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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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는 데뷔 때부터 반서사적 글쓰기를 추구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전통적 서술 방식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실제 인물의 삶이 문학적 허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불가피하다. 두 주인공 어머니와 아이를 위해서도. 물론 이 작업은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 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자살과 아이의 탄생은 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절박한 욕망과 말문이 완전히 막히는 것’이 만나는 문학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 소망 없는 불행  ▒

 

*

글을 쓸 때는 난 반드시 옛날에 대해, 적어도 쓰고 있는 시간 동안은 지나가버린 일에 대해 쓴다. 늘 그렇듯이 난 문학적으로 대상에 몰두하며 나 자신을 회상하고, 문장을 만드는 기계로 피상화시키고 객관화시킨다. 나는 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종교적이니 심리학적이니 사회학적인 꿈 해석 운운하며 이 흥미로운 자살 사건을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도 있을 어떤 낯선 인터뷰 기자보다는, 내가 그녀에 대해서, 또 그녀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내 개인적인 관심 때문이다. 가령 무언가 할 일이 있으면 나는 기운을 얻는다. 마지막 이유는, 방식은 좀 다르겠지만 마치 인터뷰 기자처럼 이 자살을 하나의 사건으로 재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모든 이유들은 아주 임의적인 것들이고, 역시 임의적일 뿐인 다른 이유들로 대치될 수도 있다. 어쨌든 완전히 말문이 막혀버렸던 짧은 순간들과 그런 순간들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고 옛날부터 내게는 이런 욕망들이 글을 쓰게 하는 동기였다.

 

 

**

이렇게 한 인물을 추상화하고 형식화하는 데 위험한 점은 물론 그 추상화 및 형식화 작업이 독립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작 이야기되고 있는 그 인물이 잊히고 꿈속의 이미지들처럼 구절들과 문장들이 연쇄 작용을 일으켜 한 개인의 삶이 동기 이상의 어떤 것도 되지 못하는 문학적 의식(儀式)이 된다.

이 두 가지 위험들은 ㅡ 즉 일어난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위험과 한 인물이 시적 문장들 속으로 고통 없이 용해되어 버리는 위험 ㅡ 나의 글 쓰는 작업을 더디게 한다. 왜냐하면 문장을 쓸 때마다 나는 평형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건 물론 어떤 문학적 창작에나 다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특히 그러한데 그 이유는 사실들이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무언가 허구로 생각해 낼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사실들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그다음에 그 사실들을 서술하는 형식들을 모색했다. 그런데 서술 형식들을 찾는 동안 어느 틈에 내가 사실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사실이 아니라 이미 써오던 서술 형식들, 즉 인간의 사회적 경험 속에 들어 있는 언어군을 출발점으로 삼는 새로운 접근 방법을 택했다. 그러고서 나는 이 서술 형식들에 들어맞는 사건들을 나의 어머니의 삶에서 추려냈다. 왜냐하면 이미 통용되는 대중의 언어를 가지고서 그녀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사소한 사건들 중에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몇 사실을 골라내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문장마다 여자의 전기에 흔히 쓰이는 보편화된 형식들과 나의 어머니가 살았던 삶의 특수성을 비교했다. 결국 그 둘을 비교했을 때 일치되는 것과 상치되는 것으로부터 실질적으로 글 쓰는 작업이 따라나오게 된다.

 

 

태어난 곳과 똑같은 곳에서 자살한 어머니. 가난한 시골 살림에서 여자아이로 태어난 어머니에게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능성은 없었다. …(중략)… 그저 더위와 추위, 축축함과 건조함, 편안함과 불편함 사이의 변화만 있었을 뿐이었다.”

 

 

***

빨랫줄 위에 매달리는 물방울, 어둠 속에서 길을 가는 사람 앞으로 펄쩍 뛰어드는 두꺼비들, 모기들, 곤충들, 낮에도 날아다니는 나방들, 통나무 헛간의 널빤지들 속에 있는 벌레들과 지네들, 누구나 이런 것들에 길들여져야 했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소망 없이 사는 게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며, 소망 없이 사는 걸 모두가 불행하게 생각했다. 다른 삶의 형태와 비교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욕망도 없었을까?

