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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에 관한 검은책
에마뉘엘 피에라 외 지음, 권지현 옮김, 김기태 감수 / 알마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검열의 사회 문화사, 금하거나 혹은 허하거나.

『검열에 관한 검은 책』 에마뉘엘 피에라 외 지음, 권지현 옮김, 김기태 감수

 

벤담의 판옵티콘이 떠오른다. 감시하는 자는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 위치하는 다수는 눈부신 빛 속에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있는 ‘감시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느 시점이 되면 감시하는 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기 시작한다.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순간, 이제 다수는 스스로를 감시하고 처벌한다. 18세기 군대와 교도소의 완벽한 모형으로 디자인되었던 판옵티콘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사회 통제 시스템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철저하게 검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검열은 전 방위로, 타자와 자아를 가리지 않고 도처에 존재한다.

 

‘나는 꼼수다’의 스타이자,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였던 김용민은 과거에 인터넷 방송의 발언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진보, 보수 양날의 매서운 비판을 감당해야 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검열에서 이탈하는 관계로 접기로 한다.) 김용민에 이어 방송인 김구라 또한 십년 전 인터넷 방송에서 했던 이야기가 쟁점이 되면서, 잠정적으로 방송을 접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공중파로 진입했지만, 언제나 인터넷 방송에서 했던 말들 때문에 제대로 기뻐하지도, 잠을 이루기도 어려웠다는 그의 고백이 과장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지난밤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고 해도 별로 놀랄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전 세계에서 CCTV가 국토 대비 가장 많이 설치한 나라로 유명하다. 치안은 줄었을지 모르지만, 사생활 침해는 심각한 상황이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리는 CCTV 주연배우다.”라고 한다.

 

『검열에 관한 검은 책』은 - 제목 자체에서 충분히 드러나듯이 다양한 전문가가 참여하여 - 검열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체계적인 책이다. 이 책은 언론, 영화, 조형예술, 서적, 연극, 음악, 게임, 대중매체 등 메시지를 금하거나 제한하는 분야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미풍양속, 권력, 종교와 같은 전통분야와 건강, 인터넷, 시장의 법칙, 소수자 집단, 청소년의 현대분야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스스로를 검열하는 자기검열까지 다루고 있으니, 검열에 관한 한 중요한 키워드를 대략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벨기에 출신의 철학자, 판사, 변호사, 작가 다수가 집필에 참여하였다.

 

다양한 검열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2장 변호사인 마갈리 로테가 쓴 <자기 검열>이다. ‘사적 삶’이 중요하다는 것은 현대의 이야기다. ‘사적 삶’은 원초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라는 ‘주체’의 탄생과 함께 발명된 사회 현상이다. 사적인 생각을 표현하는데도 저자의 검열이라는 여과 장치를 거쳐야 한다. “자기 검열은 저자나 기자의 생각을 뿌리부터 뽑아버린다는 점에서 폭력적인 검열보다 더 나쁘다.” 다른 검열은 갈등 상황이나 법적 분쟁을 거치게 마련이지만, 자기 검열은 존재부재로 마무리되고, 여론 형성 자체를 차단한다는 점에서 해약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를 유지하는 힘은 공권력을 앞지르는 체화된 자기검열에 있다.

 

재미있는 현상은 ‘유머’에 관한 검열은 느슨하다는 점이다. 다수의 국가와 사회에서 유머는 감추고 억압한 감정을 토해내는 특권의 장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대담한 유머는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상징자본으로 기능한다. 유머에 정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반응한 사람이 옹졸한 사람이 된다. 유머에 관대해야 한다는 담론이 사회적인 힘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 개그맨 최효종의 ‘국회의원’ 개그를 가지고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정색을 한 - 국회의원 강용석의 주장이 옳았다 하더라도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유머는 “정치적 부당함이나 저질 취향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신성한 것’에 대한 토론을 재개시킨다.”는 다수의 믿을 때문이다.

