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生涯

  1.6  絶頂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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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 강을 건너가는 나폴레옹>





  * 제4차 대불대동맹(Fourth Coalition, 1806년 10월 6일~1807년 7월 7일)



 ** 독일, 폴란드 전쟁(1806~1807)



 *** 예나, 아우어슈테트 전쟁(Schlacht bei Jena und Auerstedt)>



<예나전쟁에서 친위대를 열병하는 나폴레옹>


 <아우어슈테트 전쟁>


                                            <참고도-검은색 사각형이 프로이센군>


 10월 14일.

 이른 아침 '다브'의 '제3군단'은 '나움브르크'를 출발, 서방의 '게젠'으로 향했다.
 그리고 또 같은 무렵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은 남방의 '도른부루크'로 향했다.
 그리고 또 '프로이센군'은 '바이마르'로부터 '에카츠부르크'를 경유 '나움브르크'로 향하고 있었다.

 오전 6시 30분.

 '제3군단' 선봉의 ‘규단’사단이 '자레 江'을 건넜다.



 ※ 참고 < 자레 또는 잘레(Saale)강 >

 작센의 잘레 강(Sachsische Saale)
 혹은 튀링겐의 잘레 강(Thuringische Saale)이라고도 불린다.
 전체 길이 413km(426km로 나와 있는 곳도 있음)의 하천으로
 수량이 풍부한 지류이다.


<검은 선 부분>




 오전 7시.

 '규단'사단은 '하센하우젠' 부근에서 '프로이센군'과 접촉, 그대로 교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또 그때 '예나'와 같이 그곳 '아우어슈타트'도 짙은 안개로 덮여있어서 양군 모두가 교전개시시점에서는 적군의 상태를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자 '규단'은 최초의 교전에서 사로잡았던 '프로이센군' 병사를 사령부에 보냈고, 그러자 '다브'는 그 포로로부터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적의 주력부대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때, 결전을 앞둔 양군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군'

 제3군단(27,000명, 포45문) - 다브 (실제로는 26,000명 정도)
 제1보병사단(10,000명, 포10문 정도) - 모란()
 제2보병사단(78,00명, 포8문) - 브리랑
 제3보병사단(8,000명, 포8문) - 규단
 기병여단(1,500명) - 비아라네
 군단포병(포17문) - 아닉크

 '프로이센군'

 중앙군(63,000명, 포 230문) -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 브라운슈바이크공
 전위(前衛)사단(7,000명) - 부류헬
 주력군(31,000명) - 브라운슈바이크공
 제1사단(9,500명) - 오라네 황태자 빌헬름 프리드리히
 제2사단(10,500명) - 발텐슈레벤伯
 제3사단(11,000명) - 슈멧타우伯
 예비군(15,000명) - 카르클라이트伯
 제1사단(7,700명) - 키 하임
 제2사단(7,300명) - 아르님
 미투입(10,000명) 


 
 **부류()헬(Gebhard Leberecht von Blucher) 1742년 12월 16일-1819년 9월 12일

 프로이센왕국의 군인. 육군 원수. 와르슈탓트 대공.
 나폴레옹전쟁 후반에 프로이센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Wellington과 함께 워털루전쟁에서 나폴레옹을 물리쳤다.
 그 공격적인 성격으로부터 전진원수(前進元帥-Marschall Vorwarts)로도 불렸다.
 그리고 姓의 표기는 발음에 가까운 '부륫허'로도 불리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부류헬'로 표기함.
 (그러나 잘 아시는 분들은 제대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 참고로 <블뤼허>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 바랍니다.


 




 그러자 '다브'는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우선 '
규단'사단에게 '하센하우젠'을 중심으로 戰列을 형성시켰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그때까지 '잘레 江' 근처에서 머물고 있던 '모랑'사단과 '브리앙'사단
 그리고 '비아라네' 기병여단에게 전장으로 급행토록 명령했다.
 그리고 또 이어서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에는 급히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 한편, '프로이센군'도 '부류헬'사단을 좌익으로
 그리고 '슈멧타우'사단의 선봉을 우익으로 해서
 '규단'사단에 대비하는 전선을 형성해갔다.

 그리고 오전 8시.

 그 최초로 공격을 시작했던 것은 '부류헬'의 기병여단이었다.
 그러자 '규단'은 부대에 방진(方陣)을 짜게 해서 그에 대항해나갔다.
 그러나 '부류헬'은 4번에 걸쳐서 기병돌격을 감행했지만
 '슈멧타우'사단과의 제휴가 충분하지 못했던 데다가
 '규단'사단의 견고했던 방진에 의해서 모두 격퇴되었다.

 오전 8시 30분.

 '브리앙'사단이 전장에 도착했고 '다브'는 그것을 '규단'사단의 우익으로 보냈다.
 같은 시각 '프로이센'도 '슈멧타우'사단의 본대가 그곳에 도착했고
 그리고는 곧바로 선봉과 합류해서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그 후속의 부대는 '슈멧타우'사단을 중앙으로 해서
 '발텐슈레벤'사단의 선봉은 우익에 '오라네'사단의 선봉은 좌익으로 붙였다.

 그러니까 그 시점에서 봤을 때 '프로이센군'은 적어도 25,000명
 '프랑스군'은 15,000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다브'는 교묘하게 부대를 움직여서
 '프로이센군'의 공격을 전부 다 막아냈다.

 오전 9시.

 '
비아라네'의 기병여단이 그곳에 도착했고, 그러자 '다브'는 그것을 우익에 투입했다.
 그러자 '비아라네'여단은 '브리앙'사단과 협력해서
 우익의 공세를 더욱 높여 '부류헬'사단을 후퇴시켰다.
 그러자 또 그 공간을 보충하기 위해서 '브라운슈바이크'는 우익의 부대 일부를 좌익으로 이동시켰고
 그것으로 '규단'사단의 부담은 감소되었다.
 그러니까 그때, 적의 공세가 강했던 좌익으로 정면 돌파시키지 않고
 오히려 우익으로 붙여서 지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그 '다브'의 전술은
 거의 신묘(神妙)했었다고까지 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오전 10시.

