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2  나폴레옹麾下의 元帥들



 
 * 니콜라스-쟌 드 듀 스르트(솔트)(Nicolas-Jean de Dieu Soult, 1769년 3월 29일-1851년 11월 26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사상 6명밖에 없는 <프랑스의 大元帥> 중의 한 명.
 후에 정치가가 되었다.



 <생애>

 그는 궁핍했던 공증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때문으로 16세에 왕국 군에 입대했다. 그때는 군인이 되는 것이 가장 쉬운 취직방법이었기 때문에 그의 남동생도 3년 후에 입대했다.

 그는 우수했기 때문에 곧바로 군조(한국의 중사에 해당함-평민 출신자의 계급으로서는 상당히 높은 지위)가 되었지만, 군대생활에 질려버려서 2년 후에 퇴역했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빵가게를 열었다.
그러나 수입이 안정되지 않아서 다시 군에 복귀했다.

 혁명이 시작되자 지지했으며, 그 결과로 왕국 육군의 우수한 하사관이었던 그는 곧바로 장교로 승진했고(이때쯤의 경력은 다른 장군들과 비슷함), 그 5년 후에는 장관이 되었다.

 1798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사단장을 지냈고, 그때의 상관은 맛세나, 동료로는 네이 등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중에 나폴레옹의 제정 하에서 원수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방면 군사령관이 되기 바로 직전에 오스트리아군과 싸워서 부상당했고, 이어서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나폴레옹과 처음 만났던 것은 마렌고 전투 뒤의 일이었다. 그러나 우수한 지휘관으로서의 정평이 이미 나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도 마음에 들어 했었고, 이어서 1803년에는 군단장으로 승진했다.

 그 시기에 그가 실시했던 엄격한 훈련은 그 부하들뿐만 아니라 동료들, 특히 나폴레옹까지도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나중에 프랑스군의 중심역할을 맡게 되는 것으로, 그의 우수성을 증명했다.

 다음해 그는 원수로 승진했고, 1805년의 아우스트리트 전투에서는 승리를 결정짓게 하는 비상한 능력을 보여줌으로 해서 나폴레옹에게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전술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또 그때, 그가 인솔했던 제4군단은 <솔트의 수류탄(척탄)병>이란 애칭으로 칭송되었다.

 그는 또 독일전쟁과 오스트리아전쟁에서도 발군의 기능을 보였지만, 그러나 스페인전쟁(반도전쟁)에서는 너무 심한 약탈과 동료들과의 반목으로 인해서 통솔자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리고 또 한때, 스페인의 왕위를 넘보았던 것으로 해서 반역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기까지도 했다.

 그 후, 그는 스페인 방면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면서도 독일 방면의 싸움까지 지원하는 것으로 전장에서의 우수한 움직임을 선보이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다소 부족함을 드러내서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 했을 때는 프랑스 국내의 툴루즈에서 영국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그는 왕제복고 후에는 전쟁대신을 맡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돌아오자 다시 그의 휘하로 들어가서 참모총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는 우수한 전선지휘관이기는 했었어도, 치밀한 step walk에는 약했기 때문에, 그 직책은 다소 그에게서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워털루에서 그루시 원수와의 제휴에 실패했고(그때, 그가 그루시에게 보냈던 전령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후에 “만약에 베르티에 원수였다면 한 다스의 전령을 냈을 것이다”라고하며 후회했다), 이어서 패배했다.

 그는 나폴레옹이 물러간 후 복고왕제 시대에는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1830년의 7월 혁명 때도 지지했고, 이어서 왕위에 올랐던 루이-필립에게 중용되어서 전쟁대신에 취임했다. 그리고는 군의 재건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수완을 발휘했다. 


<루이 필립>


 1832년에는 首相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1840년에는 나폴레옹의 파리 移葬에 입회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드디어 1847년에는 프랑스 大元帥(Marechal general des camps et armees du roi)의 칭호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榮光과 榮譽에 싸인 채로, 82년의 긴 생애를 마감했다.

 5. 인물상

 그는 나폴레옹휘하에서도 손꼽히던 우수한 장군이었으며, 특히 기동전에서 뛰어났던 야전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전략적 시야는 다소 부족했고, 또 조직을 관리 통솔하는 수완에서도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는 또 냉정하고도 침착했지만, 다소 냉혹했을 정도로 비정한 인물이기도 했으며, 또한 대단한 俗物로, 지위와 명성 그리고 금전 등에 매우 탐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스페인전쟁에서의 약탈과 학살은 나중에까지도 화제가 되었으며, 그에 대해서는 또 Wellington은 "그는 맛세나보다도 훨씬 더 저질이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나폴레옹의 휘하에서는 가장 성공했던 두 번째 사람이었으며(첫째는 스웨덴 왕 칼14세 요한), 그런 의미로 볼 때, 그는 지극히도 운이 강했던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 루이-니코라 다브(Louis-Nicolas d'Avout 또는 Davout, 1770년 5월 10일-1823년 6월 1일)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아우어슈테트公, 에크뮬大公으로도 알려져 있다.
 군사 면에서 <불패의 다브>라고 불렸을 만큼 우수했던 외에, 행정과 관리능력에서도 우수했다.


 

 <생애>

 1. 귀족이었으면서도 공화주의자

 다브는 대대로 군인을 배출했던 하급귀족(왕제 프랑스에서는 사관이 되는 것은 귀족의 특권이었다) 가문에서 태어나서 조부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군인 감으로 키워져서 15세에 파리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그때, 동기로서 나폴레옹이 있었지만, 특별하게 사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졸업 후에 그는 조부나 아버지가 재적한 적도 있었던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혁명이 발발했고, 그러자 그는 공화주의를 지지했다.
 그는 스스로 연대 내에서 공화파를 조직했고, 그것으로 동료 사관들과 대립했다.
 그 결과, 그는 왕국군의 정규사관신분으로서 그런 행동을 취했던 것이 문제가 되어서 체포되었으며
 이어서 투옥과 함께 군적도 박탈되었다.
그러나 이어졌던 정국의 변화에 힘입어서 다시 군에 복귀했다.

 2. 흥망(浮沈)

 그 후, 그는 각지를 전전하며 점차 두각을 나타냈고, 젊고 우수한 지휘관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그와 동시에 주장을 굽히지 않는 완고자로서도 알려지게 되었다거나, 배반을 도모하던 상관을 砲擊하거나 체포하기 위해서 스스로 사령부로 뛰어들었다는 일화도 남겼다.

 그의 공화제에 대한 충성은 확고부동했던 것이었지만, 그러나 귀족출신이라는 출신이 걸림돌이 된 적도 많았었고, 1793년에 준장이 된 직후에는 귀족사관추방령에 걸려서 파면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에서도 추방되기도 했었다.

 그 후, 그는 약 1년간 고향에서 군사연구에 몰두했고, 나중에 친구의 지인 도움으로 복직에 성공했다.
 그리고는 드제이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서 그와 친교를 맺는 것으로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3. 나폴레옹과의 만남

 그 후 그는 6년에 걸쳐서 드제이의 부장 격으로서 활동하며 독일이나 이탈리아를 전전했고,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에도 참가했다. 그리고 또 바로 그곳에서 드제이로부터 나폴레옹에게 소개된 그는, 그 후 나폴레옹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는 마렌고 전투에서는 종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전사했던 드제이의 최후에는 입회하지 못했다. 그 후에 그는 친구였던 루크레일 장군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그리고 또 그때 루크레일이 나폴레옹의 여동생 포리누의 남편이었기 때문에, 그 역시 의동생이 되어서 나폴레옹의 측근 중 한사람이 되었다.

 
4. 鋼鐵의 元帥

 그는 특유의 유능함과 근실하고 정직한 인품으로 나폴레옹의 신뢰를 얻게 되었고, 나폴레옹이 제위에 오르자 원수에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34세였고, 그것은 원수 중에서는 가장 젊은 나이였다.

 그 후에 그는 제3군단을 맡게 되었고, 그 능력을 더욱 발휘해서 아우스트리트 전쟁에서는 비상식적인 기동력으로 결정적인 기능을 보였으며, 아우어슈테트의 싸움에서는 2배 이상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는 아슬아슬한 재주까지 선보였다.

 
그 승리는 특히, 독일전쟁 그 자체를 결정지었던 대승리였던 것으로, 그러자 나폴레옹도 그 공적을 높이 평가해서 <貴군단과 그 장병들에게 나의 만족감을 전해주었으면 한다. 그들이야말로 나의 경의와 감사의 생각을 얻을 권리를 영구히 획득했던 것이다... 그는 불멸의 武勇과 확고한 의지와 그리고 제1급의 戰士답게 실제로 몸으로써 그러함을 선보여주었다...>라고 말을 하고는 베를린 입성에서 제일 먼저 들어가는 영예를 주었다.

 그 후에도 그는 폴란드전쟁에서 활약했고, 바르샤바공국이 설립되자 그 총독이 되어서는 부패관료일소에도 솜씨를 발휘했으며, 對오스트리아전에서는 에크뮐 싸움에서 결정적인 능력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1810년에는 독일방면 군총사령관이 되어서 전선의 지휘관으로서 뿐만이 아니고
 위정자 또는 관리자로서의 유능함도 함께 보여주었다.

 
5. 無敵傳說

 그는 러시아원정에서도 유능함을 발휘했었지만, 그러나 그때 서서히 결단력과 지도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던 나폴레옹은 그의 충고와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원정 초반의 포위작전이나 보로디노의 싸움 등에서의 그의 조언이 無爲되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기도 했다.

 그 후, 그는 러시아원정이 끔찍한 실패로 끝나자 Hamburg를 거점으로 해서 엘베 강 하류지방의 수비를 명받아서 그곳에서 칩거하게 된다.
그러던 중 Leipzig 싸움에서 황제의 주력군이 패배했고, 그와 군단은 졸지에 고립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서도 저항을 계속했고, 그 기간은 무려 1년 이상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항복을 했던 것은 나폴레옹이 퇴위하고도 1개월 후의 일이었다.

 6. 백일천하와 그 후

 그는 루이18세가 등극하자 그에 충성을 거부하고 추방되었다.
 그리고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하자 재빨리 그를 지지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를 전쟁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그는 전선으로 나가서 싸우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때 파리를 안심하고 맡길 사람이 없어서 그는 파리에 남겨졌다.
 그러자 그는 또 그때도 유능한 능력을 발휘해서 불과 3개월 만에 군의 재편을 완성시켰다.
 그리고는 워털루 싸움에서의 패전을 알게 되자 즉석에서 군을 인솔해서 패잔의 友軍을 지원하기 위해서 출전했다.

