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水能載舟, 亦能覆舟>

 

                                 

 

 

 < 水能載舟, 亦能覆舟 - 물은 배를 띄우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

 

 이세민
(唐第2代皇帝 太宗 李世民. 598128~649710). 재위기간(在位期間)62694- 649710. (諡号)文武大聖大広孝皇帝. 연호(年号)는 정관(貞観 : 627- 649). 그는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차남(次男)이며, 이연(李淵)과 함께 당조(唐朝)를 창건자(創建者)였그의 이름인 세민(世民)은 제세안민(濟世安民-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의 약자라고 하고, 수 나라 말기(隋末)의 혼란기에 아버지(李淵)와 함께 태원(太原-現在山西省 太原市 一帯)에서 거병해서 장안(長安)을 도()로 삼고 당나라()를 건국했다. 그 후, 그는 주로 군대를 이끌고 전국을 전전(轉戰)했으며, 군웅(群雄)들을 평정하고 626년에 <현무문의 변(玄武門)>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켰던 태자(太子) 이건성(李建成)을 타도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리하여 군웅세력(群雄勢力)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그는 생전에 훌륭한 장군이었으며, 즉위 후에는 그의 시대를 <정관의 치>로 부를 정도로 정치도 잘했다. 그리고 널리 인재를 등용해서 관제(官制)를 정비했으며, 제제도(諸制度)도 정비해서 당조(唐朝)의 기반을 확립했다 그래서 역시 <정관(貞観)의 치()>라고 불리는 태평천하를 만들었으며, 대외적으로도 동돌궐(東突厥)을 정벌해서 서북(西北)의 유목민들로부터 <천하의 왕(天可汗=Tengri Qaghan)>이란 칭호를 받았다. 그래서 중국 역대 황제들 중에서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불리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때때로 청나라의 강희제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는 598년에 현재 중국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国)의 협서성(陝西省) 함양군(咸陽市)에 해당하는 무공현(武功県)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수 나라 양제(煬帝)의 어머니와 사촌지간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우문태(宇文泰-北周始祖)의 손()이었던 두씨(竇氏)였다. 그의 가문은 원래 선비족이었다는 설이 있으며, 그가 4살 때, 그의 아버지를 찾아왔던 한 식객(食客)이 그를 보고 용()과 봉()의 상(-龍鳳之姿天日之表其年几冠必能済世安民)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의 이름이 세민(世民)이 되었다.

 그는 16세 대, 수양제(隋煬帝)가 안문(雁門-산서성)에서 돌궐(突厥)에 포위 되었을 때, 운정흥(雲定興-隋朝大将)을 따라가서 수양제를 구출하는데 힘을 합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위도아(魏刀児-자료 : 山東에서 隋末이 일어나자 上谷魏刀児歴山飛라고 칭하고, 河北劫略했다)에게 포위당했을 때도 경기(輕騎)를 이끌고 달려가서 구출했다. 그리고 614년에는 장손 씨와 혼인을 올렸고, 617(大業13)에는 수 양제가 고구려 원정과 함께 엄청난 대토목공사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각지에서 난이 발생했으며, 그에 그의 아버지도 태원(太原)에서 기병하자 그는 우령군대도독(右領軍大都督敦煌郡公)이 되어서 아버지와 함께 장안(長安)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송노생(宋老生-수나라 장군)을 격파하고 장안을 평정했다. 그러자 진국공(秦国公)에 봉해졌으며, 618(義寧2) 1에는 우원수(右元帥), 3에는 조국공(趙国公)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수 양제는 강도에서 그의 시위장이자 우문술의 아들인 우문화급과 우문지급 형제에게 암살되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당의 황제에 올랐고, 그는 진왕(秦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수나라의 호족들(薛仁杲劉武周王世充竇建徳劉黒闥)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반항했다. 그러자 그가 나서서 모두 평정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하늘이 내린 장수)이란 칭호를 내렸다(621-武徳4). 그러자 그 후,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자 또 그에 불안을 느꼈던 형이자 황태자였던 이건성(李建成)이 <현무문(長安宮廷玄武門)의 반란>을 일으켰고, 그러자 626(武徳9) 6(또는 72)에 이건성(李建成)과 아우 이원길(李元吉)을 평정했다. 그러자 이연(李淵)8월에 그에게 양위(譲位)했으며, 94일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하였으며, 당나라 제2대 황제 태종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정관의 치>라고 불리는 정치를 행했으며, 그것으로 국가의 안정을 꾀했다. 그는 적이었던 위징(魏徵)을 신하로 거두어 들였으며, 그러자 위징(魏徵)은 끝 없이 직언을 해서 그를 괴롭혔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위징(魏徵)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양성했고, 그 후 당나라는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황태자였던 이승건<李承乾. 618-64528(貞観1915)>이 문제가 많아 폐하고, 이후에 4남 이태<李泰. 620(武徳3)-653120(永徽31216)>를 봉하였으나 이승건과 싸워서 추방되었다. 그리하여 9남 이치(李治)를 황태자에 세웠는데, 그리하여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당 태종(太宗)은 즉위하면서 수 나라에 이어서 고구려를 침입하려는 야심을 보였다. 그러자 고구려도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으며 방비를 시작했다. 그러자 당나라는 3(645, 647, 648)에 걸쳐서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그는 전쟁의 후유증 등으로 649710, 장안의 함풍전에서 사망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그는 세계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현군(賢君)이었으며, 그래서 지금도 훌륭한 지도자의 상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집안일에 대해서는 서툴렀으며, 거기다 마치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러시아를 공격해서 실패했던 것처럼, 수 나라에 이어서 고구려정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음으로 인해서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다.

