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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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마이즈루 灣-적색 동그라미 부분이 폭침순난현장>

 


 2. 계속...

 그리고 그 후, 현지(現地-下佐波賀 部落)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바다 위에서 큰 배가 딱 두 동강으로 잘라졌고, 그러자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배의 마스트(mast)와, 최대한 높은 곳으로 몰리면서 비명을 질렀던 등, 말 그대로 참혹했던 모습들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들 현지인들은 그 즉시 구조를 생각했고, 그래서 배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배를 몰고 나가서 조선인(朝鮮人)이라고 생각되었던 사람들을 몇 번에 걸쳐서 구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때, 우키시마마루(浮島丸) 근처, 직경 약 50미터 정도에는 해면(海面)이 부풀어 올라있었고, 그래서 또 그 파도 때문에라도 구조가 쉽지 않았으며, 거기다 해면(海面)을 덮었던 1센티미터 정도 두께의 중유(重油) 때문에 손이 미끄러워서 더욱 구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 구조를 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많았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그 배는 오후 11시경에 전부 침몰했고, 나중에는 마스트 2개만 수면(水面)에 남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어촌(漁村)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해군(海軍)과 자위대(自衛隊)의 무관심(無關心) 또는 무성의(無誠意)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고 했고, 그래서 또 그때 구조되었던 사람들은 거의가 자력(自力)생존 또는 그 마을사람들에 의해서 구조가 되었다고 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구조되었거나, 자력으로 생존했던 조선인(朝鮮人)들은 모두 중유(重油)를 덮어써서 새까맸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 죽음의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래서 또 그 바다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서 산으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 부상을 당했던 사람들은 그 부락(部落)사람들의 간호를 받았다고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는 전시(戰時)였기 때문에, 그래서 식량사정이 좋지 못해서 식사의 공급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렇게 구조된 사람들은 군대의 지휘를 받아서 타이라해병단(平海兵團)으로 수용되게 되었고, 그러자 또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으로 지쳤던 몸으로, 그날 밤 11경에, 그 타이라(平)까지 해안도(海岸道)를 따라서 줄지어서 걸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그들은 거의 구조된 상태 그대로였으며, 그래서 대부분이 맨발로 그곳까지 걸어서갔다지만,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을에서 제공해주었던 조우리(草履-일본짚신)를 신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러니까 사고 발생 후, 불과 수 시간 만에 유체(遺體)들이 해안으로 떠밀려왔고, 그러자 군인들이 와서 그것을 수용(收容)해갔다지만, 그러나 그 후, 약 1주일간 계속해서 매일 수면 위로 떠올랐던 유체(遺體)들은 군대의 지시로, 수면(水面) 위에 나와 있었던 그 마스트에 묶어두었고, 그러다 그 숫자가 많아지자, 마츠가자키해병단(松ヶ崎の海兵團)에서 모아가서 매장을 했고, 그 외에는 타이라해병단(平海兵團)에도 매장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도 사망자의 숫자는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이 되지만, 그러나 일본정부는 여전히 그에 대해서 침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후, 그러니까 타이라해병단(平海兵團)에 수용되었던 후에, 조선인(朝鮮人)들은 자기 가족들의 생사(生死)를 확인하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사망했다는 것을 알고 허탈해했다고 한다.

 3. 그리고 또, 그 사망인정서사(死亡認定書寫)란 것과, 호적말소통지사(戶籍抹消通知寫) 그리고 우키시마마루사몰자명부(浮島丸死沒者名簿)란 것이 한 세트가 되어서, 오오미나토해군설비부(大湊海軍設備部)에서 9월 1일에 작성된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러면 또 당시, 그 배에 승선(乘船)했던 사람들의 숫자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때에, 어떻게 1일주일 만에 그렇게 정확한 사망자들의 전(全)명부(名簿)를 작성할 수 있었던 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그러니까 당시, 해안으로 떠밀려왔던 유체(遺體)들의 숫자는 어떻게든 확인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때 해저(海底)에 가라앉았다거나, 선체(船體) 내에 갇혀있었던 유체(遺體)들에 대해서는 전혀 파악도 하지 못했을 그 9월 1일의 시점(時點)에서,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 숫자를 확인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명부(名簿)는 바로 그때, 확인 또는 사망으로 인정(認定)되었던 사람들의 숫자였을 것으로 생각이 되고, 그리고 또 그것을 누가 확인 또는 인정(認定)했던가에 대해서는, 오직 당시에 가족을 잃고 사방을 헤매고 있었던 조선인(朝鮮人)들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누가, 어떻게 작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그렇게 해서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또 당시, 가족들이 모두 사망했던 경우와, 주변사람들과 교류가 전혀 없었던, 즉 그 사람의 존재조차 누구도 알지 못했던 개인들의 경우에서는, 그 자료에서 누락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거기다 또, 그런 자료의 수집에 대해서 전혀 듣지 못했을 사람들과, 또는 들었어도 보고(報告)나, 신청(申請)을 하지 못했을 사람들, 예를 들어서 탈진해서 누워있었다거나, 거동할 수 없었던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 등,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서도 자료는 수집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자료들은 거의 졸속(拙速)으로, 그리고 대충대충, 자기들 마음대로 작성했을 것으로 생각이 되며, 그리고 또 그 외에도 많은, 그리고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인해서 그 자료에 포함되지 못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다 또, 그 9월 1일 이후에 작성된 자료는 없는데, 그것으로 또 당시, 그 조사를 얼마나 성의(誠意) 없이 또는 위의 명령을 받고 중지를 했든, 어쨌든, 졸속(拙速)하게 처리했는가를 알 수 있으며, 그래서 또 당시, 6000명인가, 8000명인가 하는 설(說)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그리고 또 당시, 마이즈루방비대(舞鶴防備隊)에서는 수기(手旗)로 <소해(掃海)완료> 즉 <안전하므로, 입항해도 좋다>는 신호를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 보냈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그 이유는 또, 그 당시에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외에는 어떤 함선(艦船)도 촉뢰(觸雷)되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마이즈루방비대(舞鶴防備隊)에서는 그때도 그럴 것이라는 안일한 태도에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그렇게 생각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일본 측의 자료는 모두 소각(燒却)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미군(美軍) 측에는 자료가 남아있기 때문에 조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마이즈루(舞鶴) 만구(灣口)를 GRID(구역)1 해역(海域)으로 해서, 5월 21일, 6월 20일, 7월 12일, 7월 28일, 8월 8일, 8월 15일, 6회(回)에 걸쳐서 611개의 기뢰(機雷) 투하(投下). 그리고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침몰했던 마이즈루(舞鶴) 만내(灣內)는 GRID 2 해역(海域)으로 해서, 6월 30일, 7월 12일, 7월 20일, 7월 28일, 8월 8일, 5회에 걸쳐서 116개의 기뢰투하.

