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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기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김현영·문순실 옮김 / 역사비평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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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긴 글을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 긴 글을 읽는 것은 딱 질색이다. 그런데 내 서평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얼마전에야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더 짧고, 대신 더 명확하게 쓰려고 의식적으로라도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여러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읽는 내내 정말 재미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편입되기 이전 (15세기 경부터 19세기 초까지)의 근세 동아시아 세계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점을 딱 집어 말하자면, 동아시아 세계는 (그 외연의 가변성과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들끼리 연결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긴 16세기(1450-1640)"에 출현한 유럽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움직임과도 연동하였다는 것이다(181-4, 359). 동아시아에서 은(銀)의 흐름의 변동을 추적하는 것이 이 연동의 키워드이다. 정리하면, 16세기초 은의 흐름은 조선에서 중국과 일본으로 향하였으나, 1540년대부터 일본이 주요 수출국이 된다. 여기에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을 통해 남아메리카 포토시 은광에서 채굴된 은까지 들어오게 되고, 중국은 "세계 은의 종점"이 된다. 아메리카 대륙과 달리 아시아는 유럽 세계경제와의 접촉 이후에도 바로 편입되지 않았다 (183) [cf. M. N. Pearson. Before Colonialism: Theories on Asian-European Relations, 1500-1700].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연동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 책은 그 자신의 임무를 비교적 충실히 소화해낸다. 물론 이 책은 일국을 넘어선 역사를 지향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명, 청의 중국본토와 조선의 역사를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미완의' 동아시아 각국사이지, 그 자체로 동아시아 전체사이지는 못하다. 곧 일본 이웃나라들 중 나름대로 영향이 컸던 두 지역(중국본토와 한반도)에 관한 역사일 뿐이다. 지은이들이 일본인이라 해도 일본을 중국과 조선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일본이 조선 경제를 추월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은 주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이 아쉬움과는 별도로 먼저 과연 이 질문이 성립 가능한 질문인가, 곧 일본이 전국통일을 이루기 전에는 조선보다 못 살았다는 것이 확실한 것인가 하는 문제도 매우 궁금하다.) 또 사실 조그만 나라 조선과 큰 나라 중국을 두 명의 저자가 같은 비중으로 다루면서 어떻게 동아시아 전체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구성은 일본사라는 일국사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두 주변국의 역사 서술이라는 원래 저자들의 목적에는 부합하는 것일지언정, 그 자체로서 근세 동아시아의 "있는 그대로의 역사"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할 수 있었던 저자들의 功에 비하면, 그 過는 아주 작은 것이다. 이 한계는 저자들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학자들이 앞으로 머리를 맞대고 싸우기도 하면서 힘을 모아 넘어야할 과제를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것이다. 

이 책이 내게 제시한 이후의 연구방향을 잠정적으로나마 짧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로의 편입 이전의 근세 동아시아 세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서유럽과 일본의 경우를 제외하고, 자본주의 이전 단계를 봉건제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제는 웃음거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월러스틴의 세계체계(world-system) 개념을 다소 교조적으로 동아시아에 적용한 대표적 사례는 하마시타 다케시의 중국 중심 조공무역체계론이다. 명과 청을 세계제국(world-empire)으로 보고 이의 경제적 토대를 조공무역체계로 보는 것인데, 월러스틴의 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역사적 사실들을 과도하게 단순화, 과장, 왜곡하고 있다 (reification). 하마시타에 대한 반론의 근거는 이 책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347-51쪽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모테기 도시오(茂木敏夫)의 [변용하는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1997)에 따르면, 조공국들의 구성은 위계적이기는 하지만, 내적 구성이나 중국과의 관계 모두 이질적이다. 또 한 나라가 청의 조공국이란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도 논의거리이다. 그것이 청 세계제국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청과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 어느 정도로 그 사회를 규정하였는가를 규명해야 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조공을 통해서 주고 받는 물품이 생필품이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기축적 분업(axial division of labor)이 중국과 조공국 간에 존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텐데, 적어도 조선의 경우 당시 조공은 사치품 중심이었다. 이는 월러스틴의 세계체계 구성 기준에는 못 미치는 것이다. 프랭크 식으로 사치품 교역도 소위 "상호침투적 축적"을 통해 서로 다른 사회들을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야 있겠지만, 이 주장은 당시 동아시아가 내부적으로 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이른바 "세계 체계(world system)"의 다른 부분과 연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을지언정, 동아시아 지역체계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한 명대 정화의 아프리카 원정의 중단이나 청까지 시행되었던 해금령, 조선과 일본의 쇄국 등으로 나타나는 내향적 발전 (autarky) 지향은 당시 동아시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조공체계가 당시 동아시아 국가간 체계의 상징적 위계를 보여줄 뿐, 실질적인 경제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마시타에 대한 즉각적인 반동일 수는 있어도 사려깊은 통찰이 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근세 동아시아 세계는 위계적인 국가간 체계 플러스 알파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국가간체계에서 전제되는 주권국가 간의 형식적 동등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중요한 것은 조공국마다 그 조공무역이 각국 경제를 규정하는 정도가 다 제각각이었으며, 이에 따라 통합의 정도를 달리한다는 인식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또 눈에 띄었던 것은 조선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의 서술 스타일의 독특함이었다. "중도적 해석의 추구"쯤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 듯 싶은데, 어떤 사실에 대한 기존의 양극단의 해석을 제시하고, 이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이되 단지 절충이 아닌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1)조선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인쇄혁명 같은 발전이 없었던 이유를 한자의 특성에서 찾는 부분(125-6)이나, (2) 당쟁(244), (3) 조선사회정체론과 자본주의맹아론 양자 모두를 지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강조(264)에서 두드러진다.

마지막으로 번역과 출판상의 흠에 대해 한마디 해야 할 것 같다. 번역은 무엇보다 일제시대 무성영화 변사식 말투가 무척 거슬린다. '뭐뭐했던 것이(었)다'하는 표현이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데, 손을 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194, 238, 253, 260, 261.....).  맞춤법(192쪽 밑에서 셋째줄 '빠트리다', 207쪽 '삼가하게')이나 punctuation (178, 191) 상의 실수도 보이고, 연표에서는 색깔 처리를 잘못한 것들도 보인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세계 시스템"이라는 번역어이다. 이는 일본에서 월러스틴의 world-system을 가타가나로 世界システム로 번역한 것을 이에 대해 모르는 번역자가 우리말로 중역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세계체계"라고 번역해야 옳다. 많이 팔리는 책인 것 같은데, 출판사에서 신경 좀 쓰면 좋을 것 같다.

[할 말 더 많지만, 짧게 쓰기로 했으니 여기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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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6-04-0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세계 시스템'으로 번역된 부분 읽으면서 미심쩍긴 했었는데 월러스틴의 세계체제의 번역어였군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에로이카 2006-04-08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메테우스님 추천 감사합니다.

