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백두산 천지-중국 측에서 바라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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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한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역시, 편의상 번호를 붙임)

 1. 조선(朝鮮)에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이래(以來), 고구려(高句麗)를 정식(正式)으로 자국(自國)의 역사(歷史)로 인정해서 사서(史書)를 편찬해왔고, 중국의 역대왕조들도 사서(史書)에서 <고구려(高句麗)는 동이(東夷) 또는 동방(東方)의 이민족(異民族)의 역사의 일부(一部)>라고 기재(記載)했다. 그리고 또, 구당서(舊唐書)의 <백제(百濟) 전(傳)>에 따르면 <백제(百濟)는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와 함께, 삼한(三韓)>이라고 기술(記述)되어 있다. 그리고 또 <동이(東夷) 전(傳)>에서는, 그 삼국(三國)을 <해동삼국(海東三國)>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또, 몽골의 원사(元史)에서는 <고려(高句麗)는 고신라(古新羅)> 즉, 삼국통일 이전(以前)의 신라(新羅)와 같았다고 했다. 그리고 또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가 융합(融合)해서,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라고도 기술(記述)했다. 그리고 또, 근현대(近現代)의 중국의 사학(史學)계에서도 <고구려(高句麗)는 한국사(韓國史)에 속한다>라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서서 중국은, 자국(自國)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적(國籍)을 가진 모든 사람 또는 민족들에 의해서 공동으로 건설된 나라이며, 그래서 단 하나의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라고 재(再)정의(定議)했고, 그러자 또 중국의 역사학자들 중에서도 <수도(首都)를 평양(平壤)으로 옮기기 전의 고구려(高句麗)는 또는 고구려(高句麗)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사(韓國史)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사(中國史)이다>라고 하는 재(再)정의를 내렸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것을 <일사양용론(一史兩用論)>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또 1990년 이후부터는 역사에 대한 강한 수정(修正)이 이루어졌고, 급속한 경제발전을 하고 있었던 2000년 이후부터는, 현재 중국 내에 있는 모든 민족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고 했던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論)>이라는 주장을 내세워서, 정부의 주도로 <역사공정(歷史工程)>을 시작했던 것이다.

 2. 하지만 1993년에 진옥룡(陳玉龍)과 양통방(楊通方) 등, 북경대학(北京大學)의 교수(敎授) 4명이 집필(執筆)했던 역사(歷史)교재(敎材) <한문화논강(漢文化論綱)>에서는, 고구려(高句麗)를 한국사(韓國史)로 취급했으며, 1998년에 동(同) 대학의 발비비(拔非非)와 왕소보(王小甫) 교수 등, 젊은 학자 6명이 집필했던 <중한관계사(中韓關係史)>에서도, 고구려(高句麗)를 한국사(韓國史)로 취급했던 적이 있었고, 그 교재(敎材)들은 모두 북경대학(北京大學)의 역사학과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었다. 그리고 또, 동북공정(東北工程)이 한창 진행 중이었을 때도, 상해(上海) 복단(復旦)대학의 역사교재 <국사개요(國史槪要)>에서도 고구려(高句麗)는 한국사(韓國史)라는 기술(記述)이 있었으며, 2005년에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이 간행(刊行)했던 <열국지(列國志)-한국(韓國)>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고구려(高句麗)를 한국사(韓國史)로 취급했었는데, 그 이유는 또, 중학(中學)이나, 고등학교(高等學校)의 교과서들과는 달리, 대학의 교재(敎材)와 학술(學術)용의 일반 역사서적들은, 중국의 정부가 직접적으로 출판, 관리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내용의 시정(是正)을 요구하기가 힘들었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3. 그래서 또, 중국의 그런 역사학(歷史學)계의 움직임에 대해서, 중국의 국내로부터도 비판이 있으며, 그것은 또 과거, 주은래(周恩來)가 <한국사(韓國史)인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 그리고 발해(渤海)를 중국사(中國史)로 왜곡(歪曲)하려 한다>고,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의 역사왜곡과 배외(排外)주의에 대해서 경종(警鐘)을 울렸던 바 있었으며, 그리고 또 비근(卑近)했던 예로는, 원등비(袁騰飛)의 <중국의 역사왜곡과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한 비판> 등이 있었다.

