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노조 운동 20년 - 쟁점과 과제
조돈문.이수봉 외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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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7년 이후 20년에 걸치는 세월 동안 노동운동이 거쳐온 길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글 13편을 모은 책이다. 한두 개의 글을 빼고는 전반적으로 훌륭한 글들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후반부에 실려 있는 오건호와 조돈문의 글은 나처럼 노동운동(더 정확히 말하면 민주노총)의 주체와 전망에 대한 미더움이 급감하고 있는 이들의 관심을 좀더 붙잡아 두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사실 전망에 대해 더 많은 궁금함이 생기긴 했지만, 언젠가부터 증폭되어온 노동운동에 대한 냉소의 상당 부분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나의 이 냉소가 물론 어려운 과정에서 투쟁에 나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냉소는 아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무력함이 미안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모순과 착시
1987년 6월 항쟁 직후 전국에서 터져 나온 “노동자 대투쟁”은 제도정치 영역에서 확보된 민주화를 사회 전반의 영역과 개별 사업장으로 확장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곧 정치영역의 민주화가 대중투쟁을 통해 독재정권의 반응을 끌어낸 것이었다면, 노동자 대투쟁은 그 정치적 영역의 민주화를 다시 대중투쟁을 통해 확산시켜 (국가와 자본의 절대적 우위 속에서 유지될 수 있었던) 폭압적 노사관계를 민주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이 주체로 참여한 이 민주화 확장 투쟁에서 민주노조 건설은 당시 노동자들이 당면한 핵심 과제였다. 노동자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자본 측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 당시 15.7%에 그쳤던 노조 조직률은1989년 19.8%에 이르게 된다. 수치상의 변화는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그 와중에 기존 한국노총 소속 어용 노조들의 민주노조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대단한 성과였다. 그러나 89년 정점을 이루었던 노조 조직률은 이후 하강을 거듭하며, 2004년에는 11%에 이르게 된다 (354). 수치만 놓고 보아도 민주화 이전보다 더 못한 조직률이고, 내용을 들여다 보아도 민주노조 건설에 성공했던 정규직 노조들이 고용 불안 위협 속에서 비정규직에 등을 돌리고 개별 자본에 종속당한 사례들이 부지기수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민주노조의 타락은 분명히 관찰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1997년 경제위기 이후 가속화된 사회 전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었다. 신자유주의화의 시발을 언제부터 잡을 것인가는 이견의 여지가 있겠지만, 전반적인 산업구조 조정으로 인해 여성의 노조조직률은 전체 정점인1989년이 아니라 1987년 말 이미 정점(15.3%)에 도달한 후 꾸준히 하락했다는 점(강인순: 354)이나 비정규직 비중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점(김성희: 307)을 보면, 비정규직 증가와 노조조직률 하락의 문제는 민주노조 건설의 성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 경제위기 이전에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곧 87년 이후 노동운동은 민주화와 신자유주의화의 동시진행이라는 모순적 역사경로 속에 발전해 온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민중운동 진영에게나 일반 시민들에게 일종의 착시 현상을 동반하였다 (이수봉: 228; 조돈문: 463). 곧 먹고 살기는 빠듯한데, 군사독재도 무너뜨린 마당에 노동자들이 맨날 파업해서 국가경제가 거덜난다는 자본과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일반 국민들이 동조하면서 노동운동에 ‘집단 이기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게 된 것이다.

전투성 게임과 제도성 게임
199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노사관계의 제도화 경향은 국가와 한국노총에 의해 주도되었다 (김준: 88-89; 노중기: 403-405). 국가는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통제권을 새로이 확보하기 위해, 한국노총은 상실한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사정 3자 협의 틀을 필요로 하였다. 자본 측은 국가의 엄호 속에 일방적 우위 관계에 있던 노사관계를 노동 측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이 협의 틀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히 꺼려하였다. 민주노조 측은 이 사회적 합의 실험에 참여와 불참을 반복하였다. 어쨌든 전투성 게임과 함께 제도성 게임에도 노동운동이 참여하게 된 것은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성과라면 성과였지만, 결과적으로 국가와 자본에게는 지배와 착취의 정당성을 새로이 확보하는 기제로 사용되었다.

제도성 게임의 장이 전무하였던 87년 당시 노동운동의 전투성 게임에 상대적으로 동조적이었던 시민들은 경제위기 이후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가속화된 사회전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더불어 진행된 일방적 정리해고에 대한 생존권 사수 차원에서 저항했던 노동자들의 전투성 게임에는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다 (조돈문: 475-476).

