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7-2)


 ※
 왕전(王翦-생몰불상)은,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무장이었고, 빈양동향(頻陽東郷) 출신의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그리고 왕분(王賁)의 아버지였고, 왕이(王離)의 조부(祖父), 진(秦)의 왕 정(政)을 섬겼으며, 초(楚)와 월(越)을 멸하는 등, 진(秦)이 천하통일을 하는데 공헌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원전 236년, 정(政) 11년에 환기(桓齮), 양단화(楊端和) 등과 함께 위(魏)의 업(鄴-현재의 河南省)을
공격해서 9개의 성을 빼앗았다. 그 후, 왕전(王翦)은 혼자서 알여(閼與) 등을 공격한 후, 모든 병사들을 모아서 일군(一軍)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군대의 장군이 된 후, 18일 안에 군중(軍中)에서 두식(斗食-콩밥을 먹을 정도의 지위 또는 능력자) 이하의 공로(功勞)도 올리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다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그것으로 군(軍)을 거의 1/5이나 감축해서 정예군으로 편성했다. 그런 다음, 그때까지도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었던 업(鄴)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229년, 왕전(王翦)은 상군(上郡-魏의 文侯가 현재의 陝西省에 설치했던 郡으로, 기원전 328년에 魏는 秦에 그 上郡 15縣을 헌상했고, 그 후로 秦의 영토가 되었던 곳)지방 군(軍)의 대장 자격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조(趙)로 쳐들어갔으며, 그 결과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즉, 정형(井陘)을 함락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28년, 정(政)19년에는 강외(羌瘣)와 조(趙)를 평정하고 그곳의 영토를 모조리 빼앗았으며, 유목왕(幽繆王)을 포획했다.

 참고 1: 유목왕(幽繆王-생몰불명. 재위는 기원전 236년부터 기원전 228년)은 중국 전국시대 조(趙)의 제10대 군주였고, 왕으로서는 제4대였다.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은 천(遷), 도양왕(悼襄王)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즉위하고 2년째 되던 해에 진(秦)이 쳐들어왔는데, 그 결과 평양(平陽-현재의 河北省 臨漳県 西部)과 무성(武城-현재의 山東省 武城県 西部)을 빼앗겼으며, 무수(武遂)에서는 조(趙)의 장군 호첩(扈輒)이 진군(秦軍)에 패해서 10만이란 수의 수급(首級)이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유목왕(幽繆王)은 이목(李牧)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해서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자 이목(李牧)은 진군(秦軍)을 의안宜安(현재의 河北省 石家荘市 南東部)에서 격퇴했고, 그러자 또 진(秦)의 장수였던 환기(桓齮)는 패주했다. 그러자 또 그 공으로 유목왕(幽繆王)은 이목(李牧)을 무안군(武安君)에 봉했다. 그 후, 이목(李牧)은 자주 진군(秦軍)을 격파했으며, 그러자 진(秦)에서는 그 이목(李牧)을 제거하기 위해서 조(趙)의 신하였던 곽개(郭開)란 자에게 아주 많은 뇌물을 보냈고, 그리고는 이목(李牧)이 모반을 기도하고 있다는 참언을 유목왕(幽繆王)에게 올리게 했다. 그러자 그 후, 유목왕(幽繆王)은 그 참언을 그대로 믿고 이목(李牧)을 죽였는데, 그러자 또 기원전 228년에 진(秦)은 장군 왕전(王翦)을 보내서 조군(趙軍)을 격파했으며, 이어서 수도 한단(邯鄲)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유목왕(幽繆王)은 진군(秦軍)에 투항했고, 이어서 방능(房陵)이란 곳으로 귀양을 갔다. 그리하여 결국 조(趙)는 멸해졌으나, 그러나 또 그때, 조(趙)의 왕자였던 가(嘉)가 대(代-현재의 河北省 蔚県)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스스로 자립(自立)하고는 왕이라고 자칭했다(代王嘉). 거기다 병(兵)을 이끌고 연(燕)을 치기 위해서 중산(中山-현재의 山西省 北部)으로 가서 주둔했다.

 참고 2: 대왕 가(代王嘉-생몰불상. 재위: 기원전 227년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전국시대 조(趙) 최후의 군주(11대)였고, 왕으로서는 제5대였다.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가(嘉), 도양왕(悼襄王)의 아들이었고, 유목왕(幽繆王)의 동생이었다. 그는 도양왕(悼襄王)의 적출(嫡出) 장자(長子)였지만, 그러나 도양왕(悼襄王)은 자신이 총애하고 있었던 창후(倡后)가 생산했던 왕자 천(遷)을 태자로 삼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왕이 되질 못했다. 그리고 그 후, 조(趙)는 진군(秦軍)의 공격을 받아서 결국 멸해졌고, 유목왕(幽繆王)은 포로가 된 후 방능(房陵)이란 곳으로 귀양을 떠났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일족(一族)들을 데리고 대(代)로 도망을 갔으며, 그곳에서 대왕(代王)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연(燕)의 왕 희(喜)와 손을 잡고 진(秦)에 저항했지만, 그러나 연(燕)의 태자 단(丹)이 인솔했던 연(燕)대(代) 연합군은 역수(易水-中國 河北省에 있는 강 이름)에서 진군(秦軍)에 패했고, 그 때문에 연왕(燕王) 부자(父子)는 요동(遼東)으로 도망을 갔다. 그러자 가(嘉)는 연왕(燕王) 희(喜)에게 단(丹)을 죽이고 진(秦)에게 화의를 청해보자고 했고, 그러자 희(喜)는 단(丹)을 죽였다. 그리고는 그 머리를 진왕(秦王) 정(政)에게 헌상했는데, 그러자 그 뜻을 정(政)이 받아들여서 일단 공격은 중지되었다. 하지만 그 화목은 얼마가지 못했고, 그리하여 기원전 223년에 왕전(王翦)의 아들이었던 왕분(王賁)이 이끌었던 진군(秦軍)은 요동(遼東)을 공격했으며, 그 결과로 희(喜)는 포로가 되었으며, 그것으로 연(燕)은 멸망했다. 그러자 또 왕분(王賁)은 이어서 대(代)마저 공격했고, 그 결과로 가(嘉)도 포로로 잡혔으며, 그리하여 조(趙)의 왕통(王統)은 영원히 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227년, 정(政) 20년에 왕전(王翦)은 신승(辛勝)과 함께 연(燕)을 공격해서 연(燕)대(代)연합군을 역수(易水)에서 격파했다. 그리고 기원전 226년에는 대(大)원군(援軍)을 받아서 연(燕)의 공자(公子) 단(丹)이 이끌었던 군대를 격파하고는 연(燕)의 수도 계(薊)를 평정했다.

 참고 3: 공자(公子) 단(丹-?부터 기원전 226년)은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 연(燕)의 왕족이었고, 성(姓)은 길(姞-竹書紀年에 의한 것이며, 史記에서는 周 왕조와 같은 성인 姬라고 함), 휘(諱)는 단(丹), 연왕(燕王) 희(喜)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진(秦)이 점점 더 강국이 되어가자 그에 위기를 느끼고는 당시 중신(重臣)이었던 국무(鞠武)란 사람에게 그에 대해서 의견을 구했는데, 그러자 국무(鞠武)가 이렇게 말을 했다. <진(秦)은 현재 북쪽으로는 감천(甘泉)과 곡구(谷口)란 천연요새를 가지고 있고, 남쪽으로는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에 연(沿)한 비옥한 대지(大地)를 가진 것으로 삼진(三晋-趙・魏・韓)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또 비옥한 파(巴)와 한중(漢中)을 독점하고 있으며, 그곳은 또 오른쪽으로는 농(隴)과 촉(蜀)의 산맥이, 그리고 왼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과 효산(崤山)에 둘려져서 그곳을 보호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지형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그래서 또 그곳에는 인구도 많고, 병사(兵士)들도 용맹하며, 무기(武器)방구(防具) 같은 것들도 충분하게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진(秦)과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그러나 단(丹)은 그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그런데 그 즈음에, 진(秦)에서는 소수정예(少數精銳)화로 군(軍)을 개편했는데, 그러자 또 그 때문에 해고된 병사들이 늘어났다. 그러자 또 그것을 보고 안타깝게 느꼈던 장군 번어기(樊於期)는 그때부터 그 자신도 정(政)으로부터 소외를 당하자 연(燕)으로 망명을 해왔다. 그러자 단(丹)은 그를 숨겨주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국무(鞠武)가 이렇게 말을 했다. <지금 번어기(樊於期)를 보호해주는 것은 굶주린 호랑이(秦) 눈 앞에 고기를 놓아두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그 번어기(樊於期)를 흉노(匈奴) 쪽으로 추방을 하고, 삼진(三晋)과 함께 제(齊), 초(楚), 흉노(匈奴)까지 동맹을 맺어서 진(秦)에 대항해야한다!>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단(丹)은 그때, 정(政)의 비정한 정책에 의해서 목숨까지 위협 당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몰살당하고는 정처도 없이 진(秦)의 추격을 받으면서 연(燕)으로까지 도피를 해왔던 그 번어기(樊於期)를 도저히 추방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단(丹)은 국무(鞠武)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러자 또 국무(鞠武)는 전광(田光)이란 사람을 단(丹)에게 소개시켜주면서 서로 이야기를 한번 나눠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남의 자리를 가졌는데, 그러자 그때, 전광(田光)은 형가(荊軻)라는 사람을 추천했다. 그리고 또 그 뒤의 이야기는 본문(7,8)에 자세히 소개가 되어 있으므로 참고바라며,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226년에 정(政)은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단(丹)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연(燕)을 침공했고, 그러자 또 연왕(燕王) 희(喜) 등은 일시 요동(遼東)으로 도망을 갔지만, 그 후의 이야기는 앞에서 소개한 그대로이다.

 아무튼 그 후에 이신(李信)이 요동(遼東)으로 가서 단(丹)의 머리를 가져왔지만, 연왕(燕王) 희(喜)는 그곳에서 왕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해, 왕전(王翦)은 노병(老病)을 핑계로 장군의 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기원전 224년, 정(政) 23년에 정(政)은 다시 왕전(王翦)을 불렀으며, 그러자 그는 다시 출사(出師)해서 초(楚)를 공격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남(河南)의 진(陳)에서부터 그 남쪽의 평여(平輿-河南省의 駐馬店市)까지 점령을 했으며, 거기다 초(楚)의 왕 부추(負芻)까지 포획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23년에는 몽무(蒙武-蒙恬의 父)와 함께 초(楚)를 다시 공략했으며, 그 결과로 그때 초왕(楚王)이 되어있었던 창평군(昌平君)이 전사했으며, 항연(項燕)도 자살했다.

