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踏雪野中去...>

 

                                 

 

                                                     

 

<1932년 4월 윤봉길과 함께>
  

 

 <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가지 말라. 오늘 걸은 나의 걸음이 뒷사람의 길이 될 수 있으므로... 

 

 백범 김구(白凡 金九,1876년 8월 28일부터 1949년 6월 26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었고,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했으며,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인물이었다.

​ 그는 황해도 해주 출신이며, 아버지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과 어머니 곽낙원(당시 17세)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창암(昌巖)이었으나 19세 때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 때 구(九)로 바꾸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 가난했기 때문에 독학으로 한글과 한문을 배우다, 교육열이 강했던 어머니 덕분에 한학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안중근>과 비슷하게 어려서부터 혁명적인 기질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현실과 사회를 비관적으로 보게 되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에 응시했으나, 오히려 그곳에서도 부정부패가 만연한 것을 보고 벼슬길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 후에 동학운동에 참가했다거나, 승려로도 활동을 했고, 28세 때는 기독교에 입문을 했기 때문에 동학도에서 불교도 그리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한 때 교육자도 활동을 했다.

 



                                            

<교육자 시절의 모습>

 그는 21세 때 소위 <치하포(황해도 ) 사건>을 일으켜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었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고 기다리던 중 <고종>의 특사로 사형을 면했다. 그리고 1898년 3월에 동료들과 탈옥에 성공했고, 공주 <마곡사>에서 불교에 입문했다. 하지만 그 후에 환속했고, 우여곡절 끝에 감리교에 입교했다. 그리고 그 후에 교육에 힘쓰며 잠시 관직(농상공부 種桑委員)을 맡기도 했다.

 

 

 

                                 

                                                         <105인 사건 관련자들 체포 장면>
 

 

 1911년, 그는 105인 사건(百五人事件=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이름을 九로 개명했다. 그리고 1915년 8월에 가출옥했고,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단에 참여했다. 그리고 1919년 8월에는 <안창호>의 천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활약 끝에 1923년에는 내무총장에 재임되었고, 국무총리 대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26년에는 국무령에 선출되었고, 이후 초대 주석이 되었다.

 

 

 

                           

<임시정부 피난 시절 가흥에서 촬영. 중앙 김구 중심으로

송병조, 이동녕, 이시영, 조성환, 엄항섭, 조완구, 차리석 등과 부인들.

맨 앞줄의 어린이들은 엄항섭의 자녀들>


 1920년대 이후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조직은 와해의 위기를 겪었다. 1932년 <이봉창>을 <일본 도쿄>로 보내서 천황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윤봉길>의 거사는 성공했는데, 그 때문에 그는 피신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1933년에는 장개석을 만나서 도움을 받았으며,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을 설치해서 한국인 92명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1937년부터는 형편이 나아져 그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국민당에서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40년 9월에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장개석이 임시정부의 지휘를 반대해서 <광복군>은 <국민당 군>에 예속되었다.

 1941년 12월,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그리고 1944년 8월에는 중화민국으로부터 <광복군>의 통수권을 돌려 받았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김구는 임시정부의 힘으로 광복을 하지 못한 것을 통탄해했다. 그리고 11월 3일,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김포공항).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하지만 12월 말에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반대운동을 주관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 후에 <찬탁>이라고 생각되었던 <송진우 암살사건(1945년 12월 30일)>이 발생했고, 그 배후로 김구가 지목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발생했던 <장덕수 암살 사건(1947년 12월 2일)>의 배후로 <이승만>은 그를 지목했는데, 그 때문에 김구는 이승만과 결별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의 송진우>

                                                      

                                                               

<장덕수 1945년>


 그는 1948년 4월 19일에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 목적으로 북쪽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김일성=김성주>에게 완전히 농락당하고 5월에 다시 남쪽으로 넘어왔다. 그 후, 그는 <김일성>에게 당한 것을 분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그 후의 2차 회의 초대는 거절했다.

 

 

 

                                

<38선을 넘어 가는 김구 일행>

 그리고 그 후에 터졌던 <여순반란사건(1948년 10월 19일~27일)>의 배후로도 그가 지목된다. 그 후, 그는 칩거생활에 들어갔지만, 1949년 6월 26일 육군포병 소위였던 안두희(安斗熙)에게 저격되어 사망했고, 그때가 74세였는데, 그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경교장에 안치된 김구>

 이상, 간단하게 살펴보았지만, 그는 대한민국의 위인(偉人) 중 1인으로, 또한 독립운동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 역사에 굵은 한 획을 그은 인물임에 확실하다. 하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과 행동주의적 태도로 인해서 많은 뒷 예기를 남겼다. 그래서 양(陽)으로 포장된 그의 명성(名聲) 만큼이나 음(陰)의 면도 많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陽의 면이 더욱 많이 부각되어 있으며, 그래서 한국인에게는 영원한 독립운동가로, 또한 독립투사로, 그리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독립과 자강(自彊)을 위해서 노력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진하지 않는 사람은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40대의 모습>

 

 < He who moves not forward, goes backward >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年8月28日부터 1832年3月22日)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너무도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시인이었으며, 극작가였고, 소설가였고, 자연과학자였으며, 그 외에도 정치가, 법률가 등,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독일을 대표하는 문호(文豪)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며,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苦惱)-1774>과 시극(詩劇) <파우스트>는 특히 유명하다.

