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보니 여간 실망이 아니었어요. 똑똑한 놈들이 모였다곤 했지만 공부도 잘 안 하고, 시시콜콜 개인적인 일들에만 관심이 있는 겁니다.

혼자서 책만 봤습니다. 하루에 한 권씩 책을 보면서 많은 생각에 젖었습니다. 특히 불행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지요. 그러던 5월 어느 날 선배들이 와서 학회 소개를 하더군요. 정운영 씨였죠. 그 분이 나와서 “세상을 바꾸는데 같이 할 사람 나와라!” 하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들은 설문지를 나눠주고 일주일 후에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게 내가 살고자 했던 삶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난 그 학회에 들어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자체 프로그램을 잡아서 공부했는데, 나는 자유에 대해 공부하기로 했죠. 학기 내내 내가 찾을 수 있는 책들을 모아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쓴 글이 ‘자유에 대해서’ 라는 글이었죠. 지금 돌아보면 낮은 수준이지만 내겐 깊은 관심거리의 대상이었죠. 난 그 글에서 형식적 자유와 실질적 자유에 대해 논했습니다. 실질적 자유는 그야말로 자유를 누릴 물질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라는 주장이었죠. 그렇다면 돈과 학식이 있는 자는 자유스럽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유스러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죠. 못 가진 자가 자유스러울 수 있는 ‘평등’ 사상은 거기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겁니다. 자유란 다시 말해 평등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논지였죠.

그 글은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아, 정운영 선배의 따뜻한 도움으로 ‘상대 평론’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린 ‘통혁당 사건’을 접하게 됐습니다. 신영복 선배가 관련된 사건이었는데, 당시 육사 중위였던 그 선배는 우리 학회에 와서 강연도 했던 분이었지요. 아무튼 그 사건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전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고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을 하게 됐죠. 그 고민과 맞딱드린 사건이 69년 박정희의 ‘삼선 개헌’ 문제로 나타난 겁니다. 이제 사회에 대한 눈을 뜬 상태니 어찌 가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처음으로 데모에 주동적으로 참가해, 선동을 했지요. 그후 저는 과격파로 찍혔습니다. 김근태 선배 이후 상대에서 처음 데모를 한 사건이니 더욱 더 눈에 띄었던 거지요. 그리고 방학을 하자, 경찰에서 바로 수배를 때렸더군요. 그게 첫 수배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수배생활을 하고 있군요.

그 사건 이후 전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여러 번 데모를 하고 수배도 받았죠. 그러다가 70년 11월 전태일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많은 지식인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의 주체’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게된 것이죠. 그 이후 전 범 민중적인 저항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는 대통령 선거에도 큰 기대를 갖지 않았습니다. 생각대로 박정희가 이겼으나, 우린 개의치 않고 다시 움직였습니다. 부정부패 싸움을 통해서 정권에 타격을 가해야 된다고 판단했죠. 그 때가 4학년 2학기인데, 전 완전 골수로 찍혀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잠잠해질 줄 알았던 박정희는 학생운동이 멈추지 않자 위수령을 발동했습니다. 그 때가 서울대 개교기념일이었어요. 학교로 군인이 쳐들어왔고, 그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랬지요. 전 수배 상태로 돌아다니다, 강제 징집을 당했습니다. 끝없는 감시에 시달리며 육체적 고통을 당한 군 생활이었습니다. 최전방에서 말단 박격포 탄약수로 지내면서 폐렴까지 걸렸었지요. 전방에서 총 들고 보초를 서다보면 내가 누구를 위해 어디를 향해 총구를 내밀고 있나 무척이나 괴로워하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대하고 나와 집으로 돌아와 일곱 식구가 모여 단칸방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을 봤을 때, 내 심정은 얼마나 처참했겠습니까.

왜 우리네 삶은 이렇게 비참해야 되는가. 전태일 열사가 떠올랐고, 내 자신의 무능함이 저주스러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이 내 가슴을 짓눌러 한없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터뜨렸던 밤이었지요.

노운협에서 전노협으로, 다시 전국연합으로

새롭게 시작해야 된다. 광주의 넋을 가슴에 담고 철저한 삶을 살아야 한다. 보일러공을 그만두고 전기 기사 자격증을 따서 연탄공장에 취직하고 아내와 함께 이문동에 자리를 잡았어요. 온통 까만 세상을 산 거지요. 그러다가 내선 공사와 외선 공사하는 데를 전전하면서 삶 자체를 처절하게 경험했죠. 아내 역시 공장에 취직해 다녔습니다. 밑바닥 삶에 자신감도 생기면서 부모님과 살림을 합쳐 상도동으로 이사했습니다.

