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불란서책방 (북페스트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불란서책방의 책을 소개합니다.</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04 Apr 2026 06:57:49 +0900</lastBuildDate><image><title>북페스트</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752871434027155.jpg</url><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북페스트</description></image><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영화/연극</category><title>뱀파이어는 영화 자체, 관객은 흡혈의 대상</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93113</link><pubDate>Thu, 02 Apr 2026 21: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9311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82934297&TPaperId=171931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070/78/coveroff/k98293429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김성태 저자의 『뱀파이어, 이미지에 관한 생각』(불란서책방, 2024)은 뱀파이어와 영화가 '이중적 질료성'이라는 공통 속성을 지닌다는 독창적 시각으로, 공포와 매혹의 존재인 뱀파이어를 통해 영화 이미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합니다.&nbsp;<br>"이중적 질료성"은 김성태의 책에서 핵심 개념입니다.&nbsp;<br>쉽게 말하면, 뱀파이어와 영화는 둘 다 "실체가 없지만, 특정 조건을 만나면 잠깐 존재를 얻는" 존재라는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br>​뱀파이어는 낮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밤이 되면 육체를 입고 나타납니다. 영화 속 인물은 현실에 없는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스크린에 투영되는 순간 관객은 그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느낍니다.&nbsp;<br>둘 다 "허구 속 존재"이면서, 특정 조건(밤/스크린)을 만나야만 비로소 질료, 즉 몸·실체를 얻는다는 점이 같습니다. 이게 바로 이중적 질료성의 핵심입니다.<br>​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관객과 뱀파이어의 관계를 "흡혈"에 빗댑니다. 뱀파이어가 인간을 자신의 최면 속으로 끌어들이듯, 영화도 관객을 스크린 앞에 붙들고 현실감을 이식합니다.&nbsp;<br>그래서 "뱀파이어는 영화 자체이고, 관객은 흡혈의 대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죠.<br>이중적 질료성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개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꽤 정교한 '존재론적' '주장'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br>철학에서 질료(質料)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형상을 받아들이는 재료"를 뜻합니다. 조각상으로 치면 대리석이 질료이고, 그 돌에 새겨진 형태가 형상(形相)입니다. 그런데 뱀파이어와 영화는 질료가 두 겹으로 작동합니다.&nbsp;<br>평소에는 질료가 없는 순수한 관념(이야기, 이미지)으로 존재하다가, 특수한 조건이 주어지면 일시적으로 질료를 얻어 현실에 침투합니다. 이 "이중성"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핵심입니다.<br>흥미로운 지점은 이 침투가 완전한 현실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뱀파이어는 거울에 비치지 않고, 햇빛을 받으면 사라집니다. 영화 속 인물은 관객이 극장을 나서는 순간 다시 스크린 안으로 돌아갑니다. 둘 다 현실을 넘나들되, 결코 완전히 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nbsp;<br>이 "경계에 머무는 존재"라는 특성이 두 존재를 더욱 묶어 줍니다.<br>또한 저자는 "매혹"이라는 공통점도 강조합니다. 뱀파이어는 공포스럽지만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관객은 스크린 위의 이미지가 허구임을 알면서도 울고, 웃고, 공포에 떱니다. 이 "알면서도 속는" 자발적 취약성이 흡혈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겹친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입니다.<br>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화론입니다. 뱀파이어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영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우리가 왜 어두운 극장에 앉아 낯선 이야기에 감정을 내어주는지, 왜 허구인 줄 알면서도 스크린 앞에서 무력해지는지 — 그 불가사의한 경험의 구조를 "뱀파이어성"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 것입니다.<br>달리 말하면,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은 이미 한 번씩 뱀파이어에게 목을 내어준 셈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도 기꺼이 극장에 앉는다는 사실이, 그 흡혈이 결코 불쾌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합니다.<br><br>이 책은 크게 두 개의 대부(大部)로 나뉘며, 그 앞에 짧은 서문 격의 글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전체 312쪽의 분량 안에서, 저자는 뱀파이어라는 존재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하는 1부에서 출발하여 뱀파이어-영화라는 등식을 다양한 작품에 적용하는 2부로 넘어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책은 "건너기 전의 다리 이 편에서"라는 제목의 서두로 시작합니다. 제목 자체가 의미심장한데, 저자가 앞으로 펼쳐갈 논의 전체를 "경계를 건너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뱀파이어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듯, 이 책 자체도 공포 문화사와 영화 철학 사이의 경계 위에 서 있음을 처음부터 예고합니다.​1부: 드라쿨레아에서 노스페라투로1부는 뱀파이어라는 존재가 어디서 왔는가를 묻는 역사적·문화적 탐구입니다. 저자는 19세기와 20세기를 각각 하나의 장으로 나눠 다룹니다.첫 번째 장에서는 뱀파이어 이미지의 기원을 중세 유럽의 공포 문화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합니다. 악과 마법, 마녀, 흑사병, 십자군 전쟁 등 중세인들의 실존적 공포가 어떻게 뱀파이어라는 형상 안에 응결되었는지를 설명하며, 특히 블라드 3세(Vlad the Dragon), 즉 역사 속 실존 인물 드라쿨 3세가 뱀파이어 신화의 토대에 어떤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분석합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신의 침묵 앞에서 생겨난 공백, 페스트가 만들어낸 죽음에 대한 공포가 뱀파이어라는 초자연적 존재를 필요로 했다는 논지는 단순한 괴물 기원론이 아니라 일종의 문명 공포사에 가깝습니다.​두 번째 장은 이 공포의 형상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화의 탄생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다룹니다. 브램 스토커의 소설 속 드라큘라가 런던으로 '건너오는' 장면을 분기점으로 삼아, 뱀파이어가 근대 도시 문명 속으로 침투하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이어 무르나우의 무성영화 〈노스페라투〉(1922)와 〈파우스트〉를 경유하면서, 뱀파이어가 영화라는 매체를 만나 어떻게 새롭게 변형·재탄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최면 이미지의 힘"을 다루는 소절은 이중적 질료성 개념의 직접적인 서막으로, 카메라 앞에 선 이미지가 관객을 최면 상태로 이끄는 구조를 뱀파이어의 흡혈 행위와 겹쳐 읽습니다.​2부: 어지러진 사건의 지평선2부는 더욱 자유롭고 넓게 펼쳐집니다.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는 물리학적 개념, 즉 블랙홀의 경계면으로부터 은유를 빌려, 저자는 뱀파이어-영화의 속성이 구현된 다양한 영화 작품들을 하나씩 불러냅니다. 각 소절은 사실상 개별 영화론에 가깝습니다.여기서 거론되는 작품들이 흥미롭습니다. 뱀파이어 영화가 아니라 안토니오니의 〈Blow-Up〉,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그리고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을 연상케 하는 노스트로모(우주선 이름)가 등장합니다. ​저자는 이 작품들에서 뱀파이어적인 것을 찾아냅니다. 〈Blow-Up〉에서는 스크린 속에 존재하지 않는 공(Ball), 즉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사물을 뱀파이어적 허구성의 사례로 읽고, 〈샤이닝〉의 오버룩 호텔에서는 과거가 현재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초시간적 공포를 분석합니다. "나포당함, 끌려감"이라는 소절 제목은 영화 관람의 경험 자체를 뱀파이어에게 붙들리는 감각으로 표현한 것으로, 앞서 다룬 이중적 질료성 개념이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통해 검증되는 부분입니다.​2부의 마지막은 프리츠 랑의 〈마부제 박사〉 시리즈와 영화 일반을 직접 등치시키는 논의로 마무리됩니다. 마부제는 변신과 최면, 타인에 대한 지배를 능력으로 삼는 악당인데, 저자는 그가 뱀파이어-영화의 속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캐릭터라고 봅니다. 영화 관객은 마부제의 피지배자이자, 스크린 앞의 흡혈 대상이라는 논지가 여기서 완성됩니다.​​정리하자면, 1부에서 뱀파이어가 어떤 문화적 필요에 의해 태어났는지를 밝힌 뒤, 2부에서는 그 뱀파이어성이 영화라는 장치 안에서 어떻게 반복·심화되는지를 개별 작품들을 통해 입증합니다. 단순히 뱀파이어가 많이 나오는 영화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영화 관람이라는 행위 자체를 흡혈의 구조로 해석하는 영화 존재론에 가까운 책입니다.​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070/78/cover150/k98293429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0707862</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사회</category><title>루이즈 미셸이 말하는 루이즈 미셸</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91857</link><pubDate>Thu, 02 Apr 2026 09: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9185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6372&TPaperId=1719185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off/k302136372_3.jpg" width="75" border="0"></a>&nbsp;<br/><br/>나는 18830년 브롱쿠르 성의 하녀 마리안느 미셸과 성주의 아들 로랑 드마히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성주 조부모 밑에서 자라 사랑받으며 계몽주의 교육을 받고 독학으로 교사가 되었습니다. 세간에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두 분은 서로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이였다.&nbsp;<br>나는 모든 종류의 글을 썼다. 시, 동화, 희곡, 소설 등. 1850년 빅토르 위고에게 내 첫 시를 보낸 이후 그가 죽기 전까지 편지를 주고 받았다. 내 편지의 서명은 그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등장 인물 앙졸라였다. 1851년 드디어 나는 파리에서 빅토르 위고를 만난다.<br>1852년 나는 교사가 되었다. 당시 나폴레옹 3세 제정에서는 교사들의 충성서약을 의무화했지만 나는 서약을 거부하고 내 스스로 학교를 세워서 당시엔 금지되었던 라 마르세이예즈를 아이들과 함께 불렀고 세속교육과 남녀 평등을 가르친다.<br>나의 목표는 아이들 사이에서 인간성과 정의의 원칙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1890년 런던에 망명하는 동안에도 국제자유학교를 세워 기능, 예술과 과학 과정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혁신적 교육을 펼쳤다.<br>1856년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나의 영혼의 동반자 테오필 페레를 만난다. 그는 파리 코뮌 탄압 이후 2만 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총살 당했다. 테오를 체포할 때, 그들은 나의 친구 병약한 마리를 그녀의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끌고 나갔다. 어머니에게 딸을 살리려면 아들의 이름을 대라고,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무의식 중에 몇 마디를 밷었다..그렇게 체포되었고 어머니는 몇 주후 완전히 실성하여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nbsp;<br>나는 사회 정의, 일자리 그리고 모두를 위한 교육을 위해 싸웠다. 장 조레스는 나를 세속의 성녀라 불렀다. 무엇보다 나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나는 여성이었고 여성으로 말해야만 했다.&nbsp;<br>1871년 파리 코뮌의 아이콘이 되었다. 나는 바리케이드에서 무기를 들고 싸웠고 부상자들과 여성과 아이들을 돌봤다.&nbsp; 파리 코뮌 실패 이후 정부는 나를 잡겠다는 명목으로 어머니를 베르샤유 감옥에 가두었다. 나는 내 생명같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자수했다. 어머니는 한사코 감옥에서 나가길 거부했지만 오랫동안 설득했고 어머니는 결국 내 말을 들어주었다.&nbsp;<br>파리 코뮌 군사법정은 한 마디로 나에게 전장이었다. 나는 마치 총을 쏘듯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다했고 그들 앞에서 당당했다. 나는 사형을 원했고, 겁장이들인 당신들이 나를 사형시키지 않으면 복수하겠다고 했다. 빅토르 위고는 내 모습을 보고 나를 위한 시를 남겼다. 남자보다 위대한.<br>결국 나는 사형 대신 누벨칼레도니 유배형이 선고되었다. 나는 그곳에서도 다른 유형수들과는 달리 원주민과 우정을 쌓고 그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웠고 또 책으로 엮었으며 반제국주의자로서 원주민 봉기를 지지했다. 당시 대부분의 유형수들은 원주민 봉기 탄압에 동조했었다.&nbsp;<br>​1870년 사면으로 파리로 돌아왔다. 수천 명의 인파가 역에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아나키스트로서 이후 수많은 강연에 참여한다.&nbsp;<br>1883년 엥발리드 실업자 시위에 이은 빵폭동 주도 혐의로 수감된다. 세 곳의 빵집을 약탈했다는 혐의다. 정부와 언론의 비열한 수작은 끝이 없었다.&nbsp; &nbsp;<br>폴 베를렌느는 이에 분개해서 나를 위한 시를 남겼다. 각 구절의 마지막은 '루이즈 미셸은 좋은 사람'이었다.<br>1886년 석방되었고 여전히 강연과 투쟁을 지속했다.<br>1880년 르 아브르에서 브르타뉴 지방의 한 남자로부터 권총 테러를 당해 머리에 총알 한 발이 박혔다. 나는 이걸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 빼내는 건 너무 위험했다. 나는 이걸 훈장처럼 여겼다. 물론 나머지 17년 동안 고통스러웠다. 나는 내게 총을 쏜 자를 용서했다. 그가 감옥에 가지 않게 하려고 백방으로 뛰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 이렇게 만든 사회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의 가족을 돌보기 위해 모금도 했다.<br>나는 페미니스트로서 결혼 제도에 반대한다. 성매매와 결혼은 본질상 다르지 않은 거래관계라고 파악했다. 성매매에 강하게 반대하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nbsp; 나는 사회 문제를 구조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경제적 불평등, 범죄, 빈곤을 개인의 잘못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았으며, 사회적 억압이 이러한 문제들의 근본 원인이라고 판단했다.<br>​1905년 알제리 강연을 다녀오고 폐렴 치료를 위해 마르세이유 요양중 생을 마감한다.&nbsp;<br>내 장례식엔 경찰만 1만명이 동원되었다. 운집한 군중은 2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나의 마지막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br>지금 내 이름이 붙은 파리 지하철 역이 있다. 단독으로 지하철 명으로 여성의 이름이 붙은 유일한 사례다. 그리고 전국에 수백개의 학교, 거리,문화센터, 공원, 광장에 내 이름이 붙어있다.&nbsp;<br>나의 삶은 고단했으나 나는 한번도 고단함을 느끼지 않았다. 나의 삶은 언제나 약자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상황들에서도 나는 언제나 희망을 보았다. 삶을 누렸다. 미래는 결국 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지금 해야할 것을 하는 것이다.<br> <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150/k302136372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970959</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사회</category><title>모두가 그 이름을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녀(연보 포함)루이즈 미셸</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71460</link><pubDate>Wed, 25 Mar 2026 01: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7146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6372&TPaperId=171714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off/k302136372_3.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루이즈 미셸 — "붉은 처녀"의 삶과 사상루이즈 미셸(Louise Michel, 1830~1905)은 19세기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교사, 혁명가로, 파리 코뮌(1871)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붉은 처녀(La Vierge Rouge)"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녀는 여성이 정치와 혁명의 주변부에 머물러야 했던 시대에, 최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운 인물이었다. 그녀의 삶은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헌신과 끝없는 저항의 연속이었다.<br>출생과 성장 — 사생아에서 교사로루이즈 미셸은 1830년 5월 29일, 프랑스 오트-마른(Haute-Marne) 주의 브롱코르(Vroncourt)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영주의 아들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지만, 영주 가문의 조부모 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즐겨 읽고 시를 쓰는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으며, 볼테르와 루소 같은 계몽사상가들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교사 자격을 취득한 그녀는 1856년 파리로 이주해 몽마르트르 지구에서 학교를 운영했다. 당시 공립학교 교사가 되려면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했는데, 미셸은 이를 거부하고 사립학교를 직접 세웠다. 그녀의 교실은 단순한 지식 전달의 공간이 아니라, 빈민과 노동자 자녀들에게 열려 있는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녀는 수업료를 받지 않거나 적게 받으며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쳤고, 이 시기에 이미 그녀의 사상적 지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br>파리 코뮌 — 혁명의 최전선에 서다루이즈 미셸의 이름이 역사에 깊이 새겨진 것은 1871년 파리 코뮌을 통해서였다.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파리 시민들은 임시 자치 정부인 코뮌을 수립했다. 코뮌은 불과 72일간(3월 18일~5월 28일) 지속된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자치 정권으로, 이후 수많은 혁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미셸은 이 투쟁에서 가장 열렬하고 용맹한 전사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몽마르트르 여성 경비대를 조직하고 직접 총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지켰다. 간호사로 부상자를 돌보는 한편, 직접 소총을 들고 전투에 참가했다. 코뮌의 이상, 즉 노동자의 자치, 교육의 무상화,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은 그녀의 신념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피의 주간(Semaine sanglante)"으로 불리는 코뮌의 마지막 진압 과정에서 수만 명이 학살되었고, 미셸은 체포를 피하지 않고 스스로 자수했다.