동원과 설득
오늘날 국가와 자본과의 수세적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국민들마저 등을 돌려버린 사회적 고립 속에서 노동운동은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1987년 당시 노동운동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와 사회 민주화라는 대중적 요구의 합치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단결된 노동자의 동원을 통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현재는 국가와 자본의 개별화 공세 속에서 연대, 단결, 조율을 달성하는 것도 어렵고 설령 이것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를 통한 노동자들의 동원이 국민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곤 한다. 조돈문(481)은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기업별 노조 체계 아래에서 전투적 노조 운동을 전개해 온 우리 민주 노조들은 ‘동원의 논리’에 익숙하지만 국민 여론을 향한 ‘설득의 논리’ 경험이 별로 없다. 따라서 국민 여론을 견인하지 못하는 노동조합의 전투주의는 보수 언론에 의해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되기 쉬우며, 성공적인 투쟁 동원의 파괴력이 자본과 정부에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시민들에게는 불안을 안겨줄 수 있고, 특히 위치적 권력(positional power)이 큰 네트워크 산업의 경우 불편함을 인내하지 못하는 시민들은 보수 언론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쉽게 호응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된 노동운동의 문제는 경험 부족과 기업별 노조체계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점은 오늘날 노동운동이 한편으로 동원의 논리에 기반한 전투성 게임을 유발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재편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책임성을 담보한 제도성 게임을 요구하는 민주화 양자 간의 내재적 모순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485-6).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신병현은 사라진 노동자 정치의 장소들을 새로이 형성해 나갈 것을, 노중기(429)는 (1)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산별노조 건설, (2) 정치세력화, (3)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연대 구축을 핵심 과제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제들은 모두 동원의 주체 형성과 관련되어 있을 뿐, 설득의 논리를 어떻게 증진시킬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함하지 않는다. (노중기는 세 가지 과제 중 정치세력화를 가장 관건적 요소로 꼽으면서, 설득의 논리를 진보정당을 통해 성장시킬 수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조돈문 식으로 하자면, 동원의 논리와 설득의 논리, 전투성 게임과 제도성 게임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사회공공성 투쟁을 통한 새로운 운동 주체 형성
이에 대한 (유일한 답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답을 포함하고 있는 유일한 글은 오건호의 글이다. 그는 개별 작업장의 노동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의 이해를 중시하는 운동으로서 사회공공성 운동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 공공적 서비스는 비록 자본주의 체제일지라도 시장과 이윤 논리에서 벗어나 생산∙공급되어야” 하며, 이 “사회공공적 영역이 시장 논리에 지배되어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저지”해야 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진보 운동의 핵심 과제로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공공적 서비스는 개인의 ‘구입 능력’이 아니라 ‘생활 필요’에 맞추어 제공되어야 한다”(384)는 그의 참으로 멋진 말은 “고타강령 비판”에서 “능력에 따른 생산과 필요에 따른 분배”의 미래 세상을 그렸던 맑스의 인식을 사회공공 서비스의 영역으로 도입하여 현재의 “시장화∙이윤화 대항투쟁의 과제로 설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현시기 노동운동이 설득의 논리를 개발하는 데에, 그리고 진보정당이 재구성을 통해 언젠가 다시 도약하는 데에 있어 사활이 걸린 과제라고 생각한다.

긴장과 약간의 아쉬움
서로 다른 지은이들의 여러 글들이 실려 있고, 상당수의 글들이 이들의 더 큰 저작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초점이 다소 다르긴 하지만, 책 전체의 짜임새는 근래 본 국내의 편집서 중에서 꽤 훌륭한 편이다. 그런데 글들마다 약간의 긴장이 엿보이기는 한다. 제도성 게임과 전투성 게임을 동시에 슬기롭게 사용해야 한다는 조돈문과 전투적 노조주의는 당시 노동운동의 합리적 대응 결과였다는 노중기 사이에는 극한적인 의견 차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긴장을 감지할 수 있다. 또 개별 글들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김성희의 글은 비정규직의 비중 변화라는 측면에서 1980년대 중반이 결정적이었다는 중요한 주장을 제시하면서도, 주요 내용을 각주에 나온 저서를 참고하라는 식으로 넘어가는데, 너무 불친절하다. 신병현은 노동자 계급 형성 과정에서 선진활동가 문화가 노동자 대중문화와 유리되어 엘리트주의로 빠져 하위문화화되었다는 점, 그리고 노동자의 정치적 장소들이 사라졌다는 점을 잘 분석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현장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하고 새로운 정치의 장소를 형성해야 한다는 그의 결론은 다소 안이하게 느껴져서 용두사미스러웠다.

이수봉의 글은 도입부터 행간의 뜻을 읽어 달라며 필자로서 독자에게 참으로 무례한 부탁을 하더니, 다소 중구난방으로 느껴지는 글을 썼다. 전반적으로 “짱나”(238)는 글이었는데, 결론은 이거다. “정규직의 이해 관계와 결부된 사회구조 자체의 근본적 변혁, 이른바 혁명을 [정규직 노동자] 자신의 이해로 설정할 수 있다”(254)고. 물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또 민주노총 중앙과 현장 노동자 사이에 끼어 열심히 살고 있는 정규직 현장 활동가들을 탓할 마음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이수봉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이진경과 네그리 식의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여 하는 말이 고작 이거라면, 이수봉은 이진경과 네그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난 별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지만, 노동의 자본에 대한 형식적∙실질적 포섭을 넘어 “활동 일반이 자본에 의해 기계적으로 포섭”되어 (노동 과정 내에서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인간 활동으로부터 자본이 “사회적 잉여가치”를 추출한다는 이진경의 핵심 논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이진경의 논리는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를 전제하는 공공연금 조성을 요구하는 오건호의 논리와 훨씬 더 잘 부합한다. 오건호와 이수봉의 글 사이에는, 조돈문과 노중기 사이에 존재하는 실강이 아니라, 태평양 바다가 존재하는 것처럼 읽힌다. 이수봉의 요구대로 행간을 읽자면, 내가 마음이 비뚤어져서 그런지, 민주노총 중앙 책임자의 변명으로밖에 안 읽힌다. 정말 힘들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편히 앉아 투정하듯 비판하는 것이 참으로 호사스럽게 느껴져 정말 죄송하다. 그렇지만 이수봉이 요구하는 징후적 독해를 통해서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민주노총 중앙의 변명, 그리고 민주노총이 직면하고 있는 갑갑한 현실과 그의 욕망 사이의 괴리와 그것의 힘겨움일 뿐이다.

사족
나는 ‘노동해방’을 믿지 않는다. 그건 ‘천국’과 같은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언급이 맑스의 저작에 거의 안 나오듯, 천국에 대한 언급도 성경에 거의 안 나온다.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깡패짓을 하고 있는 일부 광신도들을 시민들은 외면한다. 혹 “노동해방” 구호도 그렇지 않을까? 사람들은 유한자로서 인간의 한계를 느낄 때 신을 찾고 종교에 귀의한다. 혹은 정말 훌륭한 인품을 지닌 종교인을 만났을 때 그를 따른다. 노동자들은 나약한 개별 노동자로서 억울함에 처했을 때 단결하여 계급 운동을 전개한다. 혹은 훌륭한 노동운동가를 접했을 때, 노동운동에 대한 의혹을 조금씩 거둔다. 천국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고, 노동해방이 있기 때문에 노동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천국이나 노동해방은 내부자의 동원에는, 특히나 한 때 내부자였다가 동요하는 이들을 다루는 데에는 아주 약간의 효과를 얻을 지 모르지만, 외부자의 설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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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20년의 재조명 - 1987년체제와 외환위기를 중심으로
홍순영.장재철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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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 경제시스템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원근법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곧 경제시스템의 역사를 1987년과 1997년 외환위기, 이 두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세 시기로 나누고, 각 시기의 특성을 간략히 서술한 후에, 두 번째 시점(외환위기)의 전과 후를 비교한 후, 이 책의 지은이들이 기반하고 있는 입장에 따라 향후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곧 현재 시점으로 오면 올수록 서술은 상세해지고, 주장은 강해진다.

