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시 말들의 흐름 3
정지돈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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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작가가 있는데, 정지돈도 그런 것 같다. 작법과 문체가 뚜렷한 작가이기 때문에 독자는 같은 이유로 싫어하고 좋아한다. 그의 소설은 인물의 정서나 인물 간의 갈등 중심인 통상적인 소설과 다른데, 낯선 소재(지명, 인명, 역사적 사건, 예술과 문화 가십 등)들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먼저 당부할 것은 독자가 느끼는 당혹과 거부감은 정지돈의 특성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인지적 특성에 있다. 인간은 정보 과잉의 피로와 해석의 부담을 싫어한다. 정지돈이 그런 것을 감안해 글을 썼다면 지금의 모습은 결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지돈이 정말 독자나 기성 문단과 싸우자는 걸까. 작가는 영감들을 어떻게 배치할지 골몰할 뿐이다. 언어를 전달 매개로 쓰고 있지만 다분히 영화적 사고 특성도 반영되고 있다. 정지돈은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이런 글을 썼다.

 

 

“고다르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거리를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나는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 내가 그 거리를 좋아한다거나, 혹은 빛 때문에, 혹은 인상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면 찍을 것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찍지 않고 그걸 잘라낼 것이다.

(중략)

필립 그랑드리외는 <음지>의 제작노트에 영화를 만들지 마라, 이미지에 의해 벌어지는 일들이 저절로 프린트되도록 하라, 라고 썼다고 동기는 말하며 영화 이미지란 사진 이미지와 어떻게 다르고 저절로 형성되는 이미지는 시간과 인물 사이에서 어떤 운동을 하는지, 그 운동은 시간과 인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운동이 시간과 인물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것은 사후에 벌어지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후에 벌어지는 시간이 역사라면 우리는 역사 없이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며 필립 그랑드리외의 영화는 시간과 인물에 전혀 다른 위치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ㅡ 정지돈 「건축이냐 혁명이냐」

 

 

 

정지돈은 소설에 요구되는 사건의 인과와 그에 따른 교훈에는 흥미가 없다. 몽타주처럼 인상적인 무엇들의 배치에 흥미가 있고, 시간과 인물을 교직(交織)하면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에 관심이 있다. 그의 글이 에세이 같은 문예 편력기 같은 것도 이 때문인데, 그래서 정지돈은 소설가보다 창작자라는 게 더 적확하다. 소설이 영화화되고 영화가 소설로 옮겨지는 게 다반사인데, 장르 구분은 작법의 차이일 뿐이다. 영화 찍을 돈도 없고 수많은 스텝을 통솔할 능력도 없는 히키코모리라도 블록버스터 영화는 어렵더라도 유튜브에 올린 단편 정도는 혼자 만들 수 있다(과연 히키코모리일까??). 노력의 문제일까, 재능의 문제일까, 운의 문제일까를 따지며 허송세월하지 말고 닥치고 만들어라! 시를 써도 시 같지 않고, 영화관에서 콜라를 보고 미친 듯이 잠을 잘 지라도 정지돈의 소설은 자기 탐닉에 빠진 창작은 아니다. 현실을 벗어난 이상주의자도 아니다. 그가 곧잘 소재로 쓰는 1960년대 뉴욕의 예술과 가십의 세계는 예술에 진지한 자리를 주지 않는다. 그에게 “진지함이란 시를 포함한 예술들이 살아남는 최고의 전략이다.”(「점심을 먹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시」, 65~66쪽) 무엇과 무엇을 잇는 불가분의 관계는 없고 무엇도 필연적이지 않지만, 이미 이루어졌기에 그 무엇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게 되는 ‘삶’은 그에게 끝없는 탐구 거리다. 태국의 영화감독 아피찻뽕 위라세타군의 말처럼 ‘꿈’을 가진 우리는 이미 최고의 영화를 소유하고 있다. 영화는 그런 꿈을 모방하려는 노력 중 하나다. 우리는 영화에서 수다스러운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가 품고 있는 진귀한 무엇을 원한다. 시에서 “가장 시적이지 않은 것은 감정이나 영원성의 결여가 아니라 수다스러운 것”(「좋아하는 것 또는 좋아하지 않는 것」, 21쪽)이듯, 우리는 안개 너머의 진짜를 원한다. 정지돈은 시와 관련해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두 권을 꼽았다. 나데쥬다 만델슈탐은 『회상』을 써서ㅡ“예술가에게 세계 탐지 감지는 석공의 손에 들린 망치와 마찬가지로 무기이자 도구다. 그리고 유일하게 실제적인 것은 작품 자체다(아크메이즘의 아침)”ㅡ 남편 오시프 만델슈탐의 작품이 조명되도록 만들었다. 시인 이장욱은 『혁명과 모더니즘』을 써서 20세기 초 러시아의 시인과 이론가들을 소개했는데, 정지돈은 이장욱의 평론을 통해 ‘아름다움과 분석적인 것은 반대 항이 아니고, 객관적인 것과 편파적인 것 역시 반대가 아니다’라고 느꼈다.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의 길항작용을 놓치지 않고 끌고 가는 좋은 글이었다고 평가하며, 말을 하기 위해서 배제와 적대가 가치처럼 쓰인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결여나 허물도 인정하는 게 좋은 글이라는 걸 배웠다고 말한다. 이 두 책을 고른 정지돈의 선택은 그가 자신의 글로 말하고자 하는 바와도 상통한다. 묵혀 있는 걸 찾아내고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 분주한 세계 탐지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의 길항작용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의 글은 다름 아닌 그의 세계관이다. 그것을 통해 그가 원하는 ‘순수한 긍정과 기쁨’을 얼마나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많은 환멸 속에서도 계속 쓰고 있는 건 성공적이란 소리가 아닐까. 마감과 밥벌이에 쫓겨서만 썼다면 몇 년이나 가겠나. 더 두고 보면 알겠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라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다. 또는 일부만 진실이다. 언어는 아무리 완벽해도 50퍼센트 부족하며 수사는 100퍼센트 오류다. 언어가 100퍼센트 진실일 때는 오로지 언어가 언어 그 자신으로 작동할 때뿐이다. 이것은 자아가 존재하지 않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진실에 대한 감각은 뭘까. 어떤 언어를 접했을 때 정확히 표현했다고 느끼는 순간은 어떻게 도래하는 것일까.”