<br>재판과 유배 — 꺾이지 않는 의지1871년 12월 재판에서 루이즈 미셸은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법정에서 "나는 사회의 적이다. 그러므로 나를 늑대와 함께 가두어라"라고 선언하며,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그녀는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오늘날 태평양의 섬나라)로 유배형을 선고받았다.그러나 유배지에서도 그녀의 삶은 멈추지 않았다. 미셸은 현지 원주민 카낙(Kanak) 족과 교류하며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배웠다. 1878년 카낙 족이 식민 지배에 저항해 봉기를 일으켰을 때, 그녀는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몇 안 되는 프랑스인 중 하나였다. 유배지에서도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고, 식물을 채집하고 시를 쓰며 지적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유배 생활은 그녀를 굴복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그녀의 사상을 더욱 깊고 넓게 만들었다.<br>귀환과 아나키즘 — 끝없는 투쟁1880년 사면령으로 파리에 돌아온 미셸은 더욱 급진적인 아나키즘 운동에 투신했다. 그녀는 표트르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같은 아나키스트 이론가들과 교류하며 무정부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1883년 파리에서 일어난 실업자 시위에서 빵집을 습격하는 군중을 이끈 혐의로 다시 투옥되었고, 이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망명 생활을 하며 강연과 저술 활동을 벌였다.그녀는 여성 해방 문제에도 적극적이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나 부르주아적 여성 해방론에는 거리를 두었지만, 계급 해방과 여성 해방이 불가분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가난한 여성, 노동하는 여성, 식민지 원주민 여성의 삶에 주목하며, 혁명은 모든 억압받는 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br>마지막 삶과 유산루이즈 미셸은 70대에도 강연을 다니며 노동자와 빈민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05년 1월 9일, 강연 여행 중 마르세유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파리로 운구된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몰려 애도를 표했다.&nbsp;루이즈 미셸은 억압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기억된다. 그녀는 여성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했으며, 교육·아나키즘·식민지 해방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를 하나의 삶으로 엮어낸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녀의 삶은 "진정한 혁명가는 이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br>루이즈 미셸 연보<br>1830년 5월 29일 오트-마른 지방 브롱쿠르 성에서 출생. 하녀였던 마리 안 미셸의 딸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성주의 아들 로랑 드마이로 추정. 아버지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유주의적 교육과 사랑을 받으며 성장. 빅토르 위고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br>1851년 쇼몽에서 교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고, 이후 센에마른 지방 라니로 이동.<br>1853년 오들롱쿠르에 자유 학교 개교. 제국에 대한 충성 서약 거부. 1855년 오트-마른 지방 미예르에 학교 개교.<br>활동가 시절<br>1856~1868년 파리에서 집필 활동과 사회운동을 하며 교사로 활동함. 주요 저서:『어둠 속의 빛, 바보도 미치광이도 없는 세상』,『유형 지의 책』, 『에르만의 책』(1861),『삶과 죽음을 관통하며』(1864)<br>1868~1869년 조르주 클레망소의 지원을 받아 최초의 민중 무료 급식소 설립.<br>1870년 정치 활동이 본격화. 제국 타도 투쟁에 참여하고, 여러 야당 신문에 기고하며, 쥘 발레스, 외젠 바를랭, 테오필 페레와 함께 공개 집회 개최.<br>1870년 8월 15일 블랑키주의자 외드와 브리도를 지지하는 시위 참여. 1870년 9월 스당 전투 패배로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무너짐. 제3공화국 선포.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포위함. 굴욕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파리 시민들이 항복을 거부함.<br>1870년 11월 18구 경계위원회 의장으로 선출. ‘위기의 조국 클럽’에 적극 참여.<br>1871년 2~3월 티에르가 행정부 수반으로 선출되고, 파리 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몽마르트르 언덕의 대포를 회수하기로 결정.<br>1871년 3월 28일 민중 봉기가 파리 전역에서 승리하고, 파리코뮌이 시청에서 선포됨. 국민의회는 베르사유로 도피.<br>1871년 4월 3일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를 공격함. 루이즈 미셸은 국민방위군 복장을 하고 이시 요새, 클라마르, 뇌이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 부상자 구호 활동.<br>1871년 5월 22~28일 ‘피의 주간’. 베르사유 정부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3만 명이 넘는 코뮌 지지자들이 학살됨.<br>1871년 5월 24일 어머니가 포로로 잡히자, 루이즈 미셸은 어머니를 석방시키기 위해 베르사유군에 자수. 베르사유와 아라스에 수감.<br>감옥과 유배 생활<br>1871년 11월 28일 루이즈 미셸이 깊이 사랑했던 코뮌 지도자 테오필 페레 처형.<br>1871년 12월 16일 루이즈 미셸, 군사법정에 출두해 스스로 사형을 요구함. 누벨칼레도니 유배형을 선고받음.<br>1871년 12월 21일 오베리브 감옥으로 이송되어 20개월간 수감 생활을 함. 주요 저서: 『새해의 책, 짧은 이야기들』 『어린이를 위한 이 야기와 전설』(1872)<br>1873년 8월 28일 로슈포르 항에서 ‘비르지니’ 호를 타고 누벨칼레도니로 출발함. 4개월간의 항해 끝에 누벨칼레도니에 도착.<br>1873년 12월 10일 뒤코 반도의 눔보에 정착함. 루이즈 미셸은 현지 원주민인 카나크 족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문화를 연구하며 교류했다. 1878년 그들의 봉기 때 이들을 지지함.<br>1879년 누메아에 학교를 개교함.<br>1880년 11월 파리 코뮌 가담자들에 대한 전면 사면령(7월)이 내려진 후, 유배자 전원 사면. 파리로 귀환.<br>사회 진보를 위한 투쟁<br>1880년 11월 21일 엘리제-몽마르트르에서 강연. 이후 수백 차례 강연 시작.<br>1881년 1월 4일 10만 명의 군중 앞에서 블랑키의 추도사를 낭독함. 1881년 7월 런던에서 열린 국제 무정부주의자 대회에 참석함. 주요 저서: 『마지막 파업』(1881) 『비참함』, 『청년 이본』, 『나딘』, 『프로메테우스』(1882) 『제국의 사생아』, 『민중의 딸』, 『농민들』 (1883),『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와 전설』(1884)<br>1882년 2월 24 일 마리 페레 사망.<br>1883년 3월 9일 에밀 푸제와 함께 앵발리드에서 실업자 시위(검은 깃발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br>1883년 3월 체포된 후, 그해 6월에 6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nbsp;<br>1885년 클레르몽 중앙교도소로 이송됨. 1월 3일어머니 사망. 5월22일 스승이자 오랜 친구였던 빅토르 위고 사망,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함.<br>1886년 1월 17일.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약 2년 10개월 만에 출소. 르 발루아-페레의 빅토르 위고 거리 89번지에 거주. 주요 저서: 『카나크족의 전설과 서사시』(1885),『인간 미생물』,『회고록』 (1886),『새로운 시대』,『마지막 사상』,『칼레도니아 회상』(1887)<br>1888년 1월 22일 르아브르에서 연설 중 피에르 뤼카에게 총격을 받아 부상당함. 그러나 가해자에 대한 고소를 거부함. 주요 저서:『순환체계에 따른 백과사전 강독』,『붉은 수탉』,『새로운 세계』,『시대의 범죄들』<br>1890년 4월 30일 생테티엔과 비엔에서 강연.<br>1890년 7월 29일 런던으로 망명(~1905) 샤를로트 보벨과 함께 학교를 개교. 주요 저서:『점령』,『가불레트의 딸들』<br>1895년 세바스티앵 포르와 무정부주의 신문 《리베르테르》를 창간. 1896년 7월 27일 런던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 참석. 무정부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분열을 목격.<br>1897년 세바스티앵 포르, 샤를로트 보벨과 함께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강연 활동.<br>1898~1903년 장 비옹과 함께 프랑스 전역을 순회하며 강연하고, 이후 에르네스트 지로와 함께 알제리에서도 강연함. 인권 결사에 가입함. 주요 저서: 『코뮌: 역사와 회상』, 『꿈』, 『코뮌』(1898년)<br>1904년 5월 16일 폐렴으로 고통받으며 유언장을 작성함. 테오필 페레의 묘 근처, 르발루아-페레 묘지에서 어머니 곁에 묻히기를 요청. 주요 저서:『코뮌 이전』<br>1905년 1월 9일 마르세유의 오아시스 호텔(현재의 DUC 호텔)에서 별세. 1905년 1월 21일 르발루아-페레에서 장례식이 거행됨.<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150/k302136372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970959</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영화/연극</category><title>인간은 기계를 만들고 기계에 먹히며 기계를 먹는다 &amp;lt;미래의 범죄들&amp;gt;</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66920</link><pubDate>Sun, 22 Mar 2026 23: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6692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032825&TPaperId=1716692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5/50/coveroff/k51203282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br>신체적 고통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젯거리다. 고통을 자각하는 건 동물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의 뇌는 물리적 고통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과 세계 구조 사이의 연결성을 의식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보다 치명적이다. 동물은 고통에 즉물적으로 반응하다가 극에 달하면 죽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을 없애거나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강구해왔다. 그래서 고통이 완화되거나 사라지기도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전이되기도 한다.<br>기계와 섞여 변형되는 인간의 몸<br>신체의 고통은 몸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만물에게 불가피하다. 바이러스나 병원체에 의해서든, 사고에 의해서든, 또는 애초에 몸이 지닌 자기 재구성 과정의 한 방식으로든 고통은 상시적이다. 고통에 대한 불안이나 암시는 정신적 스트레스로도 이어진다. 병에 걸리지나 않을까, 혹은 사고나 자연재해에 희생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삶의 기본 전제마저 되짚게 만들기도 한다. 그에 대한 대처 능력을 마련하려는 것 자체가 때로 더 큰 고통을 생산하기도 한다. 고통은 삶의 기본 조건과도 같다. 그래서 고통은 모든 철학과 과학의 주요 전제가 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그로 인해 변형되는 인간의 물리적 형질 및 신체와 기계 문명 사이의 기묘한 접합 또는 분열 양상에 대해 줄곧 탐구해 온 감독이다.&nbsp;<br>그의 영화는 짐짓 뚱딴지같으면서도 초지일관하는 면이 있다. 작품 대부분이 SF나 B급 호러 사이 어디에선가 혼자만의 괴이한 공간과 물질(특히 인체)을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SF나 호러 전문 감독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도 없다. B급 호러의 형식을 취한 초기 작품들도 특유의 신체 변형과 기계 문명의 뒤틀린 비전을 독특하게 뒤섞은 묵직한 메시지로 독창성을 드러냈었다. 그리고 그 괴이한 독창성이 온갖 편견과 숭앙의 갈림길이 되었다. “내 영화가 난해하다고? 이 사람아, 세상이 더 난해해!”라며 느긋하고 건조하게, 옆구리 쿡쿡 찌르는 듯한 일침을 나로선 꽤 즐기는 편이다.&nbsp;<br>그중 &lt;크래시&gt;(1996)는 내게 아직도 각별하게 남아있다. 크로넨버그가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G. 발라드의 문제작(1973년에 초판이 나왔다)을 그대로 영상에 옮긴 작품이다. 소설이 발표됐을 때도, 영화가 개봉됐을 때도 극심한 논란이 일었다. 역겹고 비틀리고 왜곡된 성 관념으로 인간을 모욕하는 작품이라는 악평도 드셌다. 결국 엽기적인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하지 않겠냐는 비난인 것인데, 영화화되기 직전 제임스 발라드는 이런 발언을 했다.&nbsp;<br>&nbsp;"나는 『크래시』 도처에서 자동차를 하나의 성적 이미지로써 현대 사회의 삶에 대한 총체적 은유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소설은 성적 내용과는 별도로 꽤나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크래시』가 테크놀로지를 근간으로 한 최초의 포르노그래피 소설이라 여기고 싶다. 어떻게 보면, 포르노그래피는 가장 옥죄고 무자비한 방식으로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이용하고 착취하는지를 다룬 가장 정치적 형태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크래시』 (제임스 발라드, 김미정 옮김, 그책, 2011) ‘들어가는 말’에서&nbsp;<br>50년 전에 쓰인 원작 소설과, 3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 자동차와 섹스하며 기존 도덕률을 무참할 정도로 까뭉개는 그 작품의 강렬도는 여전히 유효하고 치명적이다. 남녀가 대놓고 보란 듯 벌거벗은 채 살을 섞는 영상은 이제 포르노그래피 축에도 못 낀다. 세계의 모든 사건과 사고를 전하면서 서로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가상 시스템의 전파력 자체가 무엇보다 농밀한 포르노그래피의 전시장인 것이다. 정치가, 언론이,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른 테크놀로지의 이념이 현재 그러하다. &lt;크래시&gt;는 그렇게 벌어지고 깨진 ‘틈’을 훤히 들여다보라고 쓰이고 만들어진 작품이다.&nbsp;<br>오래전부터 인간은 포르노그래피의 노예였다. 포르노그래피는 의외로 모든 걸 보여주지 않는다. 보지 말라고 눈 감게 하거나, 듣지 말라고 귀를 막는 게 포르노그래피의 진짜 목적이다. 내가 나임을, 그리고 당신이 당신 자신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순간, 망념의 쇼가 끝나고 진짜 인생이 시작될 테니까. 진짜 인생이 가득해지면 가짜로 꿀을 바르고 가짜로 피를 바른 것 앞에서 당신의 욕망은 세상의 ‘진짜’를 알려고 들 테니까. 그때, 세상은 멸망한다. 가치 판단은 없다. 멸망은 여전히 ‘근미래’다. 가깝지만, 아직 알 수 없는 미래. 이미 세상은 미래마저 잡아먹고 있다.<br>그런 의미에서 크로넨버그는 집요하고 줄기차다. 인간의 육체와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를 뒤섞은 그만의 독특한 과학적이고도 묵시록적인 은유 체계가 &lt;미래의 범죄들&gt;로 향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진화의 끝. 이 영화는 그가 평생(벌써 여든을 훌쩍 넘겼다) 만들었던 영화의 종합판으로 여겨진다.&nbsp;<br>노년 거장, 자신의 작품들을 종합하다<br>2022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대되어 기예르모 델 토로가 격찬했다는 뉴스 한편엔 영화 시작 10분 만에 극장을 뛰쳐나간 관객이 수두룩했다는 소식도 있다. 과연 크로넨버그 영화다운 반응이다. 한국 개봉은 아직 예정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을 여담 삼아 얹자면, &lt;폭력의 역사&gt;(2007) 이후 그의 페르소나가 된 비고 모텐슨은 이 영화에서 실제로 외모가 크로넨버그를 연상케 한다. 말을 타다가 허리를 다쳐 영화 중 절반 이상을 누워있는 연기로 일관했다는 건 굉장히 아이러니하기도 적확하기도 하다. 그가 연기한 행위예술가 사울 텐서는 여러모로 크로넨버그 자신의 모습이라 여겨졌다. 괴이하고 묵시록적인 주제를 상상 그 이상의 영상 테크닉으로 충격을 안겨주는 예술가의 초상. 이 영화가 왠지 자전적이라는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nbsp;<br>영화는 어느 바닷가에서 시작한다. 옆으로 뒤집힌 채 바다에 반쯤 침몰한 배(유조선?)가 보이고 한 아이가 갯벌에서 숟가락으로 진창을 뒤적거리고 있다. 멀리서 아이의 엄마가 아이에게 외친다. “아무거나 먹으면 안 돼!” 아이는 일견 평범해 보인다. 이 대사가 뭘 의미하는지는 얼마 안 가 밝혀진다. 곧이어 아이가 화장실에서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비스킷인 양 야금야금 뜯어먹는 장면이 나온다. 참다못한 아이 엄마가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그러면서 인간의 장기 변화로 인한 식성 및 성격, 나아가 신체의 변형을 모티프 삼아 행위 예술을 구현하는 사울 텐서의 작업장이 나온다.&nbsp;<br>사울은 인간의 장기 형태로 꿈틀대는 침대에서 잠을 자는 중이다. 레아 세두가 연기한 조력자 카프리스가 곧바로 등장한다. 아무거나 먹는 아이와 사울의 퍼포먼스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밝히는 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생략하겠다. 그 이후 이야기들도 마찬가지다. 크로넨버그의 작품들은 스토리를 알려주는 것으로 힌트를 얻을 게 거의 없는 영화이다. 그의 작품은 직접 체험하는 것만이 제대로 된 감상법이라 할 수 있다. 그 체험은 단순히 객석에 앉아 눈과 귀를 열어 두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너무 황당하고 엽기적이어서 되레 내가 죽을 때까지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몸속 내장들을 들여다보는 느낌마저 든다. 그걸 어찌 일설로 다 안내할 수 있으랴.&nbsp;<br>인간은 욕망으로 진화하여 욕망으로 종말한다<br>크로넨버그는 2013년 &lt;코스모폴리스&gt;를 만든 적 있다. 하루 종일 거대한 리무진에서 생활하며 온갖 투자를 통해 뉴욕을 지배하는 젊은 자본가가 주인공인 영화다. 이 영화 역시 그저 상류사회의 호화판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가 아니다. 크로넨버그는 일명 ‘바디호러’라 불리는 스타일의 영화 외에도 &lt;스파이더&gt;(2005), &lt;폭력의 역사&gt;(2007), &lt;이스턴 프라미스&gt;(2008) 등 인간의 심리 기저에 잠복한 폭력성과 피해의식, 그리고 그것들을 점점 극대화시키는 세계 전체의 체계와 자본의 음모 등을 끈적끈적하게 그려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카를 융의 애증 관계를 기묘한 심리 스릴러로 표현한 &lt;데인저러스 메소드&gt;(2012)는 그나마 온건(?)한 편에 속한다. 앞서 &lt;미래의 범죄들&gt;이 크로넨버그 영화의 종합판 같다는 건 그런 의미다.&nbsp;<br>기계 문명과 인간 사이의 죽이고 살리고 먹고 먹히면서 첨단과 파멸을 공유하는 설정, 그리고 그 안에 내재한 인간의 원시적 섹슈얼리티와 폭력성에 대한 진단, 자연적 진화를 지나 점점 다른 물질로 변해가고 있는 인간에 관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통찰들. 그런 주제를 믿기 힘든 물질들을 재구성해 각성케 하는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가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미 자신도 모르게 얽혀있는 세계의 첨예한 음모에 질려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어느 심원한 밑바닥에서 캐어낸 진귀하고 색다른 구성체를 통해 인류의 미래를 끊임없이 반추하고 속도를 제어하는 각성의 진미를 느껴버린 사람 또한 별반 다를 것 없다. 세계는 이미 인간이 나아갈 바를 인간 스스로 정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 시발은 결국 인간의 욕망이었고, 그 종말 역시 인간의 욕망을 폭력으로 대체하는 인간의 오만에 의할 것이다.&nbsp;<br>기계들이 있고 인간이 있다. 인간의 과학적 확증과 오만을 통해 만들어진 기계들은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해 왔다. 하지만 기계 문명이 진보할수록 거기서 발생한 본질적 폐해들이 거꾸로 증명된다. 그리고 그러한 역류가 악과 정의에 대한 새로운 표본을 제시하며 인간 자체를 병들게 한다, 문장이 복잡한가. 사실 자체가 복잡한 것인데, 인간 대부분은 그 사실 자체의 복잡성에 대해 숙고하는 걸 괴로워한다. 아무리 기계가 인간의 통증을 일시적으로 완화시켜 줄 수 있더라도, 모든 병이 그렇듯, 근본 치료는 인간이 왜 병들 수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거쳐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성찰 자체가 만병통치의 중심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역시 인간에겐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복잡한 존재의 사슬을 잠시나마 일깨워주는 장면이 있다.