1987년 이전의 체제는 수출주도형 성장 시스템였던 반면, 1987-1997년의 체제는 경제호황 속에서 노동자들의 권리 향상으로 인한 임금 증가가 내수를 확장시켜 내수주도형∙수출주도형 시스템이었다. “이 두 시기에는 소비와 설비투자 간에 피드백 효과가 있었으며 설비투자가 소비와 수출을 매개하며 경제성장의 동인 역할을 했다” (61).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에는 “내수 부문이 위축하고 대외 환경에 영향을 받는 수출 부분의 비중이 확대”되면서, “수출과 내수 부문이 괴리되고, 소비와 설비투자의 상호 연관성이 변질됨으로써 거시경제적 안정성이 훼손”되었다 (62, 65, 128-130).

지은이들은 1990년대 이후부터 실질임금증가율이 노동생산성증가율을 상회함에 따라, 기업의 임금 비용 부담이 커져서 고비용구조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점이나, 당시에는 임금과 고용 구조가 경직되어 있었다는 점도 지적한다 (95-96, 98).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보다는 1987년 이후 임금인상이 소비지출로 바로 연결됨으로써 내수 확장에 기여하여 이전까지는 수출로만 먹고 살던 경제가, 이제는 수출과 내수의 쌍끌이가 투자와 선순환하며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점에 더 큰 강조가 놓여진다. [이 점은 한국이 80년대 중반을 거치며 유혈적 테일러주의에서 주변부 포드주의로 이행했다는 리피에츠의 관찰과 일치한다.]

다른 한편, 1990년대 중반은 OECD 가입과 WTO 출범에 따라 정부가 개방과 자유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114-6, 138). 자본거래 자유화의 일환으로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국제금융시장 접근 관련 규제가 단기간 내에 과감히 완화”되었고,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금리가 낮은 단기자금을 선호했으며, 금융당국도 외채의존 경영을 우려하여 중장기 차입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해외 자본 또한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의문시하지 않았다. 당시 S&P의 한국 국가신용등급은 AA-였다. 이처럼 쉽게 조달된 해외 자금은 기업의 대규모 투자 수요에 의해 소화되었다. 제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해외자금은 해외자금대로, 국내기업은 국내기업대로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세팅였던 셈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1997년 초부터 세 차례의 변곡점을 지나 IMF의 금융지원을 받아야 하는 신세에 처하게 되었다. 세 변곡점은 1997년 1월의 한보 부도, 1997년 7월 기아자동차 부도유예협약 체결과 동남아시아 외환위기 발생, 그리고 1997년 10월 외환위기가 홍콩으로까지 전파된 것을 말한다 (143-146).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단기자금이 급격하게 유출됨에 따라 나타난 외화유동성 부족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까지 늘어가만 가던 경상수지 적자였다. 경상수지 적자 확대에 기여한 요인으로는 일본 엔화와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하에도 불구하고 원화 가치의 고평가가 지속된 상황과, 이 상황과 부분적으로 연결되 어 있는 교역조건의 악화를 꼽을 수 있다 (148-151).

이러한 외부적 요인들은 내부의 정책실패와 연결되어 있다. (외환정책, 금융감독, 자본자유화정책과 기업투자 규제 완화의 동시진행 등). 요약하면, 한국의 1997년 외환위기는 “동아시아 역내의 경쟁체제 심화와 환율불균형, 세계 금융자유화 및 투기자본 확산 등의 외부적 요인이 외환위기의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외부 환경이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경직적 환율방어정책, 급진적 자본자유화 추진에 상응하는 감독의 실패, 인위적 업종전문화 정책등의 잇따른 정책 실패가 빚어낸 결과”란다 (161).

외부환경 변화와 국가 정책 실패의 결합이 외환위기로 귀결되었다는 이야기인데, 맞다. 하지만 재벌들은 경제위기의 종범이 아니라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한 언급은 찾을 수 없다.

이후에는 경제위기 이후 이루어진 제도개혁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지은이들은 주주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영미식 신자유주의로의 재편에 대해 무척 비판적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과거 발전국가에 의해 육성되어온 재벌의 존재 기반 중 하나인 관계적 금융을 침식하고, 재벌가족의 경영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앞에 내세우는 이유는 그렇게 투명한 사익(私益) 때문이 아니다. 최근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저투자의 문제도 은행이 아니라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는데, 주식시장이 기업에 조달하는 자금보다 배당으로 추출해나가는 것이 더 많은 상황에서 자본시장을 통한 자금 조달은 외환위기 이후 오히려 줄어들었다 (205). [이는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조영철의 책에서도 지적되는 내용이다.] 또한 국내 금융산업 뿐만 아니라, 기업경영권 시장 (M&A 시장)에서도 국내기업에 대한 역차별을 통해 외국 자본의 지배를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214, 220-5).

그리고 점잖게 가르친다. “자본의 국적성은 유의미하다”고 (246-7). “소유+전문 CEO 시스템” – 아마도 재벌경영체제를 가리키는 이들의 용어인 것 같다 –은 역사적 산물이며, 영미식 경제운용방식을 이상화시켜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돌아갔던 그 “소유+전문 CEO 시스템”을 폐기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사실 난 이 부분에서 장하준을 연상하였다.]

끝에 여러 정책 방향을 언급한다. 미국을 포함하여 전방위적 FTA를 추진하여야 하며, 요즘 산별노조로 가려는 추세가 존재하는데 기업별 노조도 좋은 점이 많다느니 “다원적 노사체제 하에서 대화와 협력”을 해야 한다느니… 사실 좀 주제 넘게 들리기도 한다. (삼성은 노조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핸드폰 위치추적이나 하지 마라.)

