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각의 감옥으로부터의 해방

이 땅에서 자유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 자유주의가 무엇인가
: 극우 세력들이 자유주의자를 참칭했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주의자들까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좌익분자' '급진세력' 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했다.
: 자신과 다른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은, 어떤 '주의자'를 떠나서 기본적인 것이다.
: 유럽에서 '자유주의자'라고 하면, 신자유주의자를 의미한다.
- 자칫 자유주의자를 자처했다가, 스스로를 좌파라고 믿는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재벌 앞잡이와 한 패거리 라는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 자유주의자로서의 기본 덕목: (1) 시장경제의 유일성 (2) 시장경제와 조화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시스템은 다당제와 보통선거에 기반한 의회민주주의 (3) 자유는 분할할 수 없다

나는 국론통일이 싫다

- "국론 분열을 조장하는 행위를 발본색원하고 온 국민의 총화단결을 이루는 데도 결단코 반대한다. 그렇게 해서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 "국민 개개인의 이익을 다 합친 것이 국익이라고 생각한다."
* 무엇이 국가의 이익인가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국적 자유주의'의 비극

- 공병호, 복거일 비판
- 자유주의의 역사: 법치와 입헌정치를 강조하는 온건한 자유주의와 평등을 중시하는 급진적 사회주의로 분열

조지 오웰, 2000

- 안기부 대공수사 국장 정형근, 고문기술자 이근안 "없는 사실을 조작하는 것은 공산당의 전형적인 선전선동 수법이자 지리산 빨치산 수법이다."
- 조봉암, 김대중, 박종철, 김근태, 김성학

* DJ 정부
박정희 기념관 국고 100억 지원
출범 1년 동안 490명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

내가 아직도 악몽을 꾸는 이유, 보는 만큼 알게 된다

- 주사파가 생긴 두가지 이유: 경제와 정통성
- 강제전향이 아니라 주사파가 말하게 두어야: 유시민, 김영환, 조유식

국가안보를 위한 위험천만한 초능력

- 국가보안법 적용의 자의적인 잣대 "국가보안법은 행위 당사자의 생각과 의도가 중요하다.", 그리고 불고지죄
- 한국과 미국의 범인인도협정: 국가보안법 관련 대상자는 제외

'음험한 평화'에 도전하는 전투적 자유주의자들

- 자유주의자의 글쓰기: 홍세화, 진중권, 손석춘, 강준만, 김정란

우리가 '미련한 인간들'에게 진 빚

- 민주화유공자보상법, 광주보상법
- 자백 거부 징역 3년, 자백 1년, 괘씸죄 20년
- 애덤 스미스 이후 주류경제학이 연구의 대상으로 선택한 인간은 이기적 개인.
- 이기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개인으로 이루어진 자유방임 체제는 필연적으로 환경을 파괴한다. 따라서, 이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한다.

2. '시장'의 미덕과 악덕

시장경제는 들꽃이 아니다
그 많던 경제전문가들은 다 어디로 갔나?
U.S.A 경제학의 한계
성공한 화폐 위조는 범죄가 아니다?
수출은 악이요, 수입이 선이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우리 나라엔 신문배달부가 너무 많다
사회적 협약은 '화장'에 불과한다?
정작 구조조정의 대상은 경제 권력이다
'과소비'도 때로는 미덕이다
손해는 나누고 이익은 독차지하겠다?
'현대'에서 벌어진 중세의 비극

3. 정치에도 자유경쟁을

정당은 없다
투표하지 않을 권리
더 낮게, 더 천천히, 더 가까이
"넌 좋겠다. TK라서!"
'일해(日海) 대사'의 행복 찾기
깨끗한 절망을 위하여
해바라기는 있다
개인적 원한과 비판은 다르다
그 사건은 제발 들추지 마세요?
비전향 장기수에 관한 단상
"통일하지 맙시다!"
탈북자의 인권과 위험한 이웃, 중국

4. 낡은 권위와의 결별

인문 정신은 누구의 몫인가?
대학 개혁,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희한한 '총단결'의 우울한 여운
'후안무치'는 힘이 세다
웬 군사부일체?
이유 있는 반항
전문성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238<61?
얼굴 있는 '박노해'의 거품
난폭한 화해
나도 때로는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아직도 '개 옆구리'가 필요하십니까?
지나친 여성화, 지나친 남성화

