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은 적색이다
폴 먹가 지음, 조성만 옮김 / 북막스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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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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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입니다. ‘보수’란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재의 생활방식에서 기원한 태도이니까요. 태어날 때부터 “더러워서 못살겠다” 라고 불평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현재의 생활방식이 급격하게 변하기 이전까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입니다.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현재에 대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도 TV 뉴스를 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누군가를 욕하기도 하고, 사뭇 진지한 정책적 대안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보수적입니다. 그(녀)에게 TV 뉴스의 사건 사고들이란, 간단히 교정할 수 있는 일탈행위에 불과하니까요.
이를테면, 엊그제 제가 올린 「삼성예찬」비판글에 대해서, 호중씨의 평은 ‘삼성의 도덕성’ 이었습니다. 호중씨에게 삼성이 잃어버린 도덕성이란, 일종의 일탈행위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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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좌파 저널리스트 폴 먹가가 쓴 <녹색은 적색이다>는, 지구 온난화와 유전자 변형 농산물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환경위협의 심각성을 밝히는 것을 넘어서, 오늘 우리가 직면한 환경위협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탈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인 즉은, ‘중이 제 머리 못깍기’ 때문인데요, 지구 온난화며 유전자 변형 농산물 문제에 초국적 화학기업, 식량기업의 이해가 얼마나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지를 통해 밝혀냅니다.
그런데, 이미 전 세계 시장의 몇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이 기업들이 스스로 자신의 이윤을 포기하고 부도처리되는 것이 가능하긴 한걸까요? 그동안 각국의 정부, 재계, 학계에 거미줄 처럼 깔아놓은 이들의 인맥은 과연 손을 놓고 바라보고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린다 하더라도, 이 초국적 기업들에게 그만큼의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는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바쁜 정부도, 기업의 후원을 받지 않으면 연구할 수 없는 학자들도, 몇몇 사람들의 상징적 시위 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폴 먹가의 대답은 이것이죠.
“가장 효과적인 녹색은 적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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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중국산 김치파동에서 충분히 실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김치도 마음놓고 못먹겠다.” “먹는 것에는 장난치면 안된다.”였을텐데요,
우리들의 바램과 상관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식량, 음식이 하나의 상품이 된지는 꽤 되었습니다. 식량기업들에만 특별히 도덕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별로 실효성이 없습니다.

세계의 식량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5대 기업은 아스트라제네카, 뒤퐁, 몬산토, 노바티스, 아벤티스라고 하네요.
이들은 본래 화학약품 회사에서 시작한 기업들로서 세계 살충제시장의 2/3를, 비유전자 변형종자시장의 1/4을 석권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유전공학 학자들을 대거 매입해 유전자 변형식품을 개발하는데 앞장서고 있죠.

물론, 유전공학이나 유전공학 학자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초국적 기업들의 이윤논리에 있죠. 인류의 식생활과 생태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인 만큼 가장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빨리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는 이들의 이윤논리가, 유전공학이라는 과학을 왜곡시키는겁니다. 덕분에, 유전공학은 위험한 학문으로 낙인찍히게 되었습니다.

초국적 기업들은 유전자 변형식품을 통해서 저렴하고 질좋은 식품들이 대량으로 만들어 질 수 있다고 선전하고,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유전자 변형식품의 위험성만을 경고하는,
이런 비틀어진 논쟁의 구도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문제는 유전공학이 아닙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 초국적 기업들은 종자회사들을 모조리 합병하고, 또 저희들끼리도 흡수 합병하면서 덩치와 시장 장악력을 키워갑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 식량시장의 석권이겠죠. 쉽게 말해, 인류의 먹이사슬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수확된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의 잘난 경영마인드는 아예 종자부터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들이 유전공학을 통해서 변형시킨 종자에 대한 특허권 제도를 도입하고, 심지어 종자의 순환주기마저도 한해로 변경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굳이 세계의 모든 식량재배지를 사들이지 않아도, 종자 판매 만으로 시장을 석권할 수 있을테니까요.

물론, 이들 혼자서는 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연구원들을 매수해 유전자변형식품의 안전성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로비를 통해 공공기관의 제재조치로부터 벗어나며, WTO, APEC과 같은 무역 자유화 기구들을 통해 세계 시장의 벽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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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적 대안은, 자본주의로부터 나오지만 자본주의의 이윤논리 만을 지양합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농업의 대규모화가 가져온 이점은 두고, 이 이점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이윤논리만을 제거하는겁니다. 이미 기술은 발달되어 있고, 농장도 집약되어 있습니다. 고작 다섯개 초국적 기업들이 이것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죠. 이 농장만 몰수해서 공공의 이해에 맞게 민주적으로 운영하면 됩니다.
굳이 FTA 협상에서 초국적 식량기업들이 강행하듯이, 그리고 과거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강행했듯이, 각국의 소농을 없앨 필요가 없습니다. 극단적인 이윤논리가, 멀쩡한 농토를 철수시켜서라도 한국의 식량시장을 장악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니까요.

