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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백두산 천지-중국 측에서 바라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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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다음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관계해서 여러 사람들의 견해를 정리한 것을 참고로 올려드리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라며, 그리고 편의상 번호를 붙여서 소개합니다. 그리고 또, 다소 위의 글과 중복되는 것도 있다는 것도 미리 알려드립니다.

 1) 먼저, 발해(渤海)에 대한 각국(各國)의 역사적(歷史的)인 평가(評價)는 서로 다르며, 한국(韓國)에서는 당연히 한민족(韓民族) 또는 한반도의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근년(近年)에 들어서 중국(中國)은 발해(渤海)가 과거 중국의 지방정권 중 하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즉 중국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이유는, 한반도가 통일된 후에 나타날 국경문제와, 현재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조선족(朝鮮族)들의 귀속문제에 대해서, 사전에 견제할 목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또, 장래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한반도의 남북통일(南北統一) 후에 발생할 수 있는 민족주의(民族主義)에의 대처와, 국내적으로는 길림성(吉林省)의 관광 진흥의 목적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 측의 발표에 의하면, 2007년 2월에 종료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현재도 진행 중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그리고 또 현재, 중국의 동북지방에는 길림성(吉林省) 연변(延邊)의 조선족자치주(朝鮮族自治州)를 중심으로 해서 약 200만 명의 조선족(朝鮮族)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 일대(一帶)를 한국과 북한에서는 간도(間島)라고 부르고 있고, 그래서 또 간도협약(間島協約)에 의해서 중국의 영토로 되었던 것은, 1909년에 일본과 중국이 자기들 마음대로 체결했던 것이라는 인식이 한반도에서는 팽배(澎湃)해있는 실정이다. 그 때문에 또, 한국과 북한과의 영토문제의 재연(再燃)을 경계하고 있는 중국은, 그 연변(延邊) 조선족자치주(朝鮮族自治州)의 조선족(朝鮮族)들에 대해서 <당신들의 조국(祖國)은 중국(中國)>이라는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해서 한국(韓國)은 반발하고 있는 입장이며, 한국의 미디어들에서도 2004년부터 <중국의 역사왜곡비판>이란 캠페인(campaign)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또 한국의 정부는 그에 대해서 <민족사(民族史)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했으면서도, 그러나 또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술(學術) 차원의 문제로 대응하려는 입장을 취했고, 그래서 또 정부와 학계의 힘을 합쳐서 <고구려(高句麗)연구단체>를 발족하기도 했다. 그래서 또 2004년부터 한국과 중국 간에 몇 번에 걸쳐서 교섭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중국은 한국의 항의를 받아들여서, 자신의 외교부 홈페이지에 올려져있었던 한국건국(韓國建國)이전(以前)의 기술(記述)을 완전히 삭제했지만, 그러나 또 한국은 그에 대해서 납득을 하지 못했고, 그래서 또 일층(一層) 비판의 수위를 높였던 바 있었다.
그리고 또, 그에 대해서 북한(北韓)에서는 별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그러나 한국과 같이 반발이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또, 중국의 알력(軋轢)에 의해서 북한(北韓) 내의 <고구려고분군(高句麗古墳群)>들도 중국과 동시에 세계유산(世界遺産)에 등록은 되었지만, 그러나 또 고구려(高句麗) 문제에서만큼은, 한국과 함께 공동보조를 맞추려는 입장을 취했던 바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2006년에 들어서자 발해사(渤海史)와 관계해서, 백두산(白頭山)의 귀속문제에 대해서 쟁점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또, 한국에서는 <고구려연구재단(高句麗硏究財團)>이 2006년 9월에 설립되었던 <동북(東北)아시아역사재단>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국민들로부터 고구려(高句麗)의 연구가 소홀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정부에의 불신(不信)이 높아졌다. 그리고 또, 그 <동북아시아역사재단>은, 독도(獨島)의 영유권문제를 포함한, 주변국들과의 사이에서 현안(懸案)문제가 되어있었던 역사문제를 연구하는 새로운 정부기관이었는데, 어쨌든 그러자 또 한국의 정부는 <중국 측의 연구는 중국정부의 공식적인 견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취했고, 그래서 또 <중국 측에 그러한 연구 자체를 중단하게 할 수는 없다>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래서 여야(與野)의 의원들과 매스컴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 또, 위에서 소개했던 대로,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은 2006년 9월 10일 헬싱키에서 열렸던 <ASEM 首腦會議>에서, 그와 관계해서 중국 측에 유감(遺憾)을 표명했으며, 그리고 또 10월 13일에도 북한의 핵실험과 관계해서 중국을 방문했던 자리에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양국(兩國) 간의 정치적인 마찰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의견일치를 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중국의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은 한국과 북한의 반발을 고려해서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중단하겠다는 뜻을 9월 초에 홍콩 발(發)로 보도를 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여전히 불투명한 채로 남겨져 있는 것이다.

