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부터의 혁명 - 우리 시대의 청춘과 사랑, 죽음을 엮어가는 인문학 지도
정지우.이우정 지음 / 이경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정말 진부한 이야기입니다만 책은 언제나 저의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면서 항상 새로운 멘토를 만나고, 새로운 것을 접할 때도 그랬지만,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많은 것을 헤쳐나가야 하는 지금, 책의 존재는 저에게 있어 더욱 더 강인하고 강력한 것이 되었습니다. 책을 읽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며,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할 수 있게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을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죠.

작년 한 해 동안 마음먹고 여러 분야의 책들을 가리지 않고 읽으려 노력했습니다. 한가지 방향을 고집하지 않은 덕분에 조금 더 폭넓게 많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고요. 거의 모든 책들이 저에게 새로운 것을 알려주었고, 그 중 많은 책들을 감명깊게 읽었지만 유독 마음 속에 남는 책이 몇 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권이 바로 정지우 작가의 "청춘인문학"입니다. 소위 "청춘들의 멘토"로써 쓰디쓴 말이나 달콤한 말을 무책임하게 남용하는 일이 빈번한 요즘 정지우 작가의 뼈아픈 조언은 어떠한 "깨달음"을 주었다기 보다는, 처음으로 그것에 대해서 골똘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선물해준 것 같습니다. 미사어구로 아름답게 포장하여 희망을 가지고 도전하게 하고, 그것이 실패할 때에는 정작 도울 방법을 모르는 책임감없는 멘토링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 과정과 답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독 이 책은 천천히 그리고 오래 다시 읽게 되었고, 읽은 후에도 많은 영향을 받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런 정지우 작가의 신간이 출시되었다는 소식은 무엇보다 반갑고, 궁금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그 혼자가 아니라 공동저자 이우정씨와 함께 집필했다고 하니 더욱 더 어떤 내용인지 알고싶어지더군요. 그런 궁금증과 기대가 컸던 만큼 그의 새 책 "삶으로부터의 혁명"을 받아든 순간 더욱 설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폭풍같은 침묵의 시간을 가지게 해 준 이 책을 여러분에게도 소개할까 합니다. "현대"라는 특수상황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수 많은 세월을 연구하며 통찰해온 작가가 던지는 두번째 뼈아픈 이야기 말입니다.





눈 먼 자들에게 이끌리는 현대

이 책은 '청춘인문학'의 후속작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청춘인문학'에서 등장했던 개념들이 상당 부분 재출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반복 혹은 중복의 느낌보다는, 마치 '청춘인문학'을 읽음으로써 익숙해진 개념들을 조금 더 확장시켜 사유하는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미 저자는 '청춘인문학'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청춘과 그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줄 수 없는 사회에 대해 비판하고 개선방안에 대해 심도깊은 조언을 한 바 있습니다. 사실 저 역시 그 한 권의 책을 읽고 저자 정지우 씨의 팬이 되었는데, 그가 사유하는 현대의 근본적인 문제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질적인 사회적 문제"와는 그 시작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특정 정당이나 운동 혹은 사회적 방향을 옹호/비판하지 않고서 이성적인 중도의 길을 택한다는 인상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자신의 이상을 주장하고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할 때는 현재 산재해 있는 문제의 주원인을 찾아 비판하고 책임을 묻는 것이 보통인데, '청춘인문학'은 누군가를 "마녀"로 만들어 "사냥"한다기 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설정으로 들어가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방안을 찾는 것에 집중하였습니다. 자신의 특정한 목표를 위해 사람들을 선동하려 쓴 글에 지친 현대인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삶으로부터의 혁명"에서 저자는 조금 더 심화된 "현대의 갈등"으로 파고들어갑니다. "청춘인문학"이 이제 사회에 나와 새로운 인생의 장을 시작해야 하는, 하지만 분열된 정체성 속에 갈 길을 잃고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청춘들을 위한 책이었다면, "삶으로부터의 혁명"은 청춘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매일 무의식중에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참담한 방황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도 많은 책이 출간되고 많은 강연회가 개최되며, 많은 멘토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 때가 공교롭게도 가장 혼란스러운 방황의 시대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근래에 문자 그래도 "쏟아져나오는" 청춘의 멘토들에 대해 일침을 날립니다. 이른바 "열정 멘토"와 "체제 비판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어느새 공공연한 청춘에 대한 담론은 이 양자의 뚜렷한 대립구도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 청춘은 주로 이 따뜻한 목소리와 치열한 외침 가운데에서 흔들리며 청춘 시절을 보낸다. 이 두 가지의 이야기는 반복적으로 청춘에게 되풀이 되고 있으며, 계속해서 재생산되며 고유의 영역을 만들어가고있다." (29 페이지)
"그러나 진정한 인간 삶, 인생, 인생관에 대한 대답은 스님의 에세이나, 성공한 사업가의 자기 계발서보다는, 진지하고 합리적인 성찰을 하는 인문학에 있어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인문학 그 자체이다." (362 페이지)