 참고: 원등비(袁騰飛)는 중국 북경(北京) 시내(市內)의 예비교(予備校) 교사(敎師)로, 중국의 국영(國營) 티브이에서 교양(敎養)프로그램의 강사(講師)로도 활동하면서 중국 내에서는 인기가 많은 사람이며, 그래서 또 그 프로그램에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의 원흉(元兇)이 모택동(毛澤東)이라고 통렬(痛烈)하게 비판했던 것이 네트워크상에서 공개되었고, 그로 인해서 찬반양론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켰던 사람이었다.

 4. 그래서 또, 중국의 역사교과서에 기술(記述)되어 있는 내용 중에, 진실(眞實)은 단 5%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사람도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 나머지 95%는 완전히 허구(虛構)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래서 또, 근년(近年)의 경제성장에 힘을 얻은 중국은, 옛날부터 꿈꾸어왔던 중화제국(中華帝國)의 판도(版圖) 확대를 위해서, 한국사(韓國史)는 물론, 오키나와(琉球)와 베트남, 몽골 등도 모두 자국(自國)의 영토라고 주장하려고 하고 있다고 주장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또, 1991년부터 1998년까지 역사학과의 교감(校監)으로 근무했었고, 북동(北東)아시아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연구소의 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세계사연구실주임(世界史硏究室主任) 직을 맡고 있다는 북경대학(北京大學)의 역사학과 송성유(宋成有) 교수는, 미디어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비판했던 최초의 역사학자였으며, 그래서 또 그는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은, 고구려(高句麗)의 왕들은 중국으로부터 그 지위(地位)를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고구려(高句麗)는 고대중국의 지방자치체(地方自治體)였다라고 주장을 하지만, 그렇다면 또 과거, 일본의 왕들 역시도 약 500년에 걸쳐서 중국의 황제들에게 그 지위를 인정받았었는데, 그러면 또 왜, 일본은 중국의 지방자치체라고 주장하지 않는지 의심이 든다>라고 했다. 그래서 또 그는 <자신은 물론, 역사학과(歷史學科)도 그런 주장에는 찬성할 수 없으며> 그래서 또, 자신들의 학술적(學術的)인 견해는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사(中國史)가 아닌, 외국(外國)의 역사의 일부였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또 그는, 그 <승인(承認)>의 문제에서 <그것은 과거, 중국 외(外)의 인근(隣近)국가들에 대한 외교(外交)의 한 형식(形式)으로 볼 것이며, 그래서 또 역시, 당시 중국은 그런 외국(外國) 즉, 고구려(高句麗)나 신라(新羅), 백제(百濟), 일본(日本)에 직접적인 내정간섭(內政干涉)을 하지도 않았으며, 유효(有效)한 통제(統制)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이 주장하는 고구려(高句麗)가 중국의 지방자치체(地方自治體)였다고 하는 주장에는 잘못이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는 <북경대학(北京大學) 역사학과(歷史學科)의 한국사(韓國史)에 대한 것은, 저명(著名)한 학자(學者)였던 주일량(周一良)이 1963년에 서술했던 세계사(世界史)가 그 토대(base)였다>고 하면서, 그래서 또 그 자신도 그에 기초해서 <고구려(高句麗)를 한국사(韓國史)의 일부로 학생들에게 가르쳐왔기 때문에, 사회과학원(社會科學院)의 그런 주장에는 찬성할 수 없다>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또 그는,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것에 대해서 비평(批評)을 했으며 <북경대학(北京大學)의 역사학과(歷史學科)는 그런 것을 인정할 수 없고, 현대(現代)의 시점(視點)으로부터 역사를 해석해서, 현재의 실정(實情)에 이용(利用)하려는 것은, 현명(賢明)한 처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5. 하지만 또 그것은(東北工程) 단지, 중국의 일부 현명한 학자들이나, 일본 또는 한국의 학자들이나 국민들 그리고 매스컴에서만 비판을 했던 것은 아니었고, 그래서 또 미국(美國)이나, 러시아, 몽골, 오스트레일리아 등, 많은 나라의 학자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또 그들은 <중국이 단순히 정치적인 동기(動機)에 의해서 역사를 왜곡(歪曲)>한다는 비판을 했었고, 그래서 또 그 중에서 미국(美國)의 한 학자(學者-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john Duncan 敎授)는 <전(前)근대(近代)의 중국의 역사서(歷史書)들에서는,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이 아닌 동이(東夷)로 취급했다>라고 지적을 했으며, 그리고 또, 하와이대(University of Hawaii, 略稱 UH)의 한 교수(敎授-Edward Schultz)는 <한국(韓國)의 역사서(歷史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 그리고 백제(百濟), 그 삼국(三國)이 대두(擡頭)했던 시기(時期)를 한국사(韓國史)의 여명기(黎明期)였다고 강조(强調)했다>고 하면서 <중국의 야심(野心)에 맞서야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대학(The University of Sydney)의 한 교수(敎授-FㆍMohan)는 <중국은 과거, 중국과 고구려(高句麗)와의 책봉(冊封)관계란 것이, 의례적(儀禮的)이었다는 것을 무시(無視)하고, 주종(主從) 복속(服屬)관계였다고 해석하려고 했다>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또 그는 <한국(韓國)의 내셔널리즘(nationalism-국가중심주의) 고양(高揚)이, 과거의 중화질서부활(中華秩序復活)의 장해(障害)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중국은 그것을 타파(打破)할 목적으로,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중국사(中國史)에 편입(編入)시키려고 기도(企圖)했다>라고도 비판했다. 그리고 또, 이탈리아 나폴리대학(University of Naples)의 한 교수(敎授-Maurizio Riotto)는 <서기(西紀) 1세기에 고구려(高句麗)는 이미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외교(外交)를 펼치고 있었고, 군사적(軍事的)으로도 중국에 대항(對抗)하고 있었다>라고 지적했고, 미국(美國)의 하버드대학의 한 연구원(硏究員-Mark Vinton)은, 그러한 중국의 의도(意圖)를, 중국 국경지대의 정치적인 안정(安定)을 목적으로 한 <방어적(防禦的)인 움직임 또는 행동>이라고 표현했던 후에 <그러므로 그런 중국 측의 주장은 상대할 필요도 없으며, 무시(無視)하는 것이 좋다>라고 주장했고, 덧붙여서 중국의 그런 주장에 관해서, 한마디로 <치졸(稚拙)하다>라고까지 말을 하기도 했다.

