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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날은 많이 추워도, 두터운 코트 한 겹을 벗었다고 마음이 조금 가벼운 걸 보니 말입니다. 1월에 세웠던 계획, 2월에 다짐했던 결심 변함없으신가요? 3월도 막바지입니다. 다음 달 '내맘책'은 꽃구경이 한창일 때 올라오겠네요. 따뜻한 봄나들이에 몸과 마음 다 녹았으면 좋겠습니다.

"절판본의 귀환"

<이와 손톱>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때였다.(어언 십수년 전. -_-;) 해문의 애거서 크리스티 빨간 색 문고판 80권을 다 읽고 난 후 무얼 읽을까 찾다가 우연히 잡게 된 것이 자유추리문고였는데, 그중 한 권이 바로 <이와 손톱>이었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렇게 완벽한 완전범죄가 가능하다니!"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두 줄기의 이야기가 전개되다 겹쳐지는 구성과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결말은 이제 너무 흔해졌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띵' 하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 생애 처음 만나는 반전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정말 오랫동안 이 책의 재출간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보아도 예전만큼 재미있을까 기대 반, 두려움 반 뒤섞인 감정으로... 물론 예전만큼 놀랍거나 충격적인 감흥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고전'으로 남은 작품 특유의 아우라는 여전하여 반가웠다. 다시 생각해도 여전히 최고의 복수담인 것은 확실하다.(마지막 한 장만으로 충분하다.)

오랜 세월 묻혀있던 <이와 손톱>에 비해 <엔더의 게임>은 절판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는 사람만 아는(?) 재미있는 SF 소설이다.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에 수상한 올슨 스콧 카드의 대표작으로 생명에 대한 연민과 통찰, 소통의 문제, 인간성과 조직에 대한 성찰이 담긴 수작이다. 무엇보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기 때문에 SF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작품이기도. 이 책은 엔더 위긴 시리즈의 오프닝이기도 한데, 사실 가장 큰 감동은 <엔더의 게임> 다음 작품인 <사자의 대변인>에서 느낄 수 있으므로, 이 작품 역시 곧이어 출간되기를 바란다.




"올바른 문화 생활"

올바른 문화 생활이란 게 대체 뭘까. 찌든 일상을 날려버릴 한 순간? 온 몸을 움직이며 땀으로 생명을 체감하는 것? 말도 못하게 재미있어서 페이지 넘기는 것도 아까운 이야기들? 아무려나 일상 속에 기적처럼 솟아올랐던, 놓치고 싶지 않았으나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이야기 몇 개.

1. <이와 손톱>은 반전이 기가 막힌 작품이라 알려졌지만 사실 그 반전이 일어나기 전의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다. 서커스 유랑단, 유쾌한 마술사, 달콤한 러브 스토리, 아마도 중절모와 레인코트가 범람했을 뉴욕의 어떤 시절 등등이 그렇다. 더욱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 대단하다는 '반전'이 끝난 이후.

2. 시간제 연인과 정규직 친구. 사려 깊은 행동과 애정에서 우러난 배려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판타지 [주노]. 소닉 유쓰가 부른 '슈퍼스타', 벨 앤 세바스찬의 '피아자, 뉴욕(메츠) 포수' 등 익숙한 트랙도 반갑다. 가장 인상적인 평은 "현실의 인간들도 그들처럼 위트있는 대사를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이다.

3. 일본 로컬 밴드의 자존심(물론 이런 단어와 어울리는 사람들은 아니다) 스핏츠의 '잔물결 투어' 내한 공연에도 다녀왔다. 마흔을 넘겼음에도 귀여운 외모의 보컬 쿠사노 마사무네는 요즘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 우리말 공부에 여념이 없단다. 실제로 그가 내뱉은 말들은 단어와 단어로 이루어진 미숙한 외국말이 아니라 진짜 마음을 담은 완성된 문장이었다.

"한국에 와서, 여기서, 공연하게 되어서, 진짜 좋아요." 대장금, 다모 등은 물론이요 김삼순, 위풍당당 그녀, 쩐의 전쟁까지 보셨다고. 그들의 앵콜 첫 곡은 김삼순이 드라마에서 부르던 서유석의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근래 제 관심사는 설득의 힘과 와인이지요.."

새 대통령 취임식 즈음하여 여기저기서 설득과 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연일 떠들어댔다. 다른 나라 어느 지도자가 어떠한 설득의 힘으로 어떤 업적들을 남겼는지를 소개하며, 새 대통령이 국민들의 여망에 부응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근래 읽은 책들은 대부분이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책들이었던 지라, 마침 요새 분위기도 있으니,,설득에 관한 책을 좀 읽어볼까하고 책장을 두리번거렸지만, 제목에 '설득'이란 문구가 들어간 책만 유심히 보아서일까. 눈에 띄는 건 '설득의 심리학' 뿐였다.

몇 년새 자기계발서와 관련되는 심리학 서적들이 엄청나게 쏟아졌건만, 여전히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또 그럴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책이다. 아주 예전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종종 어떠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책에 열거되었던 논제를 떠올리게 되니 말이다.

암튼, 설득에 대한 책은 그다지 추천하고픈 것이 더 이상은 나오질 않았고, 대신 눈에 들어온 건 '와인강의'였다. 그냥 얻어진 것인지, 책장에 꽂혀있는 지조차 몰랐던 책였건만, 뒷부분이 저자의 학문적인 배경이 드러나 약간 지루해지는 감이 있었다는 점을 빼곤 나름 유익한 독서였다. (과학자의 시선에서 쓰여진 와인책이 없어 못내 아쉬웠다는 저자의 말씀이 있었지만서도..)

집에서건 밖에서건 요샌 와인을 먹을 일이 꽤 많았는데도 관심을 갖고 공부해 본 적은 없어서 와인을 즐기기는 하되 문외한였다. 와인에 대해 좀 아는 지인과 같이 가서 골라주는 대로 먹든지, 대충 가격대 보고 정하든지 하는 단순함으로 선택해왔었는데, 그래도 와인 책 한권을 보고 나니, 얻은 게 많다.

