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홍성 그물코출판사 장은성 사장 /

초심을 지키고 사는 이들은 드물다. 일에 파묻히면 잊어버린다. 왜 그 일을 시작했는지도 까먹는다. 잊고 살다 보면 가려던 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불행한 이들이 많다. 그때부터 스스로 최면을 건다. 내가 젊어서, 철이 없어서, 세상을 몰라서 그랬어. 지금 가는 이 길이 옳아. 저기 봐.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길을 가잖아. 그런데, 그런데 왜 행복하지 않지?

그물코출판사 장은성 대표는 2004년 8월 서울을 떠나 홍성으로 내려왔다. 출판사를 접은 것은 아니다. 출판사를 시작할 때의 그 마음을 되찾기 위해서다. 그 마음을 되찾아 만들고 싶은 책을 편한 마음으로 내고 그래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다.

1인 출판사라 기획, 편집, 제작, 영업 등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해야 하지만 장 대표는 요즈음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꾸준하게 책을 내야 한다는 부담도 없고 제작비와 인건비 때문에 책 판매에 밤낮없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가장 기분 좋은 점은 그가 처음 출판사를 만들 때 했던 다짐을 지키고 살기 때문이다.

‘생태주의 관련 책을 낸다. 재생용지만을 쓴다. 양장은 만들지 않는다. 신념에 맞지 않는 책은 만들지 않는다. 광고를 하지 않는다. 2천부 이상 팔리면 베스트셀러라고 생각한다.’ 이를 되찾는 데 6년이 넘게 걸렸다. 수업료도 톡톡히 치렀다.

2001년 그는 다니던 중견 출판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었다. 저녁이면 출판사에서 알게 된 선후배들과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술을 마시면 출판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책 내용을 고민하기보다 껍데기를 화려하게 하는 데 더 신경을 쓴다, 권하기에도 부끄러운 책에 엄청난 광고비를 쏟아붓는다, 초판을 1만부 찍고 7천부를 서점에 깔지만 3천~4천부를 반품으로 받는 일이 다반사라는 등. 출판사가 아니라 출판공장이라고 자조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술자리마다 제대로 된 출판사를 한번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오갔다. 그에게 “네가 한번 해보라. 그러면 내가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래, 내가 한번 만들어 보자. 2001년 5월 출판사 등록을 했다. 10년 넘게 환경 관련 책만 내고 있는 따님출판사를 모델로 했다. 출판사에서 일할 때 우연히 접한 〈녹색평론〉을 통해 생태주의의 세례를 받은 터라 생태주의 전문 출판사를 만들고 싶었다.

예전에 거래하던 인쇄소 건물의 옥탑방을 빌려서 사무실로 썼다. 이듬해 낸 첫 책이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 반응이 좋았다. 언론에 소개도 되고 수천 부가 팔렸다. 〈지구를 살리는 7가지 불가사의한 물건들〉도 첫 책 못지않게 잘 팔렸다. 여섯 권의 책을 내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욕심도 났다. 생태환경책을 만들고 싶다는 이가 찾아오자 편집자로 채용했고, 영업자도 뒀다.

하지만 직원을 채용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방향은 잃지 않았지만” 출판사 운영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편집자는 자신의 몫을 하느라 정기적으로 책을 냈다. 영업상 필요해 부수도 더 찍어야 했다. 책을 수금하기 위해 썩 내키지 않는 내용의 책도 내야 했다. 어느날 돌아보니 그물코도 신간을 밀어내고 수금하고 반품받는 기존 출판계 관행을 따르고 있었다.

“출판계에서는 그런 현상을 멍든다, 골병든다고 합니다. 그물코도 골병이 든 거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행은 함께 찾아온다고 사무실도 비워줘야 했다. 새로 사무실을 얻을 돈도 없었다. 친구의 권유로 고향인 홍성으로 내려와 빈 농가에 사무실을 차렸다. 서울을 떠나고 나니 초심이 새록새록 다시 생각났다.

그래. 내고 싶은 책이 생기면 내자. 2005년은 동면 기간이었다. 한 권의 책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2006년이 되자 다시 힘이 생겼다. 풀무학교와 유기농업으로 이름난 홍동면이 자리한 홍성은 생태주의 출판사를 지향하는 그물코한테 축복의 땅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고 싶은 책도 생기고, 원고를 갖고 찾아오는 단체들도 있었다.

지난해에는 적지 않은 책을 냈다. 〈백성 백작〉, 〈농부의 길〉, 〈오리농법〉, 〈풀무학교 아이들〉, 〈풀무 청소년 특강〉, 〈헌책방에서 보낸 1년〉 등. 유기농 도농직거래 운동을 하는 한살림과 함께 〈땅에 뿌리박은 지혜〉, 〈태양도시〉, 〈스무살 한살림 세상을 껴안다〉 등을 냈고,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의 제안으로 〈풀씨〉와 〈간이역〉을 냈다.

여느 출판사처럼 만 권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는 없지만 그물코의 책은 생태주의와 생명운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조금씩 소문이 나 꾸준히 팔리고 있다. “금융기관의 부채도 거의 다 갚아 출판사는 운영이나 재정면에서 다시 건강해졌다”고 했다. 책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만난 여느 생태주의자처럼 그도 소박하지만 마음은 넉넉하게 산다.

지나고 보니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 먼저 부모님이다. 장 대표는 지금까지 빠짐없이 자신이 낸 책을 부모님께 갖다 드렸다. 그때마다 부모님은 그냥 받으신 적이 없다. “내가 먼저 사봐야 마음이 편하다”며 집을 나서는 그에게 책값을 주셨다. 다음으로 대학생 한달 하숙비 정도의 생활비를 받으면서도 잔소리 한번 없이 딸 채원이를 구김살 없이 키우고 있는 아내 이미희씨다. 그의 초심 회복은 그런 이들로 인해 가능했다고 한다.

“하루에 10여 권 가량 책 주문이 들어와요. 제가 만든 책을 사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고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홍성/글·사진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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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문화방송 라이브음악프로그램 <김동률의 포유>가 지난 6일 방송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2005년 10월 첫 방송을 시작한 뒤 1년4개월 남짓 만이다.