만 3년 동안 그런 삶을 살던 중 84년 말부터 구로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85년 구로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후배들이 찾아와 다시 뛰자고 하더군요. 전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했지요. 최소한 10년은 삶 자체를 처절하게 느끼며 내 몸에 붙은 관념과 지식인의 때를 벗어버리고 싶었거든요. 후배들이 준비론자라고 비판하더군요. 돌이켜보니 그 비판이 일리가 있어 다시 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후배들이 말하는 단체의 상근자로는 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겠다고 해서 들어간 곳이 반월공단 중소기업이었습니다.

그 때 학생운동 출신들이 대거 공단으로 존재 이전을 하던 때였습니다. 관념과 의식으로 뭉친 그들은 현장으로 들어와 공장을 쑤시며 다녔어요. 홍보물을 뿌리고, 책임지지 못하는 행동을 먼저 내세웠지요. 난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어 꾸준히 사람들을 만나며 일하고 있는데, 우리 공장에도 신원 조회가 들어온 겁니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나를 부르더군요. 공구를 찬 채 사무실에 가기 전에 화장실을 들렸어요. 그런데 한 직원이 날 보고 위장취업 했냐고 하더라구요. 무슨 소리냐고 버럭 화를 냈는데, 형사가 와 있다고 하며 그 친구가 사라지는 거예요. 아찔하더군요. 난 공구를 풀어놓고 담을 넘어 도망을 쳤어요.

또 다시 내 전력이 따라붙은 것에 대해 한탄을 하다 함께 활동하던 안산 지역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내 위치를 조직을 지도하는 쪽으로 잡았습니다. 당시 학생 출신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노동해방 투쟁위원회’가 있었는데, 우린 ‘노동자 권익 투쟁위원회’를 결성했었죠. 난 ‘노동해방 투쟁위원회’를 찾아가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둘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지도부 쪽에서는 같이 마음을 모아 움직였었죠. 파업, 가두투쟁, 홍보전 등등 1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철저하게 지도부는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죠. 그러다가 86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공안 탄압이 거세졌지요. 그 탄압에 휩쓸려 조직이 일부 노출되어 나는 안양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곳에서 성수, 안양, 안산 친구들을 모아 다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폭로 투쟁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그 사건은 전두환의 ‘4.13 호헌 선언’을 통해 폭발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고양된 민중의 항거가 6월 10일 민중 항쟁으로 이어지자 노동자가 진출할 때라고 판단했죠. 80년 민주화의 봄처럼 민주노조 결성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지역에선 대중적인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고, 지역 노조 연합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88년 상반기, 지역의 노동운동 단체들이 모여 ‘전국 노동운동 단체 협의회’를 만들어졌지요. 막상 그 단체가 만들어지자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영순 씨가 위원장을 맡고, 내가 노조 특위장을 맡았습니다. 88년 노동법 개정 투쟁과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을 위한 노동자 대회 땐 정말 감동의 물결이었습니다. 연세대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던 모습은 정말 노동자의 물결 그 자체였으니까요.