 2) 그리고 또, 중국이 한반도에 대한 역사왜곡을 처음 시작했던 것은 2004년 7월이었고, 그 후에는 여러 가지 위의 소개했던 과정들을 거쳤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1980년대부터 중국의 <소수민족(少數民族)정책>과 연동(連動)해서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그래서 또 중국이 1차적으로 목표로 했던 것은 <고구려(高句麗)를 포함한 한국의 북방(北方)고대사(古代史) 전체를 왜곡(歪曲)>하려는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중국은 2000년도 이전부터 소수민족(少數民族)들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작업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그래서 또 한국사(韓國史)의 왜곡인 <동북공정(東北工程)>뿐만 아니라 <신강(新疆)위구르지역>의 <서북공정(西北工程)>과 <티베트지역>의 <서남공정(西南工程)>까지도 동시에 진행시켰던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또, 그런 관점에서 보게 되면, 중국의 역사왜곡(歷史歪曲) 저의(底意)는 소수민족(少數民族)들의 관리(管理)에 있다고 볼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국가전략(國家戰略) 차원에서의 프로젝트>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이유는, 현재 중국은 56개의 민족들로 구성된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라는 점을 들 수 있고, 그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한족(漢族)은 약 13억 이상의 인구 중에서 91.9%를 점(點)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8.1%밖에 되지 않는 소수민족(少數民族)들이 차지하고 있는 토지가 중국 전체의 64%에 달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또 만약에 그 소수민족(少數民族)들이 모두 독립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중국의 본토는 현재의 3분의 1정도로 축소가 될 것이고, 그것은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조선족(朝鮮族)의 한 역사연구가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간도협약(間島協約) 문제와 함께 한반도 통일 이후의 상황변화, 그리고 중화(中華)적인 역사관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라면서, 그 때문에 중국은 한국과 세론(世論)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북공정(東北工程)을 강하게 추진시키고 있다고 했고, 그리고 또, 현재 중국 내에 살고 있는 조선족(朝鮮族)의 수는 약 210만 명 정도이며, 그것은 또 소수민족(少數民族) 중에서 13번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은 그 조선족(朝鮮族)을 특별관리 하에 두고 있으며, 그래서 또, 그 자치주(自治州)의 장(長)은, 통상적으로는 그곳에 살고 있는 민족(民族)들 중에서 선출될 것이지만, 그러나 그곳에서는 한족(漢族)이 장(長)을 맡아서 관리를 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조선족(朝鮮族)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전문가들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저의(底意)는 단순히 소수민족(少數民族)들의 이탈(離脫)방지책이 아니며, 북한지역의 영토에 대해서, 중국이 본격적으로 야심(野心)을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래서 또, 한반도의 통일과 그에 따른 북한(北韓)의 붕괴(崩壞)를 염두에 둔 군사전략(軍事戰略)적인 포석(布石)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다른 역사평론가는, 중국의 진짜 의도는 한국의 견제와 조선족(朝鮮族)의 이탈(離脫)저지뿐만이 아니라, 한반도통일 후의 한강(漢江) 이북(以北)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또, 그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상대는 바로 미국(美國)이며, 그래서 또, 한반도통일 후에 연합국(聯合國)이 북한(北韓)지역을 관리하기 전에, 중국이 자신들만 단독(單獨)으로 관리하기 위한 <정치적인 노림수> 또는 <사전공작(事前工作)>이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리고 또, 미국(美國)의 대북(對北)특사(特使)를 지냈던 한 관계자도, 그와 비슷하게 <북한(北韓)이 붕괴되면, 중국에 흡수 통합될 가능성이 있다>라는 발언을 했던 바 있었다.

 

 











 <계속...>











 

 

 

참고: 오늘은 사이트의 점검이 있어 많이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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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백두산 천지-중국 측에서 바라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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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여기서, 일본(日本)과 중국(中國)의 학자 또는 관련 인들의 견해들을 잠시 살펴보면, 대충 아래와 같다.
 (역시, 편의상 번호를 붙임)

 1. 하마다코우사쿠(濱田耕策-일본의 역사학자)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옥저(沃沮)를 구성했던 퉁구스계의 제족(諸族)
 고구려(高句麗) 족(族)은 퉁구스계 부여(夫餘) 족(族)의 별종(別種)

 2. 스와하루오(諏訪春雄-일본의 近世文學, 芸能史學者)

 고조선(古朝鮮)에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건국했던 부여족(夫餘族)은 퉁구스계의 유목민족(遊牧民族)

 3. Searchina(주로 중국에 관련된 사업을 하는 기업으로, search + china의 造語)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는 주몽(朱蒙)이었고, 퉁구스계의 1부족이었던 부여족(夫餘族)이었다.

 4. 황문웅(黃文雄-중국의 평론가, 經濟史연구가)

 요동(遼東)과 북(北)만주(滿洲)의 땅은, 일찍이 고구려(高句麗) 인들과 발해(渤海) 인 등, 퉁구스계의 제 민족(諸民族)들이 활약했던 땅이었다.

 5. 토리고에켄자부로우(鳥越憲三郞-일본의 학자)

 고구려(高句麗)는 1세기 말, 퉁구스계의 예맥(濊貊) 족(族)이 건국(建國)했던 나라였다.

