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온라인에서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을 즐겨하는 편이 아닙니다. 온라인은 지극히 오프라인에 종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오프라인에 종속적일 때 온라인은 오프라인의 단점을 보완하지만, 오프라인에서 벗어나는 순간 온라인에서의 논쟁은 무책임에 너무 쉽게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책마을은 아직까지 소수에 국한된 커뮤니티라는 점에서, 최소한의 책임감이 보장될 수 있고 어느정도 논쟁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책마을 역시도 온라인 커뮤니티의 하나일 뿐이며, 온라인 커뮤니티의 논쟁에서 저는 절실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논쟁 보다는, 서로간의 다양한 관심사와 입장을 교류하는 것이 제가 책마을에서 바라는 바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죠.

하지만, 책마을에서도 불가피하게 논쟁을 해야할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나마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최소한의 책임감이 보장되기 때문이지,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라면 그냥 지나쳤을겁니다.

불가피하게 논쟁을 해야할 경우는, (1) 상대방이 최소한의 상식도 지키지 않을 경우와 (2) 객관적인 사실을 왜곡하고 있을 경우입니다. 저는 이 경우 글을 쓰기 시작하지만,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 이미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은 상대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니까요.

엥똘레랑스에는 엥똘레랑스인 법입니다.

주제는 삼성입니다.
사실, 제게 삼성이든 LG든 기업의 명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기업 일반을 움직이는 메커니즘, 즉 자본주의 운동법칙이니까요. 기업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 차이란 거대한 메커니즘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을 비판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가장 구체적이면서 가장 적나라한 폭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병씨가 책가지에 쓴 「삼성 예찬」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불가피하게 논쟁을 해야할 두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

“뉘라서 자신이 키운 기업이 힘들여 번 돈을 세금으로 퍼다주고 싶겠는가? 법에 구멍이 뚫렸으면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이지 위법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묘히 법망을 우회하여 세금을 최소화한 상태로 양도했으니 이 얼마나 현명한 처사인가! 피땀흘려 번 돈이 쓰레기 살찌우는 데 쓰이지 않고 세계 제 1,2위의 반도체 기업으로 우뚝서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는데 쓰였으니 이 또한 얼마나 다행인가!”


주병씨가 지칭하는 ‘쓰레기‘란 국가관료들을 뜻할겁니다. 공공연히 알고 있듯이, 일단의 기업범죄는 국가관료와의 유착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죠. 기업은 철저히 이윤논리에 따라 움직입니다. 영리행위 뿐만 아니라 사회봉사 역시도 철저히 이윤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국가관료와의 유착관계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서로 주고받는 상례를 그들은 철저히 지켰을 것입니다.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은 친일지주 출신이죠. 그는 일정부터 미정, 역대정권들과 빠짐없이 유착관계를 가져왔고, 그 안에서 혜택을 받아왔음은 물론입니다. 1938년에 시작한 양조업은 일정의 도움을, 1968년에 시작한 삼성전자는 박정희 정권의 도움을, 1980년의 문어발식 사업확장은 전두환 정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혜는 사업의 시작과 학장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관련한 경제범죄에서도 주어졌습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부터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선거자금을 비롯한 대가를 치뤘지만요.
때로는 국가관료들이 지나치게 이득을 보면서 80년대 부산의 국제기업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기업을 강제로 해체하는 권력을 휘둘렀을 수도 있겠으나,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거래에서 누가 남는 장사를 했느냐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밑그림을 가지고 있는 국가관료와 대기업들의 유착관계를 두고, 한쪽만을 편들기 하는 것은 공정한 처사가 아니겠죠. 더군다나, 설사 그들만의 진흙탕 싸움에서 보복성이 농후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삼성의 조세포탈 행위를 눈감아 줄 이유가 될까요. 국가관료들이 세금을 제 마음대로 전횡한다해서, 그것이 ‘쓰레기에게 바쳐지는’ 그래서 ‘적당히 포탈해도 되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주병씨도 알다시피 정부관료들은 삼성의 조세포탈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기업을 길들이고 싶어할테니, 그들의 폭로는 어디까지나 기업이 순응하는 그 순간까지 만이겠죠.
하지만, 삼성의 조세포탈 분식회계에 진정으로 분노하는 것은 서민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국가관료들과 언론이 서민들의 분노를 적당히 여론몰이하며 이용할 뿐이지만, 서민들의 분노야 말로 진정한 것입니다.

