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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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1974)(https://blog.aladin.co.kr/eroica/14627603)의 진한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다. 그 책에서 주인공 셰벡은 원고를 다듬던 오도가 보이는 비전(vision)을 접한다. 나도 빼앗긴 자들을 쓰던 당시 르 귄의 모습과 생각이 궁금해서 작품 밖의 그녀가 보고 싶었고, 50년 전쯤에 쓰인 글들이 모여 있는 이 책을 통해 살짝이나마 본 것 같아 좋았다. 따뜻한 음색의 명료한 영어를 구사하는 지금 내 나이 또래의 똑똑한 백인 여성. 이 책에서 만난 르 귄은 그렇다. 원래부터 유명하지만 나는 몰랐던,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요즘 내게 르 귄이 그렇다.

 

1979년에 처음, 그리고 1989년에 다시 손봐서 출판된 책이다. 수록된 글들은 1973년부터 79년까지 출판된 에세이들이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https://blog.aladin.co.kr/eroica/13896013)1976~88년 시기에 쓰여진 글들의 모음이니, 그 책과 시기가 살짝 겹치면서도 약간 더 오래된 글들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생각하기에 따라 큰 흠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한국어판은 편집자 수잔 우드가 주제별로 배열한 순서를 해체하고 발표 연대순으로 글을 재배열해놓았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유를 밝혀놓았는데, 별로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1. 르 귄의 창작법과 예술론: “SF와 브라운 부인

르 귄이 좋은 글을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글을 아주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에세이에는 언제나 독서 이력이 진하게 묻어난다. 던세이니, 자먀친, 톨킨, 스타니스워프 렘, 필립 K. 딕 같은 판타지/SF 작가들뿐만 아니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D. H. 로렌스, 솔제니친 같은 소설가들, 카를 융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이 등장한다. 사실 나는 이들 모두에 대해 이름만 들어봤을 뿐 문외한이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만 약간의 정성을 더 기울여 르 귄이 다루는 울프 글을 읽어봤지만, 정작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아 공들인 것이 좀 아쉽다. “SF와 브라운 부인”(1975)은 울프의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1924)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 또는 업데이트다. 울프의 글은 100년 전 글이고, 르 귄의 글은 50년 전 글이다. 두 글 간에는 50년 정도의 격차가 있고, 르 귄이 “SF와 브라운 부인을 쓴 시점과 독자인 내가 그 글을 읽는 시점 사이에도 50년의 시차가 있다.

 

울프는 브라운 부인으로 상징되는 인물(character)에 대한 글을 썼다. 브라운 부인은 “Catch me, if you can!”을 외치고 사라지며 작가들에게 글을 쓰게 만든다. 르 귄은 그 글을 물고 늘어지면서 묻는다. “SF 작가가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그것은 바람직한 것일까?”(200). 르 귄에 따르면, SF는 오웰이나 헉슬리 등에 의해 1930년대에야 태동하였고, 1920년대 초에 그 글을 쓰던 울프는 SF의 존재를 몰랐다. 그리고는 넌지시 말한다. 판타지 문학은 브라운 부인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문학 분야라고, 판타지는 민담, 동화, 신화처럼 인물(character)이 아니라 원형(archetype)을 다룬다고 말이다. 그러나 곧 다시 반문한다.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본 나도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과 이름이 나온다. “프로도 배긴스!” 톨킨이 대단한 점은 프로도라는 하나의 캐릭터에 실제로는 너댓 원형들(archetypes)을 조합해낸 것이다. 프로도, , 골룸, 스미아골, 그리고 아마 빌보까지 다섯 개의 부분이 프로도라는 하나의 퍼스낼러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어서 SF 소설 두 작품(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D. G. 콤튼의 인조쾌락)의 사례를 들어 이제 SF에도 브라운 부인, 그러니까 캐릭터, 또는 우리가 따르며 사는 영혼(the spirit we live by)”이 존재함을 확언한다.

 

[“the spirit we live by”212쪽에서는 우리가 따르며 사는 영혼으로, 218쪽에서는 우리가 그 인도를 따르며 사는 영혼으로 다르게 번역된다. 갈라디아서 525절의 구절이라는 각주가 붙어 있다. 그러나 역자가 이 말이 울프의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의 맨 마지막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한 것 같다. 알았다면 좀더 번역이 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건 그렇고, spirit영혼으로 옮겨도 되나?]

 

반지의 제왕이야기가 나올 때는 재미있었는데, 다른 SF를 몰라서 살짝 지루해졌다. 그런데 때마침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르 귄은 책에 대한 영감을 줄거리나 메시지의 형태가 아니라, 문득 보이는 사람의 모습, 사람이 있는 어떤 비전(vision)에서 얻는다고 한다(214). 그리고 자신은 그 사람과 그가 있는 곳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 사람을 보면, 그곳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르 귄은 빼앗긴 자들의 메인 캐릭터인 셰벡도 그렇게 보았다고 한다. 이 남자 물리학자의 모델은 젊은 시절의 로버트 오펜하이머란다. 원자폭탄 발명가. 때마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도 개봉 예정이다. 외모는 그렇게 보였다 한다. 그 다음은?



 

르 귄은 원래 이 이야기를 단편으로 썼다. 그런데 이것이 “30여년 작가 인생 최악의 작품, 정말 한심한 단편였다나... 이 단편을 발표했을까? 발표했다면 제목을 언급했을텐데, 그런 이야기는 없다. 어쨌든 그 실패작 단편에서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남자 물리학자 캐릭터가 르 귄에게 말한다. 아마 썩소를 날리면서 말했을 것이다. “Catch me, if you can.” 이때부터 르 귄의 캐릭터 잡기 = 둘 간의 대화 = 르 귄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상상이 시작된다.


르 귄: 이름이 뭐니?

셰벡: 셰벡. (이 때에야 비로소 이름이 지어진다.)

르 귄: 그래서 당신은 누구지?

셰벡: 글쎄... 아마도 유토피아의 시민?  


르 귄은 유토피아가 어떤 모습일까 알기 위해 여러 해에 걸쳐, 엥겔스, 마르크스, 폴 굿맨, 셸리, 크로포트킨을 읽는다. 셰벡과 대화하며 상상하는 과정은 아직은 캐릭터로 구현되지 않은 spiritlive by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르 귄에게 셰벡이 있는 곳, 그가 돌아갈 곳 등을 고민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사회와 세계에 대한 고민과 겹쳐 있다. “Catch me, if you can!”하며 달아나는 셰벡을 르 귄은 결국 잡아내서 빼앗긴 자들안에 온전히 담게 된다.

 

이쯤에서 끝나도 좋았을 글인데, 르 귄은 계속한다.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우리는 객체가 아닌 주체이며, 자연이라는 위대하고 궁극적인 객체도 오직 우리가 함께 해야 전부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베넷씨가 주체를 객체에 대한 묘사로 대체해버리려 했다는 울프의 비판에 동참하면서, 르 귄은 베넷식의 소설작법뿐만 아니라, 현대 심리소설’,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당시의 대중적 SF를 싸잡아 비판한다. 곧 이들은 신 흉내를 내면서 불편부당함을 강조하는 과학자들처럼 주체의 경험을 무시하는데, 이는 비전(vision)을 재생산해야 한다는 예술가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한다(230, 그런데 번역이 잘못되어 있어 이런 말인지 알기 힘들다).

 

르 귄은 픽션의 매력을 언제나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찾는다(231). 시와 음악과 달리, 픽션은 초월, 곧 이해(understanding)를 건너뛴 평화를 줄 수 없다. 픽션의 본질은 바로 진창(muddle)이다. 진창은 흐느적거리며 유연하고,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무언가가 새롭게 생겨나는 진흙탕이 바로 소설인 것이다. 소설은 거짓 희망이 아닌 진실한 희망을 주며, 빵은 아니지만 우리가 의지해 살아갈 대상”(what we live by)을 준다. 그리고 브라운 부인이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을 약속한다.