<…포유>는 그간 피아니스트 조지 윈스턴, 지휘자 정명훈, 13세 영국가수 조셉 맥머너스 등 국내외 실력 있는 음악인들을 초대해 재즈, 클래식, 포크를 망라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였다. 늦은 밤 시간대 편성되어 시청률은 낮았지만 수준 높은 무대는 호평 받았다. 김엽 피디는 “기획하면서부터 지상파에서 접하기 힘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담으려 노력했다”며 “아쉽지만, 좋은 음악을 들려줄 수 있어서 기뻤다”고 마지막 방송 소감을 말했다. 이흥우 피디는 “수개월에 걸친 섭외 끝에 한국 포크계의 거장 한대수 선생님을 10년 만에 지상파 음악프로그램에 모셨는데, 그것이 마지막 방송이 될 줄은 몰랐다”며 아쉬워했다.

<…포유>의 폐지는 사실상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경제원리에 입각한 결정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넘어, 공공연하게 나돌던 지상파 음악프로그램의 위기에 불을 지피는 부싯돌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로 번지고 있다. 방송사들이 비용 대비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시트콤도 축소했는데, 음악프로그램이 그 전철을 밟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상파 음악프로그램은 케이블 음악전문채널, 인터넷, 모바일 등의 영향으로 구실이 줄어들었지만, 종합편성을 하는 지상파의 특성상 위태롭게나마 자리를 유지해 온 게 사실이다. 에스비에스 <음악공간>을 연출하는 심성민 피디는 “경쟁 프로그램이었지만 남의 일이 아니다”며 “공영방송인 문화방송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는데 우리 프로그램도 같은 상황이 닥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고 했다. <윤도현의 러브레터>를 방영하는 한국방송 예능2팀의 전진국 팀장도 “좋은 평가를 받았던 <…포유>의 폐지가 전반적으로 침체기에 놓인 지상파 음악프로그램에 영향을 끼칠까 걱정된다”면서 “지상파 음악프로그램이 날이 갈수록 위축되고, 힘의 균형이 케이블이나 다른 매체로 이동하는 현상을 보여주는 예”라고 우려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음악프로그램을 연출하는 피디들도 차별성 있는 상차림으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음악공간>은 같은 라이브프로그램이지만 <…러브레터>나 <…포유>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 전신인 <뮤직웨이브> 때부터 출연가수들에게 다른 가수의 노래를 편곡해 부를 것을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심성민 피디는 “이미 여러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노래를 충분히 부른 가수가 우리 프로그램에서조차 같은 노래를 부른다면 의미가 없다”며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성그룹 ‘씨야’에게 ‘에스이에스’의 발랄한 노래 <너를 사랑해>를 부르게 하는 등 가수들의 새로운 모습도 보여주려고 한다”고 했다.

전진국 팀장은 “시청자 기호나 정서의 변화를 따르지 못하면 외면을 받기 쉽기 때문에 음악 프로그램도 폐지가 아닌 지상파만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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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누리꾼들의 자유로운 글쓰기로 급성장한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가 신뢰성 문제에 부닥치자, 제한적으로 필자 신분을 확인하기로 했다. 위키피디아 창업자 지미 웨일스는 7일 <에이피>(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집필 참여자가 전문가임을 내세우려 한다면 먼저 신분을 확인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익명으로 자유롭게 집필하게 한다는 원칙은 고수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입장은 최근 <뉴요커> 등 미국 언론이 “에스제이”라는 필명의 위키피디아 주요 필자가 이력란에 밝힌 것처럼 신학 교수가 아니라 24살의 대학교 중퇴자 라이언 조던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에 대한 대응이다. 위키피디아에 글 수천건을 올린 조던은 편집자 격인 ‘중재자’로도 활약했고, 1월에는 웨일스가 온라인사업으로 돈을 벌려고 만든 회사인 위키아에 고용되기도 했다.

2001년 출발한 위키피디아는 250여개 언어로 500만건 이상의 글을 확보하며 막강한 온라인 지식창고로 떠올랐다. 하지만 지난해 <유에스에이투데이> 초대 편집국장을 지낸 존 시전털러가 존 에프 케네디 전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전 상원의원 암살에 연루됐다는 잘못된 내용의 글이 문제를 일으키는 등 말썽이 끊이질 않고 있다.

웨일스 자신도 “얼마 동안 나에 관한 위키피디아의 내용에 ‘그는 여가시간에 친구들과 체스를 즐긴다’고 써 있는 걸 보고 내가 체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미국 버몬트주 미들베리대 역사학과는 위키피디아의 내용을 시험이나 과제물에 쓰는 것을 불허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웨일스는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위키피디아 내용을 검증한다”며 누리꾼들의 자정능력이 전반적으로 위키피디아 내용의 신뢰성을 확보해 준다고 말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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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허미경 기자  
 
<중앙일보>와 <조선일보> 등 신문 대기업이 방송영역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는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중앙일보>는 계열사 소속 케이블 채널의 시사 성격을 강화하고 있고, <조선일보>는 지상파 지역민방과 제휴해 콘텐츠 공급에 나서고 있다. 이들의 움직임이 신문·방송 겸업으로 가려는 ‘땅 다지기’가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중앙일보>가 최대주주인 중앙방송은 보유 4개 케이블채널 중 하나인 다큐채널 <큐채널>을 종합교양채널로 재단장하고 이 채널의 시사 성격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큐채널>은 <시엔엔> <비비시> <엔에치케이> 등과의 제휴를 통해 이들의 프로그램을 방영하겠다고 홍보하고 있다. 특히 <큐채널>은 미국의 뉴스전문채널 <시엔엔>의 간판 시사뉴스 토크 프로인 <래리 킹 라이브>와 연예뉴스쇼 <쇼비즈 투나잇>을 지난달부터 방영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인쇄매체-중앙방송-인터넷을 아우르는 복합미디어그룹으로 나아가겠다는 흐름으로 풀이된다.

특히 <큐채널>의 <래리 킹 라이브> 방영은 방송법 규제를 편법으로 회피하는 듯한 인상도 있다. 종합교양채널인 <큐채널>이 비록 외국 것을 재전송하는 형태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보도 프로그램 성격이 강한 <래리 킹 라이브>를 방영하기 때문이다.