와인 라벨 이해하기부터, 시음에 관한 Tip, 양조 과정, 세계의 와인 정보 등 읽는 재미가 솔솔 했고, 또한 감동을 준 것은 책 말미에 '와인발음가이드' !  와인을 많이도 들이켰던 프랑스 여행을 떠올리니, 이 발음 가이드를 미리 섭렵하고 갔었더라면 파란 눈의 프렌치 앞에서 메뉴판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는 대신 멋드러진 발음으로 와인 1병을 주문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2008년 목표 중의 하나가 취미생활을 좀 더 심도있게 하는 것이니, 와인공부에도 열을 올려봐야겠다. 다음엔 휴 존슨의 도서들로 그 열의를 쭉 이어볼 생각이다.








"write forever!"

책을 받아보고 두 번 놀랐다. 처음은 제목 때문이었다. '행복한'에 '글쓰기'라니. 마치 "<행복한 글쓰기>(라고 쓰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읽는다)" 같은 느낌이랄까. 종교색이 거슬린다면 이렇게 쓸 수도 있겠다. "나는 행복도, 글쓰기도 모릅니다. 정말로요." 물론 좋은 글쓰기는 아니다. 정직은 최우선이 아니고, 뜻만 통한다고 글은 아닐 테니까.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저자와 역자 때문이었다. 명색이 어린이 책 MD로 밥을 먹는 마당에, 뉴베리상 수상 작가라는 저자의 이름은 그야말로 금시초문. 헌데 역자는 언제나 사랑하는 김연수 작가가 아니던가. (인터뷰를 추진했으나, 번역서로 인터뷰하기는 쑥스럽다고 하셨… 안녕히, 그리고 <대성당>은 고마웠어요…)
 
하지만 진짜 놀라운 것은 바로 책의 내용이다. 놀람은 두 번 뿐이었다고 첫 문장에 이미 썼으니 다른 말로 표현해보자면(다양한 표현!), 음… 'Magic'정도? (원제가 바로 <Writing Magic>이다) 다시 말해, 귀찮은 일을 사서하지 않는 성격의 나이지만 누군가 "마술이라니 에이, 과장도"라고 말하면 친절하게 다가가 "미안하지만 과장 아니거든요"라고 말해주고 싶은 정도라는 것.
 
흔한 생각으로,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글쓰기 책이라면 유치할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쉬울 것 같기도 하고, 논술 공부에만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정말 흔한 생각이지만 백보 양보하여 적어도,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저자는 책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글쓰기>는 이야기를 지어내 쓰는 법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하지만 꼭 이야기가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이메일, 글짓기, 축하 카드, 블로그, 소형 비행기의 연기로 하늘에다 글을 쓰는 스카이라이팅에 이르기까지 글로 쓰는 일이라면 뭐든지 도와줄 수 있는 책이에요."
 
그러니까 누구든, '행복한'이니 '글쓰기'니 너무 잘해 지겹다 하지 않는 이상은(이 분 저한테 연락 좀 주세요), 누구에게나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이, 배짱 좋은 작가의 허언은 결코 아니다.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각 챕터의 제목마저 얼마나 아름다운지! ('Liftoff'로 시작해서 'Writing Forever'로 끝나는 원서의 목차를 볼 때면 나도 몰래 손으로 차양을 만들게 된다. 마치 행복의 나라를 향해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비행기를 멀리서 바라보듯… )
 
마지막으로,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나는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책이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라고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책을 번역하면서 '맞아, 그렇지!'라고 맞장구를 친 일이 정말 많았거든요"라는 옮긴이의 말을 다시 한 번 옮겨 본다. 나 역시 이 책을 팔면서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책이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빅뱅 같은 친구들을 보며 가끔 느끼는 거지만, 늦게 태어나는 것도 복이지 싶다. 간만에 오아시스의 'live forever'나 들어야겠다. 아 90년대. 가끔은 정말이지… (푸념)





 

"김광석을 기억하는 시간 !"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그의 노래를 들을때면 꼭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것 같은 착각에 빠져 들곤 했지요. 그처럼 노래 하고 싶은 마음에 통기타도 배워본 시절의 기억을 돌아 보며 10여년전 기억들 속으로 빠져 오후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한사람이 간직하고 있던 사진을 꺼내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 쉽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 김광석을 기억하는 시간을 꽤 오랜만에 가져 봅니다.

'연암 박지원' 하면 떠오르는 단어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북학파' '실학자' '양반전' '백탑' ...  요즘엔 한 단어가 더 떠오릅니다. 몇해 전 '리라이팅'시리즈로 나온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의 저자(고미숙) 입니다. 어려운 고전을 접할 수 있게 해준 저자가 2008년엔 비주얼판 '열하일기'를 통해 고전읽기의 재미를 얼마나 더해 주었을지 기대가 됩니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 정신이 멍멍한 느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접했을 때가 그랬다. '부자가 되고 싶어요,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라고 말을 하는 게 조금은 꺼려지고 천박하다는 생각이 들던 시절, 이 책은 용감하게도 "가난한 아빠는 죄다"라는 말을 던져 충격을 줬었다. 월급만으로 돈을 차곡차곡 벌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접근이 얼마나 안일한지 알려줘 허탈감을 줬다.
 
이 책이 꼭 그렇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 정신이 멍멍한 느낌. 책을 덮고 나면 꼭 그렇다. 일주일에 4시간만 일해도 충분하다는 이 책의 카피는 하루 8시간은 기본 야근까지 밥 먹듯이 하고도 일에 치어 사는 직장인들을 홀리기에 충분해 보인다. 어떻게 하면 4시간만 일해도 되는가. 그러고도 지금의 월급 아니 두 배 다섯 배를 벌어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정말 가능한 것인가.
 
평범한 생각의 틀을 깨뜨리게 되는 책. <세계는 평평하다>보다 훨씬 개인적이고 내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책. 그래서 읽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여러분도 분명 이 책을 읽고나면 주변의 모든 일들이 새삼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아마존을 보니 극찬이 우세한 가운데 혹평도 여럿 보인다. 혹평은 대안의 비현실성에 대한 불만이다. 극찬은 새로운 시각을 던져준 것에 대한 감사다. 나는? 오랜만에 충격을 주는 책을 만났다는 데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괜찮아, 난 술주정뱅이니까."