 그런 점에서는 그 역시도 하나의 인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며, 인간이 특히 말년에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서도 잘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서 가정의 파멸과 함께 나라의 파멸까지 유도했고, 그것으로 그의 공은 모두 허사가 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후손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그래서 지금도 그를 흠모하거나 따라 하려는 자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다만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바라건데, 부디 좋은 것만 배우고, 나쁜 것은 타산지석으로 삼기만 바랄 따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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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金素月, 190297~19341224)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호는 소월(素月). 본관은 공주(公州).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김성도(金性燾),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 2세 때 아버지가 처가로 가던 도중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됨. 그 후 광산을 경영했던 할아버지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가르쳐 준 숙모 <계희영>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었으며, 그 후에 평안북도 곽산군에서 성장하였다. 19341224일 평안북도 곽산 자택에서 향년 33세로 병사했다. 사후에 <민족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립이었던 평안북도 곽산 남산보통학교(南山學校)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五山學校)에서 교장이었던 조만식(曺晩植)과 서춘(徐椿이돈화(李敦化) · 김억(金億)을 문학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1920년 김억의 배려로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그 사이 그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1916년 오산학교 재학 시절 고향 구성군 평지면의 홍시옥의 딸 홍단실과 결혼했다.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關東大震災)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던 광산 일을 도왔으나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했다. 구성군 남시면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그 후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친척들한테도 천시를 받았고, 일본의 압박으로 부인과 동반 자살 기도까지 했다. 그리고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하다가 19341224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향년 33세였다.

 그 이틀 전, 그는 부인에게 세상을 한탄하는 말을 했다고 하고,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김소월이 자살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래서 <자살로 요절한 시인>이라는 별명이 붙으면서 그는 오히려 <대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증손녀의 증언으로는 그가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도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 때문에 사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다.

 자손에 부인 홍단실(풍산 홍씨)이 낳은 첫째 딸 김구생, 둘째 딸 김구원, 첫째 아들 김준호, 둘째 아들 김은호, 셋째 아들 김정호(1953년 반공포로로 석방, 김소월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남한에 거주) 손녀 김은숙, 손자 김영돈, 넷째 아들 김낙호가 있었다. 1981년 금관문화훈장(1등급)이 추서되었으며, 서울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평가>

