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poleon Bonaparte>


 
 1 生涯

  1.6  絶頂期




 * 아우스트리트전투(영:Battle of Austerlitz-불:Bataille d'Austerlitz-독:Schlacht von Austerlitz)
   ※ 앞에서 계속...


                  <우측 백마-나폴레옹, 좌측 백마-아렉산들1세=현실적이지 못한, 일종의 상징도임>


 <전후 처리>

 
12월 4일, '프란츠2세'는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
아렉산드르1세'는 끔찍한 모습으로 '러시아'로 도망쳤다.
 12월 26일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화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에 굴복했다.
 그리하여 '제3차 대불대동맹'은 붕괴했다.
 그리고 이어서 '
프란츠2세'는 '신성로마 황제 位'로부터 퇴위했고
 그로인해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이어서 '독일'에는 '라인동맹'이 성립했다.


 
 ** 프레스부르크 화약(불:Paix de Presbourg, 영:Peace of Pressburg, 1805년 12월 26일)

 '나폴레옹전쟁' 중에 '오스트리아 영내'의 '프레스부르크'(현: 슬로바키아공화국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체결되었던 강화조약.
 '
프레스부르크 강화조약'(불:Traite de Presbourg, 영:Treaty of Pressburg)라고도 불린다.


<성에서 바라본 브라티슬라바의 舊 市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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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오스트리아'는 1805년 '영국' '러시아' 등과 '제3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했고, 이어서 '북쪽 이탈리아'와 '바이에른'을 침공했지만 '프랑스황제 나폴레옹1세'에 의해서 '울름의 전투'(1805년 9월 25일~10월 20일)와 '아우스트리트 전투'(12월 2일)에서 각각 패배했다.

 
그 결과, 12월 4일에 양국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나폴레옹1세'와 '신성로마황제 프란츠2세'(오스트리아황제 프란츠1세)는 '프레스부르크'에서 평화 교섭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강화 조약에 의해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왕국'을 승인했던 것과 동시에, 同國에 '베네치아'를 할양했다. 그리고 또 '프랑스'에 ‘이스트리아’와 ‘달마치어’를 그리고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바이에른왕국’과 ‘뷰르텐베르크왕국’ ‘바덴대공국’에 ‘치롤’ ‘콘스탄트’ ‘브라이스가우’ 등의 '오스트리아 령'을 할양했다. 게다가 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4,000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강화 후 '나폴레옹'의 세력 확대>

 
그 강화를 기회로 '나폴레옹1세'는 각지에로의 세력확대를 추진했다.
 그리고 1806년 2월 '나폴리왕국'을 점령해서 형 ‘죠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또 동년 5월에는 '바타비아공화국(네덜란드)'을 '네덜란드왕국'으로 해서
 남동생이었던 ‘루이 보나파르트’를 국왕으로 앉혔다.
 그리고 7월에는 '베루크대공국'을 수립(樹立)해서 의동생이었던 ‘뮤라’를 원수로 앉혔고
 또 '서남 독일' 각국의 연합체에서 親 '나폴레옹'의 '라인동맹'을 성립시켰다.


 
 ***  라인동맹(영:Confederation of the Rhine, 독:Rheinbund, 불: Confederation du Rhin)

 19세기의 '독일'에서 '프랑스황제 나폴레옹1세'의 압력에 의해서 성립했던 국가연합.
 '나폴레옹'의 패퇴와 함께 해체되었다. (자세한 것은 생략)



<Rheinbund>



 <나폴레옹의 승전 연설>

 병사들이여! 나는 제군들에 만족한다. 제군들은 이 '아우스트리트 전투'에서 내가 제군들의 용감함에 기대를 걸었던 것에 대해서 결코 실망을 시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군들은 제군들의 軍旗를 영원한 불멸의 영광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러시아황제'와 '오스트리아황제'가 지휘하던 10만의 군대는 불과 4시간도 되지 않아서 제군들의 손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또, 다행스럽게도 제군들의 포화를 면했던 적병들도 결국에는 도망을 가다가 호수에 빠져서 모두 다 죽었다. 그리고 또한 '러시아친위대'의 40개의 군기와 120문의 대포 그리고 또한 20명의 장군과 3만 이상의 포로가 영구히 영광으로 빛나게 될 이날의 전과이다.
 
제군들에게 이제 더 이상 무서워해야 할 적은 없다. 그러므로 병사들이여! 우리 조국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서 필요한 일들이 생길 때, 나는 제군들을 기꺼이 '프랑스'로 다시 돌려보낼 것이다. 그러면 '프랑스'의 온 국민들은 제군들의 귀환을 기뻐하며 환영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제군들은 그들 앞에서 당당히 <나는 '아우스트리트 전투'에 참가하고 돌아온 사람이다 !>라고 말을 한다면, 그들은 또 이렇게 제군들에 대해서 말을 할 것이다.
 
<아! 저 사람이 바로 '아우스트리트'의 영웅(勇士)이다!>라고...