에필로그 / 다시 슬픔과 노여움으로

----------------

박정희 기념관, 이젠 거두라
 
이달 말로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사업이 시한 만료된다. 기념관 건립 허용 조건을 보면, 이 사업을 주도하는 박정희대통령 기념사업회에 대한 국고 지원 계획도 철회돼야 한다. 기념사업회가 500억원을 모금하면 200억원을 국고로 보조해 주기로 약속했으나, 모금액이 108억원에 그쳐 공사가 초기에 중단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기념사업회 쪽은 다시 시한 연장을 요구하며 국고 지원에 매달리고, 정부는 정치권 등의 눈치를 보느라 머뭇거리고 있다. 정부는 간명하게 국고 지원을 철회해야 한다.
정부는 애초 2002년 2월까지 기념관을 완공하도록 했다가 기념사업회의 요청으로 시한을 올 10월로 연장해줬다. 별다른 진전 없이 이제 그 기한이 다가온 것이다. 정부가 기한을 재차 연장해주면 또다시 편법을 허용하는 것으로, 이는 국고를 사용하는 최소한의 요건에도 어긋난다. 기념사업회 쪽은 규모를 줄여 구미에 215억원 규모의 기념관을 짓겠다는 대안을 제시했는데, 어떻게든 국고를 타내겠다는 편법에 지나지 않는다.

박정희 기념관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대구를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약속한 것으로, 처음부터 무리한 정치적 결정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일제와 유신독재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시점에, 친일과 독재의 전력이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관만을 서둘러 국고로 지원해 지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 기념관은 현정권이 역점을 두어 추진하고 있는 역사 바로세우기와도 모순된다. 과거사 진상규명의 길이 열려 한쪽에선 친일·유신의 공과를 열심히 파헤치는데, 다른 한쪽에선 미화 일색으로 기념관을 짓는다면 꼴이 우습게 된다. 국민적 합의가 없는 기념관 사업에 혈세를 써서는 안 되며, 굳이 짓는다면 역대 대통령의 사료관이나 현대사 자료관이 먼저다. 이번 기회에 역사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인물에 대한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 사업을 재검토해야 한다.

“박정희기념관 국고보조금 줘야”
행정법원 “지급취소 부당” 판결
 
 
  김태규 기자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안철상)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가 ‘기부금이 목표치에 미달됐다고 해서 국고보조금 지급을 취소한 것은 부당하다’며 행정자치부를 상대로 낸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했다고 1일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보조금법에서는 ‘사업자 자신이 부담할 경비를 조달하지 못한 경우’를 국가보조금 지급 취소 요건에서 제외하고 있다”며 “기념사업회가 모금해야 할 기부금 500억원도 결국 사업자 자신이 부담해야 할 경비이므로, 이를 근거로 국고보조를 취소한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정부가 2002년 7월 ‘100억원을 모금하면 100억원을 보조금으로 집행하겠다’는 수정된 방침을 제시했으나, 사업회가 100억원을 모은 뒤에도 보조금 집행 승인을 미뤄왔다”며 “박정희 기념사업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고 추진된 사업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행정에 있어서 신뢰보호의 원칙과 비례의 원칙은 모든 행정객체에 동등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공약으로 시작된 박정희기념관 건립사업은 기부금 500억원이 모이면 208억원의 국고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2002년 1월 착공됐으나, 기부금이 목표치에 미달되자 3월 보조금 지급이 취소됐다.

김태규 기자
 
[사설] 시대착오적인 주체사상 소동
 
[경향신문 2004-11-12 18:30] 
 

 
  
 광고
 
 
난데없이, 북한 주체사상 위협론이 등장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원들이 주체사상으로 무장 중이고, 김일성 방송대학의 인터넷 사이트가 개설돼 체제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어머어마한’ 주장이 제기됐다. 보수언론은 대서특필하고, 한나라당은 “철책선 침투보다 위험한 상황”이라고 아우성이다.