문제는 어머니가 갑자기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배우고 싶어 했다. 그건 그녀가 아이였을 때 무언가를 배우면서 자기 자신에 관해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건 사람들이 ‘난 나 자신을 느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건 최초로 가진 소망이었고, 그 소망을 끊임없이 말하다 보니 급기야는 고정 관념이 되어버렸다. 어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할아버지께 무엇인가 배우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할아버지껜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손짓 몇 번으로 거절당했고 그 이후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가출, 돈을 벌며 잠깐 누린 청춘의 맛, 전쟁, 유부남과의 첫사랑, 임신, 아이 때문에 한 다른 남자와의 결혼, 남편의 외도, 주정뱅이가 된 남편, 손찌검, 임신, 낙태, 누구에게도 흠 잡히지 않고 싶은 공허한 일상, 국경 탈출, 임신, 고향에서 똑같은 반복 …… “그녀는 성(性)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일상의 사소함 속에 자신을 묻어버렸다.”


 

 

****

이 모든 것들은 다른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타입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전쟁 전의 타입에서 전쟁 후의 타입으로, 시골 처녀에서 도시 여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적절한 말로 표현하자면 크고, 날씬하고, 검은 머리를 한 도시 여자로 말이다.

그런 타입으로 묘사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의 내력에서 해방된 듯 느꼈다. 왜냐하면 이제 에로틱하게 바라보는 어떤 사람의 낯선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코 시민적으로 평온해질 가능성이 없었던 정서 생활은 겉으로는 여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모임의 시민적 체계를 서툴게 흉내 냄으로써 안정되어 갔다. 그 체계 속에선 ‘이러저러한 사람은 내 타입이지만 난 그의 타입이 아니야’, 혹은 ‘난 그의 타입이지만 그는 나의 타입이 아니야’, 혹은 ‘우린 서로 잘 맞아’라거나 ‘우린 서로 쳐다보는 것도 견딜 수 없어’라는 말들이나 상투적인 말들이 구속력 있는 규칙들로 간주되었기에 어떤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약간 주의를 기울이는 반응조차 모두 이 규칙들에서 벗어난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사실 그 사람은 내 타입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이런저런 유형(類型)에 따라 살면서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객관적 느낌을 가졌으며 자신의 출신이라든지, 비듬이 떨어져 괴롭다든지, 발에 땀이 난다든지 하는 개인적 특성이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등 매일매일 반복되는 문제들 따위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하나의 유형에 들어감으로써 개인은 부끄럽게 여겨졌던 외로움과 고독감으로부터 벗어났고 스스로를 망각했으며 비록 잠깐이긴 하지만 때로는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되었다.

(중략)

그녀는 언제나 계산을 틀리게 했다. 집에서는 소시민적인 해결책조차도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단칸방에다 날마다 하는 빵 걱정,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는 제스처와 억지 표정, 그리고 의사소통이라곤 김빠진 성행위밖에 하지 않는 동거인과의 생활 여건들이 시민적이랄 수 있기 이전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삶에서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밖에서는 승리자 타입, 안에서는 약한 반쪽, 영원한 패배자였다. 그건 삶이 아니었다!

(중략)

