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지음, 이규현 옮김, 김지윤 외 해설 / 이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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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르 책 중에서 가장 수월하게 읽은 책이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라투르의 단독 저작이 아니라 니콜라이 슐츠와의 공저이기 때문일 수도, 비교적 친숙한 주제인 계급을 다루기 때문일 수도, 또는 번역이 무난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라투르는 별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은 물이었는데, 신기후체제 하의 새로운 계급 형성의 문제를 다룬다는 말에 도저히 외면하기 힘들었다.

 

1. 계급투쟁: 기술적이면서도 수행적인 개념

엄밀한 분석과 주장이라기보다는 단상들의 메모이다. 저자들은 계급투쟁 개념의 기술적(descriptive)이면서 수행적인(performative) 성격에 주목한다(16).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은 이 성격을 잘 보여준다. 1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의 탄생, 성장, 국가권력의 장악, 자본주의의 세계화, 상업공황, 프롤레타리아의 탄생과 성장에 이르는 과거와 현재의 훌륭한 역사적 기술이다. 2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는 처음에는 기술로 시작되지만 역사적 경향을 식별해내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재배열하면서 현재부터 미래에 이르는 투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2장과 마지막 4장은 일종의 투쟁의 시나리오, 그것에 맞춰 투쟁을 지도하고 수행(perform)해야 하는 대본이다. 공산당 선언의 이러한 수행적 성격에 주목했던 하트와 네그리는 맑스가 그랬듯 자신들의 제국도 도래할 계급에 대해서 쓰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녹색 계급의 출현공산당 선언에 필적할 만큼 훌륭한 분석적이면서도 수행적인 글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논의들이 있고,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공산당 선언도 교리문답 같은 엥겔스의 공산주의의 원리라는 견실한 초고가 있었기 때문에 명확히 쓰여질 수 있었다. 짧은 단편 영화라기보다는 영화 예고편 광고 같다. 내용을 살펴보자.

 

2. 전통적인 계급투쟁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저자들은 녹색계급이 존재하기 원한다면 적어도 맑스주의만큼은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녹색계급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맑스주의적 시나리오처럼 자기 존재의 물질적 조건의 생산과 재생산에 대해 규정해야 한다고 말한다(22-23). 그러나 바로 여기에 두 개의 단서를 덧붙인다. 하나는 물질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에 대한 것이다. 첫째, 이제 물질은 맑스가 분석했던 인간의 재생산과 관련된 의식주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유용하지 않은 비인간 존재들의 재생산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곧 분석대상으로서 하부구조의 경계가 확장되어야 한다. 둘째, 오늘날 생산체계가 파괴체계와 같은 말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지구의 자연을 생산을 위해 추출해야 하는 자원이 아니라, 거주가능 조건으로 사유해야 한다(26). 곧 생산에 대한 배타적 관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시각은 노동, 토지, 화폐는 원래 상품이 아니었다는 칼 폴라니의 논의에 접목된다. 사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생태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폴라니의 논의를 끌어들이는 것은 많은 생태사회주의자들 제임스 오코너, 미카엘 뢰비 등 이 오래 전부터 하던 이야기라 새로울 것은 없다.

 

그나마 새로운 것이 있다면, 생산이 거주가능조건의 파괴와 동일시되는 임박한 파국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를 멈출 수 있는 동원은 지지부진하다는 사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이를 극복할 필요성의 제기이다. 맑스주의에 대해 적대적이면서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던 라투르가 이런 말을 하다니, 그 차가웠던 물이 조금은 미지근하게 느껴진다. 생산 체계(system of production)는 생성 체계(system of engendering)에 둘러싸여 있다는 인식론적 지도를 그리면서, 다른 계급들이 생산관계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면, 녹색계급은 이를 제한하고자 하며, 이제 계급 갈등이 생산체계 내부(1)뿐만 아니라 생산체계와 생성체계의 인터페이스(2)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34-35). 이 제2열의 투쟁에서 녹색계급은 지구 차원의 거주가능성 문제를 중심으로 옛 계급들과 충돌하면서 자신의 긍지를 끌어낸다(38-39). 이 서술은 분명 기술적이기보다는 수행적이다. 곧 그러기를 바라고, 저자들이 그렇게 되는 데에 일조하겠다는 바램과 다짐이 투영된 말이다.

 

이 형성 중인 녹색계급은 행위 지평을 생산의 외부로, 또 한 나라의 외부로 넓혀나가야 한다. 이 녹색계급이 대립하는 근대화와 세계화를 추구하는 계급들은 과거로 회귀하려 하는 것이므로 반동적이고, 거주가능조건을 유지하고자 하는 녹색계급은 진보적이며 해방적이다(43). 여기에서 저자들은 해방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이들의 해방은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해방이 아니라, 비로소 무언가에 의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의 해방이다. 자유라는 이상은 발전(development)의 끝에 놓인 채 전진할수록 더 물러나는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envelopment), 곧 거주가능조건에 편안히 몸을 맡긴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전자가 생산 안에서의 사고라면, 후자는 생성 안에서의 사고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생성 안에서 우리는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더 좋다. 인클로저 운동이 인간이 자연을 소유하고자 울타리를 친 것이었다면, 이제 이 해방하는 속박은 자연이 인간을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50-52). 이제 진보는 시간의 화살을 따라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생산체계 둘레를 감싸고 있는 생성체계로 사방팔방으로 분산하는 것이 된다(60).

 

그렇다면 누가 녹색계급을 구성하는가? 7장에서 잠재적 구성원들이 제시된다.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토착 민족, 미래 세대, 지식인, 종교가 녹색계급을 구성 중이지만, 정작 그 계급은 자신이 잠재적으로 다수파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곧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는 긍지가 없다(73). 상황이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라투르와 슐츠는 이 상황을 돌파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축 계급으로서의 긍지를 얻을 수 있을까? 저자들은 그람시의 진지전개념을 빌어온다. 이러한 차용은 두 가지 맥락에서 이뤄지는데, 하나는 미래의 기동전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서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객관적이익 심지어 그것이 생태적 이익이라고 해도 -에 매달리지 않고, 매번 문화 전체를 휘저어 섞어야 다른 계급들을 설득시켜서 동맹을 맺을 수 있는 헤게모니 계급으로서 등장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점에서는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모방해야 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81-82).

 

녹색계급이 쟁취하고자 하는 권력은 어떤 권력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 9장의 제목으로 들어가 있는 질문인데, 여기에 대한 충실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녹색 계급의 주제는 일국의 영토에 제한된 것이 아니고 지구(global? earth?)정치에 속하기 때문에 권력 획득이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장치를 차지해야 하며(97), 풀뿌리부터 건설되는 정당이 필요하다(103). 그래야 투표할 수 있다. 근대화와 글로벌화의 국가가 아니라 생태화를 추구하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녹색계급의 정당은 아마도 그람시가 이야기하는 현대의 군주로서 지도를 수행하는 당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칼 슈미트의 논의를 연상시키면서 동지와 적을 새롭게 구분하며, 기존의 계급제휴를 붕괴시키고, 녹색계급의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데에도 뭔가 역할을 하기는 바라는 것 같다(111-112). 또 언젠가 올지 모르는 뜻밖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113). 그런데 그 당의 이미지, 또는 짙은 안개 속에서마침내 모습을 드러낼 녹색계급의 모습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삐에로(112, 97)라면? 맥이 빠지면서 헛웃음이 나온다. 물론 반전이 있을 수도 있지. 그 삐에로가 허당이 아니라,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로 변신하여 모든 기후악당들을 심판하는 시나리오가 가능도 할 수 있겠다만... 글쎄... 이 맥빠짐은 무엇일까? 내가 그저 우리가 잠재적 다수임을 확신하지 못한 채 한탄과 불평만을 일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104).

 

3. 부록

이상이 100쪽 남짓의 분량으로 쓰여진 76개의 메모를 정리하고, 아주 약간의 느낌을 덧붙인 것이다. 출판사가 이 분량만으로는 책을 내서 가격을 매기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역자 후기를 포함하여 다섯 편의 짧은 글들이 더 실렸다. 이 중에서는 미셸 세르의 자연계약론을 소개한 역자 후기와 슐츠의 계급이론을 소개한 김환석의 글이 볼 만하다.

 

4. 단상과 의문

라투르 책 치고 쉬워서 좋았지만, 그리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약간의 단상과 의문을 글로 적어 남긴다. 라투르와 슐츠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녹색계급에게 우리가 함께 싸우면 기후변화를 막아낼 수 있다는 긍지, 곧 집합적 효능감을 불어넣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 글이 그 목적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와는 별도로 나는 이 의도가 좋다. 그토록 맑스주의를 싫어했던 라투르가 계급투쟁을 선동하다니. 장하십니다! 좋습니다! 나도 힘을 합해 싸울게요!



 

그런데 이것이 단지 바이럴 효과를 노리는 일종의 카피캣 마케팅이 아니려면, 몇 가지 지점이 좀더 명확해져야 할 것 같다. 먼저 저자들은 계급투쟁을 생산체계 내부의 기존 계급투쟁과 생산체계와 생성체계간의 투쟁으로 분류하는데, 두 투쟁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 사회적 계급과 지구사회적 계급에 대한 슐츠의 구분(140) 역시 양자를 추상적으로 범주화할 뿐이다. 물론 슐츠의 글을 직접 다 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그가 양자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데 여기에 소개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둘째, (난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라투르의 기존 저작들과 이 프로젝트의 정합성과 갈등의 지점이 명확해져야 할 것 같다. 라투르는 네트워크는 으로 이뤄진 것인데, 맑스주의자들은 추상을 통해 이 선들의 네트워크를 으로 인식하여 세계를 절대적 총체성의 관점에서 이해하였고, 이 면을 한 번에 뒤집으려던 맑스주의의 프로젝트는 총체적으로 실패했다고 조롱한 바 있다(우리는 결코 근대인인 적이 없다, 294-311). 그런데 그것이 생성체계가 밖을 감싸고 있는 생산체계의 이미지든, 슐츠가 표로 정리한 두 계급의 구별이든 추상의 산물 아닌가? 또 이 수행적인 글쓰기 어디에 라투르가 고수하던 행위자를 따라가라는 지극히 기술적인 글쓰기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내가 라투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를 하고, 그 오해의 뇌피셜이 자가발전한 꼬투리 잡기일까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녹색계급은 해방을 지향하는 좌파이지만, 그저 반자본주의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21),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라투르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길게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개인의 호오를 떠나서 자본주의에 대한 녹색계급의 입장은 무엇인가? 녹색계급의 계급의식을 고취하여 계급투쟁을 수행할 정당은 자본주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라투르가 자본주의에 대해 말해봤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언급 자체를 회피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좌파가 가능한가? 내가 구닥다리라서 이런 말을 하는가? 자신이 녹색계급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며, 이런 팜플렛을 쓴 저자들이 회피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녹색 계급의 출현공산당 선언에 비교될 만한 대단한 글은 아니다. //코 아니다! 이것이 무언가 도래할 것에 대한 글이라면, 그 도래할 것은 새로운 계급투쟁을 수행하는 녹색 계급(ecological class) 자체라기보다는, 이 계급에 대한 새로운 연구일 것이다.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가 과하다 싶은 맑스에 대한 맹목적 충성 때문에 지루했다면, 반대로 이 글은 맑스의 계급 이론에 대한 선택적 단순화 때문에, 그리고 라투르가 이전에 맑스주의에 대해 써댄 말들 때문에 그리 후한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짧고 쉽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답을 주기보다는 더 많은 물음표들을 제기하게 만든 책이다. 물론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내가 너무 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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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지음, 이규현 옮김, 김지윤 외 해설 / 이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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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자연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대륙과 온갖 층위에서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많은 갈등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은 통합을 고취하기는커녕 분열을 조장한다.

