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

 


 

 

<James_Joyce_by_Alex_Ehrenzweig,1915_restored>

 

 사랑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Love, Loves to Love Love)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1882221941113)

 그는 20세기의 작가 중에서 제일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앞의 <사무엘 베케트>에서 조금 소개가 되었기 때문에 그 기회로 여기서 소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는 언제든 소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었고, 다만 그 시기만 결정되지 않았을 그런 위인(偉人)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소개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는 영광>이며, 지금까지 그를 잘 몰랐던 분들에게도 그를 알 수 있을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아일랜드 위치도>

 

 그는 아일랜드 출신이었고, 소설가, 시인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베케트=고도>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처럼, 그를 이야기할 때도 <율리시즈(1922)>를 빼놓을 수 없다. 그 때문에 <베케트>처럼 다른 훌륭한 작품들이 소외된 감도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대충 <더블린의 사람들(1914)><젊은 예술가의 초상(肖像) 1916> 그리고 그의 대표작 <율리시즈> 외에,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내용이 가장 난해하다고 알려진 <피네건의 경야(竟夜=통야(通夜) 1939> 등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의 경야(竟夜)는 <초상집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간본-1922>

 

 

 그는 청년기 이후는 거의 외국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의 글들은 대부분 아일랜드에서 살았을 때의 경험에 기초로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일랜드의 치부를 많이 담고 있었기 때문에 아일랜드에서 배척당했다. 그리고 그는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을 이끌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래서 <현대소설>이라고 하면 <그의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고 말해지고 있을 정도다.

 

                                            

                                                                 <라스가 위치도>

 

 

그는 188222일 아일랜드 더블린 남쪽 교외에 있는 <라스가(Rathgar)>라는 부유한 지역(41 Brighton Square, Rathgar, Dublin, Ireland)에서 몰락해가던 중류층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후에 형제들이 많이 태어나서 그는 10형제의 장남이 되었다(15명 중 10명만 생존). 그의 어머니 <메리(머레이) 제인 조이스(Mary Jane "May" Murray)>는 경건한 신자였고, 아버지 <존 스태니슬로스 조이스(John Stanislaus Joyce. 4 July 184929 December 1931>는 아일랜드의 <(County Cork-지도 생략)> 출신으로, 소규모의 소석회(消石灰) 공장을 운영했으며, 성악(聲樂)과 농담(弄談)을 즐겼던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조이스 가()>의 선조들은 <코네마라(: Conamara: Connemara) 지도 생략>의 석공(石工)이었지만, 조이스의 아버지와 조부들은 전부 유복한 집안과 혼인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다소 예민한 성격으로,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과보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887년에 <조이스>의 아버지가 더블린 시청의 세리(稅吏-徵稅人)에 임명되자 가족은 <브레이(: Bray아일랜드: Bré정식으로는 Brí Chulainn)> 교외(郊外)의 신흥주택지로 이사갔다. 하지만 그 후로 가족은 곤궁해져서 이사를 네 번이나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에 조이스는 개에게 물리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 후로 평생 개를 싫어했다고 하다. 그리고 자신이 경애(敬愛)했던 숙모에게 <그것은 하나님이 노했다는 표시다>라는 말을 들었던 후에, 천둥소리도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가 9(1891)였을 때, 아일랜드의 정치지도자였으며, 그의 아버지도 열렬하게 지지했던 <왕관 없는 왕=무관의 제왕>이라고 불렸던 <찰스 스튜어트 파넬(CS=영어: Charles Stewart Parnell. 아일랜드어: Cathal Stiúbhard Pharnell. 카헐 스투와르드 파르넬, 1846627~1891106=아일랜드의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 10년 가까이 내연의 관계를 지속해오던 캐서린 오세이 부인의 이혼이 확정된 후 정치적 생명을 잃었고, 그가 추구한 아일랜드의 독립에도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 때문에 폐렴에 걸렸고, 류마티즘의 열에 의한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이 갑자기 사망했다.

