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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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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0년 서점가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로 평정되었다. 많은 독자들은 그의 책을 사보았고 영향을 받았다. 나도 그 책을 읽었고 교양서적으로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샌델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왜냐하면 그 책에서는 샌델이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했을 뿐,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보기 전에도 내심 걱정되었다.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지난 여름에 있었던 내한 강연회에서 보여 준 그의 일관된 주장들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책에 대한 결론의 정점을 찍었고 나는 책보다 그 강연회에서 만난 샌델이 더욱 좋았다. 그런 희망은 내가 이 책을 읽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신념들을 회피하는 대신 그것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떄로는 거기에 의문과 이의를 제기하고, 때로는 경청하고, 때로는 다른 신념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려운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공공의 숙고를 함으로써 반드시 일치된 합의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도덕적, 종교적 관점을 충분히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보장 역시 없다. 타인의 관점과 견해를 알아갈수록 그것을 전보다 더 싫어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시도해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결과를 알 수 없는 법이다.  <23p>  

  샌델이 하고 싶은 말은 이 책의 서두에 있다. 이 책의 핵심만 보고 싶다면 그 부분만 읽어도 다 읽은 셈이다. 나머지는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계속 사례제시를 통한 다양한 관점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조금 더 내 의견을 내자면, 이 책은 그나마 샌델의 의견을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다. 

  사람의 모든 일에는 도덕적 가치판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것이 가장 가치있는 지는 나와 다른 사람들의 대화와 토론 속에서 내려진 결론들이 좋은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 하다면 스스로 신중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믿어지면 그대로 행하면 된다.  

  샌델은 이 책에서 그런 판단과 과정들이 쉽게 결정 되기를 원치 않는다. 치열한 대화와 토론, 자기 성찰 속에서 사회와 구성원들의 모두를 위한 결정이 내려지길 원한다. 무엇보다 도덕적인 근거에 비추어 볼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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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 근래에 독일 역사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 명사들의 인터뷰, 조금은 도움되지 않을까? 제발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 고인 시인의 산문집, 언젠가 그의 사후에 그의 책들은 좋은 가치를 받을 것이다. 

 

- 강의록을 정리한 네그르의 제국강의, 상당히 흥미로운 글들이 예상된다. 

 

- 두 지성인의 대화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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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견문록 - 외교관 임홍재, 베트남의 천 가지 멋을 발견하다
임홍재 지음 / 김영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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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과 에릭 웨스턴 감독의 <트라이앵글>에서 본 베트남은 처절한 전쟁과 빈곤한 사람들의 나라였다. 프랑스와 미국은 1946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을 자신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국제적인 망신과 지탄을 받았다. 그리고 베트남인들은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처럼 허약해보였고, 아직 문명화가 덜 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디까지가 진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처음 접한 베트남은 어쨌든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이런 베트남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된 것은, 무엇보다 고등학교 때였다. 나는 그때 월남전의 발생배경과 의미를 배웠고, 베트남 역시 아시아의 약소국으로 우리나라와 같이 강대국의 식민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근래에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굿모닝 베트남>을 보고 베트남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어디까지나 영화를 보고 난 후 생기는 일시적인 궁금증과 같은 것이었고, 금방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처음 받아본 순간, 예전에 가지고 있던 궁금증들이 다시 몰려왔고, 약간의 흥분감을 느꼈다. 前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로 오랫동안 있었던 저자가 소개하는 베트남은, 내게 있어서 미지의 땅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의 시간 개념과 박자는 우리와 다르다. 베트남 사람들은 얼리 버드(early bird) 즉, 새벽을 깨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과 역사를 통해 그들 나름대로의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내이다. 인내로 자연재해와 전쟁을 극복한 사람들인 그들은 죽창을 가지고 프랑스를 이겼고 재래식 무기를 가지고 미국을 이겼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현대기술이 없어도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기다리는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247p>