 어쨌든, 그곳에서 '나폴레옹'은 교묘한 작전으로 완승했고
그 결과로 12월에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프레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또 그로인해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고액의 배상금 지불과 함께
영토의 할양 등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제3차 대불대동맹'은 붕괴했다.

그러자 '영국'의 수상이었던 ‘윌리엄 피트’는 그 패전의 충격으로 병이 나서 그 다음해에 죽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현재의 '개선문(凱旋門)'은 그 '아우스트리트전투'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이 1806년에 건축을 명했던 것이었다.


 
 * 에투알 개선문(불어:Arc de triomphe de l'Etoile)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도로'의 서쪽 '샤를 드골광장'에 있는 凱旋門이다. 그것은 '
파리'의 상징적인 건조물의 하나로, 단지 '개선문'이라고만 하면 그 '에투알 개선문'을 가리키는 수가 많기 때문에 세계의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개선문'을 중심으로 '샹젤리제 거리'가 시작되고, 그로부터 12개의 大路가 방사상(放射狀)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그 형태가 마치 지도상에서는 밝게 빛나는 <별-toile>과도 같게 보인다고 해서 그 광장은 <별의 광장(에투알광장)-la place de l'Etoile>이라고도 불렸다. 그 때문에 그것은 <에투알광장의 개선문>이라는 의미의 <Arc de triomphe de l'Etoile>이라는 정식명칭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 현재의 그 광장은 <샤를 드골광장-la place de Charles de Gaulle>이라고 명칭이 변경이 되어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개선문-Arc de triomphe>의 직역이<승전(勝戰) 또는 전승(戰勝)>의 아치>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선문> 그 자체는 전승기념비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고대 그리스'와 '로마' 건축을 모범으로 했던 '신고전주의 건축'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
에투알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명(命)에 의해서 건설이 시작되었지만, 그 완성은 ‘루이 필립’의 '복고왕정시대'였던 1836년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본인은 그 '개선문'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그 문을 처음으로 빠져 나갔던 것은 1840년 '파리'에 유해가 이장되었을 때였다.

 그 '개선문' 아래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던 '무명용사'들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또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의 '파리점령'으로 그곳에 '나치스旗'가 게양되었고
 '히틀러'가 전차를 타고 지나가기도 했다.
 



<에투알 개선문>








 

 

 

 

 



< Napoleon Bonaparte(24)-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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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6  絶頂期


 * 아우스트리트전투(영:Battle of Austerlitz-불:Bataille d'Austerlitz-독:Schlacht von Austerlitz)
   ※ 앞에서 계속...


                  <우측 백마-나폴레옹, 좌측 백마-아렉산들1세=현실적이지 못한, 일종의 상징도임>


 그래서 그곳에서 '나폴레옹'은 적의 공격을 유인하기 위해서 함정을 쳤다.



<12월 1일 상황도-적색이 연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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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나폴레옹'의 대관식 1주년이 되던 1805년 12월 2일 오전 8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 8만 7천 명은 '아우스트리트' 서방의 '프라트 고지'로 진출했고, 그 우세했던 병력으로 '프랑스군'에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때 '프랑스군'은 7만 3천의 병력으로 연합군에 열세였다. 그리고 또, 그 포진(布陣)에 있어서도 '프랑스군'은 나중에 후방과의 연락선(連絡線)을 확보하기 위해서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右翼(남쪽)쪽이 특히 허술했다. 그러자 '아렉산드르1세'는 그것을 호기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주력부대를 '프라트 고지'로부터 '프랑스군' 우익방향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자 그때 '프랑스군'의 우익을 지키고 있던 '다브'의 '제3군단'은 그 많은 군대를 다 상대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고, 곧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연합군은 한층 더 많은 부대를, 그것도 '프랑스군' 진지 바로 앞을 횡단해서는 그 우익 쪽으로 쇄도해서 들어갔다.



 ** 다브()(Louis-Nicolas d'Avout 또는 Davout, 1770년 5월 10일~1823년 6월 1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아우어슈테트 공. 에크뮬(뮤르)大公으로도 알려져 있다.
 군사(軍事) 면에서 <不敗의 다브>라고 불렸을 만큼 우수했고
 그 외에 행정과 관리능력에서도 매우 우수했다.






  
                                                           <12월 2일 9시 상황도>

 
 하지만 그것은 바로 '나폴레옹'의 함정이었다. 그러자 '
나폴레옹'은 곧 그 때문에 허물어져버렸던 '연합군'의 중앙부를 향해서 '솔트'의 '제4군단'을 단번에 꽂아 넣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때, 중앙돌파에 성공했던 '솔트 군단'은 '다브 군단'과 협력해서 그때 이미 '프랑스군'의 우익에 쇄도해 있었던 '연합군부대'를 협공했다. 그러자 '연합군'은 얼어있던 호수를 건너서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또 그때 '프랑스군'이 대포를 쏘아서 얼음을 깨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엄청난 수의 '연합군'들이 그곳에서 수몰(水沒)했다. 그러자 또 이어서 다른 '연합군부대'들에도 '란누'(앞에서 소개되었음)의 '제5군단'과 '뮤라'(앞에서 소개되었음)의 기병군단이 돌파해서 들어갔다. 그리고는 저녁때까지 '연합군'은 약 3만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는 뿔뿔이 흩어져서 패주하고야 말았다.


