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라는 이름, 참노동자라는 이름 김승호씨를 찾아서
이인휘

80년 겨울은 참혹한 삶, 그 자체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징집돼 군대에 끌려갔다가 1974년 제대를 해서 돌아오니 암울하더군요. 서너 평짜리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가 살고 있는 겁니다. 제대한 첫날밤 발을 뻗을 곳이 없어서 동생들 다 재우고 앉아서 잠을 자는데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더군요.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사회 변혁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던 나였습니다. 하지만 경동시장에서 밥튀기 장사를 하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외면할 순 없었죠. 취직을 해서 뒷바라지를 했어요. 3개월 정도 일을 하는데, 미쳐버리겠더라구요. 내가 가진 놈들을 위해 일하려고 이제까지 고생했나 싶었죠. 선택을 해야 했어요. 가족이냐, 내 삶이냐. 모질게 마음을 먹기로 했습니다.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갖고 소리 없이 성남으로 갔어요. 당시 성남은 이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이었지요. 어떤 대단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과 함께 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거죠. 75년 여름 기술을 배우면서, 주민교회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느닷없이 ‘사복’들이 문을 열어 젖혔습니다.
“손들어!”
그들은 내게 총구를 들이밀며 서울대 시위 사건의 배후 조종자를 찾았어요. 당시 김상진이가 ‘진정한 민주주의가 돼야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 자살을 했었거든요. 아마도 서울대 출신 요주의 명단을 작성해 조사하다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낸 거죠. 결국 그 사건과는 관련이 없어 풀어줬지만, 그들은 나를 끊임없이 감시했습니다. 부모 형제와 인연을 끊고 떠나왔는데,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용납하지 않더군요. 그때만 해도 학생운동 인자들이 현장에 가는 것 자체가 보안법 대상이 될 수 있었거든요.

'문제는 학교다. 내가 비록 학교 생활 속에서 세상에 대한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이젠 그게 너무도 힘든 짐이 되었구나. 끊자. 학생운동과의 모든 인연도 끊어버리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직장을 다시 잡고, 야간 기술 학원을 다녔습니다. 1년쯤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기술이 있어야 공장에 들어가서 노동운동을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렸습니다. 77년 말쯤 직장을 버리고 양평동에 있는 금속 공장에 들어갔어요. 공장은 그야말로 비참한 환경이더군요. 정말 자고 먹고 일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삶 그 자체였어요. 그 곳에서 한 3개월 동안 현장에 대한 감을 익히고, 구로 공단에 있는 공장으로 이전했죠. 그런데 5개월쯤 지나자 또다시 감시가 따라붙더군요.

이게 무슨 업보인가. 정말 지독한 놈들이구나. 이젠 학교와의 인연도 끊었는데 평생 저놈들 감시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니…. 합법적인 신분을 갖자. 몇 년 벙어리처럼 냉가슴 앓으며 지내면 나를 포기하지 않겠나. 좋다. 그런 생각으로 어용인 한국노총으로 들어갔어요. 78년 말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노총 섬유노조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 교육 선전부 차장을 거쳐 교선 부장으로까지 올라갔지요. 처음엔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어요. 국장이란 놈이 이북에서 넘어온 안기부 프락치인데, 이놈이 내가 출근을 하면 24시간 감시하는 거예요. 놈들은 내가 어떤 놈인지 잘 알면서 뽑은 거거든요. 어떻게든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했는데, 이상스럽게 행동하면 골치 아프니까, 늘 감시를 한 거지요.

출근해서 화장실 가는 때를 빼놓고 책만 보는 일을 되풀이하다가 ‘동일방직 사건’과 ‘YH 사건’을 겪게 되었죠. ‘YH 사건’ 일어날 때가 내가 2년째 되던 해입니다. 국장이란 놈이 ‘YH’ 저놈들 빨갱인데, 빨갱이란 성명서 한 장 쓰자고 하데요.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그들을 빨갱이로 몰다니. 해도 너무 한다 싶어 국장이란 자와 싸움이 붙었어요. 그러자 직원들이 두 패로 갈라졌어요. 안기부에서 파견 나와 있는 놈들이 국장 쪽으로 달라붙고, 양심적인 직원들과 중간파까지 나를 응원했지요. 옥상에서 한판 붙자고 했지만, 싸움해 봐야 자기들만 망신당하는 꼴이 되니, 신경전만 매일 부려댔지요. 그러면서 지내는데 한 달도 안 돼서 궁정동에서 총소리가 나고 10.26 사태가 터진 겁니다.

당시 노동운동 쪽에 관여하던 선배 그룹들을 만났지만 지켜보자는 결론만 들었습니다. 답답하더군요. 어차피 누군가가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은 뻔한 이치였습니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막혔던 숨통을 토해내듯 거리로 뛰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난 간염을 앓고 있었지만 가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그토록 목놓아 기다리던 때가 눈앞에 닥친 겁니다. 쓰러져서 죽어도 좋다, 라는 각오로 6개월 동안 집도 안 들어가고 전국을 뛰어다니며 신규노조 결성을 서둘렀습니다. 마지막으로 5월 17일 서통노조를 결성했는데, 그 시각 군사 쿠테타가 일어난 겁니다.

다음날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데, 계엄선포가 된 거예요. 광주에서 전화가 불나게 오고, 19일엔 사람이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비상이다! 선배들이 모였지만 또 다시 관망론이었습니다. 쿠테타가 분명하니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 난 참을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여동생이 직장생활로 모아 사준 어머니가 낀 금가락지까지 팔아서 모은 돈 40여 만원을 가지고, 00일보 원판 삭제 안 한 것을 빼돌려 복사를 하고 뿌렸지요.

하지만, 이미 거리는 얼어붙었습니다. 총을 맨 군인들이 거리를 장악하고 모두들 다시 어디론가 숨어들었습니다. 참혹했습니다. 노총에선 나를 일주일 무단 결근으로 처리해서 해임시켰습니다. 간염은 더욱 도져 몸도 무너지고, 마음은 황폐해져 어디에 둘 곳을 몰랐지요. 죽은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내 마음을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이제까지 세상을 읽고 대항해 왔다는 내 자신이 얼마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가를 한번에 보게 된 겁니다. 그토록 일사천리로 진행된 쿠테타를 모르고 있었다니…. 80년 겨울은 참혹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3개월 동안 투병 생활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이를 물었습니다.

딛고 일어서야 한다. 관념적인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자. 10년 동안은 최소한 노동자, 민중으로서 철저하게 바닥 생활로부터 다시 시작하자. 노동운동 한다고 할 때, 학생운동과의 인연을 철저히 끊은 것처럼, 노동운동을 하면서 알던 사람들을 다 끊었어요. 몸이 회복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죠. 기술을 배우자.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자. 보일러공 자격증을 따서 81년 제지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서 1년 정도 생활하면서 부인될 사람을 만났습니다. 광주항쟁을 통해 카톨릭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던 그 사람을 만나면서, 연인적 감정보다는 동지로서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6개월 정도 그녀와 만나면서 ‘노동계급’이 나서야 혁명이 된다는 의견일치를 봤습니다. 이 참혹한 세상으로부터 좀더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세상이 되려면,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지요. 우린 결혼하고 단칸방을 마련해서 우리부터 혁명의 세포가 되어, 철저하게 바닥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하자고 맹세했던 거지요.

서울대 시절, 세상을 바꾸는데 같이 할 사람 나와라!

저는 1949년 6^25가 일어나기 바로 전 해에 울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기와집 하나 없는 산골 마을이었지요.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시절이었으니까, 어릴 적엔 탄피 같은 것을 주어서 장난을 하며 자랐답니다. 증조부께서 장사를 한 돈으로 농토를 모아 아버지 대에는 농사를 지었지요. 50여 가구되는 마을에서 논 열 다섯 마지기와 밭 스무 마지기 정도를 갖고 있는 중농쯤 되었어요. 하지만, 종가집이라 형편이 넉넉치 못했고요. 제사 많고 예의는 다 차려야 하고, 고모 이모들 시집갈 때 땅 조금씩 나눠주고, 그러다 보니 내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에는 땅이 모두 없어졌어요.

전 국민학교를 만 다섯 살에 들어갔습니다. 한글도 모른 채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거죠. 그런데 1학년 끝날 때 1등을 했어요. 국민학교 시절 내내 일등을 하다가 중학교도 일등으로 들어갔죠. 아버지가 교편을 잡고 있었으나, 여전히 생계는 어려웠어요. 중학교 졸업할 무렵 형이 도망간 이유도 알게 됐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학비를 못 내자 가출했던 겁니다. 깝깝하데요. 울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해 봤자, 서울에 있는 대학 들어가기는 하늘에서 별따기였습니다. 또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고등학교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웠던 것은 자라면서 부모님들 간섭을 많이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내게 큰 축복이었지요. 고향의 그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생활은 곤궁했지만, 대가족 속에서 정감 있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전 생각이 찌들지는 않았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고요. 그러던 어느날 불현듯 사람이 태어났는데 큰 물에 가서 한 번 놀아봐야 되지 않겠나 싶더라구요. 그래서 느닷없이 부모님에게 서울로 가겠다고 했죠. 어릴 때부터 모범생이었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걸 믿었던 탓인지, 반대 한 번 없이 천 원을 만들어주시더군요.

오백 원 차비하고, 오백 원 비상금을 찔러 넣고 가방에 옷가지 몇 개 집어 넣어서 서울로 향했습니다. 14살 먹은 시골 촌놈이 서울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새벽이더군요. 다행히 열차 안에서 만난 군인이 내 처지를 눈치채고, 형 주소를 보며 집을 찾아줬어요. 그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지금도 남아 있는 청량리 588 골목이었습니다. 다닥다닥 붙은 판자집들 사이에 있는 이층 판자집에 딱 들어서니, 형이 대뜸 하는 말이 “니 임마, 왜 왔노?”입디다. 당시 형은 고물상에 기거하면서 엿을 팔고 있었어요. 판자집 이층에는 노인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숙하고 있었고요.

서울 구경 한 번 시켜주고 무작정 쫓아내려고 했던 형의 고집을 꺾고 신문팔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구역 다툼하는 고참들에게 세 번을 속아 비상금을 다 날리면서 신문팔이 길로 접어들었죠. 서울에 왔으니, 악착같이 돈을 벌자고 다짐했습니다. 청량리에서 광화문 쪽에 있는 동아일보사까지 걸어다니며, 신문을 하청 받아 거리를 뛰어다녔습니다. 기숙사에서 먹여주는 아침만 먹고, 점심은 굶고, 돈이 생기면 무조건 저금을 했습니다. 또 신문이 나오면 한 줄도 빼지 않고 다 읽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세상에 돌아가는 것이 눈에 띄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더군요.

6개월 동안 모은 돈을 갖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 공부를 하기로 작심했습니다. 3개월 동안 죽어라고 공부를 해서 서울에 있는 대광 상업고등학교 야간을 전체 일등으로 들어갔지요. 배우자. 배워서 저 청량리 588 같은 어두운 인생을 살지 말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하도록 하자. 주간에는 형과 함께 리어카를 끌며 고물을 줍고 야간에는 학교를 다녔죠. 그러다가 형이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내 위치가 위태롭게 된 거죠.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담임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에게 부탁해 수위 아저씨들과 함께 잘 수 있도록 해줬어요. 그 숙직실에서 기거하며 학교에서 마련해준 가정교사 일을 했어요. 눈물겨운 날도 많았지만 배워서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을 했죠.

주야간 통 털어서 1등을 하자 학교에서 서울대를 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은행원이 될까, 고민하다가 내가 배우자고 했던 이유가 단지 돈만 벌겠다는 것이 아니었기에, 서울대에 가서 좀더 배우기로 했지요. 시험 운이 좋았던지 서울 상대 과 수석을 했습니다. 때마침 독지가가 나타나 가난한 집 자식 중에 공부 잘하는 사람 대여섯 명에게 주는 장학금이 생겼어요. 그 장학금으로 하숙비도 내고, 책도 사서 볼 수 있게 됐어요. 또 남는 돈은 집에 부쳐 가사에 보탬이 되도록 했고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보니 여간 실망이 아니었어요. 똑똑한 놈들이 모였다곤 했지만 공부도 잘 안 하고, 시시콜콜 개인적인 일들에만 관심이 있는 겁니다.