 그 후 그는 승리에 도취되어있던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는 등 성과를 올리면서 연합군과의 협정이 성립될 때까지 파리를 지켜냈다. 그러나 왕정복고 후에는 다시 모든 직무가 박탈되어서 경찰의 감시까지 받아야만 했었지만, 하지만 오랜 친구였던 네이의 재판 때에는 자신의 안위도 무시하고 변호인으로 참가하기 위해서 파리로 향하는 등, 당찬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또 화가 되어서 그는 일시 체포되는 등 곤궁에 처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 3년 후에는 간신히 원수의 칭호를 되찾아서 명예를 회복했다.
 그리고 그 4년 후, 그는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또한 그는 네이, 맛세나와 같은 묘지에 매장되었다.

 
7. 인물상

 그는 극도의 근시였기 때문에 두꺼운 안경을 썼고, 키도 작았던 데다 젊어서부터 대머리였기 때문에 외관은 그렇게 좋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 휘하에서는 최우수라고 평가된 장군이었으며, 또한 생애 불패로 불리던 그의 군력이 말해주듯, 온통 승리와 영광으로 채워져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능력은 또 단순한 전선지휘관에 머물지 않았고, 나폴레옹의 전략을 고차원적으로 이해해서 독자적으로도 1군을 유지하며 지휘할 수 있었던 얼마 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행정관으로서 조직을 관리 통솔하는 수완도 아주 우수했으며, 그의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은 가히 신앙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의 유능함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지만, 그러나 그 재능에 대해서는 다소의 질투심도 있었던지 후에 꽤 신랄한 평도 남겨 두었다.

 하지만 그는 인품에서는 약간의 문제도 있어서 언동은 볼품이 없었고 매우 냉담했으며, 특히 사관 以上에 대해서는 비정상일 정도로 어렵게 다루어서 그들에게서 미움도 받았다.
 그리고 또 규율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했기 때문에 俗物스런 많은 동료들로부터도 답답한 사람이란 소리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친구도 적었고, 元帥 중에서 친했던 사람은 우디노와 네이 그리고 산-씰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반대로 또 싫어했던 사람은 뮤라와 베르나도트 그 두 명이었다고 한다.




 * 뮤라- 앞에서 설명되었음.

                    


 
 * 안드레 맛세나(Andre Massena, 1758년 5월 6일-1817년 4월 4일)

 프랑스의 군인. 제1제정 하의 원수. 에슬링 大侯爵. 리보리 공작.
 나폴레옹전쟁에서는 주로 方面군사령관을 맡아서, 스위스전쟁이나 반도전쟁 등에 종사했다.
 혹은 마세나라고도 부른다.


 <생애>

 1. 前半生

 그는 1758년 5월 6일, 니스의 무역상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조실부모하고 비누제조업을 하던 숙부에게 의탁되었지만, 13세에 가출해서 武裝商船(일종의 私掠船, 해적)의 선원이 되었다.

 1775년, 그는 선원을 그만두고 일병졸로 프랑스육군에게 입대했다.
그리고는 로열 이탈리안 연대에 배속되어서 하사관의 최고위인 상사(준위)까지 승진했지만, 그러나  귀족출신자 이외에는 그 이상의 승진 전망이 없었기 때문에 1789년에 제대했다.

 그 후, 그는 밀수업을 했다.
그러나 1791년에 다시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는 한때의 군력이 평가되어서 1792년에는 대령까지 승진했다.

 
2. 장군시대

 프랑스혁명전쟁 중에 그는 이탈리아 방면 군에서 착실하게 공적을 쌓아올려서 2년 만에 장군까지 승진했고, 1794년 8월의 사오르지오 전투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795년 8월 3일에 있었던 로나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쳤던 것은 그에게서는 최초의 이름난 승리가 되었다. 그리고 또 바로 그 싸움에서 처음으로 그는 나폴레옹과 대면했다.

 1796년, 나폴레옹이 신임 이탈리아방면 군사령관이 되자 그는 그의 휘하로 들어가서 이탈리아원정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1797년 1월 14일 리보리의 싸움에서 그는 경이적인 機動으로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를 쳐서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1799년 그는 스위스방면 군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제2차 대불대동맹에 의해서 헤르베티아공화국(스위스에 수립되었던 프랑스의 괴뢰국가)로 침공해온 러시아, 오스트리아 동맹군과 싸웠다. 그리고 그는 동년 9월 25일부터 26일에 걸쳐서 행해졌던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동맹군을 물리쳤으며, 그로인해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1799년, 브뤼메르 쿠데타로 나폴레옹이 제1집정이 되자, 그는 1800년에 이탈리아방면 군사령관에 임명되어서 이탈리아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數에서 월등했던 오스트리아군의 공세 앞에서 프랑스군은 방어전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또 그때 프랑스군들은 악랄하게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현지인들의 불만이 많았다.

 동년 3월, 그는 제노바에서 포위되었고, 이어서 3개월의 농성 끝에 6월 4일 항복했다.
 (그 때문에 맛세나는 6월 14일의 마렌고 전투에는 참전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맛세나는 일시 軍籍이 떨어졌고, 의원직을 맡게 되었다.

 
3. 원수 시대

 1804년, 그는 황제 나폴레옹에 의해서 군에 다시 복귀했고, 이어서 원수로 승진했다.
 1805년, 그는 다시 이탈리아방면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서 베로나를 제압했다. 그리고는 오스트리아군의 진군을 막는 한편, 동년 10월 30일의 카르디에로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쳤으며, 다수의 포로도 얻었다.
 1806년, 나폴레옹의 형 죠제프가 나폴리 왕이 되자 그에게는 또 나폴리군의 지휘권도 주어졌다.
 그러나 그때도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현지인들의 반감을 샀다.
 1808년에 그는 리보리 공작이 되었다.
 그리고 1809년 제5차 대불대동맹이 결성되자, 그는 제4군단 사령관이 되었고 이어서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아스페른과 에슬링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전위가 패퇴했을 때 제4군단을 몰아서 우군을 구원해냈고, 거기에 더해서 그 근거지를 확보했다.
 그 공적과 계속된 바그람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그는 에슬링 大侯爵이 되었다.
 1810년, 그는 다시 포르투갈방면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서 반도전쟁에 참가했다.
 그리고는 동년 9월 27일, 브사코 전투에서 처음으로 동맹군과 충돌했다.
 그러자 영국군사령관이었던 Wellington은 결전을 피해서 동맹군을 일단 후퇴시켰다.
 
1811년, 영국의 원군이 도착하자 전황은 역전되었다. 그러자 동년 3월 5일의 바롯사 전투와 동년 5월 3일의 펜테스 데 오뇨로 전투 등에서 프랑스군은 패퇴를 반복했다. 그러자 그는 군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이어서 마르세유의 사령관직으로 격하되었다.

 
4. 만년

 그 후,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왕제가 복고되고 나서도 그는 마르세유 사령관직을 계속해서 맡았다.
 그리고 백일천하 때는 그 역시도 나폴레옹을 지지했지만, 그러나 군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그 후, 그는 上記의 이유로 모든 군무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1817년 4월 4일, 파리에서 그는 사망했다.

 
5. 평가

 그는 독점욕이 강했고, 탐욕적인 사람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또 전장에는 남장을 시킨 애인을 데려갔을 정도로 여자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또 그러한 성격으로 문제를 자주 일으켰고, 특히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의 대대적인 약탈 행위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군사지휘관으로서는 매우 우수한 인물이었으며, 특히 리보리 전투에서 보여주었던 기동전은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또 나폴레옹 휘하의 원수들 중에서는 최우수라고 평가하는 역사가도 있을 정도다.
 그리고 나폴레옹 역시도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그 결과로는 또 그가 한때 군무를 떠나있었지만, 다시 복귀시켰으며, 이어서 원수의 자리에까지 올려주었던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것은 또, 반도전쟁에서 적으로 싸웠던 Wellington조차도 그의 후임이었던 솔트와 비교해서 그가 오히려 나았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6. 비고

 뉴욕 주의 마을 맛세나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19세기 프랑스인의 材木商에 의해서 명명되었다.

 7. 관련항목

 페일 라시즈 묘지에 그의 사위인 레이유, 동료였던 네이 원수, 다브원수 등과 함께 그는 매장되어있다.
 그리고 또 戰艦으로도 맛세나 호가 있었다.


<맛세나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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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2  나폴레옹麾下의 元帥들



 * 유제프 앤토니 포냐트후스키(Jozef Antoni Poniatowski, 1763년 5월 7일-1813년 10월 19일)

 폴란드의 군인, 귀족.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휘하에서 활약하다 원수가 되었다.
 
프랑스명은 죠제프 안토와느 포냐트후스키(Joseph Antoine Poniatowski)



         


 <생애>

 그는 1763년 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던 포냐트후스키家는 슈라후타(폴란드 귀족, 士族) 家系로, 조부였던 스타니스와후는 스웨덴 왕 칼12세를 받들다가 폴란드로 돌아가서 쿠라크후 城을 이어받았던 군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안제이는 오스트리아의 장군이었고. 거기다 폴란드 왕국 마지막 국왕이었던 스타니스와후 2세 아우구스트가 그의 아버지의 형이었기 때문에 그는 Prince(大公)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군에 몸을 담고 오스만제국과의 전투에도 종군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1789년에 숙부의 권유로 조국으로 돌아가서 폴란드의 육군소장이 되었지만, 그러나 <오스트리아-러시아제국-프로이센왕국>에 의한 조국 폴란드의 분할은 어떻게도 막을 수가 없었다.(폴란드 분할)

 1806년 그는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싸움에서 이기는 것을 보고, 조국을 재흥시켜줄 사람은 바로 나폴레옹뿐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폴란드 군을 인솔해서 나폴레옹 휘하로 들어갔다.

 그 다음해 그는 나폴레옹이 바르샤바공국을 건국하자 그곳의 육군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1809년,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일시적으로 점령당했던 바르샤바를 재탈환했고, 그 여세를 몰아서 폴란드의 옛 영토였던 쿠라크프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실패하자 바르샤바공국의 존재도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또 그때 敵 측에는 자신의 동료들이 많이 있었던 상태였지만,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다.