<br>인간은 잘못 만들어진 로봇인가<br>​눈과 입을 꿰맨 채 온몸에 수십 개의 귀가 붙어있는 댄서가 춤을 추는 장면. 굉장히 명상적이고 종교적인 느낌마저 든다. 보지도 먹지도 못하게 구속된 육체로 수십 개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과연 어떤 소리일까. 춤은 격렬하기도 나긋하기도 하다. 댄서는 아무 표정이 없다. 물론, 수십 개의 귀는 사울이 인공적으로 장착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퍼포먼스가 그렇듯, 이것은 그저 하나의 쇼에 불과하다. 사실, 자본과 정치가 작동하는 체계도 쇼의 속성을 지녔다. 그리고, 영화도 당연히 쇼다. 그런데 그 쇼가 이미 몸과 정신에 내장된 실체처럼 세계라는 장기판을 들었다 놨다 하는 세상. 진실도 정의도 악도 폭력도 그렇게 꾸며지고 가공된다. 인간은 이제 만들어 붙여진 수십 개의 귀처럼 인간 스스로를 가공하고 고통을 위장한다. 위장함으로써 없애려 한다. 인간은 이제 잘못 만들어진 로봇과도 같다. 죽음을 물질화한 것을 먹고, 물질이 된 죽음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각은 역시 각자의 몫이다.&nbsp;<br> <br><br>  &nbsp;  ​  &nbsp;    &nbsp;    &nbsp;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5/50/cover150/k51203282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5155047</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영화/연극</category><title>영화를 보고 쓴다는 것은 </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66903</link><pubDate>Sun, 22 Mar 2026 23: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6690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032825&TPaperId=1716690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5/50/coveroff/k51203282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영화는 처음 어둠에서 탄생했다. 물론, 역사에 기록된 바로는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상영한 것이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뤼미에르(Lumière)’는 ‘빛’을 뜻한다). 그들은 세상이라는 어두운 벽면에 새로운 문명의 빛을 쏘았다고도 할 수 있다. 정확히 130년 전이다.  &nbsp;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다. 영화는 본래 어둠 속에 빛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영화가 지금도 그렇다. 영화 감상의 태도 및 생태계를 전면적으로 바꾸어 놓은 OTT 채널 감상 등 가정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nbsp;  어떤 물리적 조명(照明)의 유무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일종의 비유나 상징으로 여겨도 된다. 또는 그런 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내 고집을 투사하는 것이라 봐도 부인하지 않겠다. 단지, 내게 영화란 어둠을 먹고 사는 물질적 환영이라는 사실만 강조하고 싶다.  &nbsp;  나는 영화 평론가도 아니고, 영화 종사자도 아니다. 그저, 오랫동안 시를 쓰고 때로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영화와는 아주 가까울 수도 있고, 때론 상반되거나 빗나갈 수도 있는 예술적 지향을 지닌 사람일 뿐이다. 자신을 스스로 ‘어떠어떠한 사람’이라 규정하는 건 지나친 자기 비하나 자기 치장에 가까울 것이나, 내가 종종 이 세상의 중심에서 어느 정도 엇나간 위치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그 ‘엇나간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 모음집이자, 그 ‘엇나감’의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에 대한 감상이라 해도 무방하다.  &nbsp;  영화보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하고 황당무계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이다. 딱히 요즘만 그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소위 ‘상식과 표준’이라는 것 자체를 오도하고 호도하는 일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되레 ‘상식과 표준’의 본질을 따져 묻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상식과 표준’ 자체가 때론 인간을 억압하고, 눈 귀를 가리며, 사지를 친친 감아 버리기도 한다. 영화는 그 이상한 현실의 역설을 역상으로 되비추는 거름판과도 같다. 그래서 생각해 보는바, 영화는 오히려 더 현실보다 낯설고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함으로써 현실이 가려버리는 어떤 흑막(?)들을 거꾸로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영화들은 그런 기준으로 내게 포착된 작품들이다.   &nbsp;  반복건대, 영화는 어둠에서 처음 탄생했다. 그 ‘어둠’은 현실이 감추고 있거나 현실을 감추고 있는 무언가의 흑막과도 같다. 누가 조작했는지, 혹은 어떻게 사람의 눈 귀를 가리면서 허상의 빛에 홀리도록 만들었는지를 새삼 따지는 건 별로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세상에도,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어둠’은 항상 존재한다는 근본 사실만 따져본다. 시공 포괄하여 세계는 어둠 속에서 작동한다. 삶과 세계의 이면과 후면이 모두 쉬이 판별할 수 없는 어둠 속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누군가 총을 쏘듯 빛을 쏜다. 현실에서 떼어낸 듯 여겨지는 어떤 형상과 소리와 이야기들이 허공에서 빛의 너울로 일렁인다. 현실을 투영했다는 그것으로 오히려 현실을 뒤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내가 영화를 감상하는 기본이다. 내게 영화는 망상의 거울과도 같다. 그러니까 그것은 나의 현실이기도, 나의 꿈이기도 하다. 그 모든 사념을 배반하는 심정으로 독자들은 이 책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하시라.   &nbsp;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총 한 자루를 건네는 기분이다. 탄창엔 총알이 단 한 발 남았을 수도, 꽉 차 있을 수도 있다. 방아쇠를 당기면 진짜 죽을 수도, 다시 살 수도 있다. 죽든 살든, 새삼 현실도 영화도 더없이 낯설어진다면 이 책은 그나마 효능 있는 물건으로 누군가에게 남을 것이다.<br> <br>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5/50/cover150/k51203282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5155047</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사회</category><title>루이즈 미셸,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뜨거움</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60369</link><pubDate>Thu, 19 Mar 2026 20: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6036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6372&TPaperId=1716036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off/k302136372_3.jpg" width="75" border="0"></a>&nbsp;<br/><br/>오늘날까지도 1871년 파리 코뮌 당시 '붉은 처녀'로서 명성을 얻은 루이즈 미셸은 프랑스 좌파의 영웅으로 남아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대영박물관에 앉아 팜플렛을 쓰고 있을 때, 미셸은 파리의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프랑스 정부군과 맞서고 있었다. 그녀의 동시대 인물들이 이제 막 식민주의를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뉴칼레도니아의 죄수 신분으로 1878년 카나카(Kanaka) 봉기에 참여했다.&nbsp;<br>그녀가 남긴 이 회고록은 인간의 꿈을 향한 기념비로 서 있다. 변방의 보잘것없는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가 자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자유까지 교조적 이론이 아닌 마음에 이끌려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음을 , 미셸은 자신의 회고록과 삶을 통해 증명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br>1830년 5월 29일 사생아로 태어난 루이즈 미셸은 오트마른(Haute-Marne)에 있는 반쯤 허물어진 요새화된 저택에서 어머니와 친조부모의 손에 자랐다. 그녀의 친할아버지 에티엔 샤를 드마이(Etienne-Charles Demahis)는 귀족의 후손이었으나, 1789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공화주의적 지지의 표시로 자신의 성을 '드 마이(De Mahis)'에서 덜 화려한 '드마이(Demahis)'로 바꾸었다.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인인 마리 안(또는 마리안) 미셸과 더 이상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그의 아들 로랑 사이에서 루이즈가 태어났을 때 브롱쿠르(Vroncourt) 마을의 시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루이즈는 마치 적통인 드마이 가문의 손녀처럼 양육되었고, 친조부모가 사망한 후 여교사가 되어 처음에는 오트마른에서, 나중에는 파리에서 가르쳤다. 그녀는 혁명적인 꿈을 꾸기 시작했고, 루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2제국이 황혼에 접어들 때 급진적인 활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과 프로이센의 파리 포위 공격 당시, 그녀는 수 세기 동안 불만을 품은 빈민들이 거주해 온 몽마르트르 지역 혁명 단체의 주요 일원이었다.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파리 시민들이 정부가 자신들의 공화국을 훔치려 한다고 믿고 반란을 일으킨 파리 코뮌 기간 동안, 미셸은 사건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며 봉기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br>‘피의 일주일’ 1871년 5월 베르사유 정부군이 코뮌을 진압했을 때, 미셸은 붙잡혀 재판을 받고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1873년 죄수 호송선을 타고 뉴칼레도니아로 이송되었다. 6년 동안 수도 누메아 인근의 형벌 식민지에서 가혹한 조건 속에 살았으며, 이후 수도에서 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며 지냈다. 여론의 압박에 따라 정부가 코뮌 가담자들에게 내린 1880년 일반 사면령 이후,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와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br>미셸이 귀국했을 때 거대한 대중 집회가 그녀를 맞이했으나, 그녀가 혁명진영 내에서 자리를 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지난 10년 동안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무지했고, 급진 세력 내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얻은 인물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그 어떤 '전설'에게도 내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얻는 대중적 지지는 여전히 엄청났으며, 이후 몇 년간 파리와 지방, 그리고 해외에서 열린 그녀의 강연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소란을 이룰 정도였다.<br>1882년 미셸은 치안 문란 죄로 체포되어 2주간 감옥에서 보냈다. 이어 1883년 봄, 앵발리드에서 열린 ‘빵과 일자리’시위 직후, 그녀는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들고 파리 전역에서 군중을 이끌었다. 그녀는 폭동을 일으키고 추종자들에게 빵집 약탈을 선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실질적인 변론을 거부한 그녀는 6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3년 후 사면된 그녀는 단호하게 강연과 집필 활동을 이어갔으며, 급진적인 대중은 그녀를 '위대한 시민(la grande citoyenne)'으로 예우했다. 1890년부터 1905년까지 영국에 머물며 유럽을 돌며 강연 투어에 나섰으며 1905년 그녀가 사망했을 때도 강연 투어 중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수만의 인파가 참여한 가운데 프랑스의 3대에 걸친 혁명 정서가 거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br>루이즈 미셸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어린 시절 억압받는 이들에 대해 품었던 막연한 동정과 이후 유토피아적 혁명에 바쳤던 막연한 헌신을 거쳐 무정부주의라는 신념에 도달했다고 선언한다. 그녀는 훗날 자신의 무정부주의로의 전향이 죄수 호송선 비르지니(Virginie)호를 타고 뉴칼레도니아로 가던 넉 달의 항해 중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을 개종시킨 나탈리 르멜(Natalie Lemel)과 여정을 함께했었다. 미셸은 회고록에서 1883년 1월 무정부주의자들의 '리옹 선언문'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기술한다. 그녀는 회고록에 "나는 그곳에 기록된 모든 사상을 공유한다"라고 적으며 해당 문서의 전문을 인용했다.<br>하지만 미셸의 무정부주의는 이론적이라기보다 감성적이었다. 사실 그녀는 당대와 과거의 혁명 저작물들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녀가 라메네(Lamennais)를 읽은 것은 확실하며, 프루동(Proudhon)을 읽었을 가능성도 크다. 블랑키(Blanqui)나 바쿠닌(Bakunin)의 사상은 당시 널리 퍼져 있었기에 당연히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들의 저작을 직접 읽었을 가능성은 낮다. 마르크스주의는 회고록에서는 거의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데, 이는 그녀가 마르크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이 회고록 출간 수년 후인 1890년대였기 때문이다.&nbsp;<br>그녀는 소유권에 대한 관점, 착취에 대한 인식, 과학의 역할에 대한 주장, 그리고 인류의 근본적인 선함에 대한 비전에서 전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사회 혁명에 대한 염원에서도 그녀는 그 형태와 성격에 대해 일관적이었다. 즉, 혁명이란 불의와 착취에 대항하여 민중이 일으키는 자발적인 봉기여야 한다는 점이었다.&nbsp;<br>민중의 자발적 봉기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간접적으로나마 그녀가 많은 무정부주의자가 택했던 테러의 승인에서 한 발 비켜나가게 한다. 암살은 도구로서 아주 가끔만 언급한다. 한 번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살해하는 것을 논했고, 또 다른 때는 아돌프 티에르를 암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두 사람을 살해하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준비는 하지 않았다. 이와 유사하게, 그녀가 폭발물을 사용한 유일한 사례는 동상을 폭파하려다 실패한 시도뿐이었다. 그녀는 "폭군 살해는 폭정의 머리가 하나이거나 기껏해야 적은 수일 때만 실용적이다. 그것이 히드라(머리가 여럿인 괴물)일 때는 오직 혁명만이 그것을 해낼 수 있다"라고 적었다. 그녀는 혁명의 모든 지도자가 혁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전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도 언급했는데, 그래야만 민중이 살아남은 참모진과 다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면 어떻게든 무정부주의적 꿈이 실현되리라는 것이었다.<br>E. H. 카(E. H. Carr)의 적절한 표현을 빌려 "낭만주의 교리의 논리적 결말"이라고 불리는 무정부주의는 정의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그 핵심—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모든 형태의 정치 조직에 대한 혐오, 인간의 타고난 선함에 대한 믿음—은 미셸의 생각과 너무나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미셸이 무정부주의를 찾은 것인지 무정부주의가 미셸을 찾은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회고록을 집필할 당시 그녀는 진보가 필연적이며, 정부는 그 어떤 정부든 악하다는 점을 확고하게 믿었다. "권력은 악이다"라는 그녀의 진술은 모든 무정부주의 체계의 핵심을 형성한다.<br>그녀는 역사를 자유로운 인류가 어떻게든 노예화되어 온 이야기로 보았으며 과거에 대한 관심은 미래에 대한 희망만큼이나 컸다. 과거에 대한 그녀의 비전이 비록 신화와 괴물로 가득 찬 낭만적인 것이었을지라도, 그것은 미래에 대한 그녀의 낭만적인 꿈과 쉽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녀에게 과거와 미래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br>안타깝지만, 미셸의 희망—그리고 역사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라는 낭만적인 꿈은 미래의 물결이 아니라 쇠퇴해가는 세력이었다. 수치상으로 볼 때 프랑스에서 무정부주의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1890년대의 폭력 사태 이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의 기간이었으나, 그 수십 년 동안 무정부주의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힘은 노동자 자치조직, 다양한 노선과 전략을 품은 노동총연맹(CGT), 그리고 정파 간의 내분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루이즈 미셸이 꿈꾸었던 무정부주의, 즉 사회 혁명과 착취의 종말로 이어지는 형태 없는 민중 봉기는 세부 사항과 방법론을 둘러싼 화해 불가능한 말다툼 속으로 사라졌다. 그 꿈은 흩어지더니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br>미셸은 이론가가 아니었던 것처럼 조직가도 아니었다. 시위와 조직을 구상하는 초라하고 어두운 방들은 미셸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녀는 1882년 한 연설에서 "모든 혁명이 불충분했던 이유는 그것들이 정치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조직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는데, 가까운 시점에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압도적인 수와 의지의 힘, 그리고 그들 명분의 정당성을 통해 구체제가 자신들 앞에서 시들어 버리게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nbsp;<br>이론가도 조직가도 아니었던 미셸은 프랑스 급진파들 사이에서 또 다른 역할을 채웠다. 베를렌은 그녀를 "잔 다르크에 가까운 인물"이라 불렀다. 무정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분명 낭만주의자였던 빅토르 위고는 어느 시의 초고 제목을 '루이즈 미셸'이라고 지었으며, 「남자보다 위대한(Viro Major)」으로로 제목이 바뀐 이 긴 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br>"아는 이들은 알리라... 모두를 위해 바쳐진 당신의 나날들, 밤들, 심려들, 눈물들을, 타인을 돕느라 스스로를 잊어버린 당신을, 사도의 불꽃과도 같은 당신의 언어들을, 비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향한 당신의 긴 증오의 시선을, 그리고 당신의 두 손으로 녹여주던 아이들의 발을..."<br>위고는 미셸이 영웅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은 일은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위고는 미셸이 다음과 같은 존재라고 결론지었다.​"...두 정신이 뒤섞인 존재 ...거대하고 폭풍우 치는 심장 밑바닥에서 보이는 별과 같은 것들의 신성한 혼돈 ...불꽃 속에서 보이는 광채<br>당신은 여인의 몸을 하고 있지만, 그 영혼은 위대한 남성(Viro Major)보다 더 거대하다."<br>모든 운동에는 예언자와 입법자, 죄인과 변절자, 순교자와 성인이 필요하다. 프랑스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미셸은 순교자이자 성인—즉, '붉은 처녀'였다.<br>미셸의 지적 호기심은 엄청났고 지식에 대한 갈증은 갈구해도 끝이 없었다. 그녀의 회고록 전반에는 음악, 악기, 교수법, 동물 학대, 여성의 지위, 카나리아 제도에서 통용되는 화폐, 곤충, 카나크 원주민 인류학, 날씨, 식물학 등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주제들이 흐르고 있다. 목록은 끝이 없다. 어린 시절 그녀는 자신의 탑 방에 동물 해골을 수집했다. 파리에서 여교사로 지낼 때는 바쁜 수업 일정에도 불구하고 물리, 화학, 역사, 심지어 법학 수업까지 청강했다. 감옥에서는 책과 시를 썼고, 뉴칼레도니아에서는 동식물의 목록을 작성하고 파파야 나무의 황달병 예방 접종을 실험하기도 했다.<br>그녀가 회고록에서 드러낸 내면의 삶은 분명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전설, 맹수, 민속 영웅들이 그녀의 환상 속에서 뒤섞였으며, 그녀는 자신의 환상과 현실을 결코 구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초기 생애가 "꿈과 학업으로 이루어진" 시기였으며, 이는 삶의 두 번째 부분인 "투쟁의 시기"를 위한 준비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파리 포위전과 코뮌이라는 깨어 있는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던 대로 행동했다. 