진상은 무엇인가. 전공노 조합원 80여명을 상대로 한 외부인사의 강연 내용 일부가 주체사상과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일성 방송대학 사이트를 통해 주체사상 원문을 접해볼 수 있게 돼서라고 한다. 설령 강연 일부가 주체사상과 비슷하다 치더라도, 어떻게 그게 전공노 전체의 사상적 성향과 연결되는가. 김일성 방송대학 사이트는 당장 열어보면 안다. 조악한 정지 화면과 ‘김일성동지 로작’ 등으로 짜여 있다. 인터넷 세대에게는 되레 ‘반공교육장’이 될 수도 있는 구성이다.

더욱이 이런 내용은 새삼스러운 것도, 비밀스러운 것도 아니다. 북한 관련 인터넷 사이트는 이외에도 많다. 현행법상 남쪽 주민은 북한 사이트에 회원 가입은 안되지만, 접속은 할 수 있다. 성인이면 누구나 서울 광화문 우체국 6층에 가서 ‘로동신문’을 읽을 수 있다. 정부가 북한 위성TV 시청을 허용한 것은 5년 전이다. 어지간한 서점에서는 주체사상 원문이 담긴 연구서를 구할 수 있다.

이래서 체제가 흔들렸는가. 일련의 북한 자료와 방송 개방 결과는 북한의 일방적 사상 선전이 우리 체제를 흔들 위협이 되지 못함을 웅변한다. 이미 야당도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국가보안법의 단순 찬양고무죄 폐지에 공감하는 상황이다. 이런 판에 인터넷에서 주체사상을 접할 수 있게 된 게 체제를 붕괴시킬 것처럼 떠드는 것은 정치적 의도이거나 아니면 시대착오다. 보수세력들이 인정하듯, 체제경쟁의 승부가 끝난 것이라면 더욱 두려워할 게 없다. 오히려 적나라한 북한 사상의 실체를 접하고, 그 허구성을 비교·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게 체제의 건강성을 강화시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국사 교과서를 꽤나 증오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책상과 의자가 빽빽하게 들어찬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있을 때가 그러했고, 계급투쟁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새로이 바라보던 시절이 그러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제 교과서도 하나의 책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도 다른 책과 하나 다를 바 없이, 필자 집단과 필자 집단의 관점이 녹아있는 책이라는 것이죠. 교과서에 대한 판단이 변한 것이 아니라, 교과서를 바라보는 감정의 응어리가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어졌습니다.

- 다소 딱딱한 필체이지만, 교과서도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읽기는 어렵지만, 찾기 쉽게 쓰여졌다고 할까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나뉘어 쓰여져있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이야기를 포기하는 대신 전체를 조망하는 편리함을 택한 것이죠. 하지만, 전자와 후자는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데에 아쉬움이 있습니다. 오히려 전후관계라고 생각해요. 분석과 종합이라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분석되고 종합될 대상이 필요한데 그것이 이야기이니까요. 초등학교, 중학교 교과과정에서 충분히 이야기를 전달한 다음이라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이미 여러차례 국사 교과서를 공부한 스물여섯 한국청년이 이야기에 목말라 대하소설이며 역사영화 데이터베이스를 뒤적이는 꼴이란.

- 영화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초반은, 한국 근현대사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자발적으로 - 엄밀하게 따져 자발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과 달리, 조선과 청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합니다. 그 결과는, 무력을 앞세운 침략이었고 지배와 통치였습니다. 그리고, 강요된 변화가 가져온 것은 - 변화의 방향이 옳고 그름을 떠나 - 가치관과 사회의 급격한 변화였죠. 이 점에서 조선과 청이 나아갈 길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역시 중국에서 5/4 운동이 일어나고, 이 흐름이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인해 한중 독립군의 연합작전으로 모아졌다고 본다면 너무 지나친 일반화일런지요. 하지만, 아무리 주인공이 조선이고 대한제국이며 한국인 국사 교과서라고 해도, 중국은 조연으로서의 자리매김도 확실하게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종종 국제정세, 대외정세로 다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마치 일인다역을 하는 이름 없는 조연배우 마냥 느껴진다면 좀 지나친 표현일까요.