마르크스는 원시 공산제에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로 이어지는 각각의 세계를 생산관계의 정형을 통해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각 시대의 지배계급은 멸망할 때 까지 기존의 생산관계를 고집한다고 말했죠.

채집사회나 농경사회에서는, 과학의 발전이 극히 미미한 나머지 그것이 어떤 재앙(환경파괴)을 초래할 줄도 모른 채 기존 생산관계에 몰두했죠.
이들은 채집을 통해 동물이 지리멸렬하고, 한 작물만 심다가 지력이 고갈되는, 일종의 환경에 의한 재앙이 닥쳐서야 기존의 생산관계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놀라우리만치 발달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어떤 재앙이 닥칠지 충분히 예상하고 남음에도 불구하고, 생산관계를 고집하고 있죠.
과거 스페인이 남미를 식민지배하던 시절에, 돈 되는 커피나무의 비료를 쓰기 위해 산사태 위험에도 불구하고 산기슭을 모조리 불태웠다가 변을 당했다는데, 식량기업들이 경쟁상대도 되지 않는 한국의 농토를 황폐화시키는 것이나, 정유기업들이 끊임없는 지구온난화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산화탄소 제거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확대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는 것을 보면 이와 한치 다를바가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들도 결국,
1980년대 체르노빌 사건, 1997년 엘리뇨, 평균온도 상승과 해수면 상승, 오늘날 카트리나와 동남아를 강타한 해일과 같은 환경재앙, 혹은 핵전쟁과 같은 인류재앙에 이르러서야 깨닫게될런지요.
마르크스는 한 시대의 종말을 두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공멸이나 기존 계급관계의 혁명적 변화 둘 중 하나라고 얘기했습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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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민주주의가 오고 있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
박동진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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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적 신화

익히 들어온 '정보화 사회' 선언.

우리가 살아갈 사회를, 새로이 부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환상을 심어주기에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기존 사회에 대한 실망과 갈등, 그리고 새 사회에 대한 갈망이 어우러져,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 미처 충분히 살펴보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화 사회'를 받아들였는지도 모릅니다.

<전자민주주의가 오고있다>의 저자 박동진 교수는, 이를 두고 '정보적 신화' 라 이르고 있습니다.

정치에서는 인터넷의 보급과 전자투표의 활성화를 두고 직접민주주의의 시대를,
일상생활에서도 유비쿼터스 컴퓨팅과 같은 가전기기의 네트워크화를 두고 생활의 편리함을,
전사회적으로 정보화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의 신화 부수기가 자못 기대되지 않습니까.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전자투표의 활성화를 두고 일컬어지는 직접민주주의, 혹은 전자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입니다.
전자투표를 통한 용이한 정치에의 참여가 민주주의를 -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주장, 심지어 참여의 활성화를 떠나서 대의제 민주주의를 극복한 직접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는 이제 기술과 정치의 만남을 지켜봅니다.

# 정치와 경마

" 정치가 전문화되는 순간부터 데모스는 자신들의 모든 삶을 정치게임에 내맡기게 되며, 이때 민주주의는 사라진다. " (27쪽)

기술에 의해 자극받아야 할 만큼, 대의제 민주주의는 못난 것이었나 봅니다.

민주주의 본연의 형태인 직접민주주의를 두고, 통제 불가능한 대표에 의해서 수행되는 오늘날의 간접민주주의를 변호하는 논리는 효율성이었습니다.
고대 도시공동체와 비교할 수 없이 커져버린 국가규모에서 당시의 광장문화를 재현하기란 좀처럼 힘들다는 것이죠.

이 효율성의 논리란 여간 드센 것이 아니어서,
과거의 군사정권이나 체육관 선거와 같은 대통령 간선제는 폐지되었어도, 오늘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 이 효율성의 논리는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명명백백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이 민주주일텐데,
'정치인'이라는 직함이 보여주듯이, 정치는 전문가(?)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되어버렸고,
민중은, 데모스(Demos)는, 마치 경마나 경륜을 하듯 자신의 삶을 정치게임에 내맡긴 채,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배팅을 제외하고는 그저 게임의 결과에 대해서만 왈가왈부할 따름입니다.
게임의 결과인 물질적 이득에만 관심이 있을 뿐인 이들이, 게임 자체를 즐길리 만무합니다.