혼자서 책만 봤습니다. 하루에 한 권씩 책을 보면서 많은 생각에 젖었습니다. 특히 불행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지요. 그러던 5월 어느 날 선배들이 와서 학회 소개를 하더군요. 정운영 씨였죠. 그 분이 나와서 “세상을 바꾸는데 같이 할 사람 나와라!” 하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들은 설문지를 나눠주고 일주일 후에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게 내가 살고자 했던 삶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난 그 학회에 들어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자체 프로그램을 잡아서 공부했는데, 나는 자유에 대해 공부하기로 했죠. 학기 내내 내가 찾을 수 있는 책들을 모아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쓴 글이 ‘자유에 대해서’ 라는 글이었죠. 지금 돌아보면 낮은 수준이지만 내겐 깊은 관심거리의 대상이었죠. 난 그 글에서 형식적 자유와 실질적 자유에 대해 논했습니다. 실질적 자유는 그야말로 자유를 누릴 물질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라는 주장이었죠. 그렇다면 돈과 학식이 있는 자는 자유스럽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유스러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죠. 못 가진 자가 자유스러울 수 있는 ‘평등’ 사상은 거기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겁니다. 자유란 다시 말해 평등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논지였죠.

그 글은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아, 정운영 선배의 따뜻한 도움으로 ‘상대 평론’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린 ‘통혁당 사건’을 접하게 됐습니다. 신영복 선배가 관련된 사건이었는데, 당시 육사 중위였던 그 선배는 우리 학회에 와서 강연도 했던 분이었지요. 아무튼 그 사건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전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고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을 하게 됐죠. 그 고민과 맞딱드린 사건이 69년 박정희의 ‘삼선 개헌’ 문제로 나타난 겁니다. 이제 사회에 대한 눈을 뜬 상태니 어찌 가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처음으로 데모에 주동적으로 참가해, 선동을 했지요. 그후 저는 과격파로 찍혔습니다. 김근태 선배 이후 상대에서 처음 데모를 한 사건이니 더욱 더 눈에 띄었던 거지요. 그리고 방학을 하자, 경찰에서 바로 수배를 때렸더군요. 그게 첫 수배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수배생활을 하고 있군요.

그 사건 이후 전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여러 번 데모를 하고 수배도 받았죠. 그러다가 70년 11월 전태일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많은 지식인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의 주체’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게된 것이죠. 그 이후 전 범 민중적인 저항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는 대통령 선거에도 큰 기대를 갖지 않았습니다. 생각대로 박정희가 이겼으나, 우린 개의치 않고 다시 움직였습니다. 부정부패 싸움을 통해서 정권에 타격을 가해야 된다고 판단했죠. 그 때가 4학년 2학기인데, 전 완전 골수로 찍혀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잠잠해질 줄 알았던 박정희는 학생운동이 멈추지 않자 위수령을 발동했습니다. 그 때가 서울대 개교기념일이었어요. 학교로 군인이 쳐들어왔고, 그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랬지요. 전 수배 상태로 돌아다니다, 강제 징집을 당했습니다. 끝없는 감시에 시달리며 육체적 고통을 당한 군 생활이었습니다. 최전방에서 말단 박격포 탄약수로 지내면서 폐렴까지 걸렸었지요. 전방에서 총 들고 보초를 서다보면 내가 누구를 위해 어디를 향해 총구를 내밀고 있나 무척이나 괴로워하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대하고 나와 집으로 돌아와 일곱 식구가 모여 단칸방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을 봤을 때, 내 심정은 얼마나 처참했겠습니까.

왜 우리네 삶은 이렇게 비참해야 되는가. 전태일 열사가 떠올랐고, 내 자신의 무능함이 저주스러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이 내 가슴을 짓눌러 한없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터뜨렸던 밤이었지요.

노운협에서 전노협으로, 다시 전국연합으로

새롭게 시작해야 된다. 광주의 넋을 가슴에 담고 철저한 삶을 살아야 한다. 보일러공을 그만두고 전기 기사 자격증을 따서 연탄공장에 취직하고 아내와 함께 이문동에 자리를 잡았어요. 온통 까만 세상을 산 거지요. 그러다가 내선 공사와 외선 공사하는 데를 전전하면서 삶 자체를 처절하게 경험했죠. 아내 역시 공장에 취직해 다녔습니다. 밑바닥 삶에 자신감도 생기면서 부모님과 살림을 합쳐 상도동으로 이사했습니다.

만 3년 동안 그런 삶을 살던 중 84년 말부터 구로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85년 구로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후배들이 찾아와 다시 뛰자고 하더군요. 전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했지요. 최소한 10년은 삶 자체를 처절하게 느끼며 내 몸에 붙은 관념과 지식인의 때를 벗어버리고 싶었거든요. 후배들이 준비론자라고 비판하더군요. 돌이켜보니 그 비판이 일리가 있어 다시 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후배들이 말하는 단체의 상근자로는 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겠다고 해서 들어간 곳이 반월공단 중소기업이었습니다.

그 때 학생운동 출신들이 대거 공단으로 존재 이전을 하던 때였습니다. 관념과 의식으로 뭉친 그들은 현장으로 들어와 공장을 쑤시며 다녔어요. 홍보물을 뿌리고, 책임지지 못하는 행동을 먼저 내세웠지요. 난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어 꾸준히 사람들을 만나며 일하고 있는데, 우리 공장에도 신원 조회가 들어온 겁니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나를 부르더군요. 공구를 찬 채 사무실에 가기 전에 화장실을 들렸어요. 그런데 한 직원이 날 보고 위장취업 했냐고 하더라구요. 무슨 소리냐고 버럭 화를 냈는데, 형사가 와 있다고 하며 그 친구가 사라지는 거예요. 아찔하더군요. 난 공구를 풀어놓고 담을 넘어 도망을 쳤어요.

또 다시 내 전력이 따라붙은 것에 대해 한탄을 하다 함께 활동하던 안산 지역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내 위치를 조직을 지도하는 쪽으로 잡았습니다. 당시 학생 출신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노동해방 투쟁위원회’가 있었는데, 우린 ‘노동자 권익 투쟁위원회’를 결성했었죠. 난 ‘노동해방 투쟁위원회’를 찾아가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둘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지도부 쪽에서는 같이 마음을 모아 움직였었죠. 파업, 가두투쟁, 홍보전 등등 1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철저하게 지도부는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죠. 그러다가 86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공안 탄압이 거세졌지요. 그 탄압에 휩쓸려 조직이 일부 노출되어 나는 안양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곳에서 성수, 안양, 안산 친구들을 모아 다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폭로 투쟁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그 사건은 전두환의 ‘4.13 호헌 선언’을 통해 폭발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고양된 민중의 항거가 6월 10일 민중 항쟁으로 이어지자 노동자가 진출할 때라고 판단했죠. 80년 민주화의 봄처럼 민주노조 결성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지역에선 대중적인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고, 지역 노조 연합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88년 상반기, 지역의 노동운동 단체들이 모여 ‘전국 노동운동 단체 협의회’를 만들어졌지요. 막상 그 단체가 만들어지자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영순 씨가 위원장을 맡고, 내가 노조 특위장을 맡았습니다. 88년 노동법 개정 투쟁과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을 위한 노동자 대회 땐 정말 감동의 물결이었습니다. 연세대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던 모습은 정말 노동자의 물결 그 자체였으니까요.

그후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조직을 결성하자는 말과 함께 전국회의 결성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럼 전국회의를 누가 감당할 것인가. ‘전국 노동운동 단체 협의회’(이하 노운협)에서는 나를 파견했어요. 89년 임금인상투쟁과 노동법 개정 투쟁을 통해 실질적인 전국 조직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죠. 그런데 제가 또 폐결핵이 걸린 겁니다.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무리를 한 거죠. 의사가 쉬라고 하는데, 어찌 쉴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전국 조직 건설을 보고 쓰러지자, 다짐하며 실무자 10명을 구성해서 1년 동안 민주노조 전국회의를 조직해 가며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협의회’(이하 전노협) 건설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90년 1월 22일 공권력이 몰아쳤지만 전노협은 결성됐습니다. 감격적인 그 순간을 맞이하고 몸이 안 좋아진 나는 ‘노운협’으로 다시 복귀를 했습니다. 복귀를 해서는 이영순 위원장이 힘에 부친다고 해서 위원장 역할을 맡게 되었지요. 그 때부터 복잡한 일들이 들어 나기 시작했습니다. 민중당에서는 자기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동맹’(이하 사노맹)은 그들대로 비판 아닌 비난을 해대고, 노동조합 운동도 제대로 못해본 사람들이 상급 단체에 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달라고 항의하고…. 90년 넘어오면서부터 뭉치자고 한 것들이 깨져 나갔습니다. 전국 민주 단체 연합’(이하 전민련)도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운동을 지도했던 사람들이 생각의 차이를 주장하며, 자리 다툼도 심하게 벌였구요.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통해 민중의 동력은 살아나는데, 운동권은 내분으로 소용돌이 쳤습니다. 몸이 힘든 건 견딜 수 있었으나, 마음이 힘든 건 너무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아마도 한계였겠지요. 90년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상황이 미묘해졌잖아요.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개량화 공세가 치열하게 일고, 지도부들이 동요와 혼란을 거듭하면서 개인적 입지를 향해 찢어진 겁니다. 나 역시 그 한계 속에 있었지만 노동자와 민중의 힘이라는 커다란 토대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 인해 끓어오르던 대중의 열기를 모아 쉽게 투항하지 않고, 변절하지 않는 대중조직을 건설해야 된다고 주장했죠. 그게 바로 ‘전국연합’입니다. NL쪽에서 전민련이 있는데, 무슨 전국연합이냐고 강하게 비판했죠. 왜냐면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사람들이 전민련을 장악하고 있었거든요.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PD와 NL은 물과 기름 같았으니까요. 도대체 무슨 진영, 무슨 진영하는데, 왜 우리끼리 진영 싸움을 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어떻게 이 갈라진 골을 메울 수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결국 전국연합을 결성했으나, 그 골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습니다. 전국 조직의 명칭을 정하는데, ‘민중연합’이냐, ‘민주연합’이냐를 놓고 서로의 입장을 대변한 이름만 되풀이했으니까요. 도저히 그 반목을 없앨 수 없어, 사회를 진행하던 저는 오늘은 결판내자고 하면서 ‘전국연합’을 제안한 겁니다.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이바지하자고 했던 그 조직도 시간이 흐르면서 갈라져버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회의가 몰아치는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되돌아 볼 시간을 갖고 싶어 ‘노운협’을 다른 분에게 넘기고 저는 연구소를 만들어 탐구와 사색의 시간을 갖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관계를 맺고 있던 한국통신 내의 민주파가 노조 지도부를 장악한 겁니다. 예상을 하지 못한 엄청난 쾌거였지요. 한국 최대의 사업장이며, 주요 사업장의 일이니 구경만 할 수 없었습니다. 94년부터 그 뒷바라지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어느 정도 내부 동력이 생기자 95년도에 뒤로 물러나 예정된 연구의 시간을 갖으려 했는데, 공권력 투입으로 ‘한국통신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우왕좌왕하는 동지들을 몰라라 할 수 없어 또다시 1년을 그 일에 매달리다, 노동악법 중 하나였던 3자 개입으로 수배를 당했으나, 그것으로 수배 명목이 충분치 않자 ‘노운협’을 이적 단체로 몰아 국가보안법을 걸은 거지요.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 갈 때 그 꽃을 틔운다

수배 생활은 힘들고 괴롭지만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주로 책을 보고 많은 것들을 되돌아봤습니다. 자본론부터 시작해서 고전도 다시 읽고, 변혁 운동에 대한 한계와 극복에 대해, 내 개인의 문제점에 대해 깊이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지요. 인간의 뿌리는 무엇인가. 사회주의라든지 진보라는 개념은 종전의 책에서 본 이야기처럼 정말 맞는 것인가. 종전에 우리 운동의 개념에서 소외당한 공동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인간에 대한 참 의미를 더듬어가면서, 포괄적이면서도 장기적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너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지요.