 그리고 또, 미군(美軍)의 그 기뢰(機雷)는 당시, 대단히 정교(精巧)했다고 알려졌으며, 그것은 또 종전(終戰)의 막바지에서, 일본 전국(全國)을 상대로, 군사적인, 경제적인 봉쇄(封鎖)를 목적으로, B29와 잠수함들에 의해서 투하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 미군(美軍)이 실수로 산에 떨어뜨렸던 것을 수거해서 살펴봤던 일본의 전문가들은, 그 기능의 우수함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우수했던 기뢰(機雷)였어도, 그날 마이즈루방비대(舞鶴防備隊)에서 수기(手旗)로 <소해(掃海)완료>란 신호를 보냈을 정도로 그들은 안전하다고 보았다는 점, 그리고 또 우키시마마루(浮島丸)를 인도했던 그 두 척의 배가 무사히 입항을 했던 점, 등을 고려했을 때, 구(舊) 해군(海軍)의 한 관계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나타냈다.

 <아무래도 그 사건에는 의문이 많다. 그리고 만약에 누군가가 자폭(自爆)을 했던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래도 하사관(下士官)들 중에서 어떤 음모가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당시에는 패전(敗戰)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그 배의 실권(實權)은 그 하사관(下士官)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실제로 또 그들만큼 그 배를 잘 아는 사람들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그들 중에서 몇 명이 음모를 꾸며서 그 배안에 폭발물을 설치했다면, 그것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음은,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九事件)에 대해서, 자신(佐藤勝巳)의 생각을 적은 것은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또 저는, B29가 투하(投下)했던 기뢰(機雷)에 우키시마마루(浮島九)가 촉뢰(觸雷)되었다고 가정(仮定)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 B29가 투하했던 기뢰(機雷)의 폭발력(爆發力)이 일정(一定)했다고 한다면(調査 要), 그리고 또 증언(證言)들처럼 그때, 세 번의 폭발이 있었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서 우키시마마루(浮島九)처럼 5천 톤이나 되었던 배였다고 하더라도, 3천 명이나 되었던 사람들이 구조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때 제가 탔던 배는 3천 톤 정도의 배였지만, 그때 25명의 승조원(乗組員)이 사망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망원인은, 기뢰(機雷)가 선저(船底)에서 폭발했고, 그리고는 그 폭발력으로 인해서 배가 두 동강이 났던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또 그때, 그 배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거의가 몸이 위로 튀어 올라서 선실(船室)의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고, 그래서 내출혈(內出血)이 일어났다든지, 신음소리들과 함께 귀에서 피가 흘렀던 등, 그 상황은 너무도 참혹했던 것입니다. 거기다 또 기관실(機關室)의 스팀파이프가 터져서, 스팀이 "확"하고 쏟아져 나왔던 때문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뜨거운 증기 때문에 사망했던 사람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당직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운 좋게도 자리에 누워 있다가 그런 일을 당해서, 별 부상 없이 구조가 되었습니다만, 하지만 또 그 폭음(爆音)이 들렸던 순간에는 저 역시도 깜짝 놀랐을 뿐만 아니라, 그 순간부터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귀머거리 상태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九)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만약에 세 번의 폭발이 있었고, 그러자 또 3500명이나 되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져나갔다고 생각을 해보면, 그 안에서는 아마도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저는 그 외에도, 그와 비슷했던 많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상태는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그리고 또 기록된 증언(證言)들을 살펴봤어도, 그 폭발순간부터 배가 침몰했을 때까지의 시간이 불명(不明)했다는 점과, 그런데도 그런 혼란 속에서 3천 명이란 사람들이 구조되었다면, 누가 생각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란 것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그 증언들을 토대로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때, 그 폭발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것은 또, 그 3천 명이나 되었던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전부 구조되었다는 사실이 증명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만약에, 정말로 기뢰(機雷)에 의한 폭발이었다면, 분명히 50미터정도의 수주(水柱-물기둥)는 생겼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러나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경우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수중(水中)에서 폭발물이 폭발했을 때는, 수주(水柱)는 당연히 생기는 것이며, 그럴 경우에는 함교(艦橋)나 갑판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수주(水柱)의 물벼락에 의해서 바다 위로 쓸려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데 증언자들 중에서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증언을 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뢰(機雷)에 의한 폭침설(爆沈說)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舞鶴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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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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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마이즈루 灣-적색 동그라미 부분이 폭침순난현장>

 

 

 2. 계속...

 그런데 또 당시,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 승선(乘船)했던 승조원(乗組員)들은, 선장(船長)부터 시작해서, 아무도 그 항해(航海)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 내용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그러니까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이었던 8월 18일경에, 세이칸연락선(靑函連絡船) 대신 임무를 끝내고 하코다테(函館)에서 오오미나토(大湊)로 돌아왔던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서는, 당연히 소집해제(召集解除)나 복원(復員) 명령이 내려질 줄 알았지만, 그러나 갑자기 부산(釜山)으로 출항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당시, 그 부산(釜山)까지의 바다에는 엄청난 양의 기뢰(機雷)가 부설(敷設)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승조원(乗組員)들은 그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거기다 또 마땅한 해도(海圖)조차도 없었던 데다, 꼭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에 의해서 배가 침몰하거나, 그들에게 붙잡혀서 포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그 명령을 거부했다고 한다.