 

이 글 “SF와 브라운 부인은 르 귄의 판타지처럼 글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다(74, 125). 버지니아 울프에서 출발해서 톨킨과 다른 SF를 거쳐서 자신의 빼앗긴 자들, 그리고 다시 애초에 울프의 글로 돌아가서 멋진 마무리를 짓는다. 그러나 이 글을 쓰던 당시 르 귄은 몰랐을 것이다. 이 마지막 부분에 그녀가 남긴 실의 형상(string figure)이 도나 해러웨이라는 걸출한 생물학자이자 SF 팬에게 넘어가 트러블과 함께 하기라는 흥미로운 저작이 태어나는 진창 역할을 하게 될지를. 마치 1923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을 쓰고 있던 울프의 실이 50년 후 르 귄에게 넘어가 새로운 형상의 실뜨기 모습으로 릴레이되리라는 것을 울프가 몰랐듯이.

 

2. 판타지는 밤의 언어로 말한다.

르 귄의 책을 읽을 때에는 그것이 소설이 아닌 에세이집이라 해도 제목에 상당히 신경이 쓰인다. “밤의 언어”? 무슨 말일까? 영어책 맨 앞에 실린 수잔 우드의 Introduction은 한국어판에서는 책 뒤에 실린 해설이다. 어쨌든 우드의 그 글은 르 귄이 1976년에 발표한 에세이의 한 구절을 제사(題詞)로 택한다. “... 판타지는 시처럼 밤의 언어로 말한다.” 르 귄은 일단 출판한 글을 다시 손대는 일을 타부로 생각했지만(6), 그녀의 팬이 편집자가 되어, 자신의 수많은 글들을 추리고, 그 중에 나오는 멋진 말 밤의 언어(the language of the night)”를 콕 집어 제목으로 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밤의 언어란 무엇인가? 먼저 우드의 요약에 따르면, 꿈은 말이 아닌 이미지(nonverbal images)로 되어 있는데, 의식의 정신(conscious mind)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꿈이 단어-상징(word-symbols)으로 번역되어야 한다(362). 그래서 우드는 이 책의 핵심어로 번역을 꼽는다. 실제로 르 귄은 아이와 그림자”(1974)에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대한 훌륭한 비평(130~131)을 제시하는데, 바로 이것이 밤의 언어를 낮의 언어로, 직관적인 과정을 이해가능한 언어-상징으로 번역한 것이다.

 

르 귄은 밤의 언어를 낮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에도 능하지만, 밤의 언어로 창작하는 것에 더 능한 이이다. 르 귄의 출중한 밤의 언어 구사 능력에는 칼 구스타프 융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 르 귄이 융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얼핏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난 융을 모르고, 사실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다. 그런데 르 귄은 내게 융의 매력을 제대로 알려주었다. 좀처럼 하지 않는 일인 것 같은데, 르 귄은 아주 친절히 융을 독자에게 설명해준다.

 

융 이론의 핵심은 자아ego는 더 큰 자기self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합적인 것이며, 모든 인류, 어쩌면 모든 생명체와 공유하는 것, 어쩌면 신이라 불리는 존재로의 연결 고리이다. 곧 자기는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으로서, 이 안에서 우리 모두가 만난다. 곧 진정한 공동체의 근원이다(121). 이 곳에 가는 방법은? 융은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가라고 말한다. 그림자는 인간 의식의 그늘 속 형제, 카인, 칼리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하이드 씨, 골룸, 도플갱어다. 의식에 의해서 부정당한 자신의 일부분. 그러나 그림자는 단순히 열등하고, 원시적이고, 서투르고, 짐승 같고, 아이 같은 악한 존재가 아니라, 강인하고, 생명력 넘치고, 즉홍적이다. 막 사춘기를 벗어난 젊은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총체적인 악으로 취급하곤 하지만, 결국 그것 역시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해야 자기비하와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그림자는 그에게 안내자가 된다. 판타지는 그 그림자를 따라가는 여행이다. 여행자가 그 여행을 통해 바뀌는 여행(74, 128, 188).


자기라는 집단 무의식의 존재가 바로 인간의 소통가능성을 보장한다. 아마도 이것이 프로이트와 융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일 것이다.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내 속에서 자아(ego)id, superego와 겹쳐 있다는 프로이트 이야기는 이제 좀 지겹다. 융은 저마다의 자아가 그 깊은 곳에 최소공통분모(the lowest common denominator), mass mind[120,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라 그런지 역자가 번역을 안 했다]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다 같은 인간이고, 같은 우주의 부분이다. 이 말은 당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이 바로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르 귄은 이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정리한다.


예술가는 타인의 내면에 닿으려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 자신의 내면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갈수록 타인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188).


역설적으로 들리는 이 말이 가능한 것은 바로 융이 말하는 자기, 곧 집단 무의식의 존재 때문이다.


책꽂이나 텔레비전에서 살아 있는 원형(archetype)을 찾을 수는 없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인류 공통의 마음 속 어둠에 도사린, 개인성의 핵심에서 말이다”(189).

타인은 (사르트르처럼) 지옥이 아니라 구원이다”(254).

르 귄의 판타지가 성공한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르 귄이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그녀의 독자를 포함한 인류의 집단 무의식, 곧 자기에 잘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 경험을 다른 이들의 내면에 맞닿아 있는 밤의 언어로 뛰어나게 형상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3. 나의 그림자

처음 아이와 그림자”(1974)를 읽으면서는 <악귀>머리를 풀어헤친 그림자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그림자가 나오는 장이 떠올랐다. 한국과 서양은 그림자에 대한 의미 부여가 좀 다른 것 같다. 프로도의 골룸, 나의 또 다른 나.

 

그림자는 평상시 잊고 지내던 과거의 나의 어떤 모습을 투사한 것이다. 아니 반대로 투사하기를 거부하려는 것, 투사되지 않고 안에 남은 불편함의 응어리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있을 것이다. 가끔 꾸게 되는 힘든 꿈. 보통 나는 그 꿈이라는 직관의 과정을 번역하지 않는다. 아니, 번역을 거부한다. 그리고 나는 잊었다 말한다. 그랬다. 조금 더 어른이 되면 그 시절을 다시 기억하려고 할까? 그러면 뭐가 좀더 좋을까?

 

공상은 이어진다. 그래. 나에게도 그림자가 있다. 밤에 이대로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다. 날씨가 좀 좋아져서 밤에 걷기 좋을 때쯤 그림자랑 대화를 한 번 해봐야 하겠다. 낮으로 넘어온다.

 

4. 쉬었다 계속하는 꼬리물기처럼...

베넷 부인이 버지니아 울프에게, 꺽다리 물리학자가 어슐러 르 귄에게 말했다. “Catch me, if you can!”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처음에는 순진한 호기심에, 그 후에는 오기도 생기고 재미도 있어 그 캐릭터 꼬리물기를 계속한다. 창작자가 아닌 나는 덕질하는 팬의 마음으로 르 귄의 꼬리물기를 계속한다. 여기에만 탐닉하면 안 될 것 같아 강도와 속도 조절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 내가 따라가던 르 귄은 트릭스터처럼 모습을 바꾼다. 바로 나의 그림자로... ... 이 예측하지 못한 반전이란... 내가 따라가던 것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따라가던 나도 달라진다. 책장을 덮은 나는 책을 읽으려고 첫 장을 읽던 나와 달라져 있다


어슐라, 이번에도 재미있었어요. 당분간은 못 와요. 다나 해러웨이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또 올게요. 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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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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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르 귄이 칼 구스타프 융의 집합적 무의식 이론이라는 렌즈를 통해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낮의 언어˝로 친절하게 해설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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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아닌가 - 버지니아 울프 산문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정소영 옮김 / 온다프레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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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책 전체에 대한 리뷰가 아니라, 오직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에 대한 리뷰이다. 르 귄의 <밤의 언어>를 재미있게 읽는 중이다. 하루에 에세이 한 두 편 정도씩 보고 있어서 일주일쯤 후면 리뷰를 쓰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간쯤 읽었는데, "SF와 브라운 부인"을 읽자니, 그 글은 버지니아 울프의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을 읽어야 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다. 소설은 아니고 짧은 에세이.




