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토그라피라는 운동과 시간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발명품이 소리와 색채를 얻고 자본과 결합하여 리바이어든 같은 거대산업이 되기까지, 노동과 기술의 결합이면서 동시에 창작자의 생산품이 무한복제의 수익상품, 심지어 신식민지화의 대표상품이 되기까지, 렌즈를 통과한 빛이 만들어내는 현상이 삶과 세상을 읽는 철학이 되고 예술이 되고 가장 강력하게 대중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매체가 되기까지, 그 다채로운 영화의 정체성을 해부하고 복잡한 진화의 과정을 밝히고 있는 책이다.

 

영화의 역사를 이렇게 넓고 깊게, 이처럼 다층적인 시각으로 서술한 책은 한국은 물론이고 저자 자신이 공부한, 영화를 발명했던 프랑스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김성태의 <영화의 역사>는 감히 기념비적인 역작이라 할 만하다. 마침내 우리는 영화를 이해하고 사유하기 위해 서가 한쪽에 꽂아두고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영화 관련 참고서를 한 권 얻게 되었다.

  

이창동(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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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이 책은 영화의 과거를 다룹니다. 그런데 <영화의 역사>를 읽으면서 마치 어떤 사람의 일대기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다른 역사서에서 잘 발견하지 못하는 감정인데, 이유가 뭘까요?

 

사실 그런 의도는 오히려 제 첫 이론서에서 비췄었는데, 하나의 태어난 존재로서 생각해본다면, 영화 역시 사람의 일생과 무척 닮아있습니다. 맨 처음 태어났을 때는 본능조차 희미한 상태인 아기와도 같고, 점차 주변을 익혀가고 주변과 관계 맺으면서 자신의 역할이나 의미를 알아나가겠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분명하게 자신을 주장하고 내세우는 사춘기, 청춘도 있고, 그러다 만만치 않은 세상 앞에 자신을 웅크려야 하는 시기도 찾아오고정말로 특이하게도 백 년 정도 되어가자, 맨 처음 자신을 규정했던 정체성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그즈음에 사람도 자신이 지켜왔던 존재성을 잃어가듯이 말 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것이 존재의 삶의 과정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영화의 역사도 사실 그런 관점에서 쫓아가면 아주 잘 이해가 되니까요.

 

 

Q2.

<영화의 역사>영화의 시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개별 영화들보다 영화 자체의 개념에 파고든 계기가 있을까요?

 

A.

영화 작품 한편 한편에 몰두하다 보면 결국엔 이 영화란 것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인간의 삶,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화를 창출하고 존속시키는 방법으로서의 영화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언제나 어느 감독, 어느 작품에 대한 찬미만이 가능해질 뿐, 우리와 긴밀하게 대화하는 영화는 점점 멀어지게 되지요. 작품들도 아름답지만, 정작 아름다운 것은 영화라는 방식이 우리를 새로운 생각들로 이끌고, 새로운 의식들을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술에 있어서 우리가 오늘날 잃어버린 것은 바로 이 ‘, 혹은 방법에 대한 사유입니다.

 

Q3.

프랑스 유학 생활을 마친 뒤, 20년 이상 써온 글이 묶여 이렇게 책으로 나오게 되었어요. 유학이 흔치 않던 시절, 드문 동양인으로서 유럽으로 건너가 영화를 공부해 박사학위를 따셨습니다. 어떤 중요한 순간들이 있었나요?

 

영화를 공부한 것은 햇수로 삼십삼 년이 되었고, 이 역사를 생각하고 시작한 것은 25년이 되었네요. 박사과정 후반기에 딱히 역사책을 쓰겠다고 여기지는 않았으나 역사에 대해 차곡차곡 글을 쓰기 시작했지요. 나중에 사람들에게 제가 프랑스에서 공부하며 발견하고 느끼고 경이로웠던 점들을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 정도였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도 말했듯이 저는 그러한 방식으로 집필을 시작합니다. 어느 책을 내야지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지 하고 써나갑니다. 지금도 제게는 엄청나게 많은 글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엮어서 이제 내놓을 생각이지만, 그것도 생존이라는 삶의 형편이 보태줘야 가능하니까 장담은 못 하겠군요. 하지만 어떻든 써놓은 것들은 언젠가는 필요하면 빛을 보겠지요. 필요치 않으면 그대로 사라질 거고요. 저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써놓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것만이 제 삶의 한 의무지요. 득을 보자고 시작한 것이 아니니까요. 제가 즐거워서 시작한 거니까. 그래서 제안받은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무언가를 써온 것입니다. 암튼, 세상이 필요하다면 가져가겠지요. 저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씁니다.