 6. 야마카와출판사(山川出版社-일본의 교과서, 참고서, 역사관련 출판전문 업체)

 세계사용어집(世界史用語集)에서,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의 동북지방 동부(東部)의 퉁구스계 예맥족(濊貊族) 부여족(夫餘族)의 나라였고, 부여(夫餘)는 무라야마마사오(村山正雄)의 견해에 의하면 <고대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할거했던 퉁구스계라고 생각되는 민족으로, 부여(夫餘)의 건국(建國) 전승(傳乘)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것과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민족의 계통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라고 했고, 그리고 또 사사키시로(佐佐木史郞)에 의하면 <부여(夫餘)와 말갈(靺鞨)은 퉁구스계의 민족이 아니었나하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했으며, 야마카와출판사(山川出版社)의 세계용어집(世界史用語集)에서의 부여(夫餘)는 <같은 퉁구스계였던 물길(勿吉)에 의해서 멸(滅)해졌고, 백제(百濟)의 왕은 부여족(夫餘族)이었다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7. 모리마사오(護雅夫-일본의 동양학자, 역사학자)

 고구려(高句麗)는 동북아시아와 만주(滿洲)에서 4세기에서부터 6세기에 걸쳐서 살았던 퉁구스계 민족이었으며, 최성기(最盛期)에는 한반도의 태반(太半)과 남(南)만주(滿洲)에까지 세력권을 넓혔다.

 8. 이노우에미츠로우(井上滿郞-일본의 학자)

 고구려(高句麗)는 예맥족(濊貊族)의 일부에 의해서 세워졌던 나라였다.

 9. 미야와키쥰코(宮脇淳子-일본의 역사학자)

 고구려인(高句麗人)은 남(南)만주에서 반농반목(半農半牧) 생활을 했던 예맥(濊貊) 인의 일종(一種)

 10. 그리고 예맥(濊貊)은, 야마카와출판사(山川出版社)의 세계용어집(世界史用語集)에서 <기원전7세기에서 기원전 6세기 이후, 하북성(河北省) 장성(長城)지대로부터 중국의 동북지방에 걸쳐서 살았던 퉁구스계민족으로, 한족(漢族)과 몽골계에 밀려서 동쪽으로 이주했으며, 그 후에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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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발해인(渤海人-靺鞨人)에 대해서는

 1. 야마카와출판사(山川出版社)의 세계용어집(世界史用語集)에서

 <말갈인(靺鞨人)은 중국 동북부의 동부(東部)에 살았던 퉁구스계의 제족(諸族)이었으며, 6세기 반(半)경, 물길(勿吉) 붕괴(崩壞) 후의 부족(部族)의 총칭(總稱)>이라고 했다.

 2. 키쿠치토시히코(菊池俊彦-일본의 고고, 역사학자, 문학박사)

 말갈(靺鞨)은, 6세기 반경부터 중국의 동북쪽, 송화강(松花江) 유역을 중심으로 해서, 북쪽으로는 흑룡 강(黑龍江) 중류와 하류 유역, 그리고 동쪽으로는 우수리 강(烏蘇里江) 유역, 그리고 남쪽으로는 한반도의 북부에까지 세력을 떨쳤던 퉁구스계 제족(諸族)의 일파(一派)였다.

 3. 와다아츠무(和田萃-일본의 역사학자)

 발해(渤海)는 7세기 말부터 10세기 전반에 걸쳐서, 중국의 동북지방에 있었던 퉁구스계 민족의 국가였고, 고구려(高句麗)와 동족(同族)이었던 말갈(靺鞨) 출신의 대조영(大祚榮)에 의해서 건국되었던 나라였다.

 4. 모리야스타카오(森安孝夫-일본의 역사학자)

 발해(渤海)는 현재 중국의 동북지방, 러시아연방(連邦)의 연해주(沿海州), 북한(北韓)의 북부(北部)에 걸쳤던 넓은 범위를 영유(領有)하면서 번영했던 <만주(滿洲) 퉁구스계>의 민족국가였고, 그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말갈인(靺鞨人)과 고구려인(高句麗人)들이었다.

 5. 후지모토와키오(藤本和貴夫-일본의 역사학자)

 7세기에서 10세기에는 극동지방에서부터 만주(滿洲)와 북한(北韓)의 북부(北部)에 퉁구스계의 발해국(渤海國)이 세워졌다.

 라고 했던 것들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인(高句麗人)들 및 발해인(渤海人-靺鞨人)들을 <퉁구스계의 민족>이라고 보는 학설이 주류(主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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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일본의 각종 사전(辭典)들에서도...

 1. 고구려(高句麗)는 기원 전후(前後)에 퉁구스계 부여(夫餘) 출신의 주몽(朱蒙)이 세웠던 나라였고, 말갈(靺鞨)은 퉁구스족의 하나이며, 고구려(高句麗)와 인접지역에 살았던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수장(首長)이었던 대조영(大祚榮)이 발해(渤海)를 세웠는데, 흑수말갈(黑水靺鞨-粟末靺鞨의 북쪽)은 나중에 여진(女眞)이라고 불렸다.(코우지엔-広辞苑) 라고 했고

 2. 다이지센(大辞泉)에서는, 고구려(高句麗)는 기원 전후(前後)에 퉁구스계 부여족(夫餘族)의 주몽(朱蒙)이 세웠던 나라였고, 발해(渤海)는 698년에 퉁구스계 말갈족(靺鞨族)의 수장(首長)이었던 대조영(大祚榮)이 세웠던 나라였다. 그리고 말갈(靺鞨)은 중국의 수당(隋唐)시대에, 중국 동북부에서부터 한반도의 북부에서 살았던 퉁구스계의 제족(諸族)들을 중국 측에서 불렀던 이름이며, 그 7부족 중에서 속말부(粟末部)는 발해(渤海)를 건국했고, 흑수부(黑水部)는 그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고, 나중에 여진(女眞)이라고 불렸다... 라고 했다.