 '발텐슈레
벤'사단 본대가 또 그곳에 도착했고, 그들도 그대로 선봉과 합류해서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프로이센군'은 그때, '카르클라이트 군'과 '오라네'사단본대를 제외한
 적어도 30,000명 정도의 병력이 그곳에 모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브라운슈바이크'는 주공격의 목표를 '하센하우젠'으로 정하고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그 시점에서 겨우 16,000명, 그날 중 가장 전력비(戰力比)가 컸던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도 '다브'는 냉정하고도 적확(的確)하게 지휘를 맡았고
 그리고는 교묘한 부대기동으로 '프로이센군'의 공세에 대처했다.

 그리고 또 한때 '규단'사단이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나 '프랑스군'은 그 총공격을 끝까지 막아냈다.
 
뿐만 아니라 '브라운슈바이크'와 '슈멧타우'를 부상시키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은 곧 후송되었지만, 그러나 그 두 사람 다 상처로 인해서 금방 사망했다.

 그러자 그 최고사령관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의 부재(不在)로 인해서 '프로이센군'의 지휘계통은 곧 마비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그 차석(次席)이었던 '카르클라이트'가 그 즉시 지휘권을 계승해야만 했었지만,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는 아직 그 전장에는 도착하지 않고 있었고, 또 '브라운슈바이크'의 부상에 대한 보고도 받지 못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지휘권은 더욱 계승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 상황에서도 '프로이센군'의 구식(舊式) 적인 통신능력은 결국 치명적인 상황을 불렀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사실상, 그 시점에서 '프로이센군'의 지휘통제는 완전히 붕괴했고, 각부대급 지휘관들은 나름대로 독단으로 교전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오전 10시 30분이 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는 그날의 唯一한 명령을 내렸고, 그것은 '오라네'사단의 본대를 전장으로 투입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는 그 '오라네'사단을 둘로 나누었고, 그것을 또 양익(兩翼)의 지원으로 돌려버려서, 그래서 전력분산이라고 하는 우(愚)를 범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양익을 일시적으로 지지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나 '프랑스군'에게 효과적인 타격은 주지 못했다.

 오전 11시.

 '모랑'사단이 또 그곳에 도착했고, 그러자 '다브'는 그것을 좌익에다 투입했다.
 그러자 '모랑'사단은 맹공을 펼쳐서 투입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오라네'사단의 본대를 격파했고
 계속해서 '발텐슈레벤'의 사단도 격퇴해버렸다.

 그 양(兩)사단이 격파 당했던 직후에야 간신히 '카르클라이트 군'이 그 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곧 바로 '키하임'사단 및 '아르님'사단이 전장으로 투입되었지만, 그러나 '오라네'사단과 '발텐슈레벤'사단의 패주병들에게 전진의 방해를 받아서 신속한 전투참가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오전 12시.

 '모랑'사단은 더욱 전진해서 '슈멧타우'사단의 측면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 맹공을 저지하기 위해서 '빌헬름' 황태자의 기병여단이 '모랑'사단에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때 '모랑'은 재빠르게 방진을 짜서 그 돌격을 모두 격퇴했다.
 그러자 '빌헬름' 황태자의 기병여단은 후퇴했고, 원호(援護)를 잃은 '슈멧타우'사단도 곧 붕괴했다.

 거기서 '다브'는 총 반공(反攻)을 명령했다.
 그러자 '규단'사단과 '브리앙'사단도 반격으로 전환했고
 이어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던 '프로이센군'을 차례로 격파해나갔다.
 그리고 또 그때 '키하임'사단과 '아르님'사단이 '프로이센군'의 후퇴를 원호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의 '제3군단' 앞을 가로막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 역시 허무하게 격퇴되었다.
 그러자 '제3군단'은 그 기세를 타서 '프로이센군'을 한꺼번에 '아우어슈타트'까지 밀어 넣었다.

 오후 1시가 되자 '프로이센군'은 거의 다 무너졌다.
 그리고 또 그때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에게 약간의 예비 병력이 남아있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이미 전의를 상실했던 왕은 그것을 투입하는 일 없이 총퇴각을 명령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의 '제3군단'은 밤까지 추격을 계속했고
 '프로이센군'은 그것으로 인해서 더욱 많은 손실을 입었다.

 그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랑스'의 '제3군단'은
 총병력의 1/4에 해당하는 7,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그리고 '프로이센군'은 병력 13,000명과 포 115문이라고 하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그때 '다브'의 '제3군단'은 2배의 적군을 상대로 해서
 또 그 2배의 손해를 '프로이센군'에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그 정도의 병력차이를 뒤집은 전례는 전사(戰史)상에서도 드문 것이라고 할 수 있었고
 또 '나폴레옹전쟁' 중에서도 더 이상의 그러한 예는 없었다.

 물론, 그것은 또 그때 '프랑스군'의 상태가 '프로이센군'보다 훨씬 질적으로 우세해있었던 때문도 있었지만, 그러나 또 아무튼, 그때 그 '다브'의 걸출했던 전술지휘능력이 없었다면, 그 승리는 결코 있을 수 없었던 일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과와 영향>

 그때 '다브'의 부관(副官)이었던 ‘드로브리앙’으로부터 '아우어슈타트'의 승전보고를 받았던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귀관의 원수(元帥)는 사물이 두개로 보이는 것이 틀림없다!>

 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브'는 실제로도 극도의 근시였다.

 아무튼, 
그러나 그 보고가 사실인 것을 알게 되자 '나폴레옹'은 곧 경악하고는
 '다브'를 최대한의 찬사로 칭찬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다음날 발행되었던 '대륙군홍보(弘報)제5호'에는
 그 '아우어슈테트의 싸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 군의 우익에서 '다브 원수'는 기적을 완수했다. 그는 '게젠'을 통해서 들어왔던 적의 대부분을 포위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서 3번 이상이나 그들을 격파했다. 그는 무인으로서는 제일의 소질이라고 할 수 있을 탁월한 용기와 견고한 성격을 발휘했었다...
대륙군홍보 제5호>

 
그리고 또 '나폴레옹'은 1808년에 그 공으로, 그에게 ‘아우어슈테트 공작’이란 칭호까지 내렸다.

 그러나 그에 대조적으로 질책을 받았던 것은 '베르나도트'였다.
 그의
'제1군단'은 그때 '다브'를 도와주지도 않았고
 또 주전장(主戰場)이었던 '예나'에도 참가하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그때 '제1군단'은 완만하게 행군을 해서는 '도른부루크'를 경유, 그리하여 '아포로다'에 도착했던 것은 14일 저녁때였던 것이다.
 그랬으므로 적의 주력을 놓쳤을 가능성에 비추어서 그런 '베르나도트'의 행동은 당연히 비판받았음에 마땅했던 것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자 또 그때 '나폴레옹'은 그 '베르나도트'를 처분하기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는 또 이미 그의 아내가 되어 있었고
 또 한때 자신의 약혼자였기도 했던 ‘데지레 클라리’를 생각해서 그 처분은 보류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는 또 많은 반론도 있다.
 