 그는 또 1813년에 스스로 13,000명의 폴란드군을 조직해서 뤼헬전투에 참가했고, 그리고는 이어서 라이프치히전투 중에 프랑스 원수로 승진했다.
그러나 불과 그 3일 후에, 라이프치히에서 프랑스 군의 퇴각을 지원하다 전사했다.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 미셸 네(이)(Michel Ney, 1769년 1월 10일-1815년 12월 7일)

 나폴레옹 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성의 Ney는 이중모음 <네이>가 아니고 <네>[nε]가 원음에 가깝다.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자르지방 출신이다.
 <용사 중의 용사>로 알려졌다.


                          


   <생애>

 
7년 전쟁에 종군했던 병사였으며, 樽職人(술통을 만들던 장인)이었던 피에르 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처음에는 공증인이 되기 위해서 법률사무소에 취직했었지만, 1787년에 왕국 군이었던 유사르 연대에 일병졸(一兵卒)로 입대했다. 그리고는 프랑스혁명 중에 두각을 나타내었고, 이어서 1799년에는 벌써 사단장으로 승진했다. 1800년에 그는 조세핀의 소개로 결혼했고, 이어서 나폴레옹의 측근이 되었다.
 그는 성실하고 열성적이었던 부관(스위스인 용병 죠미니. 나중에 고명한 군사이론가가 된다)의 조력에 힘입어서 보병지휘관으로서의 뛰어난 능력을 연마했다.


                
                                           <죠미니>


 그리고 그는 또 개인적으로 죠미니의 저작출판비용을 부담하는 등, 여러 가지로 원조했다.
 그래서 죠미니는 나중에 베르티에 원수와 대립해서 네이를 떠난 후에도 평생 그를 경애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나폴레옹이 제위에 오르자 원수가 되었고, 1805년에는 에르힌겐의 싸움에서 대활약했으며, 그 공으로 1808년에는 에르힌겐 공작이 되었다.

 그는 또 프로이센 전쟁에서도 활약했고, 러시아전쟁에서는 보로디노 싸움에서 분전한 뒤, 모스크바로부터의 길고 힘들었던 퇴각 전을 후위사령관으로서 지휘했으며, 끝내는 본국에의 귀환을 완수했다. 
그래서 그 역경 속에서도 보여주었던 그의 끈질김과 용기 그리고 통솔력은 나중에 전설로 남아서 회자되었고, 그에 대해서는 또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남자다! (그리고)프랑스군에는 용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이도 모여 있다지만, 그러나 미셸 네이야말로 실로 용사 중의 용사인 것이다!>

 그는 그 후 독일전쟁에서도 활약했지만, 그러나 1814년에 敗色이 짙어지자 다른 원수들과 함께 나폴레옹에게 퇴위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왕정복고 후에는 루이18세를 따르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궁정 내에서의 소외와 모욕 등에 불만을 가져서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자 다시 그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는 그 후 워털루 싸움에서 前衛로써 사실상의 총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1만 기병으로 총돌격을 감행하는 등 분전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그리하여 
그 후에 다시 복권했던 루이18세의 정부에 의해서 그는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러자 그때, 세간에서는 네이와 뮤라의 총살은 루이18세의 개인적인 복수라는 말이 있었지만
 (얀간公에 대한), 그러나 네이 자신은 그때 동료 장관들에 의한 군법재판을 거절했으며
 프랑스의 상원의원 자격을 방패 삼아서 상원을 지배하고 있었던 왕당파의 재판을 받았다.
 그러자 또 루이18세는 그를 두고 <두뇌 없는 영웅>이라고 비웃었다지만
 그러나 그 배경에는 <스스로를 과시하려했던 결과에서였지 않았겠는가>하는 평도 있었다.

 아무튼 덧붙여서, 그때 그의 처형을 강경하게 바랐던 사람 중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이었던 앙레임 공작부인(마리 테레즈-앞에서 소개 되었음)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녀는 후에 네이의 부하가 쓴 회상록을 읽어보고, 그가 모스크바 퇴각 전에서 분전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때서야

 <만약 내가 그때, 러시아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조국에의 헌신적인 모습을 알았었더라면, 결코 나는 그의 처형에 찬성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울었다는 일화도 있다.

 <인물>

 그는 大陸軍에서는 나폴레옹 다음으로 장병들에게서 인기가 많았던 지휘관이었으며
 불굴의 투지와 인간 이상의 용기로 유명했던 국민적인 영웅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성실하고 정직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노력가였으며
 또한 많은 동료들과는 달리 세속적인 욕구에도 무관심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또 부하들에게도 물심양면의 도움을 주는데 아낌이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무인으로서의 명예에는 매우 민감해서 모욕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며
 또한 비겁한 태도를 몹시 싫어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전장에서는 지극히 엄격하고 냉철했으며, 부하들의 죽음을 보고서도 눈 한번 까딱하지 않는 냉혈한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군인이 전장에서 쓰러지는 것은 당연한 운명이다!>라고 했다는 자신의 말처럼, 그 또한 그런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또 워털루 싸움의 막바지에 이르자 붕괴해가던 대열을 향해서 <도망치지 말고 싸워라! 내가 누군지 모르는가?! 프랑스 元帥의 죽음으로 너희들에게 모범을 보여주겠다!>라고 하면서 병사들을 질타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성격이 급한 激情家이기도 했었지만, 하지만 상황이 끝나면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또 솔직하게 사죄도 할 줄 아는 그런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전장에서의 용맹함과는 정반대로, 평상시에는 마음이 약하고 우유부단한 면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말 위에서는 半神이지만, 말에서 내리면 마치 아이와도 같았다>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는 또 태어났던 환경으로 인해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유창하게 할 수가 있었고
 또한 명령서 등에 남겨진 필적으로 볼 때 매우 달필이었다고 한다.



                                                   <카우나스 전쟁에서의 네이>


 그는 또 플루트와 클라리넷 연주를 잘했으며, 체스의 명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지휘관으로서는 특히 끈질김을 그 생명력으로 했으며, 방어퇴각 전에서는 후위를 인솔해서 수많은 전설적인 무훈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또 공격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용기와 감투정신이 풍부했었지만, 그러나 그는 대군을 조직적으로 운용하는 일에는 다소 서투름을 보였었고, 상황판단도 하지 않고 무조건 저돌적으로 돌입해서 고립당하는 실패도 자주 범했다.(그 예로는 워털루에서 Wellington의 후퇴를 퇴각이라고 오인해서 기병들을 모두 투입해서 예비 병력을 잃었던 것을 들 수 있다)

 아무튼, 그리고 그는 전략적인 시야는 부족했
지만, 그러나 남겨진 명령서 등을 볼 때, 매우 간결하고도 명료하게 일처리를 하고 있어, 부대의 통솔자로서는 숙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런 그에 대해서 愛憎半하는 복잡한 심정을 가졌던 모양으로, 유형지에서의 회상에 의하면, 그를 엄격하게 비판했으면서도 또한 최대한으로 칭찬하는 것도 볼 수가 있다.
 아무튼, 그는 최후 룩셈브르크 궁전의 정원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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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자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눈가림을 추천했다지만, 그러나 그는

 <너희들은 내가 20년 이상도 전부터 총탄을 직시해왔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는가!>

 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덧붙여서, 그가 총살되었던 장소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서 현재에도 獻花가 끊이지 않고 있다.

 <최후의 말>

 “병사 제군! 이것이 나의 마지막 명령이다! 내가 호령을 하면 곧바로 나의 심장을 노려서 쏘아라! 나는 이 부당한 판결에 항의한다! 나는 프랑스를 위해서 백번이나 싸웠으되, 단 한 번도 조국을 배반했던 적은 없었다!” 


<네이 상>


 


 * 칼(카를)14세 요한(스웨덴어:Karl XIV Johan, 1763년 1월 26일-1844년 3월 8일)

 
스웨덴 왕-노르웨이 왕(노르웨이 왕으로서는 칼3세). 베르나도트朝 초대국왕(재위:1818년-1844년).
 프랑스혁명, 나폴레옹전쟁기의 프랑스의 군인.
 쟌-바티스트 줄 베르나도트(프랑스어:Jean-Baptiste Jules Bernadotte)로서도 알려져 있다.
 덧붙여서, 베르나도트朝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서 만들어진 왕조 중에서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는 왕가이다.





 <프랑스혁명 시대>

 그는 포(Pau-프랑스 최남단 서부지역으로, 피레네산맥의 溪流인 포 江 유역에 위치한 도시)에서 代訴人(소송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런 부모의 희망을 뿌리치고 1780년 프랑스육군에 입대했다.


<포의 gave 城>


 그리고 그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열성적인 자코뱅파가 되었고, 그 증거로써 자신의 팔에다
 <王侯 뒈져라!>라고 쓴 문신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혁명 후에는 독일과 북쪽 이탈리아 방면으로 전전하며 무훈을 쌓았고, 1794년에는 육군소장까지 승진했다. 그러자 그가 일개 병사에서 장군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사실에 민중들은 찬사를 보냈고, 그리하여 한때는 나폴레옹의 라이벌이라고까지 주목받기도 했다.

 그는 또 자코뱅파의 두목 역할을 맡았던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결단력 부족으로 나폴레옹에게 먼저 권력을 빼앗기게 되었다.(브뤼메르 쿠데타-
하지만 그때 정작 본인은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때 그는 쿠데타에 대해서는 중립의 입장을 취했고
 그것이 또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는 일이 되기도 했다.

 <나폴레옹전쟁 시대>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 의해서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나폴레옹에게 이렇다 할 뚜렷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그는 나폴레옹에 대해서 진심으로 心醉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호의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그랬던 그가 나폴레옹으로부터 아무런 制裁도 받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나폴레옹의 전 약혼자였던 데지레와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은 그 때문에 평생 그를 처단할 수 없게 된다)




<데지레>


 아무튼,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자 그는 원수가 되었고, 1806년에는 또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있는 폰테코르보(Pontecorvo)의 大公에 봉해졌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그러한 승진의 배경에는 나폴레옹의 데지레에 대한 연민이 숨어있다고 생각해서 그에 알맞은 뚜렷한 성과(무훈)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그 즈음인 1806년경부터 나폴레옹에게서 마음이 떠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무튼,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는 꼭 꼬투리를 잡는다면, 군사재판까지도 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데지레의 중재로 그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랬던 그도 군공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1806년의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추격전 끝에 프로이센의 항복을 받아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프로이센군에 합류했던 스웨덴군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이, 나중에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일조했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는 1808년의 핀란드전쟁에서는 스웨덴 공격을 위해서 유트란드반도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곧 나폴레옹의 변심으로 철수했고, 이어서 그동안의 성과를 물어서 그는 모든 임무에서 제외되었다.