 참고 4: 이신(李信-생몰불명)은 중국 전국시대부터 진(秦)대에 걸쳐서 활약했던 진(秦)의 무장이었고, 기원전 226년에 왕전(王翦)과 왕분(王賁)이 전년(前年) 연(燕)의 태자 단(丹)이 주도했던 형가(荊軻)의 정(政) 살해 미수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연(燕)을 공격했을 때, 그는 약 천 명 정도의 군사를 이끌고 연군(燕軍)을 추격했으며, 그 결과 단(丹)의 군대를 토벌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25년에 정(政)이 초(楚)를 정복하려고 했을 때, 그는 정(政)의 물음에 <20만의 군사면 충분하다>고 답을 했다. 하지만 그때, 왕전(王翦)은 <60만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러자 정(政)은 <왕전(王翦)이 이제는 늙었다>고 생각해서 이신(李信)에게 20만의 병사를 주어서 초(楚)를 치게 했다. 그러자 이신(李信)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서 초(楚)로 쳐들어갔는데, 그 결과 그 자신은 평여(平輿)에서, 그리고 몽염(蒙恬)은 침구(寢丘)에서 각각 초(楚)군에 대승했다. 그 후, 이신(李信)과 몽염(蒙恬)은 영(郢) 주변까지 공격해서 다시 초군(楚軍)을 물리쳤지만, 그러나 성부(城父)란 곳에서 이신(李信)과 몽염(蒙恬)이 합류했을 때, 그들은 3일 밤낮으로 추격을 해왔던 항연(項燕) 군에 기습을 당해서 두 곳 성(城)과 7명의 장수를 잃는 대패를 맛봐야만 했다. 그러자 정(政)은 장수를 교체해서 왕전(王翦)을 그곳으로 다시 투입시켰다. 그러자 왕전(王翦)은 그 다음해 몽무(蒙武)와 함께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楚)를 다시 쳤으며, 그 결과 초왕(楚王) 부추(負芻)를 포획하고 초(楚)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이신(李信)은 왕분(王賁)과 몽염(蒙恬)과 함께 제(齊)를 공격했으며, 그 결과 제(齊)는 멸망했다. 그리고 이신(李信)이 그 대(對)초(楚)전(戰)에서 대패했음에도 숙청당하지 않았고, 거기다 자손들까지도 살아 남았던 것은, 정(政)이 그만큼 그를 믿고 있었던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그래서 또 그의 후손에 대해서도 잠시 알아보면, 일단 증손(曾孫)에 전한(前漢)시대의 장군 이광(李廣)이 있었으며, 그 자손으로 이능(李陵)이 있었고, 그리고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에 서량(西涼)을 건국했던 이고(李暠)는 이광(李廣)의 자손으로 알려졌으며, 그 자손에 당(唐)의 시인 <이백(李白)>이 있었다.

 참고 5: 몽염(蒙恬-?부터 기원전 210년)은 중국 진(秦)의 장군이었고, 몽오(蒙驁)의 손자, 몽무(蒙武)의 아들이었으며, 몽의(蒙毅)의 형이었다. 그리고 생전에 흉노 토벌 등의 공적을 세웠지만, 그러나 조고(趙高) 등의 음모에 말려들어서 부소(扶蘇)와 함께 자살했다. 그리고 몽(蒙)씨는 조부(祖父) 대에 제(齊)에서 진(秦)으로 이주해서 살게 되었으며, 몽염(蒙恬)은 또 당초에는 문관으로, 궁정에 들어가서 소송과 재판 등에 관여를 했었는데, 그런데 기원전 224년에 이신(李信)의 부장(副將)으로 초(楚) 토벌에 나섰고, 그 결과 침(寢丘-河南省)을 공격해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후에 항연(項燕)에게 대패했으며, 그 다음 기원전 221년에 가문의 도움으로 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 제(齊)를 토벌하러 갔을 때는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으며, 그 결과 제(齊)는 멸해졌고, 그 공적으로 그는 내리(內吏-수도권의 長官)가 되었다. 그 후, 기원전 215년에는 흉노를 30만 대군으로 공격했으며, 오르도스지방을 빼앗고 흉노를 북쪽으로 내쫓았고, 그 경계의 진(陣)으로 장성(長城)의 직도(直道-직선으로 연결된 길)를 축조했다. 그러자 정(政)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그의 공적을 인정했고, 그 결과로 그의 동생이었던 몽의(蒙毅)도 받아들였으며, 그래서 또 몽염(蒙恬)은 외정(外政)에서, 몽의(蒙毅)는 내정(內政)에서 활약하면서 그 충성심과 공적을 정(政)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즈음에, 그 벌써 전에 정(政)에게 분서(焚書)를 중지해 달라는 말을 해서 원방(遠方)으로 쫓겨가 있었던 왕자 부소(扶蘇)가 몽염(蒙恬)의 진으로 옮겨왔다.(겉으로는 扶蘇가 政에게 내쳐진 후에 蒙恬의 居所로 보내진 형식을 취했지만, 그러나 그 속내는 蒙恬을 감시하라는 감시 역으로 보내졌던 것으로 생각됨) 그리고 기원전 210년, 드디어 시황제(始皇帝)가 순행 중에 사망했고, 그러자 호해(胡亥), 조고(趙高), 이사(李斯)가 공모(共謀)를 해서 호해(胡亥)를 왕위에 올렸으며, 이어서 조서(詔書)를 위조해서 부소(扶蘇)와 몽염(蒙恬)에게 자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몽염(蒙恬)은 그에 의심을 품고 그 진상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부소(扶蘇)는 저항 없이 자살했다. 그러자 또 몽염(蒙恬)은 더욱 저항했지만, 그러나 그도 결국에는 자살했다. 그리고 또 그 몽염(蒙恬) 사후에는 조고(趙高)에 의해서 몽의(蒙毅)와 함께 그 일족도 모두 멸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 대한 일화가 하나 있어 소개하면, 그는 생전에 동물들의 털을 모아서 만든 붓()을 시황제에게 헌상했는데, 그래서 그것이 붓 사용의 시작이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또 1928년에 전국시대의 유적에서 필(筆)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현재에는 갑골문자에서도 필(筆)을 표현한 문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필(筆)의 사용 또는 발명은 아마도 은(殷)대까지는 올라갔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또 몽염(蒙恬)은 아마도 그것을 개량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되고 있다.

 참고 6: 항연(項燕-?부터 기원전 223년)은 전국시대 말기 초(楚)의 대장군이었고, 하상(下相-현재의 江蘇省 宿遷市 宿城区)출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는 항우(項羽)와 항장(項莊)의 조부(祖父)였고, 항량(項梁)과 항백(項伯)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또 진(秦)의 무장 이신(李信)을 대파했지만, 그러나 또 나중에 초(楚)가 멸하면서 자살했다. 그리고 또 그 항(項)씨(氏)에 관해서 사기(史記)는, 항(項)씨는 대대로 초(楚)의 무장 집안이었으며, 항(項)이라는 읍(邑)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항(項)이라는 성(姓)의 선조(先祖)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기원전 225년에 진(秦)의 장군 이신(李信)이 쳐들어왔을 때, 그것을 대파해서 물리쳤으며, 기원전 224년에는 진(秦)의 장군 왕전(王翦)이 쳐들어와서 견수(堅守), 불출(不出)의 전술을 구사해서 항연(項燕)을 괴롭혔다. 그러자 항연(項燕)의 방비에 틈이 생겼고, 그러자 또 왕전(王翦)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습작전을 펼쳐서 항연(項燕)의 군대를 대파했다. 그러자 또 그 결과 초왕(楚王)이었던 부추(負芻)가 포로로 잡혔는데, 그러자 항연(項燕)은 회수(淮水) 이남(以南)으로 내려가서 초(楚)의 공자였던 창평군(昌平君)을 초왕(楚王)에 올리고는 반항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 다음해 왕전(王翦)이 다시 쳐들어왔고,
그러던 중에 창평군과 항연(項燕)은 사망했으며, 그것으로 초(楚)도 완전히 멸해졌다. <『史記』의 秦始皇本紀에 의함. 그러나 또『史記』의 楚世家에서는 項燕 死後에 負芻가 포로가 되었다고 함.>

 그리고 기원전 222년, 정(政) 25년에 진(秦)은 대병(大兵)을 일으켜서 왕전(王翦)과 몽무(蒙武)에게 초(楚)의 강남(江南)을 평정시켰으며, 이어서 동(東)월(越)의 왕을 항복시켰던 동시에, 그곳에다 회계(會稽)군(郡)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진(秦)은 제(齊)를 멸망시켰고, 그것으로 천하통일의 업은 완수되었다. 그리고 그 후, 왕전(王翦)은 별 탈 없이 천수(天壽)를 누렸으며, 그 후에도 그의 자손들은 번창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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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7-1)


 ※ 이사(李斯-?부터 기원전 208년)는 중국 진(秦)대(代)의 재상이었고, 법가(法家)에 사상적 기반을 두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도량형(度量衡)을 통일시켰고, 분서(焚書)를 행했던 등, 진(秦) 제국(帝國)의 성립에 크게 공헌했지만, 그러나 시황제(始皇帝) 사후에 권력 싸움에서 패하고는 살해되었다.

 그는 초(楚)의 상채(上蔡-현재의 河南省 上蔡県) 출신으로, 젊어서는 말단관리로 초(楚)에서 벼슬을 했다. 그러다가 변소에서 사람의 분뇨(糞尿)를 먹고 있다가,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도망을 가던 쥐와 병량고(兵糧庫)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도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병량(兵糧)을 먹고 있던 쥐를 보고는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사람은 그 처한 환경만으로도 현명함 등, 자신의 가치가 결정되고 마는 것인가?!> 그리고는 유가(儒家) 순자(荀子)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또 당시의 동문(同門)으로 한(韓)의 공자(公子)였던 한비(韓非)가 있었으며, 그와 함께 순자(荀子)에게서 배우고 그는 진(秦)으로 들어가서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 되었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절찬(絶讚)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어서 진왕(秦王) 정(政-始皇帝)에게 추천했다. 그러자 그 후, 그는 정(政)의 근시(近侍)가 되었고, 정(政)의 명령으로 타국(他國)에 잠입해서 각국(各國)의 왕족들과 장군들 사이를 이간질했으며, 그 공적으로 객경(客卿-타국출신의 大臣)이 되었다. 그 후, 그는 순조롭게 출세를 하는가 싶었지만, 그러나 기원전 238년경에 노애(嫪毐)란 타국출신자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진(秦) 국내에서는 타국출신자들의 평판이 나빠졌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타국인들에게 추방령(逐客令)까지 내려졌다.