탄탄한 분석 위에서 중언부언하지 않고 필요한 말만 하는 좋은 책이다. 주장은 공감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이 배웠다. 촛불집회하는 시민들 빨갱이라고 욕하고, 1인시위하던 여성을 각목으로 때리는 무서운 아저씨들이나, 양손에 태극기 성조기 흔들며 찬송가 부르는 개신교인들도 무섭다. 하지만 그 무식해서 용감한 우파와는 차원이 다른 정말 무섭고 세련된 우파는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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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의 태동 - 민주화, 세계화, 그리고 한국의 복지정치, 사회복지학 총서 80
송호근.홍경준 지음 / 나남출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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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특히 한국의 복지국가에 관한 책 한 권을 본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야말로 문외한이다. 따라서 책에 대한 비판보다는 지은이들의 핵심논지를 정리하는 정도가 이 글이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1부에서는 세계화와 복지국가의 일반적 관계에 관한 서구의 이론을 주로 다루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화가 복지국가의 재편을 초래한다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일방적인 축소로 귀결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주장은 근거없는 낭설이라고 주장한다. 곧 세계화에 대응하는 국가마다 그 나라에 고유한 복지정치를 통해 복지제도가 확장될 수도 있고, 부분수정을 통한 현상유지를 할 수도 있고, 전면축소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곧 미국, 영국, 중남미에서는 축소가 일어났으며, 북구 사민주의국가와 유럽대륙의 보수적 복지국가들에서는 재조정이, 한국의 경우에는 확대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103쪽). 


2부에서는 1부에서 소개된 개념적 장치들이 민주화 이후 태동한 한국의 복지국가가 1997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다. 지은이들은 한국이 본격적 복지국가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미흡하더라도 복지국가를 향한 시동은 이미 걸려 있는 상태라고 본다. 이러한 복지국가의 초기형성과정이라는 사정은 서구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복지국가 유형 중 하나로 한국을 범주화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따라서 지은이들은 한국을 일종의 ‘혼합형’ (곧 사회보험의 기본 설계는 ‘보수주의 복지국가’와 유사한데, 그 혜택요건은 ‘임금생활자 복지국가’와 유사하며, 노동시장정책과 공적부조는 ‘자유주의 복지체제’와 유사하지만, 재정부담과 수혜기준은 ‘가톨릭 보수주의 복지체제’와 유사한) 체제로 분류하고, 이처럼 독특한 체제가 존재하게 된 과정을 추적한다. 무엇보다도 이는 “민주화와 세계화의 이중적 전환을 거치면서 가족과 기업에의 의존성을 낮추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복지동맹과 반복지 세력의 거부권(veto point) 간의 복지정치의 산물이었다 (111).


1987년 이후, 복지제도는 ‘확대’되었으나, 그것이 초기설계를 넘는 시스템적 개혁은 결코 아니었으며, 경제발전이 국가의 복지역량을 향상시킨 결과로서 나타난 ‘따라잡기적 확대과정’(expansionary catching-up)이며 “초기설계의 성숙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점진주의적 확대”이다 (126, 140-1). 복지확대는 고용연계성과 비정규직의 배제라는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노동시장 분절에 의해 촉진된 소득불평등이 국가복지를 통해 재생산되는 역설적 결과가 초래되었다. 저자들은 이를 한국 복지제도의 “구조적 한계”라 칭하는 데, 세 가지 구조적 한계로 (1) 고용연계적 자격요건, (2) 사각지대의 지속, (3) 취약계층 중심의 사회서비스를 들고 있다. 이 구조적 한계는 애초의 제도설계에 내재된 제약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1990년대의 복지 개혁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데, 이는 비용절감에 목을 맨 국가와 기업이 노동시장의 삼분적 분절구조 - 관리사무직 / 정규직 핵심노동자 / 비정규직으로 분리되어 있는 노동시장구조 - 라는 “구조적 덫” 안에서 가장 강한 정치력을 획득한 정규직 핵심노동자만을 선별하여 복지를 제공하고, 관리사무직과 비정규직을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70-71, 311). 1995년부터 불어닥친 대량감원과 해고 바람은 당시 막 정상조직으로 설립되었던 민주노총으로 하여금, 조직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정규직 핵심노동자의 고용안정을 위해 비정규직을 포기하게끔 한다. 이는 “고용연계성이 강한 제도적 설계 위에 취업자의 50%에 이르는 비정규직이 국가복지로부터 배제된 결과”를 낳게 되며, 이는 당시 민주노총 “조직 결성의 성공요인이었지만, 향후 민노총이 풀어야 할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176-7). 이러한 구조적 한계로 인해 “한국의 복지개혁은 초기설계로부터 결코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정치인, 관료, 시민들에게 장기간 내면화된 복지이념과 의식에 의해 재생산됨에 따라 강력한 경로의존성을 구성하게 된다 (201-2).


이러한 경로의존성이 관철되는 와중에도 한국 사회복지 정책은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하나의 전환점”을 통과하는데, 1998년에는 GDP 대비 사회복지비 지출규모가 11%까지 늘어났으며 이후에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권위주의 시절만큼 축소될 가능성은 거의 없게 되었다. 지은이들은 이 과정을 “글로벌 스탠더드의 준수와 그에 따르는 구조조정”을 구실로 삼아 기업들에게 위임되었던 복지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된 기회, 곧 국가가 기업에 위임하였던 복지의 책임을 이제는 가져가야 하는 상황으로 이해한다 (270).


