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나, 아우어슈테트 전쟁(Schlacht bei Jena und Auerstedt)>
<예나전쟁에서 친위대를 열병하는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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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어슈테트 전쟁>
<참고도-검은색 사각형이 프로이센군>
10월 14일.
이른 아침 '다브'의 '제3군단'은 '나움브르크'를 출발, 서방의 '게젠'으로 향했다.
그리고 또 같은 무렵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은 남방의 '도른부루크'로 향했다.
그리고 또 '프로이센군'은 '바이마르'로부터 '에카츠부르크'를 경유 '나움브르크'로 향하고 있었다.
오전 6시 30분.
'제3군단' 선봉의 ‘규단’사단이 '자레 江'을 건넜다.
※ 참고 < 자레 또는 잘레(Saale)강 > |
작센의 잘레 강(Sachsische Saale)
혹은 튀링겐의 잘레 강(Thuringische Saale)이라고도 불린다.
전체 길이 413km(426km로 나와 있는 곳도 있음)의 하천으로
수량이 풍부한 지류이다.
<검은 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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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규단'사단은 '하센하우젠' 부근에서 '프로이센군'과 접촉, 그대로 교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또 그때 '예나'와 같이 그곳 '아우어슈타트'도 짙은 안개로 덮여있어서 양군 모두가 교전개시시점에서는 적군의 상태를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자 '규단'은 최초의 교전에서 사로잡았던 '프로이센군' 병사를 사령부에 보냈고, 그러자 '다브'는 그 포로로부터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적의 주력부대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때, 결전을 앞둔 양군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군'
제3군단(27,000명, 포45문) - 다브 (실제로는 26,000명 정도)
제1보병사단(10,000명, 포10문 정도) - 모란(랑)
제2보병사단(78,00명, 포8문) - 브리랑
제3보병사단(8,000명, 포8문) - 규단
기병여단(1,500명) - 비아라네
군단포병(포17문) - 아닉크
'프로이센군'
중앙군(63,000명, 포 230문) -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 브라운슈바이크공
전위(前衛)사단(7,000명) - 부류헬
주력군(31,000명) - 브라운슈바이크공
제1사단(9,500명) - 오라네 황태자 빌헬름 프리드리히
제2사단(10,500명) - 발텐슈레벤伯
제3사단(11,000명) - 슈멧타우伯
예비군(15,000명) - 카르클라이트伯
제1사단(7,700명) - 키 하임
제2사단(7,300명) - 아르님
미투입(10,000명)
**부류(륫)헬(Gebhard Leberecht von Blucher) 1742년 12월 16일-1819년 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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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왕국의 군인. 육군 원수. 와르슈탓트 대공.
나폴레옹전쟁 후반에 프로이센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Wellington과 함께 워털루전쟁에서 나폴레옹을 물리쳤다.
그 공격적인 성격으로부터 전진원수(前進元帥-Marschall Vorwarts)로도 불렸다.
그리고 姓의 표기는 발음에 가까운 '부륫허'로도 불리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부류헬'로 표기함.
(그러나 잘 아시는 분들은 제대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 참고로 <블뤼허>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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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다브'는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우선 '규단'사단에게 '하센하우젠'을 중심으로 戰列을 형성시켰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그때까지 '잘레 江' 근처에서 머물고 있던 '모랑'사단과 '브리앙'사단
그리고 '비아라네' 기병여단에게 전장으로 급행토록 명령했다.
그리고 또 이어서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에는 급히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 한편, '프로이센군'도 '부류헬'사단을 좌익으로
그리고 '슈멧타우'사단의 선봉을 우익으로 해서
'규단'사단에 대비하는 전선을 형성해갔다.
그리고 오전 8시.
그 최초로 공격을 시작했던 것은 '부류헬'의 기병여단이었다.
그러자 '규단'은 부대에 방진(方陣)을 짜게 해서 그에 대항해나갔다.
그러나 '부류헬'은 4번에 걸쳐서 기병돌격을 감행했지만
'슈멧타우'사단과의 제휴가 충분하지 못했던 데다가
'규단'사단의 견고했던 방진에 의해서 모두 격퇴되었다.