 

“유머는 나의 힘”

 

최근 유행하는 “소셜테이너”에 대한 찬반양론이 뜨겁다. 생각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유리한 그들의 직업 세계를 고려한다면, 그들의 용기가 일반인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소셜테이너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기검열의 여과 없이 소신발언을 하는 그들의 용기와 신념에 찬사를 보낸다. 일부는 엔터테이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다는 비판 또한 만만치 않다. 엔터네이너는 자신의 업에 충실해야지 사회 참여를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광대 가면”을 벗고, 영향력 있는 시민으로서 의견을 내놓는 순간, 장벽과 위협에 부딪히게 된다. 얼마 전 ‘손석희의 시선 집중’의 인터뷰에 참여한 김제동은 민간인 사찰의 대상으로 힘들었느냐는 질문에, 그들이 사찰 자체가 억압이거나 무섭지는 않았다고 했다. 문제는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든다는 비슷한 언급을 했다. 검열은 결국 사회참여를 포기하게 만든다.

 

인권과 관련된 ‘민간인 사찰’ 은 쟁점으로 잠깐 반짝하더니 이제는 어느 매체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연예인 기획사 대표의 연습생 성폭행, 10년도 더 지난 B급 인터넷 방송의 막말 파동 등이다. 민간사찰을 덮은 의제로 세팅된 것이다. 사회 어디에나 검열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스런 현상이 되는 순간, 인권은 상실된다.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가 다양하기 때문에, 독자가 관심 있는 검열에 관해서만 읽어도 큰 도움을 얻을 것이다. 검열이라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권리를 지키는 출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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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5-0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리뷰 쓸 때 파놉티콘에 대해 언급하려고 했었는데 숲님도?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가?".,,그러면서....^^

이 책이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사실 뒷목이 서늘해지는 내용들이잖아요..
특히 자기검열,, 이런 엿 같은!!!
저는 이제 리뷰쓰러 갑니다...허접하기 짝이 없을 거라고 짐작되는...^^

더불어숲 2012-05-03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망하는 일, 설래는 일...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
서점에 가서 예쁘게 빠진 책을 사는 것이지요? ㅎㅎ
잘 읽히고 공감가는 꽃님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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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서강인문정신 16
이주동 지음 / 소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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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는 카프카다.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카프카 평전』이동주 지음, 소나무, 2012. 4

 

프라하는 카프카다. 내가 프라하에 갔던 이유는 오로지 카프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황금소로 22번지에 그가 집필에 몰두했던 이층집이 있다. 카프카는 이곳에서 1916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치열하게 글을 썼다. 하루 스물 네 계절이 있다는 변덕스런 날씨의 프라하에서 체코 맥주를 마실 때마다 나는 현존하는 카프카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세계와 불화했던 그도 늘 고독했을 것이다. 작가의 삶이란 상식적인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이므로 나는 이미 그랬으리라 단정했다.

 

프라하에 머무는 매일 밤, 나는 그곳의 감흥을 오래오래 잊지 않기 위해서 프라하 하늘의 처연한 달을 맥주에 담아 마셨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은 바램이었다. 불운해도 좋으니 ‘유사 작가’의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원했던 것도 같다. 관념을 머리에 이고 살던 나의 청춘의 밤에 카프카가 있었다. 빵을 벌기 위한 직업과 밤의 글쓰기를 규칙적으로 지킨 작가, 프라하를 떠나본 경험이 별로 없지만,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 지독하게 글쓰기에 매달렸던 그의 삶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군대의 ‘기동 연습’ 같은 엄격한 시간표”가 없었다면 그의 작품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글쓰기를 밥벌이와 분리하는 순간, 그에게 글쓰기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인 신성한 행위가 되었다.