그녀는 존재했고 성장해 갔지만 아무것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

사사로운 걱정, 무언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갈증, 무언가 하고 싶은 욕망, 단 한 번뿐이라는 느낌, 먼 곳에 대한 동경, 성적 충동 등등 머릿속의 생각들이 어느 것 할 것 없이 역할이 뒤바뀐 듯한 전도된 세계와 함께 이런 의식 속으로 녹아들어가 버렸다. 결국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이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유 의지에 따라 사는 것, 가령 평일에 산보를 간다든지, 두 번째로 사랑에 빠진다든지, 여자가 혼자 술집에서 과일주를 마신다든지 하는 등의 일은 말할 것도 없이 괴물이나 하는 짓이었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노래를 같이 하자거나 춤을 추자고 요청할 때나 ‘자유 의지로’ 할 뿐이었다. 자기 자신의 내력과 감정을 속이기 위해 사람들은 말[馬]과 같은 가축들에 관해 말할 때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서먹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숫기가 없어졌고 거의 말을 하지 않거나 약간 정신이 돌아버려 집 안 여기저기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된 의식(儀式)에는 위안의 기능이 있다. 이 위안은 어떤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으로 소멸되는 것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개인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어쨌든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기분 좋은 가난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완성된 궁핍”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다른 삶은 오지 않았다. ‘소유권이란 구체화된 자유’라는 말처럼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유, 자유의지는 비참함을 알려주는 공소장 같다. 참아낼 수는 있지만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가난 속에서 취미도, 오락도, 활동적인 공공생활도 없이 닥쳐오는 삶을 받아들였던 어머니는 병이 들자 ‘난 이제 인간도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난 나 자신과 얘길 한다. 그건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지’라고 한 말은 한트케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과 똑같다. 사실 이건 우리 모두의 속내 아닌가. 유언장에서 자살 선택에 대해 ‘행복하다’고 남겼지만 그도 우리도 진심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자살을 선택하는 상황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는 “가능한 한 적합한 문장들로 기억에 접근해 가려고 노력함으로써 공포의 상태에서 작은 쾌감을 얻어내고, 공포의 쾌감에서 회상의 쾌감을 완성해 내는 것”으로 이 소설을 완성했다. 작가라면 누구나 부모에 대해 이런 글을 써보고 싶을 것이다. 이 작품을 에세이로 보든 소설로 보든 한트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고 끝맺음이었다.

 

 

 


 ▒  아이 이야기 ▒

 

*

소망한다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또한 소망하는 것에 시한(時限)을 두어야 한다는 의식도 가능하리라. 근데 그런 의식은 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소망이 있었다. 아이, 운명의 여인,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직업. 이 세 가지가 그에게 다 왔지만 그것은 하나의 상으로 모이지 않았다. 작가도 되었고 아이도 생겼지만 아내와의 불화는 그 때문에 더욱 커졌다. 아내와 별거 후 아이와 살게 된 그는 틀에 짜인 습관들로 가득했던 어머니의 시간을 조금 이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

아이의 생활 리듬에 따라 흐르는 일상을 잔인하고도 무의미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더 강도 높게 체험했다. 물건들은 무기처럼 비스듬하게, 악의를 품고 비현실적으로 놓여 있었다. 물건들 사이에는 무기 창고 속에 무기가 쟁여져 있는 것처럼 공기 한 점의 여지도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 묶여 있는 자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그 혼란 속에서 어디를 보나 적대적인 무질서만이 있었다. 훨씬 나중 에야 비로소 그는 아이가 어질러놓은 잡동사니를 참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아무렇게나, 심지어는 형편없이 흩어져 있는 듯 보이더라도 무질서 속의 질서를 깨닫고선 그 속에서 아이와 똑같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을 배웠다. 단지 자유로운 순간과 꾸준히 지켜봐 주는 것만이 필요했다.

(중략)

집에 묶여 있으면서도 거의 안정을 찾지 못하던 남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색깔과 형태에 대한 모든 감각과 사물 간의 거리와 등급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렸고, 시야는 흐려지고 불유쾌한 여명 속에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아이는 여러 물건과 섞여 있어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물건처럼 돌아다녔다. 그것은 비현실적이었다. 비현실이란 상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광기와 구별되지 않는 야만이었다. 활기를 잃은 남자는 더 이상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고 불안감이 그의 의지를 더욱 빼앗아갔다. 


대작을 쓰고 싶다는 열망과 아이 양육 사이에서 그는 시종일관 고민에 휩싸였다. 자신의 재능과 업적을 위해 아이를 버린 아내를 그는 비난하지 않았던가. 그에게 아이는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진리의 척도’였다. 처음에 그는 아이의 감독자나 상급 명령자처럼 대했지만 아이를 통해 무조건적인 신뢰감을 배웠고, 그가 비난해왔던 위대한 말들도 아이와 함께 하며 이해하게 되었다. 나중에 아내, 아이와 함께 피크닉도 가지만 그들은 끝내 ‘가족’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도, 그도, 그의 아이도 자신만의 소망이 있었을 테지만 그것은 다른 무엇에 의해 비밀처럼 덮인다. 우리가 가진 소망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소망은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삶이 삶을 키우듯 소망이 소망을 키운다. 소망 없는 것이 불행이 아니라 우리가 소망이 끝났다고 매듭짓는 순간이 불행 아닐지. 소망을 더 자세히 보아야 하리라. 그가 아이를 보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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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도 하나의 수수께끼다.
베일에 싸인 듯한 인생이 그렇듯.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음악이 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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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 연결되는 키냐르의 다른 책『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는 게 좋다.

