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불란서책방 (북페스트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불란서책방의 책을 소개합니다.</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un, 05 Jul 2026 02:39:53 +0900</lastBuildDate><image><title>북페스트</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752871435114436.png</url><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북페스트</description></image><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밤에만 우는 새-슬픔의 긍지-콜레트</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370082</link><pubDate>Thu, 02 Jul 2026 16: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37008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52931135&TPaperId=173700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18/73/coveroff/k952931135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밤에만 우는 새가 있다. 나이팅게일이다. 그런데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한 프랑스 작가는 썼다. 옛날 옛적 나이팅게일은 낮에 울고 밤에는 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 봄밤, 포도나무 덩굴손이 다리를 휘감았다. 잠결에 묶인 새는 사력을 다해 풀려났지만, 그 후로 다시는 무방비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서 밤마다 깨어 노래한다.<br>​이 우화를 쓴 사람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다. 1908년, 그녀는 이 짧은 콩트 한 편으로 자신의 첫 단편집 제목을 정했다. 『슬픔의 긍지(포도나무 덩굴손)』(Les Vrilles de la vigne).&nbsp;<br>콜레트는 1873년 부르고뉴의 작은 마을 생소뵈르앙퓌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잃은 퇴역 군인이었고, 어머니 시도는 정원 식물과 동물들을 아꼈던 사람이다. 이 어머니의 존재는 평생 콜레트의 글에서 떠나지 않는다.<br>스무 살에 그녀는 열네 살 연상의 작가 겸 출판업과 음악비평을 하던 앙리 고티에 빌라르와 결혼한다. 필명 ‘윌리’. 사교계에서 이름값 있던 이 남자는 젊은 아내를 방에 가두고 매일 글의 분량을 채우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렇게 나온 게 클로딘 연작이다.&nbsp;<br>1900년부터 1903년까지 네 권. 학교 다니는 소녀의 발칙한 성장담은 파리를 흔들었다. 옷깃 디자인이 ‘클로딘 칼라’라는 이름을 얻었을 정도로 당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책은 모두 윌리의 이름으로 나갔다. 남의 이름으로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콜레트의 출발점은 또렷해진다. 그녀의 문장은 처음부터 자기 것이 아니었다. 빌려준 사람의 서명 아래 묻혀 있었다.<br>풀려난 새<br>1906년, 콜레트는 윌리와 이혼한다. 인세는 전 남편이 챙겼다. 그녀에게 남은 건 글솜씨뿐이었고, 그걸로 당장 먹고살 길이 없었다. 그래서 무대에 올랐다. 뮤직홀 마임 배우로, 종종 가슴을 드러내는 파격적인 공연으로 물랭루주에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귀족인 마틸드 드 모르니, 일명 ‘미시’와의 관계도 이 시기에 시작된다.<br>이 무렵 콜레트는 잡지 세 곳, 『르 메르퀴르 뮈지칼』,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 『라 비 파리지엔』의 청탁을 받아 짧은 글들을 발표한다.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기획된 글들이 아니었다. 1905년에서 1907년 사이 띄엄띄엄 쓴 산문, 콩트, 대화체 스케치가 1908년 한데 묶여 『슬픔의 긍지(포도나무 덩굴손)』이 된다.<br>이 시점에서 나이팅게일 우화로 돌아가야 한다. 묶여 있다가 풀려난 새는 더 이상 예전의 잠을 잘 수 없다. 콜레트의 이혼과 정확히 겹치는 그림이다. 윌리 밑에서 보낸 시간을 ‘순진하고 무방비한 잠’으로, 거기서 빠져나온 뒤의 글쓰기를 ‘깨어 있는 밤의 노래’로 치환한 것이다. 그녀는 이 비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적는다. “나는 더 이상 행복한 잠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더 이상 포도나무 덩굴손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을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는다. 어느 쪽도 부풀리지 않는다.<br><br><br>줄거리 없는 책<br>『슬픔의 긍지』를 처음 펼치는 독자는 종종 당황한다. 이야기가 끝까지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스물두 편의 이야기. 분명한 장 구분도 없다. 표제작 같은 우화가 있는가 하면, 개와 고양이가 주고받는 대화체 글도 있다. 가족 풍경과 해변 마을 스케치를 섞어놓은 글도 있다.<br>이 책을 소설처럼 읽으면 실패한다. 콜레트는 이야기를 짓지 않았다. 기억과 감각의 단편을 늘어놓았다. 책 앞쪽은 우화와 알레고리에 가깝고, 뒤로 갈수록 관찰과 성찰의 톤으로 옮겨간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1인칭의 내밀한 목소리 하나뿐이다. 누가 읽어도 이건 콜레트 자신이 말하고 있다는 걸 안다.<br>후대 독자 중에는 이 책을 콜레트 입문서로 권하는 이들이 많다. 짧은 형식이 그녀의 본령이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실제로 그녀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장편의 서사 구조보다 짧은 산문의 밀도에 있었다. 자연, 동물, 사랑, 자유. 이 책에는 콜레트라는 작가를 이루는 모든 재료가 작은 다발로 묶여 있다.<br>권두에 놓인 「포도 덩굴손」은 이 책 전체를 읽는 열쇠로 거듭 언급된다. 프랑스 고등학교 문학 교재들이 이 짧은 텍스트 하나를 두고 따로 분석을 붙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한 동물 우화가 아니라는 것이다.<br>문장을 보면 이유가 드러난다. 잠든 새의 다리를 휘감는 덩굴손을 콜레트는 시고 떫은 산미가 톡 쏘면서도 갈증을 가시게 하는 식물로 묘사한다. 고통과 쾌감을 한 단어 안에 욱여넣는다. 자연 묘사 하나에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시각이 동시에 걸려 있다. 같은 책의 다른 글에서도 이런 감각의 밀도는 일관되게 나타난다. 콜레트의 문장이 ‘관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노골적인 장면 묘사 때문이 아니라, 풍경 하나조차 몸으로 받아들이는 이 감각의 과잉 때문이다.<br>새가 풀려난 뒤에도 자유를 공짜로 얻지 않았다는 점도 짚을 만하다. 다리는 끈에 얽히고, 날개는 힘을 잃었다고 묘사된 그 새는 사투 끝에 빠져나온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묶였던 흔적을 몸에 새긴 채로 얻는다. 이혼 후 무일푼으로 무대에 서야 했던 콜레트의 현실과 이 문장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br>가벼운 작가라는 오해<br>콜레트는 생전에도 평가가 엇갈렸다. 사랑과 욕망을 다루는 작가라는 꼬리표 때문에 일부 비평가들은 그녀를 ‘가벼운’ 작가로 분류했다. 작가 캐서린 앤 포터는 뉴욕 타임스에 지드와 프루스트가 생존해있을 때도 이미 콜레트는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소설 작가”라 불렀다. 1935년 벨기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 1945년 공쿠르 아카데미 회원, 1949년에는 그 아카데미의 회장. 1948년에는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br>그녀를 둘러싼 그림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점도 정직하게 짚어야 한다. 비시 정권 시기 친나치 매체에 글을 기고했고, 일부 작품에는 반유대주의적 서술이 남아 있다. 자유와 해방의 작가라는 이미지와 이 사실은 쉽게 포개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프랑스가 그녀에게 국장으로 예우했다는 것. 그는 점령기 파리의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 그의 남편을 살려냈다.&nbsp;<br>그녀가 기고한 글들은 전시 일상을 살아가는 여인들의 애잔한 풍경들이었다. 선동적인 글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기 작가들 사이에서도 해석은 엇갈린다. 어느 한쪽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말년의 콜레트를 돌봤던 사람은 그의 연하 남편, 그리고 장 콕토같은 주변의 수많은 작가들이었다. 미국 작가 트루먼 카포티는 오직 콜레트를 보려고 대서양을 건넌다.&nbsp;<br>1954년, 콜레트는 파리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가톨릭교회는 두 번의 이혼 전력을 이유로 종교장을 거부했다. 대신 프랑스는 여성 문인으로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국장을 치러주었다. 거부와 인정이 같은 죽음 위에 동시에 내려앉은 셈이다.<br>『슬픔의 긍지』를 백 년도 더 지난 지금 읽는 이유는 이 책이 그리는 그림이 여전히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이름 뒤에서 쓰던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되찾는 과정, 그 과정이 결코 매끈하지 않다는 사실. 자유를 얻은 뒤에도 예전의 무방비한 평온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감각. 이건 백 년 전 파리의 한 여성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br>콜레트는 이 모든 걸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나이팅게일 한 마리가 덩굴손에 묶였다가 풀려나는 짧은 우화 하나로. 그녀는 이 책에서 자신이 더 이상 행복한 잠을 잘 수 없다고 썼지만, 동시에 더 이상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도 썼다. 그 둘 사이의 거리가 이 작가의 평생을 관통하는 거리이기도 하다. 『슬픔의 긍지』는 그 거리를 처음으로 자기 이름으로 기록한 책이다.<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18/73/cover150/k95293113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2187300</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인문/예술</category><title>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멸망하지 않는다 </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350280</link><pubDate>Tue, 23 Jun 2026 07: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35028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032825&TPaperId=1735028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5/50/coveroff/k51203282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일부 인류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는 이미 1970년대부터 멸종 단계에 접어들었다. 한국에선 최근에서야 여기저기서 제기되는 ‘기후위기’와 연관된 측면이 크다. 과학적으로 측정된 여러 지표들을 문제 삼으며 인류의 존립과 지구의 환경에 대해 얘기하는 것인데, 그 자체로 시급하고 위중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논의하는 걸 보면서 항상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인류는 왜 과학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확장으로 발생한 문제를 ‘과학’과 ‘자본’에 기대어 해결하려 드는가, 하는 점이다.&nbsp;<br><br><br>왜 과학은 더 인류를 멸망케 하는가<br>인류의 진보를 이끌어온 데에 과학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18세기 이후 급진적으로 발전한 과학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인류의 생활 양태와 그로 인한 의식의 변화를 가능케 했다. 지금은 그 발전 단계의 시간적 폭이 갈수록 좁아지고, 빨라지고 있다. 한 세대를 거쳐야 할 문제가 두 세대 이상까지 아우르게 되면서 동시대 자체가 크게 분열하고 갈등하게 되는 요소로 작용하게도 되었다. 그런 점에서 세대나 계급, 경제적 부와 빈곤의 극단적 대치는 과학 발전의 속도에 못 미치는 인간 인식 또는 심리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따져볼 여지도 다분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lt;산책하는 침략자&gt;(2017)는 그것의 한 모델이 될 법한 영화다.<br>구로사와 기요시는 일본 내에서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독특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초창기 로망 포르노에서부터 호러, 멜로, 스릴러 등 기존 장르를 매개 삼아 자신만의 특출한 영화적 감각을 표출했는데, &lt;산책하는 침략자&gt;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좀 더 특이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신체강탈 외계인이라는 SF영화의 오랜 클리셰를 바탕으로 호러와 블랙코미디, 누아르와 로맨스를 자유자재로 버무린 솜씨가 가히 ‘장인’스럽다 할 만하다. 심각할 수 있는 주제를 경쾌하게, 자칫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을 장면을 심도 있게 우려내면서 130분을 충만하게 채운다.<br>영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특유의 미스터리 스릴러 풍으로 시작한다. 어항 속의 금붕어가 나오고 돌연 어느 주택에서 토막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일가족 중 교복을 입은 소녀 하나만 피투성이가 되어 살아남는다. 외상은 없어 보인다. 소녀는 피칠갑을 한 채 어느 좁은 국도를 무심하게 걷는다. 자동차들이 소녀를 피하려다 서로 충돌한다. 소녀는 아랑곳 않는다.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마저 가득하다. 그러면서 오프닝 타이틀이 뜬다. 이거 무슨 영화지? 싶은 호기심을 당기기에 아주 효과적인 연출이다.<br> <br><br>괴이한 감독, 스스로 장르가 되다<br>다음 장면, 한 젊은 부부가 병원에서 진찰 중이다. 평범한 직장인인 신지(마츠다 류헤이)와 광고 디자이너인 나루미(나가사와 마사미) 부부다. 신지의 상태가 이상하다. 외출했다 돌아와선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버렸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뿐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아내도 못 알아본다. 나루미는 속이 끓어오른다. 시쳇말로 ‘진상’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일을 따내야 하는 나루미는 자신의 일을 감당하기도 벅찬 상태다. 신지는 걷는 법, 먹는 법뿐 아니라 언어부터 다시 배워야 할 상황. 나루미는 신지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말할 정도다. 관계의 붕괴를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br>또 한편, 주간지 기자 사쿠라이(하세가와 히로키)는 토막 살인 사건 현장에 취재차 갔다가 이상한 소년을 만난다. 대뜸 반말부터 해대는 이 소년의 이름은 아마노(타카스기 마히로). 토막 살인 사건에서 살아남아 경찰에 인계된 소녀를 같이 찾으러 가자고 한다. 소녀의 이름은 타치바나 아키라(츠네마츠 유리), 오프닝 장면에서 피칠갑으로 길을 걷던 바로 그 아이다. 얼떨결에 아마노와 동행하게 된 사쿠라이는 아마노로부터 자신과 타치바나가 외계인이라는 얘길 듣는다. 요는, 평범한 지구인의 몸속에 잠입했다는 것. 목적은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서라나.<br>​누구라도 믿기 힘든 얘기다. 그럼에도 사쿠라이는 좋은 기삿거리라 여겨 아마노와 함께 타치바나를 찾게 되는데, 실로 믿을 수 없는 상황들이 계속 벌어지자 사쿠라이도 점점 아이들에게 동화되어 간다. 그건 신지 부부도 마찬가지. 신지는 어느 정도 지구인의 습성에 적응해 가면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기 시작한다. 신지 역시 나루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나, 믿기 힘든 건 나루미도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신지의 이상한 능력을 목격하면서 슬슬 신지의 편이 되어간다.&nbsp;<br>아저씨! 나 외계인이에요<br>대략의 설정이 이러하다. 언뜻 보기에 초등학생에게나 먹힐 만한 만화 같은 얘기지만, 영화의 디테일들을 살피면 짐짓 숙고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다분하다. 외계인이 돼버린 인물들은 지구인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재점검을 유도한다. 가령, ‘나’와 ‘너’. ‘소유’와 ‘사랑’ 등 사람이 익히 알고 있어 재고조차 않는 단어들의 기본 의미와 맥락을 새삼 따져 묻는 식이다. 인류 문명의 발달이 언어가 발명된 이후, 급격하게 빨라졌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저 하나의 생명체였던 존재가 언어를 익히면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도 부언할 필요가 없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개념을 익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삶을 개진하게 된다.&nbsp;<br>그런데,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언어의 규칙과 쓰임을 망각하게 된다면 인간은 어찌 되겠는가. 모든 게 혼란이자 최초로 되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랬을 때 세계는 외려 더 적나라하게 그 진상을 드러내게 될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 집단과 집단 사이의 반목, 다른 생명체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 등 모든 것이 언어를 기반하고 결국 또 다른 언어로 개념화되어 일정한 질서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런데 그 질서가 과연 온당하고 자연의 원리에 부합하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인간의 질서에 의해 자연이 망가지고 지구가 병들어간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선 지구를 살려야 한다고 외치는 말들이, 그 절박한 사정과 의미에도 불구하고, 때로 공허하게 들리는 건 바로 그런 연유다.&nbsp;<br>영화에서 외계인들은 지구 침략을 목적으로 지구인의 몸속에 잠입했다고 말한다. 왜 침략하려 하는지, 어떻게 지구인들을 몰살시키려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없다. 그러다 후반부에 이르면 지구를 침략하려는 자는 오히려 지구인들이고 인류를 몰살시키려 하는 자 역시 지구인들이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오래전부터 영화에서 외계인이란 설정은 대기권 바깥을 상상하여 거꾸로 발명해 낸 ‘자신의 안의 다른 존재’였다. 영화 속 외계인이 원생대의 생물이나 유인원과 흡사한 외형을 갖게 된 것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관습적으로 디자인된 탓이다.&nbsp;<br>외계인은 ‘내 안의 다른 존재’다<br>​&lt;산책하는 침략자&gt;는 바로 그러한 영화적 관습을 까발리고 뒤집어 버린다. 외계인은 지구인의 외형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다만,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기에 지구의 위기와 병폐를 전체적으로 통찰해 낼 뿐이다. 산속에선 산이 안 보이고 물속에선 바다를 아우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자신조차 지구 안의 생물에 불과하면서도, 때로 더 지구에 해로울 수 있는 지식과 기술로 지구를 진단하고 해부하려 한다. 그러한 행위는 빙하가 녹는다고 북극에다가 냉방기를 틀어놓는 식의 자가당착이 될 위험도 다분하다. 