- <마지막 황제>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 의 황제 '푸이' (이름과 지명은 원어 발음 그대로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의 일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국사 교과서에는 '만주국의 허수아비 국왕' 이라고 짧게 다루어졌던 그였죠. 그의 일생을 연기하는 배우가 유아시절, 청소년 시절, 장년기까지 모두 세명이라는 점이 상징적입니다. 유아시절의 그는 찬란한 중국왕조의 황제(1908년 즉위)였고, 청소년 시절(1911년 신해혁명)의 그는 자금성만의 황제였으며, 장년기(1924년 일본공사관 피신)의 그는 그저 명망있는 중국인일 뿐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지나간 시대의 최정점에 서있던 이를 가장 먼저 스치고 지나갔으며, 그만큼 가장 멀리 멀어져갔던 것이죠. 황제 푸이가 1911년 신해혁명과 함께 해체된다면, 인간 푸이의 해체가 1924년 군벌들 사이의 펑톈즈리 전쟁과 함께 자금성을 나오면서 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에서 일본공사관을 선택한 것이죠. 이러한 그의 선택은, 1931년 만주사변 이 후, 만주국 황제로까지 이어지면서 그를 전쟁범죄자로 만들게 됩니다. 그는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1959년 특사로 풀려나올 때 까지, 오랜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던 1967년 사망합니다. 전쟁범죄자인 자신을 심문하던 공산당의 간부가 죄인으로 몰려 뭇매를 맞던 시대였습니다.

- 영화를 제작한 이탈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훗날 발간된 푸이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을 원작으로 했다고 합니다. 그는

- 7살의 나이에 황제에 오른 푸이는 수많은 환관과 시종 시녀 요리사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넓고 높은 자금성의 벽에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이내 나갈 수 없도록 된 자금성의 벽은, 그에게 담장 이상의 것이었겠죠. 그는 푸이이기 이전에, 황제 푸이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비극적으로 마감시킨 일본공사관으로의 선택 역시, '황제 푸이'의 결정이었습니다.

- 동정적인 시선: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자금성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자유를 허락받지 못했다, 1924년 펑톈즈리 전쟁 이후 국민당의 종묘 도굴, 내내 멍한 표정, 일본 내무대신들의 농간, 등 

- 비판적인 시선: 권력에 집착하는 그의 선택, 신발끈 조차 매지 않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거지?" 라며 환관들에게 목욕물을 뿌려대던 유아시절 이후, 그에게서 웃음은 사라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한국어 초판이 88년에 나왔고, 실제 인터뷰는 60년대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보입니다. 토인비가 말하는 '요즘의 세태' 가 주로 60년대 미국의 히피족들을 꼬집고 있는 것 같군요. 60년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 가장 오래고 화려한 호황을 맞았던 세계 자본주의가 일단락되었던 시기이지요. 61년에 시작된 베트남 전쟁과 더불어, 세계 곳곳에서 반전운동을 비롯해 68년 '혁명' 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던 때이기도 합니다. <토인비와의 대화> 는 인생의 목적, 삶과 죽음, 여성 해방, 지적 생물로서의 인간, 건강과 복지를 위하여,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 사랑과 성, 현대의 과제, 젊은 세대에 대한 기대,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장편의 인터뷰를 담고 있습니다. 발췌독 하였습니다.

- (2장. 삶과 죽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학과 종교의 갈등, 종교와 종교의 갈등, 이데올로기 갈등은 도덕 내지 윤리라는 공통의 가치에 의해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 과학 이전에 종교가 있었다고 봐야 할까요? 과학이 종교로 부터 그리고 철학으로 부터 분리되어 나온 것이라고 봐야할까요?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류의 노력이 종교의 시작 - 그것이 다산의 기원이든, 풍년의 기원이든 - 이었던 것 처럼, 철학이나 과학도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철학자 과학자는 기원전 OOOO년 OOOO문명에서 탄생했을지 모르겠지만, 철학이든 과학이든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류의 노력 안에 모두 뭉뜽그려져 있을테니까요. 우리가 최초의 철학자니 과학자라고 지칭하는 이들 역시, 종교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생존 이래 계속 존재해왔던 고민이 어느 순간 집약되고 전문화되었음을 알려주는 척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도, 결국은 오늘날의 우리이니 말이죠.

