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妻>
마리아 루이자(Maria Luisa, 1791년 12월 12일-1847년 12월 17일)
신성로마황제 프란츠2세(오스트리아황제 프란츠1세)의 딸.
프랑스황제 나폴레옹1세의 황후. 후에 파르마공국의 女公(재위:1814년-1847년).
1. 이름
그녀의 이름은 각국어로 아래와 같다.
* 독일어-메리 루이제 폰 에스타라이히(Marie Louise von Osterreich)
* 프랑스어-메리 루이즈 도트릿슈(Marie Louise d'Autriche)
* 이탈리아어-마리아 루이자 다우스트리어(Maria Luisa d'Austria) 또는
마리아 루이쟈 다우스트리어(Maria Luigia d'Austria)
여기서는 프랑스의 황후와 이탈리아 군주를 지냈던 것으로 해서
주로 프랑스어명과 이탈리아어명으로 부르기로 함.
2. 생애
2-1 바라지 않았던 결혼
그녀는 프란츠2세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러자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나폴레옹은 침략자이며, 무섭고도 증오해야할 남자(자신들이 쇤브룬 궁전에서 두 번이나 쫓겨났던 것을 상기시키며)로 교육받았고, 그래서 그녀 또한 나폴레옹이라고 이름 붙인 인형을 학대하는 놀이를 하면서 자라났다.
그녀는 후에 나폴레옹이 조세핀과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음 왕비가 누가될지 진심으로 동정이 된다!>면서 <제발 그 사람이 내가 아니기 만을 바란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자신의 친했던 친구에게 보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계속해서 울었다고 한다.
아무튼 1810년 4월 1일, 그녀는 루브르 궁전의 예배당에서 황제 나폴레옹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이후 나폴레옹의 친절함에 마음을 열었고, 그를 사랑하게까지 되었다.
(나폴레옹은 그때 그녀를 결코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거의 필사적으로 매달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녀는 또 그 후에 자신의 친구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빈에서는 내가 불안에 떨면서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다릅니다. 나는 조금도 나폴레옹이 무섭지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나폴레옹이 나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최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라는 내용의 글까지 써서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교적이었고 또 언제나 많은 궁녀들과 담소를 나누었다던 조세핀과는 달리, 그때 그녀의 방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궁녀장이었던 몬테베로 부인과 의상계장이었던 류세이 부인 등, 극히 한정된 사람들일 뿐이었다고 하며, 그래서 그녀의 방은 언제나 조용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녀는 합스부르크家의 황녀라고 해도 조신하게 자랐었기 때문에, 세련됨 따위에는 특히 관심도 없었고, 옷은 또 조세핀과 비교해서 아주 조금밖에는 주문하지 않았으며, 거기다 보석 같은 것은 거의 주문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때문에 조세핀이 황후였을 때 큰 벌이를 했던 상인들에게서 그녀의 평판은 아주 나빴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녀는 나폴레옹의 여동생들과도 시비할만한 일은 전혀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2-2 嫡子出産
그러던 중 1811년 3월 20일, 그녀는 로마 왕(나폴레옹2세)을 출산했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대단한 난산으로, 母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한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전해들은 나폴레옹은 그에 두말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구하라!>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나폴레옹은 자기 자식의 탄생을 매우 기뻐하며 귀여워했다지만
그러나 정작 그녀 본인은 그 아이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일례로, 양육계의 몬테스큐 부인이 로마 왕이 눈을 뜨자마자 그녀에게 데려갔다지만, 그러나 그녀는 마치 깨진 물건에 손을 대듯 조심스럽게 안았다가는 곧바로 몬테스큐 부인에게 돌려줘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녀는 오후에는 꼭 로마 왕의 방으로 가는 것이 습관이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어르는 일도 없었으며, 또한 말을 거는 일도 없이 그저 미소만 지으면서 응시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지켜본 궁녀들은 <그녀에게는 모성애가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진심어린 걱정을 했을 정도로 그녀는 아이의 양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때문에 로마 왕이 제일로 따랐던 것은 당연 몬테스큐 부인으로, 그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최초로 했던 말이 <마만-큐> 라고 해서, 그것으로 그 부인을 감격시켰다고 한다.