사람은 과연 지구를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까.<br>섣불리 답을 내긴 어렵다. &lt;산책하는 침략자&gt; 역시 분명한 답은 내놓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의 막바지에 다다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는 건 그 어떤 언어적 해법보다 명확한 답이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영화 속 외계인들이 사람을 감화시키는 방식 같은 것. 상대의 이마에 검지를 대면 갑자기 상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며 순식간에 다른 인성으로 변한다. 영화가 실제로 그런 식으로 보는 이를 감화시키는 게 가히 놀랍고도 황망했다. 더 자세한 건 영화를 보면 안다. 힌트를 하나 주자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신지를 비롯한 외계인들이 아니고, 다름 아닌 나루미라 보는 게 타당하다. “온 인류를 사랑하는 건 쉽다. 그러나 자신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정말 어렵다.” 도스토옙스키가 한 말이다. 영화를 보고 새삼 떠올랐기에 첨언한다.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 중)]]></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5/50/cover150/k51203282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5155047</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인문/예술</category><title>메소드연기의 기원 - 배우가 아니어도 읽는 연기 교과서-연기6강</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349767</link><pubDate>Mon, 22 Jun 2026 22: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34976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930037&TPaperId=1734976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928/5/coveroff/k262930037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리 스트라스버그, 스텔라 애들러, 해롤드 클러먼이라는 제자들을 배출하고 이제는 헐리우드의 일급 감독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리처드 볼레스라브스키(Richard Boleslavsky, 1889~1937)는 1937년 조앤 크로퍼드 주연의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스승은 잊혔지만 스승이 가져온 것은 살아남았다. 스타니슬랍스키의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최초로 미국 땅에 전달한 이 책, 『연기6강(Acting: The First Six Lessons)』이 그것이다.<br>이 책은 1933년 뉴욕의 Theatre Arts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됐다. 교재가 아니었다. 볼레스라브스키가 1920년대 내내 Theatre Arts Monthly에 기고한 연기론 칼럼들을 엮은 것이었다. 형식은 대화였다. 교사인 저자와 열정적이지만 재능이 불분명한 젊은 여배우 사이의 여섯 번의 대화. 그 대화 안에 농축된 수업이 미국 연기 교육의 방향을 바꿔놓았다.<br>군인이었다가 배우가 됐다가 연기 스승이 된 사람본명은 볼레스와프 리샤르트 스르제드니츠키(Boleslaw Ryszard Srzednicki). 1889년 2월 4일, 당시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폴란드계 가톨릭 가문에서 태어났다. 트베르 기병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 장교의 길을 걷던 그는 연기에 이끌려 방향을 틀었다. 1906년, 모스크바 예술극장(Moscow Art Theatre, MAT)의 스쿨에 입학해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i)와 그의 조교 레오폴트 술레르지츠키(Leopold Sulerzhitsky) 아래에서 훈련을 받았다. 1909년, 스타니슬랍스키의 유명한 투르게네프 연출작 '시골에서의 한 달(A Month in the Country)'에서 주역 벨랴예프를 맡았다. 학생으로서 MAT 무대에서 주역을 받은 것은 드문 영예였다.<br>​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볼레스라브스키는 러시아 제국군 기병 중위로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1917년 10월혁명 이후 러시아를 떠났다. 이후 바르샤바, 프라하, 파리, 베를린을 거쳤다. 폴란드에서 영화 연출을 시작했고, 1921년에는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의 승리를 다룬 반다큐멘터리 영화 '비스와의 기적(Cud nad Wisla)'을 만들었다. 1922년에는 덴마크 감독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의 독일 영화 'Die Gezeichneten'에 배우로 출연했다. 같은 해 9월, 뉴욕에 도착했다.<br>아메리칸 래버러토리 시어터 — 메소드의 발원지1923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미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볼레스라브스키는 이 순회공연에 배우 겸 스타니슬랍스키의 조교로 합류했다. 공연 이후, 프린세스 시어터에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소개하는 강연 시리즈를 열었다. 이 강연이 미국 연극 후원자 미리엄과 허버트 스톡턴(Miriam and Herbert Stockton)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이들의 재정 지원으로 아메리칸 래버러토리 시어터(American Laboratory Theatre, 이하 '랩')가 설립됐다.<br>볼레스라브스키는 유학 동료 마리아 우스펜스카야(Maria Ouspenskaya)와 함께 랩을 이끌었다. 랩의 학생 명단은 후일 미국 연극사의 목차가 됐다.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 스텔라 애들러(Stella Adler), 해롤드 클러먼(Harold Clurman). 이 세 사람은 모두 랩의 동문으로, 1931년 그룹 시어터(Group Theatre)를 창설했다. 그룹 시어터는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을 미국 연기에 최초로 체계적으로 적용한 앙상블 단체였다. 스트라스버그는 훗날 이 시스템을 '메서드(The Method)'로 발전시켜 액터스 스튜디오(Actors Studio)에서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더스틴 호프먼 세대를 훈련했다.<br>​랩은 1930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발성 영화의 등장으로 할리우드에서 극작가와 연출가 수요가 급증했고, 볼레슬라프스키는 영화 연출 계약을 받아 뉴욕을 떠났다. 1930년 컬럼비아 픽처스를 시작으로 MGM, 20세기 폭스, RKO 등 주요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1932년 'Rasputin and the Empress'는 배리모어 3남매(에텔, 존, 라이어널)가 함께 출연한 유일한 영화로, 당시 화제를 모았다. 이후 'The Painted Veil'(1934, 그레타 가르보), 'Les Miserables'(1935, 프레드릭 마치와 찰스 로튼), 'Theodora Goes Wild'(1936, 아이린 던)를 연출했다.<br>여섯 번의 대화, 하나의 철학『연기6강』은 교사인 저자(I)와 젊은 여배우 '크리처(The Creature)' 사이의 대화 여섯 편으로 이루어진다. 수업의 제목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1. 집중(Concentration), 2. 감정의 기억(Memory of Emotion), 3. 극적 행동(Dramatic Action), 4. 성격화(Characterization), 5. 관찰(Observation), 6. 리듬(Rhythm).<br>여섯 항목은 독립된 기술이 아니다. 하나의 신념에서 파생된 여섯 갈래다. 그 신념을 볼레슬라프스키는 이렇게 요약했다. "연기는 예술을 통해 탄생하는 인간 영혼의 삶이다(Acting is the life of the human soul receiving its birth through art)." 기술보다 내면이 먼저다. 테크닉 이전에 진실이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이 여섯 수업 전체를 관통한다.<br>첫 번째 수업 '집중'에서 볼레스라브스키는 집중을 "영혼에 대한 정신적 집중"으로 규정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오직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야 감지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능력. 두 번째 수업 '감정의 기억'은 이 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챕터다. 리 스트라스버그가 메서드를 발전시키는 데 직접적인 출발점이 된 개념이 여기 있다. 배우는 과거의 감정 경험을 저장하고, 필요할 때 정확하게 불러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무대 위에서 없는 감정을 느끼기 위해, 실제로 경험했던 감정의 기억을 재활성화한다는 원리다.<br>세 번째 수업 '극적 행동'은 내면 충동이 어떻게 무대 위의 행동으로 전환되는지를 다루고, 네 번째 '성격화'는 캐릭터를 실제 삶의 역사를 가진 인물로 구축하는 방법을 다룬다. 다섯 번째 '관찰'은 볼레스라브스키가 삶을 연구하는 방식 자체를 요구한다. 배우는 언제나 세상을 관찰하는 눈을 열어두어야 한다. 마지막 '리듬'은 한 공연 안의 감정적 흐름과 긴장의 파동을 다룬다.<br>​대화 형식이 가르치는 것이 책의 형식 자체가 내용과 맞닿아 있다. 교사는 크리처에게 직접 답을 주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고, 연습을 지시하고, 크리처가 스스로 경험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끈다. 볼레스라브스키가 스타니슬랍스키에게 배운 방식 그대로다. 배우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감각으로 습득한다.<br>Goodreads의 독자 평들이 이 지점에서 일관되게 갈린다. 대화 형식이 "이론을 살아 있게 만든다"고 평가하는 쪽이 있고, "교사가 크리처에게 지나치게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답한다"고 불편함을 표하는 쪽이 있다. 이 분열 자체가 볼레스라브스키가 의도한 방식이다. 연기를 가르치는 책이 독자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br>Powell's Books의 소개 문구는 이 책의 성격을 정확하게 요약한다. "집중, 감정의 기억, 극적 행동, 성격화, 관찰, 리듬에 관한 여섯 편의 미니어처 드라마들. 이것들은 모든 배우 앞에 놓인 도전을 증류해낸다." 수업이 아니라 드라마라고 부른 것은 정확하다. 읽는 동안 독자도 크리처와 함께 교사의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br>이 책은 1933년 이후 90년 넘게 절판된 적이 없다. Theatre Arts 출판사에서 출간된 뒤, Taylor &amp; Francis 등 여러 출판사를 통해 계속 찍혔다. 현재는 Theatre Arts Book 시리즈 판본이 가장 널리 유통된다. 2013년에는 초판 원본 책의 형태, 색상, 활자, 심지어 종이 질감까지 초판 발행 당시의 모습을 물리적으로 완전히 똑같이 재현한 복제본도 나왔다. 그리고 2024년 드디어 한국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nbsp;<br>Goodreads 리뷰의 공통 평가는 "연기에 관심이 없어도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이다. 집중, 감정 기억, 관찰이라는 주제가 연기 기술에 국한되지 않고 삶의 태도 자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몇 시간 만에 읽혔는데, 읽는 내내 '나 자신의 이야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독자 반응이 반복된다.<br>한편 학술적 평가는 좀 더 복잡하다. 스타니슬랍스키 연구자들은 볼레스라브스키가 스타니슬랍스키의 초기 개념, 특히 감정 기억(정서 기억, affective memory)에 특별히 큰 비중을 뒀다는 점을 지적한다. 스타니슬랍스키 자신은 이후 신체 행동 방법(Method of Physical Actions)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초기의 감정 기억 중심 접근을 일부 수정했다. 스트라스버그는 볼레슬라프스키의 감정 기억 개념을 발전시켰지만, 스타니슬랍스키의 후기 수정을 사실상 무시한 채 '메소드'를 구축했다. 이 계보상의 분기점에서 볼레슬라프스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은 셈이다.<br>마흔여덟 살의 죽음, 그리고 남은 것1937년 1월 17일, 조앤 크로퍼드와 윌리엄 파월 주연의 'The Last of Mrs. Cheyney'를 촬영하던 중 볼레스라브스키는 심장마비로 숨졌다. 마흔일곱 살이었다. 영화는 조지 피츠모리스와 도로시 에이즈너가 마무리했다. 그의 아들 얀은 당시 생후 18개월이었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7021번지에 별이 새겨져 있다.<br>볼레스라브스키는 생전에 세 권의 책을 남겼다. 1932년 자전적 1차대전 회고록 'Way of the Lancer'와 'Lances Down'(모두 헬렌 우드워드와 공저), 그리고 1933년 『연기6강』. 소설가 휴 월폴(Hugh Walpole)은 1937년 소설 'John Cornelius'를 볼레슬라프스키를 추모하며 헌정했다.<br>그가 없었다면 스트라스버그는 어떻게 됐을까. 그 질문에 스트라스버그 본인은 이렇게 답했다고 기록돼 있다. "거기서(아메리칸 래버러토리 시어터에서) 우스펜스카야와 볼레스라브스키에게 나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원칙들을 배웠다." 메서드가 말론 브란도를 만들었고, 그것이 현대 영화 연기의 기준이 됐다. 그 연쇄의 최초 연결고리가 1933년에 출간된 이 얇은 책이다.<br>​이 책을 읽는 방법『연기6강』은 연기를 배우는 사람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볼레스라브스키가 '크리처'에게 가르치는 것들 — 집중, 관찰, 감정의 저장과 재생, 리듬 — 은 어떤 창조적 작업에도 적용 가능한 원칙들이다.분량은 짧다. 빠르면 하루에 읽힌다. 그러나 각 챕터를 읽은 뒤 볼레슬라프스키가 크리처에게 제시한 연습들을 실제로 시도해보지 않으면 텍스트의 절반만 접한 셈이다.볼레스라브스키의 이 책은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진입로로 읽어도 좋다.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논쟁적이며, 그래서 가장 중요한 진입로.&nbsp;<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928/5/cover150/k26293003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9280526</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인문/예술</category><title>﻿화가가 남긴 단상들 — 조르주 브라크와 『낮과 밤』</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347224</link><pubDate>Sun, 21 Jun 2026 18: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347224</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92036815&TPaperId=1734722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539/3/coveroff/k89203681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나는 자연을 모방하기 보다는 자연과 일치하기를 원한다."-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br>그가 남긴 말 중 하나다.브라크에게 회화는 자연을 복제하는 일이 아니었다. 자연과 화음을 남기는 일이었다. 그 차이가 그의 생애 전체를 관통한다.화가의 단상집이라는 장르는 낯설었다. 파울 클레(Paul Klee),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같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 이론을 글로 남겼다. 브라크는 이론을 쓴 것이 아니라 단상을 남겼다. 다른 의도다.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진지하게, 보이는 진실 하나하나를 고정하려는 의지였다. 그 35년의 직무가 『낮과 밤(Le jour et la nuit)』이다.<br>1882년 5월 13일, 브라크는 파리 근교 아르장퇴유(Argenteuil)에서 태어났다. 르아브르에서 성장했다. 조부와 부친이 건물 도장업을 하면서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한 집안이었다. 브라크는 르아브르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오통 프리에즈(Othon Friesz), 라울 뒤피(Raoul Dufy)와 함께 미술을 배웠다. 이 시절의 훈련, 즉 장인의 눈으로 타일을 다루고 표면을 가공하는 습력이 후일 그의 회화에 직접 반영됐다는 평이 프랑스 미술계에서 공통적 견해다.<br>1900년 파리로 이주한 브라크는 아카데미 앙베르(Academie Humbert)에서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프랑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를 만났다. 1906년 에스타크(L'Estaque) 해안 풍경화로 야수파(Fauve) 스타일에 진입했다가, 1907년이 그의 회화 인생의 분기점이 된다. 엑스(Aix)에서 폴 세잔(Paul Cezanne)의 회고전을 보고,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소개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아틀리에에서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을 목격했다. 이 조우가 브라크의 경로를 완전히 바꿨다.<br><br>큐비즘의 탄생 — 피카소와의 시절1907년 11월, 아폴리네르의 소개로 피카소를 만났다. 브라크는 에스타크에서 시도한 풍경화 연작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화에 반응했다. 1908년 가을, 드니엘-앙리 카날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 갤러리에서 브라크의 첫 전시가 열렸다. 비평가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브라크의 건물 피사체들을 "작은 큐브들(petits cubes)의 집합"이라 평했다. 큐비즘(Cubisme)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비롯된다.<br>피카소와 브라크는 스스로 자신들의 협업을 "로프로 연결된 등반자들(La Cordee)"에 비유했다. 1908년부터 1914년까지, 두 사람은 여름을 세레(Ceret)와 소르그(Sorgues)에서 함께 작업하며 큐비즘 분석기를 전개했다. 1912년 브라크는 파피에 콜레(papier colle), 즉 신문지나 인쇄 종이를 화면에 직접 붙이는 기법을 최초로 도입했다. 이것이 현대 콜라주 기법의 기원으로 평가받는다. 피카소는 훗날 편지에서 브라크를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한 여성(la femme qui m'a le plus aime)"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두 사람의 관계의 깊이를 전하는 동시에, 큐비즘 혁명에서 브라크의 기여가 피카소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경향에 대한 미묘한 인정이기도 했다.<br><br>일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전쟁 — 두개골 천공 수술과 35년의 준비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브라크는 보병 제224연대로 징집됐다. 피카소는 아비뇽 역에서 군복 차림의 브라크를 전송했다. 두 사람이 수년간 이어온 대화는 그 순간 끊겼다.1915년 5월 11일, 브라크는 뇌빌-생-바스트(Neuville-Saint-Vaast) 전투에서 두부에 중상을 입었다. 전사한 것으로 여겨져 방치됐다가 다음 날 들것병들에게 발견됐다. 두개골 천공 수술(trepanation)을 받고 이틀간의 혼수상태 끝에 의식을 되찾았다. 회복에 1917년까지 걸렸다.<br>바로 이 1917년,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Pierre Reverdy)와 함께 평상의 단상들을 정리해 문학 잡지 『노르-쉬드(Nord-Sud)』 제10호에 발표했다. 제목은 「회화에 대한 사상과 성찰(Pensees et reflexions sur la peinture)」. 이 글이 이후 35년간 작성된 단상들의 출발점이 된다. 전쟁이 붓을 빼앗았지만, 성찰은 계속됐다.<br>전후 브라크의 회화는 큰 변화를 거쳤다. 큐비즘의 납작한 기하학에서 점차 곡선으로 돌아오고, 단일한 색채로 화면을 통일하는 대상을 고집했다. 인물, 정물, 비둘기. 같은 대상을 수년간 반복해 그렸다. 브라크에게 싫증은 없었다. 다음 단계는 언제나 안에서 발견해야 했다.