사실 '3월 내맘대로 좋은 책'은 이미 다른 책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원고를 기다리는 동안 '나 좀 잡아봐라'는 것처럼 재미난 책이 꾸역꾸역 쏟아졌다.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도, 다시 읽은 이언 매큐언의 <속죄>도 선방했다. 그러나 만화 담당 MD가 이 책을 빠뜨려서 쓰겄는가. <노다메 칸타빌레>의 주인공, 노다 메구미의 실제 모델은 일본 변두리 마을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모모씨라고 한다. <음주가무연구소> 소장은 이 작품의 모델이 본인이라고 떳떳이 밝힌 바 있다. 책 한 권으로 묶어낼 만큼의 주벽이 어련하겠느냐만, 그것을 읽고 술에 대한 무언의 환상과 동경을 품게 하기란 쉽지 않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만행을 보고 있자니, 지난 날 나의 만행 따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위로가 된다. 깨어보니 방 구석에 세워져 있던 교차로 가판대도, 현관 밖에 일렬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던 화분도, 냉장고에 들어있던 봉제 인형도, 이제는 잊을 수 있다. 작가의 말마따나 '괜찮아, 난 술주정뱅이니까'.

꽃이 핀다. 봄바람이 분다. 마셔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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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반쪽 2008-03-25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와손톱,책도둑...읽고싶어요^^

하루(春) 2008-03-25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rt-time lover, full-time freind를 '시간제 연인과 정규직 친구'라고 직역해 놓으니까 왜 이리 웃기죠? 하하

whguswjd99 2008-03-2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도둑, 행복한 글쓰기.....읽어보고 싶네요^^

순오기 2008-04-05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글쓰기 구입...한 시간만 기다리면 올 것 같아요. 기대만땅~~~ ^^
 



벌써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1월편을 느지막히 올리는 통에 일찍 닥쳐온 마감일로 편집팀은 분주했습니다. 구정 연휴가 참 길지요. 간만의 휴식에 몸과 마음을 맡겨버리고, 따뜻하고 평온한 2월이 되시기 바랍니다. (안 보이는 분들이 몇 분 있지요. 곧 추가될 예정입니다. 커피사기 내기를 했는데, 과연 누가 내게 될 지! :) )

"역시 대단해"

 언젠가는 읽어야겠지, 라고 생각하고 따로 보관해 둔 책들. 그 중의 한 권을 꺼내들었다. 출간되었을 때 사람들에게 소개도 하고 많이 팔기도 했지만 정작 나는 자세히 읽지 못했던 책이다. 좋은 책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마도 '주제가 너무 진부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생각과 달리 그의 이야기는 진부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혁신이라는 주제를 이렇게 쉽게 풀어낼 수 있다니. 그가 가진 통찰력 그리고 쉽게 표현해내는 능력에 감탄할 뿐이다.
 
책을 읽다 볼펜을 찾아들고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밑줄 긋는 부분이 점점 많아진다. 책을 읽다 잠시 멈추어 선다. 생각한다. 그리고 밑줄을 긋고 또 생각한다. 멈추어 서는 시간이 길어지고 나의 생각은 점점 혁신이라는 주제를 파고들며 생각을 확장해간다. 내 업무,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 사회의 변화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 바꿔볼만한 것은 없을까.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없을까...
 
가끔씩 가진 능력에 비해서 과대평가 받는 사람들이 있지만 피터 드러커만은 아니다. 대가라는 말이 전혀 부족함이 없다.



 


"Why do I keep counting?"


아직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새해건만 문득 불안감이 엄습,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대충 이런 이미지로- 촛불이 켜진 방, 홀로 무릎 꿇은 나는 단독자로서(어쩐지 나는 ‘로써’가 어울릴 듯한 기분이 들면서) 신 앞에 기도한다. “쎄뇨르, 헤수스(Senor, Jesus)...”로 시작하는 그 기도는, 온갖 참회와 고해의 뜨거운 눈물을 지나 블루지한 기타 솔로(대략 23분)로 마무리 되는데… 그런 장면을 그릴 때면 나도 모르게 울컥, 당장이라도 스페인어 학원과 기타 학원을 등록하고, 동네교회라도 기웃거리고 싶은 마음을 참기 힘들어지지 말입니다(겨울바람이 매서워 다행이지요). 그것이 바로 내가 살면서 깨닫게 된 이미지 트레이닝의 힘이라고 하면 너무 싱거운 농이겠지만.

 

 

 

 

기타는 백날 쳐봐야 A-C-Em-G 겨우 하는 수준이고, 스페인어라고는 은지원의 ‘미 까사’ 가사를 흥얼거리는 것이 전부이지만, 기도만은 종종 하고 있다. 한 번도 신자인적은 없지만 그렇게 되었다. 완벽한 절대자에 대한 관념이 완벽하지 않은 나에게서 나올 수 없으므로…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은 것은 물론 아니고. 그것이 카뮈적인 반항이든지, 오에적인- ‘신 없는 인간의 구원’ 같은 문제이든지간에, 결국 앞서 존재하는 것은 신이었으니까. 문제는 존재증명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조건으로 (그로부터!)던져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하지만 도무지 모르겠어서 이제는 조금 대화를 시도하고 싶다는 정도? 한마디로 돌아온 탕아 되겠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건 분명하다)

 

 

 


그 계기는 사실 아주 사소했다. 전직 종교담당MD 김*욱 씨가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조지 뮬러의 기도 응답수첩]이란 것을 던져 주었고, 깍두기 여덟 칸에 우선순위를 긴급/작정/신유/일반으로 나누어 기도를 적고, 옆에 하나님의 응답을 적는 조금 우스운 모양새(*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주로 긴급에)의 그것을 들여다본 것이 시작이었으니까. 비웃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지난 연말, 남들보다 100년 늦게 읽었던 <파이 이야기>의 파이가 나와 같은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고, 퇴근해서 틀었던 TV에서는 [하우스 vs 신] 에피소드가 하고 있었다면? 나는 이 모든 것을 우연이라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고, 그렇다고 무슨 뜻인지 알아낼 능력은 없지만, 적어도 융 선생이라면 비웃지 않았을 터. 하여 기도를 시작했다는 말이다.

설을 앞둔 월요일 새벽, 아직 응답을 받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코헨 아저씨가 야한 목소리로 ‘할렐루야’를 불러주시는 지금, 나 역시, “낙관하고 있습니다!” 라고 씩씩하게 말해 볼까 생각중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 내 기도의 내용은 언제나, 브랜든 플라워스의 노래마냥, "Help me get down / I can make it / Help me get down / Help me get down / I can make it / Help me get down / If I only knew the answer / I wouldn't be bothering you" 딱 그 만큼이다. 나 역시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저 위의 누군가를 귀찮게 해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조금 울며 떼써보고도 싶다고 한다면, 너무 엄살일까? 엉크, 엉크.  