 

Q4.

프랑스는 영화의 본고장으로 유명합니다. 프랑스 현지에서 공부하는 과정은 관점이나 방식 면에서 우리와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프랑스에서 배워 온 것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이것만큼은 꼭 알았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이 있었을 것 같아요. 박사님 수업을 듣지 못한,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좀 더 깊게 영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을 위한 조언이 있을까요?

 

A.

무조건 영화들을 보아야 합니다. 영화는 글로 쓰인 게 아니라 움직이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듯 시간과 움직임을 겪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요즈음에는 정말이지 너무나 보지 않습니다. 물론, 극장, 모니터, TV들을 통해서 엄청 많이들 본다고 여기겠지만 모두 현재의 것들이지요. 게다가, 자신의 기호에 따라서만 보고 있고요. 재미를 찾아서 말입니다. 아닙니다. 영화를 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기호는 일단 덮어두어야 하죠. 백지에서 모든 것을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관객임을 파기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한 번도 공부하려고 영화를 본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관객이지요. 이론이나 작가로서가 아니라 순전한 관객으로 영화들을 즐겨보라는 말이고, 시간의 순서대로 역사를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의 부록에 참고할만한 목록을 실어두기는 했습니다만그러다 보면 이전보다 훨씬 더 나은 관점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책을 보고, 이론서를 통해서 영화에 대한 이해를 취득하는 일은 가장 위험한 일에 속합니다. 마니아가 되고, 시네필이 되는 일이 영화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첫 번째 단계겠죠. 실제로 이론과 창작은 늘 거기서 시작합니다.

 

Q5.

<영화의 역사>는 한국 저자로서는 드문 세계영화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뜻깊게 느껴졌습니다.

 

A.

문제는 서양인이고 한국인이고를 떠나서 이미 수십 년 전에 정착한 사고방식, 역사를 판단하고 보는 관점이 이미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프랑스에서 조르쥬 사둘의 영화사를 보면서 의아했던 것이 그것입니다. 1949년의 의식,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5,60년대의 관점이 지금까지 철저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지요. 우리는 그때와 다른 이들입니다. 그때의 소중함을 받아들이고 사색해야 하지만 그와 다른 토양 위에 서 있으므로 새로운 관점으로 전체를 다시 되돌아봐야겠지요. 그것이 역사를 다시 쓰게 했던 것입니다. 물론 한국인이라는 한정이 이제까지 세계영화사를 쓴다는 지점으로 이끌지 않고 있는 환경도 의아했습니다. 기존의 책들은 역사적 고찰을 다루기엔 좀 부족한 면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저는 한국 혹은 아시아의 누구라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사색한다면 얼마든지 세상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고 여겼고, 부족하지만 이 책은 그 시도입니다. 이 책 자체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그런 새로운 작업으로 이끌려는 목적입니다. 우리가 세계를 재해석 할 수 있다는 점. 그래서 저는 가능하다면 프랑스어로도 이 책을 내고 싶습니다. 대단하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시각에 대한 논의는 줄 수 있다고 여기니까요.

 

 

Q6. 

<영화의 역사>19세기 영화의 출현부터 1927년 유성영화의 등장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무성영화 시대를 다루기보단 영화의 본질, 그 의미를 탐색하고 부각하는 책이 바로 이 책 <영화의 역사>라면, 시간적으로 여전히 풀어낼 역사가 많이 남은 셈이에요. 그렇게 시대를 구분하신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나올 <영화의 역사2>에 대해서 짧게 소개해 주세요.

 

오늘날 우리는 사운드가 있는 상태의 영화들을 영화라고 부르지요. 그 이전의 무성인 상태를 특별히 무성영화라 부르고요. 말인즉슨, 이제 우리에게 영화는 사운드가 당연하게 간섭한 상태를 지칭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1927년 이후의 첫 번째 중요한 줄기는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영화라는 개념을 형성한 시기입니다. 대략 2차 세계대전 전까지인데, 이 시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의 할리우드 클래식과 일반적인 클래식이 성립되지요


