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맑스주의 클리나멘 총서 3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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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래의 맑스주의>>는 그의 이전 저작인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읽어 그 맛을 한 번 본 이들이라면 알아볼 수 있는 맛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본 국물맛이 같다고, 이 책이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서 했던 것과 다름없는 얘기를 되풀이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넘어서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얘기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책에 겨누어진 비판들에 대한 이진경의 대답들을 담고 있다.

 

1년 전 쯤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읽었다. 분명 처음 그 책을 보았을 때의 감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래의 맑스주의>>는 결코 지식인의 자기과시적 저작이라 폄하될 수 없는 읽고 배울 게 많은 책이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읽었다면, 이 책은 더 쉽게 읽혀질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위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꼭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략 비슷한 얘기를 이 책에서 보다 심도 깊게 한다고 해야 할지재미로만 따지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 더 나았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보고 재미있었던 이들이나, 반대로 의구심을 가졌던 이들이 본다면 좋을 듯 싶다. 이 서평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 쏟아진 의혹의 시선에 대한 이진경의 변론(1, 2)을 먼저 살펴보고, 이 책에서 하는 새로운 이야기들(3, 4)을 본 후, 마지막으로 이진경의 내부와 외부의 구분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5).

 

 

1. 노동가치론 비판 / 착취의 재정의 / 화폐 허무주의

 

저자에 따르면, 맑스의 비판해체’ (82)이며, 비판대상의 장점을 최대화하여 대결하는 최대주의적방법 (83)이며, ‘몰입비판’, ‘변환을 반복하여 통과하는 과정(84)이며, 비판대상의 내부에서 외부를 창출해내는 것(85)이다. 그리고 맑스를 통해 비판한다는 것은 맑스의 문제설정을 (1) 오늘의 조건 위에서 다시 작동시키며, (2) 맑스 자신도 그 비판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을 뜻한다. 노동가치론에 대한 이진경의 비판은, 바로 이처럼 한편으로는 맑스를 노동가치론의 완성자가 아니라 해체자로 독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맑스의 잉여가치론을 오늘의 조건과 대질시킴으로써 해체시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맑스주의와 근대성>>, <<자본을 넘어선 자본>>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맑스의 잉여가치론을 부정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맑스주의로 간주하려는 모든 시도들(리카르디안 맑시스트, 분석 맑시스트, etc.)은 하나의 동일한 절차를 반복한다. 곧 자본주의 하에서의 착취를 가치론에 의존하지 않고 구성, 설명해내는 것이다. 이진경도 이 점에서 동일하다. 또 이 부분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비롯한 이전 저작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진경은 생산과정 외부에서 발생하는 착취에 주목한다 (97). 첫째, 그는 계급투쟁은 생산의 결과물 분배를 둘러싼 투쟁이 아니라, 활동능력과 활동 자체의 가치화를 둘러싼 투쟁이며, 따라서 생산과정 이전에 시작된다는 오래된 발리바르의 테제를 끌어들인다. 둘째, 화폐 형태를 취하는 노동자의 임금은 자본으로서의 화폐가 지속적으로 감가됨에 따라 함께 감가된다. 셋째, 자본으로부터 가치화가 배제된 활동들 - 예컨대, “가사나 공부, 자연-환경적 조건 - 은 가치화의 조건을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지불 없이 착취된다” (98). 따라서 이제 착취는 생산과정 내부의 노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 과정 외부에서도 활동 일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개념화된다.

 

그리고 이 착취 메커니즘의 근원에는 소위 화폐 허무주의”(128-149)가 놓여 있다. 맑스는 <<자본>> 1권에서 상품 일반의 관계로부터 화폐의 특수성을 도출하고, 또 그 상품 일반의 관계로부터 인간의 노동이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으로 교환되는 자본 임노동 형식을 도출한다. 그러나 이진경에게 논리 전개의 출발점은 상품이 아니라 화폐이다. “화폐는 생산물에 상품성을 부여하고, 그것이 상품으로서 상품세계 안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외적인 초월자이다. … 화폐는 상품세계의 신이다” (129). 따라서 상품의 본질은 화폐(128)이며 (맑스라면 거꾸로 화폐의 본질은 상품이라고 했겠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은 화폐를 매개로 해서만 가능”(133)하고, 시장은 화폐에 의해 자동화된 권력의 메커니즘”(142)이다. 화폐 허무주의란, 모든 상품의 가치가 초월적 지위를 지닌 화폐라는 척도를 통해 측정되며, 화폐화될 수 없는 모든 가치들은 부정되는 것을 뜻한다. 

 

 

 

2.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 / 활동의 기계적 포섭과 사회적 잉여가치

 

그런데 사실, 이진경의 입장이 애매한 부분이 있다. 맑스의 잉여가치론은 (변증법적으로?) 부정되지만, 그렇다고 잉여가치라는 개념 자체를 팽개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맑스의 관계적 개념화가 무시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맑스의 개념들 위에서 새로운 잉여가치 범주들을 추가한다. 간단히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에 의한 포섭                         역사적 계기                     기계화의 계기               잉여가치

(1)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     자본주의 성립 (16세기)                                  절대적 잉여가치

(2)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     산업혁명 (19세기 이후)    육체노동의 기계화     상대적 잉여가치

(3) 자본에 의한 노동의 기계적 포섭     자동화 (1970년대 이후)    정신노동의 기계화     기계적 잉여가치

(4) 자본에 의한 활동의 기계적 포섭     정보화 (1970년대 이후)    결합노동의 기계화     사회적 잉여가치

 

(1), (2)는 맑스의 개념화이고, (3), (4)는 이진경의 추가적 개념화이다. 특히, (4)는 이 책에서 새로 추가된 내용이다. 이진경은 위에서 착취를 잉여가치론에 기반하지 않은 채 설명하지만, 동시에 여기서는 그 자신의 잉여가치론에 기반하여 착취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제까지 자신의 이러한 잉여가치론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반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178-184).