 거기다 또 별 특별한 임무도 아닌, 겨우 조선인(朝鮮人)들을 본국으로 데려다주기 위해서 그런 항해를 해야 한다는 것에 그들은 분노했다고 하고, 그것은 또 당시, 전쟁이 모두 끝났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명령지휘계통의 기능(機能)도 거의 와해되어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질서도 거의 붕괴되어서, 혼란(混亂)과 반란(反亂)까지도 일어나고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동요(動搖)는 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당시, 그런 혼란 속에서 탈주(脫走)를 했던 승조원(乗組員)까지 생겼을 정도였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그 진압을 위해서 그 배에는 헌병(憲兵)까지 올라가서 통제를 했다고 했고, 그리하여 8월 21일에는 총원(總員) 집합명령이 내려졌던 가운데, 그 석상(席上)에서 오오미나토경비부(大湊警備府)의 한 참모(參謀)가 나타나서 강력하게 부산으로 출항할 것을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그 명령에 대해서 불신(不信)의 태도를 보였다고 했는데, 그러자 그 참모(參謀)는 도검(刀劍)을 빼서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겠다고 협박을 했고, 그러자 승조원(乗組員)들은 더 이상 반항하지 못했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그 다음날 밤 10시경에, 오오미타토항(大湊港)을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출발은 했다지만, 그러나 또 그들은 곧바로 부산(釜山)으로 출발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의 해안이 눈에 보이는 위치에서 남하(南下)를 계속했다는데, 그래서 또 그 배의 기관장(機關長-野澤忠雄 元少佐)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함장과 항해장 그리고 고참 사관(士官) 2, 3명과 하사관대표 몇 명과 협의를 해서, 부산(釜山)으로 가지 않고, 일본의 적당한 항구에 입항하기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지는 함장 등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자신은 알지 못했다고 하며, 그러나 또 그 대충은, 우라니혼(裏日本-보통, 우리의 東海 측 해안을 말함)의 어느 항구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操舵長 齊藤恒次 等)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때 그들의 목적지는 거의 마이즈루(舞鶴)로 알고 있었다고 했고, 그것은 또, 함교(艦橋)에서도 처음부터 그렇게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조선인(朝鮮人)들을 조선(朝鮮)으로 보내는 책임을 맡았던 인솔책임자(日通勞務係 高橋嘉一郞)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고 증언을 했고(NHK의 爆沈에서), 그래서 그 외에도 일부의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당시의 항해사(航海士-田寺伸彦)는 다른 증언을 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또 그는, 그때 자신들은 진해(鎭海) 만(灣)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으며, 그러나 또 24일 이후부터 대형함선의 항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마이즈루(舞鶴)에 입항했을 때, 그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전쟁이 이미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배 안에서는 평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하사관들을 수병(水兵)들이 보복(報復) 폭행했던 일이 발생했을 정도로 규율이 문란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때, 통조림통으로 머리에 부상을 당했던 어떤 하사관은, 배가 폭침되었을 그때 자리에 누웠던 채로 사망했는데, 그런데 나중에 전사(戰死)로 처리되었던 일도 있었다고 하고, 또 어떤 하사관 한두 명은 그런 것을 두려워해서 아예 바다로 몸을 던져서 행방불명되었던 사람도 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들 역시도 전사(戰死)로 처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때, 그 배에 함께 승선해있었던 조선인(朝鮮人) 이영출(李英出) 씨는,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출항(出航)했던 후에, 일본군 병사들이 술을 가지고 나와서 마시며 소동을 피웠다고 증언을 했고, 그리고 또 어떤 병사들은 술에 취해서 모포(毛布) 등을 바다로 던졌던 등, 소란을 피웠기 때문에 몹시 두려웠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음은 당시,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항해장(航海長 倭島定雄)의 증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때, 군함기(軍艦旗)를 내걸고, 천천히 입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두 척의 해방함(海防艦)이 조용하게 입항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 항로(航路)를 따라서 천천히 들어갔던 것이었지요. 그리고 잠시 후, 마이즈루(舞鶴)에서 "소해(掃海) 완료"란 신호를 받고 입항을 개시했는데, 그런데 저는 그 마이즈루(舞鶴)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앞의 그 두 척의 배를 따라서 충실하게 항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났고, 그러자 저는 그와 동시에 공중으로 떠올라서는 그 옆으로 나가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급히 다시 일어나서 살펴보니, 배는 그대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그래서 괜찮은가 싶었는데, 하지만 결국 반으로 잘라진 채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배에 화재(火災)도 발생하지 않았고, 수주(水柱-폭발 등으로 인해서 기둥처럼 공중으로 솟구치는 물줄기)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방비대(防備隊)가 달려와서 저는 구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당시, 해로(海路)를 계산하고 있었던 항해사(航海士 田寺伸彦)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마이즈루(舞鶴)에 입항(入港)했을 때, 저는 함교(艦橋)에서 함장(艦長)과 조타수(操舵手) 등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해방함(海防艦)은 약 300미터 정도 앞에서 전진하고 있었고요. 그래서 우리는 정확하게 그 항로를 따라서 입항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쾅"하던 소리가 들렸고, 그러자 그 순간에 우리는 마치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모습으로 붕 떠서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지요. 그러자 함장(艦長)이 큰 소리로 "항해사(航海士), 위치(位置)는?!"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자 저는 얼른 일어나서 해도(海圖)와 컴퍼스로 충실하게 그 위치를 산출해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마이즈루(舞鶴) 만내(灣內)였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일상의 습관이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 함장(艦長) 역시도 그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서, 아마도 그렇게 저에게 위치를 물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또 그때, 갑판(甲板)에서는 많은 수병(水兵)들이 입항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래서 또 그 중에서 2등병조(二等兵曹)였던 하세가와(長谷川)란 사람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

