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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주의의 역사 - 빼앗긴 들에 서다
강만길 엮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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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한국통사에 관한 책을 읽은 게 아주 오래된 일이라는 것을… 80년대말 90년대초에 읽은 [다현사], [바보사],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서사연에서 펴낸 [한자발], 그리고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누런 근현대사 책 이후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저학년 때까지의 아스라한 기억들을 더듬으며 여기 나오는 역사적 사실들을 배열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다. 사실 그동안은 1945년 이전의 한반도 역사를 공부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가고 있었다. 현대에 관심을 국한시킴으로써 주의가 분산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또 제도교육과 운동권 교육 모두를 통해 접했던 민족사 중심의 서술에 적잖이 물리기도 하였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수구파들 덕에 최근 들어 더욱 시끄러워지고 있는 한국근현대사의 쟁점화에 내 눈과 귀를 더럽히고 싶지도 않았다. 20세기 초반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 후반과 21세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 미루고 있던 공부를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하게 된 셈이다.

 

이 책은 강만길 교수가 큰 틀을 잡고, 그 제자들이 알맹이를 채우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아무리 같은 학풍을 따르는 이들이고 조정작업을 거쳤다 하더라도, 책의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상(歷史像)을 잡아내는 맛은 한 개인의 독자적인 저서에 비해 떨어진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쉬운 점으로 인해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이 저서의 통찰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그간의 한국통사 책을 통해 접했던 한반도를 '닫힌 공간'으로 서술하는 민족사완결주의적 사관과 거리를 두고 있다. 곧 이 책에서의 역사 서술대상 -곧 일제시대의 한반도와 해방 이후의 남한 – 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역사적 전개에 배태되어 있다는 점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처럼서술대상을 전체의 부분으로 파악함으로써 역사서술의 범위를 시공간적으로 한정짓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이 책이 말하지 않는 부분 – 예컨대, 강만길 교수가 언제고 보충되기를 희망하는 해방 이후 북한의 역사 – 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 부분과의 연관을 어떻게 구성해나갈 것인가, 나아가 한반도와 한반도를 포괄하는 더 큰 실체인 동아시아나 자본주의 세계경제 간의 연관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곧 한반도라는 부분을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전체의 역사적 전개 속에 어떻게 위치지울 것인가 하는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나름대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봉건제라는 용어의 사용이다. 조선 땅이 일제 식민지화를 거치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되었다는 올바른 인식에도 불구하고, 편입 이전의 사회 성격을 기술하는 데에 있어 ‘봉건제’ 혹은 ‘봉건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저자들은 봉건제에 대한 어떠한 정의도 없이 이를 前자본주의 사회 일반과 관성적으로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다 (30쪽, 79-80쪽,  etc.). 봉건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 발흥 이전에 서유럽과 일본 정도에서만 발견되는 역사적으로 아주 특이한 사회형태이지, 그 자체로서 역사적 보편성을 획득한 개념이 결코 아니다.

 

둘째, 이 책의 대상 독자층은 아무래도 학부에서 근현대사 교양수업을 듣는 대학 1-2학년생들이 아닐까 싶은데, 이 때문인지 역사적 사료에 대한 각주 처리가 대부분 생략되어 있고, 각 장 끝에 주요참고문헌만을 덧붙이고 있다. 뭐 대중적으로 읽히겠다는 의도야 좋지만, 기왕에 연구자들이 공들여 연구한 내용일텐데, 논쟁의 여지가 있는 역사적 사실들은 각주처리를 하거나 박스 처리를 해서라도 그 사료를 명확히 게시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특히,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수구파들이 판치는 (또 노골적으로 그 수구파들에게 구애하는 일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존재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역사상(歷史像) 간의 대결은 역사적 사실들 간의 실증적 대질을 통해 수행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조선 말기 남발된 백동화의 상당 부분이 일본인에 의해 오사카에서 위조되었다는 서술이 나오는데 (89쪽), 이 사실의 출처나 근거 혹은 사료가 무엇인 지는 나와 있지 않다. 또한 노동력 강제동원의 추정치를 제시하면서 자료마다 심한 편차를 보인다고 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일제의 조선인 동원이 강제적이고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183쪽)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naïve하다는 느낌이다 (최근들어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있는 이영훈 교수가 얼마전 종군위안부의 추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좋은 공격거리이다).