  이 책은 관광을 목적으로 써진 책이 아니다. 마치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보고서처럼 작성한 기분이 느껴졌다. 초반부에는 저자의 강점을 살려서 우리나라와 베트남 간의 국제교류에 대해 자세히 적었고, 중반부에는 베트남의 역사, 후반부에는 베트남의 문화에 대해 적었다. 개인적으로 중반부는 다소 지루하게 다가오는데, 왠지 저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다른 베트남 관련 서적들을 잘 정리한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베트남인들의 소박한 생활의식과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발달된 문명 속에서 살진 않았지만, 무엇이 인간과 자연에게 좋은 것인지 알고 있었고 후대에 전했다. 또한 외세의 침입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나라를 빼앗겼지만, 다시 찾는 과정은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지금 살펴봐도 미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승산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는 그들이 전쟁의 승리자라고 되어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베트남인들은 약해보이지만 무척이나 강한 민족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언제부턴가 베트남 음식점 특히 쌀국수집이 많아졌는데, 나도 몇 번 먹어본 적이 있다. 그게 진짜 베트남 음식일지는 모르겠지만, 베트남 음식을 베트남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꼈다. 또한 많은 베트남 처녀들이 우리나라 남자들과 국제결혼을 하여 ‘사돈의 나라’가 되었다. 그만큼 베트남 문화는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보거나,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베트남이 미개한 나라이고 베트남인들의 낮은 문명화를 우습게 볼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베트남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결코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또한 이 책을 읽는다면 베트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질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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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훈의 그랜드투어 : 동유럽 편 - 사람, 역사, 문명을 찾아 거닐고 사유하고 통찰하는 노블레스 여행 송동훈의 그랜드투어
송동훈 지음 / 김영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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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턴가 유럽여행은 젊은 세대들의 희망사항이 되었다. 미디어나 매스컴에서 보여진 유럽나라들의 고풍적인 건축물과 자유분방함과 우아함이 느껴지는 유럽인들의 삶은, 동양인들이 보기에 사뭇 호기심을 가지게 하고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 주변에도 유럽여행을 갔다 와서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사진과 여행담을 올려놓으면 흥미롭게 보고 읽지만, 나도 무척이나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아쉽게도 난 해외여행을 아직 한 적이 없다). 다만 유럽나라들에 관련된 책이나 여행가이드만이 이런 내 마음을 달래주고, 언젠가는 꼭 가게 될 것을 다짐하게 만든다.

  이 책은 한 때 유명 일간지 기자였던 저자가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기행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여행정보를 넘어서 깊이가 느껴지는 것은, 여행한 나라들마다 가지고 있는 공통된, 때로는 독특한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생각이 적혀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이 책은 여행을 도구로 한 역사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로 서유럽편도 따로 출간하였다.  

 

  중요한 건 바로 그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정신, 굴하지 않는 용기, 흔들리지 않는 의지! 역사에 향기로운 이름을 남긴 대부분의 위인은 그런 공통점이 있다. <172p>

  유럽의 역사는 학창시절 세계사를 통하여 살펴본 적이 있다. 많은 나라들이 유럽에 있는 만큼, 다양한 사건들이 있었고, 저마다의 꿈과 야망을 가진 채 많은 인물들은 태어나고 죽어갔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나라의 영웅 또는 희대의 악인이 되었던 인물들의 공통점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 굴하지 않는 용기, 흔들리지 않는 의지" 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늘날 강대국인 러시아의 기초를 쌓았던, 표트르 대제와 레닌, 음악과 예술의 나라이자 지금은 작은 나라인 오스트리아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시절에는 거의 유럽 전역을 통치하며 강성대국으로 이름을 떨쳤었다. 또한 유럽의 강대국들의 틈에서 스스로 땅을 개척하며 오늘날의 독일이 있게 한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프리드리히 2세, 비스마르크 그리고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까지, 동유럽의 삼국은 위기 때마다 불세출의 영웅들이 탄생하였고, 역사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여 후세에 전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이 지켜봐야 할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문은 답하지 않는다. 200년 세월을 한자리에서 묵묵히 지켜봐온 관찰자답게 앞으로도 그저 말없이 지켜볼 뿐이다. 그러나 문은 이미 우리에게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는 승리와 패배, 영광과 치욕 사이에서 돌고 돈다는 것을,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스스로라는 것을. <307p>