 

 

3. 계급과 비계급 / 프롤레타리아트와 임노동자

 

자본주의는 국가 없이 사고될 수 없다. 본원적 축적이나, 화폐, 전국시장의 창출, 절대군주의 영토 국가의 출현 등은 자본에는 국경이 없을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에는 국경이 있다”(206)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자본주의 형성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적극적 고려는 부르주아지가 귀족과의 계급투쟁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성립되었다는 식의 신화와 결별할 것을 요구한다. 역사가들의 연구는 자본주의가 성립되면서 귀족과 부르주아지는 서로 다른 계급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동질화되며,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의 보편적 계급, 자본주의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계급이다. 이에 반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비-계급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자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은 아주 약간의 예외를 무시하면, “‘인구법칙에 관한 장과 본원적 축적에 관한 장에서만 출현할 뿐인데, 이는 자본에 의해 축출되어 계급적 규정성을 상실한-계급을 뜻한다 (239) [Cf. <맑스의 계급정치 사상>, 서관모 엮음 <<역사유물론의 전화>>(민맥), 특히 216-230쪽을 보라].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주어진 규정의 획득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에서 다수적/주류적 (major) 집단이요 다수자 (majority)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규정의 부재, 척도의 부재, 혹은 수많은 이질적 규정의 혼합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란 점에서 소수적(minor) 집단이요 소수자 (minority)” (240-1).

 

 

4. 탈주 / 진지전: 아나코-코뮤니즘 (Anarcho-Communism)

 

이러한 비-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학으로서 코뮨주의는 대항-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 정치학으로서의 사회주의와 대비된다.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지를 대체하는 보편적 계급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기획으로서의 사회주의와는 달리 코뮨주의는 전 사회적 차원에서 노동자나 인민을 하나의 계급으로 구성하고 통합하려는 게 아니라 계급 자체의 해소를 추구한다” (253). 이러한 의미에서 이진경이 말하는 코뮨주의는 아나코-코뮤니즘정도로 생각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의문은 이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두 전략 - 곧 진지전과 탈주 양자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차이의 정치학을 통해서 이진경이 말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 구체적 연대이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이진경은 그가 그토록 예찬했던 몰입, 비판, 변환으로서의 맑스의 비판을 따르지 않고, 어설픈 거리두기” (84)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옛날에 했고, 감옥까지 갔다 왔으니, 몰입은 할만큼 했다는 것인가? 나는 여전히 탈주보다는 진지전이 더욱더 필요하다고 본다. 미안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저자가 뜻한 바만큼 탈주전략이 불온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진경의 탈주가 더욱더 불온해지기를, 하지만 또 동시에 진지전에 대해 다시 사고해주기를 감히 바란다. 이진경은 기동전의 시대에서 탈주의 시대로 점프하면서, 현재 진지전을 펼치고 있는 이들을, 과거 노동계급(LC)” 시절 자신의 실천의 구태와 동일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가 마지막 장에서 펼치고 있는 토니 모리슨의 소설에 나오는 두 가지 종류의 콤뮨, 곧 루비와 수녀원 공동체의 대비는 약자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계--존재는 공동체 내의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동체들과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공동체 하나하나, 다른 국가들과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구성하는 국가들 하나하나에도 적용될 수 있다. 나는 타자의 타자로서, 곧 나라는 세계--존재는 또 다른 세계--존재인 타자의 타자로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루비와 수녀원은, 진지전을 펼치는 참호 속의 병사와 포탄 속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마타하리는, 민주노동당과 수유+너머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5. 외부의 중의성

 

이 책을 읽다가 흥미로웠던 점 하나는, 이전의 저작들에서부터 무수하게 반복되는 외부라는 말이 [따라서 그것과 대칭되는 내부의 함의도] 단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외부는 (1) “연기적 조건” [<-> 하나의 원리로 환원 가능한 내부의 영역](40)이기도 하며, (2) “초험적 조건” [<-> 합목적적으로 조작가능한 대상](47)이기도 하고, (3) “클리나멘” [<-> 정해진 궤도를 운동하게 하는 관성] (49)이고, 또 때로는 (4) “단절의 지점, 변환의 문턱” [<-> 동일성의 관념체계]이다. (또 다른 의미들도 있을테지만, 지금 더 찾기 귀찮다.) 어떨 때는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선험적으로 주어지고, 또 어떨 때는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실천에 의해 구성되기도 한다. 나는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하나의 유비(analogy)로 이해했다. 곧 불완전한 언어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을 비교적 명확한 연상을 통해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 정도로 이해했는데, 이렇게 다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또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와 같은 식으로 애초의 명확한 연상을 비틀게 된다면, 과연 이 내부와 외부라는 유비가 고수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 지 다소 의심스러웠다. 하긴 내부와 외부를 대체할만한 말이 뾰족히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게 무책임하기도 하다.