 

셋째, 이 책에서 구사된 비판적 역사 기술의 준거에 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의 관점은 한반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 엘리트들의 정책 운용에 대해 비판적이다. 문제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해 비판적인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비판의 준거이다. 이런 식이다. 일제 강점기나 미군정기의 역사 전개나 장면 정부의 역사적 한계 등을 비판할 때에는 '만약 자주적 국민국가를 세웠다면 그러지 않았을텐데' 하는 식으로 늘 反사실적 준거가 동원된다. 이 자주적 국민국가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봐도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부에 이 국가가 존재해야한다는 현실적 전제를 유지한다면, 이 국가는 힘센 국가, 핵심부 국가일 것이다. 그리고 핵심부 국가들 중에서도 일본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도 헤게모니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과장을 약간 보태면, 자주적 국가는 결국 헤게모니인 미국 말고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이 反사실적 준거란 ‘우리가 미국만큼 힘이 셌으면’ 하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반사실적 준거에 의지하기보다는 역사서술대상(식민지 조선과 이후의 남한 경제)의 희생이 과연 가해자 혹은 강자(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헤게모니)의 이득으로 연결되었는가,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이러한 불평등 관계가 어떻게 구조적으로 재생산되었는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는 서술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서술은 이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를 더 발전시키는 것이 반사실적 판단준거를 들이대는 것보다 책의 품격을 더욱 높였을 것이다.

 

넷째, 이 책에서 다루어진 근현대사 공간의 역사적 사실들의 서술에 대한 평가는 본인의 역량 바깥의 문제이지만, 책 마지막에 실린 신용옥의 “보론: 박정희정권기 경제성장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 대해서는 몇마디 해두어야 할 것 같다. 발전국가론에 대한 제대로 된 국내 비판을 별로 접해본 기억이 없는 내게 이 글은 무척 반가웠다. 특히 그가 이승만정권과 박정희정권을 대비시키면서 발전국가론이 간과하고 있는 재원의 성격변화(무상원조에서 유상차관으로)를 강조한 것은 발전국가론에 대한 역사학자의 개입으로서 매우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의 성취를 가능하게 했던 당시의 특수한 세계체제적 환경을 강조한 점 역시 옳다. 그러나 (1) 발전국가론을 ‘유교자본주의’론과 함께 “한국 자본주의 성격에 대한 ‘우파’의 종별 규정”(312쪽)으로 바라보는 것은 발전국가론에 대한 “지나치게 독창적인 오해”이다. 더구나 양자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한 통속으로 취급하는 것은 둘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2) 그의 주된 비판대상으로서 등장하는 발전국가론 문헌은 발전국가론의 기초를 닦았다 할 수 있는 찰머스 존슨(일본)이나 앨리스 앰스덴(남한), 로버트 웨이드(대만)의 대표적 저작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상이한 이데올로기적 구성을 보이는 저작들을 발전국가'론'으로 동질화하여 취급하는 것 또한 성급해 보인다. 게다가, 90년대말 경제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대한 방어의 성격을 띠고 있는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글을 단순히 발전주의 옹호론으로 독해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된다.  (3) 또한 발전국가론에 대한 비판의 준거도 좌에서 우로 오락가락 진동한다. 한 번은 전형적인 IMF의 논리를 들이대며 발전국가가 ‘연고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온실이었다(322쪽)는 우파적 비판을 하다가, 또 다른 곳에서는 발전국가 속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요소를 찾기란 불가능하다(327-8, 329쪽)는 좌파적 비판을 하기도 한다. (4)또 아시아 경제 위기에 대한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논문을 음모론 정도로 격하하고 있는데(329쪽), 도대체 이 글의 저자 신용옥 선생의 내공이 얼마나 대단한 지 궁금하다. 정치경제학 연구는 보통 특정 행위자의 행위가 구조에 미친 영향이 보다 강조될 경우 음모론처럼 보이는 반면, 개별 행위에 대한 전체 구조의 제약이 강조될 경우나 개별 행위가 전체 구조의 재생산에 어떻게 기여하는 지가 강조되면 기능주의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치경제학 연구는 음모론과 기능주의라는 양극단의 유혹에 언제나 맞서야 한다. 그러나 아시아 경제 위기는 ‘월가-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의 정책행위의 결과로서 드러난 것이라는 웨이드와 베네로소의 주장은 정당하다. 물론 이 복합체가 한국 경제를 말아먹으려고 음모를 꾸민 것도 아니며, 웨이드와 베네로소가 그런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강력한 행위자(‘월가-미국 재무부-IMF 복합체’)의 행위 결과가 어떻게 구조의 약한 부분(경제위기에 노출된 동아시아 국가들)을 통해 드러났는 지를 훌륭하게 설명하였을 뿐이다. 이것이 어떻게 음모론인가?