 6. 그리고 또, 주한(駐韓) 미국(美國)대사(大使)를 지냈던 제임스릴리(James Lilley)는, 2007년 1월 18일, 미국(美國)의 하원외교위원회(下院外交委員會) 북한문제청문회(北韓問題聽聞會) 자리에서 <중국의 그런(東北工程) 의도는, 북한(北韓)이 붕괴 되었을 때, 그 북한(北韓)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미국은 그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주시(注視)해야만 한다>라고 말을 했다.

 7. 그리고 또,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산하(傘下)의 동방학(東方學)연구소의 한국(韓國)과 몽골 과장을 역임(歷任)했었고, 한국(韓國)중세사(中世史)를 전공(專攻)했다는 유리(Yuri)와, 한국인(韓國人) 2세(世-한반도계 러시아인)로, 모스크바국립대학명예교수이며, 모스크바국립대최고학술상을 처음으로 해서, 구(舊)소련 및 러시아정부로부터 명예훈장 등, 10여개의 메달을 받았으며, 한국에서도 92년에 국민훈장(國民勳章)동백장(冬栢章)과 98년 KBS해외한민족상(海外韓民族賞)을 수상했던 미하일박(Mihael 朴) 등, 러시아 역사학(歷史學)계의 저명(著名)한 학자들은, 2003년 12월 23일 모스크바대학에서 회견(會見)을 개최해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비판했으며, 그리하여 <고구려(高句麗)가 한국사(韓國史)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세계사상(世界史上)의 정설(定說)>이라는 내용을 발표했다.

