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9월 5주

 

 

 

 

 

 

  

 

1. 체인질링 -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의 영화들의 대부분은 가족애(愛)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시작은 <미스틱 리버>였다) 약간 다른 분위기라면 찰리 파커의 일대기를 그린 <Bird> 정도. (사실 이 영화는 재즈를 좋아하는 이스트우드의 헌정영화이다.) 그의 영화는 실화나 실화에 가까울 정도로 느껴지는 스토리 전개와 영상으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것은 지루함과 사실감 사이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호불호로 나뉘게 하는데 나는 이스트우드의 이런 면을 좋아한다.

  내용은 다소 평이하다. 싱글맘인 어머니가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미국의 1920~30년대 시대적 비리에 저항하는 내용이다. '민중의 지팡이' 를 해야할 경찰들의 권력남용 심했던 시기는 어느 나라나 있었다보나, 물론 지금도 경찰의 공권력은 대단하다. 안타까운 것은 권력자들의 권력남용은 지금도 유효하고 이것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도 더욱 과격해졌다.

 

 

 

 

 

   

 

 

2. 마더 - 봉준호 감독  

  영화는 엄마가 아들을 구하기 위한 모성애를 보여주지만, <괴물>의 가족들처럼 불쌍하게 느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엄마 주변의 세상은, 엄마의 눈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욱 오기가 생기고 미칠 수밖에. 그것은 모성애를 넘어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넘을 수 없는 벽을 향한 도전이다.

  엄마라는 이름의 감옥, 도준이라는 감옥. 엄마는 어릴적 도준을 죽이고 싶었지만, 도준 역시 항상 어린애처럼 대하는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중간에 잠깐 어린아이가 박카스를 들고 있는 짧은 장면은 엄마로서의 역할을 그만두고 싶다는 의지로 보인다. 그러나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둘은 꼭 같이 있어야 한다. 즉, 엄마와 도준은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다.

  영화는 모성애의 승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엄마는 아들을 구했고, 아들도 엄마를 구했다. 그게 한국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것이다.

 
 

 

 

 

 

 

  

 

3. 언노운 우먼 -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이 영화를 보다가 어릴적 읽었던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 이 떠올랐다. 내용은 다르지만 자연주의 작가인 모파상은 '여자의 일생' 에서, 추상적인 상상보다 사실적인 감정과 배경묘사로 불행한 여자의 삶을 이야기 한다. 이 영화 또한 이레나의 삶을 통해, 불행한 여자의 삶을 비슷하게 보여주지만 결말은 소설보다 영화가 조금 해피하다. 

  나는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 을 읽으면서 "왜 모파상은 이런 불운한 여자의 삶을 '여자의 일생' 이라고 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 질문을 이 영화를 보면서 똑같이 던졌다. "왜 감독은 이 영화 제목을 '언노운 우먼(The Unknown Woman)' 이라고 지었을까?" 소설과 영화 둘다, 제목과는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에서 잔느의 일생은 정말 불행하고 영화에서 이레나는 철저하게 과거의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만, 영화 말미에 자신의 정체는 모두에게 알려진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싶었던 두 여자는 외부의 요인들로 인하여 불행해진다. 하지만 이레나는 잔느의 비해 삶에 대해 적극적이다. 영화를 보면 그녀의 예상과 다른 반전이 숨겨져 있었지만, 그 반전은 평생 불행했던 그녀에게 행복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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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4주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 마이클 호프만 감독 

  영화는 잔잔한 호수와 같다. 그 잔잔한 호수에 몇 개의 돌이 떨어져 파형을 만들기도 하지만, 파형이 사라지면 호수는 다시 잔잔하다. 실화를 재구성 한 영화지만 "실제로 이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감동을 느꼈고, 때에 따른 아름다운 OST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개인적으로 등장인물 간의 대사들이 마음에 들어서 대사들을 외우면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다.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내가 읽었던 그의 작품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사랑'이었다. 인간과 인간 간의 사랑이었고, 연인 간의 사랑이었으며, 인류 공존을 위한 사랑이었다. 생각해 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문호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사랑'이었고, 종교와 사상의 위대한 가르침 역시 '사랑'이었다.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웃고 울었고, 사랑 때문에 살고 죽었다.  