#

삼성이 세계 1위를 다투는 반도체 기업으로서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며 흥분하는 주병씨.
삼성을 이순신에 빗댄 주병씨의 비유는 무지와 왜곡의 극치였습니다. 잘못된 비유는 독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란 굉장히 모순적입니다. 한편에서는 굉장히 사회적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굉장히 소수만의 이해를 대변하죠.
전자는 기업이 구축하고 있는 사회망입니다. 삼성만 해도 동남아, 남미, 유럽, 중동 할 것 없이 진출해서, 인종을 가리지 않고 생산체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사업분야 또한 광범위하죠. 삼성이라는 기업 자체가 일종의 소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자는 그것이 기업주 개인이든 주주이든 상관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특성입니다. 이들이 선택하는 사업분야와 진출하는 지역은, 단순히 혁신 마인드 글로벌 마인드이기 이전에 이윤추구라는 동기로부터 시작됩니다.

문제는, 전자와 후자가 서로 대립한다는 것입니다. 주로 후자가 전자를 압박하죠.
그래서 그들은 교육, 의료와 같은 최소한의 공공부문에까지 사업분야를 확장하고, 최적의 조건을 찾아 공장을 이전하는데 있어서는 각 나라 노동자들의 생존권 따위는 여념하지 않습니다.
후자가 전자가 구축해놓은 성격을 파괴하고 있는 셈이죠.

전자는 단지 형식일 뿐입니다. 후자에 종속되어 있어요.
아무리 사회적 존재라는 허울을 둘러쓴다 하더라도, 기업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들이 기본적으로 처해있는 모순입니다.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것에 관심이 있는건,
이미지메이킹도 곧 이윤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삼성의 홍보광고팀과 그에 매료된 이들 뿐이지, 정작 광고를 만드는 삼성은 아닙니다.

이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증명될 것입니다. 현재, 삼성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수출의 22% 주식시장의 23% 세수의 8%인데, 이 비율이 높아질 수록 국가는 삼성이라는 기업의 하위파트너로 전락할 것이니까요.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과 봉건시대의 군인을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애국심을 추켜세우기 위한 것이라며 더더욱이요.

#

기업범죄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두가지 관점인 국가관료와의 유착관계, 기업의 모순적 성격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관점을 떠나서 기본적인 태도의 문제입니다. 객관적인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사람은 일기나 써야지 공개적으로 칼럼을 쓸 자격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가령, 기업이 자신에 속한 직원들에게 높은 연봉과 여러가지 복지를 구비해 주기만 한다면 노조를 구성할 하등의 이유는 없으며, 기업이 스스로 노조를 만들지 않는 것이 분명한 이상, 노조의 부제는 다분히 자발적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너무 바쁜 나머지 노사따위를 만들어서 파업할 여유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삼성은 높은 연봉으로써 그 댓가를 톡톡히 그들에게 주고 있다.”
“노사문제? 빌어먹을 노조가 없는 기업만큼 이상적인 기업이 어디있는가?”


주병씨의 의견 아닌 의견은, 삼성이 직원들에게 (1) 높은 연봉과 복지를 지급한다 (2) 노동조합이 없는 것은 직원들의 자발적인 행위이다 라는 것에서 비롯되었는데요,
삼성 직원들의 임금격차가 128배이며, 대기업 중 노동소득분배율(전체 매출액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제일 낫다는 것은 아시는지요. 아니면, 주병씨의 시선이 상층에만 맞추어져 있어, 삼성의 생산라인에 근무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인지요.

