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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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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지성 깨어 있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바다출판사, 2016. 3.

 


 

 

   '그람시 읽기'의 무게를 가늠하기에 앞서, 그람시를 읽고 싶은 욕망이 앞섰던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앎과 사유가 어렸던 나는 그람시의 사상보다 그의 아우라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람시의 삶 자체가 로쟈 룩셈부르크와 겹쳐지면서, 삶과 사상에 매료되었다. 한걸음 다가가지도 못한 채, 이십 여 년이 흘러버렸다. 그리고 다시 그람시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안토니오 그람시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22).

 

시간과 공간이 확연히 다름에도, 그람시의 글은 21세기 한국의 정세를 분석하는데 잘 맞아 떨어진다. 민주주의는 과정일 뿐,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반대로 파시즘은 조건이 만들어지면 언제든지 새로운 형태로 등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파시즘의 등장은 몇몇 권력자의 의지로 될 수 없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먹고 사는 경제문제만 해결해준다면, 어떤 정권이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일 때, 파시즘은 슬그머니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다. 지난 대선에서 대한민국의 선택에서 가장 큰 변수는 경제적 효용이었다. 선택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를 쥐고 있는 시민이 어떤 가치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깨어 있는 시민만이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다.

 

세상의 가치가 경제를 바탕으로 할 때, 인간관계가 어떻게 파괴되는지, 우리 모두 목도하고 있다. 먹고사는 일이 투표의 방향을 결정하는 21세기 한국의 현실과 1920년대 전후 이탈리아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는 것이 파시즘을 불러 왔다.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최우선일 때, 이것이 파시즘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있다. 혁명 역시 현재가 최악의 상황이라고 믿는 민중에게 극한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옥중수고이전, 1917~ 18년 동안 그람시가 쓴 산문을 모은 책이다. 그가 초기 사회 혁명가와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던 시기의 정치 평론집(10)’이다. <1. 무엇보다 먼저, 2. 정치와 정치인, 3. 교육에 관하여, 4. 자유와 법, 5. 국가이 병폐들, 6. 전쟁에 반대한다>로 구성되어 있다. 체계를 갖춘 논문으로서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정독 보다는 자신이 당면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하면 좋을 듯하다. 여기에 1차 세계 대전 전후의 이탈리아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뭇소리니와의 의사진행발언을 포함해서 25개의 평론이 실린 이 책의 제목을 출판사와 편집인이 무관심의 증오로 잡은 것은, 그만큼 그람시가 지성, 참여, 실천에서 무관심만큼 독이 되는 것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리라.

 

산다는 것은 지지자(혹은 참여자)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라는 말을 믿는다. 무관심은 무기력이고 기생적인 것이며 비겁함일 뿐 진정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27). 나는 살아 있고 참여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삶에 참여하지 낳는 사람들을 증오하며,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32).

 

여타 평론의 제목에서도 그람시의 단호함이 묻어난다. “구호는 권리이지, 선물이 아니다.”에서 다루는 병원 관료제의 문제점, “경솔한 언동에는 어떠한 인내도 없다.”에서는 비타협-관용불관용-타협이라는 조합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73)하기, “통제 밖의 자본주의가 가지는 착취의 본질, 전쟁은 경제적 이익 산출의 중요한 수단임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으로 글을 쓴다. 글의 소재도 전횡무진 한다. 경제적 투기를 하는 사립학교들의 학위 장사, 예술과 무관하게 귀부인 침실에 넘쳐나는 연애 소설과 같은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관심 있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압권은 그람시가 무솔리니를 상대로 하원에서 의사 진행 발언한 파시즘에 대적한 녹취문이다. 수백 번에 걸쳐 반복할 필요는 없다는 의장의 말에 그람시는 그것을 혐오스러워할 때까지 계속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밝히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짧은 녹취문에서 우리는 그람시라는 하나의 위대한 인격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람시의 정치 평론은 문학처럼 읽히기도 하다. 현란한 언어로 독자를 현혹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행위는 자기 과시적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진실함이 베어난다. 현란한 언어보다는 평이한 언어로 진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최대한 가공을 덜 해서 원재료의 풍미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자연주의 요리를 먹는 기분이 든다.

