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生涯>

 1.4  統領 나폴레옹



 그 후 '나폴레옹'은 내정(內政) 면에서도 제(諸)개혁을 실시했다. '나폴레옹'은 전국적인 '세제(稅制)제도'와 '행정제도'의 정비를 진행시켰던 것과 동시에 '혁명기'에 괴멸적이었을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던 '공업생산력'의 회복을 시작으로 해서 '산업전반의 진흥'에도 힘썼다. 그리고 또
1800년에는 '프랑스은행'을 설립해서 통화와 경제의 안정을 도모했고, 1802년에는 그 유명한 ‘레지온드누르 훈장(L'ordre national de la legion d'honneur-명예군인 국가훈장)’도 창설했다.

 * 프랑스은행(불:Banque de France)

 프랑스의 중앙은행이며, 유럽중앙은행제도에 참가했다. 본점은 파리에 있다.
 
1716년에 경제학자 ‘존 로’가 프랑스은행의 전신이었던 ‘Banque Generale’를 설립.
 1718년에 정부가 획득하여 '프랑스왕립은행(Banque Royale)'으로 개칭했다.
 
1800년에 '나폴레옹'이 프랑스 내의 화폐통일을 목표로 해서 '프랑스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한 후, 1803년에 파리의 발권(發券)은행이 되었고, 1806년에는 은행의 총재, 부총재를 정부임명제로 제정했다.


<죤 로>


<프랑스 은행 정면>

 
 

                                                         <레지온드누르 훈장>
                       

 


 그리고 또, 국내의 법정비(法整備)에도 임해서 1804년에는 <프랑스 민법전> 이른바 <나폴레옹 법전>도 공포했다. 
그것은 그때까지 각지에 남아있던 여러 가지의 '관습법'과 '봉건법' 등을 통일했던 최초의 본격적인 '민법전'이었고 <만인의 법 앞에서의 평등>과 <국가의 세속(世俗-神聖의 반대)성>과 <신교(信敎)의 자유> 그리고 <경제활동의 자유> 등의 근대적인 가치관을 도입했던 획기적인 것이었다.




<1804-프랑스민법전 초판. 제1page>
                       

           

 그리고 또한, 교육개혁에도 진력을 다해서 <공공교육법>을 제정했으며, 
교통망의 정비도 정력적(精力的)으로 추진했다. 그리고 또 '프랑스혁명' 이후, 적대관계에 있었던 '로마가톨릭교회'와의 화해에도 관심을 가졌던 '나폴레옹'은 1801년에 교황이었던 '피우스7세(또는 비오7세-Papa Pius VII)'와의 사이에 '정치와 종교조약'을 맺어서 국내의 종교대립도 완화했다.          

 


  * 피우스7세(또는 비오7세-Papa Pius VII)


 1742년 4월 14일-1823년 7월 20일
 로마교황(재위:1800년 3월 14일-1823년 7월 20일)
 
가톨릭교회의 사제
 본명은 '죠르죠 바르나바 루이지 키아라몬티(Giorgio Barnaba Luigi Chiaramonti)'
 
나폴레옹과 격렬하게 대립해서 유폐(幽閉)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유럽 외교계에 있어서, 교황청의 지위를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혁명으로 망명했던 귀족들의 귀국을 허락했으며, 거기다 '왕당파'나 '자코뱅파' 등의 전력을 불문하고 군대와 행정에 등용하며 정치적인 화해를 추진했다. 하지만 체제를 전복하려던 사람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고 탄압했다.

 그리고 또 그 무렵 '
나폴레옹'이 '통령정부'의 '제1통령'이 되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그를 노린 '암살미수사건'은 점점 더 격화되어서 1800년 12월에는 '왕당파'에 의한 '폭탄테러'도 일어났다. 그리고 또, 그러한 사건의 끝에 일어났던 1804년 3월의 '프랑스왕족' '엔갼 공’의 처형은 당시 왕국을 유지하고 있던 '유럽 제국'의 '반 나폴레옹' 감정을 상기시키게 하는데 충분하게 했다.

 


 * 엔(안)갼 公(Louis Antoine Henri de Bourbon-Conde, duc d'Enghien)


 1772년 8월 2일-1804년 3월 21일
 프랑스의 귀족으로, 프랑스혁명기의 망명귀족(에미그레=Émigré)들의 리더 중 1명.

 
<내력>

 그는 '
부르봉家'의 지류(支流)였던 '부르봉-컨대家'의 '컨데公' '루이6세' ‘앙리’의 상속인으로서 태어났다. 그리고 '바스티유습격' 후에는 조모의 친가였던 ‘바덴’ 변경(邊境)의 영지(領地)로 망명해서 '프랑스혁명전쟁'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대한 음모를 기도했다는 것으로 '프랑스군'에게 붙잡혔고, 1804년 3월 20일 '파리' 교외의 '바센누 城'에 이송된 후, 군법회의 멤버 7명의 대령 앞으로 연행되어서 그 1시간 후에 처형되었다. 그의 처형 이유는 '나폴레옹'에 대한 사한(私恨-사적인 감정 또는 원한)과 '페리고르 백작'의 음모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또 그때, 그는 '왕당파의 음모'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왕당파'에 의한 '나폴레옹 암살 미수의 배후'로서 처리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처형은 '페리고르'에 의해서 '왕족살인의 죄'를 '나폴레옹'에게 덮어씌우게 하는 빌미를 제공해주었고, 그것으로 '유럽제국'은 다시 '나폴레옹'에 대한 적의(敵意)를 상기시켜서 '나폴레옹전쟁'으로 연결해갔다.