 

할 말은 더 있는데, 이 쯤에서 접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도 이 책은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이해하는 첫 걸음으로서 손색이 없다. 보론은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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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국주의 한울아카데미 737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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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개념

(1) spatio-temporal fix

개념을 한국말로 옮기기 쉽지 않은 이유는 여기서 'fix' 중의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첫째, 문자 그대로의 뜻은 '고정' 정도로 번역할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인가 [자본의 한계]인가 (아님 [희망의 공간]?) 에서는 시공간 고정으로 번역되었던 같다). 투하된 총자본 일부는 상당기간 동안 물리적 형태로 토지에 '고정'된다 (건물, 하수도, 도로, 공공 교육체계, 의료복지 체계, etc.). 둘째, 은유적 함의로서, 어떤 오작동이나 고장에 대한 '수리'라는 뜻으로부터 도출된 것으로, 자본주의적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뜻한다. 자본주의의 과잉축적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는 가지가 있을 있다. 하나는 단기적 이윤 확보가 용이치 않은 공공 하부구조에 대한 장기적 투자를 함으로써, 고용창출 효과와 더불어 미래의 경제 활성화의 기반을 마련하는 (케인즈주의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잉여가치 실현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품들의 판로를 개척하거나 값싼 노동력을 고용하여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지리적 팽창을 도모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제국주의적 방식)이다. 실제의 경우에서는 양자가 조합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는 이윤이 회수되는 시점을 시간적으로 지연시킴으로써, 후자의 경우는 자본의 순환범위를 공간적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위기에 처한 잉여자본의 순환과 잉여가치의 실현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가지 의미들 - , '고정' '수리' - 서로 충돌한다. 자본이 고정된 곳에는 자본이 투여된 건축물들 뿐만 아니라, 자본에 고용된 인간들과 그들의 가족들, 생활공간들, 사회적 관계들이 존재한다 (첫번째 ). 만약 자본이 위기에 대한 타결책으로 보다 값싼 노동력이 있는 외국으로 이동했다고 해보자 (두번째 ). 사회적 관계는 자본이 철수한 후에는 공장 건물들만 남는 것이 아니라, 공장과 동네의 활기를 구성했던 사람들이 남는다. 사회적 관계는 관성을 갖고 있으며, 관성은 자본 철수에 대한 저항을 유발한다.

 

사회적 관계의 관성이 야기하는 저항은 하비가 'switching crises'라고 칭하는 - 자본의 흐름이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움직임으로써 야기되는 효과 -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자본주의 전체는 상대적으로 안정성을 유지한 남아 있게 되지만, 부분들이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들(금융위기, 탈산업화, 가치감소 devaluation) 갈수록 격화된다. 전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은 '강탈에 의한 축적 accumulation by dispossession' 동반한다.

 

(2) accumulation by dispossession

개념을 통해 하비는 하나의 오래된 난국을 피할 있었다. 개념이 나오기 전까지 세계체계 시각의 학자들(아민, 프랭크, 월러스틴)이나 Socialist Register 필진 일부는 지속적인 원시적 축적, 혹은 지속적인 본원적 축적 (ongoing primitive/original accumulation)이라는 모순적 개념을 써야 했다. 형용모순의 시발점은 로자 룩셈부르크인데, 그녀는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과 본원적 축적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며, 이것이 제국주의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있다. 자체는 그녀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에 있어서, 룩셈부르크가 보여준 이론적 설명은 맑스의 확대재생산도식에 대한 오해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부하린에 의해 철저하게 공박된다). 로스돌스키 또한 룩셈부르크의 자본주의 확대재생산과 본원적 축적의 동시적 진행 테제에 대해 비판한 있는데, 지금 기억하기로는 맑스에게 있어 소위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에 역사적으로는 선행하는, 그리고 분석적으로는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던 같다. 세계체계 시각의 학자들이 양자의 유기적 연결과 동시적 진행을 이야기했던 것은 맑스가 본원적 축적이라고 보았던 것이 현재의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맑스가 소위 본원적 축적이라고 불렀던 것의 어떤 내용이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지, 그것 자체가 본원적 축적인 것은 아니다. (? 맑스의 본원적 축적이나 아담 스미스의 사전적 축적은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한 것이니까; 또한 맑스에게 소위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에 있어 계기로 고려되지 않으니까) 하비의 기여는 세계체제 분석이 본원적 축적의 지속적 진행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통해 제기하고자 했던 올바른 관찰을 '강탈에 의한 축적'이라는 개념적 교정을 통해 정당화한 것이다. '강탈에 의한 축적' 맑스가 본원적 축적이라고 것의 핵심이면서도, 자본주의 확대재생산의 내적 계기로서 여전히 지속되는 것이다. 이것의 효과는 재생산 도식에 대한 맑스의 설명을 제한시키는 것이다. 대신 하비는 ‘자본축적의 분자적 과정’(아쉽게도 여기에 대한 충분한 분석은 제시되지 않는다) 강탈에 의한 축적의 동시적 진행이라는 자신의 테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강탈에 의한 축적의 주요 담지자로서 국가와 금융기관을 들고 있다. 

