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을지로 수집
설동주 지음 / 비컷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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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를 마시며 "나 때는 말이야"가 수긍 가는 을지로 이야기를 읽는다. 을지로를 좋아해서 이 책이 나왔을 때부터 꼭 읽어보고 싶었다. 내가 떠나온 곳보다 서울에서 더 오래 살아 고향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서울 곳곳의 이야기가 생경하지만도 않다. 을지로 인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의 독특한 풍경, 영업이 끝난 조명 가게 조명이 고즈넉이 거리를 비추는 판타지 한 광경, 서울 중심가인데도 다른 시공간으로 온 듯한 기시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듯한 기분을 잊지 못한다. 첨단 도시와 구멍가게가 공존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이곳의 풍경은 서울에서 유일하다.

설동주 저자가 짚어낸 을지로의 이미지는 내가 느꼈던 것과 동일했다.

 

*

"을지로의 간판은 직설적이다. 명함, 와이어, 프레스, 가공, 도장 같은 단어들이 이거 돼요, 이런 건 어때요, 하고 말을 건다. ‘이런 걸 할 수 있어요’라는 결과물을 바깥에 대문짝만 하게 걸어놓기도 한다. 틈새 없이 늘어서 있는 간판들은 이 골목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아온 기술을 닮았다."

 

 

을지로의 낡은 상가들은 재개발로 무너져도 좋은 퇴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는 황정은 작가의 소설 속 암울한 청계 상가 풍경과 다르다. "1층에는 인쇄, 타일, 공구, 조명, 분식집과 다방, 오래된 맛집들. 2층과 3층에는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소담한 카페, 독특한 가게들. 마치 10년 전 찍은 사진과 어제 찍은 사진이 한 롤에 들어 있는 필름"처럼 어우러져 상생하는 생활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공구 소리와 쌍화탕 향기가 공존하는 곳. 기원, 이발소, 다방, 인쇄소들이 화석처럼 아직도 거기 있다.

 

*

윤소영 : 맞아요. 먼저 계시던 분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깨뜨리지 않는 선에서 저희처럼 새로운 사람들이 스며들면 좋겠어요. 변하긴 변하겠지만, 깊숙이 파헤쳐 보면 새로운 요소가 들어와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지 모두 다 바뀌어버리는 변화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설동주 : 라이프스타일을 깨뜨리지 않는다는 말 참 좋네요.

 

김요한 :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추가로 이야기해보자면, 마지막 재료는 ‘시간’이라는 말 있잖아요. 이 건물이랑 골목, 가게 다 시간을 품고 있는데, 그런 공간과 대비돼서 저희 가게도 새롭게 보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은 시간을 품고 있는 것의 가치가 너무 낮게 평가되는 것 같아요. 이 가치가 잘 지켜지면 좋겠어요.

- 「윤소영(패션MD), 김요한(그래픽디자이너)이 만든 편집숍 <오팔> INTERVIEW 2(2019. 07. 24)」

 

 

여행의 의미가 단지 관광이 아니듯 우리는 세계를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 만지고 경험하고 싶어한다.

 

*

윤병주 : 사진관 치고는 소품이 엄청 많은데, 제가 워낙 만지는 걸 좋아해요. 예전에 로마에 간 적이 있는데, 눈으로만 보기에는 이미 익숙한 것들이잖아요. 워낙 사진을 많이 찍어서 눈으로 보는 데에는 둔감해지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한 번 만져보면 느낌이 달라요. 그런 걸 좋아해요. 어디를 가든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벽이라도 한 번 만져야 내가 여기 왔다 갔다는 느낌이 들어요. 비행기를 타고 갈 때 홍콩을 경유해서 가면 홍콩 가봤다고 하지 않잖아요. 안 만져보면 공항에만 있는 거나 다름없는 것 같아요. 경유한 걸로만 치면 세계일주 다 했겠죠.