2-3 나폴레옹의 몰락과 파리탈출
그러나 그 후인 1812년에 나폴레옹은 러시아원정에서 실패했고, 1813년의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도 대패했다. 그리고 1814년에는 연합군들의 압박으로 인해서 나폴레옹은 점점 더 곤경에 처해갔다. 그러자 프랑스에서는 연합군들의 습격에 대비해서 그녀와 로마 왕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가 계속되었다.
그러자 그때 사보리(警務大臣)는 <황후가 수도를 떠난다는 것은 곧 제국의 붕괴를 의미하고, 또 반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 두 사람이 파리에 남아 있어야한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의견에는 칸바세레스 대법관과 탈레랑이 동의함)
그러나 그에 대해서 육군대신이었던 쿠라르크는 <만일의 일을 생각해서 그 두 사람을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장소에 피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이, 그녀는 한마디도 거들지 않고 논의를 지켜봤다)
그러자 논의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한밤중이 되어서도 결론이 나오지 않자 마침내 투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와 로마 왕은 파리에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또 바로 그때였다. 그때까지는 침묵을 유지하며 투표까지 기권했던 나폴레옹의 형 죠제프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미리 나폴레옹으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성명문을 읽기 시작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행하게도 만일 싸움에 지는 일이 생겼을 경우, 황후와 로마 왕을 신속하게 람보이레(Rambouillet-파리근교)로 옮겨서 결코 적의 손에 건네주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다할 것!>
<람보이레 궁전>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루이즈는 단호히 반대했다. 그리고는 <파리를 내주는 것은 부르봉왕조 부활에 절호의 기회를 주는 일이 됩니다. 나는 이대로 파리에 머무는 일이야말로 황제 부재중에 섭정을 맡은 프랑스황후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했다.(그때 그녀가 그렇게 말을 했던 것은, 자신의 아버지였던 프란츠1세를 통해서 러시아황제 아렉산드르1세 및 프로이센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를 설득해서 로마 왕을 나폴레옹2세로서 즉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아무튼, 그러나 1814년 3월 29일 아침, 결국 그 두 사람은 10대의 대형마차와 함께 람보이레를 향해서 출발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그곳도 안전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된 일행들은 그곳에서 더 먼 곳에 있었던 블로어 성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달려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성에 도착했던 것은 4월 2일도 한밤중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6일 후였던 4월 8일, 그녀는 나폴레옹이 퐁텐블로우 궁전에서 퇴위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퐁텐블로우 궁전이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마차를 준비시켜서 나폴레옹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도중에 란누 원수의 미망인이었던 몬테베로 부인은
<나폴레옹이 지금 나라를 잃은 마당인데, 그래서 적어도 그녀와 로마 왕만이라도 향후의 일을 보증 받을 수 있도록 프란츠 황제에게 탄원할 것>을 루이즈에게 집요하게 조언했다.
그 부인은 그때,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가게된 것에 대해서는 마음 아프게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이미 궁정생활의 달콤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미 실각한 나폴레옹은 하루 빨리 잊어버리고 부르봉가에 기대서 살아갈 생각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였던지 루이즈는 오를레앙에 도착하자 곧 나폴레옹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다. <지금 당장은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선 저는 아버지를 만나려고 합니다. 그것은 엘바 섬에서의 당신의 대우개선과 우리의 아들을 위해서 토스카나대공국을 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반드시 토스카나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량한 아버지는 나의 눈물에 감동해서 반드시 당신의 운명도 바뀌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히 프란츠1세는 딸의 그런 호소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프란츠1세는 그때, 어치피 그녀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방편으로 나폴레옹에게 시집보냈던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때, 토스카나는 이미 원래의 통치자였던 토스카나대공 페르디난도3세(프란츠1세의 친아우, 메리 루이즈의 숙부)에게 반환했던 상태였고, 그녀를 위해서는 파르마공국의 통치권을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아무튼, 또 그로부터 며칠 후였던 4월 12일, 몬테베로 부인의 사주였다고 생각되던, 프란츠2세의 사자를 자칭했던 한 인물이 돌연 그녀의 처소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반강제적으로 그녀와 로마 왕을 납치해 가버렸다. 그러자 그날 밤, 그 소식을 듣고 모든 것에 절망했던 나폴레옹은 퐁텐블로우 궁전에서 스스로 독약을 마셨다.
