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우키시마마루사건>도 올려드리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유익한 시간 되길 기대합니다...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은,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에 발생했던 사건이었고,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서 귀국(歸國)을 하던 우리 동포들을 태우고 부산(釜山)으로 향하던 도중에 발생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설(說)이 분분하며, 일본정부도 그에 대한 해명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 진실과 멀어져 있는 것이 또 바로 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또, 그 중에는 본인처럼, 그런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거나 또는 그런 사건이 있었던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2012년 8월 24일), 그 사건이 발생했던 날을 맞이해서, 다시 그 사건의 대강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니, 지금도 그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고 계시는 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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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사건(事件)은, 일본(日本)의 패망(敗亡) 직후였던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에, 마이즈루(舞鶴)항구, 교토 부(京都府) 마이즈루시(舞鶴市) 사바카(佐波賀) 앞바다 약 300m 지점에서, 일본해군특설운송함(日本海軍特設運送艦) 우키시마마루(浮島丸-4,730톤, 乗員 255名)가, 3,725명의 한국인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태운 채로, 갑자기 원인불명상태로 침몰했던 사건이었다.

 참고: 그에 대해서 일본 측의 주장은, 미군(美軍)이 부설(敷設)했던 2천 파운드(pound-lb)의 음향식기계수뢰(音響式機械水雷-舞鶴鎮守府 舞鶴防備隊報告)에 촉뢰(觸雷)해서 배가 침몰했고, 그때 사망했던 사람은 승원(乘員) 25명(戰死취급)과 편승(便乘)자 524명이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았던 사람이 승선(乘船)했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래서 그에 대한 것은 후술함.

 

 


<靑森>

 


 그리고 그 배는 아오모리현(靑森)의 오오미나토항(大湊港)에서 부산(釜山)으로 가던 중에, 마이즈루(舞鶴)에 기항(寄港)하던 중에 발생했다. 그래서 침몰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설(說)들이 난무했다지만, 그러나 또 폭침(爆枕)의 원인은 상기(上記)의 건과 동일하다고 일본정부와 미국 측이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단, 당시 일본은 종전(終戰) 직후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자료들이 정확하지 않았던 점이 많았으므로, 그래서 또, 그 배에 승선(乘船)했던 사람들의 숫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가능성도 있으며, 공식기록에서의 피해자들의 씨명(氏名)과 사망자의 숫자 등에서도 다소 착오가 있을 가능이 높다.


 


<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아무튼, 1945년에 미군(美軍)은 일본의 전쟁수행능력을 상실시킬 목적으로, 기뢰(機雷)에 의한 해상봉쇄(海上封鎖), 즉 기아작전(飢餓作戰)에 들어갔다. 그래서 그때 사용되었던 기뢰(機雷)는 약 1만1천 기(基) 정도로 알려져 있으며, 주로 대형폭격기였던 B-29에 의해서 부설(敷設)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사용된 기뢰(機雷) 중에는, 배(船)의 자기(磁氣)반응과 기관(機關)의 음향(音響) 그리고 수압(水壓)의 변화 등, 여러 가지의 반응에 동작하는 기뢰(機雷)들이 혼용(混用)되었고, 거기다 소해(掃海-기뢰를 제거하는 것)를 곤란하게 할 목적으로, 일회(一回)에 반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러 번의 반응 후에 기폭(起爆)하는 기뢰(機雷)도 사용되었다.

 그러자 일본군(日本軍)도 그런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소해(掃海)작전을 펼쳤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래서 또 그 때문에 670척(隻) 이상의 함선(艦船)들이 침몰했던 등, 해상교통이 마비되었으며,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것은 약 6600기(基)나 바다 속에 남아있었을 정도였다. 그런데다 또 당시, 마이즈루항(舞鶴港)은 일본의 굴지(屈指)의 군항(軍港)이었기 때문에, 미군(美軍)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공격목표가 되었고, 그래서 또 그곳에는 자기(磁氣)기뢰와 음향(音響)기뢰가 더 많이 부설(敷設)되어 있었다.


 


<舞鶴港 2007년>

 


 그리고 또,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종전(終戰) 직후에 <조선(朝鮮)사람들의 본국 이송(移送)과 함께, 가능하면 발송(發送) 준비 때에, 식량을 실을 수 있게... >라고 했던 극비(極秘)명령을 해군성(海軍省)으로부터 받았던, 수(數) 척(隻)의 수송선(輸送船)들 중 하나였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해군(海軍) 관계자의 말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신빙성은 부족하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그 배의 출항(出港) 바로 직전에 <조선인(朝鮮人)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편승(便乘)>에 대한 문의가 오오미나토경비부(大湊警備府)로부터 있었다는데, 그러자 해군성운수본부(海軍省運輸本部)는 그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하사관(下士官)의 일부가 그 명령에 불복했고, 그러자 또 오오미나토경비부(大湊警備府)가 강경하게 명령을 내렸던 결과, 우키시마루(浮島丸)는 3,725명(거기에 便乘者들 추가)을 태우고 8월 22일 오후 10시경에 오오미나토항(大湊港)을 출발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기뢰(機雷)와 잠수정(潛水艇)을 경계하면서 항해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또 그때가 바로 정전(停戰) 후였지만, 그날 오후 4시 20분경에 홋카이도(北海道) 앞바다에서 정체불명의 잠수정(潛水艇)에 의해서 부녀자(婦女子) 등을 태웠던 함선(艦船) 3척(隻)이 공격을 받아서 침몰했기 때문이었고(三船殉難事件-설명은 생략함), 그래서 우키시마루(浮島丸)는 그때, 일본(日本) 본토(本土)의 연안부(沿岸部)를 바짝 붙어서 부산(釜山)으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舞鶴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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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백두산 천지-중국 측에서 바라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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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아래는 한 반한(反韓) 성향(性向)의 일본인(日本人)이 쓴 글이지만, 그러나 생각할 점이 다소 있는 것 같아서,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본(本)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한 소개를 마치려 하며, 그러므로 부디 유익(有益)한 시간되셨길 기대합니다. 그럼, 변변치 않은 글, 끝까지 읽어주신 분에게 감사인사 드립니다.