                       

             

그래서 '나폴레옹 진영'은 잇따르던 암살 미수에의 대항으로부터 독재(獨裁)의 色을 더욱 강화해서
그때부터 제제(帝制)에의 길로 돌진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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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프스산맥을 넘어가는 나폴레옹 >

 



 <1 生涯>

 1.4  統領 나폴레옹

 그리고 12월에는 '독일'방면의 ‘호헨린덴의 싸움(영:The Battle of Hohenlinden, 프:La Bataille de Hohenlinden-프랑스혁명전쟁 중 1800년12월 3일, '뮌헨'인근의 '호헨린덴'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 '쟌 빅토르 메리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1763년 2월 14일~1813년 9월 2일 : 군인. 나폴레옹의 라이벌적인 존재였다)장군이 인솔하던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에 대승했다. 그러자 그 다음 해 2월 '오스트리아'는 '和約'에 따라서(류네빌의 화약-불: Paix de Luneville, 영: Peace of Luneville, 1801년 2월 9일) '라인 강'의 좌단(左端)을 '프랑스'에 할양했고 '북쪽 이탈리아' 등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삼게 했다. 그리고 또, 그 화약으로 인해서 '제2차 대불대동맹'은 붕괴했고. 프랑스는 그때부터 '영국'만 저지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때 '영국'에서는 국내의 '대불강경파'의 실각과 함께, 종교 · 노동운동
문제 등으로 어수선했다. 그리고 또 그때, 프랑스에서도 아무리 국민들이 '나폴레옹'을 따르고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그러나 국내통치의 안정에도 힘을 쏟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1802년 3월 '아미앵의 화약'(영: Peace of Amiens, 불: Paix d'Amiens. 1802년 3월 25일)’으로 강화가 성립되었다.

           


 * 류네빌의 화약(불: Paix de Lunéville, 영: Peace of Lunéville)



 1801년 2월 9일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전쟁) 기간' 중에 '프랑스' 동부의 도시 '류네빌'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체결했던 강화조약이다. '류네빌의 강화조약'(불: Trait de Lunéville, 영: Treaty of Lunéville)이라고도 불린다.

 <개요>

 '오스트리아'는 1798년에 '제2차대불대동맹'을 결성해서 '북쪽 이탈리아'와 '라인 방면'을 침공했다.
 그러나 1800년 '마렝고 전투'와 '호헨린덴의 전투'에서 패했고, 그 대가로 강화에 임했다.
 그리고 또, 그로 인해서 '제2차대불대동맹'은 붕괴했고 '영국'만이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조약에 따라서 '오스트리아'는 '바타비아 공화국' '헤르베티아 공화국' '치자르피나 공화국' '리그리어 공화국'의 승인을 재확인했고 '프랑스'에 '라인 강 좌안 지역(라인랜트)'의 병합을 승인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캄포·포르미오의 화약'을 재확인했던 것으로, 패전국이었던 '오스트리아'에게는 아주 관대했던 내용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 바타비아 공화국 또는 바타브, 바타비안 공화국


 네:Bataafse Republiek, 불:République batave
 영: Batavian Republic

 1795년부터 1806년까지 현재의 '네덜란드'에 존재했던 '프랑스의 위성국'
 '네덜란드연방공화국' 붕괴 후에 성립했다
 1806년에 '루이·보나파르트'가 국왕이 되자 '홀란드왕국'이 되었다
 국명은 고대 '로마시대'의 '네덜란드 북부' 현재의 '남(南)홀란드 주(州)'
 일대에 정주(定住)하던 '게르만계(系)'의 '바타위 족'에서 유래했다
                                   

 

 

 


 ** 헤르베티아 공화국(불:République helvétique, 독: Helvetische Republik)



 1798년부터 1803년간에 '스위스'에 존재했던 공화국

 <개요>

 1798년 3월 5일 '프랑스 공화국군'은 '스위스'에 침공했다. 그러자 '스위스'의 '동맹단체(盟約者團)'는 붕괴했고, 4월 12일에 '헤르베티아 공화국'의 건국이 선언되었다. 그러자 그때까지의 주(州)의 독립성이 높았던 정치체제와 봉건적인 권리는 폐지되었고 '프랑스혁명'의 제 원리를 도입했던 중앙집권적인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그러했던 진보적인 정책은 '스위스'의 국정(國情)과는 맞지가 않아서 반발을 불렀다. 그리하여 '니트바르덴(Nidwalden)'에서 발생했던 봉기는 점령군에 의해서 진압되었지만, 그러나 정황불안과 재정문제가 계속되어 국가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했다. 그러자 1803년 2월 19일 '나폴레옹·보나파르트'의 중재로 이전(以前)의 맹약자단이 부활했고, 그로 인해 중앙집권적인 정부는 폐지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몇 곳의 영역(領域)이 주(州)로 승격되었고, 그래서 헌법의 규정도 재검토되는 등, 그 영향은 오늘에까지도 남아있다

     


  ** 치자르피나 공화국(이: Repubblica Cisalpina)

 



 1797년부터 1802년까지 '이탈리아 북부'에 존재했던 '프랑스'의 위성국(衛星國)
 1802년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개칭했고 1805년에 '이탈리아왕국'이 되었다
 국명은 고대 '로마시대'의 '북부 이탈리아'의 호칭이었던
 '갈리아·키사르피나(Gallia Cisalpina-알프스 쪽의 갈리아란 뜻)'에서 유래했다

 <개요>

 1796년 '나폴레옹·보나파르트'는 '이탈리아 원정'에서 점령했던 '북쪽 이탈리아'에 '치스파다나 공화국(La Repubblica Cispadana-설명생략)'과 '트란스파다나 공화국(La Repubblica Transpadana-설명생략)'을 건국했다. 그 兩공화국은 1797년 6월 29일에 통합되어 '치자르피나 공화국'이 되었다.
 1797년 10월 17일에 그 공화국은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의해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家)'에 승인되었다. 공화국의 수도는 '밀라노'. 건국 시에는 4만 2,500평방 킬로의 국토와 인구 324萬 명을 가지고 있었다. 행정구획으로 20개의 현(縣-道)이 있었다.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전 국토가 점령되었지만, 그러나 1800년의 '마렝고 싸움' 뒤에 재건되었다. 1802년 1월 26일 '치자르피나 공화국'은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개칭했다. 거기다 '프랑스 제1제정'의 성립 시(1805)에는 괴뢰국가인 '이탈리아왕국'이 되었고, 그로 인해 황제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왕'을 겸임했다. 그리고 또, 나중에는 그의 양자 '우제누·드·보아루네(조세핀의 아들)'가 부왕(副王)이 되었고, 왕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의 패배와 함께 소멸했다.