예를 들어서 '도른부루크' 주변의 지형을 참작했을 때, 행군이 곤란했다는 점
 그리고 아무리 강행군을 했더라도 시간상으로는 그 전장에 도착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란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실 '제3군단'의 위기적 상황을 부르게 했던 것은 위에서도 설명했던 바와 같이 바로 '나폴레옹' 그 자신의 오해에 근거했던 명령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역사가들은 그것을 두고

 <'나폴레옹'이 그때 자신의 실패를 가리기 위해서, 말하자면 그 희생양(scapegoat)으로서 삼았던 것이 바로 그 '베르나도트'가 아니었겠는가...>

 라고 지적하고도 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프랑스군'은 승리했다. 그리고 그 두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입었던 손해는 병력 38,000명에다 포 227문이라고 하는 아주 심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후의 추격전은 일방적인 것으로 전개가 되었다. 그때 용병(傭兵) 군으로 이루어졌던 '프로이센군'은 한번 무너지게 되면 재편(再編)이 곤란했기 때문에, 그래서 '프랑스군'의 추격에 대해서 어찌해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전투에서 패배했던 그 시점이 바로 '프로이센군'이 붕괴했던 시점이라고 사람들은 말을 하고 있고, 그래서 또 그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의 싸움'은 실로 결정적인 싸움이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바로 그때, 그러니까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예나'에 '나폴레옹'이 입성했을 때, 그를 맞으러 나왔던 시민들 중에서는 당시 '예나 대학'에서 근무하던 철학자 '헤겔(Hegel-유명하므로 설명은 생략함)'도 있었는데, 그때 그는 '나폴레옹'을 직접 본 느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한다.

 <世界精神이 말을 타고 통과한다(지나간다)-Weltseele zu Pferde>



 <戰後>

 어쨌든 그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쟁'에서 '프로이센'의 주력을 격파했던 '프랑스군'은 이어서 '프로이센' 본토까지 한꺼번에 침공했다. 그리고는 10월 25일 '프랑스군'은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고, 그러자 그때 '나폴레옹'은 전공이 제일 컸던 '다브'에게 제일 먼저 입성하는 영예를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11월 중순까지 '프랑스군'은 전 국토를 제압했고, 최종적으로 사망 24,000명, 포로 140,000명의 손해를 내고는 '프로이센군'은 괴멸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에 끝까지 저항했던 사람은 ‘부류헬’과 ‘샤른호르스트’ 그리고 ‘마크데브르크’ 등 ‘그나이제나우’를 지휘하던 군대였다.
그리고 또 그들은 나중에 '프로이센군'의 개혁에 큰 역할을 맡게 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지만, 그러나 전쟁 그 자체가 그것으로 해서 완전히 끝났던 것은 아니었다. 이어서 ‘쾨니히스베르크’로 도망을 갔던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는 '러시아'의 원군을 끌어들여서 다시 국토회복을 기도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또 '러시아군' 약 10만 명이 '프로이센' 동쪽으로 집결했고, 그러자 또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측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리고 또 그 '러시아군'을 깨고 강화(講和)를 할 목적으로 '폴란드침공'을 개시했던 것이다.

 그러자 '프로이센' 왕을 대신해서 그 왕비였던 '루이제'가 '프랑스'에 강화를 요구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 '루이제'는 '나폴레옹'에게 온후한 처분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것을 냉정하게 무시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프로이센'의 전후처리는 그 다음해 7월의 ‘틸지트 화약’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프로이센'은 '엘베 강' 서쪽 영토와 '폴란드'를 잃게 되었고
 거기다 1억 2000만 프랑이라는 배상금까지 부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육군(陸軍)의 인원도 4만 명으로 제한을 받아서
 기나긴 인내의 시간을 강요당하게도 되었던 것이다.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쟁 - 끝 >



 



<베를린에 입성하는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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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6  絶頂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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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 강을 건너가는 나폴레옹>





  * 제4차 대불대동맹(Fourth Coalition, 1806년 10월 6일~1807년 7월 7일)



 ** 독일, 폴란드 전쟁(1806~1807)



 *** 예나, 아우어슈테트 전쟁(Schlacht bei Jena und Auerstedt)>



<예나전쟁에서 친위대를 열병하는 나폴레옹>


 <예나 전쟁>



                                  <예나전쟁-흰색 사각형이 나폴레옹>



 10월 14일.

 "프랑스군'의 주력부대는 집결이 완전하게 끝나지 않고 있었고, 그때 '나폴레옹'의 수중에 남아있던 전력도 軍 45,000명과 포 100문정도가 전부였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포병을 ‘란트그라펠베르크山'으로 올라가게 했고, 화력지원도 더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에 비해서 '프로이센군'은 '호엔로에 군' 33,000명, 포 120문 그리고 ‘잘펠트’에서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 '도른부루크'의 측면방어를 목적으로 보냈던 군사 5,000명으로 인해서 그 열세(劣勢)는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그래서 '호엔로에'는 전날 하루 내내 '류헬(또는 뤼벨)'에게 원군을 요청하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프랑스군'이 행동을 개시했다.

 아침 6시.

 '프랑스군'이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날 아침에는 마침 주위에 온통 안개가 깔려있었는데, 그로써 '프랑스군'은 자연(自然) 은폐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일종의 기습효과를 낳았다.
 아무튼 그때 '란누'의 '제5군단' 20,000명의 병력이 맨 앞장을 서서 우선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서 우익에서는 '솔트'의 '제4군단' 9,000명이
 그리고 좌익에서는 '오쥬로'의 '제7군단' 16,000명이 전진을 시작했다.
 그런데다 또 기습효과까지 더해져서 그로부터 얼마 후 '제5군단'은 '크로즈비츠'와 '코스페다'의 '프로이센군'을 격퇴했고, 그리고는 그 여세를 몰아서 전선의 중앙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프로이센군'은 대오가 크게 흐트러져서 곧 붕괴할 조짐을 보였다.

 오전 9시.