 

1990년대 초, 연세대학교 다니던 친구에게 '그람시'를 읽고 싶다고, 졸업 논문을 써볼 생각이라고, 대학도서관에서 그람시 관련 책을 빌려 소포로 붙여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국회에서 논문 서비스를 해준다거나, 시립도서관에서 전문 서적을 충분히 보여하고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친구는 자기 대학에 있는 그람시 관련 서적을 될 수 있는 대로 충분히 빌려서 소포로 보내주었다. 지나고 보니, 참 부끄럽다. 의욕은 넘쳤고, 앎은 일천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때가 되면 이렇게 다시 조우할 수 있다는 거다. 이제 연락도 닿지 않는 그 친구에 대한 그리움까지 더해져서, 나는 또 이렇게 그람시를 다시 만난다.

 

   현재가 최선이라고 믿는 우리의 태도는 옳은가?

    

그람시의 사상에서 순간순간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다. 5월 봉하에 다녀왔다. 빛이 눈부신 5, 초록이 떨고 있었다. 난장 같은 축제 분위기에 가족 단위로 넘쳐나는 상춘객들 사이에서, 나는 오롯이 그와 독대하는 기분으로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그가 떠난 2009년은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다. 그람시의 부활처럼, 노무현은 그렇게 민주주의의 현재에 머물고 있다. 그들의 말처럼 "깨어있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없이 민주주의는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집단 지성의 힘없이, 세상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지성, 그 자체가 용기다. 현실에 수동적으로 안주하기 않기 위해서 지성은 필요조건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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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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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넘어선 진보 새로운 계급투쟁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자음과모음, 2016. 3.

 

오랜만에 심장이 밑줄 긋게 하는 책을 만났다. 지젝의 사상은 강렬하다. 얇지만 깊다. ‘지젝 읽기는 불가피한 필연이라는 서평가 이현우의 서평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새로운 계급투쟁을 위한 지침서로도 충분하다. 때를 기다린 듯, 신자유주의 세계정세에 대항하기 위한 사상과 방법론을 모색하는 사람에겐 시기적절한 책이다. 지젝은 진보의 보편적인 인권에 대한 생각에서 한 걸음 크게 나아간다. 또한 모든 종교의 어두운 잠재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

 

이 책에서 지젝은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이고, 그 대안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유로파스탄이 될지도 모르지만, 유럽으로 밀려오는 가난한 난민에게 공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 생각일 것이다. “인간은 누군가의 생각보다는 누군가의 고통에 훨씬 더 쉽게 공감을 느끼는 법(15)이니까. 하지만 지젝은 철저한 근본적 성찰로 사유를 전환한다. 연민보다는 어떻게 하면 본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지젝은 난민에 대한 고결한 이타주의가 가난이 존재할 수 없는 기반을 만드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거듭된 물음으로 유럽의 전통 전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새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19)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를 위협하는 것은 난민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이슬람 공포에 대한 죄책감을 반성하기보다는 얼마나 강력하게 글로벌 자본주의와 결탁되어 있는지를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위는 행위로만 이해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진보 프레임을 넘어선다. 지젝이 명명한 해석학적 유혹(48)’은 사회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진보의 발목을 잡는다. 서울 강남 지하철 여성 살해 사건에 대한 분석 기사를 보면서 지젝의 냉철한 판단을 떠올렸다. 우리 사회는 어떤 분출에 어떤 심오한 의미나 메시지가 숨어 있는지 찾으려는 유혹(48)”이 개인의 성찰의 깊이처럼 취급되고 있다. 인과 관계를 역치할 수도 없고, 하나의 결과에 하나의 원인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우리에게 다양한 해석을 하게 하고, 그것이 본질에서 벗어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지젝은 행위로의 이행은 단지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의 무기력함(46)일 뿐이라고 판단한다.