 위에서 살펴본 대로, 그는 일제강점기의 힘든 시기를 보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정사정이 좋았기 때문에 교육적인 혜택은 충분히 받았다. 거기다 좋은 스승들을 만나서 쉽게 문학의 길로 들어섰고, 주옥같은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말년에 사업이 실패하면서 그는 좌절했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그를 보면 <김동인>이 생각날 때가 많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작가들은 배가 고프다>는 말에 계속 무게가 실리는 것 같아 슬프기도 하다. 그러나 <그>나 <김동인>은 부유했던 환경에서 잘 지내다가 사업의 실패로 스스로 좌절했던 작가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실에서 잘 자란 사람이 강풍을 만났을 때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자살 내지는 스스로를 절망으로 몰아넣은 것은 너무도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작가의 입장에서보다도 일반적인 한 인간을 두고 느끼는 감정이다. , 그럴수록 더욱 꿋꿋하게 일어섰더라면 더 돋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본인의 심정이지만, 그러나 또 그의 시들에서도 많이 나타나듯이 자기학대적인 또는 자기연민적인 또는 염세주의적인 면으로 인해 언제든 그런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은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죽음은 충격이며, 그래서 그가 언제까지라도 살아서 아름답고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남겨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은 비단 본인뿐만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노래들은 누군가의 입으로 어디에서든 언제나 불리고 있다. 그래서 그 노래들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달래주기도 하고, 내일의 시인이 되려고 꿈을 꾸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한국의 별>로 남아서, 그 주옥같은 작품들을 통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불멸의 시인>으로 우리들 곁에 남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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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  

 

 

 <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년1월26일부터 1964년4월5일)는 너무도 유명한 인물이며, 그만큼 그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그러나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의 입장에서는 큰 인상을 남겼던 인물이었으며, 그래서 지금도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과연 <그가 존경할 만한 인물인가?>하는 의문도 있으며, 그래서 현재도 인천에 세워진 그의 동상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인의 입장이며, 그는 세계의 전쟁사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던 것으로 해서 거의 패전으로 가고 있었던 <한국전쟁>을 역전시켰던 공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를 객관적으로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그의 약력을 대충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그는 군인 출신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래서 군인으로, 정치가로 활약했으며, 나중에는 기업가, 사회운동가로도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1880년에 미국의 아칸소주(State of Arkansas)에서 태어났으며, 뉴욕에서 성장했고, 위로 형이 두 명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Arthur MacArthur Jr)도 군인이었고, 독실한 개신교(Protestantism) 신자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도 나중에 <웨스트포인트 미국육군사관학교(美國 陸軍士官學校-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 USMA 또는 별칭 West Point)>에 진학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

 

 

 그의 어머니(Mary Pinkney Hardy MacArthur)는 자식 교육에 열정적인 분이셨고, 그래서 그가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자 그 근처에 방을 얻어 생활하면서 그의 뒷바라지를 했을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에 입학하려 했을 때, 대통령과 유력한 의원의 추전장이 필요했는데, 그때 그의 어머니가 나서서 그 자격을 획득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는 <웨스트사이드고등학교>에 입학해서 1년 반 동안 수험준비를 했던 결과 1899년에 750점 만점에서 700점을 획득해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가족사진-좌측이 맥아더-1883년에 차남 말콤은 病死함>

 

 

 하지만 그 학교생활은 아주 힘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갈등도 했다고 했는데,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그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제42사단 참모장>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했고, 이후 준장으로 승진한 후 사단장이 되었다. 그 후 <웨스트포인트 교장>이 되었으며 <1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최연소 육군 소장이 되었다. 그리고 1930년 미국의 제 13대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 후에는 임기를 마치고 1937년에 필리핀에서 최고 군사 고문을 지냈으며, 필리핀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가 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지원해서 참전했다. 그 후 필리핀 주재 극동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며, 1944년에는 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에는 일본군을 격파하고 필리핀에 상륙했으며, 8월 30일에는 일본 본토에 상륙했다. 그리고 <연합국군최고사령관(連合国軍最高司令官-SCAP)>이 되어서 전후처리를 주도했는데, 이 부분에서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미심쩍은 부분>을 많이 남겼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민족의 원흉(元兇)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켰고, 그러자 그는 <유엔군 총사령관>에 취임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서 패색이 짙었던 전쟁을 역전시켰다. 그러나 그 사이에 <트루먼 대통령>과 사이가 나빠졌고, 그 입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해임되었다. 

