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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미야자키 하야오.

 

내가 본 애니메이션의 90퍼센트는 그와 그의 동료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특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일년에 두어번은 꼭 본다.

눈 올 때 러브레터를, 장마 때 삼순이를, 봄에 연애시대를 보고 나야만

다음 계절이 맞이하는 것처럼, 그것은 나의 중요한 의식처럼 반복된다.

한마디로 그는 나의 애니메이션 세계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작가의 얼굴>에서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괴테에 대해 말한 것을 빌리자면,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누군들,

미야자키 하야오를 지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까.

호주 일주를 할 때 그가 영화의 모티브로 삼았다는 장소들,

울루루카타츄타 국립공원이나 버슬톤, 로스 등에 도착해서

나는 알 수 없이 엄숙한 마음이 들곤 했다.

마치 대단한 유적지에라도 서 있는 기분이었다.

수십년 전 여기 서 있었을 그를 상상하며

그가 보고 느꼈을 무언가를 찾듯 한참을 서성였다.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지! 하면서.

 

 

이처럼 나같은 문외한마저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그가

아이들을 위해, 50권의 책을 골랐다.

 

저자가 '승부의 세계'로까지 묘사하며 신중하게 고르고 고른 것들은

어린 왕자나 삼총사, 파브르 곤충기, 서유기 같은 것부터

파를 심은 사람처럼 우리나라 민화를 엮어 놓았다는

(나는 처음 들어보는) 책까지 다양하다.

 

책 한권을 네 다섯 줄로 맛깔나게 설명한 그의 능력도 감탄스럽지만

역시 나의 눈은 끄는 것은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회상과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을 위한 작가의 깊은 고민이다.

 

특히 지난 2011년 원전사태는 일본 사회는 물론

그에게도 중요한 전환점이 된 듯하다.

 

서브 컬쳐가 또 다른 서브 컬쳐를 낳는 시대(131쪽),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상과 게임과 소비에 빠져들면서,

개를 키우고 건강과 연금 걱정을 하고 조바심을 내면서,

결국 경제 이야기만 해 온, 불안만큼은 착착 부풀어 올라

스무 살 젊은이와 예순 살 늙은이가 다르지 않게 된 시대(145쪽).

 

작가는 아이들이 즐겁게 보는, 그런 행복한 판타지 영화를

당분간은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다.

행복한 에니메이션을 만들려고 해도 어쩐지 거짓말 같은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다 버린 것은 아니다.

세상이 아무리 흥청거려도 온화하고 차분한 방향으로 키를 돌린다면,

그 방향에서 우리가 찾는 새로운 판타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판타지를 만들어갈 어린이들.

우리에게 새 희망을 보여줄 그들을 위해 그는 책을 고른 것이다.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밀양 송전탑 문제로

한참 마음이 쓰이기 시작할 때였다.

 

과연 이 시대는, 사람은 얼마나 더 망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경제논리, 전쟁논리에 이용당할 것인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끝없는 질문만 퍼부으며 답답해 하고 있을 때.

 

 

그는 힌트를 주었다.

 

아이들이 모닥불을 피우거나 나무에 오르는 일은 위험하다.

처음에는 아주 조심하며 오르내리지만 차츰 대담해진다.

그러다가 떨어진다. 실제로 해보면 아주 큰일이다.

그래도 모닥불을 피울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 정치가 어떻다느니 사회 상황이 어떻다느니

대중매체가 어떻다느니 세상 전체만 논할 게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이는 범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상당히 여러 가지 것들이 변하지 않을까(141쪽).

 

그리고 저자는 음성이 거의 담기지 않은, 한가로운 영화를 만들었다.

이젠 내가 답을 내야할 차례다.

인생에 단 한권이어도 좋을 책.

그의 말대로 어쩌면 우리는 시험을 치르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 대한 설명 중 한 부분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 사람의 작품은 모두 보물이다.

서둘러 읽어서는 안 된다.

찬찬히 몇 번이고 읽고 소리 내서 읽고, 그러고 나서 마음에 울리는 것이나

전해오는 것에 귀를 기울이며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며칠 지난 후에 다시 읽고, 몇 년 지나고 나서도 읽고,

잘 알지도 못하는데 왜 눈물이 나는 것일까 생각이 들고,

어떤 때는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기도 한데, 그 순간 또 쓱 사라져 버린다.

그런 아름다운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46쪽, 주문 많은 요리점)

 

 

 

 

마지막으로, 내사랑 ‘하쿠’가 나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물위를 달리던 기차의 모토가 되었다는 제티.

- 버슬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2010.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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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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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일까. 인연일까.

 

같은 시대를 보낸 오랜 지기한테나 기대할 수 있는 깊은 위로를 받은 느낌.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대학이후 십삼년을 보낸 서울, 도시를 떠나 산골로 돌아온

나에게 설렘과 숙제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이 작가가 하늘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 갖는 위대한 애정은 놀랍기만 하다!