 

2. 이론적 개입으로서의 의의

(1) 레닌주의적 제국주의 개념의 교정

평화적인 초제국주의 시대의 도래 가능성을 점친 카우츠키를 비판한 레닌에게 제국주의는 표현이 어떤 식으로 이해되든 간에, 그것이 자본주의의 최고의 단계이든, 최후의 단계이든, 최근의 단계이든 간에 자본주의의 임박한 파국을 알리는 하나의 단계이며, 이는 다섯 개의 표지를 통해 있는 것이었다. 하비는 좌파 내에서 지배적이었던 레닌주의적 개념을 한나 아렌트의 제국주의 개념과 대비시킨다. 레닌과 달리, 아렌트는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의 제국주의를 부르주아의 첫번째 정치적 지배의 시대로 이해한다. 하비는 이런 대립적인 개념화 (최후와 최초) 간의 대비를 통해, 제국주의의 지배적 이미지(1. 레닌주의적 개념화따라서 2. 오류) 불식시킨다. 동시에 그는 맑스 뿐만 아니라 슘페터와 브로델에 의해 영향 받은 아리기의 자본주의적 팽창 논리와 영토적 팽창 논리 간의 교체 진행 테제를 도입한다. 여기에 위에서 '강탈에 의한 축적'이라는 자신의 개념적 교정을 통해 로자 룩셈부르크의 문제의식을 정당화시킴으로써 새로운 제국주의 논의를 진행해나간다.

 

(2)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사이 어디선가에서의 새로운 주체 구성

하비는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에서 상정된 무차별적, 동질적, 비정형적 집단인 '다중' 어느 마법처럼 분연히 떨쳐일어나 지구를 접수하게 거라는 한편의 순진한 환상과, 반대로 특수한 투쟁 고유의 1차적 중요성만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집단과의 소통과 연대를 힘들게 하는 다른 한편의 국부적, 특수주의적 주체관 사이 어디 쯤에 새로운 주체를 구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투쟁 주체의 표적은 금융기관과 국가기구이다. 어느 정도의 공감에도 불구하고, 허탈함이란... 아마 그것은 하비가 채울 몫은 아닌 같다.

 

3. 아리기의 하비 수용

하비의 이 책에 끼친 지오바니 아리기의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에서 개진된 하비의 분석들 역시 아리기에게 영향을 끼쳤다. 얼마전 아리기는 New Left Review에 하비가 이 책에서 개진한 내용들을 역사적 자본주의의 전개에 관한 설명에 자신이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 지를 흥미진진하게 밝혀 놓은 바 있다 ("Hegemony Unravelling" I & II , New Left Review. 32: pp.23-80, 33: pp.83-116). 그는 대체로 하비에 공감하면서, 그를 추켜 세우기도 하고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의 공간적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 하비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기도 (예컨대 하비가 자신의 논리를 오독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한다. 아리기는 하비의 spatial fix라는 개념을 기존에 자신이 주장해왔던 축적체제 주기와 헤게모니 교체 메커니즘에 적용함으로써 자신과 하비의 설명 모두를 풍부하게 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아리기는 클린턴 시대의 신경제를 헤게모니 쇠퇴 직전의 번영기 (belle epoque)로 해석하며, 신자유주의로부터 신보수주의로의 전화를 이 번영기의 종말로 이해한다. 또한 이는 클린턴 시절 경제정책의 기조 역할을 했던 글로벌리제이션 담론이 아들 부시 시대에 이르러 급격히 소멸되었다는 점을 통해 강조된다. 현재 미국에 군사적으로 대적할 국가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피터 고완이 그의 역작을 통해 개념화한) '달러-월스트리트 체제'는 갈수록 위기를 맞고 있다. 이전의 쇠퇴하는 헤게모니는 모두 채권국이었던 데 반해, 현재 미국은 채무국이라는 점은 미국 헤게모니 쇠퇴가 이전의 역사적 헤게모니의 쇠퇴와 구분되는 가장 특이한 점이다. 아리기는 이를 통해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가파를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이전까지는 헤게모니의 교체에 (현재 이라크에서의 전쟁보다 훨씬 규모가 큰) 대규모 전쟁이 동반되었다. 과연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은 어떠할 것인가? 몰락하기는 몰락하는가? 아리기보다 오래 살면서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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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0 0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9-28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성
나카무라 사토루 지음, 정안기 옮김 / 혜안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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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가을을 맞이하며 읽은 책이다. 간단하게 책의 미덕과 단점을 추려보자.

