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톨로지 (스페셜 에디션, 양장)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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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는 자신을 작곡가(Composer)가 아닌 발명가(Inventer)라고 소개했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성경 말씀처럼 더이상의 새로운 음악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창조가 아닌 "발명"을 한다고 주장한 셈이죠.
실제로 그의 작품세계를 보면 이런 주장도 무리가 아닙니다. 이때까지 수많은 작곡가들이 좀 더 멋진 멜로디와 드라마틱한 구성, 웅장하거나 혹은 절제된 곡을 쓰고 있었다면, 케이지는 음악은 무엇이고, 음악을 창조하는 행위는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으니까요. "연주"라고 하면 당연히 연주자가 무대에 올라와 음악을 소리로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 케이지의 4'33''는 지금까지의 작곡가적인 행위 자체를 뒤바꿔놓은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물론 전통적 의미의 음악을 사랑하는 애호가들 사이에선 괴짜에 궤변을 늘어놓는 것 같은 작곡가인 케이지지만, 이후 현대음악에 있어 그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어쩌면 이후 작곡가들에게 커다란 교훈과 계몽을 선사한 셈이니까요. 

이미 <남자의 물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정운 교수님의 <에디톨로지>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책입니다. 첫 챕터부터 누가 볼까 놀랄만한 사진(!)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작가가 평생동안 가장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번에 발간된 책이 아니라 김정운 저서 100만부 돌파 기념으로 개정증보되어 재판된 하드커버 스페셜 에디션이죠. 저자의 다른 도서들은 도서관에서 빌려봤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에디톨로지는 발간 당시 초판이 아닌 "하드커버 스페셜 에디션"으로 소장할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었답니다! 이런 책이야말로 아주 튼튼하게 제본되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보고, 또 보고, 한참 지난 후에도 다시 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니까 말이죠. 

비슷한 이론을 주장해도 외국 사람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의 말은 그냥 넘겨버리는 국내 학계에 단단히 뿔이 난 저자는, 적어도 자신이 정립한 "편집학"만큼은 고유의 이론으로 삼고자 "에디톨로지(Editology)"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나중에 편집학이 더욱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지속적인 연구대상인 학문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 보험을 들어두는 것이죠. 이 상황을 설명하는 과정이기가막히게 재미있습니다. 아니, 이 책은 인문서답지 않게(?) 정말 재미있습니다. 전철 안에서 혼자 읽다가도 탁 하고 머리를 치게 될 정도로 기발하기도 하고요. "비슷한 것을 읽고, 비슷한 것을 보면서 나는 왜 이런 궁금증이 생기지 않았지?" 하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저자의 다른 책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아무리 어려운 이야기라도 저자의 필력을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로 거듭납니다. 저자 역시 이 부분을 강조하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재미있어야" 한다고 말이에요. 책을 읽다보면 오랜 독일 생활을 거쳐 현지화(?)가 된 저자가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비엔나에서 공부하던 시절 무려 세 개의 박사학위(음악학, 의학, 철학)의 소유자였던 한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르더라고요. "책을 읽다가 이해가 안되면 내가 바보가 아니라 쓴 사람이 바보인거야(Wenn es nicht verständlich ist, bin ich nicht der Deppat, sondern derjenige, der das geschrieben hat)" 교수님 정도 되니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복잡하게 이야기하는 사람 치고 제대로알고 있는 사람은 적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었어요. 

그런 면에서 저자는 정말 대단한 석학(!)이라고 감탄할 수밖에 없어요. 미술은 물론 과학, 철학, 역사, 지리 등 여러 방면에서 문외한인 제가 읽어도 이해가 쏙쏙 되도록 설명해주시니까요. 어렸을 때 이렇게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계셨다면 과목에 상관없이 푹 빠져서 공부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더불어 저자는 어떻게 이렇게나 다양한 분야에서 깊은 지식을 연마할 수 있었을까 놀랍기도 해요. 

결국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는 이 시대에는 오직 편집만이 진정한 창조가 될 수 있고, 기존의 지식을 어떻게 편집하느냐가 곧 자신의 능력이자 미래"가 된다는 거에요.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실용서에서도 읽을 수 있었지만 <에디톨로지>는 근본적으로 달랐답니다. 저자의 성급하거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닌 역사와 철학, 사회학, 그리고 인문학을 통해 밝혀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죠. 적절한 예와 함께 논리적인 주장을 펼치는 저자의 글을 읽고 있으면 희열마저 느껴진답니다. 같은 부분을 읽어도 읽을 때마다 좀 더 이해가 가기 때문에 두고두고 다시 읽을 책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요즘엔 흔히 만나기 힘든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라고요. 

14년 동안 살면서 나름 잘 파악하고 있는 오스트리아(혹은 독일)의 문화라고 생각했는데, 저자의 시선을 통해 "아, 이게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새롭게 깨달았던 것이 많았어요. 어렸고 철이 없어서 음악 외의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후회스럽기도 했답니다. 조금 더 눈과 귀를 열었다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에디톨로지>를 통해 다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답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 않더라도, 제 생각을 풍부하게 해줄 많은 것들이 생각나서요. 결국 이게 진짜 융합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조금 더 용기를 보태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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