4. ... 기후와 에너지 그리고 생물다양성에 대한 관심은 도처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 세기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이끈 변화가 그랬던 것과 달리, 이런 이슈들을 둘러싼 갈등들은 아무튼 지금까지는 대중의 결집, 대중봉기라는 형태를 띠지 않았다. 이 점에서 생태주의는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다. ... - P12

4. ... 생태운동이 더 견실해지고 더 자율적이게 되려면, 그리하여 과거에 못지 않은 역사적 도약으로 나타나려면 이 모두가 생태 운동을 모든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통일된 행동으로 모아냄으로써 자신의 기획을 인정하고 파악하고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재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생태주의가 분열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으로 생태주의가 낳은 새로운 유형의 갈등들의 지도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야 한다. 끝으로 단체행동을 위한 공동의 지평을 규정해야 한다. - P13

6.
"계급" ... 개념의 이점은 정치 역학을 사회의 갈등과 경험의 형성 그리고 집단의 지평이라는 관점에서 제시하도록 함으로써 사회적·물질적인 세계의 구조를 명확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계급투쟁의 개념의 역할은 분명코 기술적이면서 수행적이었다. 이 개념이 사회 현실을 묘사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정할 수 있게 자처하더라도 계급투쟁의 개념은 결코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시도와 분리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계급"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전투대형을 갖추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녹색계급"에 관해 말하기는 불가피하게 행동을 새롭게 기술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녹색"이라 부르는, 형성 중인 이 계급을 위한 분류(classement) 작업은 필연적으로 수행적이다. 이 용어가 많은 혼동을 초래한다 해도 다시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에 유용하다. - P15

7.
"계급투쟁"의 개념을 다시 사용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생태학적 문제로 말미암아 분류투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 생태학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군과 적군이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가 난다. 따라서 녹색계급을 출현시키려면 이와 같은 분류를 둘러싼 투쟁을 받아들이고 전통적인 계급갈등을 때로는 횡단하거나, 반대로 그것과 합류하는 구별의 기준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 P16

8.
생태학이 더 자율적이려면 계급이라는 용어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녹색계급은 지난 두 세기의 투쟁들과 관계를 설정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 그렇지만 모든 녹색 계급이 관계의 경제화에 저항하는 사회적 투쟁들을 역사적으로 이어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녹색계급은 생산의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희생시켜 경제를 자율화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거부를 증폭시킨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이 점에서 녹색 계급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좌파이다. - P20

9.
그렇지만 생산의 개념과 이상에 여전히 깊이 연계된 "계급투쟁"의 전통에 보조를 맞추어야 할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새로운 상황을 기존의 틀안에 밀어넣는 것은 언제나 유혹적이지만 녹색계급이 그저 "반자본주의" 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서둘러 단언하지 말기로 하자. 생태주의가 이러한 조건반사적인 단언으로 자신의 가치들을 제한하지 않은 것은 옳았다. 그러므로 이 논쟁을 종결짓고 왜 이 점에서는 필연적으로 연속성이 없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P20

10. ...
마르크스는 여전히 이 분야에 뛰어들기 위한 길잡이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뚜렷하게 구획된 어떤 시기 동안 "계급이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지, 그들이 사회적 풍경에서 어디에 위치하며, 누구와 싸움을 벌이는지에 대해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 역할을 했다. ... 자유주의처럼 마르크스주의도 역사에 의미를 부여했다. 녹색계급 또한 존재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마르크스주의만큼은 해야 하고 특히 역사,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 - P21

11.
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정의는 물질적 조건 - 사회적 조건은 물질적 조건의 표현일 뿐이다 - 을 이해하는 데 기여했다. 마르크스의 나침반이 유용했다면 이는 사회가 지속되는 데 필요한 과정을 비교적 분명하게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먼저 사회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묘사하며, 이어서 이 재생산 과정에서 행위자들이 대립적으로 위치하는 방식을 평가한다. 계급에 입각한 분석이 유물론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그러므로 녹색계급이 이 전통을 이어받고자 한다면 녹색계급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 주는 교훈을 받아들여서 자기 존재의 물질적 조건과 관련하여 자기규정을 시도해야 한다. 새로운 계급투쟁은 옛 계급투쟁만큼 유물론적인 접근을 토대로 전개되어야 한다. 연속성은 바로 이 본질적인 점에서 존재한다. - P22

12.
그러나 정말이지 그것은 이제 동일한 물질성이 아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전통과 오늘날 떠오르게 하는 것이 문제인 관심의 대상 사이에 상대적 불연속성이 생겨난다. ... 마르크스에게는 인간의 생존과 생식이 모든 사회와 사회사의 기본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인간 사회와 사회사에 대한 모든 분석의 첫 단계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과정과, 인간 사회 및 집단에 존속을 허용하는 물질적 조건 - 인간이 먹는 것, 마시는 물, 입는 옷, 거주하는 집 등 -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맑스가 사회사의 토대로 간주한 것은 바로 이 물질적 재생산 조건의 생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재생산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전혀 다른 역사의 지형 안에 놓여 있다. 이제 우리는 동일한 역사를 좇지 않는다. 생산은 이제 우리의 유일한 지평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것은 이제 동일한 물질이 아니다. - P23

13. ...
사회주의의 나침반은 거의 배타적으로 생산과 재생산에 입각해서만 사유하기 때문에, 오늘날 계급의 풍경이 형태를 달리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기계 문명이 생겨날 때 그랬듯이, 오늘날 신기후체제는 우리에게 사회가 재생되거나 존속하는 과정을 다시 그리도록 강제한다. 또다시 "견고성과 영속성을 지녔던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19세기에 그랬듯이 현재 우리는 사회의 하부구조가 엄청나게 변화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 녹색 계급에 입각한 분석은 여전히 유물론적이지만, 인간만의 생산과 재생산 이외의 다른 현상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 P25

14.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이 생산체계가 몹시 거세게 가속화되어 지구와 기후의 체계를 불안정하게 했다. ... 생산체계는 파괴 체계와 동의어가 되었다. 인간이 아닌 것의 재생산에도 집중될 맑스주의적 분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유물론적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유리한 물질적 조건의 재생산 이외에도 지구라는 행성의 거주가능 조건을 고려하는 것이다. 후자의 조건은 전통적인 정당의 정치경제학이 자원의 이름으로 단순화하려고 애쓴 것뿐만 아니라 지구의 새로운 물질적 현실을 고려하도록 강제한다. ... 지구의 거주가능조건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는, 달리 말해서 생산에 대한 이 배타적 관심에 등을 돌려 거주가능 조건의 탐색이라는 더 큰 틀로 나아갈 수 있는 경제학은 존재하는가? 이것이 새로운 녹색계급의 관건 전체이다. 이 점에서, 다들 이해하다시피, 전통적인 "계급투쟁"과의 불연속성이 크게 돋보인다. - P26

15. ...
생산만을 지향하는 이러한 관심에서 벗어나 경제화에 대한 (칼 폴라니의 표현을 빌리건대) 사회의 저항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20세기의 몇몇 투쟁은 명백히 맑스주의의 전통에 의해 고취되었지만, 다른 많은 투쟁은 단순히 생산의 확대에 대한 거부를 명분으로, 그리고 생산이 나머지 사회생활의 틀 밖으로 벗어난다는 그 끔찍한 주장을 거슬러 수행되었다. ... Lucas Chancel이 말했듯이, "노예제의 폐지, 사회보장, 보통선거권, 무상교육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물질 생산의 조직화 문제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 사회가 경제화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없다는 대단히 중요한 표현이다. 따라서 맑스주의적 발상의 유물론이 갖는 몇몇 한계를 비판하는 것은 또한 경제화에 대한 다양한 투쟁의 전통을 갱신할 수 있게도 해준다. 그러므로 사실 결정적이지만, 이 미묘한 차이를 제외하면, 녹색 계급은 해방을 주장하는 좌파의 역사를 이어받아 확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 P27

16.
현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제는 모두가 파국을 막기 윟나 결정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행동을 가능하게 해줄 중계점, 동기, 지침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예전에는 이상이 정열을 끓어오르게 했고 상황의 이해가 동원을 충분히 가능하게 했다. 오늘날에는 파국의 확실성이 오히려 행동을 마비시키는 것 같다. 어쨌든 세계의 재현, 에너지의 용출, 가치의 수호 사이에 본능적인 동조는 없다. 반대로 모든 본능이 생산을 이해하는 옛 방식의 완전히 동일한 "되풀이" 쪽으로 향해 있다. 이러한 마비 상태를 진단하고 불안, 집단행동, 이상과 역사의 방향 사이에 새로운 동조 관계를 찾아내는 것이 녹색 계급의 의무이다. - P30

17.
물론 자유주의의 다양한 형태와 대다수 사회주의의 전통 사이에 수많은 알력이 있어 왔다. 하지만 생산량을 높이는 데에는 양쪽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다. ...
갑자기 생산의 증대, 발전의 개념 자체, 진보의 개념이 고쳐야 할 착오로 나타난다. 생산이 지구에 거주할 수 있는 조건의 파괴와 연결되면서 동원의 역량은 위기에 처한다. ...
오늘날 관심의 방향이 바뀌었지만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줄 새로운 장치는 아직 고안되지 않았다. 누구나 불안, 죄의식,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장치를 제공하는 것이 녹색계급의 역할이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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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자연의 재발명 동문선 문예신서 199
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동문선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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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0.