  부부 관계는 연인 관계와 다른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연인 관계도 사랑하는 사이지만 부부 관계보다 깊을 수는 없다. 간단하게 우리들의 부모님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헤어짐을 몇 번 경험했지만, 부모님은 30년 이상 헤어지지 않고 오늘도 같은 방에서 같은 침대에 눕는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부모님이 크든 작든 서로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별 일이 아니었는데도 싸웠고 괴로워 하셨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셨고, 아버지는 식사를 마치고 직장에 나가셨다. 그리고 언제 싸우고 괴로워 했냐는 듯,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즐겁게 대화하신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하늘이 맺어 준 사랑'은 반드시 있다고 확신했다. 나의 부모님과, 톨스토이와 소피아가 그랬듯이..  

  

 


 
 

 

 

   

러브&드럭스 - 에드워드 즈윅 감독 

  제이미와 매기는 쿨한 척 한다. 서로 뜨겁게 만나서 깨끗하게 헤어지길 원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서로가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제이미는 열정적이었고, 매기는 제이미에 비해 냉정했다. 흥미로운 것은 둘 다 남들이 보기에는 진부한 직업을 가지고 삶을 살았는데, 섹스가 아닌 진심으로 사랑을 확인한 이후부터는 이전과 다르게 삶이 변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귀가 얇다. 아무리 냉정하고 자기 주관이 강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책이나 영화 등 어떤 것을 읽고 보았던 경험과 생각들이 그동안과 앞으로의 생각과 판단을 이끌어 낸다. 그래서 귀가 얇은 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믿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확고하고 싶을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오랫동안 고민하고 공부해서 나온 진리 같은 가설들과 신념들, 나와 부모님 간의 천륜, 나와 친구들 간의 우정,그리고 나와 그녀가 고백했던 사랑이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믿음들이 흔들리지 않길 원하고, 혹시라도 흔들리게 되면 혼란스럽거나 심지어 삶을 포기하고 죽기도 한다. 왜 흔들리는 것일까? 아쉽게도 사람들은 귀가 얇다.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로미오와 줄리엣이 주변의 반대에도 만남을 지속하고, 위대한 개츠비와 영리한 베르테르를 단숨에 무모한 자로 만들고, 폭군과 악녀를 순한 양으로 변하게 할 수 있고, 인간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 오직 하나만 바라 볼 수 있게 만드는 그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태어나고 죽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 때문에 평생 후회 하지 않기 위해서 주어진 운명과 환경에 순응하거나 불응했다. 아직도 내가 운명을 믿는가 보면, 철이 없고 순수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경험과 고민에서 얻어진 나름의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다만 이 믿음이 지루하거나 애가 탈 정도로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믿음이 없다면 사람들은 기다림에 강하지 않으니까.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 라이언 머피 감독 

  벌써 이런 내용의 멜로영화에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다. 몇 번의 사랑과 이별은 영화를 보면서 큰 도움이 되었고, 나이 뿐만 아니라 책, 영화, 상상 등 간접 경험들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한 여자의 내적치유의 과정을 과장보다는 솔직하고 담백하게 표현했다. 1인칭 주인공시점의 멜로영화라서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 충분히 재밌게 보았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주인공인 리즈가 삶과 사랑의 의미에 대해 깨닫는 과정들이 인상적이었다. 꽤 긴 런닝타임에 지루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끔씩 이런 영화를 보면서 마음의 완급조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랑했다면 이별 앞에서 쿨할 수 없다. 사랑은 쿨하게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별의 후폭풍은 뒤늦게 찾아오는데 사람들은 이별 그 순간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별했던 그 순간에는 이별의 아픔을 잘 몰랐다. 이별의 아픔은 항상 일상의 삶 속에서 불현듯 찾아왔다. 이를 닦다가 식사를 하다가 아니면 잠시 멍 때리고 있다가 등등.. 별 다른 의미 없는 말과 행동 속에서 진지하게 다가왔고, 최근의 이별부터 오래된 이별까지 두서없이 생각나게 만들었다. 그럴 때면 정말 하루가 넘게 온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떠나갔다.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 잠시 떠난 것이다. 