오전 8시 30분.
'브리앙'사단이 전장에 도착했고 '다브'는 그것을 '규단'사단의 우익으로 보냈다.
같은 시각 '프로이센'도 '슈멧타우'사단의 본대가 그곳에 도착했고
그리고는 곧바로 선봉과 합류해서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그 후속의 부대는 '슈멧타우'사단을 중앙으로 해서
'발텐슈레벤'사단의 선봉은 우익에 '오라네'사단의 선봉은 좌익으로 붙였다.
그러니까 그 시점에서 봤을 때 '프로이센군'은 적어도 25,000명
'프랑스군'은 15,000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다브'는 교묘하게 부대를 움직여서
'프로이센군'의 공격을 전부 다 막아냈다.
오전 9시.
'비아라네'의 기병여단이 그곳에 도착했고, 그러자 '다브'는 그것을 우익에 투입했다.
그러자 '비아라네'여단은 '브리앙'사단과 협력해서
우익의 공세를 더욱 높여 '부류헬'사단을 후퇴시켰다.
그러자 또 그 공간을 보충하기 위해서 '브라운슈바이크'는 우익의 부대 일부를 좌익으로 이동시켰고
그것으로 '규단'사단의 부담은 감소되었다.
그러니까 그때, 적의 공세가 강했던 좌익으로 정면 돌파시키지 않고
오히려 우익으로 붙여서 지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그 '다브'의 전술은
거의 신묘(神妙)했었다고까지 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오전 10시.
'발텐슈레벤'사단 본대가 또 그곳에 도착했고, 그들도 그대로 선봉과 합류해서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프로이센군'은 그때, '카르클라이트 군'과 '오라네'사단본대를 제외한
적어도 30,000명 정도의 병력이 그곳에 모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브라운슈바이크'는 주공격의 목표를 '하센하우젠'으로 정하고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그 시점에서 겨우 16,000명, 그날 중 가장 전력비(戰力比)가 컸던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도 '다브'는 냉정하고도 적확(的確)하게 지휘를 맡았고
그리고는 교묘한 부대기동으로 '프로이센군'의 공세에 대처했다.
그리고 또 한때 '규단'사단이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나 '프랑스군'은 그 총공격을 끝까지 막아냈다.
뿐만 아니라 '브라운슈바이크'와 '슈멧타우'를 부상시키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은 곧 후송되었지만, 그러나 그 두 사람 다 상처로 인해서 금방 사망했다.
그러자 그 최고사령관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의 부재(不在)로 인해서 '프로이센군'의 지휘계통은 곧 마비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그 차석(次席)이었던 '카르클라이트'가 그 즉시 지휘권을 계승해야만 했었지만,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는 아직 그 전장에는 도착하지 않고 있었고, 또 '브라운슈바이크'의 부상에 대한 보고도 받지 못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지휘권은 더욱 계승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도 '프로이센군'의 구식(舊式) 적인 통신능력은 결국 치명적인 상황을 불렀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사실상, 그 시점에서 '프로이센군'의 지휘통제는 완전히 붕괴했고, 각부대급 지휘관들은 나름대로 독단으로 교전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오전 10시 30분이 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는 그날의 唯一한 명령을 내렸고, 그것은 '오라네'사단의 본대를 전장으로 투입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는 그 '오라네'사단을 둘로 나누었고, 그것을 또 양익(兩翼)의 지원으로 돌려버려서, 그래서 전력분산이라고 하는 우(愚)를 범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양익을 일시적으로 지지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나 '프랑스군'에게 효과적인 타격은 주지 못했다.
오전 11시.
'모랑'사단이 또 그곳에 도착했고, 그러자 '다브'는 그것을 좌익에다 투입했다.
그러자 '모랑'사단은 맹공을 펼쳐서 투입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오라네'사단의 본대를 격파했고
계속해서 '발텐슈레벤'의 사단도 격퇴해버렸다.
