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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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기구한 운명이란 이런 삶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아니, 이 책의 주인공 신길만의 삶은 너무도 기가 막혀 그 말을 붙이는 것도 망설여진다. 읽는 내내, 정말 이런 삶이 가능했을까 궁금했다. 나찌 군대에 복무한 조선인, 신길만.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군에서, 소련군으로, 독일군으로, 끝에는 미군의 포로로, 군인과 포로의 신분을 번갈아 가며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또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가 다시 소련으로 넘겨져 처형당하는 한많은 인생 여정. 조정래의 소설은 늘 실제로 벌어진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있었을 법한 삶을 탁월하게 그려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없는 얘기를 꾸며낸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의 이 의문은 책 뒤의 해설을 읽으면서 쉽게 풀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미군에게 붙잡혔던 동양인 독일군 포로의 사진에 대해 언급하는 해설은 이 인물에 대한 추측이 몇 년전 부터 인터넷에서 유행하였고, 결국은 방송사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노르망디의 코리안

 

몇년전 방영되었던 SBS 스페샬 2부작 노르망디의 코리안을 찾아보았다. 그러면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풀렸지만, 이 소설에 대한 감탄은 반감되었다. 처음에 사진만 보았을 때에는, 어떻게 저 한 장의 사진을 갖고 한 권의 장편 소설을 쓸 수 있는지, ‘역시 조정래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소설을 너무 쉽게 쓰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코 폄하할 마음은 없다.

 

조정래는 조정래다. 약소 민족의 한, 민초들의 고생스러운 삶, 정겨웠던 농촌 고향과 남겨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남자들의 음담까지도 예전과 똑같다. 역사를 이렇게 탁월하게 형상화할 재주가 있는 이가 또 누가 있을까? 그런데 늘 되풀이되는 주제들이 이제 좀 불편하다.

 

이 소설이 펼쳐지는 20세기에서 가장 야만적이었던 시대를 거쳐 민족주의는 전지구적으로 확립되었다. 민족은 강자의 논리였지만, 또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는 약자의 논리이기도 했다. 비교적 짧은 몇 년동안 목숨 보전을 위해 3개국의 군복을 입어야 했던 신길만의 인생은 약소민족의 비애를 표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목숨 앞에 민족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국기에 대한 맹세민족해방슬로건도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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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3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7-06-1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 저도 그 문제를 좀더 생각해보긴 해야 해요.. 국제결혼율이 15%에 육박하는 세상에 주변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면 '민족' 담론은 참으로 짜증나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도 일본국적과 분단된 남북한 국적 모두를 거부하며 '조선'이라는 민족적을 유지하면서 차별을 감수하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을 보면 '민족' 문제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거든요. 민족해방 구호 없는 '반미'를 고민할 때입니다. 오늘이 미선 효순 5주기이군요.

2007-06-14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7-06-15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 이 리뷰가 호기심을 자극했다니 의외인걸요.. 어쨌든 그 다큐멘타리는 꽤 잘 만든 것 같더라구요. 감사합니다. ^^

rosa 2007-06-18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까 말까 망설이다 서점에 서서 봤는데요. sbs스페셜 탓인지 별로 감흥이.. --; 오랜만에 시내 나가서 책 뒤적이는 재미는 좋았습니다. ^^

에로이카 2007-06-19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osa님 그러셨군요. 그 다큐멘터리를 봤다면, 이 책을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알라딘 덕인지, 요즘은 서점에서 책을 뒤적일 일이 전혀 없군요. 더운 여름 즐겁게 보내시기를.. ^^
 
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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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로 강박, 불안감 등을 안고 산다. 때로는 그 강박과 불안감을 야기하는 사태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혹은 단순히 싫어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대상에 몰입함으로써 위안감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해야할 일을 미루면서 딴 일에 몰두한다고 해도 삶의 궤도를 완전히 바꾸지 않는 한, 원래 그 해야할 일, 진도가 나가야 하는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그 몰입의 성과가 주는 위안이란 금새 초라해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정작 해야할 일은 다른 대상에 몰입해 있는 순간에도 나의 뒤통수를 끊임없이 „“아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대체적인 몰입 행위가 끝이 났을 때에도 그 눈길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면 다른 몰입대상을 찾게 될 것이고, 이러한 강박회피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친 강박과 불안에 시달리는 것도, 그 반대의 강박-불안로부터의 지나친 회피도 어느 정도가 넘어서면 정신질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질환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소 주관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 불안함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사회생활을 함께 해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정도로까지 발전할 경우, 대체로 의사들은 정신질환 판정을 내리는 것 같다. 물론 정신질환이 아니라 성격이상인 경우에도 다른 사람들과 생활하는 게 힘들 수 있고,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약물 치료가 가능한 것은 확실히 정신질환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정신질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으로 점프할 수도 있겠다.