꿈과 행동은 하나였으며,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 둘은 외견상 구분이 불가능했다. 어린 시절에 놀이처럼 상연했던 교수대 연극의 연설을 그녀는 1871년 재판관들 앞에서 실제로 쏟아냈다.<br>사람들은 자신만의 드라마를 만들고 그 안에서 주연을 맡기 마련인데, 미셸은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드루이드 여사제, 발키리, 베스탈 처녀(성스러운 처녀)로 여겼으며, 기이한 악령과 신비로운 환영 등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그녀의 실재 삶 속을 지나갔다. 1860년대의 어느 날, 그녀는 친구 빅토린과 함께 어린 시절 집 근처의 깊은 숲속을 걸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숲속을 거의 소리 없이 가로지르며 늑대 한 마리가 그들 곁에서 발맞추어 걸었다고 한다. 늑대가 정말 그곳에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1860년대에는 오트마른 지역조차 늑대의 수가 적었으나, 그 맹수는 미셸의 마음속에 분명하고 진실하게 존재했다.<br>본문의 주요 준비 과정이 감옥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셸이 공적인 기록이 있는 사건들을 서술할 때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뉴칼레도니아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투옥되지 않았을 때조차 매일 경찰 요원들의 감시를 받았다. 그들의 보고서가 남아 있기에, 1881년부터 1883년까지 그리고 1886년부터 1889년까지의 그녀의 삶은 객관적이지는 않을지언정 뒷받침할 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과 여교사 시절에 대해서는 그녀의 기억이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그녀가 묘사하는 일부 태도들은 오직 그녀의 입을 통해서만 진실로 남을 것이다. 아마도 미셸은 환상을 구축한 뒤 그것을 실현하며 살았거나, 혹은 회고적으로 환상을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회고록 집필자 외에 자기의 삶을 다시 한번 살 기회를 얻는 사람은 거의 없다.<br>미셸은 회고록이 빠지기 쉬운 자기과시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우며, 심지어 자신의 중요성을 소홀히 다루기까지 한다. 그녀는 코뮌 기간 여성 감시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파리 포위 공격(파리 포위전-보불전쟁) 당시 그녀는 조르주 클레망소의 도움 덕분에 약 200명의 아이를 보살피며 일상적인 복지를 책임졌고 그 일을 아주 잘 해냈으나, 그녀의 회고록에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비록 그녀의 재판 중 하나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뉴칼레도니아 유배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런던에서 열린 크로포트킨의 국제 회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했다. 그녀는 그 여행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곳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br>때때로 그녀의 회고록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장엄한 몸짓으로 매혹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그것이 정확한 사실이 아닌 경우도 있지만, 1886년의 이러한 서술들은 루이즈 미셸이 자기의 삶을 진정으로 바라보았던 방식이거나, 혹은 타인에게 드러내려 했던 방식을 나타낸다. 그 효과란 그녀에세 선전의 의미일 것이며 어쩌면 그녀 스스로도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회상록은 미셸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뜬 상황에서 쓰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쉰여섯 살의 이 혁명가는 모든 것을 혁명에 희생했다. 아마도 자신이 처한 현재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녀는 어린 시절의 자아를 훗날의 혁명가 모습으로 소급하여 만들 수밖에 없었을지도. 이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nbsp;<br>할아버지의 볼테르적 가르침 덕분에 처음부터 단호하게 반교회적이었다고 자신을 묘사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겉보기에 적절히 종교적인 아이였다. 경건한 고모의 열렬한 가르침을 통해 그녀가 신비주의적 가톨릭에 매료되었던 흔적들이다. 이는 훗날 혁명가로서 열정에 모종의 신비로운 에너지를 발휘한다.&nbsp;<br>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미셸은 곧바로 급진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 기간 중 그녀의 친구 마리 페레(Marie Ferré)가 사망했으나, 미셸에게 사건의 정점은 리옹에서 열린 '66인의 재판(Trial of the Sixty-eight)'이었다. 정부는 크로포트킨과 고티에를 포함한 많은 지도자를 파멸시킴으로써 무정부주의 운동을 꺾으려 했다. 미셸은 재판 초기에 영국에 있었으나 마지막 단계에 참석했고, 비록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수감자들과 동일시했다. 66인의 유죄 판결 이후 그녀는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꼈다. "내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허용된 자유를 사용해 지구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뻗어 나갈 새롭고 거대한 인터내셔널을 소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겁함의 공범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순교를 갈구하고 있었고, 1883년 4월 앵발리드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정부는 야만적으로 반응했고, 형식적인 재판 끝에 그녀에게 6년의 독방 구금형을 선고했다. 이는 범죄에 비해 너무나도 불균형한 형량이었기에 보수적인 신문들조차 항의할 정도였다.<br>어머니의 쇠약해진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미셸은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유죄 판결 이후에도 최소 두 차례 어머니를 병문안할 수 있는 가석방 허가를 받았다. 클레르몽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도 어머니를 뵙기 위한 외출이 허용되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절차였다. 미셸의 전기 작가 에디스 토마스(Edith Thomas)는 이 에피소드를 논하며 19세기가 "우리 시대보다 훨씬 더 인도적인 시대였다"라고 평했다. 미셸은 1884년 12월 초, 당국이 그녀를 어머니와 가까운 파리 교도소로 이감해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나흘 후 내무부 장관은 미셸이 두 명의 경찰관 감시하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녀의 회고록만으로는 알기 어렵지만, 미셸은 1884년 12월 11일부터 1885년 1월 3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br>미셸의 감정은 항상 격렬했다. 그녀의 회고록 페이지 곳곳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점철되어 있으며, 어린 시절을 묘사할 때는 친척들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후 젊은 여성 시절에는 자신을 따라 파리까지 온 줄리 롱샹(Julie Longchamps)과 깊은 우정을 쌓았다.&nbsp;<br>세월이 흘러도 제자들에 대한 미셸의 애정은 식지 않았다. 첫 번째 재판 당시 정부가 그녀에게 제자가 없었다고 주장하자 그녀는 격분하며 반박했는데, 정작 그보다 훨씬 더 큰 거짓말들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고 내버려 두기도 했다. 그녀는 성실하고 상상력 풍부한 교사였던 것으로 보이며, 외부의 증거들도 그러한 판단을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누메아에서 카나크족을 가르치는 데 쏟은 그녀의 헌신은 회고록에 자부심으로 담겨 있다.​미셸의 동정심은 사회의 모든 약자, 즉 가난한 이들, 노인들, 죄수들, 그리고 여성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초기 페미니즘(protofeminism)을 발전시켰으나, 이는 곧 더 포괄적인 급진주의로 융합되었다. 미셸은 사회 문제를 명확히 직시했으며, 여성뿐만 아니라 많은 집단이 착취당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하여 여성에 관한 회고록의 한 장은 사회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가 "좋은 동반자로서 인생을 함께 걸어갈 것"을 호소하는 톤으로 변한다.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인류 전체의 권리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느 인종이 으뜸인지를 두고 인종들이 다투지 않게 되는 것처럼, 어느 성별이 우월한지"에 대해 더 이상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동물을 향한 잔혹 행위에 대한 미셸의 혐오감은 약자와 착취당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연결되어 있다.<br>&nbsp;"새끼가 짓밟힌 새부터 전쟁으로 보금자리가 파괴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br>​그녀의 회고록에서 어머니에 대한 감정 다음으로 가장 격렬한 감정은 테오필 페레(Théophile Ferré)를 향해 있다. 그녀는 그와 그의 처형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만, 그 감정이 인간 페레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탄압이 초래할 수 있는 결과의 상징으로서의 페레를 향한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혹자는 페레를 그의 연인으로 보기도 한다. 페레의 누이 마리(Marie)와 미셸의 따뜻한 우정이 테오필에 대한 감정의 결과인지 아니면 그와 별개인지는 불분명하나, 미셸과 마리 페레의 삶은 영구적으로 얽혀 있었다. 마리는 미셸이 집회에 참석하거나 유배 중일 때, 혹은 여행이나 투옥 중일 때 미셸의 어머니를 돌보는 것을 도왔고, 두 사람은 수년 동안 활발하게 서신을 주고받았다. 미셸이 자신의 시집과 스크랩 자료들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리 덕분이었으며, 그중 상당수가 회고록에 포함되었다. 블랑키 서거 기념일 시위 직후 미셸이 체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가 사망했다. 미셸은 회고록에 마리의 장례식 기록과 앙리 로슈포르가 보낸 찬사의 편지를 수록했다.<br>​하지만 미셸의 정서적 삶의 중심은 어머니였다. 미셸은 어머니가 "공유하지 않았던" 자신의 견해 때문에 어머니가 겪은 고통의 대부분을 자신이 초래했음을 인정했다. 평생 어머니는 딸의 빚을 갚기 위해 애썼고 애정과 소소한 선물들을 쏟아부었다. 그 보답으로 루이즈는 자신의 불행을 어머니에게 숨기려 애썼고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편안하게 해드리고자 노력했다. 미셸은 "우리 혁명가들은 가족에게 행복을 거의 가져다주지 못한다"라고 한탄한다.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미셸은 어머니의 장례식 기록 전문을 실었다. 그녀가 깨닫지 못한 사실은, 어머니의 시신을 따라 파리를 가로질러 르발루아 페레 묘지까지 행진했던 수천 명의 사람이 어머니뿐만 아니라 루이즈 자신에게도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br>실질적으로 미셸의 회고록은 어머니의 죽음 시점에서 끝을 맺으며, 그녀는 상실로 인해 황량해진 정신 상태로 이듬해 출판을 위해 원고를 완성했다. 현실은 가변적이며, 회고록 저술가가 해야 하듯 자신의 마음의 과정을 되짚어보는 것은 회상이 소환되는 순간에 존재하는 햇빛이나 그림자를 통해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는 일이다. 혁명적 대의에 대한 미셸의 헌신과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그림자 아래서도 확고했으나, 만약 그녀가 슬픔의 충격 속에서 회고록을 쓰지 않았더라면 잃어버린 과거에 대해 향수와 슬픔을 덜 드러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또한 우리 몫이 아니다.<br>미셸이 이 회고록을 쓰기 시작한 것은 1883년에 시작된 그녀의 세 번째 수감 기간 중이었으나, 자료 수집은 그보다 일찍 이루어졌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시작한 오트마른의 역사와 같은 초기 저작물들도 가지고 있었으며, 뉴칼레도니아 항해 중에 기록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일기'에 대해 감질나는 언급을 남기기도 했다.<br>1885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미셸은 일종의 신경 쇠약을 겪었으며 이는 그녀의 회고록이 파편화되고 일관성이 떨어지게 된 분명한 이유 중 하나였다. 두 부분으로 나뉜 본문 전체에 대략적인 연대기적 개요가 흐르고는 있지만, 이야기와 일화들은 단계적인 서사보다는 단어 연상에 따라 나타난다. 또한 이 회고록은 사실적인 기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본문은 그녀의 꿈에 대한 감정적인 묘사, 행동을 촉구하는 고무적인 부름, 그리고 다수의 시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다른 아이디어로 가볍게 옮겨간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이 독자에게 야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원문에서 그녀는 "나의 세 번째 체포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앞선 두 번의 체포 과정을 서술해야겠다"라고 쓰기도 했다. 회고록은 향수와 고양된 감정, 서사와 예언 사이를 격렬하게 오간다.<br>1888년 1월, 미셸이 르아브르에서 연설하던 중 광신적인 가톨릭교도 브르타뉴인이 그녀를 쏘았다. 왼쪽 귀 뒤에 박힌 총알 부상은 잘 아물지 않았고, 한동안 그녀의 건강은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러나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게도, 미셸은 가해자의 재판에 출석하여 그가 악한 사회에 의해 미혹된 것이라 주장하며 선처를 호소했고, 결국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br>루이즈 미셀은 1890년 노동절 시위 참여를 준비하던 중 행사 전날 체포되었다. 분노와 좌절감에 휩싸인 그녀는 감방의 가구들을 부수었고, 당국은 그 행동을 구실 삼아 그녀를 정신 이상자로 몰아 수용하려 했다. 불분명한 이유로 내무부 장관 콩스탕이 직접 개입하여 수용 절차를 중단시키고 그녀를 석방했다.<br>미셸은 즉시 영국으로 떠났고, 189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nbsp;<br>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이후 그곳의 사건들은 그녀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미셸은 이 무모한 전쟁이 사회 혁명의 시작을 가져올 기회라는 점에 기뻐했다. 그녀는 1904년 2월과 3월 초 프랑스에서 더 많은 강연을 했으나, 그 후 중병에 걸렸다. 그녀는 회복되었고, 대중이 치명적일 것이라 예상했던 그녀의 병세가 널리 알려진 후 전설적인 인물을 보기 위해 과거처럼 엄청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아마 사람들은 이제 전설을 보러 온 것일 뿐이었겠지만, 어쨌든 수많은 이들이 모여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연말에 그녀는 알제리로 떠났고, 프랑스로 돌아오던 중 마르세유에서 병이 났다. 이 병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1905년 1월 9일, 그녀는 마르세유의 호텔 드 로아지스(Hotel de l'Oasis)에서 사망했다.<br>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좋아했을 법한 장관 중 하나가 되었다. 적기와 수많은 꽃, 그리고 노동조합, 사회주의 단체, 무정부주의자, 반종교 단체 대표 등 2,000명의 조문객과 함께 장례 행렬은 마르세유에서 묘지까지 1킬로미터에 달했다. 추모식이 프랑스 전역과 런던 등지에서 거행되었다. 1월 20일 그녀의 유해는 이장되어 파리로 옮겨졌고, 이틀 후 르발루아 페레(Levallois-Perret)에 있는 어머니 곁에 묻혔다. 언론은 이것이 빅토르 위고의 사망 이후 최대 규모의 장관이었다고 전했다. 같은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군중이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려다 벌어진 대학살은 또 다른 '피의 일요일'로 영원히 각인되었다<br>​오늘날 미셸의 고향인 브롱쿠르(Vroncourt)에는 그녀의 동상이 서 있고, 마을을 지나는 거리에는 그녀의 이름이 붙어 있다. 르발루아 페레에 있는 그녀의 묘지는—1905년에 묻힌 곳이 아니라 1936년 인민전선 시절에 옮겨진 새 묘지이다—여전히 익명의 손길이 놓아둔 꽃들로 채워져 있다. 그녀의 이름을 딴 지하철역과 거리도 만들었지만, 둘 다 파리 시 경계 바로 바깥에 걸쳐 있다. 그녀는 이제 전설이다. 그녀가 그 전설의 일부를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다. 루이즈 미셸은 영웅적이었으나, 그녀 자신이 말했듯<br>"영웅적인 것은 없다. 사람들은 그저 사건에 매료될 뿐이다."<br>흔히 하나의 사건에 대해 여러 버전의 서술이 존재했는데, 이는 드문 경우이지만 큰 틀에서 항상 서로 일치하면서도 각기 새로운 세부 사항을 덧붙이고 있었다. 몇몇 시들은 서사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아 생략했다. 게다가 미셸의 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있다. 물론, 에디스 토마스는 미셸의 "가장 훌륭한 시는 단연코 그녀의 삶"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br>미셸은 분명 이 회고록의 후속편을 쓸 의도가 있었다. 이 책을 출간하고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으나,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녀의 시와 편지들을 제외하면, 여기에 실린 『루이즈 미셸 자필 회고록(Mémoires de Louise Michel écrits par elle-même)』이 혁명가이자 시인, 그리고 몽상가였던 매혹적인 여성의 가장 주요한 자전적 기록이다.<br>1886년 이 회고록을 출간했을 때 그녀는 쉰여섯 살이었으며, 여전히 많은 세월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언급했던 두 번째 회고록을 쓰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녀가 남긴 이 회고록은 인간의 꿈을 향한 기념비로 서 있다. 변방의 보잘것없는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가 자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자유까지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음을 교조적 이론이 아닌 마음에 이끌려, 미셸은 자신의 회고록과 삶을 통해 증명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150/k302136372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970959</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사회</category><title>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단 한 명의 프랑스 여성 루이즈 미셸</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55612</link><pubDate>Tue, 17 Mar 2026 13: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5561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6372&TPaperId=1715561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off/k302136372_3.jpg" width="75" border="0"></a>&nbsp;<br/><br/>2024년 12월에서 다음 해 1월로 넘어가는 어디쯤에서 이 책을 번역하기로 맘먹었습니다.&nbsp;분량이 만만치 않아서 좀 힘들겠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어서 해야지 해야지 하고 마음만 분주했습니다. 2025년 4권의 책을 만들면서 틈틈히 번역을 했고 지난 해 12월 말에 초고를 만들었습니다.<br>3개월 동안 달려왔습니다. 이제 책이 손에 들어왔고요.음, 루이즈 미셸의 삶을 들여다보면 볼 수록 삶이란 어쩔 수 없는 고통이라겠지만 그 고통이란 또 삶을 빛나게 할 것이란 걸 확신하게 됩니다.<br>루이즈 미셸은 결과가 아니라 신념을 지키는 삶 그 자체가 이미 승리임을 온몸으로 웅변합니다.&nbsp;타인의 시선과 평판에 매몰되지 않고 세상의 기준이 아닌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 삶을 정의하는 태도, 길들어진 풍요 속에 머물지 않고 위험하더라도 자유로운 인간으로 남기 위해 온 존재를 걸었던 여성의 이야기는 온갖 역경에도 세상이 정해준 한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삶을 창조할 용기를 얻으려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이야기일지도.  &nbsp;  날카로운 비수 같은 문장과 부드러운 위로와 공감으로 채워진 이 회고록은 누구라도 그 어떤 곤경에 처했다 하더라도 루이즈 미셸에게 기대볼 수 있는 최고의 멘탈 지침서로도 손색없습니다.  &nbsp;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뜨거움’, 누군가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거나 불가능한 이상에 투신하는 열정이야말로 기술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시대에 되새겨야 할 미덕이 아닐까요.&nbsp;루이즈 미셸처럼 비합리적일 만큼 뜨거운 정의감과 생명에 대한 애정을 가진 인간의 기록을 읽으며 우리의 본질을 확인해봅니다. <br><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150/k302136372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970959</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인문/예술</category><title>낯설고 기이한 프랑스 문화와 그 흔적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10451</link><pubDate>Tue, 24 Feb 2026 07: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10451</guid><description><![CDATA[문화의 힘은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에서.  &nbsp;  간혹 한국에 오래 살고 있는 프랑스인들을 만날 때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프랑스에 대한 오해와 고정관념이 상당하는 것이죠. 프랑스적인 것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프랑스적인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nbsp;  낯설고 기이한 프랑스 문화와 그 흔적들  &nbsp;    &nbsp;  프랑스적인 것, 우리와 동질적인 프랑스적인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프랑스적인 것을 찾으려는 시도로 프랑스 도서를 번역 출간합니다.   &nbsp;  불란서책방은 프랑스라는 국가적 정체성과는 무관하게 문화적 이질성을 탐색합니다. 20세기 초중반 한국 사회에 유입된 문화적 이질성의 상징적 의미를 담은 불란서라는 단어가 현실에서 소비된 경로나 양태는 부정성도 긍정성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불란서책방은 문화적 이질성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을 하려 합니다. 그것이 곧 우리 문화의 내성과 진수를 보여줄 수 있는 바탕이 되겠죠.   &nbsp;  감각을 번역합니다.  &nbsp;  불란서책방은 잊힌 목소리, 낯설지만 아름다운 것, 오래된 질문과 새로 태동하는 감각을 번역합니다. 그 목소리와 감각들이 책의 형태로 다시 숨을 얻고, 독자가 그 페이지 사이에서 오래 머물며 빛을 발견하길 바랍니다. 우리는 책이 건네는 한 줄의 빛을 믿으며, 그 빛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전하는 일을 이어가려 합니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224/pimg_7752871435040108.jpg</url><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10451</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사회</category><title>바리케이드에 핀 붉은 꽃_루이즈 미셸</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06786</link><pubDate>Sun, 22 Feb 2026 15: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06786</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6372&TPaperId=1710678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off/k302136372_3.jpg" width="75" border="0"></a>&nbsp;<br/><br/>역사는 당대의 관습에 도전한 인물들로 가득 차 있지만, '붉은 처녀'로 알려진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만큼 반항 정신과 정의에 대한 헌신을 강력하게 구현한 인물은 드물다. 미셸은 1871년 파리 코뮌 당시의 혁명적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교육, 성평등, 아나키즘을 열렬히 옹호한 인물이기도 했다.<br>용기, 희생, 불굴의 의지로 점철된 그녀의 삶은 사회 정의와 평등을 위한 투쟁의 영원한 증거가 된다. 파리 코뮌에서의 혁명적 역할부터 뉴칼레도니아 유배 생활, 교육에 대한 변함없는 옹호와 폭넓은 기여에 이르기까지, 루이즈 미셸은 영감을 주는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 남아 있다.<br>1871년의 파리 코뮌은 혁명 운동사의 중대한 전환점이며, 루이즈 미셸은 그 중심에 있었다. 1830년 프랑스 브랑쿠르(Vroncourt)의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난 미셸은 오랫동안 정의감과 진보적 이상에 대한 헌신을 키워왔다. 이러한 가치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혼란스러운 여파와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 몰락 과정에서 전면으로 부각되었다.파리가 포위되고 시민들이 극심한 고난에 처하자 통치 계급에 대한 불만이 폭동으로 번졌고, 이는 1871년 3월 파리 코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미셸은 코뮌의 가장 열정적인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그녀는 정치적, 군사적 노력 모두에 깊이 관여하며 혁명적 이상에 대한 두려움 없는 헌신으로 명성을 얻었다.<br>그녀는 코뮌의 방어를 책임지는 조직인 공안위원회에 합류하여, 평등과 정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미셸은 특히 성평등과 노동계급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 목소리를 높였으며, 이는 모든 사람의 존엄성과 잠재력에 대한 그녀의 평생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br>그녀의 역할은 정책 수립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셸은 바리케이드에서 무기를 들었으며, 특히 코뮌의 반란이 처음 불붙었던 장소인 몽마르트르를 방어했다. 그녀의 용기와 헌신은 동료 코뮌 대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녀는 굴하지 않는 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1871년 5월 '피의 일주일' 동안 코뮌이 잔혹한 탄압에 직면했을 때도 미셸은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켰으며, 이는 대의에 대한 그녀의 굴하지 않는 헌신을 증명했다.코뮌 함락 후 미셸은 체포되었다. 그녀는 재판에서 "나를 살려둔다면, 나는 결코 복수를 부르짖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이러한 저항은 억압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는 그녀의 정신을 요약해 보여준다. 그녀의 형량은 먼 식민지인 뉴칼레도니아로의 추방이었다. 1873년 미셸의 뉴칼레도니아 유배는 그녀의 삶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이는 그녀의 혁명적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br>유배 생활은 그녀의 정신을 꺾기는커녕 지적 성장과 연대의 시간이 되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맞서 싸우던 원주민 카낙(Kanak)족과 유대를 형성했는데, 그들의 투쟁은 정의와 평등에 대한 그녀 자신의 신념과 깊이 공명했다. 1870년대 카낙 봉기에 대한 미셸의 지지는 파리에서든 태평양에서든 모든 형태의 억압에 반대한다는 그녀의 폭넓은 헌신을 반영했다.<br>뉴칼레도니아에 머무는 동안 미셸은 이후 그녀의 활동을 정의하게 될 이데올로기인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유배 기간 동안 광범위한 글을 썼으며, 진화하는 정치적 신념을 명확히 하고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기록한 저작들을 남겼다. 이 글들은 유배지의 상황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와 혁명 이론에 관한 폭넓은 담론에도 기여했다.미셸은 1880년 사면을 받아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그녀는 아나키즘을 완전히 수용했으며 억압받는 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뉴칼레도니아에서의 시간은 그녀의 결단력을 약화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전 세계의 불의에 맞선 투쟁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녀의 이해를 깊게 만들었다.<br>루이즈 미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가장 일관된 주제 중 하나는 교육의 변화시키는 힘에 대한 믿음이었다. 파리 코뮌에 참여하기 전에도 미셸은 교사로 일하며 무상 세속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녀는 교육을 권한 부여의 수단이자, 개인들, 특히 소외된 공동체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구조에 도전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았다.코뮌 활동 기간 동안 미셸은 이러한 이상을 반영한 정책들을 옹호했다. 접근 가능하면서도 세속적인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그녀의 우선순위였는데, 지식은 종교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두가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서의 그녀의 활동은 교육을 개인적 성장뿐만 아니라 사회적 변혁을 위한 도구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미셸의 활동은 교육을 넘어 더 넓은 사회 정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그녀는 성평등, 노동자의 권리, 빈곤층의 곤궁을 대변하며 일관되게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의 편에 섰다. 프랑스 귀국 후 그녀의 연설과 저술은 이러한 대의를 더욱 증폭시켰고, 그녀를 아나키스트 운동의 저명한 인물로 만들었다.<br>루이즈 미셸의 유산은 그녀의 생애를 훨씬 넘어 이어진다. 그녀의 용기와 이상은 수많은 운동과 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녀를 저항과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프랑스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으며, 학교, 거리, 심지어 지하철역에도 그녀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녀의 자서전 '루이즈 미셸 회고록(Mémoires de Louise Michel)'을 포함한 저술들은 그녀의 삶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제공하며 혁명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계속해서 연구되고 있다.<br>루이즈 미셸의 영향력은 프랑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육, 평등, 정의에 대한 그녀의 옹호는 전 세계적으로 공명을 일으키며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에 영감을 주고, 역경에 맞서는 회복탄력성의 힘을 상기시킨다. 혁명가, 페미니스트, 혹은 아나키스트 중 어떤 모습으로 비치든 미셸은 불굴의 저항 정신을 구현한다. 루이즈 미셸의 삶은 용기와 지성, 그리고 정의에 대한 흔들림 없는 헌신이 담긴 놀라운 이야기다.<br>파리 코뮌에서의 지도력부터 뉴칼레도니아 유배, 교육에 대한 옹호, 그리고 폭넓은 유산에 이르기까지, 미셸은 사회 운동사의 거인으로 우뚝 서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평등과 정의를 위한 투쟁이 결코 쉽지 않지만 언제나 추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저항과 희망의 상징으로서 루이즈 미셸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영감을 주며, 그녀가 소중히 여겼던 원칙들에 뿌리를 둔 세상을 상상하고 그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br>루이즈 미셸&nbsp;알라딘 북펀드<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150/k302136372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970959</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사회</category><title>루이즈 미셀 저격 사건</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05308</link><pubDate>Sat, 21 Feb 2026 18: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105308</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6372&TPaperId=1710530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off/k302136372_3.jpg" width="75" border="0"></a>&nbsp;<br/><br/>1871년 12월 16일 베르사유의 군사법정(제4군사법정)에서 파리 코뮌 관련 혐의로 재판을 받은 루이즈 미셸의 최후 진술은 일명 “사형요구 연설”입니다. 이 연설에서,&nbsp; “나를 풀어주지 말고, 함께 싸운 동지들과 같은 운명을, 더 나아가 사형을 달라”“내가 당신들 앞에 있는 것은 혁명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를 살려준다면, 나는 패배한 자들을 위해 복수를 외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당신들이 다시 자유의 투사들을 죽이려 한다면, 나는 내 형제들처럼 죽기를 원합니다. 만약 내 목숨을 요구한다면, 나는 그것을 아낌없이 바칠 것입니다.”​​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것은 ‘범죄’가 아니라 민중의 편에 선 정치적 행동이며, 그 책임을 온전히 지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러니, 빅토르 위고가 그녀에게 헌사는 시를 썼겠죠. 제목은 &lt;남자보다 위대한&gt;.오늘의 그 누군가의 재판을 보니, 맞습니다. 분명 어떤 남자보다는 위대합니다.<br>또 하나의 일화, 루이즈 미셸 저격 사건.<br><br><br>1888년 1월 22일 루이즈 미셸은 르아브르(Le Havre)에서 강연하던 중, 피에르 뤼카(Pierre Lucas)라는 인물이 쏜 6.5mm 구경의 권총 탄환 두 발 중 한 발을 왼쪽 귀 뒷부분에 맞았습니다. 당시 의사들은 총탄 제거 수술을 권유했지만 뇌 근처의 총탄을 제거하는 수술이 매우 위험했기에 루이즈 미셸은 수술보다 총탄을 그대로 두는 것을 선택했습니다.1905년 1월 9일 마르세유에서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약 17년 동안 머릿속에 그 총탄을 지닌 채 활동을 이어갔고 사망 후 진행된 부검에서 실제로 두개골 내부에 박혀 있던 총탄이 발견되었습니다. 뇌 조직을 직접적으로 손상시키지는 않았으나, 뼈와 밀착된 상태로 약 17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죠.그녀는 머릿속에 박힌 총탄으로 인해 평생 간헐적인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나를 쏜 불쌍한 자가 준 선물"이라 말했습니다.루이즈 미셸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이 사건의 법정에 나타나 자신을 쏜 범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단지 시대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는 나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불행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을 뿐"이라며 가해자의 무죄 석방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nbsp;"나는 이 총탄을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였다"루이즈 미셸은 자신에게 총을 쏜 피에르 뤼카(Pierre Lucas)를 단순한 범죄자가 아닌,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희생자'로 본 것이죠.&nbsp;그녀는 판사에게 "그를 처벌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또 다른 불행을 만드는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했고 결국 뤼카는 정신 이상 판정을 받아 감옥 대신 수용 시설로 보내졌습니다. 뤼카가 수용 시설에 갇히자 그의 가족이 생계가 막막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루이즈 미셸은 자신의 적은 강연료와 인세를 쪼개어 뤼카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냈고&nbsp; 뤼카에게는 위로의 편지를 보내 그가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고 합니다. 가해자를 증오하기보다 그 가족의 고통을 먼저 살핀 루이즈 미셸.&nbsp;1905년 1월 9일(혹은 10일), 그녀가 마르세유에서 사망한 후 시신은 파리로 운구되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1월22일, 국가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인파가 몰렸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파리 시내에만 최소 10만 명에서 12만 명의 시민들이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일부 기록에서는 운구 행렬을 지켜본 인파를 포함해 25만 명 이상으로 추산하기도 합니다.)<br><br><br>마르세유에서 파리 리옹 역에 도착한 그녀의 관은 붉은 깃발과 검은 깃발(아나키즘의 상징)로 뒤덮였습니다. 노동자, 여성, 빈민층뿐만 아니라 당대의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루이즈 미셸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장례식 당일 파리의 공공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인파가 몰려 경찰조차 통제 포기 상태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파리 외곽의 르발루아-페레(Levallois-Perret) 묘지에 안치되었습니다. 혹 이곳을 들르신다면 꼭 찾아보시길. 루이즈 미셸과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친구 마리 페레와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br>루이즈 미셸 회상록&nbsp;#루이즈미셸<br><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150/k302136372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970959</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사회</category><title>북펀드) 루이즈 미셸</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90575</link><pubDate>Fri, 13 Feb 2026 21: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9057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6372&TPaperId=1709057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off/k302136372_3.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2024년 1월 즈음, 이 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금씩 조금씩 만들었습니다. 회고록인 만큼 본문 안에 많은 인물들에 대한 보충 설명들도 필요할 듯 공부하는 셈치고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루이즈 미셸, 누구인지 모르는 분도 대부분일 거 같습니다. 이 사람에 관한 책도 국내엔 없습니다. 프랑스나 유럽 미국에서의 명성과 이력에 비해 이 쪽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죠. 루이즈 미셸의 이름을 단 파리 지하철 역과 전국의 학교나 문화센터가 200여개 이상인 것으로 봐선 그들에겐 남다른 사람입니다.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뮌을 다루는 역사과정과 시민 교육과정에선 필수적으로 다루는 사람입니다. 삶이 온통 ,,,뭐랄까...싸움이었고 패배였던 사람이랄까...이토록 가슴저린 회고록, 교정을 맡아준 분은 끝내 눈물을 쏟았습니다...<br> <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150/k302136372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970959</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사회</category><title>루이즈 미셸_영웅적인 것은 없다. 사람들은 그저 사건에 매료될 뿐이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59913</link><pubDate>Sat, 31 Jan 2026 13: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5991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6372&TPaperId=170599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off/k302136372_3.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루이즈 미셸은 1886년 1월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 무렵 그녀는 이미 전설적인 존재였다. 