 최근(最近), 중국정부가 한국의 민요(民謠) <아리랑>을, 중국의 국가무형문화재(國家無形文化財)로 지정(指定)했다고 해서, 한국 측의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내용을 잠시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중공(中共)은 2011년 6월 10일, 길림성(吉林省)의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에, 조선인의 민요인 <아리랑>을 소수민족의 문화를 존중하기 위해서, 국가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한다고 알렸다. 그러자 그에 대해서 한국(韓國)의 문화체육관광부의 장관(정병국)이란 사람이 <중국이 우리의 노래를 문화재로 등록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고 하고, 그래서 또, 중국이 내년(來年)에 <아리랑>을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에 등록할 것에 대한 대항책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민족(韓民族)아리랑연합회>라는 단체도 그것을 두고 <민족성을 무시한 중국의 팽창주의의 횡포(橫暴)>라고 하면서 <그것은 아리랑 승계(承繼)에의 위협이며, 중국에 의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일환(一環)이다>라고 문제시하는 자세를 표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중공(中共)에서의 역사(歷史)연구를 말하는 것이며, 그 내용에는 또,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해서, 양국(兩國)은 그 역사(歷史)의 이해(理解)를 두고, 서로 완전히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입장을 말하자면, 그런 한국인들의 아리랑문제와 동북공정(東北工程)문제로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그것은 또, 중국인들의 범죄적인 민족관(民族觀)과 역사관(歷史觀)을, 한국인들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인들은 백년도 전부터 중화민족주의라는 중국인 특유의 민족관이 있었고, 그 최대의 특징은 민족개념이 이중(二重)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또, 중국에서 <무슨, 무슨 족(族)>이라고 부르고 있는 전국(全國) 56개의 소수민족들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입장에서는 하위(下位)의 민족개념이며, 그것을 전부 포함하는 상위(上位)의 민족개념으로는 <중화민족(中華民族)>이란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공식적으로는 중국 국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그들은 중화민족(中華民族) 즉, 중국인(中國人)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또 현재, 중국을 구성하고 있는 56족의 하나인 조선족(朝鮮族) 또는 조선인(朝鮮人)들도, 당연히 중화민족(中華民族)에 포함된다는 것이며, 그래서 또, 중국정부가 그 <아리랑>을 국가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국의 국내문제로, 당연한 일을 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근본적인 문제는, 그 56개의 소수민족들이 하나의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고 하는, 이른바 <중화민족주의의 범죄성(犯罪性)>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현재, 중국의 완전(完全)속국(屬國)이라고 할 수 있을 북한(北韓)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러나 한국인(韓國人)들조차도 그 <중화주의(中華主義)이데올로기>의 위험성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그에 대해서 놀랄 만큼 둔감(鈍感)하다고 밖에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또, 그 중화민족주의(中華民族主義)란 것이 중국 또는 중국인들로 하여금, 금후(今後)의 새로운 침략들을 정당화(正當化)시켜주는 흉기(凶器)로 이용될 것이란 생각 때문인데, 그래서 또 현재는, 중국 본토 내에 살고 있는 조선족(朝鮮族)들만이 중화민족(中華民族)으로 되어 있지만, 그러나 장래에는 한반도(韓半島)의 사람들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극히 높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한반도 역시도 중화민족(中華民族)의 거주지(居住地)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또 당연히 <중국의 일부(一部)>가 되고 말 것이란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예로는, 티베트와 동(東)투르키스탄을 들 수가 있고, 그들 역시도 그 <중화민족(中華民族)의 논리(論理)>에 의해서 중국의 침략을 받은 후에, 병합(倂合)되었던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 말이지만, 6월 25일의 일본경제(니혼케이자이)신문에 따르면, 한국의 고등학생 2500명을 대상으로 앙케트를 실시했는데, 그러자 그 학생들은 제일로 경계해야하는 나라를 일본(日本)이라고 했다고 하고, 그것은 또 34%를 차지했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북한(北韓)이 17%라고 했고, 그 다음은 미국이 15%, 그리고 중국이 10%정도의 순(順)으로 나타났다고 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현재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침략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일로 높은 적(敵)이 바로 그 <중국>이란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위의 결과는 그것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東北工程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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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백두산 천지-중국 측에서 바라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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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한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역시, 편의상 번호를 붙임)

 1. 조선(朝鮮)에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이래(以來), 고구려(高句麗)를 정식(正式)으로 자국(自國)의 역사(歷史)로 인정해서 사서(史書)를 편찬해왔고, 중국의 역대왕조들도 사서(史書)에서 <고구려(高句麗)는 동이(東夷) 또는 동방(東方)의 이민족(異民族)의 역사의 일부(一部)>라고 기재(記載)했다. 그리고 또, 구당서(舊唐書)의 <백제(百濟) 전(傳)>에 따르면 <백제(百濟)는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와 함께, 삼한(三韓)>이라고 기술(記述)되어 있다. 그리고 또 <동이(東夷) 전(傳)>에서는, 그 삼국(三國)을 <해동삼국(海東三國)>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또, 몽골의 원사(元史)에서는 <고려(高句麗)는 고신라(古新羅)> 즉, 삼국통일 이전(以前)의 신라(新羅)와 같았다고 했다. 그리고 또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가 융합(融合)해서,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라고도 기술(記述)했다. 그리고 또, 근현대(近現代)의 중국의 사학(史學)계에서도 <고구려(高句麗)는 한국사(韓國史)에 속한다>라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서서 중국은, 자국(自國)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적(國籍)을 가진 모든 사람 또는 민족들에 의해서 공동으로 건설된 나라이며, 그래서 단 하나의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라고 재(再)정의(定議)했고, 그러자 또 중국의 역사학자들 중에서도 <수도(首都)를 평양(平壤)으로 옮기기 전의 고구려(高句麗)는 또는 고구려(高句麗)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사(韓國史)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사(中國史)이다>라고 하는 재(再)정의를 내렸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것을 <일사양용론(一史兩用論)>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또 1990년 이후부터는 역사에 대한 강한 수정(修正)이 이루어졌고, 급속한 경제발전을 하고 있었던 2000년 이후부터는, 현재 중국 내에 있는 모든 민족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고 했던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論)>이라는 주장을 내세워서, 정부의 주도로 <역사공정(歷史工程)>을 시작했던 것이다.

 2. 하지만 1993년에 진옥룡(陳玉龍)과 양통방(楊通方) 등, 북경대학(北京大學)의 교수(敎授) 4명이 집필(執筆)했던 역사(歷史)교재(敎材) <한문화논강(漢文化論綱)>에서는, 고구려(高句麗)를 한국사(韓國史)로 취급했으며, 1998년에 동(同) 대학의 발비비(拔非非)와 왕소보(王小甫) 교수 등, 젊은 학자 6명이 집필했던 <중한관계사(中韓關係史)>에서도, 고구려(高句麗)를 한국사(韓國史)로 취급했던 적이 있었고, 그 교재(敎材)들은 모두 북경대학(北京大學)의 역사학과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었다. 그리고 또, 동북공정(東北工程)이 한창 진행 중이었을 때도, 상해(上海) 복단(復旦)대학의 역사교재 <국사개요(國史槪要)>에서도 고구려(高句麗)는 한국사(韓國史)라는 기술(記述)이 있었으며, 2005년에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이 간행(刊行)했던 <열국지(列國志)-한국(韓國)>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고구려(高句麗)를 한국사(韓國史)로 취급했었는데, 그 이유는 또, 중학(中學)이나, 고등학교(高等學校)의 교과서들과는 달리, 대학의 교재(敎材)와 학술(學術)용의 일반 역사서적들은, 중국의 정부가 직접적으로 출판, 관리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내용의 시정(是正)을 요구하기가 힘들었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3. 그래서 또, 중국의 그런 역사학(歷史學)계의 움직임에 대해서, 중국의 국내로부터도 비판이 있으며, 그것은 또 과거, 주은래(周恩來)가 <한국사(韓國史)인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 그리고 발해(渤海)를 중국사(中國史)로 왜곡(歪曲)하려 한다>고,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의 역사왜곡과 배외(排外)주의에 대해서 경종(警鐘)을 울렸던 바 있었으며, 그리고 또 비근(卑近)했던 예로는, 원등비(袁騰飛)의 <중국의 역사왜곡과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한 비판> 등이 있었다.