                        

                                                                     

                                                      <트루먼과 함께>

 

 

 그 후, 그는 별 다른 활약은 없었으며, 대통령선거 출마에도 실패했다. 그리고 회사(레밍턴랜드)에 입사해서 회장 직을 지내기도 했지만, 주로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960년에 요도의 질환으로 입원을 해서 수술을 받았고, 1964년 <워싱턴>에서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한 인간으로 봤을 때, 충분히 <영웅적인 기질>을 타고난 사람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라든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등 <천재적인 면>도 충분히 보여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과유불급>이다. 그래서 그런 독특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들이 많고, 그 때문에 스스로 자멸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그래서 그 역시도 그런 면 또한 충분히 보여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전후처리>와 <한국전쟁>을 통해서 애증(愛憎)의 면을 보인 바 있었고, 그래서 지금도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무조건 인정할 수도 없는 인물로 남아 있다.

 

 

 

 

 

 

 

                                                                                 <1960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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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婦人)들도 국민 중의 한 분자(分子)입니다!>

 

                              

 

 

 

 <남자가 하는 일을 여자라고 왜 못하나? 조선 사람이 조선의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김마리아(金瑪利亞. 光山 김씨. 1891년6월18일부터 1944년 3월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였고, 그 모진 일제(日帝) 하에서 여성운동을 주동했던 분이었다. 그래서 <애국부인회장>과 <상하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 등을 지냈으며, 본명은 김진상(金眞常) 또는 김근포(金槿圃)로도 불렸다. 그리고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김순애(金淳愛. 1889년6월10일부터 1976년5월17일.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회운동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소개함)>보다 2살 어린 친정5촌 고모였다. 그런 것을 보아서도 소위 <집안 내력> 또는 <뼈대 있는 가문>이란 것이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래서 또 여기서 <여성독립운동가> 한 분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김순애 20세경>
 

 

 김마리아 선생은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으로, 아버지 김윤방(金允邦)과 어머니 김몽은(金蒙恩) 사이에서 세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학자였으며, 서상륜(徐相崙-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운 인물. 상세한 것은 후술 또는 생략함)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김마리아는 1895년에 아버지가 세운 <소래초등학교>에 입학해서 4년만에 졸업했다.

 선생의 집안은 원래 서울의 명문양반가문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그래서 선생의 아버지 김윤방은 생전에 많은 사업을 할 수 있었으며, 친척들도 모두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선생도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장했다. 그리고 참고로 선생의 셋째 삼촌 김필순(金弼淳)은 <안창호>와 <신민회원>으로 활동했고, 한국최초의 의사가 되어서 만주 등지에서 <한인촌>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셋째 고모 김순애(金淳愛)는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의 부인이었으며, 역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둘째 고모부 서병호(徐丙浩)는 <신한청년당>과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한국 YWCA>의 창설자이며, 민족교육자였던 <김필례>도 넷째 고모였다.

 그렇듯 애국지사의 가문에서 성장했던 선생은 그러나 조실부모(早失父母)한 후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서 서울로 올라가 1906년에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다시 학교를 옮겨서 1910년에 연동여학교(지금의 정신여자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 후에 광주의 <수피아여학교-당시 큰언니 김함라(金函羅)가 교사로 있었다>에서 교사를 지낸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1918년에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했으며, 1928년에는 <2·8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그 후, 선생은 <조국광복을 위해서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졸업을 포기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귀국했고 <3·1운동 사전준비운동>에 진력했다. 그러나 모교(母校)에서 체포된 후(3월5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수감 때의 모습>

 

 

 그 후, 석방된 선생은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여성항일운동>에 힘썼으며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다시 체포되었고, 그때 선생은 <조선인이 조선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라든가 <나는 일본의 연호 같은 것은 모른다!>는 등, 확고한 자주독립의 의지를 피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도 남자들도 쉽지 않았던 것으로, 그런 것으로도 선생의 위대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후, 병보석으로 풀려난 선생은(1920년 5월 22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고, 그 후에 조선을 탈출해서 상해로 망명했다. 그리고 <상해애국부인회>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몸이 조금 완쾌되자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했고, 1923년 6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1924년 9월에 <파크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

 

<1923년 파크대학 졸업 관련 사진>

 

 