이 책의 9<상황적 지식들: 페미니즘에서의 과학의 문제와 부분적 시각의 이점>은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해러웨이의 글 중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던 글이다. 샌드라 하딩의 페미니즘과 과학(1986)에 대한 논평문으로 1987년에 처음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그 책을 읽지는 못 했지만, 하딩은 참 행복했을 것 같다. 자신의 책에 대해서 이렇게 멋진 논평문을 써주다니. 사실 이제 이 <상황적 지식들>은 하딩의 그 책보다 더 유명한 논문으로 남게 되었다. 이 논문의 존재는 3년 전쯤 알았고, 한국어 번역이 있다는 것은 1년 전쯤 알았는데, 다른 책들 때문에 독서 우선순위에서 밀렸었다. 원래 스트래선의 부분적 연결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역자 서문에서 <상황적 지식들>이 중요하게 언급되어서 비로소 잡고 읽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번역은 후졌다. 잘 절판됐다. 에효~

 

대략의 내용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해러웨이는 누가 정리해주는 것보다는 힘들어도 직접 읽는 것이 훨씬 좋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이 정리한 글은 맥락과 뉘앙스를 놓치거나 제거한 경우가 많다. 해러웨이의 글을 읽고 한 번에 이해할 수는 없다. 처음에는 이렇게 깊은 줄도 넓은 줄도 모르고 몸을 담갔는데, 깊고 넓다. 라투르도 깊고 넓은데 그 물은 차갑고 냉소적이라 별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해러웨이라는 물은 따뜻하다. 그런데 그것이 마냥 편안한 느낌은 아니다. 낯선 개념들이 나를 새로운 지적 지평으로 이끈다. 물론 처음 들어가는 물이라 트러블이 따르는데, 그녀가 이전에 쓴 글들이나 인용된 글들까지 파도를 타다 보면 이전에 내게 트러블로 다가왔던 것들의 실마리가 보이는데, 이 과정에 나름 희열이 있다. 이전에 힘들었지만 트러블과 함께하기<사이보그 선언>을 읽었기 때문에 이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이 글을 읽고서야 그 때 읽었을 때 명확하지 않았던 의미들이 좀더 명확해진다. 푸코는 전혀 다르다. 말과 사물을 읽는다고 성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는 없다. 오독과 뇌피셜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 불행하게도 주변에는 해러웨이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니, 나의 뇌피셜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힘들지만 스스로 직접 읽고 정리하기는 해러웨이를 그저 페미니스트 중 한 명, 포스트휴먼 논자 중 한 명으로 치부하는 이들은 할 수 없을 저자와 독자 사이의 특이한(singular) 부분적 연결을 가능하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혼자 읽는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모르는 것을 퉁치고 넘어가면서 어떤 입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름을 질문으로 언어화해서 기록해두는 것이다. 이 방법은 해러웨이 독서에 특히 유용한 것 같다. 다음에 다른 글을 읽을 때 확실히 도움이 된다.

 

1. 나의 객관성과 너의 객관성이 다르다면?

글의 출발점과 도착점은 객관성이다. 과학과 페미니즘에 관한 기존 논쟁에 개입하면서, 해러웨이는 과학이라는 좋은 양을 편견(bias)이라는 나쁜 염소 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 이상을 원한다. 분리는 어쩌면 불가피하다. 논쟁은 그 분리를 명시한다. 인식 대상이 일관된 내적 법칙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낭만주의적·근대주의적 관점과 인식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항상 이미 권력관계였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모든 객관성 주장은 허구라는 급진적 사회구성주의 간의 양극적 분리의 지형 안에서 논쟁이 펼쳐진다. 급진적 사회구성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맑스주의도 좋은 양과 나쁜 염소로 분리된다. 인간(남성)의 자기 구성 과정에서 자연 지배에 대한 존재론적 이론을 전제하고, 이로 인해 임금을 받지 않는 여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역사화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여주는 소위 인간주의적맑스주의로부터 관점, 체현, 헤게모니 비판, 매개에 대한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정초를 도울 수 있는 유용한 도구들을 제공하는 맑스주의가 분리된다(334). [335쪽의 각주 9(영어판 미주 6)에 나온 참고문헌들의 논의를 해러웨이식으로 종합한 것인데, 맑스주의의 어떠한 자원들이 페미니스트 인식론에 이렇게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자세히 논해지지 않는다.]

 

해러웨이는 이러한 맑스주의적 자원들을 이용하여 급진적 구성주의를 비판하면서 객관성의 존재를 견지하는 하딩의 견해를 페미니스트 경험주의(feminist empiricism)라고 칭한다. 그녀는 하딩의 계승자 과학프로젝트의 핵심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335~336, 재번역).


1) 모든 지식 주장들과 인식주체에 대한 근본적인(radical) 역사적 우연성에 대한 설명, 2) 의미를 만들어내는 우리 자신의 '기호학적 기술' 인식하기 위한 비판적 실천, 그리고 3) 유한한 자유, 적당한 물질적 풍요, 고통 속에서도 겸손한 의미를 가질 있고, 제한된 것이라 해도 행복을 있는 지구 전체의 프로젝트에 친화적이면서 부분적으로라도 공유될 있는 '실재' 세계에 대한 충실한 설명을 위한 제대로 참여적 실천(commitment)."

이 세 가지 사항은 역설적이고 모순적이라 해도 필연적으로 동시에 추구되어야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그 어떤 초월을 약속하는 객관성도, 무제한적인 도구적 권력도, 세계를 재현할 수 있는 무오류의(innocent) 권력 이론도, 세계를 글로벌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이론화도, 한 언어가 모든 번역과 전환을 위한 기준으로 강요되는 환원주의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지구 전체에 걸쳐 있는 연결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이론화)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들이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들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객관성의 속성이자 그것의 부정적 발현태이다. 해러웨이는 덧붙인다. 불멸성(immortality)과 전능성(omnipotence)은 페미니스트의 목표가 아니라고. 이것들은 신의 속성이고, 따라서 그러한 식으로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보이는 객관성이란 신 흉내(God trick)”일 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이보그 선언>의 마지막 문장-“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을 떠올리며 스스로 기특해 했다. <사이보그 선언>은 이 책에는 8장에 실려 있다.

 

2. 비전의 체현성과 이동가능성, 상황적 지식, 그리고 부분적 연결

기존의 객관성 개념은 “그 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신 흉내”(the god-trick of seeing everything from nowhere, 339)로서 인식대상에 대한 정복자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재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의 시각이 체현된(embodied) 몸은 재현되지 않게 하는, 따라서 그것이 백인 남성의 시선이라는 점을 숨기는 권력이다. 모든 것을 보려고 하면서, 자신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권력이다. 곧 관음증의 권력이다. 이에 대항하는 페미니스트의 객관성은 체현된 객관성, 상황적 지식들(situated knowledges)”이다. 우리의 눈은 몸의 일부이며, 사람들의 몸이 자리매김된 상황은 다 다르다. 사람들마다 보는 것이 다를 수 있고, 자신이 본 것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이 꼭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더라도 시선이 시작되는 장소와 상황이 없을 수는 없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이렇게 주장한다. “오직 부분적인 관점만이 객관적인 비전(vision, 시야, 시력, 전망)을 약속할 수 있다.” 자신의 부분성을 부정하는 객관성 주장, 곧 총체화하는 시선은 초월적인 신의 시각과 자신의 시각을 허위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페미니스트라면 이를 흉내내려고 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상대주의의 유혹에 굴복해서도 안 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어려워진다. 해러웨이는 총체화와 상대주의 양자 모두에 대한 대안으로 연대(solidarity)”공유된 대화(shared conversations)”를 통한 연결들의 그물망의 가능성을 견지하는 부분적이면서,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비판적인 지식을 주장한다(343). 이것이 상황적 지식이며, 총체화하지 않지만 객관성을 포기하지 않는 해러웨이의 입장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선위치의 이동성과 열정적인 초연함(passionate detachment)”이 동시에 필요하다. 약자인 자신들의 죄없음을 강변하는 정체성/동일성의 정치는 그 자체로 그 시선의 옳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344). 따라서 과학적 인식 주체라면, 정체성/동일성의 위치에 고정되어서는 안 되고, 부분적 연결을 통해서 자신의 몸들이 알지 못하는 경험들과 대화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분적 연결, 곧 가능한 객관성의 주체 위치이다(346).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운동 행위자들이 귀를 열고 들어야 하는 말이다.

 

이러한 페미니스트 객관성은 (최소한) 둘 이상의 시선을 지닌 복수의 주체들이 대화를 통해서 만들어 나가는 과학을 주장한다(350). 처한 장소의 상이성은 언어의 상이성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부분성은 번역되어야 하고, 번역은 부분적이고 해석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대화는 다원주의라는 손쉬운 해결책의 유혹에 저항하면서도 권력의 작동 가능성을 민감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 페미니스트 객관성은 최종심급에서의 단순화[결정]”라는 알튀세르의 해법에 저항하면서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 따라서 단 하나의 페미니즘 입장이란 것은 없다. 이 대화의 과정과 목적은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이고, 바로 이것이 과학이다(351~352). 따라서 경합(가능성)은 과학의 속성 그 자체이다(352).

 

3. 남근로고스중심주의와 백인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남근로고스중심주의(phallogocentrism)는 하나의 진정한 세계의 현존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재현된 세계란 그것이 특정 장소의 그 어떤 몸에 붙어 있는 눈으로 본 것임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곧 부분성을 부정한다. 페미니즘이 부분성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부분성 그 자체가 아니라, 곧 박해받는 동일한 정체성 집단인 여성의 입장의 옳음 때문이 아니라, 부분성을 전제해야만 상황적 지식이 가능해지는 연결 관계들과 예기치 못한 기회들이 비로소 제공될 수 있기 때문이다(352-353).

 

남근로고스중심주의를 내장한 백인 자본주의 가부장제는 인식 대상인 세계를 행위자가 아니라 사물로 대상화한다(355). 여성, 자연, 식민지는 일을 시키고 제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노예, 쓸모있는 것들을 빨대꽂아 바닥까지 단물 쪽쪽 빨아먹고 버려도 되는 원료로 동질화될 뿐이다. 이 남근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해러웨이의 해법은 정반대다. 곧 세계를 사물이 아니라 행위자들로 인식하는 것이다. 세계는 발견을 기다리는 동질적 대상인 사물들이 아니라, ‘대화를 거쳐야만 알 수 있는 능동적 행위자들이다(356). 해러웨이의 이러한 통찰은 브뤼노 라투르, 제이슨 무어, 마리아 미즈 등의 통찰과 공유된 대화를 통해 저마다 부분적 연결을 형성하면서, 매우 강력한 객관성 주장으로 발전하게 된다. “주체의 죽음으로 시작된 로고스적 이성 비판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는데, 해러웨이의 이 글이 바로 그 흐름의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4. 세계는 사물이 아니라 행위자다.