삼성이라고 요술방망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 200만원을 주고 100명 고용하던 노동자들을 전부 해고하고, 이제 2억 보다 낮은 1억 8000만원에 하청업체를 고용해서 전과 한치 다름없는 생산을 하면서도 2000만원의 이득을 보는 것이, 그 잘난 글로벌 경쟁이고 구조조정입니다.
삼성도 97년에 전체 임직원의 32%를 감원했고, 그 인력 전부를 사내하청과 아웃소싱으로 처리했습니다. 기본급 70만원에 매일 잔업 2시간, 토요일 일요일 특근을 해야 겨우 100만원을 넘기는 하청노동자들이 간판만 달려있는 하청업체 소속으로 자랑스런 삼성의 생산을 담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노동조합의 부재가 다분히 자발적이라구요?
하긴, 삼성에서 얼마 전에 삼성노동조합탄압백서를 발간했던 삼성일반노조의 김성환 위원장을 명예회손죄로 3년 8개월의 실형을 살게하는 분투를 했으니, 주병씨가 몰라주는 것도 예의일 수 있겠군요.

삼성의 노동자 탄압역사가 1950년대 제일제당부터 시작합니다. 결국 군산공장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1988년 노사관리지침, 1989년 비상노사관리지침으로 비롯되는 철두철미한 노무관리를 알고계십니까?
1987년에 삼성중공업, 삼성화재, 신라호텔, 에스원, 전부 노동조합을 설립하려다가 포기했습니다. 복수노조법에 걸렸던거죠. 최첨단의 삼성은 어용노조를 만드는 것도 최첨단이었으니까요.
중국 독일 등에서도 삼성의 무노조 원칙 때문에, 중국의 어용노조인 총공회 조차도 경고조치를 하고, 독일금속노조가 시위를 벌였습니다.
교육을 파는 공장인 성균관대에서도, 교지에 대한 편집권이나 학생 자치권에 대한 탄압은 물론이고, 2000년에 학생들이 삼성의 학내사찰 문서를 폭로하자 4명 출교 18명 징계라는 대학내 초유의 징계조치로 이목을 끌었습니다.
노동조합 포기각서는 양반입니다. 납치 감금에 백지수표, 삼성SDI에서는 휴대폰 위치추적까지.

이윤을 많이 내는 기업일 수록 최첨단의 노무관리를 한다는 것은, 역으로 최첨단의 노무관리가 기업의 이윤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삼성이 초유의 조세를 포탈하고도 과태료 몇천만원으로 가볍게 처리하지만, 고작 삼성노동탄압백서를 출간했던 김성환씨는 감옥에서 3년 8개월의 실형을 살고 있습니다.
주병씨의 글은, 논지를 떠나서 사실왜곡 자체만으로도 이들을 위해하는 것입니다.

책임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정정문구를 삽입하기를 바랍니다.
삼성의 이데올로그 역할을 자처하시려면 제대로 하실 것을 권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제가 지적하고자 했던 OO씨의 선입견은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굉장히 일반적인, 널리 퍼져있는 오해들입니다.
OO씨가 말씀하셨듯이, 노동현장의 절대다수도 그와 같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명백한 현실이죠.

이들이 어떤 사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우리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삶의 기반이 책상과 도서관이 아닌, 하루 10시간 이상을 기계에 매여있어야 하는 노동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스치듯 접하는 신문기사나 동료들과 나누는 잡담 정도로 얻을 수 있는 사상이란 없겠죠. 더구나 이들을 둘러싼 매체는, 끊임없이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과 사회주의적 전망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조장할 테니까요.