 참고: 노애(嫪毐-?부터 기원전 238년)는 중국 진(秦)의 왕 정(政)을 모셨던 신하 중 한사람이었고, 당초에는 이사(李斯)처럼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거근(巨根)으로 알려졌다고 하고, 그래서 또 연회(宴會) 같은 자리에서 그 여흥(餘興)으로 스스로 나서서 마차(馬車)의 차륜(車輪)을 회전시키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 특이했던 기행(奇行)으로 그는 여불위(呂不韋)의 눈에 들었고, 그것은 또 당시 그 여불위(呂不韋)는 정(政)의 어머니였던 태후(太后)와 오랜 시간동안 불륜관계를 지속해오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런데 또 그 태후(太后)가 아주 음란한 여자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즈음에 여불위(呂不韋)는 자신의 능력부족을 느끼고 있었던 참이었으며, 동시에 그 관계란 것도 잘못되면 아주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불위(呂不韋)는 그 노애(嫪毐)를 이용하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여불위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로 태후도 만족시켜주고, 자신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를 당시에는 남자라고는 내시(內侍-宦官)밖에는 출입할 수 없었던 후궁(後宮)으로 몰래 들여 넣었다. 그리고는 환관(宦官)처럼 변장을 시키고는 태후(太后)에게 소개를 시켰는데, 그러자 그 후, 여불위(呂不韋)의 생각대로 그는 태후(太后)의 총애를 듬뿍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에 2명의 아이까지 생산했고, 그 후로는 태후(太后)의 후원을 받아서 권세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신장후(長信侯)에 봉해지기까지도 했다. 그러자 또 그 후에 그는 아주 많은 식객(食客)을 모았으며, 그것으로 여불위(呂不韋) 다음의 권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결국에는 태후(太后)와의 밀통(密通)이 발각되었고, 그러자 그는 옥새(玉璽)를 훔쳐서 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군사를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때 이미 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정(政)에 의해서 그 반란군은 진압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도망을 갔지만, 하지만 또 포로로 잡혀서 차열(車裂)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의 일족과 함께 태후(太后)가 생산했던 아이들도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 사건에 연좌(連座)해서 당시 재상이었던 여불위(呂不韋)도 세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로는 정(政)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러자 이사(李斯)도 그에 위기감을 느끼고는 정(政)에게 편지를 써서 그 추방령을 철회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가 썼다던 그 <간축객서(諫逐客書)>는 실로 논리 정연했던 명문(名文)이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나중에 문선(文選)에도 수록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것을 읽었던 정(政)은 그 명문(名文)에 설득당해서 추방령을 철회했고, 당시의 실력자였던 여불위가 자살한 후에는 정(政)의 신임을 계속해서 쌓아갔다.

 그런데 또 그 얼마 후에 그런 이사(李斯)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동문수학했던 한비(韓非子는 너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소개를 생략함)였다. 그것은 또 정(政)이 벌써 전에 한비(韓非)가 썼던 그 한비자(韓非子)를 읽고는 <그 작자(作者)와 친하게 지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고 말을 했을 정도로 한비(韓非)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이사(李斯)는 한비(韓非)가 정(政)을 만나게 되면 자신의 지위가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비(韓非)를 모함했다. 그리고는 한비(韓非)를 투옥(投獄)시켰으며, 그러자 또 그는 옥중에 있던 한비(韓非)를 찾아가서 독(毒)을 주어서 죽게 했다.

 그 후, 더 이상의 경쟁자가 없어진 이사(李斯)는 진(秦)의 부국강병정책을 적극적으로 헌책(獻策)해서 시행하게 했으며, 그 결과로 기원전 221년에 마침내 진(秦)은 중국을 통일했고, 그러자 정(政)은 시황제(始皇帝)가 되었다.

 그 후, 시황제(始皇帝)는 승상(丞相)이었던 왕관(王綰)과 어사대부(御史大夫-副丞相 格)였던 풍겁(馮劫) 등의 중신들로부터, 과거 주(周)의 제도였던 봉건(封建)제를 실시해서 시황제(始皇帝)의 자식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해서 보낼 것을 진언(進言)받았다. 그러자 이사(李斯)는 그것에 맹(猛) 반대를 하면서, 과거 주(周)가 어떻게 해서 망하게 되었던가에 대해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그래서 또 그 해결책으로 그보다 한층 더 강한 군현제(郡縣制)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또한, 정치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비판만 일삼는 학자들의 책들을 모두 모아서 태워버릴 것을 진언(進言)했다.

 하지만 그 후였던 기원전 210년 가을 7월에 시황제(始皇帝)가 순행(巡幸) 도중에 죽었고, 그러자 또 이사(李斯)는 조고(趙高)와 함께 위소(僞詔-始皇帝의 거짓 명령장)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또 그것으로 호해(胡亥)를 즉위시켜서 2세 황제로 만들었으며, 원래의 태자였던 부소(扶蘇)를 자결시켰다.

 참고: 일설에는 이사(李斯)가 조고(趙高)를 협박했고, 그러자 조고(趙高)는 부득이 호해(胡亥)의 즉위를 인정했다고 하며, 위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소개할 예정임.

 아무튼 그 후, 진(秦)에서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을 처음으로 해서 반란이 계속해서 발생했으며, 그것으로 중국 본토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호해(胡亥)는 궁정 깊은 곳에서 노느라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또 조고(趙高)가 책략을 써서 그런 호해(胡亥)를 각성시켰으며, 그 때문에 이사(李斯)는 호해(胡亥)와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08년에 이사(李斯)는 우(右)승상이었던 곽거질(霍去疾)과 장군이었던 풍겁(馮劫)과 함께 아방궁(阿房宮) 조영(造營) 등의 압박(壓迫)정책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호해(胡亥)에게 진언(進言)했지만 거절당했고, 그러자 곽거질(霍去疾)과 풍겁(馮劫)은 자살했다. 그러자 이사(李斯)는 제삼(第三) 간언(諫言)을 했지만 그러나 그때는 또 조고(趙高)의 참언(讒言)을 받아서 포박 당했으며, 이어서 그 조고(趙高)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에도 굴하지 않자 조고(趙高)는 더욱 고문의 강도를 높여갔고, 그러자 또 이사(李斯)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고(趙高)가 날조했던 죄를 시인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또 일찍이 초(楚)의 항량(項梁)에 패했던 이사(李斯)의 장남으로, 삼천군(三川郡)의 태수였던 이유(李由)가 생전(生前)에 초(楚)와 내통했다는 것을 시인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결국 저자거리에서 요참(腰斬-허리를 잘라서 죽이는 벌)형에 처해졌으며, 그러자 또 그때, 이사(李斯)는 함께 끌려왔던 자신의 차남(次男-이름은 不明)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전에 너와 함께 고향 상채(上蔡)로 붉은 사냥개를 데리고 가서 토끼사냥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일이 없겠구나...>

 아무튼 그 후, 이사(李斯)의 일족(一族)은 모두 처형되었는데, 그런데 그의 아들(그러나 누구인지,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음)은 시황제(始皇帝)의 황녀(皇女-공주)에게 장가를 갔다고 하고, 그 딸은 또 시황제(始皇帝)의 공자(公子-아들)에게 시집을 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그 이사(李斯)는 법가이론의 완성자였던 한비(韓非)에 대해서 법가실무의 완성자로 알려졌지만, 그러나 그의 생전의 업(業) 즉, 한비(韓非)를 죽였던 일과 위소(僞詔)로 부소(扶蘇)를 죽였던 일, 그리고 또 유자(儒者)들을 탄압해서 분서갱유(焚書坑儒)했던 일 등으로 해서 후세의 평판은 아주 나빴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진(秦) 통일에서 최고의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며, 그래서 또 사기(史記)에서는 <이사(李斯)가 길을 잘못 가지만 않았더라면, 그 공적은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에 비견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사마천(司馬遷)은 술회(述懷)했던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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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불위(呂不韋-?부터 기원전 235년)는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정치가였고, 시황제(始皇帝)의 부(父)였던 장양왕(莊襄王)을 왕위에 올리는 일에 진력했으며, 그 공으로 후에 권세를 누렸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일설(一說)에는 그가 시황제(始皇帝)의 진짜 친부(親父)였다는 설도 있는데, 아무튼 그는 복양(濮陽-河南省) 출신으로 상인(商人)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젊어서부터 각국(各國)을 전전하면서 상술(商術)을 익혔고, 그것으로 부(富)를 축적했다.

 그런데 어느 때, 그는 조(趙)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고, 그래서 아주 초라하게 보였던 진(秦)의 공자였던 이인(異人-나중에 子楚로 改稱했으며, 그 후에 秦의 莊襄王이 됨)을 보게 되었는데, 그러자 그는 첫눈에 <此奇貨可居!>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뜻은 <대단히 진기(珍奇)한 보배다! 미리 사두(확보해두)지 않을 수가 없겠군!>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 후에 양책(陽翟)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그 일을 그의 아버지와 의논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잘 되지 않았던지 그런 일은 몇 번이나 있었고, 그 결과 여(呂)부자(父子)는 먼 장래를 보고 이인(異人)에게 투자를 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다시 조(趙)로 갔고, 그곳에서 이인(異人)과 첫 대면을 했다.

