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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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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변호사의 유럽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저 |한상연 역 |부키 |2011.10.19

 

한국 근현대 역사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미국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아메리카 드림을 ‘팍스 아메리카나’로 실현했다. 독립 혁명 이후, 미국은 민주주의 리더였고,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평화의 전령사 역할을 자처했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가진 많은 이에게 ‘샐러드 보울(salad bowl)로 은유되고 있다. 섞이되 각자의 맛과 향을 그대로 지켜나갈 수 있는 ‘드림’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땅이 미국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20세기였다.

 

자본주의의 미덕에 기초한 자유의 땅이 붕괴하는 심상치 않은 조짐은 지난 2001년 ‘911 테러’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진주만 폭격 이후 단 한 번도 본토를 침략 당한 적이 없던 미국에 대한 쌍둥이 빌딩(twin towers) 테러는 미국인들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에 대한 의문을 갖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는 여전히 미국이 해결해야 할 난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희망의 땅이다. 우리는 유럽 복지의 출발이 미국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대륙에서 진행되고 있는 복지의 싹은 (뉴딜정책과 같은) 미국 정책에서 출발했다는 것과, 미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사회를 비판하고 내부적 모순을 드러내는 훌륭한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세계화와 미국 패권의 몰락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임마누엘 월러스틴, 미국 보수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며 미국 정책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노암 촘스키와 하워드 진, 미국 교육의 지식 내용을 비판하는 마이클 애플 등 열거하기에도 벅찬 훌륭한 학자들이 내부에서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교육 정책가 조너선 코졸은『야만적 불평등』에서 미국의 공교육 실패를 커밍아웃하고, 자신이 참여했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대한 반성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런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입장에서 시카고의 노동 전문 변호사인 토머스 게이건은 세계의 단일적 단극체제 중심에 서 있는 미국의 실체를 확실하게 분석한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역행하는 발언으로 가득한『미국에서 태어난게 잘못이야』는 억압된 우리의 상상력이 현실로 작동하는 유럽 - 특히 독일 - 의 복지 현실과 국가 마인드를 제대로 보여준다. 자칫 딱딱한 주제가 될 수도 있음에도 그는 감독 마이클 무어(M. Moore)식의 유머로 쓴 웃음을 웃게 하는 탁월한 글쓰기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회과학 서적으로서의 치밀함은 떨어지지만, 두 달 동안 몸소 경험한 독일 복지와 미국 복지를 비교· 분석하여 미국 정책의 허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과연 단일화된 단극체제에서 유럽복지를 지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게이건은 분명하게 독일이 사회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YES"라고 대답한다. 하버드 대학의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영향 탓인지 미국 정부는 자국의 라이벌을 중국으로 상정하고 있지만, 게이건은 미국의 맞수는 독일이라는 지론을 펼친다. 여행에서 만난 독일인의 이야기를 토대로 세계화가 아무리 거세어도 독일식 삶의 방식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한다.

 

아직도 이 책에서 기술하고 있는 미국과 독일의 상반된 상황을 믿을 수 없다면, 실제 그 나라를 경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아쉬운 대로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미국에 가 있는 한국인 유학생과 이민자들은 잠시 한국을 들릴 일이 있으면 치과 진료와 정기검진을 꼭 받고 간다는 사실만 기억해도 충분할 것이다.

 

2011년 한국은 교육복지, 무상급식, 한미 FTA가 전 국가적인 화두였다. 이 모든 이슈는 결국 하나의 그물망으로 엮인다. 또한 세계화의 대세 속에서 교육, 복지, 경제, 이념은 자국의 가치만으로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사소한 바람 한 점에도 한국의 정치 경제는 버터플라이 이펙트로 휘청거린다. 한국과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밀접한 미국의 현재를 냉정하게 분석할 때만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정책이 미국과 유럽에서 각자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인 사례를 보게 될 것이다. 미국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 없이 구시대의 유물이 된 ‘근대화론’에 집착하는 한국 보수 세력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사족 1 : 미국에서 “변호사가 두 달이나 쉰다는 것은 일반인이 2년을 통째로 쉬는 것과 맞먹는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두 달의 유럽 여행은 쉽지 않은 결정일 수도 있다. 몇 년 전 호주에서 만났던 미국인 여자가 생각난다.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고 6개월째 배낭여행을 하고 있었다. 골드코스트에서 배를 타고 들어갔던 (사막으로 이루어진) 프레이저 섬에서 수채화를 그리며 여유자적 하던 그녀와 같은 미국인의 삶이 이제는 불가능한 것일까?

