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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안정옥.윤상우 옮김 / 그린비 / 2005년 9월
평점 :
지오바니 아리기는 The Long Twentieth Century 서문에서 "긴 20세기"의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그 책 안에서 다루지 못했음을 말한 바 있다. 그 때 지적된 노동운동의 공백을 이 책이 메꾸고 있다고 이해해도 괜찮을 것 같다.
2003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판된 이 책은 1984년에 아리기와의 공저로 출판된 논문(“Labor Movements and Capital Migration: The United States and Western Europe in World-Historical Perspective”)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곧 20년 연구의 결실이다. 존경스러우면서도 부러운 일이다. 그 논문에서 아리기와 이 책의 저자인 비벌리 실버는 1960-70년대 유럽을 휩쓴 일련의 노동소요들 (labor unrests)은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미국의 노동소요들과 닮아 있다는 것 (Déjà Vu)을, 또 이러한 유사성은 미국 자본의 초국적화에 상당 부분 기인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아울러, 운동의 강도(strength)나 성공 여부는 운동 세력의 이념적 급진성과는 별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한다.
이 책은 그 논문의 연장이다. 포괄대상 국가가 미국과 유럽 뿐만 아니라, 남미 (아르헨티나,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 (일본, 중국) 등에까지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섬유, 서비스, 운수 산업별로 노동소요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기술된다. 또 개념적 세련화를 통해 여러가지 유형화(typology)가 시도된다 (공간 / 기술·조직 / 제품 / 금융 재정립 (fix), 연합적 힘 / 구조적 힘 (시장교섭력 / 작업장교섭력), 맑스적 유형의 운동과 폴라니적 유형의 운동, etc.). 이 개념들 중에서 연합적 / 구조적 힘의 구분을 제외하고는, 이 책에서 처음 선보이는 것들이다. 비록 재정립 (fix)의 경우는 데이빗 하비의 개념에 기반해 있고, 맑스적 유형과 폴라니적 유형의 운동 구분은 이념형적 범주이긴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 개념들이 어떻게 노동소요의 역사적 전개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공간재정립을 다루는 2장에서는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노동의 소요에 맞서 생산설비를 해외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새로이 이전된 곳에서도 강력한 노동운동이 발생하게 됨을 보여준다. 일본의 자동차 산업은 예외로 취급되는데, 그 이유를 일본에서는 노동소요가 자동차산업이 발전하기 직전에 한번 전 사회를 휩쓸었고, 이에 따라 자본 측에서는 기술·조직 재정립의 일환으로 유효한 노동통제 전략 (산업평화와 평생고용 간의 교환, 적기생산방식, 하청 네트워크의 발달 등)을 수립하게 된 데에서 찾는다.
제품재정립을 주로 다루는 3장에서는 20세기 동안 전지구적 규모에서 펼쳐진 자동차산업 노동소요의 확산을 그 이전의 섬유산업의 노동소요 확산과 그 이후의 운수, 교육 산업에서 발생한 노동 소요의 전지구적 확산과 비교한다.