 그런데 당시, 그 이인(異人)은 진(秦) 소양왕(昭襄王)의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나중의 孝文王)의 서자(庶子)였는데, 그런데 또 그 안국군(安國君)은 자식을 20명 이상이나 두고 있었으며, 거기에다 또 이인(異人)의 어머니 하(夏)씨(氏)는 당시 그 안국군(安國君)의 총애마저 잃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이인(異人)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또 당시, 진(秦)은 인접했던 조(趙)와 항상 대립하고 있었으며, 그 관계는 날로 악화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랬으므로 또, 그 이인(異人)이 조(趙)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는 것은 진(秦)의 입장에서는 그가 죽어도 아무 것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의미였고, 그래서 또 이인(異人)은 그곳에서 감시를 당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대우란 것도 형편없었으며, 그래서 또 생활비조차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여불위(呂不韋)는 그런 이인(異人)에게 접근을 해서 왕으로 즉위시킬 꿈을 꾸었으며, 그 공적으로 자신은 나중에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에는 또 그 나름대로의 승산(勝算)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 후, 그는 이인(異人)에게 돈(金)을 주어서 사교계로 진출할 것을 지도했고, 그런 다음에는 자신의 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게 했다. 그런 다음 자신은 진(秦)으로 들어가서 안국군(安國君)의 총희(寵姬)였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을 만나서 이인(異人)이 <아주 현명한 사람이며, 화양부인(華陽夫人)을 마치 친어머니처럼 생각해서 매일 그리워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라고 말을 하면서 꼬드겼다. 거기다 그 부인의 언니까지 만나서 자신이 가지고 갔던 재보(財寶)의 일부를 뇌물로 바치고는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그리고는 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 말을 잘 해서 이인(異人)을 화양부인(華陽夫人)의 양자로 삼고, 그런 다음에는 안국군(安國君)의 세자(世子)로 만들면 좋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런데 또 그때, 사실 그 화양부인(華陽夫人)도 비록 안국군(安國君)의 총애는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자기가 낳은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또 그대로 세월만 보내다가는 안국군(安國君)의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그렇게 되면 또 자신의 지위도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던 참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불위(呂不韋)의 계산은 그녀들과도 딱 맞아떨어져서 그녀들이 나서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안국군(安國君)도 그녀의 뜻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인(異人)은 하루아침에 신분이 상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급히 다시 조(趙)로 돌아가서 그 낭보(朗報)를 이인(異人)에게 전했다. 그러자 이인(異人)은 여불위(呂不韋)를 후견자로 결정했고, 그때부터 또 양모(養母)가 되었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이 초(楚)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신의 이름도 자초(子楚)로 바꿨다.

 그런데 또 그때, 여불위(呂不韋)는 어떤 기생 여자를 한명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자초(子楚)가 그 여자를 탐냈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고민이 되었지만, 그러나 자신이 그것을 거부하면 자초(子楚)와의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동안 투자했던 것이 아까워서라도 그녀를 자초(子楚)에게 주었다. 그런데 또 그때, 그 여자는 이미 여불위(呂不韋)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던 상태였다. 하지만 여불위(呂不韋)는 그런 사실을 숨기고 그 여자를 자초(子楚)에게 보냈으며, 그러자 그 아이는 나중에 자초(子楚)의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아이가 바로 나중의 시황제(始皇帝)가 되는 정(政)이라는 설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 진위(眞僞)에 관해서는 현재 알 길이 없지만, 하지만 또 그 당시에는 그 소문이 넓게 펴졌다고 하며, 그래서 사기(史記)에서도 그것을 사실(事實)로 기록했다.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252년에 진(秦)의 소양왕(昭襄王)이 고령(高齡)에다 재위 55년에 사망했고, 그러자 차남 효문왕(孝文王)이 즉위했다. 그러자 자초(子楚)도 그때서야 진(秦)으로 돌아가서 태자가 되었으며, 하지만 또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효문왕(孝文王)마저 50대에 사망하자, 자초(子楚)는 자동적으로 즉위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장양왕(莊襄王)이었다. 그러자 또 여불위(呂不韋)도 승상이 되었으며, 문신후(文信侯)로 칭해져서 낙양(洛陽)의 10만 호(戶)를 영지로 내려 받았다. 그리하여 또 그것으로 그의 계산은 맞아 떨어졌으며, 그 후 진(秦)의 재상으로 무한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46년에 장양왕(莊襄王)마저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그러자 태자 정(政)이 왕이 되었다. 그러자 또 여불위(呂不韋)는 그 정(政)으로부터 중부(仲父-둘째아버지 또는 삼촌 격)라는 칭호를 내려 받았으며, 그 후로 그의 권세는 더욱더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기에는 맹상군(孟嘗君)과 신능군(信陵君) 등이 많은 식객들을 받아들여서 천하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도 그에 대항해서 식객 3000명을 받아들였으며, 그 시중을 들기 위해서 거느리고 있던 하인, 하녀들도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객 중에는 이사(李斯)도 있었는데,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정(政)에게 추거했고, 거기다 객들의 지식을 한곳에 모았던 여씨춘추(呂氏春秋)란 책도 출간했다. 그리고 또 그 책은 당시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책들과는 달랐던 것으로, 말하자면 사상적으로는 중립적인 일종의 백과사전 같은 것이었다.

 그러자 또 여불위(呂不韋)는 그 책에 아주 만족을 해서, 시장 한가운데에다 그것을 펼쳐놓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 책에서 한 자(一字)라도 빼거나 더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천금(千金)을 주겠다!(以呂氏春秋 布咸陽市門 縣千金其上 延諸侯游士賓客 有能增損一字者 予千金.『史記』巻八五 呂不韋列傳에서)> 그리고 그것은 후에 일자천금(一字千金)이란 말의 유래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당시, 그 여불위(呂不韋)는 그렇게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세를 휘두르면서도 자신의 원래 애인이었던 태후와 밀통(密通)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또 그 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미 노애(嫪毐)에서 소개가 되었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어쨌든 그 노애(嫪毐)로 인해서 여불위(呂不韋) 역시도 연좌(連座)되어서 죽을 처지에 놓였지만, 그러나 그 간의 공을 참작해서 승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게만 했고, 그 후에는 칩거(蟄居)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후로도 여불위(呂不韋)는 식객 등, 객(客)들과의 교류는 끊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또 제국(諸國)에서는 그의 명성이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정(政)은 그가 식객이나 제국(諸國)들과 함께 모반(謀反)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여불위(呂不韋)를 힐문(詰問)하는 글을 써서 보내고는, 촉(蜀)의 땅으로 유배(流配)를 보내버렸다. 그러자 여불위(呂不韋)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 다음해에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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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2)


 연도, 연

사건


 BC770

 春秋時代 시작

 ※ 춘추시대란 중국의 시대구분 중 하나이며, 기원전 770년 주(周)의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게 살해당하고 낙읍(洛邑=成周=洛陽-河南省)으로 도(都)를 옮겼을 때부터 시작해서, 진(晋)이 삼국(三國=韓, 魏, 趙)으로 분열했던 기원전 403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춘추(春秋)란 이름은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하나인 ‘춘추(春秋)’에 기술되었던 '시대(時代)'란 말의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하며, 그리하여 그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아울러서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거나, 또는 '동주(東周)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경계 지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가들마다 의견이 나뉘고 있다.(더욱 상세한 것은 참고 6-15부터 6-41까지 참조바람)

<춘추시대의 개념 지도>

※ 사진 설명

룽먼석굴
중국 허난 성(河南省) 뤄양(洛陽)의 남쪽에 있는 석굴 사원으로
윈강 석굴과 쌍벽을 이루는 중국의 대표적인 석굴 사원
북위 때 만들기 시작해서 수·당으로 이어졌고 송나라에서 끝났으나
그 주요 부분은 5세기 말에서 7세기 후반에 이르는
불교 미술의 전성기에 조형되었다고 함



 BC551

 공자(孔子) 탄생(~479)

 ※ 기원전 551년 9월 28일-기원전 479년 4월 11일
춘추시대 중국의 사상가이며, 유가(儒家)의 시조
세계 삼성(三聖)으로도 불린다(後述)


<孔丘>


 BC500 경

 기원전 5세기-오르도스 청동기문화(青銅器文化) 전성기

 ※ 오르도스문화(Ordos文化)

 중국 內몽골 오르도스 지방에 있었던 구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 홍적세 말기의 황토 퇴적층에서 석영(石英), 수석(燧石-부싯돌) 등을 사용해서 만든 첨두기(尖頭器-끝이 뾰족한 도구)와 칼 등이, 그리고 하이에나와 타조 그리고 낙타 등의 온난계 동물의 화석도 나왔다.

 ※ 청동기문화

 기원전 1,000년에서 200년 무렵까지 오르도스에서 장성(長城)에 걸쳐서 번영하였다.
그리고 오르도스는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중남부에 있는 고원 지역이며, 북쪽과 서쪽은 황허(黃河) 강이, 남쪽은 만리장성이 둘러싸고 있다. 예로부터 한족(漢族)과 북방 유목민족의 쟁탈지였으며, 명나라 때는 몽고의 오르도스 부(部)가 점거했던 바 있다. 높이는 1,500미터.

 ※ 오르도스청동기(Ordos靑銅器)

 오르도스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를 말하며, 그것은 또 중국의 은(殷)나라에서 남북조에 이르는 시기에
북방 유목민들이 썼던 무기들과 마구(馬具), 장신구 등으로, 사실적인 동물무늬가 특징이다.

<기원전 3-1세기의 인물상. 대영박물관 소장>


 BC453

 진(晋=春秋)이 삼국(韓・魏・趙)으로 분열되고, 전국시대가 시작됨

 ※ 진(晋-기원전1100년경부터 기원전378년)은, 현재의 중국 산서성(山西省) 지역에 주(周)대, 춘추(春秋)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국가이며, 처음에는 당(唐)이라고 불렸지만, 이후 진으로 개명했다. 국성(國姓)은 희(姬), 수도(首都)는 익(翼)에서 곡옥(曲沃) 다음 강(絳)으로 바뀌었다.