 
 ** 솔트(Nicolas-Jean de Dieu Soult, 1769년 3월 29일~1851년 11월 26일)(후술)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史上 6명밖에 없었던 <프랑스 大元帥> 중의 한명.
 후에 정치가가 되었다.




 

 그러자 그때, 중앙부를 지키고 있던 ‘쿠투조프’는 급히 '러시아 근위군단'을 투입했다. 그리고는 '프랑스군'과 격전을 펼쳤지만, 그러나 '베르나돗트' '제1군단'의 원호와 '나폴레옹 친위대'의 투입으로 인해서 '프라트 고지'의 연합군은 곧 허물어졌다.


 
 ** 카를(칼)14세 요한(스웨덴어:Karl XIV Johan, 1763년 1월 26일~1844년 3월 8일)

 스웨덴 왕. 노르웨이 왕(노르웨이 왕으로서는 컬3세). 베르나도트 朝 초대국왕(재위:1818년~1844년).
 프랑스혁명, 나폴레옹전쟁 기의 프랑스의 군인.
 
쟌-바티스트 줄 베르나돗트(프:Jean-Baptiste Jules Bernadotte)로서도 알려져 있다. 덧붙여서, 베르나도트 朝는 '나폴레옹'에 의해서 만들어졌던 왕조 중에서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는 왕가이다.





 
  ** 老親衛隊(La Vieille Garde, 영:The Old Guard)

 프랑스제1제정시대의 프랑스육군의 近衛제3보병사단의 통칭.
 
황제친위대(Garde imperiale) 중 古參, 베테랑 兵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부대였으며
 다른 부대와는 한 선을 긋는 전투능력과 '나폴레옹'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으로 알려졌다.
 항상 황제 나폴레옹과 함께 했었고, 영고성쇠를 같이 했던 부대로 유명했다.
 별명으로 ‘고참 근위병’이라고도 불려졌다.
 그 친위대는 '나폴레옹'을 '家長'으로해서 군대가족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에 '나폴레옹'은 그들을 敬愛했으며, 그들의 충성심 또한 범상치 않았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나폴레옹'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써, 전장에서는 '決戰병력'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또 그들은 <검은 곰털모(熊毛帽)의 무리(부대)> 또는 <무적의 노친위대>란 이름으로
 적들을 공포에 떨게 했으며 '프랑스군'에게서는 승리를 약속하는 존재로서 그 이름을 날렸다.


 
 ***  퐁텐블로궁전(불:Palais de Fontainebleau)

 세계문화유산. 1981년에 등록.
 세이누-에-마르누(Seine-et-Marne)縣에 있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궁전.
 
퐁텐블로우 城(Chateau de Fontainebleau)이라고도 불리어진다.
 궁전의 현재모습은 많은 프랑스 왕들에 의한 축성의 결실이며
 기본적인 건축구조는 '프랑수와1세'에 의한 것이었다.
 
건물은 안뜰을 둘러싸도록 되어있고, 퐁텐블로우 거리 또한
 한 때 왕의 수렵장(퐁텐블로우의 숲)이었던 곳을 둘러싸듯이 발전하고 있다.






 그들은 또 '나폴레옹'과는 매우 강한 정신적인 동반자로서 결속되어있었기 때문에
 1814년 제1회째의 退位 때는 ‘퐁텐블로궁전(Fontainebleau-파리 동남쪽, 궁전과 숲으로 유명. 역대 왕들의 거주지)’ 앞 광장에서 이별을 고하면서 '나폴레옹'은 그 사단장이었던 ‘푸티’ 장군을 포옹 한 후
 군기에 입맞춤을 하고는 쓰러져서 울었다고 한다.



  
                                                        <퐁텐블로의 결별>


 그리고 또 '워털루의 싸움'에서는 '네이 원수'가 반복해서 친위대의 투입을 간절히 원했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것을 주저해서 승리를 놓치게 된 한 요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최종국면에 투입되어서 '영국군' '메이트랜드 旅團' 등과 교전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에는 이설도 많다.

 
아무튼, 그 전쟁에서 그들은 패배가 결정된 후에도 전장을 떠나지 않고 '프랑스군'의 퇴각을 도왔으며
 이어서 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서 항복권고도 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때 연대장이었던 ‘캄브론누’ 장군은 <친위대는 죽을지언정 항복하지는 않는다(La Garde meurt mais ne se rend pas)> 라고 말을 하고는, 곧 이어서 <똥이나 싸라!(Merde!)>라고 말을 하면서 항복을 거부해서 모두 괴멸 당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캄브론누의 한마디> 또는 <5문자> 라고하면, 그 <똥이나 싸라!>라고 하는 의미라고 한다.