<퇴위 후의 나폴레옹-퐁텐블로우에서>
2-4 나이페르크 백작
그 후, 메리 루이즈는 러시아병사들이 수비하던 람보이레 성에서 당분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곳에서 자신의 아버지 프란츠1세와 재회했고, 곧 이어서 오스트리아로 귀국했다.
그때 프란츠1세는 여윈 그녀에게 <당분간 에익스 레 밴(Aix-les-bains.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온천지)의 온천에서 천천히 정양하고, 나중에 엘바 섬으로 가면된다>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무튼, 그녀는 그 말을 믿고 빈에 로마 왕을 남겨둔 채 혼자서 보양지로 떠났다.
<에익스 레 밴>
그런데 그곳으로 향했을 때, 멧테르니히가 그녀의 호위 겸 감시역으로 붙였던 나이페르크 백작이란 사람이 그녀와 동행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멧테르니히의 <그곳에 있으면서 필요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서 그녀가 나폴레옹과 다시 만나겠다는 희망을 버리게 할 것. 그러나 그녀가 그래도 고집을 부릴 경우 반드시 동행할 것>이라는 임무가 주어져있었던 상태였다.
그러자 아무튼, 또 그에 대해서 그는 대답하기를 <10개월 안에 그녀의 연인이 되어서 결혼까지 하고 말겠다>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42세의 처자도 있었던 기혼남으로,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고, 그래서 나폴레옹을 한껏 증오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 후, 메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의 생일을 맞아 자신의 머리카락과 아들의 흉상을 보내기도 했고, 또 몇 통의 편지도 보냈다. 그리고 또 한편, 나폴레옹 역시도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데려올 날만 손꼽아서 기다렸다. (그런 이유로 나폴레옹은 자신의 아들이었던 아렉산들을 데리고 엘바 섬을 찾아왔던 애인 마리아 바레후스카조차 3일 만에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그곳에서 그녀는 곧 나이페르크 백작의 세련됨에 마음을 빼앗겼고, 그리고는 마침내 점점 나폴레옹을 잊어가고 있던 어느 가을날, 산책도중에 폭풍우를 피해서 들어갔던 소레이유 도레라는 간소한 숙소에서 나이페르크 백작과 동침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녀는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했다는 통지를 받자 하늘을 우러르며 <다시 유럽의 평화가 위기에 처했구나!>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로부터 또 3월 20일, 나폴레옹은 그녀에게 다시 돌아와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몇 통이나 보냈지만, 그러나 그녀는 일절 답장을 하지 않았고, 이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람 곁으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2-5 새로운 생활
동년 6월 18일, 의회에서 그녀의 파르마통치가 결정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들과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나이페르크 백작과의 새로운 생활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로부터 또 3개월 후, 나폴레옹이 워털루 싸움에서 져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또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제 세상은 평안해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제 두 번 다시 평화를 흔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단지 사람들이 선의와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 사람을 대해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제가 그 사람과 관련되는 일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리고는 1816년 3월 7일, 그녀는 나이페르크 백작과 함께 파르마로 떠났다.
그런 한편, 로마 왕은 감금과도 같은 외로운 생활을 보내면서 그의 어머니와의 첫 대면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1817년 5월 1일에 나이페르크 백작의 딸 아르베르티나를 비밀리에 출산하면서 로마 왕과의 약속을 간단하게 깨버렸다. 그러자 로마 왕은 몹시도 슬퍼했다.