(중략)

을지로는 지금 방향이 좋다고 봐요. 기존 가게들이 1층에 현존해 있고. 1층은 우리가 파고들지 않잖아요. 우리는 2,3층에 있는데, 우사단은 원래 있던 식당 쫓아내고 미용실 오래 했던 사람 나가게 하고 전혀 다른 게 들어오니까 완전히 변해버렸어요. 공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을지로는 가능해요. 우리는 1층에 못 들어가요. 왜냐면 을지로는 1층 분들이 건물주인 경우가 많거든요. 덕분에 2,3층 월세가 싼 거예요. 그래서 을지로는 지속 가능할 것 같아요. 이런 방향이라면 젠트리피케이션도 방어할 수 있는 거죠. 경리단길이나 망원동도 정책적으로 1층은 건드리지 않고 2,3층에 젊은 사람이 들어올 수 있게 했으면 문제될 게 없었다고 봐요. 을지로가 앞으로의 롤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윤병주 사진작가가 운영하는 사진관 겸 현상소 겸 살롱 <망우삼림>, INTERVIEW 3(2019. 07. 30)」

 

노동이 있는 곳에는 삶의 가치, 방향성에 대해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이 많다. 자본의 환경 변화에 따라 사라지는 직업에 대해 재빠르게 부응하지 않는 개인만을 탓할 수 있을까. 일은 재화의 가치만 가지지 않는다. 우리가 노력을 쏟은 만큼의 긍지와 애정도 있다. 지금 시대는 그런 재반을 간과하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장인이나 예술가로 추앙하면서 어떤 이는 대체 가능한 부품 같은 노동자로 치부하면서.

 

*

설동주 : 외부에서 노하우를 잘 알려주시나요? 영업비밀일 수도 있는데.

 

박철성 : 친절하게 알려주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죠. 그래서 리서치를 잘하는 게 중요한 거죠. 여기서 선수가 되려면 진짜 제일 바닥, 아무도 모르는 바닥의 바닥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더 고급정보를 알아야지. 예들어 어떤 사람들은 좋은 인디고집을 하나 알면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패 하나만 든 거예요. 그렇잖아요? 이 사업에 관해 패를 몇 개는 갖고 있어야 작가가 어떤 요구를 해도 해결해주죠. 하다못해 경쟁업체를 소개해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을 내가 리드하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편하고 네트워크가 있는 데를 자꾸 가려고 해요. 거기가 최선이 아니라 하더라도 몸에 밴 습성, 편의성 때문에 그렇게 되거든요.

(중략)

그동안 인쇄산업은 수주산업화해서 살아왔어요. 사실 그 패러다임이 가장 큰 문제였던 거예요. ‘일이 있어야 일을 하지’, 이 말에는 누군가 일을 줄 거라는 전제가 있잖아요. 우리 아버지 세대는 일을 만들어서 하는 세대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런 걸 배워본 적이 없어요. 고도성장기 때 산업이 잘 돌아가니까 사람들은 도장도 필요하고 인쇄물도 필요하고 명함도 필요했던 거야.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누가 일감을 주는 상황에서 이제는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어요.

(중략)

나는 무에서 시작하는 걸 새로운 창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존에 있는 것을 발전시키거나 그 안에서 예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해요. 새로 그리는 건 누구나 언제든 할 수 있어요. 이 공간을 하얀 페인트를 칠한 다음에 자기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러면 이 공간에 있던 일종의 영혼은 사라지는 거야. 이곳에도 공간의 특성이 있어요. 저쪽에 홈이 파여 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금고가 있었는지 아니면 건축이 이상해서인지 모르겠는데, 그것 때문에 이 공간이 재미있어져요. 또 여기가 지하다 보니 하중을 받치려고 위에 H빔을 넣었는데, 이런 것들이 공간의 정체성이나 재미를 주죠. 만약 층고가 높고 이 기둥이 없었으면 여긴 그냥 인쇄소 자리예요. 그런데 기둥하고 층고 때문에 일반 상용 인쇄기가 못 들어왔던 거야. 그래서 점빵의 오늘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여기가 밋밋했으면 점빵의 느낌이 덜 살았을 거예요. 재미가 없는 거죠. 공간만의 이야기가 없으니까.