 
 **  캄브론누(Pierre Jacques Etienne Cambronne:1770년 12월 26일~1842년 1월 29일)

 프랑스혁명전쟁, 나폴레옹전쟁 기의 군인.
 지휘능력과 용모가 뛰어났고, 몸집이 컸다.
 나폴레옹과 함께 600명의 노친위대를 인솔해서 엘바 섬으로 건너갔다.
 나폴레옹 탈출 후에는 워털루 싸움에도 참가했으나 패배했고
 항복을 강요하던 영국군에게 <친위대는 죽을지언정 항복하지는 않는다>는 말과 함께
 라고 말을 하면서 거부했다.
 하지만 그로인해서 노친위대는 괴멸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유탄에 맞고서도 살아남았다.
 그는 의식을 잃은 후 포로가 되어서 영국으로 호송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그의 간호를 맡았던 영국인 여성과 결혼까지 하였다.
 그리고
또, 그 용기가 인정되어서 '루이18세'로부터 작위가 주어지기도 했다.








  
                                                     <12월 2일 오후 2시 상황도>




<아우스트리트 전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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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6  絶頂期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프란츠1세' 軍은 북쪽으로 도망을 갔고, 그때 마침 오스트리아를 구원하러 왔던 '러시아'의
 '아렉산드르1세(앞에서 설명되었음)' 군과 합류했다.


 
 * 프란츠 1세(Franz II-1768년 2월 12일~1835년 3월 2일)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재위:1792년~1806년)이며
 오스트리아 제국 최초의 황제 프란츠1세(재위:1804년~1835년)이다.
 
아버지는 신성로마황제 레오포르트 2세. 어머니는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의 딸 마리아 르드비카.

 <생애>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왕제(王制)를 구하기 위해서 제1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했고, 이어서 프랑스혁명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던 중 그는 폴란드의 분할에도 관여했지만(1795년) 그러나 그 후에 나폴레옹 전쟁에도 휘말려서 3제회전(아우스트리트 싸움)에서 참패했고, 그에 신성로마황제를 스스로 포기했으며, 그로인해 신성로마제국은 소멸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배영역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왕국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제국’을 다시 형성했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1세’로서 군림했다. 그리고 또, 크레멘스 멧테르니히를 등용해서 '빈 회의'에서 잃었던 땅도 회복했다. 국가운영은 주로 멧테르니히 등 신하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그는 검소한 생활을 좋아했고, 재위기간도 40년이란 긴 세월이었기 때문에, 만년은 국민으로부터도 우대받아 <선량한 황제 프란츠>라고 칭해졌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프랑스군'과 '오-러 연합군'이 '아우스트리트' 교외의 ‘프라트 고지’에서 격돌했던 바로 그날은 '나폴레옹'이 즉위한지 일주년이 되던 12월 2일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세 명의 황제가 한 전쟁터에 모두 모였다고 해서 '3帝會戰'이라고도 불린다.



* 아우스트리트전투(영:Battle of Austerlitz-불:Bataille d'Austerlitz-독:Schlacht von Austerlitz)


 
                  <우측 백마-나폴레옹, 좌측 백마-아렉산들1세=현실적이지 못한, 일종의 상징도임>

 <개요>

 1805년 12월 2일, '오스트리아領'(현 체코) '모라비아'(영:Moravia-체코 동부)의 '브르노' 근교의 마을
 '아우스트리트'(현재의 스라후코후 우 브르나-Slavkov U Brna. 독:Austerlitz)교외에서
 '나폴레옹'이 인솔하던 '프랑스군'(대육군)이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물리쳤던 싸움이었다.
 


 그때의 '나폴레옹'의 지휘는 <마치 예술과도 같았다>라고 평가되었던 훌륭했던 승리였으며 '나폴레옹전쟁' 중에서 가장 눈부신 것이었다.

 '프랑스제국'의 황제 '나폴레옹 1세'와 '신성로마제국(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제국이 되는 것은 1806년 이후)' 황제 '프란츠2세' 그리고 '러시아제국'의 황제 '아렉산드르1세' 그 3명의 황제가 참가했기 때문에 3제회전(영:Battle of the Three Emperors-독:Dreikaiserschlacht)이라고도 불린다.

 
덧붙여서, 그러나 실제로 '프란츠2세'는 그 전장의 현장에는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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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1805년,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영국' 등과 '제3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하고 '바이에른'(Bayern-1918년 멸망. 현재 독일의 바이에른 주. 수도-뮌헨)을 침공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울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항복시키고 11월 13일 '빈'에 입성했다. 그러자 또 '프란츠2세'는 '모라비아'로 후퇴해서 '아렉산드르1세'와 '쿠토우조프'가 인솔하던 '러시아군'과 합류했다.



 
 * 쿠토우조프(또는 쿠투조프-러:МихаилИлларионовичГоленищев-Кутузов. 라:Mikhail Illarionovich Golenishchev-Kutuzov)

 1745년 9월 16일(율리우스력 9월 5일)-1813년 4월 28일(율리우스력 4월 16일)
 
제정 러시아시대의 군인.