 <스웨덴 王太子시대>

 
1809년 스웨덴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결과 대불강경파(반 나폴레옹)로서, 러시아제국에게 핀란드를 빼앗기는 등, 군사적으로도 강경파였던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폐위되었고, 그의 숙부 카를13세가 왕위에 올랐다.




<구스타프4 아돌프 1778-1837>


 그러나 그때 이미 카를13세는 노인이었던 데다, 왕태자였던 카를 아우구스트도 1810년에 급사해버려서 스웨덴은 다음 후계자가 절실해졌다.
그러자 한때 그 후계자로서 죽은 왕태자의 형이 정해지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때 나폴레옹에게 그런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서 파리로 갔던 使者 메르넬 남작이 추천을 해서 그가 후보로 신청되었다.(그 이면에는 또 앞서 밝힌 전쟁 때에 메르넬 남작이 그에게 포로가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에게서 받았던 친절에 보은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었다. 그리고 베르나도트는 일찍이 스웨덴군들의 포로에 대해서는 관대한 조치를 취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이미 그는 스웨덴 국민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러자 아무튼, 스웨덴 국회는 <그가 Protestant(개신교)로 개종한다면 국왕의 후계자로서 맞아들이겠다> 라고 결의했다.
그러자 또 카를13세는 <요컨대, (그는) 나쁜 놈일 리 없다!>는 한마디로 그를 인정했다.



<카를(컬)13세>


 그러자 또 베르나도트는 그에 대해서 <나도 평소부터 Protestant로 개종하고 싶었다>라는 의사를 표시함으로 해서 그 제의를 승낙했다. 그리고 또 나폴레옹도 북방 쪽으로 의지가 되는 동맹국을 갖게 된다는 기대와 함께 데지레에 대한 연민으로 그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나폴레옹에게 <내가 스웨덴의 왕태자가 된 이상, 나는 이제부터 스웨덴을 위해서 싸운다>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 1810년부터 섭정으로 스웨덴의 정치를 맡게 된 그는, 점차 反프랑스 행동을 취해갔고, 1812년에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또 북방의 동맹국을 만들려고 했던 나폴레옹의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졌지만, 그러나 그는 그에 더해서 <정치에는 우정도 증오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다만 운명의 신이 명하신 조국에 대한 의무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의 친서를 나폴레옹에 보내는 것으로 그 결별의 뜻을 표했다.

 그 후,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실패하자 反나폴레옹의 기운이 높아졌고, 그러자 그 틈을 노려서 그는 또 反나폴레옹 연합군에 솔선해서 참가했으며, 이어서 프랑스군의 중요한 정보를 연합국 측에 제공하거나 하면서 연합군이 승리하는데 공헌했다.(해방전쟁, 제6차 대불대동맹)

 그는 또 1813년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던 공으로 연합군 측으로부터 최고급의 훈장까지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태도는 반 프랑스적이었기 때문에(그의 명분은 '나폴레옹을 넘어뜨려야 유럽의 평화가 보장된다'는 것이었지만) 조국이었던 프랑스에 대해서는 배반행위가 되어서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 몰락 후에 아렉산드르1세와 스타르 부인(프랑스의 비평가, 소설가)의 추천으로 그는 프랑스 왕위를 노려보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정작 중요했던 프랑스에서는 지지가 부족해서 결국 루이16세의 남동생 루이18세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스타르 부인>


 <스웨덴 국왕 시대>

 그 후,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간 그는 1814년에 노르웨이 병합(kiel 조약)에 성공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공적을 쌓았고, 1818년에는 카를14세 요한으로 정식으로 국왕이 되었다(스웨덴-노르웨이 왕).

 그 후 그는 대외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면서 국내의 평화유지에 충실했고, 영토의 확대보다는 산업의 진흥으로 국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또 국내의 자유주의파의 요구를 묵살했고, 의회개혁 등 정치개혁에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며 反動적인 정치를 실시했다.(그 배경의 하나로, 그는 스웨덴어를 전혀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들 수가 있다. 그가 스웨덴으로 갔을 때는 이미 나이가 47세나 되어있었기 때문에 배우려는 의지는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포기했다. 그러자 그 후 통역은 외아들로 후에 왕위에 오르는 오스칼에 의해서 행해졌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으로 <황후 뒈져라>라는 문신을 했다는 그 남자는 일국의 국왕이 되었고, 그에 더해서 반동적인 국왕으로까지 군림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역사의 한 일면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그 후에도 그는 빈 체제를 충실히 이행했으며, 1830년 이후에는 온건한 입헌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프랑스와의 사이도 점차 개선되어서 그는 친구의 장례식에게 참례하기 위해서 프랑스로 향하기도 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는 파리의 개선문에 그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리고 그의 만년에는 북유럽에서 내셔널리즘으로 끓어오르던 汎스칸디나비아주의가 싹트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크게 염려할 것은 없었고, 또 친 러시아적인 정책에는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현재의 골격을 쌓아올렸다고 할 수 있을 스웨덴의 중립정책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현대에까지 계속되고 있는 <중립주의(무장 중립)>의 創成이 되기도 했다.




<베르나도트의 親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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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1.  나폴레옹의 一 愛人과 庶子 <단, 나폴레옹 생존 시를 기준으로 함>



 <愛人>

 
루이즈 카트린느 에레오노르 드뉴엘 드 라 프레뉴
 (Louise Catherine Eleonore Denuelle de La Plaigne)
 1787년-186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인 애인.
 평민출신의 메이드(maid-잡부. 가정부).

 1805년에 대위와 결혼했지만, 그 남편이 9주 만에 공비유용혐의로 투옥됨으로 해서 파국을 맞았다.
 
그 다음으로 1806년에 카로리누 보나파르트로부터 나폴레옹에게 소개되어져서 그의 애인이 되었고
 이어서 그의 아이도 낳았다. 그러자
그 아이에게는 작위와 연금이 주어졌고, 庶子로 인정되었으며
 레옹伯 샤를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전에 교제했던 죠아살 뮤라가 그 친아버지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 다음에 그녀는 또 1808년에 보병중위와 재혼했지만, 그 남편은 그 4년 후에 전사했다.
 그 후에는 또 1814년에 바이에른의 어느 백작과 결혼했다.

 <庶子>

 레옹伯 샤를(Charles Leon, 1806년 12월-1881년 4월 15일)
 프랑스의 귀족. 나폴레옹1세의 서자.
 나폴레옹과 에레오노르 드뉴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친아버지는 죠아살 뮤라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도 서자로 인정되었고, 1815년에는 백작의 지위가 주어졌다.
 1832년에 그는 영국인 대위를 결투로 사살했다.
 그리고 또 1840년에는 루이 나폴레옹(나중의 나폴레옹3세)과도 결투 신청이 있었다.(미수)




 <愛人>

 
마리아 바레후스카(Maria Walewska, 프랑스어 Marie Walewska)
 1786년 12월 7일-1817년 12월 11일.
 
나폴레옹1세의 애인으로 알려진 인물.
 처음에는 폴란드의 명문귀족 바레후스키 백작의 아내였다.




 <생애>

 
1786년, 마리아는 폴란드의 워비치 부근 마을 브로드노(Brodno)에서
 폴란드의 귀족 워틴스키(라틴스키, 라크즈스카와 誤讀)家의 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테우슈 워틴스키(Mateusz Ł-czy-ski).
 어머니는 에바 자보로후스카(Ewa Ł-czy-ska-Zaborowska).
 처음에 워틴스키家는 유서 깊은 명문귀족이었지만, 5명의 아이들을 거느리게 되자 생활이 어려워졌다.
 그것은 또 1772년 제1회 폴란드 분할로 대부분의 영지를 프로이센왕국에 빼앗겨버렸던 것에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게다가 또 폴란드 의용군에 들어가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1794년에 마체요비트 싸움에서 러시아병에게 살해되었다. 그러자 가정은 더욱 어려워졌고, 그것이 또 나중에 그녀의 애국심을 강하게 했던 한 요인으로 생각되어진다.

 1. 바레후스키 백작과의 결혼

 그녀가 16세 되었을 때, 아름다운 그녀를 본 아나스타시 코론나 바레후스키 백작은 워틴스키家의 빚을 인수하는 대신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전해왔다.
 
(그때, 바레후스키 백작은 두 번의 결혼에서 모두 처와 사별하고 있었다)
 그러자 결국 마리아의 어머니 에바는 어려운 살림 때문에 그 결혼을 승낙했다.
 그러나 그때 바레후스키 백작은 마리아보다 46세나 연상이었던 데다 나이도 62세나 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이미 성인이 되어있었던 바레후스키의 손녀조차도 마리아보다 6세나 연상이었다.
 그러자 그 혼담에 쇼크를 받은 그녀(손녀)는 폐렴에 걸려버렸다.
 아무튼, 그런 우여곡절 끝에 1804년 6월 18일 마리아는 바레후스키 백작과 결혼했다.
 그리고 1805년의 6월 13일에는 장남 안토와느를 출산했다.
 (그때, 그녀는 그런 불행했던 결혼의 보상으로, 신앙과 애국심에서 위로를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2. 나폴레옹과의 만남

 
그랬던 그녀에게 큰 전환기가 찾아왔던 것은 1806년 12월 18일 나폴레옹이 바르샤바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때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은 폴란드의 구세주로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고 있었고, 그녀는 1807년 1월 7일 외무대신 탈레랑이 주최했던 무도회에서 자신의 남편과 함께 나폴레옹을 만났다. 그러자 그녀를 본 나폴레옹은 첫눈에 반해버렸다.(그러나 그때, 마리아는 탈레랑과 그의 아들이었던 샤를 드 후라오에게도 호감을 가졌던 듯하다) 아무튼, 그러자 나폴레옹은 재빨리 꽃다발과 편지를 보내서 그녀에게 구애했지만, 그러나 신앙심이 강하고 정숙했던 그녀는 그것을 전부 무시했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에게 폴란드부흥의 기대를 걸고 있었던 마지막 폴란드국왕 스타니스와프2세의 조카 유제프 포냐트프스키 外 여러 사람들이 바레후스키 백작을 찾아갔고, 그리고는 폴란드를 위해서 그녀가 나폴레옹의 구애를 받아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바레후스키 백작이 승낙했고, 그래서 그녀는 그때부터 나폴레옹의 공식적인 애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의 고집과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나폴레옹을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자 나폴레옹도 그녀의 온화하고도 진실했으며, 욕심이 없는 순진한 성격을 알게 되자 여태 사귀어왔던 다른 애인들과는 달리 그녀를 진심으로 깊게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은 또 나폴레옹이 마리아와 사귄다는 말을 들은 조세핀이 급히 폴란드로 달려오자 나폴레옹은 그런 그녀를 별일 아니라는 듯이 바로 돌려보내버렸던 것을 봐서도 알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나폴레옹은 그녀를 <폴란드의 아내>라고 불렀고, 1808년의 4월부터 독일의 핀켄슈타인城에서 6주간 둘이서 함께 보냈다.