 

카프카는 나의 청춘이었다. 낮과 밤의 다른 삶을 살았던 그처럼 - 한계를 초연하게 업으로 받들되 - 창작을 생명수로 받아 마시고 싶었다. 언젠가 나도 “카프카처럼” 그의 삶을 흉내 내는 ‘어른’이 되리라 다짐하며 미래를 그려가던 날들이었다. 황금소로 시절 카프카는 프라하성에서 모티브를 얻어 대표작인 『성(城)』을 완성했다. 전 세계 코스모폴리턴(cosmopolitan)을 만날 수 있는 그곳에서, 카프카는 오로지 실존과 구원을 위한 글쓰기로 마흔 한해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동주의 『카프카 평전』을 통해서 다시 카프카를 만난다. 다시 프라하에 간다면 - 부피가 매우 부담스럽지만 - 이동주의 『카프카 평전』을 들고 가고 싶다. 이 책은 불멸의 작가인 카프카 뿐 아니라, 인간 카프카를 만날 수 있는 장대한 연구 결과물이다. 프라하의 해지는 벤치에서, 카페에서, 게스트하우스에서 그의 삶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줄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신경증과 우유부단함 사이에서 격렬하게 진동하는 카프카와 함께 여행하며 그의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자유롭고 주체적이며 창조적인 작가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하다 보면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어질 것이다.

 

이동주 선생님의 『카프카 평전』은 카프카의 난해함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그와 결별한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카프카 전집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논문을 썼던 이동주 선생님의 필생의 작업이 단단한 도끼로 탄생했다. 오독이라면, 모든 독자가 오독일 것이고, 해석이라면 모두 합당한 해석이겠으나, 그간의 카프카의 연구는 그를 이해하는데 혼란만 가중시켰다. 이전의 평전과 달리 『카프카 평전』은 카프카가 공식적으로 썼던 글보다는 주로 자전적인 작품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기, 편지, 미완성 작품, 유고(遺稿), 공무 증명 기록들은 ‘인간’ 카프카에 방점을 찍으며 그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문학세계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자전적 증거와 논증을 통해서 저자의 주관에 몰입하지 않도록 경계를 지킨다. 또한 창작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추적하며 기술하는 사이사이에 중요한 주제와 해설을 가미시켜 - 삶과 예술의 - 상보적인 형태의 전기(傳記)로 구성하였다.

 

재담하기 좋아했던 까마귀, Kavka. 모든 것이 지나쳤던 - 지나치게 친절하고, 지나치게 겸손하고, 지나치게 고독해하면서도 수다스러웠던 Kavka. 빵만으로는 절대 살 수 없다는 것을 일찍 알았던 Kavka. 그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지만, 최종심급의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긴장 상태를 유지하되, 주어진 ‘지위’를 자신의 것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쓰는 만큼 읽는 것 또한 멈출 수 없었던 카프카는 “독서하고 싶은 마음과 책에 대한 갈망을 자신의 고유한 특성으로 간주”했다. 그것은 카프카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례였다. 그는 독서 행위를 “나로부터 벗어나 어떤 다른 객관적인 것으로 충동의 위치를 변경시키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독서가 문학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가 가지고 있는 누구보다 뛰어났던 “모방능력과 유희”였을 것이다.

 

카프카가 체험한 시간과 공간의 협소함을 넘어 서서, 그가 살던 유럽은 세계의 심장이었고, 다양한 사상과 양식이 공존하는 교차점이었다. 카프카의 생애를 들여다보다 보면,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지식인 사이에서 정신분석학이 유행처럼 번졌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이 된다. 친밀한 관계에서 카프카가 보여주는 행동은 초자아로 자리 잡고 있는 아버지로부터 탈착하지 못하는 심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것은 성적(性的) 억압으로 나타났고, 관계 맺기의 곤혹스러움으로 드러났다. 약혼식을 앞두고도 그는 항상 결혼의 불가능성을 생각했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그의 삶 역시 부조리로 가득 차 있었다. 전례 없던 세계대전을 경험한 시대가 예고하는 “고통과 상실”이 가져온 고뇌와 통찰이었다. 전통적 가치와 통일된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 ‘해석’의 자유가 주어졌다. “땅 위에 엎드려 있는 자”로서 주관에 충실한 카프카는 자신만의 “절대적 메타포”를 구성함으로써 무수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 주었다.