- 역사의 길이로 과학, 철학, 종교의 우위를 구분하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그것은 처음 하나의 목적 안에서 뭉뚱그려진 상태로 존재했으나, 어떤 계기로 인해 하나씩 떨어져나가 각자의 영역을 구축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들이 각각 독립하여 종교 철학 과학이라고 불리우기 위해서는 나름의 완결된 체계가 존재해야 할텐데요, 종교가 이들 사이에서 제일 먼저 독립했다는 것은 곧, 종교야말로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체계화를 시도했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일부가 '종교'라는 이름을 달고 독립을 시도한 만큼, 이제 남겨진 이들과의 구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름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나머지 고민' 이라고 하죠. 선뜻 여기에 철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름들은 후세의 역사가들이 임의로 붙인 것일 뿐인데, 이런 이름들은 오히려 종교, 철학, 과학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름을 붙일 만큼 확실한 것은 '종교' 일 뿐, 종교로의 체계화 속에 편입되지 않은 고민들은 뭉뜽그려 '나머지 고민' 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나머지 고민' 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과 과학이 뭉뜽그려져 있을 것이구요. 이들은 종교와 더불어 끊임없이 인류 생존의 과제를 탐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 하지만, 예전 같으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을 끊임없는 탐구와 문제제기가 이제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수준은 비슷하면서도 가장 먼저 체계화되어 활약하고 있었던 종교이니 만큼, 가장 큰 지지세력을 형성했을 것이고 그것은 곧 정치권력이기도 했을테니까요. 이들의 문제제기는 종교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만 허락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가 바로, 종교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 생각인 '나머지 그룹' 이 종교에 의해서 억압받았던 중세에 해당한다고 보여집니다. 이 '나머지 그룹' 은 종교처럼 강력한 '스폰서' - 그것이 지지세력이든 정치권력이든 - 가 없어 고통받았을 것이고, 종교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올바른 문제제기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와 '나머지 그룹' 모두에게 불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직자 당국은 과학이 논파한 뒤에도 전통에 입각한 종교적 회답을 지켜 나가려고 하여 성직자 자신이 종교에 대한 평가를 떨어뜨렸습니다." 라는 토인비의 지적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 종교가 독립한 이래, 결과적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한 탐구 전체가 억눌렸다는 이런 밑그림은, 동서양에 보편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중 서양의 가톨릭은 '면죄부 판매' 로 비화되는 극도의 폐쇄성과 부패 속에서 '종교개혁' 이라고 불리우는 일대 변화를 겪게되죠. 그리고, 이것을 통해 줄곧 억압받았던 '나머지 그룹' 에게도 기회가 돌아오게 됩니다. 물론, 이들 모두 본래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그룹' 의 발전은 곧 종교의 발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개신교의 탄생이 그것이지요.

- 여튼, '나머지 그룹' 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제법 혁신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훗날 역사가들로 부터 '근대 철학' 이라는 이름을 선물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오늘까지도 이 '나머지 그룹' 이 종교와 같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고 보여집니다. '나머지 그룹' 중의 일부가 '과학' 으로 독립하고, 과학의 발전이 인류가 가진 욕구의 상당부분을 해결하면서 크게 주목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를 대체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

종교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서로 분리된 것은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과학은 오늘날 종교 못지 않은 아니 어쩌면 더 월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토인비는 이 점과 관련해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요, 첫번째는 종교와 철학으로 부터 독립한 과학이 스스로 이룩한 놀라운 업적입니다. 두번째는, 과학의 놀라운 발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렴하려 하지 않은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인데요, 실재의 현상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과학이 좀 더 명쾌한 언어로 추상적인 종교 교리를 뒷받침함에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들 스스로 과학과의 논쟁을 통해 스스로의 역할을 망각할 뿐 아니라 지위마저 떨어뜨렸다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

- 과학은 종교를 대체하지 못할 것이다.