 
3. 出産

 
1809년 9월, 마리아로부터 임신소식을 전해들었던 나폴레옹은 그에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유럽 군주들의 황녀들과 결연할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그때, 에레오노르 드뉴엘(그녀는 나폴레옹의 부하들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었던 카로리누의 남편 죠아살 뮤라 등과도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이후 父 불명의 레옹 백 샤를을 생산함) 때와는 달리 그 아이가 분명히 자신의 아이라고 확신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때 이미 마리아도 나폴레옹이 조세핀과 이혼할 것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 또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무엇인가 불안감을 느꼈던지 <비록 당신의 사랑이 식는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사랑했던 때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새긴 금과 에나멜로 만든 반지를 나폴레옹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때, 그 반지에 자신의 머리카락도 한 가닥 담아 넣었다)

 어쨌든, 그런 마리아의 불안감은 적중했고, 나폴레옹은 조세핀과 12월에 이혼한 후 오스트리아 황녀 메리 루이즈와의 결혼을 준비했다. 
그러자 그것을 알게 된 마리아는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혼자서 조용히 폴란드로 돌아갔다. 그리고 1810년 4월 2일, 나폴레옹은 메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그리고 또 한편, 마리아는 1810년 5월 4일에 아렉산들 바레후스키를 출산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바로 바레후스키 백작의 아이로 인정되었다.

 
4. 나폴레옹의 퇴위

 
1812년, 마리아는 바레후스키 백작의 아내란 신분으로 지낸다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7월 18일에 이혼을 청구했다. 그리고 8월 24일 그 사실이 인정되어서 마리아는 이혼했다.

 그 후, 그녀는 재혼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나폴레옹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그녀는 나폴레옹의 형제자매들과 나폴리에서 지낸 적도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때 모두 마리아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또 1813년 봄에는 조세핀으로부터 마르메존 성에 아들 아렉산들과 함께 초대된 적도 있었다.
 
그러자 마리아는 그에 부담을 느꼈지만, 그러나 조세핀은 그녀의 인품에 매우 만족하고 그 두 사람에게 선물까지 했다. 그리고 조세핀은 나중에 그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었다고 한다.

 
<천성이 상냥한 그녀로부터 나는 어떠한 마음의 고통도 받지 않았다...
 그녀의 시녀 아브리온 부인의 회고록에서>

 어쨌든, 1814년 4월 6일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그에 걱정이 되었던 마리아는 4월 13일 퐁텐블로우 궁전으로 즉시에 달려갔다.
그리고는 나폴레옹을 만나려는 일념으로 밤새도록 밖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그때 이미 나폴레옹은 독약을 마시고 쓰러져있었던 상태였다. 그러자 할 수 없이 마리아는 그대로 돌아갔다.

 1814년 8월 31일 그녀는 또 엘바 섬으로 달려갔다. (그때는 나폴레옹이 불렀던 것으로 보임)
 그리고 또 1815년 워털루 싸움에서 졌던 나폴레옹과 마지막 이별을 하기위해서 6월 28일에는 아렉산들을 데리고 마르메존城을 방문했다. 그리고 마리아는 그곳에서 1시간정도 나폴레옹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또 그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폴레옹에게 자신도 그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데려가줄 것을 호소했다고 한다.

 5. 晩年

 그 후, 그녀는 나폴레옹의 권유로 그의 사촌동생 달러나노伯과 1815년 9월 7일에 결혼했다.
 (나폴레옹은 그때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조세핀과 마리아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리아가 준 반지를 끝까지 끼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1816년 6월 9일에 그녀는 로드르후 오규스트 달러나노를 출산했지만, 그러나 신장 기능의 악화와 함께 나폴레옹의 몰락과 그와 이별했을 때 받았던 충격으로 인해서 나날이 몸 상태가 악화되어 갔다.

 그 후, 임종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달러나노에게 부탁을 해서 프랑스의 불로뉴 숲을 잠시 여행했다.
 그리고 1817년 12월 11일에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아렉산들은 프랑스로 망명했고, 외무대신이 되어서 사촌이었던 나폴레옹3세를 도왔다.
 그리고 그녀는 1970년에 <위대한 애국자의 1명>으로서 <폴란드의 우표>로 제작되었다.


 <庶子>

 아렉산들 흘로리안 죠제프 코론나-바레후스키

 프랑스 제2제정 기의 정치가, 귀족.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애인이었던 마리아 바레후스카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來歷>

 나폴레옹이 폴란드 원정 시에 만났던 유부녀 마리아 바레후스카 백작 부인이 낳았던 아이였다.
 그는 태어나자 곧 마리아의 남편이었던 바렌스카 백작의 아이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곧 두 사람은 이혼했고, 1817년 그가 10세 때 그의 어머니 마리아도 병사했다.
 그리고 친아버지 나폴레옹도 1821년에 사망했다.
 그는 유년 시대를 폴란드에서 지냈고, 독립운동에도 참가했다.
 그리고 17세에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는 모국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그 혁명군에 참가했다.
 그러나 혁명이 실패하자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서 외교관이 되었다.
 그는 또 1848년에 사촌이었던 루이 나폴레옹(후의 나폴레옹3세)이 대통령이 되자
 그 인맥을 이용해서 주 마드리드대사, 주 런던대사를 지냈다.
 그리고 1855년에는 외무대신으로 취임했고. 그 후에는 또 국무대신, 입법원의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
 그가 大臣이었던 시절에는 나폴레옹과 꼭 닮은 외모 때문에 외국인들로부터 나폴레옹3세라고 오해받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미모의 아내였던 마리안누와 나폴레옹3세가 불륜하던 현장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그는 1868년 10월 27일, 스트라스부르에서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페레 라제즈 묘지에 매장되었다.



     


 <愛馬>

 
마렌고(Marengo, 1793년-1832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애마.
 體高 142cm의 순혈 아랍 마.
 
1799년 이집트에서 프랑스로 데려온 후 나폴레옹의 애마가 되었다.
 이름은 마렌고 전투에서 따왔다.
 毛色은 호모(芦毛-말의 모색 중 하나. 몸의 전체 또는 일부에 白毛가 混生. 나이에 따라서 흰색으로 변해간다. 처음에는 갈색이 많고, 남은 털에 따라서 赤毛 등 여러 종류가 있다-여기서는 백마로 봄).
 
나폴레옹은 호모를 선호했다.
 
마렌고는 뛰어난 명마로 발이 빨랐고, 전장에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식전(朝) 운동으로 50마일을 달렸고
 식후에는 5시간 만에 80마일을 주파했었다고 한다.
 1805년의 아우스트리트 전투, 1806년의 예나 전투, 1809년의 바그람 전투, 1815년의 워털루 전투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패한 뒤에는 영국으로 끌려갔다.
 그 후 마렌고는 번식용 종두마가 되었지만 성공한 적은 없었고, 말로서는 고령이었던 38세에 죽었다.
 현재 그 골격이 영국의 국립육군박물관에 수장(收藏)되어 있다.

 * 그림 설명

 
題目은 잭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어가는 나폴레옹>
 
特記로는 左下에 나폴레옹 외에도 알프스를 넘으려했던 한니발과 칼 대제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리고 그림에 그려져 있는 말은 마렌고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로바를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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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1.  나폴레옹의 一 妻, 子, 愛人 <단, 나폴레옹 생존 시를 기준으로 함>




 <妻>

 
마리아 루이자(Maria Luisa, 1791년 12월 12일-1847년 12월 17일)
 신성로마황제 프란츠2세(오스트리아황제 프란츠1세)의 딸.
 프랑스황제 나폴레옹1세의 황후. 후에 파르마공국의 女公(재위:1814년-1847년).

 1. 이름

 
그녀의 이름은 각국어로 아래와 같다.

 
* 독일어-메리 루이제 폰 에스타라이히(Marie Louise von Osterreich)
 * 프랑스어-메리 루이즈 도트릿슈(Marie Louise d'Autriche)
 * 이탈리아어-마리아 루이자 다우스트리어(Maria Luisa d'Austria) 또는
                    마리아 루이쟈 다우스트리어(Maria Luigia d'Austria)

 여기서는 프랑스의 황후와 이탈리아 군주를 지냈던 것으로 해서
 주로 프랑스어명과 이탈리아어명으로 부르기로 함.



  2. 생애

  2-1 바라지 않았던 결혼

 
그녀는 프란츠2세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러자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나폴레옹은 침략자이며, 무섭고도 증오해야할 남자(자신들이 쇤브룬 궁전에서 두 번이나 쫓겨났던 것을 상기시키며)로 교육받았고, 그래서 그녀 또한 나폴레옹이라고 이름 붙인 인형을 학대하는 놀이를 하면서 자라났다.

 
그녀는 후에 나폴레옹이 조세핀과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음 왕비가 누가될지 진심으로 동정이 된다!>면서 <제발 그 사람이 내가 아니기 만을 바란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자신의 친했던 친구에게 보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계속해서 울었다고 한다.