내가 보는 세계의 대상들을 행위자로 인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해러웨이는 세계를 위트 있는 행위자(witty agent)”로 본다. 그러면서 미국 남서부 인디언들의 코요테 또는 트릭스터(Trickster) 이야기를 한다(357; 역자는 357쪽에는 역주까지 달아서 트릭스터가 무엇인지 설명을 해놓으면서도 360쪽에서는 이를 사기꾼으로 번역한다. 어이없음). 만약 해러웨이를 처음 보는 독자라면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당황하기 마련이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읽은 나님은 그것이 크리터(critters)의 형뻘임을 알게 된다. 다름아니라 이것이 해러웨이가 수동적 범주들을 능동화(activation)”하는 방식이다. 세계에 대한 정복은 포기하되, 계속해서 객관성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의 실천에 수반되는 것이다.

 

내 몸의 일부인 눈으로 보는 것과 그/녀의 몸에 달린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부터 존재하는 옳은 시각, 객관성은 없다. 18세기말 낭만주의 시대 이래로 시인들의 시와 생물학자들이 연구하는 유기체의 몸은 그것이 생산또는 발생된다는 점에서 유사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해러웨이는 이 관점을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계승한다. 곧 세계를 물질적·기호학적 행위자(material-semiotic actor)’, 능동적으로 의미를 생산해내는 존재로 인식한다(359). 문학생산의 장소에서 시가 창작의도나 저자로부터 독립된 행위자인 것처럼 지식/인식의 대상으로서의 몸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기호를 통해 의미가 발생하는 마디들(nodes)이다. 객관성은 특정 상황에서 풀려남(dis-engagement)으로써 얻게 되는 불편부당한 시각이 아니라, 우리가 유한자로서 존재하는 이 세계 안에서 위험을 무릅써야만 얻을 수 있는 상호적이면서 동시에 불평등한 구조화에 관한 것이다(360). 몸과 의미 모두 특정 상황에 강하게 결박되어 있다. 페미니스트 체현(embodiment), 곧 부분성, 객관성, 그리고 상황적 지식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이 희망은 이 매듭이 묶인 마디에서 몸들과 의미들의 대화를 개시하는 것이다.

 

5. 나가며

인식대상인 세계를 물질적·기호학적 행위자(material-semiotic actor)’로 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또 상대주의, 다원주의, 불가지론의 손쉬운 해결책에 투항하지 않고 객관성을 견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학문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든 비판적 실천에 참여하는 이의 자세일 것이다. 해러웨이가 좋은 이유는 비판을 하면서도 따뜻하고, 그러면서도 활기와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다. 무척 똑똑한 할머니와 신나게 대화하는 느낌이 계속 든다. 도나, 부디 오래 사세요!

 

말로만 들었던 <상황적 지식들>을 보고, 내용까지 정리하니 마음이 놓인다. 다음 여정은 스트래선의 부분적 연결들이다. 해러웨이 선언문을 읽고 하고 싶었던 것으로 적어 놓았던 것의 대략 70% 정도를 한 것 같다. 화이트헤드는 엄두를 못 낼 것 같고, 스트래선은 이제 읽어야지.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당분간 해러웨이 가지치기는 못할 듯. , 지금 읽고 있는 르 귄 책은 마저 봐야지.


[2022. 9. 14. 추기]

우연의 일치이지만, 어제 리뷰 쓰고 새벽에 일어나 다른 책 좀 보다가, 읽다 만 르 귄의 『세상 끝에서 춤추다』163쪽을 펼쳤는데, 바로 코요테와 트릭스터 이야기가 나온다. ^^ 이럴 때 난 기분이 좋다. 부분적 연결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잘 더듬어 따라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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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자연의 재발명 동문선 문예신서 199
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동문선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드디어 다 읽었다.

책 전제가 아니라, 이 책의 9장 <상황적 지식들>만.
읽는 데에도 정리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뭐? 어떡해? 
해러웨이 읽는 데 이 정도 노력은 해줘야지.
번역은 엉망인데, 원문과 대조하면서 봤다.
아래 밑줄긋기는 일부는 고쳤고, 일부는 답이 없어 그냥 놔뒀다. 



‘자연’ 의 재현 불가능성, 역사적 우연성, 가공성(artefactuality), 그러나 자발성, 필요성, 허약성, 그리고 놀라운 풍요성 등을 언어학적 용어로 묘사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개인들일 수 있는지를 재형상화하도록 도울수 있다. 이 개인들은 더 이상 주인 주체(master subjects)가 아니며(그런 적이 있다 하더 라도), 소외된 주체(alienated subjects)도 아니다. 다만 복수적으로 이질적이며, 비동질적이고, 설명 가능(accountable)하며, 서로 연결된 인간 행위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다시는 전체에 대한 부분으로 연결되어서는 안 되며, 낙인찍히지 않은 존재들 속에 통합된 낙인찍힌 존재로서 연결되어도 안 되며, 일신론과 그 세속적 이단들의 유일한 주체(Subject)에 경배하는 단일적 · 보완적 주체들(subjects)로서 연결되어도 안 된다. 우리는 방어된 주체들 없이 매개 행위, 혹은 매개 행위들을 갖고 있어야 한다. - P17

모든 신경증처럼 나의 신경증도 은유의 문제에 뿌리박고 있으며, 몸과 언어의 관계의 문제에 뿌리박고 있다. 예를 들어 완전히 텍스트화되고 코드화된 세계 속에서의 움직임들에 대한 힘의 장(場) 이미저리는, 포스트모던 주체를 위해 사회적으로 타협된 실재에 대한 여러 주장들의 모체이다. 이 코드로서의-세계는, 초보자들에게는 하이데크의 군사적 장, 즉 일종의 자동화된 학술적 전쟁터이며, 여기에서 경기자라고 불리는 광점들이 지식과 권력 게임 속에 남아 있기 위해 서로를 분해시킨다.(대단한 은유이다!) 기술 과학과 과학소설은 그들의 빛나는 (비)현실의 태양, 즉 전쟁 속으로 붕괴되어 들어간다. - P332

인본주의적 마르크시즘은 인간의 자기- 구성 논리에 있는 자연 지배라는 구조적인 존재론적 이론으로 인해, 그리고 임금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여성들이 행한 어떤 것도 역사화할 수 없는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무능으로 인해 근원부터 오염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시즘은 객관적 시각에 대한 우리만의 학설을 추구한 인식론이라는 페미니즘적인 정선적 건전함의 형태로 여전히 유망한 자원으로 남아 있었다. 마르크시즘의 출발점은 입장 이론, 고집 센 체현, 실증주의 및 상대주의의 권위를 박탈하지 않은 채 헤게모니를 비판하는 풍부한 전통, 중재에 대한미묘한 차이들을 갖고있는 여러 이론들 등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구를 제공해 주었다. 정선 분석의 몇몇 해석들도 이런 접근방법을 무한하게 도와주었는데,특히 영어 사용권의 대상 관계 이론은 한동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펜으로 씌어진 어떤 것보다 미국의 사회주의적-페미니즘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으나,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주체를 다루는 알튀세르나 최근 - P334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초월을 약속하는 객관성의 학설, 즉 누군가에게 어떤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그런 중재를 추적할 수 없는 설화는 필요 없으며, 무제한의 도구 권력도 필요 없다. 우리는 언어와 몸들이 모두 유기적 공생의 축복으로 타락하는 그런 세계를 재현할 순진한 권력들에 대한 이론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글로벌 시스템(Global Systems)의 견지에서 세계 속에서 행동하기는커녕 세계를 이론화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매우 다른 그리고 권력―차별화된-공동체들 사이에서 지식들을 부분적으로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는, 지구 전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우리는 의미와 몸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가진 의미와 몸 속에 살기 위해, 의미와 몸이 만들어지는 방법에 대한 근대적인 비판적 이론들의 권력이 필요하다. - P336

나는 모든 시력(vision)의 체현적(embodied) 성질을 주장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모든 낙인찍힌 몸에서 무소(nowhere)로부터 바라보는 정복적인 시선으로의 도약을 의미화하는 데 사용되어 온 감각 체계를 재주장하기를 원한다. 무소로부터의 정복적인 시선은 모든 낙인찍힌 몸들을 신화적으로 기록하는 시선이며, 낙인찍히지 않은 범주로 하여금 재현을 피하는동시에 재현하기 위해 보는 권력과 보임을 당하지 않는 권력을주장하도록 만든다. 이런 시선은 남자와 백인의 낙인찍히지 않은 위치들을 의미화하고 과학적이며 기술적이고, 후기 산업적이며 군사화된, 인종차별주의적인 남성 지배적 사회, 즉 여기 1980년대말 미국, 괴물의 뱃속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의 귀에 들리는 객관성이라는 세계의 여러 비열한 어조들 중의 하나를 의미화한다. 나는 역설적이고 비판적인 페미니즘 과학 프로젝트를 수용하는 체현직 객관성이라는 학설을 원한다: 페미니즘 객관성은 매우 단순하게 상황적 지식을 의미한다. - P338

눈은 족쇄 풀린 권력을 위하여 인식 주체를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로부터 멀리 떼어 놓는 왜곡된 능력一군사주의 · 자본주의 · 식민주의 · 남성 우월 등과 결합된, 과학사 속에서 완전할 때까지 숫돌에 갈아진 능력一을 의미화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다국적의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시각화의 도구들은 체현-해체(dis-embodiment)의 이런 의미들을 합성하였다. 시각화의 기술에는 명확한 한계가 없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영장류들의 눈은 ... 다목적의 카메라들 등에 의해 끝없이 강화될 수 있다. 이런 과학 기술적 업적 속에서 시력은 규제되지 않는 폭식이 된다. 모든 시각은 무한히 이동하는 시력에 자리를 양보하고, 이동하는 시력은 무소로부터 모든 것을 보는 신 같은 속임수의 것(the god-trick of seeing everything from nowhere)으로 더 이상 신비하게 보이지 않으며, 그 신화를 평범한 실천으로 만들어 버렸다. - P339

물론 무한한 시력이라는 관점은 환상이며, 신을 흉내내는 속임수이다. 나는 모든 시력의 특별성과 체현(반드시 유기적인 체현일 필요는 없으며, 기술적 중재를 포함하는 체현)에 대해 은유적으로 주장하고, 시력을 체현―해체와 제2의 탄생으로 가는 길로 간주하는 유혹적인 신화들에 글복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우리들로 하여금 유용하지만 순진하지 않은 객관성의 학설을 구성하도록 허용하는지 제안하려고 한다. 나는 은유적으로 시력을 또다시 강조하는 몸에 대한 페미니즘 글쓰기를 원한다(I want a feminist writing of the body that metaphorically emphasizes vision again). 왜냐하면 우리는 객관성 논쟁을 변형시킨 근대 과학과 기술의 모든 시각화의 속임수와 권력들을 통해 우리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그 감각을 재주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 P340