폴 베를렌이 그의 시 「루이즈 미셸을 찬양하는 발라드」에서 표현했듯이, 그녀는 "잔 다르크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녀는 "성 세실리아였으며, 가난한 이들의 수호천사이자, 그들의 거칠고 가냘픈 뮤즈"였다.   &nbsp;  이제 50대 후반이 된 미셸은 지칠 줄 몰랐다. 그녀는 시를 짓고 여러 권의 난해한 소설을 썼으며, 끊임없이 연단으로 향했다. 석방된 이듬해 여름, 그녀는 줄 게드, 폴 라파르그, 수시니와 함께 "살인 및 약탈 선동" 혐의로 다시 한번 기소되었다.  &nbsp;  그녀는 정부가 "도둑과 살인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 혐의를 받았다. "도둑은 체포되고 살인자는 죽임을 당한다. 그들을 물속에 던져버려라!" 미셸은 정확히 그 단어들을 사용했다는 점은 부인했으나, 그 어조만큼은 정확하다고 인정했는데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배심원단은 그녀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유죄 확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다시 감옥에 보내는 것은 정부에 심각한 당혹감을 줄 수 있었기에 결국 그녀는 다시 수감되지 않고 사면되었다.  &nbsp;  1888년 1월, 미셸이 르아브르에서 연설하던 중 광신적인 가톨릭교도 브르타뉴인이 그녀를 쏘았다. 왼쪽 귀 뒤에 박힌 총알 부상은 잘 아물지 않았고, 한동안 그녀의 건강은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러나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게도, 미셸은 가해자의 재판에 출석하여 그가 악한 사회에 의해 미혹된 것이라 주장하며 선처를 호소했고, 결국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  &nbsp;  미셸 생애의 이 시기는 블랑키스트 운동의 정점과 일치했다. 이 정치적 현상은 좌파에서 시작되어 세월이 흐르며 우파로 이동했으며, 제3공화국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 특히 마지막에는 독일에 대한 복수를 원하는 이들을 하나로 묶었다. 미셸의 일반적인 원칙대로라면 이 운동의 최종 단계에 반대해야 했으나, 그녀는 개입을 피했다. 아마도 그녀의 친구 앙리 로슈포르가 열렬한 블랑키스트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인 게드처럼 미셸 역시 블랑키 운동을 그저 부르주아들의 투쟁일 뿐이며, 따라서 혁명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nbsp;  미셸은 제3공화국이라는 공통의 적을 둔 무정부주의자들과 왕당파들의 일시적인 동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녀를 통해 왕당파들은 무정부주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전달했다. 일부 왕당파들은 1917년 독일인들이 레닌을 이용했듯이 분명 미셸을 이용하고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일으키는 어떤 혼란이든 왕당파들의 명분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셸은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그 상황에 전적으로 만족했다. 이제 그녀의 주요 적은 왕당파들이 아니라, 그녀가 혐오했던 '기회주의적' 공화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긴 '현실적 개혁주의자-가능주의(Possibilist)' 사회주의자들이었다.  &nbsp;  오늘날 보통 점진적 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가능주의자들은 소규모 개혁을 통해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완화하고 체제 내에서 권력을 쟁취하기를 희망했다. 미셸은 사실 가능주의자들이 부르주아를 자신들로 대체하려는 것 이상의 목표가 없다고 믿었다. 게다가 그들이 지지하는 소소한 개혁들은 사회 혁명을 지연시킬 뿐이라고 생각했다.  &nbsp;  1889년 제2인터내셔널 창설 과정에서의 문제들은 이러한 이론적 차이를 잘 보여주었다. 제1인터내셔널은 외부의 탄압과 내부의 분열로 인해 이미 수년 전부터 빈사 상태였다가 1876년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소멸 이후 제1인터내셔널은 생전에는 얻지 못했던 실효성 있다는 명성을 얻고 있었고, 프랑스 혁명 100주년인 1889년, 이를 재건하기 위해 파리에서 가능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두 국제회의가 동시에 개최되어 대의원들이 양쪽을 오갔다. 미셸은 조직이나 조직 정치에 대한 관심 부족 때문인지 이 회의들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nbsp;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의 혼란스러운 창립 과정에서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노동절(May Day) 시위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1880년대 후반까지 미셸은 가난한 이들이 사회 혁명을 달성할 수단으로 '대파업(La grande grève)'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산업과 상업의 모든 분야를 중단시키고 마침내 사회 혁명을 이끌어낼 것"이었다. 대파업에 대한 꿈에도 불구하고, 노동절 시위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제한적이었다. 시위의 목적이 민중의 봉기를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좌파를 홍보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미셸은 더 이상 군중을 확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분명 그녀는 점점 더 '행동에 의한 선전'과 소수 엘리트에 의해 고무되고 이끌리는 직접 행동에 대한 믿음으로 기울고 있었다.  &nbsp;  하지만 미셸은 늘 그래왔듯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고, 1890년 노동절 시위 참여를 준비하던 중 행사 전날 체포되었다. 분노와 좌절감에 휩싸인 그녀는 감방의 가구들을 부수었고, 당국은 그 행동을 구실 삼아 그녀를 정신 이상자로 몰아 수용하려 했다. 불분명한 이유로 내무부 장관 콩스탕이 직접 개입하여 수용 절차를 중단시키고 그녀를 석방했다.  &nbsp;  미셸은 즉시 영국으로 떠났고, 189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마도 거의 성공할 뻔했던 정신병원 수용 절차가 그녀를 겁나게 했을 것이다. 수용되는 것은 그녀가 수년 동안 품어온 공포였다. 어쩌면 그저 지쳤을 수도 있다. 어쨌든 영국은 외국 망명객들의 전통적인 안식처였고, 불랑제 운동 붕괴 후 망명한 로슈포르도 그곳에 있었다. 로슈포르는 그녀에게 생활비를 대주었고, 크로포트킨은 가능한 도움을 주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녀는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영국의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 애썼으며—늘 그렇듯 수중에 돈이 생기면 요청하는 이들에게 즉시 나누어 주었다—런던의 최악의 슬럼가에서 "선한 여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nbsp;  그녀는 프랑스에서 무정부주의가 가장 악명을 떨쳤던 1890년부터 1895년 사이, 단, 한 번 짧게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 시기는 프랑스가 매일같이 폭탄 테러의 공포 속에 살던 때로, 1892년 봄 라바숄의 폭파 사건부터 1893년 12월 하원 의사당 폭발, 1894년 2월 카페 테르미누스 폭발에 이르기까지 가장 잔혹한 기간이었다. 미셸은 여성과 아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폭탄 테러에는 반대했지만, 무력 사용 자체는 계속해서 승인했다. 그녀는 라바숄을 "현대 전설의 영웅"이라 불렀고, 나중에는 하원 의사당 폭파도 승인했다.  &nbsp;  1895년 미셸은 프랑스로 돌아와 7개월 동안 강연을 하고 시를 썼다. 이듬해 여름 그녀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제명을 확정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미셸은 그 진행 과정과 마르크스주의 정통성의 강요에 경악했다. 그녀는 그 회의가 "가장 훌륭하고 지적이며 헌신적인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라도 그가 대체하는 그 누구보다 더 나빠질 것임을 증명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오류성을 주장하고 파문을 일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능주의자들과의 결별처럼, 미셸과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단절도 완전해졌다.  &nbsp;  1897년 봄, 67세가 된 미셸은 프랑스 전역을 도는 대규모 강연 투어를 가졌다. 프랑스에서는 드레퓌스 사건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으나, 미셸은 비밀 재판과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는 했어도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신념이 일시적으로 약해졌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는 40년 동안 혁명을 설교하거나 그 죄로 감옥에 갇혀 지내왔다. 게다가 청중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nbsp;  점점 쇠약해지는 건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02년 5월 프랑스에서 새로운 강연 시리즈를 시작했고, 런던에서의 짧은 휴식을 제외하고 1903년까지 이어갔다. 당시 그녀가 수년 동안 매료되었던 러시아는 혁명의 직전에 와 있는 듯 보였고, 특히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이후 그곳의 사건들은 그녀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단호한 반군주제주의자였던 미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 없는 전쟁이 사회 혁명의 시작을 가져올 기회라는 점에 기뻐했다. 그녀는 1904년 2월과 3월 초 프랑스에서 더 많은 강연을 했으나, 그 후 중병에 걸렸다.  &nbsp;  그녀는 회복되었고, 대중이 치명적일 것이라 예상했던 그녀의 병세가 널리 알려진 후 전설적인 인물을 보기 위해 과거처럼 엄청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아마 사람들은 이제 전설을 보러 온 것일 뿐이었겠지만, 어쨌든 수많은 이들이 모여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연말에 그녀는 알제리로 떠났고, 프랑스로 돌아오던 중 마르세유에서 병이 났다. 이 병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1905년 1월 9일, 그녀는 마르세유의 호텔 드 로아지스(Hotel de l'Oasis)에서 사망했다.  &nbsp;  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좋아했을 법한 장관 중 하나가 되었다. 적기와 수많은 꽃, 그리고 노동조합, 사회주의 단체, 무정부주의자, 반종교 단체 대표 등 2,000명의 조문객과 함께 장례 행렬은 마르세유에서 묘지까지 1킬로미터에 달했다. 추모식이 프랑스 전역과 런던 등지에서 거행되었다. 1월 20일 그녀의 유해는 이장되어 파리로 옮겨졌고, 이틀 후 르발루아 페레(Levallois-Perret)에 있는 어머니 곁에 묻혔다. 언론은 이것이 빅토르 위고의 사망 이후 최대 규모의 장관이었다고 전했다. 바로 그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군중이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려다 벌어진 대학살은 또 다른 '피의 일요일'로 영원히 각인되었다는.  &nbsp;  오늘날 미셸의 고향인 브롱쿠르(Vroncourt)에는 그녀의 동상이 서 있고, 마을을 지나는 거리에는 그녀의 이름이 붙어 있다. 르발루아 페레에 있는 그녀의 묘지는—1905년에 묻힌 곳이 아니라 1936년 인민전선 시절에 옮겨진 새 묘지이다—여전히 익명의 손길이 놓아둔 꽃들로 채워져 있다. 당국은 그녀의 이름을 딴 지하철역과 거리도 만들었지만, 둘 다 파리시 경계를 바로 넘어서 그 바깥에 걸쳐 있다.  &nbsp;  그녀는 이제 전설이다. 그녀가 그 전설의 일부를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루이즈 미셸은 영웅적이었으나, 그녀 자신이 말했듯 "영웅적인 것은 없다. 사람들은 그저 사건에 매료될 뿐이다."<br><br> <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150/k302136372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970959</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인문/예술</category><title>식습관이 곧 형이상학이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58529</link><pubDate>Fri, 30 Jan 2026 22: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58529</guid><description><![CDATA[프랑스의 대중 철학자(이 용어가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표현을 philosophes actuels라고 하니)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가 1989년에 발표한 『철학자의 뱃속(Le Ventre des philosophes)』, 원제는 철학자들의 배, 위장, 대략 그런 의미다.  이와 비슷한 책은 거의 없을 정도다. 당시에도 상당히 도발적이란 평가를 받았는데, 등장하는 철학자들에 대한 평가 측면에서 그런 듯하다. 어떻든 '미식 철학(Gastrosophie)' 서적이라고 정의해본다.​ "먹는 것이 곧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옹프레는 이 책에서 프랑스 현대 철학이 그랬든,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무시해온 '신체'와 '음식'을 철학의 중심부로 끌어들인다. 그는 철학자의 사상이 단순히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소화하며, 어떤 식습관을 가졌는지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 언뜻 하나마나한 이야기 같지만 먹는대로 생각한다는 거 이거 쉽지 않은 거다.  ​다른 말로하면 또 역으로 "식습관이 곧 형이상학이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br><br><br>등장하는 철학자들은 대략 이렇다. 주요하게 한 챕터씩 차지한 철학자 말고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사드 등등. 옹프레는 꽤 치밀하게 조사한 철학자들의 사례를 통해 그들의 식탁과 사상의 상관 관계를 분석한다.​거칠게나마 소개하면, 좀 정형적인 소개이긴 하나 덧붙인다.디오게네스: 날것의 철학. 날것(문명에 대한 거부)을 먹음으로써 사회적 관습을 타파하려 했던 견유학파의 철학을 소개하며 생각하는 것과 먹는 것의 완벽한 일치의 예를 선보인다.루소:  우유와 채소의 순결주의. 채식과 유제품을 선호했던 그의 식단이 어떻게 자연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순결주의로 이어졌는지 분석.칸트: 규칙과 대화의 식탁. 그러나 젊은 시절 칸트는 완전 주당으로 밤거리에서 집으로 엎혀온 사람사람. 점점 엄격한 식사 시간과 절제된 식단, 그리고 식탁에서의 대화를 중시했던 모습이 그의 체계적이고 의무 중심적인 비판 철학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고찰하고 있다.니체: 소화불량과 초인의 식단. 위장 장애로 고생하며 식단 조절에 집착했던 니체의 개인적 고통이 그의 허무주의 극복과 초인 사상에 어떤 생리학적 배경이 되었는지 탐구. 어머니가 뭐 좀해먹으라고 독일제 식료품과 특히, 주방기구까지 바리바리 싸 보냄. 근데 식욕부진과 식욕 사이에서 분열증.푸리에: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푸리에가 꿈꾼 '미식적 유토피아'를 통해 욕망의 해방을 논한다. 어마어마한 상상력, 직접 확인해보시길, 음식으로 이런 정치사회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예는 없었지 않나 한다.마리네티 (미래주의자): 요리도 예술처럼 파괴적이고 혁신적이어야 한다고 주장,  '파스타 폐지론'을 펼쳤던 인물. 마리네티 미래파 선언에 관련된 내용을 참고할 수 있음.사르트르: 갑각류 혐오와 통조림 실존주의. 옹프레는 사르트르의 식습관을 '점성에 대한 공포'와 연결 지어 설명한다. 갑각류에 대한 혐오라 표현했는데 게나 바닷가재 같은 갑각류를 극도로 혐오했다. 옹프레는 이를 사르트르가 가진 '속이 비어 있지 않고 꽉 찬 존재', 혹은 '끈적거리는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거부감으로 해석한다. 사르트르는 자연 상태의 음식보다 통조림이나 소시지처럼 인간에 의해 완전히 가공되고 형태가 변한 음식을 선호했다. 이는 자연(즉자)에 의해 압도당하지 않으려는 자유로운 인간(대자)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것일 수도 있다. 사르트르의 '게'에 대한 공포는 그의 철학적 개념인 '구토'와도 긴밀하게 연결되는 지점이라 옹프레의 분석 중에서도 특히 백미로 꼽힙니다. 잘 먹지도 않고 씻지도 않았던 사람. 사르트르 외에도 옹프레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짧게 다루며 자신의 논리를 보강한다.에피쿠로스: 미셸 옹프레 철학의 근간인 쾌락주의의 아버지. 흔히 '쾌락주의'로 오해받지만, 사실은 빵과 물만으로도 충분한 '최소한의 쾌락'을 추구했던 철학자. 사드 후작: 미셸 옹프레는 이 책에서 그를  '감옥 속의 미식가'이자, 음식을 철저하게 '권력과 통제의 도구'로 사용한 인물로 조명한다. 옹프레가 분석한 사드의 미식 철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인생의 오랜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사드는 외부에서 들여오는 음식에 병적으로 집착했습니다. 옹프레는 사드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을 분석하며, 그가 요구했던 구체적인 요리 목록(특히 초콜릿과 단 음식들)이 단순한 식욕이 아니라 박탈당한 자유를 회복하려는 의지였다고 본다.사드에게 음식은 성적 욕망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옹프레는 사드의 문학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연회들이 어떻게 미식적 쾌락을 넘어 타자를 지배하고 파괴하는 소모적인 축제로 변질되는지 설명.( 미식과 에로티시즘의 결합) 특히 사드는 초콜릿에 집착했는데, 옹프레는 이를 그의 어둡고 무거운 욕망을 상징하는 검은색의 연금술적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초콜릿에 대한 갈망) 사드 후작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인간의 욕망이 가장 극단적인 상황(감옥)에서 어떻게 '미식'이라는 형태로 표출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대목. ​철학자의 뱃속을 통해서 본 저자 미셸 옹프레의 철학은 반(反)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이성이나 영혼 같은 추상적인 개념만 숭상하던 기존 철학의 권위를 해체하는 대신 '입, 위장, 항문'으로 이어지는 신체적 과정을 통해 철학을 다시 읽어낸다(프랑스 철학 전통에서 멀지 않다). 인간을 먹고 마시는 생물학적 존재로 규정하며, 사상 또한 생리적 현상의 연장선에 있음을 강조하는 유물론적 관점으로 음식과 요리를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을 결정짓는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격상시키면서 철학적 미식학의 진정한 시초를 알렸다는 평가.​​『철학자의 뱃속』이 책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사실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엄숙하고 딱딱한 철학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신체의 철학'을 맛보고 싶은 독자에게 매우 흥미로운 작품. 미셸 옹프레는 철학자들의 '신체적 욕망'을 통해 사상을 해부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책으로 1989년 'Prix de l'Union des éditeurs de langue française'(프랑스어 출판 연합상)를 수상하며 철학계에 화려하게 데뷔. 옹프레는 1959년생이니(2026년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되었으니...시끄러운 사람..), 만 30세가 되던 해에 이 책을 출간한 셈입니다. 당시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그들의 식탁을 통해 해부한다"는 접근법으로 대중과 비평가 모두에게 큰 찬사를 받았다는데 당시 판매량 40만부라고.#미식철학 #미식가 #철학자 #음식철학 #미식 #미셸옹프레 #철학자의뱃속 #책 #책추천<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130/pimg_7752871435014365.png</url><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58529</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영화/연극</category><title>진화하는 괴물의 형상</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53971</link><pubDate>Wed, 28 Jan 2026 23: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5397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82934297&TPaperId=1705397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070/78/coveroff/k98293429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뱀파이어 이미지에 관한 생각』 은 뱀파이어라는 매혹적이고도 기괴한 존재가 인류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어떻게 형상화되고 소비되어 왔는지를 다각도로 조명한 인문학 서적이다.이 책은 단순히 괴물로서의 뱀파이어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적 맥락에 따라 변화해 온 뱀파이어의 '이미지'와 그 속에 투영된 인간의 욕망, 공포, 그리고 사회적 함의를 분석한다.