10장에서는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세계적 추세가 한국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제위기를 전후한 1996년의 개정 노동법과 1998년 사회협약을 통해 자본 측은 끈질기게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시간제 도입을 통한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를 추구한다. 이에 반해 노동 측은 고용 안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는 교환된다. “자본가는 유연성을 얻고, 노동자는 고용보호를 약속받았다. 바로 이 점이 문제다. 유연성과 고용보호라는 상반된 목표가 어떻게 맞교환 되었는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분절시장을 전제로 해야 비로소 이해된다. 위 두 개의 목표를 맞교환할 때 정규직 노동자들만으로 구성된 노동조합은 비정규직을 유연성 증대의 대상 집단으로 내주고 자신들은 엄격성(고용보호)을 약속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비정규직 비율이 급증하던 당시의 현실에서 자본에게도 그리 불리하지 않은 교환형식이었다. 1998년 중반 이미 비정규직은 취업자의 45%선을 돌파하였다” (289-90).


한국적 복지의 특성인 “고용연계적 복지”(employment-entitled welfare)는 바로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정성(security) 간의 제도적 분절 고착을 뜻하는 것인데, 노동조합과 기업의 저항으로 인해 분절시장은 더욱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현재 민주노총에서 내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는 사회보험의 확대가 필수적으로 수반되는데, 이는 고용주에게는 사회보험 부담금의 증가를 뜻하고, 기업의 고용능력 저하로 이어질 우려가 많단다 (196).

유연노동시장, 관대한 복지제도,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의 황금삼각형으로 대변되는 덴마크식 유연안정성 모델과 같은 개혁정치가 한국에서 이루어지려면, 고용연계적 복지제도와 정규직 중심의 보호정책이라는 노동시장제도의 양대 초기 설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노무현 정권 말기 (이 책이 쓰여진 후) 발효된 비정규직 보호법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표하고 있다 (300).


 

마지막 11장 결론에서는 앞의 논의들을 정리하면서, 노무현 정권 말기 복지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일별하고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지은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 궁금하다. 결론 내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던 이정우 전 정와대 정책실장의 글 (성장지상주의의 폐기와 분배를 통한 성장을 주장)을 인용하면서, 정당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이 먹히지 않는가를 자문하며 그 이유를 당시의 경기침체 (그 때 그게 경기침체면 지금은 뭐냐?)와 더불어 다른 구조적 요인에서 찾고 있다. “복지제도의 성장과 확대를 결정하는 계기가 ‘국가’에 있다기보다 ‘기업과 생산체제’로부터 기인한다는 한국적 특성”이 그것인데, 그동안 한국의 국가는 미래대응적이기보다는 반응적 역할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대기업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 이는 국가복지가 “생산체제 변화의 함수”로서, “생산체제의 구조변화가 낳는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국가복지의 영역으로 흡수하는 것이 국가의 주된 역할”이었다고 주장한다. 지은이들은 노무현 정권이 겪었던 저항을 반응적 조치로부터 미래대응적 조치로 복지정치의 기조를 옮긴 탓으로 해석하고 있다. (글쎄?) 

 

서평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간단한 느낌이나 몇 자 적자. 서구의 논의들을 정리한 1부는 다소 지루했지만, 2부, 그 중에서도 6, 7, 10장은 꽤 재미있었다. 지은이들은 한국노총은 “한국노총”이라고 하면서 민주노총은 계속 “민노총”이라고 하는 게 사실 좀 짜증났었는데, 또 막상 노동조합과 긴밀한 연대력을 가진 계급정당이 출현한다면 기업차원의 정치가 국가차원의 정치로 원활히 전환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함으로써 미래대응적 조치들이 가능할 거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예전에 누가 복지국가 공부한다고 하면, “드디어 맛탱이가 갔구만”하고 깐죽거리기도 했는데, 그 때 나한테 그 소리 들었던 그 친구가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걸 알면 뭐라 그럴까? 웃으면서 “그래, 이제 정신 차렸구나”라고 하려나.. 만약 그러면 난 “난 아직도 너랑은 달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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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노동시장의 정치 사회학
정이환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지은이는 자본주의의 다양성 대한 이론적 논의의 연장으로서 지구화라는 맥락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대 노동시장 유연화 문제를 집중적으로 고찰한다. 2부에서는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했던 방식대로 북구 사민주의(4), 독일(5), 미국(6) 노동시장제도를 살펴본 , 일본, 한국, 대만 동아시아 3국의 노사관계(7) 고용안정성(8) 변화를 통계방법을 통해 비교 검토하고 있다. 3부에서는 한국의 노동시장체제의 변동을 미국과의 비교를 통해서(9), 분단노동시장의 현실과 연대의 고취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고(10), 11장에서는 한국노동시장체제 개혁의 대략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론적 논의와 이론적 논의에 바탕이 서구의 사례들에 대한 문헌 리뷰를 , 통계를 통해 한국과 일본, 대만, 미국 노동시장을 비교 검토하고, 한국 내의 단위 사업장들에서 어떻게 비정규직 투쟁이 조직되어 왔는 살펴본 , 향후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데, 전체의 짜임새가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책이 다루는 내용의 범위가 방대하면서도 상당히 전문적이므로 서평에서는 한국 노동시장이 관련되어 있는 7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에 집중해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점들을 간략히 짚어보고자 한다.

지은이는 동아시아 노동시장이 구미국가와 대조되는 특징(기업내부노동시장의 발달, 상대적으로 평등한 소득과 비교적 낮은 실업률 간의 양립 )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각국이 서로 다른 변화 과정을 거침에 따라, 일부의 주장과 달리 동아시아 복지 모델이나 동아시아형 노동체제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261, 292).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 일본, 대만의 상이한 노사관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있다 (266 ff, 322).

                                   한국                         일본                                  대만

전체 노사관계            분권적 교섭형          (약한) 조율된 교섭형                시장형

기업내 노사관계        대립적 노사관계       협조적 노사관계                종속적 노사관계

전체 노사관계를 보면, 일본은 조율된 교섭형을, 대만은 시장형을 유지한 데에 반해, 한국은 1980년대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서 시장형에서 분권적 교섭형으로 이행하였다 (269). “시장형은 임금과 노동조건이 시장 원리에 의해 결정되는 유형으로서, “노동조합이나 단체교섭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노동시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근로 조건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며 노동시장은 '제도화되지 않은' 시장이 된다. 분권적 교섭형은 단체교섭이 기업별 또는 산업별로 행해지면서 기업 또는 산업 간에 조율이 이루어지지 않는 유형인데, “임금인상이나 임금평준화라는 목표는 교섭 단위 내에 국한되어 추구되며, 교섭 단위 밖에 있는 기업이나 부문과의 형평성은 별로 고려되지 않는다” (267). 박동(2005: 165) 분권적 교섭 유형을 “파편화되고 조정되지 않은 임금결정제도”라고 표현한 있다. 지은이는 한국의 전체적 임금불평등도가 1980년대 이후 감소하다가 1990년대 후반 이후 다시 증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283).