 

 

 

 



"Do what you wanna do"

'단순화를 넘어 모 아니면 도로. 1월 내맘대로 존책, 에서 천명한 'simplify'는 적정선을 넘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어째서 손에 잡히는 것이 잡히지 않는 것보다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두냐, 버리느냐'의 기로에서 기준은 매분 매초 바뀌었습니다.

당신도 그렇겠죠? 마늘은 절대로 먹지 않지만 닭과 함께 고아 삶아진 마늘은 괜찮고, 윗사람에게는 존댓말을 해야겠지만 이 사람은 나와 비슷한 사람이니까 반말을 반 섞어도 괜찮고. 마늘이 아니고 파라도 괜찮아요. 윗사람이 아니고 아랫사람이라도 상관없구요. 자꾸 완벽하라고만 이야기하는 이 세상에서라면, 조금쯤은 자신에게 관대해야 위안을 얻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너무 관대했었나봐요. 정신을 차리고보니 주위에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네 귀퉁이가 비어버린 방 가운데 앉아 전화를 하면, 제 목소리가 모서리와 천장에 부딪히고 다시 전화기로 돌아와요. 바닥에 엎드려  '이 자식 너무 잘난 척하잖아'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문득 꺼내드는 <풀하우스>를, 사랑하는 M언니가 공역하신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를 읽고 있습니다. 온기를 품은 고양이 세 마리가 어느덧 가슴팍 밑으로 모여듭니다.

...연말도, 정초도 나와는 무관해. 두어 사람은 전화를 할 것도 같은데 오지 않고. TV는 괜히 없앴나, 뭘 해보겠다고. 생각만 하던 그 일 언제쯤 할 수 있을까. 부재중전화 2건이 신경쓰이지만 모르는 번호라 다시 걸고 싶지 않아. 하지만, 혹시...

그런 당신과 나를 위한 노래예요. <Mocca>의 'Do what you wanna do'. 부디, 모두 행복했으면 싶어요.

모두가 행복하다면, 모두 기분이 좋다면
하고 싶은 걸 하세요. 하고 싶은 말을 해요.
마음 편하게 먹어요. 폭풍우는 잦아들테니까요.
자신에게 진실하세요. 그럼 모든 게 잘 될 거예요.

 

 

 

 



"당신이 무서워하는 것을 말하라"

친구가 꾼 어젯밤 악몽 이야기를 시작으로, 나와 그는 자신이 아는 무서운 이야기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어헤친다. 그런데 서로가 느끼는 공포의 간극이 너무 크다. 내가 한 무서운 이야기를 그는 우습다고 했고, 그가 한 무서운 이야기를 나는 짜증스럽다고 했다.

우리의 접점 없는 무서운 이야기 배틀 후, 나는 오랫동안 공포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소꿉친구에게 살해당한 아홉살짜리 여자아이가 자신을 살해한 친구와 그 오빠가 자신의 시체를 숨기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죽은 소녀의 시점, 반전의 반전 그런 요소들 말고 이 소설의 공포를 지탱하는 가장 커다란 줄기는 이 모든 것들이 아이들에게서 일어난 일이란 사실이다.

<태평양 특급>
그로테스크한 공간에 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스퀘어 댄스'. 외계 생명체의 공간에서 사지가 뒤틀린 채 내 멋대로 움직이는 인간의 몸.

<어리석은 농부와 귀신들의 합창>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불러오는 파멸의 변주곡. 귀신들이 하는 말에 대답하면 안 된다는 할머니 말씀이 떠오르는 동화다.

그림 형제의 '두려움을 배우러 간 사나이'라는 동화를 보면 온갖 기괴한 상황에서도 공포를 느끼지 못하던 사나이가 가장 무서워한 것은 잠결에 뒤집어쓴 물세례였다.

당신이 무서워하는 것을 말하라. 그러면 당신을 조금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번만 읽어도 상위 1%로 간다"

3-4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친한 후배에게서 자기 직장 상사 중에 점심시간이면 ‘수학의 정석’을 푸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뇌 구조가 독특한 사람이거나 얼마나 심심했으면.. 네가 세상사는 이야기 좀 해주고 그러렴. 하고는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 기억이 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 비슷한 증상을 앓고 있다는 ‘어딘가 수상한 사람’ 이야기를 몇 명이 더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30대가 넘어서 수학책을 보다니.. 그것도 휴일에.. 일주일 동안 수고한 자기 몸을 일으켜 머리에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다니...  다행히 나와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중에는 그런 적잖이 수상한 자가 지금까지는 없었고, 계속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우연하게 손에 들어온 수학책 하나. 부제가 ‘한번만 읽어도 상위 1%로 간다’이다. 남들 일주일 일할 분량을 하루에 다하고 간다고 착각하면서 복잡한 머리를 지하철에 싣고 퇴근 하는 길에 손에 있었던 책이 왜 이 책이었을까.  한번만 읽고 대한민국 1%로 가서 렉써썬을 타고 싶다는 독특한 생각을 하면서 펼쳐 들었다.

얼마 후, 난 수학공식을 읽으면서 지하철을 타고 그렇게 집으로 가고 있었다. 수학을 취미로 하기는 쉽지 않겠고, 수험생은 더더욱 아니지만, 가끔은 단행본보다 지하철퇴근길에 ‘수학의 발견’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  30대 넘어서 수학책을 읽어보자! 그리고, <수학의 비결>은 고등학교 참고서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만의 리듬.."

삶이란 게 원래가 하루하루 선택의 연속이고,  결국에 인생은 혼자 살아내는 것이라고.. 철없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이미 달관이나 한 듯 떠들어대던 기억이 난다. 살다보면 많은 부분 그러하기도 하고, 버겁다 느껴지는 날엔 더욱 냉소적으로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어디서부터 어긋나 있는지 모르게 점점 균형을 잃어간다거나, 고민에 휩싸이게 되는 날에,
 
모리 에토의'리듬'은 쉽고 경쾌하게, 존 러벅의 '성찰'은 경건하고 깊이있게,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언제인가 두껍고 약간은 지루한 책을 읽다 슬슬 지겨워지던 찰나에 머리나 식힐 겸 집어들었던 이 책. 어느 새인가 박자를 놓쳐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조바심이 나던 때에 본연의 내 '리듬'을 되새기게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어른들의 눈엔 문제아일 뿐이지만, 사유키의 작은 우상 신지오빠는 신주쿠로 가기 전, 사유키에게 '나만의 리듬'을 잃지 말라고 얘기한다.
 