 <배가 폭발했을 때, 우리는 갑판에서 입항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러자 우리는 공중으로 붕 뜬 채로 날아가서 갑판에 나뒹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잠시 무아지경상태로 있었는데, 그러자 그때, 함(艦) 내(內)에서도 혼란이 발생했고, 그러자 또 커터(cutter-군함에 싣는 대형보트)를 내리는 사람, 갑판 위를 뛰어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던가 하면, 조선인(朝鮮人)들은 필사적으로 갑판 위로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또 "아이고, 아이고"하는 소리와 함께, 여성들의 절규와 아이들의 비명소리 등, 그 혼란은 완전히 극(極)에 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 배에서 내려졌던 커터(cutter)의 줄이 끊어져서, 그 커터(cutter)가 바다 속으로 추락하던 사고도 목격되었는데, 그래서 그때, 그곳은 완전히 지옥(地獄) 그 자체였습니다...>

 

 

 

 

 

 

 

 


<舞鶴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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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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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그리고 또 아래는 위의 설명에 대한 보충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편의상, 번호를 붙임.


 2. 1945년(昭和20年) 8월 24일 오후 5시가 넘어서, 22일 밤 10시에 오오미나토(大湊)를 출항(出航)했던 우키시마마루(浮島丸-총 4.730t, 全長 114.79m, 航海速度 14노트, 全速 17.95노트)가 마이즈루(舞鶴)에 기항(寄港)하기 위해서 그 앞 바다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는 255명의 해군(海軍)들과, 조선인(朝鮮人) 3.735명이 승선(乘船)해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증언 등에 의하면, 그보다 훨씬 많았던 사람들, 즉 4000명 또는 6000명 또는 8000명하고도, 수백(數百) 명 정도가 승선해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배(浮島丸)는 화객선(貨客船)이었기 때문에 정원(定員)이 860명이었다. 그랬는데도 그 배에는 정원의 10배나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선저(船底)에서부터 갑판(甲板)까지 꽉 들어차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무게 때문에라도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더욱 속도를 내지 못하고 천천히 그 만(灣)으로 들어갔고, 그리고 또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때, 그 선내(船內)의 객실(客室)들은 해군(海軍)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조선인(朝鮮人) 노동자들은 탄약고(彈藥庫)와 기관실(機關室) 사이의 중갑판(中甲板)과 선창(船倉)에 밀어 넣어져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그 배의 밑바닥에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양의 자갈이 적재되어있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또 나머지 조선인(朝鮮人)들은 그 자갈 위에다 깔았던 나무판자 위에도 많이 밀어 넣어져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그때, 같이 승선해있었던 한 병사(長谷川)는, 자신은 6000에서 8000명 정도가 그 배에 승선(乘船)해있었다고 들었다고 하면서, 정부의 발표에 대해서 의아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세이칸연락선(靑函連絡船)의 대체(代替)로 운행(運行)했을 때, 선저(船底)에는 사람이 없었던 상태로 4000명 정도가 승선(乘船)해있었으며, 오오미나토(大湊)에서 태웠던 조선인(朝鮮人)들은 공간이 없어서 선저(船底)까지 쑤셔 넣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최소 4000명 이상, 총 6000명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을 했던 사람(齊藤)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당시, 마이즈루(舞鶴) 만구(灣口)는 좁아서, 그 폭이 1킬로미터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는데, 그런데다 특히 그날은 입항(入港)하는 함선(艦船)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앞에는 두 척(隻)의 해방함(海防艦)이 입항(入港)을 하고 있었던 중이었다고 하며, 그 항적(航跡)을 따라서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항구로 천천히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그 배에 타고 있었던 승조원(乗組員)들 중에서, 그 만내(灣內)의 지리(地理)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고, 거기다 해도(海圖)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또 패전(敗戰) 시(時)에 전부 소각시켜버렸던 때문이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들은 기뢰(機雷)가 어디에 얼마나 부설(敷設)되어 있었던 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고, 단지 가지고 있던 일반보통지도만으로 짐작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앞으로 닥쳐올 위험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또 그들은 앞서갔던 그 해방함(海防艦)의 뒤만 따라서 갔을 뿐이었지만, 그리고 또 당시, 그 해방함(海防艦)이란 것도 천 톤도 되지 않았던 소형(小型)의 연안경비용(沿岸警備用) 해군함선(海軍艦船)이었고, 그런데다 또, 좁고, 몹시 붐비던 장소였기 때문에,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매우 느린 속도로 항구로 진입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또 그때, 목격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시속(時速) 약 10킬로에서 15킬로 정도로 움직이고 있었다고 한다.

 

 


<마이즈루 灣-적색 동그라미 부분이 폭침순난현장>

 


 아무튼,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그렇게 바쿠치미사키(博奕岬-舞鶴灣口)로 들어와서, 토시마(戶島)를 정면(正面)으로 보면서 전진(前進)했고, 그런 다음 산본마츠하나(三本松鼻-또는 산본마츠바나)와 요코나미하나(橫波鼻-또는 요코나미바나)를 지났을 때, 왼쪽으로 진로(進路)를 꺾어서, 히가시마이즈루항(東舞鶴港)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또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한 승조원(乗組員)의 증언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았다.