 참고: 원등비(袁騰飛)는 중국 북경(北京) 시내(市內)의 예비교(予備校) 교사(敎師)로, 중국의 국영(國營) 티브이에서 교양(敎養)프로그램의 강사(講師)로도 활동하면서 중국 내에서는 인기가 많은 사람이며, 그래서 또 그 프로그램에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의 원흉(元兇)이 모택동(毛澤東)이라고 통렬(痛烈)하게 비판했던 것이 네트워크상에서 공개되었고, 그로 인해서 찬반양론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켰던 사람이었다.

 4. 그래서 또, 중국의 역사교과서에 기술(記述)되어 있는 내용 중에, 진실(眞實)은 단 5%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사람도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 나머지 95%는 완전히 허구(虛構)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래서 또, 근년(近年)의 경제성장에 힘을 얻은 중국은, 옛날부터 꿈꾸어왔던 중화제국(中華帝國)의 판도(版圖) 확대를 위해서, 한국사(韓國史)는 물론, 오키나와(琉球)와 베트남, 몽골 등도 모두 자국(自國)의 영토라고 주장하려고 하고 있다고 주장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또, 1991년부터 1998년까지 역사학과의 교감(校監)으로 근무했었고, 북동(北東)아시아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연구소의 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세계사연구실주임(世界史硏究室主任) 직을 맡고 있다는 북경대학(北京大學)의 역사학과 송성유(宋成有) 교수는, 미디어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비판했던 최초의 역사학자였으며, 그래서 또 그는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은, 고구려(高句麗)의 왕들은 중국으로부터 그 지위(地位)를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고구려(高句麗)는 고대중국의 지방자치체(地方自治體)였다라고 주장을 하지만, 그렇다면 또 과거, 일본의 왕들 역시도 약 500년에 걸쳐서 중국의 황제들에게 그 지위를 인정받았었는데, 그러면 또 왜, 일본은 중국의 지방자치체라고 주장하지 않는지 의심이 든다>라고 했다. 그래서 또 그는 <자신은 물론, 역사학과(歷史學科)도 그런 주장에는 찬성할 수 없으며> 그래서 또, 자신들의 학술적(學術的)인 견해는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사(中國史)가 아닌, 외국(外國)의 역사의 일부였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또 그는, 그 <승인(承認)>의 문제에서 <그것은 과거, 중국 외(外)의 인근(隣近)국가들에 대한 외교(外交)의 한 형식(形式)으로 볼 것이며, 그래서 또 역시, 당시 중국은 그런 외국(外國) 즉, 고구려(高句麗)나 신라(新羅), 백제(百濟), 일본(日本)에 직접적인 내정간섭(內政干涉)을 하지도 않았으며, 유효(有效)한 통제(統制)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이 주장하는 고구려(高句麗)가 중국의 지방자치체(地方自治體)였다고 하는 주장에는 잘못이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는 <북경대학(北京大學) 역사학과(歷史學科)의 한국사(韓國史)에 대한 것은, 저명(著名)한 학자(學者)였던 주일량(周一良)이 1963년에 서술했던 세계사(世界史)가 그 토대(base)였다>고 하면서, 그래서 또 그 자신도 그에 기초해서 <고구려(高句麗)를 한국사(韓國史)의 일부로 학생들에게 가르쳐왔기 때문에,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의 그런 주장에는 찬성할 수 없다>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또 그는,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서 비평(批評)을 했으며 <북경대학(北京大學)의 역사학과(歷史學科)는 그런 것을 인정할 수 없고, 현대(現代)의 시점(視點)으로부터 역사를 해석해서, 현재의 실정(實情)에 이용(利用)하려는 것은, 현명(賢明)한 처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5. 하지만 또 그것은(東北工程) 단지, 중국의 일부 현명한 학자들이나, 일본 또는 한국의 학자들이나 국민들 그리고 매스컴에서만 비판을 했던 것은 아니었고, 그래서 또 미국(美國)이나, 러시아, 몽골, 오스트레일리아 등, 많은 나라의 학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또 그들은 <중국이 단순히 정치적인 동기(動機)에 의해서 역사를 왜곡(歪曲)>한다는 비판을 했었고, 그래서 또 그 중에서 미국(美國)의 한 학자(學者-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john Duncan 敎授)는 <전(前)근대(近代)의 중국의 역사서(歷史書)들에서는,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이 아닌 동이(東夷)로 취급했다>라고 지적을 했으며, 그리고 또, 하와이대(University of Hawaii, 略稱 UH)의 한 교수(敎授-Edward Schultz)는 <한국(韓國)의 역사서(歷史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 그리고 백제(百濟), 그 삼국(三國)이 대두(擡頭)했던 시기(時期)를 한국사(韓國史)의 여명기(黎明期)였다고 강조(强調)했다>고 하면서 <중국의 야심(野心)에 맞서야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대학(The University of Sydney)의 한 교수(敎授-FㆍMohan)는 <중국은 과거, 중국과 고구려(高句麗)와의 책봉(冊封)관계란 것이, 의례적(儀禮的)이었다는 것을 무시(無視)하고, 주종(主從) 복속(服屬)관계였다고 해석하려고 했다>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또 그는 <한국(韓國)의 내셔널리즘(nationalism-국가중심주의) 고양(高揚)이, 과거의 중화질서부활(中華秩序復活)의 장해(障害)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중국은 그것을 타파(打破)할 목적으로,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중국사(中國史)에 편입(編入)시키려고 기도(企圖)했다>라고도 비판했다. 그리고 또, 이탈리아 나폴리대학(University of Naples)의 한 교수(敎授-Maurizio Riotto)는 <서기(西紀) 1세기에 고구려(高句麗)는 이미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외교(外交)를 펼치고 있었고, 군사적(軍事的)으로도 중국에 대항(對抗)하고 있었다>라고 지적했고, 미국(美國)의 하버드대학의 한 연구원(硏究員-Mark Vinton)은, 그러한 중국의 의도(意圖)를, 중국 국경지대의 정치적인 안정(安定)을 목적으로 한 <방어적(防禦的)인 움직임 또는 행동>이라고 표현했던 후에 <그러므로 그런 중국 측의 주장은 상대할 필요도 없으며, 무시(無視)하는 것이 좋다>라고 주장했고, 덧붙여서 중국의 그런 주장에 관해서, 한마디로 <치졸(稚拙)하다>라고까지 말을 하기도 했다.