11월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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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9-11-05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느낌있게 잘 찍으시는 것 같아서 부러워요^^

AgalmA 2019-11-06 22:28   좋아요 0 | URL
사진 잘 찍으시는 분이 많아서^^;; 감사합니다♡
 

사유와 바깥 모든 것을 자동반사적으로 추적하는 그의 문장들은 섬뜩할 정도.




 나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완독했다. 책의 내용은 한 남자가 만(灣) 한쪽에 위치한 집 한 채를 사서,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만 다른 쪽의 집에 매일 밤 불이 켜지는 것을 바라본다는 연애담이었다. 위대한 개츠비는 자기 감정에 충실했지만 그만큼 수치심도 느꼈다. 말하자면 여자의 사랑 행위가 노골적이고 대담해질수록 개츠비도 더욱더 비겁하게 행동했다.
"그래." 나는 말했다. "한편으로는 수치심이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어도 유디트에 대한 나의 감정과 관련해서는, 난 겁쟁이야. 나는 그녀 앞에서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을 늘 주저해왔지. 체질적이긴 하지만 그간 내가 보여왔던 부끄러움은, 비록 그것이 그녀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참지 못하리라는 나만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여하튼 일종의 소심함의 표현임이 분명해. 적어도 그것이 내 사랑의 감정을드러내는 하나의 척도로서 작용하는 한 말이야. 위대한 개츠비는 단지 그를 사로잡는 사랑을 행하는 방식에서만 소극적이었어. 이를테면그는 예의를 아는 인간이었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나도 그처럼 정중하면서 동시에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법 좀 터득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다른 한편으로 나의 지나친 시간관념이 외려 나의 발목을 잡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자신에 대해 과도하리만치 세심하게 신경을 쓰다보면 지금 내가 추구하는 느긋함이나 남에 대한 관용 같은 것들로부터 더욱더 멀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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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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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이나 읽고도 리뷰 쓰기가 내키지 않았던 것은 이 소설집에 동봉된 작가 노트와 옮긴이의 말이 이미 많은 것을 설명해주기 때문이었다. 그의 창작 노트에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정합성과 비유 사이의 균형’에 대한 그의 고심을 엿볼 수 있었다. 평균 2년에 한 편씩 작품을 발표하는 이유와 그가 “세계 최고의 현역 SF 작가”라는 찬사를 받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킵 손의 시간 이동에 대한 수학적 분석ㅡ“타임머신은 과거를 바꾸지 못하고, 시간선의 경우도 자기모순이 없는 단 하나의 시간선만이 존재”ㅡ에 따랐다. 테드 창은 기존의 시간 여행 소설이 과거를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비극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 이 소설로 다른 시도(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반드시 비극적이지는 않다는 것)를 했다.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슬람 신앙에 착안해 배경을 그렇게 설정했고, 시간 여행의 재귀적 성격과 이야기가 꼬리를 무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액자식 틀을 접목했다. 배경과 이야기 틀이 내겐 다소 고리타분했는데 이 설명을 듣고 보니 작가의 의도가 잘 이해됐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도 그랬지만 운명 결정론으로 귀결되는 것에 나는 계속 반감이 들지만 테드 창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과정'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좋은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서 여러 인물이 과거로 돌아가나 그들 모두가 ‘변화‘가 아니라 ‘이해‘를 배운다는 점에서 그렇다.

 

*

젊은 시절에는 무의미하게만 여겼던 관습들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그 효용을 이해하게 되듯이, 어떤 정보를 감추는 것은 그것을 밝히는 것만큼이나 쓸모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산은 깨달았습니다. “아뇨, 오히려 경고해주지 않아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

"...정상적인 방법으로 복도를 거쳐가는 것보다 더 빨리 목적하는 방에 도달할 수 있는 통로 말입니다. 어떤 통로를 이용하든 방 자체에는 아무 변화도 없습니다.”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과거와 마찬가지로 바꿀 수 없다는 뜻입니까?”