'이제부터 주위의 잡음이 신경쓰이고...네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거나 웃지 못할 때, 이 스틱으로 리듬을 맞춰봐. 너에게는 너만의 리듬이 있으니까.'
 
'그것을 소중히 여기면 주위가 아무리 변해도 너는 너인채로 있을 수 있어.'

 
나름의 기준과 소신으로 행하는 것들에 때때로 내가 지치고, 그저 남들이 지나가듯 내뱉는 말들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할 때면, '신지오빠'의 나지막한 얘기를 떠올리며,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 본다.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는 그 리듬을..다시 내가 원하는대로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존 러벅의 '성찰'은 여러 학자와 작가들의 언행을 담아 이루어진 책이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줄 긋고 기억하고 싶은, 또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문구들이 참으로 많다. 꼭지마다 인생의 중요 요소들을 고맙게도 잘 정리해 일러주고 있으니, 흔히 FAQ 항목에서 내가 원하는 유사 질문을 뒤져 보듯, 그날 그날 인생의 처방이 필요한 부분들에 집중해서 들춰보았더랬다.

서두르지 말라, 생각없는 행동이
정신의 속도를 망쳐 놓지 않도록 하라.
숙고하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라.
그러한 바탕 위에서 할 일을 결정하라.
서두르지 말라. 세월은 무모한 행동을
덮어주지 못한다.
쉬지 말라, 인생은 흘러간다.


순간순간 온전히 '나'인채로 살아가되, 주위에 귀기울일 줄 알고, 서두름 없이 의미없는 쉼도 없이, 한 번 뿐인 내 삶을 충만되게 채워갈 수 있길 빌어본다.
 


"2008년 1월 22일, 히스 레저가 죽었다."

2008년 1월 22일, 히스 레저가 죽었다. 에니스 델 마가 죽은 것이다. 며칠 뒤 새벽, 그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진 나는 가슴 떨리는 기차 소리와 기타 연주로 시작되던 [브로크백 마운틴]의 트레일러 동영상을 연신 돌려보고 있었으며, 문득 몇 개의 진실을 깨달아 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간다는 평범한 진리와, 마초 같은 인생 때문에 편견으로 시작된 한 배우와의 만남, 그리고 그처럼 편견으로 시작된 모든 관계들이 꼭 상상했던 방식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 등등을.
 
'내가 좋아하지만 곧 죽게 될' 사람들의 목록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오에 겐자부로는 <회복하는 인간>에서 시인 개리 스나이더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적는다. '원한다면 구원은 온다 / 그러나 결코 네가 몰랐던 방식으로', 그러나 구원이 오기는 온답니까, 라고 되묻고 싶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범인들에게 전도유망한 청년의 죽음은 그러한 구원의 가능성을 몰수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아쉽게도, 헐리웃 배우 하나 죽었다고 삶의 고삐는 늦춰지지 않는 법. 무던하게 지루한 일상을 헐떡이며 주파하던 나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선례처럼 소설과 영화의 완성도가 경이로운 균형을 이루는 예를 찾고 싶어진다. 가슴 벅찬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여 집어든 것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였다.
 
총기와 마약, 돈다발이 들어찬 서류가방, 국경과 보안관과 범죄자. 너무 빤한 건 아닌가. 그러나 사막을 건너는 낡은 트럭, 그 트럭에서 새어나오는 불길한 삐걱거림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한 비극의 한계를 한 단계 넘어선 장면을 보여준다. 차마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안타까운 비극의 순간이 이 과장하지 않는, 현실같은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시거' 역을 맡은 배우가 왜 유수의 시상식에서 유력한 후보자로 지칭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우리의 에니스는 돌아오지 않겠지. 편견과 편애를 넘어 온갖 아름다움에 휩싸여 죽는 것. 다만 아름다웠을 (것이라 추측되는) 그의 넋에 평온이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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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5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8-02-07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o what do wanna do라는 말이 참 와닿네요. 요즘 그걸 위해 뭔가 벌이는 중인데... 커피 사실 분은 1명만 당첨되는 건가요? ㅋㅋㅋ
 



올해 초반까지, 알라딘 편집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내맘대로 좋은 책이 잠시 연재를 중단(?)한 사이, 신입 편집직원 두 분이 오셨습니다. (누구일까요, 찾아보세요^^;) 편집장님도 바뀌었구요. 여러분들도 모두 별고 없으셨길 바라며, 새로 꾸린 편집팀에서 2008년 내맘대로 좋은 책 첫번째 소식을 보내드립니다.

"만원 지하철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건조하고 팍팍한 날들입니다. 책도 안 읽히고요. 12월에 읽은 책을 꼽아보니 일곱 권 정도 되는데 기억에 남는 책이 별로 없네요. 내맘대로 좋은책을 오랜만에 쓰니, 이런 얘길 해도 되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그 팍팍한 책읽기 라이프에 한 줄기 빛이 있었으니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시리즈입니다. 심심해서 들췄다가 푹 빠져서 읽었습니다. 출퇴근 길에 한 권씩 읽으니 시간이 어찌 빨리 흐르는지 만원 지하철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실 '실록'이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신념과 투쟁, 성공과 실패의 기록인가요. 그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일컬어 다만 '재미었다'고 말하는 게 실은 조금 불편합니다. 그러니 너무너무 재밌다는 말은 이만 접겠습니다.

"어디까지가 정사에 기록된 것이고 어느 부분이 야사에 소개된 이야기인지 모호했다. 이 대목에서 결심이 섰던 것 같다. 조선 정치사를 만화로 그리자, 그것도 철저히 <실록>에 기록된 정사를 그리자. 곧이어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조선왕조실록> CD를 구입하였다. 돌이켜보면 참 무모한 결심이었다. 특정한 출판사와 계약한 상태도 아니었고 실록의 한 페이지를 직접 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작업에 전념한다는 미명 아래 회사부터 그만두었으니, 내 구상만듣고 이런 대책 없는 결정에 동의해준 아내에게도 뭔가가 씌웠던 모양이다. 궁궐을 찾아 사진을 찍고 화보 자료를 찾아 헌책방도 기웃거렸다."
 