100명이 있다면 그 100명의 인생이 모두 다른 것이 기정 사실인데, 현대는 오직 하나의 "성공 모델"을 지향하고, 그 범주 안에 들지 못하는 이들을 "낙오자"로 심판합니다. 이러한 현대의 "성공 모델"은 너무나도 획일화 되어있어서 조금이라도 다른 삶을 지향하는 것 자체를 "쓸데없는 짓"으로 규정하곤 합니다. 몇십만명 중에서 단 한 사람이 그러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면, 그 사실만으로도 자신 역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맹신을 부추기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현대는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사회가 말하는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정의라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이 세대 모든 이들의 소망이 된 '행복해지고 싶다'는 염원은 그처럼 거의 동일한 형태의 이미지를 갈망하는 것이다." (46 페이지)

예전에만 해도 어린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의사, 대통령, 경찰관, 우주비행사, 심지어는 동네 생선가게 아저씨와 꽃집 아주머니가 장래희망인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요? 아이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가 물어보면 상당히 획일화 되어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조금만 커도 벌써 "현실에서 멋지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어댑트(adapt) 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것은 단지 어린아이들의 장래희망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데 있어 들이대는 잣대 역시 획일화되어있습니다. 꾸준히 공부하여 명문대를 진학하였고 고시에 합격하였다면 성공한 인생이지만 중학교를 자퇴하고 차고에 틀어박혀 밤낮 무언가를 발명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백수" 혹은 "잉여" 취급을 면할 수 없으니까요.




매 달 수 백, 수 천권씩 쏟아져나오는 자기계발서들 역시 같은 맥락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기업에 입사할 것인가? 억대 연봉을 벌 수 있을 것인가? 40대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여 성공할 것인가 등 자기계발서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 역시 그 기저에 "현실에서 인정하는, 현실에서 말하는 성공"이 기본적인 조건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사람들은 10대에도, 20대에도, 30대에도, 그리고 40대, 50대, 60대까지 "미쳐"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현대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살고 있고,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진 몰라도 "현실"과 "삶"은 엄연히 다른 것이고, 이 두 가지의 개념의 혼동으로 인해 주체적인 삶의 길이 막혀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은 자기의 관점에서, 자기 삶의 입장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체 현실'의 관점에서 강요받는 인생 형대이다. 여기에는 과연 나의 진정한 관심과 취향과 취미는 무엇인지, 내가 어떤 상태에서 가장 만족할 수 있는지, 나와 가장 어울리는 삶이란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은 빠져있다(...) 즉, 현실적 성공을 이루게 되면 '모든 것'이 만족되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당연한 듯이 말해지는 것이다." (38 페이지)




현실의 이미지와 자신의 삶이 동일시되면서 "삶"이라는 것은 그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개개인의 삶은 어떤 획일화된 기준에 따라 판단되고, 사람들은 일부 소수만 누릴 수 있는 이러한 이미지를 향해 너나할 것 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낸" 일부 사람들의 성공담은 우리에게 다시한번 도전의 희망이 되거나 더 큰 좌절의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불행하거나 성취되지 못한 삶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미 우리나라가 세계 자살 1위 국가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서부터 황혼에 접어는 노인들까지 자살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삶이 사멸된 오늘,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의 손으로 스스로의 삶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악순환 속에 갇혀진 현대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그것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놀랍게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분열시키는 현실의 실체 말입니다.