 6. 그리고 또, 주한(駐韓) 미국(美國)대사(大使)를 지냈던 제임스릴리(James Lilley)는, 2007년 1월 18일, 미국(美國)의 하원외교위원회(下院外交委員會) 북한문제청문회(北韓問題聽聞會) 자리에서 <중국의 그런(東北工程) 의도는, 북한(北韓)이 붕괴 되었을 때, 그 북한(北韓)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미국은 그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주시(注視)해야만 한다>라고 말을 했다.

 7. 그리고 또,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산하(傘下)의 동방학(東方學)연구소의 한국(韓國)과 몽골 과장을 역임(歷任)했었고, 한국(韓國)중세사(中世史)를 전공(專攻)했다는 유리(Yuri)와, 한국인(韓國人) 2세(世-한반도계 러시아인)로, 모스크바국립대학명예교수이며, 모스크바국립대최고학술상을 처음으로 해서, 구(舊)소련 및 러시아정부로부터 명예훈장 등, 10여개의 메달을 받았으며, 한국에서도 92년에 국민훈장(國民勳章)동백장(冬栢章)과 98년 KBS해외한민족상(海外韓民族賞)을 수상했던 미하일박(Mihael 朴) 등, 러시아 역사학(歷史學)계의 저명(著名)한 학자들은, 2003년 12월 23일 모스크바대학에서 회견(會見)을 개최해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비판했으며, 그리하여 <고구려(高句麗)가 한국사(韓國史)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세계사상(世界史上)의 정설(定說)>이라는 내용을 발표했다.

 8. 그리고 또 2004년 6월에 개최되었던 국제학술대회에서도, 일본과 러시아, 미국, 몽골 등, 제삼국(第三國)의 학자들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비판했으며, 그 집약(集約) 내용은 <중국의 팽창적중화주의(膨脹的中華主義)에 대한 학술적(學術的)인 경고(警告)>였다. 그리고 또 그때, 그 학자들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 단지 한국과 중국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는데 인식(認識)을 같이 했으며, 그리하여 또, 그 문제가 되었던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에 대해서 <그것을 중앙(中央)과 지방(地方)정부(政府)로 해석하게 되면, 한국(韓國)뿐만이 아니라, 몽골과 일본 그리고 터키와 베트남은 물론,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등, 고대(古代)로부터 중국과 관계를 가져왔던 많은 주변 국가들의 역사들 또한 중국에 의해서 중국사(中國史)에 편입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또, 그 중에서 터키의 한 학자는 <한국(韓國)은 물론이고, 몽골과 터키 등, 중국의 역사왜곡의 대상이 되어있는 나라들이 힘을 합쳐서 그에 대응해나가자>라는 제안(提案)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 대회(大會)에 참가했던 몽골의 국립역사박물관장도 <몽고인들이 세웠던 원(元)은, 중국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몽골 역사의 일부이기도 한 것처럼, 한국인들에 의해서 세워졌던 고구려(高句麗)는, 한국사(韓國史)에 속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을 했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취지의 발언을 했던 바 있었다.

 9. 그리고 또, 2004년 9월에 개최되었던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했던 몽골아카데미의 한 교수(敎授)도 <중국이 1950년부터 몽골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역사왜곡을 계속해오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그 대표적인 것으로, 1991년에 출판되었던 <몽골족통사(族統史)>를 예로 들었다. 그리하여 또 그는 <중국의 그러한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서, 몽골과 한국의 연휴(連携)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10. 그리고 또, 영국의 <더 타임스(The Times)>도 <중국은 2003년부터 고구려(高句麗)를 중국 영토(領土)의 일부(一部)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예(例)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그래서 또 마치 그것은, 영국의 아서왕(King Arthur)의 캐멀롯(camelot) 성(城)을, 느닷없이 독일(獨逸)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중국을 비판했다. 그리고 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 역시도 <근거(根據) 없는 역사논쟁을 펼치는 중국>이란 제목의 기사(記事)를 게재(揭載)해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해서 소개했던 한편 <중국의 역사교과서에는, 일본에 관해서도, 불사(不死)의 약(藥)을 찾아 나섰던 천(千) 명의 중국인 소년, 소녀들이, 기원전 209년에 일본을 식민지(植民地)로 만들기 위해서 도일(渡日)하기 시작했다>라는 내용에 대해서도 지적한 다음 <중국은 자국(自國)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물들어 있으며, 그래서 또, 근대(近代)에 들어서 외국(外國)의 침략(侵略)에 수(數)도 없이 시달렸던 적이 있었음에도, 자기들의 문화(文化)가 번영(繁榮)과 부국(富國)의 원천(源泉)이라는 사고방식(思考方式)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있다>라고도 지적했다.

 11. 그리고 또, 사전(事典) 류(類)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미국(美國) 등, 영어권(英語圈)에서 인기가 많은 브리태니커(Britannica)백과사전 등, 각종(各種) 사전들과, 동양사(東洋史)를 배우는 프랑스대학생들의 주요(主要)텍스트인 한국사(韓國史), 그리고 일본의 야마카와출판사(山川出版社)의 고등학교 과정의 일본사(日本史) 등과,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고구려(高句麗)는 한국고대사의 일부>로 취급, 교육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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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백두산 천지-중국 측에서 바라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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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아래는 어느 일본 기자(記者)가 2003년경에 썼던 글을 참고로 소개하며, 편의상 번호를 붙입니다.

 2003년도에 본인은 <교토(京都)의 일본국립박물관>을 찾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나는 그곳에서 깜짝 놀랄만한 것을 보고는 대경실색(大驚失色)하고 말았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그 박물관의 벽에 걸려있었던 <동북아시아 연표(年表)>에, 당연히 한국의 역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 <고구려사(高句麗史)>가, 한국과 중국의 역사 양방(兩方)으로 분류(分類)되어있었기 때문이었고, 거기다 <발해(渤海)>는 아예 처음부터 <중국사(中國史)> 쪽에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 두 나라의 역사관계에 대해서는 <제3자>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도 그런 것을, 적어도 <국립박물관>이란 곳에서 전시해두고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일본(日本)은 이미 친중국(親中國)의 자세로 돌아섰던 것인가?...>하는 의심을 본인으로 하여금 가지게 만들었고, 그러자 또 나는 난생 처음으로 그런 것을 보고는 상당히 머리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 뒤에 그에 대한 것을 살펴본 바, 대충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확인되었다.