이 리뷰를 쓰는 목표는 아주 단순하다. 훌륭한 르 귄의 글을 읽기 전에 초심자인 내가 읽어서 일단 무슨 말인지를 내 말로 정리해 적어두기 위해서다. 르 귄의 고매한 통찰을 접하기 전, 배우는 마음으로 정리하는 글이다.  


1. 청순한 정리

에세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작가에게 그 작가가 쓰고 있는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가 놀리듯 이렇게 말한다. "Catch me, if you can." 그 캐릭터를 잡으려는 노력이 바로 소설 쓰기이다. 


에세이 안에 아주 짧은 소설의 한 장면으로 쓸 수 있을 법한 컷이 삽입되어 있다. 리치몬드에서 워털루로 가는 기차 안에서 픽션이 이뤄진다. 등장인물은 세 명, 스미스씨, 브라운 부인, 그리고 화자이다. 앞의 두 명만이 말을 한다. 픽션 밖 에세이는 화자인 젊은 "나", 곧 버지니아 울프가 요즘 소설 좀 쓴다는 것들의 방식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소설 속 인물의 사실성(the reality of characters in a fiction)"을 강조하는 아널드 베넷("Five Towns"라는 소설의 작가란다)에게 반론을 펼치는 내용이다. 


베넷은 인물의 사실성이 그 인물에 대한 자세한 묘사에 의해 창조된다고 보는 것 같다. 울프는 이를 지나간 시대(에드워드 시대, 1901-1910)의 시류로 간주하면서, 그 이후의 조지 시대(1910-1936)에서 인물의 사실성은 그녀의 생김새, 출신계급, 옷차림 같은 표면, 또는 "사물의 짜임새"(fabric of things, 167)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그녀 내면의 경험에 대한 작가의 주목으로부터 탄생한다고 본다. 에드워드 시대의 작가들은 그녀가 보는 것, 또는 그녀의 옷, 그녀가 지금 있는 열차칸의 모습에 대해 디테일한 묘사를 할 뿐, 그녀를, 그녀의 삶을 보지 않는다(163-164).


작가는 자신이 창조하고 있는 캐릭터의 내면을, 그/녀가 무언가 경험하면서 느꼈을 감정의 파고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브라운 부인이 껍데기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과 엄청난 다양함을 지닌 노부인"(176), 또 사람의 마음을 지닌 캐릭터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제서야 작가와 독자는 같은 열차칸에서 여행하는 동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약간의 거들먹

이게 맥락이 맞는 연관짓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푸코가 쓴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관하여>가 생각이 났다. (제목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뭐 어쨌든...)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좀 전의 프로이센에서 당시 유행하던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두고 설왕설래가 벌어졌고, 이에 대해 칸트가 멋진 말들을 했었다. 그리고 그 칸트의 멋진 글이 출판된 지 2백주년을 맞아 푸코는 죽음을 앞두고 글을 쓴 것이다. 계몽... 미성년에서 벗어남...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음.... 이성의 공적 사용... 뭐 이런 말들이 아련히 기억나는데...


그 텍스트처럼 이 텍스트도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캐릭터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방식에 대한 신구갈등이 소재이다. ... 음... 여기까지... 더 쓰려면 칸트 글도, 푸코 글도 다시 펴서 봐야 할텐데... 나는 지금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다. 


3. 다시 겸손해질 때

나는 해러웨이를 읽다가 르 귄을 읽게 되었고, 르 귄을 읽다 보니 또 르 귄이 너무도 사랑한 훌륭한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 노자, 폴 굿맨, 머레이 북친, 칼 융,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다 이름만 들어본 이들이었다.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만, 이들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르 귄의 헤인시리즈부터 천천히 차근차근 읽는 것이 먼저다. 오지랖을 좁게 유지해야만 중심을 잃지 않고 집중할 수 있고, 궤적을 그릴 수 있다. 이렇게 다짐해도 또 호기심이 발동해서 시간을 들여 무언가 새로운 텍스트를 읽게 된다.

 

지난 번 <세상 끝에서 춤추다>를 읽으면서도 울프의 <3기니> 이야기가 한참 나와서 읽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잘 참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못 참고 읽어 버렸다. 1924년에 쓰여진 글이니, 백 년 전에 쓰여진 글이다. 영문학의 역사는 전혀 모르고, 빅토리아 시대는 들어봤어도 그 이후의 에드워드 시대와 조지 시대가 나와는 무슨 상관이겠는가? 단지 르 귄이 이 글을 읽고 자신의 글을 썼기 때문에 그 르 귄 글을 읽기 위해 읽었을 뿐이다. 따라서 대단한 감동이나 통찰을 얻지는 못했다. 정리나 해두었을 뿐...


자, 이제 다시 르 귄의 글을 읽을 차례이다. 또 나는 경탄하면서 겸손해질 것이다.






울프가 태어난 19세기 말은 영국이 번영을 구가하던 빅토리아 시대가 저물어가던 때였지만, 그의 부모님은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은 1837년에서 1901년이지만 사회문화적 변화라는 측면에서 빅토리아 시대는 1820년경부터 조지 5세가 즉위한 1910년이나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의 기간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소설 형식의 필요를 주장하는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에서 울프가 에드워드 왕 시대 작가와 조지 왕 시대 작가를 구분하며 1910년을 기점으로 드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 P7

울프가 <여성과 직업>에서 언급하는 ‘집 안의 천사‘(Angel in the House)는 우리의 ‘현모양처‘와 아주 흡사하게 가족 구성원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여성에게 부여했다. ... 그 전까지 사회적 지위와 재산 여부에 따라 제한되었던 투표권이 1884년에 노동자계급 남성에게까지 부여되었지만, 30세 이상의 대부분 여성이 투표권을 획득한 것은 그보다 수십 년이 지난 1918년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자연스럽게 공적 영역으로 분리된 생산 분야는 남성이 장악하고, 여성이 속한 가정은 예전과 달리 생산에서 배제된 사적 영역이 되었다. - P9

... 일단 에드워드 시대 인물과 조지 시대 인물, 두 진영의 구분부터 해보겠습니다. 웰스 씨와 베넷 씨와 골즈워디 씨는 에드워드 시대 인물이라 하고, 포스터 씨와 로런스 씨, 스트레이치 씨, 조이스 씨, 엘리언 씨는 조지 시대 인물로 칭하겠습니다. ...

에드워드 시대는 빅토리아 여왕의 뒤를 이어 1901년부터 1910년까지 통치한 에드워드 7세의 통치 기간을 말한다(1차대전 전까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조지 시대는 ... 1910~36년의 조지 5세의 통치 기간을 의미한다. - P143

여기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인물이 있어요 (Here is a character imposing itself upon another person). 이 이야기의 브라운 부인은 거의 자동으로 소설을 쓰게 만드는 그런 인물이지요. 모든 소설이 맞은편 구석자리에 앉은 노부인과 함께 시작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소설은 인물을 다루는 것이고, 소설이라는 형식은 ...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거죠. - P152

이 모든 소설에서 이 위대한 소설가들은 우리가 보았으면 하는 것들을 이런 저런 인물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게 아니라면 소설가라고 할 수가 없지요. 시인이거나 역사가거나 논문 저자면 모를까. - P155

