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을지로 수집
설동주 지음 / 비컷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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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를 마시며 "나 때는 말이야"가 수긍 가는 을지로 이야기를 읽는다. 을지로를 좋아해서 이 책이 나왔을 때부터 꼭 읽어보고 싶었다. 내가 떠나온 곳보다 서울에서 더 오래 살아 고향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서울 곳곳의 이야기가 생경하지만도 않다. 을지로 인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의 독특한 풍경, 영업이 끝난 조명 가게 조명이 고즈넉이 거리를 비추는 판타지 한 광경, 서울 중심가인데도 다른 시공간으로 온 듯한 기시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듯한 기분을 잊지 못한다. 첨단 도시와 구멍가게가 공존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이곳의 풍경은 서울에서 유일하다.

설동주 저자가 짚어낸 을지로의 이미지는 내가 느꼈던 것과 동일했다.

 

*

"을지로의 간판은 직설적이다. 명함, 와이어, 프레스, 가공, 도장 같은 단어들이 이거 돼요, 이런 건 어때요, 하고 말을 건다. ‘이런 걸 할 수 있어요’라는 결과물을 바깥에 대문짝만 하게 걸어놓기도 한다. 틈새 없이 늘어서 있는 간판들은 이 골목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아온 기술을 닮았다."

 

 

을지로의 낡은 상가들은 재개발로 무너져도 좋은 퇴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는 황정은 작가의 소설 속 암울한 청계 상가 풍경과 다르다. "1층에는 인쇄, 타일, 공구, 조명, 분식집과 다방, 오래된 맛집들. 2층과 3층에는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소담한 카페, 독특한 가게들. 마치 10년 전 찍은 사진과 어제 찍은 사진이 한 롤에 들어 있는 필름"처럼 어우러져 상생하는 생활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공구 소리와 쌍화탕 향기가 공존하는 곳. 기원, 이발소, 다방, 인쇄소들이 화석처럼 아직도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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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영 : 맞아요. 먼저 계시던 분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깨뜨리지 않는 선에서 저희처럼 새로운 사람들이 스며들면 좋겠어요. 변하긴 변하겠지만, 깊숙이 파헤쳐 보면 새로운 요소가 들어와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지 모두 다 바뀌어버리는 변화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설동주 : 라이프스타일을 깨뜨리지 않는다는 말 참 좋네요.

 

김요한 :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추가로 이야기해보자면, 마지막 재료는 ‘시간’이라는 말 있잖아요. 이 건물이랑 골목, 가게 다 시간을 품고 있는데, 그런 공간과 대비돼서 저희 가게도 새롭게 보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은 시간을 품고 있는 것의 가치가 너무 낮게 평가되는 것 같아요. 이 가치가 잘 지켜지면 좋겠어요.

- 「윤소영(패션MD), 김요한(그래픽디자이너)이 만든 편집숍 <오팔> INTERVIEW 2(2019. 07. 24)」

 

 

여행의 의미가 단지 관광이 아니듯 우리는 세계를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 만지고 경험하고 싶어한다.

 

*

윤병주 : 사진관 치고는 소품이 엄청 많은데, 제가 워낙 만지는 걸 좋아해요. 예전에 로마에 간 적이 있는데, 눈으로만 보기에는 이미 익숙한 것들이잖아요. 워낙 사진을 많이 찍어서 눈으로 보는 데에는 둔감해지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한 번 만져보면 느낌이 달라요. 그런 걸 좋아해요. 어디를 가든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벽이라도 한 번 만져야 내가 여기 왔다 갔다는 느낌이 들어요. 비행기를 타고 갈 때 홍콩을 경유해서 가면 홍콩 가봤다고 하지 않잖아요. 안 만져보면 공항에만 있는 거나 다름없는 것 같아요. 경유한 걸로만 치면 세계일주 다 했겠죠.

(중략)

을지로는 지금 방향이 좋다고 봐요. 기존 가게들이 1층에 현존해 있고. 1층은 우리가 파고들지 않잖아요. 우리는 2,3층에 있는데, 우사단은 원래 있던 식당 쫓아내고 미용실 오래 했던 사람 나가게 하고 전혀 다른 게 들어오니까 완전히 변해버렸어요. 공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을지로는 가능해요. 우리는 1층에 못 들어가요. 왜냐면 을지로는 1층 분들이 건물주인 경우가 많거든요. 덕분에 2,3층 월세가 싼 거예요. 그래서 을지로는 지속 가능할 것 같아요. 이런 방향이라면 젠트리피케이션도 방어할 수 있는 거죠. 경리단길이나 망원동도 정책적으로 1층은 건드리지 않고 2,3층에 젊은 사람이 들어올 수 있게 했으면 문제될 게 없었다고 봐요. 을지로가 앞으로의 롤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윤병주 사진작가가 운영하는 사진관 겸 현상소 겸 살롱 <망우삼림>, INTERVIEW 3(2019. 07. 30)」

 

노동이 있는 곳에는 삶의 가치, 방향성에 대해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이 많다. 자본의 환경 변화에 따라 사라지는 직업에 대해 재빠르게 부응하지 않는 개인만을 탓할 수 있을까. 일은 재화의 가치만 가지지 않는다. 우리가 노력을 쏟은 만큼의 긍지와 애정도 있다. 지금 시대는 그런 재반을 간과하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장인이나 예술가로 추앙하면서 어떤 이는 대체 가능한 부품 같은 노동자로 치부하면서.

 

*

설동주 : 외부에서 노하우를 잘 알려주시나요? 영업비밀일 수도 있는데.

 

박철성 : 친절하게 알려주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죠. 그래서 리서치를 잘하는 게 중요한 거죠. 여기서 선수가 되려면 진짜 제일 바닥, 아무도 모르는 바닥의 바닥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더 고급정보를 알아야지. 예들어 어떤 사람들은 좋은 인디고집을 하나 알면 자기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패 하나만 든 거예요. 그렇잖아요? 이 사업에 관해 패를 몇 개는 갖고 있어야 작가가 어떤 요구를 해도 해결해주죠. 하다못해 경쟁업체를 소개해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을 내가 리드하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편하고 네트워크가 있는 데를 자꾸 가려고 해요. 거기가 최선이 아니라 하더라도 몸에 밴 습성, 편의성 때문에 그렇게 되거든요.

(중략)

그동안 인쇄산업은 수주산업화해서 살아왔어요. 사실 그 패러다임이 가장 큰 문제였던 거예요. ‘일이 있어야 일을 하지’, 이 말에는 누군가 일을 줄 거라는 전제가 있잖아요. 우리 아버지 세대는 일을 만들어서 하는 세대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런 걸 배워본 적이 없어요. 고도성장기 때 산업이 잘 돌아가니까 사람들은 도장도 필요하고 인쇄물도 필요하고 명함도 필요했던 거야.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누가 일감을 주는 상황에서 이제는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어요.

(중략)

나는 무에서 시작하는 걸 새로운 창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존에 있는 것을 발전시키거나 그 안에서 예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해요. 새로 그리는 건 누구나 언제든 할 수 있어요. 이 공간을 하얀 페인트를 칠한 다음에 자기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러면 이 공간에 있던 일종의 영혼은 사라지는 거야. 이곳에도 공간의 특성이 있어요. 저쪽에 홈이 파여 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금고가 있었는지 아니면 건축이 이상해서인지 모르겠는데, 그것 때문에 이 공간이 재미있어져요. 또 여기가 지하다 보니 하중을 받치려고 위에 H빔을 넣었는데, 이런 것들이 공간의 정체성이나 재미를 주죠. 만약 층고가 높고 이 기둥이 없었으면 여긴 그냥 인쇄소 자리예요. 그런데 기둥하고 층고 때문에 일반 상용 인쇄기가 못 들어왔던 거야. 그래서 점빵의 오늘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여기가 밋밋했으면 점빵의 느낌이 덜 살았을 거예요. 재미가 없는 거죠. 공간만의 이야기가 없으니까.

 

- 「리소 인쇄를 이용해 디자인 제작을 하고 있는 레터프레스 전문 인쇄공방 <디자인점빵> 박철성, NTERVIEW 5(2019. 08. 02)」 

 

 

비하인드 이야기가 많은 <에이스포클럽> 인터뷰는 작은 단편처럼 재밌었다.

 

 

*

설동주 : 해방 직후면 말 그대로 반세기네요. 이전 사장님은 또 여기서 20년을 지내셨고요.

 

권민석 : 강산이 두 번 변할 수 있는 시간. 20년 장사라니 말이 쉽지, 다방 운영하기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그 인생이 얼굴과 말투에 묻어 있더라고요. 사람에 웃고 사람에 지친 그 얼굴. 그래서 ‘젊은 사람이니 열심히 살아라. 이화다방을 잘 부탁한다’던 마지막 한마디가 잊히지 않아요.

(중략)

저희 오픈 준비하느라 공사할 때도 별의별 물건들이 다 나왔어요. 가짜 부동산 투자 서류, 위조지폐 만드는 틀, 6·25 참전용사증, 갖가지 의학서적 등등. 예전에는 무슨무슨 종파 몇 대손 모임 할아버지들이라거나 종묘제례 올리시는 분들이 제사 끝나고 와서 담소 나누시고 그랬대요. 다방 안쪽 방에서 종묘제례에 쓰이는 한복도 나오고, 그분들이 같이 찍은 사진도 나왔어요. 진짜 매력적인 곳이죠.