이는 1987 노동자 대투쟁과 1997-98 경제 위기가 이러한 추세의 변동에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있다. 지은이는 “기업 규모별 임금 격차라는 측면에서 한국 노동시장은 1980년대 말에 통합노동시장에서 분절노동시장으로 변화되었으며, 1990년대 이후 그런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283) 진단하면서, '1987 노동체제' 개념은 노동시장 분석에도 유용하다”고 본다 (391): “노동시장이라는 측면에서 1987 노동체제는 기업별 교섭, 기업내부노동시장, 그리고 노동시장 분절 주요 특징으로 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90년대 중반까지는 높은 경제성장률과 낮은 실업률로 초래된 인력난 때문에 기업 규모별 임금 격차를 비롯한 전반적 임금 격차는 축소되어 왔다. 당시까지는 대기업의 임금인상은 전체 중소기업으로 파급되어 전체 임금노동자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한국이 임금 상승과 함께 전반적 대중시장의 비약적 성장으로 유혈적 테일러주의에서 주변부 포드주의로 이행했다고 주장했던 리피에츠의 논의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1997년의 경제위기는 전체 임금노동자의 생활수준이 향상될 없는 상황으로의 급반전을 동반하며, 기업규모간 임금격차를 확대시킴으로써 노동시장 분절을 심화시킨다.  

1990년대의 불황에 대한 일본 사용자의 대처와 1997년의 격렬했던 경제 위기에 대한 한국 사용자의 대처 간의 차이는 양국 노사관계의 차이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해 거리를 던져준다: “일본에서는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공세적 인력 감축이 추진되지 않았고 이것은 기존의 협조적 노사관계를 유지하는 기여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사용자들이 추진한 인력 감축은 노사간 불신을 키우고 한국의 노사관계를 더욱 대립적으로 만들었다” (322). 이것이 단순히 불황과 짧고 강력한 경제위기라는 주어진 조건의 차이일까? 아니면 단지 협조적 노사관계나 대립적 노사관계의 지속으로 설명되는 경로의존성일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할 같지는 않다. 경제 위기 이후의 노동시장 체제는 노동시장의 분절이라는 1987 노동체제의 특징의 지속, 심화 있는 한편, 기업내부노동시장의 확장과 같은 87 체제 내부 추세의 역전으로도 있다. 그리고 이는 다름아닌 계급 역관계의 역전 아닌가? (이렇게 단언하려면 다른 많은 조건들을 고려해야 하긴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1987 노동체제의 끝은 어디까지라고 보아야 할까? 다음 체제가 시작되어야 있는 문제인가

이런 의문은 특히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의 갑갑한 노동계 상황을 생각하면 그렇다. 2006 여름에 출판된 책에서 지은이는 영미식 탈규제와 유연화는 현실적이지도 않거니와 규범적으로도 동의하기 어려운 ”(395)이라고 말하지만, 언제 세상이 우리가 규범적으로 동의하는 방향으로 굴러왔는가? 문제는 영미식 탈규제와 유연화가 자본의 공세 속에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뻑하면 비즈니스 프렌들리 외치고, 노동부 장관이란 자가 임금교섭은 앞으로 2년에 한번씩 하자고 하고, 비정규직 고용기한은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늘리자고 한다. 저들만 그런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외치는 진보정치세력은 분열되었다. 2 현실적이지도 않았고 규범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웠던 일이 벌어지는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87 노동체제를 탄생시킨 87 여름의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계급 형성의 문제는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남자든 여자든, 대졸이든 국졸이든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슬로건으로 집약되듯,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여 단결투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이제 슬로건은 촌빨 날리는 死語가 되어버렸다. 노동계급 형성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이해 관계가 상이한 노동자 집단”(358) 사이에 연대를 형성하는 일이지만, 오늘날의 프레임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전했던 가슴벅참을 허용치 않는다. 사례 연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처럼 비정규직 노동자가 바로 옆에서 일할수록, 그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좋을수록, 정규직은 고용불안을 느끼고 연대를 꺼려 하게 된다  