 <참고 : 아래 그림에서 3 나라의 분열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三晋지도>


 ※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春秋) 다음의 시대이며,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위(魏)·조(趙) 3개의 나라로 나뉜 후, 기원전 221년에 진(秦)에 의해 다시 통일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그 이름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해졌으며, 그리고 또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그 기간의 구분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해서는 현재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전국열국도>

 ※ 참고로 <戰國7雄>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韓 (紀元前403年 - 紀元前230年)
 趙 (紀元前403年 - 紀元前228年)
 魏 (紀元前403年 - 紀元前225年)
 楚 (? - 紀元前223年)
 燕 (紀元前1100年頃 - 紀元前222年)
 斉 (紀元前386年 - 紀元前221年)
 秦 (? - 紀元前206年)


 BC359

 상앙(商鞅)의 변법(変法-국정개혁)이 실시(実施)됨

 ※ 상앙(商鞅-?부터 기원전 338년)은, 중국(中國) 진(秦)나라의 정치가(政治家)였으며, 다른 이름은 위앙(衛鞅) 또는 공손앙(公孫鞅).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으로 법학을 공부했고, 진(秦)의 효공(孝公)을 섬겼으며, 부국강병책을 단행(斷行)해서 뒤에 진(秦)이 전국(全國)을 통일(統一)하는 기틀을 마련했다.(1,2차에 걸쳐서 단행되었으며, 더욱 상세한 참고 6-40 참조바람) 효공(孝公) 22(340 B.C.)년 상(商)에 봉함을 받았으나 효공이 죽은 뒤에는 중신들에게 원한(怨恨)을 사서 극형에 처해졌다.


<상앙 상>


 BC221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천하(天下)를 통일함.
 전국시대 막을 내림.



                                      <진의 판도-기원전210년>


 ※ 진(秦-기원전 778년부터 기원전 206년)은, 중국의 왕조 중 하나이며, 주(周)대, 춘추(春秋)시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서 존재했었고,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후, 기원전 206년에 멸망했다. 국성(國姓)은 영(嬴), 통일 후의 수도는 함양(咸陽).

 BC210

 시황제(始皇帝) 동방순행(東方巡行) 中 사거(死去)


                           


 ※ 시황제<始皇帝-기원전 259년 정월 1월(? 또는 10월)부터 기원전 210년 9월 10일(秋7월)>는, 진조(秦朝)의 황제였으며, 성(性)은 영(嬴), 씨(氏)는 진(秦), 시호(諱)는 정(政). 현대의 중국어에서는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르고 있고, 진(秦)왕으로 기원전 246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는 또한 중국 사상 처음으로 황제로 칭해졌던 인물이었다.

 <약력(略曆)>

 1. 출생(出生)

 시황제의 아버지 자초<子楚=後의 장양왕(莊襄王)>는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인질(人質)의 처지에 있었으나, 대상(大商) 여불위(呂不韋-참고 7-1참조)의 도움을 받아서 효문왕(孝文王-)의 태자(太子)가 되었고, 나중에 진왕(秦王)에 즉위하였다.


<한단의 위치도> 

 
 그리고 그 여불위는 그 전에 자신의 애인(愛人)이었던 여인을 자초에게 양도했는데, 그 후에 태어났던 사람이 바로 시황제 정(政)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초에게로 가기 전에 회임을 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로써 여불위가 그의 親父인가 하는 의심이 강하게 일었다. 그것은 또 사기(史記)의 <여불위열전>에도 소개가 되었을 정도여서, 그래서 그때 그것이 얼마나 크게 소문이 났었던가에 대해서는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정작 <진시황본기>에는 기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으로 또 사마천(司馬遷)이 양론병기(兩論倂記)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사마천=후술>


<반고=후술> 

 
 그러나 그 후의 반고(班固)가 쓴 사기(史記-漢書)의 <진시황본기수록(秦始皇本紀收錄)> 상서부(上書部)에서는 政을 <여정(呂政)>이라고 표기해놓았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것으로 보아서는 한조(漢朝)가 진조(秦朝)의 혈연관계를 부정하여, 그것으로 진조(秦朝)의 정통성을 부정하려 했다는 의도가 강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또 동시대(同時代)의 <춘신군(春申君)>에게서도 그와 비슷한 고사(故事)가 전해져오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보아서는 또 <그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역사가도 있다. 그리고 또 그와 관련해서는 <그때, 자초가 여불위의 애인에게 이미 회임을 시켜버렸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불위가 자초에게 그녀를 보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역사가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소문이 나게 된 배경에는 또 <당시, 그를 아주 미워했던 육국(六國)의 유민(遺民)들이 그를 흠집 내고자 그런 풍문을 널리 퍼뜨렸던 것이 아니었겠는가>하는 의견도 있다고 해서, 그래서 그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기(史記)에서도 그의 용모와 성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두었다.

 <그는 몹시 거만하고, 눈초리는 길게 째졌으며, 그 목소리는 마치 승냥이와도 같고, 또 은애(恩愛)의 정(情)도 부족한데다, 호랑이나 이리와 같이 잔인한 마음의 소유자이다>

 2. 즉위(卽位)

 기원전 258년, 정(政)이 탄생한 직후에 진(秦)이 조(趙)를 공격해서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그러자 조(趙)는 그 보복으로 자초(子楚)를 처형시키려고 했는데, 그러자 여불위(呂不韋)가 나서서 자초(子楚)를 도망치게 도왔다. 하지만 그때, 정(政) 모자(母子)는 한단(邯鄲)에 남겨졌다. 그 후, 기원전 251년에 자초(子楚)가 귀국한 후, 소양왕(昭襄王)이 훙거(薨去)하자, 효문왕(孝文王)이 그 뒤를 이었고, 그러자 자초(子楚)는 그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또 그것을 알게 된 조(趙)나라는 정(政)의 모자(母子)를 정중하게 진(秦)나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다음 기원전 250년, 효문왕(孝文王)이 훙거하고 자초(子楚)가 즉위하자 여불위(呂不韋)는 승상(丞相)이 되어서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46년, 장양왕(莊襄王)이 훙거하자, 당시 13세였던 정(政)이 진왕(秦王)에 즉위했다. 하지만 즉위 당초 여불위(呂不韋)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정(政)은 어쩔 수 없이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 정(政)은 남동생이었던 성교(成蟜)의 모반(謀反)과 친모(親母)의 애인이었던 노애(嫪毐-참고 7-1참조바람)의 반란을 진압한 후, 기원전 238년에는 여불위(呂不韋)마저 먼 곳으로 보내버리고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그 후 정(政)은 한(韓)의 공자(公子)였던 한비(韓非)가 기술했던 <한비자(韓非子>에 감동해서 그의 사상을 도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여불위(呂不韋)의 식객이었으며, 한비(韓非)의 동문이었던 이사(李斯-참고 7-1 참조바람)가 한비(韓非)를 자살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그래서 정(政)은 하는 수없이 이사(李斯)를 중신으로 채용했다. 그 후, 정(政)은 이사(李斯)의 주도(主導)로 법가(法家)사상을 정치에 도입했고, 이어서 군주독재(君主獨裁)와 군현제(郡縣制) 그리고 엄벌주의(嚴罰主義) 등을 추진했으며, 그로써 강력한 독재체제를 쌓았다. 그리고는 또 진군(秦軍)의 소수정예(少數精銳)화도 단행했으며, 원정(遠征)으로서는 장수(將帥)로 왕전(王翦-참고 7-2 참조)과 왕분(王賁) 부자(父子) 그리고 이신(李信-참고 7-2 참조) 등을 기용해서 한(韓)·조(趙)·위(魏)를 차례로 멸했다.


<그림 설명: 左는 秦王, 右는 荊軻, 중앙은 秦舞陽, 아래는 번어기의 머리를 담은 상자>


 기원전 227년, 연(燕)의 태자 단(丹-참고 7-2 참조)이 이웃나라였던 조(趙)가 진(秦)에 멸해졌던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정(政)을 암살하기 위해서 형가(荊軻)를 자객으로서 보냈다. 그러자 그 형가(荊軻)는 진군(秦軍)의 개혁에 반대하다 가족이 모두 처형당하고 진(秦)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던 장군 번어기(또는 번오기-樊於期)의 머리를 진상품으로 하고, 사자(使者)의 자격으로 진(秦)의 왕 정(政)을 배알(拜謁)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했던 두루마리(지도) 속에 숨겼던 칼로 정(政)을 습격했다. 그러자 궁전 내에서는 무기소지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때 政의 신하들은 그것을 보고서도 저지하지 못했는데, 그런데다 또 그때 政 자신은 장검을 차고 있었지만, 그러나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칼을 뽑지 못하고 절명에 처할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또 그때, 마침 政의 시의(侍醫)가 임기응변을 발휘했고, 그러자 政은 그 틈을 타서 장검을 뽑아 형가(荊軻)를 살해했다. 그 후 정(政)은 그 일에 격분해서 연(燕)을 쳤고, 그로써 연(燕)도 멸했다. 하지만 기원전 225년, 진(秦)은 당시 최대의 적국이었던 초(楚)도 공격을 했지만 실패했고, 그러자 반대로 이번에는 초군(楚軍)이 진(秦)을 침공해왔다. 그러자 또 정(政)은 당시 이미 은퇴해있던 왕전(王翦)을 장군으로 해서 전권을 맡겼고, 그러자 또 왕전(王翦)은 초군(楚軍)을 격퇴한 후 그대로 초(楚)로 쳐들어가서 항연(項燕-項羽의 조부-참고 7-2 참조)이 인솔하던 초군(楚軍)을 괴멸시켜서 초(楚)를 멸망시켰다. 그리하여 기원전 221년에, 진(秦)은 전국(戰國) 육국(六國) 중 그때까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제(齊)까지 멸하고는 중국통일을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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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41)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
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그 후, 경후(敬侯)의 증손(曾孫)이었던 무령왕(武靈王)은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騎馬)전술을 도입해서 호복기사(胡服騎射)라고 명명했으며, 그 후에 조(趙)의 그 기마대(騎馬隊)는 제국(諸國)을 떨게 했고, 당시 위(魏)에 멸해졌던 후 재흥(再興)을 하고 있었던 중산국(中山國)을 다시 멸했다.

 그리고 또 당시, 진(秦)에서는 효공(孝公)을 섬기고 있던 상앙(商鞅)이 정치개혁을 단행한 후, 엄격한 법치주의에 의한 통치체제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진(秦)의 국력은 증대되었다. 그러자 또 위(魏)와 한(韓)이 그에 위협을 받았으며, 장의(張儀-6-26참조)의 책략에 의해서 초(楚)의 회왕(懷王)은 포로로 잡혔고, 진(秦)은 초(草)의 땅을 빼앗았다.