 

 

딱히 결론이 없는 서평이 되어버렸다. 기대 이상까지는 아니었어도, 기대한 만큼은 읽고 배웠다. 그래도 <<자본을 넘어선 자본>>만큼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는 힘들 것 같다. 책 어디에선가 맑스의 지대론을 더 다루었어야 했는데, 여기서 못 다루었다는 아쉬움을 표하던데, 다음 저작에서 다룰 수 있으면 한다. 이 책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 그랬듯, 겉멋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보다 어렵다. 이 책은 일반독자들보다는 맑스주의자를 자처하거나, 자기가 맑스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의구심을 지닌 전문 학자들이 보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면 좋을 것 같다. 책의 이 곳 저 곳에 논쟁거리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생산적 논쟁이 가능할 듯 싶고, 또 좋은 볼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6. 8. 16. 추기]

이재영은 레디앙에서 박원순을 비판하며, '이탈 공동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개념, 바로 이 책에서 이진경 선생이 펼치는 주장에도 적용할 수 있을 듯 싶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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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24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겉멋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니 안심하고 갑니다.
꿈도 꾸지 않겠다는 거죠.
내부와 외부,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 이런 부분은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흥미롭게 읽힙니다.^^

에로이카 2006-06-2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로드무비님.. 괜히 죄송스럽네요... 근데.. 저는 이 책이 꽤 어려웠어서... 그나저나 로드무비님은 겉멋과는 거리가 머신 분인데요... ^^
 
새로운 한국경제 발전사 - 조선후기에서 20세기 고도성장까지 나남신서 384
이대근 외 지음 / 나남출판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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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낙성대경제연구소가 조선후기에서부터 97 경제위기까지 200여년에 걸치는 시기의 경제사를 다룬 것으로서, 열일곱 개의 논문이 실린 책이다. 따라서 서평 쓰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 열일곱 개의 글들 중에서도 박이택 (1), 이헌창 (4), 이대근 (5), 이영훈 (6), 장시원 (8), 김낙년 (9), 이상철 (12), 박영구 (13), 신장섭 (14), 김석진 (16) 글들은 괜찮았으며, 몇몇은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나머지 글들 중에는 쓰레기도 있다.

 

상당수의 글들이 일련의 논쟁 구도에 기꺼이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비판의 대상과 자신의 입장을 비교적 명확하게 한다. 박이택은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하며, 이의 대안으로 나카무리 사토루의 소농경제론을 채택한다. 이영훈은, 언제나 그랬듯, 수탈론을 비판하며 식민지근대화론을 옹호한다 (그러나 책에 실린 이영훈의 글은 세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실린 그의 글과는 달리 훌륭한 편이다). 김낙년은 식민지기 총독부와 박정희 정부의 유사성(‘강한 국가’) 강조하는 Woo, Eckert, Kohli 등의 서구의 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현행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의 수탈론적 기술을 문제시한다 (196-299, 304). 주익종은 허수열의 <<개발 없는 개발>> 대한 비판과 길인성의 생활수준 정체론에 대해 비판한다. 신장섭은 독점자본론(이강국) 주주민주주의론(장하성) 대해 비판적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입장과 전선, 쟁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글들은 입장 자체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일단 미덕을 갖고 있다고 있다.

 

여러 필자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관점이 일관되지는 않다. 개항기를 다룬 1-4장의 글들을 굳이 색안경을 끼고 필요는 없을 같다. 김석진의 글이나 박영구의 글은 사실 기대가 없었는데, 굳이 얘기를 하자면 중도좌파적 시각에서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고, 이상철은 대체로 정치적 입장을 배제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다소 싱거운 글을 썼다. 예외들을 제외하면 그래도 전체를 관통하는 관점이 있긴 하다. 그것은 박정희 코드이다. [ 일제강점기 하에서 형성된 반일 민족주의는 무마시키고, 박정희 시기에 형성된 경제발전 지상주의의 남한 민족주의를 전면에 배치하는 민주주의?.. 당근 무시된다노동자? 빨갱이랑 동의어다북한? 책에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   

 

인상적이었던 글들 중에서 개만 보자.

 