 

ㅡ 「나는 ~한다, 로고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의 ~다.」, 43쪽)

 

 

 

정지돈은 예술의 진정성에 기대지 않고 신변잡기적이고 가십에 가까운 시를 쓴 프랭크 오하라를 옹호했지만, 위의 문장을 보면 그가 문학의 진정성 딜레마에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그는 낡은 시네필리아, 작가주의, 기성세대로서 사고하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문체는 모로 가는 반항적 글쓰기가 아니라 정형에서 벗어나려는 탐구의 글쓰기다. 그가 소설가든 창작자든 문제 될 건 없다. 마음껏 쓴 뒤에 돌아보면 그가 만든 길이 보일 것이다. 그 길은 한참 전에 시작되었다.

 

 

 

 

ps) 정지돈, 금정연, 이상우, 오한기 등의 작가들이 ‘후장 사실주의’를 기치로 소통하는 게 흥미롭지만, ‘그들만의 리그’로 보이던 기성 문단과 얼마나 다른 변별을 보여주는지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2000년대 한국 시단에서 이슈가 됐던 ‘미래파’가 자멸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싫든 좋든 그들도 문단을 이루는 한 흐름이고, 권력도 없는 우리에게 뭘 바라나! 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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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21-01-08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솔직히 말해서 정지돈의 글(소설)들이 왜 이렇게 잘 읽히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겠지요.

AgalmA 2021-01-10 21:48   좋아요 0 | URL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문장에 정보가 너무 많아요. 게다가 생소하기까지 하니 더 독해가 까다롭죠.
개념 가득한 철학책이 잘 안 읽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안 쓰는 뇌근육을 좀 움직여줘야 하는^^;

하나 2021-01-08 11: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지돈 새 소설 읽어볼까말까 고민하다가 아갈마님의 포스트에서 보니 궁금해지네요. 저는 소설가라는 자의식이 강한 사람도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렇게 경계에 있는 사람쪽의 이야기도 좋아해요. 창작을 하다 보니 그게 소설이 되기도 하고 시가 되기도 하고 영화가 되기도 하는 ^^ “마음껏 쓴 뒤에 돌아보면 그가 만든 길이 보일 것이다. 그 길은 한참 전에 시작되었다.”