"현실은 바깥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라기보다는, 주로 우리가 내면에서 우리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과 더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언제나 '현실보다 더 큰 현실'을 두려움으로 가지고 있다." (57 페이지)





기독교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

정지우 씨의 현대비판에 있어 하나의 큰 쟁점이 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근본주의입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가답게 그는 우리나라의 큰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사건들을 근거로 직격탄을 날립니다. 문득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출판사측에서 "특정종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포함되어있으니 참고해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나네요. 현대사회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맹점에 대한 담론에서 저자는 독단과 "강요받는 인생"이 좌절과 실패의 주원인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독교의 근본주의 (이것이 옳은 것이다) 는 확실히 포용하는 사회에서 큰 장애물로 비춰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한발짝 물러나 생각해보면 상황은 조금 다릅니다. 국적이나 인종, 직업에 대해서 격차를 두거나 차별하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도 올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미국인이 맞고 영국인이 틀린 것이 아니며, 소방관보다 경찰관이 우월한 것이 아니듯 사실 이러한 구분에 있어서는 전혀 옳고 그름의 잣대가 적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인종이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고, 다른 나라 사람입니다.
하지만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애초의 종교의 목적 자체는 이 세상의 차원을 초월한 구원 혹은 해탈에 있습니다. 결국 종교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어떤 "신념"이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초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나는 기독교이지만 다른 종교도 다 옳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의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종교는 단순한 취미활동이 아니라 어떠한 사상을 믿고 의지하며 그것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인데, 단지 자신의 종교에 대한 신뢰와 유일성을 근거로 우리나라의 종교 문화가 후진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59 페이지) 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조금은 섣부른 판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천주교의 (심지어는 이슬람교까지) 경계가 모호해지며 서로 어우르고 이해하자는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독일의 경우, 종교적인 벽을 허물자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까지도 대단한 인종차별주의자인 경우가 있으며, 네오나치운동을 옹호하기도 합니다. 결국 "유일신"을 주장한 신 때문에 나 자신이 옳다라고 현대인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독단에 빠진 사람들은 그것이 신이건 종교건 국적이건간에 그 독단을 삶의 어느 부분에나 적용하려 하기 때문이죠.

저자가 지적한 우리나라 기독교의 더 큰 문제는 근본주의가 아닌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행동입니다. 명동 일대에 갈 일이 생기면 단 한번도 시끄럽게 포효(!)하는 "전도자"들을 보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비기독교인은 물론 기독교인들까지도 눈살을 찌뿌리고 진심으로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광경입니다. 또 다른 예는, 우리나라에 기승을 부리고 있는 대부분의 사이비 단체가 성경을 교묘하게 바꾼 교리를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가장 친숙한 이야기를 사용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크고 작은 사이비 단체들에게 남용되고 있는 성경으로 인해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배척하고 있는 단체들의 행위가 고스란히 기독교의 소관 혹은 책임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중은 "아, 이것은 기독교의 이름을 빌리고는 있지만 확실히 기독교의 소행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고 말해줄만큼 관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사회나 환경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 자신, 즉 내 안에서 찾고 해결하기를 힘쓰자고 권면하던 저자가 갑자기 "신이 문제" (308쪽) 라고 신에게 일방적인 책임을 묻는 것에 의아했습니다. 부패한 정권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도 아닌 자신의 안에서 삶을 되찾아야 한다고 하면서 '신'이 "실제로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서로간의 학살과 생태계의 무차별적인 파괴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근거가 되었"으므로 "신을 버려야 한다"(319 페이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자가 일방적으로 종교가 나쁜 것이며 그곳에 모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3부 마지막에서 그는 종교로 인한 지금까지의 사건들이 종교 자체가 아닌 그것을 이해하고 실행하는 방법에 있었다고 마무리합니다.

"이는 우리가 거부해야할 것이 종교 자체라기보다는 '기존의 종교적 태도'라는 것이다. 계속 말해왔던 바,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호명 받아 자기의 감정을 절대시하는 맹목성이고, 자기 자신을 외적인 것(코드나 대지의 여신)으로 계속해서 집어 던지는 초월성이다." (324 페이지)






우리가 살아야 할 것은 현실이 아니라 삶이다

"다만 여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하나의 현실'에 완전히 포박되어, 그것에 의해 지배당하고, 그것으로 규정 당하고, 그로 인해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것만이 운명적으로 정해져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69 페이지)

"청춘인문학"을 너무도 감명깊게 읽었던 독자로써, 이번 "삶으로부터의 혁명"을 손에 쥔 그 순간부터 저의 기대는 대단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에서 깊은 고찰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자를 사로잡는 정지우 작가의 신간이니만큼 "청춘인문학"의 뒤를 이을 그의 작품이 너무도 궁금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들었던 생각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이 책은 홍수처럼 내 안에 들어와 폭풍같이 불어 그간의 쌓아두었던 것들을 해체시킨 뒤, 전보다 더 많은 생각할 과제를 내게 주었다."