 

- 「리소 인쇄를 이용해 디자인 제작을 하고 있는 레터프레스 전문 인쇄공방 <디자인점빵> 박철성, NTERVIEW 5(2019. 08. 02)」 

 

 

비하인드 이야기가 많은 <에이스포클럽> 인터뷰는 작은 단편처럼 재밌었다.

 

 

*

설동주 : 해방 직후면 말 그대로 반세기네요. 이전 사장님은 또 여기서 20년을 지내셨고요.

 

권민석 : 강산이 두 번 변할 수 있는 시간. 20년 장사라니 말이 쉽지, 다방 운영하기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그 인생이 얼굴과 말투에 묻어 있더라고요. 사람에 웃고 사람에 지친 그 얼굴. 그래서 ‘젊은 사람이니 열심히 살아라. 이화다방을 잘 부탁한다’던 마지막 한마디가 잊히지 않아요.

(중략)

저희 오픈 준비하느라 공사할 때도 별의별 물건들이 다 나왔어요. 가짜 부동산 투자 서류, 위조지폐 만드는 틀, 6·25 참전용사증, 갖가지 의학서적 등등. 예전에는 무슨무슨 종파 몇 대손 모임 할아버지들이라거나 종묘제례 올리시는 분들이 제사 끝나고 와서 담소 나누시고 그랬대요. 다방 안쪽 방에서 종묘제례에 쓰이는 한복도 나오고, 그분들이 같이 찍은 사진도 나왔어요. 진짜 매력적인 곳이죠.

(중략)

아, 공사하느라 벽을 뜯었더니 시멘트 위에 칼로 그린 그림 같은 게 나온 적도 있어요. 사람이 앉아서 뭔가 하고 있는 모습. 누구 작품일까 알아봤는데, 옛날에는 미장이들이 미장 칼로 장난삼아 벽에 그림 그리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위에 시멘트로 문지르건 타일을 대건 할 테니까. 하지만 얼마나 예술적이에요. 미장한 직후에는 흘러내려서 이렇게 그리기도 쉽지 않을 텐데 굳기 직전에 미장 칼로 그린 거잖아요. 남겨놓고 싶었는데… 아쉽죠.

 

- 「1959년부터 을지로를 지켰던 ‘이화다방’을 개조·계승한 카페 겸 바 <에이스포클럽> 권민석, INTERVIEW 6(2019. 07. 25) 」  

 

 

이 책은 을지로 골목 탐방 지도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뒤에 부록으로 명소 소개를 꼼꼼히 정리해 놓았다. 중구에서 을지로 투어를 무료로 하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방산시장에서 청계 대림상가까지 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총 20개 지점을 둘러보며 을지로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짚어본다. 지하철 을지로 4가 역 6번 출구에서 출발해 방산시장 비닐·제지와 초콜릿·베이킹 거리, 성제묘, 염초청 터, 향초·디퓨저 DIY 상가, 포장 인쇄골목을 지나 중앙아파트, 을지로 예술가 작업 공간을 거쳐 청계 대림상가, 조명거리, 마지막으로 을지로 3가 노가리 호프에서 끝난다. 중구청 도심산업과에서 사전 신청을 받으며, 4명 이상이면 해설사가 배정된다. 평일과 토요일 오후 3시에 운영되고, 참가비는 무료다."