 

부정적인 현실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길은 오로지 성찰적 글쓰기뿐이었다. 문학적 삶만이 유일한 실존이었던 카프카에게 문학은 삶 그 자체였다. 아무런 의무감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카페를 좋아했던 카프카처럼, 하루에 한 두 시간 혼자 카페를 지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카프카가 될 수 있다. 익명이지만, 더불어 있으니 은둔이나 소외가 아니다. 다만 제 몫의 고독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릴 뿐이다. 카프카가 살았던 시공과 모든 것이 다르지만, 규칙적인 체험 속에서 동일하게 읽고 쓰다 보면, 성찰과 성장을 선물 받을 것이다.

 

좋은 책이 그러하듯 카프카의 글은 어려서 읽고, 어른이 되어 또 읽고, 늙어서 다시 읽어야 한다. 그 자신이 “책은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듯이, 그의 책은 우리의 뇌를 두 쪽 내는 도끼의 강렬함이 있다. 카프카의 글은 독자가 놓인 시기와 상황에 따라서 전혀 다른 책이 된다. 매번 짙어지는 농도와 질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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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5-01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아요.. 프라하에서 카프카를 만나고 느끼고 온 숲님의 감정들이 느껴져요..
사실 리뷰를 쓸까 싶어 들어왔다가 숲님의 리뷰를 지나칠 수 없어 먼저 읽게 되었네요..
비오는 밤, 글들이 촉촉하게 젖어들어요...^^

저는 카프카는 아직 반도 못 읽었어요...
단숨에 읽어내야 하는데 찔끔찔끔 읽어서 감흥도 떨어지고 책에게 미안해질 지경이네요..ㅡ.ㅡ
(물론 리뷰 마감일 지나서 담당자한테 더 미안하지만요..)

아무튼 숲님의 좋은 리뷰 읽고가니 기분은 좋네요..
저도 힘닿는데 까지 언능 읽어야겠어요..^^

더불어숲 2012-05-0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카프카는... 리뷰가 아니라, 논문으로 쓰고픈... 아니면 <해변의 카프카>처럼...창작품으로??ㅎㅎ
 
[블루레이] 언 에듀케이션
론 셰르픽 감독, 캐리 멀리건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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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An Education>은 비틀스가 나오기 직전인 1961년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옥스퍼드 대학 입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는 십대 소녀 제니의 질풍노도 성장기를 다루고 있다. 보수적인 중산층 부모는 명문대학 입학을 위해서 딸의 사생활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상승 욕구를 실현하기 위한 부모의 압력을 수용하던 모범생 제니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데이비드와 우연히 만난다. 오케스트라 연습을 마치고 비에 젖은 채 첼로를 메고 가던 제니의 옆에 값 비싼 자동차 브리스톨이 멈춘다. “비싼 첼로를 비에 젖게 할 수 없다.”는 남자의 호의에 잠깐 망설이지만, 제니는 그가 가지고 있는 묘한 매력에 이끌려 브리스톨을 탄다. 경제력, 유머, 배려심을 갖춘 데이비드는 제니와 상당한 나이 차이가 나지만, 그 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혼란스러운 세계로 제니를 끌어들이다. 데이비드의 물질적 풍요, 자유로운 기질과 미적 감각 때문에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온 제니와 그녀의 부모는 데이비드에게 사로잡힌다. 십대 소녀가 결코 알 수 없는 데이비드의 세계에서, 제니는 학교에서 경험할 수 없는 화려한 유혹을 경험한다. 이렇게 새로운 경험 세계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제니의 옥스퍼드 진학의 꿈과 학교생활은 엉망이 되어간다.