 

사족 2 : 세계 최고의 장수 국가 ‘불가리스’의 노인 수명이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동유럽을 휩쓸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가, 아니면 그들이 즐겨먹은 요구르트, 토마토, 와인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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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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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으로 촘촘하게 읽어야 할 사회계약설 철학자 쟝 자크 루소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애드먼즈, 존 에이디노 저 |임현경 역 |난장 |2011.10.31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은 근대의 두 철학자, 루소(J. J. Rousseau)와 흄(D. Hume) 사이에 인간적인 접점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무척 흥미로운 책이다. 18세기 역사, 철학, 정치, 사회의 중심에 서 있던 두 사람의 18개월 간 지속된 논쟁이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조 에이디노를 통해서 21세기에 재현되었다. 21세기의 독자는 18세기와 다른 에피스테메로 그들의 논쟁을 바라본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들의 우정과 진흙탕 싸움 끝의 결별은 감정의 가감 없이 상당 부분 사실적으로 묘사 되어 있다. 드러난 실체에 가려진 거대한 성인의 왜소해진 그림자는 그들의 실제 사이즈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자연 상태’와 사회계약을 비판하고, 만인의 공통된 ‘이익’에 기초한 감정에서 법의 근거를 구하는 공리주의를 제시했던 경험론 철학자 흄, ‘이성’을 가진 개인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사회계약을 통해서 보편적 일반 의지를 산출하여 사회를 구성하고자 했던 사회계약설 학자이자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 그들의 인간적인 고뇌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거장의 철학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BBC 시사 다큐멘터리 전문작가와 프로듀서로 만난 두 사람 데이비드 에드먼즈·존 에이디노는 한편의 다큐를 보여주듯이 두 철학자 사이에 있었던 18개월의 사건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 현재시점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글쓰기는 결론으로 치닫는 전 과정에 자연스런 몰입을 가능케 한다. 이백 여 년이 지난 후, 다시 보는 역사에는 사라진 부분과 부식된 지층들이 존재한다. 작가들은 루소와 흄이 남긴 글과 왕래한 서신, 두 사람을 지켜보았던 주변 사람들의 기록 사이사이의 틈새에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촘촘하게 엮는다. 철학사의 거대담론에 가려진 두 사람 사이의 사소한 미시사를 복원하는 일은 고고학 탐사처럼 조심스럽고 흥미로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복원된 의미 있는 역사의 한 지점을 마주하는 값진 시간을 갖는다.

 

책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루소와 흄이 동등한 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흄은 당시 루소를 바라보는 철학자의 전형일수도 있겠다. 루소에게 온전한 사랑과 이해를 주었던 이들은 - 우정을 나누었던 흄이 아니라 - 수준도, 관점도 전혀 다른 가정부 르바쇠르와 그의 개 쉴탕이였다. 인간적인 비난을 감내해야 하는 유럽의 유명인으로 살아간 루소의 고독과 외로움에 관한 출처를 벗어나서, 인간 루소를 비판하는 일은 온당치 못하다. 사상과 삶(실천)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준 대표 주자로 언급되는 루소는 직접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의사(意思)는 대표될 수 없다”로 유명하다. 책을 읽는 내내 이 문장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아직도 루소가 새롭게 읽혀질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루소에게 외로움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자신의 탄생이 어머니의 죽음이었던 기억 이전의 트라우마를 안고 이 세상에 온 루소는 『고백』에서 “ 내 인생 최초의 불행은 나의 탄생이었다.”라고 말했다. 아내의 상실로 아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했던 아버지 마저 루소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다. 인간의 불행에 관한한 뛰어난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 서사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항상 망명가의 심정으로 살았을 루소는 기존질서를 뒤흔드는 ‘위험한 책’을 세상에 내 놓음으로써, 정부, 귀족, 교회의 노여움의 대상이었다. 저서를 통해서 모든 종교와 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도전은 루소를 유럽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작가로 만들었다. “그가 펜을 들면 제도가 몰락했다.” 구속당하고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분석, 교육에 대한 기존 질서를 뒤집는 이론은 그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기제로 작동하였다. 이는 치명적인 적대 세력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문자 메커니즘을 장악하고 여론을 만들 수 있는 집단과 나약한 개인으로서 루소의 싸움은 루소에 대한 심각한 이미지 훼손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공모가 만들어낸 ‘사실’을 후세대는 진실이라고 오인하고 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오늘날 지식인 집단과 언론이 하는 일들과 당시 살롱과 학계가 했던 일 사이에는 분명 공통점이 존재한다.