 <마이즈루(舞鶴)에 입항했을 때, 우리는 그 마이즈루(舞鶴) 항만(港灣)을 관리하고 있었던 마이즈루해방대(舞鶴防備隊)와 수기(手旗)로 연락(連絡)을 취했고, 그래서 앞의 그 해방함(海防艦) 두 척(隻)이 무사히 입항(入港)했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는 입항(入港)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때 조타(操舵)를 맡지 않고, 다른 수병(水兵)이 그것을 맡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때, 배의 속도는 너무 느렸고, 엔진들도 거의 정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거의 타성(惰性)으로 운항(運航)을 했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또 그때, 함교(艦橋)에서 정찰을 하던 수병(水兵)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만약에 기뢰(機雷)가 바다 위에 떠있었다면, 분명히 그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그때까지 그런 부유(浮遊)기뢰(機雷)가 발견되면, 배에서 기총소사(機銃掃射)해서 그것을 폭발시켰던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입니다...>

 

 


<長浜五森-해상보안학교 위치도>

 



 그런데 또 당시, 그 수기(手旗)로 연락을 취했다던 곳은, 현재의 해상보안학교(海上保安學校)의 자리에 있었던 본청(本廳) 나가하마이즈모리(長浜五森)에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은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수기(手旗)를 보내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던 곳이었는데, 그래서 또 추측해보면,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서 그 수기(手旗)를 받았을 때는,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폭침(爆沈)하기 바로 직전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기록(記錄)에 의하면, 그 근처에 마이즈루방비대송신소(舞鶴防備隊送信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또 그곳은 지금도 자위대(自衛隊)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곳이며, 그래서 또 그 안에 뭔가가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원인 모를 사고로 폭발하고 말았고, 그리고는 400미터 정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후, 카라스지마(烏島) 285도(度) 1080미터 지점(地點)에서 침몰했는데, 그때의 시간은 오후 5시 20분 또는 15분경이었고, 수심(水深)은 18미터였다.


 

 

 

 

 

 

 


<舞鶴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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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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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그리고 또 아래는 위의 설명에 대한 보충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편의상, 번호를 붙임.

 1. 일본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희생자는, 조선인(朝鮮人) 노동자 3725명 중 524명, 승원(乘員) 255명 중 25명, 합계 549명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의 생존자 등의 증언(證言)에 의하면, 그때 그 배를 타고가기 위해서 함께 뛰어들었던 사람들을 포함하면, 그 사망자의 수는 2천 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망자 또는 희생자들의 숫자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또, 1945년 8월 21일에, 일본의 정부차관회의(政府次官會議)에서 강제(强制)이입(移入) 조선인(朝鮮人) 등의 징용(徵用)해제방침이 결정되었고, 그 다음날, 그들의 귀환(歸還)수송(輸送)문제를 타진하는 회의가 개최되었지만, 그러나 정작,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 송환명령(送還命令)이 내려졌던 것은 8월 19일이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교토지방재판소(京都地裁)는 <강제 연행되었던 조선인들이, 연합군의 진주(進駐)와 소련군의 진군(進軍)에 호응해서 폭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했던 일본정부는, 그에 안전을 확인하지 않고, 급하게 그들을 귀환시키려고 했었다>고 그때의 상황을 인정했던 바 있었다.(2001년 8월 23일)

 그리고 또 그때, 마이즈루(舞鶴)에 기항(寄港)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승객(乘客)들에게는 <물의 보급(補給)>을 위해서라고 설명되었지만, 그러나 승원(乘員)들에게는 <하선(下船)을 준비(準備)...>라고 했다는 증언(證言)도 있었고, 그리고 또 8월 24일 18시 이후부터 모든 선박의 항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부산(釜山)으로 갈 계획이 아예 없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리고 또, 그 폭발의 원인에 관해서도, 당시 마이즈루(舞鶴) 만(灣)에는 미군(美軍)의 기뢰(機雷)들이 상당히 많이 부설(敷設)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선체(船體)를 인양했을 때, 그 폭발의 원인에 대해서 조사를 정확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래서 또 그 진상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목격자에 의하면, 그 선체를 인양했을 때, 선체(船體)의 구멍이 바깥쪽으로 향해있었다는 증언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기뢰(機雷)에 의해서 폭발했다>는 주장과는 모순이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런데다 또 당시, 승조원(乘組員)들의 가족들 사이에서는, 그 배가 출항했을 때, 그 배 안에 화약(火藥)이 적재되어있었다든지, 폭파장치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등, 소문이 난무했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때의 생존자들과 유족(遺族)들 등, 한국인 80명이 일본을 상대로 그 손해배상을 위한 소송(訴訟)을 청구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일본 법원은 처음에는 그 책임에 대해서 일부 인정을 했으나(大阪高裁・岡部裁判長-5월 30일), 그러나 또 그 후에 판결이 번복되었던 것이다.(京都地裁判決)

