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6)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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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 제(齊-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386년)

 제(齊)는 주대(周代)와 춘추시대 그리고 전국시대 초기에 걸쳐서, 현재의 산동(山東)성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제후국)였다. 주(周) 건국의 공신이었던 태공망(太公望)에 의해서 건국되었고, 성(姓)이 강(姜)이었기 때문에, 전국시대의 제(齊-田齊) 등과 구별해서 강제(姜齊)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기원전 386년에 가신이었던 전화(田和)에 의해서 찬탈되었고, 그리하여 그 시점에서 멸(滅)했으며, 수도는 임치(臨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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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齊)의 환공(桓公)

 환공(桓公)은 춘추시대, 제(齊)의 제16대 군주였고, 문공(文公)과 함께 춘추오패의 필두였다. 그리고 그는 포숙아(鮑叔牙)의 활약으로 공자(公子) 규(糾)와의 공위(公位)계승전에서 승리했고,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해서 제(齊)를 강대한 국가로 이끌었다. 그리고 또한, 당시에는 이미 힘을 잃고 있었던 동주(東周)를 대신해서 회맹도 이끌었다.

 희공(釐公-?부터 기원전 698년)은 강제(姜齊)의 제13대 군주였고, 장공(莊公)의 아들이었으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는 희(僖)공(公)이라고 표기했다.

 ♣ 장공(莊公-?부터 기원전 731)은 속(贖)은 제(齊)의 제12대 군주였고, 장공(莊公)은 그의 시(諡)였으며, 속(贖)은 그의 휘(諱)였다. 그리고 원문에서는 장공(莊公) 구(購)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 구(購)는 속(贖)의 오자(誤字)이다. 그리고 또, 그 제(齊)에서는 나중에 그 장공(莊公)을 시(諡)로 쓴 또 한사람의 군주가 있었는데, 그는 장공(莊公) 광(光)이었다. 장공은 성공(成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성공(成公)9년(기원전 795년)에 성공(成公)이 훙거(薨去)하자 제(齊)의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장공(莊公) 24(기원전 771년)년에 주(周)의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 살해되자, 주(周)는 도(都)를 동쪽의 락(雒-현재의 하남성 낙양군)으로 옮겼다. 그 후, 장공(莊公) 64년(731년)에 장공(莊公)이 훙거하자, 그의 아들이었던 녹보(祿甫)가 왕좌에 올라서 희공(釐公)이 되었다.