박이택에 따르면, 18세기 조선, 중국, 일본에는 모두 집약적 소농경제가 확립되어 있었다. “소농이란 단혼소가족 혹은 핵가족이 주로 가족 노동에 의거해서 독립된 경영을 하는 농가이고, 소농경제란 소농이 집약적 농업의 발전주체로 확립되어 있는 농업경제이다” (39). 당시 중국 강남지역에서는 소농경제가 전문화 진전이 주축이 되는 스미스적 성장과 혁신이 주축이 되는 슘페터적 성장과 결합하여  생산성 향상을 갖고 왔다. 그러나 중국의 1/10 안되는 규모를 갖고 있는 조선과 일본이 중국과 같은 규모의 시장 분업체계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조선의 경우는, 후기에 접어들면서 전기의 노비제가 해체되고 소농경영이 널리 퍼지면서 근로혁명과 시장규율을 통해 소농경제가 발전하였다 (46-7). 일본의 경우는, 중국과 조선과 달리, 영주제적 사회편성으로 도시화가 진전되었고, 재정적 물류, 상업적 물류, 그리고 농민적 물류가 하나로 통합된 상업도시망이 발달하게 된다. 이에 비해 18세기 조선 왕조는 시장배제적 재정적 물류가 중심인 재분배적 도덕경제가 집약적 소농경제와 결합하였고, 시장 경제는 농민적 물류 속에서 발전하였으나, 기본적으로 국지적 거래에 제한되어 있는 세포질형 시장경제 모습을 띠었다. 여기에서 스미스적 성장이나 슘페터적 성장을 기대하기란 무리였고, 이것이 19세기에 일본과 조선이 상이한 역사적 길을 걷게 것에 영향을 끼쳤다는 필자의 결론이다. 중국 강남지역과 조선, 일본 간의 다각적 비교가 돋보인다.

 

신장섭의 글은 재벌을 죄악시하는 사회분위기에 대한 반론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재벌의 비효율성 비민주성비판에 대한 반비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 비판의 전제로서 가정되는 신고전파적 자유시장 경제관을 비판하고 있는 점은 옳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논의는 재벌을 기업집단 (business group) 일종으로 다루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기업집단이라는 형태는 개별 기업이라는 형태에 비해 범위의 경제로부터 기인하는 여러 가지 이점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이는 보편적인 추세이지, 자체로 한국에만 특이한 어떤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1997 경제위기의 책임을 재벌에게 묻는 비판에 대해서, 필자는 그게 재벌 책임이 맞다고 답한다. 하지만 재벌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은 금융위기 관리에 실패했다는 점이지, 구조 자체의 비효율성 아니라는 것이다. 주식을 얼마 갖고 있지도 않은 총수가 전체 그룹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비판하는 주주민주주의논의는 ‘1 1’(democracy) 아니라 ‘1 1’(plutocracy) 대표되는  상법과 주식회사 제도의 기본원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주주집단이 결코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며, 여기에는 국내외 기관투자가들도 있고, 이들은 기업 자체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지만, 주식을 상호보유하고 있는 재벌계열사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기업의 운명에 책임을 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양자간의 입장 차이는 주주들의 합리적인 요구 재벌의 비합리적경영의 차이가 아니라, 내부인과 외부인 간의 갈등으로서 서로 다른 합리성의 대결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끝에서 그는 글로벌 스탠다드 거부할 것을 주장하며, 선진국 수준의 성장률을 유지해서는 결코 선진국이 없다는 멋진 주장을 한다.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재벌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필자의 시도는 참으로 궁색해 보인다. 필자가 하는 얘기란, 국가가, 그리고 사회가 나서서 재벌을 도와주고, (괜히 비효율성이다 비민주성이다 딴지 걸지 말고) 재벌은 국민경제 발전의 기관차 역할을 계속하여 선진조국 창조하자는, 그래서 다시 박정희 시대의 정신으로 살아 보세그런 얘기이다. 올해(2006)처럼 삼성, 두산, 현대자동차 총수들이 줄줄이 사고를 치고 있는 시점에서 보자면, 웃기는 얘기이다. 그들은 민주국가의 법을 1조원 상당의 돈으로 조롱하려 드는데경제위기 사고는 김영삼 정부랑 재벌이랑 쳐놓고, 뒷수습은 국민 전체, 특히 중에서도 하층에게 떠넘기고,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공적 자금으로 비자금이나 만들고, 나중에 문제되니까, 지갑 꺼내면서 얼마면 ?”하고 말하는 재벌을 경영의 투명성만 확보하면 된다는 식으로 옹호하기에는 부족하다. 그건 신장섭이 공부를 덜해서가 아니라, 재벌이 해도해도 너무했기 때문이다.  

 

Parallax view라는 말이 있다. 시차(視差) 정도로 번역하나 본데, 보는 이의 위치가 달라짐에 따라 동일대상이 다르게 관측되는 현상을 뜻한다. 나는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나온 글들을 읽기 전에는 언제나 마음을 다잡는다. 이들이 세상을 오른쪽 애꾸눈으로 본다고 해서, 나까지 이들의 글을 왼쪽 애꾸눈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이들의 주장을 이들의 진심대로 읽어주자고왜냐하면 그래야지만 뭐라도 하나 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Parallax view 경험은 자신의 시야를 넓히는 것이며, 편협을 교정하는 것이다. 글을 읽다 보면, 설득되는 부분도 있고, 며칠 있다 다시 보면 다르게 생각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자기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야지, 어떤 학적, 정치적 권위에 의해 미리 주어진 조야한 잣대를 새로 읽는 글에 처음부터 들이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가 지난 10 동안 걸로 충분하다. 분명 몇몇 쓰레기 같은 글들이 있긴 했지만, 근현대 경제사 책으로서 책은 훌륭하다. 다만, 다소 다른 관점에서 서술된 여러개의 글들이 각각 전문적인 분야를 다루고 있어서 비전공자가 가볍게 마음먹고 덤벼들 책은 아니다. (그리고 다수의 오자와 편집상의 실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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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경제연구소 멤버들 중 일부가 주축이 된 교과서 포럼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한겨레신문 비판기사

 