 

 

                                       

                                                    <파넬>                     Irish politician Tim Healy, circa 1915

 그러자 그는 <힐리여, 당신마저?=Et Tu, Healy?>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다. 그리고 <힐리><Timothy Michael Healy, KC(17 May 185526 March 1931)>, 아일랜드의 정치가, 아일랜드 민족독립주의자였다. 그리고 <파넬>을 배신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이스는 그것을 인쇄했고, 그 복사본을 <바티칸 도서관(: Bibliotheca Apostolica Vaticana)은 현재 바티칸 시국에 있는 로마 교황청의 도서관>으로 보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 그의 아버지는 파산선고를 받고 휴직에 들어갔고, 1893년에는 연금을 받기로 하고 해고되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에 빠졌고, 살림살이는 더욱 곤궁해졌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가정폭력을 일삼았다고 하고, 그럴수록 그의 어머니는 신앙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신앙에 회의를 느꼈던 그는 10대에 벌써 방황을 시작했으며, 그것은 나중에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에 투영되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原著>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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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고도는 오지 않습니다...>

 


 

 

 

 

 <고도는 오늘 못 오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413-19891222).

 그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했으며, 프랑스의 극작가, 소설가, 시인. 부조리(不條理)연극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소설에서도 20세기 중요작가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외젠 이오네스코 (Eugène Ionesco, 19091126~1994328. 실존주의파에 속하는 프랑스의 시인·소설가·극작가)>와 함께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극작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그 결과 196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폭스록(FOX ROCK)에서 비교적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성()금요일에 태어났지만, 무슨 문제로 그의 출생증명서에는 513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름도 원래는 프랑스어로 베케(Becquet. 영어= Samuel Barclay Beckett)였다고 하고, 그의 가문도 1598년 낭트칙령(Edict of Nantes=앙리 4세가 1598413일 선포한 칙령) 후에 아일랜드로 망명한 위그노(프랑스어: Huguenot=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 역사적으로 프랑스 칼뱅주의자들로 알려졌다)였다고 하는데, 그에는 이설도 있다. 그리고 1923년에서 27년까지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교(Trinity College=더블린 대학)>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고, 그 후에 프랑스로 건너가서 1928년부터 2년간 <파리의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 약칭 ENS,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서 교사(敎師)로 지냈다.(영어 강사로 지냈다고 함) 그리고 그때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22~1941113)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작가로, 소설, ,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족적을 남긴 인물>와 사귀면서 조이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James_Joyce_by_Alex_Ehrenzweig,1915_restored>



 그래서 그는 <조이스>의 작품활동을 도왔고, 그것은 <조이스><피네간의 경야(-經夜, 영어: Finnegans Wake.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쓴 소설. 1939년에 출판>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1930년에는 <트리니티>에서 3년간 강사로 지내기로 하고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그러나 프랑스어 강사를 하던 중 2년도 채우지 못하고 사직했고, 그 후에는 저술업(著述業)을 하면서 유럽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1937년에 파리로 돌아와서 정착했다.

 그런데 19381월에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갑자기 처음 보던 매춘알선 남자가 휘두른 칼에 찔려서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칼은 그의 심장을 스쳐서 들어갔고, 그러자 그는 스스로 병원까지 달려가서 쓰러졌다. 그리고 그가 의식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조이스>가 자신의 주치의와 함께 그의 간호에 열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해자는 재판정에서 그에게 사죄했지만, 그러나 <자신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자신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입원하고 있었을 때 찾아온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녀는 <슈잔느 데슈뷔오>, 그때 두 사람은 마음이 통했던지 교제를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일을 도와주었다든지, 저널리즘과 그를 비판하는 자들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1961년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리고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1940년에는 나치가 프랑스를 침공해서 파리를 점령했다. 그러자 그는 프랑스레지스탕스에 가입했고, 나치 저항 운동에 참가했다. 그러자 게슈타포가 그를 노리기 시작했고, 친구가 체포되는 것을 보고 소설가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 1900718일 러시아 제국 이바노보~19991019) 프랑스의 작가., 누보로망을 대표한다>의 집 다락에서 오랫동안 숨어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역시 게슈타포를 피해서 은거하고 있었던 나탈리의 아버지와 같이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파리를 탈출했고, 시골에서 몇 개월 정도 지냈다. 그리고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보클뤼즈주(: Vaucluse) 주도는 아비뇽. 인구는 538,541(2007년 기준), 면적 3,567km2><루시용(Roussillon.Rossilhon/Rossihoun>에서 2년 반 동안 숨어있었다. 그리고 그 기간에 소설 <와트(Watt. 1953)>를 썼다.