 장공(莊公) 64년(기원전 731년)에 장공(莊公)이 훙거하자 녹보(祿甫)가 왕위에 올라 희공(釐公)이 되었다. 그리고 그 희공(釐公) 11년(기원전 720년) 12월에 희공(釐公)은 장공(莊公-鄭의 3대 군주)과 제(齊)의 땅 석문(石門)에서 맹약(盟約)을 맺었다. 그리고 14년(기원전 717년) 5월에는 노(魯)의 은공(隱公)과 회합(會合)했으며, 애(艾)에서 맹약했다. 그러자 제(齊)와 노(魯)는 처음으로 화평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에 희공(釐公)은 그 기념으로 자신의 아들이었던 공자(公子) 년(年-이중(夷仲)을 노(魯)에 파견했다. 그 다음 16년(기원전 715년) 7월에는 송(宋)의 상공(殤公)과 위(衛)의 선공(宣公)을 온(溫-河南省 焦作市 温県)에서 만났으며, 와옥(瓦屋-周의 땅)에서 맹약했다. 그리하여 송(宋)과 위(衛) 그리고 정(鄭)과 화평관계가 성립되었다. 17년 겨울에, 희공(釐公)은 노(魯)의 은공(隱公)과 방(防-魯의 땅)에서 회합했으며, 송(宋)을 칠 계략을 꾸몄다. 18년(기원전 713년) 2월, 정(鄭)의 장공(莊公)과 중구(中丘-魯의 땅)에서 만나서 송(宋)을 칠 날짜를 정했다. 그리하여 또 그해 6월, 제(齊)는 노(魯), 정(鄭)과 연합해서 송(宋)을 쳤으며, 그 땅을 빼앗았다. 하지만 또 그 7월에는 위(衛)와 채(蔡)가 송(宋)을 지원했기 때문에, 그들과 협상을 벌였지만 실패했고, 그러자 또 제(齊)와 노(魯) 그리고 정(鄭) 삼국은 그들도 쳐서 승리했다. 그 후, 19년(기원전 712년) 9월에, 제(齊), 노(魯), 정(鄭) 3국은 허(許)를 공격했으며, 3일 만에 함락했고, 그러자 허(許)의 장공(莊公)은 위(衛)로 망명했다. 그러자 또 희공(釐公)은 그 허(許)를 노(魯)의 은공(隱公)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거절했기 때문에, 정(鄭)의 장공(莊公)이 허숙(許叔-許 莊公의 弟)과 공손획(公孫獲-鄭의 大夫)에게 그 땅을 통치하게 했다. 21년(기원전 710년) 3월. 1월에 송(宋)에서 군주(君主)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희공(釐公)은 노(魯)와 진(陳) 그리고 정(鄭)의 군주들과 직(稷-宋의 땅)에서 회합했고, 그 송(宋)을 토벌할 것을 논의했다. 그러나 송(宋)의 대재독(大宰督-亂의 首謀者)이 4개국(個國)에 뇌물을 전달했기 때문에, 그 일은 무산되었다. 다음 22년, 1월. 희공(釐公)은 노(魯)의 환공(桓公)과 영(嬴-齊의 邑)에서 회합해서 혼약(婚約)을 맺었으며, 그 결과 9월에 딸 강 씨(姜氏)를 노(魯)로 출가시켰다. 25년(기원전 706년) 5월에는 북융(北戎)이 제(齊)를 침범했다. 그러자 6월, 정(鄭)이 태자였던 홀(忽)을 파견해서 제(齊)를 구원했고, 그 북융(北戎)을 격파했다. 그러자 그 보답으로 희공(釐公)은 자신의 딸을 그 홀(忽)에게 주려고 했으나, 홀(忽)이 그것을 거절했다. 다음 29년(기원전 702년) 12월. 희공(釐公)은 정(鄭) 장공(莊公)의 뜻을 받아들여서 위(衛)와 함께 노(魯)를 침공해서 랑(郞-魯의 땅)에서 싸웠다. 다음 32년(기원전 699년) 봄, 정(鄭)이 기(紀), 노(魯)와 함께 제(齊), 송(宋), 위(衛), 연(燕) 4개 연합군을 공격해서 이겼다. 그리고 그해, 희공(釐公)의 동모제(同母弟)였던 공자(公子) 년(年)이 죽어서 시(諡)를 이(夷)로 받았다. 그래서 그는 그 후, 이중년(夷仲年)으로 불렸다. 그 후, 희공(釐公)은 그 이중년의 아들이었던 공손무지(公孫無知)를 특히 총애했으며, 그래서 봉록(俸祿)과 복식(服飾) 등을 태자(太子)와 대등하게 대우했다. 희공(釐公) 33년(기원전 698년) 12월, 희공(釐公)이 죽었다. 그러자 태자(太子)였던 제아(諸兒)가 왕위에 올랐고, 그가 바로 양공(襄公)이었다.