 

역사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기록 사이사이의 오인을 들추어내고, 근거를 찾아가고, 거대담론에 가려 있거나 의도적으로 묻혀버린 미시사를 복원하여 진실에 근접해 나가며, 우리 삶의 은유로서 역사를 활용하는 일은 여전히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당시의 생활양식을 바탕으로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역사 서술 작업이 갖는 함의이다. 역사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가능성의 역사’가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새롭게 부각되는 것은 루소를 프랑스 살롱에 진입하게 한 후견인 바랑부인이 아니라, 가정부이자 루소의 다섯 아이를 출산했던 르바르쇠였다. 루소가 살롱에서 만나는 귀부인들과 달리 르바르쇠는 손에 물이 마를 날 없이 부엌과 세탁실에서 일만 하는 하녀였다. 루소의 전기 작가들은 “엄청나게 무식한 여성”, “불행한 여인”, “악독하고 천하고 열등한…맥베스 부인 같은 여자”라고 묘사했다. 흄은 “자신의 사악한 마음을 교활하게 쓸 수 있을 정도의 지성만 지녔다.”는 악평을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르바르쇠는 루소의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 루소의 개, 슐탕과 함께 그의 옆을 지킨다. 아직도 그녀는 루소와 함께 여전히 새롭게 읽어야만 하는 열린 텍스트로 존재한다.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의 삶을 재현하는 일은 엄청난 고증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의 미덕은 역사, 역사적 인물을 재현한 드라마와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사유하게 한다는 점이다. 다만 다큐적 기술 방식은 소설 같은 재미를 반감하기도 한다. 루소와 흄의 논쟁 뿐 아니라, 당시 철학의 바탕을 이루었던 18세기 유럽의 문화를 간접경험 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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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12-24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정신인 흄보다 미치광이었던 루소가 사랑을 더 받고 있다는 사실을 숲님의 리뷰에서도 읽을 수 있네요.^^
루소의 불완전성,기질적으로 우울하고 예민했던 그의 성향들, 모순적인 그의 행적들에 대해
사람들은 비난하면서도 동정심을 함께 가지는 건, 본디 우리 모두가 트라우마를 가진, 혹은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그러지 않을까....더 많이 그쪽으로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까 싶은데,,
숲님은 어찌하여! 루소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는 겁니까?,,,,,ㅎㅎㅎ 듣고 싶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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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히, 아름다움』 

김병종 | 김혜순 | 안상수 | 최재천 | 최창조 | 백영서 | 전중환 | 배병우 | 민현식 | 이건용 | 홍승수 | 김현자 | 정두수 (지은이) | 이음 | 2011-11-28 

‘아름다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시대의 지성 열한분이 미학의 전문 영역으로 다루어진 ‘아름다움’을 자기 삶에 용해하여 드러낸다. 저자들은 통섭의 형태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를 자기 고백적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 역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공감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다. ‘아름다움’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건축가 민현식, 진화심리학자 전중환, 디자이너 안상수, 지리학자 최재천, 생물학자 최재천 등의 소통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M. Foucault가 『성의 역사 』3권에서 이야기했던 주체적 삶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아름답게 만들고, 이를 통해서 노예적 삶을 탈피하는 것이다. 이는 타자의 윤리를 내면화하지 않고, ‘자기 배려의 윤리’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미학으로 가꾸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보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원제 Wie wollen wir sterben? (2010)
|미하엘 데 리더 (지은이) | 이수영 (옮긴이) | 학고재 | 2011-11-25  