 

중요한 것은 본질을 직면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바로 새로운 계급투쟁이다. 우리가 수많은 지구촌 문제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필연성에 발생하고 있다. 난민 문제는 그들을 유럽이 받아들여 줄 것인지, 말 것인지에 있지 않다. 아랍과 서구를 대결 구도로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음은 명확하다. 가령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서구 자본주의의 전초기지라는 점에서 아랍과 서구로 양분되지 않는다. 세계를 가로지르는 보다 명확한 기준은 바로 계급이다. 감상적 연대가 아닌 계급적 연대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지젝은 페미니즘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과학은 논의의 방향을 바꾸는 것, 질문의 방향을 트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패턴으로 고착 된 생각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홈 패인 레일을 달릴 수밖에 없다.

 

지젝의 이 문장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어렵고 힘들수록 인간은 절대적 유토피아를 열망한다. 그러나 난민이 배우게 될 뼈아픈 교훈은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 심지어 노르웨이 안에도 노르웨이는 없다는 것이리라. 난민은 자신의 꿈을 검열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실 속 꿈을 좇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한다(65~66).

    

지젝을 읽으며 새삼스레 대학 시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친구들과 나누었던 하찮은 대화가 떠오른다. “내가 삼성 이건희와 가까울까, 미국에 살고 있는 홈리스와 더 가까운지와 같은 유의 주제였다.

 

여기에 소통에 관한 지젝의 생각에 내 생각을 포개어 본다.

 

더 많은 소통은 무엇보다도 더 많은 소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서로 이해함이라는 태도는 서로 길을 비켜감이라는 태도로 보완되거나, 새로운 비밀 보호법에 부합하는 적절한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생활 방식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우리에겐 어느 정도의 소외가 필수적이다. 많은 경우 소외는 문제가 아니라 해법이다(91).

 

꼰대의 특징 중 하나는 누구에게나 반말을 한다는 거다. 자식 나이니까. 오래 함께 지냈으니까. 격이 없어서 등등 참 많은 이유가 있을 법 한데, 반말은 상대를 하대하는 것이고, ‘늙음의 바로미터라는 생각은 못하는 모양이다. 가족 같은직장과 가족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도, 사람들은 직장을 가족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른다. 그 순간, 꼰대 짓이 시작된다. 이런 식의 관계는 반드시 권력을 동반하고, 거리두기에서 실패한다. 소통은 소동을 만들 것이고, 공존의 평화를 깨트린다. 권력관계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인간들을 상대해주겠는가?

 

약자는 연민으로 타인을 약자로 만든다. 감정에 기대면 기댈수록 본질에서 멀어진다. 난민, 가난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는 일종의 자기 최면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하는 근거는 바로 우리 자신이 우리와 같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101)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지젝에게는 확실한 대안이 있다. ‘유럽 중심적이라는 비난이 있더라도, 모두가 의무적으로 지킬 최소한의 규범 만들기. 이 제한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생활 방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관용이다. 지구촌은 그때 비로소 공동의 문제에 대한 연대 투쟁이 가능할 것이다. 계급적 연대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지젝의 새로운 계급투쟁두고두고 다시 펼쳐야 할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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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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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혼으로 고민하는 이를 위한 (21세기 실천적 지식인의) 합리적 조언

 

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사회평론, 2016. 2.

 


 

1998, 다른 번역본으로 결혼과 도덕을 읽은 적이 있다. (결혼과 도덕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김영철 옮김, 자작나무, 1997.) 꽃도 제 때를 만나야 피듯이, 책도 시절인연인지라,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십여 년이 시간이 필요했음을 여실히 깨닫는다. 서재에서 그 책을 꺼내보니, 밑줄이 빼곡하고, 느낌표와 물음표가 가득하지만, 실제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이번에 읽은 결혼과 도덕은 러셀의 친절한 설명뿐 아니라, 번역도 부드럽다. 이번에 다시 러셀을 처음 접하는 새로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십여 년 전, 러셀 사상을 이해했다면, 내 인생에서 사랑, 결혼, 가족은 전혀 다른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개인이 어떻게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인간의 성()은 본능이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내가 가지고 살아가는 올바름(도덕)에 대하여 회의(懷疑)하게 된다. 결혼과 가족은 변화에 대한 이해, 새로운 도전과 적응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성 행위는 본능이 아니라, 사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다른 성 윤리, 책임과 의무가 필요하다. 그만큼 제대로 된 성교육 역시 중요하다.