# 게임의 성격

" 전자민주주의의 새로운 한 축은 체제 유지를 위한 절차적 측면의 보수적 논리로 기능해온 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
" 직접민주주의라는 이상화되고 신화화된 이념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원적 의미를 복구하는 논술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중략) 다시 말해 권력은 데모스로부터 나온다는 수사가 아니라, 데모스가 권력을 수행하는 것을 상징하는 비관적 저항적 실천적 논술로 직접민주주의를 전망하는 전자민주주의를 요구해야 한다."

오늘날 정치게임 경마장은 한산하기 그지 없습니다.
'인생역전'이라는 게임의 결과에 기대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가산을 탕진하는데 매우 적합하다는 혹평을 들으며 불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죠.

마사회 측에서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게임의 결과가 조작이나 우연이 아니라, 게이머의 철저한 분석에 따라 결정된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였습니다.

다시 '인생역전'의 저울에 무게가 실리는 순간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박동진 교수는 전자투표와 같은 기술의 발달이,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민중의 참여를 독려하는 역할에 그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경마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수많은 조건들, 이를테면 말의 건강상태나 컨디션, 기수의 능력, 등등을 좀 더 세부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졌다한들,
그것은 배팅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경마인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게임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죠.

굳이 게임에 비유하자면,
'민주주의 정치'란, 자신이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야하는 일종의 '아케이드 게임' 일텐데,
이미 오늘날 정치게임의 성격은 그것과 다르며, 전자투표라는 기술의 발달로 이 게임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박동진 교수는 직접민주주의 논쟁에 앞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를 질문하며 멀리 돌아갑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로 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은 게임의 성격을 규명하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 기술과 게임의 성격

"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절차를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

기술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그것은 게임의 성격과는 별개로 작용해요. 그것은 경마를 더욱 경마답게 할 수도 있고, 아케이드 게임을 좀 더 아케이드답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따라서, 경마나 경륜에 비유할 만한 오늘날의 정치게임을 아케이드 적으로 만드는 것은,
기술을 통해서 이루어 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술은, 정치게임의 성격을 변화시킬 정치적인 투쟁에 이용될 성질의 것입니다.

기술 자체의 중립성이라는 맥락에서, 박동진 교수는 세가지 가설을 제시합니다.
기술이 어떻게 사용되는냐에 따라, 오늘날의 정보화 사회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그려진 바와 같이 소수의 권력층이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민중을 감시하는 '정보독재사회'가 될 수도 있고, 오늘날 일반적인 경향으로 드러나는 것 처럼, 대의제 민주주의에의 참여를 보완하는 것에 그치는 '정보민주주의 사회'가 될 수도 있고, 그가 지향하는 직접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말이죠.

그의 결론은 자못 실천적입니다.
" 비민주적인 전자감시 사회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보다는 민주적 전자감시의 허구성을 파헤치기 위한 저항적 논술이 더 민주적인 논술이 된다. "

기술의 발달에 대한 환상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실천적인 접근방식 - 정치적 투쟁 - 이 필요하다는 것인데요,
그것은 '정보매체의 민주화' 내지는 '협의민주주의'에 잘 배어있습니다.

# 협의민주주의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정신

'정보매체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적은 분량이나마 다소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NEIS나 전자주민카드, 전자지문데이터베이스 논쟁과 같이, 분권화로 익히 선전되어온 네트워크가 실제로는 행정권력에 의한 개인정보의 초집중화를 가져오는데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하지만, 이는 유비쿼터스 컴퓨팅과 연계할 때 좀 더 풍성하게 얘기할 수 있으니, 홍성욱 교수의 <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 독서후기에서 좀 더 다루도록 하고, '협의민주주의'에 대해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 참여의 증대가 현대 정치 문제의 해결을 위한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정치적 진실은 시민 토론에서 나오는 것이지 아이디어의 경쟁에서 나오지 않는다. 민주적 참여의 주요 수단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 라는 것이 제가 받아들인 협의민주주의의 정신입니다.