 

“회개와 속죄는 과거를 지워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얘기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유감이군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미래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잠시 이 말에 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자신이 지금부터 이십 년 뒤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 죽음을 피할 방법은 전혀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바샤라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낙담을 안기는 말처럼 들렸지만, 어찌 보면 그 사실이 일종의 보장이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이십 년 뒤에도 살아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가정해보지요. 그렇다면 향후 이십 년 동안은 그 어떤 것도 저를 죽일 수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럼 아무 걱정 없이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습니다. 살아남을 것이 확실하니까요."

 

***

현자들은 말합니다. “세상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네 가지 있다. 입 밖에 낸 말, 공중에 쏜 화살, 지나간 인생, 그리고 놓쳐버린 기회.”

 

****

그녀는 떠났고, 저는 몇 시간 동안이나 해방의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그러면서 줄곧 바샤라트가 한 말이 얼마나 옳았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알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우리는 바로 그 이야기를 살아감으로써 그것이 전해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

생각건대, 제가 가진 가장 값진 지식은 이것입니다.

그 무엇도 과거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개가 있고, 속죄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작가에 따르면 「숨 : EXHALATION」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고 있는 주인공’의 이미지와 엔트로피적 무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나는 이 단편을 읽으며 만물 유전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영혼‘이라 여기던 자리에 작가는 ‘공기‘를 배치했다. 폐 같은 기관을 돌려쓰고 자기가 자신을 해부하는 위치까지 간 인간에겐 ‘자기‘라는 개념은 뒤떨어진 생각으로까지 보인다. 그런 인간이 바라보는 이 세계의 모습은 ‘기압의 흐름‘ 같은 것. 작가 노트를 읽어보니 내가 느낀 이 질서의 상태가 이해되었다.

 

*

내 몸은 어디 있는 것일까? 나의 시력과 동작을 더 넓은 공간으로 연장해준 도관들은 나의 원래의 눈과 손을 뇌에 연결하고 있는 도관들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실험을 진행하는 동안 조작기들은 실질적으로 내 손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내 전망경 끝에 달린 확대경들은 실질적으로 내 눈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나는 안이 밖으로 나온 인간이었다. 확장된 뇌의 한가운데에, 해체된 조그만 몸이 위치해 있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형태로 내 몸을 배치해놓고, 나는 나 자신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나는 현미경을 돌려 기억 담당 하위 부품 중 하나의 형태를 관찰했다. 나 자신의 기억을 해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았다. 단지 기억이 기록된 방법을 추측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예상대로 겹겹이 포개진 박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톱니바퀴나 개폐기마저 보이지 않는 것은 의외였다. 대신 하위 부품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가느다란 공기 관들의 뱅크(동시에 작동하도록 배열된 부품이나 단자, 옮긴이)였다. 이 세관들의 틈새로 뱅크의 내부를 지나가는 잔물결 같은 것이 흘끗 보였다.

 

**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추정과 달리, 공기는 단순히 우리의 사고를 발생시키는 엔진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기는 사실상 우리의 사고가 각인되는 바로 그 매체였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공기 흐름의 패턴이었다. 나의 기억은 박편에 팬 홈이나 개폐기의 위치가 아니라, 지속적인 아르곤의 흐름으로서 각인되는 것이다.

 

***

뇌의 연구가 과거의 비밀이 아닌 미래의 궁극적 운명을 밝혀냈다는 사실에서 아이러니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과거에 관해 중요한 뭔가를 알아낸 것이라고 믿는다. 우주는 엄청난 양의 공기가 비축된 데서 시작됐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나는 그 사실에 감사한다. 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욕구와 고찰은 우리의 우주가 점진적으로 내쉬는 숨에 의해 생성된 소용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내쉼이 끝날 때까지, 나의 사고는 계속될 것이다.