다시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수지만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생각의 차이가 아니라, 깊이와 폭의 차이며, 이탈과 타락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겁니다. 사실 운동을 하면서 얼마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까. 세상을 좀더 낫게 만들기 위해 알게 모르게 도와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힘들지만 우리 대에서 다음 대가 딛고 넘어갈 수 있는 디딤돌 하나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주적이고, 유대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요. 유대란 서로 주고 받는 연대의 차원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주듯 받을 걸 계산하지 않고 주는 겁니다. 스스로 그런 마음이 쌓일 때, 우리의 운동에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 갈 때, 그 꽃을 틔울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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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학생신문 149호)

어떤 어려움에도 나는 비관하지 않는다
류재영 기자 unipress@e-unipress.com

조정환 - 서울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에서 일제하 프롤레타리아 문학 연구. 1987년에 문학운동의 당파성 강화를 주장하는 민주주의민족문학론을 제창했고, 1989년에 월간 「노동해방문학」창간에 참여, 노동해방문학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한 1990년 말에서 1999년 말까지의 수배기간 동안에는 이원영이라는 필명으로 국제주의적 및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와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번역했다. 2000년 9월 다중문화공간 왑의 창립에 참여했고 현재 도서출판 갈무리 편집인을 맡고 있다.

"노정권의 수배 조치로 저자는 지금까지 15개월동안 사랑하는 동지들과 단절되고 정든 아내와 강제로 헤어져야 하며 이 거친 남한 땅에 태어난 딸의 얼굴조차 모르는 채로 살아야 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 <노동해방문학의 논리> 서문 中, 조정환, 1990

수배가 풀리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얼굴조차 몰랐던 딸' 문영이는 올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정말이지 12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90년대 초까지 그에게 있어 최대의 화두는 다른 사회주의자와 다르지 않았다. '당 건설' 그리고 '당파성'.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을 더 이상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과거와의 단절, 도대체 12년이라는 시간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인터뷰를 약속했던 갈무리 출판사에 아직 조정환 씨는 도착하지 않았다. 대신 반갑게 맞아주는 분이 있었다. 1980년대 말부터 수배된 조정환 씨와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동지'중 한 명이다. "이곳으로 이사온 지는 얼마 안돼요. 예전에 정말 이사 자주했는데 이제는 좀 오래 머물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는 그동안 조정환 씨와 이곳 사람들이 겪었을 만한 어려움이 묻어났다. 얼마 후 조정환 씨가 도착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건네는 데 "이런 게 별로 익숙치 않다"며 웃는다. 오랫동안의 은둔 생활에서 굳어진 습관 탓이었다. 혹시 아직도 조정환이라는 본명보다 이원영이라는 가명이 익숙하지는 않을까?

- 10년 간의 수배 생활이 정말 힘들었을 텐데요.

지속적으로 만난 사람은 다섯 명을 넘지 않았죠. 가족이나 동지들은 물론 만날 생각도 못했구요.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이상한 오해들이 저에게 들려올 때 였어요. 인도로 갔다, 북한으로 갔다, 지방으로 가서 중이 됐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거나 변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나설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무기력했죠. 한 번은 실종자로 제가 '시사매거진 2580'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화를 걸어서 방송 정지를 요구하는데 그 쪽에서 믿을 수 없다고 해서 무척 애먹었죠. 주민등록번호부터 지은 책, 아는 사람까지 다 대고 나서야 간신히 제가 조정환이라는 걸 설득시켰죠. 아마 방송에 제 얼굴이 나갔다면 제 수배 생활은 훨씬 힘들어졌을 겁니다. 그리고 제 주 관심사가 사회과학이니 책을 살 때도 항상 긴장을 하고 서점에 절대 오래 머무를 수 없었죠. 혹여 불심검문이라도 당할까 항상 긴장하면서 길을 다녀야 했구요. 그래도 수배 기간 동안 주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수배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 최근 펴낸 「지구 제국」이나, 얼마 전 말지에 연재했던 글을 보면 노동해방문학운동을 했던 과거와는 크게 생각이 바뀌었다고 느껴집니다.

한국사회운동도 80년대와 90년대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고 보는데요. 개인적으로는 94-95년이 그런 시기였습니다. 80년대 운동가들 사이에는 노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노동자 계급을 혁명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정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죠. 그런데 89-90년 동구 사회주의와 소련이 몰락하고 사회주의 국가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기존의 혁명 이론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그때는 마침 제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으로 수배생활을 시작할 무렵이었죠. 수배 생활은 한편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월세방에 틀어박혀 한국에 번역된 맑스와 레닌의 책을 모아 모두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국제 사회주의 관련 문헌과 SWP(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 내부에 존재하는 당 경향과 평의회 경향의 논쟁을 연구하며 평의회에 관심을 갖게되죠. 잊고 있던 파리꼬뮨을 눈 여겨 보게된 것도 그때였죠. 이후에는 68 혁명과 당시 학술계의 관심을 끌었던 알뛰세르와 푸코 등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딸리아의 자율주의 운동과 자율주의 이론가 네그리를 알게 되고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참여했던 당이 얼마나 중앙집권적이고 위계적이었는가에 대한 네그리의 반성은 지난날 사노맹 활동을 하면서 제가 느꼈던 당 건설의 문제점과 유사했습니다. 당파성에서 자율성으로의 전환. 그 이후부터는 자율주의 운동에 대한 번역과 연구를 진행해왔고 <지구 제국>은 그 동안 변화되어온 저의 생각을 정리하고 집약한 첫 번째 책입니다.

- <지구제국>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신다면

제국이란 세계화 시대 지구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이전에는 거대한 국민국가가 식민지를 구축하고 패권을 행사했고 대항전선도 제국주의와 식민지 민중 사이에 형성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권력이 특정 국민국가에 모여있지 않죠. WTO, IMF 등의 초국가적 기구, 초국가적 자본이 지구사회에 주권을 행사합니다.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이란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대항방식도 지구적 다중의 연대를 구축해 제국의 압제를 봉쇄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여기서 다중이란 68 혁명이후에 분화되어온 여러 유형의 대중 집단을 말하는데요. 기존의 노동자 계급이라는 말로는 다양한 대중을 정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네그리는 이 다양한 대중을 스피노자의 개념을 빌어 multitude라 정의하는데요. 저는 이것을 다중(다양한 대중)이라고 번역했습니다.

- 말 지에 실렸던 <국가권력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글을 보면 '바꿀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시고 있던데요.

존 홀러웨이의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책이 곧 번역될 예정인데요. 진보정당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읽고 답해주길 바라는 책입니다.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오히려 현재의 기본 골격을 강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뿐입니다. 반대로 국가, 정부, 당, 국민 등을 약화시키는 정치를 해야합니다. 지금 열거한 개념들은 다중을 수동화시키는 핵심적인 요소들이죠. 의회나 국가 등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의견은 그 구조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다중의 자치적인 조직들이 활성화되고 상호 교류가 고도화되면서 그 힘이 거대해졌을 때에만 제도를 활용할 수 있죠.

'활동가는 낙관적이어야 한다'. 사회변화에 낙관적이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인생 속에서 체득한 '모든 문제에는 해결책이 있다'는 그의 믿음, 낙관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볼 때에 가능하다는 그의 말이 진심으로 와 닿았다.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거대함은 우리의 거대함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거대함을 그들의 거대함으로 오인하고 있을 뿐이죠. 다중의 힘을 먹고 사는 제국은 결국 다중에 의해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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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21)

-바쁠텐데 인터뷰를 위해 시간 내주어 감사하다.
=원래 약속이 하나 있었는데 의례적인 만남이었다. 인턴기자들 만나려고 왔다. 술벗도 없었는데 반가웠다. 취재는 취재고 소주나 마시자.

-`처음처럼 백세까지' 직접 만들었나?
=‘처음처럼’ 나왔을 때 이름 보면서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 ‘초심을 잃지 마라’가 떠올랐다. 주위 사람들이 ‘초심을 잃지 않으면 왕따여도 지켜줄 것이고, 초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대통령 할아버지라도 당신을 볼 일이 없다’고 한다. 거의 내 좌우명이라 할 수 있다. ‘처음처럼’이 제일 중요하고 ‘백세까지’는 농담이다. 내 마음은 처음처럼 백세까지 간다는 것이다. 중간에 바뀌는 게 아니라 처음처럼 백세까지 영원히 간다. 그래서 섞어 먹으면서도 그 생각을 한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대학 입학 전까지 계속 제주도에서 자랐나?
=제주도 서귀포가 고향이고, 고등학교는 제주시에서 나왔다.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학력 고사 전국 수석을 한 것은 원의원이 처음인가?
=내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 와서도 고등학교 때까지 하던 대로 공부만 계속 했나?
=학자가 될 생각으로 1학년 1학기 때는 도서관파였다. 시골에서 올라와 열심히 공부해서 학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 세상과 사회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 당시 1982년 당시에는 전경들이 학교에 상주했고 광주항쟁에 항의하는 시위가 많았다. 현실에 참여를 해야 한다면 학업인지 직접적인 저항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면서 1학기를 보냈다. 한편으로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도. 도서관 출석률과 집회 참여도가 반비례했다.
이념 서클을 제 발로 찾아들어가 소위 본격적인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2학기 때부터 학업을 접다시피 하고 학내 시위를 과격하게 하다가 2학년 1학기 올라가자마자 정학을 맞았다. 구로공단에서 2년 반 정도 야학을 했고 공활도 갔다. 휴학과 정학을 반복하다가 4학년 되어서는 인천에 있는 한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해 노동조합 만들었다. 기술 없이 할 수 있는 웬만한 일은 다 해봤다. 그러다 신분이 탄로나 쫓겨나게 되었다.
학교로 돌아와 ‘직업적인 운동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89년까지 학생운동을 했다. 89년에 겨우 졸업을 했는데, ‘부모님에게 마지막 불효는 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학생운동을 하게 된 구체적인 계기는?
=광주항쟁이다. 유인물을 통해 광주를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선배들 통해서도 알게 되었다. 지하 이념 서클에서 활동을 했는데 법대 동기 360명 중에 60명 정도가 이념 서클 활동을 했다.
이념의 시대, 저항의 시대였고 저항에 대한 공감이 있던 상태였다. 참여하면 참여한 대로, 안 하면 안 한대로 부채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대학생들 사이에 강렬한 연대감이 심정적으로 있었다.
우리 시대가 불행했다고 생각한다. 모순이 있었으니 저항하려는 집단적인 움직임이 있었지, 사실 바람직한 것이야 모순이나 고통 없이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게 행복 아닌가. 그런 면에서 우리는 불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했다면 그런 결단들을 못했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흘러왔던 것이다.