 에카체리나2세, 파베르1세, 아렉산드르1세, 그 3대에 걸쳐서 재직했고, 외교관으로서도 활약했다. 그는
나폴레옹의 그늘에 가려져서 빛을 잃기도 했지만,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국민영웅으로 칭송되었다. (이하, 자세한 것은 생략)
 




그러자 '나폴레옹'도 '도나우(독:Donau-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2860km) 강'을 건너서
'모라비아'로 진출했고, '아우스트리트' 서방(西方)에 포진 했다.



<참고-도나우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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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또 바로 그때, '
이탈리아 방면'에서는 아직도 '컬 대공'이 인솔하던 '오스트리아군'이
온전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폴레옹'으로서는 그 부대가 가담하기 전에
미리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의 주력을 꺾어둘 필요가 있었던 때문이었다.


 
 * 카를(칼)대공(Erzherzog Karl von sterreich, Herzog von Teschen)


 1771년 9월 5일 - 1847년 4월 30일
 프랑스혁명전쟁, 나폴레옹전쟁기에 활약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인, 황족. 테센 公.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황제 레오포르트2세와 황후 마리아 르드비카의 제3자.
 신성로마황제 프란츠2세(오스트리아 황제로서는 프란츠1세)의 동생.








 < 아우스트리트전투-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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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6  絶頂期


   어쨌든, 그렇게 바다에서는 '영국'에 참패를 했던 '프랑스군'이었지만
   그러나 육상에서는 '울름 전투'로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했고, 이어서 '빈'을 점령했다.



 * 울름전투(영:Battle of Ulm, 프:Bataille d'Ulm, 독:Schlacht von Ulm-1805년 10월 17일)


 <개요>

 '바이에른 公國령(現 독일령)' '슈투트가르트' 근교의 마을 '울름 교외'에서
 '나폴레옹'이 인솔하던 '프랑스군(大陸軍)이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쳤던 싸움이었다.
 
그 전쟁에서 기동력(機動力)만으로 승리했던 '나폴레옹'은 상대에게 5만의 피해를 주었다.



  ** 大陸軍 <프: La Grande Armee(라 그란·타르메)>


 영어로는 'The Great Army' 혹은 'The Grand Army'
 1805년에 '나폴레옹1세'가 命名했던 '프랑스군'을 핵심으로 했던 군대의 명칭.
 그 최초로 역사적인 기록에서 나타나는 것은 '영국침공'을 위해서 '영국해협'에 접하는 해안에 군대를 집결시켰을 때이며, 그것을 다시 東方의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에 대한 작전을 하도록 배치 전환되었다. 그후, 1806년-1807년, 1812년 및 1813년-1814년의 각 작전에도 그 명칭이 사용되었으며 '나폴레옹'이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서 소집했던 '다국적군'의 총칭이었다. (이하 상세한 것은 생략함)


<사진은 그 중 한 부대인 老親衛隊> 

                                     
                                     
                                              <독일의 울름 위치도>

 
                                              <울름의 풍경-1900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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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805년 8월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영국'등과 함께 '제3차 대불대동맹'을 결성해서 '바이에른'에 침공했다.
 그때 '
나폴레옹'은 영국침공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제3차 대불대동맹'이 결성되었기 때문에 그 계획은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던 중에 '바이에른 침공' 소식을 들었던 '나폴레옹'은 '바이에른' 및  
'빈' 침공을 결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동년 9월 23일, 원로원에서 <나는 군의 선두에 서서, 나의 동맹국을 구하러 갈 것이다>라고 선언하고는 그 원정을 개시했다. 그렇게 하여 ‘산 크루 궁전(Saint Cloud)’을 출발했던 '프랑스군'은 그때 대략 80,000이었는데, 그래서 그때부터 '프랑스군'은 ‘그란 타루메(Grand Armee)’ 즉
'대육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산 크루 궁전의 과거 모습>


어쨌든, 최종적으로 예비군을 포함해서 全7군단 총병력 21만의 대육군은
9월 24일 '라인 강'을 따라서 집결했다.
그런 한편, 그에 맞섰던 '오스트리아군'은
'맥(마크) 장군' 인솔로 72000명이 '울름'과 그 주변지역에 포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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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과>


<검은 숲 위치도>


 그때 '검은 숲'으로부터 진격해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맥 장군'을 속이고 '도나우 호반'까지 진격했던 '프랑스군'은, 그렇게 해서 간단하게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를 돌아서 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맥 장군'은 그런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전혀 알아차리고 못하고 '울름' 농성을 고집하고 있었다.


<검은 숲 풍경> 


 그러자 1805년 10월 14일 '에르틴겐'을 지키던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로
‘네이 元帥’가 인솔하던 '프랑스군'이 돌격해서 들어갔다.
그러자 대혼란에 빠져버린 '오스트리아군'은 '울름' 근교로 후퇴했다.
그 승리로 '네이 원수'는 나중에 ‘에르틴겐 公’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 네이(Michel Ney) 1769년 1월 10일-1815년 12월 7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姓의 Ney는 이중모음 <네이>가 아니고, <네-(nε)>가 원음에 가깝다.
 당시의 '프랑스령'이었던 ‘자르(Saarland-독일 연방 주의 하나. 검은 숲 근처) 지방’ 출신이다.
 <용사 중의 용사>로 알려져 있다.