(1)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24976.html

(2)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24974.html

 

아래는 [레디앙]에 실린 이재영의 재벌비판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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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5-20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른쪽 애꾸눈, 왼쪽 애꾸눈, 표현이 멋집니다.^^

에로이카 2006-05-2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칭찬 감사합니다... 두 눈 똑바로 떠야지요.. @.@

waits 2006-05-20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번을 왔다갔다하다가 완독(--;;, 책도 아니고 리뷰를. 흑~)했어요. 모르는 말이 많군요, 근데... 꼭 성장을 하고 선진국이 되어야하는 건가요? 이미 벌여놓은 판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건가요? 두 눈 똑바로 떠도 모르겠다는...

waits 2006-05-20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수업 마지막 발제 주제가 '한국의 대안발전모델(?)' 중 하나고, 제가 발제인데 얼마전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특별히 다루고 싶은 게 있냐고 물으시더라구요. 물론 다들 잘 모르니 묵묵부답. 저는 전부터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오늘 광화문 오가는 길에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집어들었는데, 경제성장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고... 더 읽고 이 책에서 취할 부분이 있을까 생각해 보려구요. 전에 술자리에서 전 수업에선 대안체제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이 나왔냐고 여쭸었는데, 별 건 없다고 하더라구요. 결국 교실 안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무기력감 같은 것이나 이야기 한다는 의미 자체 외에 뭐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아마 다들 그랬겠죠? 그래도 함께 하는 고민은 중요하겠지만. 선생님께 여쭤보고 말씀 들으면 전해드릴께요.(어인 긴 댓글~;;;)

2006-05-25 0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6-05-26 0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어릴때님.. 기다리고 있을께요.. ^^

..님, 에이.. 설마 그런 오해를 할까요? 그리고 책 읽는 데에 편식이 어디 있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 읽는거지요.. 전 이렇게 재미없는 책만 읽고 살아서... 재미있는 님 서재가서 음악도 들으면서 고개도 까딱까딱, 발도 까딱까딱하며 장단 맞추고 하는 게 큰 즐거움입지요... ^^
 
동아시아의 지역질서 - 제국을 넘어 공동체로
백영서 외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명의 필자에 의해 쓰여진 책은 동아시아 공간이 역사적으로 개의 제국적 질서에 의해 교체 지배되어 왔다는 그림을 그리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 동아시아의 역사를 (1)중화제국의 華夷질서, (2)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 (3)냉전기 미제국의 아시아-태평양 질서가 교체되어 것으로 파악한다. 책의 기획의도는 일국사 서술을 넘어서 동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하되 제국중심의 시각이 아니라, 주변의 시각에서 동아시아의 제국질서의 역사적 전개를 파악함으로써, 탈중심화된 공동체로서 동아시아를 건설하겠다는 전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있을 같다. 기획의도는 노무현 정권이 후기에 접어들면서 한미동맹강화론이 재등장함에 따라 동북아균형자론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시점에서 시의적절해 보인다.

 

각론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면, 정용화의 주변에서 조공체제 김명섭의 동아시아 냉전질서의 탄생 가장 주목할만하다. 정용화는 고려와 조선에게 조공관계는 경제적 것이기 보다는 정치적 것이었다는 시각을 취하면서, 동아시아국제관계에 사대교린정책을 통해 정권의 안보를 보장받는 동시에 스스로 小中華가 되고자 했던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조공관계를 책봉을 전제로 맺어진 왕조간의 교류형식이자, “동아시아 문명국가간의 소통양식으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말 조선은 이전까지의 조공체제에 잔존하는 동시에 만국공법제 기반한 조약체제에도 편입된다. 그러나 조선은 조공체제와 조약체제의 충돌의 격류 속에 힘없이 몸을 맡기고 말았으며, (서구가 아닌) 일본의 주도로 조약체제가 조공체제를 대체하게 된다. 동아시아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동아시아 주변국의 눈으로 중심국을 보며, 주변국의 피지배층의 눈으로 지배질서를 바라본다는 삼중의 주변의 대한 강조는 특히 귀담아들을만 하다. 하지만 조선의 피지배층의 시각에서 서술이 글에서는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김명섭의 글은 미국의 설계 하에 어떻게 유럽의 식민지적 유제는 부정되었던 반면, (군사력이 아닌 자본으로 무장한) 일본 중심의 질서가 동아시아에서 온존하게 되었는 지를 다루고 있다. 정용화의 글에서만큼이나 여기서도 (공산주의 진영과의 냉전이라는) 정치적 요소가 강조된다. 그는 선진제국에 대한 열세의 만회라는 후진 제국들의 동기에 주목하는 동시에, 여기에서 나아가 서양침략세력에 대한 동방의 방패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반인종주의적 정당화를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에 보았던 Geoffrey Barraclough An Introduction to Contemporary History에서도 지적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김명섭은 안중근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승리로 크게 기뻐했다는 (내게는 나름대로 충격적인) 사실로서 관점을 뒷받침한다 (271-72). 전쟁을 현상유지국가와 현상타파국가 간의 대결로 보는 코노에 후미마로의 주장 역시 인상적이었다. 태평양전쟁은 脫亞入歐 주창했으면서도 백인우월주의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던 일본이 아시아의 수장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현상타파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2차대전후,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지역중심으로 활용했고, 일본은 과거의 영일동맹 대신 미일동맹을 통한 국가발전을 도모했다. 미국이 동아시아지역에서 추구한 상호수혜적 교환체계는 일본을 수장 기러기 하는, 이른바 기러기 편대’[雁行] 모델로 발전했다” (294-5).