(중략)

아, 공사하느라 벽을 뜯었더니 시멘트 위에 칼로 그린 그림 같은 게 나온 적도 있어요. 사람이 앉아서 뭔가 하고 있는 모습. 누구 작품일까 알아봤는데, 옛날에는 미장이들이 미장 칼로 장난삼아 벽에 그림 그리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위에 시멘트로 문지르건 타일을 대건 할 테니까. 하지만 얼마나 예술적이에요. 미장한 직후에는 흘러내려서 이렇게 그리기도 쉽지 않을 텐데 굳기 직전에 미장 칼로 그린 거잖아요. 남겨놓고 싶었는데… 아쉽죠.

 

- 「1959년부터 을지로를 지켰던 ‘이화다방’을 개조·계승한 카페 겸 바 <에이스포클럽> 권민석, INTERVIEW 6(2019. 07. 25) 」  

 

 

이 책은 을지로 골목 탐방 지도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뒤에 부록으로 명소 소개를 꼼꼼히 정리해 놓았다. 중구에서 을지로 투어를 무료로 하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방산시장에서 청계 대림상가까지 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총 20개 지점을 둘러보며 을지로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짚어본다. 지하철 을지로 4가 역 6번 출구에서 출발해 방산시장 비닐·제지와 초콜릿·베이킹 거리, 성제묘, 염초청 터, 향초·디퓨저 DIY 상가, 포장 인쇄골목을 지나 중앙아파트, 을지로 예술가 작업 공간을 거쳐 청계 대림상가, 조명거리, 마지막으로 을지로 3가 노가리 호프에서 끝난다. 중구청 도심산업과에서 사전 신청을 받으며, 4명 이상이면 해설사가 배정된다. 평일과 토요일 오후 3시에 운영되고, 참가비는 무료다."

내가 아는 명소도 있고 모르는 곳도 있는데 오래오래 운영되어 단순히 '힙지로'로 불리며 트렌드로만 소비되지 않았으면 싶다. 친구를 데려가면 아니, 여기 이런 데가 있어 하고 놀라게 하기 좋은 곳이고 비밀스러운 아지트가 많지만, 요즘은 힙스터들 때문에 어렵게 된ㅎ

 

 

저작권 때문에 수록된 사진과 그림은 생략. 정감 가는 사진과 그림이 많아서 읽는 내내 눈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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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의 세계 - 세계 석학 7인에게 코로나 이후 인류의 미래를 묻다
안희경 지음, 제러미 리프킨 외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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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N. 스턴스는 『세계사 공부의 기초』에서 역사를 공부할 때 주의할 점을 여럿 당부했는데, 각 나라의 입장과 트렌드 중심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나는 특히 유념한다. 일본 인터뷰어와 유발 하라리 외 세계 석학들의 대담 『초예측』 시리즈가 일본의 향후 전망 위주로 기술되어 있어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오늘부터의 세계』는 2020년 5월 7일부터 총 8회 <경향신문>에 연재된 내용을 보강한 글인데, 《초예측》 과 중복되는 인터뷰이도 있어 코로나19 관련해 우후죽순 나온 이슈 쟁탈 책이 아닌지 반신반의 했다. 코로나19라는 세계 공통 관심사로 엮여 있어서 그런지 지금 한국에만 국한된 대담이 아니었고, 향후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고민은 가볍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중국이 원흉이라고 혐오와 배척하는 시각이 많은데, 리프킨은 핵심을 명확히 지적한다. 이 팬데믹은 기후 변화와 세계화의 결과라고 콕 집는다. 1) 물순환 교란으로 인한 생태계 붕괴, 2) 지구의 마지막 야생터까지 침범하는 인간, 3)야생 생명들의 이주가 큰 요인이다.

 

*

리프킨 : 생태계가 변화하는 물순환을 따라잡지 못하고 붕괴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인간이 지구에 남은 마지막 야생의 터를 침범하고 있어서예요. 1900년만 해도 인간이 사는 땅은 전체의 14퍼센트 정도였어요. 지금은 77퍼센트에 육박합니다. 야생은 23퍼센트만 남았어요. 인간은 야생을 개발해 단일 경작지로 사용하고, 숲을 밀어버리고, 소를 키워 소고기를 생산합니다. 이것도 기후변화를 유발합니다. 셋째, 야생 생명들의 이주가 시작됐습니다. 인간들이 재난을 피해 이주하듯 동물뿐 아니라 식물, 바이러스까지 기후 재난을 피해 탈출하고 있어요. 서식지가 파괴됐기 때문에 인간 곁으로 왔고, 바이러스는 동물의 몸에 올라타서 이동했죠. 최근 몇 년 동안 사스, 메르스, 에볼라, 지카와 같은 팬데믹이 발생한 이유입니다. 세계보건기구, 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 세계은행 등에서 오랜 연구를 통해 지구의 공중 보건이 위기임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시장에서 야생동물을 산다면 바이러스가 붙어 있는 야생동물을 사는 거죠.

안희경 : 기후변화로 야생동물이 바이러스의 중간 매개체가 된 것인데, 미개한 문화가 바이러스를 끌어들였다는 혐오가 오히려 본질을 호도하고 있군요.

 

리프킨 : 앞으로 더 많은 감염병이 창궐할 겁니다. 이제는 팬데믹이 올 때마다 1년 반 정도 봉쇄될 것을 예상해야 해요. 초기 단계에서 봉쇄를 해도 약 6개월 뒤에는 두 번째 파고가 찾아옵니다. 초반에 완전히 봉쇄하지 않으면 두 번째 파고는 훨씬 심각합니다. 그다음에 백신이나 항체가 나오길 기다려야 하지요. 대략 1년에서 1년 반 정도 걸립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 안에 백신 접종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까지 또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경제를 새로 조직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사회생활 그리고 통치 방식까지 재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희경 : 사스나 메르스, 에볼라는 세계 경제를 멈추는 단계로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왜 다를까요?

 

리프킨 : 이는 세계화에 답이 있습니다. 1차 산업혁명은 국가와 국가적인 시장이라는 개념을 심었고, 2차 산업혁명은 세계화를 가져왔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과 같은 중개 조직들이 이때 나타났지요. 이 인프라는 적시 생산 방식JIT으로 재고를 남기지 않습니다. 탄력성보다는 오로지 효율성에만 의존하죠. 지금의 신자유주의 경제는 단기 이익만 추구합니다. 주식시장에서 분기별 보고서로 이익 현황을 보여줘야 하죠. 이익을 못 내면 주주의 주식이 평가절하되니 경영자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분기마다 수익을 내려면 장기 투자, 장기 계획, 문제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는 중복 장치를 구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처럼 팬데믹이 오면 전체가 타격받고 세계화된 인프라가 붕괴합니다. 감염병이 발생하는 순간 전 세계 인프라가 무너졌습니다. 마스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인공호흡기는 어디에 있었나요? 우리의 음식을 실은 배는요?

 

- 1장 집중과 분산 [제러미 리프킨, 화석연료 없는 문명이 가능한가]

 

빅 데이터,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무인 기술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들어섰다고 자찬하지만, 리프킨은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글로벌 IT 기업들이 수직적으로 통합된 2차 산업혁명(에너지 기반 대량 생산) 인프라를 가져와 3차 산업혁명(컴퓨터와 인터넷 기반의 지식혁명)에 심으려 하기 때문에 그들이 10년도 못 버틸 거라고 전망한다. 농업에서 3D 프린팅을 활용하는 제조업에 이르기까지 아웃소싱보다 지역에서 생산하는 온쇼어링(onshoring)으로 바뀔 거라고 분석한다. 팬데믹, 테러, 기후 재난이 벌어질 때 대처하려면 국가적인 전력망과 지역 중심의 소규모 전력망이 효율적으로 움직일 구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19에 대한 한국의 대처에서도 잘 나타났고, 리프킨 대담의 소제목처럼 ‘집중과 분산’의 구조를 짜는 게 관건이다. 공공 인프라가 민영화되는 걸 저지해야 하고, 전체 공동체가 협력하는 수평적인 통치가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번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각자 도생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는 없다.

 

 

리프킨과 마찬가지로 중국 지식인 원톄쥔도 코로나19는 서구 문화, 서구적 행동을 답습하며 자연에 분리된 채 살아가는 인류가 자초한 결과라고 진단한다. 코로나19 이후는 글로컬라이제이션(지역 중심 세계화)이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를 거라고 전망하는데, 미국이 선도하는 북아메리카 글로컬 체계, 러시아와 협력할 유럽 연합, 아시아가 삼각형 구조로 세계 경제의 축을 이룰 것이다.

 

 

경제학자 장하준도 단기적 효율성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바이러스 사태에 흔들리게 됐다는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

안희경 : 메르켈 총리는 코로나19 위기를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위기라 했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75년 만에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지요?