현행 방송법은 신문사의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 보도전문 및 종합편성채널의 소유를 금지하고 있고, 뉴스채널로 승인받은 채널 외에는 케이블방송에서 보도 프로 편성을 못하도록 하고 있다. 보도 프로는 국내·외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에 관한 시사적인 보도·논평으로 정의된다. 보도채널의 큰 여론 영향력을 감안해 특정 사업자에 여론 지배력 집중을 막고자 한 방송법 취지 때문이다. 더욱이 케이블채널이 주편성분야 외의 부편성분야를 편성할 경우에도 보도는 할 수 없도록 한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이 입법예고된 상태다.

방송위원회 김양하 심의2부장은 6일 “<래리 킹 라이브>의 경우 아이템별로 보도 프로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말부터 4주 동안 <대구방송>과 <케이엔엔>(KNN) 등 지상파 지역민방과 제휴해 시사다큐멘터리(‘아워 아시아’)를 제작해 이들 민방과 조선일보, 인터넷 조선닷컴을 통해 내보내기 시작했다. 방상훈 사장은 이를 두고 5일 창간기념사에서 “뉴스 시장 1등으로 가기 위한 새 사업을 성공적으로 출범시켰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조선은 관계사인 <스포츠조선>이 최대주주인 <디지틀조선일보>를 통해 <비즈니스엔>이란 케이블 채널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신문 대자본의 움직임은 한나라당의 움직임과 관련해서도 관심을 끈다. 한나라당은 2월 임시국회에서 신문·방송 겸영을 아예 허용하는 내용으로 신문법을 개정한다는 방침을 밝혔다가, 실제 추진은 하지 않은 상태다.

이에 김승수 교수(전북대·신문방송)는 “1960년대 삼성그룹이 신문(중앙일보)과 방송(동양방송)을 다 가짐으로써 여론 조작 등 폐해가 컸다”며 “전국 일간지의 전국 방송 소유가 거의 모든 나라에서 금지돼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잖아도 조중동 등 3개 신문재벌의 여론 독점 현상이 있는데, 이들이 방송까지 갖게 된다면 여론의 다양성이 더욱 위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인 신태섭 교수(동의대·신문방송학)도 “중앙일보의 경우 보도채널을 뚫으면 신문의 뉴스 기능을 시너지해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고 보고, 유사하게라도 일단 발을 밀어넣고 있는 것 같다”며 “여론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신문시장 독과점 약화와 불공정 거래의 정상화가 더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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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한겨레 특집_대안모델을 찾는다] ①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 국가론 - 조희연, 신영복, 조현연, 김호기

“민주적이고 투명한 계급사회가 출현했다.”
지난해 말 출간된 <민주화·세계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대안체제 모형을 찾아서>(함께하는책)에서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역설적인 현실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런 역설이 발생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그는 민주화와 세계화의 동시 진행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민주화가 진전된 지난 10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파괴적 수준으로 한국 사회를 습격했다. 지난 시대 한국 경제를 책임지던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민주화의 영향으로 무너졌지만, 신자유주의에 강타당한 한국 사회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뚜렷한 항해도도 없이 한국호는 신자유주의 물결로 넘실대는 바다 위를 표류한다는 게 조 교수의 분석이다.

조 교수와 동료 연구자들이 보기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국민국가의 자기 조정 기능을 심대하게 위협하는 악조건이다. 이 악조건 위에서 민주진보세력은 민주주의, 분배, 인간다운 삶이라는 자신들의 기본가치를 실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조 교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조건 때문에 대안적 국가 모델은 필연적으로 일국적 차원을 넘어선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제하고 규율하려면 전 지구적 차원에서 대안을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조 교수와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김호기 연세대 교수,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 등이 제출한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 국가론’은 이런 지구적 차원의 조건을 일차로 염두에 두고 있다. 어떤 대안도 일국적 수준을 넘어 국제적 전망을 보여주지 않는 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국제적 변화만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다. 전 지구적 조건이 열악하면 열악한 대로 일국적 전망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의 대안은 국제적 전망과 일국적 전망을 동시에 고려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조 교수가 말하는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 국가론’의 첫번째 강조점은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에 놓여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사회민주주의는 20세기 서유럽의 사민주의보다 폭이 넓다. 20세기 사민주의는 국가주의와 성장주의의 한계에 갇혀 결국 좌초하고 말았다고 조 교수는 평가한다. 새로운 사민주의는 19세기 사민주의 이념의 급진적 변혁 전망을 내장한 채로 20세기 사민주의를 성찰·극복한 좀더 이상적인 사민주의다. 이 사민주의의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 생태주의와 평화주의다. 개발과 성장에 매몰되지 않고 생태와 환경의 가치를 끌어안으며, 군사주의와 팽창주의와 단절하고 반전·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장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확장을 통해 시장을 규율하고 민주화해야 한다. 시장을 민주화함으로써 양극화를 극복한 ‘사회적 완충국가’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민주의적 대안을 동아시아 차원으로 확장해 구현해야 함도 이들은 강조한다. 일국적 수준의 실현이 단기 과제라면, 국제적 실현은 장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대안적 체제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조 교수는 ‘진보적 민중주의’에서 동력을 찾는다. “남미의 차베스 정권에서 볼 수 있듯이 대중을 급진화시키는 운동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서구의 복지국가보다 더 평등하고 더 민주적인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한계와 보완할 점]

빈곤 · 양극화 해법 ‘생태’와 연결
기대치 높아…분배 연구도 부족

조희연 교수팀이 내놓은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 국가론’은 구체성 부족이 약점으로 꼽힌다. 조 교수는 영국 노동당의 사민주의를 서구 사민주의 실패의 대표적 사례로 제시하는데, 이 점과 관련해서는 영국 노동당사를 전공한 고세훈 고려대 교수(정치학)가 매서운 반론을 제기했다.