AgalmA 2021-01-10 21:52   좋아요 1 | URL
저도 경계에 있는 글쓰기를 더 좋아해요. 문학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런 스타일 안 좋아해요ㅎㅎ;;;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닥친 삶을 사는 인간일 뿐이니까. 지나친 의미 부여는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쉬워요.
직진 스타일의 외골수형도 장점이 있겠지만, 그런 사고방식이 전방위로 유연할 수 있을까? 싶어요.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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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역사의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은 반복된다고 말했고, 마르크스는 역사가 한 번은 비극,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거대담론의 정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데,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이 아니어도 인생에서는 많은 것이 반복되고, 삶은 비극과 희극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순간의 지리멸렬한 반복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루키 단편집 『일인칭 단수』의 표제작이자 마지막 단편이었던 「일인칭 단수」를 읽은 뒤에도 그랬다. 하루키는 연례 행사처럼 평소 입지 않는 슈트를 입고 산책을 즐겼고 낯선 바에 가서 책을 읽었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다가 문득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에서도 말했듯이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면 거울에 비친 자신은 이곳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는 중에 모르는 여자가 다가와 삼 년 전에 여자의 친구에게 그가 몹쓸 짓을 했다고 비난을 쏟아냈다. 터무니없는 오해와 불쾌한 행동이었지만 그는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기분 좋고 평화로웠던 저녁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부끄러운 줄 알아요”라는 여자의 마지막 말을 나도 들은 적 있다. 내가 누군지 확인도 없이 대뜸 긴 장문의 비난을 쏟아낸 이가 있었다. 사연에 대해 물으니 답은 돌아오지 않아서 혼자 억울하기만 했다. 이 외에도 시시때때로 불쾌한 일을 당하는데 살면서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왜 하필 이렇게 께름칙한 뒷맛의 단편을 마지막에 배치했을까 한참 생각했다. 이 단편집에는 달콤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많지만, 우리가 사는 삶은 달콤하지만 날카롭게 찌르는 맛의 보드카 김렛 같은 맛이 더 많다는 걸 시사하려던 걸까. 모종의 악의는 「크림」에서도 등장하는데, 열여덟 살의 하루키는 친하지 않던 소녀의 초대장을 받고 찾아갔다가 불쾌한 경험을 했다. 그때 우연히 만난 노인이 선문답 같은 인생 지침을 선물했다.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 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처럼 설명도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으면서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을 겪을 때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것이 쉽지 않아서 우리는 다른 것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어떤 것인지 대충 알겠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더 깊이 생각하다 보면 다시 알 수 없어졌다. 그러기를 되풀이한다. 아마 그것은 구체적인 도형으로서의 원이 아니라, 사람의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원일 것이다. (중략) 이를테면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무언가에 깊은 연민을 느끼거나, 이 세상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거나, 신앙(혹은 신앙 비슷한 것)을 발견하거나 할 때,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게 그 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게 아닐까.” 하루키의 ‘크림’은 글쓰기 작업으로 되었고 우리는 공감하며 읽게 되었다. 세계의 일들과 하루키라는 작가와 독자로서의 우리가 만들어내는 서클은 정말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 같다.

 

하루키 단편집이 대체로 그렇지만 이 단편집도 편안했다. 책상에 각 잡고 앉아 읽는 게 아니라 소파에 파묻혀서 앨범을 넘겨보듯이 그렇게 읽었다. 내가 잊고 있었던 추억과 감각들, 그리고 나를 간간이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잊고 지낼 사람들도 떠올렸다. 자기만의 짝사랑 속에서 살며 자비출판으로 단카短歌 가집을 출간한 「돌베개에」의 그녀도 꼭 내가 아는 사람 같았다. 좋아하는 재즈 뮤지션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를 읽을 때 나는 찰리 파커의 음악을 틀었다. 비틀스 열풍이던 시절엔 비틀스 음악이 벽지壁紙처럼 둘러싸이게 놔두고 앨범으로 듣게 되는 건 한참 나중 일이었던 일화나 기억 속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은 소녀, 첫 여자 친구와의 이별과 나중에 황망히 듣게 되는 죽음, 누군가의 기묘한 병 등등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에 나오는 이야기도 내게 오버랩 되는 게 많았다. 사람 삶의 패턴과 확률은 비슷해 이런 우연의 일치가 놀라울 것도 없지만 하루키의 단편은 이해가 바로 되어서 거리 두기가 어렵다. 비틀스 음악에 대해서라면 故 신해철의 표현을 가장 인상적으로 생각한다. 라디오를 틀면 언제나 만나게 되는 비틀스 음악을 구닥다리 선곡으로만 여길 게 아니라 누군가에겐 처음 듣는 명곡일 수 있다는 걸 생각하자고. 연예인 중 내가 유일하게 덕질 했던 신해철처럼 어느 때의 우리는 누군가의 팬이다. 하루키가 좋아하는 진구 구장에서 야구를 보다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듯이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하루키가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팬으로 남기는 글이다. 자비출판으로 정말 이런 시집을 냈던 걸까. 가상의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음반이 있었다는 단편을 읽고 난 뒤라서 이걸 믿어야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어쨌거나 약체 팀이었던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구단 창설 이십구 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을 달성하고 일본시리즈도 제패한 1978년은 하루키가 스물아홉 살에 처음으로 소설을 완성하고 소설가가 된 해이기도 했다. 이런 우연들이 겹치면 깊은 인연으로 발전한다. 야쿠르트 스왈로스는 여전히 건재하고 하루키의 소설 쓰기도 그의 인기도 건재하다. 「사육제」는 하루키 소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묘한 매력을 지닌 인물을 만나 그 가면과 민낯에 대해 고찰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 단편에서는 인물보다 음악 이야기에 더 교감했는데, “우리는 피아노곡을 좋아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물론 오페라도 듣고, 교향곡도 듣고, 실내악도 듣는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피아노 독주곡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특히 애호하는 작품이, 신기할 만큼 정확히 겹쳤다. 우리 둘 다 쇼팽의 음악에는 그다지 항구적인 열의를 품지 못했다. 적어도 아침에 눈뜨자마자 듣고 싶어지는 음악은 아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소나타는 아름답고 차밍하지만, 솔직히 말해 너무 많이 들어서 질렸다. 바흐의 평균율은 근사한 작품이지만 집중해서 듣기에는 너무 길다. 컨디션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는 가끔 너무 빤한 대목이 거슬린다. 해석도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브람스의 피아노곡은 가끔 들으면 멋지지만, 매일 듣다가는 피곤해진다. 가끔은 따분하기도 하다. 드뷔시와 라벨의 피아노곡은 감상하는 시간과 상황을 잘못 고르면 영 와닿지 않는다. 우리가 이의를 제기할 바 없이 훌륭한, 이른바 궁극의 피아노곡으로 선택한 것은 슈베르트의 피아노소나타 몇 곡과 슈만의 피아노 작품이었다. 그중에서도 한 곡만 남긴다면 뭐가 좋을까?” 대목에서 내 마음도 맞장구 물개 손뼉을 쳤다. 슈만의 '사육제'를 들으며 이 단편을 읽으니 더욱 좋았다. 못생긴 여자와 훌륭한 취향의 간극처럼 그녀의 드러난 삶과 드러내지 않았던 삶의 위태한 균형은 슈만의 ‘종잡을 수 없는 몽상적인’ 색채와 잘 어울렸다. 하루키 소설에서 인간 외 생물이 등장하지 않으면 섭섭하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은 일본 민간 설화의 현대판 구성이다. 온천마을에 들러 어렵게 숙박하게 된 온천 료칸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원숭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 원숭이는 연모하는 인간 여자들의 이름을 훔치고 다녔다고 고백한다. 흔히 잃어버린 것을 한참 못 찾다가 다시 발견하게 되는 건 정령들의 장난이라는 괴담도 있듯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까지 잊어버리는 건망증을 하루키는 이렇게 소설로 풀어놓았다.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에서도 사요코의 오빠가 단기기억 상실증이라는 설정이 있었는데, 이런 소재를 자주 쓰는 건 하루키가 나이가 들어가니 기억 퇴화에 관심이 많아져서 일까. 이 단편집이 60~70년 대 청춘에 대한 회고성 단편이 많은 것도 그렇고 하루키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정리하고픈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도 덩달아 정리를 하게 되고.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이 소설을 읽는 중에 맥주도 많이 마셨고 스파게티도 해먹었다.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 자동적으로 하게 되는 습관인지 우연인지 나도 이젠 모르겠다. 읽는 내내 달콤 씁쓸했고, 한참 지난 뒤 하루키 수제 크림이 토핑 된 도넛과 커피처럼 이 책을 또 읽으리란 건 안다. 이 반복은 언제나 독자로서의 기쁨이다. 하루키 소설을 접할 때 늘 드는 마음인데, 엄청난 작품이 아니어도 된다. 하루키 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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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2-30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엄청난 작품이 아니어도 된다. 하루키면 된다. ^^ 동감입니당! 생각해보니까 저도 이 소설집 읽고 파스타랑 맥주 자주 먹었네여... 저도 신해철 라디오부터 라디오 듣기 시작해서 좋아합니다. (거의 끝물이었지만) 오늘 차를 오래 탈 일이 있어서 민물장어의 꿈 들었는데 되게 좋았어요. 사육제 물개 손뼉넘 귀여워... 아갈마님 리뷰에서 은근히 귀여움이 묻어나와... (죄송)