     

 

                      

 
 ** 리그리어 공화국(La Repubblica Ligure, 1797-1805 ; 1814)



 '이탈리아' 북서부, 현재의 '리그리어 주' 대부분에 해당하는 장소에 존재했던 나라
 '몸벨로(Mombello-아렛산드리아에 위치함) 화약'의 결과
 '나폴레옹·보나파르트'에 의해서 1797년 6월 14일에 세워졌다
 수도는 '제노바'
 단기간만 존재했었던 '프랑스'의 위성공화국이었고 1805년 6월 '프랑스'에 병합 되었다


                     

 
 ** 토스카나 공국(Granducato di Toscana)

 근세 '이탈리아'에 존재했던 국가
 영역은 현재의 '토스카나 주'에 해당한다

                                   

       

 
 ** 에트루리아 왕국(Regno d'Etruria)


 근세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왕국
 1801년 2월 9일에 체결되었던 '류네빌의 화약'에 의해서
 '토스카나 대공국'은 '프랑스'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동년 3월 21일에 '나폴레옹'에 의해서 괴뢰국가로 성립되었다
 그러다 1807년에 붕괴했고 '퐁텐블로우 조약'에 의해서 '프랑스'에 병합되었다

                                   

<위치도- 이탈리아의 로마 바로 위에 위치>


                         그리고 또 '토스카나 대공국'의 '프랑스'에의 양도(직후에 대공국은 폐지되었고 '에트루리아 왕국'이 된다)와 '치자르피나 공화국'의 영토 확대, 그리고 또 '나폴리'에 있어서의 '왕제의 부활' 등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여러 문제에 관해서도 동시에 결정되었다.


<류네빌의 샤토 城內>  


  * 아미앵의 화약(영: Peace of Amiens. 불: Paix d'Amiens)

 1802년 3월 25일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체결되었던 '프랑스혁명전쟁'의 강화조약.
 '
아미앵 강화 조약'(영:Treaty of Amiens 불:Trait d'Amiens)이라고도 불린다.
 '
강화조약'은 '프랑스북부' 도시 '아미앵'에서 체결되었다.


<아미앵 대성당>
                       


<개요>

 '
영국'은 1793년에 '제1차 대불대동맹'을 결성 '프랑스'에 선전(宣戰)한 이래 '프랑스'와 전쟁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1801년에 '류네빌의 화약'을 체결해서 '제2차 대불대동맹'으로부터 탈락했고, 그리하여 그때 '영국'만이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同年 '영국'에서는 '對프랑스강경파'였던 '윌리엄 피트(William pitt-사진은 제일 처음에 소개되었으며, 자세한 것은 후술함)가 국내의 종교문제 등으로 퇴진하자, 그 뒤를 이어서 '對프랑스융화파'였던 '헨리 아딩톤'이 내각을 조직했다.

 * 헨리 아딩톤(Henry Addington) 1757. 5. 30~1844. 2. 15

                   

 

 그런 한편 '프랑스'에서도 '제1통령'의 지위에 올랐던 '나폴레옹'이 대외 전쟁보다는 국내안정을 더 중시해서 강화 쪽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1802년 3월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강화조약에서 '영국'은 ‘몰타 섬’과 ‘케이프 식민지’ 그리고 ‘이집트’의 점령지로부터 군을 철수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몰타(Malta) 섬'은 ‘요한 기사단(騎士團)’에게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는 '네덜란드(바타비아 공화국)'에 반환되게 되었다.                         

 

 ** 몰타(Malta) 지중해 중앙에 있는 섬. 몰타공화국



                                                        

                                           

                                                      <바렛타 서쪽 시가-2004년>


 
 **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했던 남아프리카의 식민지.
 케이프타운으로부터 발전했고, 1795년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성요한기사단의 旗 문양>



  ** < 聖 요한기사단 >

 11세기의 종교기사단.
 '템플기사단(라: 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olomonici)'
 '독일기사단과' 함께 중세 유럽의 3大기사수도회의 하나로 꼽힌다.
 원래는 성지순례를 하는 크리스트교도의 보호를 그 임무로 했지만
 나중에는 성지(聖地) 방위를 주력(主力)으로 활약했다.
 '병원(病院)기사단(Knights Hospitaller)'이라고도 하며
 그 본거지를 옮기는 데에 따라서 '로도스(Rhodes섬-에게 海 내의 그리스 령의 섬)기사단'
 '몰타기사단'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현재의 정식명칭은「로도스 및 몰타의 예루살렘 성요한병원독립기사수도회」이다.
 (상세한 것은 이 이야기와 별 관계가 없으므로 생략함)

 


<맛콘 포위전에서 성벽을 오르는 기사단>


 그리고 또한 '프랑스'는 그때 '나폴리 왕국'과 '로마 교황령'으로부터 군을 철수할 것을 약속했다.

 그
후 '유럽'에는 약 1년 남짓 평화로운 기간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아미앵 화약'은 거의 준수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1803년 5월 '영국'이 '네덜란드'에서 '프랑스' 선박을 나포했던 것을 계기로 양국관계는 다시 악화되었고
 그러자 5월 16일 '영국'은 '和約'을 파기하고, 재차 '프랑스'에 선전(宣戰)했다.
 그
후, 양국은 다시 '나폴레옹전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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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스산맥을 넘어가는 나폴레옹- 나폴레옹이 가슴에 손을 넣고 있는 것은 위통(胃痛)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1 生涯>

 1.4  統領 나폴레옹


 그렇게 해서 드디어 '통령(統領)정부'의 '제1통령(제1집정)'이 되어서 정권(政權)의 자리에 올라앉았던 '나폴레옹'이었지만, 그러나 그때 국내외(國內外)의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제1통령 나폴레옹>

           
 그리고 그 첫째로

'나폴레옹'은 '제2차 대불대동맹'에 포위되어 있던 '프랑스'의 위기를 타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 제2차 대불대동맹(Second Coalition)

 1798년 12월 24일-1801년
 '프랑스'의 세력확대가 위협이라고 느꼈던 '유럽 제국'이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서 결성했던 동맹이다.