죽음에 대한 사유와 성찰은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생명의 탄생만큼 도처에 퍼져 있는 죽음을 외면한다면,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의학 기술의 획기적인 발달은 끊임없이 윤리의 딜레마 상황을 가져오기도 한다. 직업상 누구보다도 죽음 과 밀접할 수밖에 없는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의사는 과연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30여 년 동안 독일 의료 현장에서 일한 의사 미하엘 데 리더는 수많은 말기 환자와 임종환자의 사례를 통해서 존엄사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한해의 끝에서 죽음과 소멸을 받아들이는 법에 대하여 깊게 사유한다면, 달라진 새해를 맞이할 수 있으리라.
  

 

『아이비리그의 빛과 그늘 - 능력주의 사회와 엘리트의 탄생 』 

  강준만 (지은이)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11월

 시대의 최고 지성 강.준.만 교수의 책을 빼놓지 않고 읽는 애독자로서 눈길이 가는 책이다. 그의 글은 발터 벤야민의 모자이크 글쓰기처럼 온갖 인용과 그에 대한 분석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사회 현상과 이슈에 대하여 새로운 이면을 보게 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지녔다. 거대 담론 사이사이 박혀 있는 미시사를 발굴하는 강준만 교수의 분석은 인쇄된 모든 원자료를 읽고, 분석하고, 재단하여 다시 바느질하는 우직한 장인정신을 느끼게 한다.  

좀처럼 연구실을 벗어나지 않는 강준만 교수는 『아이비리그의 빛과 그늘』을 쓰기 위해서 아이비리그 대학을 직접 탐방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전에도 『입시 전쟁 잔혹사』『서울대의 나라』등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학벌주의를 심도 깊게 논의한 바 있다. 미국의 명문대학의 실체를 보게 된다면 - 조기 영어 교육, 조기 유학 등 - 우리나라의 교육 문제의 원인과 예후를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난게 잘못이야』와 함께 읽게 된다면 미국 사회를 보다 더 적확하게 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 글로벌 슬럼프 - 위기와 저항의 글로벌 정치경제 이야기』
 
  데이비드 맥낼리 (지은이), 강수돌, 김낙중 (옮긴이) | 그린비 | 2011년 11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유권자들은 도덕성을 포기하고서라도 ‘경제’만 해결해준다면 누구라도 괜찮다는 신념으로 대표를 선출했다. 그러나 실업, 물가상승, 전세 값 폭등 등 서민의 고통은 오히려 더 배가되고 있을 뿐이고, 세계의 거대 자본은 서민의 생계를 가지고 사채업을 하고 있다. 국가 단위의 경제가 불가능한 세계화 시대, 국가 내, 국가 간, 대륙 간의 빈부 격차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주류 언론은 현재의 위기를 자본주의 흐름상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주기적 불황 현상에 불과하고, 이는 곧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펼친다.

캐나다 진보 정치경제학자인 데이비드 맥낼리는 글로벌슬럼프를 정치적으로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연대와 민주주의를 강조한다. 그는 이 시대의 정치경제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할 것을 요청한다. 경제 위기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심층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한 그의 글을 통해서 의미 있는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학자연하는 현란한 언어가 아니라, 치밀하되 명쾌하고 쉬운 언어로 다가오는 그의 글을 글에서 희망을 읽기를 바란다.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 미래, 과연 희망 버스는 달릴 수 있을까?』
 
| 원제 Hopes and Prospects 촘스키, | 희망을 묻다 전망에 답하다
노엄 촘스키 (지은이) | 노승영 (옮긴이)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11-09