 

비타민 주사라는 위약(placebo) 처방만으로 환자들을 진료하는 이라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공중그네]는 이 애매한 경계에 있는 환자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도 일종의 유사-정신질환을 갖고 있고, 자신의 불안함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그 불안의 근거를 회피하지 말고,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름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 내에서 주변으로부터 인정받던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신감을 잃게 되고, 이라부를 찾아온다. 환자들이 보기에도 별로 미덥지 못한 이라부는 환자들의 전문 영역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보이며, 아이 같은 순진무구함과 열정으로 도로 표지판에 장난낙서를 하고, 공중그네에 도전하며, 소설을 쓰겠다고 난리를 친다. 이라부는 환자가 갖고 있는 것 (전문성)을 갖고 있지 못하지만, 그들에게는 없는 것(자신감, 즐거움,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움)으로 충만하다. 분명 저자는 독자들이 이라부가 아닌 환자들에게 감정이입할 것을 예측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 환자가 갖고 있는 것 (전문성)이 내게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난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의 좌절을 마주하기가 싫기 때문에 그 불안과 강박을 회피하는 쪽을 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문득 든 생각은 이거다. 불안과 강박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선택해보면 어떨까? 그것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문제는 하기 싫은 일상의 과제에 전력하는 것을 선택했을 때 그것이 불안과 강박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것들자신감, 성취감, 도전정신, 즐거움을 갖는 것 같다. 그래.. 그래보자..

 

책은 재미있다. 그렇다고 별 대단한 내용이 있거나 그렇지는 못하다. 책을 읽고 나서는 나오키상이 그렇게 대단한 상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까지 했다. 지하철에서 시간 떼우며 읽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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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7-06-08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박회피, 저 부르셨어요? ㅎㅎ '공중그네' 리뷰마저도 에로이카님이 쓰시니 진지한 레포트가 되네요.^^ 그래도 지하철에서 책 읽는 재미를 되찾으신 게 좋아보여요!

에로이카 2007-06-08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나어릴때님도... 새삼 반갑네요.. 쓰다보니 좀 이상한 글이 되어 버렸어요.. 이런 책을 읽은 것은 하도 오랜만이라.. 앞으로는 자주 보겠지요..
 
영화로 읽는 세기말의 역사 - 밀레니엄총서 1
신채호 지음 / 바다출판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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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가수는 오랜만에 들고온 앨범에서 노래했다. “언제나 영화처럼.” 지금은 끊임없이 반복되던 이 구절 외의 다른 가사들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가사가 끊임없이 반복되어도 노래는 끝나기 마련이다. 사실 언제나 영화처럼살고 싶다는 꿈은 영화도 노래처럼 결국은 끝나고 만다는 사실에 기반해있다. 내게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의 기준은 아주 단순하다. 영화가 끝나고,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떠나지 못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고, 그렇지 않은 영화는 그냥 그런 영화다.

 

이 책에는 아주 오래전 극장에 그렇게 끝까지 앉아 모든 게 다 끝나고 환해지는 조명에 서둘러 눈물을 훔쳐야 했던 추억의 명화들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에 관해 말하지만, 영화평론서가 아니다. 사실 난 영화평론가가 쓴 영화평론들은 별로 재미가 없다. 그들은 영화의 여러 장치, 각본의 꼼꼼함, 배우들의 연기에 관해 평하고, 때로는 친분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뒷얘기들을 전한다. 이 책에 그런 얘기는 없다. 심지어 어떨 때 영화란 그저 얘기의 삽화일 뿐이다.

 

또 영화평론들은 스포일러거나 반대로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이 역력하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영화평론은 영화에 대해 말해야 하지만, 그 짜고치는 고스톱판에 엉덩이를 밀어넣으려면 영화의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면 안된다.