  역사가 중요한 것은 역사를 통해 오늘과 내일을 알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럽의 역사는 유럽인들에게 충분한 자부심이고 비 유럽인들에게는 좋은 교훈이 된다. 유럽의 지배했던 나라들은 시대마다 달랐고, 그 기간 역시 그리 길지 않았다. 시대별로 유럽을 지배했던 나라들의 왕들은 자신의 통치가 길 것이라 믿었고, 나라 또한 절대로 망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과 생각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여지없이 깨어지고 사라졌다. 결국 어느 누구도 유럽을 통일하지 못한 채, 오늘날의 유럽은 여러 나라들이 자기들의 깃발을 세우고 살아가고 있다. 다만 각 나라들마다 여러 유적과 동상(銅像)들만이 과거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때를 어렴풋 상상한다. 역사는 바로 이런 것이다.   


  작년에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하는 이집트문명전을 보러 갔었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지만, 입장료에 비해 큰 소득은 없었다. 2시간도 채 안 되서 관람을 마치고 바로 옆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자체 전시실로 이동했다. 어릴 때 몇 번 와서 그런지 친근했고 내부구조는 예전 그대로였다(더구나 무료였다!). 우리 조상들과 아시아 나라들의 많은 유물들과 예술품들이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역사의 현장이었다. 나는 다리가 아픈지도 모른 채 구경했고 사진을 찍었다. 거의 3시간 가까이 꼼꼼하게 둘러보았고, 이집트문명전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

  내가 본 역사의 흔적들은 큰 유리 너머에, 또는 박제되어 경직되어 있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생명을 회복하여 길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나에게 많은 영감과 교훈을 주었다. 이런 역사의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는 없다. 그만큼 고귀하고 중요하다. 뿌리가 없는 나무가 없듯이, 역사가 없는 민족과 나라는 없다. 저자가 동유럽 삼국을 돌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역사를 통해 대한민국을 자세히 살펴본 다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도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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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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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농장>, <1984> 등의 걸작을 남긴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는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에세이집이지만, 한편으로는 오웰이 살았던 시대상과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자서전, 회고록 같은 책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의 탁월한 문장력과 위트에 감탄과 웃음을 연발했고, 문학인으로서 시대를 바라보고 미래를 내다보다는 안목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그렇다! 적어도 문학인이고, 글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정도의 문장력과 소신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는 이미 길에 멈춰 서 있었다. 나는 코끼리를 보자마자 쏴서는 안 된다는 걸 완벽하리만큼 확실히 알았다. 멀쩡한 코끼리를 쏜다는 건 심각한 문제이며(거대하고 값진 기계장치를 파괴하는 것에 비할 만한 일이다) 피할 수 있다면 분명히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멀리서 보니 평화롭게 풀을 뜨는 코끼리는 소보다도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발정기’의 발작은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녀석은 위험하지 않게 그저 배회할 것이고, 조련사가 돌아와서 데려가면 그만일 터였다. 더욱이 나는 녀석을 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좀 지켜보며 녀석이 다시 난폭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한 뒤 집으로 돌아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돌아서다 나를 따라온 군중을 흘낏 보고 말았다. 막대한 인파였다. 적어도 2000명은 되고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길 양쪽을 다 막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빛깔 요란한 옷들 위로 길게 이어져 있는 노란 얼굴들의 물결이 보였다. 모두 코끼리한테 총을 쏠 것이라 확실히 믿고서 제법 흥이 나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마술사의 묘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날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술의 소총을 든 나는 잠시 봐줄 만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가 그러리라 기대하고 있었으니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2000명의 의지가 나를 거역할 수 없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손에 소총을 들고 서 있는 그 순간 나는 백인의 동양 지배가 공허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군중 앞에 총을 들고 서 있는 백인인 나는 겉보기엔 작품의 주연이었지만, 실은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바보 같은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백인이 폭군이 되면 폭력을 휘두르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지만, 백인 나리라는 상투적 이미지에 들어맞는 가식적인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나 ‘원주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안달하고, 그래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원주민’이 예상하는 바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게 그의 지배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쓰고, 그의 얼굴은 가면에 맞춰져간다. 그러니 나는 코끼리를 쏴야 했다. 나는 소총 심부름을 시킬 때부터 이미 그럴 것이라고 알린 셈이었다. 백인 나리는 백인 나리답게 행동해야 한다. 단호하고, 생각이 분명하고, 확실히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것이다. 2000명이 졸졸 따라오는 가운데 총을 들고 여기까지 왔다가 아무것도 안 하고 슬그머니 물러나버린다-그런 것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군중들이 날 비웃을 터였다. 나의 모든 생활은, 동양에 있는 모든 백인의 삶은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한 기나긴 투쟁이었다. <37-38p>