그가 태양과 구름, 산, 호수, 나무, 풀 그리고 살아 있는 존재들에 대해 묘사하고 찬미하면,

그의 말을 통해 진실한 감정과 사색의 음향이 들려온다.

그리고 이미 익숙해진 것들조차 새롭고 고귀해진다."

- 발터 라테나우의 서평, 217쪽.

 

그렇다.

나무, 잡초, 선인장, 복숭아 나무와 흙,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다 탄 뒤 남은 재까지.

마치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된 뒤에야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는 것처럼

모든 자연에 열려 있는 그의 가슴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친숙한 것들조차 새롭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아마 한 번도 자신의 정원을 가지는 걸 생각해보지 않은 이들에게조차

'살면서 한번쯤은...'하는 꿈을 갖게 할 만큼,

결코 가볍지 않은 그의 생활이 그저 낭만적으로 보일 만큼.

그의 말은 살아서 숨을 쉬고 춤을 추고, 당신도 어서 해보라며 손짓을 한다.

 

스스로 부딪히고 경험한 것들이 갖는 진실성.

이 책을 읽으며 '노동'에 대해 강조한 이오덕 선생의 말을 여러번 떠올렸다.

 

"글은 자기가 겪은 일을 정직하게 쓰는 것이 기본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정직하게 쓰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고,

다시 또 남들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가치가 있는 글을 쓰려면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하고,

가치가 있는 생각을 해야 한다.

글쓰기가 어렵다면 바로 이것이 어려운 것이다."

- 이오덕, <무엇을 어떻게 쓸까>, 31쪽.

 

그가 정원으로 들어간 것도

가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가치 있는 생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전쟁과 현대 문명이 만들어내는 기계적이고 소모적인 세상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충동으로 가득 찬 시대의 흐름에 영혼의 고요함으로 맞서"기 위해서(204쪽).

 

내가, 우리가 그토록 도시를 떠나고 싶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소비만이 추앙받는 곳에서 제대로 살 자신이 없었다.

온갖 소음과 쓸데 없는 일들에 치여 나를,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살까봐 두려웠다.

그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싶었다.

우리 모두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시대의 아픔을 견디고자 했던 대문호에게도, 미천한 도시인에게도

'자연'은 그래서 그 자체로 축복이고 치유다.

 

 

 

 

그래서 떠나왔다.

내 아이가 맘 껏 걸음마를 할 수 있는 잔디밭이 있고,

밥상에 올릴 푸성귀를 직접 키우고 가꿀 수 있는 텃밭과

개 한마리와 닭 다섯마리와 토끼 한마리가 있는 집으로.

 

집안 어디에서든 산과 나무와 하늘이 보이고

몇걸음만 옮기면 누런 들판이 나오며

언제고 불쑥 대문을 열어제끼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주로 사는 곳.

변성기를 지나는 중학생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온동네가 잠잘 준비를 하는 진짜 시골로 말이다.

 

아마 내 아이에겐 이곳이 첫 고향이 될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그곳을 떠난 뒤에도 두고두고 그리워하게 되겠지.

그리하여 저자가 그랬듯이 나중에 다 자라서 세상 여기저기를 나갔다가도

언제든 ‘고향’이라 부르며 돌아올 수 있는, 영혼이 머물 수 있는 진짜 집.

 

나도 저자처럼 정원을 가꾸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쉬지않고 '가치있게 사는 법'을 고민하며 살아갈 생각이다.

 

그는 토마토 이외의 모든 먹을거리는 아내에게 맡겼지만

아마 나는 그 반대가 될 것 같다.

 

"집 안에 저장해둔 씨앗과 구근을 살펴보고

정원에서 사용할 공구들을 점검하며,

잡초 한 포기 자라지 않게(12~13쪽)"

제대로 정원을 가꾸는 일은 남편에게 맡겨두고

그가 정성들여 키우고 가꾸는 밭을 들여다보며 맘껏 흐뭇해 하리라.

 

그래도 가끔은 그 일에 열심히 동참할 것이다.

이오덕 선생이 말했듯이, 헤르만 헤세가 삶으로 증명했듯이

일을 하는 것이 없는데 글만 자꾸 쓴다면

그 글이 제대로 될 수가 없으니까.

 

 

 

 

리뷰 작성 기한일을 지키고 싶은 마음에

이사와 명절, 돌배기 아이를 돌보는 틈틈히 분주히 읽었지만

한 번에 한 챕터 씩,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겠다.

 

넘쳐나는 자연의 힘, 그 사이에서 맘껏 유희하고 싶은 내가

어떤 게으름뱅이 정원사가 될 지 한껏 기대하며.

멋스런 셔츠에 우수에 찬 눈과 고집스런 주름을 갖고 있던 그를 떠올리며.

 

"재미 삼아 정원사 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몇 달밖에 안 되는

따뜻한 기간에 많은 것들을 관찰할 수 있다.

원한다면, 혹은 누군가의 부탁으로  정원을 가꾸게 된다면

온통 즐거운 것만 보게 된다.