 

이 책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CF성 평론이 아니다. 때로는 스포일러일 수는 있어도 간략한 줄거리만을 전한다. 결코 영화에 대해 주제넘게 떠들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평론가들의 몫일 뿐그저 영화가 보여준 만큼을 갖고 세상의 얘기를 전한다. 이 책은 역사책이다. 열한개의 영화가 다루어지고, 그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역사를 담담하고 간결하게, 하지만 깊이있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푸른연>, <로메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포레스트 검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간디>, <더 파워 오브 원>,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인도차이나>, <오피셜 스토리>.

 

<포레스트 검프>를 제외하고는 다 묵직한 영화들이다. 그리고 후까시 잡기 좋아하는 감독들의 영화와 달리 얘기가 꼬여있지 않고, 말하는 바가 명확한 영화들이다. 지배와 착취, 그리고 그로 인한 희생과 그에 대한 저항의 얘기들이다. 이런 숙연한 영화들을 떠올린다면, “언제나 영화처럼이라고 노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은이는 말한다. “영화는 끝났다. 그러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파워 오브 원>은 주인공이 아프리카너는 아니지만, 어쨌든 백인이라는 당시 나름대로의 삐딱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참 재미있게 본 영화였다. 수용소에서주인공 PK의 지휘에 맞춰 수천명의 흑인들이 노래하는 씬은 지금도 마음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아쌈멤마 얌멤메 아쌈멤마 얌멤메, 림보람보 림보람보 아리예 아리예뭐 이런 가사의 그 노래는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지만 그 자체로 영혼의 울림이었다. 영화는 PK가 옥스포드대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흑인해방운동에 뛰어든다는 내용으로 끝이 난다. 이 책은 그 이후 만델라의 당선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고단한 역사를 돌아본다. 역사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되지만, 그 영화의 시작 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영국인과 아프리카너’, 서로 다른 두 백인 집단 간의 갈등에 대해 들어본 바도 없었는데, 이 책은 그 갈등의 역사적 기원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초기 팽창과정과의 연관 속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들은 종종 십여년의 세월을 건너뛴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노인이 된다. 이 책은 그 건너뛴 십여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준다. <인도차이나>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 밥티스트 옆에 있던 갓난 아이 에티엔느는 다섯살 때 할머니를 따라 프랑스로 가는데, 10년 후 다 큰 청년이 되어 등장한다. 그리고는 제네바 협정에 베트민 정부 대표로 온 생모 까미유를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않는다. 이 책의 지은이는 영화에서 건너뛰어버린 시절의 살아있는 역사를 들려준다. 나치 독일에 유린당한 주권과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끈질긴 저항을 펼쳤던 프랑스라 할지라도, 2차대전 종전 이후까지 인도차이나에서는 여전히 제국주의의 면모를 바꾸지 않았다. 마치 오늘날의 이스라엘처럼 당시의 프랑스는 자신의 피해에 민감하고, 가해에 무감한 양심마비 제국주의 국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베트남에 대한 더러운 전쟁을 중지하라는 시위가 벌어졌고,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최후 결전에서 아작이 나고 베트민에 항복하고 만다.  

 

한편, 1950년대 말 흐루시초프 시대에 기숙사 생활을 하던 세 명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얘기로 시작하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20년 정도의 세월을 건너뛰고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중년을 맞이하는 지를 보여준다. 일찌감치 사람좋은 농부와 결혼했던 이는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젊은 시절 수영영웅이었던 남편은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미혼모였던 이는 신분상승의 바늘구멍을 뚫고 공장의 관리자가 된다. 영화에서 생략된 이후의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의 시기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환멸의 연속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부업을 해야 했고, 결근이 잦았으며, 근무를 땡땡이치고 상점에 갔다. 모든 소비재가 부족했지만, 보드카는 언제나 풍족했고 알콜 중독이 큰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이 깝깝한 사회주의 혁명의 후퇴 과정을 지은이는 담담하게 서술한다.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 이 책만 봤다. 원래 한 챕터만 보려고 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반나절만에 다 봤다. 마침 몇몇 영화들은 영화음악 씨디를 갖고 있어서, <원스 어폰 어 타임>이나 <포레스트 검프>를 틀어놓고 그 영화와 관련된 역사얘기를 보니, 영화도, 음악도, 글도 근사했다. 그러고 보니 괜찮은 올드팝들로 채워져있는 <포레스트 검프> 씨디는 아주 오래동안 듣지 않았었다. 5년 전 크리스마스 즈음에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었는데, 그 때 운전할 때 들었던 음악이었다. 영화음악 씨디가 없는 경우에는 비슷한 분위기의 음악을 들었다. <천지인>을 들으면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읽었는데, 역시나,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장인 <오피셜 스토리>를 읽을 때에는다소 뜬금없긴 했지만,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 아마도;;) 스페인어 씨디인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틀어놓았다.