 
<개요>

 
1798년 '이탈리아원정'을 끝냈던 '나폴레옹'은 '영국'과 '인도'와의 연결을 차단할 목적으로 '이집트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나폴레옹 군'은 '오스만제국' 상대의 육전에서는 연승했지만 'Nile 해전'에서는 '넬슨'이 인솔하던 '영국함대'에 패했다. 그로인해 '이집트'에서 잠시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던 '나폴레옹'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것을 호기라고 보았던 제국들은 동년 12월 24일 '제2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했고, 이어서 '프랑스'에로의 공격을 개시했다. 그때 참가했던 국가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아일랜드 포함), 그리고 '러시아제국'과 '오스만제국'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이탈리아' 재(再)탈환을 목표로 세웠다. 그리고는 당시의 상식이라면 '지중해 측'으로 루트를 잡고 군을 이동해야 했지만, 그러나 그는 '
알프스산맥'을 넘어서 '북쪽 이탈리아'로 들어가려는 기책(奇策)을 취했다. 그러나 병(兵) 배치의 실패 등으로 인해서 '오스트리아' 대군(大軍)에게 대패(大敗) 바로 직전까지 몰렸다. 하지만 1800년 6월, 별동대(別動隊)의 도착으로 '머렝고우(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 겨우 승리했다. 그러나 그때, 별동대의 지휘관이었으며 '나폴레옹'의 친구였던 '드제(이)'가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
           


  * 1800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1800년 5월 '나폴레옹'은 약 3만 7,000명의 군대를 '제네바(Genève-스위스 서부)'에 집결시켰다. 그리고는 '그랜드 세인트버나드(불: Col du Grand-Saint-Bernard. 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위치한 알프스산맥의 고개 중 하나) 고개’를 넘어서 '북쪽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 위 그림, 데이비드 작「세인트버나드 고개를 넘어가는 나폴레옹」은 그때의 정경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탔던 말은 노바(당나귀의 한 종류)였다.


<알프스 산맥-아래가 이탈리아 반도>


<나폴레옹 군이 지나갔던 길=세인트버나드 고개>


<세인트 버나드 犬>
                                   



 ** 데이비드(Jacques-Louis David)


 1748년 8월 30일 - 1825년 12월 29일
 프랑스 新古典主義의 대표적인 화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프랑스史의 격동기에 활약했던 화가. 


                                   

                       
 그 무렵, '오스트리아군'은 '제노바'에서 농성하던 '맛세나' 지휘하의 '프랑스 부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를 돌아서 '밀라노'와 '파비아'를 점령했다. 하지만 '제노바'의 '프랑스 부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서 6월 4일에 항복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군'의 주력부대는 '토리노'에서 집결했다.                        

 

                <토리노의 위치도-그림은 이탈리아>

 

                       
 하지만 그때 '프랑스군'에 의해서 퇴로가 차단된 형태가 되었던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메라스'는 동진(東進)을 결의했다. 그리하여 6월 14일 양군은 '아렛산드리아(Alessndria-이탈리아 북부)' 근교의 '마렝고'에서 만나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바로 그때 '드제(이)'가 이끌던 '별동대'가 합류해서 역습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승리와의 교환으로 '드제(이)'는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렛산드리아의 위치도>

                       


  ** 마렝고 전투(Batter of Marengo)



 1800년 6월 14일 이른 아침.
'오스트리아군' 31,000명은 '아렛산드리아'로부터 '마렝고'로 전진했고
오전 9시에 그곳에서 진을 치고 있던 '빅토르(Victor)'의 '프랑스군 부대'를 공격했다.
그리고 그때, '보나파르트'는 그곳에서 5킬로 후방에 있었다.

 


 *** 빅토르(Claude Victor-Perrin)

 
 1764년 12월 7일 - 1841년 3월 1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元帥). 베르노(펠린)공작.
 
나폴레옹의 오랜 전우였으며, 툴롱 공략전에서 보나파르트를 만나서 많은 싸움을 같이 치러냈다. 밝고 호감이 가는 성격으로 <화려한 태양>이라고 불렸고, 많은 병사들로부터 존경도 받았지만, 그러나 꼼꼼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나폴레옹과 자주 부딪혔다. 왕정복고 즈음에는 '부르봉 家'에 일찍부터 충성을 맹세했고, 또 百日天下 때에는 나폴레옹에 따르지 않고 '루이 18세'를 따라서 국외로 망명했다. '제2차 왕정복고' 후에는 전쟁 대신 근위군(近衛軍) 지령(指令)을 역임했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왕에게 소외당해서 만년을 불우하게 보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 공격이 '오스트리아군'의 주력부대에 의한 것이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그 전장에 즉시 ‘란누’와 ‘뮤라’ 부대를 증원 투입했다.
그리고는 그 사이 별동대에게도 전령을 보냈고
자신은 오전 11시에 그 전장에 도착했다.

                                   


 

*** 란누(Jean Lannes)


 
 1769년 4월 10일-1809년 5월 31일
 나폴레옹전쟁기의 군인, 원수. 전설적인 용사로서 알려져 있다.

 상세한 것은 후술


                                               



 *** 뮤라((Joachim Murat-Jordy)

 1767년 3월 25일-1815년 10월 13일
 프랑스의 군인, 원수. 후에 나폴레옹의 의동생이 되는 프랑스 황족.
 나폴리왕 죠악키노 1세(재위 1808년-1815년) 


                                               

 

 그 시점에서 '프랑스군'은 23,000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래서 수(數)적으로 월등했던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기다 오후 2시에는 '마렝고'를 '오스트리아군'에 빼앗겨서 '프랑스군'은 3킬로나 후퇴했다. 그러자 ‘메라스’는 승리를 확신했고, 그 승보를 '빈'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때, 나폴레옹은 아직 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후 5시, 마침내 '드제(이)'가 이끌던 별동대 5,000명이 그곳에 도착했고 '프랑스군'은 전황을 역습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때 '드제이'는 '오스트리아군' 정면으로 돌격해서 들어갔다. 그리고 '케레르만'의 기병부대가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를 기습했다.
                                   


 *** 프랑소와 에티엔 드 케레르만-2대째 바르미 공작


 1770년 8월 4일-1835년 6월 2일
 프랑스제국의 기병장군. 프랑스제국의 명예원수.
 프랑소와 크리스토프 케레르만의 아들.
 외교관 프랑소와 크리스토프 에드몬 드 케레르만의 부친.
 나폴레옹전쟁에 있어서 대담하고 숙달된 전법으로 활약했던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러자 '오스트리아군'은 곧 분산되었고 '아렛산드리아'로 패주했다.
 그리하여 결국 그 싸움은 '프랑스군'의 역전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그 전투 중에 승리에 큰 공헌을 했던 '드제(이)'는 전사했다.



 그리고 또 그때, '라인 방면'에서도 '이탈리아 방면' 군사령관이었으면서 '라인 방면' 군사령관이었던
‘모로’가 6월 19일의 ‘홋호슈탓트’ 싸움에서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했다.
그리하여 
7월에는 '뮌헨'까지 강공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7월 15일,
휴전에 들어갔다.