 

김경일의 글은 일본을 태평양 전쟁으로 이르게 과정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여준다. 세계체제 시각에 따르면, 현상유지국가와 현상타파국가 간의 갈등은 헤게모니 국가와 헤게모니 도전국 간의 갈등으로 이해될 있다. 1930년대말까지 일본은 미국에 경제적으로는 의존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에 시달리던 일본이 1937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1939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일통상항해조약을 파기한다. 이에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를 구질서 비난하고, 미국의 대일경제제재에 대항하여 원유를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노리게 된다. 유럽본토에서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들이 독일에게 밀리는 것을 목격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남방진출을 시도하게 된다. 김경일의 이러한 설명은 유럽과 동아시아 서로 다른 지역들에서 전개된 헤게모니 도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강진아, 박태균, 백지운의 글들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강진아의 글은, 기시모토 미오와 미야지마 히로시의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와의 연결 속에서, 그리고 책의 정용화의 글과의 긴장 속에서 읽으면 특히 재미있다. 강진아는 조선이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경제적으로는 조공무역체제로부터 별로 이익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유럽과 일본이 각각 라틴아메리카의 은으로 연결된 세계경제체제, 일본 은으로 연결된 동아시아무역체제를 통해 중국의 선진상품에 중독되고 소비하면서 따라잡기형 발전을 준비해갔다 가설을 제시한다 (47-8). 그녀에 따르면, “따라잡기형 발전이라는 면에서 조선과 일본은 모두 중국을 정점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 도자기, 면직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업에서도 일본이 시기적으로 한국에 뒤처져도 발전 폭이 훨씬 컸다” (61). ? 첫째, 일본은 은이라는 지불수단이 되는 고유상품을 1530-1750년대까지 2백여년간 동아시아 시장에 지속적으로 대량공급할 있었다. 조선은 이에 필적할만한 대표상품이 없었다. 인삼수출은 상대적으로 규모에 한계가 있었다 (57). 둘째, 일본은 자급화의 과정을 국가가 계획적이고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수입대체를 이룰 있었다 (62).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강진아가 조선의 국가는 그랬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갑자기 일본의 비교대상을 유럽(62)이나 라틴아메리카(58) 둔다는 점이다. 그러다 뜬금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공체제에 강하게 편입되어 있는 국가일수록 정치적 취약성 때문에 자립적인 따라잡기형 발전을 추구할 있는 강력한 국가의 역할은 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64).

 

강진아는 주장을 자신있게 수는 없었을까? 결국 조선이 일본에 따라잡히게 것은 일본에게는 있었고, 조선에는 없었던 (<1>‘이라는 천혜의 조건과 <2> 중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국가’)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를 따져보기 전에 주장이 좀더 설득력이 있으려면, 일본이 조선을 추월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언제까지는 조선이 살았는데, 언제부터는 일본이 앞섰다 하는 식으로이것이 증명이 되어야지, 이후에 사실에 대한 설명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증명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 치더라도, 강진아의 사실에 대한 설명은 과연 옳은가도 의문이다. 또 일단 설명이 옳다 쳐도, 그것 외에 다른 설명요소들도 있을 있다. 강진아는 일본의 수입대체산업화를 마찬가지로 귀금속이 풍부했던 라틴아메리카와 비교하면서, 독립된 정치권력을 가졌던 일본이 그렇지 못했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수입대체산업화에 성공할 있었다고 한다. 강진아는 16-19세기를 하나의 역사적 시간대로 다루지만, 그것이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메이지유신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하더라도 19세기 초반 독립을 달성한 라틴아메리카에게는 단절적인 개의 시간대에 걸쳐있는 것이며, 따라서 시기 전체에 걸쳐 라틴아메리카는 독립적이지 못했다고 말할 없다. 만약 외세로부터의 독립이 중요했다면, 정치적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는 일본과 같은 수입대체발전을 이루지 못했는가도 설명할 없다.

 

여기에는 다른 답들이 존재할 있다. 스기하라 카오루는 라틴아메리카와 달리 아시아 나라들이 연쇄적으로 안행적 발전 (flying geese development) 이룰 있었던 것을 역내 무역네트웍의 발달에서 찾고 있다. 생각에는 일본이 조선을 어느 시점에서 경제적으로 추월했다는 사실이라면, 그것은 일본이 세계체제의 접경지대, 중국중심의 세계체제와 유럽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 사이의 interstitial location 이점 때문인 같다. 은광 개발 기술이나, 도자기 기술은 조선에서 전해졌다. 의류 뿐만 아니라 화약, 무기류를 만드는 데에 필수적이었던 면포도 조선에서 수입되었다. 다른 한편 포르투갈로부터 전해받은 조총이 있었기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 세력은 일본을 통일할 있었고,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침략할 있었다. 일본의 통일은 국민경제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명간 hybrid 결합해서 일본의 조선경제 추월을 가능하게 했고,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편입된 이후, 핵심부의 지위에 올라설 있게 했던 아닐까?

