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에서의 나폴레옹>
*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The Campaign of Egypt and Syria)
그냥 'The Expedition to Egypt' 라고도 함
※ 이야기가 복잡해지므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설명을 생략함
< 개요 >
1798년부터 1801년까지 '프랑스군'이 '이집트'와 '시리아'에 원정했던 전쟁이었으며 '나폴레옹'이 인솔했던 5만의 '프랑스군'은 '이집트'에 상륙한 후 3년에 걸쳐서 '이집트군'과 '영국군' 그리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던 '오스만제국군'과 싸웠다.
< 배경 >
'나폴레옹'이 그때 '이집트원정'을 계획했던 이유는, 대륙 제패를 목표로 바다 건너에 있던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 '프랑스 측'에는 눈에 가시 같았던 '영국'은 '인도'라는 중요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 접촉 방법으로 '이집트'를 경유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 등으로 '프랑스'로서는 그 '이집트'를 빼앗는 것이 '영국'과 '인도'의 관계, 특히 '인도'와 '지중해'와의 관계를 제거할 수 있는 전략상 절호의 기회라고 보았다.
그런 한편 당시의 '이집트'는 그때까지 약 300여 년간이나 '오스만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그러나 그 즈음에는 긴 통치로 인한 피로감으로 인해서 '이스탄불'에서 미치는 힘이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그때 24개로 나누어져있던 현(縣)을 그 현들의 지사(知事-현의 장관)들이 지배하는 일명 '맘르크'라는 유력자들에 의해서 실질상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 마무루크(맘르크-Mamluke) ※ 역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소개만 함
'마무루(르)크' 또는 '맘르크'란 '이슬람세계'에서 노예출신의 군인들을 지칭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原義는 <소유(m-l-k)된 사람>을 의미함. 그리고 본래 그것은 '‘아브드' '쟈리야' 등의 '아라비아어'로 노예를 가리키던 여러 가지 말들 중 남성노예를 가리켰던 말 중의 하나였지만, 특히 '맘르크'란 말은 9세기 무렵부터 19세기 초두 무렵까지 '이슬람세계'의 각지에서 넓게 활약했던 백인 노예 출신의 군인들을 가리켰던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그 '이슬람세계'에 있어서의 '백인'이란 '흑인'의 순수한 대의어(對義語)로 당시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던 '네그로이드'를 제외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대륙에서 살고 있었던 인종들이 대개 그 백인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군인으로 활약했던 그 '맘르크' 출신자들은 대체로 '키프체크' 등의 '테르크계 민족' 혹은 '체르케스인' 등의 '카프카스계 민족'이었지만, 그러나 '몽골인'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스라브인' 등의 민족들도 그에 포함되었다.
'맘르크'는 대부분이 유소(幼少) 무렵부터 승마를 즐기는 기마민족 출신으로, 아이들 때부터 승마나 활쏘기 창술 등의 훈련을 철저하게 시켰고, 그리하여 나중에는 궁사를 자랑으로 여기는 기병의 엘리트 군인으로 육성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뛰어난 군사력으로 13세기부터 16세기초두까지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했던 '맘르크왕조'로 사실상의 지배 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17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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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
1798년 7월 3일 '아부키르'의 항구를 통해서 '이집트'에 상륙했던 '프랑스군'은 다음날에는 '지중해' 해안의 최대중요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까지 최단거리로 가기 위해서 사막의 한가운데를 행군해서 '카이로'까지 진격했고, 7월 21일 가까스로 도착했던 '카이로' 근교의 'Nile 강'변의 마을 '엠바베'에서 미리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이집트'의 '맘르크군'을 쳐부수었다. 그래서 그때, 그들은 '3大 피라미드'가 있던 '기자'까지 불과 15km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던 곳에서 거대한 피라미드를 바라보면서 행군했기 때문에 후에 그 전쟁은 <피라미드의 전쟁>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아무튼, 그 전쟁에서 그들은 '아주 휘황찬란한 의상으로 몸을 감싸고, 또 숄을 입힌 말을 몰고, 그리고는 아주 대단한 속도로 맞서오던 마치 중세의 기사와도 같았던' '맘르크 기병'들을 상대로 해서 근대적인 총검을 장비했던 보병을 주체로 한 '방진대형'(方陣隊形-고대 그리스의 전법 중 하나로 사각형으로 진을 짜서 밀짚형태로 배치하는 진형)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피라미드의 전쟁> |
그때 '맘르크' 기병들은 '프랑스군'들이 일제사격하기 바로 전 총검으로 굳히고 있던 그 방진을 깨지 못해서 패주했고, 그러자 '프랑스군'은 적의 진지를 순식간에 돌파해서 '이집트군'을 섬멸했다. 그리고 또 그때, 전투가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적의 옷이 아군이 들었던 총의 발화장치에 걸려서 불이 붙었다... 우리들이 짠 방진의 주위에서 철퍽대며 덮쳐지던 적의 시체들에 불이 붙어서, 그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지방(脂肪)으로 인해 불길은 더욱 타올랐다...>라고 그때 종군했던 한 병사는 이렇게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기록을 남겨 놓았다.