 

21세기에 우리는 러셀의 결혼과 도덕을 읽어야 하는가?

 

러셀은 올바른 성교육, 자유연애, 계약 결혼, 성적 자유화를 통해서 건강한 개인의 삶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29년 쓰인 이 책은 아직 우리가 넘어 서지 못한 구시대의 한계. 구태의연함에 대하여 혁명적인 질문을 한다. 그 당시 러셀의 주장이 얼마나 도발적이었을지 가늠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또한 1세기 가까이 흐른 지금, 결혼과 도덕에 관한 사회 시스템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의문이 갖게 한다.

 

러셀이 이 책을 집필한 당시와 비교해 보면, 이제는 결혼과 도덕에 관한 가치관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반전, 반핵 운동으로 구속 되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러셀의 뉴욕시립대학교 교수 임용이 취소된 것도 결혼과 도덕때문이다. 니체는 가부장사회에서 성, 결혼이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유지되고, 성 담론이 금기 되었는지를 (당시 시대상으로 볼 때) 아주 급진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원시 부족사회에서 기독교와 천주교, 근대까지 역사적 분석을 토대로 탄탄한 주장을 펼친다.

 

결혼과 도덕에 대한 이해는 문화 인류학적 연구가 필수다. 종교가 결혼과 가족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던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주민들을 살펴보면,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사회 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된 것에 대해서도 새롭게 접근할 수 있다. 금욕주의는 성 관계를 왜곡한다. 성적인 피로를 느끼지 못했던 원시 부족과 달리 문명인은 성적 피로와 함께 금욕주의를 동시에 경험한다.

 

결혼과 도덕이 한 사람의 인생 발목을 잡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시스템으로 통제하려고 할 때, 성 문제의 발생은 필연적이다. 얼마 전, 강신주 철학자의 전 부인이 인터넷에 올린 글 때문에 지인과 언쟁(not 논쟁)을 벌였다. 강신주가 쓴 책이 문광부의 청소년 권장 도서로 선정된 것에 대하여 철학자의 전 부인이 수년 전에 도서 추천을 취소해달라는 요청 글이었다. 진위여부는 잘 모르겠고, 개인적으로는 관심도 없다. 그 글은 강신주의 아들이 일탈한 것에 대한 구구절절한 나열과, 자기 아들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한 철학자의 책을 추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정답인지도 의문이고, 자기 자식을 사회에 잘 적응하는 사람으로 교육한 사람만이 철학자나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행복과 불행의 경계에서 자기다움을 지키며 잡스럽게살기를 자처한 철학자에게 규범화된 바른 삶을 요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결혼과 도덕에 대한 논쟁은 자연스럽게 사랑에 대한 논의를 불러온다. “인생에서 사랑의 지위에 대한 러셀의 주장은 사랑의 힘과 방식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사랑이 반드시 반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 출세를 위해 사랑을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다. / 사랑을 통해서만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성교는 사랑을 목적으로 한 실험이다.”) 십대, 이십대에 러셀을 읽는다면 사랑을 긍정하며 - 훨씬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 합리적인 제안으로 가득하다. 아이 없는 부부의 계약 결혼, 간통에 대한 법적 대응보다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유연한 태도, 억압적이지 않은 성교육, 국가가 아버지를 대신하는 모계 사회, 성의 개방과 피임 등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 본 다음, 자기의 성()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수능을 마친 학생들에게,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고뇌하는 청춘에게, 결혼을 보험이나 적금으로 생각하는 결혼 정령기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결혼이 자기 인생을 불행의 늪으로 만들고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줄 것이라고도 확신한다. 이 책을 보면서, 밴쿠버 챕터 서점에서 러셀의 행복의 정복문고판을 사서 읽던 오래 전 겨울도 떠올랐다. 이 책을 추천하며 썼던 글을 다시 옮겨 본다. - 영어가 안 되는 내가 단기 어학연수를 가서, 끼고 살았던 책은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었다. 얇은 책이니,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읽고 해석하리라 목표도 세웠다. 어려운 건 영어가 아니라, 러셀의 사상이다. 내겐 노동으로 부터의 소외가 빼앗아 간 여가를 되찾아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되었다. 자기계발의 시대에 자발적 게으름은 가능한가? (이번에 본 영화 <풍푸 팬더>에서 무술을 가르칠 줄 모르는 아버지가 아들 팬더에게 요구하는 것이 늦게 일어나기, 오래 자기 등등이다. 아이들은 여기에서 웃음이 터진다. 사실 우리가 꿈꾸는 삶이 그렇지 않은가?) 니체 방식으로 사유하자면, 결혼과 도덕은 시대의 담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대한 통찰을 위해서 다시 또 고전이다.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올린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결혼과 도덕