 '호엔로에'는 예비부대를 투입해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막으면서 그 사이에 전열을 다시 가다듬으려고 했다.
 그때 '프로이센군'은 '필센하이리겐'을 중심으로 해서 좌익은 '헬무스포드' 우익은 '이젤슈타트'에 이르는 방위선을 형성하고, '바이마르' 쪽에서 달려올 '뤼벨'의 원군을 기다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것을 호기라고 보고는 전군에 적극적인 공세를 명했다.
 그런데 그 바로 직후에 '네이'의 '제6군단' 선봉 4,000명이 그 전장에 도착했고, 그리고는 이어서 '나폴레옹'의 명령도 기다리지도 않고 독단으로 '제5군단'의 좌익을 빠져나가서 돌격을 개시해버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프로이센군'도 전열을 정돈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제5군단'의 돌격은 '프로이센군'의 심한 반격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적에게 포위를 당한 꼴이 되었던 '제5군단'은 그때부터 '프로이센'의 기병들에게 맹공을 받았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베르트랑'에게 친위대의 기병 2개 연대를 주어서 그들을 구출할 것을 명했던 것과 동시에 '란누'에게도 '네이'를 지원할 것을 명령했다.

 <아래 그림은 오전 10시 상황도-청색이 나폴레옹 >





 오전 10시.

 '도른부루크'에 파견되었던 '프로이센'의 분견(分遣)대 5,000명이 그 전장에 도착해서 우익의 '솔트 제4군단'에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솔트'는 보병과 기병의 협동작전으로 그것을 완전하게 격퇴했고, 측면의 안전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헬무스포드'의 '프로이센군' 좌익을 밀어붙여서 '그로스 롬스터드'까지 후퇴 시켰다.

 오전 11시.

 '제5군단'이 '필센하이리겐'을 제압했고, 그것으로 다시 '프로이센군'의 중앙 쪽이 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호엔로에'는 전군을 후퇴시키고는 '바이마르'로 향하는 길목에 전군(全軍)을 집중시켰다.
 그것은 또 그때 '프로이센군'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겨우 '뤼벨'의 지원을 받으면서 그 전장으로부터 탈출하는 수밖에는 없었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결정으로 인해서 '프로이센군'은 차폐물(遮蔽物) 하나 없는 상태로 완전하게 노출되어버려서, 그때 촌락의 생원(生垣-볏짚이나 식물류를 이용한 울타리나 가림 막)을 이용하고 있던 '프랑스군'과 총격전을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오후 1시.

 '프랑스군'은 후속군의 집결도 모두 다 끝이 났고, 전력(全力)도 거의 다 갖추어졌다.
 그런 한편, '프로이센군'은 2시간에 걸쳤던 총격전으로 인해서 붕괴일보직전상태에까지 가있었다.
 그러자 그에 승리를 확신했던 '나폴레옹'은 이윽고 총공격을 명령했다.

  <아래 그림은 오후 2시 상황도-청색이 나폴레옹 >





 오후 2시.

 '뤼벨'의 원군 13,000명이 그 전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때 '뤼벨'은 자기 편의 탈출을 지원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곧 바로 '프랑스군'을 향해서 돌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의 '제5군단'과 '제6군단' 그리고 '제7군단'까지 나서서 그것을 막았고, 그 우세했던 병력으로 인해서 '프로이센군'은 철저하게 격파 당했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프로이센군'은 마지막 예비 병력까지 잃게 되었고 곧 이어서 완전히 붕괴했다.

 '프랑스군'은 그런 완패에 빠져있던 '프로이센군'을 계속해서 추격했다. 거기다 '뮤라'의 기병 예비군단까지 패병소탕작전에 참여했고, 그것으로 몇 안 되던 '프로이센군'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북쪽으로 도망을 갔다.

 그 '예나'의 싸움에서 '프로이센군'은 병력 25,000명과 포 112문을 잃었다. 그러나 그에 비해서 '프랑스군'의 손해는 5,0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었기 때문에, 완벽한 승리였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병력차이가 워낙 많이 났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결과였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하지만 '프로이센'의 주력군을 격파했다고 생각했던 '나폴레옹'은 그 승리에 대해서 아주 크게 만족했다.

 그렇지만 같은 날, 그 보다 더 중요했던 승리가 또 북방의 '아우어슈테트'에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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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6  絶頂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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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 강을 건너가는 나폴레옹>





  * 제4차 대불대동맹(Fourth Coalition, 1806년 10월 6일~1807년 7월 7일)



 ** 독일, 폴란드 전쟁(1806~1807)



 *** 예나, 아우어슈테트 전쟁(Schlacht bei Jena und Auerstedt)>



<예나전쟁에서 친위대를 열병하는 나폴레옹>


 <양군의 전력>

 그래서 그때 '마센밧하()'와 '샤룬()호르스트' 등은 그전부터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 호소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그들은 군부 내에서 소수파였기 때문에 개혁은 부분적으로 밖에 실행되지 않았다. (그랬던 '프로이센군'에 '사단제'가 도입되었던 것은 그 1806년 때의 動員이 처음이었다)



 **** 샤른호르스트(Gerhard Johann David von Scharnhorst)
       1755년 11월 12일~1813년 6월 28일)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
 '프로이센'의 군제개혁에 다대한 영향을 미쳤고, 참모본부의 초대총장이었으며
 '나폴레옹전쟁' 중에는 '프로이센군'을 지도했다.
 
후임의 ‘그나이제나우’와 함께 '참모본부제도 탄생의 아버지'로서
 軍事사상에서도 특필되는 인물이다.






 <會戰의 동기>

 아무튼 그때 '프랑스군'은 세 개로 나뉘어져서 우선 ‘라이프치히(Leipzig)’ 및 ‘드레스덴(Dresden)’을 향하여 진격해갔다.(分進合擊 作戰)
 그리하여 '
제5군단'과 '제7군단'은 '예나(Jena)' 방면으로
 그리고 '
친위대'와 '제1군단' '제3군단'은 ‘나움브()르크(Naumburg)’ 방면으로
 그리고 또 '
제4군단'과 '제6군단'은 ‘게라(Gera)’ 방면으로 향해서
 소규모적인 전투로 '프로이센군'의 선봉들을 격파하면서 진군해갔다.