그 결과 그다지 왜곡되지 않게, 객관성이 특별하고 특수한 체현에 관한 것이지 모든 제한과 책임의 초월을 약속하는 거짓 시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판명된다. 이 교훈은 단순하다: 오직 부분적인 시각만이 객관적 시력을 약속한다(The moral is simple: only partial perspective promises objective vision). 이것은 모든 시각적 실천의 발생성에 대한 책임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기보다 종결시키는 객관적 시력이다. 부분적 시각은 유망한 괴물과 파괴적 괴물 모두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객관성에 대한 모든 서양의 문화적 서사는 페미니즘 속의 과학 문제에 새겨져 있는 소위 정신과 몸, 거리와 책임의 관계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알레고리이다. 페미니즘의 객관성은 주체와 대상의 초월 및 분열(splitting)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위치 및 상황적 지식에 관한 것이다. - P341

이 장(章)은 상황직 지식과 체현직 지식을 주장하며, 소재 파악이 불가능한, 그래서 무책임한, 다양한 형태의 지식 소유권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무책임하다는 것은 설명하도록 요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주변과 심연으로부터 보는 능력을 확립하는 데에는 프리미엄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덜 강한 자들의 위치로부터 볼 것을 주장하는 반면, 그들의 시력을 낭만화하고/하거나 전유하는 심각한 위험이 놓여 있다. 아래로부터 보는 것은, ‘우리‘가‘자연스럽게‘ 종속된 지식이라는 거대한 지하 영역에 거주한다 하더라도 쉽게 학습되는 것이 아니며,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종속된 자들의 자리매김은 비판적인 재-조사 · 코드 해독 · 해체 · 해석 등에서 면제되지 않으며, 즉 기호학적 · 해석학적 모드의 비판적 의문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종속된 자의 입장은 ‘순진한’ 위치가 아니다. 반대로 그들은 원칙상 모든 지식의 비판적 · 해석적 핵심에 대해 부인하도록 허용될 가능성이 가장 적기 때문에 선호된다 - P342

종속된 자들은 신을 흉내내는 속임수와 그 모든 현란한-그러므로 눈을 멀게 하는-조명들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갖고 있다. ‘종속된’ 입장은 선호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계에 대해 보다 정확하고 지속적이며, 객관적이고 변형시키는 설명을 약속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로부터 보는 방법은, 적어도 ‘최고의’ 기술적_과학적 시각화만큼 몸과 언어, 시력의 중재를 다루는 상당한 솜씨를 요구한다.
그런 선호된 자리매김은, 과학적 권위를 주장하는 가장 명확하게 총체화하는 해석들에게 적대적인 만큼 다양한 형태의 상대주의에도 적대적이다. 그러나 체계적인 편협화와 불투명화에 의존하는 권력을 갖고 있는 언제나 최종적으로 낙인찍히지 않은 범주인 총체화와 단일 시력이 상대주의의 대안은 아니다. 상대주의의 대안은 정치에서는 결속이라고 불리고, 인식론에서는 공유된 대화라고 불리는 그물망 같은 연결 관계들의 가능성을 유지하는 부분적이고 소재 파악이 가능한 비판적인 지식이다. - P343

상대주의는 동등하게 모든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어디에도 없는 방법이다. 상대주의는 객관성의 이데올로기들 속에 있는 총체화의 완전한 거울 쌍둥이이다. 이 둘은 모두 위치, 체현, 부분적 시각 속에 있는 이해 관계를 부인한다. 이 둘은 모두 잘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상대주의와 총체화는 둘다 사방에서, 그리고 무소에서 동등하게 완전하게 볼 것을 약속하는 ‘신을 흉내내는 속임수‘이며, 과학을 둘러싼 수사학 속에 있는 공통된 신화들이다. 그러나 지속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의문의 가능성이 그대로 남는 곳이 바로 부분적 시각의 정치이며 인식론이다. - P343

우리는 즉각 우리 자신들에게 현존하지 않는다. 자기-지식은 의미와 몸을 연결시키는 기호학적-물질적 기술을 요구한다. 자기-정체성은 나쁜 시각 체계이다. 융합은 자리매김의 나쁜 전략이다. 인문과학의 남자들은 자기-현존에 대한 이런 의문을 의지와 의식을 가진 단 하나의 명령점인 ‘주체의 죽음’ 이라고 불렀다. 그런 판단은 나에게 이상해 보인다. 나는 이런 발생적 의문에 대해 이종 동형이 아닌 주체들, 행위자들, 그리고 외눈거인인 주인 주체의 자기 포만적 눈이라는유리한 지점으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설화들의 영역들 등등의 열림이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서양의 눈은 근본적으로 방황하는 눈, 여행하는 렌즈였다. 이런 이주들은 자주 폭력적이었고, 정복적 자아를 비출 거울들을 고집하였다. - P345

주체성의 지형학은 다차원적이다; 그러므로 시력도 그러하다. 인식 주체는 갖가지로 위장하고 있는 모든 위장 속에서 부분적이며, 결코 완성되어 있거나, 전체이거나, 단순히 거기에 존재하거나, 기원적이지 않댜 그것은 언제나 불완전하게 구성되고 꿰매지며, 그러므로 다른 것과 결합할 수 있고, 또 다른 것이라고 주장할 필요없이 함께 볼 수 있다. 여기에 객관성의 약속이 있다: 과학적 인식주체는 정체성의 주체 위치가 아닌 객관성의 주체 위치를 추구한다. 즉 부분적 연결 관계를 추구한다. 젠더 · 인종 · 민족 · 계층에 의해 구조화된 모든 특권적(종속된) 위치에 동시에 ‘촌재할 방법은 없다. 혹은 이 특권을 가진 어느 위치에서도 전체로 존재할 방법도 없다. 그리고 젠더 · 인종 · 민족 · 계층은 비판적 위치에 대한 짧은 목록이댜 그런 ‘완전하고‘ 총체적인 위치를 찾는 것은, 본질화된 제3세계 여성으로서 페미니즘 이론에 이따금 등장하는 대립적 역사의 물신화된 완전한 주체를 찾는 것이다. - P346

객관성이 실천되고 존경될 가능성이 없는 유일한 위치는 주인, 인간(Man), 유일신(One God)의 입장으로, 이들의 눈은 모든 차이를 생산하고 전용하고 명령한다. 어느 누구도 객관성 때문에 일신론의 신을 비난한 적이 없었으며, 단지 무관심 때문에 비난하였다. 신을 흉내내는 속임수는 자기-동일적이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창조성과 지식, 그리고 전능으로 오인해 왔다.
그러므로 자리매김은 서양의 과학적 · 철학적 담론이 그런 것처럼, 시각의 이미저리를 둘러싸고 조직된 지식을 수립하는 주요 실천이다. 자리매김은 우리의 권능부여적 실천에 대한 책임을 함축한다. 그 결과 정치와 윤리가 무엇이 합리적 지식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쟁하기 위해 투쟁을 도모한다. - P347

국지적 지식들은, 지식과 권력의 그물망 내에서 불평등한 번역과 교환들 물질적이고 기호적인 을 강요하는 생산적 구조화와 긴장 속에 있어야 한다. 고물망들은 체계성의 속성을 가질 수 있으며, 시간 · 공간 · 의식 이라는 세계사의 차원들 속으로 깊은 화사들(filaments)과 고집 센 덩글손을 뻗고 었는 종앙 집중적으로 구조화된 글로벌 시스템들의 속성조차 가질 수 있다. 페미니즘의 설명 가능성은 이분법이 아닌 반향에 맞춰진 지식을 요구한다. 젠더는 구조화된, 구조화하는 자이의 장으로, 여기에서는 극단적인 지역화의 여러 어조들, 즉 친근하게 개인적이고 개체화된 몸의 여러 어조들이 세계적인 높은 긴장의 방출과 함께 동일한 장에서 진동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체현은 여성이든 아니든 구체화된 몸속의 고정된 장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장들 속에 있는 혹들, 정위 (定位, orientations) 속의 굴절들, 물질적―기호학적 의미의 장 속에 였는 차이의 책임 등에 관한 것이다. - P348

우리는 남근로고스 중심주의(phallogocentrism, 하나의 진실된 말의 현존에 대한 향수)와 체현-해체된 시력의 지배를 받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 시력과 제한된 목소리에 의해 지배되는 지식을 추구한다. 우리는 부분성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황적 지식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연결 관계들과 예기치 못한 기회들을 위해 부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보다 큰 시력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어느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에서의 과학 문제는 자리매김된 합리성으로서의 객관성에 관한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한계로부터의 도피나 한계 초월의 산물, 즉 위로부터의 관점의 산물이 아니라 부분적 관점들과 머뭇거리는 목소리들을 집합적인 주체 위치로 결속시키는 것이다. 이 집합적 주체 위치는 진행되는 유한한 체현 수단의 시각, 한계와 모순 내에서의 삶의 시각, 즉 어떤 곳으로부터의 관점의 시각을 약속한다. - P352

자연은 전유되고, 보존되며, 노예가 되고, 고양된 문화의 원료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적 식민주의의 논리 속에서 문화에 의해 처리되도록 유연해진 문화의 원료일 뿐이다. 이와 유사하게 성은 젠더 행위에게 물질일 뿐이다. 생산주의적 논리는 서양의 이원론의 전통에서 불가피해 보인다. 이런 분석적 · 역사적 서사 논리는, 페미니즘 이론의 최근의 역사에서 성/젠더 구별에 대한 나의 예민함에 대해 해명한다. 성은 젠더로 재-표현되기 위해 ‘자원회‘되며, ‘우리‘는 이것을 통제할 수 있다. 자연/문화의 이원론과, 성/젠더 구별을 포함하는 그 발생적 계보 속에 확립된 전유주의적(appropriationist) 지배 논리의 함정을 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 P355

상황적 지식은 지식대상이 가리개도, 근거도, 자원도 아닌 행동가(actor)와 행위자(agent)로 묘사될 것을 요구하며, ‘객관적‘ 지식이라는 유일한 매개행위와 저술행위 속에서 변증법을 종결시키는, 주인에게 딸린 노예로 최종적으로 묘사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요구한다. 이 점은 연구대상인 사람들의 매개 행위 자체가 사회 이론 생산이라는 전체 프로젝트를 변형시키는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에 대한 비판적 접근 방법에서 패러다임상으로 분명하다. 진실로 연구 ‘대상들‘의 매개 행위와 타협하는 일은, 이런 학문들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엄청난 오류와 거짓 지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학문이라 불리는 나머지 지식 프로젝트에도 이와 똑같은 점이 적용되어야 한댜. 윤리와 정치가 단지 사회과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 전체로서의 학문에 있는 객관성에, 암암리에 혹은 드러내 놓고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세계의 ‘대상들‘에게 행위자/행동가의 지위를 주는 결과를 낳는다. - P355