그 후였던 1928년에 선생은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0년에는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지인이었던 <황에스터(황애덕)>와 <박인덕(朴仁德)> 등을 만났으며 <근화회(槿花會: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서 회장으로 추대된 후, 일제(日帝)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그리고 1933년(또는 1932년 7월)에 귀국한 후 원산으로 가서 기독교 전도와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는데, 그것은 일제의 감시와 압박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강연을 하였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나름대로 일제(日帝)에 항거했지만,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평양기독병원에서 순국하셨다. 그런데 그때가 광복을 거의 1년 앞 둔 시점이어서 그 안타까움은 더했고,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와 같이 선생은 확고한 민족 정신을 가진 분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노력하셨던 분이었다. 그리고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었던 상황에서도 결혼도 하지 못하고 처녀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뒷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유관순 열사>와 당시에 日帝에 의해 고문을 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선생도 <추악하고 더러운 왜놈>들에 의해서 고문을 당하면서 <한 쪽 가슴을 잃어야> 했고 <여성의 상징을 인두로 지짐 당하는> 천하가 공노할 고문을 당했던 수치심에 스스로 여성으로서 떳떳함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해서도 <한국인이라면> 저 <일본놈>들을 <왜놈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공감할 것으로 생각하고, 저 <강도에다, 저질의 족속이며, 천박한 난쟁이>들을 영원히 증오하는 것이 마땅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이 땅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친일(親日) 쓰레기>들은 모두 불에 태워서 소각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반성은 커녕 오히려 이 나라를 다시 손아귀에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저 <더러운 강도 왜놈들>을 보면서 가슴 깊이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너무도 <소박한 원함> <가장 최소한의 우리의 자존감>을 위한 것으로다시 그 <인간 말종>들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짐승들>의 손에 의해 온갖 <욕보임>을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그래서 <안창호 선생>은 생전에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더라면 한국은 벌써 독립이 되었을 것!>이란 말을 남겼다고 하고그리하여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라는 선생의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져서우리 후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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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노량해전-이순신 장군 전사> 

 

 <이순신(李舜臣-1545년 4월 28일부터 1598년 12월 16일) 장군>은 중국의 대 명장(名將) 한신(韓信-상세한 것은 본인의 中國 참조)과 함께, 소개가 더 필요 없을 정도로 세계적인 무장으로 알려진 분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聖雄 이순신>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 선조 때의 무신이었고, 시호는 충무(忠武), 한성(현재의 을지로) 출신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구(倭寇)의 침략을 맞아 국난(國難)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분이다. 그래서 조선(朝鮮)은 그 분에게 아주 큰 빚을 졌는데, 그래서 더욱 귀하게 모셔져야 했던 분이었음에도 <그 분>의 생(生)은 다른 위대한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다시 <그 분>의 발자취를 간략하게 더듬어보고자 한다.

​ <이순신 장군>은 문반(文班) 가문의 출신이었으며, 선조 9년(1576) 32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정(李貞),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 卞氏)였고, 4형제(위로부터 羲臣、堯臣、舜臣、禹臣)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자식은 이회(李薈), 이열(李䓲), 이면(李葂), 이훈(李薰), 이개(李藎) 등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영의정이 되는 3세 연상의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자랐으며, 그래서 유성룡은 자신의 저서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 장군>의 성품에 대해서 기록을 해두었는데, 그것으로 보아서 <이순신 장군> 역시도 타고난 영웅이었으며, 혁명적인 기질이 강했던 분이란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그 분>의 어린 시절을 보고 <용맹과감(勇猛果敢)한 성격을 지녔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28세(1572년-선조 5년) 때 <훈련원별과(訓錬院 別科)>에 응시했지만 말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 그래서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하고 시험을 끝냈지만 낙방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정도로 <그 분>은집중력이 강한 분이셨고, 고난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 <그 분>의 성격이자 인품(人品)이었다. 그래서 그 4년 뒤였던 32세 때 처음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 분>의 어머니의 실가(實家)가 있었던 충남 아산 <현충사>의 자료에 의하면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무과내과사위합격총29명중12위(武科丙科四位合格総合格者29人中12位)>라고 되어 있고 <현직군관(現職軍官)이 아닌 자 중에서는 2위>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이순신 장군>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그래서 많은 영웅들처럼 <자신 스스로의 극복 문제>보다 자신을 해치려는 적들 중에서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처음 발생했던 고난이 <녹둔도 전투>였는데, 그것은 또 1587년(선조 20년)에 <이순신 장군>이 함경도에서 여진족의 방어를 맡던 중에 여진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9월1일).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 열심히 싸웠지만 오히려 상관이었던 <이일(李鎰)>의 모함을 받고 백의종군(白衣從軍-1차)하게 되었던 것이다.