 8. 그리고 또 2004년 6월에 개최되었던 국제학술대회에서도, 일본과 러시아, 미국, 몽골 등, 제삼국(第三國)의 학자들이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비판했으며, 그 집약(集約) 내용은 <중국의 팽창적중화주의(膨脹的中華主義)에 대한 학술적(學術的)인 경고(警告)>였다. 그리고 또 그때, 그 학자들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 단지 한국과 중국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는데 인식(認識)을 같이 했으며, 그리하여 또, 그 문제가 되었던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에 대해서 <그것을 중앙(中央)과 지방(地方)정부(政府)로 해석하게 되면, 한국(韓國)뿐만이 아니라, 몽골과 일본 그리고 터키와 베트남은 물론,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등, 고대(古代)로부터 중국과 관계를 가져왔던 많은 주변 국가들의 역사들 또한 중국에 의해서 중국사(中國史)에 편입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또, 그 중에서 터키의 한 학자는 <한국(韓國)은 물론이고, 몽골과 터키 등, 중국의 역사왜곡의 대상이 되어있는 나라들이 힘을 합쳐서 그에 대응해나가자>라는 제안(提案)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그 대회(大會)에 참가했던 몽골의 국립역사박물관장도 <몽고인들이 세웠던 원(元)은, 중국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몽골 역사의 일부이기도 한 것처럼, 한국인들에 의해서 세워졌던 고구려(高句麗)는, 한국사(韓國史)에 속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을 했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취지의 발언을 했던 바 있었다.

 9. 그리고 또, 2004년 9월에 개최되었던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했던 몽골아카데미의 한 교수(敎授)도 <중국이 1950년부터 몽골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역사왜곡을 계속해오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그 대표적인 것으로, 1991년에 출판되었던 <몽골족통사(族統史)>를 예로 들었다. 그리하여 또 그는 <중국의 그러한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서, 몽골과 한국의 연휴(連携)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10. 그리고 또, 영국의 <더 타임스(The Times)>도 <중국은 2003년부터 고구려(高句麗)를 중국 영토(領土)의 일부(一部)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예(例)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그래서 또 마치 그것은, 영국의 아서왕(King Arthur)의 캐멀롯(camelot) 성(城)을, 느닷없이 독일(獨逸)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중국을 비판했다. 그리고 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 역시도 <근거(根據) 없는 역사논쟁을 펼치는 중국>이란 제목의 기사(記事)를 게재(揭載)해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해서 소개했던 한편 <중국의 역사교과서에는, 일본에 관해서도, 불사(不死)의 약(藥)을 찾아 나섰던 천(千) 명의 중국인 소년, 소녀들이, 기원전 209년에 일본을 식민지(植民地)로 만들기 위해서 도일(渡日)하기 시작했다>라는 내용에 대해서도 지적한 다음 <중국은 자국(自國)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물들어 있으며, 그래서 또, 근대(近代)에 들어서 외국(外國)의 침략(侵略)에 수(數)도 없이 시달렸던 적이 있었음에도, 자기들의 문화(文化)가 번영(繁榮)과 부국(富國)의 원천(源泉)이라는 사고방식(思考方式)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있다>라고도 지적했다.

 11. 그리고 또, 사전(事典) 류(類)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미국(美國) 등, 영어권(英語圈)에서 인기가 많은 브리태니커(Britannica)백과사전 등, 각종(各種) 사전들과, 동양사(東洋史)를 배우는 프랑스대학생들의 주요(主要)텍스트인 한국사(韓國史), 그리고 일본의 야마카와출판사(山川出版社)의 고등학교 과정의 일본사(日本史) 등과,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고구려(高句麗)는 한국고대사의 일부>로 취급, 교육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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