2006-04-09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공감이론신서 26
윤소영 지음 / 공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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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개념: [자본] 난점과 공백 (67),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67),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 (68, 91, 142-143), 현실의 대상(Gegenstand) 사고의 대상(Objeckt) / concept notion (106-108), individuality (개인성) singularity (특이성) (128, 277), 자본주의적 기술진보의 편향성 (134-5, 220),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론 (143,), 자본주의적 축적의 엔트로피법칙과 네겐트로피 (149-150), 에포크 (164-5, 185, 188,) 경향적 불안정성 (191), 전방효과와 후방효과 (242), 아포리아(277), 인권의 정치 (278, 282-3), 주체화와 예속 (281, 296), 상징의 가상화 (283), R-S-I 셰마의 전도 (285),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해후 (143, 153, 287-289), 과잉결정과 과소결정 (288), 봉기와 구성 (296-8), 공산주의의 가지 역사적 형태 (302-4), 지적 차이와 성적 차이 (309-18), 네가지 차이 (318).

 

책에는 다섯 개의 강의가 본문 격으로 실려져 있고, 부록으로 뒤메닐과 레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현재성] 실려 있으며, 책의 끝에는 정운영 선생에 대한 추도사가 실려져 있다. 뒤메닐과 레비의 부록글은 윤소영 교수의 입장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좌파 경제학 비판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정독이 필요한 글이며, 책에서 가장 마음에 부분이었다. 그러나 부록과 추도사는 서평에서 제외하고 다섯 개의 강의를 통해 지은이 윤소영 교수가 펼치는 논의를 살펴보겠다. 워낙에 이말 저말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개요를 정리하고, 다음에 평을 하기로 한다. 개요는 다섯 부분으로 나눴다: 1. 역사동역학, 2. 역사적 자본주의론, 3. 이데올로기 비판, 4. 윤소영의 역사, 현실 인식, 5. 윤소영의 정치적 판단. 앞의 개요 부분, 특히 중에서도 1, 2, 3 책을 읽지 않았다면 다소 지루할 것이다.

 

 

개요

 

지은이 윤소영 교수가 책에서 포괄하는 대상의 범위는 알튀세르가 [자본] 난점(논리와 역사의 관계) 공백(이데올로기 비판)이라고 칭한 것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란 이러한 두 가지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칭하는 것이다 (67). 따라서 지은이가 스스로 설정한 과제는 난점을 어떻게 해결하며, 공백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 이다. 전자는 2강과 3강에서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론을 통해 다루어지며, 후자는 4강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구성된다. 또 지은이는 알튀세르적인 경제학 비판은 곧 그로스만의 경제학 비판을 현대화시키려는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69, 105).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알튀세르 초기의 개념을 차용해 본다면, 이중의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될 있다.

 

1.

                            일반성I                                                               일반성II                                          일반성III

난점    발리바르, 브뤼노프, 뒤메닐, 아리기         알튀세르-발리바르의 유물변증법       혁신된 그로스만적 계보

공백    스피노자, 게루, 마트롱, 바디우, 이리가레, etc.                 상동                                              인권의 정치

 

[약간의 caveats 추가되어야 한다. 여기서 일반성 III 현재 주어진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은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목표의 상이다. 이데올로기(일반성I) 과학(일반성 III) 대한 초기 알튀세르의 엄격한 구분은 무시한다. 윤소영은 구분이 비판사회학(일반성I) 경제학 비판(일반성 III), 소외론(일반성I) 이데올로기 비판(일반성 III) 간의 대조에는 적용될 있고, 이것은 알튀세르에 의해 완료된 것으로 ( 싶어하), 비판사회학과 소외론은 흘러간 옛노래 정도로 취급한다.]

 

1. 역사동역학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은 뉴턴의 동역학과 마찬가지로 운동의 법칙과 힘의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은 가속도법칙과 같은 운동의 법칙이며,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은 중력법칙과 같은 힘의 법칙이다. 그리고 양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해할 있는 행성운동법칙에 해당하는 것이 이윤율 하락의 법칙이다 (133). 뒤메닐과 폴리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은 경험법칙이 아니라 가속도 법칙과 같은 정의법칙이며, 이윤율 하락의 법칙은 행성운동법칙과 같은 경험법칙이다 (133, 138, 141). 

 

 

2.

                                운동의 법칙                                    힘의 법칙                         행성운동법칙

정의법칙         가치법칙, 잉여가치법칙            

경험법칙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         이윤율 하락의 법칙

 

 

발리바르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포섭이라는 개념을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키는데, 자본의 추상화는 가치증식과정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가리키며, 노동의 구체성은 노동과정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가리키며, 논리와 역사 양자의 결합은 역사동역학 역사적 자본주의론으로 구체화된다. 이윤율 하락의 법칙은 동역학 모델에서의 궁극적인 설명대상인 동시에, 동역학 모델 외부의 상쇄 경향과의 경계 지점이다. 따라서 역사적 자본주의론은 역사동역학 바깥에 위치해 있다. 반면, 열역학 모델은 이윤율 하락 법칙과 이에 대한 반작용 요인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150). 열역학 모델에서 자본주의의 역사는 엔트로피(비가역성) 증가의 법칙인 이윤율 하락의 법칙과 이에 반작용하는 제도적 요인의 네겐트로피(가역성) 상호작용을 통해서 설명된다. 뒤메닐은 이러한 역사동역학에 개의 동역학(부문간 경쟁, 경기순환) 추가한다.

 

지은이는 이러한 개념적 패러미터들을 정립한 , 뒤메닐과 아리기를 따라, 이윤율의 이론궤도와 현실궤도를 추적한다 (161-165, 219).

 

2. 역사적 자본주의

지은이는 1차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적 기술혁신의 역사를 대략 다음과 같이 본다 (242).

