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으로 건강한 영성 - 진정한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영성의 비밀 Emotionally Healthy 시리즈 1
피터 스카지로 지음, 강소희 옮김 / 두란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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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다닐 때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너네 아빠 목사님이라며?"였다. 
아빠가 목사님이라는 것이 싫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강단 위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아빠의 모습이 멋지고 자랑스러웠다. 교회에서나 집에서나 한결같은 아빠를 존경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유독 "너네 아빠 목사님이라며?"라는 말이 싫었다. 누군가 이렇게 물었을 때면 백이면 백 우리 아빠가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네 아빠 목사님이시라며? 완전 멋지다!"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 말에는 언제나 숨은 뒷문장이 존재했다. 실제로 말하건 말하지 않건 내포하는 의미는 같았다. "너네 아빠 목사님이라며? 근데 넌 왜그래?" 바로 이 뜻이었다. 

우리 아빠가 목사님이라는 말은 마치 어떤 문도 열 수 있는 "열려라 참깨" 정도였던 것 같다. 
"너네 아빠 목사님이라며? 근데 너 왜 나한테 지우개 안빌려줘?"
"너네 아빠 목사님이라며? 그럼 너 나한테 숙제 보여줘야지." 
"너네 아빠 목사님이라며? 근데 넌 왜 이런거 가지고 화내?"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당최 우리 아빠가 목사님인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지 못할 일들이 어린 마음에 하나둘 상처로 남았었다. 몇 번은 급식에서 맛있는 메뉴가 나오면 "우리 아빠가 목사님이니까" 당연히 다른 아이들에게 내 것을 양보하기도 했었다. 

비엔나로 떠난 후 본격적으로 한국 사람들과 멀리(?) 지내게 되면서 나는 "아빠가 목사님" 주문에서 해방되었다. 더이상 아무도 내게 크리스천인 것을 들먹이며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이 나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약점처럼 악용되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는데도 그제서야 짜릿하고 아름다운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자 예전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정도 봉사는 해야하는 거 아니야? 게다가 아버지가 목사님이시잖아"라고 당연하게 말하는 사람들.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1억 상당의 피아노를 부상으로 받았을 때 그에 상응하는 십일조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은근한 압박(?)을 주던 사람들. '1억 상당'의 피아노를 받았던 거지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었는데 어디서 천만원을 헌금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피아노 무게가 약 300킬로이니 30킬로 정도 나무를 떼어(??) 드려야 하나 하는 억하심정(???) 마저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들어 기독교와 크리스천들이 끝없는 증오와 심지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서 착잡하고 갑갑한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턱대고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해대는 사람들의 인성과 수준이 의심되면서도, 그들이 욕할만한 빌미를 제공한 것은 누구도 아닌 (어쨌든 자칭) 크리스천들이라는 생각에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내가 봐도 욕먹을 수 밖에 없는 한심한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나오고 있었으니까.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크리스천의 모습 역시 자랑스럽지 못한 것이 많았다. 교회에서 사기치고, 음해하고, 이간질하며 심지어 주먹까지 오고가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렇다고 그들에게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그래요?"라고 해봤자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반발심을 갖고 더 목소리를 높이거나 나처럼 위축된 채로 살아갈테니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하는걸까? 왜 예수 믿고 거듭났다는 사람들에게서 그에 맞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걸까? 아니, 다른 사람에 대해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왜 이러는걸까 생각하던 도중 만나게 된 책이 있다. 바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정서적으로 건강한 영성>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영성 