 ⊙ 양공(襄公-?부터 기원전 686년)은 강제(姜齊)의 제14대 군주였고, 희공(釐公)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희공(釐公)이 기원전 698년에 훙거하자, 희공(釐公)의 아들 제아(諸兒)가 왕위에 올랐고, 그 후로 양공(襄公)이 되었다. 그리고 원년(元年-기원전 697년)에 희공(釐公)이 아꼈던 공손무지(公孫無知)의 대우가 과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공(襄公)은 그의 봉록(俸祿)과 복식(服飾)을 감했다. 2년(696년) 11월에 위(衛)의 혜공(惠空)이 제(齊)로 망명해왔다. 그러자 양공(襄公)은 3년, 1월에 노(魯)의 환공(桓公), 기후(紀侯)와 함께 황(黃-齊의 땅)에서 맹약했고, 그곳에서 위(衛)를 칠 것을 모의했다. 그리고 5월에 제(齊)가 노(魯)의 국경을 침범했기 때문에, 해(奚-魯의 땅)에서 양국(兩國)이 충돌했다. 그리고 또 10월에는 정(鄭)에서 고량미(高梁弥)가 주군(主君)이었던 소공(昭公)을 살해했고, 이어서 공자(公子) 미(亹)를 옹립했다. 다음해 양공(襄公) 4년, 1월에 양공(襄公)은 노(魯)의 환공(桓公)과 낙수(濼水-齊의 땅)에서 회합했고, 그 결과로 노(魯)의 환공(桓公) 부처(夫妻)가 결국 제(齊)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양공(襄公)은 그 노(魯)의 환공(桓公)부인(姜氏)과 사통(私通)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또 그때도 양공(襄公)은 그녀와 밀통을 하고 말았고, 그리하여 또 결국 환공(桓公)도 그 사실을 알고 말았다. 그러자 양공(襄公)은 그해 4월에, 그 사실을 염려해서 하루는 환공(桓公)과 술자리를 가졌고, 대취(大醉)하게 한 다음, 그를 죽여 버렸다. 그러자 또 노(魯)에서 사람을 보내서 그 일을 책망했는데, 그러자 또 양공(襄公)은 그 살해에 관여했던 팽생(彭生)이란 자에게 그 책임을 모두 전가시킨 다음, 그를 죽여서 진사(陳謝-사연을 말하며 사과함)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양공(襄公)은 자주 그 강(姜)씨(氏)와 밀통했으며, 그리고 그 7월에는 회맹(會盟)을 소집해서 정(鄭)의 미(亹)를 유인한 후, 고량미(高梁弥)와 함께 그 미(亹)를 죽여 버렸다. 양공(襄公) 7년(기원전 691년) 가을, 기계(紀季-紀侯의 막내 동생)가 기(紀)에서 떨어져 나와서 휴(酅)를 제(齊)에 헌상하고 스스로 제(齊)의 속국이 되었다. 양공(襄公) 8년 여름, 제(齊)가 기(紀)를 공격하자 기후(紀侯)가 나라를 버리고 도망을 갔기 때문에, 그때부터 기(紀)는 제(齊)에 병합되었다. 다음해 겨울, 양공(襄公)은 제(齊)에 거류(居留)하고 있던 위(衛)의 혜공(惠公)을 복위(復位)시키기 위해서 송(宋)과 진(陳) 그리고 채(蔡)와 노(魯) 연합군을 형성했다. 그리고는 위(衛)를 공격했고, 그 결과 혜공(惠公)은 그 다음해에 복위했다. 양공(襄公) 12년(기원전 686년), 양공(襄公)은 전년(前年)에 연칭(連称)과 관지부(管至父) 그 두 사람에게 규구(葵丘)란 곳을 지키게 했는데, 그러면서 양공(襄公)은 1년 후에 교대할 사람을 보내주겠다고 말을 했다. 하지만 그해, 1년이 지났어도 교대 자를 보내주지 않자, 양공(襄公)에게 그에 대한 문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양공(襄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에 화가 났던 두 사람은 공손무지(公孫無知)를 내세워서 반란할 것을 획책했다. 그리하여 그해 12월(단, 史記에서는 12월이지만, 左傳에서는 11월), 공손무지(公孫無知) 등이 궁중으로 난입했고, 그리고는 이어서 궁인(宮人)들과 양공(襄公)의 총신(寵臣)들을 살해했다. 하지만 그때, 양공(襄公)은 어딘가에 숨어있었는데, 하지만 그들은 끝내 양공(襄公)을 찾아내서 살해했으며, 그리하여 그 공손무지(公孫無知)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해, 그 역시도 대신(大臣)이었던 옹름(雍廩)에게 암살당했다.

 환공(桓公)의 아버지는 희공(釐公)이었고, 그의 형은 양공(襄公)이었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대충 전술(前述)한 대로 양공(襄公)은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래서 그는 일찍이 자신의 친여동생이었던 문강(文姜)과 연애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 후에 문강(文姜)이 노(魯)의 환공(桓公)에게 시집을 가서 장공(莊公)을 낳은 후에도 그 관계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환공(桓公)이 그것을 알고 문강(文姜)을 꾸짖었는데, 그러자 또 문강(文姜)은 그런 사실을 양공(襄公)에게 밀고(密告)했다. 그러자 또 양공(襄公)은 자신의 일족(一族)이었던 팽생(彭生)에게 시켜서 환공(桓公)을 살해했고, 그 후에는 또 그 팽생(彭生)을 죽인 후 누명을 씌웠다. 하지만 그 후에도 양공(襄公)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차례로 하나씩 죽였는데, 그러자 곧 제(齊)는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자 이미 전술(前述)한 대로, 공자(公子) 소백(小白)과 규(糾)는 거(莒)와 노(魯)로 망명했으며, 이어서 양공(襄公)은 사촌이었던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암살되었고, 그리고 또 그 공손무지(公孫無知) 사망 후, 두 공자(公子)는 다시 후계자 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 후, 환공(桓公)이 되었던 소백(小白)은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맞이했고, 제(諸)개혁에 박차를 가해나갔다. 그 후, 오만해졌던 환공(桓公)은 당시, 성천자(聖天子-덕망이 높은 임금)만이 행할 수 있었던 봉선(封禪)의식까지 행하려고 했고, 그러자 또 관중(管仲)은 <그것은 주(周)왕실을 무시하는 처사로, 절대로 자중해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필사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관중(管仲)이 죽자 환공(桓公)은 점점 더 방탕해졌으며, 끝내는 관중(管仲)의 유언도 무시하고 간신들을 등용시켰다. 그러자 나라는 점점 더 말이 아니게 되어갔으며, 그러던 중에 또 환공(桓公)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버리자 공자(公子)들이 후계 다툼은 더욱 치열해졌다. 그리고 또, 그러던 중이었던 기원전 643년 10월 8일에 그 환공(桓公)도 끝내 숨을 거두었지만, 그러나 입관(入棺)했던 일도 없이 67일이란 시간이 지나갔으며, 그동안 그의 유체는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또 그 다음해 8월까지 그의 관은 매장되지 못했고, 그래서 그 주위에는 온통 구더기와 악취로 인해서 사람들이 다가갈 수도 없었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제(齊)에서는 자주 후계 문제로 갈등이 발생했으며, 그 사이에 패권(覇權)으 진(晋)과 초(楚)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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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秦-기원전 778년부터 기원전 206년)