키우고 열매 맺는 것을 보고 형태를 다듬어가는 가운데 넘쳐나는 자연의 힘,

자연 속의 형상들과 색채 사이에서 유희하고 싶은 느낌과 환상,

여러 면에서 인간적인 여운을 주는 작고 소소한 즐거운 생명(17~18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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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책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어느 책방에 머물러 있던 청춘의 글씨들
윤성근 엮음 / 큐리어스(Qrious)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헌책, 책방, 청춘의 글씨.

 

겉표지부터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이 죽 늘어서 있다.

'헌책방' 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딱 한 명 있는데,

이 책도 그의 신작이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작가에 대한 얘기부터 해봐야겠다.

 

그의 책을 처음 본 건 2011년 가을,

내가 일하던 곳에선 일년 중 가장 바쁜 계절이었다.

밤을 새도 모자라는 일더미에 파묻혀 있을 때면

왜 그리 책 생각은 더욱 간절한지.

잠은 부족하고 늘 긴장하고 있느라 벌건 눈을 하고서도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책을 읽는 기쁨이란!

 

사실 그의 책은 어지럽고 번잡한 마음을 달래줄 만큼

간단한 책이 아니었다.

저자의 책과 작가에 대한 방대한 지식은 놀라울 정도였고

그래서 꽤 어렵게 읽혔다.

 

나도 그만할 때(초등학교)는 책벌레란 소리를 듣고 살았는데

그가 몇시간씩 걸어서 책방을 찾아다녔던 것 만큼

나는 열정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서글펐다.

그가 언급한 책들을 모조리 찾아 읽고 싶은 쓸데 없는 욕망에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기도 했다.

남들이 안정을 찾아가는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회사를, 세상을 박차고 나온 용기와

이름마저 근사한, 자기가 읽고 추천하는 책만 파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하는 그가 부러웠고, 난 그래서

그가 나와 같은 부류, 그러니까

늘 자유롭기를 갈망하고 진실한 삶에 대해 고민하며

종이책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105쪽)

사람일거라고 멋대로 정의내리며 그의 친구가 되고자 했다.

여백이 별로 없던 그 책은 어쩌면

그가 세상과 나누고 싶은, 소통하고픈 이야기가 많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전작에 비하면

상당히 대중적이라고 할 만 하다.

헌 책 속에 새겨진 편지나 문장들로 시작하는 그의 글은

어렵고 고지식하고 따분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 뒤에 가려져 있는

평범하고 여린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주인공으로 만든다.

 

그래서

정성들여 꾹꾹 눌러쓴 사랑의 증표든,

술 먹고 휘갈긴 철학의 고뇌든,

그 속에 담긴 모든 이야기들은

나의 것, 우리들의 것이다.

그들의 심정과 진심을 헤아려 소중하게 모아두고,

급기야 수십년 전 메모의 주인공까지 만난 저자의 노력이 고맙다.

 

특히 1980년대 90년대에 청춘을 보냈던 이들이라면

자유와 진리, 선과 정의, 희망과 절망을 탐색하고

책에서 그 정답을, 자신에 대해 고민했던 이들이라면(69쪽)

그리하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 당신이라면,

낡고 오래되고 헌 것을 볼 때마다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당신이라면,

이 책은 큰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가을은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염원해 왔던 탈서울을 실천한 것이 무척 기쁘다.

 

이사날짜를 며칠 앞두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서재 정리였다.

아이가 잠든 사이 치킨 한마리를 주문해 놓고 남편은 책장을 나는 서랍을 맡았다.

그가 크기별로 꼼꼼히 꾸려놓은 책들을 보고 있자니

한때 불꽃처럼 거세게 타올랐고

영원한 것을 찾아 헤맸던 내 청춘이 생각났다.

 

그 때 난 저렇게 책 아랫면에 이름을 써두었고,

가끔은 그가 내 대신 누구누구꺼라고 쓰기도 했다.

그건 이 책 주인이 나란 뜻이자 책 주인인 내가 그의 것이라는,

유치한 우리만의 대화법이었다.

이름 옆에 찍혀 있는 도장은 서점에서 계산을 마친 뒤 찍어준 것이다.

 

지금 난 대부분의 책을 인터넷에서 산다.

그가 책에 내 이름을 써주기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난 여전히 책이 좋다.

책을 선물하고 선물받는 것도 좋다.

 

내 청춘을 바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대신

그 영원하지 못한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싶게 만든,

한결같이 내 옆에 있어준 그가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한 가지 다짐했다.

 

전에는 엽서나 편지지에 글을 적어 표지 뒤에 끼워두곤 했는데

앞으론 맨 앞 장에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의 이름과 보낸 날짜를 적어 두기로.

그리하여 훗날 누군가가 그 책을 다시 들춰봐도

(선물받은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 책을 선물하던 나의 마음을, 우리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끈질기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당신이 그렇게 눌러 쓰며 결심한 것처럼(216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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