 

책의 첫째 미덕은 오래 돕과 스위지에 의해 주도된 자본주의 이행 논쟁이나 국내의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간의 대립 등이 기반하고 있는 하나의 허위적 대립을 지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위적 대립은 맑스가 {자본} 3권의 말미에서 구분한 초기 자본주의 발전의 가지 길이다. 구분을 통해 맑스는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질곡으로 작용하게 기존 생산관계가 모순을 잉태, 발전시킴으로써 자본주의가 내적 모순의 작동 결과로 등장하게 되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 외부에 이미 성립되어 있던 자본주의적 시장 세력에 의해 기존의 전자본주의적 관계가 잠식되는 경로 가지를 설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베버적인 의미에서의 이념형이다. 현실에서 초기 자본주의 발전의 경로는 양극단 사이의 어디 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양자 하나로 clear-cut하게 나누어질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만일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역사적 사례들이 양자 하나로 범주화될 있다고 믿는다면이는 이론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이며, 추상의 폭력으로 현실을 재단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자본주의 이행 논쟁이나 식민지 근대화 / 내재적 발전 논쟁은 사실상 이러한 추상의 폭력을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나카무라 사토루는 자본주의의 일국내재적 발전 경로는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조선 뿐만 아니라 식민본국인 일본 역시 외부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와의 접촉을 통해 자본주의화가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되는 지역이 편입 이전에는 마치 진공상태나 처녀지였던 것처럼 취급되어서는 된다. 지역에 독특한 자본주의 경제를 형성하게 만드는 고유하게 존재해온 역사적 조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얘기해온 자본주의 맹아란 바로 이런 자본주의 세계경제와의 접촉 없이 체제의 한계 내에서 발전해온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상품화가 아닐까?

 

책의 번째 미덕은 동아시아 자본주의 발전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이다. 특수성은 다양한 수준에서의 비교 - 동북아시아와 북서유럽 간의 비교, 동북아시아와 다른 주변부 지역 간의 비교, 그리고 동북아시아 내부 국가들 간의 비교 - 통해 도출된다. 예컨대, 동북아시아의 소농경영의 발달은 북서유럽과의 비교 속에서, 화교와 인교에 의해 매개된 동아시아 역내 무역의 급증은 라틴 아메리카와의 비교를 통해서 (cf. 스기하라 가오루), 그리고 조선, 중국, 일본의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자본주의 발전경로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상호작용하는 지역적 전체의 입장에서 해명된다. 이러한 지역간, 지역내 비교의 결합은 고립적으로 상정된 단위 국가들의 비교를 통해 제시되는 차이들의 나열을 넘어 차이 간의 연결을 보여준다. A B라는 국가의 공업 발전 경로에 차이가 존재한다면, 차이는 나라 내부의 조건만으로 설명될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개별 차이들은 보다 과정의 계기를 이루는 것으로 조망된다. 

 

번째 미덕은 셋째 미덕으로 연결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동아시아의 관점을 구성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이다. 일국적 분석단위에 대한 거부는 일찍이 세계체제 분석에 의해서 주장되었으며, 널리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월러스틴의 작업을 위시한 세계체제 분석 역시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유럽중심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날 없었다는 지적은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자넷 아부룩호드, 에릭 울프 등과 같은 주변부 전공 연구자들에 의해 선구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며, 너무 나가기는 했지만 얼마 작고한 안드레 군더 프랭크도 마찬가지였다 (프랭크는 '자본주의' 개념의 폐기를 주장하면서 브로델, 월러스틴이 넘어서고자 했던 랑케의 실증주의적 역사서술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우를 범한다). 최근에는 멕시코의 철학자인 엔리케 두쎌도 여기에 동참한 있다. 이러한 주장들의 함의는 분석단위로서 세계체제를 채택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서구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책의 저자 나카무라 사토루 역시 이러한 비판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번째 미덕으로는, 대가의 세계경제에 관한 전망 귀담아들어야 부분을 꼽고 싶다. 무엇보다 공업화를 통한 경제발전의 성취라는 기존 후발국들의 전략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핵심부의 사양산업이 ()주변부로 재배치되는 기본 메커니즘의 존재 (데이빗 하비나 베벌리 실버가 말하는 spatial fix) 인해 공업화 자체는 용이해졌지만, 그를 통해 발전을 이루는 것은 NIEs 성공 이후로는 후발국간의 국제경쟁 심화와 선진국의 견제로 인하여 갈수록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cf. 지오바니 아리기). 이러한 공업의 세계적 발전과 대조적으로 농업은 정체 상태에 있다. "더구나 문제는 식량수출국이 대부분 선진국이고, 수입국은 모두 개발도상국이라는 점이다. , 국가별 농업생산력의 격차가 공업생산력 격차 이상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219). 이러한 가지 현실, (1) 후발국에게 공업화는 쉬워졌으나 공업화 자체가 경제발전과 등치될 없다는 , 그리고 (2) 선진국이 식량수출국이라는 점은 UN ECLA 이후 과거 라틴아메리카에서 "종속" "저발전" 관한 논의가 한창일 때의 상황과 작금의 상황이 얼마나 다른 지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최선진국과 최후진국 간의 소득 격차는 산업혁명 이전에는 3, 1870 경에는 15-20배에 이르던 것이 현재에는 500 (실질소득격차는 대략 50 정도) 확대일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229-300). 따라서 종속 분석의 기본적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문제의식이 옳다는 것과 분석이 옳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것이 변화한 시대 상황에 걸맞는 종속 연구가 수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책의 다섯 번째 미덕으로는 일본 경제사 연구의 진행상황에 대한 소개를 들고 싶다. 일본의 경제사 연구는 나름대로는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자칭타칭 식민지근대화론 진영에 속하는 국내 학자들에 의해 소개되어 왔다. 전에 스기하라 가오루나 호리 가즈오의 책을 재미있게 보았고, 많은 것을 배울 있었다. 일본의 학자들은 세계의 관점에서 일본을 바라봄으로써 세계를 일본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학문적 발전의 길을 가고 있다. 이들의 연구가 일본의 경제사 연구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자기들의 성에 차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논거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기각되는 것은 저열한 민족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실제로 위의 저자들이나 책을 지은 나카무라 사토루는 한국 내부의 민족주의 사관이 끼친 영향을 알고 있으며, 자신들의 연구가 (마치 일본제국주의가 식민지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만을 끼친 것으로) 오독되는 것에 대해 독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또한 지은이 나카무라 사토루는 구미숭배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일본 민족주의 역시 경계하고 있다. 이는 그가 하마시타 다케시의 조공무역체제론을 실증적으로 근거가 박약하다는 이유로 비판하고 있는 점에서 나타나고 있다 (44-46). <90년대 이후 하마시타는 일본의 입장에서 수정된 세계체제 관점에 입각하여 16세기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조공체제로 파악하면서,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를 조공을 바치러 갔던 사신으로 해석하여 조선이 중국과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이중적 주변부였다는 주장을 해왔다.>