변형생성문법이론으로 언어학에 끼친 영향만큼, 1960년대부터 활발한 사회운동 참여로 미국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노암 촘스키의 신간이 나왔다. 책의 원제가 『희망과 전망』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이번에도 21세기에 닥친 위험을 분석하여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하였다. 그가 생각했을 때 희망은 미국에 대항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 권력들에게 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민중 투쟁은 전 세계의 양식 있는 민중의 목표가 되는 세계화를 향한 공동 노력에서 전 세계의 귀감”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정권 위기 상황을 초래하면서까지 기습적으로 통과시킨 한미 FTA와 ISD(투자자 국가소송제도)로 정국이 시끄러운 이즈음, 이 책을 통해서 미국을 제대로 알고, 한미 FTA 조약을 재분석하여 우리가 미국 경제에 종속되지 않도록 무력화하는 해법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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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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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하고 위험한 책 『맹신자들』-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이민아 옮김, 궁리(2011. 11)

  샌프란시스코의 부두 노동자이자 철학자인 에릭 호퍼의 책 『맹신자들』은 개인이 광신자가 되는 과정을 드러냄으로써, 대중운동의 공통적인 속성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1951년에 쓴 것이지만, 2011년 오늘의 한국 상황에도 무리 없이 적용되는 통찰을 담고 있다. 대중 운동에 참여하는 다수의 행동을 추동하는 심리를 잘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퍼는 초기 기독교, 아시아의 부흥을 가져 온 민족주의, 유럽과 전 세계 많은 지역에서 승리한 공산주의와 오늘날 대중운동이 가지는 하나의 절대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바로 신을 믿지 않는 시대의 맹신자들이라는 것이다.  

  호퍼의 무수한 단상을 하나로 엮는 키워드는 ‘희망’이다. ‘희망’에 설득당한다면, 대중은 계급과 이념에 상관없이 욕망과 광기에 의해서 변화를 갈망한다. 기득권자 뿐 아니라, 비참하게 가난한 사람들은 변화에 호의적이지 않다. 빈민층 역시 특권층처럼 사회 질서를 영속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좋았던 시절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거나, 희망을 가질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변화에 대한 욕망으로 피가 끓는다. “대중 운동을 개척하는 것은 지식인, 실현하는 것은 광신자, 굳건히 다지는 것은 행동가다(214쪽). 

  철학적 분석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얻어낸 125가지의 ‘단상’을 책으로 엮는 것은 호퍼의 대단한 용기다.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의 결함을 인정하게 하는 이 진실에 대해서 극도의 증오심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는 파스칼의 『팡세』를 인용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 진보와 대립각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사회의 시민운동과 변혁을 위한 투쟁은 희망을 원하는 다중(!)의 움직임이지만, 이것을 맹신자들이라고 규정한다면 이것은 이성적 자기 성찰을 모두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호퍼의 주장 대부분을 수용하는 것은 불온하고, 무의미하다.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대중 강연에서 한 청중이 조국 교수에게 “당신도 콤플렉스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했다. 그는 “엄친아인 삶의 이력이 콤플렉스”라고 답했다. 그것은 계급적 한계를 인정한 참으로 진솔한 답변이었다. 알튀세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의식은 곧잘 우리의 존재를 배반한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통치기구가 헤게모니를 장악했을 때, 우리의 의식은 존재를 배반한다. 때문에 희망과 욕망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고, 과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계상황에서 능동적으로 자유의지를 실천한다. 건강한 사회는 모든 사람이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궤적과 사회적 위치에 위배되지 않는 의식을 갖는 다중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맹신자들』은 우리에게 ‘일정 정도’의 성찰을 요구한다.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며 자신의 계급적 위치와 삶의 궤적을 메타적으로 성찰하는 많은 사람들은 호퍼의 생각에서 ‘일정 정도’의 동의와 함께 대안을 만들어가는 해법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호퍼의 책을 ‘충고’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독재정권과의 투쟁 경험을 계급과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대중운동을 추동하는 여러 변인 중의 하나가 ‘희망’을 걸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대중운동은 초기 기독교, 나치즘, 민족주의와 다른 성격을 가지는 것이 분명하다. (희망에 들뜬) 맹신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계급에서 떨어져 나와 소수자의 시선으로, 언어를 갖지 못하는 대중의 입이 되어 역사 발전의 한 점으로 남는 많은 실천가의 무수한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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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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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피에서 한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운 시(詩) 읽기의 난해함은 작가주의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의 시선과 별로 다르지 않다. 시의 난해함을 극복한다면 응축된 시 세계를 만날 수 있지만, 그 고비를 넘는 일은 자연스러운 감수성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시인은 우리가 무심코 흘려버렸을 미세한 경험과 감정에서 호흡을 멈추고, 존재를 던져 사유했을 것이다. 그들의 절망과 고뇌를 짐작한다면, 시를 이해하겠다고 덤비는 것 자체가 욕심일 수 있다.  