‘실제‘ 세계에 대한 설명은, 그러므로 ‘빌견‘의 논리에 의촌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실린 ‘대화‘의 사회 관계에 의존한다. 세계는 스스로 말하지도, 주인 암호 해독자를 위해 사라지지도 않는다. 세계의 코드들은 읽혀지기만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지도 않는다. 세계는 인간화를 위한 원료가 아니다. ‘주체의 죽음‘ 담론의 또 다른 지류인 인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공격은 이 점을 매우 명확하게 하였다. 사회적인 것 혹은 매개 행위라는 어설폰 범주에 의해 조악하게 암시된 어떤 비판적 의미에서 볼 때, 지식 프로젝트 속에서 만나는 세계는 능동적 실체이다. 과학적 설명이 지식 대상으로서의 이런 차원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한 충실한 지식은 상상 가능하며, 우리에게 소유권 주장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재현 혹은 암호 해독 혹은 발견 등에 대한 어떤 특정한 학설도 어떤 것을 보증할 수 없다. 이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다. 왜냐하면 리얼리즘은 세계의 능동적 매개 행위를 다루기에는 너무 초라하다. - P356

에코페미니즘은 부르주아적 · 마르크시즘적 혹은 남성주의적 프로젝트에서 계획되고 전용되는 자원으로서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로서 세계를 해석할 것을 무엇보다도 고집하였다. 지식면에서의 세계의 매개 행위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의 독자적인 유머 감각에 대한 지각을 포함한 불안케 하는 가능성들을 위한 여지를 만든다. 그런 유머 감각은, 자원으로서의 세계에 관심이 있는 인본주의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편안한 것이 아니다. - P356

나는 ‘사실성‘과 ‘유기적인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물질적-기호적 행동가‘라고 불리는 성가신 실체로 번역하고 싶다. 이런 적절치 못한 용어는 지식 대상들의 즉각적인 현존이나 혹은 동일한 것, 즉 특별한 역사적 위기에 무엇이 객관적 지식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에 대한 최종적이거나 유일한 결정을 함축하는 일이 절대로 없이, 몸 생산 장치의 능동적이고 의미 발생적인 축으로서의 지식 대상들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언어 역시 의도와 저자로부터 독립된 행동가가 되는 문학 생산의 소재지인, ‘시‘라고 불리는 킹의 대상들처럼 지식 대상으로서의 몸들도 물질적이고 기호적인 발생적 혹이다. 그들의 경계는 사회적인 상호 작용 속에서 물질화한다. 경계들은 실천을 계획함으로써 그려진다. ‘대상‘들은 그런 식으로 미리-현존하지 않는다. 대상들은 경계 프로젝트이다. 그러나 경계들은 내부로부터 변화한다; 경계들은 속임수를 쓴다. 경계들이 임시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은 의미들과 몸들을 발생시킨다. - P359

객관성은 해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그리고 통상적으로 불평등한 구조화에 관한 것이며, ‘우리‘가 영구히 죽어야 하는, 즉 ‘최종적인‘ 통제 속에 있지 않은 세계에서 위험을 무릅쓰는 일에 관한 것이다. ...
아마도 세계가 일개의 자원으로 환원되는 것에 저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세계는-어머니(mother)/물질(matter)/중얼거림(mutter)이 아니라-언제나 의미와 몸의 강력한 결속이며, 언제나 문제시되는 것을 상징하는 은유인 코요테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체현, 부분성에 대한 페미니즘 희망, 객관성, 상황적 지식 동은 여러 가능한 몸과 의미의 장 속에 있는 이런 강력한 혹 속에서 대화와 코드에 의지한다. 이곳이 바로 페미니즘의 객관성 문제에서 과학, 과학 공상, 과학소설이 수렴되는 곳이다. 설명 가능성, 정치, 에코페미니즘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우리가 대화히는 법을 배워야 하는 코드화의 사기꾼으로서 세계를 재상상하는 데(revisioning) 달려있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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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에서 춤추다 -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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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여행 때 갖고 갔다 못 읽고 온 책을 이제서야 펼쳤다. 짧은 에세이들이라 조각시간들에 읽기 좋다. 지난 번에 읽었던 <바람의 열두방향>은 1962년부터 1974년까지의 단편 모음이었는데, 이 책은 1976년부터 88년까지 르 귄이 쓴 짧은 글들의 모음이다. 


페미니즘과 SF에 대한 그녀의 사유의 발전의 여정을 엿볼 수 있어서 재미있다. 


그리고 우로보로스의 형상을 여기서 만나다니... 

처음, 중간, 끝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부분은 다른 두 글(48~49쪽, 73쪽)에서 각기 인용되는데, 우로보로스는 이 시간의 흐름 안에 존재하는 처음, 중간, 끝이라는 서사의 전개 구조를 비판하는 데에 사용된다. 


"유클리드적"(155~)이라는 표현은 유토피아와의 연관성 속에서 논의된다. 현재의 고통이 없다는 일상적인 의미보다는 '살 수 없다'는 측면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런 유토피아는... 살 수 있는 현재는 없고 오직 미래형으로만 말한다"(159). "유토피아는 쭉 유클리드적이었고, 유럽적이었으며, 남성적이었다." 르 귄은 이와는 다른 종류의 유토피아를 제안하고자 한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순진무구하고 결백한(innocent) 세계가 아니라는 해러웨이의 인식과 연결되는 것 같다.   


해러웨이가 언제나 서부의 코요테와 함께 논하던 '트릭스터(trickster)'도 등장한다(163-164, 298).

아, 그런데 장자가 트릭스터라니...


또 Old Nobodaddy라는 표현을 처음 봤는데,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나온단다 (168). 

이 노바대디의 형상은 해러웨이가 근대적 객관성 개념을 God's trick이라고 야유할 때의 신과 정확히 겹친다.


<브린 모어 대학 졸업식 축사>(1986) 역시 "상황적 지식"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었을 거라고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구절들이 이어진다. 쪼개는 "아버지 말"과 연결하는 "어머니 말"의 대비... 아버지 말이란 "무기로 쓰기 위해 경험에서 떼어낸 말들, 상처를 만들고 주체와 객체 사이를 찢고 객체를 드러내고 착취하면서 주체는 숨기고 방어하는 말들"(266), 곧 신 흉내를 즐기는 자의 언어이다. 

르 귄은 엘렌 식수의 "나는 그것이 말하는 곳"이라는 여섯 단어를 한 수의 시로 옮기는데, 아버지말을 쓰는 이들의 귀는 돌로 되어 있다고 비꼰다(274-276). 멋지다!


해러웨이와 라투르의 주요 비판 대상인 Man / Nature의 근대적 이분법 비판도 <여자/황야>에서 선보이고 있다(286-290).


그리고 이 책을 읽게 된 단 하나의 직접적인 이유를 대자면, "소설판 장바구니론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1986)을 들 수 있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2장 "촉수 사유"에 직접적인 모티브를 제공한 글이었는데, 역시 훌륭하다. 해러웨이 읽다 좌절할 필요가 없다. 르 귄의 이 글을 보면 된다!! 

아인슈타인의 엘리베이터, 슈뢰딩거의 고양이, 나의 게센인들은 단순히 생각의 수단이다. 이것들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다. 나는 SF의 핵심 기능 하나가 바로 이런 종류의 질문 던지기라고 생각한다. 습관적인 사고방식을 뒤집고, 우리의 언어에 아직 가리킬 말이 없는 것을 은유하고, 상상으로 실험하기. ...
상상으로 만든, 그러나 인습에 충실하고 평범한, 아니 고루하기까지 한 젊은 지구인을 생리적인 성 구별이 전혀 없기에 성 역할이 없는 상상 속의 문화에 던져넣을 수 있다. 나는 무엇이 남는지 알아보기 위해 젠더(사회적 성)를 제거했다. 아마 그저 인간이 남을 터였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가 공유하는 영역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아직도 이게 제법 훌륭한 착상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험으로서는 엉망이었다. 모든 결과가 불확실했다. ... 과학적으로 보자면 최악이라고 할 만한 실험이다. 괜찮다. 나는 과학자가 아니다. 나는 규칙이 계속 변하는 게임을 한다. - P26

머나먼 서쪽, 브리검 영이 죽고 내가 태어난 그곳에서는 고리 모양의 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고리 뱀이 어딘가로 가고 싶어지면 - 고리 뱀이 뭔가를 쫓고 있어서든, 뭔가에 쫓기고 있어서든 간에, 뱀은 꼬리를 입에 물고 고리 모양을 만들어서 굴러간다. ... 하지만 방울이 달린 고리 뱀들에게는 결점이 있다. 독이 있는 뱀이라, 자기 꼬리를 물면 그 상처 때문에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는다는 결점이다. 모든 진보에는 이런 문제점이 있다. 교훈이 뭔지는 모르겠다. ... 여기에서 나오는 교훈이란, 원에서 탈출하려면 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캠프파이어 주위로 조금 더 바싹 다가가라. 우리가 정말로 원을 그려낼 수 있다면, 시작과 끝을 맺을 수 있다면, 또다른 그리스인이 말했듯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두려워 말라. 아무리 시도한다 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으리니. 그래도 좋은 이야기보다 더 진짜 고리 트릭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별로 없다. - P50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 말하기 속에서 우리는 모두 한 핏줄이다. 이야기를 입에 물고, 독이 아니기를 빌면서 피가 날 때까지 꽉 깨물어라. 그러면 우리는 모두 함께 끝에 다다를 것이고, 어쩌면 시작에도 다다를지 모른다. 언제나 중간을 살면서 말이다. - P61

아리스토텔레스는 극과 서사시의 핵심 요소는 "사건의 배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서사 또는 플롯 요소가 처음, 중간 끝으로 구성된다는 그 유명하고도 멋진 발언을 이어나간다.