 1) 중국의 해군(海軍)은 KDX라는 신형(新型) 구축함(驅逐艦)을 건조(建造)해서, 거기다 고구려(高句麗)의 위인(偉人)들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또 KDX-I 제1번 함(艦)에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이름을 붙여서 <광개토대왕함(廣開土大王艦)>으로, 제2번 함(艦)은 <을지문덕함(乙支文德艦)>, 제3번 함(艦)은 <양만춘함(楊萬春艦)>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건조될 함선(艦船) 중 하나에는 꼭 <대조영(大祚榮)>이란 이름을 붙일 예정에 있다고 중국의 한 관계자가 말을 했다. 하지만 그 후에 중국은 당초의 계획을 변경해서, KDX-II 제3번 함(艦)에 대조영(大祚榮)이란 이름을 붙여서 <대조영함(大祚榮艦)>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또, 이미 건조된 KDX-Ⅱ의 제1번 함(艦)은 <충무공이순신함(忠武公李舜臣艦)>으로, 그리고 제2번 함(艦)은 <문무대왕함(文武大王艦)>으로 이름을 붙여둔 상태였으며, 그리고 또 앞으로 건조될 제4번 함(艦)은 <왕건함(王建艦)>으로, 그리고 제5번 함(艦)은 <강감찬함(姜邯贊艦)>으로, 그리고 제6번 함(艦)은 <최영함(崔瑩艦)>으로 이름을 붙일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당초에는 한반도에서 활약했던 위인(偉人)들의 이름만 붙일 예정이었지만,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던지, 그 계획을 변경해서, 만주(滿洲) 등에서 활약했던 위인(偉人)들의 이름도 붙일 예정에 있다고 했다. 그런 한편, 중국의 해군(海軍)은 2000년에 <천하제일군단(天下第一軍團)>이라고 부르는 <제1군단>의 별명(別名)을 <광개토군단(廣開土軍團)>으로 변경했던 바 있었다.

 2) 그리고 또 사실, 한국(韓國) 즉, 남한(南韓)이 북방사(北方史)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극히 최근(最近)의 일이었다. 그래서 또 그 이전(以前)까지, 고조선(古朝鮮)에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로 연결되는 북방사(北方史)에 대한 연구는 북한(北韓)이 주도(主導)해왔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이유는, 김일성(金日成)이 자신의 정권(政權)에 대한 정당성(正當性)을 바로 그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에서 찾으려고 했었기 때문이었고, 그러자 또 남한(南韓)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삼국통일(三國統一)을 달성(達成)했던 신라(新羅)로부터 남북통일(南北統一)에 대한 기백(氣魄)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1994년 10월 11일에, 북한(北韓)에서는 당시 식량난(食糧難)과 경제난(經濟難)에 허덕이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단군능(檀君陵)을 완공시켰던 것은, 바로 그 정당성(正當性)을 그 북방사(北方史)에서 찾으려했던 노력과 무관계하지 않았다고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3) 그리고 또, 2002년에 열렸던 <한일(韓日)월드컵대회>는, 한국(韓國)에서는 그 북방사(北方史)를 극적(劇的)으로 부활시켰던 <일대사건(一大事件)>이었다고 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한국(韓國) 전체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환성(歡聲)으로 뒤덮였으며, 그것은 또,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전쟁(戰爭)의 신(神)>과 <군신(軍神)>이며 <동방(東方)의 지도자(指導者)> <치우천왕(蚩尤天王)>을 자신들의 상징물(象徵物)로 선택했던 소위 <붉은악마(惡魔)>가 그것을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국(韓國)의 사학회(史學會)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학설(學說)은 아니지만, 어쨌든 단군(檀君)고기(古記) 등에 의하면, 한반도의 민족은 환인(桓因)이 통치했던 환국(桓國)에서, 환웅(桓雄)이 건국했다고 하는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고, 그리고는 그 아들이었던 단군(檀君)이 건국했던 고조선(古朝鮮)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 치우(蚩尤)는 그 배달국(倍達國)의 14대 천왕(天王)으로서, 특히 용맹(勇猛)스러웠기 때문에, 그래서 또 중국인의 조선(祖先)에 해당되는 황제(黃帝)와도 많은 전쟁을 벌여서, 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치우(蚩尤)는 황제(黃帝)에게 져서 죽음을 맞이했고, 그러자 또 그때부터 중국인들은 그 치우(蚩尤)를 군신(軍神)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후에, 한(漢)의 유방(劉邦)은 전쟁에 임했을 때마다, 그 치우(蚩尤)천왕(天王)의 사당(祠堂)에서 제사를 올렸다고 했던 것이다.

 4) 아무튼, 그러한 치우(蚩尤)의 등장은, 평소 한국인(韓國人)들 또는 한반도(韓半島)인들이 품고 있었던 <대륙(大陸)과 백두산(白頭山)에 대한 마음 또는 애착>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보다 확실하게 구명(究明)하기 위해서는 좀 더 냉정하고, 인내심을 가진 정밀한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며, 북한(北韓)과도 힘을 합쳐서 공동연구를 하는 것도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러나 또 그에는 많은 제약(制約)들이 따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사이에 일본(日本)에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중국과 한국(韓國) 양방(兩方)으로 했으며, 발해(渤海)는 또 아예, 처음부터 중국사(中國史)에 넣어버렸던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이다.

 5) 그리고 또 최근(最近), 중국을 출입하는 사업가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공산당의 당보(黨報)라든가, 또는 그 당(黨)의 논리(論理)를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는 광명일보(光明日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의 동북지역에 있었던 변방민족의 왕조(王朝)였다> 그리고 또 그 사업가는 덧붙여서 말하기를 <그런 내용의 기사가 보도되자, 연변 조선자치주의 지식인들은 모두 크게 동요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작 한국(韓國)의 학회(學會)나, 매스컴에 등에서는, 마치 꿀을 먹은 매미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그리고 또 그는 <그때 북경(北京)에 있었던 한국(韓國) 매스컴의 특파원들은, 그런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그것을 무시(無視)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중국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아예 모른 척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중국은, 그 한국특파원들에게 6개월마다 비자를 경신(更新)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특파원들은 중국에 불리한 기사(記事)를 쓰게 되면, 비자 만료를 이유로 중국에서 추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식해서, 그렇게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국(韓國)에 있는 기자(記者)들이 문제를 제기(提起)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강조(强調)하기도 했다.