협의민주주의는 '어떻게 논쟁을 결론지을 것이냐'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으니 만큼, 그 자체로는 완결된 논리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협의민주주의의 약점이라기 보다는, 간접ㆍ직접 민주주의에서 간과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성격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 세력들이 전자투표와 같은 기술적 발달을 두고 직접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는 바탕에는,
참여의 증대를 통해서 직접민주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오해가 바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직접민주주의까지 끼어들어, 민주주의의 자식들이 서로 정통성을 논쟁합니다.
하지만, 협의민주주의는 점잖게 타이릅니다. 간접이든 직접이든 너희들 중 누가 대를 이어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정신, 구성원 각자가 정치의 독립적이고 평등한 주체가 되는 것, 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냐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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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정치 사상 현대의 지성 67
브라이언 레드헤드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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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요즘엔 빛바랜 책들을 연이어 보게 되는군요.

『서양 정치 사상』이라고, 영국 BBC 라디오 방송의 정치사상강좌 원고들을 묶어낸 책이라고 하는데,
짤막한 원고에 플라톤에서부터 마르쿠제, 한나 아렌트까지, 열댓명의 사상가들을 담고있습니다.

이번 후기도 각 사상가들에 대한 단편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는 건너 뛰었습니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 『군주론』

1513년에 집필한『군주론』덕택에 '마키아벨리적인' 이라는 형용사까지 달고다니는 불명예를 감수하고 있는 분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교묘한 정책과 교활한 협잡, 폭군 정치 지향'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니 불명예라고 할 만 하죠.

하지만, 저자는 『군주론』을 독해함에 있어서 시대적 배경(16세기 이탈리아)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변호?합니다.
구체적인 역사를 모르니 쉬이 이해하는데에 무리가 있습니다만, 16세기이면 중세의 말미이니만큼 대략적인 밑그림은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마키아벨리가 암묵적으로? 『군주론』을 헌상하게되는 메디치家의 경우 신흥교역가문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에 생각이 미치는군요.

여튼, 마키아벨리는,
타락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모든 윤리적인 규범을 무시해버릴 마음의 준비를 갖춘 무자비한 군주만이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있다고 한 덕분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있지만,
제 생각엔, 그가 내린 결론에만 천착하기 보다는, 결론에 전제되어 있는 가치판단들을 살펴보는 편이 더 생산적일 듯 합니다.

예를 들면, 군사적 기율이나 종교신앙을 중요한 정치수단으로 바라보았던 점 같은거요.
충분히 논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런지.

# 쟝 칼뱅 - 『기독교제도론』

'종교개혁' 하면 떠오르는 두 사람. 칼뱅과 루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등교육의 영향이죠. 아니, 루터의 그것이 칼뱅보다 좀 더 자유분방했다는 것 까지가 고등교육의 영향입니다. 므흣

칼뱅과 루터의 차이는 칼뱅의 단언으로 더욱 두드러지는데,
칼뱅은 "기독교도의 자유가 기독교도의 의무를 결코 능가할 수는 없다." 고 했다죠.

고위 성직자들의 전제정치, 가톨릭 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부와 권력.
칼뱅은 딱 거기까지만을 바랬던 것 같네요. 복음이 지향하는 바대로, 순수하고 물욕을 버린 영혼성의 회복. 이런거요.

어쩌면, 칼뱅과 루터를 묶고있는 '종교개혁' 이라는 분류?가 다소 피상적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저자 역시도 후일의 자유주의 사조가 칼뱅에게 빚을 지고있다고 표현했지만,
본원의 종교로 돌아가려했던 칼뱅과, 잠재적이지만 종교로 부터 벗어나려 했던 루터의 그것은, 방향 자체를 달리하는 것이 아닐까.. 잠시나마 생각해봅니다.

참, 종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김규항씨가 『예수이야기』라는 책을 준비중이래요.
지금 집필이 끝물이라는데, 동네 주민들하고 마가복음인가 누가복음 읽기?토론?을 하고있답니다. 내년 3, 4월 중이면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이야기』돌베개 출판사와 계약했답니다. 후후 개인적으로 김규항씨 좋아요.

# 토마스 홉스 - 『리바이어던』

홉스의 성장기를 보면서, 아담 스미스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거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귀족집안의 가정교사로 들어가는 출세구도?라고나 할까.
아담 스미스는 OO대학에서 철학교수로 있다가, 무슨 귀족집안 가정교사로 들어가 대륙여행을 한 것이 기회가 되어 대륙의 자유주의 사상가 - 흄이나 밀과 같은 - 들과 교류할 기회를 맞게 되거든요. 홉스 역시도 윌리엄 카벤디쉬 집안의 가정교사 노릇을 해야했다고 합니다.
당시 섬나라의 학자들에게는 일반적인 출세구도라고 하는군요.