 

어제, 그제, 연이틀 술먹고, 오늘은 반나절 동안 이 책만 봤다. 한량같이 지내는 와중에 이 책이라도 보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사실 1998년에 출판된 책이고, 제목도 근시안적이기 이를 데 없는 세기말의 역사고, 별로 잘 팔리지도 않는 것 같은데, 알맹이는 꽉 차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죽음과 사랑, 억압과 희망의 20세기 이야기인데, 이 부제가 책 내용을 더 잘 반영하는 것 같다. 지은이가 뭐하시는 분인 지 모르겠지만, 부디 다른 영화 얘기들도 좀 이렇게 써주시라겉만 삐까리번쩍한 영화평론들은 이제 쫌 짜증나고 지겹다        (2006.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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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7-05-14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쌈멤마 얌멤메 아쌈멤마 얌멤메, 림보람보 림보람보 아리예 아리예”??
에로이카 님 기억력이 참 비상하군요.
영화 <파워 오브 원> <모스크바는 눈물을...> 등 저도 재밌게 본 영화들이네요.
저자 이름 보고 다짜고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영화 이야기를?' 했다니까요.
리뷰 제목 심플하면서도 좋습니다.^^

waits 2007-05-15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와 무관하게 "언제나 영화처럼" 시절 전인권의 풋풋함이 새삼 아련하게 떠오르네요.
책 읽으시면서 나름 분위기 많이 잡으신 것 같은...^^ 재밌게 생긴 책 알려주셔서 감사!

에로이카 2007-05-15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기억력이 비상한 게 아니라, 그 노래가 너무 좋아서 OST를 구입해서 갖고 있거든요. 그 노래 제목이 Rainmaker였나 뭐 그랬어요. 그 노래가 참 좋기도 했지만, 수많은 흑인 수용자들을 백인 꼬마가 지휘하는 모습을 그렇게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어요. 그래도 좋은 영화이지요. 심플은 무슨요... 저도 로드무비님처럼 담백하면서 울림이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잘 안 되네요.

나어릴때님.. 내가 좋아하는 전인권은 딱 고 때까지인 것 같아요. 노래에 한해서는... 하긴 다른 것들 때문에 좋아했던 것은 아니고 노래 때문에 좋아했던 거니까... ㅎㅎ 읽는 책에 따라 다르긴 한데, 이런 책 읽을 때에는 음악도 들어야지요... 꼴에 폼생폼사거든요.. ㅋㅋ
 
대안없는 자본주의
요아힘 히르쉬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발전국가 이후 한국의 국가를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은 국가에 대한 근본적, 이론적 고찰들을 살펴보게 하였다. 봅 제솝의 최근 저작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제솝의 전략관계적 국가이론, 슘페터적 근로 탈민족 체제 (SWPR), 지식기반경제 (KBE) 등에 대한 그의 통찰에 무척 감탄하였다. 물론 약간의 불만과 의구심도 동반되었다. 나의 독서는 보통 아주 훌륭한 책을 읽었을 때 그 책에서의 주장이 주로 의지하고 있는 참고문헌들을 찾아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물론 예외도 있다. 맑스의 <<자본>>이나 <<요강>>을 읽고서는 그럴 수 없었다.) 제솝을 읽으면서, 그의 주장이 명시적, 암묵적으로 요아힘 히르쉬 (Joachim Hirsch)의 국가이론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솝이나 히르쉬 모두 7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맑스주의적 국가 이론의 한 우물을 파고 있는 사람들이다 (난 이런 종류의 미련한 인간들이 좋다).