 ※ 위치도

      Leipzig      Dresden          Jena     Naumburg         Gera

 




 


 



 Leipzig 바로
오른쪽 옆

 


 




 


 




 


 




 



 그러자 ‘브라운슈바이크’는 결전을 위해서 태세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그때 (10월 9일 시점) '프로이센군'의 주력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군은 ‘바이마르(Weimar)’에
 ‘호엔로에’군은 ‘예나’에
 ‘류헬(또는 뤼벨)’군은 ‘엘프르트(또는 에르푸르트-Erfurt)’에
 그리고 예비군이었던 ‘뷰르(뷜)텐베르크’군은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서 각각 주둔하고 있었다.

 ※ 위치도

            Weimar               Erfurt             Magdeburg

 





 



 





 



 





 





 그러자 '브라운 슈바이크'는 우선 '뷜텐베르크 군'에 주력과의 합류를 명령했고
 그 다음에는 '뤼벨 군'에 '작센바이마르 공'에게 10,000명의 분견(分遣)대를 주어서 '마인츠' 방면으로 파견하게 한 다음 '프랑스군'의 후방연락선을 위협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또 '브라운 슈바이크' 자신은 '호엔로에 군'과 합류해서 결전에 임하려고 했다.
 하지만 거기서도 '프로이센군'의 지휘와 연락체계가 또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프로이센군'은 그런 작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프랑스군'을 맞이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어쨌든 10월 10일 이른 아침.

 '란누'의 '제5군단'이 '자르페르트(또는 잘펠트)' 근교에서 '호엔로에 군'의 선봉이었던 '프로이센'의 왕자 '루이 페르디난트'의 사단 약 8000명과 접촉했고, 이어서 ‘잘펠트의 싸움’이 발발했다. 
그러자 '란누'의 '제5군단'은 그날 오후까지 '프로이센군'을 격파했고, 그리고 그때 '프로이센군'의 지휘관이었던 '루이 페르디난트'를 전사시켰다. 그러자 '프로이센군'은 사상(死傷) 900명, 포로 1,800명의 손실을 낸 뒤 후퇴했다. 그러나 그때 '란누'의 '제5군단'의 손실은 겨우 2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자 그런 서전(緖戰)의 패배와 함께 '루이 페르디난트'의 전사로 인해서 '프로이센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그러자 '프랑스군'이 예상보다 강하다고 판단했던 '프로이센군'은 그때부터 서서히 철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프로이센군'은 이미 각하되었던 작전이었지만, 그러나 다급해졌던 나머지 본령(本領)까지 후퇴를 해서 '러시아 원군'과 함께 다시 반격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바쁜 시점에서도 '프로이센군'은 또 철퇴를 둘러싸고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그 아까운 시간을 낭비해버리고야 말았다.

 어쨌든, 그러던 사이에 10월 12일에는 '다브'의 '제3군단'이 '나움부르크'를 제압했고, 이어서 시가(市街) 서방(西方)에다 야영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도 같은 날 저녁에 시가의 남방에 도착해서 야영지를 마련했다. 그러자 그 '나움부르크'의 제압소식은 곧 '프로이센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때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군'에 의해서 포위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자 또 '브라운 슈바이크'는 그때서야 부랴부랴 철퇴를 결단했다. 그리고 이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는 그것을 승인했다.



 **** 10월 13일 시점 양군의 위치 (아래 중앙 푸른색이 나폴레옹)

 


 그리하여 10월 13일.
 
 '브라운 슈바이크'는 '호엔로에 군'에게 '예나' 근교에서 적의 전진을 저지하고, 주력군의 후퇴를 원호(援護)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또 '뤼벨'에게는 분견대를 귀환시키게 했고 '호엔로에'와 합류하도록 명령했다. 그런 다음 '브라운 슈바이크' 자신은 주력군을 '나움부르크' 방면으로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그날 새벽의 일이었다.

 같은 시간.

 '나폴레옹'의 '제5군단'이 '예나'에 도착했고, 그리고는 시가의 북방에 있던 '호엔로에 군'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 보고를 받았던 '나폴레옹'은 그것이 '프로이센'의 주력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 '나폴레옹'은 곧 그 군대를 격파하기 위해서 '제4군단'과 '제6군단'에 강행군으로 본대와 합류할 것을 명령했고, 이어서 그 자신도 '친위대'를 인솔해서 '예나'로 향했다.

 그날 저녁 무렵.

 '나폴레옹'으로부터 '제3군단'에 <아포로다 방면으로 가서 '프로이센군'의 배후를 확보하라>는 지령서가 도착했다.
그러자 '다브'는 그 지령서의 사본을 만들어서 '베르나도트'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참모장이었던 '베르티에'의 다음과 같은 주의(注意)서가 그 지령서 안에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귀관(다브)이 '폰테 코르보 공(베르나도트)'과 함께 있는 경우, 같이 진군해도 좋다. 다만, 황제는 그가 ‘도른()부루크’에 있길 바라고 있다>



 **** 베르티에(Louis Alexandre Berthier:1753년 2월 20일~1815년 6월 1일)

 프랑스제국의 원수. 부궁내(副宮內) 장관. 나폴레옹의 참모장. 누샤텔 대공. 바그람 대공.







 하지만 위의 내용은 '도른부루크'에 있을 '프로이센 분견대'에 잘 대처하라는 의견이었다.
 '나폴레옹'은 그때 '예나'에 있던 '프로이센군'이 그 주력이라고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도른부루크'의 적군에게 측면을 위협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계해서
 그리고 또 그 땅을 확보함으로 해서 적군의 퇴로를 막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내용을 전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전해 받았던 '베르나도트'의 '제1군단'은 곧이곧대로 '도른부루크'로 향해버렸고
 그래서 또 그때 '다브'의 '제3군단'은 단독으로 '프로이센'의 주력군과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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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 강을 건너가는 나폴레옹>





  * 제4차 대불대동맹(Fourth Coalition, 1806년 10월 6일~1807년 7월 7일)




 ** 독일, 폴란드 전쟁(1806~1807)



 *** 예나, 아우어슈테트 전쟁(Schlacht bei Jena und Auerstedt)>



<예나전쟁에서 친위대를 열병하는 나폴레옹>


 <개요>

 
나폴레옹전쟁 중 1806년 10월 14일에 '독일'의 '튀링겐'과 '예나' 및 '아우어슈테트'에서 벌어졌던 전투였으며 '나폴레옹1세'의 '프랑스 제국군'이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의 '프로이센군'에 승리했던 싸움이었다. 그 결과 '프로이센군'은 지대한 손해를 입었고, 그 후의 추격전에서 완전하게 괴멸되었으며, 또한 '프로이센' 전 국토가 '프랑스군'에 제압되었다. 사실상은 '독일전쟁'의 승패를 결정했던 전투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특히 '아우어슈테트'에서는 '다브 원수'가 2배의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배경>