이 열차는 리치먼드에서 워털루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국 문학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기차입니다. 왜냐하면 브라운 부인은 영원하기 때문이에요. 브라운 부인은 인간성 자체여서 단지 표면만이 달라질 뿐이라, 그 안을 들락날락하는 것은 소설가거든요. 그렇게 부인은 앉아 있지만 에드워드 시대 작가들 누구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온 힘을 다해서 열심히 무언가를 찾으면서 공감하는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볼 뿐이죠. 공장을, 유토피아를, 심지어 열차 칸의 장식과 가구를 바라보면서도 절대 그녀를, 삶을, 인간 본성을 보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목적에 맞는 소설 기법을 발전시킨 겁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해줄 도구를 만들고 관습을 확립한 거죠. 하지만 그 도구는 우리의 도구가 아니고 그들이 하는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관습은 파멸이고 그러한 도구는 죽음입니다. - P163

에드워드 시대의 도구가 우리가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그들은 사물의 짜임새를 엄청나게 강조했거든요. 집을 제대로 보여주면 독자들이 그 집 안에 사는 사람을 추론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어요. 집을 제대로 대접하기 위해 훨씬 살기 좋은 집으로 만들어냈죠. 하지만 소설은 일차적으로 사람에 대한 것이고 그들이 사는 집은 이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식으로 소설을 시작할 수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조지 시대 작가들은 당시 널리 쓰이던 그 방법을 집어던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브라운 부인을 독자에게 전달할 방법이라고는 없이 홀로 부인을 대면하게 되었던 거죠. 하지만 이 말은 아주 정확하진 않아요. 작가는 절대 혼자인 법이 없거든요. 늘 대중과 함께하니까요.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옆 칸에는 있는 거죠.
대중이란 여행을 함께하는 낯선 동행입니다. - P167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쇠퇴의 과정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더 신나는 우애의 교류를 위한 서막을 열어줄 어떤 관례, 작가와 독자가 함께 받아들일 관례가 부재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각 시대의 문학적 관습은 워낙 작위적-누군가를 방문하면 내내 날씨 얘기를 해야 하고, 오직 날씨 얘기만 해야 한다는 식으로-이라 약한 사람은 울화통이 터지고 강한 사람은 문학계의 기초와 규칙 자체를 아예 파괴해버리는 것도 당연해요.
어딜 보나 이런 징조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어요. 문법을 어기고 문장을 해체하죠. - P171

작품은 독자와 작가 사이의 친밀하고 동등한 동맹관계에서 태어나는 건강한 자식이어야 합니다. 작품을 무력하고 타락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러한 독자와 작가의 분리, 여러분 쪽에서의 겸손함, 우리 쪽에서는 전문가연하는 오만과 체면이거든요. 매끈하고 반지르르한 소설들과 거들먹거리는 우스꽝스러운 전기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비평들, 그리고 현재 그럴듯한 문학으로 통하는, 고운 가락으로 장미와 양의 순수함을 찬미하는 시들이 바로 거기서 생겨나는 겁니다. ...

바로 지금 영국 문학에서 또 하나의 위대한 시대가 태동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브라운 부인을 버리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할 때에만 가능합니다.(1924)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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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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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읽는 중. 그러니까 preview도 review도 아닌 on-view(?), 讀中感이다. 


그냥 비공개로 밑줄긋기하며 읽을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짧은 메모를 남긴다. 


"몬다스의 시민"(1973)이라는 짧은 글 맨 마지막(p. 30)에 <빼앗긴 자들>을 탈고한 상태지만 아직 출판 전의 기대와 걱정이 교차되는 순간을 적은 부분이 있다. 르 귄이 1929년생이니 40대 중반였겠다.


1960년대 말, 르 귄은 <어스시의 마법사>로 대표되는 순수 환타지의 정맥(vein)을 <어둠의 왼손>으로 대표되는 SF의 정맥과 마침내 분리해냈다고 회고한다. 그녀는 자신의 상상력은 언제나 내부와 외부의 한계들 모두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전자가 the Inner Lands, 후자가 Outer Space인 셈이다. 


헤인 시리즈에 관한 SF 글쓰기는 바로 그녀 자신이 그 이후로도 계속 넓혀간 Outer Space 이야기가 된다. Inner Lands 이야기인 어스시 이야기는 오지랖질 방지를 위해 헤인시리즈 다 볼 때까지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도주로"(Escape Routes)는 1974-75년에 쓰여졌다. The Dispossesed에서 언급되었던 비유와 표현들이 눈에 띈다. 89쪽에는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집(a very dafty house)"이,  마지막 장(한글판 90쪽)에는 SF가 "과업을 완수할 것(it will fulfill its promise)"이라는 표현도 있다.


"아이와 그림자"(1974)에서 르 귄은 융의 이론을 본인의 판타지 이론의 기초로 삼는다. 왜 이 책의 제목이 "밤의 언어"인지 유추할 수 있는 "낮의 언어(the language of daylight)", "낮시간의 윤리(daylight ethics)"라는 말이 간간이 나온다(118, 130). 이 낮의 언어와 대비되는 것이 밤의 언어일텐데, 그것은 그림자, 곧 "내면의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고, 그 언어가 바로 판타지인 것이다(135).

예술이란 이렇게 끊임없이 바깥 경계를 갈구하는 행위다. 원하는 것을 찾아내면 온전하고 탄탄하고 현실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한다. 그에 이르지 못하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이 책들은 당연하게도 불완전했다. 특히 <환영의 도시>가 그랬는데, 애초에 지금 모습으로 출판해서는 안 되는 책이었다. 좋은 부분도 제법 있지만 절반쯤밖에 제대로 숙고하지 않은 작품이다. 당시 나는 자만하며 서두르고 있었다. - P27

1967년에서 1968년에 걸쳐, 나는 <어스시의 마법사>와 <어둠의 왼손>을 통해 내 순수한 판타지의 흐름을 SF의 흐름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런 분리는 기법과 내용 양쪽에서 상당히 큰 발전의 증거가 되었다. 이후 나는 오른손과 왼손을 골고루 사용해서 집필해 왔으며, 계속해서 나 자신과 장르라는 매질의 한계를 밀어붙이려 시도했다. Since then I have gone on writing, as it were, with both the left and the right hands; and it has been a matter of keeping on pushing out toward the limits - my own, and those of medium. (아직 출간되지 않은) 최신작 <빼앗긴 자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시도가 될 것이다. 이 책이 세상에 등장했을 때 책을 찢어발기는 소리와 실망의 외침이 들려오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 뿐이다. - P30

도가 철학의 세계는 혼돈이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구성된 세계지만, 그 질서를 구성하는 법칙은 인류나 특정 개인이나 인격신이 강제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도덕적 법칙, 심미적 법칙, 그리고 당연하게도 과학의 법칙은 권위자가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속에 깃들어 있어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
이런 반이데올로기적이며 pragmatic한 기법은 인물뿐 아니라 장소에도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의식적으로 어시스를 창조해낸 것이 아니다. ... 나는 공학자가 아니라 탐험가다. 어스시는 발견한 것이다.
제대로 세운 계획은 모든 요소를 포괄해야 한다. 반면 발견이란 한 걸음씩 전진하는 것이다. 발견이란 시간의 경과가 필요한 과정이다.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 P36

판타지란 여행이다. 정신분석학과 마찬가지로 머릿속 무의식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정신분석학처럼 위험할 수도 있다. 그리고 반드시 정신분석학처럼 당신을 바꾸고 만다. - P74

많은 독자와 평론가들, 그리고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문체가 작품의 여러 요소 중 하나인 것처럼 말한다. ... 그러나 당연한 소리지만, 문체야말로 곧 작품이다. 케이크를 제거하면 남는 것은 쪽지에 적은 조리법뿐이다. 문체를 제거하면 개요와 줄거리밖에 남지 않는다.
역사에서는 부분적으로 진실이다. 소설에서는 대부분 진실이다. 판타지에서는 절대적인 진실이다.