 3. 그리고 또, 다이지린(大辞林)에서는, 말갈(靺鞨)은 중국의 수당시대(隋唐時代)에 동북지방에서부터 한반도의 북부에 걸쳐서 살았던 퉁구스계 제족(諸族)의 총칭(總稱)이며, 물길(勿吉) 붕괴 후에, 유력한 7부족이 분립되어, 속말부(粟末部)를 중심으로 발해(渤海)가 건국되었지만, 흑수부(黑水部)는 그에 대립해서 나중에 여진족(女眞族)이 되었다... 라고 했던 등, 고구려(高句麗)와 발해인(渤海-靺鞨人)인들을 모두 퉁구스계의 민족이라고 기술했다.

 4. 그리고 또 황문웅(黃文雄)은 자신의 저서(著書)에서 <만주족(滿洲族)의 선조(先祖)가 세웠던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라는 제목으로 <고구려(高句麗)의 주요(主要) 민족은 만주족(滿洲族)의 일종(一種)이며, 고구려인(高句麗人)과 함께 발해(渤海)를 세웠던 민족이었던 말갈(靺鞨)은 퉁구스계로, 현재의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이고, 만주족(滿洲族)의 선조(先祖)였다>라고 하면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가 만주족(滿洲族)의 선조(先祖)>라고 했고, 그리고는 또 <그 반대로 만주사(滿洲史)의 입장에서 보면, 3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서 동(東)만주에서부터 연해주(沿海州)와 한반도 북부에 건설되었던 독자(獨自)의 국가가 고구려(高句麗-?부터 668년)였고, 그 고구려(高句麗)를 재흥(再興)시켰던 것이 발해(渤海-698년부터 926년)였다>라고 해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를 만주사(滿洲史)에 넣으려고 했다.

 5. 그리고 또 미나미데키쿠지(南出喜久治-일본의 법률가)는 <고구려(高句麗)를 세웠던 주몽(朱蒙)은 퉁구스계(滿洲族)였고, 한민족(韓民族)을 피(被)지배자로 했던 정복(征服)왕조였기 때문에, 그래서 고구려(高句麗)는 한민족(韓民族)의 민족국가는 아니었다>라고 했고

 6. 그리고 또, 무로타니카츠미(室谷克實-일본의 기자. 反韓者)는 <중국의 사서(史書)는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이 기본으로, 그래서 당연한 것은 기록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또, 고구려(高句麗) 등, 퉁구스계 민족들과 한족(韓族)과의 사이에는 비교(比較)의 기술(記述)이 없다. 그래서 또, 민족이 다르다는 것이 대전제(大前提)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굳이 다른 것은 쓰지를 않았던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


 7. 그리고 또, 요코타야스지(橫田安司-일본의 작가)는 <한국(韓國)에서 발해(渤海)를 한국사(韓國史)의 일부로 보지 않고, 한국사(韓國史)에 포함된다고 하는 남북국시대론(南北國時代論)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은, 일본의 식민지화에 반발해서 나타났던 민족주의사학(民族主義史學) 발전 이후의 일>이었다고 하면서 <발해(渤海)를 포함한, 고대 한반도역사의 활동범위를 만주(滿洲)에까지 넓히고 있는 현(現) 한국의 역사교사서>에 대해서 <강렬(强烈)한 민족주의(民族主義) 자의식(自意識)의 발로(發露)>라고 지적(指摘)했다.


 8. 그리고 또, 동경대학(東京大學) 사회과학(社會科學)연구소의 그레고리노블(Gregory W. Noble) 교수는 <고구려(高句麗)가 중국과의 깊은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생기게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그래서 <중국 측의 견해에 근거(根據)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라고 말을 했다.

 그리하여 비록, 상기(上記)의 주장들은 거의가 일본인들의 주장이지만, 그러나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제3자의 입장에서, 그래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야기한다는 논리로 자신들의 주장을 폈거나, 펴고 있으며, 그래서 또 현재 일본의 교과서에서는,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사(中國史)도, 한국사(韓國史)도 아닌 <동(東)아시아세계>라는 <지역사(地域史)>로 취급하면서, 그래서 또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를 어느 나라의 역사라고 말하기에는, 복잡한 문제가 있다>라고 교과서에서 기술(記述)하고 있는 실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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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백두산 천지-중국 측에서 바라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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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중국의 동북(東北)부(部-舊 滿洲)의 역사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적(國家的)인 프로젝트(project)>라고 정의할 수 있고, 그것은 또 1997년에 시작되어서, 2000년 이후에 그 연구 성과가 중국과, 국외(國外)의 미디어(media)들에도 공표되었던 바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百濟와 新羅도 포함하는 일도 있음)를 중국사(中國史)의 지방(地方)정권(政權)으로 취급했던 것에 대해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민들로부터 격심한 반발과 항의를 받았던 바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것은 한중(韓中) 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 그것은 민간(民間) 차원의 학술토론으로 해결하기로 함에 따라서, 정치문제로까지 발전되지는 않았던 것이었다.(2006年10月13日-高句麗史 問題에 대해서 韓中이 思慮 깊은 措置에 合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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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편의상 번호로 구분함)