 
1805년 '나폴레옹'은 '아우스트리트 싸움'에서 승리하고 '제3차 대불대동맹'을 붕괴시켰다.
 그로인해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고 '프랑스'의 영향아래 '라인동맹'이 결성되었다.
 그것으로 '프랑스'의 패권은 '중부 독일'에까지 미치게 되었고, 그러자 '나폴레옹'은 '라인동맹' 각국에 약 20만의 '프랑스군'을 주둔시켰지만, 그런데 그것이 결국에는 '프로이센'으로 하여금 위기감을 느끼게 했고, 그 결과로 '프로이센' 국내에서는 '반(反) 나폴레옹파'라는 애국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는 '프랑스'와의 개전에 반드시 찬성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 '프로이센 국왕'의 소극적이고도 우유부단했던 성격 탓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때의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국력차이를 생각했을 때, 도저히 자신이 생기지 않았던 결과에서였다.

 
하지만 그때, 왕비였던 '루이제'와 왕자였던 '루이 페르디난트'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국 개전의 막은 올랐고, 이어서 '프로이센'은 1806년 7월에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작센공국'과 '스웨덴'으로 이루어진 '제4차 대불대동맹'을 결성 '프랑스'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8월말 '프로이센'은 '프랑스'에게 '라인 각국'에 주둔하던 군의 철수를 요청했으며, 그것이 사실상의 선전포고가 되었다.

 그 다음 '프로이센'은 약 15만의 병력으로 '라인 각국'에 분산해있던 '프랑스군'을 각개격파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또 그때 '엘베 강' 유역에서 '프랑스군'과 대적할 '러시아 원군'을 기다리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너무 소극적이라는 주장이 있어서 각하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프로이센군'의 동원은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다 또 지휘권의 소재도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계획도 결정되지가 않았고, 그래서 각 군 서로간의 소통도 원활하지가 못했다.

 그랬던 '프로이센군'의 남하(南下)가 개시되었던 것은 겨우 9월말이나 되었을 때였다.
 
그래서 그런 늑장은 결국 '프랑스군'에게 태세를 정비할 시간만 주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선전포고를 받았던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그저 '프로이센군'의 움직임만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9월말, 적의 목표가 '마인츠(Mainz) 방면'이라고 판단했던 '나폴레옹'은 그때서야 분산되어 있던 20만의 병력을 ‘밤베르크(Bamberg)’에 결집시켰고, 그리고는 역으로 '프로이센'의 야전군(野戰軍)을 격파하려는 작전을 세웠던 것이다.


 
 ** 마인


 독일연방공화국의 도시.
 라인 랜트-프파르트 주(州) 주도(州都).
 중세부터 마인츠 대사교(大司敎)의 사교좌(司敎座)성당의 소재지였으며
 활판인쇄의 발명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 Gutenberg)'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마인츠의 위치도>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 Gutenberg)   잘 알려져 있으므로, 설명은 생략함.




  ** 밤베르크(Bamberg)


<위치도>

 

 그때 '나폴레옹'이 세웠던 작전은 다음과 같았다.

 1, 우선 '모르티에'의 '제8군단'을 '마인츠'에 남겨두고
    진격해 오는 '프로이센군'을 대처하기 위해서 후방의 연락선(連絡線)을 확보한다.

 
2, 나머지 전군은 '튀링겐' 근교에 존재할 것으로 예상되는 '프로이센군'의 측면으로 돌아가서
    그들을 右翼으로 몰아넣은 다음, 전략적인 포위상태에서 한꺼번에 격파한다.



 <양군의 전력>

 그때 '프랑스군'은

 황제 친위대(16,000명)-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제1군단(20,000명)-쟌-바티스트 줄 베르나도트(스:Karl XIV Johan)
 제3군단(27,000명)-루이-니코라 다브(Louis-Nicolas d'Avout 또는 Davout)
 제4군단(32,000명)-니코라-쟌 드 듀 솔트(Nicolas-Jean de Dieu Soult)
 제5군단(22,000명)-쟌 란누(Jean Lannes)
 제6군단(20,000명)-미셸 네이(Michel Ney)
 제7군단(17,000명)-피에르-프랑소와-샤를르 오쥬로(Charles Pierre Francois Augereau)
 기병예비군단(28,000명)-죠아살 뮤라(Joachim Murat-Jordy)
 총병력-182,000명으로 '라자르 카르노(앞에서 설명되었음)'로부터 시작되었던 일련의 개혁에 의해서 '국민(國民)병'과 '사단(師團)제'를 중심으로 했던 군대였다. 

 

 
 ** 피에르-프랑소와-샤를르 오쥬로(Charles Pierre Francois Augereau)

 1757년 10월 21일~1816년 6월 12일
 프랑스혁명전쟁, 나폴레옹전쟁 기의 군인

 



 그리고 앞에 대해서 설명을 조금 더 하자면, 1793년에 도입되었던 '징병제'는 '프랑스군'의 동원병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고, 그때 징집되었던 '국민병'에게는 종래의 '용병'에게는 없었던 강점이 있었다. 그것은 즉, 강한 애국심과 그것을 공유함으로 해서 생겨나게 되었던 단결력이었다. 거기다 또 도주의 우려도 낮았기 때문에 '산병(散兵)전술'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한편, 그런 병력의 증가는 지휘통제의 곤란을 야기 시키기도 했다. 그러므로 다방면에서의 작전을 실시하기 위해서 종래의 군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거기서 '카르노'가 채용했던 것이 바로 '사단제'였다. 그리고 그 사단은 보병과 기병, 포병의 이른바 '3병 전술'로 구성되어서, 각각 독립적으로 전투가 가능했던 단위였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것을 더욱 개량해서 사단의 상위군단을 설립했다.
 그래서 그 군단은 독자적인 병참조직을 가지고 각 작전레벨로의 독립행동이 가능했고, 그것으로 해서 '프랑스군'은 각 군단 사령관의 행동반경 폭을 넓혀서, 다방면에 걸친 전력의 유연한 운용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또 사령부의 통신능력강화로 일원적(一元的)인 지휘도 유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유연성에 초점을 둔 편성이 당시 '프랑스군'의 높은 병참처리능력과 맞아떨어졌던 것으로 '프랑스군'은 동시대의 군대 중에서도 특히 높은 기동력을 발휘하는데 성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비해서 '프로이센군'은