... The style, of course, is the book. If you remove the cake, all you have left is a recipe. If you remove the style, all you have left is a synopsis of the plot.
This is partly true of history; largely true of fiction; and absolutely true of fantasy. - P75

... 문체는 곧 작가다. ... 문체가 없으면 아예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문체란 당신이 작가로서 대상을 관찰하고 그 대상에 관해 말하는 방식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당신의 눈, 당신이 생각하는 세상, 당신의 목소리다. - P75

... 나는 독자 또한 비슷한 의무(responsibility: 책임!!!!!)를 진다고 믿는다. 우리가 읽는 작품을 사랑한다면 독자도 마땅히 의무(duty)를 감당해야 한다. 그 의무란 바로 속아넘어가지 않을 의무다. 신화의 성역을 상업적으로 착취하지 못하도록 거부해야 한다. 조잡한 작품을 거부하고, 제대로 된 작품을 기다리며 갈채를 아껴야 한다. 진짜 판타지보다 더 진짜인 것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Because when fantasy is the real thing, nothing, after all, is realer). - P77

나는 SF가 문학에 건네는 가장 큰 선물이 열린 우주를 마주하는 포용력이라 생각한다. SF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문도 닫아버리지 않는다. ... 그 열린 우주는 단순히 고정된 계층 구조가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방대하고 복잡한 사건이 발생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인간이 탄생하기 전의 과거로부터 놀라운 현재를 거쳐 처참하거나 희망찬 미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이 열려 있다. 모든 연결이 가능하다. 모든 대안이 가능하다. 편안하고 안심되는 공간이 아니다. 아주 거대하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집(a very dafty house)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집은 바로 그런 곳이다.
그리고 SF는 그 거대하고 외풍이 숭술 들어오는 집에 거주할 수 있는, 그곳을 거처로 삼을 수 있는, 지하실에서 다락방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며 놀이를 즐길 수 있는, 현대적인 문학예술의 형태로 보인다. - P89

만약 SF가 쓰레기가 아니라, 도피주의가 아니라, 지적이고 심미적이고 윤리적 책임을 지는 위대한 예술 형식으로 취급받는다면, SF는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다. 마땅히 과업을 완수할 것이다(it will fulfill its promise). 미래를 향한 문이 열릴 것이다(The door to the future will be open). - P90

나는 나보다 나중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 톨킨을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을 질투한다. 그 질투 대상에는 내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저항이 최소한에 그치는 어린 시절에 그 책을 접하게 하는 일에는 당연하지만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 열 살이나 열세 살일 때 엔트나 로스로리엔의 존재를 알 수 있다니, 얼마나 운이 좋은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아이들이 자라나서 환상을 다루는 소설을 쓰는 일은 상당히 드물며, 나는 질투심을 품으면서도 내가 25세 이전에 톨킨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 읽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내심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감당할 수 있었을지 도저히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93

성차별주의자(sexist)로 몰리지 않기를 빌면서 감히 말해 보자면, 우리 문화권에서 이런 반소설주의는 기본적으로 남성의 태도다. 미국의 소년과 성인 남성은 종종 우리 문화권에서 ‘여성적‘ 또는 ‘유아적‘이라 간주하는 특정 성향, 특정 재능과 가능성을 배척함으로서 남성성을 드러내 보일 것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런 성향 또는 가능성 중에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인 상상력이 포함되어 있다. - P102

나는 성숙이란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성장해서 도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가 죽고 어른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살아남아 어른이 되는 것이다.
I believe that maturity is not an outgrowing, but a growing up that an adult is not a dead child, but a child who survived.
나는 어린이의 내면에 성숙한 인간에게 필요한 최고의 잠재력이 전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능력을 어린 시절부터 북돋워 주면 성인이 된 후의 인격도 제대로 발육하지 못하고 뒤틀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잠재력 중 가장 인간적이고 인도적인 능력이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도서관 사서로서, 교사로서, 부모로서, 작가로서, 또는 단순히 성인으로서, 이런 능력이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푸른 월계수처럼 번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 P109

위대한 판타지 문학이나 전설이나 민담은 사실 꿈과 유사하다. 이들은 무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의 ‘언어‘인 상징과 원형을 이용해서 말을 건다. 말을 사용하지만 작동하는 방식은 음악과 유사하다. 언어의 논리 회로를 끊어 버리고 말로 옮기기에는 너무 깊숙이 숨은 생각 쪽으로 일직선으로 달려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이성의 언어로 온전히 번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걸 이유로 들어 이런 이야기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논리 실증주의자뿐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 속에는 생생한 의미가 가득하며, 도덕이나 통찰력이나 성장 등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다. - P118

융(Carl Gustav Jung)은 우리가 보통 자기 자신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자아ego‘를 보다 큰 ‘자기self‘의 일부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지하는 부분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처럼, ‘자아‘는 ‘자기‘ 주변을 맴돈다"고 말했다. ‘자기‘는 ‘자아‘보다 훨씬 거대한 초월적인 개념이다.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집합적인 개념이다. 나머지 모든 인류와, 어쩌면 다른 모든 생명체와 공유하는 것이다. 어쩌면 신이라 불리는 존재로의 연결 고리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신비주의적으로 들리고, 사실 그렇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밀하고 실용적(exact and practical)이기도 하다. 융은 그저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육신 내부에 보편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폐와 골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정신의 내면과 그 구성 방식에도 동일한 보편적 경향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큰 틀에서 보면 모두 비슷하게 생겼다. - P119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의식적인 삶에서 체현되지 않은 그림자일수록 보다 어둡고 묵직하게 마련이다‘(융). 다른 말로 하자면 눈을 돌릴수록 그림자는 강해지며, 마침내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영혼 속에 내재한 위협이 된다는 말이다.
의식으로부터 부정당한 그림자는 외부를 향해, 타인을 향해 표출된다. 문제가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저들이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괴물은 다른 사람들이다. 모든 외국인은 사악하다. 모든 공산주의자는 사악하다. 모든 자본가는 사악하다. 고양이가 못된 짓을 해서 발로 찬 거라고요, 엄마.
현실 세계를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아를 타인에게 투사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자기 내면에도 혐오스럽고 사악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그림자를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만으로도 세계에 진정한 도움을 주는 셈이다‘(융). - P122

다른 인간, 또는 특정 부류의 인간과 자신의 연관성을 완벽하게 부정하면, 그들이 자신과 근본적을로 다르다고 선언하면 - 남성이 여성에게,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게,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게 했던 그런 행동을 벌이면, 그 타자는 증오의 대상이 될 수도, 신과 같은 경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양쪽 모두 결국에는 정신적인 동등성을,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현실을 무시할 뿐이다. 타자를 권력관계 외에는 다른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는 사물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You have made it into a thing, to which the only possible relationship is a power relationship).. 이런 행동은 결국 자신의 현실을 치명적으로 궁핍하게 만들 뿐이다. 결국은 자신을 타자화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You have, in fact, alienated yourself). - P140

우리는 즐기기 위해 이곳에 모였으며, 그 말은 곧 우리가 가장 인간적인 과업인 즐거움을 찾는다는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햄스터조차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쾌락의 추구가 아닌, 즐거움의 추구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곳에서 즐거움을 찾기를 바랍니다.