 

장하준 : 서구 중심적인 발언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전쟁과 기근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베트남전쟁 300만 명, 6·25전쟁 3~400만 명,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콩고내전 때도 3~400만 명이 죽었죠. 1960년대 초 중국이 대약진운동을 할 때는 기근으로 1000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재앙적인 상황은 예외로 치더라도 가난한 나라에서는 화장실과 하수 시설 부족, 영양실조로 매년 몇천만 명이 죽습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집계는 안 되지만 기후변화로 증가한 재해 때문에 1년에 수십만 명이 희생당하고 있고요. 코로나19 사태가 느닷없는 충격으로 왔기 때문에 크게 다가올 수 있지만, 메르켈 총리의 발언은 지극히 유럽과 미국 입장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중략)

관광이나 스포츠, 극장처럼 사람들이 모여야 운영되는 곳도 어려워지고, 의류나 음식을 가공하는 노동집약적산업도 취약해졌죠. 게다가 지난 3, 40년 동안 세계화를 하다 보니 전 세계가 공급망으로 얽혔어요. 코로나19로 중국 경제가 마비됐을 때 한국과 독일에 있는 자동차 공장들은 영업을 못했잖아요. 중국에서 부품이 오지 않으니까요. 경제 시스템이 안전이나 유연성보다는 효율성, 특히 단기적인 효율성 중심으로 짜여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약점이 노출된 거예요. 비행기나 전기 공급망, 유조선처럼 한 번의 사고가 큰 재앙으로 번지는 부문은 그에 대한 대비책이 많아요. 백업이 두세 개씩 있고, 어느 한 부분이 잘못되면 격리시켜 나머지 부분을 살리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지금의 경제 시스템은 그런 장치가 없습니다. 중국 시골에 있는 공장에서 시작해서 일고여덟 단계를 거쳐 모든 공정이 순조롭게 흘러가야 가능한 경제를 만들어놓았습니다. 더 취약할 수밖에요.

 

안희경 : 코로나19 위기를 계기로 전체 산업 체계가 변화할 경향이 보이나요?

 

장하준 : 같은 산업이라 해도 어떤 식으로 재조직되느냐에 따라 생산방식이 바뀌는 분야가 나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예측하기 힘듭니다. 지나고 나면 패턴이 보일 겁니다. 다만 한 가지, 이 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깨달은 게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에센셜임플로이essential-employees, 영국에서는 키워커key-worker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야말로 모두가 생존하는 데 기본이 되는 필수 노동을 한다는 점요. 의료진, 음식 파는 가게 직원, 배달 노동자, 양로원에서 일하는 사람들······. 지금까지 저임금으로 일해온 노동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봉쇄 상황에서 이런 말들이 나와요. ‘이제 보니 투자 은행가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이들 없으면 못 살겠구나!’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일이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해요. 코로나19 위기가 끝나고 이들 분야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겁니다.

 

- 3장 성장과 분배 [장하준, 왜 우리는 마이너스 성장을 두려워하는가]

 

이 바이러스를 통해 우리 문명의 누적된 모순과 갈등, 부실 시공된 세계화, 저임금 노동자와 취약한 사회계층의 문제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다는 게 드러났다. 불안을 해소할 구조 조정과 공동 안전망은 전 세계적인 공조가 필요하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판 뉴딜 정책을 브리핑했는데, 그것은 댐 짓고 길 닦는 1930년대 1차 미국 뉴딜의 제시가 아니다. 그것은 와그너법을 실행해 노조 권한을 강화하고, 사회보장법을 제정해 사회 보장 제도를 실행한 2차 뉴딜(제도 개혁)의 방향이어야 한다. 장하준의 지적은 여러 가지로 속 시원했다.

 

*

장하준 : 빚내서 돈 쓰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하면 대학 가려고 학자금 융자를 받아선 안 되고, 빚내서 사업하면 안 되죠. 빚을 내더라도 나중에 소득이 더 늘어나면 빚을 내는 게 더 잘하는 일 아닌가요? 정부가 돈을 빌려 단기적으로 재난지원금을 주고, 급여액을 올려 수요를 유지하면, 기업들도 그 속에서 돈을 벌 수 있어요. 수요가 완전히 붕괴하면 기업들은 더 망합니다. 정부가 돈을 빌려 경제 전체 생산성을 높이는 곳에 투자하면 장기적으로 우리 경제가 더 커지죠. 지금 돈을 빌리면 안 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기업들도 부채 하나 없이 장사해야 한다고 얘기해야 해요.

더구나 한국은 재정이 엄청나게 건전한 나라입니다. GDP 대비 국채 비율이 40퍼센트 정도 되는데, 세계 최저 수준이죠.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 나라들이 35~40퍼센트 사이로 가장 낮고, 한국이 그다음으로 낮아요. 한국은 2008년 금융 위기 났을 때 빼고 정부 재정이 매년 흑자입니다. 오죽하면 OECD같이 보수적인 기관에서 한국은 돈을 더 써도 된다고 그러겠어요. 저는 우리 경제를 ‘자린고비 경제’라고 부릅니다.

(중략)

우리는 복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잘못돼 있어요. 돈 있는 사람들한테 거둬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주는 걸로 생각해요. 그런데 북유럽식 복지는 사회보험을 공동 구매하는 겁니다. 의료보험, 교육보험, 연금보험 등을 국민이 공동 구매하는 거예요. 미국이 복지 지출을 적게 한다고 말하지만 복지 지출이 높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많은 부분이 개인 지출이죠. 공공 지출만 보면 프랑스, 핀란드, 스웨덴 같은 나라들은 국민소득의 30퍼센트를, 미국은 20퍼센트만 지출하니까 미국이 복지 지출을 안 하는 거 같죠? 하지만 개인이 쓰는 복지 지출까지 합하면 핀란드 다음으로 많아요. 그럼에도 의료보험 체계가 잘못돼 다른 나라의 두 배를 쓰고도 선진국 중에 최하위 건강 지표를 보이죠.

(중략)

한국도 이제 선진국에 포함시켜야죠. 선진국들은 더 이상 성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후변화 때문에라도 성장을 안 하는 게 좋고요. 문제는 성장의 질입니다. 성장을 얼마나 공평하게 나누느냐에 있죠. 온 국민이 편안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경제의 목표라면 성장은 그 목표를 이룰 여러 수단 중 하나입니다. 성장을 하면 덩치가 늘어나 나누기도 쉽고 목표를 이루기 수월하죠. 문제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성장을 해도 그 과실이 상류층에게만 집중되는 데 있어요. 보통 사람한테는 별 의미를 못 줘요. 성장 수치를 셈하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었죠. 브라질에서 아마존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소를 키워 소고기 수출로 돈을 아무리 많이 번다 해도 그 일로 가뭄이 들어 농사가 망하는데요.

(중략)

이번에 한국 참 자랑스럽죠.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방역을 제일 잘 했어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창피한 세계 최고 기록이 너무 많아요. 자살률 1위, 간단히 볼 일이 아닙니다. 코로나19로 사람 죽는 건 안 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서 죽는 건 괜찮은가요? 출생률은 거의 세계 최저에, OECD에서 남녀 임금 격차는 최고예요. 젊은이들이 좌절하고 이민 가고 싶다는 나라입니다. 잘한 거는 자화자찬이라도 해야 하지만 잘한 걸로 못한 것을 덮을 수는 없어요. 잘 해낸 경험을 계기로 우리가 힘을 모으면 큰일도 할 수 있구나 깨달았을 때 큰 개혁을 해야죠.

복지 제도도 제대로 도입하고, 교육 제도도 최대한 공정하게 개선하고, 세제도 최대한 공평하게 사람들의 노력을 인정하면서 연대도 조성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하고, 할 일이 많죠. 코로나19 잘 대처했다고 자축하면서 계속 건전 재정 외치고 예전처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아무것도 안 하면 이 위기가 끝나고 5년이 지난 후에도 자살률 1위, 출생률 최저, 남녀 임금 격차 최고, 그런 한심한 나라가 될 거예요. 하지 않으면 안 바뀝니다.

 

- 3장 성장과 분배 [장하준, 왜 우리는 마이너스 성장을 두려워하는가]

 

장하준이 성장이라는 양(量)이 아니라 질(質)을 고민해야 한다고 마무리했듯이, 세계적인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도 삶의 질, 인간의 품격을 갖춘 삶을 권한다. 

 

*

안희경 : 당신 말처럼 혐오는 숨겨져 있다고 하기엔 너무 일상적으로 포착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강렬한 감정이 왜 이토록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는지 골몰하게 합니다. 당신이 언급한 2002년 인도 구자라트주에서 벌어진 대학살은 성지순례를 다녀오던 힌두교도들이 열차 화재로숨지며 일어났습니다. 힌두교도들은 이슬람교도가 불을 낸 것이라고 선동했고, 이들은 3개월 동안 1000명이 넘는 이슬람교도를 살해하는 무차별 보복을 자행했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분노를 특정 집단 탓으로 돌리는 정치 방식은 대중 정치에서 점점 더 교묘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왜 민주주의마저 왜곡하는 집단 혐오가 대중의 마음속에서 위력을 발휘할까요?

 

누스바움 : 두 가지 차원의 혐오가 있다고 생각해요. 첫째는 몸에서 배출되는 분비물, 노폐물에 대해 느끼는 혐오입니다. 대소변, 피, 콧물 등 우리의 동물성에 대한 거부 표현으로 모든 사회에서 작동하죠. 시체는 확실히 혐오스럽습니다. 이 혐오에는 일종의 원시적인 두려움이 있어요. ‘나는 동물과 다르다’라는 차별 의식을 가지고 동물적 본성을 혐오하는 겁니다. 이런 사고 속에 또 다른 종류의 혐오가 파고듭니다. 문화 차원의 혐오로 저는 이를 ‘투사 혐오projective disgust’라고 불러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부패, 냄새, 분비물 같은 역겨운 특성을 우리 사회의 특정 집단에 투사해 그들을 종속시킬 전략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혐오는 대체로 약한 집단을 향합니다. 그들을 동물적이라고 묘사하죠. ‘동물적인 성적 취향은 그들에게나 있지 나한테는 없다. 고약한 냄새는 그들에게서만 난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죠. 미국 백인들은 흑인들에게 고약한 냄새가 난다며 동물로 취급했지만 사실 모든 인간은 다 비슷비슷한 냄새를 풍깁니다. 이렇게 타인을 종속시키려는 전략으로 작동하는 혐오는 흑인, 여성, 성소수자 등을 동물적인 존재로 만들면서 모든 인간이 갖는 동물성을 부정해왔습니다.