 

앞으로 우리는 어떤 방식의 결혼과 도덕으로 자기 배려를 실천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성에 대한 무지가 미덕도 아니고, 성을 금기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 갈 것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리비도는 예술의 근원이다. 우리는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를 통한 미학적 삶의 실현하기 위한 삶의 기획이 필요하다.

 

 

덧붙임 : 철학자 강신주는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편집자를 저자와 함께 위치시켰다. 역자 역시 창작자다. 왜 이 책은 역자의 흔적과 에필로그를 찾을 수 없을까? 행간의 의미 하나하나까지 사려 깊게 고민했을 역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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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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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어휘를 배우면서, 삶은 예술이 된다.

멀고도 가까운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2016. 2.

 


 

 

신간 멀고도 가까운은 잊고 지내던 유년의 뜰을 다시 찾는 감흥에 젖게 한다. 과거로 향하는 마법의 문을 열어젖힌다.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활동가인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평생 동안 어머니를 이해하고, 화해하려고 노력한다. “어머니가 극지방으로의 여정이라면 그 끝까지 가보려는 자세로 엄마의 마지막을 함께한다. 그 과정이 이 책 한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새로운 지식을 주는 책도 좋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공감하며 성찰과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도 좋다.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이 바로 그러하다. 저자는 평생을 질투와 비관으로 살았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로 돌아가는 과정을 회고한다.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화해 속에서 가족이 되어 간다.

 

솔닛은 침묵하는 자아에게 목소리를 찾아주는 길잡이 역할을 자청한다. 누구나 간직하고 살아가는 예술이 될 순간을 건드려주는 것이 바로 멀고도 가까운이다. 인생의 어떤 한 장면은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을 내면에 세기며 평생을 나와 함께 간다. 지금 여기에 있는 존재는 과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먼 신화와 같은 과거도 현재와 연결되어 있고, 미래로 이어질 것이다. 솔닛의 엄마가 남긴 살구가 프랑케슈타인, 체 게바라, 아이슬란드의 늑대, 에스키모 여인으로 이어지듯.

 

이 책을 읽는 내내 산드라 시스네로스의 망고스트리트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내게도 망고스트리트에 있던 허물어질 듯했던 부실한 집 한 채가, 100파운드를 수확할 만큼의 살구나무가 유년의 뜰에 우뚝 서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턱이 높던 단칸방, 여름이면 가지를 휘청거리게 열렸던 앵두나무가 기억 밖으로 튀어 나와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 집에 사는 내내 떠날 것을 꿈꾸었으나, 오래 전 집을 떠난 이후부터 이십 여 년 전 집은 허물어졌음에도 나는 그 곳을 그리워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곳의 시간을 그리워했다. 그 곳에서 내적 · 외적으로 아픈 날이 많았지만, 나는 고통으로 조금 더 단단해졌다.