<모로>



  그러나 그 사이에 양국 간에 강화(講話)에 대한 대화가 오갔지만, 그러나 교섭은 무위로 끝났다.
그리고
11월 13일, 휴전기한이 지났던 것과 동시에, 다시 양군은 전투를 개시했다.
그러자 '모로'는 공격을 재개했고, 12월 3일에는 '호헨린덴의 싸움'에서
'오스트리아'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는 계전(繼戰)의 욕구를 상실했고
다시 강화를 위해서 서로 간에 대화가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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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3  젊은 英雄

           


    <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 (The Campaign of Egypt and Syria) - 계속 >


  

 그리고 또 '上이집트'(이집트 남부)에서는 '카이로'에서 멀리 도망쳤던 '맘르크'들이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고, 또한 저항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랑스군'과 '카이로'의 시민들 그리고 또 '이집트인'들과의 관계도 해방 자와 피해방자(被解放者)의 관계가 인정되지 않아서 '카이로' 입성으로부터 불과 3개월 후였던 10월 21일에는 '카이로'에서 폭동이 일어나서 '프랑스兵' 300명이 폭도들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그러자 또 그 보복으로 '이집트인'들도 2,500명 이상이나 살해당했다. 그리고 또한 '프랑스군'이 진압 목적으로 '아즈 헐' 회교사원 등의 종교시설에 공격을 가했던 것도 '이집트인'들의 반감을 높였다.

 아무튼 그 후 '프랑스군'은 '상 이집트'의 평정에 별동대를 파견했던 한편 '오스만군'을 격퇴하기 위해서 '시리아'지방으로 북진했다. 그리고 또
그 다음해였던 1799년에는 '팔레스타인'으로까지 들어가서 '얏파(Jaffa-이스라엘의 텔아비브 지역)'를 점령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악카(Acre-이스라엘 西 갈릴리 지역 북부에 있는 市)' 공략에는 실패를 해서 어쩔 수 없이 철퇴했다.

                       

 

                                                         <얏파>                                    

                         
 그런데 또 설상가상으로 그때 '얏파'의 '프랑스군' 내에서는 '페스트'가 크게 유행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 많았던 '페스트환자'들을 방치해서 그냥 죽게 했었다는 것으로 현대의 역사가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지만, 하지만 또 일설에는 '나폴레옹'이 그들에게 아편을 주어서 안락사(安樂死) 시켰던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어쨌든 '나폴레옹'은 그때 그 일로 해서 자신이 책임추궁당할 것을 미리 예상하고는 그 '페스트 환자'들을 문병하며 그 상황을 그리게 했다고 하는데(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 옆에 가는 것조차도 꺼려했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얏파의 페스트 환자를 문병하는 나폴레옹>이란 그림이다.(↓아래)                  

 

 

                       
 어쨌든 또 그 당시에는 '프랑스' 본국에 대해서도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공격을 재개하고 있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오리엔트'에서의 작전을 단념하고 본국으로의 귀환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8월 22일, 소수의 측근들만 데리고서 비밀리에 '이집트'를 탈출했다.
 그래서 그곳에는 보급도 끊기고 또한 현지인들의 저항에도 맞서야만 했으며
 그리고 또한 역병에도 시달리려야만 했던 '프랑스군' 잔병들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아무튼 '나폴레옹'이 그곳을 떠난 후 ‘드제(이)’가 인솔하던 '상 이집트'의 별동대들은 당시 '맘르크'의 수령이었던 '무라드 베이(Murad Bey-1750~1801. 자세한 것은 생략함)'를 下野시키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러나 제대로 된 지휘관이 없었던 '프랑스군'은 '영국'과 '오스만 제국'의 공세를 간신히 버텨내며 그곳에서 잔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던 중 
1801년이 되자 그 2년간에 걸쳤던 비참했던 싸움도 드디어 끝을 보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그곳에서 생존했던 15,000명 정도의 '프랑스군'은 '영국'과 '오스만 제국'에게 항복을 하고는 겨우 '프랑스'로 귀환을 했다.                       


   ** 드제(이)(Louis Charles Antoine Desaix :1768년 8월 17일~1800년 6월 14일)


 

 프랑스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기의 군인이며, 나폴레옹의 친구
1798년의 이집트, 시리아 전쟁에 참가했고
그 공정한 인품으로부터, 이집트 사람들로부터 <정의의 술탄>이라고 불려졌다
하지만 그는 '마렌고(Marengo) 싸움'에서 열세에 처해있던 프랑스군에
원군으로 달려들어서 승리를 거두게 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그곳에서 전사했다

                                   


                                                                    <무라드 베이>
                                   



<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 - 끝 >


           

 그러나 그 바로 직후 '프랑스군'은 ‘아부키르 만(灣) 해전’에서 ‘넬슨’이 인솔하던 '영국함대'에 대패했고
 그리하여 '나폴레옹 군'은 '이집트'에서 고립되었다.
 그리고 또 그해 12월에는 '영국'의 요청으로 다시 '대불대동맹'이 결성되었으며(제2차 대불대동맹)
 이어서 '프랑스'본토 또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다음해였던 1799년에는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를 탈환함에 따라서
 '프랑스' 국내에서는 '총재정부'를 규탄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나폴레옹'은 자신의 군대는 그곳에 남겨두고
 몇 명의 측근들만을 데리고서 '프랑스'로 급거 귀국했다.
 그러자 민중들은 그의 도착을 기쁨과 환희로서 맞이했다.           

 * 부르주와지(프:Bourgeoisie)



 시민혁명 때, 혁명의 추진주체가 되었던 도시의 유복했던 상공업자들을 말함.
 짧게는 '부르주아(Bourgeois)'라고도 하지만, 그러나 '부르주아'는 개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중에 '공산주의사상'에서는 '산업자본가'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고
 그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멸칭(蔑稱)으로 이용되었다.

