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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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그리고 또 아래는 위의 설명에 대한 보충이므로, 관심이 계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편의상, 번호를 붙임.

 1. 일본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희생자는, 조선인(朝鮮人) 노동자 3725명 중 524명, 승원(乘員) 255명 중 25명, 합계 549명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의 생존자 등의 증언(證言)에 의하면, 그때 그 배를 타고가기 위해서 함께 뛰어들었던 사람들을 포함하면, 그 사망자의 수는 2천 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망자 또는 희생자들의 숫자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또, 1945년 8월 21일에, 일본의 정부차관회의(政府次官會議)에서 강제(强制)이입(移入) 조선인(朝鮮人) 등의 징용(徵用)해제방침이 결정되었고, 그 다음날, 그들의 귀환(歸還)수송(輸送)문제를 타진하는 회의가 개최되었지만, 그러나 정작,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 송환명령(送還命令)이 내려졌던 것은 8월 19일이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교토지방재판소(京都地裁)는 <강제 연행되었던 조선인들이, 연합군의 진주(進駐)와 소련군의 진군(進軍)에 호응해서 폭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했던 일본정부는, 그에 안전을 확인하지 않고, 급하게 그들을 귀환시키려고 했었다>고 그때의 상황을 인정했던 바 있었다.(2001년 8월 23일)

 그리고 또 그때, 마이즈루(舞鶴)에 기항(寄港)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승객(乘客)들에게는 <물의 보급(補給)>을 위해서라고 설명되었지만, 그러나 승원(乘員)들에게는 <하선(下船)을 준비(準備)...>라고 했다는 증언(證言)도 있었고, 그리고 또 8월 24일 18시 이후부터 모든 선박의 항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부산(釜山)으로 갈 계획이 아예 없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리고 또, 그 폭발의 원인에 관해서도, 당시 마이즈루(舞鶴) 만(灣)에는 미군(美軍)의 기뢰(機雷)들이 상당히 많이 부설(敷設)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선체(船體)를 인양했을 때, 그 폭발의 원인에 대해서 조사를 정확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래서 또 그 진상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목격자에 의하면, 그 선체를 인양했을 때, 선체(船體)의 구멍이 바깥쪽으로 향해있었다는 증언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기뢰(機雷)에 의해서 폭발했다>는 주장과는 모순이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런데다 또 당시, 승조원(乘組員)들의 가족들 사이에서는, 그 배가 출항했을 때, 그 배 안에 화약(火藥)이 적재되어있었다든지, 폭파장치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등, 소문이 난무했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그때의 생존자들과 유족(遺族)들 등, 한국인 80명이 일본을 상대로 그 손해배상을 위한 소송(訴訟)을 청구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일본 법원은 처음에는 그 책임에 대해서 일부 인정을 했으나(大阪高裁・岡部裁判長-5월 30일), 그러나 또 그 후에 판결이 번복되었던 것이다.(京都地裁判決)