-공단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고시공부를 시작했나?
=공단에서 나온 게 85년이고 85년부터 89년까지는 학내 조직 운동을 했다. 요즘 말로는 배후 조종 비슷한 일을 했다. 취직을 하려는 생각은 안 하고 스스로를 직업 운동가라고 생각했다. 학교는 안 짤릴 정도로만 적을 두고 있었고 고시 공부로 전환한 것은 89년 말, 90년 무렵이다.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하고 노태우 정권 들어서고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며 그 속에서 이념적인 방황을 했다. 당시 많은 운동권이 이념적 혼란에 빠졌고 전향을 한 사람도 많았다. 나같이 전향에 가깝다시피 이념의 껍데기를 버려야 하겠다는 사람들은 많이 변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운동권 내부에서 분화가 많이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을 많이 한 편이다. 당시에 전향했다고 욕도 많이 먹었다. 공개적으로 ‘전향했다’고 비판 받지 않은 이유는 그렇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기존의 내용으로서의 사회주의, 방법으로서의 혁명을 나는 버렸다.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를 버렸을 때 ‘어떤 방향과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 대안을 내세울 것인가, 내 에너지를 어떻게 바칠 것인가’에 있어서 무척이나 방황을 많이 했다. 하지만 방황을 한다고 해서 현실 세계에서 사라질 수는 없으니까 ‘제도권 내로 들어가자’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개량주의이라고 비판 했지만 점진적인 개혁의 길을 찾고, 우리 사회 한편에서 이뤄졌던 경제성장, 민주화 등과 같은 인정할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했다. 그래서 통합적인 가치를 찾자는 고민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변화의 폭이 너무 심하지 않나? 납득이 되지 않는다.
=변화의 폭이 커서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한테 욕도 많이 듣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 변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변화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보며 민중민주혁명이나 인민민주주의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과 같은 북한의 혁명 노선, 우리 내부 서클들이 추구한 혁명 노선 등에 대해 생각이 변한 것이다. 그 부분을 받아들이려 하고 준거로 삼고 살아왔는데 그 이론 틀은 틀렸다는 결론을 내렸다.
충격과 혼란에 빠진 대표적인 계기는 토플러의 책이었다. 정보 혁명의 물결이 다가오고 우리 사회가 정보화 사회로 넘어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독점 자본주의의 말기적 현상이라고 치부하면서 계급투쟁 이론만으로 사회 변화를 어떻게 다 담아낼 수 없다.
윤리로서 마르크시즘의 휴머니즘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마르크시즘의 사회 역사 이론들은 버렸다. 맑시즘은 종말론이지 과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현실을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틀로서 의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마르크시즘의 휴머니즘과 같은 열정에서 도망간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대안이 한나라당이었어야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고민과 현실의 제약과 변수에 의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완결된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 다닐 때 친했던 친구는?
=대부분 운동을 같이 했던 친구들이다. 대부분 운동 현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제일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부산에서 노동 운동을 하는 민주노동당 당원이다. 참여연대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고, 변호사 된 친구는 지평에서 일하고 있다. 나같이 한나라당 와서 꾸역꾸역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한테 ‘네가 이용당하는 것이지 한나라당을 변화시킬지 모르겠다’고 주위에서 걱정도 한다.
친했던 친구 중에 여전히 노동운동하고 있는 친구부터 크게 돈 벌어서 자본가의 길을 걷는 친구까지 있다. 다같이 운동하던 친구들인데. 제가 대학 들어가자마자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어차피 오래 사귄 친구들은 운동권일 수밖에 없다. 서클 또는 공장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지금은 가끔 만난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의 질타는 없는가?
=기본적으로 질타를 한다. 그런 질타의 수위가 내려갈수록 주문이 강해지기 때문에 더 부담스럽다.
차라리 욕을 들으면 ‘알았다, 잘 먹고 잘 살게’라고 생각해 버리면 마음이야 편한데, ‘힘들지? 잘해봐’라고 하면 오히려 더 부담스럽다.

-정치활동의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인가?
=솔직히 김민석, 김부겸 두 사람이 꼬셔서 하게 되었다. 김민석은 민주당 오라고, 김부겸은 한나라당 오라고 꼬셨다. 부겸이형을 아직도 아주 좋아한다. 정말 한국의 한 시대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고 그 정도 수준이 되는 사람이다. 내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부겸 의원 오라고 전화하겠다.
=당장 오라고 불러라. 독수리 5형제 중 김부겸 의원이 없었다면 내가 한나라당에 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부겸이형은 ‘한나라당도 힘들지만 맡아서 5년 내지 10년을 하면 답이 나올 것이다’고 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어려운 답이 한나라당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을 봤을 때는 한나라당에서의 역할이 더 개혁적일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우리 미션을 어떻게 설계할 것이냐’는 문제인데, 보수당을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나라당 개혁파가 생겼다.
전두환한테 줄 설 이유가 없다. 노태우한테도. 나는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다. 안에서 품고 있는 속뜻을 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부겸이형한테 원망 아닌 원망을 많이 했다. 감히 지게지고 가다가 벗어놓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지게 백개를 지고 있다. 나도 벗어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는 데까지 가보자’는 마음이다. 그런데 아흔아홉 번 때리면 갈라질 수 있는 부분도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다 구경꾼이다. 돌의 강도는 돌을 깨는 사람만 안다.

-강풀의 <26년>은 안 봤나?
=몰랐는데 인터뷰한다고 해서 다 봤다. 내 느낌은 첫째 너무 공감하고 너무 가슴이 아프다. 내가 저격총을 쏘려는 마음으로 테러리스트가 되려고 한 적이 있다. 내 가족을 죽였던 상대방에 죽음으로 보복했다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광주는 아직 현재성을 갖고 있다. 광주와 다른 홀로코스트와의 차이는 현재성이다. 현재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한편으로는 섬뜩하다. 광주와 6.25전쟁, 그리고 4.3을 보자. 6.25도 아직 살아있다. 북한하고 어떻게 화해를 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역사의 질곡이 굉장히 깊은 문제라 할 수 있다. 80년으로부터 26년이 지났고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흐를 텐데 ‘이 문제를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하다.

-광주에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 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성 안에서 그 안쪽을 깨뜨리는 역할을 하겠다. 과거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빚진 사람들은 조용히 있어야 한다. 빚의 탕감은 피해자가 용서해서 이뤄지는 것이지, 가해자가 ‘이쯤하면 됐지 않니?’라고 하면 고이즈미가 하는 짓과 무엇이 다른가?
다른 문제는 ‘사회 에너지를 계속 과거사에만 집중할 것인가?’이다. 집중은 미래를 향해서 하되 과거를 정리해야 한다. 내가 한나라당에 2000년에 들어왔다고 해서 한나라당이 80년에 총질한 것을 내가 왜 책임져야 하나? 사람들이 나를 비겁하고 야속하다고 한다. 경제성장이라는 자산만 가져가지 말고 광주의 부채도 가져가라는 것이다. 물론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진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정확하게 할 것이다.
전두환을 라이플로 저격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학살범을 저격해서 보복하는 것은 승리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소화하는 게 필요하다. 나는 그것은 확신한다. 26년이 정답이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

-가장 친한 국회의원은?
=남경필 의원이다. 더 친한 의원은 이성권, 김명주 의원이다. 제일 친한 의원 물으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처럼 싸움 붙이는 거랑 똑같다.

-한나라당에서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보수적인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꼬시는 것이다.

-원 의원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내 중심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걱정하지 마라. 사람들이 나를 많이 의심한다. 나를 20년 넘게 본 사람들도 나를 많이 의심한다. 하지만 나는 진실 되게 대답한다. ‘나는 내 할 일이 있다’고. 다음 총선까지는 한나라당 안에서 당장은 비전이 없어 좌절할지도 모른다. 좌절하더라도 전체에 도움이 되게 하려고 한다.

-전체에 도움이 되는 좌절은 무엇인가? 꿈꾸는 이상은 무엇인가?
=나의 도덕적인 세계는 영원히 안 온다. ‘어린 양이 사자들과 뛰놀고’라는 노랫말처럼. 불가능하다. 난 사회주의 이념에 혼란을 느끼면서 자유주의까지 왔다.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너무 잘 안다. 하지만 그 맹점조차 안고 가는 쪽으로 가겠다. 기회가 오면 힘 발휘해 바꿀 것이다. 난 뭐든 정직하게 하려고 한다.

-왜 한나라당에 있는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나라당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진짜 바뀌려면.

-한나라당은 기득권층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가?
=누군가는 바꿔야 한다.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계급으로 세상이 나뉘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나라당의 변화가 불가능하겠지만 난 그렇게 안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려고 하는 것이다.

-민정당 인적 자원 청산은 예전부터 계속 나온 얘기인데 정작 2006년에도 민정당 정신이 부활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떻게 변화시키겠다는 것인가?
=나도 헷갈린다. 시대에 대한 고민 중에서 겹치는 부분도 있고 나만의 것도 따로 있다. 내가 할 일을 정직하게 할 테니, 교집합을 위해서 사랑을 보태 달라. 동시에 냉철한 비판도 필요하다.

-한나라당으로 간 궁극적인 이유는?
=나름대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말했듯이 해답을 못 갖고 방황하는 중이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한나라당의 변화가 꼭 필요하다.

-대학 시절 때 연애 경험은 어떤가?
=미팅 대타를 몇 번 나간 적 있는데 재미를 보진 못했다. 이런 저런 스토리는 많지만 딸 둘까지 있는 마당에 지금 어떻게 말할 수 있나.
제주도 동향 동기생들 중에 아주 가까워진 친구가 있었다. 동문회 같이 하고 대성리 MT도 같이 갔다. 3년 동안 친구로 지내다가 그 친구와 4학년 때부터 애인이 되었다. 한 때 수배를 받아서 1년 넘게 도망 다닐 때 1년 넘게 못 만나기도 했다. 믿음과 사랑은 세월을 넘어 이어졌다.
그렇게 85년부터 8년을 사귀고 결혼을 했다. 사법 시험 합격하고 나서 바로 결혼을 했다. 오래 사귀어서 서로 잘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요즘 드는 생각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계속 궁금하다. 직업 운동가로 살 때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생각을 자꾸 버리려고 했다. 내 자신이 약해질까 두려웠다.

-고백은 어떻게 했나?
=봉천동에서 자취를 했다. 참 생각이 많이 났다. 고백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자취방으로 초대를 했다. 내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를 불렀다. 영양보충을 하자며 삼겹살을 같이 먹자고 불렀다. 그 날 넷이서 내 방 안에서 삼겹살을 맛있게 먹었는데 소주만 실컷 먹고 결국 고백을 못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해보니 삼겹살 먹을 때 자신을 좋아한다는 느낌이 왔다고 했다.
두 번째는 야학하던 때 어느 모임에 갔다가 뒤풀이에 갔는데 떡이 남아서 싸가라고 했다. 떡을 싸오며 누구에게 갖다 줄까 생각을 해보니 줄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었다. 자취방에 무작정 찾아 갔다. 마침 방에 있었다. 방에 있어서 같이 떡을 먹고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리고 밤이 깊어져서 아무 말이 필요 없었다.

-떡을 건네줄 때 핵심적인 질문은 무엇이었고 부인의 대답은 무엇이었나?
=8년 사귀고 결혼해 결혼 생활 13년째다. ‘당신의 허물까지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말을 제일 좋아한다.
상대가 변해야 내가 해준다는 조건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내가 사랑할 수 있는가? ‘숱한 허물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수 있는지, 그 사람을 편들어 줄 수 있는가’라는 마음이 있을 때는 나 스스로도 고귀하게 느껴진다. ‘love you as you are’다.

-연애하며 특별한 추억은?
=연애하며 가장 미안하고 가슴 아픈 일이 하나 있다. 신림사거리에서 가끔 데이트를 했는데 돈가스 집에 돈가스를 먹으러 갔다. 아내에게 돈이 있을 줄 알고 시켰다. 계산할 때쯤 확인해보니 서로에게 돈이 없었다. 나는 물론 빈털터리였다. 아내에게 잠깐 나가 있으라고 하고 나 또한 바로 뛰어나와서 손을 잡고 도망쳤다. 얼마 뒤에 돈 갚아주려고 갔는데 가게가 없었다. 지금도 아내는 돈가스 이야기가 나오면 울려고 한다.
또 다른 일은, 고시 공부 스터디를 같이 했던 친구들과 1차 시험 보고 난 뒤 지리산 종주를 연인 동반으로 간 적이 있다. 2박3일간 종주를 하는데 아내가 등산을 잘 못하지만 지는 것을 싫어해 꾸역꾸역 걸어갔다. 세석평전을 가는데 우리 둘만 뒤쳐졌고, 해는 떨어졌는데 후레쉬도 없었다. 거의 실신 상태였던 아내가 너무 힘들어했지만 결국에는 세석평전에 도착했다.
가자마자 아내는 결국 혼절을 했다. 텐트 안에 눕혀 발을 높이 올려놓고 웃통을 벗기고 여자들만 텐트 안에 남았다. 남자들은 모두 밖에 나와 있었다. 그 때 종교가 없었는데 텐트 밖에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아내가 깰 때까지 한참을 무릎 꿇고 기도를 했다. 기도라는 게 별 거 있나? ‘여기서 잘못 되면 안 됩니다’라고 계속 빌었다. 그 뒤로 다른 커플들 전부 ‘당신은 내가 아파서 쓰러졌을 때 저렇게 기도할 수 있는가’라며 싸웠다고 한다.