AgalmA 2020-12-30 21:54   좋아요 1 | URL
하루키 책을 펼치면 늘 정겨워요☺
신해철도 늘 그렇게 좋았죠. 나중엔 멀리서 잘 살겠지 하며 공연도 잘 안 가고 그랬는데 결국 그렇게 허망하게 보낼 줄이야... 있을 때 잘해야!
글의 귀여움 뿜뿜은 하나 님 글이 더 하시기 때문에 저는 순위권 밖에서 흐뭇해 하겠어요🤭🤭🤭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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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작품에서 내가 봐온 '아버지' 캐릭터들의 이미지는, 성실하지만 그 시스템밖에 모르는 NHK 수금원이나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남성들이었다. 하루키의 아버지뿐 아니라 주위를 돌아봐도 전쟁 세대들은 원하는 대로 살기는커녕 생계가 아니라 생사를 고민해야 했고 그 고됨과 상처들을 삭이느라 과묵해지고 가족과도 잘 소통하지 못했던 거 같다. 하루키는 아버지와의 세대차로 연을 끊다시피 하며, 혈연의 관계 개선보다 창작과 자신의 가정에 더 노력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하루키 작품에서 부모의 자리는 매우 적다. 그러나 하루키도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내내 고민했을 것이다. 『1Q84』에서 덴고가 요양원에 있던 아버지를 향해 독백하던 장면도 소설을 통한 일종의 살풀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친아들이 아닌데도 자신을 키워줬지만 그 양육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덴고는 아버지를 마냥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다. 그는 적어도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이 실마리가 풀려야 자신의 삶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고양이를 버리다』는 하루키와 아버지 두 사람만 공유하는 추억이 두 가지 나온다. 가장 애틋한 기억 하나와 잊을 수 없는 강력한 폭력에 대한 얘기 하나다.