 
중앙군(60,000명)-프리드리히 빌헬름3세, 브라운슈바이크公 칼 빌헬름 페르디난트
 좌익군(42,000명)-호엔로에 大公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우익군(28,000명)-에른스트 폰 뤼헬(Ernst von Ruchel)
 예비군(15,000명)-뷰르(뷜)텐베르크伯 요한 다비드 루트비히
 해서
 총병력은 145,000명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총사령관은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였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군사지휘관으로서의 경험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실제의 지휘는 최선임(最先任)장교였던 '브라운슈바이크公'이 맡고 있었다.
 그러나 또 그에도 불구하고 엄밀하게 지휘권이 규정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서 '프로이센군'의 지휘계통은 자주 혼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또, 그에 더해서 통신이나 전령도 철저하지 않았고, 또 지휘의 불통일과 함께 각 군의 연대나 제휴에도 곤란을 겪었다.

 하지만
그 제휴의 미비는 진로선택에 악영향을 주어서 결과적으로는 '프로이센군'의 기동력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어쨌든, 대체로 그때 '프로이센군'의 군사편성이나 전투교의(戰鬪敎義)는 '7년 전쟁' 당시와 큰 변화가 없었고, 그래서 '프랑스군'에 비한다면 구식이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Ernst Wilhelm Friedrich Philipp von Rüchel(1754-1823)

 




 ** 7년 전쟁(영:Seven Years' War. 독:Siebenjahriger Krieg) 1756년~1763년



 
※ 원 글의 내용과 큰 관계가 없으므로, 이해 차원에서 간단히 설명만 함,
 
 '7년 전쟁'은 '프로이센' 및 그 나라를 지원하던 '영국'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와 '프랑스' 등, 당시 유럽제국들 간에 벌어졌던 전쟁이었다.

 <개요>

 '
7년 전쟁'은 '영국'의 재정지원(財政支援)을 받았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스웨덴' '스페인'(1762년 참전) 및 '독일 제후들'과의 사이에 벌어졌던 싸움이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북아메리카'와 '인도' 그리고 각 대양(大洋) 상에서의 육해에 넘나드는 싸움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때 벌어졌던 전쟁 중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제3차 슐레지엔 전쟁>이라고 하고 '북미'에서의 전쟁을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인도'에서의 전쟁은 <제2차 카르나틱 전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래서 그러했던 전쟁 등을 총칭해서
'7년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발단>

 그 '7년 전쟁'의 서막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외교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때 400만 對 8000만이라고 하는 압도적인 인구격차 등으로 해서 애초부터 이미 '프로이센'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이고만 듯 했는데, 그러나 그때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2세'(프리드리히대왕)의 적절했던 전쟁지도와 '엘리자베타 여제(女帝)'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서 '러시아'가 배신을 했고, 그로인해 전국(戰局)은 타개되어서 다행스럽게도 전쟁의 상황은 '영국'과 '프로이센'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다.



 *** 프리드리히대왕(Friedrich II. 1712년 1월 24일~1786년 8월 17일)

 
 제3대 프로이센의 왕(재위: 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합리적인 국가경영으로 프로이센의 강대(强大)화에 노력했고, 계몽전제군주(啓蒙專制君主)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또, 플롯 연주를 시작으로 예술적 재능의 소유자이기도 했으며, 로코코적인 궁정인(宮廷人) 같은 만능像을 발휘했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공적을 높이 받들어서 현재까지 프리드리히대왕(Friedrich der Große)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하 자세한 것은 생략함)


 


 *** 엘리자베타 여제(Елизавета Петровна)


 1709년 12월 18일~1762년 1월 5일
 재위: 1741년~1762년
 로마노후朝 제6대의 러시아 황제
 표톨1세의 딸, 어머니는 에카체리나1세.
(이하 자세한 것은 생략함)


<엘리자베타의 소녀시대-좌측이 언니였던 '안나' 여제> 




 <원인>

 '
오스트리아 계승(繼承)전쟁'의 결과 '합스부르크 령'이었던 '슐레지엔(영:Siresia)'을 '프로이센'에 귀속했다. 그러자 그곳의 탈환을 기도했던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텔레지아’는 '프랑스'와의 오랜 대립관계를 해소하는 것으로써 '프랑스'와 '러시아'가 손을 잡게 했고(외교혁명), 그것을 이용해서 '프로이센'에의 복수전을 획책했다.

 그런데 그 즈음이었던 1755년 9월 '북아메리카'에서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래서 '프랑스'와 '영국'과의 대립관계도 '유럽'의 '한노우버'에까지 비화(飛火)되었다.
 그러자 그 기회를 놓칠세라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 대한 개전(開戰)의 의지를 높여갔고, 그러자 또 그것을 간파했던 '프리드리히대왕'은 미리 그 예방책으로 선제공격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예방전쟁)

 ※ 이하는 생략함




 ***  오스트리아 계승(繼承)전쟁 (1740년 - 1748년)


 영: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독: Österreichischer Erbfolgekrieg

'신성로마제국'의 계승 문제를 발단으로, '유럽'의 주요국들이 말려들었던 전쟁이었다.
'캐나다'와 '인도'에서 '영불'간의 전쟁으로도 발전했다.
 (이하, 상세한 것은 본 글과 관계가 적으므로 생략함)



 *** 슐레지엔(영:Siresia)


 現, 폴란드 남서부로부터 체코 북동부에 이르는 지역을 이름.