-어떻게 프로포즈했는가?
=아내가 야학하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나랑 비슷한 시기에 생각이 변했다. 82학번인데 86학번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다. 수많은 고민들을 같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우리 사랑은 이성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신비를 꿈꾸는 게 아니라 거의 조폭의 의리와도 같다. 사람 하나가 얼마나 소중하고 사람 하나의 작용이 얼마나 크게 미칠 수 있는지를 아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원래 나는 결혼 반대, 여성 해방, 가족 해체주의자였다. ‘당신과 보다 많은 시간을 같이 함으로써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게 좋은 사람이 될 것 같다’고 청혼을 했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서는 남성의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특별한 추억이 있는 장소는?
=‘강 건너 집’이 제일 기억난다. 관악산 올라가는 쪽 냇가 건너편에 있었다. 지금은 다 헐어버렸다. 강의 때 교수님 모시고 가서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대운동장 위 둔덕에서도 막걸리를 많이 마셨다. 관악산 아래에 있는 작은 댐 위에서 보신탕을 많이 먹었다. 하숙생 친구들 하숙집에서 솥을 가져오고 돈 있는 친구들 돈 모았는데 15명 정도 모이면 딱 좋았다.
졸업 하고 나서 몇 번 가보았는데 너무 많이 변했다. 그 때는 녹지 공간 많았는데 지금은 건물이 아주 많고, 특히 기업들이 지은 건물이 많이 늘은 것 같다. 예전에 비하면 세련된 것 같지만 낭만이 없어진 것 같아 아쉽다. 서울대는 연구시설에 투자가 많이 되어야 될 것 같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추억의 장소들을 콘크리트가 차지하고 있으니 벌써 이렇게 늙었나 생각이 든다.

-딸들 교육은 어떻게 시키는가?
=스트레스를 안 주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인들이 알아서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기회를 주고, 자극이 필요할 때 좋은 자극을 주는 일을 한다.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싹을 뽑아 올려야겠다는 생각은 안 한다.

-딸들에게 몇 점 받는 아빠인가?
=내가 생각할 때는 100점 만점에 40점을 과락이라고 본다면 59점 정도가 될 것 같다. 과락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원할 때 있어주는 아빠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3주일 장기간 외국 출장을 다녀와서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반겼는데 아이들은 오히려 덤덤했다. 보고 싶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평소에도 못 보잖아’라고 말했다. 충격을 받았다. 기회가 될 때 일단 자주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있을 때 잘 해야겠다.

-대학 1학년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돌아가면 더 치열하게 더 열심히 할 것 같다. 그 때의 대학이라면 민주화가 최고의 과제였기 때문에 더 철저히 운동해서 전두환, 노태우를 퇴장시켰어야 하지 않았을까? 대학생들은 혜택을 많이 받았고 빚을 많이 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빚을 갚는 방법은 민중들한테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역사의 제단에 나를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대학이라면 ‘누구를 타도할 것인가? 누구한테 최루탄을 쏴야 할 것인가?’가 모호하다. 진보운동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과제가 달라졌다. 지금의 대학으로 돌아간다면 전혀 다르게 살 것 같다.
전공 선택부터가 문제인데, 경영을 택했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은 생산성 혁신 밖에 없는데 과학기술혁신과 경영혁신이 핵심이다. 과학기술, 경영, 가치 창조 부분에서 인재들이 다른 것들 신경 안 쓰고 마음껏 할 수 있고 삶의 질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회적 지향점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학에 들어간다면 나는 놀기 좋아하고 호기심 많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보려고 하지 않을까? 매킨지를 넘을 수 있는 경영컨설팅지식그룹을 만든다든가 펀드매니저 같은 것을 해보고 싶다. 이용주

<한겨레> 인턴기자 minamjij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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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허무주의자들에게 고한다"
  [대화]〈12〉서경식 & 김상봉 : 디아스포라, 민족, 그리고 역사
  2006-09-06 오후 6:23:49

 재일조선인 3세 서경식은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당시 '재일거류민단 하계학교' 프로그램에 참석해 경주를 방문한 그는 먹고 살기에 급급해 문화 유적 따위는 돌볼 겨를이 없는 모국의 가난을 보았다. 그리고 경주의 한 박물관에서 제 몸뚱이조차 잃어버려 머리만 남은 석불을 보고 시를 썼다.
  
  석불
  
  
머리가 아파질 만큼 하늘이 깊은 날
  시골 마을의 작은 박물관 기와 조각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붉은 문을 들어서다
  머리 하나가 서늘하게 미소 짓고 있네
  불타버린 석단에 엄숙한 얼굴로 서 있는 내 앞에서
  머리만 남은 그대는 조용히 미소 짓고 있네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도 없고 위험을 지킬 만한 철책도 없네
  말라버려 숨죽은 잡초 위에 머리만 남은 그대
  나는 그대를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매미도 울지 않는 여름 눈부신 빛 속을 나는 그대를 향해 다가선다
  비틀어져 볼품없는 소나무
  그 조그만 그늘 속에서 돌로 된 그대는 미소 짓고 있네
  얼마나 긴 세월을 그대는 그렇게 웃어 왔는가
  제대로 된 논밭도 없는 산악지대
  경상북도의 가난하고 시커먼 백성들에게 그대는 그렇게 미소를 건네 왔다
  하지만 세월의 태풍은 그대의 강건하고도 부드러웠던 몸을 빼앗았다
  코조차 떨어져 나가고 윤곽 여기저기에는 이끼들이 돋아나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대의 이 안정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세월이 흐르게 만들었던 백성들의 눈물조차 마침내 말려버리고 마는
  경상북도의 여름에 평화롭게 웃고 있는 그대
  그대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남의 나라 일본의 말로 이야기하고 그대의 이름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도시인의 손을 가져 그대를 흔들어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야간열차를 타고 배를 타고 일본에서 왔다
  그러니 이 마을에서 가끔 교토를 떠올리기도 한다
  아마도 그대는 일본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대가 몸통을 잃어버린 것도 코가 떨어진 나간 것도 그 나라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 눈으로 그 나라 인간들이 이 나라에서 무엇을 했는지 보았을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온 나그네
  그대는 왜 나를 비난하지 않나
  그럴듯한 얼굴로 카메라를 들고 그대를 가엾어 하려고 하는 이런 나를
  
  그대는 미소 짓고 있네
  정원석과 같은 산들에 벌레처럼 들러붙어 살아가는 백성들에 둘러싸여
  그대는 미소 짓고 있네
  시골마을 박물관 마당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짓는 그대
  시커먼 세월의 흔적 돌로 된 그대
  그대를 금이나 동 같은 것이 아닌 돌로 만든 조상의 그 지혜가 얼마나 기특한지
  나는 그대 앞에서 무심결에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간밤에 해협을 건너 처음 이 나의 나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니
  그러니 그야말로 나는 납득할 수 없다
  
  그대의 풍요로운 입가
  어째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뒤틀리지 않을까
  그대의 부드러운 눈의 윤곽
  어째서 피눈물이 흘러넘치지 않을까
  나는 무엇을 구경하고 있을까
  나에게 보이는 것은 그대의 부드러운 미소
  하지만 나의 귀에는 나의 관광에 들어붙어 먹고 살려는 껌팔이 소년들의 조숙하고 쉰 목소리만 끼어드는 것이다

  

▲서경식 도쿄 게이자이대 교수(왼쪽) ⓒ프레시안

  거리의 성매매 여성들이 15세 소년인 자신마저 붙들어 세우는 어둡고 우울한 모국의 모습, 또 그 모국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첫 한국 여행을 통해 얻은 문제의식은 평생 그의 화두가 됐다. 조국 방문 후 2년이 지나, 그는 이 시들을 묶어 박일호라는 필명으로 자비 출판했다. 그리고 그 시집의 머릿글에서 첫 고국 여행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년 전 나의 첫 한국 여행은 고향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스스로의 존재기반으로서의 고향 또는 민족을 실제적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나는 고향의 실체를 잡고 싶었다. 한국의 8월은 둔기로 얻어맞는 것처럼 더웠다. 나는 그 더위 속에서 마비되려는 의식에 피를 흘리는 듯한 방식으로 고향의 모습을 기록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목격자이고자 했다. 목격자는 방관자가 아니다. 목격자는 언젠가 증언을 한다. 그리고 나는 목격으로부터 증언까지 2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무능력은 나의 진실의 증언을 허락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말은 공중을 떠돌고 의미를 잃고 허망하게 붕괴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말은 그대들의 머리를 자극하는 데는 너무 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대들 일본인들에게 있어 나의 시는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모른다. 아마도 이 책은 내 마지막 시집이 될 것이다. 나는 일본어로 고향을 쓴다는 것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고, 모국어로 고향을 쓰기에는 나는 너무나 일본인인 것이다. 자, 나는 증언했다. 내일에는 이미 나는 목격자에 머물러 있지는 않으리라."

  
  서경식은 마치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스스로의 미래를 예고라도 하듯이 재일조선인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와 글 곳곳에 토로하고 있다. 서경식이 40년 전에 쓴 시와 글을 읽고 김상봉은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이 시와 글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김상봉 전남대 교수 ⓒ프레시안

  전편의 대담("2006년 한국은 '고통의 역사'를 잊었나")에서 서경식이 '동아시아인으로서 공통성'을 쉽게 언급하는 한국 지식인들에게 문제의식을 느낀 것도 그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에 기반한 것이다. 역사의 고통을 잊은 사회는 막연한 자부심과 긍지에 기반한 왜곡된 민족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처럼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의식은 국가의 경계를 넘는 디아스포라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현재', 그리고 '미래'와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서경식은 20세기 소수자의 삶이 배어 있는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이 새로운 보편성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서경식이 김상봉과 만나는 부분도 이 대목이다. 김상봉 역시 (패권적,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기 때문이다.
  
  서경식과 김상봉은 타자와의 만남이 가능한 주체를 꿈꾼다. 김상봉이 '서로 주체성'이라고 이름 붙인 그것은 서경식이 '디아스포라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대안적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자발적 연대를 통한 '공동체', 바로 이것이야말로 21세기의 '민족'이 되어야 한다.
  
  대담 후반부를 발췌해서 소개한다. 두 사람의 대담엔 서은혜 전주대 교수가 배석해 통역과 진행을 도왔다.
  
  "민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때"
  
  서경식 : 윤동주의 시 '별을 헤는 밤'을 보면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프란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나온다. 윤동주는 이를 통해 열린 형태의 민족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본다. 민족의식이 형성되는데 타자와의 만남은 아주 중요하다. 타자와 만나지 않을 때 국수주의적 민족의식이 우선한다.
  
  윤동주의 모어(母語)는 조선어였다. 나는 일본어가 모어다. 한국에서 일본의 지배는 35년 만에 끝났지만 아프리카처럼 100년 가까이 식민 지배를 받았다면 모어가 없어지고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개인들에게 모어가 절대적이라면 별 문제가 없다. 자기가 쓰고 있는 모어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면 나도 운동주의 '서시'를 보고 이부키 같이 번역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내 사고엔 일본적인 사고가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름답다, 좋다는 느낌 자체가 일본어로 구성된다.
  
  일본어라는 모어는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고 아기일 때 투입된 것이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 그것이 원초적인 폭력이다. 이 과정이 폭력으로 인식되면 근원적인 것도 의심하게 된다. 애국심이나 가장 깊은 수준까지 생각하면 자기가 쓰고 있는 말에 대한 의심까지 든다.
  
  김상봉 :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는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민족이 '실체'냐 '무(無)'냐 하는 잘못된 인식으로 빠질 수 있다. 민족은 '실체'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집단적 주체다. 그것은 '우리'라는 공유된 자기-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 존재하고, 그것이 없으면 사라진다. 진정한 주체성은 타자와 만남을 통해 형성된다. 언제나 타자와 만남을 통해 참된 의미의 주체성이 형성되고 그게 '서로 주체성'이다.
  