그렇지만, 이들은 지식인들보다 훨씬 더 사회주의사상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지극히 잠재적이지만요.
이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노동현장이 바로, 우리 사회의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들은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모두가 뭉쳐야만 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저 묵묵히 일을 할 뿐입니다.
이런 잠재적인 요소는, 이들이 노동조합과 같은 공동의 기구를 만들고 파업을 비롯한 쟁의행위를 할 때 비로소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파업을 비롯한 쟁의행위, 즉 그동안 감내해 온 모순에 대한 저항의 경험은 이들을 몰라보게 성장시킵니다.
제가 만나본 대부분의 신생노동조합 조합원들, 즉 이제 막 노동조합을 만들고 처음으로 파업이란걸 해본 노동자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동안 세상을 너무 몰랐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을 하자 이제서야 인격적인 대우를 하는 관리자들을 보고,
고작 몇푼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조합을 없애려고 일당 몇십만원짜리 용역깡패들을 고용하는 자신의 고용주를 보고,
일방적으로 회사 편만 드는 경찰들을 보고,
집회에 나온 다른 회사 노동자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들으면서,
십년 넘게 청춘을 바친 회사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너무나 간단히 해고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은 그동안 가려져있었던 사회의 진실을 보게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만이 겪고있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개인의 의식이 사회의식으로 발전하는 순간이죠.

물론, 이런 방식으로 사회주의사상까지 도달할 수는 없을겁니다.
자본주의에서의 경험이란, 최대치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일 테니까요.

사회주의자의 역할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자본주의의 모순,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전망과 연결시켜서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굳이 사회주의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지만 내용에서는 이미 그에 가까워지는 노동자들에게, "지금 당신이 얘기하는 바로 그것이, 사회주의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 이들의 역할입니다.

이제 다시 우리 얘기로 돌아오죠.
제가 위의 사례를 말씀드린 것은, OO씨가 직접 "도대체 사회주의를 열망하는 노동자는 어디에 숨어있는 것입니까?" 라고 질문하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노동자들 특유의 양식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 처럼, 노동자들의 생각과 사상이란 지극히 경험에 좌지우지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개방적인 척 하는 몇몇 지식인들보다 훨씬 개방적이며 진실에 가깝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 그러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책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죠.

사회주의에 대한 편견을 대하는 상이한 제 태도는 이것 때문입니다.
오직 경험과 진실 만으로 사회주의를 대할 노동자들의 일시적인 편견과,
자신의 알량한 지식 만으로 마음대로 사회주의 사상을 재단하는 지식인들의 뿌리깊은 편견은 분명 다른 것이죠.

전자에게 필요한 것이 설명이라면, 후자에게 필요한 것은 논쟁입니다.

그리고, 저는 근거없이 거만한 후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자본주의의 역사, 노동자투쟁의 역사와 혁명의 역사, 성공한 혁명인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변화들, 러시아 중국 북한 쿠바 등등 사회주의라 불리우는 국가들의 역사와 사회체제의 특징,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하루 1시간 연구할 마음조차 없으면서, 사회주의의 몰락에 대해서 너무나 유창하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말이죠.

저는 이들에게 이렇게 묻고싶습니다. "당신이 마음껏 사용하는 '사회주의'라는 단어의 정의가 대체 뭐냐."
대부분은 즉흥적으로 궁색한 대답을 내어놓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에 대해서,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미안함도 가지지 못한 이들이라면 저는 그와 논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가 이제서야 "사회주의가 대체 뭐요?" 라고 묻는다고 해도, 그에게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감도 없는 이런 이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자격' 조차 없습니다.

이런 최악의 경우만 아니라면 저는 논쟁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서로의 오해와 편견들을 바로잡을 수도 있고, 좋은 정보와 고민거리를 얻게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혹 논쟁이 아니라 제가 던지는 질문이라면,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제 생각을 상대방에게 설명하는 것은 제게도 많은 도움이 되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OO씨가 사회주의를 두고 마치 일련의 경제정책의 하나인 것 처럼 고집하는 이상, 논쟁이 수월하지 못할 것 같군요.

"도대체 이 시점에서 사회주의로 어떻게 가느냐" "뭔지 골라내어 순수한 무엇을 만드는 것"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수정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OO씨의 사회주의에 대한 무지와 그로 인한 선입견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꽤나 예의가 바른 사람입니다만, 달리 정중하게 표현드릴 방법이 없군요. 사회주의에 대해서 무지하면서, OO씨에게는 일말의 조심스러움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엥똘레랑스에는 엥똘레랑스인 법입니다.