아버지는 고양이 식구가 늘자 암고양이 한 마리를 버리기로 하고 하루키와 함께 그 고양이를 버리고 집에 돌아오는데, 암고양이는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다. 낯선 길에서 자전거보다 빠르게 고양이가 돌아온 것도 놀라웠지만, 이 사건은 아버지가 어렸을 때 절에 동자승으로 보내졌다가 집으로 돌아온 기억을 환기시켰다. 버려지는 상처를 알면서도 그는 똑같은 행동을 했다. 고양이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고양이가 돌아왔기 때문에 삶은 같은 듯 달라진다. 아니 전혀 다른 궤도이다. 아버지가 절에서 집으로 돌아왔기에 살게 된 삶처럼. 스님이 되었다면 겪지 않았을 전쟁의 소용돌이,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강제 동원되어 타국까지 가야 했던 고된 여정과 각종 전쟁 트라우마, 전쟁에서 연인이 사망해 하루키의 아버지와 결혼하게 된 어머니, 하루키의 탄생 등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루키와 아버지는 많은 부분에서 달랐지만, 자신을 위무하고 표현하는 데 글을 쓰는 건 같았다. 아버지는 하이쿠로, 하루키는 소설로. 아버지가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듯 전쟁에 대한 참회도 그와 유사했다. 아침마다 조그만 불상 앞에서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행위는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키가 작가로 쓴 소설이 결코 자기 충족만의 결과물이 아니듯. 전쟁에 대해서 일절 함구하던 아버지가 하루키에게 들려준 유일한 이야기였던 중국인 처형은 ‘역사’로 전달된다.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버지는 전쟁터에서의 체험에 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당신 자신이 직접 손을 댄 일이든 또는 그저 목격한 일이든, 아마 기억도 하고 싶지 않고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만큼은, 가령 서로의 마음에 상처로 남는다 해도, 피를 나눈 아들인 내게 말해서 전하고 어떤 형태로 남겨야만 한다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이는 나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야기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재구성되었다. 하루키는 아버지가 난징대학살에 직접 참여한 군인이 아니었을지 내내 의구심을 가졌다. 진실을 감당하기 두려웠던 걸까, 아버지의 과거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하루키는 아버지가 2008년 사망하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말하고 싶은데도 어떤 것은 말이 되어 나오기까지 긴긴 시간이 걸린다. 나도 당신도.

마지막에 하루키는 마당에 있던 소나무 위로 올라간 어린 고양이의 실종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과가 원인을 꿀꺽 삼켜 무력화’하는 그런 일이었다. 하루키는 어린 고양이가 소나무 위로 올라가는 걸 무심히 봤고 고양이가 구조 요청의 울음을 울 때 아버지의 도움을 청하기도 했으나 고양이를 찾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린 고양이의 호기심 탓을 해야 할까. 어린 고양이를 막지 못한 어린 하루키 탓을 해야 할까. 어린 고양이를 더 열심히 찾지 못한 하루키 부자를 탓해야 할까. 삶은 원인과 결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달라질 수 없었다고 자조하며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까. 하루키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하루키 소설을 몇 번 접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소설에 ‘실종’ 이 잦다는 걸 안다. 그게 단순히 재밌는 작품을 위한 작법의 기능이 아니라 작가의 풀 수 없는 갈증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자주 느꼈다. 소나무 한 그루로 인해 영문을 모르게 된 고양이, 전쟁 때문에 삶과 정신이 깊게 바뀌어 버린 평범했던 한 시민, 이 우주의 우연 속에서 그들은 다르지 않다. 교환 가능한 것이라 해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라 해도 한 빗방울의 궤적은 유일무이하다. 우리가 그런 것을 살피지 않으면서 나라는 존재의 자리는 가능할까. 하루키가 아버지를 생각하며 풀어놓은 이 글은 아주 개인적이면서 근본적인 거대한 이야기, 버려지고 상처받았으며 무거운 체험을 충분히 얘기하지도 치유하지도 못한 채 살다가 죽어가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내 부모의 삶과 이야기를 이해하고 듣고 싶었던 입장이어서 하루키 부자 이야기를 매우 공감하며 읽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한 방울을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을까. 당신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위) 책에 수록된 가오 옌의 일러스트

(아래) 이 책의 내용이 처음 실린 <문예춘추> 2019. 6월 호에서의 하루키 부자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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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2-18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읽으면서 ˝버려지는 경험˝에 대한 생각들이 하루키 소설의 중요한 특징이 됐구나 생각했었어요. 태엽감는 새와도 연관이 있다고 말씀해주시니까 그 책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요즘 하루키 풍년이라 좋았어요. 이 책은 약간 하루키의 다른 글과는 무게나 질감이 다른 것 같았고요. 저도 아갈마님처럼 내 이야기는, 내 부모님의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던 책입니다.

AgalmA 2020-12-19 12:04   좋아요 3 | URL
이번에 나온 <일인칭 단수>도 사라지는 사람들, 관계들 잔뜩 출현이더군요ㅎㅎ;
살아갈수록 사실 그렇죠. 그렇게나 애틋한 관계, 감정이었는데도 어느 순간엔 소식도 모르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 부모 자식 간 관계는 천륜이라는 게 수긍돼요. 지지고 볶아도 반드시 돌아보게 되는...