  나는 이전에 민족을 가리켜 역사와 언어라고 하는 어떤 전제, 조건 위에서 수립되는 '공동 주체성'이라고 풀이했는데, 서경식 선생을 만나면서 내 안에 굉장히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타인과 만남에 전제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역사나 언어라는 전제를 버려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땅에 들어온 피부 색깔이 다른 이주민들과의 '공동 주체성'의 형성이란 과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민족은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만남의 공동체' 정도로 느슨하게 개념 지어져야 한다.
  
  윤동주 시인이 패, 경, 옥 등 이국 소녀 이름들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민족주의 개방성에 대해 개념적인 말로 형상화시켜야 하는 게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디아스포라적인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지금까지의 민족 개념이 아닌 다른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혼자서 곱씹으면서 도달한 결론이 우리 시대에 추구해야 할 개념은 만남의 지평 그 자체를 민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서경식 : 5·18에서 '서로 공동체'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다 나서서 싸운 것은 군사독재에 대한 분노, 일상적인 지역적 억압에 대한 분노 등이 근간이 됐다. 한국 사람이니까, 광주니까, 이렇게 보는 게 아니다. 다소 진부하지만 정치적 목표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 ⓒ프레시안

  김상봉 : 5·18을 생각하면 정치적 이념에 앞서야 하는 게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의 문제다. 그것 없이 정치적 이념이 먼저 갈 때 인간은 수단화된다.
  
  서경식 : 1960년대에 일본에 재일조선인들의 정체성이 문제가 됐을 때 일본 내에서 조선 문화를 얘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주장은 일본이 고대와 중세 때 백제, 고려 등으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것이다.
  
  문화가 있다, 없다는 문제와 지배, 피지배는 다른 얘기다. '문화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은 자기가 천대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다. 그렇다면 '문화가 없는' 사람들은 지배당해도 되는가? 이런 사고방식은 서양인들이 인디언들을 문명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남경태 옮김, 그린비 펴냄)에 보면 식민지 지식인의 인식의 세 단계가 나온다. 처음에는 백인에 동일화하려고 노력하고, 두 번째 자기들이 고대에 있어 얼마나 훌륭한 문화가 있었는지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고대 아프리카에 훌륭한 문화가 있었다고 해도 백인들은 그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문화를 시발점으로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눈앞에 있는 싸움을 통해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 세 번째 단계가 바로 디아스포라인 내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파농도 디아스포라다. 알제리와 별 상관없는 사람이었지만 알제리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새로운 보편성을 위해 싸웠다.
  
  김상봉 :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나누는 얘기들이 한국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보편성을 갖고 있다.
  
  서경식 : 디아스포라적인 객관성이 있다. 디아스포라야 말로 자신의 존재조건, 즉 언어조차 의심하면서 그래도 남는 자신을 근거로 타자와 서로 공동체를 만들 수밖에 없다. 피부 색깔이 다른 이주 노동자를 한국 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그들과 만남을 바탕으로 새로운 보편성을 이 사회에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허무주의에서 나오는 삶의 의지?"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언제나 그게 마음에 걸린다.
  외국이 숙소에서 눈을 떠,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실감이 급격히 흐려질 때가 있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슬프다거나,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과는 좀 다르다.
  (…)
  '누군가가 뒷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지만, 내 뒷머리를 이승으로 잡아끄는 힘은 너무 약하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
  이렇게 나를 이 세상에 잡아매 두는 끈들을 그 어떤 것도 인공적이고 불투명한 것이다. 내가'죽음'을 향해 몸을 내밀었을 때 그 끈들이 나를 꽉 잡아줄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내 쪽에서 손에 쥐고 있는 끈을 살짝 놓으면 그걸로 그만일 것이다.(<디아스포라 기행> 46~49쪽)

  
  김상봉 : 서경식 선생의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제일 가슴 아프게 읽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낯선 도시 호텔방에서 내가 뛰어내린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나를 붙잡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한 인간이 놓여 있는 측량할 수 없는 뿌리 없음, 허무함 등에 대해, 이 절규에 대해 내가 뭐라고 응답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허무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교양인이 아니라는 식의, 우리 시대의 가벼운 허무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허무주의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로서 아주 절대적이고 실제적인 허무의 체험과 또 정반대로 보통 허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삶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이 어떻게 같이 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정말로 서경식 선생이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금만 더 정면으로 선생이 그 지점을 대면해줄 수 있겠나.
  
  서경식 : 아주 근본적인 문제다. 민족과 관련된,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허무주의라고 할 때는 두 가지가 생각난다. 가네코 후미코(편집자 주: 조선인 남편 박열과 함께 1923년 히로히토 당시 일본 왕세자와 고관들을 폭살하려다가 붙잡힌 일본인. 1926년 3월 이들 부부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가네코는 석달 후 감옥에서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무정부주의자는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주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사생아라서 호적이 없었고, 그래서 소학교도 들어가기 힘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후미코는 가부장제와 국가 제도에 대해 아주 철저한 증오를 갖고 이를 끝까지 관철했던 사람이다. 그는 죽음으로 자기를 관철했다.
  
  이봉창(편집자 주: 193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의 지시로 일왕 히로히토의 암살을 시도했던 인물로 그해 10월 사형을 당했다)도 마찬가지다. 과자점 직공, 철공소 직공 등을 전전하던 그는 유가다를 입고 게다를 신고 김구 선생을 찾아가 '죽고 싶다. 죽을 명분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봉창이 마지막에 히로히토를 암살하기 위한 폭탄을 가지고 일본에 갈 때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그는 평생 집착이 없었다. 이봉창도 다이스포라였고 그래서 그런 허무주의자의 분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 ⓒ프레시안

  
김상봉 : 삶에 집착하는 한 누구도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를 걸 수 있다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오히려 궁금한 것은 삶에 대한 의지다.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 근원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 때문에 병든다. 삶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냉소에 빠지면 모든 게 다 면죄부를 부여받게 된다. 정반대로 그 허무주의를 참을 수 없을 때 맹목적인 우상숭배에 빠져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역사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 유토피아도, 절대자도 오지 않는 시대다. 서경식 선생은 디아스포라로 그걸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살았다.
  
  서경식 : 진부한 말이 될 것 같아 쓰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정의'다. 정의롭게 살고 싶다는 욕심이다. 중국의 루쉰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어떤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길이 있다고 해서 걸어가는 게 아니다. 소련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만두는 건 싸움이 아니다. 근거가 없더라도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다. 전부 다 없어도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는 뭐냐고 물으셨는데, 그럼 전부 다 없으면 죽는 것이냐. 개개인의 허무주의와의 싸움이다. 19세기 러시아 허무주의자들은 다 귀족이었다. 사치스럽게 살 수 있었는데 노예를 해방시키고 재산을 나눠줬다. 이런 허무주의적 테러리스트들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변화가 있었다.
  
  김상봉 : 수백년 전 사람이 경험했을 무조건적이고 직접적인 삶의 동력 같은 것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다.
  
  서경식 : 나는 유한이다. 국가나 국민은 무한이다. 내가 국가를 위해서 죽으면 불사가 된다. 새로운 우리라는 걸 구성할 때는 이런 사고방식을 거부해야 한다.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직시하지 않는 한 국가나 국민이 재생되고, 국가주의나 국민주의로 후퇴할 수 있다.
  
  진짜 자유인이 되려면 이것부터 거부해야 한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게 자기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되는 길이다. 마음 아프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태어나게 만든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이 삶의 끈을 잡는 행위 자체가 될 수 있다. 이를 놓는 게 패배라고 생각해서 끈을 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내일 여기에서 몸을 던지고 죽었다고 해도 놀랄 필요나 가슴 아프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냥 자살한 것처럼 뚝 끊어지는 것도…"
  
  허무주의와 삶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의 관계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아주 가깝지만 결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보였다. 답이 없는 문제를 두고 대화는 끝이 없이 계속되었고 그럴수록 점점 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불편한 긴장감이 자리에 있던 모두를 옥죄었다. 대화의 에너지는 거의 최고조에 달했다.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초월적 계기를 찾아내야 하는지, 혹은 그런 믿음에 기대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동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은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은 좀 더 철학적인 탐구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에 이 정도로 대담을 마치기로 했다.
  
  대담이 결말 없이 중간에서 끊긴 느낌이라 마무리 멘트를 부탁하자 서경식은 "그냥 자살한 것처럼 뚝 끊어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끝>
   
 
  강양구,전홍기혜/기자
 
"2006년 한국은 '고통의 역사'를 잊었나" 200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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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그렇게 혁명을 갈구했나"
'대화' <1> 전순옥 vs 조주은, '여성, 노동, 그리고 삶'
등록일자 : 2004년 05 월 15 일 (토) 09 : 11   
 

  월 2회 정도 연재될 '대화'는 대다수 대담과 달리 논쟁이 지향점은 아니다. 책이나 글을 매개로 비슷한 지향과 입장을 가진 두 사람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될 '대화'는 애정과 신뢰에 기반을 둔 공통의 지향점을 찾아가는 게 목적이다. '사회적 소통의 장'이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에도 좀더 충실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첫 번째 '대화'로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자 노동학자 전순옥씨와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여성학자 조주은씨의 대담을 싣는다. 편집자.
  
  전순옥 이야기
  
  동대문 창신동 '참여성노동복지터' 소장인 전순옥(50)씨에게는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전순옥씨 인생에도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16살이었던 그녀는 어머니 이소선씨와 함께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전씨는 22세까지 봉제의류 공장에서 일했고 그 후 노동조합 활동, 지역운동을 했다. 그녀는 35세의 늦은 나이에 영국 유학길에 올라 지난 2001년 런던 워릭대에서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을 다룬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They are not machines)>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그해 워릭대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전순옥 참여성노동복지터 소장 ⓒ프레시안

  최근 출간된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한겨레신문사 펴냄)는 이 논문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동일방직노조·청계피복노조 등 70년대 여성 노동운동가 1백여명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 또 그녀들의 삶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전씨는 유학을 떠나기 전 바로 그 자리로 돌아왔다. 영국 대학과 성공회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있는 동대문에서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사회에 알려주는 역할이 바로 내가 할일"이라고 생각하며 "저소득층 여성노동자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전씨는 또 지난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의뢰를 받아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A Single Spark)을 영어로 옮긴 데 이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의문사진상위원회 등의 한국 민주화운동사 영문 번역 작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 작업에는 뒤늦게 그녀의 인생의 반려자가 된 남편 크리스 조엘(61)도 함께하고 있다.
  
  조주은 이야기
  
 
여성학자 조주은 ⓒ프레시안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인 조주은(38)씨는 국내에서 드물게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학자다. 노동, 노동운동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구체적인 삶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는 점에서 조씨가 석사학위 논문으로 쓴 울산 현대자동차 가족에 대한 <현대가족 이야기>(이가서 펴냄)는 올 상반기에 출간된 노동 관련서 중 도드라졌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곳인 가정은 노동 정책과는 거리가 먼 듯하지만 상호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 노동자 가족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우리나라의 학문 풍토에서 조씨는 일찌감치 어려운 길을 선택한 셈이다. 이런 선택에는 남다른 개인사도 한몫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늦깎이 운동권이 돼 만난 노동운동가인 남편을 따라 울산에 내려가 '전업 주부'로 살았던 경험은 연구자로서 그녀를 '관찰자'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도 '노동'과 '가족'을 화두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전순옥ㆍ조주은 이야기
  
  두 사람에게 공통된 이슈는 '여성'과 '노동'이다. 지난 6일 오후 동대문 '참여성복지센터'에서 첫 대면하자마자 둘은 서로의 연구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며 대담은 시작됐다. 대담을 마치면서 전씨는 조씨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하기도 했다.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이 남성 연구자에 의해 경제주의적ㆍ고립적 운동으로 폄하돼 왔다는 점에 동의하면서 두 사람은 연구 대상을 '대상화'하는 지금까지 구태의연한 연구 방법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에 공감을 표시했다.
  