어쨌든 그때, 1500기(騎)의 '맘르크군을' 괴멸시켰던 격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불과 수십 명에 불과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또 그때 '나폴레옹'이 말했다고 전해지는 <병사들이여(또는 제군들)! 4000년의 역사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라는 말은 유명하지만, 그러나 그 말은 'St. Helena섬'에서의 '회상기(回想記)'가 처음이다.
어쨌든, 그 '피라미드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던 '프랑스군'은 곧 바로 남진(南進)했고, 그러자 바로 그 다음날 '카이로市'는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그리하여 7월 25일 '나폴레옹'은 '카이로'에 입성했고, 그것으로 '이집트'에 상륙한지 불과 3주간에 '이집트정복'을 거의 완료했다.
그러나 그때 '나폴레옹'에게 '이집트'를 강탈당한 꼴이 되었던 '오스만제국'은 당연히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어서 '제2차 대불대동맹'에 참가하게 된다. 거기다 또 '카이로정복'으로부터 불과 1주일 후였던 8월 1일에는 '영국'의 제독 '호레이쇼(우) 넬슨'이 지휘하던 '지중해함대'가 '아부키르'를 지키고 있던 '프랑스함대'를 섬멸해서(아부키르 灣 해전) '프랑스군'의 보급과 퇴로를 차단해버렸다.
** Nile 海戰(영:Battle of the Nile)
프랑스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전투 중 하나이다.
'아부키르 해전'(영:Battle of Aboukir Bay, 프:Bataille d'Aboukir)이라고도 불린다.
<개요>
'이집트'의 북부 '알렉산드리아' 연안의 '아부키르 灣'에서 1798년 8월 1일부터 8월 2일 이른 아침까지 '호레이쇼(우)·넬슨'이 인솔하던 '영국함대'가 '프랑스함대'를 맞아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던 전쟁이었다.
<배경(背景)>
1798년 '나폴레옹·보나파르트'는 이집트 원정을 계획했다. 그러자 이내 '영국'은 '지중해'에서의 '프랑스군'의 이상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그러자 '영국'은 곧 '넬슨'을 지휘관으로 했던 함대를 파견했지만, 그러나 그 함대는 '지중해'로 향하던 중 폭풍우를 만났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넬슨'이 그 폭풍우에 의해서 손상을 입었던 기함(旗艦-사령관이 타고 함대를 지휘하는 군함) <뱅가드>를 보수하고 있던 동안 '나폴레옹'은 함대를 이끌고 '툴롱 항'을 출발해서 '이집트'에 상륙했다. 그리고 8월 1일 '영국함대'는 육군의 수송을 마치고 '아부키르 만'에서 정박하고 있던 '프랑스함대'를 발견했다.
<경과(經過)>
그러자 '영국함대'<전열(戰列)함 14척(隻), 포(砲) 938문(門)>와 '프랑스함대'[전열함 13척, 프리깃함 4척, 포 1,026문]는 8월 1일 저녁 극적으로 조우(遭遇)했다.
그런데 그때, 전력(戰力)상으로는 양자(兩者)가 (함정 수) 비슷했지만, 그러나 '프랑스 측'은 그때 식료와 물 부족으로 몹시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해서 수병(手兵)의 약 3분의 1을 육지에다 상륙시켜두고 있었다. 그런데다 또 '영국함대'는 당시 역전(歷戰)의 정예부대였던 것에 대해서 '프랑스함대'는 징용(徵用) 선원들이 많아서 숙련된 선원들이 많이 부족했던 상태였다.