 그 다음날, 기세를 탔던 '프랑스군'은 '울름'의 서북쪽 거리가 내려다보였던 곳에 구축해두었던 방어선인
‘미헤르스베르크 고지’를 강습하여 점령했다. 
그러나 '울름' 공격은 성벽에 가로막혀서 하는 수 없이 후퇴했다.
그러자 동맹국 '러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오스트리아군'은 점점 사기를 잃어갔다.

※ 그때
'러시아군'은 '폴란드'에서 체류하고 있었다.
그에는 또 일설에 의하면, 그때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쓰던 달력이 달랐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자 그런 상황을 확인했던 '나폴레옹'은 '맥 장군'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그러나 좀처럼 항복해 오지 않던 '맥'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던 '나폴레옹'은
18일, 성내(城內)의 포격을 명했고, 그에 위협을 느꼈던 '맥 장군'은 19일에서야 마침내 항복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황후였던 ‘죠제피누’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군사 6만을 포로로 잡았고, 대포 120문 이상과 군기(軍旗) 90개 이상, 그리고 30만 명 이상의 장군을 잡았다>
 라고 전과를 알렸다. 
하지만 그 숫자는 조금 과장된 것이었고
실제로 획득했던 것은 포로 25,000명에다, 대포 65문, 군기는 140개정도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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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戰後>

 21일 '나폴레옹'은 점령지였던 ‘슈바벤(Schwaben-독일 남서부지역)’의 '오스트리아군' 무기고와 식료창고의 접수를 고시했음과 동시에, 점령지 稅와 통상 세(通常稅)를 부과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군'은 그때 막대한 손실을 내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군의 주력(主力)은 아직도 건재해있었고, 그리고 또 '러시아'의 원군도 점차로 그곳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신의 도움으로 이번에도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는 전쟁 속행의 의사를 원로원에 전달했다. 그리고는 12월 14일
'프랑스군'은 이미 버려져있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입성했다. 그리고 또 16일에는 ‘쉔브룬 궁전(Schloss Schonbrunn)’을 출발해서 북쪽으로 군을 진군시켰고, 21일에는 '브르노'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피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의 주력들과의 전투를 위해서 그 대비에 들어갔다.






** 쉔브룬 궁전(Schloss Schonbrunn)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있는 궁전
합스부르크 왕조의 역대 군주들이 주로 별궁으로 사용했다
현재 궁전과 정원군(庭園郡)은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 브르노(체코어:Brno)

체코공화국 제2의 도시
모라비아 지방의 중심 도시이며
스비타바 강과 스브라트카 강의 합류점에 위치한다
독일어명 Bru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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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참고

체코 중부에 있는 공업 도시
보헤미아·모라비아 고지의 동쪽 기슭에 있다
직물, 기계, 자동차, 화학 공업 등이 발달하였으며
교통의 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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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6  絶頂期



 * 트라팔가르 해전(영:The Battle of Trafalgar, 불:Bataille de Trafalgar)





 1805년 10월 21일에 '스페인'의 '트라팔가르 곶'<트라팔가 곶(Cabo Trafalgar)
'스페인' 남서안(南西岸), '지브롤터해협'의 북서(北西) 약 50킬로에 위치해있는
곶('지브롤터'와 '카디스'의 중간)>
에서 벌어졌던 해전이었다.
 


<트라팔가르 곶의 등대>

 '
나폴레옹전쟁'에 있어서의 최대의 해전이었으며, 그 결과 '영국'의 대승으로 일시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유럽제국'은 대륙에서의 '아우스트리트 싸움'은 막아내질 못했다.



 
  <배경>

 
1805년 '유럽'대륙은 '황제 나폴레옹'이 인솔하던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여있었지만
그러나 해상의 지배권은 그때 '영국'에 있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그때 '해상봉쇄'를 실시하며
'프랑스'의 해군력을 억제했던 한편 '영국본토'의 침공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러했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영국해군'을 해상에서 일소할 것을 결단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스페인'(당시,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지배하에 있었다)연합함대를 편성했다. 그리고는 '해상봉쇄'를 돌파하기 위해서 '불로뉴 항구'에 집결시켰던 35만의 침공군에게 '영국본토'에의 상륙을 명했다. 그러자 '영국'은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함대를 내보냈다.


  
<경과>

 그때 '넬슨제독'의 '영국함대'는 <빅토리-HMS Victory>를 기함(旗艦)으로 해서 27척이었다.
 


 ** 빅토리 HMS Victory)


 '영국해군'의 군함으로 104門  탑재의 전열함(戰列艦).
 
현존하는 유일한 전열함인 것과 동시에, 세계최고의 현역함이기도 하다.