하루키 글은 겉은 모던해도 솔직한 낭만이 있어서 읽을 때 편하고 정감이 가요. 그게 찐매력.

scott 2020-12-18 2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에 하루키 새 단편집 자신이 그동안 즐겨 듣던 음악들에 붙이는 주석같은 ‘side note‘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키 글은 읽고나면 뭔가 취미를 공유 하고 싶고 즐기고 싶어서 이것저것 찾아보게 만드는것 같아 매번 비슷하다고 해도 다음작품이 기다려 지네요.
저도 이에세이 읽으면서 ‘태엽 감는새~‘
떠올렸는데 요즘 이작품 다시 읽으면서 하루키에 모든 작품세계가 이책속에 들어 있는것 같더군요
아버지에 어린시절-청춘-장년 그리고 노년 시절을 아들이 이렇게 한권에 연대기 처럼 남겨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향한 묘비명 같다고 느껴졌어요.

AgalmA 2020-12-18 23:31   좋아요 2 | URL
네, 저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하루키 음악 단편 같은ㅎ?

그쵸. 나도 그런 거 있는데! 하면서 미주알 고주알 수다 떨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이 에세이 읽고 하루키 작품 연보를 다시 살펴 봤어요. <태엽감는 새 연대기>가 상당히 예전에 쓴 소설이었다는 게 좀 놀라웠어요. 1994년 발표인데...아버지 사망은 2008년이니. 그래서 하루키 작품 속 아버지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 많이 했는데, <1Q84>(2009) 덴고 아버지와 <기사단장 죽이기>(2017)에서의 노인 화가 설정이 하루키가 아버지에게 못다한 말을 많이 담았던 게 아닌가 싶더군요.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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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맛집을 가면 메뉴가 단출하다. 자신 있는 시그니처 메뉴 몇 가지로 승부를 건다. 한국 사람들이 된장찌개, 김치찌개, 김치를 평생 즐겨 먹듯이 작가들도 평생 집중하는 주제나 소재들이 있다. 김치만 해도 응용할 게 많다. 볶음김치, 김치찌개, 김치전, 두부김치, 김치만두 등등 변형해 다양한 맛을 음미한다. 하루키처럼 재료가 변함없는 작가도 드물다. 하루키 (미식) 마니아들은 같은 재료로 만든 요리를 질려 하기는커녕 코드를 발견한 마냥 애호한다. 『여자 없는 남자들』 단편집은 그의 단골 '그녀와 그'들이 등장한다. 첫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부터 아내의 외도와 죽음이라 하루키가 이제 ‘아내’ 소재와 이별하기 위해 마지막 파티를 벌이는 걸까 했다. 아내의 외도로 인한 방황과 깊은 상처는 「기도」에서도 그로테스크하게 펼쳐진다. 이 방황은 장편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이혼을 요구받은 화가의 상황과도 닮았다. 「예스터데이」는 친구와 그의 아름다운 여자 친구에 끼여 난처했던 주인공의 '응답하라~' 시절 후일담으로, 마찬가지 비틀스 노래를 제목을 썼던 『노르웨이의 숲』에서 기즈키와 나오코 사이에 있던 와타나베 토오루의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독특한 캐릭터 기타루가 기즈키처럼 자살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끝이 암울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독립기관」은 하루키가 소설에서 자주 설정하는 캐릭터ㅡ비밀스럽고 고급스러운 라이프 스타일을 지녔고 매력적인 바람둥이 향취를 풀풀 풍기지만 한 여자만을 사랑한 순애보이기도 해서 비극적으로 죽는ㅡ 개츠비 유형의 안타까운 죽음을 그렸다.

 

 

*

내적인 굴곡이나 고뇌가 너무도 부족한 탓에, 그 몫만큼 놀랍도록 기교적인 인생을 걷게 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 수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우연한 기회에 눈에 띄곤 한다. 도카이 의사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 같은 사람들은 굴곡진 주위 세계에 (말하자면) 올곧은 자신을 끼워 맞춰 살아가기 위해 많든 적든 저마다 조정 작업을 요구받게 되는데, 대부분 본인은 자신이 얼마나 번거로운 기교를 부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숨기는 것도 없고 꾸미는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디선가 꽂혀들어온 특별한 햇빛을 받아 그들이 자기 삶의 인공성을, 혹은 비자연성을 퍼뜩 깨달았을 때, 사태는 때로는 비통하고 또한 때로는 희극적인 국면을 맞이한다. 물론 죽을 때까지 그런 빛을 목도하지 않는, 혹은 목도하더라도 딱히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는 축복받은(이라고밖에 말할 도리가 없다) 사람들도 허다하게 존재하지만.

 

- 「독립기관」

 

 

「셰에라자드」는 하루키가 즐겨 쓰는 ‘감금’ 상태의 판타지가 펼쳐진다. 『1Q84』에서 아오마메가 아파트에 숨어 도움을 받던 상황을 변조해 더 펼쳐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셰에라자드」의 그는 모종의 이유로 도피해 숨어 있고, 도우미로 찾아오는 하바라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이 단편에 이 책의 주제를 알려주는 문장이 있다.