고 교수는 “서구 사민주의의 핵심 가치는 사회경제적 분배에 있다”며 “우리는 그쪽 사회가 이룬 성과에 전혀 도달하지도 못했는데 그걸 극복하자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 빈곤이나 양극화를 극복하는 문제를 생태와 연결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생태에 주안점을 두게 되면 빈곤 극복이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분배 문제라는 본질적 논점을 흐려 놓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계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학)는 조 교수팀의 대안에 경제 부문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생략돼 있다는 것을 약점으로 들었다. 경제적 차원에서 노동문제라든가 산업문제 등 구체적인 이슈들을 해결할 방안이 제시돼야 하는데 그 문제를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 교수의 사민주의 담론이 추상적이라는 이야기다. 이 교수는 또 고세훈 교수와 달리 생태와 평화의 가치를 사민주의와 결합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그 과제를 동시에 실현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조 교수의 제안에는 그 과제를 실현하는 방법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조 교수가 새로운 사민주의 대안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내놓은 ‘진보적 민중주의’가 ‘민중독재’를 불러올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조 교수 자신도 그런 약점을 인정하면서 “그 위험을 극복하는 것이 또 다른 과제”라고 말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한겨레 특집_대안모델을 찾는다] ② 노동 중심 통일 경제연방론 - 손석춘, 박세길, 김병권, 정희용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원장 손석춘·이하 새사연)의 박세길(새사연 부원장)·김병권(새사연 연구센터장)·정희용(새사연 미디어센터장)씨 등 연구자들이 내놓은 대안 모델은 ‘노동 중심 국민경제론’과 ‘통일 경제연방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줄여서 말하면 ‘노동 중심 통일 경제연방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학생운동 출신자로 사회단체에서 활동하거나 벤처기업 경영 경험 등을 쌓았다. 대학 석·박사 등의 제도권 교육보다는 집단 학습과 토론을 통해 나름의 대안을 마련했다.

이들이 말하는 ‘노동 중심 경제’는 기존의 사회주의 경제와도 다르고 서구 사회민주주의 경제와도 다르다. 기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구 사회민주주의는 노동 주도권을 충분히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동 중심 경제론과 차이가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노동 중심 경제론은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지만 노동자가 생산활동에서 중심 구실을 하는 경제 시스템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새사연은 한국 경제가 1987년 이전 국가 주도형에서 1987년 이후 자본 주도형으로 이행했다고 본다. 박정희 체제로 대표되는 국가 주도형 경제체제에서 한국은 고도 성장을 이뤘지만, 그 원동력은 노동자에게 있었다는 것이 이들의 견해다.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가져온 요인이 교육받은 양질의 노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이 국가 주도형 모델이 더는 작동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자본 주도형으로 넘어간 것인데, 자본 주도형 경제에서 한국 경제의 성장 원동력이 깎여 나가고 있다고 이들은 진단한다. 따라서 대안은 노동 주도형 경제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동 중심 경제에서 말하는 노동은 자본소득이나 불로소득에 의존하지 않는 모든 근로 계층을 다 아우르는 말이다. 이들이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며, 이들이 경제의 중심에 서야 한다. 노동의 발전이 경제의 성장을 이끈다는 것이 노동 중심 국민경제론의 핵심이다.

경제성장의 동력을 노동에서 찾는 이들은 유한킴벌리 사례를 중시한다. 유한킴벌리는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이 유행할 때, 단 한 명의 직원도 줄이지 않고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인력을 더 늘리는 ‘뉴 패러다임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로 현장인력이 33% 늘어나고 일인당 작업일수는 연간 180일로 줄었지만, 인건비 증가를 뛰어넘는 높은 생산성 향상을 이루어냈다. 해고불안을 없애고 줄어든 노동시간을 직원 교육에 할애한 것이 더 큰 성과를 낸 것이다.

이들의 또다른 제안은 ‘통일 경제 연방론’에 있다. 노동 중심 국민경제가 통일 민족 경제를 이루어낼 때 완결성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각각 고립되어서는 최적의 상태를 이루어낼 수 없다고 이들은 말한다. 많은 비용을 강요하는 분단체제를 극복함으로써 한반도 경제권을 구축할 때 남과 북이 유기적 관계를 맺고 경제 활력을 키울 수 있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내수 시장이 확대되며 자립 경제의 자원이 확보되고 남·북 기술 협력으로 경제 도약을 이룰 수 있다고 이들은 전망한다. 남북 경제 연방은 단순한 경제협력을 넘어 남과 북이 각각 장점을 결합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내고 더 나아가 중국·러시아를 포함한 북방경제블록을 주도적으로 창설할 수 있다. 남과 북이 경제 통합을 이루면 남쪽의 경제와 북쪽의 경제가 서로서로 블루오션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노동의 창의성이 경제 발전을 주도하고 한반도 차원에서 경제 연방으로 경쟁력을 키우면 남과 북이 통일 강국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비전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한계와 보완할 점]

‘노동 중심 통일 경제연방론’은 새사연이 지난해 발간한 책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시대의창)에 상세히 설명돼 있다. 이 구상은 경제 발전 동력에서부터 남북 경제 공동체 전망까지 비교적 일관성 있게 설명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보완할 지점도 남아 있다.

김호균 명지대 교수(경제학)는 새사연이 말하는 ‘노동 중심론’에 소유권에 대한 연구가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새사연의 노동 중심 경제론은 종업원 지주제 형태로 나타나는 노동자의 주주 참여를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은 채로 노동의 경영 참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렇게 소유권 문제가 모호해서는 노사의 대등한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종업원들이 지분을 충분히 확보할 때 능동적으로 경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통일 경제 연방론도 그 과정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독일 통일 경험으로 볼 때, 통일경제가 자칫 잘못하면 북한 경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 경제가 남한의 경제력에 압도당하지 않고 서로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안전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우석훈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경제학 박사)은 노동자 중심으로 기술 혁신을 이룬다는 새사연의 노동 중심 모델에 ‘구체적 방법’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었다.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 때 등장한 벤처산업론을 확장한 것이어서 보편적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또 통일 경제 연방론이 북한을 대등한 파트너로 일으켜세우기보다는 내부 식민지로 포섭할 가능성이 있음을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남·북의 평화라는 관점에서는 진보적인 내용이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북한을 노동과 시장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고명섭 기자)

[한겨레 특집_대안모델을 찾는다] ③ 사회투자국가론 - 천정배, 유시민, 노무현, 임채원, 김연명, 신광영

진보개혁 진영의 학계 및 정치권 등에서 최근 널리 회자되는 대안 모델은 ‘사회투자국가’이다. 지난 2월15일 참여연대가 한국적 적용 가능성을 묻는 토론회를 열었다. 엿새 뒤엔 한국사회정책학회 등 4개 학회가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짚는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정치권에서도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천정배 의원,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주창하고 있으며, 노무현 정부가 내놓은 중장기발전계획인 ‘비전 2030’ 등에도 부분적으로 녹아 있다. 영국 등 서구에서 ‘수입된’ 이 모델이 과연 우리 사회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나? 학계 등 각계가 이 담론의 적용 여부를 놓고 관심을 갖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기때문이다.