 

칭찬할 점들은 있겠지만, 일단 생각나는 것은 정도였다. 단점들도 정리해보자.

첫째,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집필된 다섯 개의 원고를 편집한 책이라 중언부언하며 겹치는 주장이 많이 있다. 둘째, 대가의 글이라 선이 굵고 명료하며 통찰력이 돋보이지만 세밀한 논리 전개는 보이지 않는다. 셋째, 민족해방운동의 능동성은 경시하며 식민지 경제발전의 능동성만을 강조한다 (200). 넷째, 선진-중진-후진 자본주의 / 본격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전체구조를 상정함으로써 일국단위의 진화론적 발전사관을 극복하는 보이지만, 발전사관을 강화된 형태로 재도입하고 있다. 개별 국가의 발전경로에 방점이 찍히지, 세계경제의 위계구조에 방점이 찍히지는 않는다. 다섯째, 놀랍게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가 없다. 여섯째, 번역의 문제다. 문장은 깔끔하게 번역되었다. ( 점에서 전통과 현대에서 출판된 스기하라 가오루의 책은 정말 거지같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한국말 어휘에 없는 "비지적 공업화 (飛地的 工業化 )" 다른 곳에서 소개되지 않는 나와 도이치의 "일본무역 3관절론" 같은 개념들은 옮긴이의 주가 필요한 개념들일 것이다.

 

남한 사회에서는 비록 식민지근대화론의 수괴 정도로 적대시되고 있지만, 지은이 나카무라 사토루의 목소리는 비분강개의 대상이기에는 너무도 이성적이다. 동아시아의 눈으로 한국을 보고, 세계의 눈으로 한국을 볼 때에야만, 한국의 눈으로 동아시아와 세계를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나카무라 사토루의 {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재구성}은 그 길을 처음 떠날 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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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넘어선 자본 리라이팅 클래식 2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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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본을 넘어선 자본} 맑스가 고전정치경제학자들을 비판했던 방법을 차용하여 저자 이진경이 맑스를 비판하고자 하는 욕망의 소산이다. 나는 책을 아주 재미있게 번을 읽었다. 내가 어떤 책을 재미있게 보게 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다. (1) 모르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이후의 공부방향을 일러줄 (.. 그렇군), (2) 어렴풋이 생각하던 것을 명료하게 정리해줄 (.. 시대의 훌륭한 두뇌라 있는 이진경도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3) 나의 다른 생각이 설득될 , 혹은 완전 설득되지 않더라도 내가 믿어 의심치 않던 것을 균열시킬 , 균열을 통해 대단한 저자에게 게겨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뭐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단 말인가? 어디 한번 보자...), etc. 책을 보면서 모두를 느꼈다. (1)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2). 책은 예전에 푸코와 폴라니를 읽으면서 맑스의 본원적 축적을 떠올렸을 때나, 아래에서 보겠지만 자본의 구절들을 읽으면서 외부를 생각했을 때를 상기시켜줬다. 그러나 (3). 다른 무엇보다 "기계가 잉여가치를 창출한다고?" 나는 고정자본이 마모분만큼 인간의 죽은 노동을 생산물에 이전시키는 것으로 배웠다. 어디 한번 물고늘어져 보자...