 

<An Education>은 영국의 유명 저널리스트 린 바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2009년 독립영화계의 화제작이었던 이 영화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의 호평을 받았던 작품으로, 베를린영화제 슈팅스타상,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고, 아카데미상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이미 어른이 한 남자와 이제 어른이 되려는 한 소녀의 로맨스에서 출발한 영화는 소녀의 혹독한 성장 과정을 거쳐서 성숙으로 마무리된다. 여성 감독 쉐르픽(Lone Scherfig)은 사건의 진행을 제니의 관점에서 접근해 나간다. 쉐르픽은 규격화된 일상 안에 갇혀 있는 십대 소녀가 꿈꿀만한 세계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감독의 현실감 있는 연출 덕분에 관습적인 성장 영화가 될 뻔한 이 이야기는 삶 전체를 사유하게 하는 힘을 갖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서 경험하기를 꿈꾸는 ‘욕망’은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은 그 실체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제니가 학교 밖의 일탈을 겪고 나서 자기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그녀가 선망하는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 역시 제니의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선망의 대상이지, 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탈로 구성된 물질세계인 데이비드의 삶과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치의 벗어남도 허용되지 않는 제니의 삶이 절대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다.

 

이 영화가 ‘교육’ 그 자체에 집중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관객에게 이 영화가 갖는 의외성 때문에 당황스러울 수 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공교육과 교육문제 자체에 집중하며, 교육 담론을 펼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학교라는 공간이 갖는 폐쇄적인 구조를 잘 보여준다. 제니의 친구들과 교사가 보여주는 반응은 지금 한국의 학교와 별로 다르지 않다.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여전히 ‘학교’는 억압의 메타포로 사유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학교 밖에서 청소년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자유 보다는 ‘일탈’로 규범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학력과 학벌의 성공 신화가 여전히 유효한 담론으로 유통되는 한국 사회의 입시 현실과 맞닿아 있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특히 대학입시를 눈앞에 둔 모범생의 일탈과 방황은 진정한 ‘교육’에 대한 성찰을 이끌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캐리 멀리건(Carey Hannah Mulligan)이라는 여배우를 기억해야 한다. ‘제니’라는 설정된 인물도 매력 있지만, 우리는 캐리 멀리건이라는 배우의 매력에 반할 수밖에 없다. “연기 이외에는 하고 싶었던 것이 없었다.” 는 캐리 멀리건은 ‘제니’라는 인물에게 생명력을 부여하여 살아있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그녀의 연기 덕분에 열여섯 제니의 선택과 행동이 설득력을 갖는다. 영화에서 멀리건은 ‘헵번 스타일’의 올림머리와 선글라스와 드레스를 하고 상큼한 매력을 과시한다. 그 덕분으로 ‘제2의 오드리 헵번’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멀리건은 헵번의 1964년작 '마이 페어 레이디'의 리메이크작 주인공으로 결정되었다. <오만과 편견> <퍼블릭 에너미> <브러더스>, 다수의 TV시리즈 등에 조연으로 출연한 경력이 전부였던 그녀는 이제 세계적인 배우로 입지를 세우고 있다. 캐리 멀리건은 이 영화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했고, <네버 렛 미 고>(2010), <드라이브>(2011)도 그녀의 화려한 필모그래피의 한 부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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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탄 소년』 (The Kid With A Bike, 2011)

감독 : 장-피에르 다르덴 , 뤽 다르덴, 출연 : 세실 드 프랑스, 토마 도레, 제레미 레니에,

 

시릴과 아만다 이야기

 

열두 살 생일을 바로 앞둔 시릴은 읽어버린 자전거를 찾기 위해 아동보호소를 뛰쳐나온다. 아이의 아빠는 자전거를 팔고 소년을 버렸다. 우격다짐 몸싸움 끝에 아버지와 추억이 있는 자전거를 쟁취해 온다. 시릴은 자전거를 아버지의 사랑과 동일시한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소년, 아들을 짐스러워하는 아버지, 둘의 재회가 쉽지 않다. 물리적인 만남 끝에서도 두 사람은 마음을 합하지 못한다. 서로 가야할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다고 믿는 소년은 길을 가는 부자(父子)를 린치하고 돈을 갈취한다.