  또 "공부한 사람들끼리만 아는 책을 쓰는" 기존의 현학적 풍토에 대한 저항 의식도 비슷했다. 조씨는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쓰고자 했고, 전씨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직접 자기 얘기를 읽고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고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것"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의 남성,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 의식도 똑같았다. 조씨는 "대기업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자본가와 함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문화를 공유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들에게 희망은 없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전씨도 "영국의 노조가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은 노조의 조직 이기주의 때문이었다"며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도 바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의 '낮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두 사람은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왜 노동운동을 하고, 정치를 민주화하려고 하고, 경제 성장을 이룩하려고 하는가?",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두 사람의 대담은 사회자가 별 끼어들 필요, 아니 끼어들 틈 없이 세 시간 넘게 계속됐다.
  
ⓒ프레시안

  대담은 지난 6일 저녁 '참여성복지터'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다음은 대담 전문이다.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 폄하로 이어져"
  
  프레시안 : 전순옥 선생의 책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와 조주은 선생의 책 <현대 가족 이야기>는 상반기에 출간된 주목할 만한 노동 관련 책이다. 서로의 책을 읽은 소감이 있을 듯하다.
  
  조주은 : 먼저 시작하겠다. 그간 '노동운동'의 역사는 있는데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는 없었다. 2000년에 개인적인 이유로 여성노동운동의 역사와 관련된 책을 도서관에서 검색해보니 정말 한 권도 찾을 수 없더라. 일제 강점기 때 부문운동의 하나로 여성노동운동이 좀 언급돼 있고, 최초로 고공농성을 했던 강주룡 열사의 얘기 등이 부분적으로 인용될 뿐이었다.
  
  이런 무관심은 자연히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폄하로 이어진다. 남성이 쓴 많은 노동운동사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90년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1995년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말하면서, 이런 노동운동이 1970년대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여성노동운동의 경제주의와 고립적인 한계를 극복하면서 가능했다고 쓰고 있다. '그건 아닌데', 하면서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런 의미에서 전순옥 선생님이 쓴 이 책은 굉장히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전순옥 : 나는 일단 <현대가족 이야기>라는 제목이 참 좋더라. 현대에 살고 있는 가족이 파괴되고 있잖아. 난 제목만 보고도 많이 사서 볼 것 같던데. (웃음) 책은 많이 팔렸나?
  
  조주은 : (웃음) 거의 안 팔렸다.
  
  전순옥 : 사실 노동조합에 대한 연구는 너무나 많은데 실제로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구체적 삶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다. 이 책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돋보기를 들이댔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라고 본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이 책에서 사용한 방법론이 참 마음에 들었다. 복잡한 이론을 사용하기보다는 책에서 서술되는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가능하면 그대로 반영하려는 노력, 그렇게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본 것도 참 좋았다.
  
  조주은 : 글을 쓸 때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순옥 : 그런 부분이 나랑 맞았다. 내 책의 주인공들도 내가 인터뷰를 할 때, 전에도 인터뷰를 많이 했지만 도대체 내 말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몰라서 인터뷰하는 게 싫다는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주인공들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이 직접 자기 얘기들을 읽을 수 있을까, 이런 것을 고민하면서 글을 썼다. 나는 학자라기보다는 노동자 출신이니까 그런 면에서는 좀더 유리했고.
  
  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직접 자기 이야기를 읽고,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도 있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공부한 사람들끼리만 아는 책을 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서구 페미니즘이 제3세계 여성을 대상화한 것은 오류"
  
 
ⓒ프레시안

  프레시안 : 책을 읽으면서 상대방의 연구에 이견이나, 아쉬운 점은 없었나?
  
  전순옥 :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서구의 여성학자들이 아시아 개발도상국 여성노동자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게 됐다. 그들은 아시아 여성노동자들이 경제성장 과정에서 겪은 희생을 보면서, 여성노동자들을 '희생자로 개념화((victimization)'하곤 한다. 대부분이 이런 접근인데 나는 이렇게 제3세계 여성들을 대상화시키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제3세계 여성들은 무조건 순종적이면서 희생을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들을 없애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모순을 떨쳐 일어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고, 우리나라의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은 그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현대 가족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런 접근이 좀 묻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이 현대자동차 노동자이긴 하지만 그도 노동자 출신은 아니지 않느냐, 조주은 씨도 마찬가지고. 그러다보니 조주은 씨도 노동자 가족들 속에 파묻히기보다는 한 발 떨어져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본 게 아니냐는 느낌을 받았다.
  
  조주은 : 물론 그런 측면에 있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다.
  
  사실 울산에서 이 책은 일종의 '금서'다. 나는 남성 노동자들이 이 책을 읽기를 원했다. 그들이 이 책을 읽고 성찰할 부분이 있다면 성찰하고, 너무 일상이나 관성에 젖었던 자기들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스스로 객관화시켜 자기비판의 계기로 삼기를 바랐는데...... 남성 노동자들은 아예 안 읽더라. 남편 동료들한테 책에 대해서 물어보면 말을 안 한다. 왜 자기들 사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까발려서 우리를 죽일 놈을 만드느냐, 자본가를 욕하고 기업을 욕해야지 왜 우리를 비판하느냐, 이런 식이다.
  
  실제로 인터뷰에 응한 여성들도 책을 보면서 기분이 별로 안 좋다고 애기했다. 한 여성은 나한테 "그래 언니 말이 맞아. 내 남편이 생산직 노동자가 맞긴 한데 그 책을 보니까 갑자기 내 처지가 서글퍼지더라"고 불편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연봉 4~5천만 원씩 받지만 그래봤자 결국 너희는 노동자다, 이렇게 규정하는 게 불편해 보였다.
  
  전순옥 : 실제로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라는 것을 까놓고 얘기하는 건 안 좋아한다는 얘긴데, 그게 일반 노동자의 의식이 아닌가 싶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또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임노동자와 그들의 자녀들이 정작 스스로 노동자 또는 노동자의 자녀라는 의식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갑갑했던 적이 있다. 사실 그렇게 임노동자들이 노동자 의식을 갖지 못한 것은 예외적인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조주은 : 이견이라기보다는 질문이 될 텐데, 선생님 책을 보면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과 관련된 국내 여성학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어떤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전순옥 : 사실 1970년대 우리나라에 여성운동은 없었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여성평우회, 여성민우회가 생기는 것을 시작으로 여성운동 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여성학자들은 1970년대 '여성들이 여성의식이 없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에서 단체교섭을 할 때 여성만의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거나, 여성 노동자로서 받아야 할 교육은 없었다는 둥. 이런 비판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조금은 무책임한 것이다. 자기들은 그 때 뭘 했나?
  
  프레시안 : 그 당시 여성노동운동을 살펴보면 여성노동자들의 '생활 공동체' 같은 게 존재했다. 그런 모습을 '자생적 페미니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전순옥 선생님도 '한국적 페미니즘'이라는 이유로 그런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여성노동운동은 어떻게 10년을 버텼나"
  
 
ⓒ프레시안

  전순옥 : 그렇다.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보자.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이 어떻게 박정희 정권의 억압적이고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10년을 견딜 수 있었을까? 나는 그 힘이 바로 지적한 그런 데서도 나왔다고 생각한다. 많은 연구들은 당시 교회에서 여성노동운동을 지원해준 것을 중요하게 보는데 그것보다는 바로 이런 부분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정말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너무 대접을 못 받고 살아왔다. 집에서는 말순이, 섭섭이, 끝단이, 큰년이, 막내로 불리다 공장에 오니까 시다 1번, 미싱사 3번으로 불렸다. 그런데 노동조합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줬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위원장, 교육선전부장 등 직함으로 불리고. '아, 나한테 이름이 있었구나', 이렇게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자아, 존재를 찾은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공장에서 사장들하고 단체교섭을 하면서 사용자가 "미스 리"라고 부르면 "내 이름은 이총각이고, 지부장이다"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됐고 또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아 노동조합이야말로 나의 자아를 지켜주는 곳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을 지키는 데 헌신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프레시안 : 그런 점과 연관해서,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민주적 운영 방식에 있어서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전순옥 : 맞다.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조합을 운영하는 방식과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조합을 운영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심리학적으로 남성은 개인적으로 지도자로 우뚝 서려고 하는 성향(individual-oriented)이 있고 여성은 같이 하려는 성향(group-oriented)이 있다고 설명된다. 노동조합 운영에서도 이런 면이 발견된다.
  
  남성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이끌어가려다 보니 굉장히 비민주적으로 조직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운영할 때 모든 것을 조합원들과 같이 의논했다. 여성 노동운동가들은 조합원들 이름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려고 했고. YH노조의 최순영 씨 같은 사람은 조합원 3천 명의 이름을 다 기억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예를 들어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단체교섭을 할 때는 '빠다 조건'이라는 게 있다. 노조 지도자가 사용자한테 이번에 임금을 10%에서 1%를 더 올려주면 내가 노동자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노조가 시끄럽지 않도록 하겠다고 물밑 협상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조합원들한테 는 '당신들이 나를 위원장으로 뽑아준다면 다른 사람보다 임금을 1% 더 올리겠다'고 말하고.
  
  근데 여성 노동운동가들의 모습에서는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단체교섭을 할 때 임금 인상률을 지도부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조합원들과 함께 결정했다. 1970년대에는 소그룹이 많았는데, 그런 소그룹에서 '이번에 우리가 임금을 얼마를 올려야 하는지' 자기들끼리 논의를 한다. 조합원들이 임금 인상률을 15%로 결정되면 집행부가 논의를 해서 조합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한 결정을 내리고, 공고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간부들은 교섭에 들어가서 반드시 15%를 올려야 한다. 조합원들의 의견이기 때문에 다른 '빠다 조건'으로 바꾸지도 못한다. 조합원들은 그들대로 내가 주장한 15% 인상을 간부들이 사용자와 교섭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도부에 신뢰와 절대적 지지를 보낸다. 여기서 지도부는 또 싸울 용기와 힘을 얻는다.
  
  "혼자 결정하다 보니 남성 노동운동가들은 회유가 잘 돼"
  
  조주은 : 동감한다. 남성 노조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이런 얘기들이다.
  
  전순옥 : 맞다. 그런 남성 노조 지도자들은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혼자 달려가다 보니 유혹에도 쉽게 무너진다. 남성 노동운동가들은 회유가 잘 된다. 어용이 되기 쉽다. 박정희가 1960~70년대 노조를 완전히 어용화시켜 조정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남자들 몇 명만 잡고 있으면 노조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그런 분위기 탓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여성들이 중심이 된 노조는 그럴 수 없고, 비타협적이어서 오히려 박정희한테 큰 타격이었다. 그래서 더욱 박정희는 민주노조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YH노조가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할 때 겨우 여성 2백여 명이 농성을 하고 있는데 중앙정보부 김재규가 관여를 하지 않았느냐. 그만큼 그들의 행동을 큰 타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두 사람을 회유하는 것으로 안 되니까 뿌리째 뽑아서 노조를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상황을 바로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만들어냈다.
  
  조주은 : 당시에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을 남성노동자들이 앞장서 방해했었다. 구사대의 대부분이 남성노동자였고 여성노동자가 출근 투쟁할 때 위협을 가하고, 머리채를 잡으며 폭력을 가했던 게 다 남성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은 선생의 연구에서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전순옥 : 섬유나 방직 산업에서도 총 4천 명이 일하는 공장에 남자는 한 5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1천3백 명 있는 공장에서 남자는 1백 명 정도가 있었고, 나도 당시 여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당시 남성노동자들에게 얼마나 많이 당했느냐, 같은 노동자들에게 당하는 게 더 분하지 않았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대답이 놀라웠다. 그들은 "아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남성노동자들도 결국 사용자에게 고용된 희생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오히려 그런 남성노동자들을 노조 지도부에 넣으려고 노력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계급의식이 훨씬 강했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 구도로 끌어가지 않았다. 만약에 그 남성들과 싸우기 시작하면 그게 바로 자본가들이 바랐던 '노-노(勞-勞) 갈등'이라고 여겼다. 개인적으로 이견이 있더라도, 그들의 입장을 최대한 그대로 반영하는 게 기록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내 책에서 남성과 여성간의 '적대적 관계'가 빠진 것은 그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 노동운동 썩었다"
  
  프레시안 : 현재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 많이 있다. 두 분의 연구는 현재 이런 노동운동 경향에 대한 아픈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이 자기비판을 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조주은 : 극단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현재 노동운동은 '썩었다'고 생각한다. 파업을 하면서도 '삐삐 아줌마'를 불러서 같이 놀고... 울산에서 직접 보고 들은 차마 얘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집행부를 장악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노사가 상견례를 핑계로 룸살롱을 같이 가는 경우도 많다. 사용자가 미리 대기시켜 놓은 아가씨들 끼고 양주 마시면서 놀고. 사용자가 용돈을 쓰라고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면서 미끼를 던지면 일부 노동운동가들은 그걸 거부하지 않고 받기도 한다. 적어도 남성 노동운동가들도 자본가와 함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전망을 가지고, 진보가 나올 수 있을까 굉장히 자괴감이 든다.
  