 그러자 2000년에 들어서, 한국의 미디어들에서도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해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러자 또 학계나 정치계 또는 일반인들 중에서도 항의가 잇달았다. 그리고 또 특히, 학계(學界)에서는 그에 대한 대책으로 <중국의 역사왜곡(歷史歪曲)> 또는 <고구려사왜곡(高句麗史歪曲)>에 대한 대책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것에 기초해서 <고구려연구재단(高句麗硏究財團)>이 설립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2006년에 들어서는 새롭게 발해(渤海)와 백두산(白頭山)의 역사적(歷史的)인 귀속(歸屬)에까지 문제를 확대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또, 한국인들의 중국에 대한 항의(抗議) 활동에 대해서는, 2004년 8월에 양국(兩國) 정부는 <역사(歷史)해석의 문제가 정치쟁점 화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합의자리가 마련되기도 했었는데, 그러나 또 대중(對中)외교를 중시했던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정부의 공식적인 인식이 아니다>라는 입장에서, 긴 시간동안 중국정부에 공식(公式)항의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한국의 미디어들에서는 그런 정부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고, 그러자 또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은 2006년 9월, 핀란드(Finland)의 수도 헬싱키(Helsinki)에서 개최되었던 <아시아유럽회합(ASEM=Asia-Europe Meeting)> 수뇌(首腦)회의에서, 중국의 웬지아바오(溫家寶) 총리(總理-首相)에게 <중국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학술연구(기관)의 차원(次元)이라고 해도, 양국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취지의 항의를 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또, 때와 더불어서 한국의 방송들에서는 주몽(朱蒙-2006년 MBC) 외(外) 태왕사신기(太王四神記-2007년 MBC), 바람의 나라(2008년 KBS2), 연개소문(淵蓋蘇文-2006년 SBS), 대조영(大祚榮-2006년 KBS) 등의 드라마들을 앞 다투어 제작, 방영했고, 그것으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가 한국의 역사였음을 세계에 어필(appeal)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또 그 때문에 중국에서는 방송이 금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또 그러했던 한국(韓國)의 사정과는 달리, 북한(北韓)에서는 그에 대해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고, 단 <재일(在日) 조선인총연합회(朝鮮總連)>의 기관지(機關紙)인 <조선신보(朝鮮新報)>에서만 <중국이 고구려(高句麗)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고 하는 것은, 노골적인 역사왜곡>이라고 밝혔던 것이 유일했다.

 그리고 또 역사적으로 들여다보면, 조선(朝鮮)의 실학자였던 유득공(柳得恭)은 <발해고(渤海考)>에서 <고려(高麗)는 남쪽의 신라(新羅)와 북쪽의 발해(渤海)를 아울러서 "남북국사(南北國史)"를 편찬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발해(渤海)의 고지(故地)와 연고(緣故)할 수 있었던 근거(根據)를 상실하여, 약국(弱國)이 되었다>라고 했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도 <契丹之失信於渤海 何與於我> 즉 <계단(契丹-거란, 遼 등, 遼東 땅에 세워졌던 나라)이 발해(渤海)를 배신했던 일 등은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라고 했고, 그리고 또 동국강목(東國綱目)에서도 <渤海不當錄于我史> 즉 <발해(渤海)를 우리의 역사에 포함한다는 것은 부당(不當)하다>라는 입장을 취했던 일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발해(渤海)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래서 또 그것은 현대에 와서 주장되거나, 부각된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또 결국, 그런 인식은 1784년에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에서부터 시작해서, 1970년대에 들어서 연구가 활발해졌고, 그 결과로 현재에는 그 시대, 즉 북쪽에는 발해(渤海), 남쪽에는 신라(新羅)가 병립(竝立)했다고 하는, 소위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라는 새로운 용어를 등장시켜서 국정교과서(國定敎科書) 등에 실려서 학생들에게 교육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한국의 학자들 중에서는 <그렇게 과도하게 민족 중심적으로 서술>된 것을 비판하면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는 다민족국가였고, 고구려(高句麗)의 영토 확장은 이민족과의 병합과정이었으며, 특히 발해(渤海)는 고구려(高句麗)의 유민들과 말갈(靺鞨)족들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는 것은 역사상식>이라고 했고 <그런데도 그러한 사실은 교과서에서 누락시킨 채로, 발해(渤海)는 고구려(高句麗)와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만 강조하고 있다>라고 비판한 사람도 있었으며, 그리고 또 <동호(東胡-몽골, 契丹 등)와 숙신(肅愼-말갈, 여진) 그리고 예맥(濊貊-부여, 고구려)은 한민족(韓民族)도 중국의 한족(漢族)도 아니므로, 그것은 한국사(韓國史)도 중국사(中國史)도 아닌, 요동사(遼東史)>라고 주장했던 사람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서 <일국사관(一國史觀)에서 탈피해서, 그것을 동아시아 사(史)로 취급할 필요성이 있다>라고 주장했던 사람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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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백두산 천지-중국 측에서 바라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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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중국의 동북(東北)부(部-舊 滿洲)의 역사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적(國家的)인 프로젝트(project)>라고 정의할 수 있고, 그것은 또 1997년에 시작되어서, 2000년 이후에 그 연구 성과가 중국과, 국외(國外)의 미디어(media)들에도 공표되었던 바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百濟와 新羅도 포함하는 일도 있음)를 중국사(中國史)의 지방(地方)정권(政權)으로 취급했던 것에 대해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민들로부터 격심한 반발과 항의를 받았던 바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것은 한중(韓中) 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 그것은 민간(民間) 차원의 학술토론으로 해결하기로 함에 따라서, 정치문제로까지 발전되지는 않았던 것이었다.(2006年10月13日-高句麗史 問題에 대해서 韓中이 思慮 깊은 措置에 合意)