We‘re here to enjoy ourselves, which means we are practicing the most essentially human of all undertakings, the search for joy. Not the pursuit of pleasure - any hamster can do that - but search for joy. - P145

저는 여기 모여든 신실한 분들께 벽이 무너졌다고 선언하러 이곳에 온 것입니다. 벽은 무너졌고, 우리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혹시 그거 아시나요? 바깥에는 냉혹한 세상이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저와 같거나 그 윗세대의, 벽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게토 상태를 부여잡고 SF를 종교로 만들어 입문 의식을 치르지 않은 사람들을 불경하다고 몰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저는 솔직히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 핍박받은 집단이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덕목으로 삼는 것은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고요.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동의할 수도 없습니다. 차별과 경멸이 멈춘 후에도 회피와 방어에 매달리면, 한때의 반항아는 결국 불구가 됩니다. 그리고 저는 SF가 반항을 계속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 저는 SF가 무너져 내린 낡은 벽의 잔해를 넘어서 곧장 다음 벽으로 돌진해 다시 무너트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 P149

진정한 미스테리는 이성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다. 가짜는 파괴된다. 그대로 직시하기만 하면 사라져 버린다. 금발 영웅을 바라보면, 진심으로 마주하면, 그는 햄스터로 변해 버린다. 그러나 아폴론을 직시하면 그는 당신을 되쏘아본다.
시인 릴케는 50여 년 전에 아폴론 상을 바라보았고, 아폴론은 그에게 말했다.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 진정한 신화는 항상 같은 말을 한다.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어쨌든 예술의 길이란 감정이나 감각이나 육체 등과 결별하고 순구한 의미라는 공백으로 항해를 떠나는 것도, 정신의 눈을 감고 비이성적이며 도덕을 초월한 무의미 속에서 뒹구는 것도 아니다. 예술의 길이란 이런 양쪽 극단 사이에서 미약하고 힘겹지만 반드시 필요한 연결의 끈을 놓지 않는 일이다. 연결하는 일이다. 개념에 가치를 연결시키고, 감각에 직관을 연결시키고, 대뇌피질과 소뇌를 연결시키는 일이다.
진정한 신화는 바로 이런 연결고리 중 하나가 된다. - P186

[융Jung은] ‘고립된 ‘이드id‘뿐 아니라 ‘집단 무의식 collective unconscious‘의 존재를 강조한다. 그리고 의식이라는 환히 밝혀졌지만 비좁은 영역 밖에 존재하는 정신/육체 mind/body의 영역이 우리 모두에서 거의 비슷하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는 의식이나 이성의 가치를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융이 ‘분화 differentiation‘라 부른 개인의식의 구축은 그가 보기에는 훌륭한 위업이자 문명의 가장 큰 업적이며, 우리 미래의 희망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무가 크게 솟으려면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신화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연결하는 과정에서만 탄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꽂이나 텔레비전에서 살아 있는 원형을 찾을 수는 없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인류 공통의 마음속 어둠에 도사린, 개인성의 핵심에서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면, 그리고 커튼을 젖히고 어둠 속을 응시하기만 하면 발견할 수 있을 것 - P188

울프 여사가 말했듯이, "브라운 부인은 영원하다. 브라운 부인은 인간의 본성이다. 브라운 부인은 겉모습만 바꿀 뿐이고, 소설가들은 같은 객실을 들락거릴 뿐이다. 그녀는 그대로 그곳에 앉아 있다."
그녀는 그대로 그곳에 앉아 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SF 작가들도 그녀의 맞은편에 앉을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 일일까? 우리도 브라운 부인을 만날 가능성이 있을까, 아니면 은하계를 가로지르는 반짝이는 거대한 우주선 안에, 리치몬드-워털루 왕복 기차편보다도 광속보다도 빠르게 움직이는 멸균 처리된 우주선 안에 영원히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 P198

내가 아는 것은 우리가 이곳에 있으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주변에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하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객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우리는 주체이며, 우리의 일부이면서 우리를 객체로 간주하는 살마은 비인도적이며 그릇된,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있으면 자연이라는 위대하고 궁극적인 객체는, 지치지 않고 무수한 태양을 타오르게 만드는 힘도, 은하계와 행성을 회전시키는 능력도, 그 안의 그 안의 바위와 바다와 물고기와 양치식물과 침엽수와 작은 털북숭이 동물조차도, 전부 주체가 된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 또한 우리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의식이다. 우리의 시선이 사라지면 세계는 시각을 잃는다. 우리가 말하고 듣기를 멈추면 세계는 귀가 먹고 벙어리가 된다. 우리가 생각을 멈추면 모든 사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 P226

우리는 개인으로서, 독립된 정신으로서 삶을 영위한다. 하나의 사람, 유일한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가능한 최고 수준은 공동체 정도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공동체란 접촉을 의미한다. 당신의 손으로 다른 사람의 손을 만지고, 함께 작업을 수행하고, 함께 썰매를 끌고, 함께 춤을 추고, 함께 아이를 품는 행위가 공동체를 정의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몸과 두 개의 손밖에 가질 수 없다. 원을 형성할 수는 있지만 직접 원이 될 수는 없다. 원이라는 진정한 공동체는 개별적인 육체와 개별적인 정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만들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객체화되고 정량화된 인간들로 구성되는 공동체는 진정한 사회의, 진정한 공동체의 기계적이고 비정한 모조품일 뿐이다. 사회계급, 민족국가, 군대, 기업, 세력 집단이 된다. 그쪽 방향에는 더 이상의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말에 이르기까지 따라왔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희망은 브라운 부인뿐이다. - P227

SF는 상상력이라는 의식을 확장시키는 훌륭한 도구를 이용해, 광막한 암흑을 등지고 서 있는, 아주 연약하고 영웅적인 브라운 부인의 모습이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 P232

"... 우리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 갈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세계의 절반은 항상 어둠에 잠겨 있다. 그리고 판타지는 시처럼 밤의 언어로 말한다"[Ursula K. Le Guin, "Fantasy, Like Poetry, Speaks the Language of the Night" published in _World_(Nov. 21, 1976)].

그녀의 지적에 따르면, 우리의 꿈은 언어가 아닌 심상(nonverbal images)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런 꿈을 의식의 정신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어-상징(word-symbols)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다. - P361

이 글["A Response to the Le Guin Issue"(1976)]의, 그리고 『밤의 언어』의 중심 단어는, 바로 ‘번역‘이다. 평론가로서 르 귄은 직관적인 과정을 지적인 용어로 해석하려 시도한다. 꿈을 단어-상징으로 번역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 P368

판타지와 SF는 르 귄에게 거리를 두는 기법을, 인간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상황을 새로운 관점으로 살펴보는 방법을 제공했다. 이런 거리두기 기법은 분명 판타지와 SF를 내면의 여정이라는 직관적 과정을 언어로 ‘번역‘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관점과 연관되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서 인류 전체가 공유하며 의미가 있는 패턴과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다. (르 귄의 소설이 장편과 단편을 막론하고, 『로캐넌의 세계』에서 『어둠의 왼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빼앗긴 자들』에 이르기까지, 물리적인 여정(physical journey)의 구조를 가진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여정 중 많은 수는 원형 또는 나선형 구조를 가지며, 걸국 자아성찰(self-knowledge)이라는 목표점에 도달한다)

다른 주요 개념은 ... 바로 온전하고 통합된 인간을 형성하려면 판타지가 제공하는 내면의 탐구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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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번역에 대한 의구심

이 페이퍼는 번역에 국한한 리뷰이다. 학술 서적도 아닌 소설에 뭔 짓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좋아하는 책에 대한 나의 애정 표현이다.

 

1. 제목에 대하여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다. 제목이 번역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내용을 모른다면 The Dispossessed빼앗긴 자들로 옮긴 것에 문제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는 의아했다. 누가 무엇을 빼앗겼다는 말인가? 누구를 the dispossessed로 지칭하는 것인가? 나는 이것이 여러 지시대상을 동시에 가리키는 중의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160여년 전 혁명을 일으킨 후 우라스 행성에서 아나레스 행성으로 이주해온 오도주의 아나키스트 집단 전체를 가리킨다.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The_Dispossessed)는 이 책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풀이해 놓았는데, 아나레스인 전체를 the dispossessed로 보는 입장이다.



제목의 의미

르 귄이 이 작품에 붙인 제목은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러시아어로는 Бесы, Bésy)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영어판 악령의 잘 알려진 제목 중 하나가 Possessed이다. 르 귄이 북친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 작품의 기저를 이루는 철학적 배경이나 생태적 개념들은 머레이 북친의 희소성 이후의 아나키즘(Post-Scarcity Anarchism, 1971)에 빚진 바 크다. 아나레스의 시민들은 단지 정치적 선택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소유할 수 있는 자원의 결핍 자체에 의해서 dispossessed되어 있다. 르 귄은 이 점을 다시 한 번 우라스의 자연적 부와 그것이 초래하는 경쟁적 행태들과 대조한다."