‘기회의 평등’ 추구하는 제3의 길=사회투자국가는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지난 1998년 처음 내놓은 개념이다. 기든스는 영국 노동당의 ‘제3의 길’을 이야기하면서 ‘전통적 복지국가와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제3의 대안’으로 이를 제시했다. 1980~90년대 전통적 복지국가의 위기와 이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재편기를 거치면서 등장한 새로운 경제사회정책적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학계에서 엄격하게 정의된 개념은 아니다.

이 담론의 핵심은 복지를 생산요소, 투자로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복지)정책과 경제(성장)정책을 대립이 아닌 상호보완적 관계로 본다. 신자유주의의 시장담론을 수용해 국가의 시장에 대한 통제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시장의 핵심기능이 정치적 행위에 의해 훼손되어선 안된다”고 인식한다. 결과의 평등보다 ‘기회의 평등’을 중시하며, 시민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책임도 따라야 한다는 논지를 내세운다.

임채원 서울대 한국행정연구소 연구원은 <신자유주의를 넘어 사회투자국가로>란 저서에서 ‘사회투자국가는 사회가 사람에 투자하는 국가’라고 정의한다.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과 지식기반 사회란 오늘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는 자본이나 토지가 아닌 인적자본이다. 따라서 이를 위한 사회정책은 비용이 아닌 생산요소, 투자라는 것이다. 이 담론의 핵심구호는 그래서 ‘사람에 대한 투자’다. 예컨대 국가가 모든 아이들에게 자기개발의 기회를 갖도록 하고자 공공보육 확충정책을 편다고 하자. 당장은 많은 비용이 들지만 아이들을 더 튼튼하게, 더 지적으로 자라게 해, 나중에는 그들이 지속적인 경제발전의 튼튼한 주춧돌이 될 것이란 논리다. 이 정책은 또 여성의 육아부담도 덜게 해 더 많은 여성들이 자기개발과 고용기회를 갖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이념적으론 중도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자유’를, 사회주의가 ‘평등’을 추구한다면 사회투자국가는‘사회정의’를 추구한다. 영·미식의 자유주의형과, 스웨덴·덴마크 등 사회민주주의형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양극화 해결의 대안모델인가?=한국 사회는 압축적인 경제성장을 경험한 만큼 성장주의 담론이 유난히 위력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사회투자국가론이 한국 진보개혁 진영의 눈길을 모으는 데는 이런 성장주의 담론의 벽을 넘어 복지(재정)확충의 당위성을 설파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상당히 작용하고 있다. ‘복지도 투자’란 말이 대표적인 그 예다.

이런 맥락에서 친 복지 학자들이 주로 주창한다. 사회복지·노동·여성·교육·가족 등 사회정책적 내용을 중심으로 다양한 적용 가능성이 모색되고 있다.

이 담론을 우리 사회에 적극 수용하자고 주창하는 이들은 우리 사회 경제사회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이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김연명 중앙대(사회복지학)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경제사회구조가 오늘날 양극화와 저출산 고령화 등의 새로운 상황과 위험을 맞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의 월급 격차(2003년 1.53배)가 해마다 늘고 있고, 10가구중 1가구가 절대빈곤 상태에 빠져 있을 정도로 소득분배가 악화하고 있다. 2005년 현재 4829만명이던 인구는 2050년에는 4234만명으로 줄어드는 데 비해 65살 이상의 노인은 2005년 전체 인구의 9.1%에서 2050년에는 37.3%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김 교수는 이에 대처하려면 새로운 사회경제정책 패러다임이 필요한데, 그게 사회적투자국가 또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양재진 연세대(행정학) 교수는 ‘사회투자국가는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경제사회 패러다임인가?’란 논문에서 한국의 선택으로 ‘영국형 사회투자국가’를 제시했다. 장기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형 사회투자국가를 목표로 두되 단기적으로 영국형같은 중간 ‘정거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양 교수는 구체적으로 아동·청소년을 위한 사회적 보육·교육을 앞세우되 평생학습체계와 장기요양서비스 구축 등 생애주기별 정책을 펴는 게 중요하다는 정책방향도 내놓았다.

신광영 중앙대(사회학) 교수는 ‘복지레짐과 사회투자국가’란 심포지엄 발표문에서 사회투자국가와 이에 따른 정책이 중산층 강화와 사회적 통합 증진’이란 효과를 낳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신 교수는 이 담론이 현실화하려면 노사간의 사회적 협력 내지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한 요건이라고 지적했다. 윤홍식 전북대(사회학) 교수는 특히 한국형 사회투자국가의 방향으로 아동수당의 도입 등 기본적 복지욕구 충족,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 및 사회서비스 확대 등을 제시했다. 그는 다만 “사회투자전략을 뒷받침할 정치세력이 존재하는가란 판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창곤 기자 goni@hani.co.kr)

[한계와 보완할 점]