 2.(편의상 번호로 구분함)

 그리고 중국의 요녕성(遼寧省) 장하현(庄河縣) 소재(所在), 고구려(高句麗)의 성산산성(城山山城) 입구에 있던 비석(碑石)에서 <고구려(高句麗)는 중화민국이 세웠던 나라>라는 비문(碑文)이 발견되었다고 하고, 그 비석에는 또 <고구려(高句麗) 민족(民族)은, 중국 고대의 화하민족(華夏民族-中華民族의 다른 표현)을 구성했던 대가족(大家族)의 일원(一員)이었다(高句麗民族是中國古代華夏民族大家庭中的一圓)> 그리고 또 <고구려(高句麗) 정권은,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 건설했던 지방정권(高句麗政權是中國東北少數民族地方政權)>이라는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진위(眞僞)는 알기 어렵다.

 그리고 또,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文化部)가 발행했던 <중외문화교류(中外文化交流)> 2004년 9월호와, 중화인민공화국 교육부(敎育部) 직속(直屬) 교과서전문출판사의 홈페이지에는 <고구려(高句麗)는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정권>이란 내용이 게재(揭載)되었으며, 문화부(文化部)가 주관(主管), 발행했던 월간지(月刊誌) <중외문화교류(中外文化交流)>에서는 <고구려(高句麗)는 중국 동북(東北)지방에서 생활했던 고대(古代)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내용을 글을 게재(揭載)했다. 그리고 또, 중화인민공화국 교육부 직속의 교과서전문출판사인 <인민교육출판사> 홈페이지의 <역사(歷史)지식(知識)> 코너에서는 <고구려(高句麗)를 중국사(中國史)>라고 게재(揭載)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外交部)는 홈페이지에 있는 <한국개황(韓國槪況)>의 고대사(古代史)에 관한 기술에서 고구려(高句麗)를 삭제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한국정부는 그 복원(復元)을 요청했지만 거절했고, 심지어는 1948년의 한국정부수립 이전(以前)의 역사기술을 전부 삭제해버렸다.

 그리고 또,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박물관(集安市博物館)의 세로로 된 안내간판의 설명문에는 <고구려(高句麗)는 중국고대에 존재했던 북동지방의 소수민족정권의 하나>라고 쓰여 있으며, 그 박물관의 현관(玄關)에 있는 돌에는 <고구려(高句麗)는 북동아시아지방 고대문명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중국북동지방의 소수민족정권의 하나>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또 그곳의 안내원은, 고구려(高句麗)의 유물(遺物)을 설명할 때, 중국문화에의 예속성(隸屬性)을 강조해서 <이 연꽃(蓮花) 모양의 와당(瓦當-기와의 마구리)은 불교문화의 흔적으로, 고구려(高句麗)가 당시, 중원(中原)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라고 말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 또 <당시 중원(中原)에서 사용되었던 경화(硬貨-금속으로 만든 화폐)가 여기에서 발굴되고 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高句麗)가 중국의 일부였다는 증거입니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 또 다른 안내원은,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고구려(高句麗)에게 그 명부(名簿)를 주관(主管)시켰다>라고 했던 문장(文章)을 다른 뜻으로 바꿔서 <고구려(高句麗)가 당시에 한(漢)나라를 주인(主人)으로 모셨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중국에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유적지(遺蹟地)들과, 백두산(白頭山)에 배포(配布)되어 있는 팸플릿(pamphlet) 등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이름은 아예 없고 <이곳은 만주족(滿洲族) 발상(發祥)의 땅으로, 중국의 성지(聖地)>라고만 쓰여 있는가 하면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의 소수민족국가였기 때문에, 그래서 한 번도 한반도(韓半島)민족의 역사라는 설명(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하는가 하면, 중국 내의 고구려(高句麗) 유적지들에도 <고구려(高句麗) 사람들은 결코 한반도 인이 아니었다>라든가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의 고대국가였던 은(殷)에 기원(起源)을 둔 한민족(漢民族)이 건설했던 국가>였다는 내용이 쓰인 안내판까지 세워져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중국의 교과서 중 <세계고대사(世界古代史)>에서는,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 그리고 부여(夫餘)는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고 하면서, 한국사(韓國史)의 시작은 통일신라(統一新羅) 때부터라는 주지(主旨)로 기술(記述)되어 있고, 그 주석(注釋)에는 <고구려(高句麗)는 당시, 중국동북부에 존재했던 소수민족정권이었다>라고 명기(明記)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중국역사수당요송금권(中國歷史隋唐遼宋金卷)>에서는 <고구려(高句麗)는 한대(漢代) 이후, 중국의 영역이라고 간주(看做)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의 100여 개의 대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중국고대사(中國古代史)>에서도,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 그리고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은, 중국의 한 대(漢代)에 동북지구에 살았던 소수민족이었으며, 고구려(高句麗)의 선조(先祖)는 중국의 오랜 민족이었던 고이(高夷)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참고:
고이(高夷)는, 과거 중국의 황제(黃帝) 시대 때, 그 황제(黃帝)의 신하였던 고원(高元)이란 사람이 집의 건축을 고안(考案)했다고 했고, 고신 씨(高辛氏) 제곡(帝嚳)과, 고양 씨(高陽氏) 전욱(顓頊)의 후예(後裔)들도 그 고(高)씨(氏) 성(姓)을 이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너무 오래된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다. 그리고 또 현재, 중국의 학회(學會)에서는, 그 고이(高夷)를 고구려(高句麗)의 조상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나머지는 생략함.