<br>그의 단상들도 같은 방식으로 성장했다. 1917년부터 단상을 쓰기 시작한 브라크는 1952년까지 35년 동안 이 작업을 이어갔다. 하루에 하나를 쓰기도 하고, 몇 달에 하나를 쓰기도 했다. 시간을 정하지 않았다. 단상들은 노트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임리에서 나온 것을 다듬고 완성하는 방식으로 겹쳐졌다.주제도 회화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보이는 것에서 숨겨진 것으로, 지식에서 감성으로, 단순에서 복잡으로. 브라크의 단상은 회화의 주제와 거의 하나로 이어진다. 색, 구도, 관점, 언어, 자연, 시간, 남기는 것과 사라지는 것. 판단하지 않는다. 단정짓지 않는다. 하나의 주제를 여러 개의 신중한 문장으로 접근한다.<br>『낮과 밤』&nbsp;브라크는 정식 논문이나 에세이를 쓰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짤막한 노트에 문장을 적었다. 대부분은 한 단락 안에 담겼다. 그 중 일부를 선별해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를 통해 있는 그대로 내놓았다. 브라크 스스로 고른 제목 '낮과 밤(le jour et la nuit)'에 주제 정의가 담겨 있다. 내려앉는 것과 떠오르는 것, 보이는 것과 숨은 것, 시작과 끝, 있는 것과 없는 것.​<br>쪽 수는 초판 기준 56쪽이다. 형태는 인-12판(In-12)으로 손안에 들어오는 소형 판본이다. 작가의 드로잉 2점이 수록되어 있다. 1952년 8월 4일 인쇄를 마쳐 발행됐다. 라피마-나바르(Lafuma-Navarre) 순지 100부 한정판(tirage de tete)과 일반지 판 두 종으로 발행됐다. 현재도 갈리마르 파리 서점 공식 판매 목록에 올라 있다.<br>브라크의 아포리즘은 두 가지 구조를 가진다.&nbsp;첫째, 개념들을 반의의 쌍으로 충돌시킨다.&nbsp;"언제나 두 가지 생각, 하나를 무너뜨릴 또 하나의 생각을 가져야 한다.(Il faut toujours avoir deux idees, l'une pour detruire l'autre.)"&nbsp;둘째, 직접적인 관찰로 곧장 들어간다.&nbsp;"감정은 덧붙여지거나 모방할 수 없다. 감정은 배아고 작품은 부화(l'eclosion)다."<br>프랑스 아포리즘 전문 매체 Aphorismundi의 평가다. "브라크는 17세기 모랄리스트들의 진정한 계승자로, 리듬감 있고 종종 이분법적인 아포리즘 안에서 인간과 세계 표상에 연관된 복잡한 개념들을 정의하려 한다." 이 평은 브라크의 글쓰기가 단순한 화가의 메모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짚는다.<br>​루브르로 — 생애 말년의 영예​1937년 카네기 국제 미술전 카네기상(Prix Carnegie), 19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52년에는 루브르 박물관 관장 조르주 살레(Georges Salles)의 의뢰로 루브르 앙리 2세 홀(salle Henri-II) 천장에 새(Oiseaux) 테마의 장식화 작업을 맡았다. 1953년 제막식이 열렸다. 피카소는 자신이 선택되지 않은 것에 불쾌해하며 브라크가 자신의 비둘기(colombes)를 베꼈다고 비난했다. 브라크는 피카소에게 답하지 않았다.<br>1961년, 루브르에서 회고전 「브라크의 아틀리에(L'Atelier de Braque)」가 열렸다. 살아 있는 화가로서 루브르에서 개인전을 연 최초의 예술가였다. 사망 2년 전의 일이었다. 1963년 8월 31일, 브라크는 파리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였다. 그가 살던 파리 거리명은 훗날 조르주-브라크(rue Georges-Braque)가로 바뀌었다.<br>1963년 9월 3일, 루브르 콜로나드 앞에서 국장이 열렸다.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문화부 장관이 추도사를 낭독했다. 말로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의 어떤 국가도 자국에서 세상을 떠난 화가에게 이러한 성격의 헌사를 바친 적이 없다. 프랑스의 명예에 빅토르 위고라는 이름이 있다. 이제 브라크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프랑스인들에게 말해야 한다. 한 국가의 명예는 무엇보다 그 국가가 세계에 무엇을 주는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말로의 추도사 전문은 현재 malraux.org 공식 아카이브에서 열람할 수 있다.<br>​화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낮과 밤』은 순서대로 읽히지 않는다. 어떤 페이지를 열어도 된다. 다음 페이지의 단상이 앞의 페이지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브라크 스스로도 선형적으로 이어지도록 쓴 텍스트가 아니다. 단상들은 여러 주제를 오가면서 반복하고, 서로 충돌하고, 때로는 돌고 돌아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br>브라크에게는 천천히 읽는 독자가 더 잘 맞는다. 하나의 단락을 읽고 잠시 멈추는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5단락씩 읽어도 되고, 집어들고 필요할 때 열어봐도 된다. 추상적인 것도 많지만, 직접적인 것이 더 많다. 브라크는 주제를 열어 놓고 미끄러져 들어가는 일을 독자에게 넘기는 편이다.<br>단상은 스케치보다 짧다. 그 압축이 브라크만의 언어다.<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539/3/cover150/k8920368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5390362</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붉은 처녀의 시- 루이즈 미셀 회고록 Louise Michel (1830–1905)</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345374</link><pubDate>Sat, 20 Jun 2026 16:1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345374</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6372&TPaperId=1734537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off/k302136372_3.jpg" width="75" border="0"></a>&nbsp;<br/><br/>1871년 12월, 베르사유 군사법원에서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은 피고석에 섰다. 파리 코뮌(Paris Commune) 가담 혐의였다. 판사가 형량을 선고하기 전, 미셸이 먼저 말했다. 당신들이 나를 죽이길 거부한다면 내가 먼저 요구하겠다고. 종신 유형이 선고됐다. 미셸은 이 선고에 저항하지 않았다. 동료들이 총살당하는 마당에 자신만 가벼운 벌을 받는 것이 오히려 부당하다고 여겼다.<br>이 장면 하나가 루이즈 미셸이라는 인간을 압축한다. 두려움보다 원칙이 앞서고, 살아남는 것보다 신념을 지키는 것이 먼저였다. 그 원칙이 교사로서의 삶에서, 바리케이드에서, 유형지에서, 그리고 감옥 안에서 쓴 회고록에서 일관되게 이어진다.<br>사생아로 태어나 교사가 되다1830년 5월 29일, 프랑스 북동부 오트-마른(Haute-Marne)의 브롱쿠르-라-코트(Vroncourt-la-Côte)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성주 집안의 하녀였고, 아버지는 그 집의 아들이었다. 미셸은 사생아였다. 성주인 조부모가 그녀를 거두어 길렀다. 조부모는 당시 기준으로 드문 자유주의적 교육을 미셸에게 제공했다. 그 교육이 이후 그녀의 모든 것을 결정했다.<br>어린 시절부터 빅토르 위고(Victor Hugo)에게 편지를 보냈다. 위고는 답장을 보냈고, 두 사람의 교류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위고는 미셸의 재판 과정을 보고 나서 용기를 ‘비로 마조르(Viro Major, 남자보다 위대한)’이라는 시로 기렸다. 1853년부터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865년에는 파리 몽마르트르(Montmartre)에 직접 학교를 열었다. 수업료를 낼 수 없는 노동자 자녀들을 받았다. 미셸에게 교육은 직업이 아니라 혁명의 준비였다.파리에서 미셸은 혁명가들과 접촉했다. 1870년에는 여성권리협회(Association pour les droits des femmes) 창설에 참여했다.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 1870~1871) 당시에는 파리 포위전에서 부상병 구호와 여성 위원회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1871년 3월, 코뮌이 시작됐다.<br>73일의 코뮌 — 바리케이드 위의 교사파리 코뮌은 1871년 3월 18일 시작돼 5월 28일 진압됐다. 73일이었다. 미셸은 이 73일 동안 전선에 있었다. 몽마르트르 18구. 국민군(National Guard) 61대대와 함께 이시(Issy), 몽마르트르, 클라마르(Clamar) 전투에 참가했다. 남성 군복을 입고 바리케이드에 섰다.<br>프랑스 언론은 그녀에게 ‘라 비에르주 루주(La Vierge Rouge)’, 붉은 처녀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멸과 공포가 섞인 호칭이었다. 미셸은 그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5월 24일, 어머니가 자신 대신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자 직접 경찰에 출두했다. 어머니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이것이 그녀가 체포된 경위였다. 경찰은 비열하게도 어머니를 인질로 삼아 루이즈 미셸을 검거한 것이다.<br>군사법원의 기소장은 미셸이 “군중의 열정을 자극하고, 무자비한 전쟁을 선동하며, 지옥의 음모로 인질들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적었다. 미셸은 이 기소 내용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진술했다. 종신 유형이 확정됐다. 사형을 면한 것에 대해서도 미셸은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br>뉴칼레도니아 — 유형지에서 카낙 편에 서다1873년 8월, 미셸은 유형선 비르지니(Virginie)호에 올랐다. 함께 탄 사람 중에는 아나키스트 나탈리 르멜(Nathalie Lemel)이 있었다. 르멜은 항해 중 미셸에게 아나키즘 이론을 전했다. 뉴칼레도니아 유형 시절, 그녀는 아나키즘으로 사상적 전환을 이룬다.<br>유형지에서 미셸은 카낙(Kanak) 원주민과 교류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기록했다. 1878년 카낙 봉기가 일어났을 때, 미셸은 프랑스 식민 당국이 아니라 카낙 편에 섰다. 유형수 신분으로 식민지 원주민의 저항을 지지한 것이다. 미셸은 카낙 어휘 수집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이 자료는 이후 프랑스-카낙 어휘 연구의 기초가 됐다.<br>유형지에서도 미셸은 아이들을 가르쳤다. 유형수 자녀들을 가르치고, 원주민 아이들을 가르쳤다. 식물 실험을 통해 열대 기후에 적합한 밀 품종을 개발하는 시도도 했고 식물의 전염병을 백신을 연구하기도 했다. 유형이 그녀의 삶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없다. 1880년 코뮌 참여자 전체에 대한 사면이 선포됐다. 미셸은 11월 9일 파리로 돌아왔다. 엄청난 군중이 마중을 나왔다.<br>감옥에서 쓴 책 — 회고록의 탄생귀국 후 미셸은 강연과 저술을 이어갔다. 1883년 1월, 파리 앵발리드(Les Invalides) 광장 시위에서 군중을 이끌고 빵집 약탈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에서 6년 형을 선고받았다. 3년 복역 후 사면됐다. 이 복역 기간인 1883년에서 1886년 사이, 미셸은 회고록(Mémoires)을 집필했다.<br>책은 1886년 2월 11일, 출판사 루아(Roy)에서 출간됐다. “제1권”으로 표기됐다. 후속 권이 이어질 것을 예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행본 형태의 제2권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대신 1890년, 사회주의 신문에 69회 연재의 형태로 그 내용이 발표됐다. 이 연재분은 오랫동안 ‘실종된 제2권’으로 불렸다가 뒤늦게 발굴돼 &lt;죽음을 향해: 미출판 회고록 1886~1890(A travers la mort: Mémoires inédits, 1886-1890)&gt;으로 별도 출간됐다.<br>2021년에는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가 CNRS 연구원 클로드 레타(Claude Rétat)의 편집·주석 작업을 거친 폴리오 역사(Folio Histoire) 시리즈 304번으로 &lt;회고록&gt;(1886)을 재출간했다. 576쪽 분량이었다. 파리 코뮌 150주년을 맞아 다시 꺼내든 텍스트였다. 원래 출판 당시 협상 과정에서 미셸이 자신의 문체를 지키고 동료들의 기억을 보호하는 방식을 편집자와 직접 조율했다는 사실도 이 시기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br>루이즈 미셸 회고록 — 선형이 아닌 기억의 구조회고록은 자서전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시간 순서대로 삶을 서술하지 않는다. 독자가 이미 알고 있다고 전제한 사건들 — 코뮌, 재판, 유형 — 을 비선형적으로 교차시킨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이고, 회상과 선언이 한 문단 안에 공존한다. 독자 주석 없이 읽기 어려운 밀도다. 이것은 결함이 아니라 선택이었다.<br>미셸의 문체는 ‘불타오르는(enflamé)’ 것으로 당대 독자들에게 묘사됐다. 부드럽지 않고, 완충재가 없다. 페미니즘 사상, 아나키즘, 빈자에 대한 연대가 동시에 터져 나온다. 여성 교육에 대한 분노, 생라자르 감옥 여성 수감자들과의 대화, 코뮌 동료들에 대한 기억이 섞인다. 회고록은 개인의 삶을 집단의 싸움과 분리하지 않는다.<br>루이즈 미셸 회고록 안에 미셸의 페미니즘 선언이 압축된 문장이 있다. “노동자는 노예다. 그러나 노동자의 아내는 노예들 중의 노예다.” 이것은 수사가 아니었다. 미셸은 여성의 해방을 계급 해방과 분리된 별도의 과제로 보지 않았다. 두 가지가 동시에 실현되지 않으면 둘 다 불완전하다는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당대 여성 참정권 운동과는 다른 거리를 두었다. 의회 정치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br>&lt;회고록&gt;이 출판됐을 때 독자들이 놀란 것은 정치적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서사의 신선함 때문이었다. 격식 있는 자서전도 아니었고, 정치 팸플릿도 아니었다. 혁명가의 내면과 일상이, 분노와 서정이, 이론과 기억이 하나의 목소리로 흘렀다. 1886년 당시 이런 형식의 여성 자서전은 거의 없었다.<br>빅토르 위고, 폴 베를렌 — 동시대가 그녀를 기린 방식빅토르 위고는 미셸의 용기를 시로 남겼다. ‘비로 마조르(Viro Major)’라는 제목의 시에서 위고는 미셸을 이렇게 썼다. 그녀의 날들, 밤들, 모든 이에게 내준 걱정과 눈물, 타인을 돕는 가운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 위고는 아나키스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미셸에 대해서는 시인으로서의 판단을 내렸다. 이 여성은 영웅적이지 않은 것을 할 수 없다고.<br>시인 폴 베를렌(Paul Verlaine)은 1883년 재판 이후 미셸에게 시를 바쳤다. 1888년에는 샤를 기르(Charles Guyé)가 르아브르(Le Havre) 강연장에서 미셸에게 총을 쐈다. 두 발을 맞았다. 미셸은 부상 이후 법원에 출석해 가해자를 옹호하는 진술을 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이므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이 진술이 당대 신문들에 크게 보도됐다. 미셸이 생산한 가장 강력한 정치적 발언은 연설이나 글이 아니라 이런 행동들이었다.<br>런던 망명, 그리고 마지막 강연1890년, 미셸은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자발적 망명이었다.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와 프랑스 당국의 압박을 피해 런던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1890년부터 1905년 사망 직전까지, 미셸은 프랑스와 유럽 각지를 돌며 강연을 이어갔다. 아나키즘, 여성의 권리, 노동자 연대가 강연의 중심 주제였다.<br>1905년 1월, 미셸은 마르세유(Marseille) 강연 중 쓰러졌다. 1월 9일, 마르세유에서 사망했다. 향년 74세였다. 장례식은 파리에서 열렸다. 세 세대에 걸친 혁명가들이 운집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 집회였다.2020년에는 뱅크시(Banksy)가 지중해 난민 구조선에 미셸의 이름을 붙였다. 루이즈 미셸호. 여성 선장이 이끌고, 페미니즘·반인종차별·반파시즘 가치를 내건 배였다. 미셸이 1878년 카낙 봉기를 지지했던 것, 그리고 』회고록『에서 아랍 유형수들에 대해 쓴 것과 같은 결이었다. 억압받는 자들의 편이라는 원칙은 국적과 시대를 가리지 않았다.<br>회고록을 읽는다는 것루이즈 미셀 회고록은 한 혁명가의 자기 서술이다. 그러나 자기 서술이기만 한 책은 아니다. 미셸이 기억하는 것은 개인의 삶이 아니라 집단의 싸움이다. 코뮌에서 함께 싸운 사람들, 유형지에서 함께 살아남은 사람들, 감옥에서 함께 복역한 사람들의 이름이 이 책을 채운다. 미셸 자신은 오히려 뒤로 물러난다.<br>독자가 시대적 맥락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읽는다면 이 책은 더 소중하게 다가설 것이다. 코뮌이 무엇이었는지, 등장하는 여러 인물이 누구인지, 뉴칼레도니아 유형이 어떤 조건이었는지. 그 맥락 없이 읽으면 인명과 지명과 사건이 연달아 쏟아지는 텍스트로 읽힌다.(한국어 번역본은 원본에 없는 이런 배경에 관한 주, 인물에 관한 주를 충실히 달아두었다) 그러나 그 맥락 안에서 읽으면, 이 책은 19세기 프랑스 하층 민중의 삶과 싸움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술한 기록이 된다.미셸이 재판정에서 한 말이 회고록을 읽는 기준이 된다. “우리가 원한 것은 사회혁명이었다. 사회혁명은 내 가장 소중한 소망이다.” 이 소망은 책 전체에 걸쳐 반복된다. 분노로, 애도로, 서정으로, 때로는 구체적인 교육 방법론으로. 미셸에게 글쓰기는 싸움의 연장이었다.&nbsp;<br><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150/k302136372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970959</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인문/예술</category><title>﻿시인이 영화를 본다는 것</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9889</link><pubDate>Sat, 16 May 2026 13: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988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032825&TPaperId=172798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5/50/coveroff/k51203282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시인이 영화를 본다는 것<br>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시적인 영화 에세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영화적인 시집이 될 것이라는 소개 문구가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정확하게 압축한다. 강정은 1992년 등단 이래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해온 시인이다. 록밴드 '엘리펀트 슬리브'의 보컬이기도 하고, 연극 무대까지 넘나든 이 경계 없는 예술가가 이번엔 영화 에세이를 냈다. 244쪽의 이 책은, 영화를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br>시인이자 음악가인 저자는, 세상의 빛보다 어둠에서 더 선명하게 타오르는 영화들의 초상을 에세이로 써 내려간다. 영화가 남긴 진동과 침묵을 붙잡는 저자에게 영화의 모든 장면은 몸으로 기록된다. 꿈처럼, 혹은 고백처럼. 그에게 영화란 체험에 가깝다.&nbsp;<br>스크린 앞에 앉아 무언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잔상과 진동을 언어로 옮겨 적은 것이 이 책이다. 영화 '비평'도 아니고, 영화 '소개'도 아니다. 시인이 영화를 통과한 흔적, 그 체험의 기록이다. 강정의 글은 영화 앞에서 분석자의 자리가 아니라 목격자의 자리에 선다. 그 차이가 이 책을 여타의 영화 에세이와 다르게 만드는 출발점이다.<br>이 책이 다루는 영화들의 목록을 보면 강정이 어디를 향하는지가 단번에 선명해진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시작으로, 줄랍스키의 〈포제션〉, 레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를 비롯해 유럽과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들 그리고 한국 영화 〈발레리나〉를 거쳐 마침내 〈조커〉에 이르기까지, 그가 선택한 영화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어둠의 이야기들이다.&nbsp;<br>〈포제션〉의 안제이 줄랍스키, 〈홀리 모터스〉의 레오 카락스, 〈거울〉의 타르코프스키. 이들은 모두 불편하고 낯설고 보기 쉽지 않은 영화를 만든 감독들이다. 강정은 이 어둡고 거친 영화들을 의도적으로 고른다. 