<진 제국의 판도>


 중국 왕조 중 하나였으며,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서 존재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했지만, 기원전 206년에 멸망했다. 그리하여 통일부터 멸망까지의 기간(기원전 221년부터 기원전 206년)을 진대(秦代)라고 부른다. 국성(國姓)은 영(嬴), 통일 때의 수도는 함양(咸陽)이었다.

 기원전 900년경에 주(周)의 효왕(孝王-周의 8代왕)을 섬겼던 비자(非子)가 말(馬)의 생산을 맡았는데, 그 공적이 높이 평가되어서 영(嬴)이란 성(姓)을 하사받았고, 그 다음에는 대부(大夫)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진(秦) 땅에 영지를 하사받게 되었다.<그러나 전설상으로 그 영(嬴)씨는, 제(帝) 순(舜)의 신하였던 백익(伯益)이 하사받았던 것이라고 한다>

 참고: 그리고 그 진(秦)은 과거, 은(殷)의 주왕(紂王)을 섬겼던 간신(奸臣) 악래(惡來)의 후예였다고 하고, 그 후에 서융(西戎)이 패자(覇者)가 되었던 일이며, 비자(非子)가 말을 생산하고 있었던 일로 해서 서융(西戎)의 일파(一派)였을 것이란 설도 있다.

<감숙성 예현-현재의 농남시(隴南市) 위치도>


 아무튼, 그 진(秦)이 최초로 발흥(勃興)했던 곳은 현재의 감숙성(甘肅省) 예(禮)현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되며, 그것은 또, 그곳에서 진(秦)의 조상 묘와 눈에 띄는 것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원전 770년에 주(周)가 견융(犬戎)에게 쫓겨서 동천(東遷)했을 때, 양공(襄公)은 주(周)의 평왕(平王)을 호위했던 공으로, 주(周)의 구지(舊地) 기(岐)에 봉해졌으며, 그 후에는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참고 : 악래(惡來)는 은(殷) 말, 주왕(紂王)시대의 관료였으며, 사기(史記)에서는 성(姓)은 영(嬴), 휘(諱)는 래(來)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비렴(蜚廉)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또 그 비렴은 달리기를 아주 잘 했는데, 그런데 그 덕분이었던지 악래(惡來)도 힘이 아주 셌다고 알려졌다. 그러자 그 능력이 인정되어서 그는 주왕(紂王)을 모시게 되었고, 그러자 또 주왕은 국정을 그에게 모두 맡겨버렸다. 그러자 그 후, 그는 사람을 참언(讒言)하거나, 교묘한 방법으로 해를 입혔기 때문에, 제후들이 그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자 제후들은 하나씩 은(殷)으로부터 멀어져갔으며, 결국에는 은주(殷周)혁명이 촉진되었다. 그리고 그 후,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했을 때, 그 역시도 살해당했고, 그 후 부친 비렴과 함께 한 묘에 매장되었다. 그런데 또 그 후, 그 비렴에는 악래의 동생으로, 계승(季勝)이란 아들이 또 있었다는데, 그런데 그 계승(季勝)의 자손이 춘추전국시대에 진(晋)의 조(趙)씨(氏)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악래(惡來)에게도 혁(革)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 자손이 진(秦)에 봉해진 후, 춘추전국시대에 진(秦)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에는 또 이설이 있으며, 그것은 또 그 혁(革)이 악래의 아들이 아니라, 비렴의 또 다른 아들이었고, 그 후에 그 자손이 진(秦)을 일으켰다는 것이 그것이다.








 <秦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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