 그리고 또, 프랑스와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중국대사관 홈페이지에도 <고구려(高句麗)는 중국고대의 변경(邊境)소수민족이 수립(樹立)했던 정권>이라고 기술되어 있다고 하고, 그 중에서도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국대사관은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의 역대왕조들과 종속(從屬)관계를 유지(維持)하면서, 중원(中原)왕조의 제약(制約)과 관할(管轄)을 받았던 지방정권>이었다라고 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중국의 국영(國營) 중앙(中央)티브이(CCTV)도, 그 홈페이지에서 <중국의 고구려 왕성(中國高句麗王城)>이란 제목의 기사(記事)를 게재(揭載)했으며, 그리하여 고구려(高句麗) 최초의 도성(都城)이었던 졸본성(卒本城)을 <중국의 고구려 왕성(中國高句麗王城)>이라고 소개했고 <고구려(高句麗)는 중국고대의 변경소수민족에 의한 정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중국문화네트워크와 중국문물네트워크 등, 중국정부소속기관들도 그 홈페이지에서 <고구려(高句麗)는 중국고대의 변경소수민족에 의한 정권>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단동시위원회(丹東市委員會)의 홈페이지 단동정협망(丹東政協網)에는 <압록강(鴨綠江) 유역(流域)의 산수(山水)는 한족(漢族) 이외의 많은 소수민족들을 먹여 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國) 등의, 소수민족들이 지방정권을 수립(樹立)했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중원(中原)의 역대왕조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었다>라는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고 한다. 그래서 또 현재, 중국인들은 그런 날조(捏造)되고, 왜곡(歪曲)된 교육으로 인해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를 당연하게 자국(自國)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을 기정사실화(旣定事實化)하는 정도가 심각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거기다 또, 유튜브(YouTube)에서는, 한국인이 <만주족의 고구려(高句麗) 역사를 도작(盜作)하고 있다>라고 하는 동영상(動映像)이 돌아다녀서 한국인들이 반발했던 바 있었는데, 그 문제의 동영상(動映像)에서는 <현대의 한국인은 고구려(高句麗)와 혈연적(血緣的)인 관계가 약하고, 실제로 고구려(高句麗)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은 만주족(滿洲族)>이라는 내용과 함께 <역사(歷史)를 도둑질하는 짓은 그만 둬라>라고 하면서 <한국인들은 고구려(高句麗)의 혈통을 이어받아서, 아주 오랜 시간동안 만주(滿洲)를 지배했었다 라고 하면서, 역사(歷史)의 도난(盜難)을 하려하고 있다>라는 내용을 담았었다.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고대의 고구려(高句麗)인들과 현대의 한국인들은 전혀 다른 민족이며, 고구려(高句麗)는 고(古) 부여(夫餘)인으로, 동호(東胡)의 일부였다>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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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北工程>

 

 

 

 


<겨울의 백두산 천지-중국 측에서 바라본 광경>

 


 위의 제목처럼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말은 이미 오래 전에 나왔던 말이었지만, 그러나 생각보다 그렇게 관심이 적은 것이 현재, 우리나라 또는 우리국민들의 태도나, 생각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으로, 그래서 또 그것은 전근대적(前近代的)인 사고(思考)와 비슷한, 침략과 야욕(野慾)의 결과물로 생각되고 있으며, 그래서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는 그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물론, 본인 역시도 그 전부터 그것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을 해왔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볼 기회가 없었다거나, 또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에라도 그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한번 고찰해볼 마음을 가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또 어쨌든, 우리들 또는 우리나라의 국민들이 그것에 대해서 문제성을 인식하고, 걱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이나 결과가 단번에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또, 그것은 과거 한국전쟁(韓國戰爭)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이었던, 소위 김일성의 소련괴뢰정부가 북쪽에서 남침준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음에도, 남쪽에서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당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번 참에 그것에 대한 것을 한번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므로, 그에 대해서 관심이 계신 분은, 이런 기회에 저와 함께 그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한번 되짚어보시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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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중국의 동북(東北)부(部-舊 滿洲)의 역사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적(國家的)인 프로젝트(project)>라고 정의할 수 있고, 그것은 또 1997년에 시작되어서, 2000년 이후에 그 연구 성과가 중국과, 국외(國外)의 미디어(media)들에도 공표되었던 바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百濟와 新羅도 포함하는 일도 있음)를 중국사(中國史)의 지방(地方)정권(政權)으로 취급했던 것에 대해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민들로부터 격심한 반발과 항의를 받았던 바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것은 한중(韓中) 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 그것은 민간(民間) 차원의 학술토론으로 해결하기로 함에 따라서, 정치문제로까지 발전되지는 않았던 것이었다.(2006年10月13日-高句麗史 問題에 대해서 韓中이 思慮 깊은 措置에 合意)


 1.(편의상 번호로 구분함)

 1996년,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은, 중국의 동북부(東北部)와 구(舊)만주(滿洲) 지역에 관한 역사연구를 중점연구과제로 결정했고, 그 연구의 프로젝트(project)를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고 명명(命名)했다. 그리하여 2002년부터 연구가 본격적으로 개시되었으며, 2003년경에는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가 <고대(古代) 중국의 영토 내에 있었고, 소수민족(少數民族)이었던 퉁구스계(Tungus系)의 부여(夫餘)인들 일부(一部)가 세웠던 정권(政權)>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의 일부(一部)에 속했던 지방정권(地方政權)이었다>라는 견해를 세상에 발표했다.