그 양(兩)사단이 격파 당했던 직후에야 간신히 '카르클라이트 군'이 그 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곧 바로 '키하임'사단 및 '아르님'사단이 전장으로 투입되었지만, 그러나 '오라네'사단과 '발텐슈레벤'사단의 패주병들에게 전진의 방해를 받아서 신속한 전투참가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오전 12시.
'모랑'사단은 더욱 전진해서 '슈멧타우'사단의 측면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 맹공을 저지하기 위해서 '빌헬름' 황태자의 기병여단이 '모랑'사단에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때 '모랑'은 재빠르게 방진을 짜서 그 돌격을 모두 격퇴했다.
그러자 '빌헬름' 황태자의 기병여단은 후퇴했고, 원호(援護)를 잃은 '슈멧타우'사단도 곧 붕괴했다.
거기서 '다브'는 총 반공(反攻)을 명령했다.
그러자 '규단'사단과 '브리앙'사단도 반격으로 전환했고
이어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던 '프로이센군'을 차례로 격파해나갔다.
그리고 또 그때 '키하임'사단과 '아르님'사단이 '프로이센군'의 후퇴를 원호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의 '제3군단' 앞을 가로막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 역시 허무하게 격퇴되었다.
그러자 '제3군단'은 그 기세를 타서 '프로이센군'을 한꺼번에 '아우어슈타트'까지 밀어 넣었다.
오후 1시가 되자 '프로이센군'은 거의 다 무너졌다.
그리고 또 그때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에게 약간의 예비 병력이 남아있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이미 전의를 상실했던 왕은 그것을 투입하는 일 없이 총퇴각을 명령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의 '제3군단'은 밤까지 추격을 계속했고
'프로이센군'은 그것으로 인해서 더욱 많은 손실을 입었다.
그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랑스'의 '제3군단'은
총병력의 1/4에 해당하는 7,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그리고 '프로이센군'은 병력 13,000명과 포 115문이라고 하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그때 '다브'의 '제3군단'은 2배의 적군을 상대로 해서
또 그 2배의 손해를 '프로이센군'에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그 정도의 병력차이를 뒤집은 전례는 전사(戰史)상에서도 드문 것이라고 할 수 있었고
또 '나폴레옹전쟁' 중에서도 더 이상의 그러한 예는 없었다.
물론, 그것은 또 그때 '프랑스군'의 상태가 '프로이센군'보다 훨씬 질적으로 우세해있었던 때문도 있었지만, 그러나 또 아무튼, 그때 그 '다브'의 걸출했던 전술지휘능력이 없었다면, 그 승리는 결코 있을 수 없었던 일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과와 영향>
그때 '다브'의 부관(副官)이었던 ‘드로브리앙’으로부터 '아우어슈타트'의 승전보고를 받았던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귀관의 원수(元帥)는 사물이 두개로 보이는 것이 틀림없다!>
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브'는 실제로도 극도의 근시였다.
아무튼, 그러나 그 보고가 사실인 것을 알게 되자 '나폴레옹'은 곧 경악하고는
'다브'를 최대한의 찬사로 칭찬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다음날 발행되었던 '대륙군홍보(弘報)제5호'에는
그 '아우어슈테트의 싸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 군의 우익에서 '다브 원수'는 기적을 완수했다. 그는 '게젠'을 통해서 들어왔던 적의 대부분을 포위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서 3번 이상이나 그들을 격파했다. 그는 무인으로서는 제일의 소질이라고 할 수 있을 탁월한 용기와 견고한 성격을 발휘했었다... 대륙군홍보 제5호>
그리고 또 '나폴레옹'은 1808년에 그 공으로, 그에게 ‘아우어슈테트 공작’이란 칭호까지 내렸다.
그러나 그에 대조적으로 질책을 받았던 것은 '베르나도트'였다.
그의 '제1군단'은 그때 '다브'를 도와주지도 않았고
또 주전장(主戰場)이었던 '예나'에도 참가하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그때 '제1군단'은 완만하게 행군을 해서는 '도른부루크'를 경유, 그리하여 '아포로다'에 도착했던 것은 14일 저녁때였던 것이다. 그랬으므로 적의 주력을 놓쳤을 가능성에 비추어서 그런 '베르나도트'의 행동은 당연히 비판받았음에 마땅했던 것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자 또 그때 '나폴레옹'은 그 '베르나도트'를 처분하기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는 또 이미 그의 아내가 되어 있었고
또 한때 자신의 약혼자였기도 했던 ‘데지레 클라리’를 생각해서 그 처분은 보류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는 또 많은 반론도 있다.