책이 좋은 책이라는 데에는 전문학자들 사이에서는 이견이 없는 같다. 그러나 단지 지은이 정이환 선생이 국내 박사이고 나름 좌파임에도 불구하고 통계에 빠삭하다는 지엽적 사실에서 책의 훌륭함을 찾는 칭찬들은 참으로 짜증난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과는 다를 같다. 책이 좋은 책이라는 것은 길을 제시해준다는 것보다는 (물론 지은이가 끝에서 밝히는 방향 설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날것으로 존재하는 현실의 갑갑함을 독자들에게 그대로 보여준다는 아닐까 싶다. 10장에서 보여지는 작업장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불평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동운동들의 좌절과 제한된 성공 사례들은 이것이 우리가 규범적으로 동의할 있는 세상의 모습을 현실 속에서 이루어 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다시 알려준다. 합리적 언어로 치장된 대안도, 분노의 수사로 점철된 선동도 믿지 않는다. 패배에 대한 냉정한 기록만을 신뢰한다. 염세주의적 매저키스트인가 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내게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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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 - 민주적 시장경제의 길, 민주주의총서 05
조영철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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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만 474쪽이다. 이틀을 아무 것도 안 하고 이 책만 봤다. 여느 때보다 하루 많은 그래서 고마운 요번 2월 안에 다 읽고 서평까지 쓰려고 굳세게 마음 먹고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넘어가서 그랬던 것일까? 아님 서문과 1장이 너무 재미있어서였을까? 혹은 기대가 너무 컸었나? 그것도 아님 직전에 읽은 책이 워낙 훌륭해서였나? 뭐 다일 것이다. 두께와 제목에 비해 기대에 못 미쳤다. 이 책이 별볼일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단지 내 기대가 너무 지나쳤다는 말일 뿐이다. 어찌 보면 봇물처럼 쏟아져나오는 미래의 대안적 정책방향에 관한 최근의 연구 조류가 “좋은 말”을 넘어 이것이 실제로 “좋은 결과”를 갖고 올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갑갑함 때문일 수도 있다. 좋은 말은 어찌 보면 이미 차고 넘치는데, 문제는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고, 이는 그러한 연구들이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정치력 부재로 인한 전망의 판단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또 그것과는 조금은 다른 그 좋은 말들에 대한 미심쩍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1, 2, 3부는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지은이 조영철 선생은 성장과 형평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확고한 케인즈주의자이다. 학문체계로서 케인즈주의 경제학에 별로 익숙하지 못한 내게는 많은 공부거리를 던져 준 것 같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금융억압과 자유화의 교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무척 재미있다. 1장에서 지은이는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
(1) 19세기 – 1929년 대공황: 영국헤게모니의 성장과 쇠퇴. 자유무역 제국주의, 고도금융, 국제금본위제.
(2) 대공황 - 1970년대 말: 미국헤게모니. 뉴딜. 경영자자본주의, 케인스주의 관리금융, 포드주의 체제의 성장과 쇠퇴.
(3) 1980년대 - : 신자유주의 구조재편. 주주자본주의. 금융주도 축적체제(finance-led accumulation regime)의 형성.
여기에서 지은이는 지오바니 아리기의 “긴 20세기”의 논의를 중심으로 어떻게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구성하는 세 가지 축이었던 포드주의 임노동관계, 경영자자본주의, 케인스주의 관리금융체제 간의 연계가 유러달러시장의 출현,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 통화주의 긴축정책으로의 전환 등과 더불어 진행된 금융자유화와 함께 해체되었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사적 고도금융의 규제자에서 강력한 지원자로 바”뀜에 따라 기존의 노사간의 계급타협을 주주자본주의가 대체한 과정도 잘 서술하고 있다.

1부의 보론에서는 기업과 혁신, 대리인비용, 행동금융학에 대한 논의를 알기 쉽게 잘 정리해놓았다. 최근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혁신에 관한 논의를 간혹 접하면서도 그에 대한 의미를 잘 알지 못했는데 보론을 통해 그 논의의 함의에 좀더 가까이 다가간 듯한 느낌이다.

2부의 2, 3, 4장에서는 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 논의에 입각하여 각각 미국, 독일, 스웨덴 모델의 역사적 전개를 위의 세 시기로의 구분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미국의 경영자자본주의의 등장과 뉴딜 금융체제, 그리고 이후 신자유주의 금유자유화와 IT, 벤처 열풍, 달러-월스트리트 체제, 독일의 종합금융(겸업은행), 공동결정제도, 스웨덴의 사회적 코포라티즘, 렌-마이드너 모델, 연대임금 정책, 이후 신자유주의적 제3의 길의 등장 등이 흥미 진진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의 금융화를 다루는 3부. 발전국가에서 재벌주도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추적하는 5장은 개발도상국 일반이 초기 산업화 단계에 맞는 어려움들에 관하여 아담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유명한 논의들을 대비시키며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후발국이 산업화를 하려면 유치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 협소한 국내 시장규모로 인하여 분업 심화∙산업 심화가 제약되는 후발국의 한계를 지적한 스미스의 논의로부터 유추될 수 있는 개도국의 전략은 협소한 국내 시장이 아닌 넓은 세계 시장을 출구로 삼음으로써 시장제약을 극복하는 것이다. 리스트적인 국내시장 보호와 스미스적인 수출지향전략은 국내 시장가격 왜곡과 세계시장 가격 순응이라는 이율배반적 과제를 동시에 추구해야 할 필요를 제기하는 데, 발전국가는 바로 이 모순적 과제 수행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후 지은이는 발전국가의 전개를 여러 측면에서 살펴본다. 1960-70년대 확립된 고부채∙고투자 산업화 방식은 투자위험의 상당 부분을 국가가 부담하는 체제였고, 국가는 기업에 조건부 지대(contingent rents)를 지급하는 동시에 저임금∙장시간 노동 동원체제를 보장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재벌은 전문화보다는 다각화를 통해 산업구조 고도화를 이루었고, 이 과정에서 재벌 총수의 지배체제는 공고화되었다.

1989년 삼저호황의 종식과 더불어 발전국가체제의 균열은 갈수록 가시화되었다. 정부는 재벌의 비관련 다각화를 수정하기 위해 업종전문화 정책을 펼쳤지만 이는 오히려 재벌의 독점적 시장지배력과 경제력집중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75). 1980년대 들면서 정부가 재벌에 대한 선별적 특혜금융에서 벗어나 금융의 시장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제2금융권에 대한 진입장벽을 완화하자, 재벌은 제2금융권에 본격 진출하였다. 3저 호황 이후 국제수지 흑자와 민간기업의 대외신용도 증가로 외자차입에 대한 정부보증과 국가관리 필요성도 줄어들게 되자, 재벌은 발전국가 시기 자신에게 특혜금융을 제공하였던 기반인 금융억압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3저 호황 이후 금융억압이 아니라 금융 자유화가 재벌의 이해와 일치하게 되었으며, 또한 국제자본도 금융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러한 재벌과 국제자본의 이해 일치는 OECD 가입 시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282). 그런데 3저호황을 전후하여 금융억압에서 금융자유화로 넘어가는 국면에 대한 지은이의 독특한 해석이 돋보인다. 지은이에 따르면, 억압으로부터 자유화로 바로 넘어가게 됨에 따라, 실제로는 금융억압과 금융자유화가 중첩되어 버림으로써 결국 금융억압이 너무 늦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만약 승자기업 선별을 완전히 은행에 맡기는 금융제한정책을 추진하는, 곧 금융억압과 금융자유화의 중간단계로서 “금융제한”의 국면을 거쳤다면 사정은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국가∙은행∙기업의 3자 관계 속에서 고저축, 고투자, 고성장을 유지했던 한국 경제발전모델은 1980년대 이후 자유화 과정에서 수직적 국가∙기업 간 관계와 관치금융을 완화하고 동시에 건전성 감독강화와 긴밀한 은행∙기업 간 수평적 협력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로 인해 외생적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차입의존경제의 위험관리체계는 더욱 약화되었던 것이다” (285).