4장에서는 노동운동의 전지구적 전개가 세계정치의 제 측면(헤게모니와 세계전쟁)과 어떻게 관련되어 이루어졌는지가 살펴지고 있다. 지은이는 여기에서 세계전쟁의 동학은 전투적 노동운동의 세계적 폭발을 전쟁 이후 시기에 집중시키고 있는 데에 반해, 제품주기 동학과 결합된 일련의 공간 재정립은 소요의 진앙을 여러 시기에 걸쳐 전세계적으로 분산시키는 효과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5장에서는 보호주의와 함께 기술재정립과 제품재정립이 일련의 기술혁신이 집중되어 있는 고소득 국가에 독점이윤을 보장하고, 저소득 국가들을 이로부터 배제함으로써 세계적인 남북분할 (North-South divide)을 재생산하는 데에 반하여, 산업재배치를 통한 공간재정립은 (산업 일반의 주변부화에도 불구하고,) 이 남북분할을 침식시킨다는 일반적인 경향을 앞서의 분석으로부터 도출한다. 그렇다면 금융재정립의 역할은 무엇인가? 저자는 현재의 금융화가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님 (19세기 후-20세기 초)을 상기시키며, 금융재정립이 노동의 상품화와 국가의 탈사회화, 노동친화적 국제체제의 붕괴, 전투적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수반한다고 주장한다 [cf. 레비, 뒤메닐, 자본의 반격]. 하지만 또 이는 맑스적 유형의 운동과 폴라니적 유형의 운동 모두의 출현을 야기하며, 그 규모나 속도에 있어 전례가 없는 산업화를 겪고 있는 중국이나, 전세계적으로 갈수록 비중이 커지는 운수, 교육, 서비스 산업 등에서 대규모 노동소요가 터질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다소 희망섞인 진단을 내놓고 있다.
요약하면, 지은이가 살펴보고 있는 187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자본은 언제나 전투적 노동운동에 맞서, 네 가지 재정립 기제를 통해 위기 해소를 도모하여왔으나, 결코 그 역사적 위기들에 대한 궁극적 해결을 하는 데에는 실패해왔고, 문제를 지연시키면서 더 키워 왔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노동운동의 폭발 가능성 역시 더 커져 왔다는 것이다.
좋은 책이다. 약간의 문제제기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좋은 분류 (typology)는 그 분류를 통해 포착하고자 하는 대상 전체를 가능한 한 넓게 포괄해야 하며, 또 가능한한 범주간 상호배타성이 관철되어야 한다. 네 가지 재정립들은 이런 측면에서 약간의 곤란함을 유발한다. 곧,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 (위기의 타개를 위한) 자본의 대 노동전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자본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주노동자들을 어떤 재정립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자본을 수출하는 대신, 노동을 수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 공간 재정립? 아니면 조직재정립? 국가의 보호주의 무역정책은 무슨 재정립인가?
또, 모든 공간재정립은 자본의 이동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자본이동이 다 공간재정립은 아닌 것이다. (물론 지은이는 모든 자본이동이 공간재정립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곧 자본이 이동하는 데에는 노동의 저항에서만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얼마전 현대자동차가 미국 앨러배마에 현지 공장을 세운 바 있는데, 이것을 자본의 공간 재정립으로 볼 수는 없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이는 무역장벽 회피와 (한미 FTA 찬성 논자들이 좋아하는) 미국의 내수 시장선점 때문이었다. 물론 한국 자본의 중국 진출은 공간재정립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저항은 그것의 결정에 있어 여러 개 중 하나의 원인일 수는 있어도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또 다른 아쉬움 하나는 설명 변수로서 국가에 대한 경시이다. 물론 한 책이 모든 것을 다룰 수도 없고, 강조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기존에 나온 노동운동이나 노동체제 관련 분석에서 국가는 언제나 중심범주에 속하였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기존의 국가중심 분석에서는 보여주지 못한 다른 점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가지 분석이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국내에서 이루어진 기존의 노동운동 / 노동체제에 대한 (일국중심적) 연구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일국중심적 연구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보완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그 양자의 결합 방식은 내부와 외부의 병치가 아니라, 전체와 부분의 동시적 조망이어야 한다. 21세기 초반 한국 노동운동이 전세계적 흐름인 신자유주의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는가를 넘어서, 또 다른 나라 노동운동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넘어서, 지금 남한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싸우고, 다른 외국의 노동운동과 연대하며, 또 이 투쟁들이 향후 노동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반격에 영향을 끼치는지가 보여져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의 힘은 온전히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데이빗 하비. [신제국주의]
도미니크 레비 / 제라르 뒤메닐. [자본의 반격]
비벌리 실버 / 지오바니 아리기. "남과 북의 노동자".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