사회주의는 당장 도입할 수 있는 경제정책의 성질도 아닐 뿐 더러, 당장 혁명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사회를 두고 사회주의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혁명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하나이지만, 결코 마술봉이 아니니까요.
OO씨가 자신만만하게 "대안이 없다"며, 당당하게 차악으로 선택하는 자본주의 사회 조차도, 산업혁명/부르주아혁명 이후에 오늘과 같은 사회의 모양새를 유지하기 위해 족히 150여년은 넘게 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참을성을 갖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사회주의가 일종의 경제정책이 아닌 이유에 대해서 다시 설명드리죠.

사회주의자는 물리적 조건을 인위적으로 뛰어넘으려는 어떤 시도에도 반대합니다. (1) 계급 (2) 정당 (3) 봉기 이 세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혁명은 일어날 수 있죠. (1) 대중들의 열망과 동의가 있어야 하고 (2) 대중들의 의사를 결집시킬 정당이 필요하고 (3) 정당과 대중의 직접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충족되지 않은 조건들입니다. 다만, 이 조건들이란 가만히 앉아있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에 한마음으로 연대하고, 정치적인 선전도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이 시점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뿅망치'를 찾고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주병씨일 뿐입니다.

다음으로, 계획경제에 대해서 말씀드리지요.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기업단위, 국가단위, 세계단위에 이미 계획이 존재합니다. 다만, 자본주의는 계획이 무정부적인 경쟁에 종속되어있을 따름입니다.
OO씨 말씀대로, 계획의 규모와 통제력은 반드시 비례하죠.

여기서도, '모두가 알아서 잘 하리라' 기대하는건 제가 아니라, 주병씨일 뿐입니다.
큰 규모의 계획에 따르는 거대한 통제력을 소수 관료가 행할 것이라 비관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OO씨일 뿐입니다.

1871년 파리꼬뮨이나, 1917년 러시아의 소비에트, 1960년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자주관리운동, 1970년대 칠레의 꼬르돈, 1980년대 한국의 광주, 등 전혀 관료적이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OO씨는 실패만 기억할 뿐 일말의 교훈도 배울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대로 읽지도 않은 독서후기에 성급하게 결론을 요구하고 논평을 즐기기 보다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이해해보는건 어떻습니까.
정책을 논하거나 결정하는 자리도 아니고, 서로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곳입니다. '대안은 없다'라며 차악을 선택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이전에, 제가 읽고 소개하는 책에 작은 관심을 갖고 '아 이런 것도 있구나' 라고 가벼이 받아들이는건 어떻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오랜만에 영준이와 통화를 했습니다.
영준이가 난데없이 자동차공장의 불법파견 문제에 관해서 물었고,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이 친구가 현재 학보사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불법파견 문제에 관해서 기사화시켜보고 싶다고 했고, 혹 기사가 통과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덧붙였습니다.
자료를 건네주기로 약속하고 통화를 마쳤습니다.

사실, 저도 기회가 된다면 불법파견을 소재로 책마을에 글을 쓰고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계속 미루어왔던 터였고,
이 참에 썰을 한번 풀어야겠습니다.

#

불법파견은 노동시장의 비정규직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개중에 적당히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었던 사안입니다.
현대자동차 울산, 아산, 전주공장을 비롯해서, 한국 산업의 한 축을 이루는 자동차사업장에서 대대적으로 불법이 난무한다는 기사는 적당히 눈길을 끌만 합니다.

불법파견이란, 말 그대로 '불법적인 파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행 파견법은, 이건 파견해도 되고 저건 파견하면 안된다는 식으로, 파견이 가능한 업종을 제한하고 있죠.

자동차사업장에서 노동자를 파견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현대자동차가 대략 몇십개의 중소규모 업체와 계약을 맺습니다.