(1) 1차 산업혁명              1780년대-   : 면직물 산업,

(2) 1차 교통, 통신혁명      1850-60년대: 철도, 전신            1880-90년대: 전화

(3) 2차 산업혁명              1910-20년대: 자동차 산업

(4) 2차 교통, 통신혁명      1950-60년대: 항공, 우주산업      1980-90년대: 컴퓨터, 인터넷산업

 

위의 1에서도 나와 있듯이 윤소영은 발리바르, 브뤼노프, 뒤메닐, 아리기 등에 주로 의지하여 이윤율 하락의 법칙과 이에 반작용하는 제도라는 관점에서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고 있다. 역사동역학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금융화에 의해서 추동되는 에포크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제도의 측면에서 보았을 , 20세기 자본주의의 중요한 변화는 법인자본주의의 형성이다. 여기에서는 단계가 관찰된다 (196, 202-220): (1) 1890-1900년대의 법인혁명, (2) 1910-20년대 관리자혁명, (3) 1930-40년대 케인즈혁명.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형성된 법인자본의 다양한 제도가 해체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2차 교통, 통신혁명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리고 금융화와 법인자본주의 제도의 해체라는 측면에서 이해 되어야 하며, 여기에 9.11 이후 금융세계화와 군사세계화의 평행적 발전 (251)이라는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

 

3. 인권의 정치

발리바르에 의해 스피노자가 주목받는 이유는 마르크스에게는 공백으로 남아있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보충할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인간학에는 자체만으로는 해결할 없는 논리적 궁지, 아포리아가 존재하는데, 이는 특이성이 아닌 개인성에 기반한 인권의 정치에 의해 보충됨으로써 비로소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기능하게 된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를 대중의 공포에서 찾으며, “스피노자의 철학을 현재화하기 위해서 대중의 공포라는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를 인권의 정치라는 비철학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283). [cf. 여기서 철학과 비철학의 결합은 난점으로부터 야기된 논리와 역사의 결합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이며, 이진경이 말하는 내부와 외부 같은 것처럼 읽힌다.]

 

인권 개념은 주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양산한다. 이제 주체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시민, 시민-주체를 뜻한다. 인권의 정치, 시민권의 정치의 메커니즘이 봉기(주체화) 구성(주권적 주체로서 시민 자신에 대한 예속)이다. 인권의 정치는 바로 인간=시민이라는 등식에 더하여 자유=평등이라는 등식을 더한 것이다. 그리고 가지 등식을 선언하는 , 그것이 바로 봉기이다. 봉기적 명제를 실현하기 위한 구성(constitution, 헌법)이라는 측면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전개된 헌법의 토대가 소유인가 공동체인가라는 쟁점은 현대정치를 결정하는 첫번째 모순[소유-공동체 모순]이며,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대두는 모순의 표현이다. 그러나 모순은 지양되고 가지 새로운 모순이 등장한다. 소유 내부에서는 소유권-노동권 모순이, 공동체 내부에서는 민족공동체-계급공동체(노동자연합) 모순이 등장한다. 새로운 전개를 통해서 소유권과 민족공동체가 결합하고, 노동권과 노동자연합이 결합하면서 현대정치의 이데올로기적 형식으로서 인권의 정치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301). 결합 간의 대결, 공화주의적,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갈등이 현대정치를 특징짓는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가지 역사적 형태를 갖고 있다: (1) 기독교적 공산주의, (2) 시민적 공산주의, (3) 마르크스주의, (4) 페미니즘.

 

4. 윤소영의 역사현실인식

책의 도입 부분인 1강에서 윤소영은 1979-80년의 경제위기와 87년의 3저호황, 97년의 경제위기 등과 정권의 성격, 운동권의 흐름들을 일별하고 있다. 가장 특이한 것은 남한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박정희 정부의 1979 4 경제안정화종합시책으로까지 소급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책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Volcker Recession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이에 따라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은 남한 최초의 반신자유주의 투쟁들이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따라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해석에 대한 가치판단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일단은 무척 새로운 해석이다.

 

97 경제위기, 외환위기의 본질은 이윤율의 급속한 하락, 원인은 금융화와 재벌이다.

 

윤소영은 1981년경 시작된 미국경제의 에포크가 2012-13 정도에 종료될 것으로 파악한다 (58, 153, 158, 163-4, 185-186). 그는 1929 대공황을 전후로 해서 영국 노동당이나 독일 사민당도 집권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어쩌면 민주노동당이 2012 대선에서 집권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단다. 윤소영이 보기에, 위기에 집권한 좌파당들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리하고 공산주의적 이행을 저지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만약 2012 민주노동당이 집권한다면, 그건 축하할 일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이행을 뜻하므로 역사의 반동. 그러나 윤소영이 보기에 2010년대의 최종적 위기는 영국자본주의에서 미국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해결되었던 지난 위기와 달리, 그러한 자본주의적 이행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해후한 공산주의적 이행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순간 노동자는 대중에서 계급으로 떨쳐일어난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뀐다. 이거 뭔가? 이게 윤소영이 복원하고자 하는 그로스만의 붕괴론인가?]

 

5. 윤소영의 정치적 판단

윤소영은 여기저기서 난삽하게 자신의 정치적 판단들을 밝히고 있다.  생각나는대로 몇가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산별노조 대신 일반노조, 지역노조로 가야 한다. (2) 성매매금지법은 얼치기 페미니스트들이나 주장하는 것이다. 성노동자성을 인정해 한다. (3) 학교는 확대되어야 하고, 가족은 축소되어야 한다. 결혼이 아니라 자유결합이 좋은거다. (4) 참여연대가 하고 있는 것은 뻘짓인데, 소액주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초민족자본의 지배를 공고히 해주자는 것이다 (233-234, 236). (5) 스크린쿼터문화연대는 웃기는 거다 (297-8). (6)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주목받는 구조조정에 대한 투쟁은 금융세계화의 결과에 대한 투쟁이다. 중요한 것은 원인에 대한 투쟁, 금융세계화 자체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

 

 

 

윤소영의 아포리아를 드러내는 식으로 엄밀한 서평을 써볼까 생각하다가, 경제수학도 젬병이고, 불어도 못하며, 마르크스의 가치법칙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내가, 베토벤과 PD 음악에 대한 윤소영의 말들을 뻘소리라고 생각하는 내가, 그걸 하려다 보면 너무 피곤하고 헛물만 가능성도 있고 해서, 그렇게 거창하게 나가기로 했다. [ 사실 윤소영의 절대지에 대한 추구는 나름대로(!) 존경하지만, 절대미에의 탐닉과, 절대지와 절대미를 결합시키고, 그것을 어떤 진짜 마르크스주의자의 자격 같은 것으로 특권화하려는 것은 미안하지만 뻘짓이라고 생각한다.]

 

일단은 1강에서 나온 남한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1979년으로 소급하는 논의는 새로웠다. 일리 있다. 그런데 논의를 지배블럭으로부터 확장시켜서,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반신자유주의투쟁이라고 주장하려면 세밀한 역사서술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것은 윤소영이 그럴 마음도 없을 것이고, 그럴 능력도 될거라고 본다. 주장이 약빨이 먹히려면, 항쟁참여자들이 자신의 적을 뭐라고 규정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해서 신자유주의가 현실화된 것인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윤소영은 '협상된 이행'으로서의 문민화 과정을 이야기하지만, 신군부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본질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본다. 민주화라는 말은 나온다. 민주화에 대한 경시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으로 주류화되기 이전 전노협 시절의 남한 노동운동이 브라질이나 남아공 같은 사회운동노조주의라고 있다는 주장과도 닿아있. 그런데 브라질과 남아공의 사회운동노조주의에 대한 Gay Seidman 연구, Manufacturing Militance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지역운동과의 결합이라는 미시적 측면 뿐만 아니라, 전체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노동계급운동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것이었다. 남아공과 브라질의 경우는 노동운동이 민주화를 추동했던 반면, 87 7, 8, 9 투쟁은 6 민주항쟁이 갖고 권력 공백이라는 정치적 기회에서 터져나왔다는 점에서 남한의 노동운동은 민주화 운동의 추동자였다기 보다는 수혜자였다 ([민주노조 투쟁과 탄압의 역사] 참조). 또 90년대 중반까지 전국연합의 존재는 바로 노동운동이 운동 내부에서 헤게모니를 확립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바로 사회운동노조주의를 (정치적 방향이 아니라, 서술개념으로서) 쉽게 8-90년대 남한에 적용할 없다는 이야기이다.