저자는,
홉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홉스 이전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좀 더 정확하게 종교개혁 세력의 도그마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리바이어던』도 그렇고, 홉스는 쉬이 이해하기 힘들더군요.

# 존 로크 - 『인간오성론』, 『관용론』, 『정부에 관한 두 논고』

서유럽의 철학이니 정치사상 사조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이라도, 로크부터는 친숙함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신민들의 동의('신민'이 뭐죠?)가 정부의 정통성을 근거한다는 점이나, 종교적 신념과 실천의 자유에 대한 옹호, 재산권의 근거로서 노동을 중시했던 점, 등 오늘날에는 꽤나 당연시되는 논리들이 그 당시에는 굉장히 급진적인 주장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 장 자크 루소 -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계약론』, 『에밀』, 『엘로이즈』

드디어 루소가 나왔군요.
루소는 우선, 정치를 인간의 삶의 핵심적인 요소로 보았다는 점에서 특이할 만 합니다. 관념이 아닌 물질적인 조건에 천착했다는 점이,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도였겠죠.
우리들의 악함은 본성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이 나쁜 방향으로 통치되었기 때문이라는건데. 그는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으로, 제도나 문명 자체에 대해서는 약간의 불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전 종교개혁이나 계몽주의에 가려진 루소의 다른 관심사들에 더 매력을 느꼈는데요.
루소는 정치사상 외에도 교육이나 음악, 인류학, 식물학,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고 합니다.

특히,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에밀』에 서술되어 있을 교육에 대한 관점이나,
「연극론」에 쓰여있는 문화에 대한 입장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본문에 짧게 소개된「연극론」을 보면,
루소는 직업적인 배우들에 의한 연극의 대안으로서, 인민들이 함께하는 그리고 우애가 넘치는 페스티벌을 제안하였다고 하네요. 집단적인 자기 표현의 아이디어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이는 독재에 대한 인민 주권이라는 그의 정치사상과 같은 맥락을 타고있구요.

모르긴 해도, 루소의 「연극론」은 예의 문화의 상품화를 걱정하는 예술인? 문화인?들의 고민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담고있는 듯 합니다.
'집단적인 자기 표현의 아이디어' 무대나 마당에 서봤던 분이라면 한번쯤 설레였던 고민거리 아니었을까요.

# 잠시, 사물놀이와 풍물굿에 대해서

루소의 「연극론」이 이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습니다.
어느새 서너해가 지나버렸지만, 연이은 술자리와 함께 하나 둘 동기들을 춘천으로 의정부로 떠나보내던 그 해에,
전 입대도 전자전기공학도 다 물리치고 문화만을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덕분에 다시금 같은 술자리에서 떠나보낸 동기들을 맞이하고, 또 그 자리를 빌어 느지막히 의정부로 떠나는 동기가 되었지만.
참 행복했던 한해로 기억을 합니다. 루소의 「연극론」이 그때 끌어안고 있었던 고민들에 '자기 표현으로서의 풍물굿' 이라는 제목을 붙여주면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해요.

대학생이라는 사회적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 스물하나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
전라북도 고창으로, 홍대 근처의 사회패로, 인터넷 자료실로, 무던히 돌아다녔습니다.

열정의 깊이에서 쉬이 비교하기는 힘들겠지만, 사물놀이를 만든 김덕수씨가 그랬을까요.
그 역시도, 풍물굿 역시 하나의 문화상품이 될 것이라는 시안을 가지고 있었나봅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풍물굿에서 다른 요소들은 차치하고, 음악적인 요소 시각적인 요소만을 뽑아 특화시켰고, 오늘날엔 '사물놀이' 라는 파생명사가 '풍물굿' 이라는 본명사를 압도할 지경에 이르렀으니까요.

저와 제 몇다리 선배들, 그러니까 90년대 중후반에 풍물을 고민한 사람이라면 의례 김덕수씨에 대한 묘연의 감정들을 가지고 있을겝니다.
'외다리 풍물굿' 이라 비꼬았던 사물놀이에 대한 반정립을 합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학교축제에 관성적인 공연만 올리던 우리들이었으니까요.
(선배님들 미안 훌쩍)

하지만, 우리의, 최소한 제 깊은 바램은,
풍물굿의 '자기 표현적 요소'를 복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애가 넘치는 페스티벌' 설레이지 않나요?
루소의 표현 역시도 풍물'굿'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건 '굿판'이 '공연'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미있는 몸부림의 제목이기도 하구요.