이 업체들은 공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스무평 남짓한 사무실만 가지고 있을 뿐이죠.
하지만, 몇십명에서 몇백명의 직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장도 없는 이 업체의 직원들은 어디서 일을 하느냐, 바로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일을 합니다.

노동자 파견에 대해서는, 노가다를 생각하시면 가장 간단합니다.
고용은 업체에 되어있지만, 일은 파견되어 하는 것이죠.

현대자동차와 같은 대규모 자동차 공장에는,
절반 정도는 현대자동차 직원이, 또 절반 정도는 업체 직원들이 일을 하는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관례적이고 상식적인 일이었죠.

#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 관례적인 사건을 두고,
노동계 일각의 활동가들이 이슈화를 시켰습니다. 노동부에 집단으로 진정을 넣은 것이죠. "이건 불법 아닌가요?"
그리고, 진정을 접수한 노동부에서는 현장 실사를 진행했고, 경이롭게도 대부분의 자동차공장들이 모조리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습니다.

파견이 불법이라면, 파견을 안해야 하는거겠죠. 즉, 직접 고용해야 하는겁니다.
업체 직원이 아니라, 현대자동차 직원으로 고용을 해야하는거죠.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본급이 70~80에 불과한 업체 직원을, 그것도 한두명이 아닌 몇천명을, 하루아침에 연봉 3000~4000의 직원으로 고용해야 한다니.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겠죠.

결국, 이슈가 되었던 이 사건은, 현재 법은 법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불법파견 진정을 넣었던 각 자동차 공장 업체 직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회사와 노동부를 상대로 투쟁이란걸 시작했습니다. "노동부가 판결했으니 직접고용해라." "니들이 판정내려놓고 왜 보고만있냐 집행해라" 라는게 이들의 요구입니다.

하지만, 금호타이어를 제외하고는 현대자동차 울산 아산 전주공장, GM대우자동차 창원공장, 구로공단의 기륭전자, 하이닉스-매그나칩 공장, 등등 어느 한 곳도 시정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요구를 했던 업체직원들은 해고되거나, 고소고발, 손해배상, 가압류, 등을 받았습니다.

#

불법이고 합법이고를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노가다 처럼 잠깐 하는 일도 아닌데, "굳이 파견을 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의문을 던질 수 있을겁니다.

상식적으로 답을 낼 수 없는 이 질문의 답은,
기업경영의 비용의 논리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목적은 비용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우리 공장에 직원이 10,000명이다 치죠. 그런데, 10,000명 모두의 임금을 깍으면 10,000명이 반발을 합니다.
그렇다고, 나머지 5,000명만 임금을 깍자니, 같은 일 하는데 누구는 많이 받고 누구는 적게 받으면, 그것도 반발을 살 것 같습니다.

이런 짱구에서 나오는겁니다.
관례적으로 행해왔던 자동차사업장의 파견제도는, 위의 안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실제, 공장에 들어가면, 현대자동차 직원이나, 업체 직원이나 같이 출근해서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같이 퇴근을 합니다.
하지만, 대기업 현대자동차 직원의 연봉은 3,000~4,000만원, 업체 직원의 기본급은 70~80정도입니다. 잔업 특근 꼬박꼬박 하면 150정도는 벌 수 있구요.

저 사람과 나와의 '신분차이'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겁니다.
당연히 같은 일하고 덜한 대우를 받는데 불만은 있겠지만, 위의 두가지 안처럼 터무니 없지는 않았던거죠.

이런걸 두고 '교묘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혁신적인 비용절감과 자랑스런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의 국제경재력으로 국내 일자리 창출과 국가체면을 살려주던 노동자 파견이,
모조리 불법파견을 받았던겁니다.

노동부의 어려운 법조문은 '1년 365일, 필수적으로 운영되는 자동차 직접생산 공정에는 파견을 할 이유가 없다' 는 뜻이었습니다.