 

책을 통해서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인권의 정치 , 그동안은 말로만 듣던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있었다. 구조주의적 사유에 취향이 없다. 그렇다. 이걸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구조와 주체의 양분(266-8)을 설정함으로써, 개인성과 특이성, 필연성과 우발성 끊임없는 사변적 이항대립의 늪에서 헤매다 정작 현실적 설명대상으로 돌아와서 현실적 관계들의 변화와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별로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설득하려면, 자체가 아니라 현실을 틀을 통해서 설명했을 , 얼마나 설명이 되는 지가 보여져야 한다. 윤소영이 후배들에게 기여하려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치법칙을 받아들여야 하고, 영어만 갖고는 되니까 불어도 하고, 경제수학도 잘해야 된다고 얘기하는 갖고는 안된다. ? 우리가 윤소영에게 기대하는 것은 단지 불어 잘하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안의 부분으로서 남한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 비판을 원하는 것이다. 말미(330-335) 이전에 자신이 제시했던 종속심화-독점강화 명제에 대한 현재 생각을 밝히고 있는데, 자기비판과 종속심화를 설명하는 데에 존재하는 난점이 피력된다. 그가 문제들을 딛고 신자유주의의 전개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 이론적 문제를 해명하며 화려하게 복귀할 것을 기대해본다. [이왕이면 2012년 이전에...]  

 

윤소영 선생에 대해 거는 나의 기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책 곳곳에서 발리바르와 브뤼노프 등이 전개했던 노동에 대한 자본의 포섭에 대한 이론이 개진되며, 이것이 트론티나 네그리의 사회에 대한 자본의 포섭과 대비된다 (92, 201). [이 점에서 이는 이진경이 주장한 바 있는 '기계적 포섭'과도 대비될 수 있다.] 이 틀에 따르면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라는 맑스주의적 가치론의 기본을 유지하면서도, 농민이나 (덤프트럭 운전사와 같은) 자영업자를 "자기착취 당하는 프롤레타리아"로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은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점이다. [농민의 노동자성에 대한 이 주장은 내가 알기로는 한국에서 오래전 김준보 선생이 한 적이 있다고 얼핏 들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한 글인데, 며칠전 번역되어 나온 [이윤에 굶주린 자들](울력, 2006)에 실려 있는 르원틴의 "자본주의적 농업의 성숙: 프롤레타리아로서의 농민"도 참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는 이론적, 현실적 파급력이 매우 큰 주제이다. 달리 말해, 광범위하면서도 심도있게 논쟁될 수 있고, 이론 영역을 넘어 정치 영역에도 중요한 함의를 가질 수 있는 주제다. 제대로 한 번 파고들 필요가 있으며, 윤소영 선생의 진가가 발휘될 수 있는 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구조주의적 사유에서 구조와 주체의 양분은 피치못할 추상의 폭력이다. 그런데 이러한 추상의 폭력은 윤소영의 현실 이해에 그대로 재현된다. 활동가의 입장에서는 사르트르가 옳고,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알튀세르가 옳다는 이러한분법적 현실 인식은 사르트르와 알튀세르의 모습 사이에서 열심히 투쟁하고, 나름 공부도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공부나 투쟁, 중에 하나 골라서 그것만 열심히 해라라는 말과 다름 없이 들린다. [그나저나 사르트르는 현장활동가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공부만 열심히 하는 자기 처지에 대한 정당화 의도가 엿보인. 그러나 사람들이 윤소영에게 이론외적으로 불만인 것은 그가 공부만 열심히 한다는 (훌륭한!) 사실이 아니다. 세간의 불만의 초점은 그가 인권의 정치 얘기하면서도 지극히 반정치적인 냉소만을 보인다는 것에 맞춰져 있. 윤소영 선생이 그렇게 좋아하는 혁명의 비극적 숭고성은 베토벤 들으면서 눈물 흘리는 순간이나, 자유결합을 실천하는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봉기의 순간,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카이로스적 순간에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의 조직을 위해 노력하는 크로노스의 일상적 순간에 존재할 것이다. 거기에는 냉소가 아니라 열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인민주의에 대한 거부가 정치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운영 선생은 윤소영이 過識하다고 했단다. 윤소영 선생의 냉소는 어쩌면 자신의 과식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자기방어기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윤소영은 지적 차이를 결국에는 소멸되어야 것이라는 의미에서 노동과 자본 간의 대립과 같은 적대적 모순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설정해놓은 일반성 III, 그로스만적 전통(붕괴론) 복원과 관계되어 있다. 동시에 알튀세르적 의미에서의 이론적 실천의 특권화, 자기정당화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윤소영은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의 순간이라는 카이로스적 관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153, 344). 자본주의적 이행과 공산주의적 이행 간의 충돌이라는 이 세계관은 좀 다르긴 해도 월러스틴의 것과 유사하다. 어디 2012년을 한 번 지켜보자. 그리고 그 이후 윤소영 선생이 뭐라고 하는지도...

 

 

사족

 

  책은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강의를 녹음한 것을 다시 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치고는 중구난방이라는 느낌이다. 지은이의 잘난척과 뒷談話는 재미없는 강의 들으면서 졸고 있는 학생들 분위기 환기 차원에서는 약빨이 먹혔을 몰라도, 그것을 활자로 접해야 하는 독자에게는 흐름을 끊는 것이다.부르디외와 라뒤리가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나, 박현채 선생이나 문익환 목사 같은 고인들도 속으로는 PD 옳다고 생각했다는 등의 야부리를 듣자고 독자들이 윤소영의 책을 사보는 아니다.  강의 도중 번번히 나오는 과천연구실에서 나온 책광고들도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차라리 참고문헌들을 각주처리해서 쪽수까지 알려주는 지은이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강의녹취록이 아니라 다음번에는 좀더 제대로 , 이두가 아니라 한글로 쓰여진 제대로 책을 있기를 기대해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자: 92 밑에서 7 : 트론트 -> 트론티

 

 

궁금한

1.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은 경험법칙인가, 정의법칙인가, 혹은 양자를 매개하는 어떤 것인가?