사실, 할리우드 클래식은 20년대를 거치면서 개념상 이미 형성되었지만, 그 특색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데는 사운드가 필요했습니다. 당시에는 누구도 사운드의 필요성 자체를 못 느꼈죠. 우연하게 나타나고 나서, 영화들에 입혀지면서 사운드의 역할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단지 들을 거리가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이전까지 이해하고 있던 서술 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끌어냈습니다. 이전까지 행동이 가장 핵심적인 서술이고 이미지의 구성이 의미의 집약이었다면, 행동은 말 뒤로 물러나 과도한 책임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서술의 방식이 달라질 것은 따라서 당연합니다. 게다가 영화 전체에 있어서 드라마가 서술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도 이 변화의 한 축입니다. 그전까지 드라마는 가급적 비사실적일 수밖에 없었거든요. 인간관계의 과정을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 없었으니 그것이 서술의 부분에서 중심부일 수는 없었지요


아무튼, 이전과 비교하면 단순히 소리가 없다, 있다가 아닌, 그 때문에 서술의 맥락, 구조, 대상이 바뀝니다. 결국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의 얼개가 되었고요. 이 서술형식이 정착되고, 그 즐거움이 극대화되는 과정이 즉, 1950년대까지의 영화계입니다. 그런데, 1940년대가 여기 아주 특이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화를 하나의 문화이면서, 예술, 나아가 중요한 의식의 표현으로 고찰해가는 동시에, 그 결과로 빚어진 앞서 말한 즐거움의 극대화가 지닌 부정적인 측면들이 새로운 세대에 의해서 반추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우리가 과거의 영화사에서 현대영화라 이름 지은 부분, , 그것이 두 번째 줄기가 됩니다. 하지만 현대영화라는 이 개념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침소봉대된 것들을 덜어내는 작업이 필수지요. 게다가 처음으로 영화를 개념적으로 고찰한 사건이기에, 예술에서 하나의 개념이 탄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와 영향력을 지녔는지 파악해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현대영화는 오늘날 사람들이 즐겨 익숙하게 보는 형식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영화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바로 오늘날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화의 여러 의미들을 가능케 한 아주 중요한 출현입니다. 말하자면 현대영화라는 개념은 결국에는 클래식에 영향을 주어서, 그것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는데, 정작 이 개념을 추인한 누벨바그보다도 뉴저먼 시네마,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그 혜택을 보았습니다. 물론, 저는 이 명칭도 지울 생각이지만요. 당시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영미권의 평론가들이 경박하게 틀을 짜려 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영화에 대한 인식에서는 독일이나 미국에서 현대영화의 영향력을 받았지만, 실제 그들의 영화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화라는 덩어리로서 현대영화는 단지 기법이 아니거든요. 이후로 6, 70년대는 정말이지 영화에서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가만히 역사적 맥락을 보면, 상업영화들 안에서 그만큼 진지한 문제들이 재미있게 다뤄졌던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형제작물들에서조차 주제는 분명했고, 항상 인간이 다뤄졌습니다. 그런 면모가 80년대 후반부로 가면서 서서히 사그라들 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갑자기 영화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완벽하게 자신이 고민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조건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70년대 후반이 그 시작이었지요. 77, 스타워즈, 78, 수퍼맨, 이 두 영화가 모든 것을 바꾸어버렸습니다. CG의 시작인데, 사실상 더 이상 특수효과가 아니라 영화의 일반적 공정이 됩니다. 그렇게 디지털이 이미 침투한 것입니다


디지털, 그 투입의 가장 큰 특징은 영화가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질료와 결별했다는 점입니다. 영화의 질료는 물질적인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디지털은 물질을 벗어나는 지점이지요. 이후는 어떤가요? 물질의 세상에서 이야기가 건져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 속에서 건져지고, , 추상에서 시작하고, 추상적으로(디지털) 완성됩니다. 이 때문에, 영화들은 더 흥미진진 해졌지만, 정체로부터 더 멀어지게 되지요. 이것이 세 번째 줄기입니다. 이 줄기에 대한 마감, 지금 생각은 1989년으로 마치려 합니다. 그 해가 진짜 특별해서가 아니라 상징적인데, 그때 까이예 뒤 시네마의 특집호 제목 때문입니다. 영화의 죽음과 관련된 주제였지요. 진짜 영화가 죽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한 세기의 의식이 마감되는 지점이기는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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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영화의 역사에 대해 물었을 때, 연대별 영화의 제목이나 배우의 이름만 나열한다면 당신은 아직 반만 알고 있는 것이다. 최초의 움직이는 이미지가 소리와 색채를 얻고 서사와 의미를 가지며 신흥 예술 작품이 되어가는 지난 2세기 동안, 영화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양한 의미로 정의하며 역사를 기록해 왔다. 영화의 역사를 다시 이렇게 나열해보면 어떨까?