"포부는 거창하였고, 노력 또한 부끄럽지 않을 만큼 하였으나 독자 여러분께 재밌고 유익할지는 자신이 없어 사랑을 고백할 때와 같은 떨림으로 삼가 이 책을 내놓습니다."

 
어찌보면 평범한 머리말인데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거창한 포부와 용기와 엄청난 노력 덕분에 읽고 웃고 배우며 살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박시백 씨 고맙습니다. 앞으로 나올 아홉 권도 부디 건필하세요.

 



"옥토끼가 동편에 서서 맑은 기운을 마시고 있..."

신년 계획을 세워 본다. 신년 계획을 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경건함과 굳은 의지 그렇지만 열린 마음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니까,


 

 

 

 

검은 몰스킨의 경건함과 파버카스텔 UFO 캡의 아름다운 단단함, 지워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HB 연필의 열린 마음 같은 것. (저축은 신년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 경박하지 않기는 물론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하얀 노트의 첫 장에 무언가를 끼적이는 것은 언제나 죄스럽고 부끄러운 일. 하여 그 네댓 줄의 문장을 이곳에 옮길 수는 없고, 그저 몇 권의 책으로 대신해 본다.


 

 


 

그러니까 경건함, 굳은 의지, 열린 마음 같은 것. 그러니까 어쩌면 치유, 같은 것.
 
작년 1월, '옥토끼가 달을 보고 노래할 궤'라는 제목으로 이 글을 썼다. 올해 신년사주는 '옥토끼가 동편에 서서 맑은 기운을 마시고 있'단다. 이런 걸 융의 표현대로 '동시성'이라고 해야 할지, 쿤데라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다. 어쩐지 쓸쓸한 새해다.






"과학이 인간의 모든 기초를 설명해준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한마디로 속이 다 후련한 책이다. 이전의 과학 서적들이 보여주지 못한 답답한 부분을 깨끗이 정리하는 멋진 책이었다. 통섭, 과학과 인문학의 조화 이런 말은 많이도 떠들지만 이 책만큼 완벽하게, 아름답게 보여주는 책은 없지 않을까.

사실 한동안 생물학, 좁게는 진화생물학 쪽 책을 많이 봤었다. 과학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내게 진화생물학이 알려주는 새로운 사실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겐 정말 다윈이 말한 것처럼 ‘도덕과 철학이 새로운 기초를 갖게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일단 인간의 모든 건 진화과정에서 나왔다라는 명제에 완전히 동의하고 나니, 나머지 다른 이야기들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들렸다. 게다가 많은 과학자들이 은근히 표현하고 있는 자신감, 이제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문학자이며 그전의 인문학과 예술은 과학적 근거를 가지지 못한 구닥다리라는 그런 자신감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닌데, 그런 걸로는 부족한데.

하지만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는 이런 답답함을 해결해주었다. ‘아하, 역시 과학만이 진리를 발견하는 게 아니야. 이들 예술가들은 당시 과학자들이 모르고 있을 때도 이미 진리를 알고 있었잖아.’ 프루스트의 소설이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것은 그의 기억에 관한 통찰이 정말 진실이라고 내가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으로도 사실이라고 하지 않는가! 난 이제껏 설렁탕이나 사골 국물이 왜 맛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건 짠맛도, 쓴맛도, 단맛도, 신맛도 아닌데 대체 왜 맛있지? 그런데 정말 그런 ‘고기맛’이라고 할 만한 맛이 있단다. 요리사들은 몇천 년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과학은 이제야 알아냈다고 한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은 처음에는 청중들에게 최악의 평가를 받다가 차차 걸작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건 그의 음악이 그전의 음악과는 너무 달랐지만 과학적으로 봤을 때는 조화로운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조화로운 음악에는 귀를 열게 되어 있다. 아, 그래 나는 이런 설명을 원했어! 과학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설명, 예술이 왜 아름다운지를 설명하는 과학을 말이야! 

과학이 인간의 모든 기초를 설명해준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기초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가? 과학적 사실을 아무리 나열해도 감동을 주진 못한다(물론 아름다운 수학이나 물리학에 어떤 감동을 느끼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진짜 감동을 주는 것은 과학적으로 올바른 사실(시적으로 말하자면 진실)을 도구로 삼아 엮어내는 예술이다. 이 책은 예술이 과학만큼이나 현실을 잘 보여준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감동을 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과학과 인문학의 진정한 통섭이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그런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케세라세라"

이따금 생각한다. ‘말’이란 어쩜 이렇게 따분할까. 세상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만한 것들이 너무 많이 떠돌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언어’만큼 아름다운 것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찬 순간에, 어쩔 수 없이 늘어놓은 그 모든 말들, 그 어딘가에 스며든 '아름다움'의 흔적이 비치는 드문 순간들. 그것은 소위 폐부를 찌르곤 한다는 명쾌한 발언일 수도, 비가 그쳐갈 즈음 나뭇잎에 튕겨 오른 물방울 같은 ‘명랑’일 수도 있다. 신기하게도, 바라만 봐도 눈물이 복받칠 것 같은 문자들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이 새벽 두 시에 가까워지고 있고, 마감 시간은 이미 넘겨버린 탓에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각설하고, 기억에 남는 몇 개의 말(이 담긴 책)을 담는다.

<리스본行 야간열차>는 근래 읽은 시집 중 가장 좋았다. 물론 나는 시집을 잘 읽지 않는다. 담당 분야가 바뀌고 나서도 별로 변한 것은 없다. +고양이도 좋아하지만, 기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말하라, 기억이여>는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도입부를 지녔다. 물론 나는 이런 장황하고 탐미적인 문체에 굴복하는 편이며, 그래서 <토지>도 좋아하지만, <토지>를 끝까지 읽지는 않았다. <대성당>은 올해 읽은 책 중에 거의 최고였다. 하지만 막상 리뷰를 쓰자니 쓸 말이 없었고, 미뤄둔 상태다. 이 작품집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는 것이 과연 필요한 일이려나 싶었기 때문이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도 좋게 읽었다. 그런데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심지어는 그의 글 솜씨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라고 느끼기까지 했다. (오만� 寗朗纛�용서하시라) 스냅 사진의 참맛을 알려면 아직 몇 십년이 더 필요한 것일까?