2.        일반성II (유물변증법) 원칙상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일반성 I III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논리와 역사의 결합을 위해 구사되는 유물변증법과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해 구사되는 유물변증법은 동일한 것인가? 만약 동일한 것이라면,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대중의 공포) 상응할만한 마르크스의 아포리아도 동일한 방법으로 주목되는가? 혹시 난점과 공백이 마르크스의 아포리아인가?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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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az 2006-03-24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이후, 올리시는 글들 매우 고맙게 잘 읽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도 사 볼까 했는데, 워낙 정리와 비평을 잘해 주셔서 그다지 얻을 건 없는 책이겠구나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 주세요. ^^

에로이카 2006-03-24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raz님 반갑습니다. 제 글을 재미있게 읽으시는 분이 다 계시네요. 근데... 저 때문에 이 책을 안 사보시기로 했다는 건... 감히 부탁드리는 건데...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윤소영 교수 만큼 한 길 열심히 가시는 분도 드문 세상인데... 마음을 착하게 먹고, 배운다 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또 배울 게 있는 책인 것 같습니다. ^^ 지은이를 원래부터 싫어한다면 모를까.... 저도 나중에 moraz님 서재에 한번 놀러갈께요..

moraz 2006-03-24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사실 윤소영 교수 책이 5권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읽은 것은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와 '워싱턴 콘센서스'>> 밖에 없네요 -_- (그 책은 얇지만 몇 가지 중요한 조류를 소개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책은 사지만 그런데 웬지 손은 잘 안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거 사 놓고 또 안읽는거 아닌지 몰라 망설이던 차에 cophonyinme님의 글을 보니까 제가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이 들어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 배울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절대 아닙니다. :) 말씀하신대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할게요. ^^ 그리고 저는 서재에 가도 리스트 밖에 없고요. 대신 지금 다른데로 옮길까 말까 생각중인 moraz.egloos.com을 보금자리로 삼고 있어요.

2006-08-01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
박승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이 책은 박승호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지은이는 600여페이지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통해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좌파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의 제조류들을 살펴보고 있다. 아글리에타와 셰네 등의 조절이론, 네그리의 자율주의 이론, 브레너의 국제경쟁론 등이 중심적으로 비판되고 있고, 그 비판의 준거는 홀로웨이, 본펠드, 클라크 등이 주도하고 있는 “개방적 맑스주의”이다. 그런데, 저자가 살펴보고 있는 이 굵직한 입장들이 워낙에 논쟁적인 저작들을 생산해낸 덕에 실제로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이론과 입장들은 좌파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의 전체 스펙트럼을 거의 다 포괄하는 듯 싶다. 워낙에 방대한 양을 다루고 있는 탓에 제 입장에 대한 지은이의 이해의 정도가 불균등해 보인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현대 정치경제학 비판을 취미나 구색 맞추기 수준에서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본 서평은 지은이가 펼치는 방대한 문헌 검토와 비판에 대해 세세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책 두께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의 엑기스는 20페이지도 채 안되는 마지막 5장에 고스란히 정리되어 있다. 책을 통독할 수 없는데, 내용이 궁금하면 5장을 보면 되고, 시비거리를 찾고 싶으면 [디지탈 말]에 실린 정성진 선생의 서평을 보면 될 것이다.


2
본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2장을 통해 지은이는 맑스의 물신주의 비판을 강조함으로써, 좌파 정치경제학 분석에서 통상 간과되고 있는 계급투쟁의 중심성을 복권하고자 하는 야심을 밝힌다. 그는 자본이 노동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자본의 모순적 존재형태에 주목함으로써, 대부분의 좌파 정치경제학 분석의 초점에서 비껴나가 있는 계급투쟁에 초점을 맞춘다: “물신주의비판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중심적 방법론이라면, 노동가치론은 자본주의 분석과 비판의 중심 개념이자 기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동중의 추상'으로서의 가치의 자기증식운동, 즉 자본운동은 자본주의 사회를 하나의 총체로 통일시키고 끊임없이 변혁해가는 원동력으로 현상한다.” (147).

3장 전반부에서는 70년대 서독 “국가도출논쟁”에서도 인용되었던 자본주의 국가의 중립적 형태에 대한 파슈카니스의 유명한 문제제기를 매개고리로 도입하여, 방대한 맑스 저작의 독해를 통해 2장에서 형성된 물신주의 비판의 강조점을 필자가 상당히 많이 의지하고 있는 “개방적 맑스주의”의 정당화로 연결시킨다. 여기에서 지은이의 주목을 받는 개념은 “경제적 강제”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확대재생산은 그것의 ‘경제적 형태’와 정치적 형태’라는 분리된 계기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양자는 ‘경제적 강제’의 매개를 통해 상호규정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하나의 ‘유기적 체계’…로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206). 따라서 “자본축적 형태와 국가형태는 동일한 계급관계 및 계급투쟁의 두 가지 다른 표현이다” (208).

3장의 중반 이후는, “자본주의의 사회관계의 총체는 지구적, 즉 세계적 범위의 총체”(224)라는 홀로웨이의 입론으로부터 출발하여, 국제적 국가체계 내부에 존재하는 국민국가형태, 제국주의에 의한 국가체계 규정, 세계시장, 세계화 논쟁 등을 이전에 전개된 논지와 맑스와 여러 맑스주의자들(만델, 홉스봄, 본펠트, 홀로웨이)의 논지에 입각하여 두루 살펴보고 있다. 서평자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지만, 할 말도 좀 있는 부분이다.

4장에서는 본격적으로 197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의 역사적 전형에 대한 좌파적 분석들, 즉 브레너, 조절이론,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개방적 맑스주의(, 그리고 이젠 좌파라고 하긴 좀 그런 카스텔까지 곁다리로) 등이 검토, 비판된다. 이를 통해 지은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 형태의 네가지 주요 특징을 다음과 같이 꼽는다 (627-8).
1. 자본의 유연화, 세계화 공세는 ‘지구적 자본’의 출현으로 표현되고, 자본간 경쟁의 중층적 형태를 통해 과잉설비, 과잉생산의 조건을 형성한다.
2. 자본의 일방적 우위의 계급 역관계가 부과하는 노동자계급의 궁핍화는 세계적 차원에서 수요 성장의 둔화와 저성장을 초래하며, 수출지향적 축적형태와 국민국가간 경쟁을 강제한다.
3. 자본의 유연화, 세계화 공세 및 복지국가 해체공세는 노동자계급의 저항 때문에 일정한 한계를 부과받게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통화주의 정책의 후퇴로서의 케인스주의적 신용팽창 정책의 재도입과 그에 따른 기업과 가계의 부채경제화를 초래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본의 ‘금융적 축적’ 전략을 강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4. 자본의 유연화, 세계화 공세와 복지국가 해체공세는 직접금융시장의 발달을 가져오는 한편, 자본은 유연화, 세계화 공세와는 구별되는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회피하기 위한 ‘도주전략’으로서 ‘금융적 전략’을 추구한다.
그리고 (주로 셰네에 의지하여) 다음과 같은 이론적 통찰을 도출해낸다:
“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 형태의 네 가지 특징은 신자유주의 시대 가치법칙의 역사적 현상형태에 독특한 특징을 부여한다. 요컨대 생산된 잉여가치가 수취되는 주된 형태가 ‘지구적 자본’ 에 의해 지대(地代) 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점이다” (577).