"처음이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지 않고 그 다음에 다른 뭔가가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것이다.끝이란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뭔가 이후에 존재하며, 그 후에는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간은 본질상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도 다른 것이 존재하는 상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서사란 사건들을 연결하며, 방향이 있는 공간 순서와 비슷하게 방향이 있는 시간 순서로 "사건을 배열"한다. 인과 관계가 암시되기는 하지만 정확히 명시되지는 않는다. 내가 이해하기로 주된 연결은 시간순이다. 그러므로 서사란 사건들을 시간에 따라 연결하는 데 쓰이는 언어이다. - P73

그 연결은 처음-중간-끝이라는 닫힌 패턴을 갖거나, 과거-현재-미래의 열린 패턴을 갖거나, 직선으로 보이거나 나선으로 보이거나 순환으로 보이거나 상관없이 공간적인 비유를 쓰기 적절한 시간 "속"의 움직임을 포함한다. 서사는 여정이다. A에서 Z로 가고, ‘그때‘에서 ‘바로 그때‘로 간다. - P74

꿈 서사는 언어보다는 감각 상징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의식적인 서사와 다르다. 꿈속에서 시간의 방향 감각은 공간 은유로 대체될 때가 많고, 약해지거나 역전되거나 사라질 수도 있다. 꿈이 사건과 사건 사이에 만드는 연결은 합리적인 지성과 미학적인 정신에는 불만족스러울 때가 아주 많다. 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연성 규칙을 비웃는 편이고 플롯에 대한 지시도 혼란시킨다. 그렇다 해도 꿈이 서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꿈은 사건들을 연결하고, 여러 가지를 우리 마음의 일부에만이라 해도 이해가 가는 순서나 패턴으로 엮어 낸다. - P80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스스로와 벌이는 내면의 대화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고 다니지 않는다. 결코 그런 적이 없다. 우리는 그럴 수도 있는 일, 우리가 하고 싶은 일, 아니면 상대가 해야 하는 일, 아니면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경고, 추정, 주장, 제의, 모호한 말, 비유, 암시, 열거, 불안, 전달, 풍문... 여기와 저기 사이, 아니면 그때와 지금 사이, 아니면 지금과 언젠가 사이의 비약과 교차와 연계, 기억과 인지와 상상을 끊입없이 엮고 재구성하기... 여기에는 스스로를 안심시키거나 즐기기 위해서 만들어 내는 엄청난 양의 소망 충족과 고의이거나 고의가 아닌 다양한 각색이 포함되며, 또한 경쟁자를 호도하거나 친구를 설득하거나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이는 고의적이거나 半고의적인 왜곡도 포함된다. - P84

직설법은 그 앙상한 손가락으로 일차적인 경험을, ‘상황‘을 가리킨다. 하지만 비유, 가능성, 개연성, 우연성, 인접성, 기억, 욕망, 두려움, 의망이라는 끈으로 그 경험들을 잇는 것은 가정법이다. 바로 이것이 서사 연결이다. ... 인간의 자유라고 할 수 있는 도덕적 선택이 가능한 잉는 "우리가 과거와 미래, 또는 머나먼 땅에 가능한 세상과 불가능한 세상들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 덕분"이다. ... 순전히 사실만들 담아 내는 서사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서사는 수동적일 것이다. 모든 것을 뒤틀림 없이 비추는 거울이랄까. 스탕달은 감상적이게도 소설을 그런 거울로 여겼으나 소설은 거울상이 아니며, 서술자의 눈은 카메라가 아니다. 역사가는 조작하고 배열하고 연결하며, 이야기꾼은 그 모두에 더하여 개입도 하고 창작도 한다. 소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롯이라고 정의한 시간 방향성의 심미 감각을 이용하여 가능성들을 연결한다. - P85

생명 보존이란 임신중단 반대 세력의 진짜 목적이 아니라 슬로건에 불과해 보이는군요. 그 사람들이 원하는 건 통제예요. 행동에 대한 통제. 여자들에 대한 권력 행사죠. 낙태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여자들은 여자들에 대한 남성의 권력을 공유하고 싶어 하고, 그러기 위해 자신들의 여성성을 부정해요. 타고난 권리와 책임을요. - P142

"창조자 역할을 떠맡"으면서 우리는 있음에 참여하기보다는 노자가 "없음의 이로움"이라고 부른 것을 추구한다. 세상을 재구성한다는 것, 세상을 다시 세우거나 합리화하는 것은 실제 본질을 잃거나 파괴할 위험을 지는 행위이다. - P148

전체주의는 지옥일 뿐 아니라 낙원에 대한 꿈이기도 하다. 모두가 단 하나의 공통 의지와 신념으로 결합하여, 서로에 대해 어떤 비밀도 없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오래된 꿈... 전체주의가 우리 모두의 마음속 깊이 존재하고 모든 종교에 깊이 뿌리내린 이런 원형들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을 매혹할 수 없었으리라. 특히 초기 단계에서는 더 그렇다. 그러나 낙원의 꿈이 현실로 변하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그 꿈을 막는 이들을 베어 내기 시작하고, 그리하여 낙원의 지배자들은 에덴 옆에 작은 강제수용소를 지어야만 한다. 이 강제수용소는 시간이 흐를수록 커지고 완벽해지는 반면, 옆에 붙은 낙원은 점점 작고 초라해진다. (밀란 쿤데라, <웃음과 망각의 책>)

유토피아를 짓는 이성이 순수하면 할수록, 더욱 유클리드적일수록 그 자기 파괴 능력도 커진다. 우리가 통제력으로서 이성이 어질다고 믿지 않는 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 P158

트릭스터는 에덴에 산 적이 없다. 코요테는 신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화염검을 든 천사에게 내몰린 이브와 아담이 서글픈 머리를 들자, 히죽 웃고 있는 코요테가 보였나니.
유럽적이지 않고, 유클리드적이지 않고, 남성적이지 않은... 모두 부정형의 정의이고, 그래도 괜찮기는 하지만, 성가시다. 그리고 마지막 표현은 불만족스럽기도 하다. 내가 접근하려는 유토피아가 여성들만 상상할 수 있거나 - 가능한 이야기다 - 여성들만 거주할 수 있는 - 이건 참을 수 없다 - 곳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말은 ‘음(陰)‘인지도 모르겠다.
유토피아는 늘 ‘양(陽)‘이었다. 플라톤 시절부터, 유토피아는 어떻게든 커다란 양의 오토바이 여행이었다. 찬란하고, 잘 말라있고, 걔끗하고, 강하고, 단단하고, 활발하고, 공격적이고, 선형적이고, 진보적이고, 창조적이고, 팽창하고, 전진하고 뜨거웠다. - P164

레비스트로스는 신석기 혁명 이후부터 나타났으며, "사회적인 변화와 에너지를 뽑아내기 위해 카스트 사이와 계급 사이의 구별을 끊임없이 촉구하는", "뜨거운" 사회들과 역사적인 온도가 거의 0도에 가깝도록 스스로를 제한하는 "차가운" 사회들을 구별하려 한다.
이 아름다운 인류학적 사고와 내 주제의 관련성은 곧바로 레비스트로스가 직접 증명하는데, 다음 단란에서 그는 인류학자가 인간의 미래를 예언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두고 하늘에 감사하면서도, 만약 인류학자에게 그런 예언을 기대한다면 우리의 "뜨거운" 사회로부터 추론만 하는 대신, 점차 "뜨거운" 사회 중 최고를 "차가운" 사회 중 최고와 통합할 것을 제안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내가 레비스트로스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 통합이란 이미 사회 에너지의 제일 원천인 산업 혁명을 논리적 극단까지, 완전한 전자 혁명까지 밀어붙이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후에 일어나는 변화와 진보는 철저히 문화적이며, 말하자면 기계가 만든 것일 터이다. - P167

"살아남은 원시 사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그 구조는 인간 조건에 적대적이지 않다."
...
내가 이해하기에, 레비스트로스는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결합하려면 유기체 모드는 인류가 유지하면서 기계 운영 모드는 기계에 넘기자고 제않나다. 기계는 진보를 맡고 생물은 리듬대로 살자는 것이다. 초고속 전자 ‘양‘의 열차가 달리는데, ‘음‘의 객차와 식당차 생활은 고요하여 식탁에 올린 장미도 흔들리지 않는 느낌이랄까. 이 모델에서 걱정되는 지점은 통합의 요소로 사이버네틱스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엔지니어 자리에는 누가 앉은 걸까? 자동 조종일까? 프로그램은 누가 짰을까? 또 오래된 노바대디(Old Nobodaddy)인가? 그 차량 중에 또 브레이크가 없는 차가 있을까? - P168

낙원의 추방자들이지만 낙원의 희망은 그 사람들에게 있고, 노동 수용소 주민이지만 그들만이 자유로운 영혼이다. 열차의 정보 체계는 경이롭지만, 그 선로는 코요테 나라를 통과한다.

"고대에 황제가 처음으로 德과 義를 써서 사람들의 마음에 관여했다. 요순이 그 뒤를 이어 다리털이 다 빠질 때까지 일하여 ... 덕과 의를 행하고, 피와 숨을 다하여 법과 기준을 세웠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의 규칙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었으니, 추방하여 멀리 내쫓아야 했다. ... 그 세상은 지식을 갈망했다. ... 물건을 자르고 만들 도끼와 톱이 있었고, 다듬을 붓과 줄이 있었으며, 구멍을 낼 망치와 끌이 있었으니, 뒤죽박죽으로 흐트러진 그 세상은 큰 혼돈에 빠졌다."

이것이 이성적인 통제를 나타내는 전설 속의 모델 황제에게 야유를 보내는 최초의 위대한 철학 트릭스터, 장자의 말이다. 장자의 시대에도 세상은 뜨거웠으니, 장자는 극단적으로 식히자고 제안했다. - P169

코페르니쿠스는 우리에게 지구가 중심이 아님을 전했다. 다윈은 우리에게 인간은 중심이 아님을 전했다. 인류학자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그들이 백인 서구가 중심이 아니라고 돌려 말하고 있음을 들을 수 있으리라. 세상의 중심은 클라마스 강의 어느 벼량, 메카의 어느 바위, 그리스 땅에 뚫린 어느 구멍에 있고 어디에도 없다. 세상은 어디로나 펼쳐져 있으니. - P179

"유토피아라는 말을 되찾으려면, 유토피아를 따라 대심문관조차 보지 못하는 곳에 입을 벌린 심연 속으로 들어갔다가, 그 후에 반대쪽으로 기어나오기까지 한 사람이라야 할 것이다."(Bob Elliot)

내가 듣기에는 코요테 같다. 어딘가 함정이나 심연에 떨어졌다가, 멍청하게 히죽대며 어떻게든 기어 나오는 코요테. ...
만일 그렇다면, 그때 우리는 그의 뒤편 심연 속에 있게 된다. 바깥이 아니다. 전형적인 코요테의 곤경이다. 우리는 진짜 지독한 난장판에 빠졌고, 빠져나와야 한다. 그것도 반대쪽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그리고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다면, 변해 있을 것이다.
반대쪽에 누가 있을지, 무엇이 있을지는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그곳에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언제나 그곳에 살았다고 믿는다. 그곳이 집이라고 빋는다. 그곳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들이 있다. 그 노래 중에는 <세상 끝에서 춤추다>라는 노래가 있다. - P180

레이건 대통령은 암트랙 없이 해 나갈 수 있다고 결정하고 예산에서 빼 버렸다. 레이건씨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나 기차를 타봤을테고 지금쯤은 기차로 여행하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모르지 싶다. 오직 ‘중요한 사람들‘, 시간이 돈인 사람들만 알겠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기차를 탄다. 시간이 돈이 아니라 살았던 삶과 살아갈 삶인 사람들. - P240