그 의도는 단순한 취향의 표명이 아니다.<br>"세상에도,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어둠'은 항상 존재한다는 근본 사실을 상기"하며 그 어둠 속에서 인간 존재의 상처, 욕망, 구원, 사랑을 시인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간다.&nbsp;여기서 '어둠'은 단순히 암울하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어둠을 먹고 사는 물질적 환영"으로 정의하는 저자에게 '어둠'은 단순한 물리적 암흑을 넘어서 현실이 감추고 있는 것, 진짜 현실을 숨기고 있는 베일이며, 영화는 그 어둠 속에 빛을 비추어 인간의 얼굴을 다시 본다.&nbsp;<br>어둠이 없으면 영화도 없다. 스크린의 빛은 언제나 어둠을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극장의 암전, 필름의 공백,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어둠 — 강정은 이 물리적 사실을 영화 미학의 핵심으로 끌어올린다. 빛을 말하기 위해 어둠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논리다.<br>책에 수록된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킬러, 조커, 괴물, 혁명가, 정신병자다. 이들은 사회의 정상 테두리 밖에 있거나, 그 테두리 자체의 모순을 폭로한다. 강정이 이 인물들에게 매혹되는 것은,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가장 정면으로, 가장 적나라하게 살아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정상성 바깥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정상성 안에 갇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nbsp;<br>거울 앞에 선 관객<br>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거울'이다. 강정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에서 길어올린 이 이미지는 책 전체를 지배하는 메타포가 된다.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보고 저자는 "거울은 고요한 평면이나 그 안엔 온갖 시간과 사물과 사람의 잔영들로 요란스럽다. '사랑'을 비추면 '증오'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슬픔'을 던지면 '욕망'이 반사되기도 한다"고 기록했다. 저자는 영화 자체를 거울로 본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 내면의 가장 어두운 부분과 맞닥뜨리는 것이다.<br>영화를 거울로 보는 시선은, 영화를 단순한 오락이나 예술 감상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락으로서의 영화 앞에서 관객은 편안하게 수용하는 쪽에 선다. 거울로서의 영화 앞에서 관객은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거울 앞에 서면 나를 보게 된다. 강정에게 영화 보기는 그래서 하나의 자기 대면이다.&nbsp;독자는 어느 순간, 스크린이 아니라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nbsp;<br>강정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영화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이 책이 단순한 영화 감상문과 구별되는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다. 영화에 대한 글이지만, 결국 그것은 인간에 대한 글이고, 더 좁혀 말하면 나에 대한 글이다.<br>조커라는 핵심, 그리고 질문<br>이 책의 심장부는 〈조커〉와 〈조커: 폴리 아 되〉를 다룬 두 편의 글이다. 강정은 이 두 편에서 책 전체의 논지를 가장 날카롭게 벼린다.조커는 "사회적 인습 바깥으로 배제되어야 할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사회적 인습과 규율 및 편견 등을 뒤엎는 예상치 못한 대중적 역린"이다.&nbsp;조커는 '나쁜 놈'이 아니다. 혹은 단순히 나쁜 놈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자, 우리 사회가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이다. 강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관객을 향해 직접 질문을 겨냥한다."거기, 판결의 총신을 겨누며 슬며시 웃거나 화내고 있는 자, 당신 또한 조커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nbsp;<br>이것은 도발이 아니라 진지한 물음이다. 우리가 스크린 위의 조커를 보며 공감하거나 두려워한다면, 그 공감과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외부의 무언가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내부의 무언가를 건드린 반응이 아닌가.<br>일관된 주제를 반복하면서 명확해지는 것은 "영화 자체가 조커"라는 저자의 깨우침이다. 영화는 관객을 유혹하고, 허구로 현실을 뒤바꾸며, 스스로 가면을 쓴다.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자체를 지배한다.&nbsp;영화가 조커라는 명제는 이 책에서 가장 도발적이고 동시에 가장 설득력 있는 통찰이다. 영화는 우리를 웃기고 울리고 흥분시키면서, 동시에 현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조금씩 재구성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의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강정은 이 역설을 시인의 언어로 날카롭게 포착한다.더 나아가, 영화와 현실 사이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것은 무대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 스크린 안과 밖의 경계가 흐릿해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이 이 책의 마지막 울림이다.&nbsp;<br>음악과 자본주의, 이기 팝과 자무시<br>이 책은 순수한 영화 미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강정이 뮤지션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이 책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펑크록 대부 이기 팝의 삶과 음악을 다룬 짐 자무시 다큐멘터리 〈김미 데인저〉를 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절박한 문제들을 새로운 각으로 예리하게 설파하기도 한다.<br>이기 팝은 주류 바깥에서 스스로를 태워온 예술가다. 자무시는 그런 이기 팝의 삶을 카메라로 응시한 감독이다. 강정이 이 교차점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읽는 방식은, 영화와 음악과 사회가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얽히는 강정 특유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어느 챕터에서도 강정의 글은 영화 이야기로 시작해 그보다 훨씬 넓은 곳에서 끝난다.<br>'죽지 않는 시인'의 의미<br>책 제목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는 여러 겹으로 읽힌다. 영화 속 인물들은 죽는다. 조커도, 〈포제션〉의 인물들도, 〈발레리나〉의 킬러도. 그러나 그들이 필름 위에 새겨진 이미지는 죽지 않는다. 상영이 끝나도, 극장 불이 켜져도, 그 잔상은 관객의 몸 어딘가에 남아 계속 진동한다.<br>"영화는 망상의 거울이고, 그 거울은 결국 나 자신이다"라고 정의하는 필자는 스크린 위 죽지 않는 영혼들의 이야기 속에서 '죽지 않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책 곳곳에 투시하고 있다. khan죽지 않는 시인은 강정 자신이기도 하다. 글이 살아 있는 한, 시인도 살아 있다. 강정은 영화를 씀으로써 자신을 쓴다. 이 책은 영화 에세이의 형식을 빌린 시인의 자화상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 존재의 어둠을 들여다보고,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언어로 붙잡으려는 한 시인의 치열한 작업이다.<br>&nbsp;『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에는 영화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광과 여운, 그 흔적이 한 편의 시처럼 놓여있다. 영화를 사랑하되 그 어두운 면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싶은 독자, 시인의 언어로 영화를 읽는 경험을 원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오래 남는 책이 될 것이다. 읽고 나면 영화관 불이 꺼지는 순간, 이제 조금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515/50/cover150/k51203282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5155047</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인문/예술</category><title>﻿시네필의 일기장</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9845</link><pubDate>Sat, 16 May 2026 13: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984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22039045&TPaperId=172798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545/40/coveroff/k522039045_3.jpg" width="75" border="0"></a>&nbsp;<br/><br/>시네필의 일기장<br>봉준호 감독은 이 책을 추천하며 '시네필의 일기장'이라고 불렀다. 이 표현이 책을 정확하게 해석해준다. 한상훈은 30여 년간 극장을 제집 드나들듯 다닌 인물이다. 영화계 종사자도 아니고, 비평으로 밥을 먹는 사람도 아니다. 그냥 영화가 좋아서, 극장이 없으면 살 수 없어서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에게 극장은 직장이 아니라 집이었다. 살아가는 이유였고, 버텨내는 방식이었다. 이 책은 그 30년의 흔적이다.&nbsp;<br>책은 네 개의 파트로 구성된다. 1부 「극장전」, 2부 「미치광이 같은 사랑」, 3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4부 「어느 가족」이 그것이다. 각 파트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화와 저자의 삶이 맞닿는 지점을 기록한다. 학술적 분석도 아니고, 세련된 영화 에세이도 아니다. 저자는 이를 일기 같은 문체로 풀어내며 독자에게 "왜 우리는 영화를 보는가, 영화의 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nbsp;<br>1부 「극장전」 극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룬다.<br>1부는 말 그대로 극장을 무대로 한 사건과 감정의 기록이다. 제목들이 이미 흥미롭다. '어느 걸작주의자의 강박증', '눈물이 주룩주룩 나, 스코티 그리고 매들린', '영화광은 어떻게 뱀파이어가 되는가'. 이 소제목들에서 이미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난다. 걸작에 집착하고, 히치콕의 〈현기증〉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영화에 피를 빨린다.<br>1부에는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감독들이 대거 등장한다. 홍상수, 나루세 미키오, 존 포드. 특히 인상적인 것은 홍상수 감독과의 우연한 조우, 류이치 사카모토를 찾아서, 페드로 코스타 감독의 조언, 박찬욱 감독과의 인연 같은 챕터들이다. 세계적인 감독들과 우연히, 혹은 필연처럼 마주치는 이 일화들은 저자가 극장을 얼마나 집요하게 다녔는지를 방증한다. 극장에 항상 있었으니까 그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이 에피소드들의 진짜 의미다.&nbsp;<br>'할머니와 〈미나리〉' 챕터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를 가족과 함께 보는 경험이 어떻게 전혀 다른 감각을 만들어내는지를, 저자 특유의 솔직한 문체로 담아낸다. 이 1부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강박'에 가깝다. 좋은 영화를 봐야 한다는 강박, 좋아하는 감독을 한 번이라도 봐야 한다는 강박. 그가 남긴 글에는 멋진 미사여구가 없다. 때로는 너무 솔직하고, 때로는 벅차게 무너진다. 그 솔직함이 오히려 이 파트를 읽히게 만든다.<br>2부 「미치광이 같은 사랑」 영화와 자신을 동일시하다<br>2부는 저자가 가장 깊이 사랑하는 영화들에 대한 글을 모았다. 특히 저자가 자신과 동일시하다시피 하는 히치콕의 〈현기증〉과 주인공 '스코티', 그리고 저자의 인생 영화인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저자의 삶으로 분석된다.&nbsp;<br>〈현기증〉을 다룬 챕터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영원히 헤매다'는 이 책에서 가장 강렬한 글 중 하나다. 저자는 히치콕의 주인공 스코티가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그 환상을 쫓는 이야기를 자신의 삶과 겹쳐 읽는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험, 스크린 속 인물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 이것이 저자에게 영화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핵심 장면이다.<br>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다룬 '간절한 기도'는 또 다른 결이다. 핵전쟁의 공포 앞에서 한 남자가 신과 거래를 하는 이 영화를, 저자는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절망과 연결 짓는다. 영화가 어떻게 삶의 어떤 감각을 대신 표현해주는지, 그 체험이 얼마나 강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글이다.나루세 미키오를 다룬 '흐르는 강물처럼',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를 다룬 '진실과 마주하는 법', 후侯孝賢(허우 샤오시엔)의 〈안녕, 용문객잔〉을 다룬 '극장의 유령', 그리고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기생충〉까지를 아우르는 '내 기억 속의 영화 음악들'까지 이어지는 2부는, 저자의 시네필리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보여준다. 일본 고전 영화의 정서, 타이완 뉴웨이브의 공간감, 러시아 영화의 영성, 헐리우드의 자기고백 — 이 모든 것을 저자는 자신의 삶으로 흡수해 다시 언어로 내놓는다.&nbsp;<br>3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떠난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br>3부는 추모의 글들이다. 근래 세상을 떠난 배우들과 감독을 위한 추모의 글로 채웠다. 알랭 들롱, 지나 롤랜즈 등 기라성 같은 배우와 오시마 나기사, 데이빗 린치 같은 독보적인 감독들을 위한 존경과 감사를 담았다.&nbsp;<br>오시마 나기사를 추모하는 '영원히 젊은 영화를 만든 거장', 장 폴 벨몽도를 기리는 '내 기억 속에 〈네 멋대로 해라〉로 박제된 배우', 엔니오 모리꼬네에게 바치는 '포에버 시네마 천국', 존 카사베츠의 〈오프닝 나이트〉와 함께 지나 롤랜즈를 추모하는 글, 알랭 들롱을 향한 '그는 시네마였다', 그리고 데이빗 린치를 추모하는 '〈스트레이트 스토리〉, 나 그리고 어머니'까지, 추모의 대상은 다양하지만 글의 온도는 한결같다.&nbsp;<br>이 챕터들에서 주목할 것은 추모와 더불어 저자의 삶을 꺼낸다는 점이다. 데이빗 린치를 추모하는 글에 어머니가 등장하고, 장 폴 벨몽도에 대한 글에 저자 자신의 젊은 시절이 겹쳐진다. 추모는 결국 기억이고, 기억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다. 이 파트를 통해 저자는 영화와 삶이 얼마나 촘촘하게 얽혀 있는지를, 간접적이지만 가장 감각적으로 보여준다.<br>4부 「어느 가족」 책의 심장가장 밀도 있고 저자의 진솔함이 묻어나는 4부는, 영화를 주제로 삼은 글 중에서 독보적이라 할 만큼 독자의 심금을 울릴 만한 글을 모았다. 이 파트가 이 책의 진짜 핵심이다.&nbsp;영화와 저자의 삶이 가족사 안에서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는지, 평생 소원했던 아버지와의 첫 화해,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순간마저 영화로 기록되는 놀라운 광경, 그리운 어머니와의 애틋한 사연도 영화와 함께 펼쳐진다.&nbsp;<br>'아버지와의 첫 포옹' — 이 챕터 제목만으로도 이미 무언가가 밀려온다. 평생 어색하고 먼 관계였던 아버지와,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처음으로 무언가 닿는 순간을 저자는 담담하게 기록한다.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어머니의 16mm 필름'은 떠나보냄의 슬픔을 필름과 이미지의 언어로 풀어낸다.영화 〈벌새〉를 통해 청년기를 다시 바라본 이야기도 실렸다. '02호에 살았던 내가 1002호에 살았던 은희에게'라는 긴 제목의 이 챕터에서, 저자는 〈벌새〉의 주인공 은희를 통해 자신의 젊은 시절을 소환한다. 영화가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게 해주는 그 경험 — 이것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감각이다.&nbsp;<br>4부에서 이 책은 단순한 영화 에세이를 넘어선다. 영화가 어떻게 한 인간의 가장 내밀한 삶 속으로 들어와 상처를 보여주고, 화해를 이끌고, 이별을 견디게 해주는지를 — 이론이 아니라 실제 경험으로 — 써내려간다.<br>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이 책은 '시네필의 일기장'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이 적잖게 담겨 있다. 그것이 이 책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강점이다. 영화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을 기대한다면 다소 좁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영화와 맺어온 30년의 관계를, 이렇게 날것 그대로 담아낸 책은 흔치 않다.&nbsp;<br>그는 스크린 속 땀과 고통을 자신의 삶에 포개어 읽었고, 그렇게 체화된 고통과 숨결은 그의 문장 속에 차분히 각인되어 있다. "영화가 삶을 바꿨다"는 익숙한 말보다, "삶이 끝까지 영화를 놓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더 어울리는 사람.&nbsp;<br>시네필이라면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불편할 만큼 솔직한 책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정도의 독자라면, 한 인간의 사랑이 이렇게까지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책이다. 어느 쪽이든, 읽고 나면 극장에 가고 싶어진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제 역할을 다한다.<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545/40/cover150/k522039045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5454044</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인문/예술</category><title>영화를 존재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9837</link><pubDate>Sat, 16 May 2026 13: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983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62030720&TPaperId=172798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958/40/coveroff/k962030720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영화라는 '존재'<br>영화란 무엇인가? 이 단순해 보이는 질문은 사실 철학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까다로운 물음 중 하나다. 우리는 영화를 본다. 그러나 영화를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영화가 어떤 존재인지를 묻는 사람은 드물다. 김성태의 『영화 — 존재의 이해를 위하여』는 바로 그 드문 질문 앞에 정면으로 선다. 개별 영화 작품의 분석이나 특정 감독론이 아니라, 영화라는 표현 형식 자체를 존재론적으로 파고드는 이 책은 한국어로 쓰인 영화 이론서 중 보기 드물게 영화의 존재론적 문제에 깊이 침잠하는 저작이다.