 그 후, 일시적으로 조(趙), 진(秦), 제(齊)의 정립(鼎立) 상태가 유지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무령왕(武靈王)이 내란으로 사망하자, 조(趙)는 그 정립(鼎立) 체제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에 진(秦)은 조(趙)와 한(韓) 그리고 위(魏)로부터 영토를 빼앗아서 더욱 강대해졌고, 그에 질세라 제(齊)도 북쪽의 연(燕)을 일시적으로 괴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송(宋)을 병합하는 등 강대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는 동(東)의 제(齊), 서(西)의 진(秦) 형태로 2강(强)의 시대가 만들어졌다.

 <후기(後期)>

 그런데 그 후였던 기원전 284년에 악의(樂毅)를 대장으로 했던 연(燕), 조(趙), 한(韓), 위(魏), 초(楚) 그 5개국 연합군에 제(齊)는 대패했으며, 그러자 제(齊)의 수도 임치(臨淄)도 그들에게 함락 당했다. 그리하여 제(齊)는 거(莒)와 즉묵(即墨)을 제외한 전 국토를 연합국에 점령당했으며, 그에 민왕(湣王)은 국외로 도망을 갔다가 다시 거(莒)로 돌아왔지만, 그러나 또 초(楚)의 장군으로 제(齊)의 재상이 되었던 도치(悼齒)에게 살해당했다. 그러자 제(齊)는 왕의 부재상태로 있었지만, 하지만 또 그 후에 전단(田單)에 의해서 부흥되기는 했었어도, 그러나 국력의 대폭적인 소모만은 면할 수가 없었다.(참고 6-25 참조)

 ○ 악의(樂毅-생몰불명)는 중국 전국시대 연(燕)의 무장이었고, 연(燕) 소왕(昭王)의 도움을 받아서 제(齊)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창국군(昌國君) 또는 망제군(望諸君)으로도 불렸다. 그의 선조는 위(魏)의 문후(文侯-6-34참조)를 모셨던 악양(樂羊-6-34참조)이었고, 그에 대한 소개는 이미 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자손들은 계속해서 영수(靈壽)에서 살았는데, 그러다가 중산국(中山國)이 부흥하자 그 나라에서 벼슬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악의(樂毅) 또한 그 나라에서 벼슬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고는 있지만,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알지 못하며, 그래서 그의 전력(前歷) 또한 불명(不明)한 상태이다. 그 후, 조(趙)의 무령왕(武靈王)에 의해서 중산국(中山國)은 멸망했고, 그 후에 또 조(趙)에서는 내란이 일어나서 무령왕(武靈王)이 아사(餓死)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위(魏)로 갔다. 그리고는 위(魏) 소왕(昭王)의 신하가 되었지만, 그런데 또 그때 마침 연(燕)에서 인재를 널리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위(魏) 소왕(昭王)에게 부탁을 해서 연(燕)으로 사자(使者)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연(燕)에서 벼슬을 하면서 돌아가지 않았으며, 그러자 또 당시의 군주였던 연(燕)의 소왕(昭王)은 그가 인재(人才)임을 알아보고 상경(上卿) 아래인 아경(亞卿)에 임명했다. 그리고 또 그 얼마 전, 연(燕)은 제(齊)에 의해서 멸망 직전까지 가야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당시 태자였던 소왕(昭王)은 신산(辛酸)의 고통을 삼키면서 제(齊)에 대해서 강한 복수심을 키웠다. 그래서 자신이 즉위하자 그로부터 20수 년간 널리 인재를 모았고<그것은 곽외(郭隗-燕의 賢人)가 소왕(昭王)에게 진언했던 "먼저 외(隗)로부터 시작하십시오!"라는 말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었으며, 그 뜻은 또 손쉬운 일부터 시작하라는 것이었고, 그러자 또 그 말은 나중에 고사(故事)가 되었다>, 그 사이에 또 그는 백성들과 더불어서 노고(勞苦)를 분담하면서 국가의 재흥에 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제(齊)는 서(西)의 진(秦)과 더불어서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전국시대(戰國時代) 사군(四君) 중 한사람이었던 맹상군(孟嘗君-6-25 참조)을 재상으로 해서 중산국(中山國)과 송(宋)을 멸했으며, 이어서 초(楚)와 삼진(三晋-趙, 魏, 韓)도 파했다. 그리하여 사수(泗水) 연안에 있던 노(魯) 등은 사실상 제(齊)의 속국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한때는 진(秦)과 함께 왕(王)보다도 더 높은 제(帝)란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던 등, 날로 그 기세를 높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당시 연(燕)은 모든 면에서 제(齊)를 따라갈 수가 없었고, 하지만 또 그런 중에서도 소왕(昭王)은 복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악의(樂毅)가 연(燕)으로 왔던 것이었고, 그리고는 <다른 나라들과 연합을 해서 제(齊)를 공격하자>는 진언을 올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또 당시 제(齊)는 민왕(湣王)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민왕(湣王)이 오만한 성품에다 국력을 과신하고 주위의 소국(小國)들에 공갈적(恐喝的)인 외교를 펼쳤던 등 해서, 많은 나라들의 원한을 사고 있었다. 그래서 악의(樂毅)는 먼저 조(趙)를 설득했고, 그 다음에는 위(魏)와 초(楚)를, 그리고 또 당시 조(趙)와 우호국이었던 진(秦)까지 끌어들이는데 성공을 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84년, 그 같은 움직임을 포착했던 민왕(湣王)은 그 선수(先手)로 송(宋)을 멸하고는 그 땅을 제(齊)에 편입시켜버렸다. 그리고는 더욱 자만해서 당시 자신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던 맹상군(孟嘗君)을 멀리하고는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러자 그에 위기를 느꼈던 맹상군(孟嘗君)은 위(魏)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또 그 기회를 놓칠세라 연(燕)에서는 악의(樂毅)를 대장으로 해서 대군을 일으켰고, 그러자 또 그에 한(韓)과 위(魏) 그리고 조(趙)와 초(楚)가 합류해서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그러자 악의(樂毅)는 그 연합군의 총대장이 되어서 제(齊)로 쳐들어갔고, 그리고는 그 제군(齊軍)을 제서(濟西)에서 격파했다. 그런 다음, 악의(樂毅)은 연군(燕軍)을 이끌고 제(齊)의 수도 임치(臨淄)로 쳐들어갔으며, 그러자 민왕(湣王)은 거(莒)로 도망을 갔다. 그 후, 악의(樂毅)는 임치(臨淄)에서 전래(傳來)의 보기(寶器)들을 탈취했으며, 그 전부를 연(燕)으로 보냈다. 그러자 소왕(昭王)은 아주 크게 기뻐했고, 직접 제(齊)까지 가서 악의(樂毅)에게 포상(褒賞)을 했을 정도였으며, 창국군(昌國君)에 봉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당시, 연(燕)의 영지(領地)는 대부분이 과거의 공신들에게 다 돌아갔던 터였기 때문에, 그래서 더 내릴 영지도 없었던 형편이었지만,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소왕(昭王)은 악의(樂毅)에게 약간의 영지까지 내렸는데, 그래서 또 그것으로 봐서도 그때 소왕(昭王)이 얼마나 기뻐했던 것인지를 잘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악의(樂毅)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제(齊)를 공략해 나갔고, 그렇게 해서 제(齊)의 70여 성(城)을 차례로 무너뜨렸으며, 그러자 또 그 연동(連動)으로 <악의(樂毅)가 온다!>라는 소리만 들렸어도 그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성문(城門)을 열어주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제(齊)에서 남았던 곳은 즉묵(即墨)과 거(莒)밖에 없었고, 그래서 또 악의(樂毅)는 당시 민왕(湣王)이 머물고 있었던 그 거(莒)부터 공격했다. 그러나 또 바로 그때 민왕(湣王)은 초(楚)의 장군이었고, 제(齊)를 구원하러 왔던 도치(悼齒)에게 살해되었으며, 도치(悼齒)는 또 그 후에 그 소식을 듣고 분개(憤慨)했던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런 다음 민왕(湣王)의 아들이었던 법장(法章)을 데려와서 즉위시켰는데, 그가 바로 양왕(襄王)이었다. 그리고 또 이미 앞에서도 충분히 소개가 되었지만, 그때 전단(田單)은 그 풍전등화 상태의 제(齊)를 구하기 위해서 홀로 고군분투(孤軍奮鬪)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79년, 그러던 중에 연(燕)의 소왕(昭王)이 세상을 떠났고, 그러자 태자 혜왕(惠王)이 즉위했다. 그런데 그 혜왕(惠王)은 태자시절부터 악의(樂毅)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러자 또 그 기회를 포착했던 전단(田單)이 악의(樂毅)와 혜왕(惠王)을 이간질했는데, 그것은 또 이미 앞의 전단(田單)에서 소개가 되었으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앞의 <참고 6-25>의 전단(田單)을 참고바랍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악의(樂毅)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는 조(趙)로 망명했으며, 그러자 조(趙)에서는 그를 아주 기쁘게 맞아주었다. 그리고는 연(燕)과 제(齊)의 국경(國境)지(地)에 봉지를 내렸으며, 그것으로 망제군(望諸君)으로 칭해졌고, 그것으로 또 그 양국(燕과 齊)을 위협하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자 또 한편, 악의(樂毅)를 책략으로 몰아냈던 전단(田單)은 그 후에 빼앗겼던 영토를 전부 회복했다. 그러자 또 그때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던 혜왕(惠王)은 악의(樂毅)가 자신에게 한을 품고 다시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서 일단 자신이 장군을 바꾸게된 경위를 설명했던 것과 동시에, 악의(樂毅)가 망명했던 일에 대해서 문책하는 글을 써서 보냈다. 그러자 악의(樂毅)는 <연(燕)왕(王)에게 보고하는 글(書)>이라고 불렸던 답신을 통해서, 선왕(先王-昭王)에 대한 넘치는 경애(敬愛)와 충성(忠誠)의 정(情)을 쓴 후에, 자신이 망명을 했던 이유는 타인의 참언(讒言)으로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으로 자신을 중용(重用)해주었던 선왕(先王)의 이름에 모욕을 주는 일이 될까 두려워서였다고 썼다. 그러자 혜왕(惠王)은 자신의 오해를 풀었고, 그곳에 있었던 악의(樂毅)의 아들 악간(樂間)을 창국군(昌國君)에 봉했으며, 그것으로 악의(樂毅)와의 화해를 증거로 했다. 그리고 또 그때 악의(樂毅)가 보냈다던 그 <보유연혜왕서(報遺燕惠王書)>는 고금(古今)의 명문(名文)으로 알려졌으며,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와 함께 <읽고도 울지 않는 자는 충신(忠臣)도 아니다!>라고 말해졌을 정도로 훌륭했던 것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에 악의(樂毅)는 조(趙)와 연(燕) 양방(兩方)의 객경(客卿-다른 나라에서 와서 公卿의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이 되었으며, 그 양국을 왕래하다가 마지막에는 조(趙)에서 죽었다. 그리고 또 그 후, 제(齊)는 다시 부흥했지만 그러나 국력은 대폭 줄어들었고, 그 결과로 그때부터 진(秦) 1강(强)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그 후로는 진(秦)이 통일을 위한 수속(收束)을 밟아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의 아들 악간(樂間)도 혜왕(惠王)에게 총애를 받기는 했지만, 그러나 또 그 혜왕(惠王)이 죽고 나자 희(喜-武成王)가 즉위했는데, 그런데 그 희(喜)와는 사이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역시도 그 아버지의 전철을 밟아서 악의(樂毅)처럼 조(趙)로 망명했다. 그러자 또 그 후에 악의(樂毅)의 자손들은 모두 조(趙)로 이주해 갔지만, 그 후에 악의(樂毅)를 숭경(崇敬)했던 유방(劉邦)에 의해서 악의(樂毅)의 자손이었던 악숙(樂叔)이 악향(樂鄕)에 봉해졌고, 그리하여 화성군(華成君)이 되었다.