 

그 과정에서 소년은 아무 조건 없이 물질적 지원과 심리적 지지를 아끼지 않는 한 여성, 아만다를 만난다. 미용실을 운영하며 혼자 사는 아만다는 소년의 요청을 받아들여 위탁모가 되어 계산하지 않는 사랑을 선물한다. 그녀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소년을 잡아주는 구심점이다. 소년이 엇나가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내면의 갈등 없이 소년을 구원한다. 이 점이 『자전거 탄 소년』을 ‘아이의 성장과 어른의 사회적 책무성에 관한 영화’로 만든다. 그녀의 선택은 즉각적이고 준엄하다. 아만다의 사랑으로 관계 윤리와 책임이 소년에게 전이되면서 치유를 경험한다.

 

평범한 플롯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은 바로 감독 다르덴 형제에게 있다. 장-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은 1990년대 세계 아트하우스 영화를 대표하는 벨기에 감독이다. 이 영화 이전에 칸 영화제에서 이미 네 편의 영화로 황금종려상 ('로제타' '더 차일드'), 각본상 ('로나의 침묵'), 여우주연상('로제타'), 남우주연상('아들')을 수상했다. 노동자의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한 다큐멘터리를 수십 편 만들었던 감독들에 대한 칸영화제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과 다른 방식을 차용한 이 영화로 칸 심사 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러닝타임 87분, 핸드 헬드 카메라에 비전문배우를 앞세우고, 음향 이외에 음악은 사용하지 않던 엄격한 리얼리스트 형제는 이전 영화와는 달리 멜로 장르의 특징을 일부 차용하여 <자전거를 탄 소년>을 연출했다. 영화 초입부터 들려주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유명 배우인 세실 드 프랑스를 주연으로 발탁한 점이 그들의 기존 영화와 다른 점이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에게 영화는 여전히 삶의 우위에 있지 않다. 그들은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 같은 캐릭터의 변화를 조심스럽게 보여주는 진정한 리얼리스트다. 피해왔던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그들의 영화에는 여전히 사회적 문제의식과 ‘희망’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소외된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제도적 모순이 개인의 의지와 만나는 한계상황에서 놓여있는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설명해야 할 부분을 생략함으로써 관객에게 복잡한 마음을 선물하는 독특한 화법 또한 변함없다.

 

드와넬, 무쉐뜨, 그리고 시릴

 

도덕과 윤리에 잡히지 않는 아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또 다른 작품이 있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누적된 슬픔의 깊이와 함량을 느낄 수 있는 리얼리즘 영화들이다. 트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1959)에서 드와넬이 살아가는 삶이 그렇다. 그의 일상은 지독한 정신적 ․ 육체적인 구타로 이루어져 있다. 드와넬은 일상화된 폭력 앞에서 무표정하게 응대할 뿐이다. 카메라는 주관을 배제한 채 한 아이의 생활을 쫓는다. 브레송의 <무쉐뜨>(1967)에서 어린 소녀가 선택하는 저항은 자기학대에 가깝다. 소녀는 자신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한다. ‘자살’을 ‘악’으로 규정짓는 근본 기독교의 기계론적 접근에서 어긋나는 지점을 형성하며, 다시 자기표적을 겨냥하듯 기독교로 회귀하여 순교한다. 모두 보편화된 어린 아이의 모습과 상반된 채, 세상과 불화한다.

 

<자전거를 탄 소년>이 다행스러운 점은 드와넬과 무쉐뜨에게 없는 평화가 시릴에게 주어졌다는 점이다. 소년은 궁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호의로 가득 한 든든한 보호자가 있고, 주변인에게 속죄의 여지가 있다. 소외된 자들에게 카메라 시선을 견지하며 윤리를 성찰하는 감독들의 내공은 이 영화를 통해서 구원과 희망으로 조용히 다가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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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배우 : 장 뒤자르댕, 베레니스 비조

 

올해 2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아티스트>는 전 세계, 전 세대를 아우르며 관객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다. 젊은 층은 새로움을 발견했고, 중장년층은 어렸을 때 감동을 주었던 고전 영화의 재현을 경험한다. 진 켈리 주연의 <사랑은 비를 타고>(1952)와 같은 뮤지컬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화면비율 4:3의 이 흑백영화는 영화 기술의 정수에 도달했다고 평가하는 21세기를 잠시 잊게 만든다.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댄스, 음악은 1920~30년대 헐리웃 영화 전성기에 제작된 영화처럼 느껴진다. 전혀 새롭지 않은 플롯과 연출에서 사람들은 ‘과거’라는 달콤한 마술을 경험한다. 반대로 고전 영화에 친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는 과거가 ‘새로움’으로 다가서면서 즐거운 꿈의 세계를 선사한다.