#

여기까지의 그림을 가장 우화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덩치가 큰 갑동이와 덩치가 작은 을동이, 그리고 이성적이고 공부 잘하는 병돌이가 있습니다. 갑동이는 매일 을동이의 도시락도 뺏어먹고 온갖 괴롭힘을 다하는데, 어느날 을동이가 이렇게 묻습니다. "병돌아, 갑동이가 내 도시락 뺏어먹는건 잘못된거지?"

정말 새삼스럽기까지 한 이 질문에, 병돌이는 안경 코를 올리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럼, 그건 너의 도시락이기 때문이야. 갑동이는 너의 도시락을 뺏어먹어서는 안되지."

을동이는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갑동이에게 이렇게 얘기하죠.
"갑동아, 공부 잘하는 병돌이가 니가 잘못했대. 이제 내 도시락 뺏어먹지마."

다음날 어떻게 되었을까요?
갑동이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을동이는 갑동이의 미움을 받아 그나마 먹던 밥도 못먹게 되었고, 병돌이는 조용히 자기 공부만 하더군요. ㅎㅎ

#

영준이가 이 사건을 학보사에 기사화하겠다고 합니다.
저는 영준이의 기사가 아래 제목을 달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첫번째, '불법파견 사업주는 노동부의 판정을 성실히 시행하라'
그들이 성실히 시행하지 않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비용의 문제, 즉 회사의 사활이 달려있기 때문이죠. 내가 죽게 생겼는데 법 지키겠습니까. 하나 마나 한 말일겁니다.

두번째, '불법파견은 근절되어야 한다'
불법파견이 안되면, 합법파견은 된다는겁니까.
불법 합법의 테두리로 문제를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법이라는게 그렇습니다. 그것은 독립적이거나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에요. 시소에 올려둔 공처럼, 기울기에 따라 왔다갔다 하는거지요.
실례로 불법파견 판정은 98년에 제정된 근로자파견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97년엔 모두 불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비정규법안 통과되어서 파견을 허용하는 업종이 확장되면, 어제는 불법이었던게 합법이 되는 것이구요.

세번째,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 법은 멀어..' 류의 동정적 기사.
동정심은 순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느끼는 것이죠.

좋은 기사를 써주세요. 자극적인 필체로 독자의 호응을 끌어내기 보다는, 독자에게 진실한 기자가 되어주세요.
한두명이 읽더라도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 "나하고 무슨 관련이 있을까?" 를 고민할 수 있도록 말이죠.

백명이 잘못 이해하거나 순간 동정하고 잊어버리느니,
가슴으로 이해한 한두명이 더 낫습니다.

#

제가 싫어하지 않지만, 동시에 믿지 않는 두가지는,
바로 '법'과 '여론'입니다.

법과 여론은 인격체가 아니니,
법을 시행하는 정부기구, 여론을 만드는 언론을 대할 때 그렇습니다.
싫어하지 않지만, 절대 믿지 않죠.

하지만, 자칫 난폭해보이는 이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제 동료가 많아질 것이라 낙관합니다.

비정규직들이 많아져야 느끼는 사람도 많을텐데, 이 사회가 알아서 비정규직을 늘려주니 말이에요.
동료가 많아질 것을 낙관하는 저는, 억지로 사람들을 자극하거나 느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동료는 늘어날테니, 전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갈까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제게, 알리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

이제 자료를 안내할 차례이군요.

- 불법파견이 무엇인가 하는 점, 그리고 초기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비정규노동센터에서 나온 자료를 첨부합니다. 정확한 법안은, 98년에 제정된 근로자파견법을 참고하세요. 노동부에 자료가 있을 것이고, 진정과 관련해서도 문의하면 답변을 줄겁니다.
- 불법파견의 실태자료는 첨부합니다. 금속연맹에서 집계한 자료인데, 작년 것이네요.
- 불법파견 진정과 이후 사태 추이에 대해서 정리된 자료는 없습니다. 신문을 검색하는게 제일 따끈따끈하고 나을겁니다. 한겨레, 매일노동뉴스, 참세상에서 '불법파견'으로 내부검색하세요.