&nbsp;<br>저자 김성태는 프랑스 파리 3대학 영화학과 박사로, 12년간 리용 2대학과 파리 3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자크 오몽 교수의 지도 아래 장-뤽 고다르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씨네21, 필름2.0 등에 영화 비평을 기고하고, 중앙대·한예종·서강대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서울의 봄〉 원안 작업 등 창작 현장에도 직접 발을 담근 실천적 영화학자다. 이 책의 무게감은 그 두꺼운 학문적 배경에서 비롯된다. 단순히 서양 이론을 소개하고 나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고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한 독자적인 사유를 전개한다.<br>이 책은 크게 네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1부 「'영화'라는 존재 I — 다른 이미지」는 영화의 탄생과 특수성을, 2부 「존재의 진화 — 첨가되는 개념들」은 영화가 포착하는 세계의 다양한 양태를, 3부 「'영화'라는 존재 II — 영화들을 생산하는 기계」는 관객과 영화의 관계를, 4부 「'영화'와 현실 — 현실을 다루는 두 가지 방법」은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다룬다.&nbsp;<br>책의 출발점은 명확하다. 1895년 탄생한 '영화'는 기계도 상품도 이야기도 아니라 '움직이는 이미지'였다는 것이다. 영화들은 모두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드는 '영화(시네마)'라는 형식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품이다. 저자는 이로부터 시작해, 영화의 고유한 표현 양식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세계를 구성하고 관객과 관계 맺는지를 단계적으로 해명해 나간다.&nbsp;<br>논지의 핵심은 하나다. 저자 김성태는 영화를 "움직이는 철학"으로 간주하며, 영화를 통해 베르그송의 지속, 들뢰즈의 시간, 라캉의 주체 등을 관통한다. 이것은 철학 개념을 영화에 단순히 '적용'하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라는 매체가 철학이 구체적 형상으로 실험되고 재현되는 장임을 밝히는 일이다. 철학과 영화가 서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하나의 사유 방식이라는 주장이다.&nbsp;<br>이미지의 존재론: 보이는 것과 있는 것 사이<br>1부의 논의는 영화 이미지의 특수성에서 출발한다. 1부에서 김성태는 영화가 현실을 모사한다기보다 다르게 재현하고, 다르게 보여주는 이미지라는 전제를 세운다. 특히 '움직임과 근대'라는 장에서 영화가 이미지와 움직임을 통해 근대를 구현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영화는 근대 시공간의 감각과 속도를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재배치하고 재조립하는 시간-운동 기계로 해석된다.&nbsp;<br>이는 단순한 기술사나 미디어론이 아니다. 영화의 탄생이 왜 19세기 후반이었는가, 왜 그 시기 인류는 운동하는 이미지를 포착하고자 했는가를 묻는 질문이다. 저자는 사진과 영화의 차이, 회화와 영화의 차이를 단순한 기술적 차이로 환원하지 않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로 읽어낸다. 영화는 움직임을 담은 것이 아니라, 움직임 자체가 되고자 했다. 이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의 씨앗이다.<br>영화의 네 가지 얼굴: 세계를 포착하는 방식들<br>2부에서 저자는 영화가 세계를 보여주는 방식을 네 가지로 나누어 분석한다.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리얼리즘 전통의 카메라 시선), 조작된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서사적 개입과 연출의 정치성), 편집을 보여주는 영화(몽타주를 통한 인식 구조의 생성),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시간성과 이야기성의 결합)가 그것이다.<br>이 구분이 의미 있는 것은, 단순히 장르나 스타일의 차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통해 영화가 조망하는 측면에 따라 세계의 양태 자체가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다. 같은 거리, 같은 사람, 같은 사건도 카메라가 어디에 서서, 어떤 리듬으로, 어떤 편집의 논리로 포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로 드러난다. 김성태는 영화가 단순한 스토리텔링 장치가 아니라, 세계를 감각하고 구성하는 복합적인 지각 기계라는 존재임을 강조한다.&nbsp;<br>이 대목에서 책은 특히 영화 문법의 존재론적 의미를 깊이 파고든다. 몽타주와 롱테이크, 데꾸빠쥬, 플랑-세껑스 같은 개념들이 단순한 기술적 도구가 아니라 인식의 틀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저자 김성태는 영화가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존재의 의미가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관객의 시선을 조직하고 현실을 분절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세계의 존재 조건 자체를 바꾸는 기술적-미학적 개입으로 읽힌다. 에이젠슈타인의 충돌 몽타주와 바쟁의 롱테이크 미학이 단순히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세계와 현실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론적 입장이라는 독해는 설득력이 있다.&nbsp;<br>관객과 영화: 관계적 존재로서의 영화<br>3부는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다. 여기서 저자는 영화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관객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재한다는 명제를 전개한다. 영화는 보는 이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의미는 관객과의 관계 안에서 생성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영화가 단지 '표현된 존재'가 아닌, '관계적 존재'로 이해되어야 함을 시사한다.&nbsp;<br>'영화관과 관객', '영화적 일루전', '영화적 상태', '영화적 공간과 최면' 등의 장은 영화 수용의 심리적·지각적 구조를 분석한다. 특히 '영화적 공간과 최면'에서는 영화가 감각적 설계와 편집을 통해 심리적·지각적 교란 상태를 어떻게 유도하는지를 분석한다. 어두운 극장, 스크린의 빛, 사운드의 포위, 편집의 리듬 — 이 모든 장치가 하나의 유사-최면 상태를 만들어내며, 관객은 그 속에서 영화적 현실을 실재처럼 경험하게 된다. 저자는 이 과정이 단순한 심리적 반응이 아니라 존재론적 변환임을 주장한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잠시 다른 존재 방식을 경험하는 일이다.&nbsp;<br>라캉의 주체 이론이 이 지점에서 개입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영화는 시선을 조직하고 주체의 위치를 구성한다. 카메라의 눈과 관객의 눈이 일치하는 순간, 관객은 영화 속 세계의 한 주체가 된다. 이 경험이 단순한 허구와 몰입을 넘어,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감각 자체를 잠시 재구성한다는 것이 저자의 통찰이다.<br>현실과 영화: 두 가지 전략의 대결<br>4부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라는 가장 고전적인 논쟁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김성태는 "현실"이란 단일한 것이 아니며, 영화는 이를 여러 층위로 분할하고 새롭게 조직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는 전략과, 편집과 몽타주를 통해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전략이 영화사에서 어떻게 경합해 왔는지를 추적한다.&nbsp;<br>바쟁에게 영화가 '현실을 보존하는 기술'이라면, 김성태에게 영화는 "현실을 낯설게 만들고, 재구성하는 사유의 매체"가 된다. 이 대립은 리얼리즘 대 형식주의의 오래된 논쟁처럼 보이지만, 저자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층위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이미지는 현실을 담을 수 있는가, 아니면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현실을 변형하는가. 이 질문들은 영화론의 범주를 넘어 인식론, 나아가 존재론의 영역으로 진입한다.&nbsp;<br>개정판에서 새롭게 추가된 마지막 장 '몽타주 이후'는 이 모든 논의의 귀결점이다. 들뢰즈의 시간-이미지론을 떠올리게 하며, 영화는 재현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구성 장치라는 점에서 이 책의 사유는 다시 정점에 도달한다. 몽타주 이후의 영화는 어디로 가는가. 디지털 이미지, 스트리밍, 가상현실의 시대에도 '영화적인 것'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 질문에 저자는 직접적인 답을 내놓기보다, 독자 스스로 사유하게 만드는 열린 결말을 선택한다. 그 열린 공간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nbsp;<br>베르그송의 지속, 들뢰즈의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라캉의 주체론, 바쟁의 리얼리즘 이론 등 20세기 영화철학의 핵심 개념들이 빠른 호흡으로 등장한다. 영화를 진지하게 사유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하나의 지적 자극이 될 것이다.<br>초판 절판 이후 2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영화에 관한 질문과 사유를 다시 제기하는 이 책은, 영화라는 이미지-기술의 집합체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세계를 보여주고 어떻게 관객과 관계 맺는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2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개정판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 영화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기술이 아무리 바뀌어도 낡지 않는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극장에서 OTT로 변해도, 이미지가 움직인다는 사실, 그것이 누군가의 시선과 만난다는 사실, 그 만남이 현실에 대한 감각을 흔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nbsp;<br>영화를 단순히 즐기는 것을 넘어 이해하고 싶은 이들, 영화가 왜 우리에게 이렇게 강렬한 경험인지를 철학적으로 묻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안내자가 된다. 영화학, 철학, 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 번 읽고 끝낼 책이 아니다. 책 자체가 하나의 몽타주처럼 — 처음 볼 때와 두 번째 볼 때 전혀 다른 것이 보이는 — 여러 번 다시 읽힐 텍스트다.<br>영화를 보는 행위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그것은 잠시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존재 방식을 경험하는 일이다. 김성태의 이 책은 우리가 왜 어두운 방에 앉아 빛의 움직임을 응시하는지, 그 오래된 물음 앞에 다시 서게 만든다.<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958/40/cover150/k962030720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9584001</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인문/예술</category><title>영화의 ‘존재론’과 ‘역사적 기원’의 복원-영화의 역사-영화, 존재의 이해를 위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7494</link><pubDate>Fri, 15 May 2026 04: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7494</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62030720&TPaperId=1727749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958/40/coveroff/k962030720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937532&TPaperId=1727749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956/93/coveroff/k562937532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김성태 저자의 『영화의 역사』는 단순한 연대기적 나열을 넘어, 영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인간의 사유와 기술, 그리고 예술적 형식을 변화시켜 왔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한 역작이다. 이 책은 영화의 탄생부터 성장까지 그 방대한 흐름을 한국적 시각과 보편적 미학의 균형 잡힌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br>​&nbsp;빛과 그림자의 연대기<br>1. 영화, 기술과 예술의 필연적 만남<br>김성태는 영화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가장 먼저 '기술적 토대'에 주목한다. 그는 영화가 다른 예술 장르와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과학 기술의 산물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를 통해 '열차의 도착'을 상영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인류가 시간을 박제하고 복제할 수 있게 된 혁명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한다.<br>저자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와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래프를 비교하며, 개인이 들여다보는 방식에서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는 '극장적 체험'으로의 전환이 영화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분기점이었는지를 상세히 분석한다. 이는 영화가 초기부터 대중 예술로서의 운명을 타고났음을 시사한다.<br>2. 형식을 향한 탐구: 무성영화의 황금기<br>책의 중반부에서 김성태는 영화가 단순한 기록의 수단에서 '언어'로 진화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마술적 상상력과 에드윈 S. 포터의 편집 기술, 그리고 이를 집대성한 D.W. 그리피스의 서사 구조는 영화가 어떻게 고유의 문법을 갖게 되었는지 보여준다.<br>특히 저자는 독일 표현주의와 러시아 몽타주 이론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nbsp;독일 표현주의는 인간의 내면적 공포와 불안을 왜곡된 세트와 조명을 통해 시각화한 과정을 설명한다. 러시아 몽타주는 에이젠슈타인 등이 확립한 '충돌의 미학'이 어떻게 관객의 이성과 감성을 자극하는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있었는지를 깊이 있게 다룬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독자는 영화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쇼트와 쇼트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지적 장치'임을 깨닫게 된다.<br>3. 리얼리즘과 현대 영화의 태동<br>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영화사 서술은 이 책의 백미다. 김성태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프랑스 누벨바그를 통해 영화가 어떻게 '스튜디오의 인공성'을 벗어나 '거리의 진실'로 나아갔는지를 서술한다.&nbsp;비전문 배우의 기용, 야외 촬영, 느슨한 내러티브 구조 등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라, 전쟁의 참상을 겪은 인류가 현실을 직시하려는 윤리적 태도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한다. 또한,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로 대표되는 누벨바그 운동이 어떻게 현대 영화의 문법을 해체하고 재구성했는지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br>4. 할리우드의 팽창과 한국 영화의 궤적<br>책은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제패한 할리우드 시스템의 명암도 놓치지 않는다. 장르 영화의 정형화와 스타 시스템이 가져온 대중적 영향력을 분석하는 한편, 그 안에서도 작가주의적 색채를 잃지 않았던 거장들의 분투를 기록한다.<br>김성태는 디지털 기술의 도입이 영화의 본질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필름이 사라진 자리에 0과 1의 데이터가 들어차고, 극장 대신 OTT 플랫폼이 대세가 된 시대에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다시 끄집어낸다.&nbsp;그는 기술이 변해도 인간의 삶을 투영하고 타인과 공감하고자 하는 영화의 본질적인 힘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가상현실(VR)과 인공지능(AI)이 영화 제작에 개입하는 오늘날에도,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가'라는 인문학적 가치에 있음을 역설한다.<br>우리 모두를 위한 시네마테크<br>김성태의 『영화의 역사』는 전문가만을 위한 학술서가 아니라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자신이 탐닉해 온 영상 언어의 뿌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친절한 지도와 같다.&nbsp;이 책은 인류가 쌓아 올린 빛과 소리의 유산을 향유하는 일임을 일깨워 준다. 방대한 사료와 깊이 있는 해석이 어우러진 이 저서는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필독서로, 영화 애호가들에게는 곁에 두고 오래도록 읽을 동반자로 손색이 없다.<br>"영화의 역사는 곧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역사이다."저자의 이 메시지는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독자의 마음속에 여운으로 남는다.<br>  <br><br><br><br><br><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956/93/cover150/k56293753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9569348</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인문/예술</category><title>할리우드 배우들부터 연기 초보자까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7490</link><pubDate>Fri, 15 May 2026 04: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749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930037&TPaperId=1727749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928/5/coveroff/k262930037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할리우드 배우들부터 연기 초보자까지, 수 세대를 거쳐 배우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은 연기의 고전.스타니스라브스키의 '시스템'을 미국에 뿌리내린 메소드 연기술의 산파, 리처드 볼레스라브스키의 가르침.<br>연기란 무엇인가 — 90년을 건너온 질문1933년 처음 출간된 리처드 볼레스라브스키의 『Acting: The First Six Lessons』는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연기 학교와 배우 지망생들의 필독서로 읽힌다. 연기에 관한 책으로는 스타니스라브스키의 저서와 함께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힌다.&nbsp;<br>이 책의 구성은 독특하다. 저자 볼레스라브스키가 한 여배우 지망생을 가르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여섯 번의 수업 — 대화체로 쓰인 이 책은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라 마치 실제 연기 수업 현장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을 전달한다. 