 하지만 그것은(京都地裁判決) 지극히 부당(不當)하고, 차별적(差別的)이고, 반동적(反動的)인 것이었으며, 그래서 또 그것은 범죄적(犯罪的)인 결과였다고 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또, 그리고 또 물론, 그 재판에서 직접적으로 쟁점(爭點)화 되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들의 요구가, 일본이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해서 다양한 노동(勞動)으로 혹사(酷使)시켰고, 거기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 강제징용이 해제되어서 안전하게 고국(故國)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었음에도, 일본은 그들의 그런 권리조차 침해했다는 것 등과 함께, 당시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가했던 전쟁범죄(戰爭犯罪)에 대한 일본정부의 성의(誠意)표시로 <사죄(謝罪)와 배상(賠償)>을 원했던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 판결(判決)에서 재판장(裁判長)은 그런 점을 전혀 무시(無視)했던 때문이었고, 그래서 또 현재까지도 일본정부는 그것에 대해서 전혀 인정을 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 등을 그 이유로 내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에 대해서 일본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그때는 전시(戰時)였기 때문>이라는 논리(論理)를 펴고 있고, 그래서 또 <그 희생자들에 대해서 국가(日本)는 어떠한 책임도 질 수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의 인권(人權)을 무시했던, 너무도 무책임한 판결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그것으로 봐서도, 일본은 앞으로도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얼마든지 그런 자세로 다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란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그래서 또 그러한 것이, 그 사건이 발생한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그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시 그때의 상황을 한 번 더 확인해보면, 일본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그 조선인들은(輸送船 浮島丸-4730톤-에 乘船했던) 전시(戰時) 중에 아오모리(靑森-일본 東北지방 북단의 현)의 해군(海軍)시설과 비행장 등의 건설 등에 강제 연행되었던 징용공(徵用工)들과 그 가족들이었고, 그 수는 3735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524명이 희생되었다고 했는데, 그 폭발원인에 관해서는 또, 여러 가지의 소문들 중에서도 <그 배를 타고 조선인들을 부산(釜山)으로 호송한 후, 조선인들에게 붙들려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데 두려움을 느꼈던 승조원(乗組員)들이 출항을 반대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그 배를 폭파했다고 하는 폭파공작설(爆破工作說)>이 있었고, 그래서 또 군(軍)이 어떻게든 관련되었다고 했던 자침설(自沈說) 등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난무했던 소문들이 있었음에도 일본정부는 그에 대해서 정확한 조사도 실시하지 않았고, 그래서 또 일관되게 <미군(美軍) 부설(敷設) 기뢰(機雷)에 의한 침몰(沈沒)>이라고만 일방적으로 발표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위의 판결은 그런 일본정부의 입장을 대변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아오모리(靑森)에는 약 21000명 정도의 조선인(朝鮮人)들이 강제 연행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당시, 그러니까 전쟁말기에 일본은 미군(美軍)과의 <본토(本土)결전(決戰)>에 앞서서, 그들을 시모키타반도(下北半島-靑森縣 北東部에 있는 半島)의 요새화(要塞化)와 철도(鐵道)건설, 탄약(彈藥) 등의 자재(資材) 비축(備蓄)을 위해서 강제 투입시켰고,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극히 과혹(過酷)했던 노동에 시달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 일본은 패전(敗戰)했고, 그러자 또 일본은 그들을 다시 한반도로 무사(無事) 귀환(歸還)시켜줄 책임이 있었으며, 하루빨리 그에 대한 보상과 사죄를 할 책임과 의무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조선인(朝鮮人)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그 치안(治安)상의 이유>로, 그리고 또 소위 <얏카이바라이(厄介払い)> 즉 <귀찮은 것들을 내쫓아버린다>는 태도로, 그들은 한반도로 내쫓을 궁리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 의한 귀환(歸還) 계획(計劃) 또는 작전(作戰)>이었고, 그래서 또 그들 즉, 조선인(朝鮮人)들은 그때 <군사물자(軍事物資)>로 취급되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의 표현으로 <것들> 또는 <놈들> 또는 <자신들에 불리한 증거물(證據物)> 또는 <폐기(廢棄)>의 대상이 되어서, 그 배 안으로 밀어 넣어졌던 것이다. 그랬으므로 그것은 분명한 <민족차별(民族差別)>이었으며, 그래서 또 일본은 그에 대한 책임이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역시, 위의 판결로 <자신들의 반성(反省) 없음>을 표현했던 것이었고, 그것으로 또 <일본의 무책임(無責任)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그 사건이 발생했던지 9년 이상이나 그 배의 인양을 하지 않았으며, 그것으로 또, 그때의 희생자들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가운데, 그 바다 속에서 잠들어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 사건에서는 그렇게 많은 의문들과 불명확(不明確)한 부분들이 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그때 왜 일본정부는 그렇게 급하게 조선인(朝鮮人)들을 귀국시키려고 했느냐>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그 사건을 보고했던 정부(政府)의 자료를 보면 <(조선인 노동자들 다수(多數)가) 연합군의 진주(進駐)를 극도(極度)로 두려워했던 때문이었던지, 조선(朝鮮)으로 보내줄 것을 호소하면서, 불온(不穩)의 조짐까지 보였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그래서 또 일본은 그런 결정을 급하게 내렸던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또 왜 갑자기 진로(進路)를 변경해서, 그것도 하필이면 마이즈루(舞鶴)에 기항(寄港) 시키려고 했던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또,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당시의 증언자들의 증언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그리고 또 그 외에도, 그때의 희생자들의 숫자가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으며, 그리고 또 그때, 그 배를 함께 타고가기 위해서 배에 달려들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그 숫자는 정부 측에서 발표했던 수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에 대한 증언으로, 당시의 선원(船員)들 중에서는, 자신의 경험상 그 배에 승선(乘船)했던 사람은 5600명 이상이었다는 증언도 있었고, 그 사망자들의 유체(遺體)를 처리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 수가 5600 이상이었다는 증언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사후(事後)처리가 미흡했다는 것은 이미 언급되었지만, 그러나 또 그때 희생되었던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일괄 전몰자(戰歿者)로 처리되어서 연금(年金)까지 지급되었지만, 그러나 조선인(朝鮮人)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이나, 사죄도 없었던 것이다.

 

 

 

 

 

 

 

 

 

 

 

 

 

 

 

 


<舞鶴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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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은,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에 발생했던 사건이었고,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서 귀국(歸國)을 하던 우리 동포들을 태우고 부산(釜山)으로 향하던 도중에 발생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설(說)이 분분하며, 일본정부도 그에 대한 해명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 진실과 멀어져 있는 것이 또 바로 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또, 그 중에는 본인처럼, 그런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거나 또는 그런 사건이 있었던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2012년 8월 24일), 그 사건이 발생했던 날을 맞이해서, 다시 그 사건의 대강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니, 지금도 그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고 계시는 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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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사건(事件)은, 일본(日本)의 패망(敗亡) 직후였던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에, 마이즈루(舞鶴)항구, 교토 부(京都府) 마이즈루시(舞鶴市) 사바카(佐波賀) 앞바다 약 300m 지점에서, 일본해군특설운송함(日本海軍特設運送艦) 우키시마마루(浮島丸-4,730톤, 乗員 255名)가, 3,725명의 한국인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태운 채로, 갑자기 원인불명상태로 침몰했던 사건이었다.