 

그러나 나의 히르쉬 독서는 아주 짧게 끝날 수밖에 없었다. 1995년 이후 영어로 번역 출판된 히르쉬의 논문은 다섯 개 정도밖에 없었다. 이 책 <<대안없는 자본주의>>도 영어로는 번역되지 않았다. 이 책은 원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1990년에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국내에서는 1996년에야 번역 출판되었다. 따라서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기대했던 것은 그 어떤 첨단 이론이 아니라, 히르쉬의 최근 논의들과 그가 70년대에 참여했던 서독 국가도출논쟁 간의 매개고리를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우 만족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번역의 탓이 크다), 상당히 괜찮은 책이었다.

 

이 책은 조절이론의 틀을 통해 본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는 1부와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사회주의 정치를 살펴보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나의 본 관심은 1부에 국한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맑스주의 국가이론과 조절이론 양자를 지은이 나름대로 비판하면서 둘을 비판적으로 화해시켜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화를 시도했던 1부보다는 68 혁명의 잔상과 89년 동구 몰락으로 인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환멸 속에서 좌파 정치를 사고하는 2부가 훨씬 더 재미있고, 오늘날 이 남한 땅에서 당적 실천을 고민하는 좌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 더 많았다. 사실 2부를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 한 권 떠올랐다. 알렉스 칼리니코스의 <<역사의 복수>>. 지금 책의 내용은 거의 잊어먹었다. 그리고 또 다시 이 책을 들춰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떠올렸던 것은 역사의 종말이라는 나팔소리로 정점에 달했던 신자유주의적 반동과 잡다한 포스트주의들에 맞서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적 실천을 옹호했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히르쉬는 자신의 사상에 투철하면서도, 자신이 참여했던 국가도출논쟁(177)과 조절이론(1 2)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난 보통 싸움을 걸기 위해 하는 비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책의 뉘앙스가 들어가 있는 자아비판을, 그것이 아니라면 내부자의 비판을 신뢰한다. 히르쉬는 이러한 성찰적 비판에 기반하여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이론화를 시도한다 (1 3, 4, 5, 6, 7, 8). 90년에 출판된 책이기 때문에 그닥 새로운 내용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맑스주의와 조절이론의 관점에서 바라본 국가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기본을 확인하다는 차원에서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 책 출판 이후에도 아주 최근까지 독일어로 출간된 히르쉬의 책들이 상당히 많다. 경쟁국가 (der nationale Wettbewerbsstaat), 글로벌리제이션, 유물론적 국가이론 등에 관한 책들인데, 누가 좀 다 번역 좀 해주셨으면 좋겠다.

 

번역은 별로 안 좋다. 특히, 1, 2, 3장은 참 안 좋다. 역자가 연관이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즐겨 쓰는데, 이게 도대체 뭘 뜻하는 지 전혀 감이 안 온다. 94-95쪽에는 사회화 연관”, “행위연관”, “제도화 연관”, “조직 연관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108-9쪽에는 축적연관”, “조절연관”, “재생산연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옮긴이가 영어로든 독일어로든 이게 뭘 뜻하는 지 주를 달았어야 할 것 같다. 맞춤법도 몇 곳 틀렸고, “내전으로 번역해야 하는 것을 시민전쟁으로 번역한다든가, 영어로는 “gentrification”인 것을 지주화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v/c (100)라고 했는데, c/v라고 해야 한다. 번역이 이처럼 문제가 좀 있긴 하지만, 영어로도 번역 안 된 책을 한국어로 읽게 해준 출판사와 옮긴이에게는 감사한다. 그런데 이왕 번역출판할 거면 신경 좀 더 쓰시지명예회복을 위해 히르쉬의 최근 책들을 번역해서 내는 것은 어떠실지…?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1. 쏠 피치오토, 존 홀로웨이 엮음, <<국가와 자본>> (청사).

2. 김호기, 김영범, 김정훈 엮음, <<포스트포드주의와 신보수주의의 미래>> (한울)에 실린 히르쉬의 글 두 개.

3. 요아힘 히르쉬, “NGO, 국가의 새로운 외피: 비정부기구와 국가의 국제화”. <<월간 사회운동>> 2005 5, 6 (http://journal.pssp.org/bbs/view.php?board=journal&id=1250).

 

 

Ps.