 

우리 집에서 5km 떨어진 할아버지 댁 뒷마당의 삼분지 일을 덮듯 퍼져있던 앵두나무는 어린 시절, 나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문간방에 사는 내게도 여름마다 나를 기다리며 휘청거리게 열리는 앵두가 있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 향기>처럼 아직은 세상을 더 살아야 할 것으로 느끼도록 만들어줬다. 툇마루에 앉아서 앵두를 따먹는 나를 바라보던 우리 할아버지가 그립다. 내 기억 속에서 이십년을 더 살고 계시는 분이다. 솔닛의 글이 세상에 없는 나의 할아버지를 불러낸다.

 

솔닛은 풍부한 문학과 지식을 활용하여 엄마와의 관계를 서사로 엮어 낸다. 실패한 (인생이라고 믿는) 인생은 회한으로 남지만, 실패한 말은 글이 된다. 자신과, 타자와의 화해를 위한 글쓰기가 시작된다. 글의 강력한 힘과 실천력이 여기에 있다. 경험과 문학이 촘촘하게 연결된다. 솔닛은 오롯한 사적 경험으로 천착하지 않고, 더 넓은 세계로 열어젖힌다. 인생은 경험이 아니라, (경험에 대한) 해석임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인생은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윤회하듯 복기하는 것이라고 조근 조근 이야기한다. 이 책의 목차만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살구에서 시작하여 다시 살구로 끝을 맺는다.

 

살구-거울-얼음-비행--감다-매듭-풀다--비행-얼음-거울-살구

 

불행은 불치병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주변을 불행으로 빠트리는 전염병이기도 하다. 가족과 모성에 대한 신화를 벗겨내고 보면, 보편성 안으로 포섭되지 않은 다양한 성향의 부모와 자식이 존재한다. 딸의 행복이 엄마의 불운한 삶의 고통을 증폭하기도 한다. 자식의 존재 자체가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모성 신화에 갇혀있는 여성들은 엄마라는 정체성에 자신을 고정한다.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불행했다는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엄마와 함께 한 딸이 어떻게 내면으로 파고드는지를 솔닛은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책으로 숨어 들어가 고독을 키우고, 인간 없는 세상에서 평화를 누리기도 한다. 막대나 돌에 맞은 것보다 말()에 더 크게 다친다. 공격할 힘을 갖지 못한 약자는 글을 통해서 자기를 지킨다. 고통스러운 이 세계와 거리두기를 하는 동안 솔닛은 작가가 되어 간다. 무심한 시간에 대한 회한으로 역사가가 되어 간다.

 

- 앓은 만큼 깊어지는 앎 

 

고통은 배움을 낳는다. 시인 존 키츠가 말했듯 응급 상황과 어려움을 통해 영혼이 만들어진다(364)”. 감당할 것은 감당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최근 나는 주변인들과 소통에 실패하여 회의에 빠졌다. 원래 말은 온전한 전달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타인에게 온전히 가 닿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 우울하기만 하지 않은 것은 내 관계가 새롭게 정리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완전하거나 영원한 관계는 없다. 서로의 반응에서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 잦아지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관계는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단칼에 관계를 끝낼 만큼 철없던 청춘의 날들도 다 지나갔다. 시절 인연이 다하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관계의 싹이 튼다. 이러한 사태가 내 마음 키를 조금 키워놓는다.

 

- 노인 없는 나라

    

우리는 누구나 사는 만큼 늙는다. 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낭만적 사랑이나 아이를 낳는 일 같은 다른 종류의 헌신에 비해, 조언이나 독려가 될 만한 분량의 글이 없다(20).” 솔닛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엄마를 보면서, 중요한 것은 망각하고, 잊어도 좋을 것은 기억하는 우리를 이야기한다. 솔닛의 어머니를 보며, 나의 엄마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녀의 삶에서 란 딸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가늠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사유의 언어와 삶을 살아오는 우리 모녀에게도 몇 가지 함께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인생의 끝자락에 와 있는 내 엄마의 삶을 해석해주고, 이름 붙여주는 지혜로운 딸이 되고 싶다.