    

             

​   <녹둔도- 두만강 하구에 있었던 섬. 그 후에 육지가 되어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이후 조선이 몇 차례 항의하였으나 러시아는 무시하였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가 찾아야 할 땅 중 하나다>


 그 후 <장군>은 다시 이광(李洸) 등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 직을 전전했고, 그러던 1591년 47세 때 <정3품 당상>에 해당하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수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또 바로 그 다음 해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졌고, 그래서 또 그때 문제가 되었던 사람이 바로 <원균(元均)>이었다. <원균>은 전쟁 중에 이순신과 계속해서 대립했으며, 결국 1592년 8월 27일 <칠천량해전>에서 패하고 거제도로 퇴각한 후 왜적에게 사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에는 일부 다른 견해도 있다.

​ 그리고 그 후에도 전세는 계속해서 불리하게 돌아갔는데, 그래서 <선조>가 몽진을 갔느니 하던 중에도 <이순신 장군>은 계속해서 승전했다. 그래서 왜구(倭寇)는 그 때문에 애가 타서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 많은 조선의 의병들이 각지에서 궐기해서 왜구(倭寇)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그에 대한 내용은 본인이 쓴 <성녀이야기>에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으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하시길 바라며, 어쨌든 그러자 일이 풀리지 않던 것에 조급함을 느꼈던 <도요토미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을 침략했는데, 그것이 또 1597년 8월부터 시작해서 1598년 12월까지 계속되었던 정유재란(丁酉再亂)이었다. 그리하여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고, 그러던 중에 <이순신 장군>은 다시 한 번 백의종군했다.

 그런데 또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던 1598년 8월 19일(일본은 8월 18일), 임진왜란의 원흉(元兇)이었던 <멍청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급사(急死)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독살(毒殺)설 등이 있었는데, 그러자 왜구(倭寇)는 완전히 전의(戰意)를 상실했고, 그때부터 도망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한 놈도 살려서 보내지 않는다(片帆不返)>는 단호한 의지를 내보였고, 그것은 또 너무도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러자 왜구(倭寇)도 사생결단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며, 그러자 또 <이순신 장군>도 <죽으려는 자는 살고, 살려는 자는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출전 吳子兵法, 마가복음8장35절 외 다수)>는 의지를 내보이며 왜구(倭寇)의 소탕에 힘을 썼다.

 그런데 또 그 10월에 <이순신 장군>은 사랑하던 아들 <이면>이 왜구(倭寇)와 싸우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병세(病勢)가 더욱 심해지던 중에 노량해전(露梁海戰. 1598년12월16일)에 임하게 되었고, 그 전투에서 유탄(流彈)을 맞고 서거(逝去)하셨다. 그리하여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도요토미히데요시>란 <미친 놈>이 일으킨 <미친전쟁>도 모두 다 끝이 났고 <이순신 장군>은 그 <죽음의 대가>로 <정1 품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1604년에 선조는 좌의정을 가증했다. 그리고 1643년 인조 때 <충무>란 시호가 내려져서 지금까지 우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큰 별, 불멸(不滅)의 이순신>이 탄생했으며, 그 때문에 이 나라와 국민들은 <장군>으로부터 <영원히 추종할 수 있는 큰 인물을 받들게 되었다>는 큰 은혜를 입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도 이 나라의 사람들은 그 많은 위인들 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을 제1로 뽑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장군의 깊은 뜻은 <그런 순차(順次)에 관계없이 나라를 지키는 데는 지위의 高下가 필요 없으며,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필코 완수해내야 하는 필명(必命)>이란 것을 후손들에게 깊이 각인시켜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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