 

괜찮은 책이긴 했는데, 여러명의 필자의 글이 실려 있는 편집서라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는 같다. 필자들 간의 의견조율과정을 거쳤다 해도, 통일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어쩔 없는 같다. 특히 이들이 얼마나 주변의 시각에 충실하였는 지는 미심쩍다. 그래도 이러한 연구성과들이 차곡차곡 쌓여, 역사학계 안팎에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면, FTA, 독도에, 신사참배에, 일본군 성노예에, 탈북자문제에, 북미관계에, 동북3성에 바람잘날 없는 동아시아 공간에서 3중의 주변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되는 순간도 것이다. 그리고 3중적 주변의 목소리가 추구해야 바는 민족간 경쟁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의 평화공존일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책의 끝에서 이남주가 제시하고 있듯이, 국민국가 협력과 더불어, 국민국가 자체의 극복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3중적 주변 세번째 주변, 주변국의 피지배층도, 그러니까 남한의 좌파도,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건설에 관심을 기울여야 것이다.

 

[덧붙임: 그러나 또 중심의 매개 없이 주변끼리 직접 소통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돌베개, 2006)이나, 이즈츠 카즈유키(井筒和幸) 감독의 영화 [박치기(パッチギ!)]를 보고 공감했던 주변부적 삶의 아우라(aura)들은 또 얼마나 섞이기 힘든 것인가? 또 남한은, 나는, 당신은,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미명 아래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이웃을 이미 주변부화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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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05-05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시안]에 연재되고 있는 김영길의 남미 리포트 153화는 볼리비아의 자원국유화로 인해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피해가 예상되며, 각국 정상들이 이 문제 때문에 협의테이블을 갖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후에 이 문제와 관련된 국제공조가 어떻게 펼쳐지게 될지 궁금하다. 특히 이남주가 제시한 국민국가간 협력과 더불어 역내 국가간체제의 틀 자체의 변형은 이미 남미에서도 움트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주시해야할 흐름이다.

에로이카 2008-03-29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신문]에서는 주경철 교수가 '문명과 바다'라는 꼭지에 글을 올리고 있다. 2008년 3월 28일 자에는 이 꼭지의 26회로 조선의 인삼과 일본 은화의 교역에 관해 대단히 흥미로운 글을 올렸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278640.html

에로이카 2008-04-2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에 실린 또 다른 글. 일본에 어떻게 포르투갈의 화승총이 전해졌으며, 이것이 조총으로 개량되었는 지에 관한 흥미진진한 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2710.html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기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김현영·문순실 옮김 / 역사비평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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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긴 글을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 긴 글을 읽는 것은 딱 질색이다. 그런데 내 서평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얼마전에야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더 짧고, 대신 더 명확하게 쓰려고 의식적으로라도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여러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읽는 내내 정말 재미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편입되기 이전 (15세기 경부터 19세기 초까지)의 근세 동아시아 세계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점을 딱 집어 말하자면, 동아시아 세계는 (그 외연의 가변성과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들끼리 연결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긴 16세기(1450-1640)"에 출현한 유럽 중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움직임과도 연동하였다는 것이다(181-4, 359). 동아시아에서 은(銀)의 흐름의 변동을 추적하는 것이 이 연동의 키워드이다. 정리하면, 16세기초 은의 흐름은 조선에서 중국과 일본으로 향하였으나, 1540년대부터 일본이 주요 수출국이 된다. 여기에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들을 통해 남아메리카 포토시 은광에서 채굴된 은까지 들어오게 되고, 중국은 "세계 은의 종점"이 된다. 아메리카 대륙과 달리 아시아는 유럽 세계경제와의 접촉 이후에도 바로 편입되지 않았다 (183) [cf. M. N. Pearson. Before Colonialism: Theories on Asian-European Relations, 1500-1700].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연동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 책은 그 자신의 임무를 비교적 충실히 소화해낸다. 물론 이 책은 일국을 넘어선 역사를 지향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명, 청의 중국본토와 조선의 역사를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미완의' 동아시아 각국사이지, 그 자체로 동아시아 전체사이지는 못하다. 곧 일본 이웃나라들 중 나름대로 영향이 컸던 두 지역(중국본토와 한반도)에 관한 역사일 뿐이다. 지은이들이 일본인이라 해도 일본을 중국과 조선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일본이 조선 경제를 추월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은 주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이 아쉬움과는 별도로 먼저 과연 이 질문이 성립 가능한 질문인가, 곧 일본이 전국통일을 이루기 전에는 조선보다 못 살았다는 것이 확실한 것인가 하는 문제도 매우 궁금하다.) 또 사실 조그만 나라 조선과 큰 나라 중국을 두 명의 저자가 같은 비중으로 다루면서 어떻게 동아시아 전체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구성은 일본사라는 일국사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두 주변국의 역사 서술이라는 원래 저자들의 목적에는 부합하는 것일지언정, 그 자체로서 근세 동아시아의 "있는 그대로의 역사"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할 수 있었던 저자들의 功에 비하면, 그 過는 아주 작은 것이다. 이 한계는 저자들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학자들이 앞으로 머리를 맞대고 싸우기도 하면서 힘을 모아 넘어야할 과제를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것이다. 