독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그 수업을 듣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br>그러나 이 책이 배우 지망생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볼레스라브스키 자신이 명확히 말하듯 — 이 책은 "연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이기보다는 그저 연기를 하길 바라는" 모든 이를 위한 책이다. 연기를 사랑하고, 배우라는 직업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6개의 강의는 무대 위의 배우만이 아니라 삶이라는 무대 위에 선 우리 모두에게 유효하다.<br>The Six Lessons<br>여섯 번의 수업 — 집중에서 리듬까지<br>1st Lesson집중Concentration<br>2nd Lesson정서 기억Memory of Emotion<br>3rd Lesson극적 행동Dramatic Action<br>4th Lesson성격 구축Characterization<br>5th Lesson관찰Observation<br>6th Lesson리듬Rhythm<br><br>첫 번째 수업 〈집중〉은 연기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다. 무대 위에서, 카메라 앞에서, 완전히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 주의를 흩뜨리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오직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에 몰입하는 능력 — 집중은 나머지 다섯 수업 모두의 전제 조건이다.<br>두 번째 수업 〈정서 기억〉은 메소드 연기의 핵심 개념이다. 배우가 무대에서 느끼는 감정은 꾸며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감정의 기억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 이것이 스타니스라브스키 시스템의 정수이자, 이후 리 스트라스버그를 거쳐 더스틴 호프만, 알 파치노, 메릴 스트립 같은 배우들에게 이어진 메소드 연기의 핵심이다.<br>세 번째 〈극적 행동〉은 배우가 무대에서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수업이다.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 연기의 단위라는 것, 모든 장면에는 인물이 원하는 것과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는 것. 네 번째 〈성격 구축〉에서는 자신과 다른 인물을 어떻게 창조하는가를, 다섯 번째 〈관찰〉에서는 일상에서 인물의 재료를 어떻게 발굴하는가를 다룬다. 마지막 〈리듬〉은 연기와 삶 전체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박자에 대한 이야기다.<br>✦ ✦ ✦메소드 연기의 계보 — 스타니스라브스키에서 할리우드까지리처드 볼레스라브스키는 스타니스라브스키의 제자이자 조수였다.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배우로서 그 유명한 '시스템'을 직접 체득했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이를 전파했다. 볼레스라브스키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할리우드 메소드 연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br>그는 1923년 뉴욕에 '아메리칸 래버러토리 극장(American Laboratory Theatre)'을 설립했고, 이 극장에서 후일 그룹 씨어터(Group Theatre)의 핵심 멤버들이 배출되었다. 그룹 씨어터는 이후 리 스트라스버그의 액터스 스튜디오로 이어졌고, 액터스 스튜디오는 말론 브란도·알 파치노·더스틴 호프만·로버트 드 니로·메릴 스트립이라는 걸출한 배우들을 길러낸다. 볼레스라브스키의 이 얇은 책 한 권이 20세기 연기 예술의 지형 전체를 바꾼 셈이다.<br>그리고 이 책이 탁월한 이유는 이론의 압축에만 있지 않다. 볼레스라브스키는 연기를 삶과 분리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 "예술을 위한 삶을 살라. 삶을 위한 예술을 살지 말고." 여섯 수업은 단순히 무대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살고 더 깊이 느끼고 더 깊이 관찰하는 인간이 되는 방법을 가르친다.<br>리처드 볼레스라브스키Richard Boleslavsky, 1889~1937폴란드 태생으로 러시아 제국에서 성장했다.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서 스타니스라브스키에게 사사하며 그의 '시스템'을 체득했다. 이후 미국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에서 연기 교사, 연극·영화 연출가로 활동하며 스타니스라브스키 시스템을 영미권에 최초로 본격 전파했다. 1933년 출간된 『Acting: The First Six Lessons』는 그의 대표작이자 연기 교육의 고전으로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읽히고 있다.<br>이런 분께 강력 추천합니다-연기를 처음 배우는 모든 배우 지망생/메소드 연기의 뿌리가 궁금한 분-연극·영화학과 학생 및 관계자-삶을 예술적으로 살고 싶은 모든 이-집중·관찰·리듬에 대해 생각하는 분<br>배우를 위한 책이 아닌, 삶을 위한 책『연기 6강』을 읽고 나면 이상하게 주위를 더 자세히 보게 된다. 지하철 맞은편 사람의 표정, 카페에서 들리는 대화의 리듬, 어제 나를 기쁘게 했던 감정의 질감 — 그것들이 이전과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볼레스라브스키가 가르친 집중, 정서 기억, 극적 행동, 성격 구축, 관찰, 리듬은 무대 위의 배우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무대를 더 깊이 살고 싶은 모든 이에게 유효하다.<br>190쪽이라는 간결한 분량 속에서 이 책은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연기 교육의 정수를 전한다. 스타니스라브스키에서 볼레스라브스키로, 볼레스라브스키에서 그룹 씨어터로, 그룹 씨어터에서 액터스 스튜디오로 이어진 위대한 계보의 출발점. 불란서책방이 이 고전을 한국에 소개한 것은 배우를 꿈꾸는 이들에게 반가운 소식이자, 연기와 삶의 교차점에 관심 있는 모든 독자에게 드리는 선물이다.<br>90년을 건너온 연기의 고전, 드디어 한국어로메소드 연기 계보의 출발점. 배우 지망생부터 삶을 깊이 살고 싶은 모든 이에게 추천.<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928/5/cover150/k26293003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9280526</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사회</category><title>저자, 출판권, 편집권 그리고 대주주_프랑스 출판계 이슈</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7487</link><pubDate>Fri, 15 May 2026 04: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7487</guid><description><![CDATA[Rentrée littéraire.<br>프랑스 출판계의 가장 활기찬 시기를 이르는 말. 매년 8월 말부터 10월 말 사이에 수백 권의 문학 신간이 쏟아져 나온다. 주요 문학상이 발표되는 11월 초까지 이어진다. 공쿠르 르노도 메디치 페미나 등.&nbsp;<br>작년 8월, 시즌을 시작하면서 "자기 연민에 빠진 셀카를 조심하라!"는 말을 남겼던 그라세 출판사 ceo 올리비에 노라가 모기업인 아셰트 그룹의 또 모그룹인 라가르데르의 뱅상 볼로레에 의해 최근에 해임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동네에서는 거의 '지진'이라는 표현도 쓰고 있다. 저간의 복잡한 사정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꽤나 정치적 입장(세계관)에 따라 갈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분명 이념적 문제일 듯하다.<br>작가와 출판인들의 말은 이렇다.<br>"오랫동안 산업 및 문화 활동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온 아셰트와 그라세가 속한 그룹은 이제 이념적 성향이 공개적인 논의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미디어 매체, 출판사, 플랫폼의 응집력 있는 전체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의도적인 변화는 노동법이나 저작권법에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br>결과적으로 저자들은 자신들의 출판권과 작품이 자신들이 반대하는 편집 방침을 가진 주주의 통제하에 놓이게 됩니다. 직원들은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는 정치적 담론의 확산에 참여하게 되고, 출판사들은 자신들이 공감하지 않는 의미를 담은 작품들을 출간하게 됩니다. 직원들은 다원주의가 사라지고 단일 노선이 지배하는, 근본적으로 변화된 환경에서 일하게 됩니다.민주주의는 개인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하지 않은 대의를 위해 복무하도록 강요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br>서점 직원, 홍보 전문가, 심지어 팀 전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케팅 활동에 휘말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프랑스 법은 이들을 위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해 놓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거나 떠나라는 선택지만 있을 뿐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수년간 쌓아온 근속 연수, 권리, 그리고 때로는 수십 년에 걸쳐 구축해 온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는다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 부조화를 감수하는 것이며, 때로는 병가, 탈진, 그리고 조용한 의욕 상실로 이미 드러나는 실제적인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br>그라세 출판사는 우리의 집이었고,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의견 차이가 거의 없는 작가들이 평화롭게 함께 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오늘날 우리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 바로 문화와 미디어 전반에 걸쳐 권위주의를 강요하려는 이념 전쟁의 인질이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라세 출판사의 작가이거나, 그라세에서 책을 출간했거나, 그라세에서 출간 ​​예정인 책이 있지만, 다음 책은 그라세에서 출간하지 않을 것입니다"<br><br>올리비에 노라를 해임한 사람 벵상 볼로레. 이 사람의 말은 이렇다.<br>"이 분쟁은 메종 그라세의 매우 실망스러운 경제적 성과를 배경으로 발생했다. 2024년 1,650만 유로였던 매출액은 2025년 1,200만 유로로 감소했으며, 2024년 120만 유로였던 영업이익은 절반으로 줄어 2025년에는 60만 유로에 그쳤다. 이와 동시에 올리비에 노라(Olivier Nora)의 연봉은 83만 유로에서 101만 7천 유로로 인상되었는데, 아셰트(Hachette)가 지급한 이 보수의 절반만이 그라세 측에 청구되었다.<br>결과적으로 그라세의 겉보기 비용이 개선되었으며, 이에 따라 발표된 실적 또한 실제보다 부풀려지는 효과를 낳았다.하지만 그라세(Grasset)를 이끌었던 올리비에 노라의 사임은 엄청난 언론의 관심과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부 언론은 이를 "지진" 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수백만 프랑스 국민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이 심각한데, 어떻게 이 사건이 이토록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Grasset은 계속 운영될 것이며, 떠나는 사람들은 새로운 작가들이 출판되고, 홍보되고, 인정받고,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br>이는 단지 소수의 이기적인 집단, 즉 스스로를 모든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집단, 서로를 포섭하고 지지하며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집단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셰트 경영진은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경영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라세는 계속될 것이며, 떠나는 사람들은 새로운 작가들이 출판되고, 홍보되고,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저는 가족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문학을 깊이 사랑해 왔으며, 더 많은 작가들이 더 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데 헌신하고 있습니다. 제 "이념 "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저는 기독교 민주당원이며, 아셰트의 경영진은 출판을 원하는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계속해서 출판할 것입니다."<br>한 마디로 영업이익은 줄고 ceo 연봉은 올랐는데 그라세가 반반 장부에 올리고 나머지는 아세트에서 댔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영업이익이 났다는 이야기다. 이 뻔한 이야기에는 그저 그렇다고 치고.<br>저자, 출판사직원, 그리고 출판사가 자신들의 출판권과 작품이 자신들이 반대하는 편집 방침을 가진 주주의 통제하에 놓이게 될때 노동법이나 저작권법에 이를 반영할 수 있는 법을 만들라는 게 핵심.<br>여튼 우리도 알만한 프랑스 작가들 300 여명이 그라세를 떠난다고 하는데 여기에 계약 문제 저작권 문제 상당히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description></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인문/예술</category><title>혐오는 감정이 아니라 ‘설계된 통치술’이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7476</link><pubDate>Fri, 15 May 2026 03: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7476</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42833109&TPaperId=1727747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770/72/coveroff/k242833109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호모포비』가 분석한 3천 년의 배제<br>우리는 흔히 혐오를 개인의 미성숙한 감정이나 특정 대상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다니엘 보릴로와 변호사 카롤린 메카리는 그들의 저서 『호모포비』를 통해, 동성애 혐오가 결코 우연적인 감정의 산물이 아님을 입증한다. 이 책은 170쪽이라는 짧은 분령이지만 압도적인 밀도로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3천 년에 걸친 혐오의 뿌리를 추적하며, 이것이 어떻게 사회적·제도적으로 구조화되었는지를 날카롭게 해부한다.<br>1. 혐오의 기원과 가부장제의 공모이 책의 가장 강력한 통찰 중 하나는 동성애 혐오가 가부장적 세계관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고대 그리스-로마와 유대-기독교라는 대조적인 두 세계를 분석한다. 먼저&nbsp;그리스-로마는 동성애를 사회적 통과의례로 수용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nbsp;유대-기독교는 잘 알려져 있듯 동성애를 철저히 부정하고 박해했다.&nbsp;겉보기에 정반대인 두 세계는 그러나 사실 ‘강력한 가부장적 질서’ 위에 세워진 사회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즉, 혐오는 이성애 우월성을 고착화하고 남성 중심의 가족 제도와 혼인 규범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가 필요로 했던 시스템이었던 것이다.<br>2. ‘죄악’에서 ‘질병’으로: 혐오의 진화와 합리화저자들은 호모포비아를 크게 두 가지 층위로 분석한다. 첫째는 유대-기독교적 전통에 기반한 '종교적·도덕적 혐오'이며, 둘째는 근대 의학 및 법률이 만들어낸 '과학적·제도적 배제'다.과거에 동성애가 종교적 단죄의 대상인 ‘죄악’이었다면, 근대에 들어 심리학과 정신의학은 이를 ‘질병’으로, 법률은 ‘반사회적 범죄’로 재정의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단 하나의 사실은, 동성애가 언제나 ‘정상’의 범주를 확립하기 위한 ‘비정상’의 거울로 동원되었다는 점이다.<br>3. 차별의 위계화와 권력의 작동이 책은 호모포비아가 어떻게 ‘차이의 위계화’를 수행하는지 밝혀낸다. 저자들은 이 현상이 단순히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마음이 아니라, 이성애적 결합만을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것으로 설정하여 권력의 우위를 점하려는 적극적인 사회적 실천이라고 비판한다.&nbsp;특히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동성애자들이 유대인 희생자들과 달리 해방 후에도 그 어떤 인간적 권리도 부여받지 못했던 처절한 사실은, 혐오가 어떻게 역사적·이념적으로 공고하게 구축되었는지를 냉철하게 증명하고 있다.<br>4. 법의 역할과 민주주의의 완성법은 다수자의 도덕을 수호하는 도구가 아니라,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보루가 되어야 한다. 저자들은 동성애의 비범죄화를 넘어 평등한 시민권(결혼, 입양 등)의 획득이 왜 민주주의 완성의 필수 요건인지를 역설한다.&nbsp;결혼 제도를 남녀 간의 결합이 아닌 ‘성 중립적 공동체’라는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급진적이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성애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소수자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사회 관습의 코르셋에서 모두를 해방시켜 만인의 자유를 향상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br>혐오의 언어 뒤에 숨은 거대한 차별의 역사를 직시하고자 하는 독자들,&nbsp;인권과 젠더 이슈에 민감한 20-30대 독자들에게&nbsp;일독을 권한다. 170페이지에 인류 역사의 단면을 닮아냈다. 역사책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운 책이다.제도적 혐오의 구조 등 현대 사회의 차별 기제를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싶은 독자에게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책이다. 그리고&nbsp;법이 어떻게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민주주의의 보루가 될 수 있는지 탐구하는 독자 또한 유익한 독서를 제공할 것이다.<br>"혐오를 알아야 혐오와 싸울 수 있다."<br>혐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제조된 것이다. 『호모포비』는 우리가 지켜야 할 인권의 최전선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정직한 지도라 할 수 있다. 혐오를 멈추는 것은 단순히 친절해지는 것이 아니라, 위계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모든 인간이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세상을 설계하는 일일 것이다.<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770/72/cover150/k24283310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7707267</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인문/예술</category><title>위장과 뇌는 낯선 사이가 아니다_철학자의 뱃속</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7471</link><pubDate>Fri, 15 May 2026 03: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7747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52736108&TPaperId=1727747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5754/48/coveroff/k452736108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철학은 오랫동안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고집해 왔다. 