 

 


<靑森>


<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그런데 갑자기 연합국의 사령부(司令部)에서, 8월 25일 오전 0시 이후로, 백 톤 이상 선박의 항행을 금지시켰고, 그래서 일본정부는 그때 항행 중이던 선박들에게, 제일 가까운 항구로 입항할 것을 지시했는데, 그래서 결국, 우키시마마루(浮島丸)도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되었던 마이즈루(舞鶴)항구로 입항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 연락은 오오미나토(大湊)에 전해져서 마이즈루(舞鶴)로 연락되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하지만 또, 그 무선(無線)상태가 좋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마이즈루(舞鶴)에서는 소해(掃海) 등, 그 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또 당시, 함교(艦橋)에서 근무했다던 어떤 선원의 증언으로는, 그때 마이즈루(舞鶴)에서는 소해정(掃海艇)을 준비하지 못해서, 당시의 주력(主力)이었던 어선 형(漁船型)의 목조소해정(木造掃海艇) 2척(隻)으로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항로(航路)를 선도(先導)지시했다고 했는데, 거기다 우키시마루(浮島丸) 선내(船內)에서는, 마이즈루(舞鶴)에 기항(寄港) 시(時), 항해(航海) 요원(要員) 이외의 육해군(陸海軍 또는 砲備員 포함?)들도 하선(下船)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선내(船內)에서는, 그 급거(急遽)의 사태(事態)로 인해서 몹시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던 중에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갑자기 침몰(沈沒)했고, 그러자 또 그 원인은 기뢰(機雷)의 폭발에 의한 선체(船體)의 손상(損傷)과 침수(浸水)가 원인이었다고 발표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자기기뢰(磁氣機雷)에 관해서는, 일본(日本) 해군(海軍)의 현외전로(舷外電路-浮島丸는 装備)를 이용해서 조기(早期-事前폭발제거) 폭발이 가능했다고 했지만, 그러나 음향기뢰(音響機雷)에 대해서는 소해정(掃海艇)에 의한 음향발신기(音響發信機-영어로는 fixer라고 불렀다고 함)로의 선도(先導)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참고: 현외전로(舷外電路)는 소자(消磁)코일이라고도 하며, 선체(船體)에 흐르는 자기(磁氣)를 없애는 장비(裝備) 또는 장치(裝置)를 말한다. 그리고 또 그 이유는, 지구(地球) 자체가 아주 큰 자석(磁石)이기 때문에, 그래서 쇠로 만들어진 배 등에는 자연스럽게 자기(磁氣)가 흐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또 그것을 이용하려는 바다 속에 설치한 자기(磁氣)나, 음향기뢰(音響機雷)를 피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것은, 그 전로(電路)에 전류를 흐르게 해서 그런 기뢰(機雷)의 탐지를 무력화시키려는 장치라고 할 수 있으며, 하지만 또 그 실제 모습을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또 예를 들어서, 뱃전에 띠처럼 둘려진 형태로 설치된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그 형태는 절연코일 또는 전선(電線)을 여러 겹으로 다발을 지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또 그때, 마이즈루(舞鶴)에서는 그런 연락을 너무도 갑작스럽게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우키시마루(浮島丸)를 충분한 대비도 없이 만내(灣內)로 진입시키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 때문에, 해저(海底)에 부설(敷設)되어 있었던 기뢰(機雷)에 자함(自艦-浮島丸))의 디젤엔진소리가 반응되고 말았고, 그러자 또 기뢰(機雷)가 자동 폭발되어서 그런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때, 그 기뢰(機雷)는 수압식(水壓式)의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러나 부유식(浮遊式)의 가능성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기뢰(機雷)는 기관 부(機關部) 부근의 선저(船底) 바로 밑에서 폭발했다고 했고, 그 폭발음은 또, 그 마이즈루(舞鶴) 만(灣)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에 반향(反響)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때, 그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 중에는, 몇 번의 폭발이 계속해서 이어졌던 느낌을 받았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충격파(衝擊波)로 인해서 선체(船體)는 단번에 급격하게 위로 치솟았는데, 그런 다음 다시 물에 빠졌을 때는, 저항피로(抵抗疲勞) 즉, 수면(水面)에 부딪혔던 충격으로 인해서 선체(船體)에 균열(龜裂)이 생겼고, 그 때문에 또, 배 안으로 물이 급격하게 들어갔으며, 그 후에 침몰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그것은 또 선저(船底) 폭발 특유의 피해였다고 한다.

 단, 사전(事前)에 그런 위험한 상황을 경계해서 배를 연안(沿岸)에 바짝 접근시켜서 항행을 시켰고(그 때문에 폭발 후에 구조활동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고 함), 그리고 또 배 안에 탔던 사람들도 미리 갑판으로 유도했던 등, 나름대로 방비를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나마 피해의 확대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침몰의 원인이 기뢰(機雷)였다는 증거로는,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證言)들과 함께, 선체(船體)의 손상상태였다고 했는데, 그래서 또 그에는, 해저(海底) 부설(敷設) 기뢰(機雷)에 의한 폭발(爆發)충격파(衝擊波) 특유의 구조(構造)단열(斷裂)상황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런 대형선(大形船)에서 내부(內部) 폭발이 일어날 경우, 상부(上部)의 구조물(構造物)들이 파괴될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그 배에서는 폭발로 인한 구조물들의 비산(飛散)과 선체(船體)의 큰 팽창으로 인한 폭파공(爆破孔) 등이 없었다는 점 등을 예로 들었다.