이 책이 내게 제시한 이후의 연구방향을 잠정적으로나마 짧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로의 편입 이전의 근세 동아시아 세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서유럽과 일본의 경우를 제외하고, 자본주의 이전 단계를 봉건제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제는 웃음거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월러스틴의 세계체계(world-system) 개념을 다소 교조적으로 동아시아에 적용한 대표적 사례는 하마시타 다케시의 중국 중심 조공무역체계론이다. 명과 청을 세계제국(world-empire)으로 보고 이의 경제적 토대를 조공무역체계로 보는 것인데, 월러스틴의 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역사적 사실들을 과도하게 단순화, 과장, 왜곡하고 있다 (reification). 하마시타에 대한 반론의 근거는 이 책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347-51쪽에서도 인용되고 있는 모테기 도시오(茂木敏夫)의 [변용하는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1997)에 따르면, 조공국들의 구성은 위계적이기는 하지만, 내적 구성이나 중국과의 관계 모두 이질적이다. 또 한 나라가 청의 조공국이란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도 논의거리이다. 그것이 청 세계제국의 부분이라는 것을 뜻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청과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 어느 정도로 그 사회를 규정하였는가를 규명해야 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조공을 통해서 주고 받는 물품이 생필품이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기축적 분업(axial division of labor)이 중국과 조공국 간에 존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텐데, 적어도 조선의 경우 당시 조공은 사치품 중심이었다. 이는 월러스틴의 세계체계 구성 기준에는 못 미치는 것이다. 프랭크 식으로 사치품 교역도 소위 "상호침투적 축적"을 통해 서로 다른 사회들을 규정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야 있겠지만, 이 주장은 당시 동아시아가 내부적으로 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이른바 "세계 체계(world system)"의 다른 부분과 연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을지언정, 동아시아 지역체계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한 명대 정화의 아프리카 원정의 중단이나 청까지 시행되었던 해금령, 조선과 일본의 쇄국 등으로 나타나는 내향적 발전 (autarky) 지향은 당시 동아시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조공체계가 당시 동아시아 국가간 체계의 상징적 위계를 보여줄 뿐, 실질적인 경제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마시타에 대한 즉각적인 반동일 수는 있어도 사려깊은 통찰이 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근세 동아시아 세계는 위계적인 국가간 체계 플러스 알파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국가간체계에서 전제되는 주권국가 간의 형식적 동등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중요한 것은 조공국마다 그 조공무역이 각국 경제를 규정하는 정도가 다 제각각이었으며, 이에 따라 통합의 정도를 달리한다는 인식일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또 눈에 띄었던 것은 조선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의 서술 스타일의 독특함이었다. "중도적 해석의 추구"쯤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 듯 싶은데, 어떤 사실에 대한 기존의 양극단의 해석을 제시하고, 이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이되 단지 절충이 아닌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1)조선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인쇄혁명 같은 발전이 없었던 이유를 한자의 특성에서 찾는 부분(125-6)이나, (2) 당쟁(244), (3) 조선사회정체론과 자본주의맹아론 양자 모두를 지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강조(264)에서 두드러진다.

마지막으로 번역과 출판상의 흠에 대해 한마디 해야 할 것 같다. 번역은 무엇보다 일제시대 무성영화 변사식 말투가 무척 거슬린다. '뭐뭐했던 것이(었)다'하는 표현이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데, 손을 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194, 238, 253, 260, 261.....).  맞춤법(192쪽 밑에서 셋째줄 '빠트리다', 207쪽 '삼가하게')이나 punctuation (178, 191) 상의 실수도 보이고, 연표에서는 색깔 처리를 잘못한 것들도 보인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세계 시스템"이라는 번역어이다. 이는 일본에서 월러스틴의 world-system을 가타가나로 世界システム로 번역한 것을 이에 대해 모르는 번역자가 우리말로 중역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세계체계"라고 번역해야 옳다. 많이 팔리는 책인 것 같은데, 출판사에서 신경 좀 쓰면 좋을 것 같다.

[할 말 더 많지만, 짧게 쓰기로 했으니 여기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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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6-04-0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세계 시스템'으로 번역된 부분 읽으면서 미심쩍긴 했었는데 월러스틴의 세계체제의 번역어였군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에로이카 2006-04-08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메테우스님 추천 감사합니다.

2006-04-09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공감이론신서 26
윤소영 지음 / 공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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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개념: [자본] 난점과 공백 (67),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67),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 (68, 91, 142-143), 현실의 대상(Gegenstand) 사고의 대상(Objeckt) / concept notion (106-108), individuality (개인성) singularity (특이성) (128, 277), 자본주의적 기술진보의 편향성 (134-5, 220),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론 (143,), 자본주의적 축적의 엔트로피법칙과 네겐트로피 (149-150), 에포크 (164-5, 185, 188,) 경향적 불안정성 (191), 전방효과와 후방효과 (242), 아포리아(277), 인권의 정치 (278, 282-3), 주체화와 예속 (281, 296), 상징의 가상화 (283), R-S-I 셰마의 전도 (285),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해후 (143, 153, 287-289), 과잉결정과 과소결정 (288), 봉기와 구성 (296-8), 공산주의의 가지 역사적 형태 (302-4), 지적 차이와 성적 차이 (309-18), 네가지 차이 (318).

 

책에는 다섯 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