꽤 오랜 동안 난 스스로를 온건한 사민주의자로 생각했었다. 또 요즘같은 세상에 내용없이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가르는 것은 넌센스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분법을 견지하는 이들은 어느 편에 서건 간에 보통의 경우, 스웨덴 모델과 러시아 모델을 대립시키기 일쑤였다. 100여년 전 각 나라에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되었던 상황이 자기가 살아 있을 동안, 혹은 죽은 다음이라도 언제건 (어쨌든 미래에 이 한국에서) 일어날 것처럼 떠드는 것도 못 마땅했다. 그랬는데, 이 책의 한 구절을 읽으면서 전깃불이 빤짝하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길지만 인용한다.

 

역사는 이성적인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적 생산력 수준을 기초로 해서도 부르주아 사회의 제도적 수단들인 정당, 국가, 관료제 등을 유지시키고도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인상 깊게 보여주고 있다 [번역 참 맘에 안 든다].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관계와 지배관계를 변혁하려 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지배적인 생산, 지배관계를 공고히 하려고 하는 제도적 형태들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해방적 사회변혁은 혁명가의 지도나 국가 폭력에 의해서는 관철될 수 없다. 국가에 의해 사회가 해방될 수 있다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지배기구로서의 국가는 사회적 권력관계의 중심 또는 근원이 아니라 단지 표상이다. 국가 정치가 해방으로의 발전을 지원하거나 용이하게는 할 수 있지만 그 토대를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164).

 

이런 말을 비단 히르쉬만 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발리바르도 내가 그의 글을 챙겨보던 옛날에 이런 말을 했을터이고, 다른 사람들도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문득 이 구절을 읽다가 온건한 사민주의자로서의 스스로의 정체성 규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 나는 왜 사민주의자인가?

: 사민주의자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며,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좌파 정당을 지지한다.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강요되는 세상에서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그것이 정치적으로 드러나는 데에 있어 아무 차이가 없기 때문에 헛된 공상에 기반한 말장난일 뿐이다.

 

이것이 이전에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다. 그러다 이 구절을 읽으며 퍼뜩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1.       사회민주주의자에게는 좌파 정당의 국가권력 획득이 목표이다.

2.       사회주의자에게 좌파 정당의 국가권력 획득은 결코 목표가 아니라, 좌파 정치를 위한 기본이다. 이는 해방으로의 발전을 지원하거나 용이하게는 할 수 있지만 그 토대를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3.       그 토대를 만들기 위해 러시아의 볼셰비키들이 두었던 무리수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부르주아 반혁명의 방지라는 미명 하에 (물론 난 그들의 충심을 믿는다) 노동자당의 이름으로 노동자를 착취했던 역사의 시작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한시적으로 도입된 것이었지만, 고난의 행군 끝에 도달한 곳은 이제 쫌 살만한 세상이 아니라, 또 다른 야만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혁명 경로는 짜르 치하의 야만에서 스탈린 치하의 야만으로, 그리고 마피아의 야만으로의 긴 노정이었다.

 

만약 남한의 좌파들이 혁명 / 개량, 폭력 / 비폭력, 러시아 / 스웨덴의 이분법에 의지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구분을 사용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자 별로 없겠지하긴 말은 쉽지만, 그것을 내용있는 실천으로 바꿔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서평 쓰다가 든 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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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7-03-1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어려워요! 에로이카님은 소설은 안 읽으시나요?^^;;;

에로이카 2007-03-14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님, 제가 이렇게 재미없는 책만 본답니다. ^^ 소설 예전에 전철 타고 다닐 때는 많이 읽었는데... 그러고 보니 참 불공평한 것 같네요.. 저는 punk님 서재 가서 재미있는 것도 많이 보고 그러는데, 제 서재에는 그렇게 재미있는 것도 없고... 쩝... 앞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언제고 소설 다시 볼 날이 오겠지요..

allnaru님, 반갑습니다... 저기 가라타니 고진의 책이 책꽂이에 꽂힌 채로 저를 째리고 있네요... 언제쯤 저 책을 잡을 지 알 수 없으나, 그 때 한 수 가르쳐주십시오.. ^^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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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분석한 경제학적 연구들이 일곱 편 실려있다. 딱히 총평을 할 것은 없고 글 하나하나에 대한 정리만 하겠다.