  오히려 나는 노동운동의 희망이 지금 현재 가장 변두리에 있는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 그 중에서도 가장 주변부에 있는 노동자들의 활동 속에서 나오리라고 기대한다. 그들의 활동에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전순옥 : 자본가와 싸울 수 있는 조건은 자본주의화 되지 않는 것이다. 단체교섭을 통해 임금을 많이 올리는 것은 결코 자본과 싸우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임금을 조금씩 올려 받으면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그물' 속으로 점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된 노동자라면 그런 것들을 오히려 거부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임금을 올려 받아도 자본가처럼 잘 살 수는 없다. 결국 우리가 노동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임금인상이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됐다. 그것이야말로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이다. 대기업 노동자들 중에서는 연봉 4~5천만 원, 심지어 6천만 원을 받는 곳도 있다. 강연을 하러 가면 아예 노조에서 그런다. 강연 듣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임금이 올라가면 자연히 노동조합의 힘은 없어진다. 어느 정도 임금이 되면 노동자 동료들과 함께하기보다는 가족들과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각종 소비문화를 즐기고 싶어진다.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노조가 집회를 해도 '그것은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다', 이런 식이다. 정말로 자본가들이 바라는 그런 노동운동이 지금 한국 노동운동의 모습이다.
  
ⓒ프레시안

  "영국 노동운동 조직이기주의로 망해. 현 대기업 노조 권력 다툼에 몰입"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영국 노동운동이 망했다고 본다. 그들은 노동조합이 조직이기주의에 빠져 비정규직이나 여성노동자들 등 주변에 있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데 등한시했고 결국 대중으로부터 소외됐다.
  
  그것을 절묘하게 이용했던 게 바로 대처다. 1980년대 대처가 추구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은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있었다.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조합원 수를 줄여야 했고, 국영기업의 민영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인 배경에도 이런 사정이 있었다. 국영기업을 사기업으로 만들면서 구조조정을 통해 한 사업장에서 반 수 이상의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영국의 노조가 너무나 무기력하게 이런 공세를 당한 데는 노조의 조직이기주의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도 바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
  
  영국에 처음 간 1990년 초에 노동자 대회를 갔는데, 2백 명이 참석했더라. 당시 우리나라는 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운동은 성공할 때가 있고 기울 때가 있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도 이런 것을 똑바로 배워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주은 : 현재 대기업 노동조합들은 서로 조직의 권력을 잡는 데 몰두해 있다. 민주노총 현대자동차 노조 자유게시판을 한번 봐라.
  
  내가 남편하고 5년 정도를 떨어져 있었다. 남들이 남편이 '바람'을 필지도 모른다면서 걱정하곤 할 때마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혹시 다른 여자하고 그런 일이 있다면 바로 자유게시판에 뜬다. 눈에 띄는 신인 노동운동가가 부인하고도 떨어져 있는데, 저 뒤를 캐면 속한 조직에 흠집을 낼 수 있겠구나 하면서 감시를 하는 거다. 남편이 속한 조직의 상대편 조직 사람들이 내 남편을 지켜주고 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웃음)
  
  현대자동차 노조의 경우에는 이번에 울산 북구에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나왔기 때문에 권력을 둘러싼 경쟁이 더욱더 치열해질 것이다. 다음 현대자동차 노조 위원장을 하는 것은, 이후에 누가 울산 북구 국회의원을 하느냐의 문제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차마 말로 못하는 사정들이 너무나 많다.
  
  전순옥 : 사실 우리 노동운동 속에 보기에도 민망한 추악한 계파 싸움이 있다. 다들 다른 이데올로기를 표명하지만 사실 자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이지 노동자를 해방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은 본인들이 더 잘 안다. 서로 자기 정파를 살리기 위해서 내분을 하고, 그 때문에 지도자들을 믿고 따랐던 노동자들이 희생을 당하고.
  
  이렇게 지도부가 계파 싸움에 몰두해 있는 동안 조합원들과 지도부의 괴리감이 커진다. 지도부가 뭘 하고 다니는지 조합원들이 모른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없던 '지도부 불신임'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속에서 노동운동의 노하우가 축적이 안 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도부는 능력 없는 허수아비가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더 계파 싸움에 의존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프레시안 : 조주은 선생의 남편도 현대자동차 노조 활동가였다. 남편은 이 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나?
  
  조주은 : 남성노동자들을 너무 비하하는 표현들이 있어서 걸린다고 얘기했다. 예를 들면 "남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성적인 시선으로 대한다", 이런 단정적인 표현을 "그러기 쉽다" 이렇게 고치는 식으로. (웃음)
  
  전순옥 :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여성은 18명을 인터뷰했는데, 현대자동차 남성노동자들의 수는 적다. 일부러 아내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가족 얘기를 쓴다고 해도, 부부 양쪽 얘기를 같이 들으면 내용이 더 풍부해졌을 텐데, 왜 그랬나? 남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나, 아니면 의도적이었나?
  
  조주은 : 약간 의도적이었다. 이 연구를 하기 전에 울산 노동자 가족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부부를 같이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부인은 말을 한 마디도 못했다. 그런 거 보면서 같이 안 되겠구나 싶었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은 똑같은 사안을 놓고 부부를 동시해 인터뷰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담는 것일 텐데, 울산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럴 때 남자들은 대개 "나는 이렇게 얘기했는데 너는 뭐라고 했느냐. 너한테 이런 질문 할 테니 이렇게 답해라", 이런 식으로 아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든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내의 목소리에 주목하기로 했다.
  
  프레시안 : 혹시 서로의 책을 읽으면서 세대차나 또는 시각차는 없었나?
  
  조주은 :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가까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전순옥 선생의 책은 남성적 시각이 주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책 전체에 여성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노동자 중에도 가장 힘없는 노동자에 마음 가. 그게 바로 여성노동자"
  
  전순옥 : 이 책을 쓸 때도 그랬고 지금도 주변 사람들은 내가 여성주의자인지 안다. 또 여기 창신동에 와서 '참여성노동복지터'를 하고 있어서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냐' 물어보면 '아니다'라고 말한다. (웃음) 페미니즘을 거부하기 때문은 아닌데 어쨌든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노동자 출신이라서 그런지 노동계급의 성향이 짙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노동계급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회에서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 같은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힘이 없는 노동자 쪽에 내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항상 그곳에는 여성이 있었다.
  
  프레시안 : 괜한 것을 물은 것 같다. 그럼 상대방에 대한 조언이나 바람이 있을 법하다.
  
  전순옥 : 나는 오늘 조주은 선생이랑 같이 얘기를 해보니까 앞으로 같이 해볼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더 뚜렷해졌다.
  
  앞으로 빈민 여성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끼리 네트워크를 한번 해보고 싶다. 서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방점은 다르겠지만, 부분적으로는 같이 연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일을 거라고 기대된다.
  
  조주은 : 나도 그 네트워크에 꼭 끼워 달라. (웃음) 나는 전 선생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한 게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에 <한겨레21>에 내 책에 대한 서평이 실렸는데 거기에 '여성학자 조주은'이라고 쓰인 것을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그 때 기분이 참 묘했다. 내 자신부터 여성학자라고 규정되는 게 당혹스러웠다.
  
  나는 전순옥 선생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선생이 하는 일이 가장 앞서가는 여성주의적 실천과 연구라고 생각한다.
  
  "노동자 목소리 대신 알려주는 게 내 할일"
  
 
  전순옥.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한겨레신문사 펴냄) ⓒ프레시안

  프레시안 :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전순옥 : 내가 연대하고 싶은 사람들, 이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없었다. 창신동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몇 시간을 일했고, 얼마를 받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가 하나도 없다. 기존의 통계들은 너무나 공평하지 못하고 자의적이다. 소외된 사람들은 통계마저도 거부한다.
  
  우리나라가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고, 노동운동도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이 사람들은 그런 것과 무관하게 살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그들의 통계, 아니 우리들의 통계를 만드는 것이 바로 내 꿈이다.
  
  영국에서 학위를 마쳤을 때, 그 학교에 자리가 났었다. 사실 고민하면서 영주권 신청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을 굳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 마침 성공회대학에 연구교수 자리가 생겨서 가게 됐는데 거기도 딱 1년 만에 사표를 냈다.
  
  내가 원래 이 지역에서 여성노동자 공동체, 탁아소를 했다. 이제 외국까지 가서 박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니까 주변에서 '박사까지 하고 이걸 하느냐'고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바로 박사까지 했기 때문에 꼭 여기로 돌아와야 했다고 생각한다.
  
  전태일 오빠는 70년대 노동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그가 보잘 것 없는 노동자였기 때문에 아무도 귀를 안 기울였다. 만약 전태일이 대학생이었어도 그랬을까?
  
  여기서 1960~70년대부터 노동을 하고 있던 여성노동자들이 16시간씩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어도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돌아오니까 인터뷰도 하고, 한마디 하면 신문에도 실리고 그러더라. 그게 바로 외국 유학 다녀온 박사라는 타이틀 때문이라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사회에 알려주는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주은 : 나는 아직 학위 과정 중에 있으니까 큰 포부를 말하기는 좀 어렵다. 다만 노동자 가족 문제에 계속 천착해 들어갈 생각이다. 솔직히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사람이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현대가족 이야기>는 노동자 안에서도 가장 상층 가족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젠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 가족에 대해서 연구해보고 싶다. 또 민족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더 홀대 받고 있는 이주 노동자의 가족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보고 싶다.
  
  "권력 가진 이들의 정체된 의식이 사회의 정체 낳아"
  
 
  조주은. <현대가족 이야기> (이가서 펴냄) ⓒ프레시안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을 던져보자. 각자 영역에서 두 분은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나.
  
  전순옥 : 요즘엔 현대 사회와 가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곤 한다. 가족이 어떤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이런 생각 말이다. 서구와 달리 우리는 끈끈한 가족애,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나는 그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졌는데 그 동안 많이 변했더라.
  
  사회가 발전하면서 경제 성장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 열중하다 보니까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 우리 사회도 거시적인 것보다는 좀더 미시적인 접근을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가치관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왜 노동운동을 하고, 정치를 민주화하려고 하고, 경제 성장을 이룩하려고 했나. 왜 우리가 그렇게 혁명을 목소리 높였나. 바로 내 삶을, 또 이웃들의 삶을 좀더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었나?
  
  그게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가치관을 어디다 놓느냐에 따라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부터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할 때다. 우리가 무엇을 향해 달려갈 것인지를 점검한 다음에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조주은 : 질문에 답하기가 막막했는데 전순옥 선생 말씀을 듣고 보니 감이 온다. (웃음) 우리 사회는 현재 엄청난 변화와 정체가 섞여 있는 것 같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서 여자가 법무부 장관을 하고, 그가 이혼했다는 게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다.
  
  난 두 아이 엄마인데 큰 애가 '가정환경 조사서'를 갖고 왔다. 너무 놀랐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그 양식 그대로더라. 여성, 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그런 모습이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좀더 힘 있는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정체된 의식이 바로 사회의 정체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안 되고 힘을 가진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고.
  
  변화의 가능성과 과거의 정체가 혼돈돼 있는 이럴 때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힘을 가진 사람들부터 우선 변할 필요가 있다. 당장 우리 사회 남성들부터 조금씩 변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이끌어내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한겨레> 홍세화 기획위원과 <한국일보> 고종석 논설위원이 '사회적 연대'를 주제로 두 번째 '대화'를 나눌 예정입니다.)
  
 
 

강양구ㆍ전홍기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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