 



 아무튼, 그리하여 11월이 되자 '나폴레옹'은 ‘브르주와지’의 의견을 받아들였던
‘에마뉴엘-죠제프 시에예스’ 등과 함께 ‘브류메이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이어서 '통령정부'를 수립했고, 스스로 '제1통령'(제1집정)이 되어서는
실질적으로 독재권을 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 에마뉴엘-죠제프 시에예스(이메뉴얼-Emmanuel-Joseph Sieyes)


 1748년 5월 3일-1836년 6월 20일
 프랑스의 혁명지도자, 정치가, 성직자.
 총재정부 5명의 총재 중의 한명(루벨의 후임).
 프랑스혁명초기에 활약했으며, 브류메이르의 쿠데타에도 크게 관여했다.
 집정정부에서는 제2 집정으로 취임했고, <혁명의 두더지>라는 별명이 있었다.
 성직자였기 때문에 ‘아베 시에예스(Abbe Sieyes)'라고도 불렸다.
 저서로 <제3 신분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 브류메이르(또는 브뤼메르) 쿠테타
   1799년 11월 9일<프랑스 혁명달력 브류메이르(霧月) 18일>



  <개요>

 '나폴레옹'이 '총재정부'를 넘어뜨린 군사쿠데타였다.
 그 결과 그는 '집정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제1집정(執政)'이 되었다.
 그러므로 '프랑스혁명'은 여기에서 끝이 났다고 여겨진다.
 '브류메이르 18일의 쿠데타'라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의 혁명은 1794년의 '테르미도르의 쿠데타'에 의해서 끝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여파로 인해서 계속 되고 있었던 '부르주와지 혁명'이
 '나폴레옹'에 의해서 완전히 정리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의원들에게 저항을 받고 있는 나폴레옹>



   <배경>

 '프레리아르 30일의 쿠데타'로 '총재정부'의 실권을 잡은 '시에예스'는 정국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강력한 정부를 지지하는 헌법 개정을 생각했다.


 < 프레리아르 30일의 쿠데타>


 1799년 6월(초원의 달) 18일 '아부키르 灣' 해전의 참패에 이어서 '이탈리아'에서도 '프랑스군'이 패배하자 '프랑스' 국내에서는 심한 동요가 일어났고, 그 결과로 '온건파'가 실각하고, '자코뱅파'가 다시 실권을 잡게 된 사건을 말함

                             

 

 그러나 헌법 개정을 지지하던 원로회의는 통과시킬 수 있었어도, 기존 헌법의 옹호파가 많았던 ‘5백인회의’를 설득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 그는 '이집트원정'에서 귀환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폴레옹'을 이용해서 군사쿠데타를 획책했다.


 < 참고 = 프랑스의 원로원(元老院-프: le Sénat)>



 '프랑스'의 '上院'에 相當하는 의회의 정식명칭이며, 그 명칭은 고대 '로마시대'의 '원로원(라:Senatus)'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의 '의사당'은 '원로원'과 '국민의회'로 구분되어 있고
 각각 그 소재지가 다르다.
 '국민의회'='부르봉궁전'
 '원로원'='뤽상부르궁전'.
 그러나 양자 모두 '파리'에 있는 궁전을 사용하고 있다.

 <연혁(沿革)>

 1795년에 창설된 Conseil des Anciens(元老會議, 元老評議會)를 기원으로 한다.
 제2제정시대의 1851년에 Sénat(元老院)으로 칭해졌다.
 제3공화정시대의 1875년부터 1940년에는 Sénat Républicain(共和國元老院)이라고 칭해졌다.
 제4공화정시대의 1946년부터 1958년에는 Conseil de la République(共和國參議院)이라고 칭해졌다.
 제5공화정 성립 시에 Sénat(元老院)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구조(構造)>

 定數는 343명. 피선거권은 30세 이상의 '프랑스국민'이며, 임기는 6년이다.
 의석은 3년마다 半數가 改選된다.
 권한은 몇 개의 例外를 제외하면 '국민의회'와 거의 동등하다.
 간접선거제가 채용되고 있어 96곳의 본토 縣(道) 및 해외 4현 그리고 '재외 프랑스인' 대상자 중에서 각각 선거인이 구성되고, 그들에 의해서 선거가 실시된다.

 <권한(權限)>

 '국민의회'와 함께 兩院制를 구성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일본'이나 '영국' '미국'과 달리 하나의 의회를 구성하는 의원이 아니고, 양자 모두 독립한 의회이다.
 그리고 또 '프랑스'에서는 '국민의회'에 우선권이 있어서 '원로원'은 주로 자문기구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나폴레옹'은 그때 처음부터 <쿠데타를 성공시키기 위한 '검(劍)'>에 지나지 않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것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자신도 나중에 <그것은 '시에예스'들이 주동했던 것이었고, 나는 그 앞잡이였을 뿐이었다. 나는 단지 그 결과만을 받았을 뿐이었다>라고 술회한 바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나폴레옹'의 역할은 처음부터 수동적이었으며, 주모자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은 그때 '이집트'로부터의 '적전도망죄'에 대한 혐의가 걸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쿠데타는 그의 입장에서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 후, 시에예스 등이 집정을 시작하려 했을 때, 그 의장(議長)을 누구로 할지에 대해서 상의되었다. 그러자 또 바로 그때 '
나폴레옹'은 민중의 인기와 무력을 배경으로 재빨리 그 자리를 차지했다.

 어쨌든, 그리하여 '제1집정'이 된 '나폴레옹'은 이후 '시에예스' 등을 억제했다. 그리고는 그로부터 5년 후였던 1804년에 제정(帝政)을 시작했고, 이어서 스스로 황제에 즉위한 다음, 이른바 '나폴레옹전쟁'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나 만약, 그 쿠데타가 실패했었더라면
'나폴레옹'은 그때 '이집트'로부터의 '적전(敵前)도망죄' 및 ‘국가반역죄’로
당연히 총살형을 면치 못했을 운명이었다.
           



           



 




  

 


 < Napoléon Bonaparte(11)-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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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3  젊은 英雄


             

 아무튼, 그러나 '오스트리아'에 대한 육지에서의 그러했던 전승과는 반대로 당시 '대불대동맹'의 주축이었으며,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영국'에 대해서는 '프랑스'는 이렇다할만한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흥망 1300-1923>

 그러자 '나폴레옹'은 당시 '영국'의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었던 식민지 '인도'와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서 '英-印교역'의 중계 지점이었으며 또한 '오스만제국'(↑그림-자세한 것은 생략함)의 지배하에 있었던 '이집트'를 확보하기 위해서(이집트원정 계획) '총재정부'에 진언을 냈고, 그에 승낙을 받아냈던 '나폴레옹'은 1798년 7월에 '이집트'에 상륙 그리고는 이어서 '피라미드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고는 바로 '카이로'에 입성했다.