 참고: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철학(哲學)과 사회과학연구를 하는 최고학술기구(最高學術機構)로, 중국의 종합적인 연구센터를 말한다. 그리고 또, 그에 속한 연구소는 31개, 연구센터는 45개, 연구자는 약 4200명에 달하고 있는 방대한 조직이며, 그리하여 또 중국정부의 싱크탱크(think tank-두뇌집단)로써,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다. 그리고 또, 세계 약 80여 개 국들의 싱크탱크들과 함께, 고등연구기관 200여 곳과도 일상적으로 교류를 하고 있으며, 그 소속은 국무원(國務院)직속(直屬)으로 알려져 있다.

 

 


<퉁구스계 諸民族의 분포도>

 



 그리고 또 퉁구스계는 또는 퉁구스족은, 동부시베리아와 중국, 만주 등지에 분포하는 몽고계의 한 종족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중간정도의 신장(身長)에다, 피부는 황백색, 그리고 모발은 흑색 직모의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또 대부분이 수렵과 유목, 농경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오로촌, 비랄, 마네길 등으로도 불렸지만, 그러나 현재는 <에벤키(Evenky)>를 공식명칭으로 가지고 있는 종족을 말한다.

 그리고는 중국 내에 잔존(殘存)해있는 고구려(高句麗) 유적(遺跡)의 조사와 정비를 실시했고, 그 후에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비석>과 <장군총(將軍塚)>을 <세계유산(世界遺産)>으로 추천했다. 그리하여 또 2004년 7월 1일에는, 소주(蘇州)에서 개최되었던 <세계유산위원회(世界遺産委員會)>에서, 고구려(高句麗) 전기(前期)의 도성(都城)들과 고분(古墳)들이 세계유산(世界遺産)에 등록되었다.

 그러자 또 다음날, 신화사통신(新華社通信)에서는 <고구려(高句麗)는 역대(歷代) 중국 왕조(王朝)와 예속(隸屬)관계에 있었고, 그리하여 중원(中原)왕조들의 관할(管轄) 하(下)에 있었던 지방정권(地方政權)이었다>라는 보도를 했다. 그리고 또, 2007년에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은, 백제(百濟)와 신라(新羅) 역시도 <중국사(中國史)의 일부(一部)>에 포함된다는 견해를 발표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또, 북경대학(北京大學)의 장비비(蔣非非)와 왕소보(王小甫) 교수(敎授) 등이, 1998년에 집필(執筆)했던 <중한관계사(中韓關係史)>에서는, 고구려(高句麗)가 독립적으로 세워졌던 국가(國家)가 아니라, 중국의 왕조(王朝)들과 관계되었던 한국사(韓國史)의 한 왕조(王朝)로 취급했고, 그러자 또 그 대학의 역사학과(歷史學科)에서는 그것을 교재(敎材)로 사용했으며, 그리고 또, 1990년대에 출판되었던 <중국동북사(中國東北史)> 등의 서적(書籍)들에서는 <고구려(高句麗)는 조선(朝鮮)에 속하지 않았다>라는 주장을 했던 등 해서, 벌써부터 중국에서는 고구려(高句麗)를 한국사(韓國史)에서 분리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주창자(主唱者)로 알려져 있는 손진기(孫進己) <심양(瀋陽) 동아시아연구(硏究) 중심(中心) 주임(主任)>은 <중국 땅에서 발전했던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의 역사(歷史)> 즉, 고구려(高句麗)가 현재의 중국 땅에서 세워졌으므로, 중국의 역사에 속한다>는 발언을 했었고, 그리고 또, 삼국통일(三國統一)에 대해서도 <그것은 삼국통일이 아닌, 신라(新羅)에 의한 백제(百濟)의 통합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했다든지, 또는 <고구려(高句麗) 영토의 3분의 2가 현재의 중국 땅에 속하고 있고, 당시(삼국통알 때, 즉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에, 고구려(高句麗)의 백성들 중 4분의 3이 중국에 귀화(歸化)했다>라고 했다든지, 또는 <그것은 현재의 미국사(美國史)를 이야기 할 때, 미국인디언들의 역사까지 포괄(包括)하는 반면(反面), 그 이민자들의 원래 고향이었던 유럽사(史)를 언급하지 않는 것과 같다>라는 등의 발언을 했던 바 있었다.

 그리고 또 손홍(孫泓) <동아시아연구중심연구원(硏究員)>은 <고구려(高句麗)가 중국(또는 中原) 왕조들의 지방정권>이었으므로 <고구려(高句麗)의 역사는 대부분이 일관(一貫)되게 중원(中原) 왕국들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또 <한국(韓國)에서는, 고구려(高句麗)의 역사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을 거쳐서 신라(新羅)로 이어졌다(또는 계승되었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는 삼국(三國)에 포함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또 <신라(新羅)의 삼국통일(三國統一)은, 백제(百濟)와 신라(新羅), 그 2국(國)의 통합(統合)이었을 뿐이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던 바 있었다.

 

 

 










 <계속...>









 

 

 

 

 

 

 

 

 

 

 

 참고: 이 글은, 본인이 이미 2012-12-12 08:17분부터, 2013-01-07 09:06분까지

         이 방에서 소개했던 것이란 것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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