 

<아티스트>는 무성영화 시대에서 유성영화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헐리웃을 배경으로 한다. 무성영화계 최고 스타였던 한 남자의 흥망성쇠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성 영화 시대에 최고의 흥행 가도를 달리던 배우 조지 발렌타인(장 뒤자르댕)은 흑백 영화의 쇠퇴와 함께 부와 명예도 전락한다. 기존 영화 제작 방식을 고수하며 지키려했던 조지는 실패를 거듭하면서 점점 침울한 상황으로 내몰린다. 그를 흠모하며 배우로 성장하고 있는 신출내기 페피 밀러(베레니스 비조)는 조지의 몰락과는 반대로 신예로 떠오르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그녀는 조지의 수호천사가 되어 그의 재기를 돕는다. 페피는 파산으로 극한의 선택을 하려는 조지 곁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함께한다.

 

무성 영화 형식을 취한 <아티스트>는 소란한 일상을 잠시 잊게 한다. 음악과 댄스는 대사가 주는 피로함을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다. 2012년 아카데미는 <아티스트>의 해라고 해야 할 것이다. 64회 칸영화제에서 <트리 오브 라이프>에 황금종려상을 양보했지만, <아티스트>는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의상상, 작곡상, 음악상을 수상했다. 장 뒤자르댕은 <머니볼>의 브래드 피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게리 올드먼, <디센던트>의 조지 클루니와 같은 경쟁자를 누르고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프랑스에서만 알려졌던 배우 장 뒤자르댕의 수상에 대한 이의는 별로 없는 듯하다.

 

유성영화를 연기해온 배우가 무성 영화의 연기로 몸을 언어화하는 것은 힘겨운 작업이다. 장 뒤자르댕은 원맨쇼 코미디를 연기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코미디언으로 활동했던 경험은 무성 영화 시기에 최고의 스타 조지를 연기하는데 필요충분조건이 되었다. 감정을 체화하여 다양한 몸짓과 표정을 만들어냄으로써 무성영화의 답답함을 완벽하게 해소했다. 그는 모든 것을 시각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방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장 뒤자르댕과 베레니스 비조는 현장에 흐르는 음악에 맞춰 감정을 조절하고, 표정과 눈짓으로 대사를 대신했다.

 

거의 무성 영화에 가깝게 제작된 이 영화는 음악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감독과 영화 음악가 루도빅 바우스는 고전 헐리웃 작품들을 감상했다. 음악이 대사와 음향 없는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방식과 친숙해지기 위해서다. 대사가 없는 상태에서 자막까지 최소화하고 이야기를 펼쳐가는 테크닉에 있어서 음악이 무척 중요하다. ‘페니 프롬 헤븐’과 ‘주빌레 스톰프’와 같은 몇몇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영화를 위해 새로 작곡되었다. 압권은 영화의 마지막 2분 동안 펼쳐지는 음악에 맞춰 두 배우가 추는 탭댄스다.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감독은 흑백 무성 영화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이 장면을 얼굴과 몸을 한눈에 보여주는 롱 쇼트로 촬영했다. 조지와 페피가 유성 영화를 찍으며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는 이 장면을 위해서 다섯 달 동안이나 탭 댄스를 연습했고, 장면을 촬영하는데도 열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찍었다고 한다.

 

<아티스트>는 단순히 과거로만의 회귀가 아니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음악을 예상하는 순간에 음향으로 반전을 끌어오기도 하고, 배우의 입이 클로즈업 된 상태인데 자막이 깔리지 않기도 한다. 기대와 어긋나는 엇박의 리듬이 관객의 집중을 유도한다. <아티스트>는 1920년대의 스타일을 그대로 복원하지 않음으로써 21세기 관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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