  서로에게 소리치며 싸우고 상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기억들도 이제는 이해가 되었고, 밤이 다가와 짧은 헤어짐이 싫어 밤새도록 전화를 붙잡고 있었던 기억들에 미소를 짓는다. 이제 곁에 없기에 알 수 없는 외로움과 공허함이 찾아 올 때면 무척이나 괴롭고, 내 자신에게 매우 불만족스럽다. 지속적으로 비슷한 기억들의 반복과 해독의 긴 시간들을 지나서 마음 깊이 소화했을 때, 이전보다 내가 성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트라베시아모(attraversiamo)" 결국 영화에서처럼 나에게도 이 단어가 지금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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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7월 4주

 

 

 

 

 

 

  

  

 

1.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조엘 코엔 감독  

  영화에서 OST는 단 한곡만이 엔딩 크레딧에서만 나온다. 배경음악 없이 단지 배우들의 대사와 주변환경에서 나오는 소리 뿐이다. 또한 시거와 모스, 에드는 너무 맹목적이다. 시거는 모스를 찾기 원하고, 모스는 그로부터 도망치기를 바라고, 에드는 적당히 뒤쫓을 뿐이다. 그리고 2백만 달러가 든 가방은 영화 후반부에 모스의 손을 마지막으로 사라져버린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뭔가 심오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보기에는 영화 포스터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이 세상에서 살인마 시거가 갈 수 없는 곳은 없다. 그런 시거를 뒤로한 채 2백만 달러가 든 돈가방을 들고 모스는 어디론가 도망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도 시거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결국 어딘가에서 개죽음 당하든 그건 상관없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선택할 수 없던 일이니까. 시거는 오늘도 산소통을 들고 그런 사람들과 마주치기를 원한다. 모스는 승산없는 도망을 칠 것이고, 에드는 그 둘을 바라보며 의미없는 고민을 한다. 의미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2. 추격자 - 나홍진 감독 

  영화는 희대의 살인범 유영철의 살인극에서 모티브를 잡았다고 한다. 요새는 쥐도 새도 모르게 어린이부터 성인 여자까지 납치해서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닌 온갖 망나니 짓에 시체토막 내는 시대라, 이 영화가 우리 사회의 불안요소를 나름 표현했다고 본다.

  영화 내용은 대충 짐작이 가겠지만 초, 중반까지 잘 나가던 스토리 라인이 후반부에 이상하게 되어버린다. 약간 억지스러운 건지, 아니면 장치였는지 모르겠지만 후반부에 슈퍼마켓에서 벌어진 장면은 엑스트라 연기도 그렇고 내용도 썩 좋진 않았다.  차라리 다른 방법으로 스토리를 전개했거나 수정했으면 좋았을 걸.

  영화는 쉼없이 전개된다. 장소도 큰 변동이 없다. 그리고 배우들은 열심히 뛴다. 요즘 영화에서는 경찰들의 나태함을 보여주고 공직사회의 단상을 표현하는데 나는 그것이 유감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을 언제까지 유효할까? 지금은 자기의 목숨하나 지키기도 어려운 시대이다.
윗물이 맑든 더럽든 아랫물은 계속해서 윗물로 부터 온다. 그렇다면 스스로 정화시킬 수밖에... 전직 경찰과 포주 사이에 서 김윤석은 그렇게 스스로 정화하려고 한다.  