"청춘인문학"을 읽은 뒤 처음으로 읽은 책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민하고 그야말로 사유하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책의 내용에 감명을 받고 끝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러한가, 지금의 나는 어떤가, 나에게 그것이 끼치는 영향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기계발서를 읽고 실천해야겠다는 막연한 다짐이 아닌, 지금까지 믿어왔던 것에 대해 처음부터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삶으로부터의 혁명"은 제게 더 큰 문제를 안겨주었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동안 저를 바쁘게할 문제를요.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을래야 받을 수 밖에 없는 한 사람의 현대인으로써, 정직하다고 생각했던 저 자신조차도 참 많은 분열 속에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애초부터 분열된 자아 가운데 무언가 조화로운 설정을 기대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던 것이죠. 이렇게 글로 쓰고 나니 무언가 대단하고 드라마틱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사실은 그것보다 단순하면서도 명료합니다. 다소 진부한 말로 표현하자면 "나 자신이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흥미로웠던 것은 저자가 어떤 체제를 비판하므로 다른 체제를 옹호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열혈 멘토들의 "무작정" 이론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체제 비판자"들의 책임전가 역시 용납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정해둔 압력 사회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본능과 낭만에 충실한 뉴에이지 역시 비판합니다. "그러면 어떡하라고!" 궁금해지는 그 무렵, 저자의 성찰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가 말하는 "나"와 내 "삶"을 찾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타자의 시선에서 벗어나 타인과 공존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사실 인간은 혼자가 아닌 사회적 욕구를 가진, 사회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은 과학적 근거를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비관론에 사로잡혀 "어차피 인류는 악하고 추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면 이것이 더더욱 하나의 희망의 빛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획일화가 나와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집단이기주의로까지 발전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는 "공공의 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우리가 여기에 왔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스처들이 하나하나 모여 사회적 이해가 바탕이 될 때, 치우칠만큼 치우쳐 극으로 달려가는 현대의 끝에서 방향을 바꾸어볼 수 있는 터닝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요.

정지우 씨 혼자 집필한 "청춘인문학"과는 달리 이번 "삶으로부터의 혁명"은 한 명의 공저자, 이우정 씨가 있습니다. 이들은 흔히 나누어 쓰는 공저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문장을 함께 작성하고, 생각하고, 퇴고했음을 저자의 말에서 밝힙니다. 이 책 전반에서 말하는 (타자가 아닌) 타인의 중요성을 그야말로 집필 과정에서부터 온전히 실천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쉽지 않은 논제를 가지고 서로 다른 두 저자가 의견을 모아 동의할 때까지 함께 사유하고 집필했다는 것이 이 책의 깊이를 역설해주는듯 합니다.

신랄하고 시니컬하기까지 한 정지우 씨의 글은 그런 첫인상과는 달리 대단히 희망적입니다. 바로 이 점이 수많은 체제 비판자들과 그를 구분하는 큰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독일어 표현 중 "Besserwiss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자면 "더 잘 아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하는 말마다 잘난 척 하는 사람을 비꼬아 부를 때 쓰는 표현입니다. 대부분의 체제 비판자들의 행동이 이렇습니다. 자신의 주장만이 옳고 남들은 무조건 틀렸으며,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자신만 알고 있다는 것처럼 "잘난 척"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지만 정지우 씨의 글에 있어 특별한 점은, 그가 어느 특정한 편에 서지 않고 가장 객관적이라고 생각되는 시선에서 장단점을 파악하려 노력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그도 인간인지라 때때로 편파적인 발언이 없을 수 없겠지만, 드러내놓고 한 쪽만을 비판하는 수 많은 다른 사람들과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지난 "청춘인문학"의 서평을 쓰면서, 보다 많은 청춘들에게 읽혀져야 할 책의 디자인이 너무 옛스러운 것 아니냐(?)는 안타까움을 표현했었습니다. 이번 "삶으로부터의 혁명"은 훨씬 시선을 끄는 표지와 디자인으로 출간되어 뿌듯하기까지 했는데요, 고뇌하는 청춘은 물론 딜레마에 빠진 모든 세대들이 이 책을 읽고 저와 같은 생각할 과제를 얻어가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자신의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과연 다른 사람이 아닌 나, 내 자신이 만족할 삶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질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국 "삶으로부터의 혁명"은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들에게,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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