<현재의 실레지아>



 ※ 노란선 안은 1871년 '독일제국'에 의한 '실레지아'이며
     푸른선 안은 1740년 '프로이센'에 병합되기 전의 실레지아 범위




 *** 마리아 텔레지아(Maria Theresia von Österreich)


 1717년 5월 13일 - 1780년 11월 29일
 신성로마황제 프란츠1세 스테판의 황후
 오스트리아 대공(재위: 1740년 - 1780년)
 헝가리 여왕(재위: 上同)
 보헤미아 여왕(재위: 1743년 - 1780년)
 오스트리아 系, 합스부르크家 男系의 마지막 군주
 일반적으로 <女帝>로 불렸고, 實態도 여제 그 자체였지만
 그러나 실제로 황제에 즉위했던 적은 없었다.
 그녀가 즐겨 사용했던 칭호는 Königin(女王)과 Kaiserin(皇后)의 머리문자인
 <K.K>였다. (이하, 상세한 것은 생략함)

 


 *** 외교혁명(Umkehrung der Allianzen)


 1750년대에 일어났던 유럽의 동맹관계에 있어서의 중대한 전환(사건)이다.
 구체적으로는 17세기 以來 대립관계에 있었던 합스부르크家(오스트리아)와
 부르봉家(프랑스)가 서로 협력관계로 변했던 것을 가리킨다.
 (이하, 생략함)



 *** 한노우버 (독:Konigreich Hannover)


 현재, 독일북부의 Niedersachsen 주에 존재했던 국가의 총칭

 


 *** 예방(豫防)전쟁


 대립국가 또는 세력에 의해서 장래에 공격이 예상되는 상태로, 그에 선수를 취해서 실시하는 전쟁이다. 자위전쟁에 가깝지만, 그러나 그보다 공격적인 개념이다.
 근대이전에는 빈번히 행해졌지만,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不戰조약'에 의해서 국제 법으로서는 금지되었다. 하지만 그 후, 미사일의 등장과 발달 등으로 인해서 현대에서는 '자위전쟁'과의 구별이 한층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상의 예로는 '7년 전쟁'과 '러일전쟁' 등이 있었고, 그리고 '對테러전쟁'과 '이라크전쟁'에서도 그에 대한 논의가 있다.


 


 

 



 

 

 

 

 

 

 

 

 

< Napoleon Bonaparte(26)-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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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6  絶頂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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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 강을 건너가는 나폴레옹>


 어쨌든, 그렇게 해서 전장으로부터 도망을 쳤던 '아렉산드르1세'는 다시 '영국' '프로이센'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1806년 10월, 이번에는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어서 '제4차 대불대동맹'이 결성되었다.


 * 제4차 대불대동맹(Fourth Coalition, 1806년 10월 6일~1807년 7월 7일)

 '나폴레옹1세'의 '프랑스 제국'의 패권에 도전하기 위해서 '유럽제국'들이 결성했던 동맹이었다.

 
<동맹>

 
1805년 12월 2일 '아우스트리트 전쟁'에서 승리했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제3차 대불대동맹'에서 탈락시켰다. 그러나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스웨덴'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자 1806년 7월 '나폴레옹'은 '라인동맹'을 결성했고, 그것으로 '프랑스'의 패권은 '중부 독일'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영역에 접하고 있었던 '프로이센'은 곧 위기감을 느꼈고, 그리하여 7월에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영국' 등도 포함한 '제4차 대불대동맹'이 10월 6일에 성립되었던 것이다.

 
<동맹국>

 그때의 동맹국은 다음과 같다.
 '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영국(아일랜드 포함)' '작센 왕국' '스웨덴 왕국'


 ** 독일, 폴란드 전쟁(1806~1807) -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쟁(Schlacht bei Jena und Auerstedt)>

 <개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는 처음에는 국력(戰力)의 차이를 걱정해서 '프랑스'와의 개전을 꺼렸지만, 그러나 왕비였던 ‘루이제’와 왕자 ‘루이 페르디난트’의 反 '나폴레옹'에 대한 강한 의지로 마침내 개전의 결의를 굳히게 된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Friedrich Wilhelm III. 1770년 8월 3일~1840년 6월 7일)

 '프로이센' 왕(재위:1797년 11월 16일~1840년 6월 7일)으로, 가정에서는 좋은 아버지였지만 소극적인 평화주의를 고집해서 '나폴레옹'과의 싸움에서 졌고, 위기의 시대에서 개혁을 주도하는 능력과 의욕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 시대에 '프로이센'에서는 문무(文武) 모두 유능한 인재들이 배출되었고, 영토도 계속해서 확대되어서, 근대화로 서서히 진행되어갔었다는 평가는 있다.(자세한 것은 생략)



 ***  루이제(Luise von Mecklenburg-Strelitz, 1776년 3월 10일~1810년 7월 19일)

 '프로이센'의 왕비.
 '메크렌브르크-슈트레이릿트公 컬2세'(후의 메크렌브르크-슈트레이릿트 대공)의 차녀.
 
全名은 Luise Auguste Wilhelmine Amalie.




 *** 루이 페르디난트(Louis Ferdinand von Preußen :1772년 11월 18일~1806년 10월 10일)

 '프로이센' 왕국의 왕족, 군인. '나폴레옹전쟁'에서 활약했고, 만약 그가 장수(長壽)했었더라면 필시 뛰어난 전략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정식적인 이름은 독일어로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크리스티앙(Friedrich Ludwig Christian)’이었지만, 나중에 기꺼이 프랑스어 풍의 <루이>로 고쳤다.





 그러나 군대를 동원하기는 했지만, 작전계획이나 지휘권의 소재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지부진해져서 준비가 잘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1806년 9월 26일 '프로이센'은 '프랑스군'에게 <독일로부터 철퇴하라>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미 '나폴레옹'이 '파리'를 출발한 뒷날이었다.(9월 25일그런 '프로이센군'의 초동(初動)지연은 결국 '프랑스군'에게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주어버린 꼴이 되었다. 그러자 10월 9일 '프로이센군'은 '프랑스'에 급히 선전포고를 하고는 15만의 병력으로 '튀링겐'을 침공했다.



 *** 튀링겐(Freistaat Thüringen)

 튀링겐 주 - 독일 중부에 있는 주.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심지였으며, 튀링겐 분지를 중심으로 밀이나 사탕수수 등의 재배가 활발하다. 철강, 기계, 유리 공업이 발달했으며, 특히 광학 기기가 유명하다. 주도(州都)는 에르푸르트(Erfurt), 면적은 1만 6251㎢.



 
그러자 그 소식을 들었던 '나폴레옹'은 그 즉시 20만의 병력을 '바이에른(Freistaat Bayern-上 튀링겐 남쪽지역)'에서 '작센(Freistaat Sachsen-上 튀링겐 오른쪽 동쪽 지역)'방면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인 10월 10일 ‘잘펠트의 싸움’에서 '란누 군단'이 '프로이센군' 선봉의 '루이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전사시켰다.
 
그리고 또 이어서 '프로이센군' 본대도 10월 14일의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싸움'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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