 6) 그리고 또 그는 자신의 사견(私見)을 이렇게 덧붙였다. <과거, 일본이 한반도를 통치했을 때, 만주(滿洲)로 나갔던 조선인들이 중국인들과 함께 항일(抗日)투쟁을 했던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 그러나 모택동(毛澤東)의 시대 때 조선족(朝鮮族)은, 조선족(朝鮮族)이 항일(抗日)투쟁에 참가했었다는 말을 했던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특히, 문화혁명(文化革命) 때는, 소수민족(少數民族)을 탄압(彈壓)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말을 했던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일제(日帝) 침략(侵略) 기(期)에 중국인들과 함께 가열(苛烈)한 항일(抗日) 투쟁을 벌였다고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은 등소평(鄧小平)이 집권하고 난 후였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중국의 개혁(改革)과 개방(開放)이 많이 진척(進陟)되었다고 하는 지금에, 그런 기사가 나왔던 것이었다. 그래서 또, 그것으로 추측을 해보면, 중국은 한국(韓國)과 미국(美國)이 연변(延邊)을 북한(北韓)의 김정일(金正日) 정권(政權)을 타도하기 위해서, 그곳을 교두보(橋頭堡)로 이용하려는 것을 사전(事前)에 차단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으로 생각이 되고, 그리고 또 만약에, 그 김정일(金正日) 정권(政權)이 붕괴할 경우를 상정해서, 그 결과 한반도(韓半島)의 통일이 실현된다면, 그때 또 한반도 면적의 4분의 1에 달하는 43, 547평방킬로미터에다, 200만 인구의 연변(延邊)이 동요(動搖)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미리 그런 상황을 경계하려는 의도에서 그런 기사를 냈던 것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 될 경우에는,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의 티베트사람들과, 신강(新疆)위구르지구의 회교도(回敎徒)들도 함께 동요할 가능성이 있으며, 만약에 또 그런 상황이 전개될 경우에는, 중국은 오대십국(五代十國-唐 멸망한 때부터 宋이 전 중국을 다시 통일했을 때까지의 10 나라와 그 시대)시대 이후에, 새로운 분열(分裂)기(期)로 들어갈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이다. 그리고 또 중국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 아주 많은 분열(分裂)을 경험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 대해서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며, 그래서 또 고구려(高句麗)가 원래부터 중국사(中國史)의 일부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서, 김정일(金正日) 정권 붕괴 후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그 조선족(朝鮮族)들의 동요(動搖)를 사전차단하려 했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또 그 작업의 일환으로, 중국에서는 한국(韓國)의 학자들이 연구해왔던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 등, 한민족(韓民族)의 북방사(北方史)에 대한 것들을 대대적(大大的)으로 수집(收集)을 하고 있는 것이다.

 7) 그런데 또, 그 기사(記事) 또는 시론(試論)를 썼던 사람을 확인해본 결과 <변중(邊衆)>이란 이름을 사용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중국의 변방(邊方)에 살고 있는 어떤 민중(民衆)>이란 의미의 가명(假名)이거나, 필명(筆名)으로 생각되었으며, 그 기술(記述) 자체도 <철저하게> 중국의 자료에만 의존해서, 중국과 고구려(高句麗)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췄던 것으로 보였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또 <그것을 읽었던 중국인들은, 고구려(高句麗)가 한국(韓國)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중국역사의 일부였던가?>하고 믿어버릴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주장을 했던 사람도 있었고, 그래서 또 그 사람은 <한국(韓國)은 일본의 역사왜곡에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이제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8) 그리고 또, 그 광명일보(光明日報)의 시론(試論)에 대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에는 또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 것>이라는 식의 궤변(詭辯)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제일로 눈에 띄는 억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거 고구려(高句麗)가 치러냈던 수당(隋唐)과의 전쟁들이, 모두 이민족(異民族)들 간의 정복(征服)전쟁이 아닌, 중국 자체 내의 <통일(統一)전쟁>이었다고 묘사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같은 민족이었던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 그리고 신라(新羅)가 상대를 흡수하려고 했던 전쟁들은 <통일전쟁>으로, 그리고 이민족(異民族) 간의 전쟁들은 정복(征服)전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러나 그 시론(試論)에서는 정복(征服)과 통일(統一)을 의도적(意圖的)으로 혼동(混同)시켰다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9) 그리고 또, 그 두 번째의 억지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왕건(王建)이 세웠던 고려(高麗)와, 고주몽(高朱蒙)이 세웠던 고구려(高句麗)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또 그는, 과거 당(唐)이 중국을 통일시켰고, 그리하여 고구려(高句麗)는 다시 중국(中國)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런데 그 고구려(高句麗)의 후예라고 자처했던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세움으로 해서, 그 고구려(高句麗)를 다시 빼앗기게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 근거로는, 중국의 역사서에 고구려(高句麗)가 <고려(高麗)>라고 되어있는데, 그래서 왕건(王建)이 그것을 도용(盜用)해서, 자신이 세웠던 나라를 고려(高麗)라고 명명(命名)했던 때문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는, 고구려(高句麗)는 고(高) 씨(氏)가 왕위를 이었던 고씨고려(高氏高麗)로, 그리고 왕건(王建)이 세웠던 고려(高麗)는 왕씨고려(王氏高麗)로 분명히 분리해서 전제(前提)한 후, 그래서 또 왕건(王建)의 왕씨고려(王氏高麗)가 고씨고려(高氏高麗)의 후예가 되기 위해서는, 그 왕건(王建)의 성이 고 씨(高氏)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주장하면서, 그래서 또, 그 왕건(王建)이 정말로 고씨고려(高氏高麗)를 이었던 것이라면, 자신이 십훈요(十訓要-訓要十條-고려 태조가 943년,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겼던 열 가지의 遺訓)를 남겼을 때, 자신이 <고씨고려(高氏高麗)의 후예(後裔)>란 말도 함께 남겼어야 옳았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런 말을 남겼던 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10) 그리고 그 외에도 몇 가지 주장이 더 있지만, 그러나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주제에서 벗어난 역사문제이므로 일단 생략하며, 어쨌든 그 광명일보(光明日報)에서 소개된 그 시론(試論)은, 단순히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중국사(中國史)에 편입시키려는 의도에서 썼던 것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조선족(朝鮮族)들에게 <당신들은 지금의 고구려(高句麗)인들이며, 그러므로 당신들은 당연히 중국인(中國人)인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주지(周知)시키려는 목적에서 쓴 것이다 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또 현재, 중국은 전(全) 인구의 92%가 한족(漢族)이지만, 그 외의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소수민족(少數民族)은 장족(莊族), 만족(滿族), 회족(回族), 묘족(苗族), 위구르족, 이족(彛族), 토가족(土家族), 몽고족(蒙古族) 등이 있고, 그 중에서 조선족(朝鮮族)은 전체 소수민족의 2.6%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는 약 192만 명 정도로 14번째를 점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그 소수민족(少數民族) 우대(優待)정책을 펼치고 있는 중이며, 그런 것으로 독립(獨立) 또는 분규(紛糾)를 막기 위해서, 그런 것을 당(黨)을 대표한다는 광명일보(光明日報)에 게재(揭載)했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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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백두산 천지-중국 측에서 바라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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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다음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관계해서 여러 사람들의 견해를 정리한 것을 참고로 올려드리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라며, 그리고 편의상 번호를 붙여서 소개합니다. 그리고 또, 다소 위의 글과 중복되는 것도 있다는 것도 미리 알려드립니다.