‘사회투자국가론’의 결정적 한계로는 흔히 경제이론이 없다는 점이 지적된다. 고전적 복지국가는 케인즈주의가, 신자유주의는 통화주의란 경제이론이 있다. 이 모델은 사회정책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구체적인 경제(성장) 정책 모형이 없다. 이때문에 진보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사회복지 확충을 위한 긍정적 담론이라고 보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에 투항한 담론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던진다. 유럽 좌파들이 사회투자국가를 ‘결과적 평등에 대한 좌파적 전통을 부정하는 신자유주의의 아류’라고 평가절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스웨덴 등 북구 사민주의 국가들의 일부 복지정책을 선별적으로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이주희 이화여대 교수는 “사회투자국가는 사회복지정책이 경제발전에 순기능을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출발하나, 최소한의 사회안전망만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접근과 큰 차이를 보이진 않았다”면서 “이런 정책방향은 시장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혼란과 불평등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지난달 15일 참여연대 토론회에서 “(사회적 투자국가인) 영국은 본질적으로 (공공 정책이 아닌)민영화 정책을 펼쳤던 만큼 우리가 그대로 가져올 수 없다”면서 “사회투자국가론은 새로운 생산주의 담론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김연명 교수는“사회투자국가론은 성장주의적 생산담론과는 달리, 스웨덴처럼 사회정책을 통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사회투자형”이라고 반박했다.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는 “대안이라고 하기엔 너무 모호한 점이 많다”면서 “성장과 고용창출을 위해 평등, 분배 등의 가치를 너무나 희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 상황에 맞는 구체적인 개별 정책 내용이 아직은 미흡하는 지적이기도 하다. 사회투자정책을 현실화할 정치세력이 없다는 점도 종종 한계로 지적된다. (이창곤 기자 goni@hani.co.kr)

[한겨레 특집_대안모델을 찾는다] ④ 사회연대국가론 -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사회 구성원들은 서로 의존한다. 콩트 등 19세기 프랑스 사회학자들은 이를 사회구성의 기본 원리라고 생각했다. 의존관계란 서로에게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연대’의 이념이다. 민주노동당의 싱크탱크인 진보정치연구소가 최근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한 한국 사회의 ‘대안 모델’은 ‘사회연대국가’이다. 연대의 이념을 기초로 한 한국형 복지국가 모델을 제시했다고 연구소는 자평한다. 성장전략과 복지전략, ‘복지동맹’이란 실천 전략까지 아우르고 있다. 이는 아직 민주노동당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연구소는 6월께 대선 후보가 결정되면 당의 주요 기조로 채택하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연대를 통한 모두를 위한 성장=이 담론은 먼저 한국 경제상황이 저성장 기조의 ‘미이라 경제’라는 진단에서 출발한다. 800여만명의 비정규직 중심의 고용과 620만명에 이르는 영세자영업자 구조는 한국 경제를 이집트의 미이라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저성장 경제구조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1997년 구제금융 이후 지속된 ‘노동과 자본의 구조조정’과 ‘급속한 시장개방’에 따른 결과라고 조진한 연구위원은 분석했다.

그렇다면 이런 경제구조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룰 전략은 무엇인가? 조 위원은 지식노동자가 국민경제의 성장을 주도하는‘하이로드(high road, 高進路)형 성장 전략’을 답으로 제시했다. 이 전략은 한국 사회의 성장엔진을 (국가와 재벌이 아닌)지식노동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21세기 경제는 창의적인 지식노동자가 주도하니 만큼 이들을 길러내고 또 이들이 경제를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지식노동자들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복지 강화도 이 전략의 주요 내용 중 하나다. 교육복지를 위한 재원은 기존 세율을 늘리기 보다 목적세를 신설할 것을 권한다. 사회복지분담금같은 ‘사회연대적 조세’를 만들어 재원을 확충하자는 생각이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모두를 위한 성장’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미래산업의 발굴과 투자도 이 전략의 주요 내용이다. 구체적인 미래산업으론 에너지환경산업을 꼽았다. 조 위원의 말로는, 최근 풍력과 태양광발전, 바이오매스에너지(동·식물 등의 생물체의 유기물로부터 얻어지는 에너지) 등 친환경 에너지 기술들이 상업화돼 대형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엄청난 성장동력이 이 산업에 잠재돼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은 신재생 에너지를 사용하는 비율이 아직 3%에 그친다. 유럽연합 12%에 견줘 4분의 1 수준이다. 조 위원은 이 부문에서 단기적으로는 20만개, 나아가 약 10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국가주도의 사회연대복지 모형=사회연대국가론의 또 하나의 축은 복지전략이다. 연구소는 이를 ‘사회연대 복지모형’이라고 이름붙였다. 이 전략을 마련한 성은미 연구위원(사회복지학)은 이 모형의 필요성을 현 한국의 복지체계의 문제에서 찾는다. 사람의 생활에 필수적인 의료서비스, 아동보육과 주택 모두 (국가 주도가 아닌) 시장 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현 복지체계는 서비스 양극화 등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는 게 성 위원의 진단이다.

부유층은 양질의 서비스를, 빈곤층은 낮은 수준의 서비스를 받는 서비스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며, 정작 서비스가 필요한 이들이 공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연금 등 사회보험도 정규직 노동자 중심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70%가 노후를 위한 국민연금에 가입돼 있지 않아 사회보험에 원천적으로 배제돼 있는 것이다. 저출산·고령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 새로운 사회적 위험도 현 복지체계의 변화를 강제하고 있다고 성 위원은 말한다.

사회연대 복지모형은 현 복지체계의 체질 개선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성 위원은 이를 위한 방안으로 세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사회보험료를 돈 많은 이는 많이, 적은 이는 적게 부담시키되, 혜택은 똑같이 주는 ‘누진보험료-균등급여’가 그 하나다. 누진 보험료는 소득재분배를, 균등급여는 저임금 노동자 등 취약계층이 기본생활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국가가 전 국민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현물서비스를 주는 공공서비스 확대가 둘째 방안이다. 실업부조 제도를 도입하고 공공부문 일자리를 창출하자는 게 세째다. 실업부조 제도는 저소득 실직자에게 국가가 최저수준의 생계비를 기간제한없이 지원하는 제도다. 성 위원은 복지에 대한 신뢰를 얻는 게 중요하며, 사회연대는 바로 그 바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열쇠는 복지동맹 구축=강병익 연구위원은 이런 성장 및 복지전략을 토대로 한 사회연대국가를 이루기 위해선 ‘복지동맹’구축을 통한 대안적 사회세력 형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복지를 매개로 사회적 연대를 넓혀가며, 이런 연대를 정치세력으로 변화시켜 그 힘으로 현실화시키겠다는 것이다. 강 위원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연대, 저소득층·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의 연대, 저소득층과 중간계층간의 연대 등 사안별로 다양한 형태의 복지동맹이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연대국가론은 이달 중 발간될 이 연구소의 잡지인 <미래공방> 2호에 자세히 실린다. (이창곤 기자 goni@hani.co.kr)