 아무튼 1810년 4월 1일, 그녀는 루브르 궁전의 예배당에서 황제 나폴레옹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이후 나폴레옹의 친절함에 마음을 열었고, 그를 사랑하게까지 되었다.
 (나폴레옹은 그때 그녀를 결코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거의 필사적으로 매달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녀는 또 그 후에 자신의 친구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빈에서는 내가 불안에 떨면서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다릅니다. 나는 조금도 나폴레옹이 무섭지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나폴레옹이 나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최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라는 내용의 글까지 써서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교적이었고 또 언제나 많은 궁녀들과 담소를 나누었다던 조세핀과는 달리, 그때 그녀의 방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궁녀장이었던 몬테베로 부인과 의상계장이었던 류세이 부인 등, 극히 한정된 사람들일 뿐이었다고 하며, 그래서 그녀의 방은 언제나 조용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녀는 합스부르크家의 황녀라고 해도 조신하게 자랐었기 때문에, 세련됨 따위에는 특히 관심도 없었고, 옷은 또 조세핀과 비교해서 아주 조금밖에는 주문하지 않았으며, 거기다 보석 같은 것은 거의 주문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때문에 조세핀이 황후였을 때 큰 벌이를 했던 상인들에게서 그녀의 평판은 아주 나빴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녀는 나폴레옹의 여동생들과도 시비할만한 일은 전혀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2-2 嫡子出産

 그러던 중 1811년 3월 20일, 그녀는 로마 왕(나폴레옹2세)을 출산했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대단한 난산으로, 母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한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전해들은 나폴레옹은 그에 두말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구하라!>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나폴레옹은 자기 자식의 탄생을 매우 기뻐하며 귀여워했다지만
 그러나 정작 그녀 본인은 그 아이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일례로, 양육계의 몬테스큐 부인이 로마 왕이 눈을 뜨자마자 그녀에게 데려갔다지만, 그러나 그녀는 마치 깨진 물건에 손을 대듯 조심스럽게 안았다가는 곧바로 몬테스큐 부인에게 돌려줘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녀는 오후에는 꼭 로마 왕의 방으로 가는 것이 습관이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어르는 일도 없었으며, 또한 말을 거는 일도 없이 그저 미소만 지으면서 응시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지켜본 궁녀들은 <그녀에게는 모성애가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진심어린 걱정을 했을 정도로 그녀는 아이의 양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때문에 로마 왕이 제일로 따랐던 것은 당연 몬테스큐 부인으로, 그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최초로 했던 말이 <마만-큐> 라고 해서, 그것으로 그 부인을 감격시켰다고 한다.

 2-3 나폴레옹의 몰락과 파리탈출

 그러나 그 후인 1812년에 나폴레옹은 러시아원정에서 실패했고, 1813년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도 대패했다. 그리고 1814년에는 연합군들의 압박으로 인해서 나폴레옹은 점점 더 곤경에 처해갔다. 그러자 프랑스에서는 연합군들의 습격에 대비해서 그녀와 로마 왕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가 계속되었다.

 그러자 그때 사보리(警務大臣)는 <황후가 수도를 떠난다는 것은 곧 제국의 붕괴를 의미하고, 또 반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 두 사람이 파리에 남아 있어야한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의견에는 칸바세레스 대법관과 탈레랑이 동의함)

 그러나 그에 대해서 육군대신이었던 쿠라르크는 <만일의 일을 생각해서 그 두 사람을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장소에 피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이, 그녀는 한마디도 거들지 않고 논의를 지켜봤다)

 그러자 논의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한밤중이 되어서도 결론이 나오지 않자 마침내 투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와 로마 왕은 파리에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또 바로 그때였다. 그때까지는 침묵을 유지하며 투표까지 기권했던 나폴레옹의 형 죠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미리 나폴레옹으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성명문을 읽기 시작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행하게도 만일 싸움에 지는 일이 생겼을 경우, 황후와 로마 왕을 신속하게 람보이레(Rambouillet-파리근교)로 옮겨서 결코 적의 손에 건네주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다할 것!>



<람보이레 궁전>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루이즈는 단호히 반대했다.
그리고는 <파리를 내주는 것은 부르봉왕조 부활에 절호의 기회를 주는 일이 됩니다. 나는 이대로 파리에 머무는 일이야말로 황제 부재중에 섭정을 맡은 프랑스황후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했다.(그때 그녀가 그렇게 말을 했던 것은, 자신의 아버지였던 프란츠1세를 통해서 러시아황제 아렉산드르1세 및 프로이센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를 설득해서 로마 왕을 나폴레옹2세로서 즉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아무튼, 그러나 1814년 3월 29일 아침, 결국 그 두 사람은 10대의 대형마차와 함께 람보이레를 향해서 출발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그곳도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된 일행들은 그곳에서 더 먼 곳에 있었던 블로어 성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달려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성에 도착했던 것은 4월 2일도 한밤중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6일 후였던 4월 8일, 그녀는 나폴레옹이 퐁텐블로우 궁전에서 퇴위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퐁텐블로우 궁전이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마차를 준비시켜서 나폴레옹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도중에 란누 원수의 미망인이었던 몬테베로 부인은
 <나폴레옹이 지금 나라를 잃은 마당인데, 그래서 적어도 그녀와 로마 왕만이라도 향후의 일을 보증 받을 수 있도록 프란츠 황제에게 탄원할 것>을 루이즈에게 집요하게 조언했다.

 그 부인은 그때,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가게된 것에 대해서는 마음 아프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이미 궁정생활의 달콤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미 실각한 나폴레옹은 하루 빨리 잊어버리고 부르봉가에 기대서 살아갈 생각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였던지 루이즈는 오를레앙에 도착하자 곧 나폴레옹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다. <지금 당장은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선 저는 아버지를 만나려고 합니다. 그것은 엘바 섬에서의 당신의 대우개선과 우리의 아들을 위해서 토스카나대공국을 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반드시 토스카나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량한 아버지는 나의 눈물에 감동해서 반드시 당신의 운명도 바뀌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히 프란츠1세는 딸의 그런 호소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프란츠1세는 그때, 어치피 그녀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방편으로 나폴레옹에게 시집보냈던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때, 토스카나는 이미 원래의 통치자였던 토스카나대공 페르디난도3세(프란츠1세의 친아우, 메리 루이즈의 숙부)에게 반환했던 상태였고, 그녀를 위해서는 파르마공국의 통치권을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아무튼, 또 그로부터 며칠 후였던 4월 12일, 몬테베로 부인의 사주였다고 생각되던, 프란츠2세의 사자를 자칭했던 한 인물이 돌연 그녀의 처소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반강제적으로 그녀와 로마 왕을 납치해 가버렸다.
그러자 그날 밤, 그 소식을 듣고 모든 것에 절망했던 나폴레옹은 퐁텐블로우 궁전에서 스스로 독약을 마셨다.




<퇴위 후의 나폴레옹-퐁텐블로우에서>

 
 2-4 나이페르크 백작

 그 후, 메리 루이즈는 러시아병사들이 수비하던 람보이레 성에서 당분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곳에서 자신의 아버지 프란츠1세와 재회했고, 곧 이어서 오스트리아로 귀국했다.

 그때 프란츠1세는 여윈 그녀에게 <당분간 에익스 레 밴(Aix-les-bains.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온천지)의 온천에서 천천히 정양하고, 나중에 엘바 섬으로 가면된다>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무튼, 그녀는 그 말을 믿고 빈에 로마 왕을 남겨둔 채 혼자서 보양지로 떠났다.



                                                            <에익스 레 밴> 


 그런데 그곳으로 향했을 때, 멧테르니히가 그녀의 호위 겸 감시역으로 붙였던 나이페르크 백작이란 사람이 그녀와 동행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멧테르니히의 <그곳에 있으면서 필요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서 그녀가 나폴레옹과 다시 만나겠다는 희망을 버리게 할 것. 그러나 그녀가 그래도 고집을 부릴 경우 반드시 동행할 것>이라는 임무가 주어져있었던 상태였다.

 그러자 아무튼, 또 그에 대해서 그는 대답하기를 <10개월 안에 그녀의 연인이 되어서 결혼까지 하고 말겠다>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42세의 처자도 있었던 기혼남으로,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고, 그래서 나폴레옹을 한껏 증오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 후, 메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의 생일을 맞아 자신의 머리카락과 아들의 흉상을 보내기도 했고, 또 몇 통의 편지도 보냈다.
그리고 또 한편, 나폴레옹 역시도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데려올 날만 손꼽아서 기다렸다. (그런 이유로 나폴레옹은 자신의 아들이었던 아렉산들을 데리고 엘바 섬을 찾아왔던 애인 마리아 바레후스카조차 3일 만에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그곳에서 그녀는 곧 나이페르크 백작의 세련됨에 마음을 빼앗겼고, 그리고는 마침내 점점 나폴레옹을 잊어가고 있던 어느 가을날, 산책도중에 폭풍우를 피해서 들어갔던 소레이유 도레라는 간소한 숙소에서 나이페르크 백작과 동침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녀는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했다는 통지를 받자 하늘을 우러르며 <다시 유럽의 평화가 위기에 처했구나!>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로부터 또 3월 20일, 나폴레옹은 그녀에게 다시 돌아와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몇 통이나 보냈지만, 그러나 그녀는 일절 답장을 하지 않았고, 이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람 곁으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2-5 새로운 생활

 동년 6월 18일, 의회에서 그녀의 파르마통치가 결정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들과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나이페르크 백작과의 새로운 생활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로부터 또 3개월 후, 나폴레옹이 워털루 싸움에서 져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또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제 세상은 평안해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제 두 번 다시 평화를 흔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단지 사람들이 선의와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 사람을 대해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제가 그 사람과 관련되는 일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리고는 1816년 3월 7일, 그녀는 나이페르크 백작과 함께 파르마로 떠났다.

 그런 한편, 로마 왕은 감금과도 같은 외로운 생활을 보내면서 그의 어머니와의 첫 대면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1817년 5월 1일에 나이페르크 백작의 딸 아르베르티나를 비밀리에 출산하면서 로마 왕과의 약속을 간단하게 깨버렸다. 그러자 로마 왕은 몹시도 슬퍼했다.

 그랬던 그녀가 다시 로마 왕을 만났던 것은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나서 2년이나 지난 1818년 7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브라질 황제 페드로1세에게 시집을 갔던 여동생 마리아 레오포르디나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던 중, 평소 사이의 좋았던 그녀의 언니(마리아 루이자)에게 몇 통의 편지를 써서 보냈지만, 그러나 왠지 그녀와 프란츠1세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그때, 그녀에게서는 오직 나이페르크 백작과 그 아이들밖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끝까지 곤경에 처해있던 동생을 외면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레오포르디나는 자신이 합스부르크가의 희생자라고 하면서, 자신은 머지않아 남편의 폭력으로 죽게 될 것이라는 비통한 편지를 마지막으로 그로부터 머지않은 29세에 사망했다)
 


 


<마리아 레오포르디나> 

 
 아무튼, 로마 왕과 재회한 후 파르마로 다시 돌아왔던 그녀는 1819년 8월 9일에 나이페르크 백작과의 두 번째 아이 그리에모를 역시 비밀리에 출산했고, 그리하여 또 다시 로마 왕을 만나러 가기 위한 빈 行을 중지했다. 그리고
1821년 5월 5일, 나폴레옹이 사망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세비야의 이발사>를 보러갔던 오페라 자리에서 우연히 본 신문에서 알았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죽기 전에 유언으로 <그녀가 자신의 심장을 보관해줄 것>을 바랬지만, 그러나 그녀는 <나의 소원은 그 사람의 심장이 그 사람 묘 안에 매장되어지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대신으로 그의 데스마스크를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에는 그녀의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을 뿐이었다.