코로나19 위기는 몇 가지 혐오를 다시금 강화했어요. 당신이 언급했듯이 미국에 있는 동아시아계 사람들이 편견과 낙인의 대상이 되었죠. 이는 지난 20여 년 동안 두드러지지 않았던 혐오입니다. 전에는 이렇게까지 심각하지 않았어요. 미국의 대통령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고 봅니다. 반면에 지금의 위기 속에서 어떤 편견은 오히려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편견과 혐오가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대중들이 의문을 갖고 비판하도록 작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시카고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다른 인종들에 비해 매우 불균형적으로 바이러스에 취약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요. 흑백 분리 거주가 뚜렷이 자리 잡은 시카고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더 많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죠. 불평등한 조건이 만들어내는 현상에 대해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미국 전역에 걸쳐 매우 의미 있는 대화를 촉발시켰습니다. 주거지와 주거 상태, 건강보험 가입 여부, 그리고 영양가 있는 음식이나 식재료에 접근할 수 있는지 여부가 얼마나 건강에 근본적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한 비판 의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시카고와 일리노이주에서 저는 혐오 정치의 이면을 봅니다. 이는 자기 비판 정치, 사랑의 정치를 위해 반드시 선결되어야 하는 자아 성찰 정치라고 할 수 있어요.

(중략)

우리가 구현해야 할 정의는 인간이 각자 자신의 역량을 개발하도록 존중하는 것입니다. 정의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은 제가 주장하는 역량 순위에 있습니다. 인간의 역량을 창조하는 조건을 10대 핵심 역량으로 정리했지요. 평균수명을 누릴 수 있는 조건, 건강을 보호할 권리,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신체 보전, 자존감을 지키며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조건 등입니다. 모든 항목에서 최저 기준을 채운다면, 그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로 불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는 질 낮은 교육을 받아도 되고 일할 기회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 평등을 추구하는 일은 어떤 분야에서건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인간의 역량을 개발하기란 참 복잡한 일이죠.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품위 있을 수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자못 끔찍할 수 있거든요. 저는 노동계급의 삶이 반드시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틈에서 자랐어요. 하지만 그들은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엄청나게 성차별적이고 호모포비아적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품격을 누리는 삶의 기본을 보장받는다면 세상의 두려움은 줄어들 겁니다. 두려움이 줄면 혐오도 줄어들죠. 우리 자신이 취약할 때 다른 집단에게 그 탓을 돌리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기거든요.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료 시스템을 강화하고,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모두가 교육받을 기회를 누리는 안전망이 갖추어진다면 불안은 훨씬 줄어들 겁니다. 요컨대 우리는 전방위적으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또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각 분야 활동가들을 뒷받침하는 용감한 지지자가 됩시다.

 

- 4장 혐오와 사랑 [마사 누스바움,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역학과 교수 케이트 피킷은 “미래에 감염병이 팬데믹으로 확산되는 상황을 막고자 한다면 먼저 사회 구성원들이 회복 탄력성을 갖추도록 사회 조건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

피킷 :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애쓰고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해주는 거죠. 우리의 말과 표정은 곧 우리의 노동조건이자 사회 환경이기도 하니까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 가치인지 보여줬습니다. 그동안 낮은 임금으로 돌봄 영역에서 일해온 이들, 슈퍼마켓 선반을 채워온 이들, 생필품을 배달해온 이들, 청소를 해온 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들 핵심 인력의 귀중한 역할을 계속 기억해야 해요.

 

- 5장 개별과 보편 [케이트 피킷, 우리는 질병과 죽음 앞에 평등한가]

 

 

철학과 교수이자 옥스퍼드대 인류미래연구소 소장인 닉 보스트롬은 지구적인 조절 능력을 세워내자고 요청한다. 비접촉 관계 방식 언택트는 일시적일 뿐이며, 인간은 끊임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위기가 문명의 몰락을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국제적 협력 결핍’은 그가 발표한 「취약한 세계 가설」에서 거대한 위험 요소이다. 

 

*

보스트롬 : 방역과 관련된 일부 제품의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기업이 소비자의 두려움을 이용해 가격을 상승시켰고, 이는 불행에서 이득을 챙기는 것과 같죠. 기업이 대중의 두려움을 통해 얻는 막대한 이윤을 막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두려움을 자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정책 결정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공급 부족이 일어난 이유죠. 대규모 비축물을 풀게 만드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정밀한 시나리오를 세워 기업이 따르도록 자극하는 정책을 폈어야 했습니다. 유인 구조(금전적 또는 비금전적인 혜택을 주어 특정한 경제행위가 이루어지도록 유도하는 여러 체계)에 있어 효용이 적은 부분을 특정하기는 쉽습니다. 지금은 행위자들(대중, 기업 등)이 상황을 낫게 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어요. 이는 조율하는 데 실패해서 그렇습니다. 심지어 우방으로 협력해오던 국가들조차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서로를 충분히 도왔는지 불분명합니다. 저는 이런 조정 실패가 이번 위기에만 해당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근원적인 악화 인자를 가지고 있어요. 바로 국제적 협력 결핍입니다.

(중략)

미래 어느 시점, 세상이 자동적으로 무너질 수 있는 발명이나 발견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 속에 있다는 가설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명은 엄청난 충격으로 황폐해질 수 있는데, 제가 반무정부 상태semi-anarchic default condition라고 부르는 지점에 우리가 계속 있다면 문명은 몰락할 수 있다는 거죠. 반무정부 상태는 지구 차원에서 조정해야 할 중대한 문제를 푸는 강력한 협력 능력이 부족한 우리의 상황을 말합니다. 우리는 많은 돈을 군대에 쓰고 있습니다. 수천 개의 핵무기를 오직 사람을 죽이겠다는 목적과 위협하는 수단으로 갖고 있죠. 이는 우리가 만든 치명적인 위기예요. 또 기후변화에 대한 지구적인 강력한 대응도 부족합니다. 이 두 가지 위협으로도 취약한 세계 가설을 반추하게 만드는데요. 여기에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인류 차원에서 도저히 승인할 수 없는 파괴 행위를 도모한다고 했을 때, 이를 막을 영향력조차 부족합니다. 상상해보세요. 만약에 대규모 파멸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면, 그러니까 누군가가 수백만 명을 한꺼번에 죽이는 방법을 발견했고, 부엌 개수대에서 이것저것을 섞어서 도시로 흘려보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현재 우리에겐 이런 파괴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수많은 개인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모니터하고 차단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죠. 이런 조건 속에서 세상은 취약합니다.

 

- 6장 기술과 조정 [닉 보스트롬, 세계는 다음의 위기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농부로 풀뿌리 운동 지도자이자 과학철학 박사인 반다나 시바는 생태 중심의 삶을 권장한다. GMO(유전자변형생물) 콩으로 만들 가짜 고기를 위해 아마존 열대 우림을 훼손하고 식품 소비 구조를 유전자조작 산업으로 옮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지탄한다.

 

*

안희경 : 그래도 기후변화를 막으려면 고기 소비를 줄여야 하지 않을까요?

 

시바 : 소비자들은 고기를 더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어요. 고기 소비는 GMO 콩과 GMO 옥수수를 기반으로 하는 축산업, 거기에 대량 지원되는 보조금 때문에 증가했습니다. 미국에서 카포CAFO라고 부르는, 좁은 공간에 가축을 대량으로 길러 이윤을 극대화하는 집약적 생산 구조가 가져온 소비입니다. 여기에 실리콘밸리는 가짜 고기를 만들어서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합니다. 특히 동물 사료 산업으로 엄청난 정부 보조금이 흘러갑니다. GMO 콩을 길러 사료로 팔면 보조금을 제일 많이 받죠. 이 시스템 속에서 공장식 축사가 운영됩니다.

이런 시스템이 없다면 고기 소비는 자동적으로 줄어들 겁니다. 사람들에게 병을 유발하는, 항생제에 오염된 고기 소비도 줄겠죠. 공장형 축사를 지나갈 때 코를 싸잡게 되죠? 돼지, 닭, 소들이 너무 많이 있는 곳에서는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이 고약한 냄새가 메탄입니다. 같은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보다 여든 배 더 기후에 치명적이죠. 동물 해방도 필요해요. 마음대로 움직일 동물의 자유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죠.

 

안희경 : 코로나19 위기의 주요한 원인은 무엇인가요?

 

시바 : 원인을 알기 어렵습니다. 거대한 지정학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이러스가 박쥐로부터 왔다는 겁니다. 작년에 박쥐와 관련된 정보를 나브다냐 회원들에게 들었는데, 중국과 미국 방위대가 인도 나갈랜드 지역에서 박쥐를 불법으로 채집했을 때입니다. 이는 생물자원 수탈bio-piracy이에요. 국제 규약은 아무 나라에나 몰래 들어가 생물자원을 훔치지 못하도록 허가를 받게 했습니다. 그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채취해간 겁니다. 그렇게 채취해간 바이러스를 장기 매매 시장이나 공장형 축사 또는 실험실에서 증식했을지 모릅니다. 어떻든 저는 코로나19만을 분리해서 보는 접근 방식은 비과학적이라고 봐요. 지난 30년 동안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 새로운 질병은 300개 가까이 됩니다. 그중 상당수는 숲에서 왔습니다. 지금 야생종들의 질병이 이동하고 있어요. 예전에 인도 키아사누르에서 감염병이 발생했습니다. 숲을 벌채하니까 원숭이들이 마을 가까이로 왔고, 원숭이 몸에서 나온 벼룩이 인간에게 오면서 출혈성 질환이 창궐했죠. 키아사누르 삼림병이라고 불립니다. 에볼라도 숲이 파괴되면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숲을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감염병이 발생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구에 대항하는 전쟁을 반드시 멈춰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 것도 멈춰야 해요. 바이러스가 생물은 아니라 할지라도 스스로를 복제합니다. 인류가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할 때마다 결과는 좋지 않았어요.