 아무튼, 그 제(齊)의 조락(凋落)에 의해서 그때부터 중국은 진(秦) 1강(强)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고, 그러자 또 진(秦)은 명장이었던 백기(白起)를 앞세워서 제국(諸國)들에 가열(苛烈)한 공격을 가했으며, 그리하여 기원전 260년에는 <장평(長平)의 싸움-6-26 참조>에서 조(趙)에 대승했고, 그러자 또 백기(白起-6-26 참조)는 45만이라는 엄청난 수의 장병(將兵)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256년에는 동주(東周)마저 멸했으며, 그러던 중 기원전 247년에는 정(政-나중의 始皇帝)이 즉위를 해서 전국통일의 시동을 걸었다. 그러자 또 그 정(政)은 이사(李斯)의 정책 하에 법치주의와 권력집중에 매진했으며, 그리고 또 외정(外征) 면에서는 왕전(王翦)과 왕분(王賁) 친자(親子) 그리고 이신(李信) 등을 기용했고, 그리하여 또 기원전 230년에는 한(韓)을 멸했으며, 계속해서 기원전 228년에는 조(趙)를, 그리고 기원전 225년에는 위(魏)를, 기원전 223년에는 초(楚)를, 기원전 222년에는 연(燕)을, 기원전 221년에는 제(齊)를 멸하고는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도 막을 내렸으며, 중국 사상(史上) 처음으로 통일왕조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春秋戰國時代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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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40)


 <春秋戰國時代>


 2.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어서 계속된 시대로, 기원전 403년에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부터 시작해서,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통일을 했을 때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그 명칭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취(取)한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의견이 있으므로, 다만 참고만 하시길 바랍니다.

 <초기(初期)>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패권을 쥐었던 것은, 진(晋)에서 분리되었던 나라 중에서 위(魏)가 먼저였다. 그리고 그 위(魏)는 주(周)왕조로부터 제후(諸侯)로 정식 인정되었을 때, 위공(魏公)이었던 문후(文侯)는 적극적으로 인재를 모았고, 그리하여 이극(李克)이나 오기(吳起-6-23참조) 같은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그 결과로 중산국(中山國)의 수도를 함락시켰던 등, 위(魏)를 최강국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무후(武侯)의 시대에도 패권은 계속되었으며, 거기다 무후(武侯)의 아들이었던 혜왕(惠王)의 시대에는 제후들 중에서 처음으로 왕호(王號)까지 사용하면서 그 강세(强勢)를 과시했었지만, 그러나 당시 제(齊)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손빈(孫臏)의 군략(軍略)에 의해서 대패(大敗)한 후에는,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위(魏)가 그렇게 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배영역이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중원(中原)의 중앙에 위치해있었고, 그곳은 또 다른 곳보다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그것은 역설적으로, 주변 제국(諸國)들의 침략을 받기에 용이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위(魏)는 자연적으로 점점 더 개발할 여지(餘地)를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자리를 배후에 광대한 미개발지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제(齊)와 진(秦) 등이 차지하고 나왔고, 그 결과로 위(魏)는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중기(中期)>

 
그리고 또, 초(楚)는 당시, 위(魏)에서 권력싸움에 패해서 도망을 왔던 오기(吳起)를 영입(迎入)해서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그 결과로 영토도 확장했었지만, 그러나 그 오기(吳起)의 후원자였던 도왕(悼王)이 죽자 오기(吳起)도 반대파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그것으로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동쪽의 제(齊)는 위왕(威王)의 치세에 손빈(孫臏)의 힘을 빌어서 위(魏)를 대파했으며, 그 후에 <직하(稷下)의 학(學)>이라고 불렸던 학자집단을 초빙해서 인재들을 모았는데, 그 대표 격의 인물은 바로 순자(荀子)였다.

 그리고 또 북쪽의 조(趙)는 경후(敬侯)의 지도 아래 수도를 군사적인 요충지였던 진양(晋陽-太原市)에서 경제의 중심지였던 한단(邯鄲)으로 천도했다.

 그 후, 경후(敬侯)의 증손(曾孫)이었던 무령왕(武靈王)은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騎馬)전술을 도입해서 호복기사(胡服騎射)라고 명명했으며, 그 후에 조(趙)의 그 기마대(騎馬隊)는 제국(諸國)을 떨게 했고, 당시 위(魏)에 멸해졌던 후 재흥(再興)을 하고 있었던 중산국(中山國)을 다시 멸했다.

 그리고 또 당시, 진(秦)에서는 효공(孝公)을 섬기고 있던 상앙(商鞅)이 정치개혁을 단행한 후, 엄격한 법치주의에 의한 통치체제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진(秦)의 국력은 증대되었다. 그러자 또 위(魏)와 한(韓)이 그에 위협을 받았으며, 장의(張儀-6-26참조)의 책략에 의해서 초(楚)의 회왕(懷王)은 포로로 잡혔고, 진(秦)은 초(草)의 땅을 빼앗았다.

 ○ 효공(孝公-기원전 381년부터 기원전 338년)은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제25대 군주였고, 헌공(獻公-師隰)의 적자(嫡子)였다. 그리고 또 그는 즉위와 동시에 포고(布告)를 내서 국정을 쇄신(刷新)하겠다고 포부를 밝혔고, 그 후에 위(魏)에서 왔던 상앙(商鞅)을 영입했던 것으로 발본(拔本)적인 국정개혁에 들어갔다.<상앙(商鞅)의 변법(變法)> 그리하여 목공(穆公) 사후부터 쇠퇴했던 진(秦)을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재탄생시켰으며, 수도를 역양(櫟陽)에서 함양(咸陽)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위(魏)를 격파하는 등, 부국강병에 노력했던 중흥(中興)의 시조(始祖)였다.

 ○상앙(商鞅-기원전 390년부터 기원전 338년)은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공손(公孫), 이름은 앙(鞅), 또는 위(衛)의 공족(公族)계였기 때문에 위앙(衛鞅)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또 상앙(商鞅)이란 호칭은 그가 나중에 진(秦)의 상(商)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상군앙(商君鞅)이라는 의미의 존칭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법가사상을 기초로 해서 진(秦)의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것이 또 나중에 진(秦)의 천하통일에 초석이 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자신은 주변의 원한을 사서 처형당했다. 그는 위(衛)의 공족(公族) 출신이었고, 위(魏)의 혜왕(惠王)을 모시던 재상 공숙좌(公叔座)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중서자(中庶子-公族을 담당했던 官職)를 지냈다.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이미 소개가 되었으며, 그러자 또 상앙(商鞅)은 그 길로 진(秦)으로 가서 당시 환관(宦官)이었던 경감(景監)이란 자를 만나서 당시 아직 젊었던 효공(孝公)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그 만남은 이루어졌고, 그러자 상앙(商鞅)은 먼저 왕도(王道)에 대해서 자신의 주장을 열변했는데, 하지만 효공(孝公)은 그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자 또 그 얼마 후에 그 두 사람의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상앙(商鞅)은 그때는 한단계정도 수준을 낮추어서 다시 왕도(王道)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그때도 효공(孝公)의 반응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또 얼마 후 세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러자 또 상앙(商鞅)은 앞보다 더 수준을 낮추어서 패자(覇者)의 길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그러자 그때는 효공(孝公)도 열심히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상앙(商鞅) 쪽으로 다가와서 그 이야기를 경청했을 정도였다. 그 후, 그렇게 해서 신임을 얻었던 상앙(商鞅)은 국법을 변화시키려고 했지만, 그러나 정작 효공(孝公)이 비판을 두려워해서 망설였다. 그러자 또 상앙(商鞅)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격려했다. <疑行無名, 疑事無功> 즉, 여기서의 의(疑)란, 확신이 없는 애매한 태도나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며, 그래서 또 그것이 무엇이든 일단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감(自信)을 가지고 단행(斷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그래서 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나 마음가짐 상태로 무엇을 하려고 든다면, 그 일이 비록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확신을 가질 수 없고, 그래서 명예 또한 얻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상앙(商鞅)의 그 말은 후세에 고사성어(故事成語)로 남게 되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자 감용(甘龍)이라든가, 두지(杜摯) 같은 자들이 반대하고 나왔는데, 그러자 상앙(商鞅)은 그들의 주장을 논파(論破)했고, 그러자 효공(孝公)도 상앙(商鞅)의 편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기원전 359년, 효공(孝公)은 상앙(商鞅)을 좌서장(左庶長)에 임명했으며, 변법(變法)이라고 불렸던 국정개혁을 단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제1차 변법(變法)이라고 불렸던 것이며, 그 주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편의상 번호를 붙임)

 
참고: 좌서장(左庶長)은 진(秦)의 20등작제(二十等爵制) 중에서 제12위를 가리켰던 것이며, 한편, 상군열전(商君列伝)에서는 그 시점(時點)에 좌서장이 되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진본기(秦本紀)에서는 변법(變法) 실행 후 3년이 지났을 때부터였다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며, 그리고 다음은 참고로 그 진20등작제(秦二十等爵制)에 대한 내용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단, 이 등작제는 진(秦)한(漢)시대에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그 등위는 다소 변동이 있을 수 있으며, 역시 한글표기는 하지 않습니다.