그랬던 그녀가 다시 로마 왕을 만났던 것은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나서 2년이나 지난 1818년 7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또 그 즈음, 브라질 황제 페드로1세에게 시집을 갔던 여동생 마리아 레오포르디나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던 중, 평소 사이의 좋았던 그녀의 언니(마리아 루이자)에게 몇 통의 편지를 써서 보냈지만, 그러나 왠지 그녀와 프란츠1세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그때, 그녀에게서는 오직 나이페르크 백작과 그 아이들밖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끝까지 곤경에 처해있던 동생을 외면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레오포르디나는 자신이 합스부르크가의 희생자라고 하면서, 자신은 머지않아 남편의 폭력으로 죽게 될 것이라는 비통한 편지를 마지막으로 그로부터 머지않은 29세에 사망했다)
<마리아 레오포르디나>
아무튼, 로마 왕과 재회한 후 파르마로 다시 돌아왔던 그녀는 1819년 8월 9일에 나이페르크 백작과의 두 번째 아이 그리에모를 역시 비밀리에 출산했고, 그리하여 또 다시 로마 왕을 만나러 가기 위한 빈 行을 중지했다. 그리고 1821년 5월 5일, 나폴레옹이 사망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세비야의 이발사>를 보러갔던 오페라 자리에서 우연히 본 신문에서 알았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죽기 전에 유언으로 <그녀가 자신의 심장을 보관해줄 것>을 바랬지만, 그러나 그녀는 <나의 소원은 그 사람의 심장이 그 사람 묘 안에 매장되어지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대신으로 그의 데스마스크를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에는 그녀의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을 뿐이었다.
아무튼, 1822년 8월 15일, 그녀는 나이페르크 백작과의 네 번째 아이(여아)를 출산했다. 그리고 1825년에는 다섯 번째 아이를 유산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빈에 있었던 로마 왕을 만나러 갔던 것은 단 한번뿐이었다. 그리고 9월 상순에 프란츠1세의 승낙을 얻어서 그녀는 나이페르크 백작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리고 그 즈음, 로마 왕은 라이히슈탓트公이 되어있었다.
2-6 나이페르크 백작의 죽음과 그 후
1829년 2월 22일 나이페르크 백작이 사망했다. 그런데 그의 유언장에서 프란츠1세와 라이히슈탓트公에게도 비밀로 하고 있었던 아르베르티나와 그리에모의 일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난처해졌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나폴레옹 생존 중에 태어났던 아이들이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 아이들과 별거를 당하고 있던 중이었고, 그래서 매일같이 그녀는 그 아이들을 보러가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정작 그 아이들은 그녀를 마담(부인-사모님) 정도로만 부르는 것이 허락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러자 그 일을 알게 된 프란츠1세는 아연실색했지만, 그러나 곧 <신에게는 지울 수 없는 죄를 짓고 말았기 때문에 슬픈 일이 되었지만, 그러나 나는 너의 아버지다. 그러므로 부모의 마음으로 그 일을 허락한다>라고 그녀에게 말을 했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후의 1832년 7월 21일, 라이히슈탓트公의 교육을 맡았던 디트리히 슈타인으로부터 온 여러 장의 편지에 못 이겨서 겨우 빈을 찾았던 그녀는, 그러나 그곳에서 병상의 여윈 아들의 얼굴을 보고서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동년 7월 22일, 라이히슈탓트公도 사망했다. 그러자 그 다음날, 그녀는 나폴레옹의 어머니였던 마리아 레티치아에게 손자의 죽음을 편지로 알렸다.
나이페르크 백작 사후, 그녀에게는 파르마통치의 보좌역으로 베르크라인, 마샬 등이 연이어서 왔지만, 그러나 그들은 인기가 없다거나 파르마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 등으로 모두 해임되었다.
그 후, 7월 혁명 때까지 샤를10세의 시중을 들었으며, 프랑스에 살고 있었던 샤를 루네 드 본벨이 왔다.
그는 온화한 인물로, 점차 그녀와 가깝게 되어서 1834년 2월 17일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리고 1847년 12월 17일, 그녀도 사망했다.
그리고 참고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大叔母에 해당되었다.
<마리아 루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