 

안희경 : 2차 세계대전에 사용했던 독가스가 농업으로 옮겨와 살충제가 됐고, 폭약의 재료인 질소 역시 농산업의 비료가 되었습니다.

 

시바 : 그래요. 사용했던 독가스가 농산업으로 옮겨와 벌레와의 전쟁, 곤충과의 전쟁을 창조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무엇을 얻었나요? 벌들의 실종입니다! 이 전쟁으로 80퍼센트의 곤충이 사라졌습니다. 전문가들은 경고합니다. 먹이사슬 속에 있어야 할 곤충의 자리를 파괴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붕괴시키고 있다고요. 전 세계는 지금 코로나와 전쟁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저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수백만 명의 생계를 앗아가는 결과를 낳을 거라고 봅니다. 벌써 굶주림의 팬데믹이 시작됐습니다. 계속된다면 인류의 50퍼센트가 삶터를 잃을지 몰라요. 정부는 경제냐 목숨이냐를 두고 논쟁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냥 경제 속에서 생계를 꾸려가요. 제가 작은 가게를 하거나 미용실에서 일하거나 작은 공장을 운영한다면, 혹은 소규모 농사를 짓는다면 제 목숨과 생계는 하나로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3000만 명의 굶주린 목숨을 저버린 채 확진자 숫자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인류가 생명의 그물망에 대항하여 전쟁을 선포한다면 이는 스스로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격이며, 그 순간 인류는 생명망에서 분리됩니다. 적어도 힘센 인간들이 나머지 인류를 향해 선포하는 전쟁이 됩니다. 그 생각만으로도 반인륜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거예요.

 

- 7장 분리와 연결 [반다나 시바,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종합하면, 바이러스가 지금 우리의 적이 아니다. 시바의 말처럼 타인이 없으면 나도 살아남을 수 없는데, 가장 거대한 ‘두려움’ 바이러스로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들의 공통된 의견은, 모든 걸 산업화하고 세계화하며 이윤을 짜내려고 작동하는 글로벌 경제가 아닌 지역공동체 속에서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지역 경제’-‘순환 경제’ 시스템이다. 환원주의적인 기계학습에 점점 더 의존하는 지금 인류가 에고ego에서 벗어나 에코eco로 갈 수 있을까. 매일 터지는 비인간적 사건 사고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호 존재라는 것을 잊고 있다는 걸 상기시킨다. 누구도 혹사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나는 오늘도 꿈꾼다.

 

 

*

"소수의 부를 만드는 활동이 실제로 다수의 이익을 가져오기에 자본주의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석학들이 힘주어 이야기하는 건 실제로 우리의 경제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금융이 금융에 투자하거나 기업이 자기네 주식을 되사들임으로써 거대한 부를 증식하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으며 시장은 홀로 다수의 이익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페레스는 “모든 혁명은 거대한 전환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황금시대로 가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붙는다. 많은 이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될 때에만 그 잠재력이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와 기업과 사회가 함께 번성할 수 있는 포지티브섬 게임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  [안희경, 혁신은 모두를 위한 이익에서 나온다] 마무리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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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9-13 08: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누스바움의 혐오에 대한 정리 좋네요. <사람, 장소, 환대>와도 왠지 좀 통하는 거 같구 요즘 고민하던 문제와도 맞아들어가서 천천히 다시 읽어보려고요.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애쓰고 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해주는 거죠. 우리의 말과 표정은 곧 우리의 노동조건이자 사회 환경이기도 하니까요.” - 이 부분 정확하게 제가 오늘 내일 쓰려던 포스트와 일치해서 소름.. (오늘도 감사드려요! 평안한 일요일 되세요 ^^)

초딩 2020-09-13 11:41   좋아요 2 | URL
시바가 모두를 포옹 하는 운동을 하겠데요. 코로나가 진정되면. :-)
소트라테스가 말한 인류의 모든 활동은 인류의 보존을 위함이고
인류의 보존은 사랑인 것 같습니다.

하나 2020-09-13 11:53   좋아요 2 | URL
초딩님과 아갈마님께서 읽으시는 걸 보고 저도 주문했어요! 저도 읽고 또 같이 얘기 나눌 수 있음 좋겠네요 :) 남은 주말도 잘 보내시고요!

AgalmA 2020-09-30 22:37   좋아요 1 | URL
말씀하시니 저도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 읽고나면 <사람, 장소, 환대> 읽어봐야겠습니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이 점점 불명확한 요즘 상황 생각하면 우리의 공통 고민은 윤리 문제고 그게 또 끝까지 갈 화두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thanks to 감사드려요. 하나님도 읽고 싶은 거 못 참는 독서가이신 걸 인정합니다^^;

초딩 2020-09-13 1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원톄쥔 농촌 이야기, 마사 누스바움 교수의 혐오와 사랑, 반다나 시바의 자연과 인간이 평등한 민주주의를 보며, 그들이 제시한 ‘증거‘를 보면, 코로나 역시 오도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까지의 세상에서 커져가고 있던 온갖 문제들이 코로나로 분출했는데, 그것 마저 미국, 유럽 등의 열강에 의해 ‘의도‘ 되어져 그 문제들을 결국엔 신자본주의로 몰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고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이 세상은 이 큰 지구는 이렇게 다양한데, 내가 아는 뉴스는 고작 의도된 몇개 뿐인것처럼 획일화되어 살고 있구나였습니다.
건강하고 밝은 하루 되세요~

AgalmA 2020-10-01 04:38   좋아요 0 | URL
네, 동감합니다. 코로나19로 인류의 문제가 여실히 드러나서 당황스러울 정도죠. 책임 전가를 어딘가에라도 하고 싶은 중대 사안이기도 하고요. 무인도에 살지 않은 이상, 현재 이 지구상 누구라도 신자본주의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죠.

공부할수록 제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초딩님, 안부 인사가 많이 늦었는데, 추석 연휴 잘 보내시길.

북다이제스터 2020-09-13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성장 아니 역성장을 당연하고 오히려 더 좋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되네요. Gdp -1퍼센트도 벌벌 떠는데 쉽지 않겠죠.

AgalmA 2020-09-30 22:46   좋아요 1 | URL
이 책에서는 장하준 교수가 역성장에 대해서 강도높게 얘기하고 있죠. 대부분 고용 노동직 종사자니 인식 전환하자는 게 쉽지 않죠. 1인 가구 증가로 자기 노동 없이는 기댈 데도 없는 상황이니까요.

2020-09-21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30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 요괴 도감
고성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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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창조론을 바탕으로 진화론에 반박하는 ‘창조과학’(과학이라는 명칭이 붙는 것도 부적절)을 포함해 우리는 여전히 종교, 신화, 이야기들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의 첫 장도 우리의 그런 점을 보여주고 시작한다.

 

 

📖

몇십 년 전 한 유명한 과학자(어떤 이들은 그가 버트런드 러셀이었다고 한다)가 천문학에 관한 대중 강연을 했다. 그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태양은 거대한 별들의 모임인 이른바 우리 은하계의 중심의 주위를 돈다고 말했다. 강의가 끝나자 뒷좌석에 앉아 있던 키 작은 할머니가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는 말도 안 돼요. 세계는 거대한 거북의 등 위에 얹혀 있는 평평한 판이라구요.” 그 과학자는 여유 있게 미소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 거북은 무엇의 위에 서 있지요?” 그러자 할머니는 “똑똑하군요, 젊은이, 아주 똑똑해”라고 비아냥거린 후 이렇게 대답했다. “그 아래로는 그렇게 끝없이 거북들이 있지요.”

- 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지구가 둥글다는 관찰이 있었지만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믿음처럼 ‘지구평면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거북이 지구를 받치고 있다는 이야기는 힌두 신화부터 중국 등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한국에서도 사방을 지키는 사신 중 현무는 대지를 상징한다. 각 문화는 자신만의 독특성을 내세우려고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문화는 서로 닮았다. 이를테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지옥문을 지키는 삼두견(三頭犬) 케르베로스(Cerberus)가 있는데, 한국에는 암흑대왕의 불개(《조선민담집》), 저승의 삼목대왕이 이승으로 와 개로 변신한 삼목구(눈이 세 개인 개) 이야기(《청장관전서》) 등은 현실에서 우리가 개를 가까이하며 사는 것과 같이 이계에서도 비슷한 형상을 그린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머리가 셋에 다리가 하나인 ‘삼두일족응(삼두매)’, 태양에 사는 다리가 셋인 까마귀 ‘삼족오’를 통해서도 숫자 ‘3’을 완벽한 숫자로 여기는 동서양의 문화가 동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고기에 대한 신성시도 종교와 민간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성배 『한국 요괴 도감』은 짐승 혹은 사람처럼 생긴 ‘괴물’, 혼백이거나 자연의 정기에 의해 만들어진 ‘귀물’,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독특한 능력을 갖춘 물건들인 ‘사물’, 오래전부터 인간과 함께 해온 한국의 ‘신’ 이렇게 네 분류로 소개하고 있다. 도깨비, 달걀귀, 손각시(처녀귀신), 몽달귀(총각귀신)처럼 익숙한 한국 요괴들부터 현대 도시괴담 속 자유로귀신, 콩콩콩귀신, 홍콩할매귀신, 한강괴물 등 신종 요괴들까지 두루 등장한다.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한국에는 요괴가 많지 않고,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만들어진 귀신이 많다는 게 내 소감이다. 많은 요괴들의 출몰 시기가 조선 시대인 것도 흥미로운데 기록 때문에 요괴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역설도 된다. 관련된 인물이 유명인이면 더욱 그렇다. 괴이한 지네가 등장하는 김자점 탄생 설화(괴오공), 금돼지가 등장하는 최치원 탄생 설화(금돼지), 동명왕이 길렀다는 기린(기린), 박혁거세가 죽자 장사를 방해한 큰 뱀(대사), 선덕왕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침실에서 늙은 여우를 죽인 일화(매구-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천 년 묵은 늙은 여우), 나라가 망할 징조인 여우들이 의자왕의 궁에 들어오는 장면(백여우) 등.