 

양동휴(1)19세기 후반의 1차 세계화 물결과 20세기 후반의 2차 세계화 물결을 비교하고 있다. 현재의 세계화 이전에 얼마나 많은 세계화의 역사적 선례들이 존재했는가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교역된 상품은 사치품에 국한되었으며 19세기 이전에는 가격수렴이 관찰되지 않았다”(O’Rourke & Williamson, 2002)는 주장을 근거로 자신의 세계화에 대한 역사적 조망의 범위를 19세기 후반의 1차 물결과 20세기 후반의 2차 물결로 국한시키고 있다. 가격수렴을 시장통합의 증거로 삼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라는 개념이 현재와 같이 학문세계에서 널리 쓰여지는대로 국제적 시장통합의 내용을 지시할 경우, 19세기 후반 이전에서 세계화의 선례들을 찾기란 다소 무리라는 얘기이다.

그는 시장 통합 (상품시장, 자본시장, 노동시장)과 불평등, 두 측면을 통해 두 세계화 간의 비교를 시도한다 (비교는 다소 산만하다).

1.       상품시장 통합의 측면에서, 현재의 세계화는 19세기와 달리, (1) 산업 내 무역의 성장, (2) 부가가치 연쇄고리의 단절, (3) 싱가포르, 홍콩 등 초무역 경제의 등장, 그리고 (4) 저임금 제조업 수출국의 대두 등의 특징을 보인다 (Krugman, 1995).

2.       자본시장 통합과 노동시장 통합에 관한 부분은 비교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쪽에서는 다소 불명확한, 그리고 황당한 주장을 한다. 19세기 말에는 신대륙으로 노동이동과 자본이동이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발산의 동력이 되었는 데 반해, 20세기 말에는 직접투자의 비중이 늘어났기 때문에 소득수준이 수렴되었다고 한다발산되는 것은 무엇이냐? 자본주의? , 기술의 이전에 수반되는 반경향들 (이전되는 기술을 구사하는 노동의 가치 절하, 지적재산권과 같은 형태의 선진국 기업들의 독점 지대 추구 등)은 언급되지도 않는다.

3.       이런 서술들은 불평등을 다루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세계적 불평등 추세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는 기술이전과 요소가격 균등화를 통해 국가간 불평등을 감소시킨 면이 클 것이리라고 추정하면서, 불평등 심화의 원인을 선진국의 성장속도가 빨랐던 것에서 찾는다. 이처럼 선진국의 성장에 외부적인 것으로 세계화를 개념화하는데 별로 설득력이 없다.

4.       backlash를 세계화에 대한 반발이 아닌 세계화의 후퇴로 번역하는 것도 상당히 독특하다.

 

정일용(2)과 안현효(3)는 각자의 글에서 세계화와의 관련 속에서 제3세계 경제발전에 대한 주류경제학적 처방을 비판하는 실증적, 이론적 논의들을 살펴보고 있다. 둘다 대척점을 잘 정리했다. 특히 안현효가 신고전파 경제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비판하면서 기든스의 구조화이론에 주목하여 이를 제도주의적 접근과 연결시키려는 시도(88-91)가 무척 흥미로웠다.

 

박승호(4) <<좌파 현대 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에서의 관점과 문제점을 여전히 보이고 있다.

1.       다양한 좌파 이론들을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가 비판하는 이론들보다도 현실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2.       힐퍼딩의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구분, 아리기의 금융적 축적과 실물적 축적 간의 구분을 형태적 추상이라고 일축하는 부분은 사실 좀 어이가 없다. 그가 의지하고 있는 본펠트의 실체적 추상’, 곧 다양한 형태 속에 존재하는 실체, 특수성 속에 존재하는 일반성, 구체 속에 존재하는 추상이라는 개념화에 기반하여 사회 현상의 내적 연관을 밝히는 방법은 시간성 (따라서 역사)이 사상된 추상적인 이론적 공리계 내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상이한 역사적 국면을 구분하고 있는 아리기에게 그것은 형태적 추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약간 과장하자면, 이승만이나 노무현이나 남한 대통령이기 때문에 똑같다는 말과 다름 없다. 600년에 걸쳐 네 개의 축적체제 (동시에 헤게모니) 싸이클이 교체되어 온 자본주의의 역사를 분석한 아리기는 금융적 축적이 우위를 보이는 시기를 하나의 축적체제가 성숙하여 쇠퇴를 암시하는 징표로 개념화한다. 한 축적체제의 말기 징후로서 (곧 역사적 국면으로서) 금융적 축적의 우위를 설명하는 것이 어떻게 형태적 추상에 기반한 것인가? 실체적 추상을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느낌이다.