작가
피터 스카지로
출판
두란노
발매
2015.06.24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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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요즘 유행하는 제자도 모델들은 대부분 성도들이 정서적으로 성장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예배나 기도, 성경 공부, 성도 간의 교제를 통해 실제적인 도움과 유익을 얻고 있다. 따라서 관계의 문제나 내면세계가 잘못되어 있어도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사람들이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고 철썩 같이 믿기 때문이다. (26 페이지)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땐 그저(?) 정체된 신앙생활을 스스로 반성하고 다시금 자극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정서"와 "영성"은 보수적이다 못해 폐쇄적이기까지 했던 내 어린시절 신앙환경에 비추어보면 결코 한 문장에 등장하지 못하는 단어였다. 지극히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으로 들리는 "정서"는 "영성"을 강조하는 일부 신앙인들에게는 오히려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되기 십상이라는 의견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스스로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면서 어렸을 때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던 신앙생활의 모습을 다각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A가 B니까 그런 줄 알아"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짚어가면서 왜 A가 B인지 스스로 체험해보길 원했다. 내 안에 있는 아주 작은 신앙의 부분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강요받거나 일방적으로 교육받은 것이 아닌, 나 스스로가 체험하여 고백하는 신앙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크게 바뀌지 않는 것에 실망하고 화가 날 때가 많았다. 점점 더 견고해지며 자라나야 할 믿음인데 오히려 퇴화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커졌다. 차라리 어렸을 때처럼 무조건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믿는 것이 나은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성경과 상극관계인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도대체 어디까지 허용하고 타협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도 더 궁금했던 것이 있다. 소위 "모두가 인정하는(?)" 신앙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나님의 일에 힘쓰고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면서도 불평과 짜증, 시기, 질투에 가득차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그런 사람들 말이다. 

저자인 피터 스카지로 목사는 뉴욕 퀸즈에 위치한 뉴 라이프 펠로우쉽 교회의 설립자로써 미국에서는 이미 강사로써, 작가로써 대단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열 아홉살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그는 평생을 복음을 전파하는데 바치기로 결심하고 쉴 새 없이 사역을 위해 힘써오던 중, 도무지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엄청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 일구어왔다고 생각했던 가족과 교회가 붕괴될 상황에 놓이자, 그의 신앙생활은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하였다. 그는 이것을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가 그와 같은 극단적 상황에 가지 않고도 자신의 영적 생활을 돌이켜볼 수 있도록 쓰여진 책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사모하고,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성경을 읽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주일학교와 소그룹 모임에 참석하면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름다운 삶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건강한 감정이 빠진 영성, 곧 내면 깊숙한 곳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층이 그대로 있다는 것은 영적 이혼 상태와 흡사한 것이다. (34 페이지)

신앙생활에 감정이라니! 흔히 감정이라고 하면 영적 생활을 가장 방해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영적 생활에 감정이 등장한다는 것은 대략 "마귀가 감정을 뒤흔들어 역사하고 있어" 정도라고 해야할까. 심지어는 외로움, 고독,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뿐만 아니라 기쁨, 설레임, 환호 등의 긍정적인 감정까지 경계의 대상으로 삼는 신앙인들도 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해서 기뻐하려면 뭔가 조신하고(??) 잔잔하게(??) 기뻐해야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리질러서는 안될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십중팔구 믿음이 아닌 "자기 감정"이 앞서는 것이기에 얼마 안가(?) 변질될 것이라는 악담을 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던 다윗 왕은 여호와의 궤를 되찾고 성안으로 들여올 때 너무도 기쁜 나머지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아랫도리가 다 보일 정도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사무엘하 6:14)
여기에는 세 가지 맹점이 있다. 첫째는 신앙과 감정이 공존할 수 없는 상극 관계인지 누가 단언할 수 있을 것이며, 둘째는 "올바른" 신앙의 표현이 어떤 것인지 누가 정했냐는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판단할 권세는 하나님께 있을 뿐 우리에게 주어진 적이 없는데 (야고보서 4:12) 다른 사람의 신앙이 올바른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무슨 권리로 판단하냐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기 전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4:5).

스스로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 역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데 익숙해있었음을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너무도 쉬웠고, 그 유혹은 너무나 컸다. '그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러는거야' 하며 가볍게(?) 시작할 때도 있었지만 '그 사람은 안되겠어. 영 글러먹었어.'라며 스스로 선고를(??) 내리기도 했다. 저자가 말하는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영성의 10가지 징후"는 충격적이었지만 내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 내 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한다.
2. 분노, 슬픔, 두려움의 감정은 즉시 억누른다.
3. 음악, 미술, 기쁨 같은 욕구는 왠지 사치라고 생각한다.
4. 발목을 잡는 과거를 덮어 두려고만 한다.
5.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칼같이 나눈다.
6. 하나님과 동행하기보다 사역에만 바쁘다.
7. 사람과의 갈등은 무조건 피한다.
8. 상처, 약점, 실패는 철저히 은폐하다.
9. 내 한계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10. 다른 사람을 쉽게 평가하고 판단한다.