3.
돈을 주고 책을 사봐야 하는 상품구매자로서의 독자 입장에서 책 한 권에 대한 평가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가격 대비 만족도’에 의해 좌우된다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최상급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박승호 선생은 이 600여페이지의 책을 쓰기 위해 그것의 백수십 배에 달하는 독서를 했을 것이다. 지은이가 여기서 한 것처럼 맑스 원전에 대한 방대한 독서와 함께 현대 좌파 정치경제학 비판의 제 조류들을 체계적으로 한 번 정리해보겠다는 엄두를 이전?국내의 그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자신의 입장을 국독자론이든 조절이론이든 자율주의 맑스주의든 브레너의 자본간 경쟁 분석이든 서구에서 개진된 입장들과 동일시하기는 쉬워도, 이들 전반에 대한 지형도를 그림으로써 자신의 관점을 그 조감도 위에 희미하나마 위치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문자 그대로의 ‘방대한’ 독서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는 이와 비슷한 공부를 하는 동료들과 후배들의 노고를 덜어주는 고마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박승호 선생이 이 책을 통해 한 값진 일이다. 나는 이 두꺼운 책 한 권을 통독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갈수록 느끼는 거지만, 무언가를 읽고, 그것을 통해 '배운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 덕분에 이후의 공부에도 문헌 속에서 헤매는 시간을 못해도 반은 줄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책은, 만약 그것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면, 경제주의 비판이라도 경제학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정받아 단행본으로 출판될 수 있다는, 그래서 학술원에 의해 “우수학술도서”로까지 선정될 수 있다는 좋은 전례를 만들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정치적 입장의 좌우를 막론하고, 그 어떤 경제학자에 의해서 쓰여진 경제주의 비판도 본 적이 없다. 최종심급으로서의 경제영역의 우위를 표명하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영역별로 파편화된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을 총체적으로 비판하는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다른 것이다. 전자에도 훌륭한 사례가 있을터이지만, 이 책의 지은이의 입장은 후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 지은이는 전자를 수행하는 이들 중 다수와 달리,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사라진 ‘계급투쟁’의 복원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 목표는 형태 분석을 통한 물신주의 비판[그리고 이를 통해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물신화되어 현상한 것(형태)과 거기에 깃들여 있는 내용 간의 대비, 곧 사물들 간의 관계로 나타나는 것과 자본과 노동의 관계 (곧 계급투쟁)간의 대비]이 방법론적으로 충실하게 구사됨으로써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이 경제주의 비판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는 평가가 필요한 문제이지만, 그 기본 방향에 대해서는 서평자도 공감하는 바이다.

또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 어떤 정통 맑스주의자에 의해서 쓰여진 일국적 분석단위 비판도 본 적이 없다. 지은이가 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물신주의 비판의 연장이었다. 곧 ‘국민경제’를 국민국가의 ‘경제적 형태’에 대한 반작용에 의해 산출된 물신적 의식형태라고 보는 것이다 (298). 좌파 경제학 비판에 만연해 있는 일국적 분석단위에 대한 지은이의 이러한 비판은 물신주의 비판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월러스틴의 비판과 내용상 유사하다. 월러스틴은 단일정치체가 경제를 관장하는 세계제국과 달리, 자본주의는 단일정치체가 부재하며, 세계경제와 국가간체계의 조응을 통해 작동한다고 개념화한 바 있다. 양자의 유사성은 다음과 같은 지은이의 언급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는 하나의 유기적 총체를 구성하고 있고, 그것의 토대가 ‘경제적 형태’의 총체로서의 세계시장이다. 그러나 세계시장이라는 토대에 입각한 상부구조는 세계국가가 아니라 ‘국제적 국가체계’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정치적 형태’는 세계국가형태가 아니라 국민국가 형태로 총괄되기 때문이다” (289-90). 
 

[2006. 2. 14. 추기: Peter Burnham (2002). "Class struggle, states and global circuits of capital" 122쪽을 보면, 월러스틴에 대한 이 개방적 맑스주의자들의 평가를 엿볼 수 있다. 번햄은 Picciotto(1991)와 Brenner(1977)에 근거하여, "생산관계를 변화시킨 것은 무역이 아니고, 봉건제와 포스트봉건제적 생산관계 간의 모순이 세계시장과 국가형태 양자의 변화로 귀결된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 짧은 구절만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월러스틴과 브레너 간의 절충을 모색하는 듯 싶다. 절충이 아니라 종합이고, 지양이면 더 좋겠지만... 아무튼 지양의 싹을 갖고 있다고는 봐줄 수 있을 것같다. 피치오토의 글을 한 번 찾아봐야 하겠다. 박승호 선생의 이 책은 나를 이 끝없는 차연(differance)으로 이끈다. ]
[2006. 3. 1. 추기: Sol Picciotto (1991). "The Internationalisation of Capital and the International State System" 218-9쪽을 보면 브레너의 월러스틴 비판에 관한 언급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리 대단한 내용이 있지는 않다.]


4.
책이 포괄하는 제 분석의 넓이는 당연히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임에 틀림없지만, 분석의 깊이나 지은이의 독창성(그리고 지적 용기)은 사실 좀 아쉽다. 물론 서평자는 앞서 말했듯, 이 책을 읽으며 많이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가 다루고 있는 여러 비판적 분석들의 스펙트럼이 워낙 넓은 탓인지, 지은이의 이해의 정도의 불균등함, 곧 깊이의 불균등함이 여과없이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지은이는 제 비판들과 논쟁들을 살펴보면서 수시로 이에 개입하는데, 어떤 경우는 그냥 한마디 참았으면 더 낫지 않았나 싶을 때가 꽤 많았다. 비판이라기보다는 꼬투리라는 인상을 받는 곳들이 다소 있었다. 어차피 정리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는데 말이다. 또한 이 책의 본문 격인 2, 3, 4장은 모두 소결을 통해 끝나는데, 소결에서는 본문에서 논의된 바에 기반하여 무언가 진일보된 결론을 제시하지 않으며, 각 장 본문에서 이야기된 바를 몇 페이지에 걸쳐 요약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는 책 전체의 결론인 5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책 전체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을 뿐, 결론이라 할만한 무언가 새로운 말은 전혀 없다. 또한 이러한 구조는 책 전체의 유기적 연결에도 장애로 작용한다. 이 파편적 구조를 유지하는 한, 이 책은 세 개의 논문을 모아놓은 것일 뿐, 응집성을 지닌 한 권의 책이라 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다. 물론 이것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의 광대함 때문이고, 그것이 또 미덕이긴 하지만 말이다.