   

 

 

 

 

 

 

 

3. 악마를 보았다 - 김지운 감독 

  영화를 보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살인마 장경철 앞에서 여자들은 너무나 무기력했고, 범죄 수법과 묘사가 무척이나 섬뜩했다. 놀랍게도 내가 이런 장면들에 익숙해졌는지 무뚝뚝하게 보았지만, 옆에 있던 관객들은 짧은 탄식과 비명을 질렀다. 내용은 어렵지 않으나 너무 엽기잔혹극으로 기울어져 보기가 민망하다. 

  근래 사회 내 성범죄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나이와 장소에 관계없이 여성들이 위험상황에 직면해 있다. 성범죄는 그 피해로 여성 한 사람의 인생이 파탄날 수 있는 잔인한 범죄이기에, 정부차원에서 더욱 큰 관심과 보호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범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기에, 정부 이전에 시민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자신과 관계없다고 방관하거나 무시하기에는, 지금의 사회 내 범죄들이 너무 잔혹하고 엽기적이다. 서로가 서로의 보호자가 되어 관심을 가지며 돕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 내에 범죄자들은 그 틈을 타서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들을 빼앗을 것이고, 피해자 가족들의 눈물에 안타까움을 느끼거나 침묵, 방관할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그 피해의 주인공이 나 자신이나 가족이 될 수 있고, 이는 심각한 사회 치안 문제와 개인 도덕성 문제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영화로 제작되었고 개봉했기에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이 영화를 보고 모방범죄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영화에서 살인마에 목숨을 잃은 여성들처럼, 우리 사회 내 여성들이 스스로 약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들 스스로가 경각심을 가져, 우리 사회 내 이런 유사한 범죄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여성을 비롯한 약(弱)자들을 도왔으면 한다. 

  만약 당신이 영화 속의 김수현이라면 굳이 이런 우려들이 필요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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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6월 5주

  

<포화 속으로> - 이재한 감독 

  정기적인 것은 아니지만, 6월에는 6.25 전쟁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들이 자주 개봉한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달이자, 오래 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고 의로운 피를 흘렸던 6월. 반 세기가 지나서 이젠 잊혀진 전쟁처럼 느껴졌지만, 2010년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재확인시켜 준 한 해였다. 그리고 그 날의 비극을 잊지 말라는 죽은 자들의 외침이었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시 학도병들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남한군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들은 총 쏘는 방법만 배우고 현역 군인들과 같이 즉시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생각하면 얼마나 기가막힌 일인가? 사춘기의 청소년들을 전쟁터로 데려가 총 한 자루 쥐어 주고 최전선에서 잘 훈련된 북한군을 상대로 조국을 위해 싸우라고 하다니! 전쟁에는 이유불문이 없다하더라도 그들은 너무 어렸다.

  시대가 많이 변했기에, 영화에서 학도병들이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모습들을 오늘날의 청소년들이 보면 어색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에 상관없이 군대를 가본 남자들이라면 공감 할 것이다. 부모님과 친구들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국방의 의무란 무엇인가? 군복만 입었다고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 깊이 가족과 친구들을 비롯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겠다 다짐하고, 나라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목숨도 바치겠다는 투철한 정신이 의무를 만든다. 좋은 싫든 군대에 와서 이것을 깨달았다면 국방의 의무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군인이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 

  1930년대 만들어진 전쟁영화라고 믿겨지지 않을만큼의 구성의 탄탄함이다. 일단 시나리오는 지금까지 제작된 전쟁영화들의 교과서와 같다. 전쟁의 참상과 병사들 개개인이 바라보는 전쟁의 회의적 시각, 비극을 짐작하게 하는 복선 등. 이 영화에는 전쟁영화의 기본적인 요소들이 정확하게 담겨져 있어 더욱 실감난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도 수준급이었고, 특히 그들이 말한 대사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특히 주연급 배우들은 거의 첫 데뷔작일 듯 싶은데, 전쟁과 어울리지 않는 꽃미남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1930년대 배우들이라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이 없다. 이외에도 긴장감을 주는 배경음악과 타격감이 느껴지는 효과음은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는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반전(反戰)영화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전쟁은 평범한 집배원을 하사관으로 만들고, 학문에 열중해야 할 학생들을 병사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명분을 부여한다. 즉, 자국 내에 전쟁이 발발하는 순간부터 개인의 꿈과 야망은 잠시 접어두고, 조국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날아오는 총탄 속에 바쳐야 하는 것이다.