 

*

그는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그 결과 셰에라자드뿐 아니라 다른 모든 여자에게서 멀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도 크다. 그렇게 되면 이제 두 번 다시 그녀들의 젖은 몸속에 들어갈 수 없다. 그 몸의 미묘한 떨림을 느낄 수도 없다. 하지만 하바라에게 무엇보다 힘겨운 것은, 성행위 그 자체보다 오히려 그녀들과 친밀한 시간을 공유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여자를 잃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현실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무효로 만들어주는 특수한 시간, 그것이 여자들이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셰에라자드는 그에게 그것을 넉넉히, 그야말로 무한정 내주었다. 그 사실이, 그리고 그것을 언젠가는 반드시 잃게 되리라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그를 슬프게 했다.

- 「셰에라자드」

 

 

하루키가 소설 속에서 내내 그렸고, 가질 수도 영원할 수도 없는 상실의 매개는 ‘여성’이 대표적이다. 하루키 소설 속 그녀들은 대부분 당차고 남성 캐릭터보다 독립적이다. 그녀들이 외로움을 성욕으로 풀려고 하는 방법은 하루키의 남성적 접근의 한계 같아 좀 아쉽지만. 「사랑하는 잠자」는 카프카 『변신』을 오마주 했다. 그가 즐겨 쓰는 리틀 피플(난쟁이, 척추장애인) 형 여성 캐릭터가 계엄령 상황에서 열쇠 수리공으로 잠자의 집을 방문한다. 바깥 상황을 전혀 모르는 순진한 잠자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발기하고 만다. 아아, 늘 이렇다니까. 「여자 없는 남자」는 하루키의 작품을 비방할 때 주로 등장하는 ‘중2병’ 스타일의 나약하고 낭만적 성향의 남성 캐릭터 재등장이다. 100% 완벽한 소녀를 만나고 그 기억을 간직하고자 하는 남자들 말이다. 하지만 이 특징은 되돌릴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이 잃고 마는 우리의 순수와 감수성에 대한 회한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

내가 여기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사실이 아닌 본질을 쓰고 싶은 것이리라. 하지만 사실이 아닌 본질을 쓰는 일이란 달의 뒷면에서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하는 일과 다름없다. 캄캄하고 표지로 삼을 만한 것도 없다. 게다가 너무 넓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무튼 엠은 내가 열네 살 때 사랑에 빠졌어야 하는 여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은 한참 나중 일이고, 그때 그녀는 (유감스럽게도) 이미 열네 살이 아니었다. 우리는 만남의 시기를 착각했던 것이다. 만나기로 한 날짜를 착각하듯이. 시간과 장소는 맞다. 하지만 날짜가 틀렸다.

그러나 엠 안에도 아직 열네 살의 소녀가 살고 있었다. 그 소녀는 하나의 총체로서 ㅡ 결코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ㅡ 그녀 안에 존재했다.

 

- 「여자 없는 남자」

 

 

 

또, 또, 또냐, 구시렁대며 읽지만, 하루키가 읽어내는 인간의 외로움과 딜레마는 언제나 독자 내면을 거울처럼 비추니 우리는 그의 최면술에 빠져들고 만다. 그래서 나도 이 소설집을 읽었다. 그리고 6년 만에 나오는 신간 소설집 『일인칭 단수』도 바로 주문;; 목차를 보니『일인칭 단수』 구성도 『여자 없는 남자들』 과 비슷해 보였다. 소설을 읽는다기보다 이젠 그와 우리가 어떤 식으로 변화해가는지 함께 경험해가는 기분.

 

 

*

“뭐라고 해야 좋을까. 일단 진지하게 연기를 시작하면 그만둘 계기를 찾기가 어려워. 아무리 정신적으로 힘들다 해도, 그 연기의 의미가 마땅한 형태를 이루기 전에는 흐름을 멈출 수가 없거든. 음악이 어떤 특정한 화음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결말을 맞을 수 없는 것처럼…… 

- 「드라이브 마이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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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4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7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가 인터뷰나 에세이보다 더 리얼한 ‘작가는 무엇인가‘


문학의 힘이란, 저는 늘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걸 만들어내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에 달려 있다고요. 그랬기 때문에,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서 특별한 의식儀式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거든요.