이성은 욕구를 초월한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사유는 고귀하고, 소화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1989년 출판된 미셸 옹프레의 첫 번째 에세이는 이 모든 전통을 향한 유쾌한 공세다. 그 핵심 주장은 단순하면서도 전복적이다. 철학자들의 음식 선택을 통해 그들의 사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 당신은 당신이 먹는 것이고, 당신의 철학 또한 그럴지 모른다는 것이다.<br>철학자들은 생각할 때 대부분 자신의 몸을, 특히 먹을 때 몸속에 쌓이는 것들을 생각하는 것을 잊는다. 그러나 사유와 위장 사이에는 복잡한 친화성과 고백의 그물망이 존재하며, 이것을 성찰이 무시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옹프레는 이 영역을 가스트로필로소피(gastro-philosophie), 즉 미식철학이라 부르며, 『철학자들의 뱃속』은 그 창립 선언문이다.<br>위장과 뇌는 낯선 사이가 아니다<br>이 책의 지적 도박은 옹프레 특유의 활기로 펼쳐진다. 디오게네스가 날것의 문어를 즐겨 먹지 않았다면 과연 그토록 문명과 그 관습에 적대적인 반대자가 되었을까? 『사회계약론』의 루소는 평소 식단이 유제품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검소함을 그토록 옹호했을까? 악몽이 게로 가득했던 사르트르는 갑각류에 대한 혐오를 평생 이론의 영역에서 치르며 살지 않았을까?<br>이것들은 가벼운 농담이 아니다. 진지한 철학적 방법론의 전제들이다. 옹프레는 한 사상가의 음식과의 관계 — 무엇을 먹고, 거부하고, 집착하고, 두려워하는지 — 가 전기적 각주가 아니라 인식론적 열쇠라고 주장한다. 식이 요법은 이 독해 방식에서 철학자들이 기록에서 지우려 애써온 자서전의 한 형식이다.<br>철저히 니체적인 이 에세이에서 옹프레는 대구, 보리 수프, 와인, 앙두이예트, 향이 든 커피, 심지어 오드콜로뉴에까지 철학적 존엄성을 되돌려 주기로 했다 — 이것들은 푸리에에서 마리네티까지, 칸트에서 실존주의자들까지, 기쁨의 학문에 이르는 뜻밖의 경로들이다. '식이적 이성 비판'이라는 부제는 칸트에 대한 의도적인 메아리다 — 칸트는 적절히도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사례 연구 중 하나로 등장한다.<br>철학자들의 메뉴<br>이 책은 각 사상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은 맛과 거부로 그려진 철학적 초상화처럼 기능한다. 등장인물은 디오게네스, 루소, 칸트, 샤를 푸리에, 니체, 미래주의자 마리네티, 그리고 장폴 사르트르다. 각 장은 한 철학자의 신체적 습관 — 쾌락, 공포증, 과잉, 결핍 — 이 그들이 공언한 사상을 어떻게 표현하고 또 어떤 모순이 있는지를 밝힌다.<br>철학자들에 이르기 전, 옹프레는 유머로 가득 찬 서문을 통해 독자의 입맛을 열어준다 — 풍자적이고, 달콤 쌉싸름하고, 매콤한 맛의 전채 요리처럼. 이것은 독자가 이 에세이를 즐거운 잔치의 연속으로, 우리의 뇌라는 미각에 제공되는 훌륭한 정신적 요리로 이어서 읽을 수 있게 해준다.<br>서문은 또한 주목할 만하게도 자전적이다. 독자는 옹프레의 어린 시절 궁핍함, 대학생 시절의 음주, 그리고 스물여덟 살에 겪은 심장마비를 발견한다. 자신의 미식 자서전으로 책문을 열면서 옹프레는 스스로를 분석 대상에 위치시킨다.<br>식탁에 앉은 철학자들<br>디오게네스는 옹프레의 영웅이자 자연스러운 모델이다. 키닉 철학자는 "자기 시대의 불량한 양심"으로 정의되는 진정한 철학자의 상징적 형상이다. 그는 습관을 통해 순응주의를 폭로하려는 완강한 의지의 담지자다. 니체가 냉소주의를 "지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것"으로 정의한 데 힘입어, 우리는 디오게네스가 누볐던 영역으로 평온히 들어설 수 있다. 날것의 문어를 먹고 익힌 음식을 경멸하는 그의 식단은 단순한 기행이 아니라 먹는 행위로 실현된 철학적 태도 — 문명의 정제를 식사마다 거부하는 몸짓이다.<br>루소는 좀 더 회의적인 시선을 받는다. 옹프레는 이 18세기 작가를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 루소의 소박한 시골 음식에 대한 취향, 우유와 유제품에 대한 찬사, 전형적인 '고귀한 야만인'식 채집 습관을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옹프레는 루소의 채식 성향과 유제품과 소박한 식사에 대한 애호를 그의 자연 이상화 및 금욕 철학과 연결하며, 두 가지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비평가들은 이 독해가 다소 편향되었다고 반론을 제기했는데, 루소가 좋은 와인을 즐겼다는 사실 — 장프랑수아 레벨이 기록한, 루소가 와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여관을 떠나 마음에 드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일화 — 을 완전히 누락했다는 점을 지적한다.)<br>칸트는 이 책에서 가장 유쾌한 놀라움을 주는 장이다. 냉철하고 금욕적이며 강박적인 건강염려증 환자를 기대했던 독자는 프로이센 도시의 거리에서 만취한 채 발견된 칸트와 마주치게 된다. 순수 이성의 철학자는 알코올과의 관계에서는 순수함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옹프레는 또한 칸트의 후각 경시에 주목한다. 쾨니히스베르크의 현자는 후각을 너무 비자발적이고 사회적이어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폄하했다.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동시에 모든 사람과 같은 것을 맡는 것 — 타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감각을 공유하도록 강제하는 필연이며, 따라서 자유에 위배된다고 칸트는 주장했다. 옹프레에게 이 후각 철학은 통제되지 않는 감각적 경험에 대한 칸트의 더 넓은 공포를 완벽하게 반영한다.<br>사르트르는 이 책에서 가장 길고 가장 신랄한 초상을 받는다. 장폴 사르트르의 갑각류에 대한 혐오는 너무 극단적이어서 공포증에서 비롯된 환각까지 경험했다 —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나이의 힘』에서 그가 정말로 바닷가재 한 마리가 자신을 뒤따라 다닌다고 확신했다고 기록한다. 옹프레는 사르트르에게서 음식이 철학자를 자기 몸의 영원한 적으로 지목한다고 결론 내린다. 자유와 급진적 선택의 실존주의 사상가가 일상적 신체의 삶에서는 합리화도, 극복도 할 수 없는 혐오에 예속되어 있었다. 알코올 중독, 온갖 종류의 약물에 절어 있고, 줄담배를 피우며 아무것이나 먹어대는 사르트르의 끔찍한 자기 관리는 옹프레의 분석에서 자아를 향해 체계적으로 선포된 전쟁처럼 읽힌다.<br>니체는 책 전체에 걸쳐 옹프레의 일차적인 철학적 선조이자 영감으로 등장한다. 부제가 칸트를 메아리치는 것도 니체적 몸짓이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영양의 문제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신학적 호기심보다 더 중요하다고 썼다. 옹프레에게 소화의 영역을 철학적인 것으로 끌어올린 이 행위는 정직하고 체현된 철학 — 아무 곳도 아닌 곳에서 생각하는 척하지 않는 철학 — 의 창립 행위다.<br>방법론으로서의 미식철학<br>옹프레가 흥미로운 초상들 너머에서 제안하는 것은 철학적 전기의 진정한 방법론적 확장이다. 먹는 것의 예술은 결국 모든 것의 예술이다. 푸코는 이렇게 썼다. "삶의 예술로서 식이 요법의 실천은… 몸에 대해 정당하고 필요하고 충분한 배려를 갖는 주체로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하나의 전체적 방식이다." 윤리와 미학이 합쳐진 것 — 하나의 반추된 삶의 형식으로서의 식이 요법.<br>이 책의 근저에 있는 주장은, 텍스트와 논증과 체계에 집중해온 전통적인 철학사가 사유의 체현되고 욕구적인 차원을 체계적으로 무시해왔다는 것이다. 그 접근이 아무리 탁월하다 해도, 가장 풍요로운 정신도 기본적인 영양 연료 공급에 생존이 달려 있는 복잡한 신체 기계와 연결된 소화관이 없지는 않다.<br>구두장이가 가장 신발을 못 신는 법이 없어야 한다는 근본 원칙에 충실하게, 옹프레는 자신의 습관대로 높고 크게 윤리를 외치면서도 선언된 원칙들과는 천문학적으로 거리가 먼 일상을 살아가는 이중성을 추적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철학적 정직함에 관한 책이다 — 사상가들이 실제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지에 관한.<br>이 책은 옹프레의 첫 번째 주요 출판물이었고, 그를 프랑스에서 가장 읽기 쉽고 도발적인 대중 지식인 중 한 명으로 부상시켰다. 철학에 평소 거리감을 느끼던 독자들에게도 진정으로 접근 가능한 입구를 제공했다. 입을 통해 철학에 들어가는 예술.<br>비평적 반응은 호의적이었지만&nbsp; 일부 평론가들은 접근법의 재치와 독창성을 칭찬하면서도 일부 결론들이 다소 성급하게 느껴진다고 지적했다 — 전기적 세부 사항에서 포괄적인 철학적 판단으로 너무 빠르게 넘어가는 순간들. 루소에 대한 처리는 특히 이념적으로 편향된 선택적 독해라는 비판을 받았다.<br>더 근본적으로, 일부 철학자들은 옹프레의 방법이 특정한 결정론의 위험을 안고 있지 않은지 의문을 제기했다. 한 철학자의 사상이 식단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 사상을 설명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다시 묘사하는 것인가? 이 책이 이 질문에 항상 엄밀하게 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이 책의 목적이 아닐 수도 있다. 증명하기보다는 도발하고, 이미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상가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것 — 이번에는 조금 더 배가 고프고, 더 호기심이 많은 눈으로.<br>『철학자들의 배』는 근엄함을 거부함으로써 진실한 무언가를 밝혀내는 일조의 진정한 지적 재기로 가득한 책이다. 소화 불량이 두렵지 않도록, 적당한 분량씩 음미하며 천천히 섭취해야 할 책이다.<br>이 책은 철학사에 대해, 긴 대화에서 훌륭한 음식이 하는 역할과 같은 것을 해낸다 — 모든 것을 더 따뜻하게, 더 구체적으로, 더 생생하게 만든다. 디오게네스의 날 문어, 칸트의 프로이센식 음주, 사르트르의 환영 속 바닷가재 — 이것들은 위대한 사상들의 각주가 아니다. 옹프레의 손에서 이것들은 사상 그 자체가 된다, 더 정직한 각도에서 바라본. 철학자도 결국 모든 다른 동물처럼 먹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를 우리가 무시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라 밝히고 있다.<br>리뷰: 미셸 옹프레의 『철학자들의 뱃속』(Le Ventre des philosophes — Critique de la raison diététique, Grasset, 1989)<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5754/48/cover150/k45273610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7544826</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인문/예술</category><title>큐비즘의 거장이 평생에 걸쳐 적어 내려간 사유의 기록</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58612</link><pubDate>Tue, 05 May 2026 14: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5861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92036815&TPaperId=1725861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539/3/coveroff/k89203681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낮과 밤』 — 조르주 브라크의 화가수첩<br>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조각가로,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큐비즘(Cubism, 입체주의)을 발전시키며 20세기 현대 미술에 깊은 영향을 미친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의 예술적 사유와 철학적 깊이를 엿볼 수 있는 특별한 책 『낮과 밤』이 출간됐다.브라크라는 이름은 흔히 피카소의 그늘에 가려지기 쉽지만, 사실 두 사람은 대등한 협력 관계 속에서 미술사의 가장 혁명적인 운동 중 하나를 함께 일궈냈다. 1911년 어느 평론가는 "입체주의란 무엇인가? 당연히 브라크-피카소 화파다"라고 말했다. 브라크는 파블로 피카소와 만남으로 예술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으며, 두 예술가는 1907년에 처음 만나 함께 큐비즘이라는 혁신적인 예술 운동을 창시했다.&nbsp;<br>그리고 브라크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었다. 그가 죽기 2년 전인 1961년, 브라크의 아뜰리에(L'Atelier de Braque)라는 작품 회고전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열렸으며, 브라크는 생존 작가로 루브르에 전시된 최초의 화가라는 인류사에 단 한 번뿐인 영예를 누렸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20세기 미술사에서 얼마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분명해진다.&nbsp;<br>35년에 걸친 내밀한 창작 노트<br>『낮과 밤』은 브라크의 그림을 직접 담은 도록이 아니다. 이 책은 1917년부터 1952년까지 조르주 브라크의 수첩에 기록된 단상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창작 행위와 예술에 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약 35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적어 내려간 이 짧은 메모들은, 완성된 논문이나 체계적인 이론서가 아니라 한 예술가의 내면이 살아 움직이는 현장 기록이다.&nbsp;<br>브라크는 완벽하게 정리된 그림보다는 작업하는 과정의 감정과 사유를 중시했기에, 그의 미술은 단순히 시각적인 작품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표현이기도 했다. 형태의 해체와 색의 변화를 통해 존재의 본질과 인간 감정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예술을 보편적인 진리로 승화시키려 했던 그의 미학적 입장은, 창작노트 『낮과 밤』에서 짧고 간결하게 표현된다.&nbsp;이 짧은 문장들은 때로 격언처럼 읽히고, 때로는 수수께끼처럼 독자를 붙잡는다. 브라크는 명확한 답을 주는 대신, 질문 자체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br>대립하는 두 세계 사이에서<br>책의 제목 '낮과 밤'은 단순한 시간의 구분이 아니다. 브라크가 펼치는 빛과 어둠, 존재와 무, 삶과 죽음의 상징적 대비는 인간의 인식과 예술의 본질을 파고드는 치열한 기록이다. 이 대립항들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긴장의 관계를 이룬다.&nbsp;『낮과 밤』은 단순히 미적 성찰을 넘어서,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탐구하는 동시에 현실과 상상이 만나서 벌이는 끊임없는 인식의 게임을 보여준다. 브라크는 독자에게 세상을 구성하는 대립을 지각하고 탐구하도록 초대한다.&nbsp;<br>자연과 인간, 실재와 관념, 현실과 상상 등 우리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대립 사이의 균형에 관한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성찰은 예술과 삶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큰 영감을 줄 것이다.&nbsp;흥미로운 점은 브라크가 이러한 대립을 단순히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낮과 밤』에서도 그의 사고는 같은 어휘일지라도 시간의 흐름이나 상황 혹은 맥락에 따라 서로 상충하거나 모순을 내포하지만, 이는 언어의 자의적인 사용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의 생각에 갇히는 것을 지양하려는 의지일 것이다. 그것은 고정된 진리를 선언하기를 거부하는 예술가의 용기이다.&nbsp;<br>화가에서 예술 철학자로<br>브라크의 회화 세계를 알고 있다면, 이 책이 그의 캔버스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 놀라게 된다. 브라크의 그림은 주로 견고한 구성, 낮은 채도, 고요하고 명상적인 정물화로, 형태, 색채, 구성의 실험을 통해 사물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으며, 전통적인 미술 기법을 넘어선 새로운 예술적 접근을 제시했다.&nbsp;이 절제된 미학은 그의 언어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브라크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도 시적이고 은유적인 특성을 갖는다. 그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세계를 설명하는 동시에, 그가 선택한 개념의 층위는 그가 단순한 미술가가 아닌 예술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nbsp;브라크는 초기에 구상적 표현을 통해 현실을 묘사했지만, 점차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로 변모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 했다. 브라크의 예술은 언제나 과정과 변화에 초점을 맞췄으며, 브라크의 예술적 성장과 변화의 과정 또한 이 책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br>독자에게 건네는 초대<br>매우 추상적이고 때로는 자기만의 언어로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전개하는 브라크의 메모는 그의 예술 세계의 이해와 지적 토론의 장으로 충분하다. 무엇보다 독자는 그의 간결하고 철학적인 메시지에서 자신만의 해석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nbsp;이 책은 미술 전공자나 예술사 연구자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 창작의 고통과 기쁨을 아는 사람,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무언가를 감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브라크의 짧은 문장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될 것이다.<br>『낮과 밤』은 예술적·철학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존재와 예술에 대한 깊은 성찰을 촉구하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브라크가 수십 년에 걸쳐 홀로 수첩에 남긴 이 기록들은, 이제 한국 독자들에게도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nbsp;<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539/3/cover150/k8920368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5390362</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누구도 예상치 못한 소설-펠릭스 발로통_유해한 남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41813</link><pubDate>Mon, 27 Apr 2026 16: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4181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02833109&TPaperId=172418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770/69/coveroff/k202833109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펠릭스 발로통(Félix Vallotton, 1865~1925)은 주로 화가이자 판화가로 기억된다. 목판화에 신랄한 위트를 담아내고, 누드와 실내 풍경을 불안하리만큼 차갑고 고요하게 그려낸 스위스 출신의 나비파 화가. 그가 소설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며, 『유해한 남자』는 그 숨겨진 재능을 증명하는 가장 빛나는 작품이다.<br>발로통은 1907년 1월부터 1908년 1월 사이에 이 소설을 집필했다. 1909년 출판사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1925년 임종 직전 작가 앙드레 테리브에게 원고를 맡기며 출판될 수 있기를 바랐다. 출판의 역사 자체가 하나의 작은 비극이다. 진지한 문학적 힘을 지닌 작품이 생전에 거절당하고,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독자들에게 닿을 수 있었으니.<br>소설이 1927년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 연재되며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테리브는 이 작품을 "자전적 요소들이 감동적이고 끔찍한 허구와 뒤섞인 소설"이라 묘사했다. "그의 옛 어두운 유머의 판화들처럼, 눈에는 환각적이고 영혼에는 황폐한 그림들처럼, 세계에 대한 자연주의적 시각이 드러나 있다".&nbsp;<br>범죄 현장 속의 고백<br>​소설의 구조는 우아하면서도 불길하다. 스물여덟 살의 젊은 화가 자크 베르디에는 자택에서 스스로 머리에 총을 쏘았다. 