 

 

 

 

 

 

 

 

 

 

 

 

 

 

 

 

 

 

 

한국 요괴들을 종합하면 몇 가지 특이사항이 있다. 영노, 장자마리, 주지 등 탈춤에만 소개되는 독특한 괴물이 있다. 불교가 민간신앙으로 오래 전해져 왔기에 불상과 관련된 요괴 이야기도 많다. 동식물 모습의 요괴들은 이 땅의 기후와 지역 특색에서 등장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은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듯 호랑이 귀물도 많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노래도 있고 금을 두꺼비 형상으로 만들 정도로 한국에서는 재물에 관련된 두꺼비가 많은데, 아닌 게 아니라 업신·조왕신·터주신으로 두꺼비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식물로 만들어진 병사인 녹두병, 죽엽군처럼 전쟁에서 도움을 주는 병사가 있었다는 것도 특이하다. 우렁각시나 선녀처럼 도와주는 여성 존재도 많고, 중국에서 불로장생약을 찾아온 곳이 한국이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병을 낫게 해주는 물이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물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한국의 요괴 이야기들은 생활과 관련된 게 많아 염원을 담은 실용, 교훈 측면에서도 다양하게 탄생한 것 같다. 제주도에서만 출몰하는 요괴 소개는 섬 문화만의 특이한 문화 탄생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한국은 오래전부터 어떤 것을 신성시했고 터부시했는지 그리고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문화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런 자료들은 재미나 이야깃거리로만 소비할 게 아니다. 여기엔 지금의 나, 세계의 뿌리들이 강력히 작용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역병 앞에 우리의 두려움은 많은 것들을 또 만들어낼지 모르는데, 우리의 두려움이 그것들의 힘을 키운다는 걸 직시해야 한다.

ps)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숙지할 수 있었다.

봉황은 특정 새가 아니라 수컷인 ‘종’과 암컷인 ‘황’을 합쳐 부르는 신령한 새로 고귀함의 상징이다.

기린도 수컷을 ‘기’, 암컷을 ‘린’이라 통틀어 기린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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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09-12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어보여요! 저 요즘 우부메의 여름 읽고 있어서 우리나라 요괴도 조사해보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나 한 발 앞서가주시는 아갈마님!! :) 좋은 밤 보내세요!

2020-09-12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2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20-09-13 05:37   좋아요 0 | URL
심오할 것까진 없는데요^^;

『시간의 역사』 내용은 기존 지식에 편향돼 세상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정도로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요^^? 앞으로 과학적인 사실이 더 바뀔 수도 있겠지만 거북이가 지구를 받치고 있다는 생각은 이젠 폐기해야죠.

겨울호랑이 2020-09-12 22: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국 요괴 도감>을 보니 요괴들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중국의 <산해경>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귀신, 요괴를 소개했다는 점에서는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귀신>과도 통하는 것도 있어 보입니다. 다만, <조선의 귀신>은 많은 귀신이 소개되었습니다만 제가 읽은 책에서는 그림이 많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한국 요괴 도감>은 이보다 편하게 다가오는 책으로 보입니다.^^:)

AgalmA 2020-09-13 06:17   좋아요 1 | URL
책에서도 산해경을 언급하며 중국 요괴와 비교를 자주 합니다. 하지만 미세하게 다르더군요. 다른 문화와 섞이면 다양성이 나오듯이요.
『조선의 귀신』이란 책도 있었군요ㅎ 무속에도 관심이 많아서 서정범 교수님의 연구에 관심 많았는데 억울한 사건으로 그리 되셔서 참 마음이 안 좋았어요.
『한국 요괴 도감』 보면서 책도 예쁘고 내용도 간단해서 아이들 키우는 분들은 그림 보며 같이 읽기 좋겠다 하긴 했습니다^^

 

이론들은 시간과 새로운 기술이 우리에게 준 증거를 반영하며 발전해야 한다. 미국의 위대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과학은 가능과 불가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더 가능성이 큰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그는 미확인 비행물체의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주변 세계의 지식에 따르면, 비행접시와 관련한 보고는 알려지지 않은 외계 지식에 대한 이성적 노력이라기보다는, 잘 알려진 지상 지식에 대한 비이성적 노력의 결과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DNA의 분자구조 해명 및 유전정보 전달 연구로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와 함께 196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내가 이 상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이다. 그녀는 과학 역사상 가장 부당하게 대우를 받은 여성 중 한 명이었는데 상을 받기 4년 전에 사망했다. 영국의 생물 물리학자였던 그녀는 브래그 부자의 이론을 바탕으로 DNA 구조를 밝히기 위해 X선 촬영에 몰두했다. 이 작은 분자들에 반사된 X선은 사진판에 영원히 남게 되었는데, 그 당시 가장 정확하고 명확한 것이었다. 특히 그녀는 특별한 사진을 발견하고 51번이라는 숫자를 붙였다. 그러나 왓슨과 크릭은 그녀의 허락 없이 그것을 사용했다. 또한, 그 사진을 통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를 발전시켜나갈 중요한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니까 그 원자 자체는 영웅도 악당도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아무도 탄소나 질소 원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매일 우리가 먹는 음식 속에도 들어 있다. 그러나 이들을 조합하면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시안화물cyanide이 될 수 있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그 자체로는 악의가 없는 원자들 사이의 미묘한 재배치에 있다. 또한, 복용량도 중요하다. 카페인에도 독성이 있지만 이걸 마시고 죽으려면 24시간 이내에 커피 100잔 이상을 마셔야 한다.
티메로살의 경우에는 수은이 체내에서 제거될 수 있는 분자로 줄어든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물론 아이들에게 투여할 화합물에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수십 년간의 독립적 연구 끝에 티메로살이 함유된 백신과 자폐증에는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과학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대부분 선진국의 의무 백신 접종 프로그램에서 티메로살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이 화합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여전히 이에 관해서 토론하고 있고, 부모가 자녀의 백신 접종을 거부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경우 3가 백신을 맞은 아이들의 비율이 1996년에는 92%였는데, 2009년에는 73%로 감소했다. 그 결과 백신으로 보호할 수 있는 병들을 증가시켰다. 그리고 결국엔 티메로살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방부제를 제거한 국가에서 자폐증 발병률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한 자료들을 비교해 보면, 자녀의 몸속에 생선 섭취로 쌓인 수은의 양이 전체 예방 접종으로 쌓인 수은의 양보다 훨씬 클 가능성이 높다.

왜 국그릇은 사과 파이보다 훨씬 더 빨리 식을까?

그 해답은 바로 대류 작용에 있다. 상승하는 액체는 차가워져서 내려오고, 열기가 있으면 밖으로 열기를 내놓기 위해 다시 위로 올라간다. 그러나 반대로 속이 꽉 채워진 사과 파이는 점성 때문에 액체가 빨리 움직이지 못해서 겉 부분이 빨리 식는다. 또한, 내부에서 올라오는 열은 훨씬 느린 전달 방법인 열의 전도를 통해 겉으로 올라온다.

태풍도 대류의 좋은 예이다. 거대한 태풍이 불면, 구름의 왕이라고 부르는 적란운이 생기는데, 이것은 놀라운 자연 현상 중 하나이다. 작은 물방울과 빙정이 쌓여 거대한 층을 이루는데 높이가 무려 20km까지 나타난다. 이것은 그릇 바닥에서 장국이 올라가는 것과 비슷한 원리로 지상 근처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상승할 때 형성된다. 뜨거워진 공기는 더 가볍기 때문에 상승하고 싶어 한다. 그럴 때 따뜻한 공기가 팽창하고 냉각되면서 올라가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공기 내에 충분한 습기가 있고 온도가 빨리 떨어지면 다른 현상이 발생한다. 즉, 습기가 응축되고 작은 물방울이 생기는데, 그 과정에서 열이 방출된다. 다시 잠열이 나왔다. 액체가 증발할 때 잠열을 흡수하고(주변 냉각), 반대 과정(응결)에서는 잠열을 방출한다. 그렇게 되면 공기가 열을 유지하면서 위로 올라가려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그러면서 미소 입자와 같은 물방울들은 우리 앞에 기류를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보는 구름이다.