경제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경제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물신주의 비판을 통해 계급투쟁을 정치경제학 비판의 중심무대로 복귀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탄탄한 기반 위에서 출발한 듯 싶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우리의 이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인 얘기를 하지 않는다. 저자는 너무 신중하다. 수많은 일급 맑스주의자들의 이름이 나오며, 저자 나름대로 이들과 대결하기도 한다. 나는 지은이가 이 책의 주요비판 대상으로 설정한 세 조류에 대한 비판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증분석이 없는 탓인지, 아니면 논문과 관계되어 있는 다른 탓인지… 도무지 이 책에서는 저자가 세상에 대해 내지르는 게 없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은 추상적인 수준에서 머물고 만다. 저자는 자신이 기대고 있는 ‘개방적’ 마르크스주의가 “생산과정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 추상성과 일면성으로 인한 ‘계급환원주의’적 경향은 극복되어야 할 과제”라고 지적한다 (532). 죄송하지만, 아저씨도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로, 일국적 분석단위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지은이가 맑스의 원전 이해에 강력한 내공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신주의 비판이라는 위력적인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최초 방향 설정에서는 월러스틴이나 아리기 못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고, 결론이 나지 않더라도 대립되는 논점이 명확히 드러났어야 하는 부분, 무엇보다도 가치법칙의 작동 범위 문제나 핵심과 주변 간의 불평등 교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매우 미흡하다. 가치법칙은 원칙상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또 이들 간에 등가교환이 이루어진다는 전제 위에서 작동한다 (cf. 로스돌스키, 돕). 게다가 국민국가들의 국경은 자본주의 세계시장 내부의 상품 흐름들에게 일종의 문턱(threshold)으로서 역할한다 (cf. 그로스만, 에마뉴엘). 지은이는 이것이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논란의 여지는 무시하고) 가치법칙은 자본주의 세계시장을 그 작동 범위로 한다고 하면서, 자세한 논의는 정성진 (1984)과 이채언 (2002)을 참조하라고 각주에서 말한다. 나는 지은이가 말한대로 이 글들을 기꺼이 찾아볼 것이다. (정말 착한 독자다. 지은이가 시킨대로 한다. 난 보통 이러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다고 이 책의 완결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저자는 가치의 실증분석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그 모호한 주장 - 가치 법칙은 세계시장의 범위에서 수정, 변형되지만 관철된다 - 을 증명할 수 있는가?

저자는 종속이론이나 세계체계 분석에 대한 얕은 이해 수준을 내비친다. 저자는 종속이론이 주변국가들의 발전을 “중심/주변관계에서 부과되는 외적 제약이라는 맥락에서만 파악”하고, “그 관계의 내적 동학을 이해할 수 있게 할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218-9). 이것은 우리나라에 다양한 종속 분석이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 못해서이지, 종속이론이 그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브라질의 하위제국주의(Sub-imperialism)를 분석한 Ruy Mauro Marini의 논의나 페루를 중심 대상으로 제국주의와 배제적 주변화(marginalization)를 분석한 Anibal Quijano의 저작들을 지은이가 접해본 바가 있었다면,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아리기를 자주 언급하면서도, 그의 주저작인 The Long Twentieth Century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으며 참고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저작 이후부터 아리기의 사전에서 “반주변부”라는 단어가 사라지는데, 저자는 이를 모르는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것이야 비교적 사소한 문제들이긴 하다. 나중에라도 읽고 배우고 비판하면 되는 문제니까…. 그러나 다음 문제는 이보다는 좀 심각해 보인다. 지은이는 종속이론이나 세계체계 분석이 중심과 주변의 문제를 외적 연관으로만 파악한다고 하지만, 지은이가 의지하고 있는 홀로웨이의 헤게모니/종속 혹은 지은이의 제국주의/신(재)식민지의 이분할 역시 외적 연관을 넘어서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차이가 있다면 세계체계 분석이 더 많은 연구성과를 갖고 있는 데에 비해, 지은이나 홀로웨이의 주장은 역사적 연구가 별로 뒷받침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차이이다. 세상에 대해 얘기한 사람들의 말을 평가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지은이가 이제는 세상에 대해서 자신의 입으로 얘기하기를.... 그것을 통해서 중심과 주변의 내적 연관을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 만약 이런 작업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지은이가 세계체계 분석이나 종속이론을 외적연관에 그친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냥 흔한 야부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보자. 지은이는 셰네(Chesnais)와 강남훈을 인용하며, 신자유주의 하에서 잉여가치가 수취되는 주된 형태가 ‘지구적 자본’ 에 의해 지대(地代) 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이 주장은 4장 내에서는 좀 따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책 전체 수준에서 보았을 때에는 응집성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저자가 이 점을 좀더 신경 썼다면, 곧 맑스에게 있어 (특별)잉여가치의 이전으로서의 지대가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이전의 케인스주의 시대에는 지금과 또 어떻게 달랐고, 그것이 계급투쟁에 끼친 함의나, 반대로 계급투쟁에 의해 규정되었다 하는 식으로 했다면 어땠을까? 책 전체의 응집력은 높아지지 않았을까? 책의 한 부분에서 지은이는 (이른바 '긴 20세기'의 역사를) (1) 고전적 제국주의 시대, (2) 케인스주의 시대, (3) 신자유시대로 국면 구분을 시도하는데, 이를 좀더 발전시켜 자본/노동의 대립, 중심/주변의 대립 등이 제 국면에 따라 어떻게 다르면서도 유사하게 전개되는 지를 각 국면 간의 비교를 통해 더욱 풍부하면서도 명료하게 다루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그래도 이 책은 이 시대에 책 값하는 몇 안되는 책중 하나이다. 꽁으로 먹으려고 하지 말고, 읽고 “배운다”는 마음으로 읽으면 다 살이 되고 피가 된다고 말하면 너무 상투적인 선전일까? 하지만 사실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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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 6. 추기: 이 책을 읽은 후 이 책에서 인용된 참고문헌들 중 인상적이었던 것들을 찾아보고 있다. 그런데 지은이가 인용한 참고문헌들에서 원래 주장하는 바와 지은이의 이해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몇몇 있다.