내가 아는 명소도 있고 모르는 곳도 있는데 오래오래 운영되어 단순히 '힙지로'로 불리며 트렌드로만 소비되지 않았으면 싶다. 친구를 데려가면 아니, 여기 이런 데가 있어 하고 놀라게 하기 좋은 곳이고 비밀스러운 아지트가 많지만, 요즘은 힙스터들 때문에 어렵게 된ㅎ

 

 

저작권 때문에 수록된 사진과 그림은 생략. 정감 가는 사진과 그림이 많아서 읽는 내내 눈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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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유주 연작소설집 틂 창작문고 13
한유주 지음 / 문학실험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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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른하르트 좋아하시더니 이젠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기 스타일로 소화해내신 듯. 「개와 걔」는 유디트 헤르만 「붉은 산호」느낌이 강하게 나지만.
무척 동감이라 단숨에(이러면 안 될 거 같은 책이지만) 다 읽었다. 내가 쓰고 싶고 읽고픈 소설을 읽은 건 참 오랜만이다. 자살과 죽음 사이의 수수께끼를 나도 많이 생각하므로. 나는 그에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했지. 내게 그 죽음은 이제 2년이 되어간다. 아주 길었고 아직도 멀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개의 죽음은 ... 영영 덜 잊을 죽음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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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인터뷰나 에세이보다 더 리얼한 ‘작가는 무엇인가‘


문학의 힘이란, 저는 늘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걸 만들어내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에 달려 있다고요. 그랬기 때문에,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서 특별한 의식儀式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거든요.

유니언광장까지, 서로의 길이 갈라지기 전까지 몇 블록을 함께 걸었어요. 작별인사를 할 때, 무용수가 몸을 숙여 제 옷깃에 인 보풀을 뜯어주었죠. 그 순간은 부드럽고 친밀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기, 벽에서 내렸어요, 그가 작게 말했어요. 뭘요? 제가 물었죠. 선생님 소설을 읽고 나서요, 벽에서 그림을 내렸어요, 더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서. 그랬어요? 제가 말했어요. 무방비 상태였죠. 왜요? 처음엔 저도 이유를 몰랐어요, 그가 대답했죠. 이사를 다닐 때마다, 도시를 옮겨다니면서도 가지고 다닌 그림이었거든요, 거의 이십 년 동안. 하지만 얼마 후엔,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나서 비로소 무언가 분명해졌다는 걸 이해했습니다. 그게 뭐였을까요? 저는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했네요. 무용수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나긋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팔을 뻗어, 두 손가락으로 제 뺨을 한 번 쓰다듬어준 다음 돌아서서 사라졌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처음에는 그의 동작이 혼란스럽다가 나중에는 불쾌했어요. 겉으로만 보면 다정한 행동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 행동에 어떤 업신여김이, 심지어 모욕적인 무언가가 담겨 있었던 것만 같았죠. 무용수의 미소가 점점 더 가식적으로 느껴졌고, 그가 수년간 그 동작을 준비해온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며, 나와 우연히 마주칠 때를 기다려온 거라고. 그럴 가치가 있었을까요?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했던 게 아닐까요? 저한테만 한 것도 아니고, 그날 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한 건데? 제가 좀더 은밀한 방법으로—이를테면 그의 일기나 편지를 몰래 읽고—그 이야기를 알게 된 거라면, 아마 그런 일은 그를 잘 모르는 저로서는 불가능했겠지만, 달랐겠죠. 혹은 그가 여전히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저에게만 그 이야기를 했다면 달랐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저녁식사 후에 그라파를 한 잔씩 나눠줄 때와 다름없이 미소를 띤 채 활기차게 이야기했는데 말이에요.