서정(敍情)과 서사(敍事)가 내포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시인(詩人)의 이해를 자신의 고유어로 형용할 수 있다면, 각자의 개별 경험 사이에서 이탈하는 궤적의 간극을 좁힐 수 있을 것이다. 그 지점에서 강신주는 열네명의 시인과 열네명의 철학자를, 또한 우리와 시인·철학자를 적극적으로 중매한다. 시를 읽는 일도 쉽지 않은데, 차가운 이성을 선호하는 논리와 분석의 철학을 시 이해의 도구로 삼는다는 일은 그 수고로움을 몇 곱절 배가하는 일이다. 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강신주는 도제적 노력으로 그들을 새롭게 빚어낸다. 봉우리에서 바라보는 자연의 풍광이 다르듯, 우리시대 철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의 세계는 자연의 산만큼이나 다채롭고, 각각의 의미로 우리의 시야를 자극한다. 그의 사유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각각의 해석은 낯설었던 시의 느낌을 서서히 보편의 감수성으로 끌어올린다.  

이 책은 읽는 동안 우리는 시와 철학으로부터 위무 받고, ‘자유’에 한걸음 다가서게 된다. 각자의 삶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받기 때문이다. 견고한 성을 쌓았으나, 실은 빈 창고와 같았던 내면이 무너지는 느낌을 선물 받는다. 내 삶의 고유한 주름들 사이의 굴곡과 상처가 실은 인간의 삶에 필연적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일정정도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을 전제하는 근대적 패러다임에 갇혀있는 나에게는 해방구와도 같은 책이었다. 미로를 헤매고 있을 때 - 감추어둔 다음 방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는 것처럼 - 적재적소에 포진해있는 시들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스스로 허용하고 받아들여도 좋다는 안도감을 갖게 한다. 삶을 성찰하고, 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길을 보여준다.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데, 무수한 사회과학서 보다도 마이클 무어의 영화 한편이 더 유용할 수 있는 것처럼, 두꺼운 철학책에 다가서는 걸음으로 한 편의 시만한 것이 없다. 거기에 이 책의 미덕은 ‘글’이 아니라, 철학자의 친절한 ‘말’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 청중을 앞에 두고 기획된 프로젝트였던 만큼, 난삽한 문맥사이를 헤매지 않아도 될 만큼 친절하다. 저자의 친절함은 ‘더 읽어볼 책들’에서 빛을 발한다. 이 책은 다른 책으로 연결되는 안내서와도 같다. ‘산’처럼 버티고 있는 철학자를 만나기 위해서 거쳐 갔던 그 길을 상냥한 주석까지 달면서 고스란히 드러낸다. 마치 어렸을 적 소풍에서 보물쪽지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기쁨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마침 어제 저녁 강신주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특강’을 들었다. 자신과 가족을 메타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성찰적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방법을 모르는 사랑’이라는 그의 말이 아마도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 또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같은 철학자의 글을 읽고 또 읽고, 문학으로 옷을 갈아입은 철학을 만나는 일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섬세한 저자는 자신을 만나러 온 독자들을 고유명사로 부르고 기억하려 애썼다. 책을 탈고하고 세 번 울었다는 그는 절정을 다시 느낄 가능성이 사라진다면 글쓰기는 멈출 것이다. 아마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을 탈고하고도 그는 통곡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무수한 통곡을 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깨달음을 나눠주려는 그의 노력은 우리에게 “얼어붙은 영혼을 깨트리는 한 자루의 도끼”를 쥐어준다. 스물두번째 시인이 되어야 할 우리는 철학자와 시인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시적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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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로스 2011-11-0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내용이 좋은데 책 제목때문에 문제가 생길까봐 말씀드린거였어요^^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