 

 

 




<하늘의 뿌리>와 <새벽의 약속>은 근래 가장 기대하는 책이지만, 아직 각각 네 페이지만 읽었을 뿐이다. <자살의 이해>는 적어도 <한낮의 우울>보다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서 반사회적인 경향을 발견하고 있거나, 용기가 필요한 분들에게 권한다. <잠자는 거리, 가라앉은 지층>은 감수성 풍부했던 군인 시절부터 눈여겨보던 시집이지만, 조금 실망했다. 기대는 컸는데, 이렇게 올곧은 작풍일 줄은 몰랐다. <월광 게임>은 그나마 소득이었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연구회의 이야기가 아직 두 편 더 남았다니,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인지도 모르겠다. <회복하는 인간>은 최고는 아니되 감동적 책읽기가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지만, 나는 이미 그의 팬이다. 어찌할 것인가.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일 뿐. 어쨌거나 즐! 겁게 읽었거나, 즐겁게 읽기 시작했거나, 즐겁게 읽고 있는 책들. 신년이고 해서 10권. 새해에는 좀 더 성실하길, 새해니까 멋대로 목표 삼아 본다.








 







"행복은 과정이다."

2007년에서 2008년으로 달력의 숫자가 바뀌었는데도 별반 느낌이 없다. 주변을 둘러봐도 비슷하다. 다가오는 새해를 반기고 새로운 희망을 품고 이야기하기에는 우리들 사는 게 너무 바쁘다. 여유가 없다. 아둥바둥 열심히는 살지만 가끔씩은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행복의 의미를 다루고 있는 책들이 평소와는 다르게 의미 있게 읽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은 진부하거나 혹은 사치스러운 단어다. 늘 노력은 하지만 잡을 수는 없는 존재. 손에 쥐고 있지만 조금만 잘못해도 깨지기 쉬운 유리병과 같다. 그래서일까 행복은 언젠가는 가져야겠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는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들이 지금 행복한가 아닌가만 생각해서는 항상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대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꿈꾸는 합격, 취업, 집장만이 이루어진다면 당연히 날듯이 행복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때까지 불만족하고 불행하게 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때도 행복해야겠지만 오늘도 분명 행복해야 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모레는 내일보다 더 행복해야 한다. 행복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10대의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들 한다. 어른이 되기 전에 겪는 신체적, 정신적 홍역..하지만 그런 시기가 살면서 꼭 한 번으로 끝나는 건 아닌 것 같다. 어느 덧 서른이라는 나이가 훌쩍 다가와 있는데도, 아직도 갖가지 고민들과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때때로, 성장통을 겪게 될 때에 나보다 먼저 이 시기를 살아낸 이들에게서 조언을 구하곤 하는데,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일일뿐이라고,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준 이 글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강금실- 여성 최초 법무부 장관으로 우리에게 유명한, 글 좀 쓴다는 그녀의 책을 들추면서 나는 단정짓듯 대부분 유명인의 자서전에 등장하는 잘난척(?) 또는 대단한 길로 가는 멘토링을 기대했나 보다.

뜻밖에도 인간적인 면모를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는 글들은 대단한 그녀의 타이틀에 대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참 솔직담백하고 친근했다.

종교든, 영화나 무용이든 여러 방면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을 담은 글들, 혹은 소신있는 생각들을 비추는 글들이나, 그녀 주변의 소소한 일상과 가치관에 대한 고민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은 대단한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어찌 생각해보면 살아가는데 기본적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인생의 의미나 가치 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니, 가르침을 받은 것 또한 확실하다.
 
지나고 나면 또 소멸되어 버릴 것들에 대한 고민은 이제 날리라고 말하는,..여전사의 면모보다는 보라색 스카프의 감성이 떠오르는 그녀의 조곤조곤한 얘기를 들어보시길.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본문 중에서)..

내 청춘의 흔들림을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음과 동시에, 나도 지긋한 나이가 되면,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들을 젊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는..나이들어감이 나에게 안겨줄 마음의 충만함을 살짝 기대해 본다.

표지를 보시라..활짝 웃고 있는 아빠, 미소를 머금은 두 아들..모두 힘겨운 듯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향한 엄마에게 엎혀 있다. 엄마의 소중함은 잊은 채, 매일 밥주고 청소해 주는 사람인냥 부려먹기만 하던. 세 부자에게 'You are Pigs'라는 간단한 메모 한 장을 남긴 채 떠나버린 엄마..그 뒤에 세 부자의 일상은 알 만하다. 
 
문장의 반복에서 오는 리듬감과, 곳곳에서 등장하는 귀여운 돼지그림, 남녀 역할에는 구분이 없다는 교훈 등등 재미있고 좋은 책인것만은 확실하나. 그 점은 간과하더라도 또 하나 떠오르는 건 어머니의 얼굴.. 부끄러움과 죄송함을 느낄 이들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리라.
 
이 책 속의 세 부자와 다름없이 매일 엄마 뭐해줘 뭐해줘 외쳐대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엄마 죄송해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나에게 이 책은 요리책이었을까?

그제와 어제와 겹치지 않는 점심 메뉴를 궁리한다. 퇴근 후에 텅 비어 있는 밥통을 보고 백미고압으로 설정하면 15분 만에 밥을 지을 수 있다는 용기를 얻는다. 아침 점심은 부실의 극치를 달리다가도 저녁이면 이를 보상받겠다는 심리인지 폭식에 빠지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탄식이다. ‘선두가 필요해!’
* 선두란, 만화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먹는 알약 형태의 간단한 식품.

시장기와 따뜻한 음식, 그리고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시간 앞에 행복을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의 음식행복지수는 얼마일까. 먹는다는 것이 행복이라기보다는 의무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탄식에 빠져 있다 용기를 주는 책을 만났다.

신선한 제철재료를 준비하고, 잘 정리된 레시피를 따라 음식을 완성한다. 그리고 맛있게 먹으려면 이 책은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책의 베이스는 즉석식품이다. 하지만 이점이 내게는 더할나위 없는 강점이었다. 요리, 음식하면 떠오르는 준비된 재료, 30분 이상 소요되는 조리시간 같은 부담스러운 요소를 털어버리고 싶었으니까. 즉석식품 하면 떠오르는 차가움, 정성 결여 같은 편견을 사하여 주었으며 함께 음식을 먹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먹는다는 것이 여전히 행복한 일임을 다시금 긍정하게 해준, 그래서 몹시 고마운 책. 