​진화하는 괴물의 형상​ 민담 속의 흉측한 시체에서 시작해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거쳐, 현대의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뱀파이어 이미지의 변천사를 다룬다. 회화, 문학,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에서 뱀파이어가 어떻게 재현되는지, 특히 고전 영화와 현대 대중문화 속 뱀파이어의 차이점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뱀파이어는 인간 사회의 '타자'를 상징한다. 책은 뱀파이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동시에 무엇을 갈망하는지를 인문학적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 뱀파이어의 원형이 된 동유럽의 민담과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어떻게 흡혈귀 전설로 둔갑했는지, 19세기 문학을 통해 뱀파이어가 어떻게 세련된 '귀족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는지 분석하며 오늘날의 뱀파이어가 더 이상 공포의 대상만이 아니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고뇌를 하거나 대중의 선망을 받는 아이콘이 된 과정을 추적한다.​이 책은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통해 '본다는 것'과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한다.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독자뿐만 아니라, 기호학이나 시각 문화 이론에 흥미가 있는 독자에게도 유익한 통찰을 제공한다.​<br>저자 김성태는 뱀파이어라는 렌즈를 통해 인간 문명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단순한 장르 비평을 넘어 이미지가 권력을 획득하고 변화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한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와 대중적 재미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070/78/cover150/k98293429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0707862</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영화/연극</category><title>글은 이렇게 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53854</link><pubDate>Wed, 28 Jan 2026 23: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53854</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032825&TPaperId=170538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5/50/coveroff/k51203282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글은 이렇게 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이 글들은 영화에 관한 글이지만, 뭐에 관한 글이든 그렇습니다. 문자로도 가감없습니다. 문자가 씌여졌다고 실재하는 건 아닌거겠죠. 그럴 때가 더 많겠습니다만, 결국 문자 안에서 실체는 드러납니다.실재하는지 실재하지 않는지. 그것이 살이고 피여서,  살아 움직이는지. 그런 글이 있습니다. 아니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책입니다. 무엇을 쓰더라도, 이렇게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글입니다. 그건 저만의 생각입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br><br> <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5/50/cover150/k51203282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5155047</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영화/연극</category><title>배우를 꿈꾸는 당신에게 필요한 책</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53838</link><pubDate>Wed, 28 Jan 2026 23: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53838</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930037&TPaperId=170538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928/5/coveroff/k262930037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br>배우를 꿈꾸는 당신에게, 혹은 이미 무대에 서고 있지만 무언가 갈증을 느끼는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바로 리처드 볼레스라브스키(Richard Boleslavsky)의 『연기 6강(Acting: The First Six Lessons)』입니다.​1933년에 처음 출간된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연기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필수 교재로 남아있습니다.지금도 할리우드 배우들부터 연극 무대의 신인 배우들까지, 수많은 세대의 배우들이 이 책을 통해 연기를 배우고 예술가로 성장해왔습니다.​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할리우드까지​저자 리처드 볼레스라브스키는 폴란드 출신의 배우이자 연출가로, 러시아 모스크바 예술극장(Moscow Art Theatre)의 멤버였으며 제1스튜디오의 연출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1920년대 미국으로 건너와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서구에 처음으로 가르친 선구자가 되었습니다.볼레스라브스키는 뉴욕에서 아메리칸 랩 시어터(American Laboratory Theatre)를 설립했고, 그의 제자들 중에는 훗날 미국 연기계의 전설이 된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와 스텔라 애들러(Stella Adler)가 있었습니다. 그는 브로드웨이 무대는 물론 1930년대 할리우드의 주요 영화감독으로도 활약했던 연극과 영화를 아우른 거장이었습니다.​여섯 번의 레슨, 한 편의 드라마처럼​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그 형식에 있습니다.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라, 선생과 학생이라는 두 인물 사이의 대화로 구성된 여섯 편의 미니 드라마입니다. 마치 한 편의 희곡을 읽는 듯한 생동감 있는 대화 속에서 연기의 핵심 원리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집니다.​여섯 가지 레슨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집중(Concentration)&nbsp;- 배우의 영혼을 향한 집중감정의 기억(Memory of Emotion)&nbsp;- 진실한 감정을 불러내는 법극적 행동(Dramatic Action)&nbsp;- 공원을 산책하며 배우는 행동의 본질성격화(Characterization)&nbsp;- 인물을 창조하는 과정관찰(Observation)&nbsp;- 차 한 잔을 나누며 세상을 보는 법리듬(Rhythm)&nbsp;- 무대 위 생명의 흐름​각 레슨은 학생의 경력에 따라 이루어지며, 매번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어떤 때는 스튜디오에서, 어떤 때는 공원을 걸으며,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차를 마시며 대화가 진행됩니다.가르치기 어렵기로 악명 높은 기술과 실천을 우아하게 표현한 것으로 사랑받고 있는 이 책은 초보 배우부터 경험 많은 전문 배우까지 모두에게 필수적인 독서로 여겨집니다.​볼레스라브스키는 말합니다. "연기는 예술을 통해 탄생하는 인간 영혼의 삶이다." 창조적 극장에서 배우가 집중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인간의 영혼입니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야만 인식할 수 있는 것, 삶에서는 가장 큰 감정과 격렬한 투쟁의 순간에만 드러나는 것입니다.​미국의 드라마 평론가이자 작가, 존 메이슨 브라운(John Mason Brown)은 이 책에 대해 "배우들이 해야 할 일은 젊든 늙었든 이 책을 사는 것이다. 이 책은 어떤 저서보다도 연기의 예술을 더 많이 탐구한다"고 평했습니다.​배우의 길을 걷고 있거나, 연기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에게 이 작은 책은 보물 상자와 같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안에 담긴 지혜와 통찰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928/5/cover150/k26293003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9280526</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사회</category><title>몽마르트의 붉은 처녀, 루이즈 미셸이 꿈꾼 공화국</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36519</link><pubDate>Wed, 21 Jan 2026 22: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36519</guid><description><![CDATA[마르크스가 대영박물관에 앉아 팜플렛을 쓰고 있을 때, 미셸은 파리의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프랑스 정부군과 맞서고 있었다. 그녀의 동시대 인물들이 이제 막 식민주의를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뉴칼레도니아의 죄수 신분으로 1878년  원주민 봉기에 참여했다. ​오늘날까지도 1871년 파리 코뮌 당시 '붉은 처녀'로 명성을 얻은 루이즈 미셸은 프랑스 인의 가슴에 남아있다. <br><br><br>그녀가 남긴 이 회고록은 인간의 꿈을 향한 기념비로 서 있다. 변방의 보잘것없는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가 자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교조적 이론이 아닌 마음에 이끌려 자신의 자유까지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음을, 미셸은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1830년 5월 29일 사생아로 태어난 루이즈 미셸은 오트마른(Haute-Marne)에 있는 반쯤 허물어진 요새화된 저택에서 어머니와 친조부모의 손에 자랐다. 그녀의 친할아버지 에티엔 샤를 드마이(Etienne-Charles Demahis)는 귀족의 후손이었으나, 1789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공화주의적 지지의 표시로 자신의 성을 '드 마이(De Mahis)'에서 덜 화려한 '드마이(Demahis)'로 바꾸었다.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인인 마리 안(또는 마리안) 미셸과 더 이상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그의 아들 로랑 사이에서 루이즈가 태어났을 때 브롱쿠르(Vroncourt) 마을의 시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루이즈는 마치 적통인 드마이 가문의 손녀처럼 양육되었고, 친조부모가 사망한 후 여교사가 되어 처음에는 오트마른에서, 나중에는 파리에서 가르쳤다. 그녀는 혁명적인 꿈을 꾸기 시작했고, 루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2제국이 황혼에 접어들 때 급진적인 활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과 프로이센의 파리 포위 공격 당시, 그녀는 수 세기 동안 불만을 품은 빈민들이 거주해 온 몽마르트르 지역 혁명 단체의 주요 일원이었다.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파리 시민들이 정부가 자신들의 공화국을 훔치려 한다고 믿고 반란을 일으킨 파리 코뮌 기간 동안, 미셸은 사건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며 봉기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피의 일주일’ 1871년 5월 베르사유 정부군이 코뮌을 진압했을 때, 미셸은 붙잡혀 재판을 받고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1873년 죄수 호송선을 타고 뉴칼레도니아로 이송되었다. 6년 동안 수도 누메아 인근의 형벌 식민지에서 가혹한 조건 속에 살았으며, 이후 수도에서 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며 지냈다. 여론의 압박에 따라 정부가 코뮌 가담자들에게 내린 1880년 일반 사면령 이후,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와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미셸이 귀국했을 때 거대한 대중 집회가 그녀를 맞이했으나, 그녀가 혁명진영 내에서 자리를 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지난 10년 동안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무지했고, 급진 세력 내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얻은 인물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그 어떤 '전설'에게도 내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얻는 대중적 지지는 여전히 엄청났으며, 이후 몇 년간 파리와 지방, 그리고 해외에서 열린 그녀의 강연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소란을 이룰 정도였다.​1882년 미셸은 치안 문란 죄로 체포되어 2주간 감옥에서 보냈다. 이어 1883년 봄, 앵발리드에서 열린 ‘빵과 일자리’시위 직후, 그녀는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들고 파리 전역에서 군중을 이끌었다. 그녀는 폭동을 일으키고 추종자들에게 빵집 약탈을 선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실질적인 변론을 거부한 그녀는 6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3년 후 사면된 그녀는 단호하게 강연과 집필 활동을 이어갔으며, 급진적인 대중은 그녀를 '위대한 시민(la grande citoyenne)'으로 예우했다. 1890년부터 1905년까지 영국에 머물며 유럽을 돌며 강연 투어에 나섰으며 1905년 그녀가 사망했을 때도 강연 투어 중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수만의 인파가 참여한 가운데 프랑스의 3대에 걸친 혁명 정서가 거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루이즈 미셸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어린 시절 억압받는 이들에 대해 품었던 막연한 동정과 이후 유토피아적 혁명에 바쳤던 막연한 헌신을 거쳐 무정부주의라는 신념에 도달했다고 선언한다. 그녀는 훗날 자신의 무정부주의로의 전향이 죄수 호송선 비르지니(Virginie)호를 타고 뉴칼레도니아로 가던 넉 달의 항해 중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을 개종시킨 나탈리 르멜(Natalie Lemel)과 여정을 함께했었다. 미셸은 회고록에서 1883년 1월 무정부주의자들의 '리옹 선언문'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기술한다. 그녀는 회고록에 "나는 그곳에 기록된 모든 사상을 공유한다"라고 적으며 해당 문서의 전문을 인용했다.하지만 미셸의 무정부주의는 이론적이라기보다 감성적이었다. 사실 그녀는 당대와 과거의 혁명 저작물들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녀가 라메네(Lamennais)를 읽은 것은 확실하며, 프루동(Proudhon)을 읽었을 가능성도 크다. 블랑키(Blanqui)나 바쿠닌(Bakunin)의 사상은 당시 널리 퍼져 있었기에 당연히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들의 저작을 직접 읽었을 가능성은 낮다. 마르크스주의는 회고록에서는 거의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데, 이는 그녀가 마르크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이 회고록 출간 수년 후인 1890년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유권에 대한 관점, 착취에 대한 인식, 과학의 역할에 대한 주장, 그리고 인류의 근본적인 선함에 대한 비전에서 전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사회 혁명에 대한 염원에서도 그녀는 그 형태와 성격에 대해 일관적이었다. 즉, 혁명이란 불의와 착취에 대항하여 민중이 일으키는 자발적인 봉기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민중의 자발적 봉기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간접적으로나마 그녀가 많은 무정부주의자가 택했던 테러의 승인에서 한 발 비켜나가게 한다. 암살은 도구로서 아주 가끔만 언급한다. 한 번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살해하는 것을 논했고, 또 다른 때는 아돌프 티에르를 암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두 사람을 살해하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준비는 하지 않았다. 이와 유사하게, 그녀가 폭발물을 사용한 유일한 사례는 동상을 폭파하려다 실패한 시도뿐이었다. 그녀는 "폭군 살해는 폭정의 머리가 하나이거나 기껏해야 적은 수일 때만 실용적이다. 그것이 히드라(머리가 여럿인 괴물)일 때는 오직 혁명만이 그것을 해낼 수 있다"라고 적었다. 그녀는 혁명의 모든 지도자가 혁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전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도 언급했는데, 그래야만 민중이 살아남은 참모진과 다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면 어떻게든 무정부주의적 꿈이 실현되리라는 것이었다.​E. H. 카(E. H. Carr)의 적절한 표현을 빌려 "낭만주의 교리의 논리적 결말"이라고 불리는 무정부주의는 정의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그 핵심—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모든 형태의 정치 조직에 대한 혐오, 인간의 타고난 선함에 대한 믿음—은 미셸의 생각과 너무나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미셸이 무정부주의를 찾은 것인지 무정부주의가 미셸을 찾은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회고록을 집필할 당시 그녀는 진보가 필연적이며, 정부는 그 어떤 정부든 악하다는 점을 확고하게 믿었다. "권력은 악이다"라는 그녀의 진술은 모든 무정부주의 체계의 핵심을 형성한다.그녀는 역사를 자유로운 인류가 어떻게든 노예화되어 온 이야기로 보았으며 과거에 대한 관심은 미래에 대한 희망만큼이나 컸다. 과거에 대한 그녀의 비전이 비록 신화와 괴물로 가득 찬 낭만적인 것이었을지라도, 그것은 미래에 대한 그녀의 낭만적인 꿈과 쉽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녀에게 과거와 미래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안타깝지만, 미셸의 희망—그리고 역사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라는 낭만적인 꿈은 미래의 물결이 아니라 쇠퇴해가는 세력이었다. 수치상으로 볼 때 프랑스에서 무정부주의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1890년대의 폭력 사태 이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의 기간이었으나, 그 수십 년 동안 무정부주의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힘은 노동자 자치조직(Bourses de Travail), 다양한 노선과 전략을 품은 노동총연맹(CGT), 그리고 정파 간의 내분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루이즈 미셸이 꿈꾸었던 무정부주의, 즉 사회 혁명과 착취의 종말로 이어지는 형태 없는 민중 봉기는 세부 사항과 방법론을 둘러싼 화해 불가능한 말다툼 속으로 사라졌다. 그 꿈은 흩어지더니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미셸은 이론가가 아니었던 것처럼 조직가도 아니었다. 시위와 조직을 구상하는 초라하고 어두운 방들은 미셸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녀는 1882년 한 연설에서 "모든 혁명이 불충분했던 이유는 그것들이 정치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조직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는데, 가까운 시점에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압도적인 수와 의지의 힘, 그리고 그들 명분의 정당성을 통해 구체제가 자신들 앞에서 시들어 버리게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론가도 조직가도 아니었던 미셸은 프랑스 급진파들 사이에서 또 다른 역할을 채웠다. 베를렌은 그녀를 "잔 다르크에 가까운 인물"이라 불렀다. 무정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분명 낭만주의자였던 빅토르 위고는 어느 시의 초고 제목을 '루이즈 미셸'이라고 지었으며, 「남자보다 위대한(Viro Major)」으로로 제목이 바뀐 이 긴 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아는 이들은 알리라... 모두를 위해 바쳐진 당신의 나날들, 밤들, 심려들, 눈물들을, 타인을 돕느라 스스로를 잊어버린 당신을, 사도의 불꽃과도 같은 당신의 언어들을, 비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향한 당신의 긴 증오의 시선을, 그리고 당신의 두 손으로 녹여주던 아이들의 발을..."