 전쟁이 끝나고 파리로 다시 돌아왔던 그는 집필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1950년대에 들어서 3부작소설 <모로이-1951><말론은 죽다-1951> 그리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1953>을 발표했다. 그래서 그것으로 20세기 문학에서 소설의 혁신에 해당하는 큰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1952년에는 현대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를 발표했다. 그러자 그것은 다음 해 파리의 작은 전위연극(前衛演劇) 극장(바빌론소극장=Thétre de Babylone)에서 초연되었다. 그리고 1959년에 그는 모교 <트리니티>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61년에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 189982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1986614일 스위스 제네바.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의 관장직을 맡았다>와 함께 <포르멘톨 상(국제문학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6910월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 그 이유는 <문학과 희곡 분야에서 새로운 표현방법을 개척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891222일 그는 사망했으며, 그것은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5개월 후의 일이었다. 그 후에 그의 유체는 <몽파르나스 묘지(Montparnasse Cemetery. : Cimetière du Montparnasse) 파리 14구역 몽파르나스에 있는 묘지. 페르 라셰즈 묘지와 몽마르트르 묘지와 함께 파리에서 가장 큰 묘지이다>에 묻혔다.

 그는 <나치 시절>을 제외하면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살았고, 영광과 찬사도 많이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뛰어난 수재(秀才)성에도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에피소드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스포츠도 잘했고, 그래서 수영, 복싱, 크리켓, 럭비, 테니스, 골프 등 다양한 스포츠에 능했으며, 취미로 피아노를 쳤다든지, 체스도 잘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소위 만능적인 수재성을 한 몸에 담았던 사람이었는데, 동물도 좋아해서 <케리 블루 테리어(Kerry Blue Terrier)> 종의 개도 키웠다고 한다. 그리고 21세 때 <트리니티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해서 금메달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유명해질수록 은둔적인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는 염세주의자로 알려져 있고, 그것은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던 <고도를 기다리며>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글 속에서 <고도는 오늘도 못 오신다고 합니다. 그러나...>라고 하면서 <올지 말지 알 수 없는 그 고도의 마음>을 절망적으로 표현했음과 동시에, 약간의 헛된 희망도 주는 악희적(惡戲的)인 면도 함께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 작품은 사람들을 열광시켰고, 그를 노벨상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는 자주 <고도 때문에 다른 훌륭한 작품들이 홀대를 받고 있다>고 투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도를 기다리며>란 작품은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단 한 번이라도 본 사람에게는 <고도가 영원한 기다림의 울림과 희망에의 동경>으로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삶이 끝날 때까지, 아니 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고도를 기다릴 것>으로 생각되고, 그래서인지 그는 그 책임감(?) 때문에라도 더욱 은둔으로 자신의 몸을 숨겼는지 알 수 없으며, 그것은 또 당연하게 거의 즉흥적으로 써내려갔던 그 <고도>의 구절구절에 대한 해석 또는 해명을 할 자신이 그에게는 없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더욱 금욕적이고 수도승 같은 생활을 추구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더욱 조심해서 사회적으로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더욱 신비주의자로 비쳐진 면도 있었겠는데, 그러나 역시, 그의 작품을 읽었던 사람들이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번쯤은 <고도>를 생각하고 잠이 들었을 것처럼, 그 독자들은 <고도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또는 <그런 기회를 준 것 만으로도> 그에게 감사하며,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으로 생각한다.


 <고도가 오늘 오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내일은 꼭 찾아 올 것이란 암시일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나 고도의 행방과 관계 없이, 그 기다림의 희망만 가지고서도 사람들은 오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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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의 50만 시대!...>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그것도 <세계에서 최고>라고 하니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다른 것이 아닌 <중국발 코로나> 이야기다

거기다 <무능 정부>가 만든

<대 재앙>의 이야기다


그러니끼 본인이 <천 명 시대>를 예언했던 것이 언제였는데

그래서 재앙이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염려를 했던 것이 언제였는데

이제는 <50만>을 헤아린다고 하니 기가 차지 않는가?


세상에 무능도 이런 무능이 없다

처음부터 중국인들 출입을 막으라고 얼마나 성토했어도 듣지 않더니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는 듯 손을 놓고 있다가

이런 <대 재앙의 시대>을 맞이한 것이다


이것은 본인이 누차 언급했지만

초등학생이 정치를 해도 이것보다는 나을 정도다

완전 돌대가리도 이런 <아두 집단>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국민이다

<문>이 그렇게 강조했던

<사람이 먼접니다>라는 그 사람 문제다


현재 <문>과 <전라도 집단> 때문에 죽어나가는 사람이 얼마인가?