# 아담 스미스 - 『도덕감정론』, 『국부론』

오랜만에 그나마 친숙한 분이 등장했네요.

스미스에 대한 언급을 재차 접하면서 더욱 뚜렷해지는건,
스미스로부터 배우고자 한다면, 이제껏 그를 상징해왔던 '보이지 않는 손' 의 무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언하건데, 스미스는 오늘날의 시장신봉자들과는 다르니까요.

저자의 경우, 익히 알려져있는 스미스의 태도, 이를테면 시장의 자율적 질서나 정부 역할의 축소에 대한 부분 외에,
스미스의 두 저작 사이의 연관관계를 밝히면서 이 부분을 좀 더 명확히 밝혀주고 있을 뿐 아니라, 스미스의 정치적 견해의 단편 또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두 저작의 관계는 '인식의 확대'라고 생각하시면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도덕감정론』에서 다루고있는 한 사회의 도덕적 문제에 대한 응답을 정치, 제도의 차원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 『국부론』이죠.

이는 『국부론』에 대한 곡해를 줄인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흔히 경제적인 변화들은 기존의 정치나 제도의 압력을 이겨내려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정치, 제도의 변화들은 다시금 경제적인 변화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면, 스미스의 『국부론』은 이미 종교개혁이나 왕정의 붕괴와 같은 정치, 제도의 변화의 시점에서,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경제원리를 논증하는 성격을 띄고있다는겁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진보적이었던거죠.

그 외에도, 스미스가 이윤율의 지속적인 감소 경향이나 계급 분화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나, 당시 영국의 식민지 시절 (오늘날 미국의) 식민지 주권에 대한 스미스의 입장들을 주목할 만 합니다.

# 존 스튜어트 밀 - 『자유론』

고전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금 돌아보게 해주는 평론이었습니다.
단편은 말 그대로 단편으로 그치고, 『자유론』꼭 한번 읽어볼 참입니다.

밀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은 일종의 비주류적인 그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산업혁명과 민주주의라는 세풍 밑에서,
밀은 법률이나 여론, 관습의 질곡에 대해서, 민주주의가 다수의 독재로 전락할 가능성에 대해서,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물론이요, 오늘날에도 충분히 유의미한 문제제기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 외에도 밀은, 정치와 교육, 산업 전반에 관한 구체적인 정책들을 제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대한 저자의 논평까지 함께 담겨있습니다.

" 창조적인 갈등이 빈번히 표출되는, 그리고 서로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되 자신들이나 남들에게 결코 무비판적이지 않은 사회, 개인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그러면서 소수의 권리를 보장하고, 시장 경쟁의 장점을 보존하는 사회 "

밀이 꿈꾸었던 자유주의적 유토피아라고 합니다.

# 칼 마르크스 - 『자본론』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역시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저자는 논평 전체에 걸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불편함을 내비치고 있습니다만, 두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첫째는,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대한 주된 오독 중에 하나인 경제결정론에 대한 반비판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흔히 마르크스-엥겔스로 불리우는 엥겔스의 그것을 마르크스와 차별화시키는 점입니다.

"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그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상황 속에서 그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과거로부터 직접 맞닥뜨려지는, 주어지는, 그리고 전승되어지는 상황 속에서 그것을 만드는 것이다. " - K.마르크스

# 버트런드 러셀, R.H.토니, 존 롤즈
# 허버트 마르쿠제, 한나 아렌트 - 각각, 『에로스와 문명』, 『전체주의의 기원』

마지막 두 단락의 경우 논평 자체가 그리 매끄럽지는 못한데,
각 사상가들이 주목받게 된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고는, 특징적인 측면만을 짧게짧게 언급하는 것에 그칩니다.

어디까지나 라디오 프로그램의 원고라는 제약이 한몫 한 것 같아요.
대략의 분위기를 옅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나오며

입문서는 어디까지나 입문서인지라, 몹시 빈약한 후기가 되었습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루소의 『에밀』『사회계약론』 『연극론』,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밀의 『자유론』,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몇편의 고전에 대해서 욕심을 가지게 된 것이 나름의 소득이기도 했습니다.

입문서. 참 계륵(鷄肋)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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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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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다양성' 이라는 단어가 오래도록 남네. 주위 사람들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인데.
그런데, ‘반개발’ 과 ‘탈중심화’ 라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생각은 충분히 긍정적이긴 하지만,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음 일상의 스트레스에 아둥바둥 하면서 사람들이 흔히, “ 시골 내려가서 농사나 짓고싶다. ” 는 흰소리들을 많이 하는데, 이 흰소리가 어찌보면 개발중심적이고 소비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내면의 저항일수도 있겠다 싶거든?
그런데, 실제 시골 내려가서 농사 짓는 사람은 거의 없지. 역설적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값싼 부동산을 매입해서 전원주택을 짓는 경우가 훨씬 많고.