 

2. (2) {자본} 외부

이론은 개념 범주들, 공리들,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하고 하나의 안에 제각각의 위치를 부여하는 논리들을 통해 구성된다. 이론은 자체로 역사적 실제가 아니다. 어떤 이론 속의 개념과 현실 세계 속의 대상 사이에 일대일 대응 관계를 상정하는 것은 유동적이며 우발성에 가득찬 역사사회적 현실을 도외시하고, 세계가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완결된 형태를 관통하는 논리가 신에 필적하는 천재에 의해 간파됨으로써 진리가 양산된다고 가정하는 순진무구한 생각이다. 이론은 대상의 모든 측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의 중요도를 가늠하여 이론 내부의 계기로 포섭되는 현상과 무시되어 계속 이론 밖에 내버려지는 측면을 선별한다. 이것이 추상의 방법이다. 추상, 취사선택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계기들 간의 연관을 드러내고자 함이며, 바로 연관을 드러내는 것이 이론적 설명이며, 필연성이란 오로지 이론적 설명 내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일 , 세계 내에서 자체로 항상-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추상적인 범주나 이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이 속해 있는 역사적 모태로부터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따라서 역사적 특정성을 지닌 어떤 실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구성된 이론은 자신이 자기가 이해하고자 하는 대상의 일부임을 겸허히 인정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정리하면, 이론과 역사는 별개이지만, 하나의 이론은 자신이 다루는 역사적 대상에 의해 범위가 제약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역사적 모태에 의해 구속된다.

 

<외부 1>

하나의 역사적 이론이라 있는 {자본}에서 제시된 맑스의 이론적 설명(explanation) 결코 역사적 기술(description)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 1권은 역사적 사실들로 가득 있다. 책은 공장감독관의 보고서에 그려져 있는 영국 공장들의 비참한 현실이나, 소위 본원적 축적을 다루는 마지막 부분에서 농민들이 어떻게 토지로부터 분리되었는지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담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맑스가 제시하고 있는 이론의 예증을 위해 쓰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증과 달리 '전제'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식민지 체제와 세계시장의 확장과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자신의 이론이 겨냥하고 있음과 동시에 발딛고 서있는 산업 자본주의가 출현할 있었던 일반적 조건으로서 전제(premise) 도입된다. 전제란 무엇인가? 전제란 이론을 지탱하기 위해 도입되지만, 바로 이론 안에서는 분석되지 않는 것이다. 전제를 보증할 있는 것은 이론 바깥의 역사적 사실성 -  실제로 일어났는가 - 뿐이다. 맑스는 식민지 체제와 세계시장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부연한다.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고... 추상적 모형인 이론은 이렇게 사실적 전제를 통해 외부와 자신과의 경계를 표시한다. 

 

<외부 2>

{자본} 이론과 외부가 만나는 하나의 지점은 자본과 노동 간의 계급투쟁 역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노동일의 분할에 관한 설명에서이다. 노동일이 어떻게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분할되는가는 오직 역사적으로만 ( 이론 바깥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두나예프스카야는 바로 지점에서 맑스의 주장의 논리적 연속성이 파열된다고 지적한 있다. 계급 간의 역관계는 맑스가 {자본} 통해 펼치고 있는 연속추론(successive approximation) 외부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3. (3) 갸우뚱: 기계적 포섭? 기계적 잉여가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덕 하나는 저자가 {자본} 이론적 설명을 다른 저작들에서 제시된 역사적 기술과 병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가치와 화폐' 다루는 3장에서 저자는 화폐의 발생에 대한 {자본} 이론적 설명, 가치의 표현적 관계가 재현적 관계로 전화하는 과정과 더불어, 폴라니와 베버의 역사적 기술을 통해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와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가 서로 다른 기원을 갖지만 양자 모두 국가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부분에서 저자는 이론과 역사 간의 '대질'이라는 발리바르 비판을 몸소 보여주고 있고, 나는 부분을 읽으면서 저자의 뛰어남에 경탄했다. 방식은 다른 장들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이진경은 {자본} 대해 말하지만, {자본} 도저한 논리에 갇혀있지 않다.

 