 하지만 그것은(京都地裁判決) 지극히 부당(不當)하고, 차별적(差別的)이고, 반동적(反動的)인 것이었으며, 그래서 또 그것은 범죄적(犯罪的)인 결과였다고 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또, 그리고 또 물론, 그 재판에서 직접적으로 쟁점(爭點)화 되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들의 요구가, 일본이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해서 다양한 노동(勞動)으로 혹사(酷使)시켰고, 거기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 강제징용이 해제되어서 안전하게 고국(故國)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었음에도, 일본은 그들의 그런 권리조차 침해했다는 것 등과 함께, 당시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가했던 전쟁범죄(戰爭犯罪)에 대한 일본정부의 성의(誠意)표시로 <사죄(謝罪)와 배상(賠償)>을 원했던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 판결(判決)에서 재판장(裁判長)은 그런 점을 전혀 무시(無視)했던 때문이었고, 그래서 또 현재까지도 일본정부는 그것에 대해서 전혀 인정을 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 등을 그 이유로 내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에 대해서 일본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그때는 전시(戰時)였기 때문>이라는 논리(論理)를 펴고 있고, 그래서 또 <그 희생자들에 대해서 국가(日本)는 어떠한 책임도 질 수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의 인권(人權)을 무시했던, 너무도 무책임한 판결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그것으로 봐서도, 일본은 앞으로도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얼마든지 그런 자세로 다시 나올 수도 있을 것이란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그래서 또 그러한 것이, 그 사건이 발생한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그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시 그때의 상황을 한 번 더 확인해보면, 일본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그 조선인들은(輸送船 浮島丸-4730톤-에 乘船했던) 전시(戰時) 중에 아오모리(靑森-일본 東北지방 북단의 현)의 해군(海軍)시설과 비행장 등의 건설 등에 강제 연행되었던 징용공(徵用工)들과 그 가족들이었고, 그 수는 3735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524명이 희생되었다고 했는데, 그 폭발원인에 관해서는 또, 여러 가지의 소문들 중에서도 <그 배를 타고 조선인들을 부산(釜山)으로 호송한 후, 조선인들에게 붙들려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데 두려움을 느꼈던 승조원(乗組員)들이 출항을 반대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그 배를 폭파했다고 하는 폭파공작설(爆破工作說)>이 있었고, 그래서 또 군(軍)이 어떻게든 관련되었다고 했던 자침설(自沈說) 등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난무했던 소문들이 있었음에도 일본정부는 그에 대해서 정확한 조사도 실시하지 않았고, 그래서 또 일관되게 <미군(美軍) 부설(敷設) 기뢰(機雷)에 의한 침몰(沈沒)>이라고만 일방적으로 발표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위의 판결은 그런 일본정부의 입장을 대변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아오모리(靑森)에는 약 21000명 정도의 조선인(朝鮮人)들이 강제 연행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당시, 그러니까 전쟁말기에 일본은 미군(美軍)과의 <본토(本土)결전(決戰)>에 앞서서, 그들을 시모키타반도(下北半島-靑森縣 北東部에 있는 半島)의 요새화(要塞化)와 철도(鐵道)건설, 탄약(彈藥) 등의 자재(資材) 비축(備蓄)을 위해서 강제 투입시켰고,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극히 과혹(過酷)했던 노동에 시달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 일본은 패전(敗戰)했고, 그러자 또 일본은 그들을 다시 한반도로 무사(無事) 귀환(歸還)시켜줄 책임이 있었으며, 하루빨리 그에 대한 보상과 사죄를 할 책임과 의무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조선인(朝鮮人)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그 치안(治安)상의 이유>로, 그리고 또 소위 <얏카이바라이(厄介払い)> 즉 <귀찮은 것들을 내쫓아버린다>는 태도로, 그들은 한반도로 내쫓을 궁리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 의한 귀환(歸還) 계획(計劃) 또는 작전(作戰)>이었고, 그래서 또 그들 즉, 조선인(朝鮮人)들은 그때 <군사물자(軍事物資)>로 취급되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의 표현으로 <것들> 또는 <놈들> 또는 <자신들에 불리한 증거물(證據物)> 또는 <폐기(廢棄)>의 대상이 되어서, 그 배 안으로 밀어 넣어졌던 것이다. 그랬으므로 그것은 분명한 <민족차별(民族差別)>이었으며, 그래서 또 일본은 그에 대한 책임이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역시, 위의 판결로 <자신들의 반성(反省) 없음>을 표현했던 것이었고, 그것으로 또 <일본의 무책임(無責任)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그 사건이 발생했던지 9년 이상이나 그 배의 인양을 하지 않았으며, 그것으로 또, 그때의 희생자들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가운데, 그 바다 속에서 잠들어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 사건에서는 그렇게 많은 의문들과 불명확(不明確)한 부분들이 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그때 왜 일본정부는 그렇게 급하게 조선인(朝鮮人)들을 귀국시키려고 했느냐>하는 것이다. 그래서 또, 그 사건을 보고했던 정부(政府)의 자료를 보면 <(조선인 노동자들 다수(多數)가) 연합군의 진주(進駐)를 극도(極度)로 두려워했던 때문이었던지, 조선(朝鮮)으로 보내줄 것을 호소하면서, 불온(不穩)의 조짐까지 보였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그래서 또 일본은 그런 결정을 급하게 내렸던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또 왜 갑자기 진로(進路)를 변경해서, 그것도 하필이면 마이즈루(舞鶴)에 기항(寄港) 시키려고 했던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또,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당시의 증언자들의 증언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그리고 또 그 외에도, 그때의 희생자들의 숫자가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으며, 그리고 또 그때, 그 배를 함께 타고가기 위해서 배에 달려들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그 숫자는 정부 측에서 발표했던 수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에 대한 증언으로, 당시의 선원(船員)들 중에서는, 자신의 경험상 그 배에 승선(乘船)했던 사람은 5600명 이상이었다는 증언도 있었고, 그 사망자들의 유체(遺體)를 처리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 수가 5600 이상이었다는 증언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사후(事後)처리가 미흡했다는 것은 이미 언급되었지만, 그러나 또 그때 희생되었던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일괄 전몰자(戰歿者)로 처리되어서 연금(年金)까지 지급되었지만, 그러나 조선인(朝鮮人)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이나, 사죄도 없었던 것이다.

 

 

 

 

 

 

 

 

 

 

 

 

 

 

 

 


<舞鶴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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