‘반개발’ 과 ‘탈중심화’ 는 늘 한편의 기획으로 끝나버리곤 했다는거야.
‘라다크 프로젝트‘ 그룹에서 시행한 유기농업을 장려라던지, 지역 전통공예품과 소규모 태양열 기술의 개발, 그리고 라다크 사람들에게 생태적 인식을 높이는 일 역시도,
본래의 긍정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편의 기획으로 끝나거나 변형 왜곡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건데..

라다크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그곳이 이미 세계경제의 일부분으로 충분히 편입된 이후라면, 유기농업이나 전통공예품과 같은 생태적인 기획도, 결국 ‘상품‘ 으로 평가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렇게 되면 비용상에서 밀리는 라다크의 상품들은 시장에서 밀려 자취를 감추거나, 혹은 오늘날의 웰빙상품들처럼 변형 왜곡될 여지가 있을 수 있고.
거기서, 헬레나 할머니는 ‘시장과 상품을 소비하는 합리적 개인만을 상정할 때 그렇겠지요.’ 라고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지.

앉은 자리에서 이리저리 재면서 볼 일 다보겠다는건 아니지만,
‘반개발’과 ‘탈중심화’ 가 가진 일종의 ‘한계지점‘ 을 고민하게되는 대목이지.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코피 쏟아가며 수능 시험을 준비해야하는 고3 수험생들에게 공부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 듯이, 오늘날의 개발도 그런 것 아닐까. 그들 모두는 고된 현실에서 벗어나길 꿈꾸지만, 그러지 못해. 여기서 벗어난다는건, 단지 수능시험에서 벗어나는게 아니라 취업이며 자아실현의 기회에 대한 박탈, 생존에의 박탈인 것을 잘 알기 때문이지.

그런데, 한 학생이 있다고 해. 이 학생이 진심으로, 게을러서가 아니라, 자신을 비롯한 고3 수험생들의 고된 현실이 안타까워서 ‘반수능’을 외쳤다면? 아니, 좀 더 나아가서 ‘대안학교’ 모델은 어떨까?
‘반수능’의 결말은 물론이요, 건방지긴 하지만 대안학교 모델 역시도 흔히들 동경하는 서구식 교육까지가 최선은 아닐까?

‘수능지옥에서 벗어난‘ 으로 시작하지만 ‘이번에 어디학교 수시로 합격했어요’ 로 끝나는 모 TV 프로그램의 씁슬한 대안학교 소개장면처럼.

‘반개발’과 ‘탈중심화’가 개발지상주의에 길들여진 입맛에 별미 정도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헬레나 할머니의 ‘반개발’ 이 그저 개발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면, ‘탈개발’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은데. 벗어난다는 ‘탈‘ 은, 죄 없는 ’개발‘ 과 죄 있는 ’지상주의‘를 모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개발’에서 ‘지상주의‘ 만을 떼어내는 일일테니까.

헬레나 할머니의 오래된 미래 속편, ‘(가칭) 라다크 프로젝트’ 가 마저 나왔다면 좋았을거야.
프로젝트의 이모저모며 좋았던 점, 어려웠던 점, 궁금하네.
아 그에 앞서 헬레나 할머니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싶고.

마음에 들었다면 프로젝트 후기도 알려주세요-
당신의 후기는 계속 되어야 할 듯. 므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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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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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노동의 종말>이라는 책을 보고 있습니다.
이전 북클럽에서 독서후기를 읽고 충동구매한 경우죠. 허허 ^^;

'노동의 종말' 이라는 문제의식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종말' 이라고 하니까 좀 무서운데, 익숙한 표현으로는 '20대 80의 사회' 가 있겠죠.

20대 80의 사회라는 것은,
빈부격차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20의 사람만으로도 100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죠.
80의 사람이 해야할 일은? 기계가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술' 이라는 것에 대해서 가지는 이미지는 굉장히 좋은 편입니다만,
이것이 또 하나의 편견이고 선입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1.

전 '기술' 하면, 핸드폰 광고가 먼저 떠오르는데요.
정말 매일 같이 새로운 핸드폰들이 출시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린 그 광고들을 보면서,
'와 세상 좋아졌다.' 라는 생각과,
'아 갖고싶다.' 라는 생각을 하게되겠죠.