 

영화는 에디슨과 뤼미에르 형제의 발명품이었고 들뢰즈와 베르그송의 철학적 사유였으며, 대중의 호기심이었고 산업혁명 시대의 신종 사업 아이템이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새로운 시장과 산업이었고 신대륙을 개척해 할리우드를 탄생시켰으며, 단순한 출연자를 연기자나 스타로 만드는가 하면, 제작 노동자이던 감독을 예술가와 창작자로 변모시키고, 독립 영화사들 간 경쟁의 불씨가 되었으며, 다양한 일자리와 체제를 창출하고 세계 굴지의 거대한 기업들을 일으켰다. 그 자체로 자본이고 종교였으며, 여러 갈래의 사조가 되었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산업과 예술의 영역 안에서 학문이 되었다.

이처럼 영화는 모든 시대의 다채로운 의미였다. 이 복잡다단한 과정 속에 대체 얼마나 놀라운 뒷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그러므로 이 책은 흔히 보는 연대별 영화작품 분석이나 미학으로서의 영화 이론은 다루지 않는다. 그보다는, 기계 장치로서의 영화와 창작물로서의 영화라는 두 가지 다른 개념을 의미론적으로 명확하게 구분 짓고, 시각 오락물에 지나지 않던 상업적 도구가 산업혁명과 세계대전을 거치며 어떻게 소리와 이야기를 입고서 시장과 돈, 대중과 문화를 움직이고 사조를 형성하며 영화의 시대를 열었는지를 세심하게 톺아본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와서는 20년 간 대학 강단에서 영화를 가르친 영화광이자 영화학자이다. 국내 출판 현실상 번역서 이외에 이렇다 할 영화 역사서나 참고서가 없음을 안타까워하다가, 직접 한국인의 시각과 정서로 본 세계 영화사를 쉽고 재미있게 새로 써 내려갔다. 덕분에 이 책의 문장은 저자의 육성을 그대로 품게 되었다. 글에 녹아있는 특유의 화법과 목소리는 그의 제자였다면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생생하다. 평생을 배우고 가르쳐 온 긴긴 시간만큼이나 영화를 대하는 저자 고유의 감성과 남다른 애정을 책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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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나는 비 오는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한 한국인 청년을 우연히 만났고, 영화를 학문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그의 남다른 열정과 포부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 열정과 꿈이 드디어 25년이라는 시간의 각고를 거쳐 <영화의 역사>라는 역작으로 탄생했음을 확인하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다.

이 책은 단순히 영화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 아니다. 시네마토그라피라는 운동과 시간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발명품이 소리와 색채를 얻고 자본과 결합하여 리바이어든 같은 거대산업이 되기까지, 노동과 기술의 결합이면서 동시에 창작자의 생산품이 무한복제의 수익상품, 심지어 신식민지화의 대표상품이 되기까지, 렌즈를 통과한 빛이 만들어내는 현상이 삶과 세상을 읽는 철학이 되고 예술이 되고 가장 강력하게 대중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매체가 되기까지, 그 다채로운 영화의 정체성을 해부하고 복잡한 진화의 과정을 밝히고 있는 책이다.

 

영화의 역사를 이렇게 넓고 깊게, 이처럼 다층적인 시각으로 서술한 책은 한국은 물론이고 저자 자신이 공부한, 영화를 발명했던 프랑스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김성태의 <영화의 역사>는 감히 기념비적인 역작이라 할 만하다. 마침내 우리는 영화를 이해하고 사유하기 위해 서가 한쪽에 꽂아두고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영화 관련 참고서를 한 권 얻게 되었다.

 

 

이창동(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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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갇힌 동성애자는 분홍 삼각형 표식이 주어졌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에게 미국으로 갈 수도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동성애자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왜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일까요?


그리스 로마, 고대 성서시대와 기독교 시대, 중세와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입장과 관점에서 동성애 혐오의 양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근대에 들어, 과학과 의학, 이데올로기와 관료체제, 그리고 부르주아 시민사회가 형태를 달리하며 교묘하게 권리를 제한하고 소외시키며 혐오를 조장하는 매커니즘이 다른 혐오들, 인종차별, 성차별, 외국인혐오 등과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호모포비>는 동성애 혐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 동시에, 인간의 행위를 집요하게 부정하고 배격하는 또 다른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 볼 수 있습니다. 


"혐오는 혐오를 낳고 더욱이 여성과 아이, 약자로 흘러가는 매커니즘을 가진다. 특정 무언가를 옹호하는 글이 아니다. 혐오는 우리 모두에게 있기에 누구나 마주해야 하는 진실임을 잊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독을 권한다." 서점인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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