"I don't have time to go round."

문득 생각해보니 이맘 때면 늘 듣던 이야기가 영 뜸하다. "XX씨, 올해 계획은 뭐예요?" 하지만 나는 과거 어딘가에 묶어 둔 매듭도 풀지 못한 채였고 닥쳐오는 시간을 외면하느라 급했다. 무엇이고 밀면 밀려나오는 복숭아뼈 각질이나 마찬가지라는 건데.

물 밑에 내 몸을 적응시키기 위해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거나, 죽어가는 뇌세포를 살리기 위해 물구나무서기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to do thing' 리스트에 더 이상 적지 않기로 한다. 해 내면 기쁨, 못 해도 그만인 것은 그저 기억만 해 두기로 한다. 그보다는 내 몸과 마음을 감싸고 놓아주지 않을 공기와도 같은 무언가가 필요하니까.

'곁가지 쳐내기', 'SImplifying'이라고 하던가.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올해 소원이자 계획이다. 관계, 계발, 문제, 숙고, 과제가 거듭되었으며 나는 점점 희석되어 틀이 나인지, 내가 틀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I'm still mad as hell, and I don't have time to go round and round and round. - Dixie Chicks 'Shut up and sing' 중

딕시칙스 언니들이 기꺼이 외친 것처럼 '돌아버릴 것 같은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이제 이래저래 허비할 시간이 없으니까', 직격타가 필요하다. 남은 시간은 길지만 또는 짧고, 사람은 약하지만 또는 강하지 말입니다.

1월 초순까지 격하지만 아름다운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애초 '아, 이들에 비하자면 나는...' 해보자는 불순한 의도에서였지만, 뼛 속부터 북러버인지라 대뜸 문장에 감탄하고 작가에 반하고...이러고 있다.

에밀 졸라, 엔도 슈사쿠, 산도르 마라이. 오래 된 돌멩이처럼 단단하고 익숙한 이름들. 구질구질하고 견딜 가치 없는 오늘의 사건사고 하나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라 비엥 로즈, 그럼에도 인생은 아름다워'로 만드는 이들이다. 욕을 퍼붓고, 불을 지르고, 죽이고 죽고 싶어하면서도 살아가는 <테레즈 라깽>에서, 혹은 도처에서 신을 찾다가 파문당하는 <깊은 강>의 신부 견습생에서, 형제같은 친구에게 아내를 빼앗긴 <열정>의 장군에서, 이생에서 즐거움을 느낄 의무 또는 이쑤시개같은 희망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2008년은 'Simplify everything'.





 

 






"간절하고도 무모한 희망에 대하여"

난독증에 시달렸다, 오래. 내 인생 최고의 단편들이 실려있는 <대성당>을 다시 읽었을 때조차 심드렁했고, 현미경처럼 지독한 디테일로 독자를 몰아가는 이언 매큐언의 작품들을 대했을 때도 큰 감흥을 받지 못했다. (물론 <대성당>과 <암스테르담>, <토요일>은 대단히 멋진 책들이다.) 책들이 예전만 못한 것인지 내 상태가 별로인 것인지 그후로 뒤적인 책들도 다 그냥저냥... 그러다 오래 미뤄두었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집어들었다. '---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찬사가 오히려 책에서 나를 밀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이 그랬다. 머리맡에 쌓아두고 오래 방치되어 있던 상태. 기대감 없이 읽기 시작했다. 조금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다음 책으로 넘어가야지.... 570여페이지가 넘는 장편 아닌가.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바로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내렸고, 심지어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사실 굉장히 보편/통속적이고 예상하기 쉬운 이야기이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아프가니스탄의 두 여자가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뎌내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에게 구원이 되었는지에 대한... 마리암과 라일라-두 여자의 성장사와 첫사랑, 남편의 학대와 지독한 결혼생활, 하루하루 격변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정세가 간명한 필치로 지루할 틈 없이 그려진다.

매일매일 폭탄이 쏟아지고 여자라는 이유로 삶의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그 불모의 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희망의 꽃이 피어오를 수 있다는 '뻔한' 이야기에 감명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책에 진정한 고통이 배어있으며, 또한 슬프도록 간절하면서도 무모한 희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어쩌면 '부서지고, 쳐다봐야 아름다울 것도 없지만, 아직도 저렇게 서있는' 벽 같은 존재가 아닐까. 모든 사람은 '자식'으로 태어나, 누군가의 벗이자 친구, 연인, 보호자로 죽는다. 바로 거기에 삶의 모든 의미가 존재한다. 지나치게 영리하게 씌여진 감이 있지만,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가 미국에서 최고의 책으로 꼽혔다는 사실이 책의 외피에 어떤 혐의를 덧씌우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누군가에게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 두 여자, 아니 두 어머니의 이름을 정말 오래도록 잊지 못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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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초 2008-01-18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책이 많네요.^ㅁ^

2008-01-18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까마귀소년 2008-01-1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다렸어요~~

legows 2008-01-19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맹 가리 신간은 엄청나게 구미가 당깁니다.

dada 2008-01-20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성당은 두 분이나 추천했네요. 저도 이번 카버 신간은 김연수 작가의 호흡 때문일까, 카버가 꼽은 최고의 단편이 있어서 그런 걸까, 간만에 좋은 책 후회없이 읽고 감사한 마음까지 든 책입니다.

digitalwave 2008-01-21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2008년 신년 내맘대로 책읽기라기보다는 2007년 마지막 내맘대로 책읽기 같은 느낌이 납니다. 뭔가 신나고 흥분되고 두근거리는게 아니라, 버석버석하고 자기반성적이거나 한듯한... 모두들 혼돈의 오춘기쯤을 한참 지나고 있는듯한 말이죠. 읽는데 어질어질하네요. 다들 화이팅하시고 으쌰으쌰하세요! ^^ 그리고 새 편집장님도 빨리 첫 글 올리시기를~~~~~

돌돌 2008-01-25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맹가리의 새책에 앞서 새벽의 약속부터 읽기 시작했습니다. 자서전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급 호감 반전입니다. 이 시니컬하고 유쾌한 어조. 기대됩니다. 좋은 책들 많아서 좋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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