 
<역사>

 
소형이고, 기동력이 뛰어난 艦(배)을 좋아했던 18세기 당시의 '영국해군'에서는 드물었던 것으로, 100문 이상 탑재의 1급 전열함으로써 수주되었다. 건조 도중에는 '7년 전쟁'이 종결하기도 했었고, 뼈대(骨組)만의 상태로 3년 가깝게 도크에 방치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1765년에 진수(進水)되었다. '존 쟈비스'와 '호레이쇼 넬슨' 등 많은 제독들의 좌승함(座乘艦)이 되었고 '미국독립전쟁'이나 '나폴레옹전쟁' 등 중요한 해전에서 활약했다. 특히 '트라팔가르 해전'에서는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의 대열에 수직으로 돌진하는 <넬슨 터치>의 성질상 약 30분에 걸쳐서 적함대로부터 집중포화를 받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연합함대의 포격미숙에 힘입어서 잘 견뎌내기도 했다. 1812년에 퇴역했고, 나중에 사관학교의 연습선으로 이용된 후, 1922년에 '포츠머스 항'에 기념함으로써 전시되게 되었다. 형식상은 현재도 '제독旗'를 내거는 현역함이다. ('포츠머스 군항'의 '항만사령관'의 '기함') 그리고 또, 2005년 10월 21일에는 왕실관계자들도 참석했던 가운데 '넬슨' 사거(死去) 200주년행사가 그곳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맞섰던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는 ‘피에르 뷔르누브’가 인솔하던  33척이었다.



 ** 피에르·뷔르누브(Pierre-Charles-Jean-Baptiste-Silvestre de Villeneuve)


 1763년 12월 31일-1806년 4월 22일
 19세기 초두(初頭)의 '프랑스해군' 제독. 백작.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인솔해서 '호레이쇼·넬슨'이 인솔하던 '영국해군'과 싸웠다. 그리하여 그는 '넬슨'을 전사시켰지만, 그러나 해전에서는 대패(大敗)했고, 포로가 되었다. 이후, 그는 사면(赦免)되어 '프랑스'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러나 그 후에 '렌'(Rennes-프랑스 북서부에 있는 도시. 교통의 요충지이며, 농업과 축산업 그리고 여러 가지 공업이 발달한 곳이다. 브르타뉴의 지역권에 있다)의 호텔에서 자살했다. (타살설도 있지만, 유서를 남겼기 때문에 자살이 유력하다)


 *** 렌 (Rennes)

 '프랑스 북서부'에 있는 도시.
 교통의 요충지이며
농업과 축산업 그리고 여러 가지 공업이 발달한 곳이다.
'브르타뉴'의 지역권에 있다

<렌을 흐르는 빌렌 강>


 그러자 '넬슨제독'은 적의 함대를 분열시키기 위해서
 2열종대로 돌진하는 ‘넬슨 터치(Nelson Touch)’ 라는 전법을 사용했다.



    <넬슨 터치-적색이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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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또 '뷔르누브'도 '다종렬(多縱列)'에 의한 분단작전을 예측해서
 마스트에 다수의 저격병을 배치시켰다.



 ** 마스트(mast)


 범선의 갑판에 돛을 치기 위해서 세웠던 수직(垂直) 봉.
 '
마스트' 혹은 '돛대'라고 번역한다. 한자로는 '장(檣)'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범선의 마스트 구성은 배의 사이즈에 따라서 다르다,
 (큰 배는 많은 마스트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20세기 전의 마스트는 각각 1개의 목재였을 뿐이었지만
 배가 커지자 3개정도의 마스트를 연결해서 보다 높은 1개의 마스트를 구성했다.


<마스트의 예>



 그런데 그때 '연합함대'는 수적(數的)으로는 뛰어났지만, 하지만 그 중에는 '스페인해군'도 섞여있었기 때문에 지휘계통도 복잡했고, 또 사기(士氣)나 훈련도도 낮아서, 함재(艦載)포의 사속(射速)도 1/3발(發)정도나 '영국'에 뒤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다 '영국해군'은 그때도 사기도 훈련도도 높았던 데다가, 사속 또한 1분 30초에 1발정도로 아주 우수했다. 그리하여 그 격전 끝에 '연합함대'는 격침 1척, 포획파괴 18척, 전사 4,000명, 포로 7,000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냈고, 거기다 또한 '뷔르누브 제독'도 포로로 잡혔다. 그런 한편, '영국함대' 또한 상실함은 0척, 전사 400명, 전상(戰傷) 1,200명이라고 하는 경미한 피해로 끝나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그때 '넬슨제독'은 '프랑스' 저격병이 쏜 총탄에 넘어졌다. 그리고 그때 '넬슨제독'은 승전보를 듣자 <신에 감사한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했다고 한다.

 
<영향>

 '
나폴레옹'은 그 패전소식을 접하자 <폭풍우 때문에 졌다>라는 말을 강조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해상권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나폴레옹'은 그 후에는 '영국침공'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또
 그에 비해서 당시 '유럽'에서는 그 전쟁의 결과로 어떠한 동요(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승전을 위한 축하도 없었으며, 더욱이 승리를 했던 '영국'조차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
나폴레옹'은 그 패배의 위기를 그로부터 2개월 후에 '아우스트리트'에서의 승리로 회복했다.
 
