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론 - 구조, 연대, 창조
앤서니 엘리엇 & 브라이언 터너 지음, 김정환 옮김 / 이학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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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미디어화"는 자신의 경험과 주변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사례이고, 숙고가 필요한 주제 같다.

공들인 번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내용이 지루하다.... 또는 산만하다...


Sherry Turkle, 『스크린 위의 삶』Life on the Screen.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사람들은 젠더, 성적 지향, 인종, 종족, 지위, 계급 등을 바꿀 수 있다. 요컨대 온라인상의 자아Net-self는 구체적인 상황 속의 자아를 뛰어넘는 것이다. - P216

마크 포스터, 『뉴미디어의 철학』
실시간으로 전 지구상에서 접해볼 수 있는 컴퓨터 글쓰기는 비선형적 시간성 속으로 진입하여 글 쓰는 주체와의 관계를 동요시킨다. ... 컴퓨터 글은 포스트모던한 주체를 만들어내는 공장과 비동일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기계를 도입하며, 서구 문화가 가장 만개해 있는 곳 속으로 그것의 타자를 각인시킨다. - P218

William Bogard 왈, "사이버스페이스의 커뮤니케이션은 낯설고 이상하다. 버튼을 한 번 누르는 것으로 영토가 사라지고, 멀고 가까움,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 내부와 외부 사이의 대립이 붕괴한다.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모조되며, 집단성은 그 경계를 상실한다." 가상의 대화 상대자 사이의 유대를 대인 관계로 기술하는 것은 곤란한데, 가상에서의 대화 흐름은 대단히 예측 불가능하고, 혼합적이며, 개방적인 네트워크 및 연결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이 가상의 공간은 성별, 젠더, 인종, 종족, 계급, 사회적 지위 등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표지가 무화되어버리는 "정체성이 없는" 낯선 영역이 된다. 가상의 사회성을 권리와 의무 등 통상적인 도덕적 담론에 적용하기 어려운 것은, ‘스크린 위의 삶‘에는 구조화된 사회적 삶에 저항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몸시 환영적인fantasmatic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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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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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페이지쯤 읽고 있을 때다. 그러니까 남북전쟁 전의 메릴랜드 시골에서 개고생 끝에 다나와 케빈이 마침내 1976LA의 집으로 돌아온 다음 익숙한 것들에 낯설어하고 있을 때, 짜증과 빡침이 확 밀려왔다. 책이 끝나려면 아직 백 페이지도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곧 다나가 또 19세기로 불려갈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나가 타임슬립을 피할 수 없듯, 독자도 노예의 고초라는 간접경험을 피할 수 없다. 채찍질, 강간, ... 노예의 자식들을 팔아넘기는 저 백인 남성 루퍼스가, 그리고 그에게 이 모든 일들을 당해야 하는 흑인 여성 앨리스가 다나의 조상이다.

 

1976LA. 다나와 케빈은 새 집으로 이사왔다. 몇 년 전, 다나는 열 살도 더 위인 백인 남성 케빈을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함께 일하다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작가이지만, 생계를 위해 그 곳에서 일해야 했다. 케빈은 막 소설을 출간했던 참이었기 때문에 이제 그 창고 일과 이별할 수 있었지만, 다나와 관계를 이어간다. 두 사람은 인종간 결혼을 반대하던 양가의 반대를 무시하고, 라스베이거스로 가서 결혼했다. 197669일부터 74일까지의 시간이 흘러간다.

 

남북전쟁 전의 매릴랜드 깡촌. 노예주였던 메릴랜드에서 흑인의 목숨은 그가 자유민이라고 해도 파리목숨였다. 주인과 노예, 노예 감독, 노예 상인, 그리고 흑인들을 사냥하는 순찰대... 이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나는 자신의 조상 루퍼스가 위험을 느낄 때마다 타임슬립을 통해 이 시대로 불려와서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새로운 관계들을 맺어나간다. 관계들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이 백인 남성 주인과 흑인 여성 노예 간의 명확한 권력관계일 때조차, 여기에는 지배와 함께 정서적 의존, 처벌과 함께 보상이 같이 존재한다. 루퍼스 와일린이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젊은 나이에 죽을 때까지 1810년대부터 대략 20여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다.