그는 1940년도에 MIT의 방사선 실험실에서 레이더 스크린 설계에 참여하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면 과학 관련 기업이 사회와 관련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일에 생명력을 불어넣게 될 것이다"라고 글을 썼다. 그리고 이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루어진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원자탄용 타이머 시스템 전자 장치를 담당했다.
브룩헤이븐 계측 그룹에는 발사체 궤도와 튀어 오르는 물체를 시뮬레이션하도록 설계된 아날로그 컴퓨터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비행기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위치를 계산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게임에 관한 히긴보덤의 생각 속에는 모든 것이 섞여 있었다. 이것은 제어 시스템과 전자 이미지, 이용 가능한 컴퓨터, 그 당시 대중화되기 시작한 독일 트랜지스터 및 화면 상의 오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에 대한 엄청난 경험이었다. 3일 만에 그는 〈테니스 포 투〉의 디자인을 끝냈다.
(중략)
그러나 그 게임은 상업적 특허를 받지 못했다. 1958년에서 1959년 사이에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 방문객이 참여한 사람들에게만 알려졌다. 오늘날 비디오 게임은 우리 사회,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 사이에 가장 많이 침투한 발명품 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인터넷이다. 대부분의 네트워크 주소에 들어가는 약자인 ‘www’는 유럽 입자물리연구소CERN의 물리학자가 고안했다. 유럽 입자 물리학 연구소는 브라우-앙글레르-힉스의 보손을 발견한 유명한 대형 강입자 충돌기LHC로 세간에 화제를 뿌린 바로 그 실험실이다. 팀 버너스리Timothy John Berners-Lee는 세계 곳곳의 입자 물리학 실험실에서 생성된 많은 양의 정보를 자동으로 신속하게 공유해 달라는 과학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그는 1989년에 www와 함께 컴퓨터가 서로 통신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토콜인 하이퍼텍스트 전송 규약Hypertext Transfer Pro-tocol(약자인 ‘http’는 즐겨 사용하는 검색 엔진에 쓰는 네트워크 주소 앞에 씀)과 그 외 오늘날 인터넷 검색을 하게 해준 기술들을 만들었다.

종종 위대한 혁신이 일어날 때처럼, 이 발명도 중대한 사건으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게 아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그 개발 덕분에 폭넓고 새로운 응용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비디오 게임과 ‘www’는 물리학 연구소에서 전혀 새로운 발명을 의도하지 않았던 사람들에 의해서 탄생했다.

여기에서는 농약과 비료 및 유전 공학이 마치 악당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악당을 물리치는 농업 덕분에 우리는 가공되지 않은 더 건강하고 맛있고 환경을 보호하는 자연산 유기농 제품을 얻는다. 그러나 정말 그런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열띤 과학 토론을 보면 이런 제품들의 효과가 그렇게 크지 않아 보인다.

첫째, 비료와 살충제가 그렇게 나쁜 걸까? 분명 어떤 화학 물질에 독성이 많이 함유될 수는 있다. 따라서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 이것은 의약품과 세제, 음료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런 규제는 합성 제품뿐만 아니라 자연산 제품에도 똑같이 중요하다. 우리 밭에서 자란 버섯이 자연산이라고 해서 무조건 치약보다 더 치아에 좋은 건 아니다.

그리고 유전공학도 생각해 보자. 유전공학은 해충에 대한 내성이 강하고, 과일의 크기와 영양가를 높이고, 더 먹음직스러운 색과 맛 등 우리가 원하는 특징을 가진 새로운 종을 만들기 위해 식물의 DNA를 개량한다. 우리는 그렇게 얻은 제품이 건강이나 생태계에 해로울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류가 수천 년 동안 해온 품종 개량 역시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단지 훨씬 천천히 진행되었을 뿐이다. 여기에선 우연히 돌연변이가 일어나길 바라고, 다음에 경작하는 생산물이 더 좋아지게 개량한다.
찰스 다윈은 이 과정에서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이것은 특수한 환경에서 더 잘 적응하는 형질을 지닌 돌연변이가 진화를 끌어낸다는 이론이다. 품종 개량에서는 그것을 원하는 대로 선택한다. 예를 들어, 옥수수는 천 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볼품없는 조상인 테오신테teosinte만 있었다. 이것은 키가 몇 센티미터 되지 않고 낱알도 얼마 붙어 있지 않는 옥수수의 근연종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수천 년간 그것을 길들여 오늘날의 옥수수로 변형시켰다. 즉, 인간은 약 만 년 동안 유전공학의 한 형태를 실행했다.

오늘날 식물이나 동물의 DNA에 원하는 유전자를 직접 넣을 수 있게 되면서 농산물을 개량하는 데 필요한 수천 년의 시간이 절약되었고, 이렇게 이 과정이 크게 발전했다. 다시 말하지만, 규제는 필요하다. 아직은 우리의 건강이나 환경을 위협할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 건 아니지만, 몇몇 비양심적인 과학자들과 사업가들, 정치인들이나 조사관들의 관행에는 규제가 필요하다.

어느 한 시인이 "한 잔의 와인 속에 우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라고 했다. 시인들은 이해받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기에, 아마도 우리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절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와인이 담긴 잔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 우주를 보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물리적 요소들이 있다. 소용돌이치는 액체, 유리잔에서 일어나는 반사, 그리고 상상력이 추가시키는 원자들, 그리고 바람과 기온에 따른 증발. 유리잔은 지구의 암석을 정제시켜 만들었기에 그 원자 구조로 우주의 나이와 별들의 진화 비밀들을 알 수 있다. 와인에는 어떤 화학 성분이 들어 있을까? 어떻게 조합된 걸까? 여기에는 효모와 효소, 그리고 여기에 반응하는 물질들과 생성된 결과물이 들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일반적 사실을 알게 된다. 즉, 모든 삶이 발효라는 것. 수많은 질병의 원인을 밝혀내야 와인의 화학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지켜보는 줄 알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와인의 이 생생한 검붉은 빛을 보라! 우리의 보잘것없는 지성으로 와인 한 잔을 놓고 이 우주를 물리학, 생물학, 지질학, 천문학, 심리학 등의 부분으로 나눈다고 해도, 자연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는 걸 기억해라. 그러므로 이제 그것들을 다시 하나로 모으고,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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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장점은 여러 가지인데 내게는 과학 공부에 좋은 자극제다. 《테넷 tenet》 관람 후 즐거운 과학 공부가 또 시작되었다.

 

리처드 파인만의 『물리법칙의 특성』 읽다 보니 놀란이 《테넷 tenet》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말고 즐겨라"라고 한 건 과학계 명언가 파인만한테 배운 거 아닌가 싶었다. 대칭성이 강조된 영화 이미지도 파인만의 '물리법칙의 대칭성' 챕터에서 영감을 받은 거 같고. 워낙 유명한 이론물리학자니 그의 책을 안 봤을 리 없고 파인만에게서 영감을 많이 받았을 듯. 봉고를 연주하는 자유로운 예술가이기도 했던 파인만과 통하는 게 많았을.

 

"나는 오늘날 양자 역학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강의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라.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형상화시켜서 꼭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긴장을 풀고 즐기는 기분을 갖기 바란다."

ㅡ 리처드 파인만 『물리법칙의 특성』

 

 

 

그러나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껴라"는 그럴싸한 말이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지각과 경험, 직관으로 접근하기에는 이 영화는 논리로 움직이고 구조적 짜임새가 상당하다.

이해 안 된다고 말들 많지만 스티븐 호킹 /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 한 권만 봐도 거론된 난제들이었다. 이론물리학자 킵 손이 각본을 봐줬다지만 《인터스텔라》보다는 시각적 구현이 잘 안된 거 같다. 익숙하지 않은 사고까지 해야 하니 사람들이 어려움을 호소할밖에.

몇몇 액션들은 좋았는데(그동안 찍은 영화 액션 총출동. 군사 동원은 《덩케르크》 영향ㅎ?) 놀란의 이전 영화에 비해 씬들이 매끄럽게 붙지 않아서 좀 지루했다. 창작자가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고 만들지 못한 책임일 수도 있지만, 물리적 구현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시간 여행은 무수히 다뤄졌기에 예전처럼 뿅 하고 왔다 갔다 하는 식으로 얼렁뚱땅 표현하면 코미디가 되기 십상이라 고민이 많았을 듯. 논리적으로 풀자면 양자 얽힘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서사를 얹어 시각적으로 푸는 건 SF 물의 어려운 과제다.

이 영화는 이해의 어려움보다 설득되지 않는 게 많다.

 

그림 1) 스티븐 호킹 /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

 

1.

영화 속 '회전문'은 입자/반입자 쌍의 시간 이동을 시각적으로 적절히 표현했다. 괴델은 우주 전체가 회전한다고 봤는데, 그렇게 시공을 보면 출발하기 이전 시점으로 돌아오는 시간 여행이 가능해진다. 이 전제를 따르려면 빛보다 빠른 여행이어야 한다. 《인터스텔라》에서는 (빛보다 빠르기는 어려울 거 같아서? 웜홀에서 딸에게 중대한 정보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웜홀'로 시간 여행을 제시했다. 그래서 더 공상 과학 판타지 같다는 소릴 듣는 거 같다;;; 지금까지 제시된 시간 여행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적 가설이다. 이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엔트로피를 되돌리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시간 여행을 제시한다.

리처드 파인만은 물리 법칙의 대칭성을 논하며, '회전'은 그와 관계된 모든 것을 되돌려 놓는 것이라고 했다. 이 영화는 인버전(엔트로피의 역전)을 이용한다면서 거꾸로 움직이는 건 맛보기 정도로 짧게 보여주고 대부분 스토리에 맞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

 

 

2.