방식은 '잉여가치와 계급투쟁' 다루는 5장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관한 저자의 주장은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 그리고 잉여가치를 가능케하는 노동의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에 대한 맑스의 개념화는 '관계적'이다. 상대방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다. 경우 '상대' 없이 '절대' 사고되어질 없으며, '형식' 없이 '실질' 사고되어질 없다. 그러나 맑스가 개념쌍들을 어떻게 구분하던가? 바로 대규모 공업의 출현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가능케 기술 혁신이다. 이제 자본가들은 단지 노동자들을 공장에 오래 매어두는 방법 외에도 잉여가치를 증가하는 방법을 알게 것이다. 빨리 돌아가는 기계를 들여온다거나, 노동자가 덜 필요한 기계를 들이거나 하면서, 이전에는 노동자 명이 생산했던 것을 명이 생산하게 만든다. 이진경은 기계적 잉여가치와 노동의 기계적 포섭을 설명하기 위해 맑스가 없었던 이후의 역사적 발전을 소개한다. 자동화와 정보화, 포스트포드주의, 이로 인해 변화된 생활양식, etc. 저자에 따르면, 이제 잉여가치는 고용된 임노동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계가 되어버린 세계 내부의 활동 전반을 통해 생산된다. 포드주의 체제를 통해 획득되었던 맑스의 관계적 개념화들의 일반성은 이제 상실된다. 이진경은 노동의 기계적 포섭이라는 일종의 ultra-실질적 포섭을 상정하면서 맑스의 관계적 개념화를 무시하며, 기계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개념들이 딛고 있는 지반들을 제거해버린다. 여기서 기계란 단순한 메타포가 아닌 같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만이 노동하고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인간학적 관념이 기계와 인간, 기계와 생명의 경계가 점차 소멸하고 있는 현재 세계에서 점차 지지할 없는 허구적 관념임을 드러내" 것이란다 (205). 저자는 진정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점차 소멸하고 있다고, 소멸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어법처럼 소멸점은 "무한히 연기"되긴 하지만 존재하는 경향의 방향으로 존재한다는 것인가? 나는 자연도 노동과 더불어 가치의 생산과 증식에 참여한다는 주장까지는 수긍할 있지만, 죽은 노동이 응고된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는 말은 도통 받아들이기 힘들다. 여기서 기계란 무엇인가? 누군가에 의해 생산된 방추가 이제 자기 혼자서 가치를 생산한다고?? 그게 아니라면, 기계란 이미 기계처럼 되어버린 사회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제 가치란 무엇인가? 노동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노동과 활동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난관은 {자본} 이론 내부에서 애초에 쌍으로 개념화된 개념쌍들을 고립적인 개념들로 분리시키고, 여기에 이후의 역사 전개에 따라 3 새로운 개념을 첨가함으로써 야기된 난관이다. 관계가 제거된 개념들 간의 병렬로 바꿔 놓는 것이다. 다른 장들에서 제시된 역사적 기술들이 대체로 맑스의 문제설정에 충실하면서 {자본} 이론적 설명들을 훌륭하게 보충하는 반면, 5장은 자본의 이론적 설명을 폐기처분한다. 그래.. 그럴 있다... 19세기 중후반 저작인 자본과 21세기 벽두의 우리의 거리는 한참 멀다. 그런데 그럴 바에야, 이진경이 차라리 맑스와 각을 제대로 세우고, 이제 이런 세상에 맑스의 가치론은 박물관으로 들어가라고 좀더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낫지 않았을까? .. '뭐뭐하지 않을까?'라는 표현 책에 많이 나온다. 읽을 때마다 눈에 걸렸는데, 나도 그렇게 썼다. 그냥.. 까놓고 말하자. '낫지 않았을까?' 아니라 '낫다'라고... 그래야 맑스던 이진경이던 제대로 평가할 있을 것이다. 

 

4.

아무리 책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도, 읽고 있는 책에서 인용한 책까지 옆에다 놓고 줄쳐가면서 읽는다고 해도, 읽는 사람의 성의란 쓰는 사람의 성의에 비할 없다. 책은 결코 녹록한 입문서가 아니다. 저자만큼의 多讀을 독자들에게 기대하기란 무리이겠지만, 책에 대해 말할 있으려면 {자본} 읽고 어느 정도까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자본} 통달했다고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 모르겠다. 아마 통달의 순간이란 내게 무한히 연기되는 어떠한 상상의 지점일 지도 - 책을 읽고 {자본} 내용들을 다시 곱씹어 있었다. 그리고 아마 다시 {자본} 읽게 되는 어떤 , 로스돌스키와 함께 이진경의 책을 옆에 두고 다시 읽을 같다. 책을 읽으신 독자들... 저자 이진경 선생의 관점이 꼬우면.. {자본} 도전하시라..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읽으면 1 남짓이면 3권까지 일단은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당신이 책을 읽고 하고 싶은 말보다 많은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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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e 2006-08-04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자연도 노동과 더불어 가치의 생산과 증식에 참여한다는 주장까지는 수긍"이라는 말에서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진경처럼 '사용가치'와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치를 '생산에의 기여'와 동일시하고 있는 듯한데, 노동가치론은 사회적 총노동의 분배를 둘러싼 자본과 노동 그리고 자본과 자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이지 어느 생산요소가 생산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측정하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서인 '자본의 두 얼굴'을 추천합니다. 함부로 님을 비웃은 것에 대해서 용서를 빕니다. 다만 맑스의 희화화에 탁월한 재능을 선보이고 있는 이진경을 추켜세워주는 것이 너무 웃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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