여기에서 dispossessed를 뭐라고 번역해야 할까? 이것은 정치적 선택에 의해서 소유권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며, 자원의 부족으로 실제로 소유할 것이 별로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소유했던 것을 빼앗긴 상태를 뜻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the dispossessed가 아나레스인을 뜻한다면 소유하지 않은 자들이나 무소유 사회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둘째, 우라스 행성의 소유주의(propertarian) 국가인 에이이오(A-Io)에 방문했다가 천신만고 끝에 그곳에서 벗어나 아나레스로 돌아오는 이 책의 주인공 쉐벡을 가리키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5장에서 [우라스의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국가 츄(Thu)국 요원] 치폴리스크는 쉐벡이 에이이오 국에 팔렸음을, 곧 매수당했음을 알려준다(156). 당시에 쉐벡은 이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9장에서 쉐벡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쉐벡)는 이제 그들(에이이오 인들)이 그를 데리고 어찌했는지 알았다. 치폴리스크는 단순한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이 그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들과 거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정말이지 순진한 아나키스트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개인은 국가와 거래할 수 없다”(309).


에이이오국에서 사람이라면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에게 소유당한다. 쉐벡은 이 사실을 몸으로 깨닫는다. 곧 자신이 에이이오국에 소유되었음을 깨닫고, 정권에 저항하는 집단적 봉기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우라스로부터 탈출을 감행하여 성공한다. 따라서 쉐벡을 the dispossessed로 볼 경우, 이 말은 소유된 상태에서 벗어난 자, 탈출자또는 해방된 자라는 뜻이다.

 

정리해보자. The dispossessed는 이것이 우라스의 아나키스트 공동체를 가리킨다면 소유하지 않는 자들또는 무소유 사회, 쉐벡을 가리킨다면 탈출자또는 해방된 자로 옮기는 것이 옳다. 따라서 영어의 중의적 의미를 다 살리는 한국말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도 빼앗긴 자는 될 수 없다. 아나레스인 전체도 쉐벡 개인도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았다. 쉐벡과 아나레스인들은 소유하지 않고 소유되지 않는 자이다. 그러고 보면 복도훈(2020)이 제안한 빈 손이라는 제목이 빼앗긴 자들이라는 제목보다는 훨씬 더 영어 the Disposssessed에 가깝다.


난 좋은 오도주의자답게 빈 손으로왔습니다”(86).

당신들이 뻗은 손은 내 손과 똑같이 텅 비어 있어요. 당신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341).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의 손은, 늘 그랬듯 비어 있었다”(440).


2. 장의 숫자를 빼버린 것에 대하여

이 책은 모두 13(chapters)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국어본은 장들을 1, 2장 하는 식으로 숫자를 붙이지 않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행성의 이름을 붙여 놓았다. 그런데 Urras라는 이름이 붙은 1장은 우라스에서만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우주선 마인드풀이 아나레스를 떠나 우라스에 도착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13장도 Urras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는 장소는 우라스가 아니라, 우라스에서 아나레스로 오는 우주선 데이브넌트 안이다. 그 중간의 장들은 아나레스와 우라스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지만, 첫 장과 마지막 장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영어판은 1974년 처음 선보인 이후로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번 펴냄에 따라 판본마다 페이지 수가 다 다르다. 따라서 이 책을 인용하는 논문들은 페이지보다는 장을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어본에는 장의 숫자가 없어서 어디를 가리켜야 하는지 말할 때 좀 난감하다. 영어 논문들을 봐도 다 장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이 한국어 책의 어느 부분인지를 확인하려고 할 때 품이 더 많이 든다. 장의 숫자를 붙이는 것이 당연히 더 좋다.

 

3. 헌정사의 생략에 대하여


영어 책 맨 앞 부분에는 르 귄이 이 책을 파트너에게 헌정한다는 짧은 헌정사가 있는데, 처음에는 별 신경을 안 썼지만 소설을 다 읽고 리뷰를 쓰려고 뒤적이다 보니 다시 눈에 띈다. 본문 전체에 걸쳐 partnership을 반려(관계)로 옮긴 것은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 이해해줄 만하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파트너라고 해도 되지 않나 싶다. (한글전용론자들께서는 아마 반대하시겠지..) 어쨌든 파트너가 무지 중요한 소설인데, 파트너에게 바친다는 헌정사를 뺀 것은 너무 무성의한 느낌이다.

 

4. 전반적인 번역

매끄럽지 못한 부분들이 좀 많다. syndicateorganism을 둘 다 조직으로 번역한 것은 거슬린다. 오도니안(Odonian)오도주의()”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solidarity연대가 아니라 결속이라고 옮긴 것도 별로다. being실존으로 becoming변화로 옮기는데, 전자는 존재로 후자는 생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254~256). 그리고 채플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화성, 화음, 하모니가 아니라 죄다 조화로 번역해 놓았는데, 나올 때마다 짜증났다. 없는 말을 집어넣어서 시간을 완전히 바꾼 경우도 있는데, 275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아홉 번째 천년기의 164년 초사불과 쉐벡은 공저를 출판한다. 영어 원문에 아홉번째 천년기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는다. 그런데 오도가 죽은 것이 우라스 력 아홉 번째 천년기” 769년이고, 정부 전복이 771년이다(102, 113). 그 후로 160여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다시 164년이란 말인가? 아나레스는 우라스와는 다른 연호를 쓰고 있는데, 216쪽에는 아나레스 정착 160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르 귄이 아나레스력이라고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다른 연호임이 분명하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오역들이 계속 눈에 띈다. 이 밖에도 많은데, 이상한 부분들을 일단 정리해둔다.

 

오자, 오역 및 어색한 번역

:

Page (Harper Perennial ed.)

이수현 국역 (황금가지)

대안적 번역 제안

16: 15~16

9

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끌어올려 달라고 외쳤다.

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다.

24: 4

15

사관들은

장교들은

30: 5

21

에세아입니다.

에세아입니다.

60: 16-17

47, fn.

타데(어린아이는 ... 나 타데라고

타데(아빠. 어린아이는 어떤 어른이라도 마나 타데라고)

61: 6

48

결속

연대(solidarity)

65: 9

51

살갗의

육체(flesh)

69: 1

55

독자성의

동일성(identity)

70: 23

56

Ts/2(R) = 0

ts

---(R) = 0

2

72: 6

58

조심하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잘 지내(take care). 자유롭게 지내게(Keep free).

72: 10

58

단독형은

단수형은

74: 14

60

퉁방울 눈

옆으로 튀어나온 귀(protruding ears)

92: 4

74-75

그들도 여자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들도 가둬두었다.

92: 8

75

격려가 되는 일이죠.

영감의 원천이죠.

93: 10

75

라디오로 우라스와 이야기해 온 자발적 조직

무전으로 우라스와 접촉했던 기획 결사 or 실행준비위원회 (Syndicate of Initiative)’

94: 16

76

죽어버린 열렬함 속에서

정직하게

108: 3

 

받아들이는

이루는(to achieve)

108: 12

 

자신을 유배시킨 사회에서

자신이 태어난 곳을 스스로 떠나 새롭게 정착한 사회에서 [의역]

111: 14

92

무역동의를

무역협정을

112: 8

93

서쪽으로

남쪽으로(southward)

114: 21

96

보다 바람직한 두뇌가

곧 두뇌 같은 것이

114: 22

96

직업 분할, 상품

분업, 재화

117: 5

98

열이

난방이

117: 5~6

98

풍력 터빈이며 ... 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풍력 터빈이며 ...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118: 24

100

저 꽉 찬

저 무성한

119: 14~15

100

종이는 무거웠다.

종이뭉치는 두꺼웠다.

119: 16

101

입증의 장을

교정지(proof sheets)

123: 7

104

시간 비유를

시간위상학(chronotopology)

129: 22~24

110

일하는 데 필요한 작업장이나 ... 선택할 수 있었다.