  오웰은 1922~1927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에서 경찰간부로 활동한다. 그는 이 시기에 자본주의의 횡포와 제국주의의 허상을 깨닫게 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일화는 이 책의 전반부 분위기를 형성하고, 아울러 오웰이 왜 사회 민주주의 계열의 운동과 그런 삶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아마 그의 문학적 영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작가다. 모든 작가는 ‘정치에 거리를 두려는’ 충동을 느낀다. 평화롭게 책을 쓸 수 있도록 내버려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이상은 기업형 슈퍼마켓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구멍가게 주인들의 꿈보다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우선 언론 자유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영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일종의 사기였다. 마지막 순간에는 언제나 돈이 의견을 지배한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법적 권리가 있는 한 별난 작가가 빠져나갈 구멍은 언제나 있기도 하다.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책들을 쓰면서도 자본가계급으로 하여금 매주 몇 파운드의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는 생활을 어찌어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나 자신을 속을 수는 없다. 우리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언론의 자유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았으며, 그런 일은 조만간 여기서도 벌어질 것이다. 때는 다가오고 있다. 당장 내년도 아니고 어쩌면 10~20년 뒤도 아니겠지만 때가 다가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모든 작가가 완전히 침묵하는 쪽을 택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특권층이 요구하는 마약만 만들어낼 때가 올 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것은 내가 아주까리기름이나 고무 곤봉이나 강제수용소에 맞서 싸우는 것과 매한가지 일이다. 그리고 길게 볼 때 언론의 자유를 감히 허용할 체제는 사회주의 체제밖에 없다. 파시즘이 승리한다면 나는 작자로서는 끝이다. 즉 내가 가진 유일하게 쓸 만한 능력이 끝이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할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63-64p>


  오웰이 독립노동당에 가입하면서 쓴 자신의 입장인데, 비장감이 느껴질 정도로 필체가 엄숙하다. 마치 출사표와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작가로서 언론인으로서 자신이 지금 시대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젊은 시절 경험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정했고, 당대 현실의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집어냈다. 나는 오늘날에도 언론인, 문학인 등 사회 지식인들이 이러한 관점에서의 실천을 기대하지만, 이해득실에만 매여 있는 것 같아 실망스러움을 느낀다. 오웰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지탄을 받기 이전에, 자신의 소신을 정당한 방법으로 제시함으로써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는다.   


  나는 이 책을 밤에 자기 전에 읽었는데, 가끔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읽었다. 그만큼 매우 흥미로웠고 읽으면 읽을수록 오웰의 심정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저작들이 새록새록 생각나면서 왜 그러한 작품을 썼고 남겼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책은 오웰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실마리가 될 것이고, “적어도 문학인이라면 이정도의 관점과 소신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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