 


<카이로에서의 나폴레옹>


     

 *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The Campaign of Egypt and Syria)
    그냥 'The Expedition to Egypt' 라고도 함


 

 ※ 이야기가 복잡해지므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설명을 생략함

 < 개요 >

 1798년부터 1801년까지 '프랑스군'이 '이집트'와 '시리아'에 원정했던 전쟁이었으며 '
나폴레옹'이 인솔했던 5만의 '프랑스군'은 '이집트'에 상륙한 후 3년에 걸쳐서 '이집트군'과 '영국군' 그리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던 '오스만제국군'과 싸웠다.

 
< 배경 >

 '
나폴레옹'이 그때 '이집트원정'을 계획했던 이유는, 대륙 제패를 목표로 바다 건너에 있던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 '프랑스 측'에는 눈에 가시 같았던 '영국'은 '인도'라는 중요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 접촉 방법으로 '이집트'를 경유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 등으로 '프랑스'로서는 그 '이집트'를 빼앗는 것이 '영국'과 '인도'의 관계, 특히 '인도'와 '지중해'와의 관계를 제거할 수 있는 전략상 절호의 기회라고 보았다.

 
그런 한편 당시의 '이집트'는 그때까지 약 300여 년간이나 '오스만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그러나 그 즈음에는 긴 통치로 인한 피로감으로 인해서 '이스탄불'에서 미치는 힘이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그때 24개로 나누어져있던 현(縣)을 그 현들의 지사(知事-현의 장관)들이 지배하는 일명 '맘르크'라는 유력자들에 의해서 실질상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 마무루크(맘르크-Mamluke)   ※ 역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소개만 함


 

 '마무루(르)크' 또는 '맘르크'란 '이슬람세계'에서 노예출신의 군인들을 지칭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原義는 <소유(m-l-k)된 사람>을 의미함. 그리고 본래 그것은 '‘아브드' '쟈리야' 등의 '아라비아어'로 노예를 가리키던 여러 가지 말들 중 남성노예를 가리켰던 말 중의 하나였지만, 특히 '맘르크'란 말은 9세기 무렵부터 19세기 초두 무렵까지 '이슬람세계'의 각지에서 넓게 활약했던 백인 노예 출신의 군인들을 가리켰던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그 '이슬람세계'에 있어서의 '백인'이란 '흑인'의 순수한 대의어(對義語)로 당시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던 '네그로이드'를 제외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대륙에서 살고 있었던 인종들이 대개 그 백인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군인으로 활약했던 그 '맘르크' 출신자들은 대체로 '키프체크' 등의 '테르크계 민족' 혹은 '체르케스인' 등의 '카프카스계 민족'이었지만, 그러나 '몽골인'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스라브인' 등의 민족들도 그에 포함되었다.
 '맘르크'는 대부분이 유소(幼少) 무렵부터 승마를 즐기는 기마민족 출신으로, 아이들 때부터 승마나 활쏘기 창술 등의 훈련을 철저하게 시켰고, 그리하여 나중에는 궁사를 자랑으로 여기는 기병의 엘리트 군인으로 육성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뛰어난 군사력으로 13세기부터 16세기초두까지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했던 '맘르크왕조'로 사실상의 지배 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1779년>                                   
                                   

                       
 < 경과 >

 
1798년 7월 3일 '아부키르'의 항구를 통해서 '이집트'에 상륙했던 '프랑스군'은 다음날에는 '지중해' 해안의 최대중요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까지 최단거리로 가기 위해서 사막의 한가운데를 행군해서 '카이로'까지 진격했고, 7월 21일 가까스로 도착했던 '카이로' 근교의 'Nile 강'변의 마을 '엠바베'에서 미리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이집트'의 '맘르크군'을 쳐부수었다. 그래서 그때, 그들은 '3大 피라미드'가 있던 '기자'까지 불과 15km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던 곳에서 거대한 피라미드를 바라보면서 행군했기 때문에 후에 그 전쟁은 <피라미드의 전쟁>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아무튼, 그 전쟁에서 그들은 '아주 휘황찬란한 의상으로 몸을 감싸고, 또 숄을 입힌 말을 몰고, 그리고는 아주 대단한 속도로 맞서오던 마치 중세의 기사와도 같았던' '맘르크 기병'들을 상대로 해서 근대적인 총검을 장비했던 보병을 주체로 한 '방진대형'(方陣隊形-고대 그리스의 전법 중 하나로 사각형으로 진을 짜서 밀짚형태로 배치하는 진형)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피라미드의 전쟁>

                        

 그때 '맘르크' 기병들은 '프랑스군'들이 일제사격하기 바로 전 총검으로 굳히고 있던 그 방진을 깨지 못해서 패주했고, 그러자 '프랑스군'은 적의 진지를 순식간에 돌파해서 '이집트군'을 섬멸했다. 그리고 또 그때, 전투가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적의 옷이 아군이 들었던 총의 발화장치에 걸려서 불이 붙었다... 우리들이 짠 방진의 주위에서 철퍽대며 덮쳐지던 적의 시체들에 불이 붙어서, 그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지방(脂肪)으로 인해 불길은 더욱 타올랐다...>라고 그때 종군했던 한 병사는 이렇게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기록을 남겨 놓았다.

 
어쨌든 그때, 1500기(騎)의 '맘르크군을' 괴멸시켰던 격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불과 수십 명에 불과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또 그때 '나폴레옹'이 말했다고 전해지는 <병사들이여(또는 제군들)! 4000년의 역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라는 말은 유명하지만, 그러나 그 말은 'St. Helena섬'에서의 '회상기(回想記)'가 처음이다.

 어쨌든, 그 '피라미드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던 '프랑스군'은 곧 바로 남진(南進)했고, 그러자 바로 그 다음날 '카이로市'는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그리하여 7월 25일 '나폴레옹'은 '카이로'에 입성했고, 그것으로 '이집트'에 상륙한지 불과 3주간에 '이집트정복'을 거의 완료했다.

 그러나 그때 '나폴레옹'에게 '이집트'를 강탈당한 꼴이 되었던 '오스만제국'은 당연히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어서 '제2차 대불대동맹'에 참가하게 된다. 거기다 또 '카이로정복'으로부터 불과 1주일 후였던 8월 1일에는 '영국'의 제독 '호레이쇼(우) 넬슨'이 지휘하던 '지중해함대'가 '아부키르'를 지키고 있던 '프랑스함대'를 섬멸해서(아부키르 灣 해전) '프랑스군'의 보급과 퇴로를 차단해버렸다.
                        