유니언광장까지, 서로의 길이 갈라지기 전까지 몇 블록을 함께 걸었어요. 작별인사를 할 때, 무용수가 몸을 숙여 제 옷깃에 인 보풀을 뜯어주었죠. 그 순간은 부드럽고 친밀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기, 벽에서 내렸어요, 그가 작게 말했어요. 뭘요? 제가 물었죠. 선생님 소설을 읽고 나서요, 벽에서 그림을 내렸어요, 더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서. 그랬어요? 제가 말했어요. 무방비 상태였죠. 왜요? 처음엔 저도 이유를 몰랐어요, 그가 대답했죠. 이사를 다닐 때마다, 도시를 옮겨다니면서도 가지고 다닌 그림이었거든요, 거의 이십 년 동안. 하지만 얼마 후엔,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나서 비로소 무언가 분명해졌다는 걸 이해했습니다. 그게 뭐였을까요? 저는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했네요. 무용수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나긋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팔을 뻗어, 두 손가락으로 제 뺨을 한 번 쓰다듬어준 다음 돌아서서 사라졌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처음에는 그의 동작이 혼란스럽다가 나중에는 불쾌했어요. 겉으로만 보면 다정한 행동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 행동에 어떤 업신여김이, 심지어 모욕적인 무언가가 담겨 있었던 것만 같았죠. 무용수의 미소가 점점 더 가식적으로 느껴졌고, 그가 수년간 그 동작을 준비해온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며, 나와 우연히 마주칠 때를 기다려온 거라고. 그럴 가치가 있었을까요?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했던 게 아닐까요? 저한테만 한 것도 아니고, 그날 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한 건데? 제가 좀더 은밀한 방법으로—이를테면 그의 일기나 편지를 몰래 읽고—그 이야기를 알게 된 거라면, 아마 그런 일은 그를 잘 모르는 저로서는 불가능했겠지만, 달랐겠죠. 혹은 그가 여전히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저에게만 그 이야기를 했다면 달랐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저녁식사 후에 그라파를 한 잔씩 나눠줄 때와 다름없이 미소를 띤 채 활기차게 이야기했는데 말이에요.

제가 들었던 소리에 대해 아무에게도, 심지어 수년 동안 제 상담의였던 릭트먼 박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후로 얼마 동안은 아이 소리가 들리지 않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비명소리는 제게 남았어요. 가끔 글을 쓰다보면 제 안에서 갑자기 그 소리가 들려서, 생각의 흐름을 놓쳐버리고 멍해질 때가 있었죠. 그 비명소리에 조롱 비슷한 것이 숨어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듣지 못한 어떤 배경음 같은 것. 혹은 아침에 일어날 때, 잠에서 빠져나와 깨어 있는 세계로 넘어오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어요. 그런 아침이면 뭔가가 목을 휘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잠을 깼죠. 뭔가 보이지 않는 무게가 집안의 물건들에, 찻잔, 문손잡이, 컵에 붙어 있는 것 같았어요. 처음엔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어떤 동작을 하든 아주 조금씩 더 힘이 들고, 그런 동작들을 마친 다음 책상에 가서 앉을 때쯤엔, 이미 제 안에 남아 있던 힘이 모두 슬그머니 빠져나가버린 상태였죠. 한 단어를 쓰고 다음 단어를 쓰기까지의 쉬는 시간이 길어지고, 힘들게 떠올린 생각을 글로 옮기려는 그 결정적 순간이 흔들리며, 무관심이라는 어두운 공간이 열리는 거예요. 아마 그게 제가 작가로 살면서 가장 자주 싸워야 했던 상황 같네요. 일종의 부질없는 관심, 혹은 무기력한 의지라고 할까요. 사실 그런 상태가 너무 꾸준했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쓰이지도 않았어요—침묵에 굴복하라고 나를 부추기는 힘 같은 것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그런 순간에 발목이 잡힐 때가 종종 생긴 거예요. 그런 순간이 점점 길어지고 폭도 넓어지면서, 그 너머를 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해져버릴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마침내 그 너머에 이르렀을 때, 구명보트처럼 어떤 단어가 찾아오고,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이어져도, 약간의 의심을 품은 채 그 단어들을 바라보기 시작한 거죠. 그런 불신은 제 작품에만 한정된 건 아니었어요. 스스로에 대한 깊은 불신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작품만 의심하는 일은 불가능하니까요.

작업은 계속 엉망이었어요. 이전보다 훨씬 느려진 것은 물론, 이미 써놓은 것들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고, 과거에 쓴 것들이 모두 잘못되었고 방향이 틀렸다는, 그 모두가 거대한 실수였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죠. 그동안은 나의 작업이 사물들의 숨은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 거예요. 제가 제 글의 소재가 된 사물들 뒤로 숨었던 거라고, 그것들을 이용해 평생 동안 다른 사람에게 저의 은밀한 결점이나 결핍을 숨겨왔고, 글을 씀으로써, 심지어 저 자신에게도 숨겨왔던 거라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결핍은 더 커졌고, 더이상 숨길 수 없을 지경까지 와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작업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어요. 어떤 결핍이냐고요? 글쎄, 영혼의 결핍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힘과 활력의 결핍, 연민의 결핍이요. 그리고 그런 결핍에서 이어진, 결과로서의 결핍. 글을 쓰는 한, 그런 환상들이 떠나지 않았어요. 직접 결과를 목격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겠죠. 저는 기자들에게 자주 받았던 질문, 책이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질문의 진짜 뜻은, 정말로 당신이 쓰는 무언가가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겠죠)에 이렇게 답하곤 했어요. 반격의 여지가 없는 질문을 기자에게 되던졌죠. 무슨 일이 생겨서 지금까지 읽은 모든 문학작품이 머릿속에서 지워진다면, 머리와 영혼에서 지워진다면, 본인이 어떤 사람이 될지 한번 생각해보라고요. 기자가 그런 황량한 상태를 그려보는 동안 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또다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피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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