이처럼 재벌은 금융부문에서는 “금융자유화라는 국가후퇴를 요구”했지만, 노동부문에서는 오히려 “노동억압적 국가복귀”를 요구했다 (291). 발전국가 시기 국가는 “자본시장과 생산물 시장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국가가 시장규율을 대신한 데 반해 노동시장에서는 … 노조조직화를 억제함으로써 경쟁시장의 규율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했다” (288).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이는 저항에 부딪치게 되고, 국가의 노동억압 기제에만 의존하는 노동시장 규율체계에 의존하는 것의 한계가 분명해지자, 재계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같은 새로운 시장 규범을 확립시키고자 하였다 (294).

외환위기의 원인과 이후 전개를 다루는 6장에서 지은이의 시각 중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발전국가에서 민간주도 경제로의 이행이나,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 등이 단순히 외부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한국 경제가 제약 속에서 나름대로 선택한 결과라고 해석하는 부분이다. 6장에서 지은이는 발전국가의 지속불가능성, 곧 한시성을 강조하며 시작한다. “발전국가모델은 시장미발달, 시장 미비로 시장경제만으로는 산업화의 동인을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유효한 모델이었기 때문에 산업화에 성공하고 시장경제가 점차 발달하면서 민간주도의 경제체제로 이행해야 했다” (299-300). 이 민간주도 경제로의 이행의 상이 당시에는 무척 불분명하였으나, 외환위기 이후 구조재편은 영미식 모델을 수용하면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을 분명히 하게 된다 (311). 그리고 이는 단지 IMF의 정책 제약 때문만이 아니라 김대중 “국민의 정부의 적극적 선택”이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또 관치금융의 폐해를 교정하기 위해 도입된 주주자본주의의 확립으로 인해 재벌들도 주주가치 경영을 펴게 되었지만, 이는 이전의 발전국가에는 없었던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한다. 무엇보다도 주주가치 경영은 투자의 외부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투자 결정으로 인해 바람직한 수준보다 과소투자가 이루어진다. 이전 발전국가에서 문제는 재벌의 문어발 확장으로 인한 과잉투자였다면, 이제는 과소투자가 문제로 대두한 것이다.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국가에 의해 선택된 정책이었다면, 다른 대안은 없었는가? 지은이가 5장에서 ‘금융제한’의 정책적 대안을 취하지 못했던 것을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6장에서는 신자유주의 구조재편 이전에는 한국 경제가 은행 중심의 탈발전국가체제로 이행할 기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기회는 사라졌고, 결국 영미식 모델의 차용으로 인해 단기투자, 과소투자가 일반화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가능한 대안적 방향은 어디에서 구해져야 하는가? 지은이는 제2의 선진국 따라잡기를 하여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높은 투자 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여 “모험적 장기투자”를 활발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저투자가 심각한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선뜻 수긍하기는 좀 힘들었다. 모험적 장기투자가 없는 것은 단지 주주가치 경영 때문만이 아니라, 모험적 장기투자를 할만한 꺼리가 없기 때문 아닌가? 있다면 왜 안하겠는가?

7장에서는 외환위기 이후 유연성(flexibility)과 거시경제 변동성(volatility)의 증가가 소득분배에 끼친 악영향과 투자율 저하로 인해 훼손된 성장잠재력 등을 여러 선행 연구와 구체적 데이터를 통해서 논증하고 있다. 4부 8장에서는 2부에서 살펴보았던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로 돌아가서 경제성장률, 고용성과, 노동생산성, 소득불평등과 삶의 질 등의 측면에서 미국모델, 라인모델, 노르딕모델을 비교하며, 노르딕 모델에 대한 지은이의 선호를 명확히 한다. 9장에서는 “민주적 시장경제모델”이라는 낯익은 단어를 통해 한국의 새로운 발전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발전국가로의 복귀도, 신자유주의 정책도 해법이 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시장경제의 효율과 역동성을 존중하되, 사회경제적 평등이라는 실질적 민주주의 가치도 함께 실현하는” 모델이며, 여기에 가장 근접한 모델은 북유럽의 사회민주적 시장경제 모델이라고 한다. 이는 사실 김대중 정부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일관된 정책 기조였다. 물론 겉보기에 비슷한 말이 실제 정책을 통해서는 얼마나 다른 차별성을 보일 지는, 여기서 지은이가 제시하는 정책방향이 실제로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 지에 달려있을 터이고, 이는 이명박 정부 동안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지금은 뭐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 정책 기조와의 차이는 지은이의 확고한 케인즈주의적 입장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그에 따르면 발전국가 시기 확립된 “수출에만 의존하는 경제성장은 비정상이며 안정적 축적체제일 수 없”고, 따라서 “생산성 향상에 기반을 둔 고임금과 복지서비스 확대”를 통해 내수 중심의 경제성장체제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분명 역대 남한 정권 모두와 차별되는 부분이다. 그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이른바 “고진로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금억제, 비용삭감, 사회적 덤핑 경쟁을 통해서는 중국, 인도에 당해낼 수 없기 때문에 한국 경제는 투자확대∙기술혁신∙인적자원관리∙사회신뢰 강화 → 생산성 향상 → 고임금과 복지확대 → 내수 창출의 고진로 축적 구조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럴 때 “말은 참 좋은데…”라는 말을 쓰는 것 같다.

좋은 책에 후진 서평을 한 것 같다. 당분간 서평은 쓰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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