제가 들었던 소리에 대해 아무에게도, 심지어 수년 동안 제 상담의였던 릭트먼 박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후로 얼마 동안은 아이 소리가 들리지 않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비명소리는 제게 남았어요. 가끔 글을 쓰다보면 제 안에서 갑자기 그 소리가 들려서, 생각의 흐름을 놓쳐버리고 멍해질 때가 있었죠. 그 비명소리에 조롱 비슷한 것이 숨어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듣지 못한 어떤 배경음 같은 것. 혹은 아침에 일어날 때, 잠에서 빠져나와 깨어 있는 세계로 넘어오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어요. 그런 아침이면 뭔가가 목을 휘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잠을 깼죠. 뭔가 보이지 않는 무게가 집안의 물건들에, 찻잔, 문손잡이, 컵에 붙어 있는 것 같았어요. 처음엔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어떤 동작을 하든 아주 조금씩 더 힘이 들고, 그런 동작들을 마친 다음 책상에 가서 앉을 때쯤엔, 이미 제 안에 남아 있던 힘이 모두 슬그머니 빠져나가버린 상태였죠. 한 단어를 쓰고 다음 단어를 쓰기까지의 쉬는 시간이 길어지고, 힘들게 떠올린 생각을 글로 옮기려는 그 결정적 순간이 흔들리며, 무관심이라는 어두운 공간이 열리는 거예요. 아마 그게 제가 작가로 살면서 가장 자주 싸워야 했던 상황 같네요. 일종의 부질없는 관심, 혹은 무기력한 의지라고 할까요. 사실 그런 상태가 너무 꾸준했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쓰이지도 않았어요—침묵에 굴복하라고 나를 부추기는 힘 같은 것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그런 순간에 발목이 잡힐 때가 종종 생긴 거예요. 그런 순간이 점점 길어지고 폭도 넓어지면서, 그 너머를 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해져버릴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마침내 그 너머에 이르렀을 때, 구명보트처럼 어떤 단어가 찾아오고,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이어져도, 약간의 의심을 품은 채 그 단어들을 바라보기 시작한 거죠. 그런 불신은 제 작품에만 한정된 건 아니었어요. 스스로에 대한 깊은 불신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작품만 의심하는 일은 불가능하니까요.

작업은 계속 엉망이었어요. 이전보다 훨씬 느려진 것은 물론, 이미 써놓은 것들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고, 과거에 쓴 것들이 모두 잘못되었고 방향이 틀렸다는, 그 모두가 거대한 실수였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죠. 그동안은 나의 작업이 사물들의 숨은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 거예요. 제가 제 글의 소재가 된 사물들 뒤로 숨었던 거라고, 그것들을 이용해 평생 동안 다른 사람에게 저의 은밀한 결점이나 결핍을 숨겨왔고, 글을 씀으로써, 심지어 저 자신에게도 숨겨왔던 거라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결핍은 더 커졌고, 더이상 숨길 수 없을 지경까지 와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작업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어요. 어떤 결핍이냐고요? 글쎄, 영혼의 결핍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힘과 활력의 결핍, 연민의 결핍이요. 그리고 그런 결핍에서 이어진, 결과로서의 결핍. 글을 쓰는 한, 그런 환상들이 떠나지 않았어요. 직접 결과를 목격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겠죠. 저는 기자들에게 자주 받았던 질문, 책이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질문의 진짜 뜻은, 정말로 당신이 쓰는 무언가가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겠죠)에 이렇게 답하곤 했어요. 반격의 여지가 없는 질문을 기자에게 되던졌죠. 무슨 일이 생겨서 지금까지 읽은 모든 문학작품이 머릿속에서 지워진다면, 머리와 영혼에서 지워진다면, 본인이 어떤 사람이 될지 한번 생각해보라고요. 기자가 그런 황량한 상태를 그려보는 동안 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또다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피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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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47
임승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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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상실의 세계에 태어났고 살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 그럴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시집.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라 점점 더 외톨이 고아 같아지는 현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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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6
뮤리얼 루카이저 지음, 박선아 옮김 / 봄날의책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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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제에 말하지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만큼은 되는 시집이었다. 사념으로 빠지지 않는 철학과 깊이가 문장마다 단단하다. 지나치면 안 되는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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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1-20 0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쉼보르스카 좋아하는데!

AgalmA 2020-11-21 23:22   좋아요 2 | URL
이번 <악스트> 읽으니 에이드리언 리치도 우리가 좋아해야 할 거 같더군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