  전쟁은 권력자들이 보기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생각하겠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는 일이다. 물론 자국 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가족과 친구들의 생존을 위해 맞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는 것이다. 국민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데 국가 위정자들의 판단 속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국민이 져야 하는가? 나는 이 대답을 정확히 말하기 힘들지만, 한 가지 예로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먼저 도망가는 것은 국가 위정자들이었고,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합법적인 군복무자들과 국민들이었다. 이건 우리 나라 역사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엘라의 계곡> - 폴 해기스 감독 

  전 세계에  교양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개인적으로 10명 중 5명 이상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그것을 복구하고 되찾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흘렀다. 실제로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 감독의 <화씨9/11>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파병된 병사들은 전쟁을 통해서 점차 반인륜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았고, 포로와 약자에 대한 인정과 자비는 희미해져갔다. 실제로 미군들이 포로들을 학대하고 성적 수치심을 주는 사진들이 언론을 통해 공개 되었을때, 많은 사람들은 이 전쟁이 무척이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터는 선량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기 쉬운 곳이며, 악인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쉽다. 그 곳에서는 오로지 승리를 위한 반칙과 승리자의 만행만 존재한다. 아쉽게도 영화에서 나오는 병사의 말처럼 그 곳에 핵폭탄이 떨어져 모든 것이 가루가 되야 이 전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군복무를 마쳤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지만, 군대라는 곳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특히 모병제가 아닌 징병제인 우리나라는 더욱 더 그렇다. 그들의 인성이나 적성은 솔직히 크게 상관없고  공통적으로 약 2년의 시간만 지나면 자동적으로 전역을 한다. 그러기에 각 병사들의 심신이나 의지에 상관없이 전역 하는 그 날까지 모두가 한 생활관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다들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고 단체생활을 통해 서로를 도울 수 있다고 좋은 취지로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단체생활이 익숙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내성적이거나 심약한 병사들은 진정 하루하루가 힘들고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 군대이다. 또한 계급사회에서는 상명하복이 당연한 의무이다. 그렇다면 이미 병사들의 인권이란 사실상 무늬 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 군대는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편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군대는 엄연히 남성위주의 사회상이고 웃음과 기쁨보다는 슬픔과 우울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물며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군의 군부상황은 어떨까? 총탄과 폭격이 난무하여 자신과 옆 전우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인권이나 인성, 자비심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큰 기대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포로들은 좋은 먹이감이다. 인간 본성이 가진 폭력과 잔인성은 전쟁에서 표출되기 너무 쉬우며,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침없다. 누가 그들을 전쟁으로부터 구원할 것인가? 아쉽게도 지구의 종말이 오지 않는 이상 이 땅에서 전쟁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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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5월 4주

 

 

 

 

 

 

 

   

<아무도 모른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미혼모인 엄마가 4남매를 남겨두고 오사카로 떠난 사이에 4남매의 생활은 침식되어간다. 아키라 외에는 집 밖에 나갈 수 없는 규칙은 엄마가 없는 상황에서도 한동안 유효했다. 그러나 너무 힘든 생활고와 무의미한 날들에 반발하여 4남매는 조용(?)하고 즐거운 외출을 한다. 비극적인 일로 동생이 의자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죽게된다. 살릴 수도 있었지만 일단 돈이 없을 뿐더러, 병원에 가도 보호자가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져 4남매가 헤어지게 될까봐 갈 수 없다. 영화에서는 남매들의 결말을 지어지 않았지만 그들의 삶을 보고 있는 자체가 안타깝다. 감독은 그런 남매들의 뒷모습을 엔딩신으로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1988년 일본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영화인데 이런 상황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회복지 계열의 종사자라면 꼭 봐야할 영화라고 생각한다. 중간중간 의미있는 영상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키라 역의 아기라 유아는 소년 가장의 역할을 잘 연기했다. 특히 어린나이지만 감정연기가 뛰어났다. 그는 2004년 칸느 영화제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윈터스 본> - 데브라 그래닉 감독