[한계와 보완할 점]

전문가들은 대체로 사회연대국가론이 경제성장 전략과 구체적인 미래산업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했다. 김연명 중앙대 교수는 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은 일보 진전”이라고 말했다. 진보진영은 그동안 복지를 외치면서도 정작 재원 확충 방안이나 성장 대안을 제시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조세의 역할을 적극 강조하고, 분배전략과 실천전략까지 종합적인 사고를 한 점도 평가해줄 만하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구체적인 정책 내용이 미흡하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김기원 방송대 교수는 “성장 및 복지 전략의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 미래산업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에너지환경산업을 내세우는 데 과연 그러한지도 의문스럽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특히 “지식노동자의 경제주도나 교육복지 강화 등은 현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다”며 “진보정당 고유의 정책을 분명히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고 꼬집었다.

김연명 교수는“복지동맹 혹은 연대전략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세부적 정책과 제도에 대한 고민과 대안이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단순히 아이디어 수준이면 대안으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이주희 이화여대 교수도 복지동맹과 관련해 도대체 어떤 초현실적 힘이 정규·비정규직, 여성, 장애인, 빈곤층을 함께 모아 복지동맹을 형성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복지동맹을 이룰 경제 및 복지정책의 구체성과 현실성이 결여돼 있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더불어 “하이로드형 성장전략은 노동자에게 숙련을 이룰 인센티브 및 기회가 주어지고, 참여와 협력의 문화가 정착될 때에만 가능하다”며 “산학연계와 노사관계 시스템 개혁 등 더욱 조밀하게 연계된 구체적인 방안들과 실행방법이 보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화와 개방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좀 더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조진한 진보정치연구소 연구위원도 이와 관련해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대안이나 서비스 시장 개방에 대한 입장을 가지지 못한 측면은 향후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장을 위해 시장과 국가가 어떻게 역할 분담을 해야 하는지도 분명치 않아 다분히 ‘좌파 실용주의적 사고’란 혹평도 나온다. (이창곤 기자)

[한겨레 특집_대안모델을 찾는다] ⑤ 신진보주의 국가론 - 참여정부

신진보주의는 명칭 자체가 기존의 진보주의를 계승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신’이란 수식어로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진보주의와 대비되는 보수주의나 역시 기존 보수주의에 거리를 두려는 신보수주의와도 다를 것이다. 신진보주의가 우리 사회 담론의 하나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이후의 일이다.
그 출발점은 정부가 발주한 연구 프로젝트였다. 지난해 6월에 나온 계간 <동향과 전망>(한국사회과학연구소·박영률출판사) 여름호(67호)와 올해 1월에 출간된 <한반도경제론>(창비)에 따르면, 2005년 7월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개방화에 대한 대안 연구를 위해 모인 다양한 전공의 ‘동아시아-한반도경제연구회’(나중에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로 확대개편) 소속 학자들에게 국가전략(참여정부 핵심담론) 연구를 의뢰했다. 넉 달 동안 13명의 학자들이 거의 매주 모여 “한국의 정치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현실에 부합하는 국가전략의 비전에 관한 공동연구”를 수행했고 그 결과는 그해 말 정책기획위원회에 제출됐다.

연구자들은 당시 “새로이 추구하는 경제이념의 기초를 ‘신진보주의’라 명명”했다. 신진보주의는 그 뒤 포괄적인 발전모델, 한반도 발전전략 구상으로 심화, 확장돼갔다.

민주화 이후 민주개혁 진영의 위기는?=<동향과 전망> 67호에 ‘신진보주의 발전모델과 민주적 발전국가의 모색’을 쓴 조형제 울산대(사회학), 정건화 한신대(경제학) 교수와 이정협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원(경제지리학)에 따르면 신진보주의는 보수주의의 반대편에 위치하면서 진보주의를 출발점으로 삼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들은 진보주의 세력이 민주화를 쟁취했고 분배, 복지 등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제기해 일정 정도 관철시키는 성과도 올렸다고 본다. 하지만 냉전체제 붕괴, 국민국가의 약화, 환경파괴 등 다원화하고 복합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무너진 현실 사회주의를 대체할 대안 찾기에도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또다른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 멤버인 전병유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원, 안병진 창원대 교수(국제관계학과),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중어중국학과)는 <한반도경제론>에서 민주개혁진영의 위기는 정책상 위기를 넘어 담론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현재 한국사회 담론과 제도적 규칙에서 헤게모니를 쥔 쪽은 보수주의적 정치담론과 지배질서다. 과거 박정희식 발전주의 모델의 온존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가 결합되어 미국 중심주의, 시장 중심주의, 성장주의, 경제주의, 기업주의, 갈등없는 통합, 엘리트 주의 담론이 지배하는 질서가 성립되었다. 민주개혁 정부는 단순히 정책의 구상과 집행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런 보수주의적 담론구조 극복에 실패한 것이다.” 이들은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소수 재벌 및 외국기업들 헤게모니에 종속된 ‘기업전체주의 국가’로 전락할 위험성이 “매우 크다”고 우려한다.
 
대안 담론의 체계=이런 신자유주의·보수주의적 질서에 맞서는 대안적 담론의 핵심으로 이들은 “역동적으로 만들어가는 공공성(dynamic republic)이 작동하는 사회경제 질서” 창출을 들고 있다. ‘역동적 공공성’은 양재진 연세대 교수(행정학) 식으로 표현하면 “성장과 분배를 아우르는 진보적 이념이다. “기존의 진보가 연대를 강조하면서 발전담론을 경시하고 연대와 대척되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진보도 연대뿐만 아니라 성장전략도 강조하면서 둘의 관계를 경쟁 혹은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지 말 것을 제안하는 것이 신진보주의가 아닌가 한다.” 이를 신진보주의가 ‘중심가치’로 내세우고 있는 ‘개방, 혁신, 연대’를 활용해 얘기한다면 “혁신과 연대의 가치가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가 된다. 이는 기존의 진보주의와 다른 부분이다.