                                     

 


 ** Nile 海戰(영:Battle of the Nile)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전투 중 하나이다.
 '아부키르 해전'(영:Battle of Aboukir Bay, 프:Bataille d'Aboukir)이라고도 불린다.
 
 <개요>

 '이집트'의 북부 '알렉산드리아' 연안의 '아부키르 灣'에서 1798년 8월 1일부터 8월 2일 이른 아침까지 '호레이쇼(우)·넬슨'이 인솔하던 '영국함대'가 '프랑스함대'를 맞아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던 전쟁이었다.

 <배경(背景)>

 1798년 '나폴레옹·보나파르트'는 이집트 원정을 계획했다. 그러자 이내 '영국'은 '지중해'에서의 '프랑스군'의 이상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그러자 '영국'은 곧 '넬슨'을 지휘관으로 했던 함대를 파견했지만, 그러나 그 함대는 '지중해'로 향하던 중 폭풍우를 만났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넬슨'이 그 폭풍우에 의해서 손상을 입었던 기함(旗艦-사령관이 타고 함대를 지휘하는 군함) <뱅가드>를 보수하고 있던 동안 '나폴레옹'은 함대를 이끌고 '툴롱 항'을 출발해서 '이집트'에 상륙했다. 그리고 8월 1일 '영국함대'는 육군의 수송을 마치고 '아부키르 만'에서 정박하고 있던 '프랑스함대'를 발견했다.

 <경과(經過)>

 그러자 '영국함대'<전열(戰列)함 14척(隻), 포(砲) 938문(門)>와 '프랑스함대'[전열함 13척, 프리깃함 4척, 포 1,026문]는 8월 1일 저녁 극적으로 조우(遭遇)했다.

 그런데 그때, 전력(戰力)상으로는 양자(兩者)가 (함정 수) 비슷했지만, 그러나 '프랑스 측'은 그때 식료와 물 부족으로 몹시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해서 수병(手兵)의 약 3분의 1을 육지에다 상륙시켜두고 있었다. 그런데다 또 '영국함대'는 당시 역전(歷戰)의 정예부대였던 것에 대해서 '프랑스함대'는 징용(徵用) 선원들이 많아서 숙련된 선원들이 많이 부족했던 상태였다.

 어쨌든, 그때 '프랑스함대'는 서쪽의 얕은 곳을 왼쪽에다 두고, 200미터 간격으로 남북 종진(縱陣)을 배치한 다음, 함정들을 쇠사슬로 연결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또 대포는 바다 쪽으로 향하게 하며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방어태세였다고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또 그때, 이미 '아부키르 만'은 얕은 여울이 퍼지고 있었고 땅거미마저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프랑스함대'로서는 그 어둠 속을 '영국함대'가 좌초의 위험까지 무릅써가면서 공격해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넬슨'은 그런 '프랑스 측'의 예상을 깨고, 그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미리 좌초되었던 '카(쿠)로덴'을 제외한 함정들을 양분(兩分)해서, 북쪽으로부터 '아부키르 만'으로 진입하면서 그 중 1隊를 대담하게도 육지와 '프랑스함대' 사이에 끼어들게 했다. 그리고 18시 30분 '영국함대'의 선두에 있던 '거라이어츠함'에서 첫 포탄이 발사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측'은 그때, 육지 쪽에서의 공격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었다. 게다가 또 계절에 따른 북풍(北風) 때문에 종진(縱陣)의 남쪽에 있던 '프랑스함정'은 북측의 요함(僚艦)을 구원할 수도 없었다. 그러자 그때부터 '영국함대'는 북쪽에서 1척씩 차례로 '프랑스함정'들을 공격해나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함대'의 기함으로 124포문의 거함이었던 <로리앙-L'Orient>은 분전했고 '영국함대' '벨레로폰'(HMS Bellerophon)의 마스트를 2개 다 날려버리는 성과도 올렸지만, 그러나 곧 이어서 '스위프트슈어'(HMS Swiftsure)와 '알렉산더'의 공격을 받았고, 마침내 21시에는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22시에 대폭발을 일으켰고, 그래서 그때, 그 함대의 지휘관이었던 '브류이'도 그 배와 함께 전사했다. 그리고 또 그때 '프랑스함정' 중에서 '전열함 2척'과 '프리깃함 2척'은 다행히 전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남은 배들은 모두 다 불에 타거나 노획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영국함대' 중에서 격침된 배는 단 한척도 없었다.

 <영향(影響)>

 그 싸움의 결과, '지중해'의 해상권은 완전히 '영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본국과의 연락이 끊겨서 '이집트'에서 고립되었다.
 그리고 또 '넬슨'은 그 후로도 연승(連勝)으로 명성을 높이며 각국의 해군으로부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最近)>

 '아부키르 만' 해저는 현재 고고학 조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프랑스함대'의 기함이었던 <로리앙>에 적재되어 있던 대포와 생활용품 및 금화들이 인양되고 있다.
 2000년에는 '아부키르 만' 內 '넬슨 섬'에서 'Nile 해전' 및 '1801년의 전투'에서 전사했던 전사자들의 묘지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2005년 4월 18일에는 '영국해군' 주최로 그 전사자들의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그래서 그때 그 자리에는 그 자손들도 참례했던 바 있었다.                                   


 *** 브류이(François-Paul Brueys d'Aigalliers)1753년 2월 12일-1798년 8월 1일


 'Nile 해전' 때의 '프랑스함대' 사령관. 프랑스해군 중장. 브류이 백작.
 '나일 해전' 때 '브류이'가 인솔했던 '프랑스 함대'는 'Nile 하구' 가까이의 '아부키르 만'에 정박하고 있던 중 '호레이쇼우·넬슨 제독'이 인솔하던 '영국함대'의 공격을 받아서 괴멸했다. 그러자 '영국'은 그 승리로 인해서 '나폴레옹전쟁' 전 기간 동안 해상권을 수중에 넣었다.

 
                                   

                                     

                                          <폭침하는 로리앙>


                                                                       


<아부키르 해전 상황도-청색이 프랑스함대>

                        


 ** 호레이쇼(우) 넬슨(Horatio Nelson:1758년 9월 29일~1805년 10월 21일)


 미국독립전쟁, 나폴레옹전쟁 등에서 활약했던 영국해군제독.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나폴레옹에 의한 해상권획득과 英 본토 침공은 저지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


                                   

                       

                   




 
 


 < Napoléon Bonaparte(10)-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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