이것은 518 사건과, 박근혜가 받아먹었다는 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학살>이며, 지휘관의 잘못으로 몰살당한 부대원의 의미와도 같은 것이다


원래 기러기 등, 철새들은 이동할 때 리더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리더가 이끄는 대로 무조건 날아가게 되는데

그러나 그 리더가 길을 잘못 잡으면 무리가 쪼아서 죽여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부정축재는 죄인이 되지만

나라를 말아먹은 무능은 죄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둔한 국민들인가?...


그것도 모자라서 그 정권을 유지시키려고

<썩은 인간 이죄명>을 뽑은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고 하니

정말이지 답도 나오지 않고, 치료도 불가능한 <병자 집단>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라도 새 정부가 들어선 것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패닉에 빠진 <문 돌 정부>의 실정을 바로잡고

그 <화상>들을 모두 깨끗하게 정리한 후

그들이 망친 나라에 <재건의 시대>를 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과 그 잡탕들, 그리고 <쓰레기 이죄명>을 찍어준 자들을 제외하고

이 나라의 국민들은 그야말로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사태에 대해서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정부에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많다

그것으로 이 나라의 <선량한 사람>들이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

두보의 <국파산하재>란 글이 생각나고 또 생각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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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서는 3월 15일이 되면 생각할 것이 많아진다

그것은 당연히 탐욕자 이승만이란 사람이 저지른 일 때문이었다

물론, 그 자신이 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책임자는 부하의 과오도 책임을 지는 법이다


그래서 그날, 마산에서는 엄청난 일이 발생했으며

그 때문에 결국 이승만은 이 나라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이 나라는 그 후유증을 지금까지도 겪고 있으며

그것은 마치 큰 수술을 하고난 상처처럼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것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 며칠 전에 또 이 나라에서는 큰 선거를 치렀다

그런데 이제는 또 다른 형태의 부정선거가 판을 치고 있으니

그것은 전라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단 이기주의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아직도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엄연히 부정 선거에 속하는 것이다

선거의 취지와 궁극적인 목적인

이 나라의 발전을 저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금에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란 점에서 문제는 심각하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역사는 앞으로 전진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국민이라는 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라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 것만 고집한다면

시대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도 필요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앞의 상황들과 이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심각하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역 이기주의와 무조건적인 아집의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체제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디, 이번 3.15를 맞이하여 다시

진정한 민주주의와 이 나라의 발전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우리도 맞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절대로 필요 없는 빨갱이들과 종북, 친일 파 등의 문제도 함께 청산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것은 시급을 요하는 것임에도 누구 하나 적극적으로 나서는 자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면 결국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너무도 많다

그러므로 이번에 새로 당선된 대통령 이하, 새 정부가 주도해서 그런 일을 해결해주길 바라며

그리하여 이 나라에서 다시는 315와 <전라도 집단 저능 이기주의>가 판 치는 일이 없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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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통령 선거를 보고 느낀 것이 많았다

그 중의 하나는 단연 지역주의의 팽배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양패로 나뉘어서 후보들을 지지했고

그 결과는 박빙이라는 의미 없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현재의 문재인 정부 또는 더불어(무엇을 더불자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민주당의 실정이 극에 달했는데도

결과가 박빙이라는 것은 충격적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거가 아니라 편짜먹기의 전형적 결과였다


그리고 이재명 같은 자들은 완전 인간 쓰레기다

그런데도 오히려 여자들이 그를 밀어주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말 한 마디 잘못해도 성추행이라고 하고

옷깃만 스쳐도 성폭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여자인데 말이다


그런데 온갖 나쁜 짓은 다하고 돌아다닌 자에게 응원을 하다니

마치 안희정이나 오거돈 같은 자들을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기다 전라도 집단의 행태는 거의 행패수준이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완전 요원하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입으로만 떠드는 집단들이 그 정도로 선전을 한 것은 당연히 지역주의의 쾌거다

그것은 이 나라가 갈 길이 그만큼 멀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또 현 정부를 비호하는 태도이며, 앞으로도 그런 것을 묵인할 수 있다는 선견이다

그러나 그들은 최초 여성 대통령을 말도 되지 않는 구실로 짓밟았던 전력이 있었다


그것은 아전인수의 결과이며, 제 것은 무조건 좋다는 원시 발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무식하고 저능한 집단들이나 하는 짓이다

적어도 이 나라의 운명을 눈꼽만큼이라도 생각한다면 소신있는 투표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선거는 역시 낙제 선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피아간에 이 나라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진정으로 이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길 바라며

후보도 자질 미숙과 불량 인물들이 아닌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나라가 되길 다시 한 번 더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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