 아무튼,
1822년 8월 15일, 그녀는 나이페르크 백작과의 네 번째 아이(여아)를 출산했다. 그리고 1825년에는 다섯 번째 아이를 유산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빈에 있었던 로마 왕을 만나러 갔던 것은 단 한번뿐이었다. 그리고 9월 상순에 프란츠1세의 승낙을 얻어서 그녀는 나이페르크 백작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리고 그 즈음, 로마 왕은 라이히슈탓트公이 되어있었다.

 2-6 나이페르크 백작의 죽음과 그 후

 1
829년 2월 22일 나이페르크 백작이 사망했다. 그런데 그의 유언장에서 프란츠1세와 라이히슈탓트公에게도 비밀로 하고 있었던 아르베르티나와 그리에모의 일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난처해졌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나폴레옹 생존 중에 태어났던 아이들이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 아이들과 별거를 당하고 있던 중이었고, 그래서 매일같이 그녀는 그 아이들을 보러가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정작 그 아이들은 그녀를 마담(부인-사모님) 정도로만 부르는 것이 허락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러자 그 일을 알게 된 프란츠1세는 아연실색했지만, 그러나 곧 <신에게는 지울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기 때문에 슬픈 일이 되었지만, 그러나 나는 너의 아버지다. 그러므로 부모의 마음으로 그 일을 허락한다>라고 그녀에게 말을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후의 1832년 7월 21일, 라이히슈탓트公의 교육을 맡았던 디트리히 슈타인으로부터 온 여러 장의 편지에 못 이겨서 겨우 빈을 찾았던 그녀는, 그러나 그곳에서 병상의 여윈 아들의 얼굴을 보고서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동년 7월 22일, 라이히슈탓트公도 사망했다. 그러자 그 다음날, 그녀는 나폴레옹의 어머니였던 마리아 레티치아에게 손자의 죽음을 편지로 알렸다.

 나이페르크 백작 사후, 그녀에게는 파르마통치의 보좌역으로 베르크라인, 마샬 등이 연이어서 왔지만, 그러나 그들은 인기가 없다거나 파르마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 등으로 모두 해임되었다.

 그 후, 7월 혁명 때까지 샤를10세의 시중을 들었으며, 프랑스에 살고 있었던 샤를 루네 드 본벨이 왔다.
 그는 온화한 인물로, 점차 그녀와 가깝게 되어서 1834년 2월 17일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리고
1847년 12월 17일, 그녀도 사망했다.
 그리고 참고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大叔母에 해당되었다.




<마리아 루이자>

 

 


 <子>

 나폴레옹2세
 나폴레옹 프랑수와 샤를 조셉 또는 프랑수와 보나파르트
 Napoleon Francois Charles Joseph Bonaparte

 1811년 3월 20일-1832년 7월 22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들. 로마 왕, 라이히슈탓트公.




 1. 고독한 유년기

 1811년 3월 20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합스부르크家의 마리아 루이제(메리 루이즈) 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자마자 바로 로마 왕이 되었다.

 1814년 4월 6일 나폴레옹이 퐁텐블로우 궁전에서 퇴위하자 그는 어머니 마리아 루이제와 함께 5월 21일 오스트리아로 귀국했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나폴레옹 잔당들의 유괴를 염려했던 멧테르니히에 의해서 거의 감금과도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16년 3월 7일, 루이제가 파르마로 떠나버리자 그의 생활은 일변해서, 프랑스어를 하거나 프랑스어 책을 읽는 것이 금지되었고, 독일어 공부만 강제되었다.

 1817년 5월 1일, 루이제는 나이페르크 백쟉의 딸 아르베르티누를 출산하느라 그와의 약속을 저버렸고, 그러자 그로인해 그는 몹시 슬퍼했다.


 그 후 2년이 지난 1818년 7월에 모자상봉이 한차례 있었지만, 그러나 다시 1819년 8월 9일 루이제는 아들의 출산으로 인해서 그와의 약속을 또 깼다.

 그 후, 러시아황제 아렉산드르1세가 그의 허락을 받고 그를 잠시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때 그는
 <아주 준수하고도 영리함이 넘치는 매우 호감이 가는 소년이다>라고 그에 대해서 평을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1821년 5월 1일 나폴레옹이 사망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그는 의자에 몸을 내던지며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1822년의 8월 15일, 루이제는 다시 나이페르크 백작의 딸을 출산했고
 9월 상순에는 정식으로 그와 결혼했다.

 2. 아버지에 대한 동경

 그의 어머니 루이즈가 나이페르크 백작과 결혼했을 무렵, 그는 라이히슈탓트공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歷史에 열중했고, 프랑스어에 대한 애착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독일어로 행해졌던 나폴레옹에 대한 온갖 중상모략을 전부 접하면서 자라왔었기 때문에, 그래서 친부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프랑스어를 밤낮없이 열심히 배웠다.

 그는 또 궁전 내의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프랑스어 책을 탐독했고, 특히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라스 카스가 발표했던 <세인트헬레나 섬의 기록>과 몬트론 백작의 <회상록>을 감명 깊게 읽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보통 오스트리아인들이 말하는 대로 <유럽의 평화를 어지럽힌 죄인>이 아니라, 그에 더해서 위대한 영웅임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그 후로 나폴레옹에 관한 일과 인간상을 더욱 깊게 존경하게 되었으며, 또한 강하게 동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결핵에 걸렸던 것도 바로 그 즈음이었다. 당시 그는 그런 자신의 아버지에게 더 다가가고 싶다는 욕망으로 耐寒훈련 등 맹렬한 군사훈련에
힘썼고, 그런데 그런 일이 결국 그의 병을 더 악화시켰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나폴레옹 생존 중에 비밀스럽게 아르베르티누와 기욤을 출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영리함을 발휘해서 그런 사실은 감춘 채, 그때부터는 더욱 상냥한 내용의 편지를 써서 그녀에게 보냈다.(그 나마의 관심조차도 유지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는 이미 그것으로 인해서 심한 충격을 받았던 상태였고
 더 나아가서 그런 어머니의 경솔함에 대해서 혐오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증거로써 그는 후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라는 글까지 남겼다.

 아무튼, 그러던 중 그는 또 프로켓슈라는 오스트리아인 청년을 한명 만나게 되었다. 그는 <워털루 전기>라는 책을 읽은 후 나폴레옹을 철저하게 옹호하고 있었던 그런 인물이었는데, 그러자 라이히슈탓트는 그에 감격했고, 두 사람은 곧 친구가 되었다.

 그 후, 1832년 7월 21일에 프로켓슈는 로마에 있던 라이히슈탓트공의 조모 마리아 레티치아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때 레티치아에게 <라이히슈탓트공은 나폴레옹에게는 잘 어울리는 아들이며, 현재 아주 훌륭하게 성장해있다>라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들은 레티치아는 몹시도 기뻐하면서
<그 아이에게 아버지의 의지와 일들을 모두 존중하라고 전해주세요. 언젠가는 그 아이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도 프랑스의 옥좌에 오르게 되겠지요...>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묘하게도 同日, 라이히슈탓트공은 병상에 눕고야 말았다.
 그러자 그는 
겨우 꺼져가던 정신을 일깨워서 돌연 이렇게 소리쳤다.

 
<어서 말을 준비하라! 내가 먼저 아버지의 선봉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날인 1832년 7월 22일, 2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 후, 그의 유해는 합스부르크家의 묘지인 카프트네 교회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그 한참 후인 나치스 독일 점령하의 1940년 12월 15일
 나폴레옹의 숭배자 중 한사람이었던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서
 그는 오텔 데 잔바릿드(폐병원)의 지하 묘소에 다시 매장되었다.

 


<아돌프 히틀러>
 

 
 3. 에피소드

 그는 1815년 나폴레옹 실각 시에 나폴레옹과 후셰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어졌고
 나폴레옹의 남동생 류시앙에 의해서 의회上院에 채택되었다.




<후세>


 그것으로 해서 그의(일시적이었지만) 2세 즉위는 공식적인 것이 되었다.
 (6월 22일~7월 7일까지 명목상의 프랑스 황제가 됨)

 그리고 또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와 헤어지게 되어 가정적으로는 불행했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외가였던 합스부르크家 사람들은 그에게 비교적 우호적으로 대했다.
 (나폴레옹에게 적대적으로 대했던 것에 비해서는)

 그런 예의 하나로 조부였던 프란츠1세는 그를 위해서 오스트리아군의 군복을 주었고
 자신의 집무 도중에도 곁에서 노는 것을 허락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소피와 장남 죠셉>

 
 그리고 또 숙모 뻘이었던 소(조)피(sophie)와도 사이가 좋았었고, 그것은 또 그의 사촌형제였던 마크시미리안이 태어났을 때는 <그 두 사람 사이에 불륜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였다고 한다.(그러나 사실에 대해서는 현재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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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국왕 막시미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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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1.  나폴레옹의 一 妻, 子, 愛人 <단, 나폴레옹 생존 시를 기준으로 함>



 <妻>

 
죠제피누 드 보아루네(Josephine de Beauharnais, 1763년 6월 23일-1814년 5월 29일)
 
프랑스 황후.
 나폴레옹의 아내.              

          

 <생애>

 프랑스령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섬에서 출생했다. 결혼 전의 정식명은 메리 죠제프 로즈 타시 드 라 파쥬리(Marie Josephe Rose Tascher de la Pagerie). 유복한 귀족의 딸로 exotic(이국적인)한 미모의 소유자였지만, 대단한 낭비벽도 있었다.

 
1779년 아렉산들 드 보아루네 자작과 결혼했고, 장남 우제누(1781년-1824년)와 장녀 오르탄스(1783년-1837년)를 낳고 가정을 이루었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부부사이가 나빠서 1783년에 이혼했다.