 

 

                                  

                                        <괴테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초판본>

 

 그리고 당대의 유명했던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1759년 11월 10일부터 1805년 5월 9일. 독일고전주의 극작가, 시인, 철학자, 역사가, 문학이론가. 괴테와 함께 독일고전주의의 2대 문호로 일컬어진다. 작품에는 돈 카를로스, 발렌슈타인 3부작, 빌헬름 텔 등이 있다)와 함께 독일문학의 고전주의시대를 구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실러>


 

 그리고 낭만적인 인물답게 70세의 고령에도 요양 차 들렀던 마리안스케라즈네(체코어: Mariánské Lázně, 독일어: Marienbad 마린바트-체코 카를로비바리 주에 위치한 도시로 대표적인 온천도시)에서 만난 17세의 소녀(Ulrike von Levetzow)와 열애(熱愛)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마리안스케라즈네-1800년대의 모습>

 

                                                                    

                                                                <Ulrike von Levetzow>

 

            

                                                                         <괴테의 임종>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빛을 더(Mehr Licht!)>

 였다고 한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부터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항일 의병장 겸 정치사상가였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그는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며, 1909년 10월 26일 한국통감 이토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척살했던 것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日帝의 복수>로 1910년 3월 26일에 <살인의 죄명>으로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것으로 그의 높은 뜻은 다시 묵살되었다.

 

 

<사건 당시의 이토 모습>

 

 그 후에 그는 많은 중국인들에 의해 추앙되었으며, 조선인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옥중에서 쓴 미완성의 작품 <동양평화론>도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으며, 그 이유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유해를 찾는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생전에 매우 열정적이고 열성적인 성격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부모 등, 가족과 친지들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높은 뜻을 세웠으며, 그 후에 많은 일들에 가담했고 나름대로의 성과도 올렸다. 그러나 强盜 日帝와 그것을 주도했던 쥐새끼(안중근의 표현으로) 이토를 처형하는데 그의 마지막 힘을 모았으며, 그 때문에 더욱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기회를 상실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이토라는, 당시로서는 거대한 산 하나를 무너뜨린 것으로도 그의 업적은 충분히 높으며, 특히 죽음 앞에서 보였던 의연했던 태도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것은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 없으면 보여주기 힘든 태도였다. 그러므로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나라를 걱정했던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으며, 그래서 지금도 많은 충열지사, 우국지사들과 함께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한 빛>으로 남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호혼(呼魂)>

 

 

 

 새색시의 얼굴에 가득 핀 홍조가 아름다웠다

 내일에의 꿈도 희망도

 그저 순수의 백기(白旗)로만 펄럭이고 있었다

 

 내 딸아, 어미 같이만 살아다오

 다독이는 손길이 성녀(聖女)를 닮아서

 더 이상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 없었다

 

 물질의 고상함이 유혹으로 넘쳐났다

 떠나는 혼 붙잡을 이 하나도 없어

 집 잃은 달팽이는 숲을 떠났다

 

 만나는 이마다 다투어 악수를 청하고

 손은 이내 더러워져

 씻을 물조차 찾으려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움의 빛은 고향 빛으로 먼저 올까보다

 형형색색의 현란함들이 발목을 잡고

 탐닉은 처음 맛본 고기맛과 그렇게도 닮았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면 거기에 벌레들이 알을 낳는다

 돌아갈 곳이 없는 달팽이는 아직도 집을 갖지 못하였다

 뭉게구름의 유혹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다

 

 아들아, 이제는 돌아와도 되련마는

 백발의 어머니가 허허로운 손짓을 하고 섰다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이번 <헤세의 노래> 100회를 맞이해서 연재를 일단 종료합니다.

 그리고 이미 출판이 된 글이므로, 언제든지 공개를 종료할 수도 있으므로

 그 점 숙지해주시길 바라며, 다음에 2편, 또는 다른 제목으로 다시 뵐 수 있길 희망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름으로 가면>

 

 

 

 여름으로 가면

 

 세상은 초록천지로 눈이 다 시리고

 뭉게구름 뭉실뭉실 피어오른 푸른 하늘과

 끝없는 해원으로 달려만 가는 수평선너머

 나의 애끓는 꿈도 그와 함께 할 것이라

 

 여름 속에서는

 

 나는 키 큰 나무의 그늘을 찾아 그 아래 앉아서는

 일부러 고른 낯선 이의 시를 읽다 곧 잠이 들고

 꿈속에서 나무요정과 낯선 시인의 대화를 엿들으리라

 별이 내리는 밤까지 이어질 그 이야기들을

 

 여름의 끝에서는

 

 지난여름 주워들었던 이야기들을 차례로 곱씹으면서

 창가에 앉아 가을이 오고 있는 밖을 쓸쓸히 내다보리라

 한 손은 턱을 괴고 한 손에는 시집을 들고

 은행잎 노랗게 깔린 정원을 하염없이 보고만 있으리라

 

 그러나 여름은 이제 비로소 시작되었다

 

 나의 계획들은 이 여름 속에서 영글어갈 것이고

 나는 사심도 없이 그 풍요로움에 나를 맡길 것이다

 뭉게구름 위에 나를 올려놓고

 그 위에서 낯선 이의 시를 읽으며

 가을이 올 때까지 베짱이처럼 노래만 부를 것이다

 

 내 여름으로 가게만 되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