조사를 위해 파견된 경감은 현장에서 '하나의 사랑(Un amour)'이라는 제목의 소설 원고를 발견한다. 1인칭으로 쓰인 이 원고는 작가가 살면서 유발했거나 유발한 것으로 보이는 일련의 죽음들을 서술하며, 그는 점차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이끄는 어두운 운명을 짊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이 불길한 저주에 대한 책임감에 시달린 끝에 자살 외에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br>학자들은 이 소설이 얀 포토츠키의 유명한 문학적 장치로부터 이어지는 '발견된 원고'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이중 액자 구조가 탄생한다. 독자는 주인공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의 삶의 이야기를 읽게 된다. 이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서스펜스가 아니라, 어떻게 그곳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느리고 서늘한 공포를 만들어낸다.<br>자크 베르디에: 악의 안티히어로<br>주인공은 함께하기 편한 인물이 아니다. 자크 베르디에는 그다지 공감하기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다. 끔찍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비관적이며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하다. 어린 시절 그의 서투름은 두세 차례의 치명적인 사고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었다.&nbsp;<br>그러나 발로통은 단순히 괴물을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무언가를 해낸다. 자크 베르디에는 악의 안티히어로다. 악을 집요하게 추구하던 이전 세기의 루시퍼적 인물들과 달리, 발로통은 악이 그림자나 향기처럼 따라다니지만 결코 그것을 원하지 않는 인물을 창조했다. 베르디에는 대체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는 파리로 상경한 지방 청년으로, 거의 우연히 미술사가로서의 소명을 발견한다. 그의 삶은 창녀촌, 살롱, 카페, 편집실이라는 대도시의 예측 가능한 풍경 속에서 펼쳐진다. 그러나 베르디에는 자신이 무언가 심각한 것을 숨기고 있음을 안다. 악은 그의 영구적인 손님이며, 그의 손을 통해 그를 찾아오는 다양한 존재들에게 전달된다.&nbsp;<br>이것이 이 소설을 단순한 자극적 이야기가 아닌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작품으로 만드는 지점이다. 주체성 없는 죄책감, 의도 없는 해악. 선택하지 않았지만 짊어진 저주에 대해 인간은 과연 책임을 질 수 있는가?<br>발로통이 탁월하게 구사하는 역설은, 베르디에의 불길한 삶이 베르디에 자신과 그의 고백을 듣는 독자 외에는 누구에게도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외부와 내부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내며, 서사에 음울한 익살의 진동을 부여한다. 외부에서 보면 베르디에는 평범한 파리 지식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부에서 보면 그는 운명의 올가미에 천천히 목이 조여들고 있다.<br>산문 속의 화가의 눈<br>『유해한 남자』를 같은 시대의 많은 소설들과 구별 짓는 것은 관찰의 질이다. 발로통의 시각 예술가로서의 훈련과 실천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그 품질.<br>이 소설은 비평가들에 의해 "유사 자전적"이라 묘사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파멸을 예고하는, 그 시선 자체가 죽이는 것 같은 영리한 젊은이의 이야기. 한 장면에서 주인공은 여성 모델이 실수로 난로로 넘어지는 데 가담(?!)하고, 그 후 그녀의 가슴 하나는 "형체도 없이 부어오른 덩어리, 일종의 점성 있는 용암"으로 변한다는 묘사가 등장한다. 이 대목은 발로통의 묘사적 정밀함을 잘 보여준다. 화가가 임상적 거리감으로 장면을 그려내듯, 외면하기를 거부하고, 위안을 거부한다.<br>화가와 작가가 섬세하고 생생한 묘사 속에서 하나로 합쳐지고, 언어적 압축의 강렬함이 돋보이는 이 언어로 쓰인 어두운 이야기 속에서,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등장하는 공포가 평범함과 나란히 놓이다가 결국 독자에게 주먹처럼 다가온다.&nbsp;<br>학자들은 또한 발로통이 이미지와 텍스트 양쪽에서 시각과 사회적 책임 사이의 관계를 위한 독특한 시각 언어를 발전시켰다고 지적한다. 그의 예술적 명성을 처음 확립시킨 파리 군중 장면들은 구경꾼이라는 현대적 유형의 중요성을 증명하며, 이는 도시적 관음의 매력과 복잡한 윤리를 나타내는 형상이다.&nbsp; 즉, 바라보는 것의 윤리 —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자의 태도 — 가 그의 판화와 소설 모두를 관통하고 있다.<br>블랙 유머와 균형 잡힌 어조<br>이 책의 진정한 놀라움 중 하나는 그 어조다. 자살, 우발적 살인, 성병, 강박이라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결코 끝없이 어두운 독서 경험이 아니다.<br>문체는 경쾌하고 부드러운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으며, 이 젊은이가 주변에 뿌리는 불행들을 읽다 보면 그의 순진함이 오히려 애처롭게 느껴져 결국 미소 짓게 된다. 주인공은 자신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이들이 확실한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라고 믿으며 살아왔고, 당연히 그의 행동은 이 치명적인 상황들을 만들어낸다.&nbsp;<br>독자들은 발로통의 시각 작품을 통해 그를 알게 된 이후 그의 산문 속 재치에 놀라곤 한다. 한 독자는 이전에는 그의 회화와 판화만 알았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그가 천재임을 확신하게 됐다며, 신랄하고 냉소적인 문체와 "블랙 유머로 가득 찬" 서사가 첫 페이지부터 사로잡는다고 평했다.<br>자전과 허구 사이<br>발로통은 단순히 자전적 예술가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적 어려움이 실행 가능한 상상의 재료를 제공할 수 있음을 냉정하고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예술가다.&nbsp; 파리를 항해하며 사랑, 미술 비평,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방인이라는 감각과 씨름하는 젊은 예술가인 주인공과 발로통 자신의 전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분명하지만, 결코 조잡하지 않다. 소설은 경험을 단순히 옮겨 적지 않고, 아이러니와 형식적 기교를 통해 그것을 변환시킨다.<br>한 학술적 분석은 발로통의 소설들이 다양한 형식적, 도상학적, 문학적 관습을 '보호막'으로 사용하여 인간 본성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표현하면서도 스스로를 거리를 두고 보호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발견된 원고라는 구조는 바로 이 목적에 봉사한다. 고백을 죽은 자의 원고 안에 놓음으로써, 발로통은 친밀함과 거리감 모두를 성취한다. 독자는 비밀을 듣기 위해 가까이 몸을 기울이지만, 말하는 자는 이미 사라져 있다.<br>『유해한 남자』는 짧고 기묘하며 깊이 완성된 소설로, 발로통의 그림과 판화와 나란히 읽혀야 마땅한 작품이다. 함께 읽을 때 하나의 일관된 예술적 비전이 드러난다. 불안한 가정의 풍경, 폭력과 욕망을 향한 차가운 시선, 감상을 거부하는 유머. 이 작품은 누아르 소설, 사실주의 서사, 자전적 이야기 사이를 오가며, 사적인 불안이 거대한 사회적 불안과 공명하고, 비관적 인식들이 놀라운 서술의 힘으로 전달된다.&nbsp;<br>발로통이라는 화가를 알고 있는 독자에게 이 소설은 붓질 뒤에 숨겨진 인간을 밝혀준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접하는 독자에게도 이 작품은 충분히 독자적인 매력을 품고 있다. 죄책감, 운명, 그리고 너무 가까이서 바라보는 것의 대가 — 혹은 너무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 자체의 대가 — 에 대한, 간결하고 신랄하게 아이러니컬한 성찰.<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770/69/cover150/k20283310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7706979</link></image></item><item><author>북페스트</author><category>사회</category><title>이 회고록은 고백인 동시에 선언문이고, 전투 명령이다_루이즈 미셸 회고록</title><link>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41800</link><pubDate>Mon, 27 Apr 2026 16: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editionb21/1724180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02136372&TPaperId=172418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off/k302136372_3.jpg" width="75" border="0"></a>&nbsp;<br/><br/>루이즈 미셸(Louise Michel, 1830~1905)은 교사이자 혁명가, 그리고 작가였다. 1871년 파리 코뮌의 영웅적 인물로, 1873년 뉴칼레도니아로 유형을 떠났다가 1880년 파리로 귀환하고 이후 런던에 정착하여 무정부주의, 여성의 권리, 그리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지칠 줄 모르는 활동가이자 강연자로 살았다. 소설, 시, 희곡, 민담, 자서전에 이르는 그의 문학적 유산은 방대하고도 독창적이다.&nbsp;<br>​동시대인들에게 붉은 성녀(la Vierge Rouge) 라 불렸던 그는 오늘날까지도 매혹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파리 코뮌 당시 그의 고양된 기질을 비난하든, 그 영웅주의에 경탄하든, 정치적 판단력과 사회적 행동주의를 평가하든, 비관습적 교사로서의 면모에 감탄하든 — 그 이미지는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nbsp;<br>1886년 처음 출판된 『루이즈 미셸 회고록』은 그 비범한 삶에 대한 루이즈 미셸 자신의 이야기다. 소설화된 전기와 이른바 평전들이 넘쳐난다. 각 저자들은 그의 글을 뒤지고, 빌리고, 지우고, 고쳐 쓴다 — 그런데 그렇게 하는 순간, 그 글의 원래 주인인 루이즈 미셸 자신은 뒤로 밀려난다. 저자가 재구성한 '루이즈 미셸'이 남게 되는 것이다. 마치 루이즈 미셸의 '삶'을 알리기 위해서는 그 삶의 주인공이 바로 그 루이즈 미셀이었다는 사실을 먼저 잊어야 하는 것처럼. 『루이즈 미셀 회고록』은 그 모든 것을 단번에 걷어낸다. 여기, 마침내 루이즈 미셸 자신의 목소리가 있다.<br>&nbsp;『회고록』에서 그는 시골에서의 어린 시절, 1870년 이전 교사로서의 초기 시절, 파리의 가난한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투쟁을 이야기한다. 1871년 코뮌 당시 최전선에 섰던 그는 베르사유 군사 재판소로부터 뉴칼레도니아 종신 유형을 선고받았고, 그곳에서 카낙 원주민들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사면된 뒤 귀환하여 혁명적 투사와 선동가로서의 삶을 이어가며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선언한다. 르클뤼 형제와 크로포트킨의 친구로서 프랑스와 유럽을 쉼 없이 누비며 거듭 감옥을 오갔고, 1883년에는 실업자 시위를 이끈 죄로 6년 중노동형을 선고받는다.<br>오트마른과 파리에서의 교사 생활을 다룬 부분은 19세기 유럽의 교육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담고 있다. 파리 포위, 코뮌, 그리고 첫 번째 재판에 관한 장들은 주요 참여자의 시선에서 본 그 사건들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여성의 권리에 관한 장으로, 미셸은 그것을 독립된 투쟁이 아니라 남녀 모두의 권리를 위한 탐색의 일부로 바라보았다.&nbsp;<br>이 책에서 독자는 장난기 넘치는 청소년, 페미니스트 교사, 확고한 혁명가, 뉴칼레도니아의 유형수, 아나키스트 전사, 예술과 과학에 열정적인 탐구자,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루이즈 미셸을 차례로 만난다. 또한 날카로운 펜과 날 것의 감수성, 무서울 것 없는 양심을 가진 사상가, 말하는 자, 글 쓰는 자로서의 루이즈 미셸을 발견한다.&nbsp;<br>회고록이란 장르의 책은 작가 자신에게 쉬운 장르가 아니가. 미셸 자신도 그 어려움을 고집스럽게 지켜냈다. 서술은 반드시 연대순을 따르지 않으며, 당대 사람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사건들을 불쑥불쑥 환기시킨다. 비평적 주석이 이해를 돕기는 하지만, 책의 구조적 느슨함을 완전히 보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루이즈 미셸의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 그는 다른 방식을 강요하려는 이들에 맞서 싸웠다.&nbsp;<br>​독자들은 루이즈 미셸의 문체에 종종 당혹감을 느낀다. 논리도 없이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건너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은 그가 오트마른 지방의 저녁 모임에서 이야기하듯 쓴 것이다 — 하나의 주제가 다른 주제를 불러오고, 추억, 고통, 후회, 희망, 죽은 이들, 어머니, 친구 마리 페레가 이어지며, 그리고 미래를 향해 열린 채로 『루이즈 미셸 회고록』을 닫는 마지막 한 마디: "혁명!"&nbsp;<br>이것은 문학적 허술함이 아니다. 담아둘 수 없었던 삶의 질감이다. 그는 필명 뒤에 숨는 대신, 자신의 이름이 지닌 공적 명성을 글쓰기의 도구로 삼았다. 나아가 독자들을 교육하고 아나키즘으로 이끌기 위해 자신의 삶을 하나의 모범으로 내놓는 대담함을 보였다. 이 회고록은 고백인 동시에 선언문이고, 동시에 전투 명령이다.<br>1880년대 주로 옥중에서 집필된 이 책에는 최근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이 배어 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다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거듭 선언하면서 —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사회혁명에 더욱 헌신하게 만든다고 쓴다. 미셸의 서술 속에서 고통은 장애물이 아니라 연료다.<br>&nbsp;페미니즘, 계급, 그리고 여성의 이중 노예제<br>『회고록』은 19세기의 가장 강력한 페미니즘 문헌 중 하나다 — 미셸이 페미니즘을 독립된 투쟁이 아닌 더 넓은 혁명적 정치의 일부로 위치시키는 방식이 특히 인상적이다.사생아로 태어난 그의 출생 — 그는 한 귀족의 하녀의 딸이었다 — 은 일찍부터 여성의 운명에 민감하게 눈을 뜨게 했다. 아버지가 죽자 성에서 쫓겨난 그는 필연적으로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지방에서 파리로 올라온 그는 "여성의 도덕적 향상을 위한 협회"를 설립해 여성들이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왔다.<br>여성 교육에 대해 그의 비판은 신랄하다. 『회고록』의 가장 유명한 구절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성을 억압하려는 시도를 단 한 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리석음 속에서 키워지는 소녀들은 더 쉽게 속을 수 있도록 일부러 무장 해제된다 — 그것이 바로 원하는 바다. 이는 마치 수영을 배우는 것을 금지하거나 사지를 묶어 놓은 채로 물속에 던져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nbsp;<br>​그의 글은 극도로 강렬하다. 미셸은 무엇보다 정당한 복수로 여기는 투쟁에 어떤 한계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투쟁을 더 넓은 틀 안에 위치시킨다 — 필요하다면 무력에 의한 혁명의 틀 속에. 오직 새로운 사회만이 사람들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nbsp;<br>미셸은 작가와 투사 모두를 체현하며, 그 삶과 작품은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수렴한다 — 평등을 위한 투쟁은 오직 전면적이고 총체적일 수 있을 뿐이며, 모든 사회 계층과 억압받는 모든 민족을 아울러야 한다는 것이다.&nbsp;<br>&nbsp;뉴칼레도니아: 제국을 가로질러 피어난 연대<br>​『회고록』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 중 하나는 뉴칼레도니아 유형 시절을 묘사한 부분이다. 지배자들이 유형을 형벌로 의도했던 곳에서, 미셸은 그것을 연대의 교훈으로 바꾸었다.<br>그의 마음은 산업화 시대의 비참한 사람들을 품기에 충분히 넓었다 — 서양과 다른 문화와 기원을 가진 민족들, 1871년 파리 코뮌 이후 유형당해 머물렀던 누메아의 카낙 원주민들까지. 루이즈 미셸은 온 마음으로, 온 지성으로, 온 연민으로 간절히 바랐다 — 어느 식탁에도 빵이 모자라지 않기를, 소녀들도 교육의 기회를 누리기를, 여성이 남성과 동등해지기를.&nbsp;<br>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에도 깊이 감동한다. 뉴칼레도니아 풍경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들을 남겼다. 이 회고록은 이념의 협소함을 거부하는 정신을 포착한다 — 아나키스트이자 박물학자, 시인, 말로 그림 그리는 자. 유형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았다.<br>『루이즈 미셸 회고록』이 1886년 2월 서점에 등장했을 때, 독자들은 이 유명한 코뮌 투사이자 아나키스트의 성장 서사에 대체로 주의 깊이 귀 기울였다 — 그리고 서술의 신선함에,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는 모든 것에 놀랐다. 그가 "어린 시절의 둥지"라 부르는 장은 큰 호응을 얻었고, 젊은 시절 붉은 성녀가 구혼자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 또한 크고 작은 익살기를 머금고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교사 시절의 장난기 어린 에피소드들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nbsp;<br>이 『회고록』은 루이즈 미셸의 여러 면모를 종합적으로 담아낸다. 오트마른과 뉴칼레도니아의 민담들, 시, 소설들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한다. 2021년에는&nbsp; 클로드 레타(CNRS/소르본 대학교 산하 연구소(UMR 8599) 소속 연구자로, 루이즈 미셸 전문가)가 편집·주석을 달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Folio Histoire 시리즈 304번으로 3월 4일 출판되었다.— 미셸이 출판사와 협상하여 지켜낸 원문을 최초로 복원한 판본이다.(Louise Michel, Mémoires, 1886, édition établie, présentée et annotée par Claude Rétat, avec dossier documentaire, Paris, Gallimard / Folio (« Folio histoire »), 2021, 576 p)<br>시대의 역사로서 기능하는 이 『회고록』그 모든 것을 직접 살고 나누기로 선택한 한 여성이 쓴 민중의 비참과 투쟁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nbsp; 루이즈 미셸과 평생 편지를 주고받았고 또 그녀를 위해 「남자보다 위대한」이란 시를 쓴 빅토르 위고 뿐아니라 시인 폴 베를렌도 1888년 그의 시집 『사랑(Amour)』에 「루이즈 미셸을 기리는 발라드」를 헌정하며 이 문학적 차원을 그의 생전에 이미 알아보았다.<br>루이즈 미셸의 『회고록』은 독특하고 필수적인 문헌이다 — 자서전인 동시에 선언문이고, 코뮌의 죽은 자들을 위한 만가(輓歌)다. 편안하거나 잘 정돈된 책이 아니며, 그 무질서함이 바로 그 정직함이다 — 이것이 전기 작가의 반듯한 책상에서가 아니라, 혁명적 삶의 내부에서 보면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이다.<br>이 책에서 무엇을 얻는가? 루이즈 미셸과 그 동료들,&nbsp;이상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 했던 모든 이들에 대한 무한한 경탄, 그 이상이란 세상을 더 좋고 더 공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장엄한 유토피아!&nbsp;<br>19세기 프랑스사, 아나키즘과 페미니즘의 기원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든, 아니면 단순히 어느 시대에도 비견할 수 없는 하나의 인간적 목소리를 찾는 독자에게든, 『루이즈 미셀&nbsp;회고록』은 대체 불가능한 무언가를 제공한다 —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고, 그로부터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도 식지 않은 분노로 그것을 써 내려간 한 여성의 이야기.<br> <br><br><br><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7/9/cover150/k302136372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970959</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