 그 후, 보아루네 자작은 프랑스 혁명 중 1794년 7월 23일에 기요틴으로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혼 후 마르티니크 섬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섬에서의 폭동에 불안을 느끼고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러나 곧 카룸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 후, 로베스피에르의 처형으로 8월 3일에 석방되었다.
 그 후, 총재정부의 폴 바라스의 애인이 되었고, 이어서 연하였던 나폴레옹과 1796년에 결혼했다. 그러자 그 결혼에 대해서 우제누는 반대했고, 오르탄스는 찬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녀는 나폴레옹이 풍류(사교)도 모르는 촌스러운 남자라고 생각하고는 차례로 애인을 만들어가면서 수도 없이 많은 남자들과 불륜을 저질렀다. 
그러자 나폴레옹의 어머니나 그 형제자매들과의 사이도 나빠졌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 중에 그녀가 미남이었던 기병대위 이포릿트 샤를과 불륜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귀국 후에 이혼할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우제누와 오르탄스의 눈물어린 호소에 그 생각을 접게 된다. 그러자 그녀는 그 즈음부터 나폴레옹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지만,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서 나폴레옹은 그때부터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다른 여성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후, 나폴레옹은 그녀와 헤어졌고, 그녀는 파리교외의 마르메존城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녀는 장미를 대단히 좋아했으며, 250종류의 장미를 마르메존 성의 뜰에다 심었다고 한다.


 



 <조세핀의 子>

 1. 우제누 드 보아루네(Eugene de Beauharnais, 1781년 9월 3일-1824년 2월 21일)

 죠제피누 드 보아루네의 아들.
 여동생은 오르탄스 드 보아루네.
 
나폴레옹1세의 양자로 이탈리아副王.
 나중에 로이히텐베르크公.






 <생애>

 우제누는 1781년 9월 3일 아렉산들 드 보아루네 자작과 죠제피누(조세핀)의 장남으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1783년에는 여동생 오르탄스가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렉산들은 죠제피누와 결혼하기 전부터 연상의 미망인이었던 마담 론프레라는 여성과 사귀면서 사생아를 낳은 등, 대단한 호색한이었다. 
게다가 교양부족에다 아직 세련되지 않았던 조세핀을 업신여겼다.

 그 후 아렉산들은 파리의 저택에다 조세핀을 방치하고 혼자서 여행만 다녔다.
 그러다가 그의 애인이었던 론프레부인과 마르티니크 섬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조세핀과 그는 마침내 1785년 봄에 이혼했다. 그 재판은 조세핀이 승소했고, 자식들은 모두 조세핀이 데려갔다.

 1788년 여름 조세핀은 오르탄스를 데리고 마르티니크 섬의 친가로 돌아갔다.
 그러나 1790년 가을, 흑인노예들의 반란을 피해서 파리로 다시 돌아갔다. 그 사이 아렉산들은 자유주의자로서 활약했으며, 프랑스혁명에도 동조했다. 그 결과 그는 의원으로서 삼부회에 선출되었고, 의장직까지 맡았다. 그러나 그는 신헌법에 의해서 의석을 잃었고 다시 군인으로 복귀했다. 1793년의 봄, 그는 라인방면 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자 영국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카룸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조세핀도 함께 투옥되었다.

 1794년 7월 24일 아렉산들은 처형되었지만, 그러나 그 3일 후, 로베스피에르도 처형됨으로 해서 조세핀은 8월 3일에 석방되었다.
 그리하여 조세핀은 그동안 헤어져있던 우제누를 데려와서 그에게는 목수 견습을 시켰고, 오르탄스에게는 재봉 일을 시켰다.

 그 후, 우제누는 방데미엘 반란(1795년)을 진압하고 일약 스타가 되어있었던 나폴레옹의 허가를 받아서 그의 아버지의 기념품이었던 사벨(洋劍-指揮刀)을 돌려받기 위해서 나폴레옹을 방문했다.



<19세기 프랑스 장교용 사벨>


 그때, 그는 비록 소행은 나빴던 아버지였지만, 그러나 나름대로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었고, 또한 미화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 소년의 호소에 감동해서 그 검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후에 조세핀은 또 그 답례로써 나폴레옹을 찾아갔고, 그러자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두 사람은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 우제누는 조세핀이 자신을 이용해서 나폴레옹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하고는 그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뜻밖으로 자신이 중매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해서)

 그러나 그는 그 이후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이 되었다.
 그리고 1798년 5월 4일에는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에까지 참전했다. 하지만 그 원정 중에 조세핀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폴레옹이 얼마나 고심하고 괴로워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주었던 나폴레옹에게 감동하여 그런 사실들과 함께 제발 자중해달라는 간곡한 호소를 담은 편지를 조세핀에게 보냈다고 한다.(하지만 그 편지는 가던 도중에 영국정부에 압수되어서 조세핀에게는 전달되지 못했다)

 그 후, 그는 계속해서 나폴레옹에게 눈물로써 선처를 호소했고, 이어서 나폴레옹도 그에 감동해서 이혼결정을 접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많은 싸움에서 훌륭한 전공을 세우면서 순조롭게 승진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유능했을 뿐만 아니라 성실한 인품으로 나폴레옹의 신뢰를 쌓아갔다. 그리하여 1806년, 나폴레옹은 그의 능력을 인정해서 이탈리아의 부왕에 명했다. 그리고 동년, 그는 바이에른 왕 막시미리안1세의 딸이었던 아우그스테 아마-리에 폰 바이에른과 결혼했다.




<막스 1>


 (그러나 그것은 아우그스테의 결혼상대가 이미 정해져있었던 상태에서 나폴레옹이 강제적으로 성사시켰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 후, 그는 그녀와 사이가 좋아서 7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 자식들은 다음과 같다.

 *
죠제피누 막시미리아네 우제니 나포레오네(스웨덴국왕 오스칼1세의 妃)






 * 우제니 오르탄스 아우그스테
 * 오규스트 샤를 우제누 나폴레옹(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의 최초의 남편)






 * 아메리 오규스트 우제니 나포레오누(브라질 황제 페드로 1세의 후처)








 * 테오드란드 루이즈 우제니 오규스트 나포레오누
 *
카로리누 크로티르드
 * 막
시미리안 죠제프 우제누 오규스트 나폴레옹
   (러시아 황제 니코라이 1세의 딸이었던 니코라에브나의 남편)




 


 그러나 야심만 강했던 나폴레옹의 형제들은 그를 그의 어머니와 같이 적대시했다.
 그러자 1809년 우제누는 조세핀에게 나폴레옹의 이혼요구에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그 후,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뮤라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느라 자신의 아내였던 카로니누와 함께 적국이었던 영국, 오스트리아 등과 내통해서 우제누의 진로를 방해했기 때문에, 결국 그는 그때 나폴레옹을 구원하러 가지 못했다.

 1814년 4월, 우제누는 장인이었던 막시미리안1세에게 귀순을 권유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계속해서 싸웠다. 그러나 4월 11일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막시미리안1세의 의향을 받아들여서 더 이상 나폴레옹에게 협력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그 후, 우제누에게 (막시미리안1세에 의해서) 로이히텐베르크公의 지위가 주어졌다.
 1824년, 우제누는 뮌헨에서 사망했다.
 덧붙여서, 1831년에 벨기에의 국왕 후보로서 그의 차남 막시미리안의 이름이 올랐지만
 그러나 영국의 압력에 의해서 작센-코브루크-고타家의 레오포르트(레오폴도1세)에게 패했다.




<레오포르트 1>



 2. <女>

 오르탄스 드 보아루네(Hortense de Beauharnais) 1783년 4월 10일-1837년 10월 5일
 <루이의 妻>-앞에서 설명되었으므로 생략함.

 
나폴레옹1세의 황후 조세핀의 딸.
 나폴레옹의 義理의 딸.
 나폴레옹3세의 어머니.
 오빠는 나폴레옹의 義理의 아들 우제누 드 보아루네.




 3. <養女>

 조세핀의 姻戚
 
스테파니 드 보아루네(Stephanie Louise Adrienne de Beauharnais) 1789년 8월 28일-1860년 1월 29일
 바덴大公 칼의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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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애

 제2대 로제-바리트伯 크러드 드 보아루네와 아내 크러드 프랑소와즈의 장녀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조세핀의 첫 남편이었던 아렉산들이 그의 아버지의 사촌동생이었다.
 그녀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후 조세핀의 힘을 입어 궁전으로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살지는 않았고, 얼마 후 나폴레옹은 바덴대공 칼 프리드리히와의 동맹이 필요하게 되자 그녀를 양녀로 삼아서 <프랑스 황녀>란 칭호를 하사했다.
 그리고는 바덴대공의 손자였던 칼 루트비히와 1806년 4월에 정략 결혼시켰다.
 하지만 그 결혼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루트비히는 결혼 후 거의 독신으로 생활했다.
 그런데다 또 그 루트비히는 칼스루에에다 집을 지어서 그녀를 그곳에서 살도록 하게도 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개입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그러나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大公이 나섰지만(여름 공용별장을 가지도록 권유했다), 그것도 무산되었다.
 (이번엔 그녀가 반대했다)
 그 후, 대공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해서 두 사람은 겨우 화해했고
 자손의 생산을 위해서 노력했다.
 1811년 6월, 칼 루트비히는 대공位를 승계했다.
 1818년 칼이 죽자 그녀는 재혼하지 않았고 3명의 딸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쏟았다.
 그녀의 만하임 저택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이는 살롱으로 유명했다.
 그녀는 1860년 니스에서 사망했다.

 2.
의문의 아이

 
뉘른베르크에서 발견되었고, 暗室에서 숨겨진 채 자랐다는 수수께끼의 아이
 카스파 하우저(Kaspar Hauser)는 그녀의 아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져왔다.




 2002년 뮨스타 대학의 의학연구소는 카스파의 頭髮과 체세포를 채취해서(유품 중의 모자와 바지, 개인용품 등으로부터, 전부 다른 루트로) 미리 제공된 6개의 샘플과 비교한 결과 유전자가 전부 합치했을 뿐만 아니라 스테파니의 자손 여성들과도 95% 정도 일치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바덴 대공家는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그러나 그 대공 가와 관계가 있는 바덴-뷰르텐부르크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카스파가 바덴 대공가의 일원임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子>

 * 루이제 아마-리에(1811년-1854년)
 
* 바사公 구스타프(스웨덴의 廢王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왕태자)의 왕비.
 
* 남아(1812년 사산)
 
* 요제피네 후리데리케(1813년-1900년) 컬 안톤의 妃

                        

 

 * 아렉산들(1816년 요절)
 * 메리 아마-리에(1818년-1888년) 제11대 해밀턴公 윌리엄 더글라스=해밀턴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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