혹, 자료가 너무 방대해서 추리기가 힘들다면, 저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일단, 대략 자료를 읽고, 기사의 골간을 잡아, 구체적으로 필요한 자료를 결정한 후에 자료찾기를 시작하는 것이 정석일겁니다.

이것이 결정되면 알려주세요. 구체적인 자료를 당장 영준이가 찾기는 힘들테니, 그 자료가 어디 있는지는 제가 찾아볼께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에서야 마지막편을 시청했네요.
전두환과 노태우가 김대중의 은총을 입어 특별사면 되는 것으로 종영이 되었습니다.

처음 방영할 때는 군 복무 중이었는데,
당직근무를 설 때면, 당직사관의 눈치를 슬슬 보아가며 채널을 돌렸던 기억이 나네요.

역사란, 역사가가 사료를 선택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객관성을 잃어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회의 제목이었던 '적과 동지' 는, 어쩌면 <5공화국>을 연출한 제작진의 시각을 그대로 투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뭐 쉽게 얘기하면 그렇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확실한 적으로, 김영삼은 반쯤 적으로, 김대중은 약간 적으로.
동지는 단연 시청자들이겠죠.

함께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518 대학살을 자행하며 정권을 장악했던 전두환과 노태우.
전두환의 지명과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그런 노태우와 3당 합당을 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해 준 김대중.

그런 그들이 매번 대통령에 당선되어 과거사를 청산하겠다는 것은,
참으로 볼품 없는 연극에 불과할겁니다.

참으로 볼품 없는 연극.
그러나, 이 박한 평가는 이 드라마에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마치, '액자소설' 과 같은거죠.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 조지오웰이 <1984년>에서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라고 했듯이,
입맛에 맞는 과거만을 골라 좋아하는 양념을 쳐놓은 과거란, 어쩌면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누더기가 되었다던 과거사청산 소동이,
전두환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이니, 5공 인사들의 항의서한이니 온갖 헤프닝을 만들어온 <제5공화국>이,
꼭 그렇습니다.

이제 이 드라마에서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시민들이,
청와대에 국정원에 정당을 비롯해 온갖 주요 기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극장에서 잘 짜여진 한편의 연극을 보고나온 사람들은, 얼마간 그 감동에 휩싸여 지낼 것입니다.

보수 대 민주라는 낡은 구도 말이죠.
하지만, 차마 연극을 볼 여유가 없었던 사람들, 아직도 엑스트라에 불과한 사람들은 더 쉬이 진실을 눈치채고 있을지 모릅니다.

다시 한번.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현실에 대해서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권력자도 오늘날의 현실에 대해서 진실을 밝히지 못할 것입니다.
밝히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권력자가 아닐테니까요.

그래서,
진실은 아래로 흐른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 방용석 근로복지공단 이사장, 노무현 대통령,
과거 민주화운동을, 노동운동을 20년 30년 했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를 무척이나 들먹입니다.

"내가 노동운동 20년 했는데, 너희들처럼 하지는 않았다."
"니들이 노동운동가냐, 폭력집단이지."

29일째 단식농성을 하고있는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에게,
방용석 이사장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과거를 기념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그들이 현실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던지는 과거사 교육이란,
이렇듯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드라마 잘 봤습니다.

 


참, "한국 드라마 참 대단해졌다" "한국 역사 많이 발전했다" 호들갑 떠는 분들께, 한마디 더 해야겠습니다.
5공이래봤자 고작 20년 전일 뿐입니다. 정확히 20년 후에 또 이런 드라마가 방영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이 드라마를 시청할 당신의 딸, 아들들이 똑같은 평을 할 것입니다. 20년 전일 오늘날을 비판하면서 말이죠.

역사는 진보합니다. 이 시절을 앞당기려면,
양념된 과거를 기념하기 보다는, 냉혹한 현실에 주목하는 당신이길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