(1) 서평 본문에서 나는 경제주의 비판과 일국적 분석단위에 대한 비판의 공을 지은이 박승호 선생에게 돌려 칭송했지만, 이는 모두 박승호 선생의 독창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박승호 선생이 "개방적 맑스주의"로부터 차용한 것으로 봐야 옳을 것 같다. 또 박승호 선생이 인용한 홀로웨이나 본펠트, 번햄 등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데, 저자가 논문의 전반부에서 방대한 맑스의 저작을 인용, 재구성한 것 또한 저자 자신의 역량이라기 보다는 이 "개방적 맑스주의"로부터 간접적 도움을 상당히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인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맑스로부터 인용한 대부분의 구절들이 똑같이 위의 개방적 맑스주의자들의 저작에 그대로 나온다.)

(2) 지은이는 만델의 Late Capitalism을 인용하면서 전자본주의적 세계시장과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맑스의 주장, 그리고 지은이가 상당부분 의지하고 있는 Werner Bonefeld가 "The Spectre of Globalization: On the form and Content of the World Market"를 통해 펼친 주장- 세계시장은 자본주의의 지상명령(categorical imperative)으로서 그 자신의 전제이자 동시에 결과이다 - 과는 모순된다. 이 점에서 지은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브레너의 70년대식 이해에 머물고 있다. 지은이가 브레너나 만델의 생각을 따를 수도 있지만, 만약에 그러려면, 그가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는 본펠트의 이해와 대결하는 과정을 책에서 전개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은이와 달리, 나는 매뉴팩쳐와 대공장산업을 前자본주의와 자본주의로 구분하지 않고 자본주의 내부의 다른 국면들로 이해하는 스위지의 견해가 보다 맞다고 생각한다.

(3) 서평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정성진(1984)과 이채언(2002)의 논문들은 저자의 논지를 뒷받침한다기 보다는 저자는 얼버무리고 넘어간 문제들을 좀더 잘 보여주고 있다. 정성진의 논문은 논문이 쓰여지던 당시까지의 국제적 불평등 교환에 대한 논쟁 구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덕택에 가치의 국제적 작동범위에 대한 서평자 본인의 이해란 대략 그 논쟁 구도 중 어느 한 편에 가까운 것이며, 그것도 아주 초보 수준이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논문이 오래된 탓에 끝에서 불평등 교환의 이론적 대안을 생산양식접합론에서 찾고 있는데, 정성진 선생이 아직도 그러한지 궁금하다. 요즘도 생산양식접합론 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 이채언의 논문은 국제적 가치를 어떻게 계산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여기에 환율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고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채언 선생이 착취를 이해하는 방식 - 착취는 등가교환"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며, 등가교환"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것 -은 다소 혼란스럽다. 무엇보다도 이는 착취라는 개념이 포괄하는 범위를 지나치게 확장시켜, 모든 것을 지시함에 따라 더이상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비개념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또한 이는 잉여가치의 착취와 잉여가치의 이전 양자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다른 한편, 여기에서 이채언은 가치법칙이 세계시장의 범위에서 수정되어 관철되는 경우와 본질적으로 변형되어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를 구분하는데, 박승호 선생의 주의는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박승호는 그냥 애매하게 정성진, 이채언 두 훌륭한 맑스주의자들이 여기에 대해 살펴본 좋은 논문들이 있고, 그것을 보면 되는데, 거기에 따르면 가치법칙은 일국 수준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시장 범위에서도 수정되건 본질적으로 변형되건 작동한다더라 하는 식의 안이한 처리를 하고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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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marx 2006-12-02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실함의 면에서 훌륭한 저자에 훌륭한 서평자시군요. 600쪽이라는데 펴보고 재밌으면 어쩌나 걱정되는군요.

에로이카 2006-12-03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나름 재미있게, 또 열심히 봤어요. 그런데 만약 지금 다시 서평을 쓰면, 좀 다르게 쓸 거 같네요... 그래도 현대정치경제학비판 제조류에 대한 좋은 소개서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와 제국주의
남구현 지음 / 한신대학교출판부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책은 1993년에 완성된 남구현 교수의 박사논문의 일부를 10년도 지난 2004년에 번역 출판한 것이다. 지구화에 관한 마지막 장은 2003년에 새로 쓰여졌다고는 하나, 귀담아들을 만한 주장이 있지는 않다.

 

저자는 가치, 잉여가치, 자본, 계급, 국가, 제국주의로 확장되는 범주적 발전 방법론을 적용하여 국가와 제국주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엄밀하게 규정하고자 시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논문 심사시에는 동구의 정통 맑시즘과 서구 맑시즘의 한계를 뛰어넘을 있는 새로운 이론적 단초를 열어주었다는 과찬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뻥에 너무 순진하게 넘어가서 책을 사고 말았다. 다음과 같은 허장성세도 눈에 거슬린다: "잉여가치의 범주를 출발점으로 '국가'와 '제국주의'의 두 범주를 발전시키고자 시도한 것은 필자가 처음이다. 이는 오로지 범주적 발전, 대립물의 통일과 반대물로의 전환,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 내부 모순과 외부 모순의 이중적 변증법 등 주로 맑스의 자본 분석에 구사되어진 변증법적인 사고로부터 배운 방법론을 적용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가능했다" (7). 남구현 선생이 처음 했다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책의 품질이나 저자의 성취를 평가할 때, 그 부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스스로 목적으로 설정한 가치로부터 제국주의로까지의 "범주적 발전"을 얼마나 잘 구성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책의 구성은 용두사미의 전형이다. 나는 책에서 읽을만한 부분은 2장밖에 없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2장과 다른 장들을 사람이 과연 동일인일까 싶을 정도이다.) 

 

-범주적 발전의 분할

일단 범주적 발전 방법론을 보자.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본] 3권의 마지막 장인 계급은 미완성인 채로 끝이 난다. 따라서 가치에서 계급까지의 범주적 발전은 힘들긴 하지만, [자본] 정성껏 읽으면 추적이 비교적 가능하다. 다른 한편, 애초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플란에 들어있던 국가, 세계시장과 해외무역, 식민지 부분에 대한 연구는 그의 생애에 불행히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40년에 걸쳐 저술된 방대한 맑스의 저작들 곳곳에국가와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통찰은 흩어져 있으며, 통찰들을 추적하여 [자본론] 같은 형태로 맑스의 국가론 제국주의론 곳에 재구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제국주의라는 자체를 맑스는 쓰지도 않았다).* 동구사회주의가 붕괴한 직후인 1990년대 초반 당시 박사 논문을 쓰던 젊은 학자 남구현 선생은 맑스 저작에 대한 열정적인 독해를 통해 바로 야심만만한 작업에 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가 구성해낸 범주적 발전을 서너 단계로 나누어 있다고 생각한다 ( 단계 구분은 서평자의 것이지, 저자의 것이 아니라는 명토박아두자). 먼저 그는 [자본] 정성껏 읽음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