 6) 그리고 또, 그 배경에는 현(現) 중국의 <힘의 논리(論理)>가 있었던 것이었으며, 그리고 또, 그 동북공정(東北工程)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그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를 둘러싼 역사적인 인식 때문이었고, 그것은 또 그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던, 그러니까 중국도 그것을 과거에는 한국사(韓國史)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을 했던 부분이었지만, 그러나 갑자기 그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태도를 일변시켰던 것이, 바로 그 문제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중국은 과거와 달리, 그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입각해서 <수(隋)와 당(唐)이 고구려(高句麗)와 다투었던 것은, 단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한 과정이었을 뿐이었다>라고 하는 입장을 취했고, 그 이유로는 또, 그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가 중국의 제국(諸國)들과의 관계에서, 책봉(冊封)과 조공(朝貢)의 관계였기 때문에, 그래서 또, 중국의 입장에서는, 그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를 중국에 통합 또는 복속시키기 위해서 그런 전쟁을 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논리를 폈던 것이다.

 7) 하지만 또 그렇게 되면, 한국사(韓國史)는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러자 한국(韓國) 측에서는 그 논리 자체만으로 경악(驚愕)했고, 그래서 각계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지만, 하지만 역시, 과거부터 <고구려(高句麗)가 조선사(朝鮮史)의 자랑>이라고 떠들어대던 북한(北韓)은 그에 대해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또 역시, 남북한(南北韓)의 동조는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으며, 그러자 또, 그런 중에서도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한반도(韓半島)에서는 눈을 뻔히 뜨고서도 자국(自國)의 역사가 중국에 약탈(掠奪) 당하고 있는 현장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지만, 하지만 또 계속 그렇게 두고만 보고 있다가는, 정말이지 앞으로 어떤 결과가 생길지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이다.

 8) 그리고 또, 2007년에 중국은, 동북(東北) 쪽의 요녕(遼寧)과 길림성(吉林省)에 있는 고구려(高句麗) 산성(山城) 2곳과 발해(渤海)의 산성 2곳을 <전국중점보호문물(全國重點保護文物-문화재와 유물)>로 확정, 발표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또, 그 고구려(高句麗) 산성(山城)은 요녕성(遼寧省) 심양시(瀋陽市) 소재(所在)의 석태자산성(石台子山城)과 길림성(吉林省) 돈화시(敦化市) 소재의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이었고, 그리고 발해(渤海)의 산성은 길림성(吉林省) 길림시(吉林市) 소재의 용담산성(龍潭山城)과 화전시(華甸市) 소재의 소밀성(蘇密城)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1961년에 제1회 발표되었던 이후 6번째의 발표였으며, 그리하여 중국이 <중점보호유적지>로 지정했던 고구려(高句麗)와 관련된 지역은 7곳, 그리고 발해(渤海)와 관련된 유적(遺蹟)들은 모두 8곳으로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외에도 중국은 <중국의 지도부(指導部) 거주지(居住地)> 등이 있는 중남해(中南海) 등, 1080곳을 <보호문물(保護文物)>로 확정했던 것이다.

 9) 그리고 또, 앞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중국은 그에 멈추지 않고, 신라(新羅)와 백제(百濟)도 <중국사(中國史)의 일부(一部)>였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그것은 또, 그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주도했던 중국의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의 한 연구소인 <중국변강사지연구센터(中國邊疆史地硏究center)>가 작성했던 공식연구서(公式硏究書)에서 그렇게 기술(記述)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것은 2001년에 출판되었던 <고대중국고구려역사총론(古代中國高句麗歷史叢論)>이란 책의 내용에 포함되었던 것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또 그와 관련된 내용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기술(記述)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은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에 대해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래서 또, 중국에 순종했던 국왕과 통치자들을 선택해서 회유(懷柔)했던, 이른바 이민족(異民族)들에 대한 간접적인 통제정책이었던 기미정책(羈縻政策)이라고 부르는 방법으로 통치했다>라고 기술(記述)했고, 그래서 또 그 기미정책(羈縻政策)에서는 <주변 민족들의 영토를 중국의 행정구역(行政區域)에 편입해서, 자치(自治)를 인정했다>라고 했으며, 백제(百濟)에 관해서는 <고구려(高句麗)와 같이, 고대중국의 변경에 있었던 소수민족(少數民族)이었던 부여(夫餘)인의 일부가 세웠던 정권(政權)>, 그리고 또 신라(新羅)에 대해서는 <당(唐)은 백제(百濟)가 멸망했던 660년 이전에는 기미정책(羈縻政策)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는 직접(直接)통치를 행했다>라고 기술(記述)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신라(新羅)는 <중국의 진(秦)이 멸망한 후, 그 사람들, 즉 그 망명자(亡命者)들이 한반도로 건너가서 세웠던 정권(政權)>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중국의 번속국(藩屬國)으로, 당(唐)이 그 관할권(管轄權)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기술(記述)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고대중국고구려역사총론(古代中國高句麗歷史叢論)>이란 책은, 위의 <변강사지(邊疆史地)연구센터>가 2002년에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그 중심인물이었던 마대정(馬大正)과 이대룡(李大龍) 등, 국경문제 전문가들에 의해서 집필되었던 것이라고 하며, 그래서 또 <고대중국고구려역사속론(古代中國高句麗歷史續論)-2003년>과 함께, 동북공정(東北工程)의 기본방침 또는 방향을 정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10) 그런 한편, 한국의 국정(國定)교과서에서의 내용을 두고 중국(中國)에서도 비판을 하고 있다고 하고, 그 내용은 또, 한국에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의 고조선(古朝鮮) 건국 시기를 이전보다도 명확하게 기술(記述)해서, 한반도의 청동기(靑銅器)문화가 시작되었던 시기를 500년에서 천년으로 앞당겼던> 것이 그 이유라고 하며, 그래서 또 중국에서는 그것을 두고 <진중(鎭重)함을 결여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또, 1990년대 한국의 역사교과서에서는 <한민족(韓民族)의 선조들이 기원전 8천년 즈음에 파미르고원으로부터 한반도로 이주했고, 그 후에 만주족(滿洲族)에 문화를 전수(傳授)했으며, 중원(中原)의 황하(黃河)문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7천년 경에는 일본문명을 창조했다>라고 했다고 하면서, 그것은 <황당무계(荒唐無稽)>한 내용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7천년에 일본문화를 창조했다>는 것으로부터는, 일본의 지식인들이 반발했고, 그래서 또 그것은 <자문화우월주의(自文化優位主義)>라거나 <에스노센트리즘(ethnocentrism)> 즉 <자민족절대주의> 또는 <민족중심주의>와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라는 자존심이 상반(相伴)되어서 <한국은 과거 자신들의 부끄러웠던 역사를 필연적으로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물이었다>라고 비판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한국은 과거 중국의 속국(屬國)이었던 때와, 일본의 통치를 받았을 때, 그리고 최빈국(最貧國)이었던 때 전부를 부정하고 싶은 사고의 발상이 그런 결과물을 낳았으며, 그것은 또, 그러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어서, 세계에서 그만큼의 기상이 높아져있는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또 역시 <이제 한국은 그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서, 과거 자신의 종주국(宗主國)이었던 중국에 도전(挑戰)하려고하고있다>라고까지 주장을 했다. 그리고 또, 그에 대해서는 한국의 일부 매스컴에서도 비판을 했다고 하며, 그 이유는 또 <단군신화(檀君神話)를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민족(民族)관념(觀念)을 우선시하기 위해서, 학술적인 근거를 무시하려는 것은 곤란하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11) 그리고 또, 중국은 백두산(白頭山)이란 이름 자체를 없애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백두산 주변에 있는 학교의 이름들을 장백산(長白山)을 붙인 이름으로 변경하고 있다고 하며, 그것은 또, 길림성(吉林省) 산하(傘下)의 <장백산보호개발구관리위원회(長白山保護開發區管理委員會)>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지역은, 백두산(白頭山)의 북쪽 등산로의 입산(入山) 매표소(賣票所)가 있는 안도현(安圖縣)과, 서쪽의 등산로 매표소가 있는 무송현(撫松縣) 지역이라고 하며, 그 조치로 인해서 우선적으로 <백하임업국고급중학교(白河林業局高級中學校)>가 <장백산제1고급중학교(長白山第1高級中學校)>로 이름을 바꿨고 <무송현제7고급중학교(撫松県第7高級中學校)>는 <장백산제2고급중학교(長白山第2高級中學校)>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변경 이유로는 <보호개발구(保護開發區) 관할구역(管轄區域) 내(內)의 사회사업자원(社會事業資源)을 정비(整備)하려는 목적>이라고 밝혔다지만,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백두산(白頭山)이란 이름 자체를 없애려는 의도가 분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12) 그리고 또, 북한(北韓)의 태도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면, 북한(北韓)은 미국(美國)에 대해서는 <우리의 자주권과 존엄을 침해하는 날치기> 또는 <공화국을 압살(壓殺)하려는 극악한 적(敵)> 등의 표현을 사용했고, 일본의 역사왜곡에 관해서는 <비열(卑劣)한 철면피(鐵面皮)의 범죄행위>라고 표현했으며, 독도(獨島)의 문제에 관해서는 <당당하게 남북(南北) 또는 북남(北南)이 공동대응하자>라는 주장을 펼쳤지만, 그러나 왠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 중국의 관제(官製)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한반도의 한강(漢江) 유역까지는 중국의 영토다>라고 하는 주장을 북한(北韓)은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또 역시, 한국 측에서 북한에 남아있는 고구려(高句麗)유적에 대한 공동연구의 제안에도, 북한(北韓)은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13) 그리고 또 그런 것은, 과거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입장도 비슷한 태도를 보였던 적이 있었고, 그래서 또,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그에 따른 역사왜곡이 진행되고 있었던 중에도 공식적인 비판을 자제(自制)했던 것인데, 그래서 또 당시, 노무현(盧武鉉) 정부가 탈미친중(脫美親中)의 정책을 취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기도 했다.