1.公士 /2.上造 /3.簪裊 /4.不更 /5.大夫 /6.官大夫 /7.公大夫 /8.公乗 /9.五大夫 /10.左庶長 /11.右庶長 /12.左更 /13.中更 /14.右更 /15.少上造 /16.大上造 /17.駟車庶長 /18.大庶長 /19.関内侯 /20.列侯

 1. 호적(戶籍)을 만들어서 백성들을 5호(戶-) 또는 10호(戶-)를 한 조(組)로 나눈다.(그것을 什伍라고 불렀음) 그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것을 의무로 할 것이며, 혹시라도 그 중에서 죄를 범한 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신고하지 않은 경우에는 십오(什伍) 전체가 연좌(連座)로 벌을 받는다.(그것을 告座라고도 불렀음) 그러나 미리 신고를 한 경우에는 전쟁에서 적의 머리를 취한 것과 같은 공적이 인정된다.

 2. 한 집에 두 명 이상의 성인 남자가 있는데도 분가하지 않은 자는, 부세(賦稅)를 배가(倍加)시킨다.

 3.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을 때는 작위(爵位)로 보상한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지 않은 자에게는 그 정도에 상응하는 과형(課刑)을 부과한다.

 4. 남자는 농업, 여자는 방적(紡績) 등, 가정 내의 수공업에 종사하고, 그 중에서 성적이 좋은 사람은 세금을 면제한다. 그러나 장사를 한다거나 게으름을 피워서 가난하게 된 자는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뜨린다.

 5. 특권 계급이라고 해도 전공(戰功)이 없는 자는 그 신분을 박탈한다.

 6. 법령(法令)을 사회규범의 요점으로 한다.

 그런 다음 그는 나라에서 법을 확실하게 집행한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 3장(丈-1丈은 10尺 그러나 秦代의 度量衡에서는 1尺이 약 27.6㎝정도였으므로, 약 8.3m)도 더 되던 나무를 수도였던 옹(雍)의 남문(南門) 앞에 박아놓고 <그 나무를 북문(北門)으로 옮기는 자에게 10금(十金)을 주겠다>고 포고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서 그 나무를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상금을 50금으로 올렸다. 그러자 어느 하루, 어떤 사람 한명이 와서 그 나무를 북문으로 옮겼다. 그러자 상앙(商鞅)은 약속대로 그 남자에게 50금을 상금으로 주었다. 그러자 그때부터 백성들은 상앙(商鞅)이 만든 변법(變法)을 믿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최초의 신법(新法)도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백성들의 불만은 높아갔지만, 그러나 상앙(商鞅)은 그것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거기다 또 상앙(商鞅)은 그 법이 훌륭하게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백성들이 그것을 반드시 지키려는 마음이 없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마침 그때, 효공(孝公)의 아들 태자 영사(嬴駟-나중의 惠文王)가 법을 어긴 일이 발생했고, 그러자 또 상앙(商鞅)은 효공(孝公)에게 그를 처벌할 것을 소원(訴願)했다. 그러자 또 효공(孝公)은 태자에게는 직접적인 벌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태자의 부(傅-후견役)였던 공자 건(虔)을 비삭(鼻削-코를 자름)형에 처했고,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던 공손가(公孫賈)에게는 이마에 글을 새겨 넣은 묵형(墨刑)에 처했으며, 거기다 또 한사람 태자의 시종(侍從)이었던 축환(祝懽)마저 태자를 잘 보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그러자 그 후, 공자 건(虔)과 공손가(公孫賈) 그 두 사람은 수치심에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고, 그러자 또 그 두 사람은 그때부터 상앙(商鞅)을 증오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전해 들었던 백성들은 그때서야 법의 지엄함을 알고는 따르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상앙(商鞅)의 변법(變法)은 그때부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자 전답(田畓)들은 아주 멋지게 개간되었으며, 병사들의 사기도 높아졌다. 그리고 또 백성들도 그때부터는 풍족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거리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내 것이다!>하고 달려드는 사람 하나도 없을 정도가 되어갔다. 그러자 또 처음에는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던 백성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때부터는 상앙(商鞅)을 칭찬하는데 입이 마를 지경이었고, 그것으로 상앙(商鞅)의 그 변법(變法)은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352년, 그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진(秦)은 위(魏)를 침공했으며, 그리고 기원전 350년에는 수도를 옹(雍)에서 함양(咸陽)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동년(同年) 상앙(商鞅)은 다시 변법(變法)을 시행했으며, 그것은 또 법가사상에 의한 군주독재권의 확립을 기도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의 주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았다.(편의상 번호를 붙임)

 1. 부자(父子)형제(兄弟)가 한집에 사는 것을 금한다.

 2. 전국(全國)의 집락(集落)을 현(縣)으로 나누고(縣制로, 全國에 41縣을 設置함) 그곳에 각각 영(令-長官), 승(丞-補佐)을 설치하는 것으로 중앙집권화를 철저히 한다.

 3. 정전(井田)을 폐(廢)하고, 전지(田地)의 구획(區劃)정리를 행한다.

 4.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한다.

 참고: 그때, 공평(公平)하게 계량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승(升-되, 말)이 <상앙승(商鞅升)> 또는 <상앙량(商鞅量)>이라고 불렸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아무튼 당시까지 그곳에서는 부자형제가 한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중원(中原) 제국(諸國)들의 시각에서 그런 것은 야만(野蠻)의 풍습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상앙(商鞅)은 그것을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었고, 그 결과로 호수(戶數)가 늘어나서 진(秦)은 그때부터 더욱더 강대해져 갔다. 그리하여 기원전 340년, 그 전 해에 이미 제(齊)의 손빈(孫臏)에 의해서 피폐(疲弊)해져 있었던 위(魏)를 다시 침공했으며, 그때 상앙(商鞅)은 스스로 군을 인솔해서 그 토벌에 나섰다. 그리고 또 옛날부터 친구사이였고, 당시 위(魏)의 총대장이었던 공자(公子) 공(邛)을 기만해서 포로로 잡았으며, 그것으로 황하(黃河) 이서(以西)의 땅을 빼앗았다. 그러자 위기를 느꼈던 위(魏)는 수도를 안읍(安邑-현재의 山西省 安邑)에서 동쪽의 대량(大梁-현재의 開封)으로 옮겼으며, 그러자 또 그때, 혜왕(惠王)은 <내가 일찍이 공숙좌(公叔座)의 말을 듣지 않아서 지금 이런 일을 겪는구나!>라고 하면서 크게 후회했다. 아무튼, 그 공적으로 상앙(商鞅)은 상(商)과 어(於)라는 땅의 15읍(邑)을 봉지로 내려 받았고, 그때부터 상앙(商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소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최고의 절정을 맞고 있었던 상앙(商鞅)도 그 이면에는 많은 그림자들을 생산했고, 그들은 또 그를 제거할 날만을 기다리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제일로 많은 피해를 봤던 사람들은 구(舊) 귀족들이었는데, 그들은 당시 군주의 독재로 인해서 자신들의 권한이 많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상앙(商鞅)에 대한 증오가 더욱 강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어느 때, 상앙(商鞅)의 심복이었던 조양(趙良)이 상앙(商鞅)에게 <지금 당장 재상의 직을 그만두고 타국(他國)으로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엄중하게 충고를 했다. 그러자 그에 대해서 상앙(商鞅)은 <네가 나의 안전을 염려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그것을 두고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조양(趙良)은 상앙(商鞅)에게서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보고 그길로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338년, 마침내 효공(孝公)이 죽었고, 그러자 태자 사(駟)가 즉위해서 혜문왕(惠文王-그러나 그 시점에서는 惠文公)이 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만을 기다려왔던 상앙(商鞅)의 반대파(公子 虔・公孫 賈 등)들이 혜문왕(惠文王)에게 참소(讒訴)를 했고, 그것으로 상앙(商鞅)을 제거하려고 들었다.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상앙(商鞅)은 급히 도망을 갔는데, 그런데 그 도중에 어느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여관의 주인은 그가 상앙(商鞅)인줄을 몰랐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의 숙박을 거부했다. <상앙(商鞅) 님의 엄명에 의해서 여권(旅券)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숙박시키지 못하도록 법률로 정해두었습니다> 그러자 상앙(商鞅)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아! 법을 위한 폐(弊), 여기에까지 이르렀던가?!(법률을 만들어서 철저하게 시켰던 폐해(弊害)가 이런 결과를 가지고 오게 할 줄이야...)> 그 후, 그는 일단 위(魏)로 도망을 갔지만, 그러나 위(魏)에서는 그를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추방되었다. 그러자 하는 수가 없었던 상앙(商鞅)은 봉지였던 상(商)으로 가서 군사를 모았지만, 그것을 토벌하러왔던 진(秦)의 토벌군에 의해서 격퇴되었으며, 상앙(商鞅)도 그때 죽었다. 그러자 혜문왕(惠文王)은 엄명을 내려서 그 본보기로 삼기 위해 그의 유해를 면지(黽地-현재의 河南省 澠池県)에서 차열(車裂)형에 처하라고 했고, 그 결과 그의 시체는 갈기갈기 찢어진 후에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그것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또 그 진(秦)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고 끝을 내면, 그 진(秦)은 원래는 내륙의 오지(奧地)에 기원(起源)을 두었던 나라로, 그래서 당시의 중국 즉, 내륙인 중앙에 있던 제국(諸國)들과는 다소 이질(異質)적인 나라였고, 그 풍습이란 것도 거의 야만(野蠻)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상앙(商鞅)에 의해서 그 모든 것들은 개혁되었으며, 거기다 위(魏)까지 이기고는 강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상앙(商鞅) 사후, 즉 혜문왕(惠文王) 이후의 진(秦)의 역대군주들도 모두 상앙(商鞅)이 만들었던 그 법을 따랐으며(그것은 또 그 반세기전에 楚의 吳起도 그런 엄격한 법을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가 죽고 나자 그것도 함께 없어졌다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또 그 후에 진(秦)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그 원동력도 바로 그 상앙(商鞅)이 만들어두었던 그 <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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