내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했던걸까? 하나 하나 읽어내려가는데 가슴이 쿡쿡 찔려왔다. 정말 그랬다. 부정적인 것을 모두 감추고 겉으로는 "모든 것이 최고인양" 가면을 쓰고 있을 때가 많았을 뿐더러 분명히 시시비비를 가리고 대응해야 했을 때도 일방적으로 갈등을 피하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어쩌면 단 몇 번의 대화로 풀렸을 수 있을 갈등으로 인해 수많은 관계를 단절했고 나 스스로의 감정도 정리하지 못한 채 그저 잊어버리려고만 했던 것 같다. 비엔나에 있었을 때는 일이 년에 한번씩은 전화번호를 바꿨고, 새로운 전화번호를 극소수의 지인들에게만 알려준 것은 물론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수없이 입으로 고백하고 알면서 정작 왜 내 생활에서의 부족함, 모자람은 인정하려 하지 않을까?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인격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지식인들을 기대하셨을리 없는데 말이다. 흔히들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울까봐"라고 변명을 하는데, 정말 나처럼 미미한 존재의 부족함으로 인해 가리워질만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애초에 나 같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잘나서 혹은 잘 행동해서가 아니라 100% 은혜로 가능했던 것인데 말이다. 

저자는 믿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해야 한다고 억압하는 오늘날의 제자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사역에 힘쓰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에만 무게를 두고 그것이 마치 '구원받기 위한 속건제'인 것마냥 집착하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마음 속으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이게 옳은 것이고 나는 옳은 일을 하니까 분명 좋은 일이 일어날거야"라는 모순적인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힘쓰기 때문에 언젠가는 결국 넘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열심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땐 어떻게 서있을 수 있을진 몰라도,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거두지 못했을 땐 "하나님, 어째서 저에게 이러십니까!"를 외치며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정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신앙생활은 "관계"이고 하나님과의 "인간적인 만남"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참 좋아한다. 처음엔 "인간적"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뭔가 거부감이 들었다. 뭔가 말만 그럴싸한 관념적 신앙이 아닐까 의구심도 들었다. 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생활의 본질에 있어 중요한 포인트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주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이 인간이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비유로써 설명해주시기 위해 인간적인 관계를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을 알려주시려 가족이라는 거울을 허락하셨고 말이다. 
물론 사람의 부모는 결코 하나님일 수 없다. 이러한 부모-자식 관계의 모형은 나 스스로가 아이를 낳고 나니 더 잘 이해가 갔다. 부족한 나라 하더라도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어떠실까 하는 마음에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사랑하실까 싶었는데, 아이가 생기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부모가 아무리 아이를 사랑한다 한들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이는 그 사랑을 느낄 수가 없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관계"라는 채널을 통해 아이에게 전달된다. 아무리 큰 사랑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사랑을 이해하고, 느끼고, 누릴 수 있으려면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곧 자신만의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고,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그 사랑으로 인한 아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관상적 영성"이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차리고 의식하려면 건강한 정서 위에 관상적 전통과 훈련이 더해져야 한다. 관상적 영성은 우리가 더욱 성숙하게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이끌어 준다. "해 주세요, 해 주세요, 해 주세요"하는 유아적 태도에서 보다 성숙한 길로, 곧 "아빠 아버지"(롬8:15-17)와 함께하며 기뻐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82 페이지)


모순적이고 가식으로 병든 영성에서 벗어나 건강한 영성에 이르기 위해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서 일곱 가지 명확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영성의 징후 10가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방법들이다. 그 내용이 좋고 그렇지 않고를 따지기 이전에 하나하나 나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말들이었기에 감사함으로 읽어내려갔다. 정말이지 이런 책을 만나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그것도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그 절묘한 시점에 말이다. 물론 이 책을 한 번 읽은 것만으로는 정서적으로 건강한 영성을 가질 수 없기에 몇 번 더 차근차근 읽고 날마다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이 책을 읽고 나니 "깨어있는 삶"의 정의가 조금은 달라졌다. 

마음같아서는 대량으로 구매하여 소중한 사람들에게 모두 한 권씩 나누어주고 싶은 책이다. 조금 더 드라마틱하게 표현하자면 인생을 바꾸어놓을 책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보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 책을 읽고 자신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건강하고 감사로 가득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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