저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러 대학에 간다고 생각했고, 그것도 공부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배운 것은 힘의 언어(the language of power)였어요. 사회적인 힘을 가진 언어요. 앞으로 그 언어를 아버지말(father tongue)이라고 부를게요. - P259

이성은 단순히 객관적인 생각보다 훨씬 큰 능력이에요. 정치 담화나 과학 담화가 이성의 목소리를 자칭할 때는 신 노릇을 하는 셈이니, 엉덩이를 때려 구석에 세워 놓아야죠. 아버지말의 가장 중요한 제스처는 추론이 아니라 거리 벌리기예요. 주체 또는 자아와 객체 또는 타자간의 거리를, 그 틈을 벌리는 작업이에요. 이렇게 인간과 세계 사이의 간격을 벌리는 가르기 작업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발생해요. 기술과 과학의 지속적인 발전은 그렇게 해서 스스로 연료를 충당하지요. 산업혁명은 세계-원자를 쪼개면서 시작되었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우리가 연속체를 불균등한 부분들로 부수어 그 불균형을 유지함으로써 다른 모든 문화를 정복하는 데 쓸 힘을 끌어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두가 실험실과 정부 건물과 본부와 회사에서 똑같은 언어를 말하고, 그 언어를 모르거나 말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침묵당허거나 말하더라도 무시당하지요. - P261

백인들은 두 갈래로 갈라진 언어를 말하지요. 백인들은 이분법으로 말해요. 백인의 언어는 쪼개진 세계의 가치들을 표현하고, 다시 쪼갤 때마다 양의 가치를 중시하고 음의 가치를 폄하해요. 주체/객체, 자아/타자, 정신/몸, 지배/피지배, 능동/수동, 인간/자연, 남자/여자 등등... 아버지말은 위쪽에서 하는 말이에요. 한 방향으로 가죠. 어떤 대답도 기대하지 않고, 듣지도 않아요. ...
제가 ‘아버지말‘이라고 부르는 언어는 어마어마하게 훌륭하고 반드시 써야 할 언어예요. 다만 그 언어가 현실에 대한 특권 관계를 주장한다면 위험해질 뿐 아니라 파괴적이 될 수도 있어요. 아버지 말은 화자들의 지속적인 행성 생태계 파괴를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죠. 아버지말 어휘에서 나온 "생태계"라는 말 자체가 화자를 생태계에서 배제시키고, 궁극적인 무책임을 담보하는 주체/객체 이분법으로 쓰일 때가 아니면 불필요한 말이거든요.
- P262

아버지들, ‘올라가는 남자‘, 정복자 남자, 문명적인 남자들의 언어는 여러분의 토박이말이 아닙니다. 누구의 토박이말도 아니죠. 여러분은 처음 몇 해 동안은 아버지말을 들은 적도 없었고, 라디오나 TV에서 나온다 해도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어린 남동생은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 여러분 형제에게는 더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고요. 여러분에게는 다른 배움의 힘이 있었죠. 그 시절 여러분은 어머니말(mother tongue)을 배우고 있었어요.
아버지말을 쓰려니, 어머니말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아버지말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밖에요. 어머니말은 타자이고, 열등한 존재예요. 원시적이고, 부정확하고, 불분명하고, 조악하고, 한계가 있고, 하찮고, 시시해요. 소위 여자들의 일이 그렇듯 어머니말도 반복적이에요. 땅에 매여 있고, 집에 매여 있어요. - P263

말로 하든, 글로 쓰든 어머니말은 답을 기대해요. 어머니말은 대화이고, 대화라는 말의 뿌리는 "서로를 돌아본다"죠. 어머니말은 그냥 의사소통이 아니라 관계와 관계 맺기의 언어예요. 어머니말은 연결해요. 쌍방향으로, 아니 많은 방향으로 오가는 교환의 연결망이에요. 어머니말의 힘은 쪼개는 데 있지 않고 묶는 데 있으며, 거리를 불리는 데 있지 않고 통합하는 데 있어요. 문자로도 쓰이기는 하지만, 후세를 위해 서기와 필경사들이 적는 말은 아니에요. 날숨처럼 우리의 생명인 호흡을 통해 빠져나가서 사라지지만, 완전히 사라졌다가도 되돌아오죠. 어디에서나, 언제나 다시 같은 호흡으로 반복되고, 우리 모두가 그 언어를 마음으로 알고 있어요. - P263

어떻게 누군가의 경험이 다른 누군가의 경험에 대한 부정, 부인, 반증이 될 수가 있겠어요? 제가 훨씬 경험이 많다 해도, 여러분의 경험은 여러분의 진실이에요. 어떻게 누군가의 존재가 다른 누군가가 틀렸다는 증명이 될 수 있겠어요? 설령 여러분이 저보다 훨씬 젊고 영리하다 해도, 제 존재는 저의 진실이죠. 전 제 경험을 제공할 수 있고, 여러분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요. 사람들은 서로 상충할 수가 없어요. 오직 말만 서로 상충할 수 있지요. 무기로 쓰기 위해 경험에서 떼어낸 말들, 상처를 만들고 주체와 객체 사이를 찢고 객체를 드러내고 착취하면서 주체는 숨기고 방어하는 말들이요. - P266

저는 "진실"이라는 말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는 의미로 써왔고, "문학"이나 "예술"이라는 암ㄹ은 "잘 산다, 능숙하게, 우아하게, 힘차게 산다"는 의미로 씁니다. 빵 바구니를 지고 그 빵 냄새를 맡고 걸으면서 먹는 것처럼요. ...

"일을 하시나요?" 여자에게 물어보면 그 여자는 부엌 걸레질을 멈추고 아기를 안아 들고 문가에 와서 말하죠. "아뇨, 전 일을 하지 않아요." - P272

문명인 남자는 말합니다. 나는 자아이다. 나는 주인이다. 나머지는 다 타자이며 - 바깥이고 아래이고, 밑이고, 부속이다. 나는 소유하고, 나는 이용하고, 나는 탐구하고, 나는 착취하고, 나는 통제한다. 내가 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내가 원하는 바가 사물의 존재 이유다. 나는 나이고, 나머지는 내가 보기에 알맞은 대로 이용할 여자들과 황야다. - P286

남자들은 삶 전체를 지배 영역에서 살아요. 남자들이 곰 사냥을 나가면 곰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오고, 모두가 귀 기울여 듣는 이 이야기들은 그 문화의 역사나 신화가 됩니다. 그리하여 남자들의 "황야"는 인간(Man)의 소유물인 자연(Nature)이 됩니다.
그러나 여자로서 여자들이 겪는 경험, 남자들과 공유하지 않는 경험은 황야 아니면 철저히 타자로서의 야생입니다. 사실상 인간(Man)에게는 부자연스러운 영역이죠. 문명이 남겨둔 곳, 문화가 배제한 곳, 지배자들이 동물적이라고, 짐승 같다고, 원시적이라고, 미개하다고, 진짜가 아니라고 하는 곳... 이야기된 적도 없고, 이야기가 되더라도 듣는 이 없었던 곳. 이제야 우리가, 그들이 아닌 우리의 언어로 서렴ㅇ할 말을 찾기 시작한 영역. 바로 여자들의 경험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지배자로 인정받은 이들에게 그곳은 진정한 황야입니다. 그들이 이 영역에 대해 품은 공포는 아주 오래됐고 깊으며 폭력적이죠. - P290

잎사귀, 박껍데기(a gourd a shell), 그물, 가방, 멜빵(a sling), 자루, 병, 통, 상자, 용기. 담을 곳. 그릇.

아마 최초의 문화적 장치는 그릇이었으리라... 많은 이론가들이 가장 이른 문화 발명품은 분명 채집물을 담을 용기와 멜빵이나 그물 형태의 운반 수단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엘리자베스 피셔는 <여자들의 창조>(1975)에서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 멋진 크고 길고 단단한 물건, 그 뼈다귀는 어디 가고? 분명히 영화에서 원인이 처음 누굴 때릴 때 그 뼈다귀를 썼는데, 그러고 나서 처음 제대로 벌인 살인의 성취감에 그르렁대면서 하늘 높이 던져 올렸더니 빙글빙글 돌다가 우주선으로 변해서 날아가지 않았나. 그래서 영화 끝에 가면 (이상하게도) 자궁도 없고, 모체도 없이 수정시키고 낳은 사랑스러운 태아가, 당연하게도 남자아이가 은하수 주위를 떠다니지 않던가? 모르겠다.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아니다. - P294

우리 모두가 온갖 막대기와 창과 칼에 대해 들었지만, 때리고 찌르고 두들길 길고 단단한 도구에 대해서는 들었지만 물건을 집어넣을 도구, 물건을 담을 용기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건 새로운 이야기다. 뉴스다.

그러면서도 오래된 이야기다. 무기라는 늦은, 사치스러운, 불필요한 도구가 나오기 이전에 - 생각해 보면 당연히 훨씬 전에 나왔을 것이다. 쓸모있는 단검과 도끼보다 훨씬 전에 나왔을 것이고, 꼭 필요한 빻고 갈고 파는 도구들과는 같이 나왔을 것이다. - P295

차이를 만드는 건 이야기다. 나의 인간성을 나에게 감춘 것도 이야기, 매머드 사냥꾼들이 때리고 찌르고 강간하고 죽이는 일에 대해, 영웅에 대해 늟어놓은 이야기다. 멋지고 독성 강한 ... 살해자 이야기.
때로는 그 이야기가 결말에 다가가는 것 같다. ... 우리들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옛 이야기가 끝났을 때 사람들이 계속 해 나갈 수 있는 이야기를. 어쩌면. 문제는, 우리 모두가 살해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버렸기에 그 이야기가 끝날 때 우리도 같이 끝날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생명 이야기의 본질과 주제(subject, 오역!! 오자??)와 말을 찾자니 절박한 심정이 함께 한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p. 75] - P297

써 놓은 음악은 어떤 경우에도 연행을 대체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교향악단이나 록 콘서트에 가서 각자 자리에 앉아 말없이 악보를 읽지 않아요.
그런데 도서관에서는 그렇게 하죠.
왜 그런 일이 말에만 일어나고, 음악에는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멍청한 질문이지만, 나에겐 그 질문의 답이 필요해요. 어쩌면 음표는 순수한 소리이고, 말은 순수하지 않은 소리라서일까요. 말은 의미를 갖고 상징하는 소리죠. 순수한 정보가 아닌데도 기호이거나, 기호로 기능할 수 있고요. 그것이 기호인 한 똑같이 임의적인 다른 기호로 대체될 수 있고, 이 기호는 시각 기호가 될 수 있어요. 음표 자체에는 어떤 상징 가치도 없고, 어떤 "의미"도 담겨 있지 않기에 기호로 대체될 수가 없어요. 오직 기호로 지시할 수 있을 뿐이죠.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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