3.       18세기에는 자본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단언도 황당하다. 영국의 산업혁명(그 이후에야 비로소 맑스가 개념화한 노동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이 가능했기 때문에)을 자본주의의 출발점으로 보는 이러한 시각은 일국적 분석단위에 기반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파악하고, 유럽중심주의적이며, 산업주의적인 것이다. (사실 여기서 박승호는 월러스틴에 대한 브레너의 70년대 비판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4.       셰네의 금융 지배적인 세계적 축적체제론을 비판한다면서,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의 금융적 축적전략을 무슨 대안적 이론화쯤으로 격상시키려고 시도하지만, 정작 이론적 설명은 없고, 순 꼬투리 잡기들밖에 없다. 굳이 이론적 설명을 찾으라면, ‘자본의 도주전략에 대한 주목 정도일 것이다. 자본의 이동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의 공간적 이동spatial fix이든, 아니면 산업영역에서 금융영역으로의 영역간 이동financial fix이든)을 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본이 노동의 저항을 피해 도주하는 것으로 개념화고자 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저자의 시각의 연장인데, 자본의 이동 원인 중 노동계급의 투쟁은 많은 요인 중 하나일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자본가들이나 정권, 보수언론이 기업 못해먹겠다고 하는 이유가 강력한 노조 때문이라는 건데, 박승호 선생은 뭐라고 할까? 자신의 논지에 따르면, ‘맞다고 해야 한다.)

5.       나중에 시간 나면 한 번 해보고 싶은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의 도주를 강조하는 박승호와 자본의 포섭을 강조하는 이진경 간의 대비이다. 노동계급의 투쟁의 능동성과 이것이 자본에 끼치는 치명성을 강조하는 박승호는 자본의 도주를 이야기하고, 자본에 의한 노동과 활동의 기계적 포섭을 말하는 이진경은 프롤레타리아의 탈주에 초점을 맞춘다. 둘 다 극단적이라는 느낌이다.

 

조복현의 글(5)은 금융자유화와 금융공황의 역사와 이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을 잘 소개해주고 있다.

 

이강국(6)은 자본자유화와 경제성장 간의 관계를 둘러싼 계량경제학적 연구들 간의 논쟁점을 잘 정리하고 있다. 정리하면, 사실 별 관계 없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그는 예의 신중함으로 자본통제만을 옹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패가 심각한 나라의 경우에 때로는 자본통제가 경제에 더욱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반면, 관료의 질이 높은 나라들에서는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0). 하지만 동아시아와 같이 경제성장이 자본통제, 국내적 금융통제, 산업정책에 기초한 고부채 모델 (high debt model)’의 경우 자본통제가 경제성장에 유리했음을 밝히고 있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자본통제가 이루어지는 나라에서는 높은 부채가 경제성장을 촉진하며, 또한 고부채 국가에서는 자본통제가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자신의 실증분석을 통해 주장한다 (194-5). 그리고 이러한 경우는 동아시아의 경우 뿐만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세계 자본주의 거버넌스의 문제를 다루는 장시복(7)은 중요한 문제에 대한 기초적 논의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거버넌스에 대한 좌파적 연구가 절실한 시점에서 좋은 출발점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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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7-03-12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저도 곧... ^^

다지원 2009-07-08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대항-대학 다중지성의 정원입니다.
실례인줄 알지만 내일부터 7주간 박승호 선생님의 책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을 중심으로 한 박승호 선생님의 강좌가 개설되어 안내드립니다.

아시겠지만 박승호 선생님께서는 저작에서 조절이론, 브레너의 국제적 경쟁론, 자율주의, 개방적 맑스주의 등 최근의 좌파이론을 분석하고 새로이 재구성된 독창적인 정치경제학을 모색하고 계십니다.

강의 시간은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이며, 수강료는 7강에 104,000원, 청소년의 경우 50% 할인됩니다. 홈페이지에서 자세한 내용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daziwon.ohpy.com/227090/11

감사합니다.

다중지성의 정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