'와 세상 좋아졌다.' 라는 생각이,
바로 우리가 '기술' 에 대해 가진 좋은 이미지입니다.

그 핸드폰을 샀을 때,
우리가 누리게 될 놀라운 기능과 그만큼의 편의가,
우리를 설레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새로운 기술이 우리에게 편의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아마 기술을 싫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식상한 예로 공장에 도입된 자동생산시스템 덕분에,
10명이 하던 일을 5명이 할 수 있게 되었다면?

아마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기술을 싫어하지 않을까요?

아시겠지만,
흔히 핵폭탄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좋은 기술과 나쁜 기술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더 많은 편리와 효율을 제공하는 좋은 기술인 산업 기술에 대한 얘기입니다.

분명, 좋은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나뉜다는 것.
우리가 가진 기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

좋은 기술이냐 나쁜 기술이냐를 판가름 하는 기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입니다.

다만,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좋은 기술이냐 나쁜 기술이냐를 판가름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편리와 효율을 제공하는 좋은 기술의 하나로 이미지화되어 있는 산업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업 기술 자체는 좋은 것임에도,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판단을 달라질 수 있는겁니다.

3.

산업화되어가는 농촌 마을(가칭 책마을)을 예로 들어볼까요.

요즘 농촌은 예전처럼 이땅은 박씨네땅, 저땅은 윤씨네땅, 이런 식이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지만, 땅주인은 변했죠.
마을의 몇몇 사람(촌장)이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땅에서 일당을 받으며 생계를 꾸립니다.

손으로 하던 추수를 기계로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여러 사람이 몇시간에 걸려서 해야하는 추수를 기계로 하면 금방 끝나겠죠?

이 성범표 자동추수기를 박씨네땅, 윤씨네땅에 들여오면,
매일 저녁 평상에 앉아 쉬고있는 박씨와 윤씨를 볼 수 있겠지만,
이 성범표 자동추수기를 박씨와 윤씨가 일하는 농장 주인에게 판다면,
아마 매일 저녁 일자리를 구하러 읍내에 다녀오는 박씨와 윤씨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4.

성범표 자동추수기는 고장도 잘 안나고 정말 좋은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박씨와 윤씨를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니.. 조금은 아이러니하네요.

그렇습니다.
산업 기술 자체는 좋은 것임에도,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판단을 달라질 수 있는겁니다.

산업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는,
곧 산업 기술을 도입하는 이유와 주체의 문제입니다.

누가, 왜 기술을 도입하느냐는 것입니다.
'왜'는 '누구'의 이해관계에 불과하니까,
누가 기술을 도입하느냐가 중요해집니다.

박씨와 윤씨가 도입하느냐,
아니면, 농장 주인이 도입하느냐.

박씨와 윤씨가 도입하면, 산업기술은 일을 줄이겠지만,
농장 주인이 도입하면, 산업기술은 일자리를 줄이는겁니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아래에서의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셈입니다.

5.

이런 역설적인 현실은,
그대로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게됩니다.

산업혁명 초기 영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기계파괴운동)이라는 것이 있었거든요.
100명분의 일을 거뜬히 해내면서 자신의 일자리를 쫓아버린 기계를 미워해버린 영국사람들을 보면서,
웃어넘길지도 모르겠지만.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오래전 영국과 같이 효율적인 생산과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새로운 기술들은 계속 도입되고,
오래전 기계를 파괴했던 영국의 노동자들과 같이,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들은 신기술 도입 시 노동조합과 사전 협의를 하라며 신문 한구석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기업의 경영권을 침해하고, 신기술의 도입을 방해한다는 누명이 씌워진 채로.

씁슬한 현실입니다.

6.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노동의 종말>의 2/3 이상을 미국의 근대사를 예시로 들어,
기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일자리의 감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 경제학을 전공한다는 경제학자들 또한,
기술의 발달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장과 고용의 창출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는 기술 발달의 단면을 나타내는 것일 뿐,
실제,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새로이 고용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쫓아낸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기업의 힘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기업이 만든 상품을 구매하고 기업에 이윤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크게 보아 그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효율을 기치로 한 서로간의 경쟁으로 너도나도 인력감축에만 열을 올려,
전 산업에 걸쳐 실업자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양산하는 지금의 추세는,
상품의 구매자를 재료로 상품을 만드는, 즉 스스로의 존재기반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윤과 시장, 시장과 경쟁이 없는 자본주의를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

우리는 이런 예측 가능한 비극 속에서,
오늘도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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