 

서로 다른 두 시간대가 타임슬립을 통해서 한데 엉킨다. 타임슬립이라는 비현실적 발상을 통해 재현되는 스토리는 매우 현실주의적이다. 보통의 경우, 예닐곱 세대 위의 조상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지 감을 잡기 힘든데, 우리의 일상적 감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을 타임슬립을 통해 재현하는 버틀러의 스토리 만들기는 매우 강렬하다. 버틀러는 이 소설의 장르를 잔혹환상물(grim fantasy)이라고 불렀다는데, 딱 어울리는 명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타임슬립이라는 환타지는 리얼리즘을 위한 강력한 장치로서 작동한다. 한국 소설이라면 국뽕의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을 소재인데, 읽는 내내 사실성이 채찍처럼 몸에 고통과 상처를 남긴다는 느낌으로 몰입했다.

 

여기서 말하는 (kindred)”은 혈연관계를 통해 맺어진 정체성(identity, 동일성) 집단이기보다는 선택이 개입되고 책임, 곧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이 작동하는 인간관계이다. 그것은 따뜻하기만 하고 무구한(innocent) 본원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 속했던 타자들이 예기치 않게 만나 관계를 형성하고, 애증 속에서도 서로를 외면하지 않고 돌보는 성숙한 관계이다. 해러웨이의 말을 인용하자면, “정체성 대신 결연과 연대로 위기에 대처하는 결연집단(affinity group)”(해러웨이 선언문, 30-31)이며, “깊은 손상과 중요한 차이를 가로지르는 킨(kin) 만들기,” 곧 갓킨(godkin)이 아니라 아드킨(oddkin) 만들기이다(트러블과 함께하기, 189, 9).

 

소설 속에서 이 킨십(kinship)은 여러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마음과 감정의 여러 층들을 드러낸다. 인종과 연령을 뛰어넘은 다나와 케빈의 관계, 루퍼스의 무의식적 구조 요청에 언제나 저항하지 못하는 다나, 사랑과 자유를 위한 탈출을 감행했다가 아이작을 잃고 갖은 고초를 겪으며 노예 신세로 전락한 앨리스,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주인으로 지배하는 루퍼스, 두 명이지만 루퍼스에게는 한 명이나 다름 없는 다나와 앨리스, 이들을 돌봐주는 새라, 캐리, 나이젤 등... 버틀러는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심정의 교차를 탁월하게 풀어낸다. 고귀한 죽음은 없고 억울하거나 억울하지 않은 죽음만 있는 것도 가슴 아프지만 마음에 들었다.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켜야 하는 삶, 등에 새겨진 채찍 자국과 없어진 왼쪽 팔.

 

500페이지가 넘어서 다시 1976년으로 다나가 돌아왔을 때,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Gracias a la vida!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마 다나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은 좀 멍한 상태다. 역사, , 고통, 생명, ... 이런 말들이 머릿속에 계속 떠돈다.

 

2022. 오후인데도 깜깜해지며 소나기가 퍼붓는다. 이제 격리도 하루밖에 안 남았다. 다시 한 번 Gracias a la v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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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 인간공학에 대하여
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문순표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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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는 Übung (practice)을 주로 "수행"으로 번역했는데, 문맥에 따라 "실천"과 "수양(수련)"으로 번역했어야 했다. 

그래야 performance를 "수행"으로 번역할 수 있다. 

466쪽 이후에는 "연습"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괜찮다.

번역이 어려웠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문제작을 이런 식으로 번역출판해놓으면 어떡하나?

번역 진짜 마음에 안 드는데, 문제가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지적하기 귀찮다.


그리고 리뷰든 페이퍼든 이 책에 관해 올라온 저 쓰레기 같은 광고들은 저것을 조장한 출판사든 방조한 알라딘이든 좀 치워라. 악취가 진동한다!!!