 그리고 또 그때, 그러니까 그 폭발 후에, 아주 심한 해저(海底) 물질(物質-진흙 등)이 위로 떠올랐던지, 해면(海面)이 아주 탁(濁)했고, 그래서 또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물 위로 떠올랐던 사체(死體)들과 조난자(遭難者)들은 진흙투성이 상태였다는 것을 예로 들었으며, 거기다 조난자(遭難者)들과 회수(回收)된 유체(遺體)들, 그리고 구조된 사람들의 부상이나, 상처의 상태를 봤을 때도, 화상(火傷)이나, 큰 손상(損傷), 즉 절단(切斷)이나 갈가리 찢어진 상태 등이 없었다는 것 등을 그 예로 들었다.

 그래서 또 그 모든 상황으로 추측했을 때, 당시 미군(美軍)이 해저(海底)에 부설(敷設)했던 2천 톤 급의 음향식기뢰수뢰(音響式機雷水雷)의 폭발이 그 원인이었다고 인정(認定)했으며, 미군(美軍) 측에서도 그것을 <기뢰(機雷)에 의한 전과(戰果)>의 하나로 공식(公式) 인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세상에는 온갖 소문과 풍설(風說)이 난무했으며, 그러던 중에 또 <우키시마마루(浮島丸) 자침설(自沈說)>이라는 것까지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부정(否定)되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또 어쨌든, 그와 관련되었던 이야기들에 대해서 소개를 하면, 아래와 같다. 그리고 편의상, 번호를 붙입니다.

 1. 그 사건이 발생하기 수일(數日) 전이었던 8월 19일에, 일본 해군이 병원선(病院船)이었던 제2히카와마루(第二氷川丸-원래는 네덜란드 배였던 Op ten Noort)를 해상(海上)에서 폭파 처리했던 일과의 혼동(混同)되었다. 단, 그 상세한 내용은 본 글의 내용과 관계가 적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2. 종전(終戰) 후,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서 근무했던 병사들의 사기(士氣)가 매우 저하되었고, 그래서 또 일부의 하사관(下士官)들이 부산(釜山)으로 가는 것을 거부했던 등, 항명(抗命)행위가 있었다.

 3. 당시, 국제법위반이었던 미군(美軍)에 의한 기뢰(機雷) 부설(敷設)에 관해서, 일본정부는 직접적인 비난을 하지 않았었고, 전후(戰後)에도 일관되게 그 사건 등에 관해서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그해서 오히려 그것이 그 사건에 관한 억측(臆測)을 양성(釀成)시켰다.

 4. 거기다 일본정부는 그 사건 후, 9년간이나 침몰된 선체(船體)를 인양(引揚)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또, 그 선체(船體)와 유체(遺體)들은 그때까지 해저(海底)에 방치되어 있었다는 점. 그래서 당시 일본정부에 대한 비난이 높았다. 하지만 인양(引揚)은 지지부진하던 중에 결국 실행은 되었지만, 그러나 또 그것은 항로(航路)의 안전 확보와 유체(遺體)의 수습이 아닌, 당시 고등(高騰)했던 철재(鐵材)의 획득이 목적이었다.

 5. 그리고 또 당시, 그런 대(大)재해(災害)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신문(新聞)들은 그 기사(記事)를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또 당시, 전쟁희생자들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았기 때문에, 그래서 배 한척 침몰했던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당시, 그 배의 생존자들은 거의가 구조되었거나, 자력(自力)으로 탈출해서 생존했다고 했으며. 그리고 또 그때, 그 폭발소리를 들었던 주변(佐波賀)의 어민(漁民)들은 어선(漁船)을 타고 나가서 조난자(遭難者)들을 구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어민(漁民)들은 자신들의 철칙이라고 할 수 있었던 <바다의 불문율(不文律)>이란 것에 의해서 <여자와 아이 우선, 군인들은 뒤에>라는 순서로 구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해군(海軍) 측에서도 군함을 보내서 구조활동에 참여했다고 하며, 조난자(遭難者)들은 당시, 식량이 극도로 부족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어민(漁民)들이 당시로서는 아주 귀했다고 할 수 있었던 고구마를 쪄서 제공했으며, 신발 등도 제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군(軍)의 지시에 의해서 타이라(平)해병단(海兵團-日帝시대에, 軍港의 警備防衛와 下士官, 新兵들의 補欠員의 艦船部隊에의 補充, 敎育訓練 등을 맡았던 陸上部隊)에 수용되어서 마른 옷과 모포 등을 지급받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때, 많은 유체(遺體)들이 물 위로 떠올랐는데, 그러자 그것은 마츠가사키(松ヶ崎) 해병단(海兵團)에서 수습했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가 전후(戰後)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그레서 더 이상의 조선인(朝鮮人)들의 유체(遺體) 인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또 나중에 인양(引揚)되었던 유골(遺骨)은 약 370주(柱) 정도였다고 했고, 그것도 동일인의 것들이 많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도 동경(東京)의 정토종(淨土宗) 유텐지(祐天寺)에 안치(安置)되어 있다고 하며, 그 후에 한일(韓日) 정부 간에 반환 검토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舞鶴浮島丸殉難碑>

 


 그리고 그 후, 유지(有志)들에 의해서 매년, 그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追悼)사업이 행해졌으며, 그리하여 1978년에 33회기(回忌)를 맞이해서, 그 침몰지점을 내려다보이는 산기슭(下佐波 賀地區)에 <우키시마마루순난(浮島丸殉難)의 비(碑)>가, 마이즈루시(舞鶴市)와 그 시민(市民)들의 기탁(寄託)으로 건립되었다. 그리고 1992년에 당시의 생존자 21명(認定 15명)과 유족(遺族) 59명이 일본을 상대로, 당시의 안전관리의무위반의 책임으로 배상금(賠償金)과 함께, 일본 중참양원(中參兩院)의 사죄를 요구했던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제소했지만, 그러나 일본은 그 배의 침몰 원인이 기뢰(機雷)에 의했던 것이었다는 이유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2003年5月 大阪高裁判決)







 

 

 

 


<舞鶴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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