 

낯선 나라, 낯선 공간에서 이 책을 발견하여 들떠했을 역자 김현우의 마음에 공감이 간다. 좋은 책을 선점했을 때의 기쁨으로 열정이 샘솟았을 것이다. 지성과 통찰이 넘쳐나는 리베타 솔닛의 위로가 그대로 전해진다. 나 또한 솔닛의 책을 가지고 다니는 시간 동안 퇴화와 생성을 반복하는 내 삶을 껴안을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 언제가 샌프란시스코 해이트애시베리에 가면, 이 책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내 어머니와 어린 날의 앵두 나무, 오래 전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를 호명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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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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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다는 것, 삶을 산다는 것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책읽은수요일, 2016. 1.

 

테리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가이자 정치 평론가. 저자의 강의실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느낌이다. 저자 자신이 수술대에서 메스를 가하듯, 놀라운 작품 분석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리한 감식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이 책은 - 원제 문학을 어떻게 읽은 것인가?”가 말해주듯이 - 문학을 읽는 방법론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서 문학을 읽는 것과 삶을 사는 것, 모두 목적 없이도 의미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책은 문학 작품을 함께 읽는 기쁨을 준다. 영문학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난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권이 달라도, 세계의 고전이라 불리는 책을 함께 나누고, 이름만 알고 있는 책은 도전해서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모든 텍스트를 순진하게 읽는 사람들에게 책 읽기의 전략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저자는 분석이 즐거움의 적이라는 신화(8)를 무너뜨리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목적이 없이도 의미 있을 수 있는 일

 

문학은 삶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문학을 읽는 것과 삶을 사는 것, 모두, 목적이 없이도 의미 있을 수 있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 문학만을 문학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 어떤 글이든 문학적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메뉴판과 설명서조차 문학적으로 쓰일 수 있고, 읽을 수 있다. “책만 보면, 언제 공부할래?”와 같이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표현이 있다.

 

십대 내내 나의 문학을 읽는 시간은 학교 공부가 끝난 다음에 자신에게 주는 선물 같은 거였고, 공부가 미진한데 소설을 읽는 일은 매번 죄의식을 불러 왔다. 아마 그런 죄의식이 삼십대까지 지배했던 듯도 하다. 직장생활과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면서도 전공 서적 외에 다른 책을 읽는 일은 매번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불편한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목적 없는 무사무욕적인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압박이 컸다. 문학 읽기의 죄의식과 함께, 십대 내내 숨 죽여 읽었던 책들이 오롯이 떠오른다. 삼중당 문고판의 한국 중단편 소설, 범우사에서 나온 세계 고전 소설, 학교 앞에서 책 외판원에게 할부로 구입했던 세계 고전 단편 선과 같은 것들이다.

 

학력고사가 끝난 이후에는 음악을 귀에 걸고, 문학을 읽으며 겨울밤을 밝혔다. 그 시간 안에서 세계의 시공간이 압축되는 경험을 했다. 고전 문학 속에서는 5분 동안 스쳐 가는 감정도 하나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음을 배웠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물리적 시간에 갇힌 생애사가 인생이 아니라, 한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만들 수 있음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책은 크게 다섯 장으로 구성된다. 도입부, 인물, 서사, 해석, 가치가 그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읽기가 인간의 삶에 어떤 기능을 하는지 명확하게 밝혀 둔다.

    

문학은 인간이 삶의 목적에 휘둘리지 않게 해주고, 삶을 더 잘 즐기도록 돕는다.”

 

훌륭한 작품은 훌륭한 그릇부터 구축한다. 문학의 형식과 무관하게 내용만을 읽는 독자들이 있지만, 글의 형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이해하는 일, 즉 분석을 통해서 문학 작품을 더 잘 읽고, 이해할 수 있다. “형식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요소에 대한 주의 깊은 독서(17)를 해야 한다. 내용이 이야기되는 방식을 분석할 줄 알아야 한다. 문학 작품은 내용만을 담보하지 않는다. 내용에만 국한하는 것은 순진한 독서 행위다.