예를 들어서 '도른부루크' 주변의 지형을 참작했을 때, 행군이 곤란했다는 점
그리고 아무리 강행군을 했더라도 시간상으로는 그 전장에 도착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란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실 '제3군단'의 위기적 상황을 부르게 했던 것은 위에서도 설명했던 바와 같이 바로 '나폴레옹' 그 자신의 오해에 근거했던 명령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역사가들은 그것을 두고
<'나폴레옹'이 그때 자신의 실패를 가리기 위해서, 말하자면 그 희생양(scapegoat)으로서 삼았던 것이 바로 그 '베르나도트'가 아니었겠는가...>
라고 지적하고도 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프랑스군'은 승리했다. 그리고 그 두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입었던 손해는 병력 38,000명에다 포 227문이라고 하는 아주 심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후의 추격전은 일방적인 것으로 전개가 되었다. 그때 용병(傭兵) 군으로 이루어졌던 '프로이센군'은 한번 무너지게 되면 재편(再編)이 곤란했기 때문에, 그래서 '프랑스군'의 추격에 대해서 어찌해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전투에서 패배했던 그 시점이 바로 '프로이센군'이 붕괴했던 시점이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고 있고, 그래서 또 그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의 싸움'은 실로 결정적인 싸움이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바로 그때, 그러니까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예나'에 '나폴레옹'이 입성했을 때, 그를 맞으러 나왔던 시민들 중에서는 당시 '예나 대학'에서 근무하던 철학자 '헤겔(Hegel-유명하므로 설명은 생략함)'도 있었는데, 그때 그는 '나폴레옹'을 직접 본 느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한다.
<世界精神이 말을 타고 통과한다(지나간다)-Weltseele zu Pferde>
<戰後>
어쨌든 그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쟁'에서 '프로이센'의 주력을 격파했던 '프랑스군'은 이어서 '프로이센' 본토까지 한꺼번에 침공했다. 그리고는 10월 25일 '프랑스군'은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고, 그러자 그때 '나폴레옹'은 전공이 제일 컸던 '다브'에게 제일 먼저 입성하는 영예를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11월 중순까지 '프랑스군'은 전 국토를 제압했고, 최종적으로 사망 24,000명, 포로 140,000명의 손해를 내고는 '프로이센군'은 괴멸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에 끝까지 저항했던 사람은 ‘부류헬’과 ‘샤른호르스트’ 그리고 ‘마크데브르크’ 등 ‘그나이제나우’를 지휘하던 군대였다. 그리고 또 그들은 나중에 '프로이센군'의 개혁에 큰 역할을 맡게 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지만, 그러나 전쟁 그 자체가 그것으로 해서 완전히 끝났던 것은 아니었다. 이어서 ‘쾨니히스베르크’로 도망을 갔던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는 '러시아'의 원군을 끌어들여서 다시 국토회복을 기도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또 '러시아군' 약 10만 명이 '프로이센' 동쪽으로 집결했고, 그러자 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측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 그 '러시아군'을 깨고 강화(講和)를 할 목적으로 '폴란드침공'을 개시했던 것이다.
그러자 '프로이센' 왕을 대신해서 그 왕비였던 '루이제'가 '프랑스'에 강화를 요구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 '루이제'는 '나폴레옹'에게 온후한 처분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것을 냉정하게 무시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프로이센'의 전후처리는 그 다음해 7월의 ‘틸지트 화약’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프로이센'은 '엘베 강' 서쪽 영토와 '폴란드'를 잃게 되었고
거기다 1억 2000만 프랑이라는 배상금까지 부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육군(陸軍)의 인원도 4만 명으로 제한을 받아서
기나긴 인내의 시간을 강요당하게도 되었던 것이다.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쟁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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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 입성하는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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