그러자 또 그때 '영국수상'이었던 ‘피터’는 그 패전에 쇼크를 받아서 실망을 거듭하다가 그 다음 해에 병사(病死)했다.

 


 ** 윌리엄 피트(William Pitt-1759년 5월 28일~1806년 1월 23일)


 '영국'의 정치가, 수상. 통칭은 작은(어린) 피트(Pitt the Younger).
 '
영국'의 정치가로, 수상(首相) 직도 맡았었던 ‘체탐 백작-윌리엄 피트(통칭-大 피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병약했지만 , 타고난 재능으로 14세에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재학 중에도 건강 때문에 많은 고생했던 그는, 나중에 귀족의 특권을 행사해서 시험 없이 그 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졸업 후, 그는 곧 '캠브리지 대학'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하원(下院)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러나 다음번엔 학벌의 힘과 커넥션을 활용해서 '애플비(Appleby)'의 '부패(腐敗)선거구'에서 보궐선거로 당선했고, 하원의원이 되었다. (후에 캠브리지 대학으로 轉業)

 ※ 그러나
그 후에, 그가 부패선거구의 폐지운동을 이용해서 인기를 끈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조금 시니칼(cynical-냉소적, 가소로운)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미국독립전쟁'으로 인한 정치의 혼란과 함께 국왕과 대중의 지지를 받아서 1783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수상에 취임했다. (그 기록은 사상최연소)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총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그로인해 17년이라는 장기정권의 기초를 쌓았다. 그리고 그는 1793년까지는 '자유주의 노선'에 따라서 제 개혁에 임했다.

 1- '미국' 상실 후의 새로운 제국의 건설('캐나다'의 행정개혁과 '동인도회사'의 재구축)
 1
- '프랑스'와의 사이에 자유무역적인 통상조약의 체결 등.
 1
- 그리하여 1786년에는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했지만, 그러나 그로인해 '영국'은 '산업혁명'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후에 '영국'은 염가에다 양질이었던 '영국 상품'을 '프랑스'에 쏟아 부으면서 '프랑스 산업'에 큰 타격을 주게 된다. 그리하여 또 '프랑스'는 '혁명'으로 치달았고, 사회적인 혼란이 계속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1788년에는 '유럽'에서의 '고립(孤立)외교'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서 '프로이센'과 '네덜란드'와의 '삼국(三國)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또 그는 가톨릭교의 해방도 생각했었지만, 그러나 국왕 '죠지
3세'(재위:1760년~1820년)와의 의견이 맞지 않아서 사임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고 그 흐름이 과격하게 변해가자, 그에 대한 위기감을 부각시켜서 1793년부터 3회에 걸쳐서 '대불대동맹'을 조직했고, 그 혁명을 해결하려했다.
 
물론, 그는 그 때문에 '프랑스'로부터 <인민의 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후 '대불온건파'가 지지를 잃게 되자 '대불강경파'에다 '주전(主戰)파'였던 그는 1804년에 다시 내각을 조성했다. 그리고 또 1805년에는 '제3차 대불대동맹'을 조직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동년(同年)의 '아우스트리트 싸움'에서 패배했고, 그 충격으로 그 다음해 1월에 병으로 죽었다.

 
그는 '영국'의 '보수 세력'을 규합해서 야당의 '휘그당(Whig Party- 영국의 정당. 후의 자유당, 현재의 자유민주당의 전신에 해당한다)'의 지도자였던 ‘폭스’와 함께 정당정치의 확립에 공헌했고, '영국'의 2大 정당정치의 토대를 쌓아올리기도 했다.






 그 승리로 해서 '영국'의 해상제패(海上制覇)는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폴레옹전쟁'의 일대전환까지는 되지 못했다.
 그것은 1815년 '워털루 싸움'에서 '나폴레옹'이 지게 되자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승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런던'의 '트라팔가르광장(Trafalgar Square)'이다.
 그리고 현재, 그 광장에는 '넬슨제독'의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트라팔가르광장과 '넬슨제독' 기념비


 
 그런 한편 '프랑스국민'에게 있어서의 그 패배는 '트라우마(Trauma-심적 외상, 쇼크)'가 되어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패배’라는 충격으로 <트라파르가>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모리스 르브란(Maurice Leblanc-1864년 11월 11l일~1941년 11월 6일: 프랑스의 소설가)’의 모험 추리소설 <루팡 대 홈즈>에서도 '프랑스'의 괴도 ‘아르세이누(알센) 루팡(Arsene Lupin)’이 '영국'의 명탐정 ‘셜록 홈즈’에게 보냈던 도전장에서 <트라파르가의 복수>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그 후의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에 있어서, 그것은 종종 인용되어지게 되었다.

 
 
                                <'모리스 르브란'과 '루팡' - 상세한 것은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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