누구나 일하는 데 필요한 작업장, 실험실, 스튜디오, 차고, 그리고 사무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목욕을 공중목욕탕에서 할지 개인욕조에서 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공간을 혼자 사용할지 함께 사용할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130: 1~2

110

배설물이었다.

낭비(waste)였다.

130: 6

111

나이든

더 오래된

130: 8

111

인간 고독의

인간들의 연대(solidarity)

130: 8~9

111

프라이버시가 제 기능을 다하는 가치일 뿐이다.

프라이버시란 그것이 기능을 수행하는 곳에서만 의미있는 가치일 뿐이다.

130: 20

111

그의 유기체(사회적 의식)

그의 양심, 곧 그의 유기체적-사회적 양심(organic-societal conscience)

130: 24

111

요리와

요리사와

131: 1

111

요리가

요리사가

131: 5

112

사회적인 의식

사회적 양심

131: 12

112

숙소로

공동숙소로

132: 19

113

위상 모델은

국면 모델은

137: 8

117

재화의 접촉에

영리적 계약(profit contract)

145: 9~10

124

너무 내 주장만 ... 관점 말이야.”

내가 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것 같구나. 하지만 난 네가 나에 대해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네가 원한다면 했었을 아들로서의 권리에 대한 주장 말이야.”

151: 14

130

초등학교 경제 교과서

기초적인 경제학 교과서

156: 20

135

선입되었다고

매수되었다(co-opted)

156 22

135

금권 정치에 소수독재 국가에서

금권과두제 국가 (plutocratic-oligarchic State)에서

157: 21

 

허용해 줬을까요

허용할까요

159: 2

137

개개인 밑에

개개인 뒤에

164: 22

142

형제애형제애 아닌 것을 뭐로 정의하겠나?

형제가 아닌 것이 없다면 무엇으로 형제를 정의할 수 있겠나?

165: 1~2

142

만나 보거나 들어보기만

만나 보거나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기만

172: 16

149

구멍 파기

무덤(grave) 파기

181: 4~5

157

시와 이야기는 노래나 춤과 더불어 명이 짧은

시와 이야기는 경향상 일시적이어서 노래나 춤과 연결되는

190: 7

165

오도니안 주의가

오도주의가

190: 15

165

공공의 견해

여론(public opinion)

192: 10

167

결속

연대

192: 15

167

너나 나나 몇 데카드 안에 PDC에 자원해서 투표자가 될 수 있어.

너나 나나 자원하면 몇 데카드 안에 추첨명단에 올라서 PDC에서 일할 수 있어.

192: 17

167

PDC에 배치된 개개인이

PDC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개개인이

193: 16

168

많은 사람이 선택한 지원자들

추첨으로 당첨된 지원자들

199: 8

173

더 인습적인

더 통상적인(conventional)

201: 4

175

테이프를 꺼버리든가 지역 연주를 그만두게 할걸.

녹음이나 지역 연주를 허가하지는 않을거야.

203: 14

178

제한되어 있는 볼거리지역을

몇 안 되는 전망좋은(scenic)’ 관람명소 지역을

207: 19

181

변명을 하고 싶어

그를 용서하고 싶어

210: 13

183

일어난

과거에 일어났던

213: 13

186

세 가지 종이

세 가지 문()

213: 16~19

186

저기엔 ... 몇 십 억이나 돼.

저 구세계에는 육상동물만 열여덟개의 문이 있어. 그리고 그 밑에는 곤충 같은 강()이 있고, 그 강에는 또 수많은 종()들이 있어서 그 수가 얼마인지 결코 세볼 수가 없어. 어떤 종들의 개체수는 무려 수십억쯤 될거야.

213: 20

186

그러면 훨씬 더 ... 들겠지.

그러면 자신이 더 큰 세계의 부분이라는 느낌이 여기보다는 훨씬 더 강하게 들거야.

217: 11

190

죽음이라는 유리한 위치에서

죽음의 관점에서

254: 7

 

옛날 옛적에라고

엣날 옛적에 그러니까 시간 위의 한 점에서(Once upon a time)’라고

254: 9

 

모든 변화를 하나의 실존으로

모든 생성(becoming)을 하나의 존재(being)

254: 23

222

도덕성을

유한성/필멸성(mortality)

255: 18

223

축약의

수축의

255: 21~22

223

변화나 발전이 없고 ... 흐르는 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화살이나 흐르는 강 같은 시간인데, 이러한 시간이 없다면 변화나 진보도, 방향이나 창조도 있을 수 없습니다.

255: 22~23

223

그리고 혼돈, 의미 없는 순간이 ... 있는 거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 또는 순환하는 시간인데, 이러한 시간이 없다면 카오스, 곧 순간들의 의미없는 연쇄만 있을 겁니다. 그러한 세계에는 시계도, 계절도, 그리고 약속도 없겠지요.

256: 8~9

224

존재나 변화 어느 한쪽을 .... 지루함이고

존재(being)나 생성(becoming) 어느 한쪽을 환영이라 치부해 버릴 수 있을까요? 존재 없는 생성은 의미 없는 것이지요. 생성 없는 존재는 커다란 지루함이고...

257: 19

 

과거의 현실을

과거의 실재성(reality)

257: 21~21

 

시간과 원인이 ... 시간의 생물이라면

시간과 이성(reason)이 상대방을 전제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만일 우리가 시간의 피조물이라면

258: 16~17

226

유지만이 아니라 ... 변화까지

지속(duration)만이 아니라 창조까지, 존재만이 아니라 생성(becoming)까지

271: 22

237

필사본을

초고를

275: 13

240

아홉 번째 천년기의 164년 초

(아나레스력) 164년 초

276: 1

241

완전한 필사본을

완성된 초고를

280: 1

244

개인의식

개인의 양심

309: 9

272

기대치에 도전하여

기대를 저버리고

317: 20

280

사실로

참으로

 

280

틀렸음이

거짓임이

 

280

모든 요소가 증명 가능한 ... 있을지도 모른다.

한 이론의 모든 요소가 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이론이란 단순한 동어반복이 아닌가? 원을 깨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증명 불가능한 것들, 또는 심지어 거짓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들의 영역에 있다.

 

280

구조적 통합은

근본적 동일성(fundamental unity)

339: 15

298

폭동의 찬가

봉기의 노래(the Hymn of the Insurrection)’

341: 14

300

자유로운 유대라는

자유로운 연합(free association)이라는

363: 9~10

320

금욕적이니까

잘 참으니까(stoical)

377: 14

333

근사한 계획 같은걸.”

그럼 바람이 많이 들어오겠네(It may get pretty drafty,)”

377: 17

333

그러길 바라.”

그렇겠지.”

379: 20

335

인간이 살 수 없는 전망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inhabitable) 풍경

388: 12

342

결속...

연대...

390: 9~10

343

초과학이죠.

순간이동(Transilience)이지요.

399: 3

352

평회의와

평의회와

424: 9

374

그 원고 찾아놨어.

원고에 페이지 달았어.

424: 16

374

금욕적이라니까.

잘 참는다니까.

439: 11

386

떠나는 건데.’ 이후 한 문장 누락!!

진정한 여행은 돌아오는 것이지요.”

 

5.

번역에 대한 지적을 하면 가끔 반론을 듣기도 하지만, 애초에 한글판을 보지 말라는 소리도 듣는다. 그런데 어쩌나? 내가 한국 사람이고 주변 사람들이 다 한국 사람들인데... 그들과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데... 악의로 받아들이지 말기를 바란다. 출판사가 검토해서 다음에 고쳐주면 고맙고, 다른 독자들이라도 보고 지금보다는 더 뜻을 잘 파악할 수 있기만 해도 좋다. 주인공 쉐벡은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나누는(share) 것이라고 한다. 지식의 작은 조각들은 그래 마땅하다. 이것은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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