위고는 미셸이 영웅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은 일은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위고는 미셸이 다음과 같은 존재라고 결론지었다."...두 정신이 뒤섞인 존재 ...거대하고 폭풍우 치는 심장 밑바닥에서 보이는 별과 같은 것들의 신성한 혼돈 ...불꽃 속에서 보이는 광채당신은 여인의 몸을 하고 있지만, 그 영혼은 위대한 남성(Viro Major)보다 더 거대하다."모든 운동에는 예언자와 입법자, 죄인과 변절자, 순교자와 성인이 필요하다. 프랑스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미셸은 순교자이자 성인—즉, '붉은 처녀'였다.미셸의 지적 호기심은 엄청났고 지식에 대한 갈증은 갈구해도 끝이 없었다. 그녀의 회고록 전반에는 음악, 악기, 교수법, 동물 학대, 여성의 지위, 카나리아 제도에서 통용되는 화폐, 곤충, 카나크 원주민 인류학, 날씨, 식물학 등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주제들이 흐르고 있다. 목록은 끝이 없다. 어린 시절 그녀는 자신의 탑 방에 동물 해골을 수집했다. 파리에서 여교사로 지낼 때는 바쁜 수업 일정에도 불구하고 물리, 화학, 역사, 심지어 법학 수업까지 청강했다. 감옥에서는 책과 시를 썼고, 뉴칼레도니아에서는 동식물의 목록을 작성하고 파파야 나무의 황달병 예방 접종을 실험하기도 했다.그녀가 회고록에서 드러낸 내면의 삶은 분명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전설, 맹수, 민속 영웅들이 그녀의 환상 속에서 뒤섞였으며, 그녀는 자신의 환상과 현실을 결코 구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초기 생애가 "꿈과 학업으로 이루어진" 시기였으며, 이는 삶의 두 번째 부분인 "투쟁의 시기"를 위한 준비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파리 포위전과 코뮌이라는 깨어 있는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던 대로 행동했다. 꿈과 행동은 하나였으며,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 둘은 외견상 구분이 불가능했다. 어린 시절에 놀이처럼 상연했던 교수대 연극의 연설을 그녀는 1871년 재판관들 앞에서 실제로 쏟아냈다.​사람들은 자신만의 드라마를 만들고 그 안에서 주연을 맡기 마련인데, 미셸은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드루이드 여사제, 발키리, 베스탈 처녀(성스러운 처녀)로 여겼으며, 기이한 악령과 신비로운 환영 등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그녀의 실재 삶 속을 지나갔다. 1860년대의 어느 날, 그녀는 친구 빅토린과 함께 어린 시절 집 근처의 깊은 숲속을 걸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숲속을 거의 소리 없이 가로지르며 늑대 한 마리가 그들 곁에서 발맞추어 걸었다고 한다. 늑대가 정말 그곳에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1860년대에는 오트마른 지역조차 늑대의 수가 적었으나, 그 맹수는 미셸의 마음속에 분명하고 진실하게 존재했다.​본문의 주요 준비 과정이 감옥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셸이 공적인 기록이 있는 사건들을 서술할 때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뉴칼레도니아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투옥되지 않았을 때조차 매일 경찰 요원들의 감시를 받았다. 그들의 보고서가 남아 있기에, 1881년부터 1883년까지 그리고 1886년부터 1889년까지의 그녀의 삶은 객관적이지는 않을지언정 뒷받침할 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과 여교사 시절에 대해서는 그녀의 기억이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그녀가 묘사하는 일부 태도들은 오직 그녀의 입을 통해서만 진실로 남을 것이다. 아마도 미셸은 환상을 구축한 뒤 그것을 실현하며 살았거나, 혹은 회고적으로 환상을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회고록 집필자 외에 자기의 삶을 다시 한번 살 기회를 얻는 사람은 거의 없다.​미셸은 회고록이 빠지기 쉬운 자기과시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우며, 심지어 자신의 중요성을 소홀히 다루기까지 한다. 그녀는 코뮌 기간 여성 감시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파리 포위 공격(파리 포위전-보불전쟁) 당시 그녀는 조르주 클레망소의 도움 덕분에 약 200명의 아이를 보살피며 일상적인 복지를 책임졌고 그 일을 아주 잘 해냈으나, 그녀의 회고록에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비록 그녀의 재판 중 하나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뉴칼레도니아 유배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런던에서 열린 크로포트킨의 국제 회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했다. 그녀는 그 여행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곳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때때로 그녀의 회고록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장엄한 몸짓으로 매혹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그것이 정확한 사실이 아닌 경우도 있지만, 1886년의 이러한 서술들은 루이즈 미셸이 자기의 삶을 진정으로 바라보았던 방식이거나, 혹은 타인에게 드러내려 했던 방식을 나타낸다. 그 효과란 그녀에세 선전의 의미일 것이며 어쩌면 그녀 스스로도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회상록은 미셸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뜬 상황에서 쓰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쉰여섯 살의 이 혁명가는 모든 것을 혁명에 희생했다. 아마도 자신이 처한 현재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녀는 어린 시절의 자아를 훗날의 혁명가 모습으로 소급하여 만들 수밖에 없었을지도. 이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할아버지의 볼테르적 가르침 덕분에 처음부터 단호하게 반교회적이었다고 자신을 묘사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겉보기에 적절히 종교적인 아이였다. 경건한 고모의 열렬한 가르침을 통해 그녀가 신비주의적 가톨릭에 매료되었던 흔적들이다. 이는 훗날 혁명가로서 열정에 모종의 신비로운 에너지를 발휘한다.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미셸은 곧바로 급진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 기간 중 그녀의 친구 마리 페레(Marie Ferré)가 사망했으나, 미셸에게 사건의 정점은 리옹에서 열린 '66인의 재판(Trial of the Sixty-eight)'이었다. 정부는 크로포트킨과 고티에를 포함한 많은 지도자를 파멸시킴으로써 무정부주의 운동을 꺾으려 했다. 미셸은 재판 초기에 영국에 있었으나 마지막 단계에 참석했고, 비록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수감자들과 동일시했다. 66인의 유죄 판결 이후 그녀는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꼈다. "내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허용된 자유를 사용해 지구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뻗어 나갈 새롭고 거대한 인터내셔널을 소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겁함의 공범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순교를 갈구하고 있었고, 1883년 4월 앵발리드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정부는 야만적으로 반응했고, 형식적인 재판 끝에 그녀에게 6년의 독방 구금형을 선고했다. 이는 범죄에 비해 너무나도 불균형한 형량이었기에 보수적인 신문들조차 항의할 정도였다.​어머니의 쇠약해진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미셸은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유죄 판결 이후에도 최소 두 차례 어머니를 병문안할 수 있는 가석방 허가를 받았다. 클레르몽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도 어머니를 뵙기 위한 외출이 허용되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절차였다. 미셸의 전기 작가 에디스 토마스(Edith Thomas)는 이 에피소드를 논하며 19세기가 "우리 시대보다 훨씬 더 인도적인 시대였다"라고 평했다. 미셸은 1884년 12월 초, 당국이 그녀를 어머니와 가까운 파리 교도소로 이감해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나흘 후 내무부 장관은 미셸이 두 명의 경찰관 감시하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녀의 회고록만으로는 알기 어렵지만, 미셸은 1884년 12월 11일부터 1885년 1월 3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미셸의 감정은 항상 격렬했다. 그녀의 회고록 페이지 곳곳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점철되어 있으며, 어린 시절을 묘사할 때는 친척들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후 젊은 여성 시절에는 자신을 따라 파리까지 온 줄리 롱샹(Julie Longchamps)과 깊은 우정을 쌓았다. 세월이 흘러도 제자들에 대한 미셸의 애정은 식지 않았다. 첫 번째 재판 당시 정부가 그녀에게 제자가 없었다고 주장하자 그녀는 격분하며 반박했는데, 정작 그보다 훨씬 더 큰 거짓말들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고 내버려 두기도 했다. 그녀는 성실하고 상상력 풍부한 교사였던 것으로 보이며, 외부의 증거들도 그러한 판단을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누메아에서 카나크족을 가르치는 데 쏟은 그녀의 헌신은 회고록에 자부심으로 담겨 있다.미셸의 동정심은 사회의 모든 약자, 즉 가난한 이들, 노인들, 죄수들, 그리고 여성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초기 페미니즘(protofeminism)을 발전시켰으나, 이는 곧 더 포괄적인 급진주의로 융합되었다. 미셸은 사회 문제를 명확히 직시했으며, 여성뿐만 아니라 많은 집단이 착취당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하여 여성에 관한 회고록의 한 장은 사회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가 "좋은 동반자로서 인생을 함께 걸어갈 것"을 호소하는 톤으로 변한다.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인류 전체의 권리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느 인종이 으뜸인지를 두고 인종들이 다투지 않게 되는 것처럼, 어느 성별이 우월한지"에 대해 더 이상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동물을 향한 잔혹 행위에 대한 미셸의 혐오감은 약자와 착취당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연결되어 있다. "새끼가 짓밟힌 새부터 전쟁으로 보금자리가 파괴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그녀의 회고록에서 어머니에 대한 감정 다음으로 가장 격렬한 감정은 테오필 페레(Théophile Ferré)를 향해 있다. 그녀는 그와 그의 처형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만, 그 감정이 인간 페레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탄압이 초래할 수 있는 결과의 상징으로서의 페레를 향한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혹자는 페레를 그의 연인으로 보기도 한다. 페레의 누이 마리(Marie)와 미셸의 따뜻한 우정이 테오필에 대한 감정의 결과인지 아니면 그와 별개인지는 불분명하나, 미셸과 마리 페레의 삶은 영구적으로 얽혀 있었다. 마리는 미셸이 집회에 참석하거나 유배 중일 때, 혹은 여행이나 투옥 중일 때 미셸의 어머니를 돌보는 것을 도왔고, 두 사람은 수년 동안 활발하게 서신을 주고받았다. 미셸이 자신의 시집과 스크랩 자료들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리 덕분이었으며, 그중 상당수가 회고록에 포함되었다. 블랑키 서거 기념일 시위 직후 미셸이 체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가 사망했다. 미셸은 회고록에 마리의 장례식 기록과 앙리 로슈포르가 보낸 찬사의 편지를 수록했다.하지만 미셸의 정서적 삶의 중심은 어머니였다. 미셸은 어머니가 "공유하지 않았던" 자신의 견해 때문에 어머니가 겪은 고통의 대부분을 자신이 초래했음을 인정했다. 평생 어머니는 딸의 빚을 갚기 위해 애썼고 애정과 소소한 선물들을 쏟아부었다. 그 보답으로 루이즈는 자신의 불행을 어머니에게 숨기려 애썼고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편안하게 해드리고자 노력했다. 미셸은 "우리 혁명가들은 가족에게 행복을 거의 가져다주지 못한다"라고 한탄한다.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미셸은 어머니의 장례식 기록 전문을 실었다. 그녀가 깨닫지 못한 사실은, 어머니의 시신을 따라 파리를 가로질러 르발루아 페레 묘지까지 행진했던 수천 명의 사람이 어머니뿐만 아니라 루이즈 자신에게도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실질적으로 미셸의 회고록은 어머니의 죽음 시점에서 끝을 맺으며, 그녀는 상실로 인해 황량해진 정신 상태로 이듬해 출판을 위해 원고를 완성했다. 현실은 가변적이며, 회고록 저술가가 해야 하듯 자신의 마음의 과정을 되짚어보는 것은 회상이 소환되는 순간에 존재하는 햇빛이나 그림자를 통해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는 일이다. 혁명적 대의에 대한 미셸의 헌신과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그림자 아래서도 확고했으나, 만약 그녀가 슬픔의 충격 속에서 회고록을 쓰지 않았더라면 잃어버린 과거에 대해 향수와 슬픔을 덜 드러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또한 우리 몫이 아니다.미셸이 이 회고록을 쓰기 시작한 것은 1883년에 시작된 그녀의 세 번째 수감 기간 중이었으나, 자료 수집은 그보다 일찍 이루어졌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시작한 오트마른의 역사와 같은 초기 저작물들도 가지고 있었으며, 뉴칼레도니아 항해 중에 기록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일기'에 대해 감질나는 언급을 남기기도 했다.​1885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미셸은 일종의 신경 쇠약을 겪었으며 이는 그녀의 회고록이 파편화되고 일관성이 떨어지게 된 분명한 이유 중 하나였다. 두 부분으로 나뉜 본문 전체에 대략적인 연대기적 개요가 흐르고는 있지만, 이야기와 일화들은 단계적인 서사보다는 단어 연상에 따라 나타난다. 또한 이 회고록은 사실적인 기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본문은 그녀의 꿈에 대한 감정적인 묘사, 행동을 촉구하는 고무적인 부름, 그리고 다수의 시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다른 아이디어로 가볍게 옮겨간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이 독자에게 야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원문에서 그녀는 "나의 세 번째 체포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앞선 두 번의 체포 과정을 서술해야겠다"라고 쓰기도 했다. 회고록은 향수와 고양된 감정, 서사와 예언 사이를 격렬하게 오간다.1888년 1월, 미셸이 르아브르에서 연설하던 중 광신적인 가톨릭교도 브르타뉴인이 그녀를 쏘았다. 왼쪽 귀 뒤에 박힌 총알 부상은 잘 아물지 않았고, 한동안 그녀의 건강은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러나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게도, 미셸은 가해자의 재판에 출석하여 그가 악한 사회에 의해 미혹된 것이라 주장하며 선처를 호소했고, 결국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루이즈 미셀은 1890년 노동절 시위 참여를 준비하던 중 행사 전날 체포되었다. 분노와 좌절감에 휩싸인 그녀는 감방의 가구들을 부수었고, 당국은 그 행동을 구실 삼아 그녀를 정신 이상자로 몰아 수용하려 했다. 불분명한 이유로 내무부 장관 콩스탕이 직접 개입하여 수용 절차를 중단시키고 그녀를 석방했다.미셸은 즉시 영국으로 떠났고, 189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이후 그곳의 사건들은 그녀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미셸은 이 무모한 전쟁이 사회 혁명의 시작을 가져올 기회라는 점에 기뻐했다. 그녀는 1904년 2월과 3월 초 프랑스에서 더 많은 강연을 했으나, 그 후 중병에 걸렸다. 그녀는 회복되었고, 대중이 치명적일 것이라 예상했던 그녀의 병세가 널리 알려진 후 전설적인 인물을 보기 위해 과거처럼 엄청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아마 사람들은 이제 전설을 보러 온 것일 뿐이었겠지만, 어쨌든 수많은 이들이 모여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연말에 그녀는 알제리로 떠났고, 프랑스로 돌아오던 중 마르세유에서 병이 났다. 이 병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1905년 1월 9일, 그녀는 마르세유의 호텔 드 로아지스(Hotel de l'Oasis)에서 사망했다.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좋아했을 법한 장관 중 하나가 되었다. 적기와 수많은 꽃, 그리고 노동조합, 사회주의 단체, 무정부주의자, 반종교 단체 대표 등 2,000명의 조문객과 함께 장례 행렬은 마르세유에서 묘지까지 1킬로미터에 달했다. 추모식이 프랑스 전역과 런던 등지에서 거행되었다. 1월 20일 그녀의 유해는 이장되어 파리로 옮겨졌고, 이틀 후 르발루아 페레(Levallois-Perret)에 있는 어머니 곁에 묻혔다. 언론은 이것이 빅토르 위고의 사망 이후 최대 규모의 장관이었다고 전했다. 같은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군중이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려다 벌어진 대학살은 또 다른 '피의 일요일'로 영원히 각인되었다오늘날 미셸의 고향인 브롱쿠르(Vroncourt)에는 그녀의 동상이 서 있고, 마을을 지나는 거리에는 그녀의 이름이 붙어 있다. 르발루아 페레에 있는 그녀의 묘지는—1905년에 묻힌 곳이 아니라 1936년 인민전선 시절에 옮겨진 새 묘지이다—여전히 익명의 손길이 놓아둔 꽃들로 채워져 있다. 그녀의 이름을 딴 지하철역과 거리도 만들었지만, 둘 다 파리 시 경계 바로 바깥에 걸쳐 있다. 그녀는 이제 전설이다. 그녀가 그 전설의 일부를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다. 루이즈 미셸은 영웅적이었으나, 그녀 자신이 말했듯 "영웅주의란 없다. 사람들은 그저 사건에 매료될 뿐이다."흔히 하나의 사건에 대해 여러 버전의 서술이 존재했는데, 이는 드문 경우이지만 큰 틀에서 항상 서로 일치하면서도 각기 새로운 세부 사항을 덧붙이고 있었다. 몇몇 시들은 서사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아 생략했다. 게다가 미셸의 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있다. 물론, 에디스 토마스는 미셸의 "가장 훌륭한 시는 단연코 그녀의 삶"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미셸은 분명 이 회고록의 후속편을 쓸 의도가 있었다. 이 책을 출간하고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으나,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녀의 시와 편지들을 제외하면, 여기에 실린 『루이즈 미셸 자필 회고록(Mémoires de Louise Michel écrits par elle-même)』이 혁명가이자 시인, 그리고 몽상가였던 매혹적인 여성의 가장 주요한 자전적 기록이다.1886년 이 회고록을 출간했을 때 그녀는 쉰여섯 살이었으며, 여전히 많은 세월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언급했던 두 번째 회고록을 쓰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녀가 남긴 이 회고록은 인간의 꿈을 향한 기념비로 서 있다. 변방의 보잘것없는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가 자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자유까지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음을 교조적 이론이 아닌 마음에 이끌려, 미셸은 자신의 회고록과 삶을 통해 증명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번역본은 MÉMOIRES DE LOUISE MICHELÉCRITS PAR ELLE-MÊMEF. Roy, libraire-éditeur, Paris, 1886참고는The Red Virgin, Memoirs of Louise Michel, edited and translated by Bullitt Lowry and Elizabeth Ellington Gunter. The University of Alabama Press.1981위 글은 Bullitt Lowry and Elizabeth Ellington Gunter의 Translators' Introduction &amp; Epilogue에서 갈무리 했습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121/pimg_7752871435003828.jpg</url><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036519</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