드니 빌뇌브 영화 《컨택트(Arrival)》와 원작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때와 같은 물음이 남는다.

시간 여행의 역설 '무모순적 역사 접근(consistent histories approach)'

영화에서도 언급된 '할아버지 역설'이 여기 해당하는데, 시간 여행이 가능해 과거로 간다 해도, 기록된 역사는 바꿀 수 없다는 것. 과거와 미래는 정해져 있고 우리는 역사를 따르는 위치다. 이 세계에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 테넷은 인류의 파멸을 막을 운명이고 피할 수 없다. 죽음의 결과를 받아놓고 살아가는 인간 삶과 마찬가지로.

시간 여행의 역설은 다른 것도 있다. 시간여행자가 기록된 역사와 다른 대체 역사 속으로 들어가 제약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대체 역사 가설(alternative histories hypothesis)', 물리 법칙들이 거시적인 물체가 과거로 정보를 운반하는 것을 막는 '시간 순서 보호 가설(chronology protection conjecture)'이다. 호킹은 '대체 역사 가설'을 '파인만의 역사합산'과 비교한다. 파인만의 방법은 우주가 단 하나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 고유한 개연성을 가진 수많은 역사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각각이 개별인 만큼 가시화된 역사는 모순이 없어야 하는 동일한 역사여야 하므로 그의 방법은 '무모순 역사 가설'과 비슷하다.

호킹은 경고했다. "과거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면, 모순에 빠진다."

이 영화의 문제는 '무모순적 역사 접근'(일어난 일은 일어난다)을 내세우면서도 실상 방법은 '대체 역사 가설'이다. 스토리 진행상 어쩔 수 없었겠지만 물리 법칙들은 무시하며 자유롭게 장면을 끌고 나간다. 양자역학에서는 물질입자들 사이의 모든 힘 혹은 상호작용이 입자들에 의해서 운반된다고 가정한다. 힘- 운반 입자의 방출(-)과 흡수(+)는 불가결하다. 이 영화 속에서 인버전이 작용하면 총알이 되돌아오는 발사처럼. 물체는 그렇다 치고 인간의 몸과 의식이 미래 정보를 가진 채 과거로 되돌아가는 건 굉장히 인간 중심 원리(anthropic principle)다. 인간은 수많은 기억과 정보로 이뤄진 유기 생명체이자 이 세계를 이루는 네 힘(중력,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에 영향받는 물리적 원자이다. 그러니까 시간 이동에서 모든 것(가장 불완전한 의식 포함)이 온전한 채 과거로 가서 힘을 행사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시간 이동에서 각종 정보와 힘들이 충돌하게 되는데, 고전 SF 영화의 충격적 장면처럼 그런 시공간이라면 파리와 얽혀 파리 인간으로 전송되는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다. 호킹이 블랙홀과 웜홀을 설명할 때 온전한 정보량으로 이동할 수 있는지에 회의적이었던 것처럼.

영화에서와 달리 대부분의 시간 이동 이론들은 미래로의 이동은 가능하지만 과거나 정확한 시점으로의 이동이 어렵다 말하는 건 불확정성 원리, 엔트로피(무질서의 증가)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성을 가진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보기 때문에 그렇다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상당수의 숨은 정보량을 모르고, 이 시공간의 자연현상은 균형을 이루는 물리 법칙 속에 함께 흘러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10차원을 말하는 끈이론을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다른 차원을 볼 수 없는 것도 이 세계의 물리법칙이 작용하는 시공간의 영향 때문이다. 이 영화가 굴러가는 핵심 논리는 '엔트로피를 제어하는(시간을 뒤집는) 인버전 기술로 시간과 상황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만으로는 모든 걸 조정할 수 없다. 불확정성 문제, 현재에 작용하는 중력은 무시된 채 인버전이면 다 될 것 같은 이 영화의 논리대로라면 과거로 사람이 오가는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다. 정확히 원인의 시작점을 알고 모든 물리 법칙을 제어 가능한 기술력까지 있다면 미래에서 간단히 조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영화가 안 되잖아-_-)...

 

3. 영화 《컨택트(Arrival)》와 원작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보면서 가진 내 의문 하나가 풀렸다. 빛은 최단 시간을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택한다는 페르마의 원리에 따라 테드 창도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를 선택하기도 전에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결정해야 한다"라는 문장을 썼다. 페르마의 원리에서 도출한 결과ㅡ'미래를 안다는 건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없다 ->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미래를 아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 미래를 안다면 그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ㅡ에 따라 주인공의 삶과 미래는 무모순적 역사 접근을 따랐다. 나는 빛이 목적론적으로 움직인다는 설명이 도무지 수긍되지 않았다. 이번에 스티븐 호킹 /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 를 읽으며, '파인만의 역사합산'이 합리적 설명으로 이해시켜줬다. "전자와 같은 한 입자는 가능한 모든 경로를 거친다." 즉 빛은 여러 경로로 출발하고 '빛의 최단 시간'은 우리가 도출해낸 결과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은 바꿀 수 없는 인과론적 결론(빛의 최단 시간)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목적론적 결론(빛의 여러 경로)을 실험해보는 과정이었다.

 그림 2) 스티븐 호킹 /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

 

 

 

4.

이 영화는 '그렇다 치고'가 너무 많다. 미래와 소통하며 인류 파멸을 계획한 빌런 캐릭터 사토르(케네스 브래너)만 등장해 아쉬움이 많은데 정작 그 힘을 가진 미래인의 정체, 그 힘이 이 현실에 어떻게 주어졌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못한 게 영화의 답답함을 더 키웠다. 거두절미하고 시간 중첩이 가능하다는 논리 아래 과거의 것들이 지금 현실에 중첩되며 모든 것이 혼재하고, 사물과 사건이 리플레이되듯 움직이며 '나'가 '나'를 만나는 것 등 근사한 이미지들이었지만 그것은 끝과 시작을 구분할 수 없는 에셔의 그림처럼 직관적이고 예술적인 나열이지 설득도 근거도 아니다. 그래서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껴라"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과거의 자기를 만나면 존재가 사라지므로 절대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나온다. 그것은 과학적인 설정이다. 원자는 구성 입자에 대응해 쌍을 이루는 반대 성질의 반입자를 가진다. 리처드 파인만의 이론에 따르면(위 그림 1 참조) 시간을 거슬러 움직이는 반입자와 입자가 만나면 둘은 소멸한다.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과거의 자신과 싸우는 장면은 기묘해진다. 자신을 몰라봐야 하니까 방독면을 쓰게 만든 설정이 이해도 됐다. 그러나 엔트로피를 거꾸로 돌려 인버전된 과거의 존 데이비드 워싱턴을 반입자라고 볼 때 이론적으로 (이미 무시되고 있지만) 그들이 못 알아보므로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접촉하는 순간 섬광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 이 영화를 분석하면 할수록 나도 억지 가설로 빠지고 있는 것만 같다-_-

인류와 에일리언의 기원을 설명한 리들리 스콧 《프로메테우스》(2012) 같은 후속작이 나오면 많은 게 설명될까. 그러자면 설명해야 할 물리법칙들이 만만찮을 것이다. 놀란 감독 앞으로 영화 찍기 더 힘들 듯. 엔트로피 성질상 이미 이런 식으로 사고한다면 더 복잡하게 가지 후퇴하진 않을 거 아닌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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α

그럼에도 이 영화는 '입자의 위치와 속도 같은 한 쌍의 양들이 동시에 정확하게 예측될 수 없다'라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원리를 (스토리의 재미를 위해선지) 나름 따르고 있다. 인버전으로 반복해 과거로 돌아가지만 계속 목표를 놓친다.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인버전을 반복한다. 어떤 역사에서는 존 데이비드 워싱턴도 로버트 패틴슨도 죽는다. 이 영화는 '성공' 결괏값만 보여준 엔딩이었다. 대칭성을 고려해 끝에서부터 앞으로 가는 인버전 관람을 한다면 결괏값은 '실패'다. 이 영화를 보고 생각을 정리하며 '진리'는 우리가 원하는 '운명'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ps)

주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캐스팅 실패였다. 존재감이 너무 없어 영화가 더 흡입력이 떨어졌다. 로버트 패틴슨은 닐 역에 잘 어울렸다. 엘리자베스 데비키 나오는 많은 장면도 그렇고, 정장 차림에 번지점프 작전이라니 거 너무 007 오마주 아니오! 뭐, 어울려서 칭찬.

내가 이 영화를 봤다는 미래 결과 때문에 봐야 했다. 이 영화의 대사 '일어난 일은 일어난다' 패러디.

아이맥스도 포기하고 사람 없을 조조로 관람했는데 나를 포함해 총관객 6명.

2시간 30분 정도 보는데 마스크 벗고 음료나 과자를 꼭 먹어야 하는지... 그 넓은 데서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이 그러길래 불편했다. QR 코드 체크해서 함부로 위치를 이동해선 안 된다. 호기심과 즐거움 추구도 좋지만 공중 위생을 더 생각하며 즐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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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9-01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보셨군요.
저도 보고 싶어 죽겠는데 현실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제게 스포될 것 같아 쓰신 첫문장만 봤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보고 소감 나누고 싶습니다. ^^

AgalmA 2020-09-01 21:51   좋아요 1 | URL
놀란 감독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재미가 확실히 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북다이제스터님은 어떤 리뷰 남기실지 궁금합니다/

2020-09-01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1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9-01 22:42   좋아요 1 | URL
아 마침 저희 집 귀요미가 웃고 있어요 ㅋㅋ