그후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조직을 결성하자는 말과 함께 전국회의 결성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럼 전국회의를 누가 감당할 것인가. ‘전국 노동운동 단체 협의회’(이하 노운협)에서는 나를 파견했어요. 89년 임금인상투쟁과 노동법 개정 투쟁을 통해 실질적인 전국 조직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죠. 그런데 제가 또 폐결핵이 걸린 겁니다.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무리를 한 거죠. 의사가 쉬라고 하는데, 어찌 쉴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전국 조직 건설을 보고 쓰러지자, 다짐하며 실무자 10명을 구성해서 1년 동안 민주노조 전국회의를 조직해 가며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협의회’(이하 전노협) 건설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90년 1월 22일 공권력이 몰아쳤지만 전노협은 결성됐습니다. 감격적인 그 순간을 맞이하고 몸이 안 좋아진 나는 ‘노운협’으로 다시 복귀를 했습니다. 복귀를 해서는 이영순 위원장이 힘에 부친다고 해서 위원장 역할을 맡게 되었지요. 그 때부터 복잡한 일들이 들어 나기 시작했습니다. 민중당에서는 자기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동맹’(이하 사노맹)은 그들대로 비판 아닌 비난을 해대고, 노동조합 운동도 제대로 못해본 사람들이 상급 단체에 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달라고 항의하고…. 90년 넘어오면서부터 뭉치자고 한 것들이 깨져 나갔습니다. 전국 민주 단체 연합’(이하 전민련)도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운동을 지도했던 사람들이 생각의 차이를 주장하며, 자리 다툼도 심하게 벌였구요.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통해 민중의 동력은 살아나는데, 운동권은 내분으로 소용돌이 쳤습니다. 몸이 힘든 건 견딜 수 있었으나, 마음이 힘든 건 너무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아마도 한계였겠지요. 90년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상황이 미묘해졌잖아요.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개량화 공세가 치열하게 일고, 지도부들이 동요와 혼란을 거듭하면서 개인적 입지를 향해 찢어진 겁니다. 나 역시 그 한계 속에 있었지만 노동자와 민중의 힘이라는 커다란 토대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 인해 끓어오르던 대중의 열기를 모아 쉽게 투항하지 않고, 변절하지 않는 대중조직을 건설해야 된다고 주장했죠. 그게 바로 ‘전국연합’입니다. NL쪽에서 전민련이 있는데, 무슨 전국연합이냐고 강하게 비판했죠. 왜냐면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사람들이 전민련을 장악하고 있었거든요.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PD와 NL은 물과 기름 같았으니까요. 도대체 무슨 진영, 무슨 진영하는데, 왜 우리끼리 진영 싸움을 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어떻게 이 갈라진 골을 메울 수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결국 전국연합을 결성했으나, 그 골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습니다. 전국 조직의 명칭을 정하는데, ‘민중연합’이냐, ‘민주연합’이냐를 놓고 서로의 입장을 대변한 이름만 되풀이했으니까요. 도저히 그 반목을 없앨 수 없어, 사회를 진행하던 저는 오늘은 결판내자고 하면서 ‘전국연합’을 제안한 겁니다.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이바지하자고 했던 그 조직도 시간이 흐르면서 갈라져버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회의가 몰아치는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되돌아 볼 시간을 갖고 싶어 ‘노운협’을 다른 분에게 넘기고 저는 연구소를 만들어 탐구와 사색의 시간을 갖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관계를 맺고 있던 한국통신 내의 민주파가 노조 지도부를 장악한 겁니다. 예상을 하지 못한 엄청난 쾌거였지요. 한국 최대의 사업장이며, 주요 사업장의 일이니 구경만 할 수 없었습니다. 94년부터 그 뒷바라지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어느 정도 내부 동력이 생기자 95년도에 뒤로 물러나 예정된 연구의 시간을 갖으려 했는데, 공권력 투입으로 ‘한국통신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우왕좌왕하는 동지들을 몰라라 할 수 없어 또다시 1년을 그 일에 매달리다, 노동악법 중 하나였던 3자 개입으로 수배를 당했으나, 그것으로 수배 명목이 충분치 않자 ‘노운협’을 이적 단체로 몰아 국가보안법을 걸은 거지요.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 갈 때 그 꽃을 틔운다

수배 생활은 힘들고 괴롭지만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주로 책을 보고 많은 것들을 되돌아봤습니다. 자본론부터 시작해서 고전도 다시 읽고, 변혁 운동에 대한 한계와 극복에 대해, 내 개인의 문제점에 대해 깊이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지요. 인간의 뿌리는 무엇인가. 사회주의라든지 진보라는 개념은 종전의 책에서 본 이야기처럼 정말 맞는 것인가. 종전에 우리 운동의 개념에서 소외당한 공동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인간에 대한 참 의미를 더듬어가면서, 포괄적이면서도 장기적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너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지요.

다시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수지만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생각의 차이가 아니라, 깊이와 폭의 차이며, 이탈과 타락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겁니다. 사실 운동을 하면서 얼마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까. 세상을 좀더 낫게 만들기 위해 알게 모르게 도와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힘들지만 우리 대에서 다음 대가 딛고 넘어갈 수 있는 디딤돌 하나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주적이고, 유대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요. 유대란 서로 주고 받는 연대의 차원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주듯 받을 걸 계산하지 않고 주는 겁니다. 스스로 그런 마음이 쌓일 때, 우리의 운동에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 갈 때, 그 꽃을 틔울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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