어쨌든, 그때 '프랑스함대'는 서쪽의 얕은 곳을 왼쪽에다 두고, 200미터 간격으로 남북 종진(縱陣)을 배치한 다음, 함정들을 쇠사슬로 연결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또 대포는 바다 쪽으로 향하게 하며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방어태세였다고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또 그때, 이미 '아부키르 만'은 얕은 여울이 퍼지고 있었고 땅거미마저 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프랑스함대'로서는 그 어둠 속을 '영국함대'가 좌초의 위험까지 무릅써가면서 공격해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넬슨'은 그런 '프랑스 측'의 예상을 깨고, 그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미리 좌초되었던 '카(쿠)로덴'을 제외한 함정들을 양분(兩分)해서, 북쪽으로부터 '아부키르 만'으로 진입하면서 그 중 1隊를 대담하게도 육지와 '프랑스함대' 사이에 끼어들게 했다. 그리고 18시 30분 '영국함대'의 선두에 있던 '거라이어츠함'에서 첫 포탄이 발사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측'은 그때, 육지 쪽에서의 공격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었다. 게다가 또 계절에 따른 북풍(北風) 때문에 종진(縱陣)의 남쪽에 있던 '프랑스함정'은 북측의 요함(僚艦)을 구원할 수도 없었다. 그러자 그때부터 '영국함대'는 북쪽에서 1척씩 차례로 '프랑스함정'들을 공격해나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프랑스함대'의 기함으로 124포문의 거함이었던 <로리앙-L'Orient>은 분전했고 '영국함대' '벨레로폰'(HMS Bellerophon)의 마스트를 2개 다 날려버리는 성과도 올렸지만, 그러나 곧 이어서 '스위프트슈어'(HMS Swiftsure)와 '알렉산더'의 공격을 받았고, 마침내 21시에는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22시에 대폭발을 일으켰고, 그래서 그때, 그 함대의 지휘관이었던 '브류이'도 그 배와 함께 전사했다. 그리고 또 그때 '프랑스함정' 중에서 '전열함 2척'과 '프리깃함 2척'은 다행히 전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남은 배들은 모두 다 불에 타거나 노획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영국함대' 중에서 격침된 배는 단 한척도 없었다.
<영향(影響)>
그 싸움의 결과, '지중해'의 해상권은 완전히 '영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본국과의 연락이 끊겨서 '이집트'에서 고립되었다.
그리고 또 '넬슨'은 그 후로도 연승(連勝)으로 명성을 높이며 각국의 해군으로부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最近)>
'아부키르 만' 해저는 현재 고고학 조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프랑스함대'의 기함이었던 <로리앙>에 적재되어 있던 대포와 생활용품 및 금화들이 인양되고 있다.
2000년에는 '아부키르 만' 內 '넬슨 섬'에서 'Nile 해전' 및 '1801년의 전투'에서 전사했던 전사자들의 묘지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2005년 4월 18일에는 '영국해군' 주최로 그 전사자들의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그래서 그때 그 자리에는 그 자손들도 참례했던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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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류이(François-Paul Brueys d'Aigalliers)1753년 2월 12일-1798년 8월 1일
'Nile 해전' 때의 '프랑스함대' 사령관. 프랑스해군 중장. 브류이 백작.
'나일 해전' 때 '브류이'가 인솔했던 '프랑스 함대'는 'Nile 하구' 가까이의 '아부키르 만'에 정박하고 있던 중 '호레이쇼우·넬슨 제독'이 인솔하던 '영국함대'의 공격을 받아서 괴멸했다. 그러자 '영국'은 그 승리로 인해서 '나폴레옹전쟁' 전 기간 동안 해상권을 수중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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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침하는 로리앙>
<아부키르 해전 상황도-청색이 프랑스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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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레이쇼(우) 넬슨(Horatio Nelson:1758년 9월 29일~1805년 10월 21일)
미국독립전쟁, 나폴레옹전쟁 등에서 활약했던 영국해군제독.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나폴레옹에 의한 해상권획득과 英 본토 침공은 저지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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