 14) 그리고 또,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서 <북한(北韓)의 영토(領土) 중, 반 이상은 원래 중국의 땅이었다>라고 주장했던 것과 관련해서, 중국이 북한(北韓)의 핵문제 해결에 대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북한(北韓)이 붕괴된 후에, 자신들이 그 북한(北韓)을 확보하기 위해서란 주장이 있으며, 그 때문에 또 북한(北韓)의 국경지대에 중국은 대규모의 군부대를 배치해두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또, 그런 맥락으로 북한(北韓)의 신의주특구(新義州特區) 구상(構想)을 반대했던 것도, 그 개발이 성공하게 되면, 중국의 동진정책(東進政策)에 차질이 생길 것을 염려했던 때문이었다고 한다.

 15) 그리고 또 중국은 현재, 동북(東北) 3성(省)을 본격적으로 개발한 후, 동진(東進)해서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까지 진출해있는 상태이며 그것은 또, 시베리아철도(TSR)를 이용해서, 유럽과 연결되는 지리적인 이점(利點)과 에너지자원에 착안(着眼)을 한 것으로, 그리하여 인도와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경제영토(經濟領土)>의 확장을 노린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또 그것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의 다음 계획으로 중국은 추진 중이라고 하며, 그 결과로 현재, 연해주(沿海州)에서 비자(visa)를 취득해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인의 수는 25만 명 이상이라고 하며, 그것은 또 연해주(沿海州) 전체 인구의 3.8%에 달하는 숫자라고 한다. 거기다 또 불법체류자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연해주(沿海州) 전체 인구 약 650만 명 중에서 약 10% 이상이 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곳에 있는 한국인(韓國人)의 수는 약 700명 정도이며, 그곳으로 매년 입국(入國)하는 외국인들 중에서 중국인의 수는 거의 70%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그래서 또, 2006년 기준으로 그 연해주(沿海州)의 대외무역(對外貿易)은 약 35억 달러였는데, 그 중에서 중국이 차지했던 것은 41%나 되었다고 하고, 그 다음으로는 일본이 약 33%, 그리고 또 그 다음으로는 한국이 약 18% 정도를 점했다고 한다. 그래서 또 외국인 투자기업의 수도, 연해주(沿海州) 전체 1330사(社) 중에서, 중국기업이 573사(社)로 43%를 점했다고 하며, 그 외의 기업으로는 미국(美國)이 109사(社) 그리고 한국이 91사(社) 그리고 그 다음이 일본으로, 81사(社)를 차지했다고 한다.

 16) 그리고 또, 중국은 각종(各種)의 대형(大型) 개발 사업을 독점(獨占)하고 있는 실정이며, 그래서 또 중국은 2012년 완성을 목표로 했던, 동시베리아에서 연해주(沿海州)에 이르는 세계(世界)최장(最長)의 파이프라인(pipeline-原油나, 精油 또는 천연가스 등, 주로 流體를 수송하기 위해서 地上이나, 地下에 고정 또는 매설한 管路이며, 그 길이는 약 4200킬로미터이고, 그리하여 年間 약 8천 톤 정도를 수출할 것으로 예상) 건설공사에도 참가를 해서, 연간(年間) 2천만 톤의 원유(原油)를 공급받기로 합의를 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또, 나홋카(Nahodka=Nakhodka=Находка-러시아連邦 東部, 沿海地方의 항구도시)에서는 대규모의 석유화학단지를 건설했던 바 있었으며, 사할린(Sakhalin-러시아東部, 하바롭스크-Khabarovsk지방의 한 州를 이루는 섬)에서는 매장량 4840억 입방미터라고 알려졌던 천연가스의 생산도 시작했던 바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그 거대한 연해주(沿海州)의 미래(未來)개발 사업에서도 진출기반을 확고히 했으며, 특히 그 사할린의 천연가스는 전량(全量) 수입할 것이라는 공언(公言)을 하기도 했다.

 17) 그리고 또, 중국이 노리는 것은 북한(北韓)이 붕괴된 후, 그 지역의 연고권(緣故權)을 확보하려 것이란 주장이 한국에서 나왔던 적이 있었고, 그래서 또 중국이 북한(北韓)에 계속해서 원조(援助)를 하는 것은, 북한(北韓)을 속국화(屬國化)하려는 하나의 포석(布石)으로 이해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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