 

* 인물

 

감정이입만으로 인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인물과 분리하는 소격 효과없이 독자는 인물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 일정 정도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캐릭터는 원래 한 개인의 특징이었는데, 지금은 개인 그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를 구분해주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91)하다. 저자는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세익스피어 오셀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인용하여 인물의 유형은 개성을 보존하며 더 넓은 배경을 부여(108)함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의 특별함은 아무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물 각자의 고유함이다. 더 이상 분절될 수 없는 개체로서 개인(in-dividual)은 배경과 분리될 수 없다.

 

* 서사

 

플롯은 서사의 일부일 뿐, 그 자체로 서사가 될 수 없다. 역으로 서사에 플롯이 생략된다면, 이야기는 추동력을 상실한다. 최근 가까이 지내는 분의 단편 소설을 피드백한 일이 있다. 평소에도 군더더기를 싫어하고, 직선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작가는 소설에서도 같은 모습을 유지했다. 정보로만 이어지는 글은 마치 트리트먼트나 개요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묘사로 가득한 글을 읽는 것도 힘들지만, 기록되어야 할 것들이 생략된 글이 오히려 더 피로하다. 저자는 고도를 기다리며, 구월에는 삼십 일이 있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처럼 플롯 없는 서사(217)도 있다고 한다. “목적이 없어도 의미 있는 인생처럼 서사도 플롯 없이 항해할 수 있는지는 작가의 역량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 해석

 

세상은 온갖 기호로 가득하다. 기호는 해석을 요구하고, 주체에 따라서 그 의미는 다의적이다. 문학 역시 해석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생산한다. 작품에는 기표에 상응하는 기의가 하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 작품의 의미는 독자의 수준에 따라 변주될 것이다. 원래 예술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므로.

 

모든 문학 작품은 출생 시에 고아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성장해가면서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인생을 통제하지 않게 되듯이, 시인은 자신의 작품이 어떤 상황에서 읽힐 것인지 또는 그 작품을 독자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222).

 

문학작품 해석의 다의성은 필연이다. 허구에 실제를 구사한 문학의 모호함이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모호한 표현을 하게 되고, 독자는 능력만큼 다양한 해석을 한다. 내용뿐 아니라, 문학이 형식 또한 해석을 요구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반 페이지를 훌쩍 넘는 하나의 문장, 육십 페이지로 이어지는 율리시스의 마지막 문장과 같은 경우, 문장의 형식이 우리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한다. 저자는 이와 같은 형식에 대한 해석이 요구되는 까닭을 불투명하고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삶(235)”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 가치

 

문학의 탁월함은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문학비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또한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위대한 작품으로 남는다. 문학 작품은 유기체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하기도 하고, 점진적으로 나아가면서 다양한 해석을 축적(339)”하기도 한다. 예술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다른 문화의 예술을 이해하려면 그 문화권의 수학자들이 만든 법칙을 이해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 필요(346)하다. 즐거움이 문학 작품의 가치가 경탄에 있지도 않다. 경탄하지만 읽지 않는 책도 있고, 경탄하지 않으면서도 즐겁게 읽는 책이 있다.

 

니체 슬로 리딩(느린 독서)”

 

예술의 힘은 무한 창조에 있다. 제한된 색을 가지고 무수한 그림을 그리고, 정해진 음표 안에서 무한의 음악을 생산한다. 몇 가지 기호인 문자 안에서 문학은 끝없이 변주된다. 같은 단어조차 맥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때때로 나이가 주는 선물이 있다. 삶이 뚜렷한 목적 없이도 흘러간다는 것, 삶은 예기치 않은 일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 그래서 삶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는 걸 알게 된다. 이제 나에게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이거나, 게으른 자의 소일거리가 아니다. 단어와 단어 사이, 행과 행 사이의 의미를 헤아리기에 충분한 시간을 가진 나이가 되었다. 늙는다는 것은 (M. Foucault주체의 해석학에서 강조하듯) 세상적인 성공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장비를 마련하는 과정일 것이다. 니체의 느린 독서는 자기인식을 넘어 자기배려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 책 또한 그런 독서가 필요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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