  영화는 깔끔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주제로 전개되었고, 감독은 자신이 하고 싶을 말들을 잘 전달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났을 때 뭔가 허전함이 들었다. 진짜 리와 그녀의 가족에게 평화가 찾아 온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일까? 어린 여동생이 아버지의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리의 표정은 밝지 않다. 

 소년소녀가장이나 고아들은 일찍부터 치열한 삶을 살아간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을 깨닫고 숙련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낯설게 느끼고 무시와 냉담을 야속하게 느낀다. 그들을 적절한 시기와 때에 도와주지 않는다면, 사회의 불안요소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사회 내 범죄와 사건의 공범이다. 

  미성년자를 일찍 성인으로 만들고, 연약한 인간을 강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처한 환경과 상황의 영향이 크고, 생존 방식을 개척함으로써 '야생'적 기질을 부여한다. 자립심이 강한 것은 좋지만 자폐적인 언행이 동반되면 곤란하다.

  지금 우리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정부 정책과 함께 개인 스스로의 결단에서 비롯된 구체적이고 진심 어린 '사회 복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회 복지'의 사각지대는 없어야 한다.
 

 
  

 

 

 

 

 

 

 

<무산일기> - 박정범 감독 

90년대만 해도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오게 되면, 국가 차원의 환영 행사와 정부에서 넉넉한 정착금과 좋은 여건을 마련해 주었는데, 2000년 이후부터는 너무 많은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오게 되어, 환영 행사는 커녕 정착금과 여건 마저 예전만 못하다. 실제로 지상파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로 탈북자들의 현실을 알리기도 했고, 언론에서도 탈북자들의 남한 생활에 있어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보도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서 공감했던 몇 가지 사실들은, 같은 동포이자 민족인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서 쉽게 정착하기란 어렵다는 사실과, 남한 사회 내에서도 약 300만 실업자들이 있으니, 탈북자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란 당연히 어렵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기성 교회들을 비롯한 사회 내 인권단체들이 탈북자들의 희망이 되어주기에는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비단 탈북자 뿐만 아니라 사회 내 소외계층에게도 해당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국가 정책이 잘못되어서가 아니고, 기성 교회들과 인권단체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해서 생긴 일은 아니라고 본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서도 히스패닉과 이민자들에게 국가 차원의 차별대우 정책을 공공연하게 시행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그것을 반대하는 인권단체들의 시위는 멈추지 않고 있다. 핵심은 인간이 자신보다 낮게 여기는 인간을 향한 본능적 비호감과, 역사적으로 계속되어 온 사회 내 유산계층의 배려없는 횡포라 할 수 있다.     

  어찌하랴! 인간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돕기보다는 이용하는 것에 익숙하고, 안타까워 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헌신하는 성실함과 꾸준한 용기가 없다. 같은 남한 사람들도 서로를 밟고 뒤통수 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하물며 사회 내 소외계층에게 눈을 돌려 그들을 진심으로 도울 수 있을까? 근래에 정치계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복지 신드롬'을 우려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앞으로 북한에서 더 많은 탈북자들이 나오겠지만, 그들이 남한행을 택할지는 미지수이다. 얼마 전에 서해상에 표류한 북한 주민들 중 상당수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일부 남한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멍청이들! 굶어 죽으러 다시 북으로 가?"라고 말했는데, 남한에서 '152'로 시작되는 탈북자 전용 주민번호가 계속 시행되는 이상, 북한이 국가와 국민들을 파멸로 몰아넣는 독재정권을 계속 존립하려는 이상,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든 편안한 생활을 보장 받을 수가 없다  

  같은 말과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박한데, 다른 말과  피부색을 가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의 "무산일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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