고대는 실천적으로 수련의 특성을 띠고 반대로 근대는 노동의 특성을 띤다는 명제는 수행 세계와 노동 세계, 완성 세계와 생산 세계의 대립과 아울러 내적 연관을 주장한다. ... 양쪽 체제를 특징짓는 것은 인간의 힘을 대규모의 노력 프로그램에 통합하는 능력이고, 이 체제들을 분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갈라진 동원의 방향이다. 근대의 경우, 소생된 활력이 대상(객체) 내지 생산물의 우위에 완전히 종속되다가 결국에는 이윤이라고 하는 추상적 생산물이나 혹은 ‘작품‘으로 전시되며 수집되는 심미적 물신에까지 종속된다. 고대의 경우는 모든 힘이 수련 과정에서 훨씬 더 높은 단계의 순수 수행적인 존재 방식으로 발전하는 수행하는 주체를 강화하는 데 유입된다. 활동하는 삶vita activa에 대립시키기 위해 관조하는 삶vita contemplativa으로 지칭했던 것이 실제로는 퍼포먼스(遂行)하는 삶, vita performativa이다. ... - P340

니체는 그의 독자들이 그를 정말 이해하길 원한다면 근대인이 되어서는 안 되며 노동 논리가 수련으로 회귀하는 그 시작을 알리는 명상가 혹은 ‘되새기는 자‘가 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와 달리 푸코가 1980년경 ‘자기배려‘(돌봄)에 대한 고대 담론을 현재의 논의 속에 다시 가져왔을 때 이것은 치료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종결됐다는 신호였다. 그때부터 중요한 의제가 된 것은 고대철학과 근대의 예술 실천과 육체 실천의 출처들에서 어떤 일반화된 수행의식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다. - P343

운명을 거스르는 어떤 단단한 피부를 기르길 원하는 사람은 먼저 편안한 것에 대한 자연적인 선호를 버려야만 한다. - P350

헤테로토피아는 푸코에 따르면 ‘다른 장소적‘ 공간의 창조로, 한편으로는 어떤 특정 문화의 사회적 자리들의 구조에 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내부에 전체의 논리에 보통 역행하는 완고한 규칙들이 통용되기 때문에 일상적인 연속에서 떨어져 나온다. 헤테로토피아의 예로 묘지, 수도원, 도서관, 귀족의 유곽, 영화관, 식민지와 선박을 든다. 힘들이지 않고 이 목록을 체육시설, 섬 휴양지, 순례지, 성지, 주차장과 다양한 종류의 접근 금지 구역 같은 현상들로까지 연장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의 헤테로토피아적 공간 발명 가운데 우주정거장은 가장 중요한 혁신들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 P355

한 명의 재능 있는 수공업자나 혹은 유능한 음악가가 되려면 옛 요강에 따라 최소한 1만 시간 동안 연습하는 ‘실천‘(practicing ‘praxis‘)이 꼭 필요하며, 더 높은 단계의 장인 능력을 고려한다면 서슴없이 그 수를 곱절하거나 3배로까지 해야 한다. 천재라고 불렀던 것은 얼마 전까지 평균 수련(practice) 시간을 화려하게 단축한 경우들을 가리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는데, 음악 신동들을 떠올려보자. ... 이 유형은 행위자가 대상의 생산이나 효과의 유발에 몰두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이와 같은 활동을 하는 자신의 능력을 재생산하고 확장하는 어떤 연습하는 일(practicing work)을 고무한다. - P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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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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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 자본주의는 풍요가 아니라 인위적 결핍을 양산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을 잘 설명하였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의 실패의 원인을 젊은 맑스의 생산력지상주의와 유럽중심주의적 편견을 잘못 답습한 것에서만 찾고 있는데, 역사적 문제를 철학자가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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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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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을 만들어라, 아기 말고!

Make kin, not babies!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76393623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부제인데, 한국어판은 kin을 "친척"으로, babies를 "자식"으로 번역하였다.

(https://blog.aladin.co.kr/eroica/12900997#Comment_12900997)

원어대로 음차하는 것이 번역자의 임무를 방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번역으로 원래의 뜻을 훼손·왜곡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다. 

더구나 전례가 있고, 그것이 꽤 유려한 번역으로 되어 있다면, 그것을 따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전의 저작들에서 "존재론적 안무", "부분적인 연결들", "소중한 타자", "합생" 등의 개념을 통해 포착된 관계맺기의 방식인 kin의 어원은 아마도 직접적으로 버틀러의 이 소설 『킨』(Kindred)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 인용 부분이 바로 해러웨이가 "kin"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kin"은 "친척"으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

그냥 "킨"이라고 하자. "찐친"이 더 나으려나... ㅋ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어야 했다. 정말로 혈연관계만으로 내가 그에게 두 번이나 끌려온 일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밖에 다른 설명도 있을 수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낯설고 이름조차 없는 무엇인가가. 혈연관계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이상한 무엇인가가 우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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