- 도덕이나 윤리라는 교집합을 통해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극복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9권)

- 양세봉 피살
- 민생단 투쟁: 중국공산당 내에서 밀정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다수의 조선독립군을 살해된 사건
- 1935년 농촌계몽운동의 금지
- 집단농장(콜호스)의 건설
- 소수민족들에 대한 소련의 동화정책
- 소련의 조선독립군 무장해제
- 혈청단
- 미나미의 총독부임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 금메달 / 동아일보 정간사건
- 1차 만주이민 10만여명
- 조선혁명당군이 양세봉의 죽음 이후 동북항일연군으로 흡수
-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반 파시즘 인민전선’ 을 주창하면서, 중조항일연군, 조선민족 자치구, 조선항일혁명당이 건설
- 학생첩
- 1937년 보천보 전투
-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1925년 결성)
- 1936년 이재유계 경성트로이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실패
-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우즈베키스탄 8만명, 카자흐스탄 10만명, 지식인 2500명 총살
- 황국신민서사와 내선일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송수익: 개화당, 정미의병
- 송중원: 송수익의 첫째 아들. 일본에서 유학
- 송가원: 송수익의 둘째 아들.
- 송준혁: 송중원의 아들.

- 정재규: 만석부자, 노름꾼 / 정상규: 악질 지주 / 정도규: 일본에서 유학, 공산주의 소작회 조직

- 유승현, 고서완: 정도규와 함께 공산주의 소작회 조직

- 신세호: 서당 운영
- 신월엽: 신세호의 딸. 송중원과 결혼.

- 이광민: 송중원의 선배, 홍범도 부대, 한인사회당
- 최현옥: 양치성에게 고문 후 자결
- 윤철훈: 한인사회당 - 소련공산당 입당 - 전쟁 발발 후 ???과 위장 결혼, 밀정으로 활약하다가 검거.
- 조강섭: 한인사회당 - 소련공산당 입당 - 윤선숙과 결혼 -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도중 사망
- 허탁: 경성꼼그룹 결성 후 체포
- 설죽: 허탁을 연모하는 기생. 허탁과 송중원을 조심스럽게 돕는다.
- 홍명준: 송중원의 대학 동기

- 임병서: 독립의군부(임병찬, 최익현)

- 방영근: 하와이 이주
- 방대근: 신흥무관학교, 독립군 부대, 의열단
- 방보름: 무주에서 시집살이 - 서무룡에게 겁탈, 세끼야의 첩
- 오삼봉: 세끼야와 방보름의 아들 - 혈청단 활동 중 검거위기 피해 배영범과 만주로 도피 -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 중 사망
- 방수국: 백남일, 양치성에게 겁탈
- 감골댁: 간도참변

- 지삼출: 동학운동 / 무주댁

- 배두성: 정미의병, 만주독립군 / 필녀

- 한기팔, 김장성, 남상명, 박건식, 김용철: 토지조사사업
- 박동화: 박건식의 첫째 아들. 광주학생운동 주도했다가 퇴학. 서기직으로 일하면서 태도 변화. 관청으로 옮기려는 것 여의치 않자 술꾼으로 타락.
- 박용화: 박건식의 둘째 아들. 경성제대 사범대 졸업 - 소학교 선생님으로 근무 - 동경제대 법학과 입학 - 학병으로 차출

- 윤주협, 김시국
- 노병갑: 방대근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출신. 이후 변절하여 방대근에게 사망.

- 차득보: 장타령 - 공허와 관계 - 소작쟁의 주도 - 신세호의 딸 월엽이를 사모 - 도로공사장 차출
- 차옥녀: 소리꾼

- 박용만, 안창호
- 한법린

- 공허
- 전동걸: 공허와 홍씨의 아들. 일본 유학 후 사학회 활동 - 1941년 태평양 전쟁 직후 중국으로 도피 - 조선의용군 활동
- 지요꼬: 사학회 일본인 회원, 전동걸과 연인관계.

- 장덕풍: 보부상 출신, 상점 및 정미소 운영 / 장칠문: 순사
- 백종두: 군산 이방 출신, 일진회 회장, 면장, 호남친화회 회장, 하시모토와의 갈등으로 사망 / 백남일: 헌병 보조원, 방대근에게 실명한 후 정미소 운영
- 쓰지무라: 영사관 / 하야가와
- 하시모토: 일본 농장주
- 후지라, 요시다: 일본 농장주 / 이동만: 요시다의 농장 지배인 / 이경욱
- 양치성: 거지 출신 일본 정보원
- 서무룡: 군산 부두노동자 출신, 조직폭력 일심회 회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