 

****

나는 당신의 탐험이 단지 저장고로 쓸 수 있는 다른 우주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기를 희망한다. 지식을 원했기를, 우주가 내쉬는 숨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에 의해 움직였기를 희망한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그저 나직한 쉿 소리를 흘리며 평형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테드 창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인 ‘자유의지’를 다루는 우화적 단편이다. 예측기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움직임에 대한 욕구를 잃어버리고 삶의 의지를 상실하는 무동무언증에 빠져 버린다. 또다시 테드 창은 자유의지가 환상이라는 운명결정론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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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 년 뒤의 미래에서 당신들에게 이 경고를 전송하고 있다. 이것은 백만 초 범위의 네거티브 딜레이 회로가 통신 장치에 장착된 이후 처음으로 도착한 장문의 메시지다. 다른 문제들을 다룬 다른 메시지들도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나의 메시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이며, 이 거짓말을 믿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명의 존속은 이제 자기 기만에 달려 있다. 어쩌면 줄곧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자유의지가 환상인 이상, 누가 무동무언증에 빠지고 누가 빠지지 않을지 또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예측기가 당신에게 끼칠 영향을 선택할 수 없다. 누군가는 굴복할 것이고 누군가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내는 이 경고는 그 비율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일을 한 것일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정서적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관계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적극적인 의지”로 가능하다. 인공지능이 의지를 가질 수 있는가, 법적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외연보다 관계에 대한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보고, 그것이 도래할 인공 지능 시대에 분명히 닥칠 문제임을 내다본 소설이라 하겠다. 그는 단호히 이렇게 말했다. “그런 문제는 컴퓨터 메모리에 칸트의 저서들을 로딩한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좋은 육아법에 상응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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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은 동물원 사육사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관념ㅡ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에 동물 쪽을 선호한다는ㅡ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애나는 자기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노력한다. 동물과의 비非성적인 관계는 정상으로 보면서 왜 성적인 관계는 그럴 수가 없을까. 동물이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한정된 동의는 동물을 애완용으로 기르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데, 왜 그들과 섹스를 하기에는 충분치 못한 것일까. 이번에도 애나는 개인적인 불쾌감에 근거하지 않은 반박 논리를 찾을 수가 없다. 불쾌감이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바로 이어지는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도 육아와 관계 고찰을 담은 소품이다. 로봇 기계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다루는 방식, 우리의 편견이 더 많은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다는 것을.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노출하기 바쁜 지금 시대와 가장 가까운 미래를 보여주는 단편이다. 모든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오류를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우리의 판단은 감정과 이성의 혼합체이며 행동은 이미 늦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반성도 바람직한 변화도 올바르고 적절할 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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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이 용서하고 모두 잊어버려라”라는 말도 있듯이 이상화된 우리의 관대한 자아에게는 그런 충고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이 두 행위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어느 정도 망각을 해야 한다. 과거의 심적 고통을 더 이상 생생하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유발한 행위를 용서하기도 더 쉬워지고, 그 결과 해당 기억 자체가 덜 중요해지는 식으로 말이다. 과거의 당신을 격분케 했던 악행도 반추의 거울에 비춰 보면 용서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심리적 피드백 고리가 존재한다.

 

 

「거대한 침묵」은 인간의 아이러니에 대해 말한다. 인간 이외의 종(種)- 외계 지성과 소통하기를 열렬히 원하면서 정작 가까이 있는 앵무새들과의 소통이나 그들의 멸종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런 인간이 외계 지성을 알아볼 수 있을까? 여러 종의 소멸과 함께 ‘거대한 침묵’은 날로 커져가고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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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전, 우리는 인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아레시보에 있는 망원경이 그들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기를 기원할 뿐이다.

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잘 있어. 사랑해.

 

 

 