신진보주의에서 연대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공동체적 가치 실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개방과 경쟁의 부작용을 해결하는 잔여적인 가치가 아니라 사회발전의 기본원리이자 가장 중요한 목표다. 혁신은 사회를 정체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고 부단히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성장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발전, 경제성장을 추진해가는 원리이자 동력, 그리고 개혁의 추진력이다. 혁신은 경쟁을 부르기 마련이고, 경쟁은 불평등과 독점을 불러 연대의 기반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크다. 이 혁신과 연대의 충돌을 완화하는 가치가 개방이다.

신진보주의에서 개방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자신의 폐쇄된 구조에 매몰되지 않고 열린 자세로 타자와 협력해가는 방법론적 원리다. 이는 모든 것을 내부화하여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기존 발전모델의 한계, 예컨대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이나 중앙집권적 위계의 발전국가 등 한국사회 주요 행위자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닌 문제들을 혁파하고 수평적 네트워크를 실현한다. 그리하여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양극화를 완화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는 분권과 지방화를 실현하며, 거버넌스를 형성해 구성원들의 참여와 복지를 증진시킴으로써 혁신과 연대 효과를 낳는다. 개방은 또 문을 여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대외 개방, 세계화, 시장확대로 이어지는 이 부분도 기존 진보주의와는 다르다.

신진보주의 발전모델은 이 ‘개방, 혁신, 연대’를 한국 사회의 중장기적 발전을 지속하기 위한 중심가치로 삼고 이를 대외관계, 국내경제, 고용복지 등 각 영역의 국가 하위시스템에 적용한다. 이로써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협력 네트워크를 토대로 한 개방형 남북한 통합 민족경제, 동북아시아 지역 네트워크형 복합공동체(한반도-동아시아경제)를 창출한다.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되게 만드는 틀, 새로운 국가운영 시스템이 ‘민주적 발전국가’다. 민주적 발전국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정당정치 강화 차원을 넘어 ‘정치의 재구성’이 필요한데, 그 핵심은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연관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존 대의제 민주주의의 결함을 시정하고 보완하는 결사체 민주주의(associative democracy)와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통해 사회집단들을 공적인 의사결정 영역에 참여시킨다. 이는 생산성 연합과 분배 연합을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코포라티즘(corporatism)이다.

안병진은 노 정권과 여당은 보수주의적 공동체 자유주의 비전에 가깝고, 민주노동당은 실패한 북한에 온정주의적이고 시장의 혁신적 기능을 무조건 배타적으로 본다며 21세기적 진보라 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광범위한 사회혁신과 공공성이 양립하는 공화주의적 모색이 필요하다고 봤다. 양재진은 민주적 발전국가를 위해서는 의석배분을 정당투표 지지율대로 하고 지역구 투표는 당선자 순위 정하기 의미만 갖는 독일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한계와 보완할 점]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는 〈동향과 전망〉 67호 좌담에서 이 담론을 두고 “신우파(뉴라이트)에서도 개방·혁신· 연대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이라고 주장할 것 같다”며 신진보주의 중심가치인 개방·혁신·연대를 도대체 ‘신진보’라 부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표시했다. 심지어 연대의 가치까지도 강조하는 신우파인데, 개방·혁신·연대 세 가지가 모두 진보와 진보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엔 너무 미흡하다, 변별력이 약하다는 지적이었다.

신진보주의 모델 입안자의 한 사람인 정건화 교수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가장 많이 고민했던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신진보와 신우파 간에 가장 크게 다른 점이 ‘국가의 역할’이라며 신우파 주장처럼 국가의 역할을 시장이 대체하기 어렵고, 성장 잠재력을 유지하고 장차 통일을 감당해야 할 우리 처지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이 밖에 신진보주의의 ‘성장’ ‘발전’ ‘혁신’ ‘경쟁’은 신보수주의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도 있다. 김수진 이화여대 교수(정치학)는 연대와 발전은 상충되는 개념이라며 연구팀이 지향하는 발전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아 궁극적인 지향점, 국가 개념, 국가 역할 등을 상정하는데 혼돈이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그런 면에서 ‘혁신과 연대가 양립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연구팀의 생각과 개방이 그 양자의 충돌을 완화할 것이라는 주장도 좀더 정교한 이론화 작업과 함께 실천 가능한 구체적 정책으로 다듬어져야 설득력이 커질 것이다. 김양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원(경제학)은 신진보주의와 진보주의의 차별성이 확연하지 않다면서도 개방의 가치를 제시한 것은 높이 평가했으나 “현실에서 이 세가지(개방·혁신·연대)가 동시에 작동 가능하겠는가”라는 의문을 던졌다. 역시 현실정책들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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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7-03-13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의 기획 의도와 달리 -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 다섯 가지 이론 모두 '새로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가장 눈에 거슬리는 새로움은 바로, "성장과 분배는 원래 배척되는 것이 아니었다."라는 새삼스러운 호들갑이군요. 전혀 새롭지 않은 얘기들 - '복지 정책과 성장 정책을 대립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관계로(사회투자국가론)', '한국형 복지국가(사회연대국가론)' - 에 그저 의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그리 탐탁치 않습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먹고 사는 문제인 '분배'를 노골적으로 배척하는 체제도 논의 가치가 있긴 한겁니까. 제 아무리 파렴치한 체제라도 겉으로는 척을 하기 마련인 것을.

'새로운 사민주의(생태 평화 사회민주주의 국가론)', '역동적 공공성 - 성장과 분배를 아우르는 진보적 이념(신진보주의국가론)', '자본주의를 인정하지만 노동자가 생산활동에서 중심 구실을 하는(노동 중심 통일 경제연방론)' 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다른 것인지, 무엇이 역동적인지, 어떻게 노동자가 중심 구실을 할지, 제목은 있으되 내용이 없다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이론이 아닌 의견 정도로 받아들일 수야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북남통일경제가 되면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가 형성된다거나(노동 중심 통일 경제연방론), 개방을 하고 분권화를 강조하면서도 (시장에서의)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시장주의자들과의 차이점(신진보주의 국가론)이라는 분들, 너무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