「옴팔로스」는 진화론과 대치되는 창조론이 인간을 창조에 중심으로 둠으로써 세계를 얼마나 왜곡 인식하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코페르니쿠스, 다윈, 뉴턴, 아인슈타인의 혜안이 나타났는데도 어째서 이 상황이 이토록 해결되지 않는지 나도 신에게 묻고 싶을 정도다! “만약 인류가 정말로 우주가 창조된 이유였다면 상대성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리법칙도 상황에 따라 변화해야 마땅하며, 그 사실 역시 탐지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테드 창의 일갈이 현실 속에 널리 퍼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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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우리의 아픔을 경감해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게 과학에 투신하는 유일한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저는 반박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진리를 탐구할 의무가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과학은 진리의 탐구만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과학은 의도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줄곧 진리와 의도가 동일한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여, 저는 이제 뭘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저를 두렵게 합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곱씹을 데가 참 많은 소설이다. 또 ‘자유의지’ 문제가 등장한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서는 프리즘을 통해 다세계에 존재하는 평행자아와 소통하는 평행우주 세계를 보여준다. 지금 이 세계에서의 결정과 다른 결정을 한 평행우주가 존재하더라도 테드 창은 본질은 같을 것이라고 말한다. “설령 다세계 해석이 옳다고 해도,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 그런 식으로 상쇄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떤 개인의 성격이 그가 지금까지 해온 선택들에 의해 밝혀지는 것이라면, 그와 비슷하게 그 개인의 성격은 그가 여러 세계에서 해온 선택들에 의해 밝혀진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 테드 창의 작가 의도대로 이 소설 속 인물들은 평행우주라 하더라도 결과론적 불행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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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의 보급은 데이터 브로커의 등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프리즘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우연성이 자신들의 삶에 미치는 거대한 영향력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평행자아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해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들도 있었다. 소수지만, 여러 개의 프리즘을 구입해 자신의 모든 평행자아를 동기화하려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각자 다른 세계로 분기됐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평행자아들에게 같은 인생을 살아갈 것을 강요하는 셈이었다. 장기적으로는 실행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러한 행위의 옹호자들은 개의치 않고 그저 새로운 프리즘들을 구입해, 새로운 평행자아들을 대상으로 같은 시도를 되풀이했다. 자아의 분산을 막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택이 무의미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그들이 취하는 모든 행동이 그들이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평행우주의 존재에 의해 상쇄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인간의 의사 결정은 양자적 현상이라기보다는 고전역학적 현상임을 지적했고, 따라서 선택한다는 행위 자체가 우주를 새로운 갈래들로 분기시키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갈래의 평행우주를 형성하는 것은 양자 현상이고, 각 갈래에서의 개인의 선택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프리즘이 개인 행위에 수반되는 윤리적 책임을 무효화시킨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복잡한듯하면서도 명쾌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테드 창의 소설은, 독자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못하든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사고실험과 인류가 함께 고민해야 될 넓은 인식 지평을 제공한다. 이런 소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외계 지성체든 최강의 인공지능이든 낯선 타인을 만나든 대비할 마음의 자세를 키워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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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9-10-28 2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저는 특히 테드창 책은 작품 여러개를 한 리뷰에 담아내지를 못하겠던데. 거의 다 담으셨군요. 작품이 드물어서 더욱 완소 작가죠. 류츠신 삼체 말고 단편집 5개 시리즈로 나온 거 있는데 정말 좋아요. 테드창과는 다르지만 단편 하나하나 서사가 가득하고 환상적인 sf..테드창 류츠신 켄리우 중국계 sf 전성시대 같

AgalmA 2019-10-29 15:03   좋아요 1 | URL
테드 창 소설은 촘촘하게 풀면 이야기가 길어져서 개괄로만 소개했어요^^; 읽을 때마다 좋아지는 단편이 달라지거나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유익한 독서 경험을 주죠.
안 그래도 류츠신 궁금하기도 하고 굿즈가 환상적이라 한 권 샀어요^^
그러게요. 중국계 sf 붐은 정말 신기해요.

겨울호랑이 2019-10-28 21: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테드 창의 작품은 SF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가볍지 않은 듯 합니다. AgalmA님의 짧은 옴니버스 리뷰 잘 읽었습니다. 솔직하게 내용을 제대로 이해는 못했지만, 좋은 작품임은 알고 갑니다.^^:)

AgalmA 2019-10-28 22:55   좋아요 2 | URL
겉은 SF지만 아니 SF라서 더 그렇다고도 생각되는데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더 심오하게 들여다보는 게 또 SF 문학일 수 있다는 걸 테드 창이 보여주죠. 겨울호랑이님도 흥미롭게 보실 책이죠^^

뒷북소녀 2019-11-05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 쓰는게 만만치 않더라구요.ㅠㅠ

AgalmA 2019-11-06 22:27   좋아요 0 | URL
작가가 작가노트까지 써줬는데 무슨 말을ㅎㅎ;;; 이런 작가노트를 보는 것도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